2018년 3월 31일 오후 5시, 인천 아트플랫폼 옆에 있는 작은 ‘근대문학관’에서 제1회 [인천, 시인과 만나다]가 열렸다. 주인공은 김영승 시인. 밑에 달린 소제목은 ‘자조적 실존의 비극적 아름다움’. 늘 느끼는 일이지만, 예술가들의 표현방식은 참으로 어렵고 복잡하며, 깊고도 빛난다. 책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도록 나는 책을 참 읽지 않는다. 그러나 서점을 두리번거리며 한, 두 권씩 사 모으다 보니 책장은 차곡차곡 채워진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인의 만남에서 내가 가서 과연 무언가를 적어낼 수 있을까 걱정됐다. 그리고 또한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소소한 작은 감동들이 마음속에 전해진 시간이었다.
‘외설’ 과 ‘예술’, 그 작은 틈 사이
많은 사람이 모여 눈을 빛내고 있었다. 시인을 바라보는 이들은 등조차도 반짝거렸다. 인사를 하고 처음 꺼낸 말은 시인, 그와 처음 마주치고 나서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외설’이라는 단어. 지금이야 알몸을 보여주건, 알몸을 글로 묘사하건, 알몸을 그리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앞에 ‘예술’이 붙으면 말이다. 그러나 1980년도의 대한민국은 그다지 관대하지 못했던 터라 시인이 시집을 내고 받은 찬사는 ‘외설’이었다. 성교라거나 성기라거나 하는 단어들이 적지 않게 그의 시를 만드는 단어들 안에 있었다. 검열, 압박, 조사, 거짓, 정치적인 어떤 것들. 키워드를 적어나가다 보니 마지막에 남는 것이 ‘굴하지 않고’라는 말이었다. 김영승 시인은 본인이 누군지 알고 있다. 그래서 본인이 쓰는 시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그를 흔드는 많은 바람이 그를 꺾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술은 원래 어렵다. 물건을 만들어서 필요한 사람에게 주면 대가를 주지만, 예술은 원하는 사람에게 쥐여 줘도 돈을 받기가 참 어렵다. 누군가가 확실한 대가를 주지도 않는 행위가 끊이지 않고 오래 이어지려면, 첫째는 재미있어야 하고, 둘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똑바로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 두 가지 중의 하나라도 없다면 어떤 방해나 장애물 앞에서 속수무책 당하게 되어있다. ‘굴하지 않았지만, 화는 났다’는 그 이야기에 작게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솔직하고 확실한 반응인가. 굴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화는 난다는 그 마음이.
표현한다, 고로 존재한다
예술가가 어떤 사람이냐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제일 먼저 말할 것이다. 어떻게 시라는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냐는 질문에 굉장히 긴 대답을 한 시인의 이야기를 아주 짧게 이야기하자면 중학생 시절부터 차근차근 써온 시들이 대량으로 있었고, 한 선생님이 그것을 발견해 처음에는 ‘베껴온’ 것이냐며 혼내다가 결국엔 그 의심이 격려와 감탄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당시 선생님에게 ‘몇 가지’ 더 쓴 게 있다고 했던 시가 오백 편 남짓. 오백 편. 억지로 누군가 시를 써!라고 시켰다면 절대로 못할 행동이다. 김영승 시인의 안에는 너무 많은 감정과 너무 많은 생각이 있었고, 단지 그것을 꺼내놓는 행위가 ‘시를 쓰는 것’ 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시인이 되었다. 그것이 아마도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면 그는 화가가 되었을 것이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면 그는 음악인이 되었을 것이고, 춤을 추는 것이었다면 그는 댄서가 되었을 것이다. 예술인들은 언제나 생각을 꺼내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가득하다. 그가 자신 안에 차오르는 그 많은 것들을 표현할 방법이 ‘시’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가 이제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서정시’에서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서정시는 무엇인가요?
라고 오늘 청중 중 누군가 질문했다. 시인은 서정시에는 어떤 고정관념이 있다고 답했다. 어떤 긍정적인 이미지의 고정관념. 아름답거나 감성적이거나 단어 표현이 말하자면 좀 촉촉한 것들. 시인은 그것이 미신과도 같다고 한다. 사전에는 ‘개인의 감정이나 정서를 주관적으로 표현한 시’라고 나와 있다. 시인의 답 또한 비슷하다. 개인의 주관적인 특수한 정서를 표현하는 것들은 다 서정시다. 그래서 서정시는 사랑이고 인정이다. 그것참, ‘서정시’가 사랑이고 인정이라니. 퍽 다정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문체는 조금 냉소적이다. 복잡하면서 날카롭고, 어느 때에는 빙 둘러 말하다가도, 어느 때에는 거침없이 내뱉는다. 김영승 시인의 시를 쭉 읽어 봤다. 정말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가도, 어떤 것은 마치 어제 내 친구가 한 말인 것처럼 와닿는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서정시’라는 그 문장 하나가 모든 글의 마지막에 큰 점을 하나 찍은 듯 시인의 세계를 하나로 정리해버린다.
‘인천, 시인과 만나다’
오늘 사회로 나온 장석주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시인이란 사회 속의 낯선 이방인’이라고. 그 이방인의 관점과 가치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것이 ‘시’라고. 그렇기 때문에 시는, 시인은, 타인에 대한 거울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 아닐까. 모두가 칼을 들며 싸울 때, 한없이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저항했던 윤동주 시인. 이제 칼과 총으로 싸워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래서 더욱더 시인의 존재감은 크다. 그들의 세심하고 예민한 눈으로 보는 세상에는 아무것도 당연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썩어지지 않게 하는 소금, 무언가를 알리는 사이렌. 그래서 시인은 부끄러워하는 것이 일이고, 한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이 일이고, 반성하는 것이 일이고, 사랑하는 것이 일이며, 울고, 아프고, 행복하고, 허무해 하는 것들이 모두 시인의 일인 것이다.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 소신을 지키는 사람, 표현에 거침이 없는 사람, 공부를 많이 한 사람,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 내가 오늘 만난 김영승 시인은 이런 사람이었다. 말이 길지만, 줄이자면 뭐 좀 매력 있는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그냥 다시 한번 보고 싶고, 한 번 더 되새겨 보고 싶은 시. 씹으면 씹을수록 맛있는 글. 그의 가난, 그의 반성, 그의 인생, 그의 사랑, 그의 지식이 전부 좋았다. 나 참, 시인이라는 사람이 재치 있게 말도 잘하면 조금 곤란하지 않은가.
글·사진 / 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이은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