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집 앞에 나타나는 곱슬머리에 가늘고 쭉 찢어진 눈을 가진 꽃남방을 입은 남자는 빨간 벽돌 건물에서 걸어 나와 나를 향해 서슬 퍼런 미소를 보내고 사라지곤 한다. 이 동네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그 남자는 봄이 시작될 무렵부터 매일 오후 4시경이면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중이다. 어떤 날은 자기 몸보다 커 보이는 헝겊 뭉텅이를 이고 가고, 또 어떤 날은 허름해 보이는 여행가방을 질질 끌고 걸어가기도 한다. 회사원은 아닌 거 같고 근처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나쁜 사람은 아닐까?
나는 그 사람이 궁금했다. 저녁 준비를 위해 집 앞 평상에서 고구마순을 다듬다가 옆집 새댁과 또 나타난 ‘그 자’를 바라보며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도 비슷한 시간에 어김없이 나타난 그 남자, 그런데 오늘은 평소 가던 방향과 다르게 우리를 향해 순식간에 성큼 성큼 다가오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하얀 치아가 다 보이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노오란 종이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 “오픈 스튜디오에 놀러 오세요.” 나는 남자의 순박한 말투에 나도 모르게 경계심을 풀고 물었다. “뭐 하시는 분이세요?” 남자가 대답했다. “저, 저요? 저는 인천아트플랫폼에 살고 있는 미술작가인데요?” 남자는 빨간 벽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한 번 허연 이를 모두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오픈스튜디오는 창작공간, 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등(이하 레지던시) 내에 작가들이 머무는 스튜디오 모두를 개방하는 행사를 말한다. 레지던시는 일정 기간 동안 작가에게 작업공간과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예술 진흥 기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국공립 레지던시들이 생겼는데 인천아트플랫폼은 경기창작센터 등과 함께 2009년도에 개관했고 현재 전국에 공,사립 레지던시는 100여개가 넘는다. 일반적으로 레지던시는 입주하는 예술가들에게 창작에 필요한 공간과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인천아트플랫폼은 1888년에 만들어진 (전)일본우선주식회사와 1940년대에 만들어진 대한통운창고건물 등을 증개축한 전시장, 공연장, 스튜디오, 교육 공간 등을 입주 작가에게 제공하고 다양한 창작지원 프로그램을 입주작가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 있다. 공간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은 스튜디오인데 스튜디오는 쉽게 말해 작가가 먹고 자며 작업(그림 그리기, 조각하기, 작곡하기, 책 읽기, 글쓰기 등)을 하는 공간이다. 레지던시의 주요한 프로그램으로는 전시, 공연, 시민 문화예술교육, 입주 작가 지원 프로그램(이론가 매칭, 살롱, 리서치 투어 등), 오픈스튜디오 등이 있다.
오픈스튜디오는 작업 공간을 일정 기간(인천아트플랫폼은 1년에 3일) 동안 개방하는데, 이는 단순히 개인 작가의 작업 공간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에 7회를 맞는 오픈스튜디오 기간(9월 23일(금)~25일(일))에 개방되는 작가의 작업실은 방 하나 하나가 대부분 완결된 형태의 전시 공간이나 체험 공간으로 바뀐다. 오프닝 파티는 물론, 스튜디오 밖에서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레지던시 공간의 여러 개의 프로그램 중 오픈스튜디오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작가와 작품이 타인과 가장 밀접하게 만나고 소통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때 작가는 오픈스튜디오를 준비하면서 많은 긴장(스트레스)과 설레임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홀로 작업하는 것이 익숙한 작가에게 오픈스튜디오 기간 동안 자신의 작업실을 찾는 비평가, 큐레이터, 연출가, 안무가, 컬렉터, 관(람)객 등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과 1:1로 마주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쉽지 않은 일이다. 전시와 공연 등을 준비하는 것과 전혀 다른 성격의 일이기도 하다. 단순히 작업실을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많은 준비(마음의 준비 포함)를 한 결과물이 오픈스튜디오인 셈이다.|
평소 문화나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주 접하기 힘든 이 기회를 놓치지 말지어다! 특히 미술, 음악, 무용, 연극… 더 세분화하여 나열한다면 추상미술, 개념미술, 동양화, 서양화, 클래식, 재즈, 국악, 프리뮤직, 미디어아트, 사운드 아트, 현대무용, 퍼포먼스, 피지컬댄스 까지 무궁무진하다. 말만 들어도 예술이 불편하거나 어려운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때를 활용하길 권한다. 방문이 활짝 열린 작가의 스튜디오 하나 하나가 어렵기만 했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은 쉬운 답을 찾아 줄 것이다.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까? 특히 앞서 언급한 예술이 익숙하지 않은 분이거나 예술에 관한 독해능력을 키우고 싶은 분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법을 따라가 보자.
첫째, 평소 관심 있던 장르의 예술가를 찾는다.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에 다니며 그림 그리기나 악기 연주에 한번쯤 심취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창시절 열심히 활동했던 미술동아리, 연극동아리, 노래 동아리, 책읽기 동아리 등에서 단서를 찾아도 좋을 것이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정말 다양한 예술 장르의 작가들이 살고 있다. 석회(회벽)에 스크래치를 내서 그림을 그리는 김유정 작가, 보는 사람까지도 불안하게 만드는 불안한 드로잉을 하는 윤대희 작가, 연극이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연극집단 앤드씨어터, 클래식인지 재즈인지 국악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음악을 만들어 내는 김성배 작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섬은 발로 디뎌본 섬 전문가 강제윤 작가 등 누굴 만나도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테니, 만나는 재미가 쏠쏠할 테다.
둘째,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기면 부담 없이 묻는다. 학교에서 1+1은 왜 2인가요? 라는 식의 당연한 질문은 하기도 힘들고 받아도 힘들다. 하지만 오픈스튜디오에 왔다면 그 당연한 질문을 쉽게 던져 봐도 괜찮다. ‘미술이 무언가요? 연극은 무언가요? 무엇으로 그리셨어요? 왜 그리시나요? 왜 만드나요? 조각은 무엇인가요? 추상은 뭔가요? 그림은 어떻게 하면 잘 그리나요? 사진은 어떻게 하면 잘 찍나요? 예술가는 누군가요?’ 등등 평소 가졌던 예술에 대한 다양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이 불편해 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인천아트플랫폼에는 예술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근본적 물음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는 많은 작가들이 있다. ‘나는 미술이 될 꺼야!’라고 외치며 미술이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말하는 최선작가, 조금만 관심 있게 살펴보면 작품 자체가 근현대미술사인 위영일 옹, 동양화적인 붓터치와 서양화의 재료를 모두 읽어 볼 수 있는 작업을 하는 김춘재 작가, 나와 너의 몸을 여러 예술적 언어로 탐구하는 고등어 작가와 김푸르나 작가 등 예의를 갖추고 진짜 궁금해서 묻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불편해할 작가는 없을 것이다. 작가에게 대중의 호기심과 관심은 작업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큰 원동력이기도 하다.
셋째, 이것도 저것도 복잡하다면 방 번호대로 이동해 보자. 사실 스튜디오의 E-1, E-2 와 같은 방 번호는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지진 않는다. 하지만 1번 방부터 가장 끝방까지 게임의 미션을 수행하듯 움직여보는 것은 가장 쉽고 빠르게 오픈스튜디오를 즐길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혹시 또 모른다. 모든 미션을 완료한 마지막 방에서 뜻하지 않는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자, 이제 23일(금)부터 활짝 열릴 인천아트플랫폼 구석구석을 돌아볼 일만 남았다.
양종남 / 인천아트플랫폼 운영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