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응원하는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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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응원하는 직업

장은영

뮤지션이자 작가, 제주의 동네 서점 책방 무사의 대표인 요조는 자신의 일을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이라고 설명한다. 지도에 없는 길을 만들고, 아무도 만들어낸 적 없는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의 삶을 우아하고 도전적으로 그려낸 표현이다. 예술가의 삶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아래 빛날 때나 무대 밖 작업실에서 고군분투할 때, 이들의 직업가적 삶에 집중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술행정가’, ‘기획자’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곤 하는 이들은 ‘실패를 응원하는 직업’을 가진 자들이다.

이들이 주로 일하는 곳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 또는 광역시구 등 지방자치단체 출자 출연기관으로 ‘문화재단’이다. 특히 지역문화재단에 속한 이들은 지역의 예술가들이 마음껏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쳐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 그리고 시민의 삶 속에서 예술향유와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판을 만드는 일을 담당한다. ‘지역’과 ‘문화’와 ‘예술’의 공통분모 속에서 공공예술행정서비스를 부지런히 만들어낸다는 의미이다.

실패를 응원하는 갖가지 방법은 주로 ‘예술인 지원사업’을 통해 작품 제작과정 및 발표에 대한 재정적·물리적 지원이나, 다양한 기획 사업에 참여하여 작품 발표를 할 수 있는 시간을 통해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지원은 중앙 또는 지방정부의 재원에서 비롯되므로, 선정을 희망하는 모든 예술가에게 지원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문화예술진흥법」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크게는 시행령·규칙·조례 등에 반(反)함이 없이, 작게는 재단 내부규정에 어긋남이 없도록 촘촘히 지원기준을 만든다.

2020 정서진아트큐브 기획전시Ⅳ <아라채집>, 참여작가 박혜원 작품(사진: 인천서구문화재단)

좀 더 섬세하게 실패를 응원하는 자들도 있다. 예술가들의 내밀한 작품세계를 두루두루 살펴보고 크고 작은 전시공간에서, 무대 위에서, 또는 유무형의 세상에서 널리 알리는 기획자의 역할을 도맡기도 한다. 특히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지속가능한 ‘지역에서 예술 하기’라는 담론과 마주하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업무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인천서구문화재단의 ‘일상 속 문화예술로 구민이 행복한 서구’라는 비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 문화예술로 구민의 일상을 풍성하게 만드는 일도 함께한다. 문화예술계의 최신 트렌드와 이슈, 떠오르는 작품과 지역의 현안에 대해 눈을 크게 뜨고 한정된 재원 안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을 선정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 한 편의 연극이, 한 번의 예술교육이 누군가의 인생의 중요한 파동을 만들어내는 순간이 될 수 있음을 상기하고자 노력한다. 특히 보람된 순간은 학교로, 복지센터로 찾아가는 콘텐츠를 만들 때이다. 광활하게 느껴지는 대극장의 객석에서 마주하는 관객들은 각자의 감동을 크게 내색하지 않고 짐짓 점잖게 집으로 돌아간다. 반면에 학교, 복지센터 등에서 만나는 소규모 관객들은 감동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공연 중에는 핸드폰을 꺼주세요, 옆 사람과 대화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극장 기반의 엄중한 예술관람 규칙이 재미있게 부서지는 현장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껏 예술을 즐기고,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피드백이 날아든다.

다(多)락(ROCK)방 콘서트 시리즈Ⅱ <데이브레이크 콘서트>(사진: 인천서구문화재단)

지방의 작은 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필자의 어린 시절은 TV만이 유일한 문화예술 향유 통로였다. 성인이 되어 서울을 비롯한 세계 유명 도시들의 문화예술공간을 방문하고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흡수하게 되면서, 내면세계가 부쩍 풍요로워졌음을 깨닫는다. 예술의 경험은 일상의 모양새를 전혀 다른 것으로 바꾸기도 한다. 어떤 이에게는 뒤늦게 자아를 찾아 문화예술계에 헌신할 용기를 제공하기도 하고. 경험의 질과 양은 중요한 요소이다. 재단에서 부르짖는 ‘문화예술의 향유 기회 확대’는 이처럼 시민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화예술 콘텐츠의 질과 양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재단 밖에서는 반공반민(半公半民, 반은 공무원 반은 민간인)처럼 보이는 직원들도, 각자의 온도는 다를지언정 문화와 예술에 사랑을 느끼는 자들이다. 한때 예술가를 꿈꾸던 사람들이거나, 문화예술과 무관한 전공을 공부하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문화예술계로 뛰어든 이들이다. 음악, 미술, 경영, 심지어 사회복지까지 전공의 종류도 장르도 천차만별이다. 이들은 각자를 구성하는 아카데믹한 렌즈로 지역 문화예술계를 바라본다. 이 고유한 관점은 관객의 입장에서, 예술가의 시선에서 지역을 바라보는 독특한 장점이 된다.

해당 지역에서 나고 자란 예술행정가는 지역의 복잡미묘한 문화예술계 지형에 눈이 밝다. 유무형의 자원을 연결하고 실현가능성을 짐작하는 데 장점을 가진다. 지역 밖에서 온 이들은 지역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하며 지역과 외부를 활발히 연결하여 사업의 범위를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다양한 배경이 어우러져 「지역문화진흥법」 제19조의 지역문화진흥에 관한 주요 사업을 수행하는 집단이 구성된다.

지역 문화예술 생태계를 거시적으로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지역 예술가들이 인천에 머무르며 성장하고 작업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마주하게 된다. 지역의 무대는 제한적이다. 순수예술 장르일수록 더욱더 그러하다. 공공 영역에서 만드는 무대로는 창작의 생태계를 풍성하게 조성하기 어렵다. 또한, 지역 예술가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인천에 거주한다면? 인천에 사업자등록을 가진다면? 인천의 여러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지역 예술가의 범주는 지역 예술 생태계에 대한 이해와 맞닿아 있다.

코로나19라는 전 세계적 위기 상황에서 문화와 예술이 ‘돈’이 되느냐 ‘밥’이 되느냐는 현실적인 질문이 아프게 날아든다. 여기에 명쾌하게 답변하기 어렵다. ‘생존’에 앞설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으므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매일 생존을 점치기 어려운 상황에서, 마실 물을 나눠 세수를 하고 용모를 단정히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살아남기 위해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은 것을 가꾸는 아이러니를 발견하며, 오늘날 팬데믹 상황에서 문화예술의 쓰임을 생각한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내면으로 침잠(沈潛)하여 지도에 없는 길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 길은 실수와 실패를 필연적으로 대동한다. 험한 길을 외로이 걸어갈 때, 서로의 실패를 아름답게 위로하는 사랑과 이해의 근간에는 문화와 예술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장은영(張恩永, Jang Eunyeong)

인천서구문화재단 문화사업팀 예술축제 담당. 홍익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 박사과정.
‘나’다움으로 나만의 일을 천천히 만들어 갑니다. 글쓰기, 새로움 발견하기, 영상 만들기, 요가에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축제를 만들고 있지만, 다양한 시도에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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