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함께 읽기
만화에는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만화에는 이 시대가 생각해야 할 가치, 우리 사회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만화 함께 읽기’에서는 ‘문화예술을 소재로 한 만화’나 ‘문화 현장의 쟁점을 다룬 만화’를 소개합니다. 바쁜 일상이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 만화를 읽으며 삶의 여유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나빌레라』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
최기현(인천문화재단)
최근 웹툰의 IP 확장이 대세다. IP는 ‘Intellectual Property’의 약자로, 콘텐츠 중심의 지식재산을 뜻한다. 경쟁력 있는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게임, 드라마 등은 ‘슈퍼 IP’로 주목받으며 다양한 매체로 확장 중이다. <미생>, <이태원 클라쓰>, <스위트홈>, <경이로운 소문>, <여신강림> 등 웹툰 원작 드라마가 넷플릭스와 같은 OTT1) 플랫폼이나 TV를 통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그중 발레를 소재로 한 웹툰 『나빌레라』는 드라마, 뮤지컬로 제작되어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HUN(글), 지민(그림), 『나빌레라』 1~5권 (2017, 위즈덤하우스) | 드라마 <나빌레라>, 12부작, 2021 (출처: tvN) | 뮤지컬 <나빌레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2021 (출처: 예술의전당) |
『나빌레라』(HUN/지민, 다음웹툰)는 70세의 노인 심덕출과 23세의 발레리노 이채록이 함께 발레를 하며 겪는 성장 드라마다. 덕출은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어릴 적부터 마음 한 켠에 담아온 발레를 하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한다. 예상대로 가족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일흔이라는 나이 탓에 몸도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는다. 젊은 무용수 채록은 타고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발레리노가 되고 싶은 꿈 앞에서 방황한다. 우여곡절 끝에 채록은 덕출이 발레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덕출은 채록의 매니저가 되어 채록이 꿈을 잃지 않도록 서로 돕는다. 덕출과 채록은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서사구조를 가진 작품이 흔히 비판받는 경우는 결말이 예상되는 뻔한 이야기를 전개할 때다. 비판을 받으면서도 이러한 이야기가 작품에 많이 쓰이는 이유는 그만큼 ‘사람들에게 먹히기’ 때문이다. 『나빌레라』의 도입부를 읽으면 이야기의 결말이 충분히 예상된다. 대략 발레에 대한 열정으로 어려움을 이겨내 마침내 꿈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노인이 발레에 도전하는 모티브는 참신하지만 전개하는 서사 구조는 다른 작품과 비교해 그리 특별하지 않다. 특별하지 않은 『나빌레라』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작품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HUN(글), 지민(그림), 『나빌레라』 (출처: http://webtoon.daum.net/webtoon/view/LikeButterfly) |
그것은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한계와 관련이 있다. 덕출과 채록이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한계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물리적인 한계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한계다. 덕출은 일흔의 노인이다. 발레를 하기에 유연성도 떨어지고 체력도 부족하다. 다치면 회복도 쉽지 않다. 발레를 하고 싶다는 열정으로 담배도 끊고 운동도 꾸준히 하면서 몸을 만들지만 육체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다. 반면 채록은 젊기 때문에 유연성도 좋고 체력도 좋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경제적인 어려움은 해결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한계다. 『나빌레라』는 우리 사회의 편견을 작품 곳곳에서 재현했다. 덕출이 발레를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가족들은 극구 반대한다. ‘남자’이자 ‘노인’이 발레를 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말이다. 언뜻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정말 할 수 없을까? 쉽게 단정 지은 편견이다. 가족들은 ‘동네 사람들 보기에 부끄러우니 운동을 하고 싶으면 발레 대신 등산이나 에어로빅을 하시라’는 반응을 보인다. 덕출의 자아실현보다 사회적 체면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덕출이 발레를 배우겠다고 처음 발레단에 갔을 때 ‘노인이 발레를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을 듣는다. 발레가 격한 몸짓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노인은 발레를 할 수 없다’는 편견이 작동한다. 또 다른 장면인 김흥식 발레스쿨에서 덕출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보고 ‘장애인이 어떻게 발레를 할 수 있을까?’생각한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그 편견을 깨고 멋지게 카발리캠프(병사들의 휴식)를 보여준다. ‘마음만 먹으면 발레리노가 될 수 있지만, 경제적 여건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채록의 생각도 역시 앞의 예와 다르지 않다.
HUN(글), 지민(그림), 『나빌레라』 (출처: http://webtoon.daum.net/webtoon/view/LikeButterfly) |
『나빌레라』에는 두 개의 클리셰2)가 결합되어 있다. ‘뻔한’ 이야기, 그리고 작품에 재현된 ‘한계와 편견’이다. 결합된 두 개의 클리셰는 일종의 커다란 벽이다. 주인공들은 이 벽을 뛰어넘어야 꿈을 성취할 수 있다. ‘뻔한’ 이야기와 ‘한계와 편견’은 독자에게 아주 친숙하기 때문에 독자 자신이 현실에서 느끼는 어려움과 동일시된다. 노인의 육체적 한계, 사회적 체면, 불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등의 편견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노인들이 실제로 현실에서 느끼는 불편함이다. 덕출이 『나빌레라』에서 겪는 불편함은 독자에게 그대로 투영된다. 채록이 겪는 어려움은 청년 독자에게 이입된다. 열심히 살아도 여전히 그대로인 자신의 모습, 취업도 힘들고 결혼도 힘든 이 시대의 어려움은 채록이 느끼는 어려움과 맞닿아있다.
클리셰로 결합된 벽을 앞에 두고 주인공들은 이제 독자와 연결되었다. 주인공들이 벽을 깨는 행위는 독자가 벽을 깨는 것과 마찬가지다. 클리셰의 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한계를 극복했을 때 사이다는 그만큼 커진다. 감동도 그만큼 커진다.
‘이쇼라스’는 러시아어로 ‘한 번 더’라는 뜻이다. 러시아 무용수 미하엘이 채록을 개인지도 할 때, 채록이 포기하려는 순간마다 “이쇼라스!”를 외치며 채록을 독려한다. 『나빌레라』에서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맞닥뜨린 한계를 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연습한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실패할 때마다 이렇게 외친다. “이쇼라스!”
『나빌레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한 노인의 발레 도전기는 더 이상 익숙하고 ‘뻔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이야기다. 『나빌레라』는 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다시 한번 도전하라고 우리를 격려한다. 어떻게? “이쇼라스!”라고. 『나빌레라』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다.
참고
1) OTT(Over the top): 인터넷으로 각종 영상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가리킨다. 넷플릭스, 티빙, 왓챠 등이 있다.
2) 클리셰는 활자 인쇄의 연판(鉛版)을 가리키는 프랑스어로 고정관념 또는 진부하거나 틀에 박힌 생각 등을 가리킨다.
최기현(崔基鉉, Daniel Choi)
인천문화재단 전략기획팀 과장. 만화평론가. 문화예술과 만화에 담긴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웹툰이나 공연, 전시를 추천해주신다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DANIEL7@ifa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