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문화적 가치 창조를 위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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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여성들은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또 하나 여성들이 싫어하는 이야기가 축구 이야기다. 그렇다면 여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의 결정판은? 바로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다. 이 정도면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아재 개그’는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다. 당연히 지금은 아니다. 군대는 몰라도 축구라면, 위의 이야기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해묵은 유머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여성들 중에서 열성 축구팬을 찾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기장에서 여성들의 응원이 더 열성적일 때도 있고, 심지어 아줌마들도 축구단을 구성해 슛을 날린다.

문화를 논하기 위한 지면에서 뜬금없는 축구 이야기는 사실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인천이 품고 있는 축구의 문화적 가치를 엿보기 위함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축구를 문화 현상으로 해석한다. 더 나아가 「축구자본주의」 같은 책에서는 경제적 관점에서 축구를 해부하고 있다. 경제까지는 아니더라도 필자는 축구와 문화 사이에는 분명 교집합의 빗금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인천을 들여다본다. 인천은 축구와 문화를 접목시킬 수 있는 최고의 여건을 갖춘 도시다. 스포츠는 스토리텔링이 접목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축구 또한 예외가 아니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유로2016’에서 8강의 기적을 일군 아이슬란드나 지난 시즌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챔피언 레스터시티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 때문에 최근의 스포츠 관련 보도 또한 단순한 스코어를 나열하는 것이 아닌, 경기 이면에 감추어진 이야기에 주목하곤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축구 도시’로서 인천의 무한한 가능성이 엿보인다. 인천에는 축구에 얽힌 기막힌 스토리텔링 소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스토리텔링은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19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성공회 소속 선교사로 추정되는 ‘시드니 J 파커’라는 한 영국인이 1901년 겨울에 강화를 방문했다. 그는 강화에서 어떤 축구클럽을 접하게 된다. 바로 강화학당 축구팀이다. 한복 유니폼(?)을 차려입은 이 축구팀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그해 3월 21일 영국 성공회 발행잡지인 ‘모닝컴(Morning Calm)’의 편집자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편지는 ‘편집자에게 지면에 반영될 만한 흥미로운 사진을 보낸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DEAR Mr. EDITOR, I here with send you a few more photographs which you may find interesting enough for the pages of Morning Calm.)

편지는 이어 “강화학당 축구팀이 G. A. 브라이들 목사에게 수년간 훈련을 받았다(Kang Hoa School fooball team, which has been carefully trained for some years by Rev. G. A. Bridle. )”며 “선수들이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고, 좀더 체계적인 훈련을 받는다면 잉글랜드 리그 진출도 가능하다.(The boys play a very good game, and after a little more training would be quite capable of taking part in some of the league matches in England )”는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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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이 편지는 한 세기 넘는 세월 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채 봉인돼 있었다. 그러다가 2007년 한국 근대 해군 창설과 관련한 옛 자료를 조사하던 인천 강화문화원이 서울 성공회대학교에 보관중인 옛 마이크로필름을 확보, 필름의 내용물을 분석하다가 바로 이 내용을 담은 8줄 가량의 영문 문서와 사진 1장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경인일보(2007년 7월20일자)에 ‘1901년 강화에 축구팀 있었다’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338740)라는 제목으로 최초 보도돼 체육계와 역사학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무려 115년 전에 잉글랜드 리그 진출도 가능한 축구팀이 우리나라에 존재했었다니… ‘유로2016’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바로 호날두의 소속팀인 레알마드리드(1902년 창단)보다 앞선 시기, 조선의 강화에 축구팀에 존재했다는 것 아닌가. 이 소식을 접했을 때의 흥분을 필자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이처럼 소중한 역사를 담은 문헌이 아직까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헌의 내용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대한민국의 축구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 근대 축구의 보급 연도(1904년)는 물론 국내 최초 공개 축구 경기 연도(1905년) 등 대한민국 근대 축구사를 수년 앞당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 체육회는 물론 인천시 등 그 어떤 공공기관도 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이 강화 축구팀의 스토리를 통해 다양한 문화적 파생상품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소설도 좋고 영화도 좋고, 요즘 유행하는 웹툰도 좋다. 야구에서는 이미 ‘YMCA 야구단’ 같은 영화로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진 바 있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심도 깊은 조사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조사와 연구를 토대로 학술대회 등을 통해 한국의 근대축구사를 재정립한다면 인천은 ‘대한민국 축구의 발상지라’는 새 타이틀을 갖게 된다. 인천시가 추진하는 ‘인천 가치재창조 사업’의 내용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니던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같은 재미없고 진부한 스토리텔링은 무시해도 된다. 그러나 ‘강화의 축구 이야기’ 처럼 인천의 위상을 드높이고 시민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는 소재라면 마땅히 새로운 조명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임성훈 / 경인일보 인천본사 문화체육부 부장




살고 싶은 도시는 ‘좋은 문화’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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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도시 인천’ 브랜딩 작업이 한창이다. 인천시가 ‘인천 음악’을 발굴 중이고, 부평은 ‘음악도시 부평’을 의제 설정하며 국비 사업까지 추진 중이다. 이는 인천에서, 혹은 인천사람들로부터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비롯됐기 때문이다. 실은 대중음악뿐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 민중가요 역시 인천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전역에 확산됐다.

얼마 전 만난 김홍탁 씨는 기자에게 ‘인천이 왜 음악도시일 수밖에 없는가’란 질문에 해답을 안겨주었다. 인천에서 낳고 자란 그가 기타를 처음 접한 때는 동산중학교 2년 때였다. 신포동에 살던 그는 친구 집 2층에 세들어 사는 한 미군의 기타소리에 반해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동산고 2학년 때부터는 신포동의 한 미군클럽에서 연주를 했고, 그 소문이 서울에까지 퍼져 서울에서 음악인을 꿈꾸던 가수 윤향기와 같은 동년배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그룹사운드인 ‘키보이스’ 였다. 이후 그는 신중현의 대척점에 서서 우리나라 로큰롤음악을 개척했다. 몇 년 전 만난 가수 송창식 씨도 마찬가지였다. 신흥동에 살던 그는 신포동 거리를 자주 오갔고, 미군클럽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들으며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다. 그런 인천에서의 성장은 훗날 그를 ‘세시봉’의 리더로 만들었다. 송창식은 이후 솔로로 독립하면서 팝송에 우리 전통음악을 접목한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음악을 하게 된 이유에 ‘인천’이라는 공간이 자양분처럼 깔려 있다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은 어떨까. 인천시립교향악단 초대 지휘자인 김중석 선생은 우리나라 클래식의 효시가 ‘인천’이라고 말해줬다. 아펜젤러가 선교를 위해 인천에 들어오며 건반악기를 가져왔고, 교회음악을 중심으로 클래식 음악인들이 성장했다는 것. 그렇게 성장한 사람들이 서울로 가서 활동하며 클래식음악을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그 역시 어린 시절 교회음악을 접하며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꿈을 키웠다.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백건우 씨도 청소년 시절에 인천에서 음악을 연주했을 정도로 인천은 클래식음악의 시발지였다. 민중가요 역시 70년대 후반 부평공단 등 인천의 공단을 중심으로 태동한 음악장르라 할 수 있다. 김민기 씨의 ‘상록수’, 박영근 시인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비롯해 많은 민중가요가 인천에서 태어나 우리나라 민주화의 씨를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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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 ‘세계 기록문화의 보고’라는 사실은 새로울 것도 없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200여 년 앞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인 <상정예문>이 인천에서 나왔고, 세계 최고 목판인쇄물인 ‘팔만대장경’이 인천에서 판각됐다. 활자의 발명은 인류의 문명을 앞당기고 지식을 크게 확산시킨 ‘제 1의 정보혁명’이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인천에 들어서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음악’과 ‘기록문화유산’을 비롯해 유·무형의 역사·문화적 가치는 너무 많아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인천이 이처럼 문화적 가치로 출렁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천이 우리나라의 ‘인후’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과거 고려왕조가 수도로 천도했던 것이나, 조선의 개항지였을 만큼 인천은 요지였다. 해불양수. 인천은 한편 포용의 땅,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유독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인천을 삶의 터전으로 찾아온 것은 바다가 육지를 끌어안듯 안아주고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사람들은 그 어느 도시보다 개방적인 인천의 문화에 동화되며, 혹은 새로운 문화를 퍼뜨리며 ‘다양성의 문화’를 빚어냈고 그 과정에서 찬란한 문화유산들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인천의 문화적 가치를 방치한 채 전략적으로 접근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인천시가 현재 ‘정체성 찾기’ , ‘가치 재창조’ 사업을 추진 중이나 열정과 노력보다는 구호가 앞서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인천만의 가치를 발굴하고, 그 가치를 인천시민들이 맘껏 향유해 ‘좋은 도시에 살아서 행복하다’는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해선 ‘문화’를 우선해야 한다. ‘문화’의 가치를 중시할 때 그 문화의 향기로 인해 모든 분야에서 시민 삶의 질은 저절로 높아질 것이다.

김진국 / 인천일보 문화체육부 부국장




인천을 떠난 사람들, 인천에 정착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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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서구 지역 이주배경 홈그룹 가족들이 다같이 월미공원 나들이를 했다.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며 게임도 하고, 음식도 나눠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오랜만에 한국이민사박물관을 찾았다. 중구에 위치한 ‘한국이민사 박물관’은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이한 2003년, 이민자들이 해외에서 보여준 개척자적인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뜻을 모아 건립한 국내 최초 이민 테마 박물관이다. “배 속에서 배 기름 냄새가 나서 구역질이 나고… 열흘을 굶고 있으니 기운이 하나도 없어…” 초기 이민자들이 탄 최초의 이민선 갤릭호 ‘함하나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 그들이 묵었던 열악한 환경 속의 객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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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크면서 조금씩 할 일이 늘어나고 있다. 일본 유학생이나 관광객들에게 한국의 정보를 소개하면서, 인천 정보도 함께 알리고 있는데 아쉽게도 여전히 대다수가 서울을 시작으로 한국을 알아 간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한국에 몇 번 온 경험이 있거나 오래 머무는 분들 중에서는 일부러 인천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시는 분들이 종종 있다고 하니 다행이다. 지난 3월, 일본 기타큐슈시와 요코하마시(두 도시 모두 인천의 자매도시다) 파견 공무원들에게 인천을 안내할 기회가 있었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인데도 인천에 애정을 갖고 인천만의 관광요소나 문화적인 가치를 재발견하려고 노력했던 모습이 참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인천 사람들도 좀 더 인천을 잘 알려는 노력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인천에 계속 살았지만, 서울에 일하러 다니고 인천은 그냥 먹고 자는 집만 있는 곳 같은 느낌이다. 나 역시 서울에서 일하는 부분이 있다보니,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 주말이라도 틈틈이 짬을 내 강화도에 있는 시댁을 찾곤 한다. 갈 때마다 ‘인천에는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여러 곳이 있겠구나’ 싶다. 내가 사는 지역에 관심을 갖고 그런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 지금 자라나는 우리 인천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지역에서 함께 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 자매도시와의 교류 사업 등에 참여하는 기회 등을 제공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천을 이끌고 나갈 다음 세대의 육성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곳 인천에서 자녀들을 키우는 입장이라서 더욱 그렇다. 나와 같은 이주배경 가정들에게는 이 지역을 잘 알고 지내는 기회가 더욱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우리 이주배경가족들이 이 이민사박물관에 찾아가면 얻어가는 것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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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인천 시민들도 이민사박물관을 많이 방문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고향인 인천시를 떠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이국땅에서 일했던 그들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되었으면 한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살면서, 다음 세대를 위해 학교를 건립한 것은 물론, 이국 땅에서도 한국 문화를 잊지 않고 살아갔던 그들의 삶에 배울 점이 많지 않은가. 또한 이곳 인천에서 새로운 가족을 구성해 정착한 이주배경 가정들 역시 배울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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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자들이 자발적으로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새로운 지역 활성화의 원동력이 된 사례는 많다. 인천시의 자매도시인 고베시 <믹스루트 칸사이>, 유럽의 <유럽평의회 인터컬츄럴시티 프로젝트> 등이 그것이다. 다함께 어울려 사는 지역사회 만들기야말로 바로 지역 공동체의 출발이다. 그리고 아마 그 첫걸음은 각자의 가족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야마다 다까코(인천시 시민기자)




그곳에 가면 살고 싶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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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풍경사진을 보며 감동받은 이유를 그곳이 시골이든 도시든 가보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거주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단지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어떤 곳에 살고 싶다는 마음은 그 장소가 방문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마치 이곳이 과거 내가 살았던 것 같은 아니면 확실히 이곳에 살아야만 할 것 같은 어떤 운명적인 만남처럼 행복한 곳이다. 프로이트는 어머니의 육체에 대해 “우리가 과거에 이미 그 안에 존재했음을 그토록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다른 장소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그곳에 잠시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거주하고 싶은 욕망은 ‘내 안에서 전혀 불안하게 하지 않는’ 어머니를 남몰래 되살아나게 하는 곳이다.

25년 전 중구청 앞 네거리에 운명처럼 첫눈에 반해 작업실을 만든 곳이 있었다. 2층 적산가옥으로 이름 모를 풀씨가 지붕에 꽃을 피울 만큼 낡은 곳이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아담한 정원에는 모란이 탐스럽게 피고 지던 곳이다. 고흐의 작업실처럼 나무 계단 위로 올라다니며 매일 창작의 꿈을 꾸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 주인집 아들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건물을 헐고 5층 빌딩을 짓는 바람에 나는 이곳을 떠나야만 했고, 주인 역시 과도한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일이 바빠서, 또 외국으로 삶을 이주한 후에도 몸은 이 곳을 떠나 있었지만 마음은 늘 이 곳을 잊지 못했다. 결국 지금은 홍예문 근처, 창문을 열면 손바닥 만한 바다가 보이는 곳에 공간을 만들어 다시 돌아왔다. 
내가 이곳을 다시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항구에서 뱃고동소리가 들리고 가끔 바다 안개가 홍예문 정상으로 올라오는 곳. 사계절 자유공원의 숲길로 산책이 즐거운 곳이다. 그런데 자유공원은 최근 눈과 귀가 피곤할 정도로 과도한 조명과 음악 소음이 넘쳐나 편하지 않다. 중구 일대 구도심도 마찬가지다.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과도한 장식들로 넘쳐난다. 화장기 들뜬 분칠된 얼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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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문화적 가치란 무엇인가? 그런 것이 따로 있기는 한 것인가? 개항장 최초의 역사들, 근대 건축물과 각종 기념비와 박물관, 차이나타운, 섬들의 가치, 해양 다문화적 성격 등을 인천의 특별한 문화적 가치로 보는 것은 인천 시민들이 욕망하는 기대치의 신화들이다. 지금 이러한 것들은 인천이라는 장소 특정성으로 규정하기에는 현실 공간에 존재하더라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부풀린 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실례로 최초의 철도 시발점인 인천역에는 조악한 기관차 돌조각이 볼품없이 서 있고 관광안내소 건물 뒤편에 심은 철도 시발 기념 식수 은행나무는 방치되어 있다. 차이나타운은 중국음식거리로 변질된 지 오래고, 그 옆 송월동은 동화마을 판타지로 마을 전체가 상품이 되었다. 다른 지역 벽화마을은 주민들이 나서 철거할 정도로 실패한 지 오래인데, 그 전철을 이제야 밟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관광객들로 넘쳐나 단기간에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언제까지 흥할 수 있을까? 급조된 것들은 오래된 역사 문화적 가치를 얻을 수 없다. 믿음과 신뢰가 바탕이 되지 못한다면 그곳을 다시 찾지 않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최근 인천의 섬을 창조적으로 활성화한다고 무의도에 카지노를 설치하고 백령도에 비행장을 만든다고 한다. 또 다른 섬들에는 골프장과 리조트를 만든다고 하는데 그 중 무엇 하나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문화적 가치란 타 지역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해서 유사한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런 곳은 세상에 많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장소, 그 장소가 가진 특성을 살려서 차이를 만들어낼 때 고유한 문화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적어도 인천의 문화가치라고 한다면 불필요하게 덧붙여진 장식들을 걷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중구청 일대 일본거리는 껍데기만 일본풍으로 덮은 짝퉁 거리가 된지 오래다. 더 이상 중,동구 일대 인천의 원도심이 특색 없는 도시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원도심의 오래된 가옥을 허무는 것도, 무분별한 주차장 만들기도 그만둬야 한다.

원도심에는 낡고 허름한 집 역사만큼이나 그곳을 오랜 세월 묵묵히 지켜온 주인들이 있다. 중고 서점, 카페, 음식점, 재래시장… 오래된 가게들이 유산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역사와 추억이 깃든 것들은 시간이 만든 아우라다. 한 번 훼손되면 다시 복원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부실 공사로 중단된 월미은하모노레일 재공사, 대책 없는 국제선여객터미널 이전, 산업도로 신설로 배다리 마을공동체를 두 조각내는 것은 인천의 문화정체성과 가치를 죽이는 일이다. 이런 일들에 소요되는 비용의 1/10만이라도 좋다. 원도심의 낡은 가옥을 시가 매입하고 문화예술가에게 기획이나 창작을 할 수 있는 거주공간을 만들어 준다면 전국의 문화예술가들뿐 아니라 외국에서까지 좋은 작가들이 몰려들 것이다. 더불어 갤러리 유치에 인센티브를 주고, 문화 공연이 가능한 카페와 오래된 음식점이 활성화되도록 한다면 어떨까? 그들이 만들어내는 뛰어난 창작물은 반드시 인천을 소재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천에 거주하면서 생산한 작품들은 결국 인천의 문화적 가치를 높여줄 것이다. 인천은 아직도 광역시 중 유일하게 시립미술관이 없는 곳이다. 언급조차 되지 않는 걸 보면 시에서는 아예 의지가 없는 모양이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쉬바빙 같은 마을에서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고, 인천을 기록한 사진과 영화를 보고, 연주도 듣고 연극도 관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술가들이 몰려들고 그들의 창작행위가 365일 이루어지는 작은 축제들이 있는 곳, 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게 만드는 곳이 되는 것만큼 좋은 문화적 가치는 없을 것이다.

이영욱(사진가)




‘있는 것’에 대한 긍정, 인천다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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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는 말을 들으며 내가 살고 있는 인천이 가진 문화적 가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문득 생각해 본다. 인천은 전체 면적이 약 1,00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국내에서 가장 큰 도시이기도 하면서 약 30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또 국내 최초의 근대적 개항이 있었던 항구 도시이며, 경제자유구역과 세계 1위의 국제공항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천은 외지 유입 인구가 87%에 이르고, 인천을 떠나고 싶다는 시민도 48%에 이르는 등 정주 의식이 희박한 곳이기도 하다. 또 제조업 중심의 공단 지대 조성으로 인해 각종 환경오염 문제가 제기되어 왔고 서울과 지역적으로 가까운 까닭에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과 투자가 미미하여 문화의 불모지, 문화의 변방 도시라는 평가를 오랫동안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정주 의식이 약하다는 것이 꼭 부정적인 것일까? 그것이 바로 인천이 가지고 있는 지역적 특색이자 인천의 고유한 문화적 가치가 될 수도 있다. 정주 의식이 희박하여 뜨내기들이 많다는 일종의 열등감이 오히려 인천의 인천다움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다. 서울의 변방 도시로서 문화의 불모지로 인식된다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 문화가 지역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삶의 총체적 모습을 의미한다면 문화의 불모지라는 말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인천은 그 나름대로 독특하고 고유한 삶의 모습을 온전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 도시’에 대한 강박과 열등감은 인천의 ‘있는 것’에 대한 올바른 시선과 판단을 가로막는다. 송도 신도시와 인천국제공항이 동북아 허브 도시로서 인천이 갖는 지역적 상징성을 보여준다는 생각도 좀 더 비집고 들어가 보면 ‘인천다움’에 대한 근본적 성찰보다는 ‘문화 도시’로서 내세울 만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열등감이 자리한 까닭이 아닐까.

문학에 미적 범주라는 것이 있다. 어떤 작품에서 ‘있는 것’에 대해 긍정하며 그것에 만족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면 우아미, ‘있는 것’을 긍정하면서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있어야 할 것’을 향해 나아가는 내용을 담고 있으면 숭고미라 한다. 반면 ‘있는 것’에 대해 부정하며 ‘있어야 할 것’을 향해 노력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면 비장미라고 한다. 우리 인천의 발전은, 문학 작품의 감상에 빗대어 말하자면 비장미의 특성이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천의 ‘있는 것’들은 긍정의 대상이기보다는 버리고 숨기거나 고쳐 바꾸어야 할 부정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있어야 할 것’을 위해 애써 노력해 왔으나 우리가 정작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부정적이었다. 서울과 비교하면서, 혹은 다른 광역시와 비교하면서도 인천은 늘 ‘다름’보다는 ‘모자람’과 ‘결핍’에 방점을 두고 이를 개선해 오려고 노력해 왔다. ‘다름’과 ‘부족함’이 함의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비장미가 결코 우아미나 숭고미가 될 수 없듯이, 인천이 갖는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도 먼저 인천의 ‘있는 것’에 대한 긍정적 수용, 그리고 ‘다름’에 대한 합리적인 인식이 바탕이 되어야 논의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문화 도시’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이 화려하고 편리한 복지에 있다면 문화 도시로 가는 것은 어쩌면 시간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인천다움은 화려함과 편리함의 그늘에서 점차 사라질 지도 모른다. ‘문화 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있는 것’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얼마나 뒷받침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아닐까 싶다. ‘무엇’이 있어야 문화 도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무엇’을 있게 하려는 노력에만 집중하다 보면 늘 본질적인 고민은 뒷전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왜 있어야 되는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천의 ‘인천다움’은 이러한 물음이 전제될 때 비로소 드러나게 될 것이라 본다. 문화 도시를 향한 인천의 노력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결국 경제적 논리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는 숭고미가 아니라 비장미가 될 것이다. 인천의 문화적 가치를 생각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 인천의 ‘있는 것’에 대한 긍정적 내면화이다. 요컨대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라는 당위적 필요성보다는 ‘무엇이 어떻게 있는지’에 대해 관심과 긍정적 이해가 더욱 필요하다.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오래도록 인천에 있어 오며 인천의 특성을 형성해 온 것들에 대한 구성원들의 온전한 관심과 이해가 선행될 때 인천의 ‘인천다움’은 올바른 모습을 찾을 수 있으며 이것이 인천의 진정한 문화적 가치를 형성할 것이다.

이동구(광성고등학교 교사)




수동적 다양성에서 창조적 다양성으로

 

우리나라 도시들 가운데 서울을 빼놓고 인천만큼 거대하고 현기증 나는 변화를 겪어온 도시는 없을 듯싶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그러니까 지금부터 110여 년 전, 인천의 인구는 고작 2만5천 명을 웃도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개항 이후에도 한 동안 자그만 항구도시에 불과했던 셈이다. 개항 전에는 그야말로 한적한 어촌 마을이었을 것이다. 그런 곳이 지금은 300만 인구에 육박하는 거대도시가 되었다.

100년 사이에 인구가 100배로 증가했다. 이 사실 속에는 인천의 모습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듯하다. 이 정도의 폭발적 증가는 다른 곳에서 대량의 인구가 끊임없이 유입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주지하다시피 인천에는 전국 각지에서 이주해 터를 잡은 주민들이 또는 그들의 2세, 3세가 원주민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특정지역 출신이 많기는 하지만,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까지 포함하여 지역적 뿌리가 다른 사람들이 이웃이거나 동료인 곳이 바로 이 도시이다. 다른 어느 도시보다 원주민의 텃세(?)가 없는 것은 이런 까닭이 아닐까 한다. 뿐만 아니라 개항기에는 일본인들이 흘러넘쳤고 서양인들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한다. 중국인들은 많이 떠나버렸지만 아직도 한편에서 후손들이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최근에는 공단을 중심으로 상당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었다. 송도신도시에선 조깅을 즐기는 외국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인천이란 곳은 다양한 출신과 국적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정착한 (물론 한동안 머물다 떠나기도 했지만) 다원적 도시이다.

도시의 팽창과 격변은 주민뿐 아니라 인천의 조감도에도 참으로 다채로운 색깔과 모습을 입혀 주었다. 바다야 원래 인천의 자랑이었지만, 지금은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섬과 대문짝만한 강화도까지(강화도와 함께 선사시대와 고려의 유산까지) 인천에 편입되었다. 인천은 대지와 바다와 섬을 두루 갖춘 행운의 도시이다. 오래된 역사뿐 아니라 최근의 역사도 이곳엔 차곡차곡 쌓여 있다. 육이오 전쟁 통에 대다수가 파괴되기는 했지만,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의 유산인 서구식 석조건물과 일본식 적산가옥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중국 붐을 타고 차이나타운에는 중국풍의 건물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산업화 시대를 상징하는 공장들이 여전히 도시 곳곳에 군락을 이루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다는 최첨단 빌딩 동북아무역센터가 위용을 자랑한다. 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길다는 인천대교를 건너면 세계적 수준의 인천국제공항이 있다. 그러나 구도심 뒤편에는 좁은 골목 양옆으로 낡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뜻하는 것은 한 마디로 다양성이 아닌가 한다. 인천을 구성하는 주민도 다양하고 풍경도 참으로 다양하다. 이렇게 풍부한 다양성은 국내 어떤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서울특별시는 특별하니까 예외로 하자). 그런데 다양성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문화적 창조의 비옥한 토양이자 원동력이 되지만,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갈등과 분규의 원인이 되거나 기껏해야 이질적 요소들이 지리멸렬하게 병존하는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인천의 다양성은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사실 이 도시의 혼란스런 모습은 시민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외부의 힘에 의해 타의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서울 중심의 논리에서 파생된 현상, 다시 말해 서울 집중화의 부대현상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그러니까 역사와 지정학적 조건에 따른 다소간 우연적 산물인 셈이다.

이유가 어떠하든 인천은 다양한 출신과 문화가 공존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지금은 이 다양성을 도시의 정체성으로 수용하면서 다양성의 긍정적 측면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본다. 이질적 요소가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도시,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창조적으로 공존하는 역동적 도시가 결국 인천이 지향해야 할 미래상일 것이다. 수동적, 종속적 다양성을 창조적 다양성으로 변환하는 이 어려운 과업을 누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방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건강하고 성숙한 시민의식이 없으면 이러한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시민사회, 지역의 지도층과 엘리트, 교육기관이 무엇보다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의제가 아닌가 한다.

최성을 인천대학교 총장




혜미씨와 금희씨

 

 

지난 4월 8일(금)에는 좀 바빴다. 정보산업고에서 사전투표하고 상경해서 인사동 여자만에서 구중서, 정희성 두 선배를 모시고 즐거운 점심을 들고 여자만 앞 인사동사람들에서 차도 한잔 하노라니 벌써 오후 다섯시, 일정 때문에 먼저 일어서 낙원표구에 가 표구 맡기고 6시에는 홍대 앞 카페 꼼마에서 열린 문학동네 시상식에 참석했다. 제자 김금희 군이 제7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덕으로 오랜만에 젊은 문단 공기를 쐰 셈인데 예정에 없는 즉석 축사까지 하곤 대학 은사 정병욱 선생의 사모님이 수를 다하셨다는 전갈에 강남성모병원으로 문상을 갔다. 빈소에서 임형택 선배를 비롯한 대학 선후배들과 담소하다가 길이 멀어 10시반쯤 서둘러 인천 길을 더듬어 귀가했다.

그뒤 시상식에서 받은 수상작품집을 틈틈이 뒤적거리다가 장강명의 소설 「알바생 자르기」에서 나도 모르게 멈췄다. 칙릿(chick lit)의 기풍이 물씬한 이 단편 역시 대도시 서울의 젊은 직장여성들을 생생하게 포착할 줄 아는 작가답게 은영(최과장)과 혜미(비정규직)의 밀당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갑을관계임에도 두 여성이 상투형으로 단일화되지도 않았거니와, 특히 후자의 생존술은 놀랍게 치밀해서 자칫 밉상으로 보이기도 할 만큼 리얼하다. 그런데 그녀는 인천에 산다. 서두에 “혜미 씨는 집이 멀어요” 할 때 웬지 불길하더니 기어코 “혜미 씨가 인천에서 1호선 타고 오거든요”에 이르러 하릴없다. 야간대학을 나온 비정규직 신세로 퇴근하면 종로에 있는 영어학원에 출석해야 하는 이 시대 청춘의 평균적 초상! 그녀가 바로 인천인 것이다.

서두에 어느 날의 서울 일정을 개관했지만 새삼 인천과 서울의 문화적 거리를 실감한 바, 상경하기 전 투표하러 들른 정보산업고는 옛 인천고 자리다. 볼품없는 파싸드 너머에 엎드린 정보산업고를 보니 절로 인천고 교사(校舍)가 그립다. 불 타기 전 송림학교와 마주본 인천고 역시 붉은 벽돌 집이었다. 그나마 지금도 여전한 창영학교가 위안이다. 붉은 벽돌의 이 세 학교가 배다리 철교를 마주보고 건재했다면 절로 배다리 일대가 향기로웠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제는 더 이상 근대건축물들을 부수지 말아야 한다. 이러구러 상경해 인사동에 오니 더욱 그렇던 것인데, 내가 가져간 두점의 글씨(廣山과 南田)를 알아보고 장황을 추천하는 표구사 주인의 응대에 내심 놀랬다. 빈소에서 나눈 대화조차 죄송하지만 재미있고 유익했으니 긴 하루가 길지 않았다.

오늘의 인천은 어디에 있는가? 외형적으로는 대구를 넘어 한국 제3의 도시라고 자랑해도, 과연 인천은 제3의 도시일까? 대구보다 아니 광주보다도 인천의 위치에너지는 낮다. 정치적 후순위는 그렇다쳐도 문화는 어떤가? 정치는 낮은데 문화가 높을 수도 있겠지만 인천은 아니다. 인천정치의 현주소는 인천문화의 현주소다.

이 곤경에서 벗어날 길은 어디 있을까? 갑자기 문화 문화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아시다시피 문화에 비약은 없다. 교양의 원말인 독일어 Bildung이 ‘형성’이듯 일상의 지속적인 축적 위에서 문화로 가는 길이 스스로 열릴 것이다. 그러니 예전에는 뭣도 있었고 또 뭣도 있었고 또 뭣도 있었는데, 하며 자대(自大)하지 말 일이다. 자대하면 곧 지금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자소(自小)하게 되니 헛애만 키일 뿐이다. 옛일을 아는 건 물론 좋은데, 그게 오늘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그저 복고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공연히 사라진 옛것을 애도하지 말고 혜미 씨를 여여(如如)히 즉 지금의 간난을 포옹하고 미래로 투척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그리고 그 도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혜미 씨가 등장하는 이 작품집의 맨앞에 인천 작가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가 위치한다. 부산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란 그는 인천을 살며 인천을 사유한다. 혜미 씨이면서 혜미 씨가 아닌 우리의 김금희들이 바로 인천 문화의 오늘이요 내일이 아닐까.

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무엇을 인천의 문화적 가치로 가꿀 것인가?

인천은, 가우디란 천재 예술가가 도시 전체를 채색한 바르셀로나도 아니고, 땅 위와 땅 밑에 2000년의 유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도(古都) 경주도 아니다. 그러나 얼마 전 개방된 미추홀 백제의 역사가 서려있는 문학산성, 강화 고인돌이나 고려 문화유산 등이 오랜 역사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고, 근대 개항 후의 문화유산들은 구청 일을 보러 다니면서도 손쉽게 일상생활 속에서 마주친다. 인천의 자랑거리로 근대건축물을 보존하자던 한 민간단체의 외침 등 민관의 많은 노력으로 20여 년이 지난 요즘, 주말이면 자유공원 일대 차이나타운 거리는 수많은 인파로 넘쳐난다.

시간의 역사는 항상 자연 지리적 장소 속에서 펼쳐졌다. 인천은 바다에 접해 일찍이 항구에 배가 드나들었다. 근대개항과 더불어 서구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하였으며, 동란으로 찢어진 북한과도 가까워 이북 피난민들이 모여 드는 보금자리 역할도 하였고, 산업화 시대에는 주안·부평·남동공단에 전국 팔도 주민들이 모여 용융되는 용광로 역할도 하였다. 이런 인적 자원의 구성은 인천의 특성도 만들어 냈다. 벌써 공단으로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들과 최근 송도신도시의 여러 국제기구들, 국제학교로 여전히 유입되는 외국인들을 바라보면, 인천의 지정학적 특성을 새삼 깨닫는다.

(사)해반문화는 1999년 ‘열려있는 땅 인천’ 인천 지역 엘리트 정주의식 조사보고서에서, 바다와 항구라는 입지가 인천의 특성으로 개방성과 다양성, 포용성을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다. 지금은 인천공항과 송도신도시, 신항만 등이 또 하나의 정체성으로 미래를 향한 역동성을 추가하고 있다. 필자는 2년 전 59회 해반문화포럼에서 “구도심의 과거와 신도심의 미래를 연결하는 데 인천 문화의 비전이 있다”고 제안한 바 있다. 많은 이들이 그간 인천의 정체성에 대해 여러 탐색을 해왔고 나름대로 가꾸어 왔다. 최근 인천시의 가치재창조 작업도 그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문화재가 귀중한 까닭은 그 안에 선조들의 삶의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이고, 정작 문화에서 귀중한 것은 대체로 눈에 안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눈으로 보아야만 고개를 끄덕이기 마련이어서, 지역의 문화적 가치를 그 흔적인 건물이나 외양에 치중해 두기 쉽다. 그러나 달동네박물관의 1960~70년대 단칸방 헌 이부자리에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살을 에는 한 겨울 추위 속에서도 옹기종기 서로의 발을 디밀어 한기를 체온으로 녹였던 그 따스함 때문이었고, 방 한 구석 밥상을 겸한 책상 위에 놓인 동생들의 교모(校帽)를 위해 기꺼이 중동과 월남, 독일로 나갔던 오누이들의 희생적인 사랑 때문이었다. 한국 근대화를 이끈 시대정신,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 그 이부자리에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눈에 안 보이는 것들, 홀로 시험 보며 자존감을 키우는 수 십 년 전통의 무감독 고사의 정신을 자율적 시민의식으로 접목시킨다든지, 한국 최초로 어린 여성들이 학교를 다니며 남녀차별을 넘어섰던 사립학교의 정신을 기린다든지, 팔도민이 모여 살며 체득한 지역감정 너머의 자유스런 개방성을 인천의 긍지로 삼는다든지, 168개의 천혜의 섬들을 그대로 후손에게 넘겨주는 자연 보존 의식을 가꾼다든지, 앞으로 우리가 문화적 가치로 만들어나갈 것은 도처에 있다.

어느 땅이든, 그 땅에 사는 사람에 걸맞은 문화가 있다. 유명세를 떠나 지역민이 얼마나 소중히 여기느냐에 따라 문화적 가치가 가름된다. 사실 내 주변을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보다 더 문화적인 것이 있을까? 문화란 가꾸어나가는 것이란 점도 주목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아끼고 보존하여 미래의 문화적 가치로 가꾸어 나갈 것인가 하는 선택과 열정이 문제이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추모하는 추도사에서, 케네디는 그 나라를 알려면 그 나라가 무엇을 기리는지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인천의 문화적 가치라고 여기고 기렸는가? 찬찬히 한번 생각해 보자.

 

이흥우 (사)해반문화 명예이사장, 철학박사




외국인이 나에게 깨우쳐 준 인천의 중요성과 자부심

10여년 전 인천 송도지역 등의 투자유치를 위해 미국의 여러 회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미국의 투자 회사들과 미리 일정을 협의하고 우리 일행은 비행기에 올랐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미국 회사 관계자들에게 설명할 여러 자료들을 꼼꼼하게 읽고 또 읽었다. LA공항에 도착했을 때, 먼저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마중 나온 미국회사의 리무진 자동차였다. 하얀색 리무진은 그야말로 마피아 영화에서나 보던 길고 큰 자동차였는데 차 안에 TV, 칵테일 바(bar)도 있는 처음 타보는 의전용 차였다. 미국 회사의 사장은 바쁜 일정 중에도 우리 일행에게 식사대접도 하고, 사업 현장도 구경시켜 주며 그야말로 정성을 다한 대접을 해주었다.식사를 하면서 내가 “당신은 미국에서도 굴지의 큰 회사 대표인데 인천에서 온 우리를 이렇게 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하고 물으니 사장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당신들이 중요해서라기보다 인천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장은 이어 인천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에게 상세하게 설명했다. “인천은 동북아의 핵심 지역 중 하나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동북아의 경제적 부상과 인천의 중요성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아시아 사업에 있어 인천은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다”라고 설명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인천의 중요성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인천의 지정학적, 역사적 중요성 그리고 동북아의 급격한 부상을 세계의 전문가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간파하고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을 만나면서 인천의 중요성을 새삼 재인식하고 인천 시민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말할 수 없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느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 인천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인천의 장점과 잠재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상하이 푸동, 싱가폴 등 타국에 비해 우리의 발전 속도가 더디고 발전 내용도 만족스럽지 못한 점을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지난 10여년 간 인천은 매우 큰 변화 속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세계적인 인천공항, 인천경제자유구역, 인천대교, 경인 아라뱃길, 인천 신항 및 북항 등이 타 지역의 부러움 속에서 건설되었고 168개의 섬 등, 대 중국 무역과 남북 협력의 중심 도시로 발돋움하였다. 그리고 인구 300만의 가능성과 다양성 그리고 포용성을 갖춘 국내 3대 도시가 되었다. 국내 어느 도시도 인천과 비교될 수 없는 역동적인 도시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될 것은 인천이 갖고 있는 지정학적 비교 우위, 물적 요건 등 잠재력에 비해 그동안 인천이 창출해낸 성과는 상대적으로 미흡했다는 사실을 여러 통계가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인천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인천의 현안 문제와 삶의 지표가 좀처럼 개선되지 못했음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뭔가 인천의 총체적 역량과 발전 잠재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는 없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잘나가는 도시 그리고 번창하는 도시는 유형적 자산 이외에 구성원들의 상상력, 그 상상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지역 시스템, 그리고 이것을 효율적으로 밀어주는 정치와 시민이 있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석에 따른다면, 우리 인천은 과연 지역을 사랑하는 인재가 제대로 활동하며 시민들이 인천의 목표와 비전을 위해 힘을 합치고 밀어주고 있는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유정복 시장은 취임 이후, “인천가치재창조”를 시정의 제1목표로 설정하고 여러 정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인천의 꿈’을 이루어내는 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자각하고 이를 위해 인천인들이 자긍심과 애향심으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 인천가치재창조의 기본 철학이다. 인천이 갖고 있는 하드웨어적 강점을 제대로 발전시키려면, 인천인의 관심과 참여 그리고 인천에 대한 자부심과 인천 사랑 등 소프트웨어적 가치가 합쳐져야 한다는 것이 그 배경이다. 올바른 방향 설정이요 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인천 발전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인천인들이 인천인임을 자랑스러워하고 이에 걸맞는 애향심과 자부심으로 힘을 합치는 것이 타 시도의 지역 이기주의와 중앙정부의 인천 홀대론을 불식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알고 올바르게 변화시키기 위한 반성과 분발이 요구되는 이유인 것이다.

인천은 역사적으로 개화의 선구도시이며 다양성, 포용성, 개방성을 갖추고 있는 열린 도시이다. 여기에다 최근 급격한 인구 유입으로 인천을 알지 못하는 인구가 급증하고 있어 국내 다른 지역처럼 “우리가 남이가”하면서 지역을 아끼고 사랑하며 뭉치는 이른바 무조건적인 애향심을 기대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그러나 소통, 융합, 퓨전, 다문화 시대에 이미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인천의 인구학적 다양성과 포용성은 오히려 21세기 인천 발전의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 시대에 걸맞는 인천의 장점들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지에 대해 매우 세심하고 지속적인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때이다. 태어난 곳보다 살고 있는 도시에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겸손하게 진정성을 갖고 다양한 과제를 발굴해야 한다. 인천시민의 자긍심과 애향심이 발휘되고 표현될 수 있도록 다양한 계기를 만들고, 그것들이 결집될 수 있도록 네트워킹하며, 자원의 배분도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인천의 비전이 21세기 시대정신과 공존할 수 있도록 진지한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넓은 안목과 포용력 그리고 뜨거운 가슴으로 인천의 마음들이 한데 모아지도록 노력할 중요한 때이다.

유필우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