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8년 4월 27일은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이 문을 연 지 100일째 되는 날입니다. 매년 세계 여러 나라의 공항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천국제공항은 지난 3월 한 달 동안 3만 편이 넘는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매우 중요한 공항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인천국제공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제2여객터미널이 개항하고, 몇 차례 방문하며 드는 생각은 ‘공간이 무척 친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외형은 기존의 제 1 여객터미널과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공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할 내부 공간 구성은 제1터미널과 매우 유사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지하층으로 연결된 지하철, 1층의 입국장, 3층의 출국장, 그 사이를 분리해주는 2층의 사무실들, 그리고 4층의 식당 배치는 제1여객터미널이나 제2터미널 모두 공통으로 일치합니다. 출입국심사대를 중심으로 반드시 나누어져야 하는 일반 구역과 면세 구역의 구성은 당연합니다만, 이렇게 층별 구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나니, 제2여객터미널에 처음 찾아오더라도 그 동안 제1여객터미널을 이용해 왔다면 전혀 어렵지 않게 공항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출국장에 배치 된 항공사 부스의 형태와 색깔도 유사하고, 커다란 알파벳 사인의 색깔까지도 같습니다. 올려다보이는 지붕의 형태는 다르지만, 4층을 작게 만들어 출국장을 두 개 층 높이로 탁 트여 놓은 것도, 각 층을 이동하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여객터미널의 중앙과 바깥쪽 통유리벽 따라서 배열한 것도 같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문제가 있지 않다면, 제 2여객터미널에 도착해서 비행기에 탑승하기까지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익숙하게 여객터미널을 이용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자동 발권기계와, 셀프 수하물 위탁 카운터가 늘어난 오늘의 공항에서는, 마음만 먹는다면, 비행기에 탑승할 때까지 단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출국하기 위해서는 티켓, 여권과 탑승 검사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 가방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인천국제공항 제 1여객터미널(좌)와 제 2여객터미널(우).
공간 구성, 사인물 등 제 1 여객터미널과 유사점이 많은 제 2여객터미널이 낯설지 않습니다.
(출처: 박준철기자의 에어포트 통신 ‘날다, 떠나다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오늘 제가 공항에 대해서 독자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 점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지만, 서로 대화와 교류가 없어도 되는 그런 장소 이야기입니다.
지난여름,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도시” 1편과 3편에서, 우리는 어떤 장소가 더 많은 의미가 있게 되고, 더 중요해지고, 더 많은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장소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랫동안 축적해 온 기억과 역사를 느낄 수 있고, 사람들이 상호 작용하는 “정통성”의 장소들의 필요성을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장소는 사람들의 공통된 기억, 장소 안에서 맺어지는 사람들 간의 관계, 장소의 정체성이 없어도 무방한 곳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공항은 이런 장소 중에서 대표적인 곳입니다. 공항은 모두 다른 디자인을 가진 듯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처음 찾아온 외국인도 이해하기 쉽게 다른 나라의 공항과 비슷합니다. 오늘 문을 연 공항이라 하더라도, 공항을 이용하는 데 있어 불편하지 않거나, 감성적으로 아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단 한마디 대화 없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é)는 이렇게 역사성도, 사람끼리의 관계도, 정체성도 없는 장소를 ‘비-장소(non-place)’라고 부르길 제안했습니다. 이곳에서 필요한 것은 사람들 간의 대화와 행위의 교류가 아니라 공적으로 증명된 매개체입니다. 그래서 오제는 비-장소에서 개인은 타인과 같은 공간 있으면서도 고립을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공항으로 예를 들자면,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 대신 커다랗게 설치된 사인물과 전광판을 이용하고,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여권을 보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이런 수준의 교류는 각 여행자와 공항 당국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여행객들 사이에선 어떠한 수준의 교류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곳은 온전히 ‘장소’이며, 어떤 곳은 완벽히 ‘비-장소’라고 규정짓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분명, ‘비- 장소’의 성격을 짙게 띠는 장소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마르쿠스 오제는 비-장소의 예로 고속도로, 쇼핑몰, 테마파크 등을 듭니다. 오직 도로 표지판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운전자들이 모이는 고속도로, 각자 쇼핑에 전념하다가 신용카드만 제시하면 되는 쇼핑몰, 같은 방식으로 자유 이용권을 하나 들고 모든 이용객이 각자의 놀이기구를 찾는 테마파크 같은 곳들은 사람들에게 공통된 기억이나 정체성을 주기 힘든, 비-장소입니다.
1990년대 초, 오제가 처음 비-장소의 개념을 제시할 때, 비-장소가 생겨난 이유가초근대성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교통과 통신은 극도로 발달해서 세계를 ‘좁히고’, 사람들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기 보다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대면으로 소통하기보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통해 만나고, 물물교환이나 현금보다는 신용카드와 전자결제가 더 익숙해지는 극도로 근대화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장소는 오랫동안 여러 사람이 교류하고, 공통된 기억을 만들고, 장소의 정체성이 생겨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삶의 필요에 따라 지속적으로 장소를 옮겨 다니고,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며 도시를 떠다닙니다. 근대 이전에 사람들이 거대한 흐름으로 같이 움직였다면 , 오늘의 현대인은 마치 꽃가루처럼 각자의 경로를 찾아 옮겨갑니다. 오제는 비-장소에서개인을 ‘고립’된다고 표현하지만, 어쩌면 관계로부터 독립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몇 년 전부터 편의점 계산대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법 합니다. 어떤 사람은 편의점에서 물건을 구매하며 점원과 이야기를 나누기를 꺼립니다. 밤늦은 시간에 아르바이트생은 술에 취한 손님과의 대화가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몇 년 전부터 편의점 계산대가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1 상품입니다” 또는 “증정품을 받아가세요” 같은. 그리고 이제는 RFID 기술과 인공지능의 발달로 무인 편의점이 등장했고,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편의점은 작은 예의 하나일 뿐, 많은 소비공간에서, 아니 많은 도시 공간에서 우리는 이러한 고립을 경험합니다. 점점 더 많은 공간이 ‘비-장소’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띠는 것이지요.
최근 도시에서 사람들이 정체성 짙은 장소를 찾는 것, 오래된 공간들이 주목받고, 이를 반영한 예스러운 인테리어 디자인이 유행하는 것, 젠트리피케이션을 걱정하며 어떤 장소들이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대부분 장소가, 심지어는 가장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정체성이 명확할 것 같은 ‘마을’과 ‘집’ 마저도 ‘비-장소’의 성격이 점점 짙어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여 정보를 공유하고, 유대를 쌓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구였을지 모를 수십 년 전의 사람들과 같은 장소 안에 머물며 목소리와 눈빛을 나누는 경험을 아쉬워하는 것이 오늘의 도시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글, 사진제공/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마르크 오제 (이상길·이윤영 역), 2017, 비장소, 아카넷
전상인, 2014, 편의점 사회학, 민음사
정헌목, 2013, 전통적인 장소의 변화와 “비장소(non-place)”의 등장, 비교문화연구 19(1)
정혜진, 2015, 비-장소적 시각에서 본 공항건축의 특성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계획계 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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