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인형 P의 노래를 따라가는 여정, 작가 서영주

 

종이인형 P의 노래를 따라가는 여정, 작가 서영주

씨앗이 떨어져 자기 자리를 찾아 땅에 뿌리를 내리기까지의 여정은 일종의 다시 태어남의 ‘방황기’이다. 종이인형이 한동네를 배회하고 있다. 종이인형이 배회하는 의미를 모르는 보는 이들은 그 이유를 찾아 자연스레 인형의 뒤를 따른다. 어느 장소에 도착하면 인형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춤을 추고 그 춤이 끝나면 인형을 연기한 배우가 관객들에게 티타임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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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아트플랫폼 단기 입주 작가 서영주는 거리극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약한 종이인형으로 표현한다. 연기는 물론 노래까지 하며 진행되는 그녀의 거리극은 보는 사람들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녀는 글을 쓰는 사람도 노래를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녀는 배우이다. 하지만 그녀의 퍼포먼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배우의 이미지와는 멀다.
배우가 왜?
어째서 배우가 종이인형을 만들고 노래하며 연출까지 하게 됐을까?
어째서 배우가 거리로 나와 사람들과 춤추고 이야기하는 걸까?
프로젝트의 탄생 배경부터 메시지까지 서영주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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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본인과 프로젝트 소개를 부탁한다.
저는 한 사람의 배우. An actor, 행동하는 자이다. 그리고 배우를 대변하는 인형 P를 만들고 이 P를 움직이는 자이기도 하다. 종이로 만든 이 인형 P는 가장 흔하고 찢어지고 구겨지기 쉬운 약한 소재로 만들어져, 내 안의 가장 조용하고 내밀한, 다뤄지지 않은, 어쩌면 가장 나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P의 행동은 나를 움직이게 한다.
<페이퍼맨의 추락>이라는 제목으로 2012년부터 이어져온 이 작품은 그림자극 영상과 인형을 활용하여 ‘추락’에 관한 의미를 무대 위에서 움직임으로 표현해 낸 이미지 극으로 출발했다. 가장 약한 소재인 종이로 인형을 만들어 배우를 대변하여 움직이고, 이를 통해 ‘삶의 과정은 모두 낙화의 반복이다. 막다른 길, 한계 지점에서 뛰어내려야만 다시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였다. 개인의 추락을 대변하는 인형의 추락 이후, 씨앗이 뿌리를 내려 새싹을 틔우는 단계에서 함께하는 춤사위는 우리 삶 곳곳에서 함께 부딪쳐온 한계와 절망의 벽으로부터 새롭게 상생하는 극복의 의지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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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배경과 얻고자하는 결과는 무엇인가?
일상 중에 마주한 추락, 벼랑 끝. 늘 되돌아오는 한계 지점에서의 관찰이 이 작업의 시작 지점이 되었다. 피하고 싶은,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그 지점이 내가 있어야 할 나의 자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때부터 추락 = 비상 = 만개(滿開)라는 것이 보였다.
“낡은 모두가 추락하고, 새롭게 모두가 피어나는 춤사위”라는 점에서 종이 인형 P는 나 자신이고, 노래하는 자다. 현재 이 P.Play 프로젝트로 P(나)는 내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와 걷고 움직이고 노래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차를 마시고 교감하고 춤을 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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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3. 본인이 기대하는 관객들의 반응이 있는지?
대중적이지는 않으나 호환 가능한 이미지로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인형 P와 배우가 나열하는 움직임을 바라보며 각자 포착되는 이미지들을 통해 개개인의 다뤄지지 않은 이야기 혹은 각자의 내면에 해당하는 P와 만나고 하나가 되는 지점을 마치 땅 속에서 만나는 듯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공명하였으면 한다. 만일 퍼포먼스 중 전체의 호흡을 함께하지 못하고, 부분만 보게 된다면, 지향점인 목적이 관객에게 호환되지 못하여 발생되는 오류는 클 것이다. 그리고 시각적으로 기이하거나 새롭기만 한 자극만 얻어 간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 물어보고 싶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는 관객과의 대화를 유도하는 창을 열어놓게 구성하였다. 그것이 만개(滿開) 춤사위 이후 티타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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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4. 인천아트플랫폼 단기작가로 입주해 있는데 지원 당시와 지금의 프로젝트 진행에 생각의 차이가 있는지?
차이라기보다는 발전도와 진행 과정을 말할 수 있겠다. 3월부터 9월 초까지 이미 프로젝트를 한차례 진행한 후 인천에 입주했다. <Pappet Play> 지역주민과의 워크숍, 이를 통한 쇼케이스 <다뤄지지 않은 몸짓> <바다 해프닝>과 Sseo와 P의 버스킹 등을 진행해 왔다. 인천에서는 벌써 한 달이 지났기 때문에 남은 시간이 적다. 프로젝트의 모든 것을 할 수 없기에 한차례 진행하고 올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현재 이곳에서는 <Pappet Play: 피플레이>에 더 집중할 단계라고 본다.

Q5. 마지막으로 인천문화통신 3.0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낯선 몸짓과 소리들이 다가갈 때, 있는 그대로 그저 바라보시면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찰나가 눈이 부셔 놀란다면 고이 간직하시길…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가슴속 방문을 두드린다면 살며시 열어보시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반응하다가 한자리에서 함께 움직여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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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인형과 함께하는 서영주 작가의 프로젝트는 작가의 아트플랫폼 입주 기간 동안 인천아트플랫폼, 차이나타운, 신포 문화의 거리, 동인천역 등 유동인구가 많은 거리에서 시민들과 “추락”의 극복과정을 공명할 계획이다. 서영주 작가의 거리극은 오는 11월 한 달 동안 진행되며 그 결과는 인천아트플랫폼 C동 공연장에서 만날 수 있다.




시네마천국이었던 동인천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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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궁금했다. 학창시절 수많은 영화를 봤던 애관극장,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인 애관에 대한 다큐 영상이 왜 한 편도 없을까. (애관은 1895년 협률사로 출발해 1911년 축항사, 1924년 애관으로 개칭된 121년 된 극장이다.) 인천영상위에 계신 아는 분께 연락을 드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나처럼 애관에 관심을 갖고 촬영하려고 했던 감독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런데 왜 영상물이 없을까?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애관 측에서 촬영 허락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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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즉시 애관극장에 전화를 했다. 처음에는 전화통화도 안 되었고 소개서를 들고 찾아도 갔지만 만나주지도 않았다. 거의 포기할 뻔 했지만, 인천에 내려갈 때마다 한 번씩 찾아갔다. (아버님이 신흥동에 사신다.) 6개월쯤 찾아갔을 때 극장 운영을 맡고 계신 이사님께서 내 정성이 갸륵(?)했는지 촬영 허락을 해주셨다. 그날은 정말이지 뛸 듯이 기뻤다. 이미 영화의 반은 완성한 느낌이었다. 그 후 어느덧 1년 가까이 촬영을 하고 있다.

“분명 한때 인천의 최고 스타플레이어였던 극장들은 은퇴경기도 제대로 치르지도 못하고 무대 뒤로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굿모닝인천 유동현 편집장님의 말씀 중 몇 단어를 바꾼 말이다. 인천의 중심지였던 동인천 지역에는 애관을 비롯해 미림극장, 키네마, 동방극장, 인영극장, 인천극장, 문화극장, 인형극장, 오성극장, 현대극장, 자유극장, 장안극장, 도원극장, 시민관, 세계극장, 용사회관, 동인천극장, 항도극장, 아카데미 등등 한때 19개의 극장이 있었다. 당시 인천의 인구 수를 생각한다면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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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익동에서 태어났고 서울로 이사 가기 전까지 송현동에서 오래 살았다. 가장 많이 간 극장은 현대극장이었다. 동시개봉관이라 두 편을 싼 값에 볼 수 있었다. 영화 포스터 붙이는 아저씨를 기다리면 재수 좋게 할인권을 얻을 수도 있었다. 내가 다닌 광성고 밑에는 자유극장이 있었고, 이곳 역시 삼류 동시개봉관이었는데 항상 성인물 한 편과 다른 영화 한 편을 틀었다. 이름 그대로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한 극장이었다. 오성극장은 특이하게도 양키시장 위에 세워진 극장이었다. 2층 계단으로 올라가면 조그만 분수대 같은 게 있었고 사람 말을 따라하는 구관조가 인상적이었다. 자료를 찾다가 인천시청 기록관에서 오성극장 내부 사진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지금 오성극장은 텅 비어있고 재난위험시설 D등급을 받고 언제 헐릴지 모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인형극장은 나중에 UIP직배 영화관이 되었는데 영화인들이 UIP 직배에 반대하여 서울 직배극장에 뱀을 풀어놓았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애관은 당시 최고의 극장이었다. 1980년대에 인천 최초의 70mm 영사기와 THX 음향시스템을 갖춘 극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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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 007 시리즈, ‘터미네이터’ 등등 영화를 보고나면 친구들과 한참동안 영화에 대해 수다를 떨곤 했다. 동인천 지역 극장들은 내게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분명 시네마천국이었다. 그때 본 영화들이 나를 감독의 길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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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 뵈었다. 최불암 선생님 선친인 최철은 인천 최초의 영화제작자로서 ‘수우(愁雨)’ (1948년작. 감독 안종화. 주연 김소영, 전택이)를 인천에서 제작하셨는데 ‘수우’ 시사회를 앞두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8살 최불암은 최철의 영정사진을 들고 가족과 함께 동방극장 시사회에 참석했다. 그 후 최불암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는 동방극장 지하에서 ‘등대’라는 음악다방을 운영하셨다. 이 모든 이야기를 최불암 선생님 인터뷰를 하면서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미림극장에서 폐관 때까지 35년간 영사기사를 하신 조점용 선생님, 인천에서 촬영한 ‘사랑’ (1957년작. 감독 이강천. 주연 김진규, 허장강)의 촬영조수였던 정의배 선생님, 39년간 극장 간판을 그린 김정길 선생님 등을 만나면서 그분들의 말씀을 소중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 분을 만나면 그분이 다른 분을 소개해 주셔서 나도 미처 알지 못했던 경험을 이어가고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극장은 단지 외형적인 건축물이 아니라 결국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06다큐 작업은 끝을 모른 채 출항하는 위태로운 항해와도 같지만 오히려 이런 점이 내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앞으로 1년 후면 영화를 완성하여 출연했던 모든 분들을 모시고 애관극장에서 시사회를 갖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윤기형 / CF 및 다큐 감독




동네 아이들의 아지트, 동네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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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좋은 일요일, 꾸물꾸물 문화학교 내부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작업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아이들을 위한 아지트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동네 언니들로 이제 막 새롭게 한 걸음 내딛기 시작한 신생 문화예술 동아리이다. 뭐든 함께 만들어나가려고 한다는 신생 동아리, 동네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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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언니들의 시작과 현재

동네언니들은 꾸물꾸물 문화학교를 이끄는 윤종필 교장 선생님의 고민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활동하다 보니 세대차를 겪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나연 씨를 비롯한 꾸물꾸물 문화학교의 청년층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 생겨난 것이 바로 ‘동네언니들’이다. 중학생 때부터 꾸물꾸물 문화학교에 나온 나연 씨를 비롯한 청년층의 주도로 조금 더 젊은 시선으로 청소년과 소통하며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에서 ‘동네언니들’이 탄생했다. 바쁘게 한 주를 보낸 사람들에게 일요일은 황금 같은 휴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일요일마다 모인다. 바로 청소년 친구들 때문이다. 중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학업으로 바쁜 일주일을 보내는 아이들이 주중에 시간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그렇게 치열하게 일주일을 보낸 아이들에게 잠시라도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아지트와 같은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일요일에 모이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인터뷰 당일에도 고등학생 친구들이 나와 동네언니들의 프로젝트를 돕고 있었다.

03가치(같이)테트리스, 동네언니들의 첫 프로젝트
가치프로젝트는 동네언니들 동아리가 꾸물꾸물 학교 내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로 2m의 철골 구조물의 큐브를 자유롭게 재창조하는 작업이다. 동네언니들은 ‘가치테트리스’라는 이름으로 직접 철골 구조물을 꾸미고 이를 채울 수 있는 대형의 테트리스 블록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같이 하며 함께하는 가치를 만들어내자는 이 프로젝트는 준비단계에만 2~3주가 소요되고 기한에 맞춰 3일 만에 제작해야 하는 굉장히 힘든 작업이었다, 그러나 합심해서 하다 보니 사이도 더욱 돈독해지고 제법 그럴싸한 결과물이 나오게 됐다. 이 기간에 꾸물꾸물 문화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커플의 결혼식도 있었다고 한다. 결혼식에 모두 함께 참석하고 다시 돌아와서 정신없이 작업했던 때를 이야기하며 동네언니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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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일상을 되돌아보다, 일상재발견
최근에 동네언니들은 일상재발견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는 기획 단계부터 자체적으로 시작한 첫 프로젝트로 사진을 찍으면서 가까운 일상의 가치를 되돌아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어려워하며 숙제처럼 의무로 사진을 찍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침대 밑의 물건들, 내 주변의 빨간 물건과 같이 사소한 일상을 담다 보니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게 되었고, 사진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동네언니들은 아이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고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자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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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을 넘어 인생을 나누다.
동네언니들은 꾸물꾸물 문화학교 내에서 문화예술교육 외에도 청소년과 다양한 소통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언니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진로를 정하고 대학에 진학한 청소년 친구도 있다고 한다. 이 친구는 현재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면서 동네언니들의 행사나 일정이 있을 때, 사진을 찍어주며 함께 하고 있다. 이외에도 성악을 전공한 동네언니들의 성지 씨 역시 서양화로 전공을 바꿔 가보지 않은 길의 기반을 다져나가고 있다. 동네언니들은 꾸물꾸물 문화학교에서 자신들이 배우고 영향받은 것처럼, 청소년에게도 다양한 문화예술교육 콘텐츠와 함께 자신이 겪은 경험을 나눠서 청소년들이 넓은 시야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한다.

동네언니들, 자신들의 변화
동네언니들 구성원의 대부분은 청소년 시기 꾸물꾸물 문화학교에서 문화예술 교육을 들었던 경험이 있다. 어른이 된 이들은 다시 모여 문화예술기획자로, 멘토로 성장했다. 나연 씨는 동네언니들 활동을 시작하면서 단순히 수업을 듣던 참여자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활동을 하게 되니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전과는 달리 실무부터 결정까지 책임져야하다보니 고민도 많고 의무감과 책임감이 든다는 것이다. 정후 씨는 개인 작업을 주로 하는데, 좀더 열린 시각을 갖게 됐고, 은진 씨는 음악교육이라는 전공을 살려 도움을 주고 있으면서 자신 역시 동네언니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일주일에 2~3번 회의를 위해 모이면서 생활의 중심이 동네언니들로 바뀐 것 같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동네언니들은 올해를 시작으로 발판을 다지고 있다. 운동회부터 성교육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할 예정이며, 이후에는 문화예술교육 역량 강화를 통해 더 다양한 문화예술교육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가능하다면 중장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다. 또한 수치만으로 책정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만들어가는 과정을 쌓아가며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들에게 동네언니들이란?
동네언니들은 그들에게 의미가 크다. 성지 씨에겐 입시 스트레스를 푸는 동시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사회생활이고, 은진 씨에게는 다른 분야의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넓힐 수 있는 기회라고 한다. 미술을 전공하는 정후 씨는 동네언니들을 작업의 일환처럼 느끼면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생활의 중심 같다고 했다. 나연 씨에게 동네언니들은 기획자로서 의무감과 책임감이 막중한 성장통과 같다. 이전까진 화려한 연꽃만 봐왔다면 동네언니들의 활동이야말로 그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 같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누군가가 나의 멘토가 되어주거나 새로운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상대가 되어준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동네언니들은 자신들도 겪은 학창시절의 고단함을 덜어주고 쉬어갈 수 있는 아지트를 만드는 한편, 청소년들에게 세상을 더 넓게 보며 문화예술을 조금 더 친숙하게 받아들일 기회를 주고자 자신의 시간을 기쁘게 활용하고 있었다. 동네언니들이 어느새 생활의 중심이 되어버렸다고 웃으며 말하는 그들이 앞으로 인천을 중심으로 더 많은 청소년과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큰 그림을 그려가며 함께 성장해나가기를 응원한다.

글 / 시민기자 오지현




문화정책동향

<300만 인천>

인천주권시대, 애인(愛仁)토론회 통해 시민大토론 
인천시의 신규 프로젝트와 주요 사업 추진에 『애인(愛仁)』명칭이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300만 인천시대, 애인 페스티벌과 함께해요
인천시에서는 인구 300만 시대를 앞두고 시민의 힘을 하나로 모아 꿈과 희망을 주며, 인천의 가치를 재창조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인천을 대표하며 상징할 수 있는 ‘제1회 애인(愛仁)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기존에 열던 행사 몽땅 묶어 ‘愛仁’ … 잡탕에 파묻힌 인천의 가치
애인(愛仁) 페스티벌이 ‘오합지졸 축제’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천시와 10개 군․구가 기존에 하던 축제를 일정한 기준이나 원칙 없이 임의적으로 묶다 보니 100여 개에 이르는 행사를 아우르는 연결고리가 없어서다.

‘3백만 도시 인천’ 타이틀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들  
인천시가 이번 년도 안으로 인구 3백만 도시를 공식화할 것으로 보인다. 5천여 명 정도 유입이 되면 이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인데, 보는 이에따라 시각차도 있는 분위기다. 

300만 인천, 맛집에 사람 꾀듯이
인천시가 최근 ‘브랜드 담당관실’ 조직을 신설하면서 행정에 상업 마인드를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브랜드(brand)’는 한마디로 말하면 ‘상표(商標)’다. 인천시가 이 조직을 만든 이유는 인천만의 독특함이 묻어나는 브랜드를 새로 만들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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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개항창조도시 재생사업>

인천 도시재생사업 민간 전문가가 코디한다. 
「인천 개항창조도시 재생사업」은 작년 12월에 국토교통부로부터 경제기반형 도시재생 일반지역으로 선정됐다. 중구 월미도, 내항, 개항장 일대와 동구 배다리지역에 산재된 해양․지역자산을 창조적으로 재생해서 해양․문화․관광 융합의 창조경제모델도시로 조성하는 사업이다.

개항창조도시 재생사업, ‘개발만능’으로 빠지나

인천내항에 ‘해상관광호텔’ 들어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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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문화예술현장>

인천지역 공연예술단체, 뭘 먹고 사나? 1. 인천지역 공연예술단체들의 현주소(상) 
예술가와 예술현장 종사자들이 예술 활동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예술이 생산되고 소통되는 현장의 당당한 주인으로 설 수 있게 하는 것이 과제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인천지역 예술현장의 현주소를 진단하는 동시에 타 지역의 예술경영 사례들을 살펴봄으로써, 인천지역 공연예술단체들의 자생력을 확보하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인천지역 공연예술단체, 뭘 먹고 사나? 2. 인천지역 공연예술단체들의 현주소(중) 
  
인천지역 공연예술단체, 뭘 먹고 사나? 3. 인천지역 공연예술단체들의 현주소(하)
  
선택과 집중, 지속성 담보한 지원정책 필요 
 
인천시의회, 예술인 복지증진 조례 발의 
인천시의회 황흥구 문화복지위원장이 지역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활성화하고 문화예술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인 복지증진 조례를 발의했다. 이 조례는 시장이 3년마다 기본방향 및 목표, 사업의 실행계획을 포함한 예술인복지증진계획을 수립토록 의무화했다.

무용단․극단 예술감독 장기공석 파행 
인천시는 교향악단․합창단․무용단․극단 등 4개 시립예술단을 운영하고 있는데, 4곳 가운데 절반인 무용단과 극단 등 2곳의 예술감독이 공석이다. 무용단과 극단의 전 예술감독은 모두 지난해 12월 31일 자로 임기가 종료됐다. 규정에는 1년을 추가로 연장할 수 있지만, 두 예술감독 모두 연장 계약이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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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영상문화>

인천상륙작전 흥행 발판 ‘영상산업 육성’ 
인천시는 인천영상산업 발전 중장기 계획을 통해 영상산업 육성방안을 구체화하고 추후 관련 조례를 개정해 인프라 구축이나 영상물 제작지원 등을 위한 근거를 마련할 계획이다.
 
인천 ‘영상산업 메카’ 중장기 청사진 
  
인천영상위원회 총회 개최, 제2기 위원회 출범  

인천상륙작전과 인천차이나타운  
  
제4회 디아스포라영화제, 성황리에 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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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문화시설>

한반도 역사에 한 획 그은 ‘인천史’를 널리 알려라 
인천시가 인천상륙작전기념관과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의 국립화 추진을 통해 문화주권 실현에 시동을 걸었다.

월미도․내항․영종도… 국립 해양박물관 유치, 속도낸다 
인천시는 올 10월 말까지 자체 진행하고 있는 국립 인천해양박물관 건립 타당성 연구용역을 마무리하고, 11월께 해양수산부에 박물관 건립을 건의할 계획이라고 28일 밝혔다.

국립한국문학관 설립하는 대신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활용하자 
인천 소재 한국근대문학관이 국립한국문학관으로 낙점될 가능성이 커졌다.
국립한국문학관을 설립하는 대신 기존 문학관 활용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는데다, 국립문학관이 갖춰야 할 요건을 상당 부분 충족하고 있어서다.

‘인천 계양산성’ 국가문화재 지정 신청 
인천의 대표적 성곽유적인 계양산성(桂陽山城)의 국가문화재 지정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인천광역시(시장 유정복)와 계양구는 인천시 기념물 제10호인 계양산성의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 신청서를 문화재청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해양관방유적 ‘뜻밖의 난관’ 
인천 강화군이 문화재 보호정책에 따른 규제를 완화해 달라고 요구하며, 강화 해양관방(關防)유적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를 반대하고 나섰다. 8월 초께 열릴 예정이던 강화 해양관방유적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관련 문화재청 심의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인천 첫 국립 문화기관 이르면 내년 상반기 설립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고려 역사, 근대 유적지를 발굴․조사하는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이르면 내년 상반기에 설립된다. 인천에 문을 여는 첫 번째 국립 문화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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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센터 인천>

아트센터 인천 ‘난항’ 
한국의 오페라 하우스를 표방한 ‘아트센터 인천’의 준공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계획 당시 2014년 9월에 준공하기로 했으나 여러 차례 합의서가 변경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개발이 지연됐다.
 
<strong골칫덩이 인천아트센터, 시도 경제청도 ‘못맡아’ 

인천시-NSIC 갈등… 아트센터 완공 지연 

‘새우등 터진’ 아트센터 인천… 내년 개관식 비상

총체적 부실…송도 ‘아트센터 인천’ 공사비 환수 실사작업 본격화

‘아트센터’ 지원단지 개발 120억만 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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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밥>
 

유커 ‘공연 상품’에 30억 투자… 학생들이 빈좌석 채웠다. 
‘비밥(BIBAP)’ 공연과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도마 위에 올랐다. 막대한 예산 지원에도 인천의 가치는 물론 정체성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에서다. 유커 등 외국인 관광객 유치 또한 실익이 없다는 판단이다. 그래서 인천시는 이들 공연의 기대효과를 들여다보겠다는 입장이다. 시의회 역시 까다로운 예산 심사를 예고한 상태다.

볼거리 없다며 들여온 ‘비밥’ … 지역문화 생태계까지 교란중 

비밥 투자비 10억, 지역예술 133개 사업 지원 맞먹어

‘비밥’ 둥지 튼 송도 트라이볼, 지역 예술공연은 곁다리 신세 

‘비밥’ 지원 타당성 꼼꼼히 살핀다

인천, 외래 관광객 상설공연 내년에도 ‘비밥’…송도 트라이볼서




문화 없이 성장이 가능한 도시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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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금융 시장의 심장 월스트리트, 예술의 중심지 브로드웨이를 동시에 품고 있으면서 세계 최첨단의 유행이 펼쳐지는 쇼핑가가 밀집한 맨하튼은 명실공히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현대적인 도시로 불린다.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지금도 세계의 많은 여행자를 끌어들이고 있으며, 러브 스토리를 위시하여 많은 명작의 배경이었던 센트럴 파크(Central Park)는 그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인천의 송도국제도시 혹은 경제자유구역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이곳에 맨하튼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닐까 싶은 착각을 할 때가 있다. 인천국제공항이라는 인프라를 배후로 약 40조원의 민간 자본 조달로 지어지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민간 도시 개발구역인 이 도시의 마스터플랜은 콘 페더슨 폭스(KPF)의 뉴욕 사무소에서 설계했다고 한다. 맨하튼이 태생부터 지역시민들의 역이탈을 막기 위해 문화적 공간에 대한 치밀한 설계를 병행했듯 송도 역시 다양한 문화적 아이템들이 생기고 있으며 일부는 성공리에 운영되고 있다고 들었다.

이쯤에서 뉴욕에서 시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고 있는 공간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필자와 같은 몇몇 영화광의 열정으로 시작된 시네마테크인 뉴욕의 시네마테크, <필름 포럼,Film Foru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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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독립영화를 상영할 공간을 찾아 카렌 쿠퍼를 대표로 50개의 간이 의자로 시작했던 뉴욕의 <필름 포럼>은 이제 미국을 대표하는 시네마테크가 되었다. <필름 포럼>의 발전과정은 DRFA와 마찬가지로 프로그램의 신뢰성에서부터 시작됐다. 보석같은 작품을 기가 막히게 찾아낸 프로그래머들의 안목과 그 열정이 지금의 필름포럼을 만든 셈이다.

이 극장에서 <쉘 위 댄스>를 보기 위해 줄을 서던 젊은 날의 그때를 잊지 못한다. 물론 이 극장에서는 한국영화 <워낭소리>도 개봉한 바 있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단골 레퍼토리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세계의 고전>, <작가주의 특선>, <세계 영화는 지금>이라는 3개의 섹션이 3개의 관을 채우고 1년 365일 다채롭게 극장은 돌아간다. 뉴욕의 관객들은 밤이 되면 그리니치빌리지로 속속 모여든다. 그리고 전세계의 영화 동지들이 지금 어떤 화두로 영화를 만드는지 진지하게 토론하며 영화에 몰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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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름 포럼 40주년 프로그램의 티켓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선 관객들, DRFA 365 예술극장도 40주년엔 이렇게 될 수 있을까?

물론 프로그램이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극장이 오늘날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그리니치 빌리지로 이사한 후 <필름포럼>은 55명의 정규 직원과 수십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힘을 합쳐 끊임없이 극장을 꾸며나갔다. 영사기를 HD로 바꾸어 어떤 매체의 소스도 디지털로 상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의자 시트를 벨벳으로 바꾸었다가 가죽으로 바꾸었다가, 조명을 바꿔본다거나 하는 등 전직원이 극장을 찾는 손님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신선한 느낌을 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이 극장의 연간예산은 800만 달러로 대부분 시와 기업들의 후원으로 충당하고 있으며, 2013년의 개인 기부금은 100만 달러를 넘어섰다고 한다. 필름 포럼의 수석 프로그래머인 캐런 쿠퍼는 작품 선정의 기준을 묻는 기자에게 “관객들의 사고에 도전의식을 던지는 개성적인 작품이 최우선”이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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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동검도에 35석의 예술극장을 지을 때만 해도 필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정신나간 이상주의자로 낙인찍혀야 했다. 30년이 넘은 필름 콜렉션의 긴 여정 끝에 내가 모은 이 필름들을 이제는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기로에 선 자신을 발견했다. 나눠야 할 공간의 지리적 요건의 1순위는 산과 바다가 보이는 자연친화적인 곳이어야 했다. 수도 없이 고민했고 많은 시간을 들여 찾아낸 곳이 바로 동검도였다. 동검도가 초지대교에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는 것도 필자를 끌어당기는 중요 요소였다.

2014년 11월 15일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여배우 <실바나 망가노 특집>을 시작으로 지난 3년간 수많은 희귀작들이 관객들과 만났다. 관객층은 김포에서 인천으로, 그리고 인천과 서울까지 저변을 넓혀나가 이제는 1달에 2,500여 명의 관객이 작가주의 영화를 보기 위해 동검도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누군가 DRFA 365 예술극장의 작품 선정 기준을 묻는다면 필자 역시도 캐런과 비슷한 대답을 할 것 같다. 영화는 세상을 선도하는 선각자 같은 시선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모든 프로그래머들이 놓친 진짜 걸작들을 찾아내서 관객에게 되돌려주는 것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3주년을 앞둔 DRFA의 숙제는 ‘2관 설립’이다. 그동안 수많은 분들로부터 2관 설립에 관한 제의를 받아왔지만 현재 가장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이 송도다. 송도는 전국의 8대 경제자유구역 중 10년 동안 단연 외투 실적 1위를 유지하고 있는 도시로 특히 8대 경제자유구역의 외자 유치금을 모두 합산했을 때 약 95%이상이 인천경제자유구역(IFEZ)이 홀로 일궈낸 투자 성과로 나타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송도에서 온 관객 분들이 그 먼 길을 거쳐 동검도의 DRFA에 들어서면서 한결같이 ‘송도에도 이런 예술극장이 하나 있었으면’하는 탄식을 하는 것을 봐 왔다. 이 분들의 절실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과연 문화 없이 뉴욕이 세계의 중심부가 될 수 있었을까? 혈관이 비어 있는 백짓장 같은 도시에 문화는 생명을 공급하는 행위다. 유독 한국에서만 R&D, 바이오, 패션, 첨단 산업 분야의 기업들이 문화와 함께 성장하는 것을 등한시하는지 영원한 미스터리다. 앞으로 송도에도 필자와 같은 문화 마인드를 가진 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거대한 콘크리트 도심 속에 문화를 정착해나가기를 바래본다. 

유상욱 / 동검도 DRFA 365예술극장 대표, 영화감독




순수 서정과 우리말 조탁의 훌륭함 청록집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은 전국 유일의 공공 종합문학관입니다. 근대문학을 중심으로 한 근대 한국학 자료 약 3만 점을 소장하고 있는 콘텐츠 중심형 문학관이기도 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 자료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문학관에 직접 오셔서 한국 근대문학이 가진 의미와 매력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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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서정과 우리말 조탁의 훌륭함
청록집

청록집은 해방 1년 후 을유문화사에서 발행된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3인의 합동시집이다. 박목월은 「청노루」, 「나그네」 등 15편, 박두진은 「묘지송」, 「도봉」 등 12편, 조지훈은 「완화삼」과 「승무」 등 12편 등 총 39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3인의 저자는 일제 말 「문장」 잡지를 통해 문단에 나온 시인들이며, 시집에 있는 작품 대부분은 「문장」지에 실린 것들이다. 한국 근대시의 대표적 절창으로 이루어진 「청록집」은 우리 자연을 소재로 한 순수 서정시집이자 아울러 우리 시어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점에서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품이다.

일제 말 암흑기에 창작된 작품들이 해방 후 책으로 묶여 나온 이 시집은 광복 전후 한국 시사를 연결해주는 작품집이자 해방 후 최초의 우리말 시집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함태영 / 한국근대문학관 학예사




인천의 비전, 시대정신을 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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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직이든 발전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비전’이다. 비전이 뚜렷해야 방향이 서고 구체적인 실천 계획도 준비할 수 있다. 비전이 공유되어야 조직구성원의 의지와 에너지도 결집할 수 있다. 따라서 비전 없는 지도자만큼 무책임한 지도자는 없다. 구성원들이 비전을 공유하지 못하는 조직만큼 위태로운 조직도 없다. 특히 급변하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나라 일도 다르지 않다. 지금 나라가 혼돈스러워 보이는 것은 경제난 때문이기도 하고 한반도 긴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국가의 비전이 안 보인다는데 있다. 대한민국이 힘을 모아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함께 어디를 바라보고 국력을 모아야 하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나라의 중요한 분들이 국가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눈앞의 이익을 놓고 이전투구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국가 혼란의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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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도 마찬가지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마다 지역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뛰는 것처럼 보이지만 뭔가 어수선하다. 지역민의 역량이 잘 모아지는 것 같지도 않다. 일관성 없는 정책들이 즉흥적으로 내던져지는 것 같기도 하다. 지역사회의 비전이 정확하지 않으니 생기는 문제들이다. 설령 비전이라고 제시되어 있는 경우에도 지역의 지도자들과 공직자들과 지역민들이 그 비전에 공감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 출발하지 않고 탁상에서 만들어진 비전일 경우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비전이 제시되어 있다고 해서 다 제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인천도 비전을 정확하게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비전을 중심으로 장단기 계획이 설정되고, 그것을 지역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인천시민들이 공감ㆍ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이 힘을 갖고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해 본다.

첫째, 인천의 비전은 현재 상황과 여건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진단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 좋아 보이고 그럴 듯해 보인다고 해서 다 끌어 써서는 안된다. 현실에 기초해서 현실적인 비전을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시민의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전문가 몇 사람이 만들어 자신들만이 공유하는 비전이어서는 안된다.

셋째는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 급변하는 시대에는 시대정신 또한 급변하기 마련이다. 현재와 미래를, 그리고 이 시대의 정신을 정확하게 읽어내 그것을 비전으로 담아내야 한다. 시대와 불화하거나 시대가 나아가는 방향과 역행해서는 그 비전이 힘을 가질 수 없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도 없다. 오히려 지역을 퇴행시킬 뿐이다.

여기서 특히 어려운 것이 바로 시대정신을 담는 것이다.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는데 대해서는 모두 공감하지만, 시대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어려워한다.

과연 2016년, 지금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몇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개방성이다. ‘열린 도시’를 지향해야 한다. ‘열린 도시’는 몇 가지 의미를 갖는다. 폐쇄성을 극복해야 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도시를 지향해야 한다. 출신 지역이나 학연 등 특수한 연고 변수가 인천을 좌우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학연이나 지연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다. 이념적으로도 당연히 개방적이어야 한다. 우리와 다른 문화와 지구촌을 향해서도 개방적이어야 한다. 인천은 어떤 면에서도 열려 있고 유연하며 포용적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안전과 평화다. ‘안전 도시, 평화 도시’야말로 21세기 도시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비전이다. 지금 인류 사회는 각종 위험과 폭력으로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촌의 어느 도시도 일상화된 테러와 전쟁과 재난과 재앙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모든 사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과 안전과 평화를 지켜내는데 있을 정도다. ‘안전 도시, 평화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지는 모든 도시들이 직면한 핵심 과제가 된 것이다.

셋째는 ‘생태 도시’다. 지금 지구촌은 심각한 환경오염과 생태계 위험으로부터도 몸살을 앓고 있다. 기후변화는 매년 수많은 생물종을 멸종시키고 있으며, 인류의 미래까지 위협하고 있다. 그런 21세기에, ‘생태 도시’는 선진도시의 피해 갈 수 없는 숙제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넷째는 협치다. ‘민-관 협치 도시’야말로 인천의 중요한 비전이어야 한다. 시민참여형의 정책결정, 시민과의 원활한 소통, 여-야간 협치, 민-관간 협치를 통한 상생 정치야말로 지역이든 나라든 미래의 비전일 수밖에 없다. 오래된 관료제의 권위와 관(官) 중심의 사회질서를 내려놓고, 수백 년 이어져 온 수직적 위계체제의 관행을 내려놓고,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면서 민과 관이 함께 책임지는 도시가 이 시대 정치-행정의 비전인 것이다.

다섯째는 창조다. ‘창조 도시’로 나아가야 한다. 21세기 지식정보시대에서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지역이든 창조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시민의 창의성을 제고해야 하며, 창조적인 시민들이 자유롭게 모여드는 도시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려면 다양성을 존중하고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를 진작해야 한다. 문화예술 활동의 공간도 넓어져야 한다.

인천이 인구 300만, 3대 도시의 위상을 넘어 지방 시대를 이끄는 선진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현실에 기반해 있으면서도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을 설정하고 그 비전을 중심으로 지역민의 열정과 의지를 모아낼 수 있어야 한다. 시대정신을 통찰하고 그것을 비전에 담아내며 지역민의 열정을 결집시켜 냄으로써, 인천이 전국의 모든 지자체들이 부러워하는 선진 도시로 발전해 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홍덕률 / 대구대학교ㆍ대구사이버대학교 총장




‘짜장면식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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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2005년 12월 5일 저녁 무렵의 일이다. 인천문화재단에서 소략한 발표회가 열렸다. 한중간의 도시교류, 곧 인천과 티엔진 그리고 부산과 상하이 간에 주고받은 도시 교류의 정황을 돌아보는 토론회 자리였다. 약정 질의자로 참석한 내가 거기서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것은 한국의 짜장면 1일 소비량이 700만식에 달한다는 거였다. 계산을 대보니 얼추 1인당 1주일에 한번 꼴이다. 가합하다고 여긴 것은 내 스스로 거기 해당된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짜장면 먹은 지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끼니때 길거리를 지나다가 중국집이 눈에 들어오면 자연스레 짜장면이 떠오르면서 입가에 군침이 도는 것이니, 인이 배겼다는 말이 그 말인 것이다.

그 이튿날 아침 나는 타이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타이베이 공항에 내리자 눈을 찔러오는 문구가 있었다. 타이베이에 와서 꼭 해야 할 열 가지 가운데는 르위에탄(日月潭)에 가보라거나 구꿍(故宮) 박물원에 가보라거나 103층 짜리 빌딩에 올라가 타이베이 야경을 감상해보라거나 하는 등은 그렇다 쳐도, 니우러우미엔(牛肉麵)을 꼭 먹어보라는 거다. 이 문구가 내 눈길을 잡아당긴 것은 필시, 그 전날 인천에서 짜장면의 1일 소비량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였기 때문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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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칭화대학에서 개최된 학술 발표회를 마치고 타이베이 시내에 자리 잡은 니우러우미엔 거리에 들려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다른 니우러우미엔 맛을 시식하고 나오는데 서점이 눈에 뜨인다. ‘직업병’을 버리지 못하고 서점에 들어가보니 <니우러우미엔지에>(牛肉麵節)이라는 책자가 다시 내 눈길을 고정시킨다. 서문을 쓴 이가 당시 타이베이 시장 마잉지우(馬英九)니 전후 사정이 감이 잡힌다. 니우러우미엔을 도시 브랜드의 물목에 올려놓은 거다. 타이베이와 우육면, 인천과 짜장면이 서로 연결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던 거였으니.

그 뒤 짜장면에 필이 꽂혀 중국의 옌타이(烟台)는 물론 산동성에서 북경까지 싸돌아다니기를 몇 차례 하던 중, 인천문화재단에서 여비를 대줄 테니 경인일보에 짜장면 이야기를 썰을 풀어보라는 거다. 당시 재단의 대표로 일하던 최원식 교수께서 평소 동아시아 타령을 하는 후배에게 ‘배당’한 용역이었겠다. 그렇게 짜장면과 인연을 맺어 연재를 마친 다음, 학교 수업에도 몇 학기 우려먹었겠다. 그런데 짜장면 뒤에 감추어진 역사와 내력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였으니…. 과장을 보태자면, 엄청나고 무지막지한 비밀이 숨어 있는 거다.

그 비밀 가운데 소소한 몇 가지를 공개하기로 하자. 첫째 춘장의 정체. 우리가 짜장을 볶는데 들어가는 이른바 춘장의 본명은 티엔장(甛醬) 혹은 티엔미엔장(甛麵醬)이다. 티엔(甛)은 영화 <첨밀밀>의 그 첨이다. 콩으로 만든 우리네 된장의 구수한 맛과는 다른 달달한 맛이 니는 건 밀가루를 주원료로 썼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으로 건너와 춘장으로 불리게 사연이다.

짜장면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산동은 밀의 주산지. 따라서 주식이 밀이고 거기서 자연스레 만두라는 메뉴가 탄생된다. 노수 강의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상 위에 만두를 빚어 올린 제갈량이 바로 산동 출신이다. 그 만두에 양고기나 돼지고기 등의 소를 넣은 것은 예전에는 일반 노백성들이 언감생심 명절에나 차례가 돌아가는 그런 것인지라, 소를 넣지 않은 만두가 주식이었다. 그렇게 밀가루로만 빚어 찐 만두를 그냥 먹으면 그게 좀 그렇다. 그래서 곁들인 게 바로 날 대파인데 대파만 먹기에는 그야말로 싱거우니 그걸 춘장에 찍어먹은 것. 그런데 그 대파를 뭐라고 부르냐. 총(蔥) 혹은 따총(大蔥)이라 부른다. 춘장은 그러니까 총장의 와전이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대충 아는 사람은 다 알게 되었다. 허명만 화백의 <식객>에도 대강 소개가 되어 있으므로.

그런데 그 대파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닌 점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산동의 장치우(章丘)에서 생산되는 대파는 길이가 2m에 한 뿌리 무게가 1kg 나가는 그야말로 대파인 것. 파는 본시 양물이라 겨울에도 날씨가 웬만하면 밭에서 자란다. 그래서 중국을 휩쓴 인기 드라마 <촹관동>(闖關東)에tj ‘장치우 대파 한 뿌리면 겨울을 난다’고 하는 대사도 바로 이로부터 비롯된 것. 만두를 한 입 베어 먹으면서 다음, 길고 굵은 대파를 총장(춘장)에 찍어 먹는 게 바로 산동의 노백성들이 일용하는 주식이었다고 보면 어김없다. 우리로 치면 여름에 찬물에 보리밥 말아 풋고추를 된장 혹은 고추장에 찍어먹는 것과 영락없다.

대파를 찍어먹던 그 춘장을 우리는 지금 양파를 찍어먹는다. 그 양파는 중국말로 양총이라고 한다. 서양에서 들어온 파(蔥)니까. 그런데 우리가 지금 한국에서 만들어 먹는 짜장면 치고 양파가 안 들어가는 짜장면은 찾기 힘들다. 대파가 양파로 은근슬쩍 둔갑한 소치다. 그리고 그 양파는 아무래도 대파보다는 갈무리가 쉽다. 무엇보다 저장기간이 대파보다는 훨씬 길다는 데 착안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그치지 않는다. 그 양파는 누가 공급했는가. 예를 들어 인천 차이나타운에 최초로 문을 연 것으로 되어 있는 공화춘에 식재료로 양파를 공급하자면 누군가가 양파 농사를 지어야 한다. 그 양파 농사를 지어 식재료로 제공했던 공급선이 바로 산동에서 넘어와 소사 부평 일대에서 농사를 짓던 화농(화교 농민)들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짜장면이라는 메뉴에 형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타이베이에 가서 니우러우미엔을 먹어야 한다면, 베이징에 가서도 꼭 먹어야 하는 메뉴가 있으니 바로 페킹 덕, 곧 베이징 카오(北京烤鴨), 다시 말해 오리구이다. 필자가 ‘연구년’으로 중국에 머무르던 2001년에 집 근처 음식점 궈린에서는 한 마리에 25원,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치면 4000원 남짓이었으니 결코 비싼 메뉴가 아니건만 그 베이징 오리를 구어차이(國菜 나라를 대표하는 요리)라고 일컫는다. 그만큼 내공이 들어간 메뉴이다. 그 오리구이를 먹던 어느 날 갑자기 황연대오한 것이, 바로 그 메뉴가 바로 짜장면과 같은 형제간이라는 점이었다. 재료를 살피자. 하엽(荷葉 연잎)이라 부르는 밀쌈에, 일단 쫄깃한 껍질 부위가 대부분인 오리고기를 얹고 나서, 그 다음에 상큼한 오이 조각을 얹고 이어서 채친 날 대파를 얹은 다음 거기에 우리가 양파를 찍어먹는 춘장을 발라 써서 먹는다. 춘장과 대파와 밀가루가 같으며, 거기에 우리나라 짜장면에 얹어주는 채친 오이를 떠올려보면 다른 것은 오리와 돼지의 차이인 것. 식재료가 대체로 엇비슷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국채 말고 최고로 계급이 낮은 지엔삥(煎餠)도 형제에 끼워줘야 옳다. 둥그런 쇠판에 밀가루 풀을 둥글고 얇게 발라 부친 다음, 거기에 달걀을 하나 깨어 얹은 다음, 다시 대파 대신 잘게 썬 쪽파를 흩뿌린 다음, 거기에 파삭거리는 밀가루 튀김을 얹어 싸먹는 이 전병은 그 시절 인민폐 단돈 1원이었다. 점심 먹고 나서 자전거를 타고 베이징 시내를 싸돌아다니다가 서너 시쯤 길가에서 자전거에 한 다리를 걸친 채 비닐에 싸서 건네주는 그 1원짜리 따끈한 지엔삥을 먹는 맛은 꿀맛이 따로 없었다. 물론 재료로 치면 얼추 비슷해서 파와 밀가루 그리고 춘장이 주재료다. 다르다면, 단백질이 돼지에서 닭(계란)으로 바뀌었을 뿐.

그런데 이 짜장면과 그 형제들을 구성하는 식재료들이 아무렇게나 합쳐져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이른바 궁합, 혹은 오미의 조화에 기초하여 디자인된 것을 알고 먹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다. 오이는 쓰고 파는 매우며, 밀가루와 춘장은 달고 짜다. 따라서 신맛이 빠져 있다. 최근 인천 화교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손덕준 씨는 자기네 음식점 중화루에서 만든 짜장면에 식초를 뿌려먹는다. 그래야 오미를 갖춘단다.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 다꾸앙과 양파에 식초를 뿌리므로. 대신 나는 고춧가루를 뿌린다. 양파의 매운 맛이 조리 도중 불에 약해졌으니 그걸 보충하는 것이다.

이들 다섯 가지 맛의 어우러짐을 조화라 부른다. 서로 상반상생하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상반상생의 조화는 음악으로 가도 그대로 적용되어 오음의 조화가 된다. 이걸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 적용하면 전쟁의 반대말, 곧 평화가 된다. 짜장면은 평화의 기호가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우리나라의 통일을 일컬어 “김치식 통일”이어야 하리라고 설파한 한 시인의 말을 떠올리면서 ‘짜장면식 평화’로 해도 말이 되지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게다. 아마도 사드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워 그런 모양이다. 인천에서 발하는 평화의 메시지가 짜장면을 먹는 것으로부터 나온다면…

유중하 /연세대학교 중문과 교수




어릴 적 장소 경험에 대한 기억, 인천의 문화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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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을 한번 여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천의 문화적 가치를 짚어 보는 것이 내게 주어진 과제인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인천에 절반에서 훨씬 못 미치게 발을 딛고 살아온 시간이 30년이 넘는다. 인천의 역사적 사실들이나 문화유산 그리고 작금의 문화예술들 속에서 문화적 가치를 찾는 일이라면 공부를 하고 답사를 해서라도 조금은 가능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인천에 뿌리박고 살고 있는 분들이 훨씬 더 귀한 작업들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내 몫은 아닌 것 같았다. 틈틈이 발을 딛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외지에서 살아 온 나로서는 마음속에 ‘윤곽’으로 그려지는 개인 경험들을 되짚어 보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엉뚱하게도 북미 원주민 사회들을 답사하다가 만난 한 고고학자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자세한 것들을 묻지 말고 단 한 가지 그들 삶 의식을 관통하는, 주제가 담긴 질문을 던지라는 것이었다. “강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참으로 막연하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잠자코 그의 말을 따라 해보았더니 놀랍게도 이 질문이 사람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어떤 이는 즉각적으로, 단 몇 마디로 강에 얹혀사는 자기 삶을 압축해 표현했으며 어떤 이는 새삼 성찰적으로 삶을 돌이켜 보곤 했다. 그리고 그 대답들은 강에 얹혀서 사는 자기 문화에 대한 ‘가치’ 표현이었다. 어떤 이는 매우 실용적 차원에서 어떤 이는 매우 철학적이고 미학적 차원에서 문화적 가치를 표현했다. 문득 이 생각이 떠올라 이번에는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인천은 내게 무엇일까?” 그런데 인천에 정주하고 먹고 살기 위해 몸 부대껴 온 바가 아니기 때문일까 그 안에 살 때의 경험에서도 밖에서 드나들 때의 경험에서도 인천은 내게 통로(route)로 접촉점으로 길 혹은 거리(street)로만 떠올려진다. 그것도 시공간적으로, 문화적으로 매우 복합적인 통로, 접촉점, 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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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부터 중학교까지 현 제물포역 뒤 인천대학교 앞쪽, 한 곳에서 살았다. 이 일대는 피난을 와서 간신히 일터를 잡은 직장인들과 소상인들과 토박이 농민들이 섞여 살았다. 그래도 인천 도심 외곽에 있는 주택가로 당시의 전형적인 ‘중산층’ 주택들이었다. 흙벽돌이나 콘크리트로 단층 기와지붕의 서양식 반 한옥 반 형식의 집을 짓고 대문 안 쪽에는 마당을 두었으며 밖으로는 작은 텃밭을 두었다. 어떤 집은 텃밭 대신에 우물터를 두었다. 마을 바로 옆에는 몇몇 농가들과 밭들이 있었고 곧바로 그 옆으로 화교 동네가 있었다. 화교 동네의 건축 양식은 사뭇 달라서 붉은 벽돌로 사방을 두르고 가운데 마당을 둔, 좁은 창문의 집들이었다. 창문틀은 거의 어김없이 푸른색이었다. 화교들은 대부분 마을 근처에서 혹은 뒤쪽 ‘성광학교’ (구 선린학원, 인천대학교의 전신) 산을 넘어서 채소 농사를 했다. 나의 어렸을 적 ‘통로’에 대한 경험은 우리 동네에서부터 옆의 농가들 그리고 화교 동네로 이어진다. 단오 때에는 농가 큰 앞마당에 높이가 10미터는 넘었음직한 그네가 설치되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처녀들부터 아줌마들까지 그네에 치맛자락을 휘날렸다. 어느 가을밤 드럼통 위에 놓인 작두 위에 오른 무당을 보고, 밤하늘에 대비되면서 불빛을 흐트러뜨리던 붉은색, 푸른색 옷가지들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쳤던 적이 있다. 그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필자의 중부지방 도당굿의 첫 답사이다. 한편 화교 동네는 색다른 경험을 주던 곳이었다. 처음에는 꽁꽁 사방을 두른 집 모양새나 푸른 창틀이나 이곳저곳에 붙은 붉은색 글씨와 문양들이나 음험해 보였다. 그곳 사람들이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 동네가 아니라 우리 집 바로 뒤에 살던 화교 한 집의 나보다 다섯, 여섯 살 위로 보이던 소년으로부터 십팔기(十八技)를 배우면서부터 그 동네에 대한 두려운 생각도 사라졌다. 자기 집 마당에서 웃통을 벗고 작은 칼 두 개를 들고 춤추는 듯 몸을 날리던 그의 모습을 보고 호기심에 다가가기 시작했으며 그 후 빵도 얻어먹고 좋은 나날을 보냈다. 이후 화교 동네에도 스스럼없이 지나다니기 시작했고 집 마당으로 들어가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사당’이었던 것 같은 좀 무서운 공간도 보았다.

피난 내려 와 인천에 자리잡은 일가친척 중에 작은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현 숭의동 공설운동장 뒤 전도관 밑 산기슭에 살았다. 아주 좁고 구불거리는 동네 길 한켠에 흙벽돌로 두어칸 짜리 집을 짓고 거기서 소소구레한 일들을 하면서 사셨다. 작은 할머니가 생선을 공판장에서 받아다가 ‘다라이’로 이곳저곳을 다니는 생선 행상을 하셨는데 집 마당에는 그물에 말리는 생선들이 아래 쪽 공설운동장으로 이어지는 하늘에 나부꼈다. 도화동에서 숭의동 언덕길로 걸어서 그 작은 골목길을 지나 그 집에서 공설운동장의 운동 경기를 보던 나날들이 있었다. 야구는 동산고등학교 팬이었고 동인천고등학교도 좋아했다. 모두 우리 집 가까운 곳에 있던 학교들이었으니까…당시는 야구가 인천사람들에게 묘한 정서를 낳는 것이었다. 촘촘하게 짜인 경기 룰에서부터 정교한 테크닉, 그리고 스타킹과 꼭 끼워 입은 줄무늬 바지와 모자 등등이 무언가 ‘근대’의 세련미를 상징하는 것 같았고 그게 근대도시 인천의 취향과 맞았던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공설운동장에서 벌어지던 고교야구는 지방들 간의 경쟁의식과 ‘지방 즐기기’까지 선사하는 것이었다. 서울 이외에 부산, 대구, 광주, 군산 등등이 인구에 회자되는 중요한 계기가 선거 말고는 고교 야구가 컸던 것 같다. 여하튼 나도 부산고가 어떻고 군산상고가 어떻고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떠들어대곤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어머니가 교사로 있던 축현 ‘국민학교’를 다녔다. 엄밀히 말해서 그냥 쫓아 다닌건데 그래도 나는 학교 다니는 것이라 했고 실제로 교실 수업도 며칠 동안 받았다가 선생님들이 달래서 ‘졸업’했다. 사실상 학교 공부보다도 학교 가는 길을 더 좋아했다. 현 제물포역 앞 길이 당시에는 주요 지방도로로 신작로라 불렸다. 그 신작로에서 버스를 타고 동인천역에서 내리면 참으로 감미롭고 신선한 경험세계가 펼쳐졌다. 축현 학교 담장에 내 기억으로는 장미였는지 찔레였는지 빨간 꽃들이 길게 이어졌고 담장 건너 길 맞은 편, 동인천역 작은 광장 한 코너에 있던 제과점에서 빵굽는 냄새가 났다. 아침 햇볕이 길거리에 쏟아지고 그건 내게는 다사로운 노란색이었다. 건물 그늘이 진 곳은 상큼한 바람이 불었다. 빵굽는 냄새와 노란 햇볕과 건물 그늘…이런 것들이 모여서 ‘도시’의 취향이 되었다. 이따금 병원에 가느라 경동 ‘싸리재’ 길에도 가고 신포시장 밑 동방극장에 쫓아가 영화도 봤다. 당시 도심 여러 곳들에 적산가옥을 개조한 점포들이 있었을 터이지만 나는 그런 건물 양식은 색다르게 느껴지지 않았고 단지 모두가 ‘현대식’ 쇼윈도에 타일 건물들로만 느껴졌다. 동방극장은 그와는 사뭇 달랐다. 그 안에는 극장 내부에 하얀 색상에 푸른색으로 그림을 그려넣은 것으로 기억되는 원형 타일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고 어째 중국풍인 것 같다고 느끼곤 했다.

인천 도심의 경험은 초등학교 입학 후에 확대된다. 그림그리기 대회 때문에 자유공원에 자주 가게 되었는데 어떤 때는 그 코스가 현 인천문화재단 자리 창고들, 구 시청 그러니까 현 중구청 그리고 차이나타운을 거치곤 했다. 지금은 차이나타운이라 이름이 붙어있지만 당시는 이름이 없이 인천 도심의 한 길거리에 있는 중국인 사는 집들이었다. 그 집들은 내게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목조 이층 건물 곳곳에, 그리고 이층 베란다 앞틀에 본래 입혔던 붉고 푸른 색들이 바래고 벗겨져 현란함과 퇴락의 느낌이 교차하고 거기에 널어놓은 빨래들과 이층 베란다를 다니는 가족원들의 머리모양과 의상까지 더해졌는데 전체적인 느낌은 시각적 이국(異國) 정서를 넘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들 방식의 살림살이, 그것도 한국 땅에서 퇴락해가는 살림살이의 구차한 모습들이 그 건물과 의상들에 찌들어 나타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려서 이것저것 잘 알지도 못하지만 색다름의 차원을 넘어서 ‘사람이 저렇게 사는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조부모께서 이북에서의 생업을 잇고자 1960년대에 현 석바위 법원 인근에서 과수원을 시작했다. 논밭 사이에 낀 작은 구릉지에 과수원이 있었고 좁은 논길을 걸어 경인선 철로를 넘어 산모퉁이를 돌면 주안염전과 갯벌이 펼쳐졌다. 초등학교 때, 수업이 끝나면 숭의동에서 도화동 집까지 걸어 책가방을 놓고 다시 석바위의 과수원에 갔다. 제물포역에서 주안역까지가 2.1Km인지 2.5Km인지 여하튼 2Km남짓한 거리였는데 꼭 그 선로를 따라 걸었다. 굵은 못을 갖고 다니다가 선로 위에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가면 납작하게 눌려진 못을 거두어 모아두곤 했다. 콜타르였을 것이다. 선로 밤나무 침목들을 딛고 뛰면서 침목에 발라놓은 목재 보호제의 냄새를 즐기기도 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지만 그것은 일상적 주거나 농촌 생활에서 나는 냄새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당시야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었겠지만 이제 보면 그 화학제품의 냄새가 ‘근대’에 대한 감각으로 다가왔던 것 같기도 하다. 과수원 작은 농가 방에 누우면 또 다른 냄새가 났다. 집 벽으로부터 흙과 짚 냄새가 섞여서 났고 앵앵거리는 파리 소리와 함께 늦은 오후를 진득하고 뉘엿하게 만들었다. 과수원 밖을 나서서 자주 가는 곳이 염전이었다. 한 1Km 정도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가는 길 산모퉁이가 시각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하나의 문턱이었다. 그 모퉁이를 넘어 펼쳐지는 세계는 과수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염전 바닥의 타일에서부터 열이 올라와 얕은 바닷물을 후끈거리게 하고 수로 곳곳에 수차를 밟아 바닷물을 염전으로 품어내는 염부들이 있었다. 주안염전에는 바닷물을 가두어 놓은 저수지가 여러 곳 있었는데 그 저수지 너머로는 깊게 파인 갯골들과 검은 갯벌들이 뜨거운 햇볕에 드러나 있다. 길에는 검은색 콜타르를 칠한 소금창고들이 누워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한 고즈넉함과 외롭고 처연함을 만드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태양의 이글거림과 고무신 안쪽까지 스며들어 온 개흙의 진득거림이 어우러져 미묘한 느낌을 주곤 했다. 필자는 여름에 저수지에서 헤엄을 치기 위해 아니면 시원한 소금창고 속에서 만화책을 보기 위해 염전에 가곤 했는데 이런 일들을 즐기기 보다는 염전과 갯벌과 사람들 일하는 모습의 강렬하고도 적막하고 처연한 모습에 마음 한 켠이 짓눌려 돌아오곤 했다.

대학 다닐 때의 단골 여로는 다양했다. 그런데 그곳들 어느 한 구석에서도 단순하고 단일하고 투명한 장소감과 장소 경험을 가져본 적은 없다.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중첩되어 있었고 비유를 하자면 장소들이 목소리가 청명한 게 아니라 허스키 풍으로 복합적이거나 걸지거나 삭혀 있었다. 동인천역에서 구 인천여고 가는 길로 조금 접어들다 보면 밴다방이라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 생긴 다방으로 디스크자키가 있었고 클래식이나 조금 조용한 팝송, 당시 활발했던 통기타 가수와 김민기, 양희은 풍의 가요들을 틀어주었다. 인천의 대학생들, 좀 젊은 문인들, 연극인들 그리고 외지에서 방학 때 귀향한 대학생들이 이 다방을 메웠다. 조금 더 문화적으로 연조가 깊은 젊은이들은 더 그윽한 것을 찾았다. 술집들이 그 욕구를 채워주었는데 꼭 가는 곳이 하인천역으로 넘어가는 곳의 잡어횟집, 인천여고 인근의 삼치구이집, 용동 큰우물집, 신포시장의 백항아리집, 옛 키네마 극장 뒤편 다복집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이나 손발짓이나 여러 행각들을 돌이켜 보면 그 어떤 체득적인 정서나 감각과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세심하고 치밀한 감각이면서 또한 복합적으로 배어 들어간 감각이기도 했다. 그들은 막걸리와 함께 먹는 생선 몇 조각이 어떻게 말려져야 하는 것이며 어떻게 구워져야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좀 곰삭고 찌든 맛이 있어야 한다.” 생선 맛에 대한 이들의 말이나 그것을 주장하느라 서로 간에 오갔던 손짓 같은 것을 보면 그것은 단순한 음식 맛의 감각을 말하는 게 아니고 구현해야 할 자기 삶의 감각, 지역 감각 같은 것이었다.

필자에게 인천은 통로,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한 것들을 넘나드는 통로로 있었다. 집에서부터 인근 농촌을 거쳐 화교 동네까지, 집에서부터 동인천역을 지나 축현 학교까지, 자유공원 밑 길거리와 차이나타운까지, 철로를 따라 석바위 과수원을 거쳐 주안염전과 갯벌에 이르기까지 어릴 적의 장소 경험들, 그리고 대학생 시절의 도심 다방과 술집들에서의 장소와 사람 경험들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 경험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인천에서 형성되어 왔던,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계층적으로 다양한 문화들이 인천의 지리적, 공간적 계열을 따라 문화 경험의 통로를 이루는 것이었다. 나에게 인천은 무엇인가?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찾아 들어가고 부대끼며 체화시켰던 감각의 장소들이다. 그것은 한 곳에 단일하게 머무는 문화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양한 문화들이 움직거리는 경험의 통로이다. 또한 곳곳에서 사람들이 장소와 접하고 사람과 접하고 감각을 생성하는 접촉지대이다.

문화 중심이라는 말은 본래는 마치 가마솥이 끓듯 다양한 것들이 모여들고 접촉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지역문화를 뜻했다. 인천은 역사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다양한 문화의 통로, 길, 접촉지대로서, 그리고 그 곳에서 생성되는 감각들과 의미들을 가치로 바꾸어 생산해내는 문화생산의 처소로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인천은 그런 곳이다.

 

조경만 / 목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땅이 된 바다, 김순임 작가

 

땅이 된 바다, 김순임 작가

개항장 일대를 걷다보면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 사람들이 의외로 잘 알지 못하고 지나간다. 인천아트플랫폼이 있는 이곳 또한 과거에 바다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9월, 바람이 분다. 바다로부터… 그리고 바다로부터 온 무엇이 인천아트플랫폼 스튜디오 앞 거대한 나무가 되어 자라났다. 김순임 작가의 작품 <굴 땅>이다.
김순임은 일정 공간에서 리서치 과정을 통해 주변 사람들의 정서, 삶, 공간이 형성되어 온 배경 등을 주로 자연물을 이용해 예술 형태로 발전시킨다. 작품 <굴 땅>은 인천 해안가 사람들의 고된 삶의 역사가 그 지역 생계수단인 굴과 그 껍질로 덮혀 개간된 땅 위에 살고 있음에 주목한 작업이다. 작가가 직접 그곳에서 수집한 굴 껍질과 같은 오브제를 사용해 만든 설치작품은 그들의 삶과 노동, 소멸이 잉태한 새로운 생성을 상징한다. 또한 바다를 땅으로 일구고 척박한 삶과 역사를 버텨내며 살아온 이 지역 사람들의 생명력에 대한 경이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김순임 작가의 개인전 《땅이 된 바다》는 10월 30일 까지 진행되며 인천아트플랫폼 오픈스튜디오 연계전시 《웻페인트 WET PAINT》전(2016.8.26-9.25 B,G1,G3 전시장)에서는 본 작업과정이 기록된 영상과 도면, 모형 등과 같은 프로젝트 진행 과정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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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이번 전시《땅이 된 바다》의 작품 <굴 땅>에 대해 이야기 해 달라.
만석동에 갔다가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바닷가에 이주한 땅 없는 사람들은 바다가 공짜로 내어준 굴을 캐어 팔아 가족과 자신을 생존케 하면서 오랜 시간 이 곳(인천 만석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팔고 버려지는 것은 산처럼 쌓이는 굴 껍질들뿐이었는데 그 장면이 매우 인상깊었다. 굴이 원래는 한 생명체의 집이었지만 또 다른 생명(사람)을 위해 내어주고, 그 껍질들로 다시 해변을 메우고 땅을 개간한 곳에서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아온 것이다. 굴로 개간된 땅들은 점점 넓어져 이제는 이곳이 원래 바다였다는 것조차 알 수 없지만, 이곳엔 사람이든 굴이든 생명을 담았고 살게 했던 것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노동과 생존이 꿈처럼 피어나고 넝쿨처럼 자란 형상을 풍요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싶었다. 

Q2. <굴 땅> 작업을 진행하게 된 계기가 있다는데, 그것은 무엇이고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2015 겨울 인천 만석동 우리미술관 개관전(집과 집 사이)을 위해 지역 리서치를 하면서 이 지역과 이곳 사람들의 삶의 단편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인천 만석동은 매우 검소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이곳에서 버려지는 것은, 내다팔고 남은 굴 껍질과 연탄재뿐이다. 버려지는 굴 껍질조차 오랫동안 이 지역에 쌓여 땅으로 개간되는데 쓰였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땅 아래를 채운 것이다. <굴 땅>은 인천 해안가 사람들의 고된 삶의 역사가 만들어낸 땅의 이야기를, 그 지역의 생계수단인 굴, 그 껍질로 덮혀 개간된 땅 위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내어준 바다의 이야기에 주목하고자 했다.
 

빈손으로 바다에게 와
땅을 짓고 집을 세워 가족을 지킨 사람들
그들을 위해 기꺼이 정착해준 바다.
바다였던 도시
바다였던 집들
바다였던 길
바다였던 사람들
잠시 정주하지만, 보이지 않는 땅 속에 숨은 바다의 꿈
사람에게 자신을 내 준 바다 이야기
그리고 그런 사람의 이야기

Q3. 주로 만나는 주변, 그 장소를 떠올리게 하는 대상, 그리고 그 만남에 의해 생성되는 기억이 얼마나 특별해 지는지에 주목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처럼 자연, 주변의 것들을 작업으로 연결시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어떤 특정 계기가 있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소백산 자락의 풍기에서 자라면서 자연 외에는 놀거리가 없었던 유년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로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는 미술대학의 비싼 등록금 때문에 학교 뒷산 숲에서 구한 재료나, 버려지는 것들로 작업을 해야 했던 대학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강력한 가부장으로 가족을 지배하셨던 할아버지, 아버지와 아버지의 많은 형제, 자매들이 함께 살았던 시골에서 어린 여자아이로 성장하며, 주변인을 관찰하게 된 것까지… 나의 성장 과정과 배경이 자연스레 작업의 방식 속으로 들어왔고, 그 대상이 확장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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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4. 장소 특정적 또는 대지미술에 가까운 작업들을 해오면서 작품이 설치되는 장소, 오히려 자연이 작품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보인다. 작품을 설치할 때 고려하는 요소가 있는가?

공간과 자연을 내가 직접 고르려고 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공간과 자연이 작업을 선택한다고 믿는다. 작가가 어떤 작업을 구현하고 그 작업을 하기 위한 공간을 찾는 일보다 마음에 들어오는 공간을 만나고 그 공간과 함께 작업을 해나가는 것이 나의 이상이라는 얘기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실 이 두 가지가 모두 일치했다. 먼저 인천의 ‘만석동’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 자연, 환경 등을 배웠고, 그래서 그 공간이 마음으로 들어와 작업의 씨앗으로 발현되었다. 그곳에서 받아온 굴 껍질과, 어떤 형상으로 세상에 나올지에 대한 대략적인 드로잉이 나오고, 아트플랫폼 입주작가로서 주변 공간과 환경을 한 달 넘도록 산책하며 관찰했었다. 이 작품이 어디에서 행복하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말이다. 이번 작품 <굴 땅>은 이렇게 해안동 사람들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매번 매 작품, 매 만나지는 공간마다 고민하는 요소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Q5. 거대한 설치 작업을 진행해 오면서 어려운 점들이 많았을 것 같다. 노동 집약적이고 큰 규모의 작품을 작은 체구의 작가가 직접 설치하는 모습이 가히 수행자를 방불케 했다. 구상만 하고 실현하지 못한 작품이 있거나, 진행하면서 어려웠던 점이나 헤프닝이 있다면?
사실 무척 어렵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정도의 무게는 가지고 산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어려움을 잊을 만큼의 큰 즐거움이 있어 이런 작업들을 계속하는 것 같다. 대형작업들은 특히 나 혼자의 힘이나 경제력만으로는 구현하기 어렵고, 당연히 공공 공간일 경우가 많으므로 다양한 서류작업들이 필요하다. 작가들이 무척 힘들어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부분일 것이다. 작업을 구현하기 위해 지원 가능한 단체나 기관을 설득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그 나머지 작업을 구현하는과정에서 날씨, 사람, 기술 등의 것들은 모두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귀이 여기고 배우며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도록 잘 준비하면 오히려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다. 물론 좋은 사람을 만나는 행운도 필요하다.
구상하고 실현하지 못한 작업들은 하루에도 몇 개씩 드로잉 북에 쌓인다.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서, 기술적으로 아직 몰라서, 재정적으로 불가능해서… 이유는 다양하지만 이것들은 사실 모두 큰 문제는 아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 드로잉 북을 봤을 때 그때 실현가능하면 하면 되는 것이니까. 드로잉한 작업들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충분히 익지 않았고 충분히 배고프지 않아서가 아닐까? 개념이 소통가능할 만큼 잡혔고, 방식이 이해가능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너무너무 해보고 싶어지면, 실현 가능한 방법들을 찾고 제안하고 지원하는데 시간을 들이는 것이 아깝지 않게 되는 것 같다.
뜨거운 날씨에 《땅이 된 바다》의 설치를 진행했었다.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나다니던 주민들에게서 기운을 얻었다. “어? ‘땅이 된 바다?’ 그래, 여기가 오래 전에 바다였지, 하하하” 하고 웃으며 지나가는 할아버지들, “이게 뭔지 알아? 바다의 굴 껍질이야” 아가에게 말해주는 아기 엄마, 그리고 갓난아이를 안고 바다와 넝쿨, 굴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부르는 등 작업 주변에서 작품을 즐기는 사람들이 작업 중인 나와 우리를 깨어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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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6.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풍경과 작가의 특별함으로 재해석한 <어디서 굴러먹던 돌멩이> 는 국내외에서 작가 김순임을 주목하게 한 대표 작업으로 보여진다. 작업에 대해 설명해 달라.
<I meet with stone. – 어디서 굴러먹던 돌멩이>, 일명 ‘Stone Project’는 2003년 1월 안양에서 처음 시작해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는 장기 프로젝트이다. 5년에 한번씩 전체를 모아 개인전을 통해 발표를 하고 있기도 하다. 어느 새로운 지역이나 새로운 시간에 길 위에서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만나면 나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셔터를 눌러 그 돌멩이가 보았음직한 풍경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 돌멩이 위에 돌멩이를 만난 날짜와 장소를 적어둔다. 산의 돌은 그 산을, 강의 돌은 그 강을, 시골의 돌은 그 시골을, 도시의 돌은 그 도시를 닮아있다. 그곳에 오래 산 사람인 것 처럼 말이다. 사실 돌멩이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살지만 이름 없이 길 위에서 사람들의 발에 차이기도 한다. 그런 이름 없는 돌멩이를 누군가 작가가 만나고 그 만남을 기록하면, 전시장에서 재미있는 일이 생긴다. 사람들이 하나하나의 돌멩이를 자세히 보고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찾으려 하게 되니 말이다. 전시장 벽에 붙은 종이에 있는 사진과 새겨진 날자와 장소, 돌멩이에 써진 날자와 장소를 기반으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인연이 생겨난다. 매칭되는 사진과 돌멩이를 찾는 관람객에게는 작품을 1,000원만 받고 그 자리에서 나눠준다. 그 관객이 그 돌과 맞여진 인연을 위해 찾는데 들인 시간이 그 비용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돌은 또 누군가에게 기억되기에 이제 더 이상 이름 없는 ‘무엇’이 아니게 된다.

Q7. 그럼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작업은 무엇이고, 그 이유가 있다면?
모든 작업이 다 애착이 가지만 작업이 완성되고 나면 작품은 모두 그들의 삶을 살아간다고 믿는다. 나의 가장 애착이 가는 작업은 ‘다음 작업’이다. 그 이유는 지금 나의 온 영혼이 집중해 있고 또 다음에 만들어질 작품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직 이야기하기엔 이르지만 말이다.

Q8.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반드시 전달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반드시, 내가 작품을 통해 무엇을 전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미 관객들 모두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 있거나 가지고 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보았거나 느꼈던 것들로 작업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흔하고 사소한 것들을 작품을 통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또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다시 보게 하는 것이 나의, 작가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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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1. 전시명 : 김순임 개인전《땅이 된 바다_ 굴 땅》
2. 기 간 : 2016년 8월 26일(금) ~ 10월30일(일)
3. 장 소 : 인천아트플랫폼 E동 앞 야외
4. 전시연계 간담회 :《땅이 된 바다》에 관한 수다
1) 초대패널_ 채은영(임시공간 기획자), 정상희(Space Ado 기획자), 김순임(작가)
2) 장소 : 인천아트플랫폼 G2
3) 일시 : 2016년 10월 29일(토), 오후 3시

글 / 오혜미(인천아트플랫폼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