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그지원> 덕분에 지옥에서 올라온 종북페미마녀가 되어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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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바로그지원>에 지원하기 전에 나는 굉장히 특이하고 재밌는 삶을 살고 있다는 한 여성, ‘송아영’에 대한 이야기를 4-5명의 지인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예술적인 창작물로 올리고자 <바로그지원> 7월 심사에 지원해 당선되었다. 공연은 12월 9일 부평 스위트홀 소극장에서 이루어졌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즐거운 시간이었고, 나는 이것을 좀 더 잘 키워보고 싶다.

…. ‘세 줄 요약’을 사랑하시는 분들께서는 여기까지만 읽으셔도 무방하다. 안 그래도 바쁜 세상에 어떤 이상한 여자가 연극 올린 과정과 이야기를 왜 보아야 하냐는 그대들의 의견도 존중하니까. 그런데도 <바로그지원>이라는 간결하고 깔끔하고 확실한 지원 프로그램과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용기가 만들어낸 듣고 보지도 못한 연극의 창작 스토리를 듣고 싶은 분들께서는, 이 글을 재미나게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다. .

1. 마녀가 된 여자
<바로 그 지원>의 지원을 받아 발표한 내 프로젝트 “지옥에서 올라온 종북페미마녀 송아영씨의 씐나는 모험”의 주인공 ‘송아영’ 씨는 대략 이런 사람이었다.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레즈비언이고 급진적 여성 커뮤니티인 ‘메갈리아’ 사이트의 운영자이면서 남성 대상의 접대노동을 하는 룸살롱 마담인데 남성에게 채찍질하길 즐기는 엄청난 새디스트인 데다가 남자관계가 매우 문란하고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안 넘어갈 수가 없는 묘한 매력을 가진 팜므파탈임. 등 뒤에 씌어있는 음란마귀의 명령에 따라 남자를 마구 유혹해서 정기를 빨아먹는 마녀임. 유명 예술가와 교제중인데 동시에 남자친구를 다섯 명 이상 사귀고 있으며 부유하고 나이많은 남자에게 막대한 후원을 받고 있음. PD(노동운동)계열의 좌파 운동권인데 종북주의자이며 러시아어에 매우 능통해서 중국과 북한의 간첩이 각각 그녀를 포섭하기 위해 접근하려 했고 그 때문에 경찰의 주요 시찰 대상 인물임. 그 와중에 국정원의 돈을 받고 유럽여행을 다녀와서, 모 국회의원의 보좌관이 핸드폰에 여행 사진까지 저장해가며 매우 열심히 시찰중인 요주의인물임. 그런데 이런 엄청난 정체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조용하게 사는 이유는 엄청나게 뒷배가 빵빵한 권력과 부를 갖춘 암흑가 집안의 딸이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큰일나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

사실 이 길고 이상한 ‘정체성’은 지난 3-4년간 나에 대해 떠도는 소문들을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와 주변 지인 4-5명에게서 듣고 수집한 것이었다. 나는 2009년부터 약 9년째 퍼포먼스와 연극을 주된 매체로 쓰는 행위예술가로 활동 중이고, 2014-15년에 정치적, 사회적 1인시위 퍼포먼스로 신문과 방송을 타며 이름이 알려진 적도 있었다. 예술가로서 적지 않은 기간을 작업하고, 그 대부분을 몸을 매개체로 사용한 행위예술로 이름을 알리다 보니 자연히 나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그 소문의 일부가 내 귀에 들어오기도 했다. 소문들의 내용은 대부분 위에 있는 텍스트처럼 매우 허황되고, 때로는 아무 이유가 없이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이런 소문들이 있음을 이야기해 주는 지인들이 말한 소문의 ‘출처’는 참으로 다양한 ‘집단’들이었다. 소문의 내용은 과도하게 성적인 내용이었다. 남성중심 사회가 여성의 성취를 깎아내리는 가장 쉬운 방식이 그 여성을 성적인 언어로 모욕하는 ‘소문’들을 퍼트리는 것이라는, 심증으로만 존재했던 불안이 나에게 물증으로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런 소리들을 모두 모아보니 역설적으로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나에게 부족하다고 말해지던 소위 ‘여성성’과 ‘섹시함’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이다. 섹시한 성적 매력으로 남자들을 마구 유혹하고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얻어내는 데다가, 간첩이 탐낼 만큼 출중한 외국어 실력과 정치력, 게다가 여성 운동에 후원을 아끼지 않는 대인의 배포까지. 시선을 달리하니 루머가 오히려 내게 힘을 주는 ‘이야기’ 가 되었다.

몸으로 메시지를 표현하고 공연하던 그간의 나를 가장 위축되고 신경 쓰게 하던 말들은 다름 아닌 나의 성적 매력에 대한 부분이었다.

‘유명한 여성 예술가가 되려면 살을 빼고 섹시해져야 해’,
‘너에겐 여성스러운 성적 매력이 부족해. 여성 예술가는 더 예뻐야 주목받는다고.’

이 글을 읽으시는 여성분들이라면, 꼭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이것과 비슷한 외모품평과 평가절하는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것이리라 예상한다. 재밌지 않은가? 앞에서는 내 실력과 아이디어보다 내 외모와 몸매를 소위 ‘나노단위’로 나누어서 가치를 깎아내리기 바쁜 사람들이, 뒤에서는 나를 성적 매력의 화신으로 만들어서 실력과 아이디어를 깎아내리려 애썼다는 것이. 그런데 그 ‘안티’의 말들이 모이고 모이니, 마치 팜므파탈의 위험한 매력이 가득한 마성의 슈퍼우먼이 만들어진 것이다! 허탈한 웃음이 나면서 오기가 생겼다. 이걸 갖고 한 번 제대로 놀아 봐야겠다고.

그래, 당신들은 내 가치를 인정하기 싫어서 그런 헛소리와 루머들을 만들어 냈지만 나는 거기서 또 다른 힘을 가진 내 분신을 만들어서 가지고 놀 것이라고. 그래서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축약한 “지옥에서 올라온 종북페미마녀” 송아영 씨의 씐나는 모험이다.

2. 바로 그 지원
나에 대한 소문과 루머들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작업해야겠다- 고 결심하고 나니, 어떻게 하면 이것을 가장 좋은 퀄리티로 제작하고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을까를 자연히 고민하게 되었다. 가장 큰 고민은 ‘돈’이었다. 아시다시피, 예술활동은 베테랑이 아니면 지극히 수익 창출이 어려운 분야의 ‘사업’이다. 일정한 경지에 올라서 지속적 수익 창출이 가능한 유명 작가가 아닌 이상 창작에 따르는 금액은 아무리 줄여도 적자를 단단히 각오해야 할 만큼 상당한 자금이 요구되곤 한다. 나는 그중에서도 글을 쓰고 행위예술을 하는, 비물질적인 예술을 주 작업 수단으로 삼는 예술가이다. 아이디어는 언제나 넘쳐 흐르지만, 그 아이디어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실행시킬까 하는 고민을 시작하면 언제나 수반되는 것은 제작비와 파급력에 대한 걱정이었다. 과연 내가 허리띠를 졸라매 가며 적자를 감당할 가치가 있을까. 이 돈과 시간을 들여서 발표하더라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서 사장되어 버리면 어쩌지? 몇 날 며칠을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고 설정을 써 내려가며 머리 터지게 고민할 무렵, 나는 인천문화재단의 청년예술가지원프로그램 [바로 그 지원]의 7월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바로그지원>은 나의 이런 고민을 덜어주기에 충분히 훌륭한 지원 프로그램이었다. 2016년에 <잃어버린 순무김치의 맛을 찾는> 프로젝트로 한 번 지원을 받은 적이 있었던 나는, 새롭고 신선한 작업을 열린 마음으로 환영해주고 또 필요한 공간과 작업에 대한 조언까지 전해주는 [바로 그 지원]이 나의 새 작품의 시초를 닦을 지원사업으로 딱 맞는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간단한 서류 제출과 100만 원이라는 창작지원금, 그리고 공개 발표를 통한 공정한 심사 과정까지. 이 사업이라면 이런 다소 이상하고 급진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도 편견에 의해 걸러지지 않고 공정한 심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가장 큰 동기로 작용했다. ‘설마 이게 될까?’ 하는 마음으로 서류를 쓱 내고 발표날을 기다렸다. 어찌 보면 상당히 괴상한 제목의 “지옥에서 올라온 종북페미마녀”라는 타이틀이 과연 발표 기회를 얻고 또 뽑힐 수 있을까? 의문과 떨림으로 가득한 며칠이 지나자, 담당 코디네이터님께서 연락을 주셨다. 코디네이터님은 상냥했고 또 이 작업의 포인트를 잘 짚어 주셨다. 방향을 잘 잡아 발표를 마치고 선정 소식을 들었을 땐 진심으로 기뻐하며 이런 제목과 내용의 프로젝트에 100만 원이라는 종잣돈을 쾌척해 주신 인천문화재단의 용맹함에 감격했다.

2-1. 제작 과정
사실 처음에 계획했던 내용은 나를 주인공으로 하여 소설이나 만화를 창작한 뒤에 내가 그 주인공인 ‘종북페미마녀 송아영’으로 분장하여 자기계발 토크 콘서트를 여는 것이었다. 프로젝트에 필요한 인력을 모으고 회의를 몇 번 거친 결과, 처음에 조금 거창하게 계획되었던 초안은 점점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제작 가능한 ‘연극’과 ‘사진’, 그리고 ‘파티’를 개최하는 쪽으로 구체화하였다. 내 머리에서 내 이야기를 통해 나온 기획안이었지만 실행에 있어서는 함께하는 스태프들의 도움과 아이디어가 빛을 발했다. 구체적인 제작 과정에 대한 것을 여기에 다 적기엔 부족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이 친구들에게 계약서를 쓰고 급료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는 점이다. 단순한 동료 관계를 넘어서, 적지 않은 인건비와 노동력을 교환하는 한 사업의 파트너로서 일을 진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나 혼자서는 무리인 장소 섭외와 세팅, 포스터 디자인과 홍보용 화보 촬영, 공연까지 스탭들의 노력과 정성이 있었다. 이 기획에서 내가 온전히 한 일이라고는 대본을 적고 연기를 한 것 정도였다. 다양한 분야의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모이니, 다들 각자의 일로 바쁜 가운데 시간을 쪼갰음에도 괜찮은 공간에서 좋은 이미지와 재미있는 공연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런 노력과 정성에 인건비를 지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그지원>의 지원금 덕분이었다.


<지옥페미> 공연과 촬영의 가장 중요한 소품이었던 꼬ㅊ다발. ‘팽이버섯같은 남근다발’이라는 어느 평론가님의 멘트에서 따온 제목이다. 자기들끼리의 헛소리를 퍼트리며 성차별을 굳건히 하려 하는 남성 집단에 대한 풍자적 상징으로, 방방곡곡에서 긁어 모은 가짜 꼬ㅊ들을 꽃과 함께 엮은 ‘선물의 꽃다발’로 무대의 어여쁜 중앙 장식이자 극중 소품으로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최종 결과발표는 2017년 12월 9일, 인천시 부평구에 위치한 스위트홀 소극장에서 <지옥에서 올라온 종북페미마녀 송아영씌의 씐나는 모험> 이란 제목의 연극형 스탠딩 코미디와 흥겨운 DJ 댄스타임이 합쳐진 파티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다소 생소한 장소였지만 와 주신 관객분들 덕분에 웃음과 폭소가 함께했고, 지원금으로 빌린 캠코더로 공연 영상도 충실히 녹화되어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대체 어떤 물건이 만들어졌는지가 궁금하시다면 아래의 공연 영상을 참조해 주시라. 삶이 30분 동안 유쾌해질 것이다.

[영상] “지옥에서 올라온 종북페미마녀 송아영씌의 씐나는 모험” 공연 현장
Youtube 바로가기 ▶

3. 결과
결과는 무난하게 괜찮았다. 관객들이 와 주었고 함께 즐겼으며 훌륭한 장비로 기록까지 잘 남겼으니 이 정도면 그간의 예술 작업 중에서 꽤 괜찮은 결과가 나온 셈이다. 더군다나 ‘자신에 대한 성적인 루머로 이야기를 만든다’는 다소 과격하고 새로운 시도를 했음에도 무사히 지원을 받고 별 사고 없이 공연을 마쳤다는 데에 모두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적자를 탈출했냐고? 그럴 리가. 적자는 여전히 났다. 좋은 퀄리티의 공연과 이미지를 제작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어간다는 자본주의의 마법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 돈 20만 원만을 가지고 만든 연극과, 120만 원을 가지고 만든 파티의 차이는 같은 20만 원의 적자라도 규모와 퀄리티, 내용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지원금이 존재함으로써 나는 하고 싶은 것을 더 많이, 더 좋은 방법으로 시도할 수 있었고 이 프로젝트를 다음에 더 확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될 공연기록 영상과 사진 작품을 얻었다. 100만 원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온전히 완성시키는 데에 약간 부족한 돈이었을지 몰라도, 하나의 아이디어가 예술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시험하기에는 괜찮은 금액이었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나의 예술적 가치관과 창작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자긍심을 얻었다. 처음에 기획했을 땐 ‘에이 설마 이런 게 예술이 될 수 있겠어?’ 라 생각했던 것이 점차 사람을 모으고 형태를 갖추어 가며 하나의 공연으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은 <바로그지원>의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느끼기 힘들었을 보람과 성취감의 시간이었다.

나는 “지옥에서 올라온 종북페미마녀” 프로젝트를 앞으로 더욱 키워볼 생각이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언어에 의한 성폭력에 시달리는 이 땅의 수많은 여성들에게 다가가 불의한 언어폭력에 맞서는 힘을 줄 수 있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의 소문에 대한 이야기와 평판에 대한 고민을 주변 여성 예술가, 활동가, 직업인들과 나누어 본 결과, 무언가 자기 뜻을 가지고 능력을 펼치는 여성들은 성과 금전에 관련된 헛소문에 크고 작게 시달려 본 경험이 적지 않게 있었다. 여성의 성취를 깎아내리고 가치를 내리는 언어 성폭력과 루머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였다. 나는 “지옥에서 올라온 종북페미마녀 송아영씌의 씐나는 모험” 을 작업의 떡잎 삼아, 이 문제들을 실제로 겪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좀 더 활기차게 가해자들에게 대항할 방법을 연구할 가능성을 더 크게, 더 널리 만들어 주고 싶다. 확장된 2차 프로젝트에서는 여성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참여하는 집단 창작 워크숍을 해볼까 생각 중이다. 물론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법적, 제도적 장치를 활용하여 가해자를 응징하고 제도를 보완하는 일이다. 하지만 싸움은 길고, 삶은 단순하지 않기에, 가장 좋은 해결책까지 가는 길에서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주입된 수치심과 2차 가해로 인해 지치곤 한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피해자가 아니다. 젠더 권력을 휘두르며 사람을 비열하게 괴롭히는 가해자들이다. 내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이 당연한 두 줄의 문장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직도 이렇게 당연한 문장이 자리 잡지 못한 채로 피해자가 부끄러워하고 위축되게 하는 성차별적 분위기와 ‘피해자다운 피해자’의 이미지라는 2차 가해적인 스테레오 타입이 존재한다. 나는 여성 피해자들이 더 이상 모욕적인 말을 듣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것을 가지고 놀고 웃을 수 있게 만듦으로써 지치지 않고 싸워나갈 수 있는 하나의 다리를 놓아주고 싶다. 이것이 완벽한 저항은 아닐지라도, 싸움의 과정에서 웃고 까불면서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며 발랄하게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의 다리를.

글/ 사진
송아영 (바로그지원 2017년 7월 대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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