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문화 담론의 시작점, 인천아트아카이브
이탈(인천아트아카이브 총감독)
아카이브는 일차적으로 작가가 예술 활동 과정에서 생산해 낸 자료이자, 그 활동을 보조하고 체계화하기 위하여 만든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의 기록 일체(보고서, 계획서, 팸플릿, 카드, 도면, 시청각자료, 전자문서 등 모든 형태의 기록정보자료)를 말한다. 더불어 단순히 과거사 복원에 머문다거나 공간적으로 폐쇄된 장소로서의 아카이브 형식을 벗어나 유동성이 부각된 기록화 방법론들이 개발되고 있다.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며 원본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전통 방식의 아카이브와 달리, 주관이 개입하고 감응과 충동 경험으로 기록을 벗어난 다양한 현재적 증언과 증거들이 교차하는 가치 발굴의 기록보관소로서의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실제로 작가들은 생산자의 생산맥락에 한정되지 않는 다양한 맥락적 해석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공식적 기록 외에 비공식적 아카이브들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아카이브는 미시적이고 이질적인 텍스트들이 교차-생성하는 또 다른 예술 작업으로의 기록 보관소인 것이다.
인천문화재단의 ‘인천아트아카이브’ (http://www.inartarchive.kr) |
개인 혹은 집단적 기억이 특정 사건을 통해 구축되는가하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기억에 의존해 특정 사건이 아카이브로 구축되기도 하는 것처럼, “과거의 기억이 반드시 과거의 기억이 되는 것은 아니다.”(마르셀 프루스트) 기억과 역사가 똑같이 과거를 재현하는 통로를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기억은 언제나 과거의 신화를 해체하려는 입장과 과거를 ‘재신화화(Remythologization)’하는 태도 사이에서 긴밀한 긴장과 충동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박물관, 미술관에 ‘박물(博物)’ 된 사료(史料)를 의미해왔던 컬렉션도 동시대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새로운 공적 담론의 콘텍스트가 되어 ‘재맥락화(再脈絡化)’가 가능하다.
이부웅 작가 작업실 방문(이부웅, 김한별) ⓒ인천문화재단, 인천아트아카이브 |
역사적으로 한 지역에서 생산된 예술 작품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는 관련 아카이브의 유무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카이브는 특정 시대의 정신과 예술의 동향을 담고 있는 정신적 유산이며, 작가와 작품 관련 기록은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예술의 경향이 변화하는 원인과 과정을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집된 자료들이 생산된 지역과 관련지을 때 지역 미술사의 보다 높은 가치를 담보할 수 있다. 또한, 창작자 개인 차원에서 생산된 자료들은 적절한 시기에 수집, 보존되지 않으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실·망실되어 사라지며, 사라진 자료는 회복이 불가능하게 된다. 인천지역에서도 시각 예술에서 중요한 활동을 했던 예술가들의 작고가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적극적인 아카이빙 실천이 시급하다 할 수 있다. 창작 주체들이 생산한 다각적인 자료들을 수집, 보존, 분류, 연구하고 이를 공유함으로써 역사의 하부를 조망하고 재창안하는 연구를 독려하는 아카이브를 통해 작가가 활동하고 있는 시기부터 체계적, 조직적 수집 및 보존이 필요하다. 창작자와 작품 중심의 아카이빙을 넘어서기 위해서 자료수집의 현황과 잠재적 정보를 가능한 포괄적으로 조사하도록 그 범위와 대상을 구체화할 필요도 있다. 아카이브 화는 기록된 양 만큼의 사건을 생산한다는 맥락과 맞닿는 이치다.
인천문화재단 기획 회의(주현수, 이생강) ⓒ인천문화재단, 인천아트아카이브 |
인천문화재단의 <2020 인천아트아카이브> 사업의 핵심은 지역 시각예술작가 아카이브의 디지털화이다. 문서화·시각화를 특징으로 하는 미술영역의 기록들을 디지털 플랫폼에 연결하는 것이다. 하부 저장고로서 개인들의 독립적인 온라인 아카이브까지 매칭하여 새로운 기록 보관소로서의 질서를 조성하고, 박제되지 않는 ‘유동적인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인천아트아카이브는 아카이브의 최종 취합이 아니다. 기록 연속체적 관점에서 개인이나 사설단위의 소장자 및 연구자들의 아카이브와 연계하는 장을 마련하여 현장 예술계에 퍼져있는 자료들의 공유와 연구 네트워크를 모색하는 접근방법이다. 시공간에 묶여 종결된 아카이브가 아닌 과정적이고 재해석적 가치를 열어둔다면 전통적 이론 프레임을 넘어서 동시대 예술 아카이브 패러다임을 상호적으로 형성하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김경인 작가 구술채록(김경인, 김달진) ⓒ인천문화재단, 인천아트아카이브 |
<2020 인천아트아카이브>는 60세를 전, 후로 인천출생 출향작가, 인천으로 이주하여 최소 20년 이상 인천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한 작가를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재단 관계자, 지역 연구진, 인천아트아카이브 기획팀과 협의를 통해 아카이브의 이해와 자료수집의 원활성 등을 토대로 일차적으로 2020년 작가 목록을 구성하였다. 직업별 배분과 창작활동의 배경 또한 선별의 중요한 지표로 고민하였다. 교사, 교수, 학원 운영, 자영업, 전업 작가 등 창작과 생계를 위한 다양한 직업도 아카이브의 중요한 배출구라는 인식이다. 아카이브는 일반적 전시회의 구조와 다르므로, 작가들 간의 친목이나 작품 성향의 관련성, 이데올로기적 판단 등을 배제하였고, 순수하게 개별 작가의 생애주기별 아카이브 정리가 가능한 작가를 우선으로 배정하였다. 특히, 이미 진행된 혹은 진행되고 있는 아카이브 방식에서 작업실 이동 경로를 추적, 제공함으로써 여타 아카이브 방식과 변별점을 갖는다. 작가들의 생활고는 종종 작업실 문제로 이어지곤 하는데, 작품이 쌓여갈수록 보관 문제도 함께 동반되어 적지 않은 작품들이 이사 시점마다 여러 방식으로 분실, 파손, 사장되어버리곤 한다. 생계의 위기와 창작의 고충 등 삶의 질곡이 묻어있는 사연과 흔적이 뒤섞인 작업실 스토리텔링은 또 다른 기억의 저장고로서 작업실이 가지는 의미이다.
<2020년 인천아트아카이브>는 향후 진행될 아카이브의 목표와 방향설정의 이정표이다. 아카이브는 지속적인 DB의 업로드가 요구되는 사업이므로 2021년부터는 지역 연고 작고 작가와 원로작가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치밀하고 섬세한 연구를 통해 확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아카이브는 창작자를 넘어, 지역의 인내와 헌신, 그리고 충분한 시간과 예산확보를 통해 가능할 것이지만, 무엇보다 지역 문화예술의 유산을 발굴, 보호하고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는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기획은 자료 공유를 위한 아카이브 기증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어 지역 미술사 연구의 저변을 견고히 하는 기회가 제공되리라 기대한다. 이번 인천아트아카이브에 참여한 작가들에 의해 빈번히 발언된 ‘동시대’라는 용어는 단순히 ‘지금’, ‘오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감이란 절대불변의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기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듯이, 동시대의 해석도 저마다의 관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인천아트아카이브가 향후 어떤 맥락으로 공공기록화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시대 공감 정서의 보다 구체적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탈(李脫, Lee Tal)
이탈은 2020년까지 13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경기대, 백석대, 인천대, 중앙대, 춘천교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타쉬켄트 비엔날레, INSIDE AFRICA, 다카르비엔날레 특별전, 창원조각비엔날레 등 여러 기획전에 참여하였다. 현재는 한국미디어아트협회 이사를 역임하며 인천 강화도에서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