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창(일본), 캠프마켓(미국), 그리고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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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미수호통상조약, 가쓰라태프트 협약

조선은 1876년 강화도에서 일본과 조·일수교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1882년에는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이어 서구 열강과 차례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미수호조약 제1조는 “대조선국 군주와 대미국 대통령 및 그 인민들은 각각 모두 영원히 화평하고 우애 있게 지낸다. 만약 타국이 어떤 불공평하고 경멸하는 일을 일으켰을 때는 일단 확인하고 서로 도와주며, 중간에서 잘 조정하여 두터운 우의를 보여 준다.”고 되어 있다. 즉 양국 중 한 나라가 제3국의 압박을 받을 경우 서로 돕고 조정한다는 ‘거중 조정’이 약속되었다. 이는 현재의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거중조정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1905년 7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태프트는 일본에서 가쓰라와 회담하여 “필리핀은 미국과 같은 나라가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 유리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떠한 침략의 의도도 갖지 않는다. 미국은 일본이 한국의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고, 극동의 평화에 직접적인 공헌을 할 것으로 인정한다”는 ‘가쓰라-태프트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은 일본과 미국이 한국과 필리핀이라는 지역을 상호 식민지 지배하기 위한 계획의 결과이다. 가쓰라-태프트 협약 이후 일본은 영국과 ‘제2차영일동맹(1905년 8월)’, 러시아와 ‘포츠머드조약(1905년 9월)’을 거쳐 대한제국과는 ‘제2차한·일협약(을사늑약, 1905년 11월 17일)’을 강제하여 외교권을 탈취한다.

2. 조병창, Ascom시티, Camp Market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경제공황은 후진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에도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일본은 이를 벗어나고자 1930년대 들어 대륙침략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였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양자강 일대까지 점령하게 된다. 이탈리아·독일과 함께 삼국동맹을 체결한 일본은 1941년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다.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와 인력을 중국과 한국에서 조달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은 제2차 대전의 전쟁터가 되었고, 한국은 병참기지가 되었다. 일본은 병참기지 건설을 위해 흥남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북부공업지대, 평양의 신의주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서부공업지대, 서울·인천을 중심으로 하는 경인공업지대를 구축하였다. 이로써 인천을 군수산업기지화하려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일본은 1939년 무렵부터 부평에 조병창 건설 계획을 추진하여 1941년 5월 5일 개창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 후 9월 8일 인천에 도착한 미군은 부평에 있는 일본육군조병창을 접수해 에스컴시티(9월 16일부터 불리었다)를 건설했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한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은 다시 에스컴에 주둔한다. 에스컴시티는 1963년 캠프마켓, 캠프그란트, 캠프타일러, 캠프하이에서, 캠프해리슨, 캠프아담스, 에스컴시티 군 교도소 등 7개의 구역으로 구성된다. 1973년 6월 30일 에스컴시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어 지금의 캠프마켓만이 남게 된다. 2013년 7월 31일 인천광역시와 국방부 주한미군기지 이전사업단은 ‘주한미군반환 공여지(캠프마켓) 관리·처분 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의 내용은 2022년까지 인천광역시가 토지매입대금 4,915억을 10년에 걸쳐 분납한 후 소유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김현석,「부평미군기지의 역사와 기지 ‘반환’의 성격」, 『박물관지』 16, 인하대학교 박물관, 2013년. 참조)

애스컴시티
부평역사박물관 제공

3. 제2회 부평캠프마켓 시민생각찾기 전문가 컨퍼런스

2019년 11월 1일 부평안전체험관에서 제2회 부평캠프마켓 시민생각찾기 전문가 컨퍼런스가 열렸다. 이 컨퍼런스의 목적은 미군기지 이전 후의 활용방안을 시민과 함께 긍정적·발전적으로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곽경전 시민참여위원회 위원의 사회로 시작된 컨퍼런스는 최용규 시민참여위원회 위원장의 인사말에 이어 부대이전개발과 강영훈 팀장이 미군 부대 이전 진행 과정과 토양정화 경과를 보고하였다.
인천민속학회 김현석 이사가 ‘조병창, 캠프 마켓의 역사와 미래’란 주제로 첫 번째 발표를 시작하였다. 김 이사는 가좌동에서 산곡동으로 이어지는 장고개가 고개로서 기능을 상실한 것은 1941년 5월 5일 인천육군조병창이 건설된 후일 것으로 추정하였으며, 1942년 4월 15일 평양병기보급창 부평분창이 가토리마치〔香取町-현재의 일신동 일대〕에 조성됨으로써 부평과 서울을 연결하는 성현의 기능이 상실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캠프마켓의 반환은 이 고개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때 비로소 완결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하였다. 계속하여 김 이사는 부평지역의 근현대 유적을 연결하여 살펴보자고 하였다. 예를 들어 인천육군조병창은 산곡동 영단주택과 함께 연결하여 살펴보면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의 군수정책을 조망 할 수 있는 주요한 유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인천육군조병창 유적의 활용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주제로 발표하였다. 정혜경 연구위원은 국내의 아시아태평양전쟁유적은 현황파악도 안되어 있으므로 조사가 필요하며, 인천육군조병창을 전쟁의 역사를 넘어 평화의 마중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리자는 의견을 제안하였다.
장정구 인천녹색연합 정책위원회 위원장은 ‘캠프마켓 주변 하천복개현황과 복원제안’을 주제로 하여, 인천하천의 복개현황과 이용실태 및 부평미군기지 주변 하천복개현황을 자료를 제시해가며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어 캠프마켓 주변의 굴포천을 복원하여 도로와 하천이 어우러진 마을을 만들어 차들이 점유했던 곳을 시민에게 되돌려 줄 것을 말하였다.
인하대학교 토목공학과 김수전 교수는 ‘도시하천의 관리 방향-하천복원을 중심으로-’를 발표하였다. 김 교수는 일제는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홍수피해가 극심한 하천을 위주로 개발을 진행하였다고 하며, 이어 도시하천은 홍수조절 및 갈수기 용수 유지 등의 기능, 생태통로의 기능, 환경자정의 기능, 다양한 놀이 공간의 기능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도시하천의 관리 및 활용사례를 설명하며 하천의 복원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성균관대학교 건설환경공학부 최혜경 교수는 ‘미군기지 공원화-용산공원의 교훈-’을 주제로 용산 미군기지를 공원으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발굴 조사가 제대로 안 된 점, 공원화 과정에서의 갈등과 논란이 있었던 면을 말하였다. 부평미군기지의 미래적 활용방안에 대해서 최 교수는 미군기지 활용에 대한 정보공개, 활용에 대한 조직 및 제도의 설계, 인천시민과의 연계가 필요하다는 조언으로 결론을 맺었다.
다섯 주제의 발표가 마무리된 후 진영환 청운대학교 토목공학과 교수를 좌장으로 토론이 시작되었다. 첫 토론은 허광무 부평사편찬 상임연구위원이었다. 허 위원은 김현석 이사에게 ‘조병창·장고개·성현 외에 일제에 의해 훼손된 부평지역’ 을 물었다. 김 이사는 부평 전체가 일제에 의해 계획된 도시라고 답변을 하였다. 이어 허 위원은 정혜경 연구위원에게 부평미군기지를 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를 질문하였으며, 정 연구위원은 시민의 제안이 가장 필요하다고 답변하였다.
두 번째 토론은 인천시민연대 김일회 신부가 담당하였다. 김 신부는 장고개길을 지하화하자는 제안과 아울러 김수전 교수에게 자연생태와 사람이 어울릴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구하였다.
세 번째 토론은 건축사무소 바인의 황순우 소장이 부평 미군기지의 활용에 있어 시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원칙이 먼저 세워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지정토론 후 청중석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부평구의회 마경남의원은 강제적으로라도 문화유산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줄 것을 말하였다. 꿈 베이커리 오미숙 사무국장은 캠프마켓 안에 있는 빵 공장의 활용에 대한 의견을 제안하였다. 시민참여위원회 역사분과 이재병 위원장은 도시재생적 관점에서 문화 특히 음악대중화를 모색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였다. MJ 엔터데인먼트 김종성 대표는 캠프마켓을 영상 산업 단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주었으며, 이윤영 시민참여위원은 이번 컨퍼런스의 내용을 백서로 제작하여 보존하자고 하였다.

제 2회 부평캠프마켓 시민생각찾기 <전문가 컨퍼런스>
인천도시공사 제공

4. 역사의 교훈

2019년 11월 2일 이재병 역사분과위원장이 캠프마켓 내부 행정동으로 추정되는 건물 앞의 휘장을 보고 ‘테두리는 태극, 가운데는 욱일승천기와 신사’라는 내용을 전해왔다. 이 휘장을 찾아보니 미국 403육군 야전지원 여단이 사용한다.(WIKIPEDIA 참조.) 403rd 육군 야전지원 여단은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 육군을 지원하고 있다.
WIKIPEDIA에 올려진 휘장을 자세히 살펴보니 바깥 테두리는 분명히 태극 문양이다. 한가운데는 일본의 욱일승천기와 신사가 그려져 있다. 태극과 욱일승천기 가운데는 둥그런 이중 원이 있고 여기에는 영어 대문자로 MAINTAINING(유지·관리)와 THE WARRIORS(전사)라고 상하로 나뉘어 쓰였다. 태극기를 깔고 그 위에 신사와 욱일승전기, 그리고 영어가 쓰여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 403 야전지원여단(403dAFSB) 휘장
출처 : WIKIPEDIA

조·미수호통상조약은 가쓰라테프트밀약으로 휴짓조각이 되었으며, 1941년 일본이 만든 조병창에는 1950년부터 미군이 주둔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는 403육군 야전지원 여단의 휘장은 태극 위에 욱일승천기를 그려 넣었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필자가 반미와 반일을 부추긴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역사학자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해 주는 것이 의무이다.
손자병법 모공편에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내용이다. 미래의 한국, 미국, 일본의 관계에서 한국이 위태롭지 않으려면 위와 같은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논어』 양화편에 공자가 “비루한 사람은 얻지 못했을 적에는 얻을 것을 근심하고, 이미 그것을 얻으면 잃을까 근심한다. 진실로 잃을 것을 근심하면 못하는 짓이 없다.”라 하였다. ‘못하는 짓이 없다’라는 것에 대해 주자는 ‘작게는 남의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으며 크게는 아버지와 군주를 시해한다’고 하였다. 지금도 자신의 이득을 얻기 위해 남의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는 자들이 곳곳에 있다.

글 / 남달우

인하대학교 사학과 대학원 문학박사(한국사 전공, 1998년)
인하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2017.3~2019.9)
인하대학교 사학과 출강(현재)
인천광역시 문화재 위원(현재)
(사)인하역사문화연구소 소장(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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