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다는 것, 곁을 만들어 간다는 것김중미, 『곁에 있다는 것』(창비, 2021)
강수환(문학평론가)
김중미, 『곁에 있다는 것』(창비, 2021) |
‘곁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언젠가 대학의 한 강의에서 ‘학벌주의’를 주제로 학생들 간의 토론을 진행한 적이 있다. 초반에는 제법 열띤 토론이 오갔다. 하지만 미리 준비한 말이 모두 소진되자 학벌주의 반대를 표방했던 학생들의 말은 점차 줄기 시작했고 토론의 무게추는 한쪽으로 급히 기울었다. 보아하니 토론의 구색을 갖추려고 형식상의 반대 의견을 준비했던 것이었다. 그 자리의 학생 다수는 수능성적을 필두로 대학을 서열화하고 그에 따라 기회나 사회적 자원을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일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험을 잘 봤으니까, 그만큼 노력한 거니까. 교육 기회의 불평등부터 채용 시의 차별 문제까지, 사안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도록 여러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은 학벌주의의 문제점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시험 이외에 ‘공정’을 담보하는 방안들에 심정적으로 공감할 수 없을 뿐이었다. 마침 그 학생들은 2016년에서 2017년까지 이어진 촛불의 현장에 청소년으로서 참여한 경험을 공유했다. 김중미의 『곁에 있다는 것』의 주인공 지우, 강, 여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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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곁에 있다는 것』은 인천 ‘은강동’에서 자란 세 명의 청소년 지우, 강, 여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은강은 작가의 전작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기도 했던 동인천과 만석 일대를 배경으로 삼는 가상의 지명으로, 그 명칭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으로부터 빌린 것이다. 두 작품 사이에는 무려 40여 년의 시차가 존재한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으나 작가는 은강이라는 지명을 통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시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충분히 받아안지 못했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은강에 관해 그리고 그 안에서의 삶과 죽음에 관해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고3이 된 지우, 강, 여울은 어려서부터 함께 지내온 ‘배꼽 친구’로 그들의 처지는 조금씩 다르다. 지우의 꿈은 소설을 쓰는 것이다. 은강방직 해고 노동자로 일생을 투쟁해 온 이모할머니와 시민운동가인 부모 곁에서 자란 지우는, 자신이 보고 들은 ‘가난의 생태계’를 틈틈이 기록했다. “가난은 낮은 데로 고여.”(226쪽)라는 지우의 말처럼 은강에는 이미 가난한 자들뿐 아니라 새로운 얼굴을 한 가난들이 날마다 흘러들었다. 독거노인, 발달장애인, 국제가정, 이주노동자, 보호 종료 아동 등등, 이들은 모두 지우의 빌라에 거주하는 이웃이기도 하다. 조명되지 않는 이들의 삶에 목소리와 서사를 부여하기 위해서, 지우는 소설을 쓴다.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강이는 쉴새 없이 일한다. 왕래조차 없는 외삼촌의 존재를 이유로 기초 생활 수급권이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치킨을 튀기지만 강이의 속은 늘 헛헛하다. 강이의 마음에는 깊게 팬 자리가 하나 있다. ‘조손 가정’이니 ‘결손 가정’이니, 어려서부터 오래도록 강이의 마음 안팎을 괴롭혀 온 결핍과 상실의 깊이만큼, 딱 그만큼의 우물이 하나 있다. 하나 도무지 메울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강이의 마음의 우물에도 변화의 조짐이 일어난다. 이는 강이가 “나보다 가난한 아이들을 돕고 싶다.”던 어머니의 “소박한 꿈”(174쪽)을 잇겠다는 꿈을 새롭게 꾸면서부터다.
여울이의 꿈은 겉보기에는 특별하지 않다. “단지 평범한 사람, 딱 중간쯤으로 사는 게 목표다.”(231쪽) 은강동을 벗어나 평범하게 살기 위해 여울이는 끊임없이 공부한다. 하지만 겨우 한 차례 전교 1등에서 2등으로 내려앉았을 뿐인데 여울이보다 주위에서 더 난리인 것을 보면 여울이가 기울이는 노력은 결코 평범하지도, 딱 중간쯤도 아니다. 도대체 평범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난은 일면 절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강이네처럼 서류를 통해 충분히 증명하지 못한 가난은 가난으로 인정조차 받을 수 없다. 하지만 가난은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모든 가난은 낮은 데로 고이므로, 자신이 바라보는 곳과 서 있는 곳 사이의 낙차만큼 우리는 가난을 느낀다. 여울이가 자신의 아파트 이름을 가난의 징표로 여기고 부끄러워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강이라는 가난의 토양만으로는 그들의 연대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강이네조차 보육원에서 자란 정민의 눈에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는 “가정집 애”(125쪽)에 불과했듯이, 가난은 오히려 서로를 상대화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지 공통의 조건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 공동의 목표를 창출하는 데에 있다. 소설의 마지막은 ‘우리의 이야기’다. 이들은 은강동 주민들의 가난한 삶을 ‘관광 자원화’하겠다는 구청의 행정을 저지하기 위해 힘을 합친다. 가난한 사람들의 터전을 허물고 파괴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생태계’를 무너뜨렸던 이들은, 이제 그들의 삶을 ‘체험’의 일부로 오락화함으로써 망가뜨리려 한다. 이러한 폭력에 맞서 자신들의 존엄과 생태계를 지켜내겠다는 공동의 의지, 그것이 서로 다른 꿈을 꾸던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여 ‘우리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도록 만든 원동력이었다.
은강 주민과의 연대를 통해 ‘쪽방 체험관’을 막아낸 이들은 소설의 끝에서, 수많은 곁이 모여 촛불을 밝히던 광화문으로 향한다. ‘곁에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은강을 지금 이곳에 호출한 김중미는 한동안 우리에게 잊혔던, 하지만 그간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던 질문을 새삼 던지고 있다. 가난이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 가난의 상대화를 넘어서, 진정으로 서로의 곁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우리는 어떻게 공동의 곁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의 질문이 웅숭깊은 것은 오랜 시간 여러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가난한 이들의 애틋한 삶의 증언들을 차곡차곡 담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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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지우, 강, 여울은 20대 중반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다시, 서두에서 언급했던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들은 아마도 특히 여울이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을 것이다. ‘공정’을 말하는 이들의 생각을 향해 어른들은 이기주의니, 경쟁주의니 하는 말로 쉽게 꾸짖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현장에도,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며 더 나은 사회를 요구했던 그곳에도 그들은 지우, 강, 여울의 모습으로 자리했다. 지금은 어떨까. 혹시 공정이 지금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말처럼 떠오른 이유는, 오히려 우리 사회가 새롭게 ‘곁’을 창안하는 것에 실패하고 있다는 방증은 아닐까. 우리가 ‘곁에 있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물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강수환(姜受芄 Kang, Soohwan)
아동문학평론가, 문화연구자. xysnp@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