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의 다양성과 통합, 포용과 21세기 코리아(Korea) 미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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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건국 1100주년․경기 천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2018. 11.2.~4, 라마다프라자수원호텔)

고려 건국 11주년과 인천
918년 음력 6월 15일(병진) 철원의 포정전에서 왕건이 즉위했다. 일부에서 ‘실질적인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라 평가하는 고려왕조 500년 사직의 출발이다. 세월이 흘러 2018년이 되었다. 왕건 즉위로부터 1100년이 되는 해다. 1000년이 되는 해는 1918년이었으나 일본제국주의에 주권을 뺏긴 처지였으므로 기념할 수 없었고, 그 이전은 고려를 이은 조선의 시대였으므로 고려 건국을 기념한다는 것은 기대난망이었다.
인천이라는 지역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역대 왕조 중 고려만큼 인연이 깊은 왕조가 없다. 이름의 뿌리인 ‘인(仁)’은 고려 인종이 어머니 출신지인 인천을 높이기 위해 고민해 내려준 것이다. 인주 이씨 집안의 여식들은 7명이나 임금의 배필이 됐다. 몽골 침략이라는 국난을 맞아 고려인들은 개성 궁궐을 그대로 본떠 또 하나의 수도를 만들었으니 바로 강도(江都)다. ‘황궁’으로 표현되는 황제국가로서 고려의 위상 역시 강화에서 끝을 맺었으니 인천 입장에서도 고려 건국 1100년이 갖는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인천문화재단은 경기문화재단과 1년여에 걸친 협업을 통해 고려 건국 1100주년과 함께 1018년 현종때 처음 지방제도로 시행된 ‘경기(京畿)’ 성립 1000년을 함께 기념하고 기억하는 사업을 기획했다. 상반기에는 4월 28일 인천에서 한국역사연구회와 함께, 하반기에는 11월 2일부터 4일까지 수원에서 한국중세사학회와 함께 고려시대사 연구자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여 논의하는 마당을 펼친 것이다.

국제학술회의 참가자 기념사진

다원성을 바탕으로 통합을 지향했던 고려
이번 국제학술회의에는 한국은 물론 미국과 중국, 일본 연구자들도 참가해서 고려왕조의 역사적 위상과 맥락, 고려시대사 연구에서 제기된 주요 쟁점,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전망하는 유력한 수단으로서 고려사가 갖는 의미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했다.
11월 2일 첫날에는 모두 11명의 연구자가 강연 형식으로 발표에 나섰다. 국내 고려사연구의 1세대가 이미 작고한 상황에서 2세대 연구를 이끈 원로 학자들과 3세대라 할 수 있는 중진 연구자들, 외국에서 고려사를 연구하는 학자들까지 무척 다양한 구성이었다.

민현구 고려대 명예교수의 발표 장면

발표 요지를 압축해보면, 고려는 후삼국의 혼란기를 단일한 힘으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각 지역 세력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전망을 제시했다. 이런 출발의 특징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인 천하관으로 이어져 ‘외왕내제(外王內帝)’, 즉 외국에 대해서는 왕이라 하면서도 안에서는 황제를 칭하는 독특한 구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당연히 사상적으로도 유학이든, 불교든 폭넓게 수용하여 쓰임에 맞게 썼을 뿐 조선시대의 ‘숭유억불(崇儒抑佛)’과 같은 특정 종교 탄압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려는 다원성에 기반한 사회였고 서로 다른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로 모으기 위한 통합의 노력을 계속해 나갔다는 것이다.
외국 연구자들로 일본의 칸다외국어대학 도요지마 유카 교수, 교토대학 야기 타케시 교수, 중국 사회과학원의 손호 연구원, 미국의 하와이대학 에드워드 슐츠 교수,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로스앤젤레스의 존 던컨 교수가 참가했다.
첫날 발표의 하이라이트는 미국 하와이대학 강희웅 교수의 총평이었다. 구순을 바라보는 노학자는 에드워드 슐츠 교수와 존 던컨 교수를 지도한 선생이기도 한데, 이제는 원로가 된 제자들의 발표를 자랑스럽게 다시 소개하기도 하고 초창기 고려사연구의 어려움과 연구에서 얻는 즐거움에 대해 익살스러우면서도 진지하게 설명했다. 내년에 하와이대학에서도 고려사 관련 심포지엄을 열어 한국의 연구자들과 논의하고 싶다는 제안을 하시는 데서는 학문에 대한 열정에는 나이가 따로 없다는 느낌을 새삼 받았다.

일본 교토대학 야기 타케시 교수 발표 장면

또 하나의 고려 수도인 강화
11월 3일 둘째 날에는 7개 주제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주로 인천과 경기의 문화유산과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는 주제로서 인천과 관련해서는 인천시립박물관 이희인 학예연구관이 개경 도성과 강화 도성의 구조를 비교하여 의미를 살펴보는 발표를 했고, 민족문화유산연구원 한성욱 원장은 강화 출토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고려의 도자기 문화에 대해 고찰했다. 이밖에도 중국 연변대학 정경일 교수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개성역사유적지구의 근황에 대해 직접 현장을 여러 차례 답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상세히 설명했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이희인 학예연구관 발표 장면

주제별 발표와 토론이다 보니 발표자와 토론자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오가기도 했다. ‘경기’의 범위와 변화에 대한 의견 차이는 생각보다 컸으며, 고려시대 ‘경기인’의 범주 설정을 두고도 몇 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고대사나 조선시대사에 비해 연구자 숫자와 시민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지만 고대와 조선을 잇는 허리로서, 그리고 조선시대 문화의 뿌리로서 고려왕조가 갖는 역사적 위상은 생각보다 높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종합토론 광경

특히 연변대 정경일 교수는 남북 간 화해와 협력 분위기에 발맞춰 북측이 관리하는 세계문화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에 강화의 고려왕릉를 포함해 확장 등재하고, 반대로 남측이 관리하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에 개풍의 재릉과 후릉을 포함해 확장 등재하면 유적의 완결성도 높이고 문화유산 관련 남북 협력의 발전적 대안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이는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에서 이미 수년 전부터 주장, 추진해 오며 내부 검토 보고서도 제출한 바 있어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고려 문화의 다양성을 느꼈던 답사
셋째날인 11월 4일에는 학술대회 장소인 수원에서 고려시대 유적을 돌아보는 답사를 진행했다. ‘답사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을 본인의 눈으로 가서 확인하는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사학과에 내려오는데, 다행히 이번 답사에는 볼거리가 무척 많았다.

 
용인 서리 고려시대 백자가마터   고려시대 백자가마터 부산물

길이가 80미터에 달하는 국내 최대 가마인 용인 서리의 고려시대 백자가마터에는 계절을 알리는 낙엽들 사이로 자기를 굽고 남은 부산물들이 여기저기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그저 얕은 구릉이라고 밖에 생각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김윤후가 몽골 장수 살리타이를 사살하여 승리로 이끈 용인 처인성은 흙으로 쌓아 올린 성벽 일부가 세월을 거쳐 흘러내려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눈에 띄게 높이 솟아있는 암벽은 안성, 이천, 수원, 평택으로 내려가는 길목을 차지했던 처인성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국민대의 박종기 명예교수는 연구 초기에 처인성을 답사하며 기록과 대조해 본 경험을 이야기하며, 역사 연구자에게 현장 답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강조했다. 참여한 여러 대학의 고려시대 전공 대학원생들에게 노학자의 열정이 전달되었길 빌어본다.

용인 처인성

몸의 비례가 맞지 않는 지방색 강한 불상의 대표로 꼽는 것이 흔히 ‘은진 미륵’이라 부르는 충남 논산 관촉사 미륵보살입상인데, 안성 매산리 미륵보살상도 그에 못지않게 ‘균형 잃은’ 몸매를 자랑한다. 중생구제의 상징이라 할 미륵부처를 자기들의 시선과 입장에서 세운 고려 사람들을 생각해 보는 기회였다.

안성 매산리 석조미륵보살입상

앞으로의 과제
학술회의라 하면 보통 연구자들끼리 모여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행사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저녁 식사 자리에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모 대학 사학과 학생이 쏟아내는 질문을 들으며 이제는 시민과 젊은 사학도를 제쳐놓는 학술대회는 수명을 다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국제학술회의에서 한국중세사학회는 원로학자, 중견학자, 신진학자와 함께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고려시대사 전공 석사, 박사과정생을 다수 초대했고 둘째날 학술회의 종료 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일일이 나와 선배 연구자들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학생이 글로만 보던 선배 학자들을 직접 마주 보고 대화하는 설렘과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본인들도 좋은 논문을 쓰겠다는 다짐과 함께였다. 학술대회에서 오간 수많은 논의보다 어쩌면 같은 시대를 공부하는 선배와 후배가 세대의 차이를 뛰어넘어 마주 앉아 학문적 대화와 토론을 하는 기회였다는 점이 더 의미 있었을지 모른다.
잊혀진 것은 아니되, 관심이 적었던 고려시대는 특히 인천의 역사를 조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맥락이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에서 강화 석릉 주변의 고분을 시범 발굴하고, 마리산 남쪽 자락의 흥왕리 이궁지를 발굴하는 등 이전과 다른 움직임이 인천에서도 피어나고 있다. 그만큼 인천은 고려와 관련된 자산을 더 많이 갖게 되는 것이다.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역시 그렇게 갖게 된 자산을 바탕으로 남북이 함께 공동으로 고려 역사를 조망하고 살피며, 고려의 기반이자 지향인 다원성과 통합성을 인천에서, 나아가 미래 통일 코리아에서 실현하기 위한 다각도의 모색과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글 / 김락기(인천역사문화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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