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내게 꿈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나는 늘 ‘가수’라고 대답했다. 합창단에서 만나 결혼하신 부모님의 영향인지 노래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노래를 좋아하는 감정만큼이나 잘 부르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음악을 공부하면서 소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기타를 배우면서 만난 사람들과 길거리에서 소소하게 밴드 활동을 했다. 우리는 음악을 함께했지만, 음악으로는 먹고살지 않았다. 함께 모여서 자신이 원하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부르면서 기타를 치고 놀았다. 가끔은 거리에서 공연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무대에 초청되어 음악을 향유했다. 그러면서 느꼈다. 뮤지션은 아니더라도 관련된 일을 하면 재밌겠다고.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시흥의 한 축제 사무국에서 우연히 일하게 되었다. 행사를 알리기 위해 다양한 홍보물을 만들고, 직접 배포에 나섰다. 많은 인파로 북적거린 행사에서 공연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때 알았다. 비록 무대에 서지 않아도 음악을 가지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음악과 관련된 행사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흥에서 근무하는 동안 다른 지역에 사는 직원들과 함께 방을 구해야 했다. 집에서 시흥까지 출퇴근하는 길이 무척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영화관람이나 쇼핑 등 간단한 여가생활을 즐기는 것조차도 한참을 이동한 후에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인천에서 고민해본 적 없던 사소한 일들이 이곳에서는 크게 다가왔다. 인천이 그리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교 내내 인천지역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잘되면 인천을 떠나야지’라는 마음으로 줄곧 지내었다. 인천은 수도 서울과 가깝고, 국제공항, 항구, 전철까지 어디론가 떠나기 좋은 최적의 교통조건을 가지고 있기에 내 주변 분들도 인천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기를 언제나 희망했다.
난생처음 시작된 타향살이가 인천에 대한 긍정적인 부분을 떠오르게 했다. 인천에 다양한 인프라가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사실 늘 서울과 비교해서 그렇지, 다른 지역에 비하면, 교육 및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그저 너무 당연한 것들이기에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인천의 고유함과 독특함으로 무언가를 창작할 수 있는 문화기획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인천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지역문화인력양성> 프로그램을 신청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지역과 문화라는 개념에 대해 이론 수업을 들으면서 기본적인 지식을 쌓았다. 5월부터는 현장과 연계하여 인천지역의 문화공간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특히 음악과 관련된 공간에 관심이 있어 ‘락캠프’에 기대가 컸다. 사실 과거에는 ‘록’이라는 장르를 선호하지 않았고 ‘라이브 클럽’도 어떤 곳인지 몰라 섣불리 방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수업을 계기로 방문한 ‘락캠프’는 21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음악 공간이었다.
부평구청역 3번 출구에서 직진으로 20걸음 정도 걷다 보니, 길 건너에 커다란 ‘락캠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 들어서자 처음 눈길을 사로잡은 건, 다양한 공연 포스터들이었다. 내려가는 계단 옆쪽 가득 붙어있는 낡은 포스터들이 지나온 시간을 말해주고 있다. 정면에는 정유천 대표의 사진으로 만든 간판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니, 액자에 담긴 공연 사진이 가득했고, 고개를 돌리자 수백 장의 음반들이 한쪽 벽을 감싸고 있었다. 공연하는 공간이라 어두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반짝이는 조명들이 이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대표님 내외분께서 한 분 한 분 커피를 내어주기 시작했다.
대표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처음 ‘락캠프’가 문을 연 곳은 인디씬이 생겨난 1997년 부평삼거리 인근이었으며, 2006년 강화도로 옮겼다. 그리고 현재의 공간에 정착한 지 어느새 7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고 한다. 어쩐지 지나온 시간에 비교해 공간이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생각해보면 21년 동안 한 공간을 유지하기에는 음악 시장의 판도가 많이 변화하였다. 특히 클럽문화가 성행했던 97년은 록이 활성화되면서 많은 록 밴드가 데뷔를 위해 공연을 하던 시절이었다. ‘락캠프’도 365일 중 360일 이상을 공연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록’보다는 ‘팝’ 장르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소비하는 음악 장르가 한쪽으로 편중되면서 시장에서 ‘락밴드’보다 ‘아이돌’을 꿈꾸는 이들이 늘었다. 공연에 대한 수요가 자연스레 줄었고, 밴드 공연 중심으로 수익을 내던 대부분의 라이브 클럽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락캠프’ 또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부평을 떠나 강화에서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부평구청 쪽으로 돌아오면서 이름을 바꿀까도 고민했지만, 이름 속에 들어있는 오랜 추억을 져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현재는 토요일에만 정기공연이 있지만, 종종 금요일에 기획공연을 진행한다. 이제는 무대에 록 밴드뿐만 아니라, 많은 뮤지션이 설 수 있도록 장르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간단한 설명과 함께 공간을 둘러보았다. 꽤 넓은 공간이었다. 보통은 100여 명 정도 앉아서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나, 공연내용에 따라 테이블과 의자를 치우고 스탠딩으로 즐기면 300여 명까지 수용 가능하다. 실제로 유명 인디 가수가 방문했을 때는 350여 명의 관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무대에는 각종 앰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종류가 워낙 다양해서 모두 쓰는 것인지 여쭤보니, 앰프별로 출력되는 소리가 다르고 뮤지션마다 선호하는 소리도 달라 많은 종류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여분의 기타 및 신디사이저를 소장하고 계셨고, 여러 색의 조명, 스모그 효과까지 공연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무대에서 조명부터 장비의 각 위치까지 디테일하게 설명하는 대표의 모습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제는 경제적인 이윤보다는 뮤지션에게 내어줄 수 있는 무대를 유지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락캠프’의 취지에 동참한 몇몇 가게들이 모여 인천 대중음악 공연장 협회를 구성하는 동시에 상생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거리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는데, 이들이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사라지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나 또한 버스킹을 시작으로 밴드를 꾸렸지만,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을 선호한다. 기본적인 장비만 준비되어 있으면 무대공연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알아주는 분이 있어서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공간을 둘러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휩싸였다. 이곳에서 록이 갖는 고유한 문화적 정서를 인천시민들과 함께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문화기획자가 된 듯한 기분으로 고민을 했다.
<지역문화인력양성> 수업을 통해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보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하나둘 모여 더 나은 지역의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앞으로의 만남이 더욱 기대된다.
앞서 말했듯이 어렸을 때 나의 꿈은 ‘가수’였다. 성인이 된 지금, 나의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내가 사는 지역에서 음악을 소재로 한 문화기획자가 되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 답하고 싶다. 무엇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글/사진
김지연(지역문화인력양성 프로그램 수강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