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함께 읽기
만화에는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만화에는 이 시대가 생각해야 할 가치, 우리 사회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만화 함께 읽기’에서는 ‘문화예술을 소재로 한 만화’나 ‘문화 현장의 쟁점을 다룬 만화’를 소개합니다. 바쁜 일상이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 만화를 읽으며 삶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자리’를 찾는 여행김소희, 『자리』(만만한책방, 2020)
최기현(인천문화재단)
예술인 고용보험이 시행된 지 8개월이 지났다. 예술인 고용보험은 잦은 실업과 고용불안정으로 지속적인 창작활동이 어려운 예술인을 위해 2020년 12월 10일부터 실시되었다. 적용대상은 문화예술용역 관련 계약을 체결한 예술인이다. 일이 없는 기간에는 최대 270일 동안 실업급여를, 출산했을 때는 90일간 출산전후급여를 받을 수 있다. 예술인이 하나의 예술 활동을 마치고 다음 활동을 하기 전까지 예술인 고용보험은 최소한의 생활을 지원한다.
예술인들은 대체로 예술인 고용보험의 시행을 환영한다. 반면 계약한 예술인의 소득과 보험료를 일일이 계산해서 신고하는 것에 번거로움을 토로하는 단체 대표자도 있다. 일부 예술인은 기존에 떼던 사업소득, 기타소득 외에 추가로 납부하는 고용보험료를 불필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을 위한 제도임에도 이해당사자 모두가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김소희, 『자리』 (만만한책방, 2020) |
김소희 작가의 만화 『자리』는 미대를 졸업한 두 명의 작가 지망생이 자신의 ‘자리’를 찾는 여정이다. 송이와 순이는 자신들의 예술 활동을 위해 함께 지낼 집을 구하러 다닌다. 처음 이사한 집은 예전에 목욕탕으로 사용한 지하 공간이다. 햇빛은 전혀 들어오지 않고 겨울에는 한기를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춥다. 계속 살다가는 심각한 병에 걸릴 것 같아 이사를 결심한다.
두 번째로 이사한 집은 일반 주택의 다락방이다. 지붕 아래에 불필요한 공간이 있긴 하지만 목욕탕 집과는 달리 햇빛도 잘 들어온다. 두 사람은 가성비 좋은 집을 구했다고 만족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저렴한 이유가 있다. 바닥이 뚫려있어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 공간이다. 다시 새로운 집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7년간 10번의 이사를 하며 그들의 ‘자리’를 찾아 헤맨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류머티즘에서 면역질환까지 크고 작은 병을 얻는다.
자리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먼저 물리적 자리와 사회적 자리를 뜻한다. 물리적 자리는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최소한의 조건이 필요하다. 햇빛이 들어와야 한다. 여름과 겨울에 너무 덥거나 춥지 않아야 한다. 개인 프라이버시도 보호되어야 한다. 방음이 잘되고 교통도 편리한 곳이면 더 좋다. 한마디로 생활의 안정성이 필수적인 요소다.
『자리』의 한 장면 (만만한책방, 2020) |
『자리』에서 두 사람은 이상하게도 지하나 반지하처럼 햇빛을 보기 어렵고,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집으로만 이사한다. 이들이 가려고 한 집 중에는 화장실이 방 한가운데 버젓이 있는 집도 있었다. 두 사람은 왜 햇빛이 잘 들면서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집을 구하지 않았을까? 자리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돈이다. 돈의 유무가 물리적인 자리를 결정한다. 돈이 충분하지 않은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지하나 반지하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 추운 집을 전전할 수밖에 없다.
한편 이들은 작가 지망생이다. 사회적 자리에 도달하지 못했고 수입은 안정적이지 않다. 작가로 데뷔해서 웹툰을 연재하거나 그림을 팔아야 일정한 수입이 생기지만 아직은 아니다. 사회적 자리에 도달하지 못해 발생하는 돈의 결핍은 물리적 자리에 영향을 미친다. 물리적 자리가 불편하면 그만큼 사회적인 자리와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생계를 위해 일러스트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작가가 되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김소희 작가는 전작 『반달』에서 어두웠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동심의 눈으로 담담하게 풀어낸 바 있다. 안정적이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듯 이번 작품 『자리』에서도 전체적으로 채도가 낮고 어두운 편이다. 어둡지만 완전히 절망적이지는 않다. 노란색이나 주황색, 하늘색 등 작은 포인트가 만화 곳곳에 담겨있다. 작가는 현실 속에서도 작은 희망의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마치 두 사람의 주인공이 자리를 찾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사람의 욕심은 무한하고 재화는 한정적이다. 경제학에 나오는 희소성의 원칙이다. 안정적인 자리는 한정되어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자리는 존재할까? 아쉽지만 답은 ‘아니오’다. 누군가는 원치 않는 결핍에 처할 수도 있다. 모두가 만족하는 안정적인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정성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코로나19로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예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예술인의 생활 안정을 위해 ‘예술인 긴급 생계지원’이 긍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일시적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코로나19 이후 다른 형태의 재난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예술인 고용보험은 하나의 예술 활동이 성공하지 않아도 예술을 포기하지 않는 최소한의 시간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지속적인 예술 활동을 위한 버팀목으로 예술인 고용보험이 예술 현장에 안착하길 기대한다.
최기현(崔基鉉, Daniel Choi)
인천문화재단 전략기획팀 과장. 만화평론가. 문화예술과 만화에 담긴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웹툰이나 공연, 전시를 추천해주신다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DANIEL7@ifa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