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비전, 시대정신을 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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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직이든 발전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비전’이다. 비전이 뚜렷해야 방향이 서고 구체적인 실천 계획도 준비할 수 있다. 비전이 공유되어야 조직구성원의 의지와 에너지도 결집할 수 있다. 따라서 비전 없는 지도자만큼 무책임한 지도자는 없다. 구성원들이 비전을 공유하지 못하는 조직만큼 위태로운 조직도 없다. 특히 급변하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나라 일도 다르지 않다. 지금 나라가 혼돈스러워 보이는 것은 경제난 때문이기도 하고 한반도 긴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국가의 비전이 안 보인다는데 있다. 대한민국이 힘을 모아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함께 어디를 바라보고 국력을 모아야 하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나라의 중요한 분들이 국가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눈앞의 이익을 놓고 이전투구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국가 혼란의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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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도 마찬가지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마다 지역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뛰는 것처럼 보이지만 뭔가 어수선하다. 지역민의 역량이 잘 모아지는 것 같지도 않다. 일관성 없는 정책들이 즉흥적으로 내던져지는 것 같기도 하다. 지역사회의 비전이 정확하지 않으니 생기는 문제들이다. 설령 비전이라고 제시되어 있는 경우에도 지역의 지도자들과 공직자들과 지역민들이 그 비전에 공감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 출발하지 않고 탁상에서 만들어진 비전일 경우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비전이 제시되어 있다고 해서 다 제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인천도 비전을 정확하게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비전을 중심으로 장단기 계획이 설정되고, 그것을 지역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인천시민들이 공감ㆍ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전이 힘을 갖고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해 본다.

첫째, 인천의 비전은 현재 상황과 여건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진단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 좋아 보이고 그럴 듯해 보인다고 해서 다 끌어 써서는 안된다. 현실에 기초해서 현실적인 비전을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시민의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전문가 몇 사람이 만들어 자신들만이 공유하는 비전이어서는 안된다.

셋째는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 급변하는 시대에는 시대정신 또한 급변하기 마련이다. 현재와 미래를, 그리고 이 시대의 정신을 정확하게 읽어내 그것을 비전으로 담아내야 한다. 시대와 불화하거나 시대가 나아가는 방향과 역행해서는 그 비전이 힘을 가질 수 없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도 없다. 오히려 지역을 퇴행시킬 뿐이다.

여기서 특히 어려운 것이 바로 시대정신을 담는 것이다.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는데 대해서는 모두 공감하지만, 시대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어려워한다.

과연 2016년, 지금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몇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개방성이다. ‘열린 도시’를 지향해야 한다. ‘열린 도시’는 몇 가지 의미를 갖는다. 폐쇄성을 극복해야 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도시를 지향해야 한다. 출신 지역이나 학연 등 특수한 연고 변수가 인천을 좌우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학연이나 지연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다. 이념적으로도 당연히 개방적이어야 한다. 우리와 다른 문화와 지구촌을 향해서도 개방적이어야 한다. 인천은 어떤 면에서도 열려 있고 유연하며 포용적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안전과 평화다. ‘안전 도시, 평화 도시’야말로 21세기 도시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비전이다. 지금 인류 사회는 각종 위험과 폭력으로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촌의 어느 도시도 일상화된 테러와 전쟁과 재난과 재앙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모든 사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과 안전과 평화를 지켜내는데 있을 정도다. ‘안전 도시, 평화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지는 모든 도시들이 직면한 핵심 과제가 된 것이다.

셋째는 ‘생태 도시’다. 지금 지구촌은 심각한 환경오염과 생태계 위험으로부터도 몸살을 앓고 있다. 기후변화는 매년 수많은 생물종을 멸종시키고 있으며, 인류의 미래까지 위협하고 있다. 그런 21세기에, ‘생태 도시’는 선진도시의 피해 갈 수 없는 숙제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넷째는 협치다. ‘민-관 협치 도시’야말로 인천의 중요한 비전이어야 한다. 시민참여형의 정책결정, 시민과의 원활한 소통, 여-야간 협치, 민-관간 협치를 통한 상생 정치야말로 지역이든 나라든 미래의 비전일 수밖에 없다. 오래된 관료제의 권위와 관(官) 중심의 사회질서를 내려놓고, 수백 년 이어져 온 수직적 위계체제의 관행을 내려놓고,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면서 민과 관이 함께 책임지는 도시가 이 시대 정치-행정의 비전인 것이다.

다섯째는 창조다. ‘창조 도시’로 나아가야 한다. 21세기 지식정보시대에서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지역이든 창조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시민의 창의성을 제고해야 하며, 창조적인 시민들이 자유롭게 모여드는 도시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려면 다양성을 존중하고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를 진작해야 한다. 문화예술 활동의 공간도 넓어져야 한다.

인천이 인구 300만, 3대 도시의 위상을 넘어 지방 시대를 이끄는 선진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현실에 기반해 있으면서도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을 설정하고 그 비전을 중심으로 지역민의 열정과 의지를 모아낼 수 있어야 한다. 시대정신을 통찰하고 그것을 비전에 담아내며 지역민의 열정을 결집시켜 냄으로써, 인천이 전국의 모든 지자체들이 부러워하는 선진 도시로 발전해 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홍덕률 / 대구대학교ㆍ대구사이버대학교 총장




‘짜장면식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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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2005년 12월 5일 저녁 무렵의 일이다. 인천문화재단에서 소략한 발표회가 열렸다. 한중간의 도시교류, 곧 인천과 티엔진 그리고 부산과 상하이 간에 주고받은 도시 교류의 정황을 돌아보는 토론회 자리였다. 약정 질의자로 참석한 내가 거기서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것은 한국의 짜장면 1일 소비량이 700만식에 달한다는 거였다. 계산을 대보니 얼추 1인당 1주일에 한번 꼴이다. 가합하다고 여긴 것은 내 스스로 거기 해당된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짜장면 먹은 지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끼니때 길거리를 지나다가 중국집이 눈에 들어오면 자연스레 짜장면이 떠오르면서 입가에 군침이 도는 것이니, 인이 배겼다는 말이 그 말인 것이다.

그 이튿날 아침 나는 타이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타이베이 공항에 내리자 눈을 찔러오는 문구가 있었다. 타이베이에 와서 꼭 해야 할 열 가지 가운데는 르위에탄(日月潭)에 가보라거나 구꿍(故宮) 박물원에 가보라거나 103층 짜리 빌딩에 올라가 타이베이 야경을 감상해보라거나 하는 등은 그렇다 쳐도, 니우러우미엔(牛肉麵)을 꼭 먹어보라는 거다. 이 문구가 내 눈길을 잡아당긴 것은 필시, 그 전날 인천에서 짜장면의 1일 소비량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였기 때문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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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칭화대학에서 개최된 학술 발표회를 마치고 타이베이 시내에 자리 잡은 니우러우미엔 거리에 들려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다른 니우러우미엔 맛을 시식하고 나오는데 서점이 눈에 뜨인다. ‘직업병’을 버리지 못하고 서점에 들어가보니 <니우러우미엔지에>(牛肉麵節)이라는 책자가 다시 내 눈길을 고정시킨다. 서문을 쓴 이가 당시 타이베이 시장 마잉지우(馬英九)니 전후 사정이 감이 잡힌다. 니우러우미엔을 도시 브랜드의 물목에 올려놓은 거다. 타이베이와 우육면, 인천과 짜장면이 서로 연결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던 거였으니.

그 뒤 짜장면에 필이 꽂혀 중국의 옌타이(烟台)는 물론 산동성에서 북경까지 싸돌아다니기를 몇 차례 하던 중, 인천문화재단에서 여비를 대줄 테니 경인일보에 짜장면 이야기를 썰을 풀어보라는 거다. 당시 재단의 대표로 일하던 최원식 교수께서 평소 동아시아 타령을 하는 후배에게 ‘배당’한 용역이었겠다. 그렇게 짜장면과 인연을 맺어 연재를 마친 다음, 학교 수업에도 몇 학기 우려먹었겠다. 그런데 짜장면 뒤에 감추어진 역사와 내력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였으니…. 과장을 보태자면, 엄청나고 무지막지한 비밀이 숨어 있는 거다.

그 비밀 가운데 소소한 몇 가지를 공개하기로 하자. 첫째 춘장의 정체. 우리가 짜장을 볶는데 들어가는 이른바 춘장의 본명은 티엔장(甛醬) 혹은 티엔미엔장(甛麵醬)이다. 티엔(甛)은 영화 <첨밀밀>의 그 첨이다. 콩으로 만든 우리네 된장의 구수한 맛과는 다른 달달한 맛이 니는 건 밀가루를 주원료로 썼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으로 건너와 춘장으로 불리게 사연이다.

짜장면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산동은 밀의 주산지. 따라서 주식이 밀이고 거기서 자연스레 만두라는 메뉴가 탄생된다. 노수 강의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상 위에 만두를 빚어 올린 제갈량이 바로 산동 출신이다. 그 만두에 양고기나 돼지고기 등의 소를 넣은 것은 예전에는 일반 노백성들이 언감생심 명절에나 차례가 돌아가는 그런 것인지라, 소를 넣지 않은 만두가 주식이었다. 그렇게 밀가루로만 빚어 찐 만두를 그냥 먹으면 그게 좀 그렇다. 그래서 곁들인 게 바로 날 대파인데 대파만 먹기에는 그야말로 싱거우니 그걸 춘장에 찍어먹은 것. 그런데 그 대파를 뭐라고 부르냐. 총(蔥) 혹은 따총(大蔥)이라 부른다. 춘장은 그러니까 총장의 와전이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대충 아는 사람은 다 알게 되었다. 허명만 화백의 <식객>에도 대강 소개가 되어 있으므로.

그런데 그 대파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닌 점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산동의 장치우(章丘)에서 생산되는 대파는 길이가 2m에 한 뿌리 무게가 1kg 나가는 그야말로 대파인 것. 파는 본시 양물이라 겨울에도 날씨가 웬만하면 밭에서 자란다. 그래서 중국을 휩쓴 인기 드라마 <촹관동>(闖關東)에tj ‘장치우 대파 한 뿌리면 겨울을 난다’고 하는 대사도 바로 이로부터 비롯된 것. 만두를 한 입 베어 먹으면서 다음, 길고 굵은 대파를 총장(춘장)에 찍어 먹는 게 바로 산동의 노백성들이 일용하는 주식이었다고 보면 어김없다. 우리로 치면 여름에 찬물에 보리밥 말아 풋고추를 된장 혹은 고추장에 찍어먹는 것과 영락없다.

대파를 찍어먹던 그 춘장을 우리는 지금 양파를 찍어먹는다. 그 양파는 중국말로 양총이라고 한다. 서양에서 들어온 파(蔥)니까. 그런데 우리가 지금 한국에서 만들어 먹는 짜장면 치고 양파가 안 들어가는 짜장면은 찾기 힘들다. 대파가 양파로 은근슬쩍 둔갑한 소치다. 그리고 그 양파는 아무래도 대파보다는 갈무리가 쉽다. 무엇보다 저장기간이 대파보다는 훨씬 길다는 데 착안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그치지 않는다. 그 양파는 누가 공급했는가. 예를 들어 인천 차이나타운에 최초로 문을 연 것으로 되어 있는 공화춘에 식재료로 양파를 공급하자면 누군가가 양파 농사를 지어야 한다. 그 양파 농사를 지어 식재료로 제공했던 공급선이 바로 산동에서 넘어와 소사 부평 일대에서 농사를 짓던 화농(화교 농민)들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짜장면이라는 메뉴에 형제가 있다는 사실이다. 타이베이에 가서 니우러우미엔을 먹어야 한다면, 베이징에 가서도 꼭 먹어야 하는 메뉴가 있으니 바로 페킹 덕, 곧 베이징 카오(北京烤鴨), 다시 말해 오리구이다. 필자가 ‘연구년’으로 중국에 머무르던 2001년에 집 근처 음식점 궈린에서는 한 마리에 25원,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치면 4000원 남짓이었으니 결코 비싼 메뉴가 아니건만 그 베이징 오리를 구어차이(國菜 나라를 대표하는 요리)라고 일컫는다. 그만큼 내공이 들어간 메뉴이다. 그 오리구이를 먹던 어느 날 갑자기 황연대오한 것이, 바로 그 메뉴가 바로 짜장면과 같은 형제간이라는 점이었다. 재료를 살피자. 하엽(荷葉 연잎)이라 부르는 밀쌈에, 일단 쫄깃한 껍질 부위가 대부분인 오리고기를 얹고 나서, 그 다음에 상큼한 오이 조각을 얹고 이어서 채친 날 대파를 얹은 다음 거기에 우리가 양파를 찍어먹는 춘장을 발라 써서 먹는다. 춘장과 대파와 밀가루가 같으며, 거기에 우리나라 짜장면에 얹어주는 채친 오이를 떠올려보면 다른 것은 오리와 돼지의 차이인 것. 식재료가 대체로 엇비슷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국채 말고 최고로 계급이 낮은 지엔삥(煎餠)도 형제에 끼워줘야 옳다. 둥그런 쇠판에 밀가루 풀을 둥글고 얇게 발라 부친 다음, 거기에 달걀을 하나 깨어 얹은 다음, 다시 대파 대신 잘게 썬 쪽파를 흩뿌린 다음, 거기에 파삭거리는 밀가루 튀김을 얹어 싸먹는 이 전병은 그 시절 인민폐 단돈 1원이었다. 점심 먹고 나서 자전거를 타고 베이징 시내를 싸돌아다니다가 서너 시쯤 길가에서 자전거에 한 다리를 걸친 채 비닐에 싸서 건네주는 그 1원짜리 따끈한 지엔삥을 먹는 맛은 꿀맛이 따로 없었다. 물론 재료로 치면 얼추 비슷해서 파와 밀가루 그리고 춘장이 주재료다. 다르다면, 단백질이 돼지에서 닭(계란)으로 바뀌었을 뿐.

그런데 이 짜장면과 그 형제들을 구성하는 식재료들이 아무렇게나 합쳐져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이른바 궁합, 혹은 오미의 조화에 기초하여 디자인된 것을 알고 먹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다. 오이는 쓰고 파는 매우며, 밀가루와 춘장은 달고 짜다. 따라서 신맛이 빠져 있다. 최근 인천 화교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손덕준 씨는 자기네 음식점 중화루에서 만든 짜장면에 식초를 뿌려먹는다. 그래야 오미를 갖춘단다.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 다꾸앙과 양파에 식초를 뿌리므로. 대신 나는 고춧가루를 뿌린다. 양파의 매운 맛이 조리 도중 불에 약해졌으니 그걸 보충하는 것이다.

이들 다섯 가지 맛의 어우러짐을 조화라 부른다. 서로 상반상생하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상반상생의 조화는 음악으로 가도 그대로 적용되어 오음의 조화가 된다. 이걸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 적용하면 전쟁의 반대말, 곧 평화가 된다. 짜장면은 평화의 기호가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우리나라의 통일을 일컬어 “김치식 통일”이어야 하리라고 설파한 한 시인의 말을 떠올리면서 ‘짜장면식 평화’로 해도 말이 되지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게다. 아마도 사드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워 그런 모양이다. 인천에서 발하는 평화의 메시지가 짜장면을 먹는 것으로부터 나온다면…

유중하 /연세대학교 중문과 교수




어릴 적 장소 경험에 대한 기억, 인천의 문화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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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을 한번 여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천의 문화적 가치를 짚어 보는 것이 내게 주어진 과제인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인천에 절반에서 훨씬 못 미치게 발을 딛고 살아온 시간이 30년이 넘는다. 인천의 역사적 사실들이나 문화유산 그리고 작금의 문화예술들 속에서 문화적 가치를 찾는 일이라면 공부를 하고 답사를 해서라도 조금은 가능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인천에 뿌리박고 살고 있는 분들이 훨씬 더 귀한 작업들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내 몫은 아닌 것 같았다. 틈틈이 발을 딛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외지에서 살아 온 나로서는 마음속에 ‘윤곽’으로 그려지는 개인 경험들을 되짚어 보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엉뚱하게도 북미 원주민 사회들을 답사하다가 만난 한 고고학자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자세한 것들을 묻지 말고 단 한 가지 그들 삶 의식을 관통하는, 주제가 담긴 질문을 던지라는 것이었다. “강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참으로 막연하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잠자코 그의 말을 따라 해보았더니 놀랍게도 이 질문이 사람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어떤 이는 즉각적으로, 단 몇 마디로 강에 얹혀사는 자기 삶을 압축해 표현했으며 어떤 이는 새삼 성찰적으로 삶을 돌이켜 보곤 했다. 그리고 그 대답들은 강에 얹혀서 사는 자기 문화에 대한 ‘가치’ 표현이었다. 어떤 이는 매우 실용적 차원에서 어떤 이는 매우 철학적이고 미학적 차원에서 문화적 가치를 표현했다. 문득 이 생각이 떠올라 이번에는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인천은 내게 무엇일까?” 그런데 인천에 정주하고 먹고 살기 위해 몸 부대껴 온 바가 아니기 때문일까 그 안에 살 때의 경험에서도 밖에서 드나들 때의 경험에서도 인천은 내게 통로(route)로 접촉점으로 길 혹은 거리(street)로만 떠올려진다. 그것도 시공간적으로, 문화적으로 매우 복합적인 통로, 접촉점, 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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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부터 중학교까지 현 제물포역 뒤 인천대학교 앞쪽, 한 곳에서 살았다. 이 일대는 피난을 와서 간신히 일터를 잡은 직장인들과 소상인들과 토박이 농민들이 섞여 살았다. 그래도 인천 도심 외곽에 있는 주택가로 당시의 전형적인 ‘중산층’ 주택들이었다. 흙벽돌이나 콘크리트로 단층 기와지붕의 서양식 반 한옥 반 형식의 집을 짓고 대문 안 쪽에는 마당을 두었으며 밖으로는 작은 텃밭을 두었다. 어떤 집은 텃밭 대신에 우물터를 두었다. 마을 바로 옆에는 몇몇 농가들과 밭들이 있었고 곧바로 그 옆으로 화교 동네가 있었다. 화교 동네의 건축 양식은 사뭇 달라서 붉은 벽돌로 사방을 두르고 가운데 마당을 둔, 좁은 창문의 집들이었다. 창문틀은 거의 어김없이 푸른색이었다. 화교들은 대부분 마을 근처에서 혹은 뒤쪽 ‘성광학교’ (구 선린학원, 인천대학교의 전신) 산을 넘어서 채소 농사를 했다. 나의 어렸을 적 ‘통로’에 대한 경험은 우리 동네에서부터 옆의 농가들 그리고 화교 동네로 이어진다. 단오 때에는 농가 큰 앞마당에 높이가 10미터는 넘었음직한 그네가 설치되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처녀들부터 아줌마들까지 그네에 치맛자락을 휘날렸다. 어느 가을밤 드럼통 위에 놓인 작두 위에 오른 무당을 보고, 밤하늘에 대비되면서 불빛을 흐트러뜨리던 붉은색, 푸른색 옷가지들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쳤던 적이 있다. 그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필자의 중부지방 도당굿의 첫 답사이다. 한편 화교 동네는 색다른 경험을 주던 곳이었다. 처음에는 꽁꽁 사방을 두른 집 모양새나 푸른 창틀이나 이곳저곳에 붙은 붉은색 글씨와 문양들이나 음험해 보였다. 그곳 사람들이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 동네가 아니라 우리 집 바로 뒤에 살던 화교 한 집의 나보다 다섯, 여섯 살 위로 보이던 소년으로부터 십팔기(十八技)를 배우면서부터 그 동네에 대한 두려운 생각도 사라졌다. 자기 집 마당에서 웃통을 벗고 작은 칼 두 개를 들고 춤추는 듯 몸을 날리던 그의 모습을 보고 호기심에 다가가기 시작했으며 그 후 빵도 얻어먹고 좋은 나날을 보냈다. 이후 화교 동네에도 스스럼없이 지나다니기 시작했고 집 마당으로 들어가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사당’이었던 것 같은 좀 무서운 공간도 보았다.

피난 내려 와 인천에 자리잡은 일가친척 중에 작은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현 숭의동 공설운동장 뒤 전도관 밑 산기슭에 살았다. 아주 좁고 구불거리는 동네 길 한켠에 흙벽돌로 두어칸 짜리 집을 짓고 거기서 소소구레한 일들을 하면서 사셨다. 작은 할머니가 생선을 공판장에서 받아다가 ‘다라이’로 이곳저곳을 다니는 생선 행상을 하셨는데 집 마당에는 그물에 말리는 생선들이 아래 쪽 공설운동장으로 이어지는 하늘에 나부꼈다. 도화동에서 숭의동 언덕길로 걸어서 그 작은 골목길을 지나 그 집에서 공설운동장의 운동 경기를 보던 나날들이 있었다. 야구는 동산고등학교 팬이었고 동인천고등학교도 좋아했다. 모두 우리 집 가까운 곳에 있던 학교들이었으니까…당시는 야구가 인천사람들에게 묘한 정서를 낳는 것이었다. 촘촘하게 짜인 경기 룰에서부터 정교한 테크닉, 그리고 스타킹과 꼭 끼워 입은 줄무늬 바지와 모자 등등이 무언가 ‘근대’의 세련미를 상징하는 것 같았고 그게 근대도시 인천의 취향과 맞았던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공설운동장에서 벌어지던 고교야구는 지방들 간의 경쟁의식과 ‘지방 즐기기’까지 선사하는 것이었다. 서울 이외에 부산, 대구, 광주, 군산 등등이 인구에 회자되는 중요한 계기가 선거 말고는 고교 야구가 컸던 것 같다. 여하튼 나도 부산고가 어떻고 군산상고가 어떻고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떠들어대곤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어머니가 교사로 있던 축현 ‘국민학교’를 다녔다. 엄밀히 말해서 그냥 쫓아 다닌건데 그래도 나는 학교 다니는 것이라 했고 실제로 교실 수업도 며칠 동안 받았다가 선생님들이 달래서 ‘졸업’했다. 사실상 학교 공부보다도 학교 가는 길을 더 좋아했다. 현 제물포역 앞 길이 당시에는 주요 지방도로로 신작로라 불렸다. 그 신작로에서 버스를 타고 동인천역에서 내리면 참으로 감미롭고 신선한 경험세계가 펼쳐졌다. 축현 학교 담장에 내 기억으로는 장미였는지 찔레였는지 빨간 꽃들이 길게 이어졌고 담장 건너 길 맞은 편, 동인천역 작은 광장 한 코너에 있던 제과점에서 빵굽는 냄새가 났다. 아침 햇볕이 길거리에 쏟아지고 그건 내게는 다사로운 노란색이었다. 건물 그늘이 진 곳은 상큼한 바람이 불었다. 빵굽는 냄새와 노란 햇볕과 건물 그늘…이런 것들이 모여서 ‘도시’의 취향이 되었다. 이따금 병원에 가느라 경동 ‘싸리재’ 길에도 가고 신포시장 밑 동방극장에 쫓아가 영화도 봤다. 당시 도심 여러 곳들에 적산가옥을 개조한 점포들이 있었을 터이지만 나는 그런 건물 양식은 색다르게 느껴지지 않았고 단지 모두가 ‘현대식’ 쇼윈도에 타일 건물들로만 느껴졌다. 동방극장은 그와는 사뭇 달랐다. 그 안에는 극장 내부에 하얀 색상에 푸른색으로 그림을 그려넣은 것으로 기억되는 원형 타일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고 어째 중국풍인 것 같다고 느끼곤 했다.

인천 도심의 경험은 초등학교 입학 후에 확대된다. 그림그리기 대회 때문에 자유공원에 자주 가게 되었는데 어떤 때는 그 코스가 현 인천문화재단 자리 창고들, 구 시청 그러니까 현 중구청 그리고 차이나타운을 거치곤 했다. 지금은 차이나타운이라 이름이 붙어있지만 당시는 이름이 없이 인천 도심의 한 길거리에 있는 중국인 사는 집들이었다. 그 집들은 내게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목조 이층 건물 곳곳에, 그리고 이층 베란다 앞틀에 본래 입혔던 붉고 푸른 색들이 바래고 벗겨져 현란함과 퇴락의 느낌이 교차하고 거기에 널어놓은 빨래들과 이층 베란다를 다니는 가족원들의 머리모양과 의상까지 더해졌는데 전체적인 느낌은 시각적 이국(異國) 정서를 넘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들 방식의 살림살이, 그것도 한국 땅에서 퇴락해가는 살림살이의 구차한 모습들이 그 건물과 의상들에 찌들어 나타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려서 이것저것 잘 알지도 못하지만 색다름의 차원을 넘어서 ‘사람이 저렇게 사는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조부모께서 이북에서의 생업을 잇고자 1960년대에 현 석바위 법원 인근에서 과수원을 시작했다. 논밭 사이에 낀 작은 구릉지에 과수원이 있었고 좁은 논길을 걸어 경인선 철로를 넘어 산모퉁이를 돌면 주안염전과 갯벌이 펼쳐졌다. 초등학교 때, 수업이 끝나면 숭의동에서 도화동 집까지 걸어 책가방을 놓고 다시 석바위의 과수원에 갔다. 제물포역에서 주안역까지가 2.1Km인지 2.5Km인지 여하튼 2Km남짓한 거리였는데 꼭 그 선로를 따라 걸었다. 굵은 못을 갖고 다니다가 선로 위에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가면 납작하게 눌려진 못을 거두어 모아두곤 했다. 콜타르였을 것이다. 선로 밤나무 침목들을 딛고 뛰면서 침목에 발라놓은 목재 보호제의 냄새를 즐기기도 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지만 그것은 일상적 주거나 농촌 생활에서 나는 냄새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당시야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었겠지만 이제 보면 그 화학제품의 냄새가 ‘근대’에 대한 감각으로 다가왔던 것 같기도 하다. 과수원 작은 농가 방에 누우면 또 다른 냄새가 났다. 집 벽으로부터 흙과 짚 냄새가 섞여서 났고 앵앵거리는 파리 소리와 함께 늦은 오후를 진득하고 뉘엿하게 만들었다. 과수원 밖을 나서서 자주 가는 곳이 염전이었다. 한 1Km 정도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가는 길 산모퉁이가 시각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하나의 문턱이었다. 그 모퉁이를 넘어 펼쳐지는 세계는 과수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염전 바닥의 타일에서부터 열이 올라와 얕은 바닷물을 후끈거리게 하고 수로 곳곳에 수차를 밟아 바닷물을 염전으로 품어내는 염부들이 있었다. 주안염전에는 바닷물을 가두어 놓은 저수지가 여러 곳 있었는데 그 저수지 너머로는 깊게 파인 갯골들과 검은 갯벌들이 뜨거운 햇볕에 드러나 있다. 길에는 검은색 콜타르를 칠한 소금창고들이 누워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한 고즈넉함과 외롭고 처연함을 만드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태양의 이글거림과 고무신 안쪽까지 스며들어 온 개흙의 진득거림이 어우러져 미묘한 느낌을 주곤 했다. 필자는 여름에 저수지에서 헤엄을 치기 위해 아니면 시원한 소금창고 속에서 만화책을 보기 위해 염전에 가곤 했는데 이런 일들을 즐기기 보다는 염전과 갯벌과 사람들 일하는 모습의 강렬하고도 적막하고 처연한 모습에 마음 한 켠이 짓눌려 돌아오곤 했다.

대학 다닐 때의 단골 여로는 다양했다. 그런데 그곳들 어느 한 구석에서도 단순하고 단일하고 투명한 장소감과 장소 경험을 가져본 적은 없다.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중첩되어 있었고 비유를 하자면 장소들이 목소리가 청명한 게 아니라 허스키 풍으로 복합적이거나 걸지거나 삭혀 있었다. 동인천역에서 구 인천여고 가는 길로 조금 접어들다 보면 밴다방이라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 생긴 다방으로 디스크자키가 있었고 클래식이나 조금 조용한 팝송, 당시 활발했던 통기타 가수와 김민기, 양희은 풍의 가요들을 틀어주었다. 인천의 대학생들, 좀 젊은 문인들, 연극인들 그리고 외지에서 방학 때 귀향한 대학생들이 이 다방을 메웠다. 조금 더 문화적으로 연조가 깊은 젊은이들은 더 그윽한 것을 찾았다. 술집들이 그 욕구를 채워주었는데 꼭 가는 곳이 하인천역으로 넘어가는 곳의 잡어횟집, 인천여고 인근의 삼치구이집, 용동 큰우물집, 신포시장의 백항아리집, 옛 키네마 극장 뒤편 다복집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이나 손발짓이나 여러 행각들을 돌이켜 보면 그 어떤 체득적인 정서나 감각과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세심하고 치밀한 감각이면서 또한 복합적으로 배어 들어간 감각이기도 했다. 그들은 막걸리와 함께 먹는 생선 몇 조각이 어떻게 말려져야 하는 것이며 어떻게 구워져야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좀 곰삭고 찌든 맛이 있어야 한다.” 생선 맛에 대한 이들의 말이나 그것을 주장하느라 서로 간에 오갔던 손짓 같은 것을 보면 그것은 단순한 음식 맛의 감각을 말하는 게 아니고 구현해야 할 자기 삶의 감각, 지역 감각 같은 것이었다.

필자에게 인천은 통로,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한 것들을 넘나드는 통로로 있었다. 집에서부터 인근 농촌을 거쳐 화교 동네까지, 집에서부터 동인천역을 지나 축현 학교까지, 자유공원 밑 길거리와 차이나타운까지, 철로를 따라 석바위 과수원을 거쳐 주안염전과 갯벌에 이르기까지 어릴 적의 장소 경험들, 그리고 대학생 시절의 도심 다방과 술집들에서의 장소와 사람 경험들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 경험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인천에서 형성되어 왔던,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계층적으로 다양한 문화들이 인천의 지리적, 공간적 계열을 따라 문화 경험의 통로를 이루는 것이었다. 나에게 인천은 무엇인가?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찾아 들어가고 부대끼며 체화시켰던 감각의 장소들이다. 그것은 한 곳에 단일하게 머무는 문화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양한 문화들이 움직거리는 경험의 통로이다. 또한 곳곳에서 사람들이 장소와 접하고 사람과 접하고 감각을 생성하는 접촉지대이다.

문화 중심이라는 말은 본래는 마치 가마솥이 끓듯 다양한 것들이 모여들고 접촉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지역문화를 뜻했다. 인천은 역사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다양한 문화의 통로, 길, 접촉지대로서, 그리고 그 곳에서 생성되는 감각들과 의미들을 가치로 바꾸어 생산해내는 문화생산의 처소로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인천은 그런 곳이다.

 

조경만 / 목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문화도시 인천‘이 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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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 인천’. 요즘 인천에 관련된 뉴스에서 참 많이 볼 수 있는 단어이고, 또 인천이 문화도시가 되기 위해 여러가지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하지만 ‘문화도시 인천‘ 이라는 단어가 아직은 어색할 뿐이다. 내가 느끼는 인천의 이미지와도 거리가 있는 듯하다. 인천에 거주하는 지인들과 인천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면, 문화도시라기보다는 ‘바다’와 ‘차이나타운’ 같은 관광지의 이미지가 연상된다고들 한다. “문화예술을 즐기기 위해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엔 하나같이 서울로 나간다는 이야기뿐이다. 나도 20여년을 인천이 아닌 타 지역에서 거주하며 성장하였기에,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문화예술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연극 보러 서울 가자.” 라는 말과 “연극 보러 인천 가자” 어느 쪽이 더 자연스러운가. 전자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다수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내가 문화예술 생활을 즐기기 위해 서울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반적인 생각으로 보이는데, 이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인천에 어떤 것이 필요할까’를 이야기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문화적 가치란 무엇인지, 문화도시 인천이 되기 위해서는 왜 문화재단이 필요한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문화적 가치를 상승시키는 방법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사전을 찾아보았다. 먼저, ‘가치’의 뜻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물이 지니고 있는 쓸모, 둘째, 철학적 의미로 대상이 인간과의 관계에 의하여 지니게 되는 중요성. 셋째, 철학적 의미로 인간의 욕구나 관심의 대상 또는 목표가 되는 진, 선, 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치이다.‘라고 쓰여있기도 하다. 이런 의미들을 보았을 때 가치란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다르게 이야기 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뮤지컬 ’캣츠‘ 공연이, 평소에 뮤지컬을 많이 관람한 사람에게는 많은 공연들 중 하나인 경험이겠지만, 뮤지컬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캣츠‘란 공연이 삶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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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정의가 다양하다. 학자마다, 또 국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2016년 시행된 문화기본법에서 제시한 ‘문화’의 정의로 이야기하려 한다. 문화기본법 제 3조(정의)를 보면 “문화란 문화예술, 생활 양식, 공동체적 삶의 방식, 가치 체계, 전통 및 신념 등을 포함하는 사회나 사회 구성원의 고유한 정신적·물질적·지적·감성적 특성의 총체를 말한다.”라고 제시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정의를 모두 고려한다면 문화적 가치란 ‘사회나 사회 구성원의 고유한 정신적·물질적·지적·감성적 특성의 총체를 인간의 욕구나 관심에 의해 지니게 되는 중요성’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천시민들이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문화적 가치를 누리기 위해서 인천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문화기본법 제4조(국민의 권리)를 보면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인종, 세대, 지역,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나 신체적 조건 등에 관계없이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문화를 향유할 권리(이하 “문화권”이라 한다)를 가진다.’ 라고 나와 있듯이, 시에서 모든 시민들이 제약을 받지 않고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향유할 수 있는 기반은 기초문화재단과 문화예술관련 시설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문화원, 문화센터, 문예회관 등이 그 역할을 하는 기초단체들이 있지만 각각의 역할은 분명히 다르다). 광역문화재단들은 지역문화 정책 개발, 문화예술진흥 지원, 문화예술교육 사업, 문화 나눔 사업 및 문화시설 운영 및 문화재 발굴 등 다양한 영역의 지역문화 사업을 지역 실정에 맞게 추진하는 역할을 한다. 기초문화재단들은 지역문화 시설 운영을 주로 하고 있지만, 지역문화 브랜드 육성과 생활문화 진흥 사업 추진을 통해 차별화된 지역문화 사업을 추진한다.

현재 인천에는 광역문화재단인 인천문화재단과, 기초문화재단인 부평문화재단 등 두 곳이 있다. 인천문화재단의 주요사업은 문화예술기금 지원 사업, 문화예술교육사업, 문화예술교류 사업, 문화예술정책연구사업, 아트플랫폼 운영 등이고, 부평문화재단의 주요사업은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정책개발 및 자문, 공연예술진흥 및 작품 전시활동 보급, 예술창작활동 지원 및 보급 등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한 번씩은 들어봤을 것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소수 엘리트 계급이 대다수의 민중들을 지배하는 엘리트주의를 멀리하고, 평범한 민중들이 지역 공동체의 살림살이에 자발적인 참여를 함으로써 지역 공동체와 실생활을 변화시키려는 참여 민주주의의 한 형태를 이야기 하는데, 문화예술 환경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가 펼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시에서, 또는 광역문화재단인 인천문화재단에서 인천시민들이 문화향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문화재단인 부평문화재단 같은 곳에서 주민들이 문화예술생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동호회를 만들 수 있게 지원하고, 모임을 가질 수 있는 시설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별로 쌓인 주민들의 자발적인 문화예술활동 기반들이 자신들의 동네를 변화시키고 실생활을 변화시킬 것이다.

시에서는 광역문화재단인 인천문화재단을 관리·감독하고 지휘할 것이 아니라, 문화재단의 자율성과 창의적 문화예술활동 지원을 위해 지원하고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인천문화재단은 시의 문화정책을 수립하고 이행하며, 각각의 기초문화재단들을 관리·감독·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또한 문화전문인력으로 문화기획자, 전문문화예술인 등을 양성·교육하고 문화예술단체들이 문화예술 지원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초문화재단들은 각각의 구민들이 문화예술을 보편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기초적 지원과 양질의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천시는 일관된 문화정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며, 전체 시민들의 문화예술 향유 기회는 현재보다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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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시설이 있고 양질의 콘텐츠를 활용한 전시회와 공연들이 진행된다면, 주민들은 거주지에서 문화생활을 누릴 것이고, 그러한 경험들이 쌓이다보면 시민들은 문화적 가치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시민들의 생각이 모여 자연스럽게 ‘인천은 문화도시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될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나처럼 문화예술을 즐기러 서울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 아니라 특별한 생각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종균(인하대학교 문화경영심리연구소 연구원)




오래된 기억, 오래된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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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문화적 가치란 무엇일까? 이 무거운 질문에 대한 원고를 요청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인천의 구도심이었다. 문화란 단어는 관련 분야에 따라서 수백 개의 다양한 단어와 형태들로 정의될 수 있겠지만, 건축과 도시를 10년 가까이 공부한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장소와 공간으로 연결되었다. 문화·예술 분야의 전문적인 관점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경험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오래된 장소와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인천의 구도심이 가지는 문화적 가치를 사람들과 공유했으면 한다.

인천에 살았지만 제물포역부터 인천역으로 이어지는 구도심 지역이 익숙한 동네는 아니었다. 하지만 구도심에 대한 오래된 기억은 가지고 있다. 어렸을 때 수봉공원에서 어지러운 다람쥐 통을 타며 깔깔거리고, 대관람차를 타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며 설레었던 기억, 그리고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서 동생과 온갖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던 추억이 흐릿한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다. 비교적 기억이 선명한 중학생 시절엔 15번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동네로 남아있다. 그 후 상권이 빠르게 변하면서 우리들의 핫플레이스는 동인천에서 주안으로, 또 부평으로, 다음은 구월동으로 변했고, 친구들과 만나는 장소도 이 흐름에 따라 이동했다. 그리고 그 후로 제물포, 동인천, 월미도와 차이나타운은 그저 낙후된 동네, 집에서 먼 동네라는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서울에 살게 되면서 인천의 구도심은 더 멀어졌다. 그러다 2008년, 인천도시설계대전에 참여하면서 이곳을 다시 찾게 됐다. 당시 대상지였던 제물포 역세권을 조사하던 처음에는 그저 도로를 따라 빼곡하게 늘어선 건물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늘어선 건물 틈 사이로 들어가자 건물로 둘러쌓인 넓은 중정이 있는 구조라는 것을 발견했고, 오래되었지만 독특한 구조의 건축물들을 보면서 나는 물론이고 당시 같은 팀이었던 친구들도 모두 감탄했었다. 오래된 지역에 남아 있는 건축물들이 박제한 시간의 매력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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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서울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구도심 개발 계획이 적은 편이다. 인천의 주거지는 점점 서울 쪽으로, 또 새로이 간척된 땅에 ‘OO신도시’라는 이름으로 이동되었고, 서울에서 먼 곳은 점차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비활성화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화려한 ‘OO신도시’의 모습보다는 이 비활성화된 지역이 가지고 있는 인천의 모습에 가치를 두고 싶다. 화려한 도시를 흉내낸 모습이 아닌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버려지고 혹은 방치되었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된다. 지역의 가치를 사람들이 알아봐 주고 오래된 것에 대한 인식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준 것은 아닐까?

이제 사람들은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지 않고 오래된 것의 매력과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빈티지와 레트로가 주요 트렌드로 자리 잡았고 근대 유산에 대한 관심도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옛 창고를 개조한 붉은 벽돌의 조적식 건물과 세월이 담긴 타일 건물, 차이나타운의 중국풍 건물, 옛 일본 조계지의 유럽식, 일본식 건물들, 이렇게 여러 문화들이 혼재되어 있는 이 지역이 항구와 수도 사이에서 그동안 담아온 인천의 문화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닐까? ‘개선’이라는 단어로 이 지역을 통일된 어떠한 것으로 성급하게 정리하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혼재되어 있어 정의하기 쉽지 않은 모호함이 이곳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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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아트플랫폼과 차이나타운이 각종 촬영과 방송을 통해 소개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작가들이 지역을 소재로 작업을 하는 등 여러 시도들이 축적되고, 예술을 매개로 재미있는 공방들과 카페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점점 재미있어지는 이 동네가 지금처럼 지역 사람들이 천천히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민간 기업이나 관에서 만드는 계획들이 매력을 갖춰가고 있는 이 거리의 분위기를 해치거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앞당기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다보면 고장난 장치에 붙어있는 안내문구가 눈에 띈다. ‘조금 늦더라도…제대로 고치겠습니다.’ 물론 많은 예산과 계획이 투입되면 빠르게 눈에 띄는 문제들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장소는 지역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천천히 자연스럽게 고쳐가는 것이 제대로 된 지역의 가치를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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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바쁘다는 핑계로 뜸했던 인천으로 향했다. 그리고 늦은 시간 만난 중학교 동창 친구들과 한밤중에 동인천으로 달려왔다. 이국적인 건물들을 조명으로 밝힌 한적한 거리를 천천히 산책을 하고 나니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 공감하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오래된 친구들과 오래된 장소로 시간 여행을 하고 돌아온 것 같다고….

인천 시민들이 각자 간직해왔던 자신만의 오래된 장소와 기억들이 인천의 기억과 가치로 연결되어 기분 좋은 공감으로 계속 남아있었으면 한다.

구아영 / 서울연구원 도시사회연구실 연구원




인천이 ‘가진 것’을 드러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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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의 봄, 나는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인천을 떠나 서울의 기숙사로 가게 되었다. 주위의 어른들은 나의 ‘서울 입성’을 축하해 주시며, ‘서울은 인천과 수준이 다르니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철없던 나는 부모님을 떠나 새로운 공간에서 누릴 자유만을 생각했었기에, 그런 이야기들은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다. 잊고 있었던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열흘 전 인천문화재단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직후였다.
“인천 가치 재창조에 관한 릴레이 기고를 받고 있습니다. 인천의 문화적 가치가 무엇인지, 인천의 문화발전에 대한 제안이나 의견 등 다양한 생각들을 써주세요.” 나는 겁 없이 ‘네’ 대답해버렸고, 이후 며칠 동안 원고에 대한 압박을 느끼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결국 인천의 지인들에게 “인천에 대해 떠오르는 키워드를 적어 보내달라” 는 문자를 돌렸다. 그 결과, 인천이라는 도시는 여전히 지리적으로는 “서울로 출퇴근을 하기 좋은 곳”이었으며, 역사적으로는 “근대적인 외교와 무역이 시작된 곳”이며, “근대문화의 발상지”, “차이나타운이 유명하다.”, “근대 건축물이 많다.” 와 같은 단편적인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 내용들을 확인하고 나니, 오래 전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하던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인천에 살고 있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인천이라는 도시가 살기 좋고, 떠나기 싫고, 행복한 곳이라고 인식되려면 앞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사람의 마음에 각인된 이미지나 인식을 변화시키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크고 작은 감동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높은 건물, 많은 아파트와 같은 물질적인 것이 마음으로 와 닿으려면, 그 곳의 풍경이 아름답거나, 동네 사람들과의 따뜻한 교류 같은 정서적인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적인 것들을 우리는 ‘문화’라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화라는 것을 전통 민속예술이나 문화재, 순수 예술장르 관련 공연이나 교육, 공연장, 미술관, 박물관과 같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또, 문화가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하냐는 물음에는 대부분 중요하다고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신적인 안정’이나 ‘즐거운 여가’ 등의 통념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문화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은 문화발전을 위해서 공연장이나 박물관, 도서관 같은 시설을 새로 만들고, 공연이나 행사, 전시 등의 횟수가 많아지면 문화도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착각이라고 여겨진다. 수년에 걸쳐 인천에 다양한 시설들이 새로 만들어지고, 크고 작은 축제와 공연, 전시 등이 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서울과 인천을 비교하면 문화 환경이나 수준의 차이가 크다고들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서울에 대한 이런 열등감은 인천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 또한, 현재 인천의 문화 정책은 인천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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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구도심의 차이나타운이나 일본인 거리, 아트플랫폼은 모두 독특하게 꾸며진 건물 외관을 배경으로 사진 찍고, 자장면 먹고, 아트플랫폼의 전시장 한 두 곳을 돌아보면 끝나는 관광코스로 이 곳을 찾은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제대로 된 역사적 배경이나 이야기는 전혀 알지 못하고 돌아간다. 또, 인천에 살고 있는 시민들에게도 이들 장소가 높은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긍정적으로 인식되거나 문화적 자부심을 주는 곳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가치와 의미에 대한 교육이나 홍보가 크게 부족하여 감동이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상업적으로 소비된다고 해서 그 가치가 높아지는 것 또한 아니다. 인천이 지닌 다양한 문화자원에 대한 시민들 스스로의 이해 수준을 높여야만 그 가치가 높아지고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정책적으로 인천이 ‘가진 것’을 발굴, 교육하여 적극적으로 드러내야만 한다. 인천이 ‘가진 것’ 중 잘 모르는 것들을 몇 가지 소개해보고자 한다. 근대 초등교육의 출발점이 된 ‘영화초등학교’와 순수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창영초등학교’는 존재만으로도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충분하다고 여겨지며, ‘자장면’뿐 아니라 ‘쫄면’도 인천에서 탄생했다. 인천이 가진 전통예술 중 국가지정문화재인 ‘은율탈춤’과 ‘서해안 배연신굿’은 보존 가치가 매우 높으며, ‘휘모리잡가’는 서울, 경기, 인천에만 인간문화재가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독특한 음악장르이다. 또, 인천 지역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서해안 풍어제’와 ‘인천 근해 갯가노래’, ‘강화 용두레질 소리’도 매우 매력적인 전통예술 장르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 인천 시민들에게는 매우 낯설 뿐이다. 물론 이 외에도 인천이 ‘가진 것’ 중 시민들이 모르는 것은 정말 많을 것이다.

인천시는 인천이 ‘가진 것’들을 적극적으로 발굴, 홍보하고, 문화예술가와 기획자, 창작자들이 좋은 창작물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창작물에 대한 교육과 체험이 함께 이루어지도록 연계하는 것을 도와야 할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천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인천의 매력을 체험하고, 그 속에서 감동과 공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들이 인천에 살고 있음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글 / 강희진(거문고앙상블 ‘다비’ 대표, 음악학박사)




영화를 만들며 인천에 정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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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았다. 2002년에 인천으로 이사왔다. 이사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비싼 집세 때문에 서울에서 쫓겨 온 것이었다. 그리고 10여 년 동안 인천에서 살았지만 내가 사는 곳이 ‘인천’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인천은 공기는 나빠도 집세가 싸고 무엇보다 서울 가는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다. 인천은 나에게 ‘서울과 가까운 곳’이었다. 동암역을 인천의 첫 집으로 선택한 것은 직통열차 때문이었다. 하지만 3편의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나는 인천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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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만든 첫 번째 단편영화는 [파마]다. 인천에서 만난 한 베트남 여성 이야기다. 남구학산문화원에서 운영했던 이주여성 교육 프로그램에서 만난 여성이었고, 촬영 장소는 집 앞 미용실이었다.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시나리오를 쓰다가 잘 안 풀리면 미용실에 가서 앞머리도 자르고 하면서 관찰하곤 했다. 자연스럽게 그곳이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배우들 중에는 실버극단 <학산>(남구학산문화원에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던 노인극단) 단원이 있었다. ‘예술 교육이 창작에 연결되니 좋구나’ 정도의 생각을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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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만든 두 번째 단편영화는 [결혼전야]다. 이 영화는 서울에서 살았던 내 이야기다. 하지만 굳이 서울에서 찍을 이유가 없었다. 인천영상위원회의 제작지원을 받았다. 배우도 실버극단 <학산>의 단원이었다. 촬영 장소도 그 분의 집, 인천시 남구 도화동이었다. 첫 영화 [파마] 때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스탭 상당수가 인천 사람들로 채워졌다는 것. 인천독립영화협회가 만들어지면서 인천에서 함께 작업할 동료들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온 스탭들의 숙소는 인천의 종교단체에서 지원해주었다. 인천여성영화제와 인천독립영화협회의 도움도 받았다. ‘나는 인천에서 영화를 찍고 있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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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만든 세 번째 단편영화는 [천막]이다. 인천시 부평구 갈산동 421-1. 지금은 가스충전소가 있는 곳이지만 예전에는 기타 공장이 있었다. 그 건너편에서 해고 노동자들이 천막을 치고 복직농성 중이다. 이분들을 처음 만난 곳은 2012년 인천노동문화제가 열렸던 부평공원이었다. 이후로 꾸준히 관심을 가지다가 함께 단편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인천영상위원회에서 제작지원을 했고, 스탭들 중 상당수가 인천독립영화협회 회원들이었다. 해고 노동자들이 배우로 자기 자신을 연기했다. 스탭들의 숙소는 이분들과 연대하는 종교단체에서 지원했다. 인천의 노동조합과 시민단체에서 보조 출연을 해줬고, 노동운동단체에서는 소품을 지원했다. 인천여성영화제에서는 밥을 해왔고, 인천독립영화협회 회원들이 음료를 들고 촬영장을 찾아왔다. 

나는 서울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비싼 집세를 피해 인천에서 당분간 살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겐 인천이 잠시 비를 피해 있다가 떠날 ‘천막’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단편영화 [천막]을 만들면서 비로소 내가 ‘인천에 정주(定住)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일, 인천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은 ‘인천에 사니까 인천에 관심을 가져야 해.’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인천에 살다보니 함께 사는 이웃들을 들여다보면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고, 그 이야기를 이웃들과 함께 영화로 만들 수 있었다. 그 영화를 이웃들과 함께 볼 수도 있었다. 내가 찾는 ‘인천의 이야기’는 인천만의 것이 아니다. TV 교양프로그램에 나오는 지역 특산품 같은 것들을 소개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웃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어느 곳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찾으려고 한다. 인천이라는 구체적인 도시에서 보편적인 삶의 이야기를 찾고 싶다.

어쩌면 나는 운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인천에 사는 창작자들이 이웃을 들여다보는 노력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제도들이 좀 더 풍요로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인천의 창작자들이 스스로 고립되지 않도록 인천에서 동료들을 만나기를 바란다.

글, 사진/ 이란희(영화감독, 배우, 예술교육자)




‘여권 없는 해외여행’, 인천의 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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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아무리 작은 섬도 그 자체로 하나의 왕국이다. 그래서 섬으로의 여행은 여권 없는 해외여행이다! 잠깐만 배를 타도 일상을 벗어나 다른 세상과 만날 수 있다. 인천에는 168개나 되는 섬이 있고, 게다가 섬들은 수도권의 안마당이나 다름없다. 과거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는 위성 도시 인천의 문화정체성 확립에 방해자였다. 하지만 인천 섬들의 가치가 재발견된다면 서울은 오히려 인천의 든든한 후원자로 바뀌고, 서울을 비롯한 2,500만 수도권 인구의 일상 탈출 욕구는 인천 섬 여행 문화를 향유할 수요자 풀(Pool)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숨겨진 인천 섬 왕국의 유물들을 발굴해 내는 일이야말로 인천 가치 재발견의 중요한 진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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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천시는 2조 3230억 원이란 거액을 투입해 인천 168개 섬들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섬 프로젝트’를 본격 추진하기로 했다. 관(官) 주도와 개발 위주 사업이 아닌 주민 주도의 자연경관을 최대한 보존해 섬의 가치를 높이는 사업을 한다니 환영할 일이다. 인천시는 4가지 추진전략을 세우고 모든 섬을 1시간 내 접근이 가능하도록 백령도 공항 건설이나 영종도 제2연안여객터미널 확충 등 시설투자는 물론 인천의 섬들을 매년 12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애인(愛仁)섬’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또 6차 산업을 육성해 섬의 경제기반을 조성, 주민 소득 증대에 기여하고 선착장 주변 문화 공간 확충과 해수담수화 시설, 신재생 에너지 자립 섬 조성사업 등도 계획하고 있다.

6차 산업 기반 조성을 통한 주민 소득 증대나 신재생에너지 자립 섬, 해수담수화를 통한 물 문제 해결 등의 인프라 구축은 섬들을 위해 꼭 필요한 사업들이다. 하지만 섬 관광의 측면에서 본다면 인천시의 섬 프로젝트는 일견 우려스러운 점도 적지 않다. 섬 문화 가치 발견보다는 시설투자와 물량주의 관광에 더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닌가 싶어서다. 관광객의 무한 증가가 꼭 섬에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인천의 이름난 섬들은 주말이나 성수기면 너무 많은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들 중 절반 이상은 섬에 돈 한 푼 쓰고 가지 않는다. 섬의 수용 역량을 초과하는 관광객 유입은 오히려 섬에 독이 된다. 그래서 관광객을 무한정 늘리는 것보다는 관광객 차량 입도금지와 입도객 총량제 등을 도입해 재방문율을 높이기나 ‘체류시간 늘리기’처럼 전략을 수정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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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접근성 개선도 반드시 이루어져야할 숙원 사업이다. 하지만 가깝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멀다고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가까우면 그만큼 일찍 돌아보고 빠져나간다. 먼 것이 매력일 수도 있다. 부러 오지를 찾아다니는 세상 아닌가. 그래서 섬의 접근성 개선을 위해서는 제2여객터미널 확충 등을 통한 섬 여행 시간 단축보다는 전천후 여객선 도입, 야간운항 허용과 시설지원, 여객선 공영제, 해사안전법 개정 등을 통한 안전성과 접근성 확보로 정책 방향을 바꾸는 것이 더 실효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백령도 같은 원도의 경우 소형공항 건설은 바람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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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 프로젝트는 4개의 추진 전략이 있지만 결국 핵심은 섬 관광업의 활성화를 통한 주민소득 증대다. 그런데 아쉽게도 인천 섬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가치 재발견 전략이 부족해 보인다. 가깝다는 것 말고도 왜 인천 섬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이 있어야 섬 관광도 지속가능하다. 섬 선착장 주변 문화 공간 확충 같은 시설 투자보다 문화가치 재발견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 ‘168개 애인 섬 만들기’ 같은 관광객 유인 전략은 실패한 여수의 ‘365 생일 섬 프로젝트’만큼이나 추상적이다.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요즘 세계의 여행 추세는 에코투어리즘이 대세다. 변화하는 시대 트렌드에 맞는 컨셉의 정립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환경 파괴로 논란이 되고 있는 굴업도는 리조트 개발 포기를 선언하고 ‘인천 바다의 제주, 화산섬 굴업도’라는 컨셉의 에코뮤지엄 조성으로 가는 것은 어떨까. 과거 잘못된 개발로 파괴된 섬의 자연환경을 복원하는 것도 섬의 가치를 재발견해 인천 섬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는 방안의 하나다. 논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황금갯벌을 없애고 간척 사업을 했으나 논에 물을 댈 담수호가 소금 호수가 되는 바람에 황무지로 버려져 있는 백령도의 1백만평 간척지와 40만평의 백령호를 역간척을 통해 다시 갯벌로 환원시킨다면 어떨까. 천혜의 비경에 시너지 효과를 더한 백령도는 분명 생태 섬 관광의 메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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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천의 와덴해 섬, 랑어욱이 역간척으로 성공한 대표적 사례다. 랑어욱은 1923년부터 시작된 간척으로 섬이 황폐화됐는데 1986년, 역간척을 택했다. 10년이 지나 갯벌 생태계가 복원되자 랑어욱은 생태관광의 메카가 됐다. 덕분에 독일에서 가장 가난 했던 섬마을은 생태관광만으로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마을 중 하나가 됐다. 인천시가 이런 사례에 주목해 섬 프로젝트를 보완한다면 고맙겠다. 그것만이 눈앞의 성과에 매몰되지 않고 미래자원으로서 인천 섬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길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글 /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




‘구도(球都) 인천’, 그 자부심에 덧붙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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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한국 근대문화의 발상지이며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근대적인 외교와 무역이 시작된 곳이고, 그래서 근대 초기의 건축과 음식문화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야구 역시 인천의 그런 특성과 내력이 낳은 한 가지 산물이다. 선교사 질레트(한국명 길예태)가 YMCA 서울지부의 청년들을 모아서 최초의 한국인 야구팀을 만들고 외국어학교 학생팀과 성동원두(훗날 동대문운동장. 오늘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터)에서 경기를 벌였던 1904년 무렵이 공인된 한국야구역사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정식으로 수입되기 이전부터 부두와 외국인 주거지역 근처 공터 곳곳에서 미국인 병사들과 일본인 학생들에 의해 야구가 시작된 것도 인천이었고, 본격적으로 야구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도 인천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개 근대문화란 빛인 동시에 어둠이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지만, 동시에 식민지로 전락해가며 전통문화를 강제 폐기당하던 시절의 흔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근대적인 복식문화란 ‘단발령’이라는 문화적 폭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근대적인 여행문화란 ‘철도부설’이라는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의 전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듯 말이다.
야구 역시 외세의 물결을 타고 들어온 것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야구라는 것 역시 원래 미국에서 시작된 공놀이고, 일본 사람들이 일찍부터 즐겼던 스포츠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어지간한 다른 문화들과 달리, 한국에서 야구만큼은 굴종 대신 저항 속에서 싹을 틔웠고, 막연한 추종보다는 자발적인 열기 속에서 뿌리를 내렸다는 점이다.

‘황성 YMCA 야구단’이 결성되고,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3.1운동을 벌여 민족의 독립의지를 안팎에 과시하는 숨가쁜 세월을 막 지났을 무렵, 인천에서 ‘한용단(漢勇團 : 용감한 남자들이라는 뜻)’이라는 한국인 학생야구단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주말마다 인천항 근처 웃터골(지금의 제물포고등학교 운동장 자리)이라는 곳에서 일본인 학생이나 직장인들로 구성된 팀과 경기를 벌이곤 했는데, 많을 때는 수천 명의 관중들이 몰려들어 그것을 관전하곤 했다. 황성 YMCA 야구단의 경기가 열리던 성동원두에 모인 사람들이 오직 신기한 서양식 공놀이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렸다면, 한용단의 경기가 열리던 웃터골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드디어 응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용단은 일본인 야구팀과 종종 야구대결을 벌였고, 한용단을 응원하는 것은 일본 경찰들의 눈을 피해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한용단이 결국 일본인 팀과의 경기에서 일본인 심판의 편파판정 때문에 억울한 역전패를 당했을 때 한국인 관중들이 집단적으로 항의했던 사건 때문에 강제 해산됐다거나, 해체된 한용단의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고 ‘고려야구단’이라는 팀을 재결성해 해방 이전 한국 야구사에 민족적인 흐름을 이어간 자세한 사정을 굳이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다만 인천은 단지 야구가 처음 전해지고 시작된 곳이라는 의미를 넘어, 야구라는 서양문화를 주체적이고 민족적인 문화로 승화시킨 곳이라는 점을 짚고 강조하고 싶다.

오늘날 야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관중과 시청자를 끌어 모으는 스포츠이며, 가장 많은 경제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산업분야다. 하지만 만약 그 역사를 더듬어갈수록 낯이 붉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족보를 가진 것이었다면 어쨌을까, 생각해볼수록 아찔하고 그래서 참 다행스럽다.
‘구도(球都)인천’. 그 네 글자는 인천에 살면서 야구를 사랑하는 이들이 가지는 한 가지 자부심이다. 하지만 그 자부심 안에 혹 ‘야구가 처음 도입된 곳’이라거나 ‘50년대와 60년대에 국내 최강의 야구팀을 가졌던 곳’이라는 의미만을 담아두었던 이들이 있다면, 한두 가지쯤 더해줄 필요가 있다. 이곳 인천은 한국인들이 비로소 야구라는 낯선 공놀이를 즐기기 시작한 곳이며, 후대의 야구팬들 역시 그것을 당당하게 즐길 수 있게끔 해준 곳이라는 뜻 말이다.

글 / 김은식(작가, 『삶의 여백 혹은 심장, 야구』 저자)




보여지는 인천이 아닌 느껴지는 인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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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가 한동안 인기였다. 88년도를 살아가던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드라마는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는 흥미를, 그 시절을 관통해온 세대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드라마의 배경은 서울 도봉구 쌍문동이지만 이 드라마의 주 촬영지는 바로 인천이다. 아직도 옛 모습을 갖추고 있는 동네 인천은 과거를 회상하는 드라마, 영화의 주 촬영지이다.

그러나 미디어가 조명하는 것과는 달리 인천은 과거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것처럼 평상에 앉아 찬거리를 다듬는 주민들도, 매일매일 친구들이 모이는 누구네 집도 더 이상 흔한 풍경이 아니다. 저층 주거지, 구도심 지역은 점차 개발되고 점점 이웃이란 개념이 옅어지고 있다. 활기차던 골목은 점점 죽어가고 죽어간 골목에는 곧 신작로가 들어선다. 뛰어 놀던 아이들도, 짖어대던 강아지도, 동네에서 살아가던 주민들도 사라지고 머물지 않는 차들만이 길을 가득 메운다.

문화를 만든다는 CJ가 TVN을 통해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를 만들고 과거의 미담을 담아냈지만 사실 그것은 과거의 삶을 재조명한 것에 불구하다. 골목과 동네의 풍경은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네 골목어귀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노래 소리, 번듯한 극장은 아니지만 모여서 함께 보던 TV,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축하하고 즐겼던 동네잔치 등. 대중 매체 같이 큰 영향력을 갖지는 못하더라도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피부로 느껴지는 문화다.

세월은 흐르고 강산이 변해 옛것을 무작정 붙들고 있을 수만은 없겠지만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는 공동체는 그 모습은 바뀔지언정 여전히 소중한 가치이다. 동네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힘겨운 일들을 함께 털어내고 즐거운 일들을 상상하는 공동체 속에서의 삶은 재미있는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충족감과는 비할 수 없다.

‘응답하라 1988’에서도 평상은 동네 사람들의 수다의 장이다. 그 위에서는 함께 하는 일거리들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동등하게 자리한다. 그리고 평상은 만든 사람은 있지만 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머물고 누구나 무엇이든 한다. 골목에 평상이 사라지고 나서 함께 사라진 것은 바로 동네주민들 간의 소통인 셈이다. 모여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곳, 서로가 서로에게 신뢰를 쌓는 곳이 바로 평상이며 이 작은 평상의 역할은 그리스 아테네의 광장과 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서로간의 소통과 관계를 맺는 공론장이다.

공론장은 주민자치위원회처럼 행정적으로 보장된 형태일 수도 있고 동네도서관이나 놀이터 같이 작은 것일 수도 있다. 크기나 형식을 떠나 그 안에서 얼마나 자유롭고 평등한 소통이 시작되는가를 살펴보고 그 시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함께 키워나가는 것이야말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걸어가다보면 다양한 걸림돌을 만날 것이며 어쩔 때는 넘어지기도 제자리걸음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하는 한걸음이 소중하고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함께하는 것이 지금의 동네에, 인천에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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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거창한 담론으로 그리고 상업적 시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세세한 소통의 과정, 사람들이 살아가며 만들어 내는 일상적인 것으로 볼 때 거대 매스미디어가 아니라 동네의 소소한 문화가 보인다. 그리고 이 문화는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소비되지도 않고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 동네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으로 자리를 잡는다. 보고 즐기는 즐거움이 아니라 내 피부에 느껴지는 즐거움, 만든 것을 보는 즐거움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즐거움이 바로 동네를 키우고 인천을 키우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미디어가 보는 인천은 산, 바다, 공항, 항만, 신도시와 구시가지 등의 다양한 모습을 갖춘 매력적인 곳이다. 인천이 매스미디어에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천의 다양함이 TV와 스크린에서 배경으로만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한다. 동네가 떠들썩한 인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나가는 인천이 되었으면 한다. 이것이야 말로 인천의, 인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한다.

라정민
청소년인문학도서관 느루 청년활동가/사회적협동조합 인천여성영화제 교육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