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사랑하며 살겠습니다극단 십년후, 다시 사람을 경작하는 최원영 교수
류수연(인하대학교 교수)
최원영 / 행정학 박사 (현)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겸임교수 |
최: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최원영입니다. 모두 안녕하신가요? 어떤 질문부터 시작할까요?
류: 선생님께 대한 질문의 시작은 아무래도 극단 십년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비록 극단을 떠나셨지만, 지역극단의 의미를 만들어낸 리더십이라는 명성은 여전하시니까요. 창단에 관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최: 내가 원래는 초등학교 선생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미국에 유학 가기 전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이 친구와는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인데, 서로 아주 친했어요. 이 친구가 지금은 밀양연극촌 3대 촌장으로 있어요. 원래는 지방에 있는 대학의 교수였는데, 지금 우리 나이로 66세니까 대학을 퇴직할 때가 됐잖아요. 어쨌든 교수로 있으면서 촌장이 된 거죠. 그 친구 얘기예요. 당시 내가 미국으로 떠나겠다, 하니까 이 친구가 본인도 유학을 떠나겠다, 이런 거죠.
류: 그럼, 같이 유학을 결심하신 건가요?
최: 그렇진 않아요. 저는 미국에 가서 정치학을 하겠다고 했고, 그 친구는 중앙대 연극과 연출 전공을 했는데 일본에 갔다가 인도로 가서 학위를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떠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때는 어렸으니까 십 년 있으면 대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포 한 잔 나누면서 헤어지기 전에 십 년 후에 자기 자리에서 최고가 되어 만나자. 그래서 우리가 공동으로 뭔가 할 수 있는 공간을 하나 만들자. 평생 무료로. 돈은 다른 일에서 벌고.
류: 멋진 포부셨군요.
최: 그래서 1984년에 떠나서 1994년에 돌아와서 만났어요. 그때 저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이고,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실험이 필요했어요. 논문이 아니라 동아리를 만들어서 실제로 그곳에 진실한 사랑이 들어갔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이걸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제가 귀국한 지 몇 개월 후에 친구도 나왔는데 그 친구에게도 연출을 할 수 있는 극단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십 년 전의 약속을 이름으로 해서 ‘십년후’가 창단이 된 거죠. 처음에 3년을 같이 하다가 그 친구는 경산에 있는 대경대학교에서 마침 교수를 뽑는다고 해서 거기로 갔고, 그게 장진호 교수예요. 장 교수가 가면서 소개해준 사람이 지금 십년후의 송용일 대표예요. 장 교수가 떠난 후에 이분이 그 이후 20여 년 동안 연출을 했죠. 이분이 당시 경기대학교 연극과에 겸임교수로 있었는데 무대제작이 전공이세요. 그렇게 같이 꾸려왔죠.
우리가 사랑으로 극단을 운영하려고 했던 노력이 있어요. 하나는 우리가 처음에 고등학교 막 마친 일곱 명을 데리고 시작했어요. 그게 1994년이에요. 1~2년 지나서 어느 날 그중에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에 다니던 단원이 연습하는데 다리가 퉁퉁 부어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인가 알아봤더니 그 친구가 학비가 모자라서 밤새 종일 서서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극단에서 연습한 거죠. 그런데 당시 우리 장 교수가 몸 연극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훈련을 시키니까 지치잖아요. 또 일까지 그렇게 하니까 더 힘들었던 거죠.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얼마가 돈이 더 필요하니? 그랬더니 80만 원이래요.
류: 당시 80만 원이면 굉장히 큰돈이죠. 제가 95학번인데 당시 학비가 160~180만 원 정도였던 것 같아요. 돈 가치는 훨씬 컸고요.
최: 네, 그래서 80만 원을 구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선배님을 찾아갔고 80만 원을 거의 강탈을 했죠. 하하. 그런데 그걸 극단에서 줄 수가 없잖아요. 다들 어려우니까. 그래서 밖으로 불렀어요. 그리고 그 돈을 주면서 당장 아르바이트 그만두라고 했죠.
판타지 뮤지컬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2002.12.4.~12.8. ⓒ극단 십년후 |
또 한 가지는 그게 뮤지컬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을 할 때였어요. 그게 대작이었죠. 그때 잘 돼서 순회공연도 하고 그랬는데 공연 횟수로 보면 한 300회 정도 했어요. 큰 성공을 한 거예요. KBS에 가서도 하고. 그런데 뮤지컬이 돈이 많이 들어요.
기억에 남는 날이 있는데, 내 기억에 그날이 12월 8일이었던 것 같아요. 인하대에서 수업을 마치고 공연이 있는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을 갔어요. 대공연장은 1500석이었죠. 그날은 마지막 공연이었는데 고약하게도 눈비가 섞여 내렸어요. 그런데 2층 매표소에서부터 사람들이 두 줄로 쭉 서서 주차장이 있는 데까지 늘어선 거예요. 직원이셨던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유명 가수가 오는 것 아니고서는 이렇게 줄이 늘어선 적은 없었다는 거예요. 그때 작곡을 해주신 분이 최종혁 선생님이셨어요. 그날, 이 어른과 제가 손을 잡고 울었어요. 너무 기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해서요.
류: 정말 기쁘셨을 것 같아요. 지금도 흔치 않은 일일 텐데요.
최: 그런데도 그때 저는 6~7천만 원 정도 빚을 졌어요. 그날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분장실에 갔는데 분위기가 이상한 거예요. 원래 우리 애들이 밝아요. 근데 그날은 말이 없이 무척 무거웠어요. 당시 창단 때부터 같이 있었던 이경미라는 단원이 주인공인 삼신할머니를 했었는데, 이 친구도 얼굴이 어두운 거예요. 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도 말을 안 해요. 그래서 연출 선생님과 기획실 직원들을 따로 불러서 물어보았어요. 그런데 서울에서 온 기획사가 그 전날인가 이 작품을 찍어 갔대요. 그러면서 이건 전국적으로 공연해도 성공할 것 같다면서 같이 하자고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서 2억을 주겠다고 했어요. 대신에 순회공연을 하면서 2억이 될 때까지는 자기들이 다 갖고, 그 이후부터는 반반씩 나눈다는 조건이었어요. 이게 첫 번째 조건이고. 이 제안은 저희에게는 무척 좋은 조건이잖아요?
류: 그렇죠. 괜찮은 조건인 거죠.
최: 우리는 그런 기획력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두 번째 조건이 뭐냐 하면 그 삼신할머니 역을 탤런트를 쓰자는 거예요.
류: 아…. 그게 문제였네요.
최: 극단의 살림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게 나쁜 게 아니죠. 살림이 뭐가 있어야 애들도 챙겨줄 수 있으니까. 기회인 것 같다는 의견도 많이 나왔어요. 연출자도 마찬가지이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순식간에 빚은 청산이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선생이라 생각이 좀 달랐어요.
류: 그러셨을 거 같아요.
최: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내 아이를 키워서 저기 더 큰 세상에 우뚝 세우고 싶은데, 이런 기회에 내 아이는 객석에서 보고 있고 다른 탤런트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면 내 아이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나는 우리가 처음 이 극단을 만들 때 사랑으로 키우고자 했는데, 이건 거기서 벗어나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내가 말했어요. 기획사에 전화해라. 20억을 줘도 이 아이를 삼신할머니로 쓰지 않으면 못한다. 그렇게 얘기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안 되었어요.
<사슴아 사슴아: 목종비곡(穆宗悲曲)>,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2001.12.1.~2. ⓒ극단 십년후 |
그런데요. 그게 그렇게 끝나지 않더라고요.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서 2006년 <사슴아 사슴아: 목종비곡(穆宗悲曲)>가 전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어요. 바로 그 아이가 연기상도 받았고요. 물론 연출상도 받았고. 그런데 그걸로 끝나지 않고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도 전국에서 2~3천만 원씩 공연비를 받으며 6~7년을 더 공연했어요. 그래서 사람도 살리고 작품도 살렸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극단의 저변이 넓어졌어요. 단원들도 극단에 대한 믿음이 생겼겠죠. 그리고 리더 그룹이 우리도 눈앞의 금덩어리보다 제일 소중한 자산인 사람을 안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치를 공유하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해요.
류: 그렇다면 역시 선생님께 극단 십년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겠군요?
최: 아무래도 그렇죠.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 성공을 하고 나니까 좀 욕심이 나더라고요. 돈은 많이 들어도 역사를 뮤지컬로 만들어보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제가 생각했던 작품은 먼저 ‘Universal’, 작품에 좀 철학이 담겼으면 좋겠다. 또 하나는 ‘Easy’, 작품이 좀 쉬웠으면 좋겠다. 다음으로는 ‘Exciting’,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걸 강조 했었어요. 이걸 가지고 우리 역사를 풀어보자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 극본은 대체로 고동희 선생이 썼어요.
이렇게 처음 만들어진 공연이 단군신화를 다룬 <박달나무정원>이였어요. 다음으로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 즉 대중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 울타리 밖으로 사랑을 전파하려고 한 인물이 누굴까 하고 찾으니까 바로 광개토대왕이 있었어요. 그래서 광개토대왕의 어린 시절을 다룬 <꽃님>을 뮤지컬로 만들었어요. 이후 이런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사랑, 집단의 사랑, 그리고 그것이 충만하게 넘쳤을 때 외부로의 확장, 이런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를 찾다 보니까 소서노라는 어머니가 있었어요. 그래서 소서노를 주인공으로 한 <도칸, 소서노>가 나왔죠. 이렇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한 번 정리해봤어요. 이렇게 역사의 위대한 순간마다, 혹은 인생의 굴곡마다 그 시대의 영웅들 속에 감춰져 있었던 모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 나라를 지탱한 힘이었구나.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어요.
극단 십년후 슬로건 ⓒ극단 십년후 |
우리 극단의 슬로건이 창단 때부터 ‘사랑하며 살겠습니다’예요. 원래의 극단 로고는 서로 기대어 있는 두 잎사귀가 있고, 그것을 태양이 비추고 있어요. 그런데 이 태양이 좀 구부러져 있어요. 무슨 의미냐면, 내가 크려면 누군가가 받쳐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나만 돋보이고 밑에 있는 잎은 영원히 사다리가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 구부러진 태양이 제일 밑에서 받쳐 주는 잎을 빛을 줘서 키워요. 이것이 끊임없이 순환되면서 크는 거죠.
그래서 저는 극단 단원들이 더 큰 곳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또 새로운 사람들이 오고. 처음에는 우리 극단의 연출가도 이걸 이해 못 했어요. 안무 선생님, 화술 선생님까지 붙여서 열심히 가르치고, 음향이나 조명도 가르치고 했는데 연기가 될 만하면 나가고 하니까. 이분은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얼마나 안타까웠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해하고 계셔요.
저는 그랬어요. 키워서 내보내야 한다. 지금은 손해 볼지 몰라도 나중엔 그렇지 않다. A라는 사람이 서울에 가서 스타가 되면 결국 자기를 키워준 곳을 돌아보게 된다는 거죠. 이 사람이 여기 올 때는 그냥 오는 게 아니죠. 관객들과 스탭들을 달고 오지 않겠어요. 전문가들을 달고 오고. 그러니까 끊임없이 여기서 내보낼 수 있어야 더 큰 눈덩이가 만들어지는 거죠. 각각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욕망이 구현될 수 있도록 희망으로 바꾸어줘야 한다는 것, 이것이 극단의 가치인 ‘사랑으로 살겠습니다’의 요체인 셈이에요.
류: 정말 좋은 뜻을 가지고, 그것을 계속 실천해 오신 것 같아서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또 궁금한 게 미국에서 원래 정치학을 공부하셨다고 했는데 귀국 후에는 의외로 연극 활동을 하셨으니까 내부에서 부딪치시거나 힘드셨던 적은 없었는지요?
최: 많았지요.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 승승장구를 하니까 한번은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거기가 공간이 좀 작아요. 여름방학 한 달 동안 인원수를 줄여서 2천만 원 정도 받고 공연을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7명 나오는 작품으로 축소해서 공연을 했어요. 이때 맡았던 중견 배우가 자기 나름으로는 여기서 공연을 하면 아르바이트비 정도는 아이들에게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셨던 거 같아요. 그때가 우리가 빚을 좀 청산을 했을 때예요. 다 끝나고 나서 기획실장이 정산보고서를 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그 공연을 대표했던 중견 배우가 속이 상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줄 돈이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적었던 거예요. 당연히 속상했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분을 만나 말했어요.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을 처음 준비했을 때, 녹음해주신 원로배우나 수많은 스텝이 거의 무료로 해주셨어요. 작곡해주신 최종혁 선생님 같은 분은 보통 뮤지컬 작곡하면 받는 금액의 5분의 1 정도만 받고 기꺼이 해주셨어요. 이렇게 헌신하신 분들이 계셨기에 이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중견 배우는 용산에서 한 달 동안 번 수입만을 나누는 것으로 여겼으니까, 적다고 생각한 거죠.
류: 두 분 다 사실은 좋은 뜻이셨네요. 그 배우님께서는 고생한 단원들을 더 챙겨주고 싶으셨던 거고, 선생님께서는 이전에 고생하셨던 분들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셨던 거군요.
최: 맞아요. 그런 거죠. 우리한테 작품을 하고 나서 돈을 나누는 전통이 있어요. 뭐냐면 돈을 봉투에 넣고 이름을 써서 광주리에 넣어요. 그리고 제가 돈을 다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제일 수고한 단원이나 나이가 가장 많은 단원이 그중 하나를 뽑아서 그 사람을 주면서 포옹을 하고, 뽑힌 사람이 다음 봉투를 뽑아서 그 사람에게 주고 포옹하고, 이런 식으로 해요.
사실 저는 20년 가까이 극단을 이끌면서 저는 월급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게 시작할 때 약속이었으니까. 저는 밖에서 벌어 먹고살고, 때로 모자라면 채워 넣는 역할을 하겠다고 결심했으니까 그렇게 했던 거죠. 아까 말했던 대통령상을 받았을 때 상금이 2천만 원이 나왔어요. 그래서 배우들에게 이 돈을 어떻게 썼으면 좋겠냐고 의논해보라고 하고 나는 자리를 피해줬어요. 그랬더니 배우들이 극단이 어려우니까 극단에 놔둡시다. 이러는 거예요. 얼마나 고마워요? 모두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달랐어요. 저는 살림살이하는 고 실장을 불러서 배우들, 스탭들에게 전처럼 광주리 행사를 했어요. 그랬더니 도립극단이나 다른 곳에서 돈을 버는 중견 배우들 몇 분은 나눠드린 수고비를 다시 극단에서 쓰라며 돌려주셨어요. 참 고마운 일이죠. 그분들도 돈이 필요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이란 생각이 들어요.
류: 정말 하나의 공동체였고, 그렇게 실천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극단 십년후를 벗어난 선생님의 삶에 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십년후 대표를 그만두시고 밖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요. 근황을 이야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최: 이렇게 사는 것이 원래 제 꿈이기도 했어요. 처음엔 극단 안에서 단원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열었어요. 사실 당시 단원들은 인문학이 뭔지 모르고 저도 공부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영어회화를 함께 공부하자고 했어요. 훗날 단원들이 외국에서 공연해야 할 때도 있을 테니까요. 그 공부를 하면서 중간중간에 인문학을 끼워 넣었던 겁니다.
처음엔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그걸로는 뭔가가 부족한 것 같아서 동양철학을 함께 공부했어요. 그리고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심리학을 공부하게 됐지요. 사실 저는 미국에서는 10년 동안 학부 과정만 했어요. 저는 10년이면 박사까지 다 끝날 줄 알고 한국에서 대학 다닌 것을 기재하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한 것만으로 대학을 들어갔어요.
그런데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대학을 다니니까 진도가 안 나간 거예요. 나중에 한국에 들어와서 인하대에서 석박사 10년을 또 한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아이들에게 가르칠 인문학 공부를 한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문학을 접하다 보니까 그동안 가졌던 제 생각 또한 달라졌어요. 예컨대 누군가를 이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들이 저절로 아름답게 크도록 여건을 형성해주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그린 설계도대로 집을 지어서 사람들을 그곳에 살게 하면 그 사람들은 기호가 달라서 불행할 수도 있잖아요. 미국을 가기 전에는 그런 설계도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인문학을 접한 후에는 그게 얼마나 교만한 일인지 그때 알게 된 거죠. 만약 제가 빈 텃밭을 마련해서 제 계획대로 심어서 계획대로 결실을 본다면 그 성취감을 저만이 느끼겠지만, 만약 제가 이 텃밭만을 마련해주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그 텃밭을 가꾸게 해주는 리더라면 훗날 텃밭에 꾸려질 아름다운 동산은 제 상상을 초월한 모습이지 않겠어요? 얼마나 감동이겠어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면 구성원이나 저 모두 감동일 겁니다. 모두가 텃밭의 주인이 되는 셈이지요.
류: 요즘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이미 20년 전에 시작하셨군요. 당시엔 오히려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이 더 지배적이던 시절인데요. 확실히 앞서 나가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너무 과찬이시고요. 하하. 제가 미국에 갈 때 들고 간 책이 『정경숙(政經塾)』이라는 일본 책이었어요. 파나소닉의 창업주인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쓴 책이에요. 결국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의미로 정치경제 아카데미를 설립한 거죠. 저도 꿈이 이런 아카데미를 하고 싶었어요. 극단 십년후가 그 첫 번째 실험이었던 거죠. 40대 후반엔 성경과 불경을 공부했어요. 거기서 결국 용어는 달라도 가르침의 끝은 똑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바로 ‘사랑’이었던 거예요. 그것도 ‘진실한’ 사랑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가 극단의 울타리를 넘어서 그 사랑을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카스(DACAS)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여기서 ‘D(discover)’는 ‘발견하라’라는 의미인데, 뭘 발견하느냐 하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행복할 수 있는 이치를 발견하자는 거죠. 그런데 그 이치를 찾아서 배워도 아직은 내 것이 아니잖아요. 두 번째 ‘A(accept)’는 그걸 내 걸로 만들라는 거죠. 세 번째 ‘C(concern)’는 관심을 두는 거죠. 이건 사랑으로 교류하고 나누라는 의미에요. 그렇게 나누다 보면 ‘A(achieve)’로 함께 성취하겠지요. 다섯 번째는 이렇게 성취한 것을 우리끼리 갖지 말고 울타리 밖으로 나누어라. 즉 ‘S(spread)’, 확산시키라는 거죠.
이 과정을 6개월에서 1년을 인천에 있는 리더 그룹들과 함께했어요. 이런 취지로 11년 전에 30~40명 정도로 시작을 했지요. 이것 역시도 무료예요. 처음에는 무료라는 것 때문에 걱정을 샀어요. 주변에서는 제가 정치를 하려고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리고, 또 가까운 지인들은 무료이면 사람들이 더 안 온다고 걱정도 해주셨어요. 더구나 이걸 제가 혼자 강의를 했어요. 혼자서 한 이유는 내가 잘 알아서가 아니에요. 교육의 일관성 때문이었어요. 여러 강연자가 오면 각각의 좋은 강의여도 모든 강의 일정이 끝나면 찐하게 남지를 않아요. 그래서 제가 혼자서 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1500명 정도가 이 공부를 했어요.
류: 제가 인터뷰 준비를 위해 자료조사를 하다 보니까 정말 많은 분들이 선생님의 강연에 대해 블로그 같은 곳에 후기를 올리셨더라고요. 정말 재미있고 유익했다고.
최: 제가 인터넷을 안 해서 못 봤네요. 감사한 분들이네요.
류: 그래서 선생님의 강의비결을 여쭙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대중강연의 비결은 역시 다카스로부터 온 것일까요?
최: 아무래도 그렇겠죠. 다카스에서의 경험이 결국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만들었을 거예요. 지금 기호일보에 매주 쓰는 칼럼도 그렇고요. 매주 금요일마다 칼럼을 쓰는데 벌써 5년이 되었죠. 매주 칼럼을 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근 30년을 새벽에 연구실에 가서 독서를 해요. 미국에서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공부했기 때문에 잠을 3시간밖에 못 잤어요. 11시 반에 집에 들어와서 12시부터 3시까지 공부하고, 잠시 잤다가 다시 6시면 일을 나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몸에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도 3시간 이상은 못 자는 것 같아요. 몸이 그 리듬에 맞춰진 거지요.
책을 사면 저는 어떻게 읽느냐면, 컴퓨터에 워딩을 하면서 읽어요. 그렇게 하면 300여 페이지 책이 약 80페이지 정도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다른 새 책을 읽다가 지치면 워딩해 놓은 요약본을 다시 봅니다. 그때 어느 부분은 ‘사랑’에 대한 자료 파일에 넣고, 또 다른 부분은 ‘친절’이라는 파일에 넣고, 이런 식으로 작은 파일들이 주제별로 수십 개가 있답니다. 그 파일들 안에는 수백, 수천 권의 책 내용이 주제별로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칼럼이나 강의에 필요한 자료들이 30년 동안 쌓여 있는 셈이에요. 그래서 남들보다는 수월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거죠. 인문학 콘서트는 기호일보 사장님으로부터 제안을 받고 5~6년 전부터 1년에 한 번씩 열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경비는 기호일보사에서 책임지고 저는 강의만 했습니다. 저로서는 참 고마운 신문사에요. 제가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언론사가 시민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건네는 일도 중요하다면서 저에게 용기를 주셨거든요.
류: 코로나 이후로 인문학 콘서트는 어떻게 진행하고 계신가요?
최: 코로나 때문에 강연이 진행될 수 없으니까 유튜브로 녹화해서 진행하고 있어요. <최원영의 책갈피>라는 제목으로 올리고 있어요. 많은 분이 시청하고 계시진 않지만 몇 분이라도 이 방송을 통해 위로를 받으시고 희망의 문을 여는 열쇠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최원영의 책갈피] 1화 <정답 없는 길 그래도 그 길을 가보고 싶다>, 2021. 5. 26.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YwIZ6UEtefs) |
류: 인터뷰 후에 저도 꼭 구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정리하는 느낌의 질문을 드리는데요. 선생님께 십년후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요? 또 극단 바깥에서 지금의 십년후에 어떤 말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최: 지금 참 힘들 거예요. 힘들 수밖에 없어요. 환경이 아무래도 열악하니까. 그래도 이 힘든 과정에서 우리 단원들이 조금 더 버텨냈으면 좋겠어요. 예상한 대로 되지 않을 때 그다음은 두 가지 길밖에 없잖아요. 포기하든지 버티든지. 포기하면 다른 데 가서 또다시 시작해야 해요. 그럴 수 없을 만큼 연극을 하고 싶다면 답은 버티는 것밖에 없습니다. 결국 버티는 사람이 이겨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도 잘 버텨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고루한 생각일 수 있지만, 결국 어느 정도는 배고파야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이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죠. 지금까지 십년후 식구들 모두 너무나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요.
십년후는 저에게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에요. 사실 처음 시작할 때는 ‘내가 너희를 키울 거야.’ 이렇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단원들로부터 위로받고 격려받고 있더라고요. 지금 다카스라는 아카데미를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준 곳 역시 십년후에서의 경험이에요. 그러니 어머니의 자궁 같은 존재이지요.
류: 요즘 코로나 때문에 다들 힘들지만, 특히 공연계가 타격이 가장 큰 걸로 알고 있어요. 극단 십년후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요?
최: 그래도 온라인으로 공연을 몇 차례 하면서 잘 해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도 1년에 2~3편씩은 꼬박꼬박하고 있어요. 지금은 대한민국연극제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거고요. 2년 전에는 김구에 관한 뮤지컬을 만들어서 공연했고요.
십년후의 힘은 같이 밥 먹는 공동체 생활이 아닐까 싶어요. 밥숟가락에서 정이 생기잖아요. 우리는 모두 가족이 된 것 같아요. 지금 중구에 극단 사무실이 있는데, 그 건물 지하실이 수년째 비어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송용일 대표가 원래 무대 제작자예요. ‘서울무대’라고 아주 큰 무대 제작사를 운영했어요. 예컨대 <투란도트> 무대 지붕을 제작했고 유명한 영화 세트도 만들었고요. 이렇게 무대 제작에는 일가견이 있는 분이죠. 이분의 지론은 장기적으로 공연할 수 있는 소극장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극단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주인어른하고 이야기가 잘 돼서 그 지하실에 소극장을 지금 꾸미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좋은 작품을 오래 공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 저는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류: 선생님께서는 공동체 활동도 하셨고, 지금은 독자적으로 자신의 것을 꾸리고 계시잖아요. 어느 쪽이 선생님께 더 맞는 것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최: 저는 원래의 꿈이 지금 하는 이것이었죠.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것. 이렇게 전하는 것을 위한 저 나름의 실험이 극단 십년후였기 때문에 이것이 다 연장선에 있다고 봐요. 인문학 콘서트가 올해 가능하다면 하려고 3월부터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 다카스 회원들과 함께 그 안에서 <봉숭아학당> 같은 연극도 준비를 해왔어요. 이렇게 극단과 지금 제가 하는 일이 다 연관이 되는 거죠. 그래서 어느 것이 더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다 연관이 되어 하나로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이 돼요. 만약 극단 십년후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제가 강의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했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까지 이 모든 경험이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류: 삶에서 수많은 선택이 항상 맞아떨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돌이켜 보면 그것들이 연결되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그런 선생님의 실행이 축적되고 그것이 강연에 녹아든 것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료의 축적도 있지만, 그 실행에서 오는 힘이 지금의 선생님을 만든 진짜 힘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최: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변곡점이 있잖아요. 변곡점마다 선택의 길이 두 개가 나오죠. 이 선택의 길에서 딜레마에 빠지는 이유가, 이걸 얻으면 저걸 잃고 저걸 얻으면 이걸 잃기 때문이에요. 이때 무엇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하느냐. 그건 바로 ‘가치’인 거죠. 사랑이라는 가치를 기준에 두고 바라보면 포기해야 하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그 기준만 가지고 있으면 사실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게 하나하나 쌓일 때마다 주위에서는 그 사람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게 결국 사회적 신뢰라는 것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겠지요.
우리 극단에서 작곡해주신 최종혁 어르신과의 관계가 그래요. 처음엔 무릎 꿇고 겨우 도움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이렇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더라고요. “나 이제 이 집단에서 내쫓지 말어.” 이렇게 식구가 된 거죠. 우리나라에서 유명하신 분장사분은 얼마 드리지도 못하는데 그 비용을 또다시 극단에 후원금으로 보내주시곤 했어요. 이렇게 우군이 되어준 스탭이 계셔서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거죠.
그래서 변곡점마다 손해를 보더라도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지속해서 행동해나갈 때, 사회적 신뢰가 생기고, 이 신뢰가 결국 사회 전체의 진화를 이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손해 볼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요.
류: 지금 말씀에 백 프로 공감합니다. 손해를 너무 이해타산적으로만 생각하면, 자신도 성장하지 못하고 남도 깎아 먹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함께 하기 위해 때로 손해를 감수할 때, 오히려 같이 성장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최: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게 문제죠. 사실 그게 힘이 있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더 심해요. 그래서 이 나라가 이렇게 갈등구조에서 벗어나기 힘든 거죠.
류: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과 같이 크려고 해야 같이 성장하는데, 옆을 밟으면서 크려고 하면 결국 나중에는 둘 다 무너진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최: 그렇죠. 결국 자신도 덫에 걸린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류: 선생님 말씀에 정말 깊이 공감합니다. 오늘 인터뷰에서 ‘사랑하며 살겠습니다’라는 가치를 지켜온 선생님의 실행과 삶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 ‘인천’이라는 도시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한 지역의 가능성을 성장시키는 힘 역시 사람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인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최: 제가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라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조금 꺼려요. 강의할 때나 말을 꼭 해야 할 때가 아니면 입을 다물고 살아요. 그런데도 이렇게 저를 인터뷰해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분이 사랑을 나누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누리시기를 진실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