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개항 이후 서양 문물과 각국 외교사절, 무역상이 모여들었던 인천 중구 개항장 일대의 신포동은 한때 서울 명동, 부산 광복동, 광주 충장로와 함께 우리나라의 4대 번화가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인천의 신포동을 경험한 사람들은 한 시대의 번영과 함께 중구 개항장 주변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역사와 문화, 그리고 바다와 인심을 두루 갖춰 누구나 한번쯤 반했던 곳입니다.
이러한 낭만이 있는 인천 신포동 일대를 돌아다니던 개인적인 취미가 사운드 바운드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2013년 5월 11일 동인천역 부근의 오디오상가 뒷골목을 시작으로 LP까페, 복합문화공간, 재즈까페, 뮤지션이 운영하는 횟집 등에서 1회 사운드바운드(Sound Bound) in 아날로그 신포(Analog Sinpo)가 개최됐습니다. 공연의 제목처럼 ‘소리(Sound)’를 ‘되튀는(Bound)’ 과정으로 동인천 일대 장소를 이동하며 콘서트를 즐기는 것입니다. 출연 뮤지션은 허클베리핀, 이장혁, 머쉬룸즈, 몽키즈, 블랙백 등과 공모를 통한 인천 지역 뮤지션이 출연했습니다. 또한 동인천 오디오 상가에서는 중고 LP/CD 셀러를 모집하여 프리마켓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오디오 상가 뒷골목에서 LP를 뒤적거리고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막걸리 한 잔 즐기면서 사운드 바운드는 소소하게 시작됐습니다.
두 번째 사운드바운드는 인천아시안게임 기간에 맞춰 신포동에서 진행되었고 기존의 공간에 ‘파란광선’, ‘라뽐므’ 등이 추가되며 길다래, 오석근, 김수환 등 지역 작가들과 협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작가들은 빈 상가를 며칠 빌려서 단 하루 공연/DJ파티를 위해 노가다와 철수 작업까지 강행하는 열정을 보여줬습니다.
세 번째 사운드바운드부터는 주제를 정해서 좀 더 집중해서 소개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3회의 주제는 ‘공간’으로 잡았는데, 역사적음악적 유서가 깊은 장소에서 공연을 통해 ‘장소의 의미’를 만들어 보자는 의도였습니다.
2009년 뮤직펍으로 시작해 200여 회의 밴드 공연이 이뤄진 <글래스톤베리>, 30여 년간 동인천을 지켜온 LP카페 <흐르는 물>, 동인천의 흥망성쇠를 같이 한 재즈 클럽 <버텀라인>, 인천시가 구도심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재조성한 복합문화예술공간 <인천아트플랫폼>, 1920년대 개항장 얼음 창고로 사용 후 방치되다 2015년 재탄생된 <빙고> 등 옛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동인천 일대의 ‘공간’에서 음악으로 가득 한 봄밤이 연출되었습니다. 음악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장소와 역사에 취하고, 함께한 사람들에 취한 아름다운 봄밤이었습니다.
네 번째 <사운드 바운드 in 부평 애스컴(ASCOM)>은 기존의 공간과 음악에 ‘이야기’를 주제로 잡아 부평의 ‘애스컴시티(ASCOM CITY)’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평 3동 내 신촌 지역은 과거 일제 강점기 육군 조병창 지대에서 광복 후 미군 부대가 들어서며 많은 사람이 몰렸고, 시민들에게 반환을 앞두고 있는 현재까지 해당 부지의 풍경도 근현대사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특히 미군 부대가 주둔하던 시절,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클럽들이 형성되며 골목 안은 밤새 미군을 상대로 하는 밴드 음악이 흘러 넘쳤습니다. 현재 클럽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의 골목은 유지된 채 그 시절의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사운드 바운드는 그 골목 안 이야기를 주제로 음악과 기쁨, 그리고 슬픔의 역사를 담아내려 했습니다. 여행 팟캐스트로 최고의 청취율을 자랑하는 ‘탁 피디의 여행수다’와 함께하여 골목 안 이야기를 팟캐스트로 담아내었으며, 음악 평론가 나도원이 들려주는 ‘인천 음악 이야기’ 란 토크 콘서트도 준비되었습니다. 또한 90년대 초중반 부평 지역에서 진행되었던 ‘지음 음악 감상회’를 부활시켜 마을의 새로운 커뮤니티 활성화를 기대하는 한편, 부평 신촌 지역의 과거 ‘애스컴 시티’를 볼 수 있는 전시관도 운영하였습니다.
<사운드 바운드 in 부평 애스컴(ASCOM)>에는 오리엔탈쇼커스, 램즈X오곤, 이지에프엠, 만쥬한봉지, 씨없는수박 김대중이 공연 팀으로 참여하였고, 70년대 컨셉의 의상과 골목 사진전 등 부평 신촌 지역의 원류를 찾기 위한 소소한 작업들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해당 부지는 대한민국 역사의 축소판이다. 친일파의 배신과 탐욕의 역사,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제국주의 병참 기지, 전쟁과 외국 군대의 주둔 그리고 시민운동까지” – 『캠프마켓』 한만송 저
이렇게 지역을 들여다보고 역사를 공부하며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곳은 단지 공연으로만 기획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프로그램들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애국지사의 땅에서 친일파의 땅으로, 일제 조병창에서 미군 기지로, 최신음악이 연주되던 기지촌에서 쇠락한 동네로 지나온 ‘부평 애스컴(ASCOM)’을 주제로 전시, 팟캐스트, 감상회 등의 프로그램에 음악과 공연을 통해 관객 분들이 조금이나마 무겁지 않게 애스컴의 이야기를 알게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부평 사운드바운드의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고 철수 중에 할머니 한 분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계셨습니다. 전시장 사진에 있는 바로 그 분이셨습니다. 몇 년 전 ‘루비살롱’을 운영했었던 기간 이상으로, 그분도 몇 십년 전 신촌에서 ‘송도홀’을 운영하였었다고 합니다. 거창하게 얘기한다면 저는 20년 가까이 잊혀졌던 우리 선배들의 꿈과 삶을 알고 더 나아가는 일을 계속 해오고 있는 셈입니다. 음악으로 잘난 척 하는것이 아닌, 음악을 매개로 함께하는 것이 중요함을 시간이 갈수록 더 느끼게 됩니다. 긴 시간 동안 이곳에 계셨던, 이곳을 지켜오셨던 그 분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 너무도 자랑스럽고 뿌듯헀습니다.
다섯 번째 사운드바운드는 ‘펜타포트 페스티벌’과 함께 ‘뮤지션’을 중심으로 구성하였습니다. 국내 최장수이자 최대 록페스티벌인 펜타포트와 함께 공연의 중심이 되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뮤지션’들을 주목하자는 의도였습니다. 인천 아트플랫폼 A동과 C동, 글래스톤베리, 버텀라인, 낙타사막에서 진행된 사운드 바운드는 국악, 재즈, 월드 뮤직, 포크, 신스팝, 사이키델릭, 메탈 그리고 DJ 파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담았습니다. 또한 10Cm, 피터팬 컴플렉스, 단편선과 선원들, 크래쉬, 잔나비, 오곤, 세움, 사비나앤드론즈, 피해의식, 줄리아드림, 써드스톤, 오대리, 영이네, ohsukkuhn 등 사운드 바운드 역대 최강 라인업을 구성하였습니다. 부평 사운드 바운드에서 음악 애호가들을 모집하여 화제가 되었던 ‘지음 음악 감상회’도 2기 멤버를 모집하며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다섯 번째 사운드바운드는 대형 무대에서 펼쳐지는 펜타포트와는 다르게 소규모 공연장에서 펜타포트 출연 아티스트들과 가까이 호흡하며 하나됨을 연출할 수 있는 뜨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요즘 사운드바운드 스태프들은 인천의 섬에 가려고 준비 중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 듣고 섬에 대한 책들을 찾아보며 준비하는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모든 곳에 이야기가 있고 노래와 공연이 있습니다. 저희가 앞으로 갈 곳이 어디든 답사와 자료 조사를 하면서 늘 좋은 곳을 알게 되고, 취하고, 즐기고 있습니다.
“조기떼의 소멸과 함께 오랜 역사를 이어온 연평도 파시도 끝났다. 조기들은 모두 어디로 떠나간 것일까.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전히 연평도 어장에는 조기군단이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세월 따라 사람은 늙어가고 파시에 대한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그 시대를 경험했던 노인들 모두 이승을 떠나고 나면 연평도의 황금시대는 흔적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 한 시대의 문화가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더 늦기 전에 파시의 기억을 채록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바다의 황금시대 파시』 , 강제윤 저
강제윤 작가의 말처럼 잊혀지는 곳들에 대해 노래와 공연으로 찾아가고, 이야기와 이미지를 남겨놓고 싶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풍경이 바뀌어 버리는 한국이라면 더욱 말이죠. 그동안 사운드바운드라는 공연 기획물로 소개해온 공간들과 부평 애스컴의 이야기들, 앞으로 소개될 섬의 풍경들 외에도 새로운 곳을 찾고 있습니다.
최근 이곳저곳에서 인천 음악도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운드바운드를 진행하면서 제가 본 인천은 음악과 관련된 화려한 과거만 있었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났고, 힘들고 부끄러웠지만 때로 즐거웠던 순간들은 희미해졌습니다. 그럴싸한 공간이라도 하나 남겨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남은 건 사진 몇 장뿐입니다. 번화가는 쇠퇴하고 불이 꺼진 지금은 아무런 생산성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크게 변하지 않은 그곳을 지나온 우리들이 이제 그곳의 과거와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한집 걸러 비어있는 낡고 오래된 구도심의 건물들, 희망보다는 억울한 사연들이 오가는 항구, 먹고살기 위해 계속되는 질긴 삶의 분쟁. 제가 태어나고 살아온 인천의 인상이었습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부평에서 클럽을 운영하다가 결국 문 닫고 동네를 욕하며 서울로 갔던 저는 요즘 사운드바운드를 진행하면서 꽤 즐겁습니다. 그렇게 척박하고 원망스럽던 인천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풍경들이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지금 우리 동네와 사람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한, 그곳이 옆 동네보다 가치 있는 곳이 될 수는 없을 겁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몰랐던 후배들도 동의하고 의미 있게 함께할 수 있는 장이 우리 인천에 꼭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앞으로도 사운드바운드가 가는 곳에 많은 관심과 제보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즐겁게 만들어나가겠습니다. 인천의 곳곳에서 사운드바운드와 함께 음악과 역사와 장소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꿈꿔봅니다.
글 / 이규영(루비레코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