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콕콕] 지금, 전자책

책(冊)은 ‘종이를 겹쳐서 한데 꿰맨 물건’입니다. 전자책의 등장으로 책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전자책과 구분하는 ‘종이책’이라는 말이 새롭게 탄생했죠. 디지털 시대에 종이가 디스플레이로 대체되면서 특히 출판과 인쇄 분야가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공간 확보와 비용 절감에서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죠. 전자책(e-북)도 그즈음 등장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스마트 기기의 보급과 태블릿의 유행으로 종이가 사라질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전자책 시장이 실패한 것도 아닙니다. 2016년 기준, 우리나라 출판시장은 약 3조 163억 원으로 이 중 전자출판은 약 2,310억 원입니다. 전체 시장의 약 7~8% 규모죠. 전자출판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미국, 중국과 함께 세계 3대 출판 시장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일본은 2016년 1,909억 엔(원화 환산 약 1조 9,314억 원 상당)에서 지난해는 상반기에만 1,029억 엔(원화 환산 약 1조 411억 원 상당)을 벌어들였습니다. 대형 출판사보다 중소 규모나 인디(개인) 출판의 다양하고 독특한 콘텐츠가 주목받았고 전자 만화와 웹툰 등도 시장을 키우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출처: IT동아

우리나라도 조금씩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웹툰 및 웹소설에 대한 수요 증가와 더불어 저렴한 비용으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월정액 무제한 구독 서비스가 하나둘 도입되는 추세입니다.

2009년 전자책 시장에 뛰어든 리디북스는 지난 7월 ‘리디셀렉트’를 출시했습니다. 월 구독료 6,500원을 내면 2,600여 권(출시 초기 1천여 권)의 전자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죠. ‘밀리의 서재’를 이용하면 월 9,900원으로 2만5000여 권의 도서를 무제한 구독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서점 예스24는 구독형 서비스 ‘북클럽’을 9월부터 시범운영 중입니다. 11월 중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는데 도서 큐레이션을 강점으로 내세웠습니다. 교보문고의 전자책 서비스 ‘샘(Sam)’도 월정액 무제한 요금제 도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년 초에 출시된다고 하네요.

 
출처:IT동아   출처:더스쿠프

우리나라 전자책 시장은 규모가 작은 것이 사실이지만 서서히 성장판이 열리고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맞춘 콘텐츠(웹툰, 웹소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고, 음성이 추가된 멀티미디어 분야도 덩치를 키워나가는 중입니다.

풀어야 할 숙제도 적지 않습니다. 월정액 구독은 일종의 스트리밍 개념으로, 다운로드 받아서 읽는 전자책과 달리 수익 구조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도서를 어느 정도 읽었을 때 출판사에 수익을 배분할 것인지 등이 업체마다 다릅니다. 유통업체들이 도서정가제를 피해가기 위한 꼼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동안 전자책 유통업체는 10~50년 동안의 장기대여 서비스를 제공해왔습니다. 전자책 판매의 경우 할인율이 15%로 제한되지만, 대여는 유통업체가 가격을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전자책 구매 시 8,000원인 도서가 50년 장기 대여 시 3,000원인 경우도 생기는 거죠.

2018년 11월 한시적으로 홍대입구역에 설치된 ‘책 읽는 지하철 전자책 체험관’
출처: 동아일보

전자책은 두 가지 흐름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종이책 출판을 재현하는 전자출판물과 종이책과 관계없이 직접 디지털 콘텐츠로 출판되는 전자출판물이 그것이죠. 최근에는 다음 스토리펀딩이나 브런치(brunch) 등의 웹 콘텐츠가 종이책으로 출간되거나 영화나 드라마로 개발되는 현상도 관찰됩니다.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는 전자출판이 ‘생산과정으로서의 전자출판’과 전자책이라는 좁은 범주에서 벗어나 전자책, 웹툰, 웹소설, 웹진, 웹콘텐츠, 앱북, 멀티미디어 콘텐츠, 오디오북 같은 웹과 모바일 기반의 디지털 콘텐츠 출판을 모두 포함하는 디지털 퍼블리싱(digital publishing)으로 정의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창작자와 저자, 출판사, 서점, 플랫폼 기업, 독자는 스마트 디바이스와 관련 기술을 기반으로 출판 가치 네트워크를 작동해야 합니다. 아울러 정부의 출판 정책은 전자출판의 확장된 범주에 기반해 모두의 활동과 역할을 강화하고 지원한다면 개발 행위자는 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선순환으로 생태계 전체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구조를 만드는 거죠.

공 교수는 “종이책의 복제와 재현에서 벗어나 디지털 콘텐츠 생태계를 위한 전반적인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출판생태계를 콘텐츠 산업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지난 십여 년간 실행한 도서정가제의 과실에 대해 분석하고 가치 네트워크 참여자들의 다양한 의견 수렴을 통해 새로운 정책으로 보완하고 변화시켜야 한다.”고 하네요.

출처: 뉴스페이퍼

지난 9월 미국에서는 ‘워터게이트’ 특종 기자 밥 우드워드(75)가 펴낸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Fear: Trump in the White House)>가 출간됐습니다. 당시 엄청난 화제를 뿌리며 발간 첫날 75만 부, 1주일 만에 110만 부 판매를 기록했죠. <공포> 한국어판은 12월 중에 리디북스에서 전자책으로 나옵니다. 종이책 출간은 미정이고요. 종이책이 출간되기 전에 전자책이 나오는 것은 드문 경우인데 물리적 제약이 덜한 전자책으로 독자들은 한발 앞서 화제의 신간을 접하게 됩니다.

인천시는 지난해 통합전자도서관 연계 구축작업을 완료했습니다. 군·구립 47개 공공도서관 및 작은 도서관의 통합도서 서비스 회원은 미추홀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언제 어디서든 전자도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018년 1월부터 3만 2천여 점(e-북 31,855/오디오북 224)의 자료를 제공해왔으며 적극적으로 전자 자료를 확대 구입하고 있습니다.

 글 이미지 이재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1. 우리말 톺아보기_‘종이책’과 ‘식빵’
한국일보, 2018.11.1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2. 성장 잠재력 품은 국내 전자책 시장, ‘콘텐츠’가 답이다
IT동아, 2018.9.11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3. ‘공포’’ 한글판, 전자책 먼저
조선일보, 2018.11.10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4. 한국 전자책, ‘아마존식 혁명’ 가능할까
더스쿠프, 2018.11.15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5. [오피니언] 디지털 콘텐츠로서의 전자책 생태계를 위한 제언
뉴스페이퍼, 2018.10.23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6. 인천시, 통합전자도서관 운영…언제 어디서나 전자책 읽을 수 있다
퀸, 2018.1.30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빛나는 도시의 그림자, 부평 삼릉 줄사택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자체나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하게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날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도시 공간에는 집단의 기억이 머물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상암월드컵경기장을 떠올려 봅시다. 20년 정도 축구경기와 공연과 행사가 무수히 열렸고, 영화관과 마트와 예식장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상암월드컵경기장이 응원하는 팀의 홈구장이고 주말마다 가는 마트이며 사랑하는 부부의 시작점이고 처음 가 본 콘서트장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 상암월드컵 경기장에서 겪은 집단의 기억은 2002년 독일과의 4강전 무대일 것입니다. 심지어 그때 태어나지 않은 학생에게도 집단의 기억이 전달되어 먼 훗날 상암경기장이 사라져도 일정 기간 이 기억은 유지될 것입니다. 2002년의 서울 광장이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서울광장에 새겨진 가장 강렬한 기억 중 하나가 거리 응원인 것처럼 말이지요.

어떤 오래된 공간은 가끔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중구의 차이나타운과 개항장 문화지구가 꼭 그렇습니다. 작년 여름에 제가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도시’ 1편에서 말씀드렸던 상하이처럼 오랜 시간 식민통치의 유산으로 취급돼 주목받지 못하던 조계지의 옛 석조건물들을 문화공간으로 재발견하고 집단의 기억에서 지워진 옛 일본식 주택들에서 개항과 근대화의 기억을 꺼낸 것이죠. 이제 이곳에는 다시금 깨어난 과거의 기억과 그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오늘의 삶이 뒤섞여 더 재미있고 역동적인 공간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대표적인 집단의 기억으로 다른 시간이나 현재마저 잊히기도 합니다. 최근 박물관 건립과 관련하여 의견이 다양하게 오고 가는 부평의 삼릉 줄사택을 보면 어떤 도시 공간에서는 현재가 잊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현재 부평공원 자리에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이 있었고 이 공장은 미쓰비시의 소유였습니다. 그들은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이 거주할 사택을 철길 건너편에 지었고, 이중에 일부가 현재까지 남아 삼릉(三菱, 미쓰비시) 줄사택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식 주택인 ‘나가야(長屋) 형태’로 지어졌는데 옆집 벽을 맞대어 줄줄이 늘어서 짓는 연립주택 형태입니다. 그래서 ‘줄’사택이지요. 현재 가장 크게 남은 곳은 ‘미쓰비시 줄사택 유적지’로 70여 채가 남아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이 유적지 외에도 일부 인근에 나가야 형태로 잘게 나뉜 필지들이 몇 군데 더 있고, 오랜 시간 건물의 외면은 변했지만, 당시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부평동 삼릉 줄사택
(출처: 중부일보 바로가기)

현재 줄사택 일부를 보존하며 마을박물관을 짓거나 부족한 주민이용시설을 확충할 공공 마을도서관이나 장난감 대여점 등을 마련하기 위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너무 낡은 건물이기에 철거하고 새로운 시설을 짓는다는 의견은 기본적으로 일치합니다. 오래되며 낮고 좁은 도시를 높고 넓은 도시로 바꾸는 것. 우리는 이러한 변화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줄사택은 80년 가까이 된 건축물이므로 보수해 생활하기에 한계가 있고 이미 상당수 집이 비어 있어 철거하는 데 크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도시 공간을 개선해 역사문화공간을 만들거나 재건축, 재개발 과정에서 현재 그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잊어지기 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사회학자 사스키아 사센은 세계적인 도시들을 연구하며 독특한 특징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첨단산업이 모여 있고 부유한 사람들이 많은 도시에 역설적으로 가난한 이민자들과 비정규적이고 낮은 임금을 받는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적인 도시의 대규모 사무실이 밀집한 곳에는 높은 임금을 받는 전문직 종사자들도 많지만 그들이 사무실을 운영하기 위해 경비와 유지보수 및 청소 등 낮은 임금의 임시직 종사자들도 함께 필요로 하게 됩니다. 또 사센은 가정에 있던 많은 여성들이 전문직종에 진출하면서 이전에는 적었던 가사노동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또 다른 도시사회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이런 직종의 종사자들을 ‘불안정한(Precarious)’과 ’노동자(Proletatiat)’를 합쳐 ‘프리케리아트(Precariat)’라 불렀습니다. 마르크스가 단결하자고 했던 노동자 계급보다 프리케리아트는 더 불안정하고 더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평균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근로하고 더 적은 임금을 받습니다. 그래서 주거지역을 선택하는 데 제약을 훨씬 많이 받습니다. 직장과 집이 더욱 가까워야 합니다. 많은 경우 임시직으로 고용되기 때문에 지금 일자리에서 해고돼도 언제든 다른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대도시에 거주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도시 중심일수록 더 비싼 임대료를 내야 합니다. 이런 악조건 때문에 많은 저소득 노동자들은 더 넓고 저렴한 주거를 찾아 교외로 나가지 못하고 도시에서 낡고 오래되고 좁은 주거공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자가소유는 꿈도 꾸지 못하고 그런 공간을 임차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건축과 재개발을 앞둔 오래된 주택과 상가건물의 옥탑, 반지하, 그리고 쪽방과 고시원 같은 곳 말입니다.

최근 화재사고가 발생한 종로구 국일 고시원
(출처 조선일보 바로가기)

하지만 우리 도시는 계속 이런 공간을 없애고 싶어 합니다. 인천뿐만 아니라 어디나 그렇습니다. 재건축과 재개발로 흔적도 없이 낡은 공간을 없애 버리기도 하고 도시재생이나 역사문화공간 만들기로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켜 겉모습을 유지한 채 공간 안의 사람들을 바꿔 버리기도 합니다. 한때 광풍과 같았던 뉴타운이 전자라면 연남동·후암동·익선동은 후자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더욱 쾌적한 삶의 공간과 더 좋은 일자리와 더 많은 문화적 경험을 위해 도시 공간에서 계속 낡고 좁은 공간을 지워 버리고 새로운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 무조건 잘못된 방법은 아닙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도시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워져야 하고 변화해야 합니다. 이런 변화는 당연하고 도도한 흐름일 뿐입니다.

다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도시가 부분부분 새로워질 때마다 별다른 방법 없이 밀려나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뉴스에서 재개발에 항의하는 세입자들이나 젠트리피케이션에 어려움을 겪는 상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고시원과 쪽방과 낡은 재개발 지역 주택의 세입자들이 도시에서 여기저기로 밀려다니는 것을 우리는 대체로 잘 알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얼마 전 또다시 날씨가 추워지자마자 종로 고시원 화재 같은 사고가 벌어지고 나서야 열악한 주거공간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정치가나 행정가들은 대책을 마련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욱 화려하게 빛나는 도시 공간을 꿈꾸는 동안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도시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 빛이 닿지 않은 도시의 그늘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글 김윤환(도시공간 연구자)

[참고문헌]

데이비드 하비(2014). 반란의 도시. 에이도스
사스키아 사센(2016). 세계경제와 도시. 푸른 길
“인천 부평구 미쓰비시 줄사택 박물관 조성 사업 표류”. 중부일보. 2018. 11. 11.
“’강제동원 흔적’ 미쓰비시 줄사택, 구청장 공약사업의 전쟁터 됐나”. 인천일보. 2018. 11. 14.

 




Yaloo Castle Site at Fukuoka 4

전시장 앞 흐드러지게 핀 벚꽃

전시를 보러오는 사람보다는 벚꽃축제를 즐기러 왔다가 들러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전시를 개장하자마자 꽤 많은 관람객이 몰렸는데 좁은 통로 일방통행만 가능한 전시 구조 때문인지 빠른 걸음으로 작업을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몹시 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상을 향해 삐쳤던 내가 우스운데, 당시에는 막 완성하고 설치를 한 작업이라 감정의 거리가 좁았던 것 같다. 관객들은 다음 관객들을 위해 멈추지 않고 빨리 지나가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전시 막바지에는 심적 여유가 생겨서 전시장 근처에 머물면서 관객들 반응도 살피고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가끔 관객들에게 직접 작업에 관해 설명도 하고 그들에게 감상을 듣거나 질문에 대답하기도 했다. 공공장소고 후쿠오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봄을 여는 행사인 만큼 다양한 관객을 만날 수 있었다. 틈틈이 다른 작가들의 전시도 방문하면서 공공장소에서 많은 인파가 몰리는 행사에서의 예술가와 예술 작품 역할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해 볼 기회가 되었다.

하나미 중 셀피. 노부오 하라다 작가, 이와모토 후미오 큐레이터와 함께

전시 기간 내내 계속된 아름다운 벚꽃과 향기, 그리고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 구경은 덤으로 얻은 즐거움이었다. 지난 연재에서 소개했던 부토 아티스트 노부오 하라다 선생님이 방문해주셔서 벚꽃 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사케 한 병과 간소하게 준비한 주전부리를 펼쳐놓고 하나미를 해봤다. 협업 결과물을 설명해 드린 것보다 작업 속에서 확대하지 못해 죄송스러운 마음이 컸는데, 다행히 작업을 좋아해 주셨고 다음 작업물에 대한 의견도 내주셨다. 언젠가는 협업 물의 정의를 지킬 수 있는 작업을 꼭 해내겠다고 말씀드렸다.

 

얄루 성터 전시 전경 일부

지난 연재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전시장 사진 몇 개를 공유한다. 성문, 샹들리에, 내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자전적 캐릭터 홍삼 돌과 고장 난 텔레비전 타워 시리즈 등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상상 속 유물이 비디오 조형 형태로 관객들을 맞이한다. 마지막 방에는 방금 지나온 유물들이 VR 진공 공간 속에서 부유하고 있다.

 

얄루 성터 전시 전경 일부

마지막 방에 설치된 가상현실(VR) 작업은 인기가 좋았다. 의외로 VR을 체험을 처음 해보는 관객들이 많았다. 상업 박람회에나 핸드폰 회사의 임시매장에서 행사용으로 준비하는 뻔한 기업 광고용 체험이 아닌 작가의 시선과 상상력이 담긴 VR 작업이 많은 이들에게 첫 경험일 수 있어서 뜻깊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스마트폰 등 디지털 미디어는 일상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많은 콘텐츠가 큰 자본으로 생산되고 유통되고 있다. 자본 제로의 개인 창작자로서 같은 매체를 실험하고 표현하기는 정말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자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 창작자로서 그 매체 안에서 비판적인 시각과 유연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창작된 생산물을 관객과 나누는 것은 그 매체의 자주성과 다양성을 확장하며 민주성을 지킨다. 이 자리를 통해 프로젝트를 지지해주신 인천재단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얄루성터VR 관람객들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후쿠오카의 지역 사회 예술인과 교류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후쿠오카 아시안 미술관에서 도보 십 분 거리에 위치한 대안공간 테트라(Space Tetra)에서 아시안 아츠 에어 후쿠오카(Asian Arts Air FUKUOKA)강의 시리즈에서 발표를 초청받았다. 지난 연재에서 조금 언급했던 것처럼 후쿠오카는 근현대 아시아 역사에서 큰 역할을 차지했고 이 유산이 이어져 아시안 아트 에어같은 풀뿌리 단체가 자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로컬 작가가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전시나 레지던시를 마치고 오면 결과 발표하는 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후쿠오카에 체류 중인 외국 작가들을 초청해서 강연을 열어 아시아 예술 커뮤니티의 친목을 도모한다. 자카르타 출신 연구자이자 큐레이터인 레너드 발토로메스(Leonhard Bartholomeus), 중국 총칭 레지던시를 마친 케이치로 테라에(Keichiro Terae) 작가, 타이완 타이난 레지던시에서 돌아온 마키조노 켄지 (Makizono Kenji) 작가들과 함께 발표했다. 일본 작가들의 발표가 그동안 내가 해왔던 방식과 아주 달라서 신기했다. 일본 작가들은 먹어본 음식, 숙소, 재밌었던 일화 등 현지 사정과 작가들의 레지던시 생활을 주로 설명하고 작업의 과정이나 결과물에 대한 말과 사진은 아꼈다. 작업과정과 전시 결과물만 소개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삼가는 프레젠테이션을 해왔던 나에겐 생소한 발표 문화였다. 질의응답 시간에도 작업보다는 현지 생활에 대한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단체 성격과 커뮤니티 내에서의 접근 방식의 차이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

 
아티스트 토크 사진

레오나드 발토로메스 큐레이터는 자카르타 출신으로 한국에도 자주 소개된 롱그루파(Wrong Groupa)라는 자카르타 대표 풀뿌리 아티스트 콜렉티브의 막내 맴버다. 아시안 아트 에어 강의에서는 롱그루파의 활동을 소개했는데, 사실 그는 개인 연구를 위해 아시안 아트 뮤지엄의 연구자 자격으로 체류 중이었다.

미술관에서 스튜디오 이웃사촌이었던 발토 큐레이터와 얄루 작가

주류 탈식민주의자들의 근현대 인도네시아 풍경화에 대한 시선을 비판하는 논문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의 연구의 요지는 주류 탈식민주의자에게 인도네시아의 근현대 풍경화 식민주의의 폐해이자 잔재를 무조건 비판하지만 발토 큐레이터는 당시 인도네시아 풍경화가에게 서양에서 건너온 새로운 표현기법은 수동적이고 억압의 산물이 아니라 새로운 영감이자 현지 문화와 유산에 공명하는 자주적인 운동이기도 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나이가 비슷한 학자와 벽을 나누며 세계화,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 사상, 아시아 근현대(미술)사를 잠깐이었지만 일상 속 수다에 녹여낼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노미짱이 해준 아침밥. 따뜻한 마음씨가 느껴져 눈물이 찔끔 났다.

노미 키쿠코(Nomi Kikuko) 작가는 이와모토 큐레이터와 십년지기 친구이다. 예산을 아껴 쓰려 고군분투하는 나에게 노미짱은 선뜻 자기 집 방 하나를 내주었다. 때때로 식사나 차를 함께 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쿠오카 현지 작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노미짱은 근처 바에서 파트타임을 하고 있었는데, 그전에는 전화 상담 아르바이트를 했었다고 한다. 후쿠오카의 많은 예술가가 시간 조절이 자유롭고 시급이 좋은 편이라 전화 상담 아르바이트를 많이 한다고 했다. 예의 바르고 조심스러운 일본 사람들조차 전화기 뒤에선 상상 이상으로 심술궂고 험악하다며 웃으며 얘기해줬다. 어디를 가든 작가들은 음지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글·사진 임지연

얄루(Yaloo)
얄루 작가는 인천에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다. 미국 시카고 예술학교에서 학부를 마치고 동대학원에서 비디오 아트를 공부했다. 현재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히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비디오 아트 계에서 권위 있는 프로그램인 비디오 데이타 뱅크에서 린블루멘탈 장학금을 수상하였으며2016년 뉴욕한인예술재단이 주최하는 비쥬얼 아트 어워드에서 금상을 받았다. 벨기에 리지 비엔날레, 퀘벡 비엔날레 등 전세계 크고 작은 도시에서 다수의 전시 경험이 있다.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해드랜드 아트센터, 퀘백 라반데 비디오 등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하면서 역량을 쌓는 중이다




[큐레이션 콕콕] 문학과 연극 사이, 낭독

‘낭독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묵독이 일반적인 시대에 소리 내어 읽는 ‘몸의 행위’로 책 읽기의 새로운 감각을 알리고자 제작됐죠. 2003년에 처음 전파를 탄 프로그램은 글자를 침묵 밖으로 끌어내 살아 있는 텍스트가 되게 하는 데 한몫했습니다.

요즘 문학과 연극계에서 낭독이라는 새로운 극형식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연극계에서 낭독은 개막 전에 작품을 미리 공개하는 리딩 공연으로 선보였습니다. 연극 제작 전 투자자를 찾기 위한 쇼케이스나 홍보용이었죠. 문학에서도 책을 소리 내어 읽는 습관을 강조하지만, 작품이 낭독의 형태로 소개되는 일은 드뭅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호흡하며 작품을 만나는 시간. 낭독극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파편화된 도시인들에게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문자 없이 구어만 존재하던 시절,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야기꾼의 모양새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낭독극은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운 세트는 치우고 배우와 대사만으로 ‘생각하는 희곡’을 추구합니다. 그야말로 이야기의 본질을 찾아가는 거죠. 빠름을 강조하는 디지털 시대에 글자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되새기는 낭독은 새로운 문화 트렌드가 되고 있습니다.

낭독극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한 장면
출처:파이낸셜뉴스

“텅 빈 무대 위에 대본을 든 배우들만 덩그러니 있다. 다른 그 무엇보다 대사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함이 흐른다. 적막을 뚫고 관객까지 달려가는 배우들의 언어는 날쌔다. 텍스트와 무대 사이 빈 공간에서 관객들은 상상의 유희를 펼친다. 듣는 희곡의 즐거움을 새삼 느낀다.” (‘극장, 낭독에 빠지다’ 중에서)

<낭독 독서법>을 쓴 진가록 작가는 “낭독은 하나의 선포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인생에 가로놓인 벽 앞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다짐”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낭독을 하면 책 속 인물에 감정 이입하기 쉽다고 합니다. 목소리의 울림, 색깔, 진동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낭독뮤지컬 ‘파리넬리’ 한 장면
출처:위클리공감

낭독+연극뿐만 아니라 낭독+뮤지컬도 있습니다. ‘파리넬리’는 뮤지컬 제작사 HJ컬처가 기획한 ‘낭독뮤지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첫 작품 ‘마리아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두 명의 배우가 노래하고 편지를 읽으며 극을 이끕니다. 무대에는 동그란 단상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피아노 한 대가 전부입니다.

18세기 최고의 카스트라토(변성기가 시작되기 전 거세해 소년 시절에 지니는 고음역을 유지하는 가수)였던 파리넬리. 극은 신이 내린 목소리를 지닌 동생 파리넬리와 불멸의 음악가가 되고자 했던 형 리카르도가 주고받은 편지를 테마로 진행됩니다. 사건보다 내면에 집중하게 하는 낭독의 형식을 극대화했죠.

‘파리넬리’의 프로듀서인 사노 아유미는 “스마트 시대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펜을 들고 편지지를 보며 오랜 시간 고민한 마음을 글로 옮기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시각보다 청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배우들도 의상과 분장보다 목소리에 집중합니다. 제작비가 줄어드니 흥행 부담도 줄고, 관객도 온전히 노래와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다는 점도 낭독극의 장점입니다. 이는 티켓 값에도 영향을 줘, 관객들이 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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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문학 사이에 위치한 ‘낭독극’을 미국 뉴욕의 맨해튼 오프브로드웨이나 대학가에서는 ‘스테이지 리딩(Stage Reading)’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에서도 누군가가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읽어주는 낭독극이 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일기를 소재로 한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올해 10주년을 맞이하여 두 남녀의 만남에부터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과 그때의 감정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냉장고 위의 인생’은 냉장고에 붙여진 쪽지를 이용해 엄마와 딸의 마음을 들려줍니다.

출처:명랑캠페인

지난여름에는 소설가 윤고은의 단편소설 <1인용 식탁>이 공연됐습니다. ‘1인용 식탁’은 회사에서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해 혼자 점심을 먹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프로젝트 그룹 ‘키르코스’ 배우들이 낭독극으로 만들었죠.

유시민 작가의 1988년 등단작인 중편소설 <달>도 무대에 올랐습니다. 군대의 고문관이라 불리는 주인공 김영민을 중심으로 그의 가족사와 군대 경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 등을 담은 작품입니다. 공연기획사 후플러스가 진행한 ‘2018 상생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죠.

 
입체낭독극 <어쩌면>과 <웃는 동안>
출처:명랑캠페인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살아가던 ‘나’의 죽음이 친구들에게 알려집니다. 전화를 받은 성민은 영재를 찾아가고, 라면을 먹던 영재와 함께 화장실에서 꼼짝 않는 민기에게 소식을 알리러 갑니다. 펑펑 울며 통곡할 줄 알았던 그들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멋진 양복을 사러 가죠.” 소설 <웃는 동안>의 내용입니다.

<어쩌면>에는 나, 압정, 라디오, 거울 네 명과 소설책을 읽고 있는 또 다른 배우가 등장합니다. 네 명의 소녀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죽은 이들의 말과 행동을 재연합니다. 작가가 쓴 따옴표 하나, 괄호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읽어 내려가죠. 연극과 소설의 경계를 잊은 관객들은 무대 너머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입체낭독연극<어쩌면>과 <웃는 동안>은 윤성희 작가의 단편소설을 원텍스트로 합니다. 독자가 만들어낸 수만, 수천 가지의 느낌들은 모두 다르기에 수많은 해석이 존재합니다. 가만히 앉아 읽기만 하는 낭독극과 달리 책상 위를 오르고, 무대 위를 뛰어다니고 손짓·발짓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입체낭독연극입니다.

출처:위클리공감

지난 9월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열린 낭독음악회에서는 이육사, 도종환, 박용재, 이원 시인의 작품이 낭독됐고 신촌, 합정, 연희동에 자리 잡은 독립서점과 카페에서는 때때로 시인의 낭독회가 펼쳐집니다. 대중가요의 가사를 읊기도 합니다. ‘밥 딜런 낭독회-샷 오브 러브’에는 대중음악평론가와 시인, 뮤지션 등이 함께했네요. 시인이 시적인 가사를 소개하면 뮤지션이 직접 밥 딜런의 노래를 들려주는 거죠.

출처:원주시 공식 블로그

소설 토지의 날은 박경리 선생이 26년에 걸친 집필 기간 끝에 5부 20권 분량의 토지를 완간한 기념으로 해마다 8월 15일에 열립니다. 소설 토지 1부 첫 장면이 1897년 8월 15일이고, 토지의 마지막 장면도 (1945년) 8월 15일, 토지 완간일은 (1994년) 8월 15일이고, 박경리 문학의 집 개관 역시 8.15가 붙은 2010년 8월 15일입니다.

해마다 시 낭송 대회, 토지 명장면 따라 그리기, 물통에 감동 메시지 남기기, 토지 한 문장 쓰기, ‘토지’ 속 등장 인물에게 편지쓰기 등의 행사가 열리는데 올해 처음 ‘박경리 소설 낭독공연 대회’를 시작했습니다. 예선을 치른 뒤 본선에 오른 네 팀이 박경리 문학의 집 공연에서 열연했고, ‘설화’, ‘불신시대’ 같은 박경리 소설을 낭독극으로 선보였습니다.

출처: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재단의 목요낭독회가 올해로 3년째 진행됐습니다. 참여자들은 3개월간의 연습 끝에 지난달 낭독극 <뷰티인사이드>를 공개했다고 하네요.

마지막으로 집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낭독 팟캐스트를 소개합니다.

1. 예스책방 책읽아웃
매주 목, 금요일 방송된다. 오은 시인이 진행.

2. 알라딘의 서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송된다. 신간 중 추천하는 책 4권을 낭독.

3. 낭만서점
매주 화요일 한 편의 소설을 선정해 들려준다. ‘세계문학 읽기’ 코너에서는 박혜진 문학평론가와 배우 김성현이 매월 두 편의 세계문학 고전을 선정해 낭독.

글 · 이미지 이재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1. 눈이 아닌, 말과 귀로 책을 읽는다! 낭독의 매력
위클리공감, 2018.8.24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2. 소설 『土地』 완간일, 8월 15일 ‘소설 토지의 날’
네이버 블로그(이슬마루), 2018.8.19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3. 명랑한 낭독, 팔딱거리는 소설 <웃는 동안>
네이버 블로그(명랑캠페인), 2017.9.16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4. ‘낭독’의 시대, 뮤지컬과 소설의 그 중간지점
브런치(서정준 JJ), 2018.8.22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5. 삶을 바꾸는 ‘우리말 낭독’의 힘-소리내어 읽는 즐거움
충청매일, 2017.8.22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6. 극장, 낭독에 빠지다
파이낸셜뉴스, 2014.2.19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완벽해요 신기하리만큼

독일인들의 작은 일탈, 크리스마스 마켓

“승연! 드디어 뮌스터(Münster)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렸어.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은 정말 유명하거든. 꼭 가봐야 한다고!”

쉐핑헨 레지던시의 사무실 직원 우타(Uta)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한다. 우타는 쉐핑헨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뮌스터에 산다. 최근 우타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뮌스터 크리스마스 마켓 이야기를 계속 들었기에 마켓이 열리면 뮌스터에 나가 봐야지 하고 생각하던 차였다.
사실 크리스마스 마켓이라고 뭔가 특별한 게 있을까 의아했다. 이미 런던 유학 시절 화려한 크리스마스 마켓을 여러 번 본 터라 아마 독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온 거리는 아름다운 조명으로 장식되어 화려하고 사람들은 한껏 들떠 쇼핑하러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그려졌다.
어쨌든 심심하고 건조한 독일인들이 이토록 신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뭔가 색다른 게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게다가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의 역사는 600여 년이나 되었다고 하니, 흠… 덩달아 기대가 된다.

스산하게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쉐핑헨에서 S70번 버스를 타고 뮌스터로 향했다. 쉐핑헨에서 뮌스터까지 버스로 1시간이 걸리고 왕복해서 12유로다. 저렴한 독일물가와 비교하면 꽤 비싼 편이다.
어쨌든 뮌스터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고 싶어 아침 일찍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아저씨가 크리스마스 쿠키를 건넨다. 흩날리는 비를 뚫고 뮌스터에 도착했다. 뮌스터에선 11월부터 크리스마스 마켓 다섯 곳이 열린다. 도시 곳곳에 붉은 장식품이 눈길을 끈다. 거리 한쪽에 작은 통나무집 모양을 한 상점이 줄지어 섰다. 힐끗힐끗 살펴보니 작은 수공예품과 털모자, 장갑, 컵 등을 거리에서 소소하게 판다. 한쪽에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따뜻하게 데워진 글루바인(Glühwein)을 홀짝홀짝 마신다. 음식이라고는 커리브로스터(Currywurst) 와 감자튀김이 전부다.

뮌스터 크리스마스 마켓

달걀에 끼워 준 크리스마스 초콜릿

뭐지? 우리나라 명동의 길거리 마켓보다 훨씬 한산해 보이는데… 이게 특별하다고?’ 

 심드렁하니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 표정은 평소보다 훨씬 밝다. 어떻게 보면 아주 소박한 크리스마스 마켓에 잔뜩 들떠 있는 독일인들이 참 귀엽다. 한국에 사는 나에게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지만 1년에 한 번 있는 크리스마스에 길거리 노점상을 즐기는 독일인들에겐 작은 일탈이었다.
크리스마스 전통은 독일에서 시작됐다던데, 크리스마스를 독일에서 보낸다고 하니 유럽의 다른 친구들은 전통 크리스마스를 보겠구나 하며 부러워했다. 그런데 막상 독일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참 소박하고 간소하다. 평소와 다르게 길에서 따뜻한 글루바인을 마시며 음식을 먹고 소소한 물건을 팔러 나와 사람들을 만난다.
이렇게 작은 이벤트가 독일인들에겐 크리스마스마다 해 오던 특별한 일이 아니었을까? 누군가에게는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고 누군가에겐 종일 쇼핑만 할 수 있는 날이며, 누군가에겐 글루바인이나 쿠키와 커리부로스터가 있는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라는 사실 그 자체로 설레는 것 같다. 화려하고 눈부셨던 런던의 크리스마스와 달리 소소하고 심심한 독일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지나 뮌스터의 구시가지를 걸어갔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인기 있던 감자튀김과 커리부러스트

비스킷으로 치장한 뮌스터 

뮌스터의 구시가지는 참 예쁘다. 정말 너무 완벽해서 이상하리만큼 예쁘다. 건물 못지않게 도시 바닥도 예쁘다. 만질만질한 돌바닥을 보니 수백 년 전 이곳에서 마차를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 오래된 돌바닥 위로 젊은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볍게 달린다. 런던처럼 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없고 파리처럼 지저분한 쓰레기가 굴러다니지도 않는다. 적어도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차분하게 정리돼 있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 마켓에 테러가 일어났다는 사실만 빼면 마치 세트장처럼 모든 게 완벽하다.  

뮌스터 거리

그런데 자세히 둘러보니 도시 전체가 꼭 얇은 비스킷으로 둘러싸인 것 같다. 구시가지의 건물 앞면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찍힌 비스킷 같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뮌스터의 구시가지 거리는 모두 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후 뮌스터는 도시의 반 이상이 전부 부서졌다.
이후 사람들은 원래 건물을 바탕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뮌스터 구시가지엔 건물 48개가 새로 지어졌다. 말이 구시가지이지 사실 새로 지어진 거리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오래전 거리를 잘 살렸다.
몇몇 건물의 앞면은 뒤쪽에서 철봉으로 받쳐 놓았다. 건물마다 문양도 찍혀 있다. 유럽의 오래된 가문들처럼 건물마다 문양들이 새겨져 있어 꽤 인상 깊다. 각 건물에 이야기가 담긴 오래된 로고가 하나씩 있는 셈이다. 나도 언젠가 집을 짓게 된다면 꼭 이런 문양을 만들어 새기고 싶다. 게다가 건물의 지붕 형태도 전부 제각각이다. 뾰족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고 층층이 나뉘어 있기도 하다. 가끔 건물 꼭대기에 사람이 조각돼 있다. 멍하니 건물 하나하나 바라보다 보니 어느덧 해가 넘어간다.

2차 세계대전 후 부서진 뮌스터 거리

 
건물 앞면을 철봉으로 비스듬히 받쳐 놓은 모습   비스킷 같은 뮌스터 건물 앞면

건물에 새겨진 문양

해가 지자 건물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물론 예쁘다. 뮌스터에서 만난 가이드 아네트는 구시가지 쇼핑거리에서 파는 물건들을 계속 설명한다. 그런데 나는 가게에서 파는 화려한 물건들보다 건물에 더 호기심이 간다.

알다시피 뮌스터는 10년마다 열리는 조각전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거리 곳곳에 예술작품이 남아 있다. 조각들이 도시 일부로 너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전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래된 것과 새것이 정겹게 도시에 어우러진다. 너무 예쁘고 완벽해서 마치 트루먼 쇼를 보는 듯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온 도시가 아름다운 비스킷으로 둘러싸인 듯한 환상을 준다. 뮌스터의 밤이 깊어 간다.

뮌스터 거리

뮌스터 조각전이 끝난 후 거리에 남은 공공예술작품

LWL로 오세요

독일에 온 후 특히 쉐핑헨에 머물며 독일 현대미술을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 매일 쉐핑헨에서 자전거를 타고 동물들을 만나며 시골생활에 흠뻑 취했다. 그렇기에 뮌스터 거리를 걷다 만난 새하얀 건물 엘베엘 미술관(LWL)을 사실 큰 기대 없이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산타클로스(세인트 니콜라스)가 나를 맞이한다. 그런데 그동안 많이 보던 산타클로스가 아니다. 삐뚤빼뚤 우스꽝스러운 얼굴이다. 설명을 읽어 보니 어린이 드로잉을 바탕으로 작가가 다시 만든 조각 작품이다. 왼쪽에는 착한 일을 한 친구에게 줄 선물 보따리를, 오른쪽에는 익살스러운 블랙 피터(까만 얼굴과 복장을 한 채 회초리를 들고 세인트 니콜라스를 따라다님)를 데리고 있다.

LWL미술관 미술관 입구에 놓인 산타클로스 작품

산타클로스를 지나 LWL미술관 전시장으로 향했다. 1층에는 백남준의 작품을 비롯해 현대 미술품이 전시돼 있다. 새하얀 벽에 걸린 현대미술 섹션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간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이 나왔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며 신전처럼 느껴진다.
밖에서 봤을 땐 모던한 건물이었는데 2층 내부는 너무 멋지게 르네상스 시대의 장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건물 바닥에 놓인 어느 작가의 설치 작품이 눈길을 끈다. 다름 아니라 A4 종이다. A4 종이를 깔아 바닥이 갈라지는 듯한 느낌을 표현했다.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과 바닥에 깔린 종이 설치작품이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LWL미술관은 현대미술뿐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의 작품들도 소장하고 있다. 게다가 미술관 건물 자체가 참 우아하다. 이곳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의 본부로 더욱 유명해진 미술관이라고 한다.

A4 종이를 사용한 설치작품과 미술관 내부

모던한 LWL미술관 내부

결국 시간에 쫓겨 LWL미술관을 다 둘러보지 못하고 나왔다. 기대하지 않고 들어갔다 뭔가에 홀린 듯 몇 시간을 보내고 나온 것이다. 뮌스터와 참 잘 어울리는 미술관이란 생각이 들었다. 새하얀 자태를 뽐내는 모던한 건물의 외형에다 잘 정리된 미술작품 콜렉션과 세련된 건물 내부 한쪽은 오래된 르네상스 형식의 건물 형태를 그대로 살렸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오묘하게 잘 어우러진 곳이다. 공공장소에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진 예술작품들과 깨끗하고 차분하게 정리된 뮌스터 거리의 모습이 미술관과 정말 닮았다.

뮌스터는 내게 이상하리만큼 완벽한 도시로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비스킷처럼 달콤하고 맛있지만 쉽게 부서질 것 같은 도시이기도 하다. 너무 완벽해서 어느 순간 쉽게 부서질지도 모르는 그런 도시 말이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부서진 도시를 이토록 멋지게 재건한 독일인들을 생각하면 이 환상적인 도시가 쉽게 사라질 것 같진 않다. 이런 도시에 사는 독일인들에게는 크리스마스 시즌 거리에서 사람들과 소소하게 와인을 마시고 연주를 하고 음식을 나눠 먹는 게 특별한 일이라니…. 참 신기할 뿐이다.
아마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할 수 있는 그들의 작은 일탈이기 때문일까? 그렇기에 이곳에서 만나는 독일인들마다 뮌스터의 크리스마스를 설레는 목소리로 이야기 해준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3일간 머물던 뮌스터를 떠나 쉐핑헨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탄다.

글 / 이승연
사진 / 저기요 스튜디오

이승연(Seung youn LEE)
고대사와 신화, 또는 상상의 극한을 보여 주는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고대’라는 재료를 갖고 미래를 얘기한다. 최근에는 물리학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드로잉을 기반으로 철과 나무, 패브릭,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작업한다. 2012년에서 2017년까지 영국인 알렉산더와 ‘더 바이트 백 무브먼트’아티스트 듀오로 활동했다. 당시의 신화적·종교적·사회적 관심은 개인작업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영국 서머싯 하우스, 국립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 문화역 서울 284, 영은 미술관,
켄 파운데이션, 베를린 ZK/U, 등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처럼 영원히 남을 작업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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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 콕콕] 노벨문학상이 없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없습니다. ‘미투 파문’으로 69년 만에 선정되지 않은 겁니다. 라르스 하이켄스텐 노벨재단 사무총장은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림원이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지 못하면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도 허락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노벨문학상은 매년 10월 스웨덴 한림원 종신 위원들의 투표로 수상자가 결정됩니다. 종신 위원은 모두 18명.

지난해 11월, 한림원은 미투 파문으로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다수의 여성이 프랑스계 사진작가 장 클로드 아르노로부터 20여 년간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했는데, 아르노는 한림원의 종신회원 카타리나 프로스텐손의 남편이었습니다. 노벨문학상 위원 18명 중 7명이 줄줄이 사임했고, 11명만으로는 수상자 선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한림원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뽑지 않았습니다.

출처 : 연합뉴스

한림원은 난리가 났고, 칼 16세 구스타브 왕에게도 보고가 됐습니다. 국왕은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고, 2016년 수상자인 밥 딜런을 포함해 최소 6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사전 유출됐다는 혐의까지 드러났습니다. 사태는 더 심각해졌죠.

카타리나 프로스텐손은 바로 사임하지 않았고 다른 종신 위원들의 사퇴 요구도 쉽게 관찰되지 않았습니다. 한림원 최초의 여성 사무총장 사라 다니우스가 사건을 책임지고 물러난 뒤 프로스텐손도 사의를 표하면서 노벨문학상 선정에 위기감이 돌았습니다.

엎친 데 덮쳐 미투 사건 피의자 장 클로드 아르노가 스웨덴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빅토리아 공주의 엉덩이까지 더듬었다는 기사가 보도됐습니다. 빅토리아 공주는 수년 안에 여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뉴스를 접한 스웨덴 시민들은 ‘아르노는 완전히 돈 놈’이라고 성토했고 노벨문학상의 신뢰는 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시민들은 한림원 해체를 요구했습니다.

감라스탄(Gamla stan)의 옛 증권거래소 건물. 이 건물 2층이 스웨덴 한림원이다
출처:데일리안

1786년 구스타브 3세가 설립한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문학상을 선정, 발표하는 스웨덴 최고의 학술 단체입니다. 스웨덴 한림원이 세 들어있는 건물은 스웨덴을 찾는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리는 곳이죠. 건물 1층에는 노벨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노벨 재단의 라르스 하이켄스텐 사무총장은 “스웨덴 아카데미가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우리는 다른 기관에 노벨문학상 선정을 책임지도록 할 수 있다”며 “한 번 선정권을 잃으면 이를 회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노벨문학상 선정권의 영구 박탈을 시사했습니다. 스웨덴 아카데미는 지난 1901년부터 100년 넘게 노벨문학상을 선정해왔죠.

전통과 권위를 인정받은 노벨문학상은 영국의 맨 부커상, 프랑스의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입니다. 노벨문학상은 국제적으로 가장 명성이 높고 상금도 800만 크로나(약 13억 원)로 맨 부커상의 5만 파운드(약 8,500만 원), 공쿠르상의 10유로(약 1만 5000원)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해마다 전 세계의 작가 중 한 사람에게 주며 대개는 작가의 작품 전체를 평가합니다. 후보는 비공개가 원칙이며 세계 곳곳의 관련 단체로부터 1월까지 후보를 추천받아 최종 5인을 심사에 올립니다. 10월 초에 수상자를 발표하고, 시상식은 노벨이 사망한 날인 12월 10일에 열립니다. 노벨문학상은 문학적 성취 외에도 장르와 지역, 정치적 상황 등을 고려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수상자를 내지 못한 것이 올해가 처음은 아닙니다. 1914년, 1918년, 1935년, 그리고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총 일곱 번 수상자가 없었죠. 수상작을 찾지 못했거나 1, 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수상이 거부된 해도 있었습니다. <닥터 지바고>를 쓴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1958년 정부의 압력으로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도 1964년 문학상 발표 후 “자신은 언제나 공적으로 주어지는 상을 거절해 왔으며, 제도권에 의해 규정되기를 원치 않는다”며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지난 5월 4일 올해 노벨문학상을 선정하지 않기로 한 스웨덴 한림원의 결정을 보도한 신문 기사(캡처)
출처:데일리안

스웨덴 문화예술계 인사 100여 명은 노벨문학상 대안으로 ‘뉴아카데미’를 설립했습니다. “문학은 특권과 편향으로 인한 오만과 성차별 없는 민주주의, 투명성, 공감, 존중을 증진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 단체를 설립했다”며 노벨문학상을 대신해 ‘뉴아카데미문학상’을 주겠다고 나선 거죠. 도서관 사서들이 후보를 선정하고 일반 시민의 인터넷 투표를 거쳐 수상자를 선정합니다. 편집자, 대학교수, 사서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10월에 ‘뉴 아카데미 문학상’ 수상자를 공표할 예정입니다.

출판계 거물 앤 폴슨이 이끄는 뉴아카데미는 일반 시민을 수상자 선정 과정에 참여시켜 노벨상의 폐쇄적인 선정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전문가들이 47명의 후보를 추천하고 3만 명 이상의 온라인 투표를 거쳐 최종 후보 4명이 선정됐으며 이 중에는 최근 노벨상 후보에 자주 오르던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있습니다. 이밖에 프랑스령 과들루프 출신 작가 마리즈 콩데, 베트남 출신 킴 투이, 영국 장르소설 작가 닐 게이먼이 올랐습니다. 시상식은 12월 19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립니다. 참고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후보 선정에 감사를 전하면서도 집필 전념을 이유로 사퇴했다고 하네요.

올해 노벨문학상 시상이 내년으로 연기된 가운데, 라르스 헤이켄스텐 노벨재단 사무총장은 2018년 9월 28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스웨덴 한림원의 구조적 변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노벨문학상을 영구 폐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출처 : 조선닷컴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1901년 쉴리 프뤼돔 시인을 시작으로 토마스 만(1929), 헤르만 헤세(1946), 오엔 겐자부로(1994), 존 멕스웰 쿳시(2003), 그리고 파트릭 모디아노(2014)가 있습니다. 국가별로는 프랑스 작가 15명, 미국 작가 12명, 영국 작가 10명, 독일 작가 8명, 스웨덴 작가 8명, 스페인 작가 6명, 이탈리아 작가 6명, 폴란드 작가 4명, 아일랜드 작가 4명 등이 있고요. 언어권으로 분류하면 영어권 27명, 불어권 16명, 독일어권 13명, 스페인어권 11명, 스웨덴어권 7명, 이탈리아어권 6명, 러시아권 5명, 폴란드어권 4명, 노르웨이권 3명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016년 노벨문학상은 ‘밥 딜런’이 수상했습니다. 앨범〈The Freewheelin’ Bob Dylan>을 통해 저항 운동계의 음악가로 더 알려졌죠. 열 살 때부터 시를 썼으며 그의 가사에서 엿볼 수 있는 시적인 면모는 대중음악 가사를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 인정을 받았습니다. 1997년에 처음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됐으며 지난 수상 과정에서 “위대한 미국 음악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작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일본 태생의 영국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입니다. 그의 작품 중 <나를 보내지 마>는 영화로도 제작돼 화제를 일으켰는데 ‘정상인’에게 장기를 공급하기 위해 태어나고 사육된 복제 인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출처 : 이투데이

온라인 서점 예스24는 지난 1~10일 독자들을 대상으로 ‘2018 노벨문학상 작가’를 선정하는 온라인 투표를 진행했습니다. 총 16만17명의 독자가 참여한 이번 투표에서 한강이 3만2528표(20.3%)로 1위로 뽑혔습니다. 2위는 <개밥바라기별>, <바리데기>의 소설가 황석영, 3위부터 5위는 각각 <기사단장 죽이기>의 무라카미 하루키(10.2%),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밀란 쿤데라(9.7%), <로드>의 코맥 매카시(5.4%)입니다.

글·이미지 이재은

*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1. [문무학의 문화읽기] 노벨문학상과 뉴아카데미문학상
영남일보, 2018.10.10(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2. 노벨문학상… 올해는 없습니다
연합뉴스, 2018.10.8(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3. 한림원도 고은 시인도 미투로 구설…노벨문학상 사라진 이유
이데일리, 2018.10.3(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4. 노벨상 주간, 그러나 노벨문학상이 사라졌다
데일리안, 2018.10.7(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5. 노벨재단 사무총장 “노벨문학상 영구 폐지도 고려”
조선닷컴, 2018.9.29(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6. 한강, 독자들이 선정한 ‘2018 노벨문학상 작가’
이투데이, 2018. 10.11(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지식의 전당의 내일 – 인천의 도서관들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자체나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하게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날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청나라에서 강희제의 명으로 1782년 ‘사고전서’라는 3,500권이 넘는 방대한 양의 백과사전을 편찬했을 때, 청나라 황실은 이 책들은 소실을 우려해서 여러 사본을 만들어 보관했다고 합니다. 마치 조선이 실록을 여러 사본으로 만들어 전국 각지에 보관한 것과 같지요. 그런데 청나라는 이 사본을 단 8부만 만들어 보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자금성 내, 혹은 황실의 행궁이나 정원과 같은 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정조는 사고전서가 제작된 사실을 알고 어떻게든 한 부를 구입해 규장각에 두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청나라 황실은 40여 년에 걸쳐 단 8부만 만든 백과사전을 절대 조선에 내어주지 않았다고 하지요.

어릴 때부터 글을 익히고, 책을 읽는 것이 당연시 된 동양의 사회에서도 이렇게 집대성된 지식은 황실의 것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책에 접근하는 것이 제한되었습니다. 서구 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그저 장식이 아니라 글을 배우지 못했고, 글을 알더라도 함부로 성서를 읽는 것조차 허락 받지 못한 중세의 평민들에게 예수의 삶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였던 것을 떠올려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책을 통해 지식과 진리에 접근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서구가 근대로 접어들며 국가 권력을 귀족과 성직자의 손에서 ‘국민’에게로 가져왔을 때, 귀족과 성직자의 지혜가 모인 서고는 ‘공공’도서관이 되었고, 그들의 컬렉션이었던 미술품은 ‘공공’미술관에 전시되어 모든 사람들 앞에 놓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지식과 예술에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은 권력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있다는 것의 상징입니다.

모두에게 열린 지식의 궁전은 점차 즐거움의 공간이 되고, 문화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도서관 서가에 소설이 꽂힌 것은 19세기의 일입니다. 책으로 진리와 지혜를 구하는 것을 넘어, 즐거움과 상상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대의 필요에 맞추어, 지역의 요구에 부합하여 도서관은 다양한 문화 행사와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무수히 늘어난 ‘작은 도서관’은 책을 보는 공간을 넘어, 도서관이 지역 커뮤니티를 위한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21세기에 들어서 도서관은 지식의 보관이 ‘책’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남겨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도서관은 지역과 공공의 문화기반시설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책과 열람실 위주의 모습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을 시작했습니다.

2001년, 일본 센다이 시에 도요 이토가 설계한 ‘센다이 미디어테크’ -‘도서관’이라는 이름조차 사용하지 않은- 도서관이 문을 열었을 때, 건축계에서는 독특한 구조의 해결 방법이나, 자유로운 평면 구성, 도시로 열린 투명한 외피에 감동했습니다. 또한 이 도서관은 주차장을 제외한 지상 7개 층 중 단 세 층에만 열람실과 서가를 할애했습니다. 그 중에는 디지털 도서관도 있어서, 비디오 테이프, CD, DVD 등으로 제작된 영상자료나 전자책 등을 비치해 두었습니다. 4개 층은 공연장, 갤러리, 스튜디오, 녹음실 등을 계획했습니다. 1층 로비에는 한 가운데에 이벤트를 열 수 있는 오픈 스퀘어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 곳을 방문했던 2006년에는 오픈스퀘어에서 일본 전통 연극을 공연하고 있었지요. 센다이 미디어테크는 책을 모으고, 읽는 곳 이상으로, 센다이 시의 문화적 중심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4년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가 설계하여 시애틀에 문을 연 시애틀 중앙도서관의 서가는 매우 독특합니다. 서가는 일반적인 건물처럼 여러 층으로 구분되지 않고, 거대한 램프(Ramp, 경사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책이 늘어날 때 램프 공간의 밀도를 조절해서 공간을 늘리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책을 보관할 수 있고, 전자책이나 DVD같은 형태로 변화하더라도 능동적으로 공간 구성을 바꾸어 대응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림1> 센다이의 문화적 중심공간이 된 센다이 미디어테크(좌), 완만한 경사로로 서가를 배치한 시애틀 중앙도서관(우)

도서관은 지식 저장의 수단이 책으로부터 전자책, 영상매체 등으로 다변화 되는 것을 받아들였고, 도서관의 기능이 책을 보관하고 읽는 공간에서 공공의 복합문화거점이 되는 것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에 맞추어 조금씩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도서관은 어떤 변화에 반응해야 하고, 어떻게 변모해야 할까요.

최근 수 년간, 정보와 지식의 전달에서 책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인터넷입니다. 일상 생활에 밀착된 정보는 블로그를 통해 얻고, 일반적인 검색 자료는 위키피디아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인터넷 세계에서 구하기 어렵다던 전문가 수준의 자료도 이제는 간편하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학은 인터넷을 통해 강의를 무료로 제공하고, 구글 스칼라를 통해서 해외에 게재된 논문을 무료로 다운받을 수도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강조된 인터넷을 통한 지식과 정보의 전달을 최근에 더 유심히 보게 되는 이유는 인터넷의 컨텐츠들이 텍스트에서 사진과 영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일상 정보는 인스타그램과 같은 이미지 중심 SNS를 통해서 주고 받습니다. 뉴스 또한 이미지 중심의 카드뉴스의 형태로 제작됩니다. 더욱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유튜브로 대표되는 동영상 서비스입니다. 단순한 일상적 지식을 넘어, 유명 석학의 강연도 유튜브를 통해 전달됩니다. 더 어린 세대일수록, 더 이상 정보검색을 위해 네이버나 구글 대신 유튜브를 이용한다고도 하지요.

이런 변화는 지식이 생산되어 일반 대중에게 전달되는 시간을 현격하게 단축시켜 주고, 지식에대한 접근성에서는 책의 형태를 압도합니다. 아직은 여전히 종이로 된 ‘책’의 필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점점 더 많은 지식이 책의 형태에 의존하지 않고 만들어지고, 확산될 것입니다. 이미 수 년 전 우리는 ‘TED’의 유행을 통해서 이런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사람들은 책이 아닌 유튜브로 TED 영상을 봄으로써 세계적 석학이나 경영인, 예술가의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또다른 중요하게 생각되는 점은 인터넷에 기댄 지식의 생산과 전달이 방향성이 없다는 점입니다. 책을 쓴 사람이 읽는 사람에게 단방향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과는 다르게, 최근의 인터넷 공간은 모든 사람들이 지식을 생산하고, 소비하고, 다른 사람의 지식에 덧대고, 수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과정 또한 개정판을 기다려야 했던 책과 달리 거의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지요.

우리가 도서관을 그저 책의 보관소로 여기지 않는다면, 도서관은 언젠가 이러한 지식의 생산과 전달의 양상을 반영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인터넷 접근을 위해 더 많은 PC를 설치하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통해서 세상 모든 곳에서 인터넷에 접근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도서관은 그 단계를 넘어서, 사람들이 모여서 지식을 생산하고, 수정하고, 전달하는 공간으로 변모할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저는 도서관의 미래를 최근 부각되는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림 2>공유업무공간을 넘어서 창조의 인큐베이터로 변화하고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좌). 을지로 위워크(우)

혼자서도 노트북 하나면 창업할 수 있는 시대에 독립 사무실을 갖추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여러 시설과 장소를 제공하는 코워킹 스페이스는 최근 2~3년 사이 공유경제의 부각과 맞물려 대단히 주목받고 있습니다. 코워킹 스페이스는 단순히 책상과 프린터, 인터넷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용자들에게 필요한 강의를 마련하기도 하고, 서로 멘토링을 할 수 있도록 소개해주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각자의 생각을 보완하고, 발전시키고, 때로는 협업과 동업자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코워킹 스페이스가 가능성을 인정받는 이유는 그저 새로운 형태의 임대업으로서의 가능성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시너지에 있습니다. 공간을 공유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생각과 지식을 공유하며 더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도서관은 이미 같은 공간에서 같은 책을 나누어 보면서 기초적인 공유경제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누적된 책과 지식은 미래 지식을 만드는데 중요한 기반과 참고자료로서의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또 책으로 만들어지지 못한 지역사회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오래된 지식과 기억들이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될 수도 있습니다.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한 교육프로그램 운영의 경험은 새로운 지식창조자들에게 필요한 교육과 도움을 주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지역단위로 연결된 공공도서관의 네트워크는 다른 도서관 이용자들과의 연결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공이 운영하는 도서관은 민간의 코워킹 스페이스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낮은 문턱의 공간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미래의 인천의 도서관이 인천 사람들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자유롭게 공유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하는 이유입니다.

 

글·사진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강숙희(2010). 인천광역시 공공도서관 상호협력 활성화 방안에 관한 연구. 한국도서관·정보학회. 41(3)
노영희(2016). 공유경제의 도서관 적용에 관한 연구. 한국비블리아학회지. 27(3)
윤희윤(2017). 공공도서관 정체성의 혼란과 극복방안.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48(3)
홍소람,박성우(2015). 코워킹 스페이스로서의 공공도서관 무한창조공간 개념 분석. 한국도서관·정보학회. 46(4)




Yaloo Castle Site at Fukuoka 3

이번 연재는 후쿠오카에서 처음 열린 ‘얄루파크, 예스! 세범(Yaloopark, Yes! Sebum)’전시와 인천재단의 후원이 함께하여 마이즈루 공원에서 열린 ‘얄루 성터(Yaloo Castle Site)’ 전시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나누려고 한다.

 
네브래스카 시티 길거리에 쌓여 있는 옥수수 더미   산책 중 찍은 사진
 2017년 봄에는 레지던시에 참여하며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보냈다. 길거리에는 사람보다 주차된 형형색색의 개인용 트럭이 많았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마른 옥수수 더미를 거대하게 형성하는 곳이었다. 이슥해질 무렵 도착한 후쿠오카는 별천지였다. 수많은 관광객이 바쁘게 지나가고 현지인들의 편의와 욕구를 자극하는 상점들로 가득한 거리가 익숙하지만 신선하고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녁에 도착해 집 앞 지하상가로 장을 보러 갔는데 약국과 슈퍼마켓의 입구가 연결돼 있었다. 자연스럽게 약국을 통해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약국에는 자극적인 삽화와 사진으로 무장한 갖가지 피부미용 상품들이 약보다 더 빼곡하게 진열돼 있었다. 신기하게도 여드름 관리제가 부위별로 있었다. 많은 상품 패키지에 혐오스럽기까지 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게 재미있어 한참 동안 살펴봤다.

 
사과, 유자레몬 콘셉트 모델링

미로처럼 설치된 진열대를 지나자 슈퍼마켓 입구가 나왔다. 입구부터 완벽하게 흠집 없는 형태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과일이 종류별로 분리돼 낱개로 포장돼 있었다. 네브래스카에서는 상처 가득하고 못생긴 사과들이 포장되지 않은 채 한가득 쌓여 있었는데. 표면에 드러나는 욕구와 그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아름답고 완벽하게 일상적인 소비공간에서 표출된다는 게 재미있었다. 이 경험이 ‘얄루파크, 예스! 세범(Yaloopark, Yes! Sebum)’의 소재가 됐다. 

‘얄루파크, 예스! 세범 Yaloopark, Yes! Sebum’ 협업 회의 중

사과와 딸기·유자·복숭아·매실 등 보편적인 과일과 여드름, 머핀톱 등 미용 관심사를 연결지어 VR을 통해 3D 로 조형하고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쇼핑공간을 놀이공원에 비유해 표현했다. 규슈상교대학교 조형학과와 협업해 프로젝션용 나무 스크린을 짰다. 전시장 입구에서 도장을 찍고 동전을 받아 입장한다. 전시내용을 예견하는 비디오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면 각 과일 영상이 대형 과일 모양 스크린에 투사되고 있다.

 
‘얄루파크, 예스! 세범 Yaloopark, Yes! Sebum’ 설치 사진

과일점 뽑기 캡슐에 들어갈 스티커

모든 3D 애니메이션은 VR을 이용해 제작됐다. 딸기코에서 화이트헤드와 블랙헤드가 끊임없이 차오르고 유자에서 여드름이 터져 나온다. 각 영상에서 특유의 과일향과 음향이 함께한다. 모든 사운드를 후쿠오카 출신 프로듀서 시노스케 마쓰미 (Breezesquad)가 담당했다. 전시 끝에는 입구에서 받은 동전으로 뽑기 머신을 사용한다. 캡슐 안에는 미래 과일·피부미용점을 쳐 주는 과일실이 들어 있다. 본래 미니어처 과일 토이를 만들려고 했으나 시간과 예산이 부족해 아쉽게도 스티커로 대신했다.

얄루파크 예스 세범 전시 사진

이번에 처음으로 대형 스크린 제작이 필요한 작업 일곱 점을 한 번에 전시했다. 분업을 위한 전시 도면을 처음 그려봤다. 재료비를 줄이기 위해 미술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과일 스티커 수백 개를 직접 자르기도 했다. 레지던시 팀의 신뢰와 희생이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인 작가로서 평생 남을 귀중한 경험이다. 이 지면을 빌려 한 번 더 감사의 뜻을 전한다. 전시 기간은 짧았지만 다행히 관객이 많이 다녀갔고 좋은 피드백을 얻었다. 이 경험을 통해 2018년 벚꽃축제와 함께 열린 후쿠오카성재건축 기념 아트전에 참여하게 됐다.

 
얄루의 콘셉트 포스터   도착하자마자 받은 전시 안내서와 출입증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이즈루 공원 후쿠오카성에 직사각형 형태의 방이 낮고 좁게 일렬로 이어져 있다. 내가 입구부터 방 일곱 칸까지 전시를 하고 일본의 오카모토 미쓰히로 작가가 뒤를 이어 작업으로 전시를 한다. 얄루파크 예스 세범 전시를 공간에 맞게 변형하는 것도 고민해 봤지만 유적지나 캐슬을 소재로 작업하고 그 건물 안에서 전시할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싶어 새롭게 작업하기로 했다.

후쿠오카성 전시장 외부 풍경

 
설치하러 가는 길에 만난 벚꽃을 이와모토 큐레이터가 감상하고 있다   문화재 보존을 위해 커스텀 제작한 프로젝터 마운트를
마츠라 큐레이터가 조심스럽게 설치하고 있다.

후쿠오카 성에 처음으로 답사 갔을 때를 떠올려 본다. 같은 모양의 방이 일렬로 이어져 한 방향으로만 이동할 수 있는 건물 형태가 시간 흐름과 닮았다. 과거에 지어진 성은 시간 흐름의 증거이자 현재와 과거를 잇는 관문이다. 유적은 과거의 한 조각이면서 미래의 파편이기도 하다. 후쿠오카성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아마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존재할 것이다. 시간의 파괴성과 영속성을 함께 내재하는 역설이 재미있다. 과거 속 후쿠오카성의 전성기를 상상하면서 내가 없을 미래 세상의 이 유적지를 투영해 본다. 그 유적지 속을 걷고 있는 내 먼지 같은 서사와 옥수수 알보다 작은 소우주도 투영해 본다. 후쿠오카에서 분야마다 다양하게 열정적으로 살고 있는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구체화된 질문 중 하나인 시대서사와 개인서사의 미묘한 경계에 대한 고민을 유적과 시간 역설의 틈새를 벌려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조심스럽고 명량하게 표현해 보기로 한다.

 
스튜디오에서 카마치,마츠라 큐레이터와
프로젝션 시험중
  전시팀과 안전모 테스트 셀피

2017년 여름 후쿠오카에서의 시간을 전시 공간 속에 펼쳐질 소우주의 경계로 삼고 기억의 파편을 비디오 조형의 형태로 빚어 투영(projection)하기로 한다. 대체 우주로의 입장을 예견하는 성곽의 문과 바닥에 떨어진 샹들리에, 고장난 텔레비전 타워 탑 시리즈 등 지난 연재에서도 다양하게 조금씩 다뤘던 경험과 소재들을 섞어 살아 숨 쉬는 상상의 유물로서 비디오 조형 시리즈로 표현했다. 인천재단 지원으로 가능했던 마지막 방에는 VR 체험 전시로 관객들이 앞서 경험한 상상유물들이 부유하고 있는 가상 공간을 만들었다. 전시 정황과 설치 사진은 다음 연재에 더 소개하겠다.

전시팀 퇴근길 야마키, 마츠라, 카마치 큐레이터

글·사진 / 얄루

얄루(Yaloo)
얄루 작가는 인천에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다. 미국 시카고 예술학교에서 학부를 마치고 동대학원에서 비디오 아트를 공부했다. 현재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히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비디오 아트 계에서 권위 있는 프로그램인 비디오 데이타 뱅크에서 린블루멘탈 장학금을 수상하였으며2016년 뉴욕한인예술재단이 주최하는 비쥬얼 아트 어워드에서 금상을 받았다. 벨기에 리지 비엔날레, 퀘벡 비엔날레 등 전세계 크고 작은 도시에서 다수의 전시 경험이 있다.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해드랜드 아트센터, 퀘백 라반데 비디오 등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하면서 역량을 쌓는 중이다.

 




[큐레이션 콕콕] 가난에 대한 짧은 생각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소년 앞에 고기와 과일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습니다. 음식을 눈앞에 두고도 먹지 못하는 상황은 영양부족으로 깡마르고 배가 불룩 튀어나온 소년의 이미지와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어처구니없어 보이면서도 아이러니한 이 현실은 보는 이의 감정을 건드립니다.

출처 : 부산일보

이탈리아 출신 사진작가가 인도의 가난한 마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인도의 비참한 빈곤 실태를 ‘꿈의 음식’ 시리즈로 공개했습니다.

이 사진은 뜻밖의 비난에 직면합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상상해 보라”며 연출한 데다, 사진에 나온 음식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모형이란 게 밝혀졌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가짜 음식을 앞에 놓고 배고픈 소년들을 놀렸다는 비난이 일었고, 아동 인권을 배려하지 않고 가난을 전시에 이용한 ‘빈곤 포르노’라는 비판으로 이어졌습니다.

‘빈곤 포르노’는 가난을 구경거리로 묘사해 자극을 주거나 동정심을 유발하는 사진이나 영상을 말합니다. 논란이 일자 작가는 “서구의 음식 낭비를 도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소년들을 소품으로 대상화했다는 논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출처:FOTOFEST 홈페이지

2014년 에버 하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이 마을에 거주할 때 이용할 고급(?) 리조트를 찍었습니다. 숙소는 남아공의 가난한 시민들을 수용하는 구조와 유사한 패치 워크 방식으로 조립됐습니다. 이 마을은 실제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화적, 시각적으로 새로운 소비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고급’ 리조트와 그곳에 머무는 고객은 거짓 서사로 충돌하고, 보는 이들은 자신들의 여행, 혹은 눈요기 관광에 물음을 던집니다.

최근 인도 뭄바이의 한 빈민가에서는 주민들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관광 상품이 출시됐습니다. 관광객은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다락방을 배정받고, 13명의 가족과 사는 주인집의 공간을 공유합니다. 화장실은 50가구가 함께 쓰는 공용 화장실을 이용하죠. 숙박비용은 하룻밤에 우리 돈으로 약 3만4000원.

‘슬럼 호텔’ 아이디어는 네덜란드 출신의 NGO 활동가 데이비드 비들(32)이 냈습니다. 2015년 싱가포르에서 빈곤 퇴치 활동을 하면서 인도인 라비 산시를 만났고, 그가 인도 현지에서 방을 제공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여행객 신분으로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고, 그 추억을 계기로 이런 호텔(?)을 기획하게 된 겁니다. 산시는 손님들을 위해 TV와 에어컨을 설치했는데 슬럼가에서는 보기 힘든 물건들입니다. 데이비드 비들은 슬럼 지역을 몇 시간 동안 둘러보는 가이드 투어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며 슬럼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주민의 삶을 직접 경험해야 한다고 언급합니다.

1885년 뉴욕의 부유층들이 파이브포인츠 슬럼을 구경하는 모습

슬럼 투어는 오래된 논쟁 대상입니다. 빈곤의 이해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측이 있는 반면에 가난을 상품화한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습니다. 인도의 빈민가 중 하나인 다라비 마을의 슬럼 투어 여행사 매니저 아심 사이크는 “슬럼가가 더럽고 범죄가 만연하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깨고, 보통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이 여행사는 수익의 80%를 마을 발전을 위해 기부하고 있습니다.

케냐 나이로비의 빈민가에서 자란 케네디 오데데는 “관광객들은 이틀 동안 굶주린 나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며 “그들이 사진을 찍을 때마다 우리는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 같았다”고 뉴욕타임스에 기고했습니다. 그는 “빈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슬럼 투어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슬럼 투어는 1880년대 런던과 뉴욕의 상류층들이 슬럼가를 돌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관찰한 데서 유래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1980년대 백인들이 흑인 거주 지역을 돌면서 ‘흑인의 삶’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투어가 만들어졌습니다. 슬럼 투어가 관광 상품으로 상업화된 거죠.

 
 
우리의 가난을 구경하신다고요?(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중에서
출처:스브스뉴스

인천 동구에서 관광객 유치를 위해 생활체험관으로 조성하려 했던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출처:경향신문

2015년 인천 동구청은 괭이부리마을에 쪽방촌 체험관을 만들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오면 쪽방촌에서 1만 원에 1박을 하며 ‘가난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이었죠. ‘가난을 상품화하려고 한다’는 비난에, 괭이부리마을에 사는 주민들을 구경거리로 만든다는 비판 여론이 일었고, 동구청은 결국 한 달 만에 계획을 철회했습니다.

‘테이프 붙인’ 운동화를 아시나요.
미국 온라인 쇼핑몰 노드스트롬에서 판매되는 이 운동화는 한화로 약 59만 원입니다.

출처 : 연합뉴스

지난 9월 22일 가디언, 타임 등 외신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명품 운동화 브랜드 골든구스는 ‘구겨지고, 테이프로 이어붙였다’는 소개와 함께 우중충하고 닳아빠진 것처럼 보이는 운동화를 출시했습니다. 복고풍의 서민 패션을 차용했다는 설명이 곁들여졌고요. 곧 소셜미디어에서도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신발 살 돈이 없어서 비닐봉지를 신발로 쓰는 사람도 있는데 이 ‘흉물스러운’ 운동화는 530달러에 팔리고 있다”, “가난을 미화하는 것이 언제부터 트렌드였냐”는 지적이 이어졌습니다.

가난을 의미하는 ‘푸어(poor)’를 응용한 신조어가 넘쳐납니다. 열심히 일해도 빈곤을 벗어나기 힘든 ‘워킹푸어(working poor)’, 비싼 전셋값을 감당하느라 빚에 허덕이는 ‘렌트푸어(rent Poor)’, 사교육비를 대느라 소비 여력이 없는 ‘에듀푸어(education poor)’,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궁핍한 생활을 하는 ‘스튜던트푸어(student poor)’까지 있습니다.

서울 서초구에 사는 김성은 씨(35·가명)는 2살 된 딸이 있지만, 아동수당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신청해도 소득 기준상 탈락할 것이고, 대상자가 되더라도 주민들에게 가난하다는 편견을 받을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아동수당은 아동 양육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아동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행정적인 불편함과 가난의 증표로 인식될 것을 염려해 신청을 꺼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전북 장수군은 신청대상자의 99.3%가 신청을 마쳤지만, 서울 강남구는 73.4%에 그쳤습니다.

아동수당이 소득으로 나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김 씨처럼 오히려 받지 않는 것이 부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주택 가격이 높다고 알려진 지역일수록 신청률이 저조했다고 하네요.

가난하다고 해서 아이폰과 개를 곁에 두지 말란 법은 없다
출처:매일경제

A 씨는 가난합니다. 홀어머니와 살고, 최저임금을 받는 직장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합니다. 밤에는 대리기사 아르바이트도 하죠. 당연히 집은 없습니다. 그의 삶에는 희망보다 절망의 그림자가 더 짙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은 2017년식 ‘아이폰8’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가격이 아무리 비싸도 아이폰을 찾는 사람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인간은 사회와 커뮤니티에 소속되는 느낌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1940년대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가 발표한 ‘욕구의 위계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먹고 마시고 자는 욕구보다 안전과 건강에 대한 욕구를 더 강하게 느낍니다. 건강과 안전에 대한 욕구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 우정, 사랑, 가정 등에 대한 소속감입니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낙인’을 “어떤 사람이 사회의 일원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지기에 불충분한 상황적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가난은 낙인입니다. 당장 밥 먹을 돈이 없는 절대 빈곤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빈곤 역시 마찬가지죠. 가난은 타인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며, 성실하지 않고 게으르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미래를 생각하기보다 현실에 안주하는 ‘배짱이’ 같은 인간이라는 주홍글씨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아이폰이 추방된 신분을 복권해주는 사면증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글·이미지 / 이재은

*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1. 연출된 가난
부산일보, 2018.7.26(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2. “가난이 패션이냐”…59만원짜리 닳아빠진 명품운동화 논란
연합뉴스, 2018.9.22(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3. 왜 가난한 사람도 아이폰을 사는가
매일경제, 2018.9.15(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4. 가난마저 부자에게 도둑맞는 시대
네이버블로그(잡식성 아카이브), 2018.2.13(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5. 가난-이상권 정치부 부장
경남신문, 2018.9.17(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6. ‘뭄바이 슬럼가에서 아침을?’ 인도 슬럼호텔과 가난 투어리즘 논쟁
경향신문, 2018.1.30(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7. 우리의 가난을 구경하신다고요?
스브스뉴스, 2017.6.28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8. 아동수당 신청안한 3만명…“가난 편견 생길까봐”
뉴스토마토, 2018.9.18(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한번쯤은 이곳에서

에덴동산과 자전거

주르륵, 사과주스에 탄산수를 따른다. 거품이 톡톡 터지는 모습이 상쾌하다. 독일에 온 이후로 이곳 사람들처럼 사과주스에 탄산수를 섞어 마시기 시작했다. 내가 매일 아침 독일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작은 의식인 셈이다.
방금 사 온 따뜻한 브레첸(broechen)과 살라미 몇 개 그리고 토마토와 모차렐라를 간단히 챙겨 스튜디오 앞 사과나무 아래에 앉는다. 따뜻한 햇살과 바람에 이마가 간질간질하다. 참으로 호사롭고 여유로운 아침이다. 뉴턴은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중력을 발견했다는데, 나는 사과나무 아래서 혹시 내가 에덴동산에 도착한 것은 아닐까 상상한다.
아침을 먹은 후 가방에 사과와 물과 수건을 챙긴다. 물론 어젯밤 슈퍼마켓에서 산 와인 한 병도 빼먹지 않는다. 신발끈을 단단히 조이고 덜컹거리는 고물 자전거를 끌며 밖으로 나온다. 야심차게 페달을 밟으며 드디어 출발!

독일식 아침 사진

비릿한 소똥 냄새와 지저귀는 새소리를 느끼며 오솔길을 가른다. 넓은 들판을 신나게 달린다. 길가에 있는 블루베리를 따 먹고 근육이 섹시한 말이나 장발 당나귀를 구경하며 눈동자가 가로로 일자인 염소에게 풀을 건넨다. 매일 아침 반복되는 나의 일상이다. 사람보다 동물을 더 자주 만나고 상상 속 에덴동산의 사과나무가 있는 이곳은 독일의 작은 마을인 쉐핑헨 (Schöppingen)이다.

 
쉐핑헨 자전거 도로 풍경   매일 달렸던 쉐핑헨 오솔길

쉐핑헨 은 독일 북서부 뮌스터(Münster)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곳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동화 같은 마을이다. 양과 말, 당나귀, 토끼, 닭, 개, 고양이, 돼지, 소, 염소 등 모든 동물이 사람들과 식구처럼 살아간다. 두 해 전 여름과 지난겨울에 이곳에서 넉 달 동안 지낼 기회가 있었다.
18세기 농장을 개조해 만든 아티스트 레지던시 ‘쉐핑헨 쿤스트 돌프(Künstlerdorf Schöppingen)’가 내 작업실이었다. 전 세계에서 온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몇 개월씩 머물며 작업을 한다. 글 쓰는 작가부터 설치와 영상, 사진, 그림 등 다양한 분야와 배경의 사람이 모여든다. 매년 2000여 명이 지원하는데, 그중 작가 20여 명만이 초대받는다.
쉐핑헨 에서는 늘 ‘자전거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매일 자전거를 타고 호숫가를 달려간다. 호수로 가는 길에서 염소와 말, 소, 사슴 등을 만난다. 경쟁률 1000 대 1을 뚫고 생활비를 받으며 독일에 체류 중인 해외 아티스트의 가장 주요한 일과였다. 사실 야심 찬 마음으로 이곳에 오긴 왔다. 그런데 당장 뭘 해야 할지 모르니 자전거나 타며 동물 구경을 할밖에….

 
장발 당나귀와 염소들

쉐핑헨 레지던시 스튜디오에서 바라본 정원

하루에 네 시간만

쉐핑헨 레지던시 사무실 식구들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한다. 오전 8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늦잠이라도 자는 날엔 마음이 다급해진다. 필요한 일이 있어 허겁지겁 사무실로 달려가 보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쉐핑헨 레지던시 사무실 앞

“몇 년 전에 온 한 예술가는 밤에 일하고 아침에 자는 스타일이었는데,
그 예술가가 처음 도착할 때 한번 보고 떠날 때까지 못 만난 적도 있어요. 하하하.”

쉐핑헨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시그런(Sigrun)과 조셉(Josef)가 웃으며 말한다. 조셉은 레지던시 대표이고 시그런은 여직원 우타(Uta)와 함께 레지던시 운영을 담당한다. 조셉과 시그런은 부부다. 이 부부의 집은 작가들이 사는 레지던시 건물과 붙어 있다. 집에서 일터까지 5분 거리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종종 마트와 동네 산책길에서 이 부부를 만난다.
레지던시 안이 아닌 동네 마트에서 이따금 만나다 보니 꼭 이웃 주민처럼 친근하다. 가끔은 작가들을 집에 초대하기도 한다. 부부는 예술가가 쉐핑헨 레지던시에서 아무런 불편 없이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자신들의 일이라 말한다. 예술가가 이곳을 떠나기 전에 전시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입주해 있는 지역에 관계된 작업을 해야 한다는 조항도 없다. 부부는 그저 머물다가 떠나는 예술가들을 묵묵히 지켜봐 줄 뿐이다.
사실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으면 매일 유유자적 있을 것만 같지만 실제로 이곳에선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함께 머물고 있는 예술가들이 매주 서로의 스튜디오를 돌며 작업을 보여주고 작업 중인 작품의 고민과 이야기를 나눈다. 사무실 식구들이 주체가 돼 돌아가는 스튜디오 오픈이 아니라 작가가 자발적으로 필요해 작가들을 초대하는 식이다. 어떤 날은 작업실에서, 어떤 날은 레지던시 부엌에서 와인을 마시며 자연스럽게 열린다. 때로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나지막이 촛불을 켜고 낭독회도 한다. 물론 독일어라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왠지 그저 분위기에 취해 어떤 내용인지 알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레지던시 사과나무

레지던시 건물 내부

어느 주말에 시그런과 조셉은 쉐핑헨 보다 더 작은 마을인 릴케쉔(Reelkirchen)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시그런의 고향이기도 한 그곳에는 시그런의 성(castle)이 있다.

“성이라고요? 왕비처럼?”

나는 캐슬(Castle)이라는 말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성을 샀다고? 알고 보니 유토피아라고 작은 팻말이 붙어 있는 이 성은 시그런이 어렸을 적 종종 이 앞을 지나다니며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대저택이란다. 부부는 몇 년 전 이 저택이 매우 싼 가격에 나온 사실을 알게 됐다. 이곳에서 한번 살아보는 게 시그런이 어릴 적부터 상상하던 오랜 꿈인 것을 알고 있던 조셉은 그녀와 함께 이곳을 가꾸어 보기로 결정한다. 시그런이 꼬마였을 때부터 꿈꾸던 일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주말마다 부부는 쉐핑헨 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이 성에 와서 집을 수리하고 가꾸며 자신들의 미래를 준비한다. 이들은 쉐핑헨 레지던시에서 곧 은퇴를 하면 이곳으로 이주할 계획을 하고 있다. 이곳 역시 예술가들과 함께 꾸려 나간다고 한다.

시그런의 성 릴퀘센 건물

유토피아가 붙어 있는 성의 입구

처음에는 레지던시 사무실을 하루에 네 시간만 운영한다는 것이 좀 신기했다. 그런데 하루에 네 시간씩만 일해도 이곳에서 항상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작가들이 운영하는 각종 토크와 행사가 열리고 매년 9월에는 쉐핑헨 의 주요 연례행사인 ‘사과축제’와 ‘빛 예술의 밤’이라는 행사도 열린다. 이 모든 일들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네 시간 동안 기획하고 운영한다는 사실이 참 신기할 뿐이다. 매일 아침 8시 반이면 어김없이 사무실 불이 켜진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8시 반부터 12시 반까지는 미스터리한 레지던시 사무실이 열리는 시간이다.

 
레지던시 풍경과 쉐핑헨 레지던시 건물

사과축제(Apfelfest)와 빛 예술의 밤(Lichtkunst-Nacht )

9월 어느 날 쉐핑헨 구 타운홀에 기다란 깃발이 펄럭였다. 1년 중 단 이틀로, 쉐핑헨 마을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날이다. 매년 쉐핑헨 의 상징 같은 행사가 열린다. 이날만은 어린아이에서 할아버지·할머니까지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낮에는 전시와 야외 공연을 하고 벼룩시장도 열린다.
나는 ‘Apfelfest’(사과 축제)에 참가했다. 자전거를 타며 만난 여러 동물들 행렬도 깃발을 만들어 쉐핑헨 구 타운홀에 걸었다. 쉐핑헨 에 와서 매일 자전거만 타고 놀러 다닌 것 같지만 그래도 사실 놀기만 하진 않았다. 그림도 그렸다. 내가 만난 동물들이 나와 함께 어딘가를 향해 행렬하는 그림이다. 제목은 ‘모든 존재는 여행을 한다’다. 작품의 이야기를 잠시 소개한다.

 
사과축제날 쉐핑헨 거리
 
<자화상: 모든 존재는 여행을 한다> 설치 사진과 전시 팸플릿

자화상: 모든 존재는 여행을 한다

내 고향은 서울입니다.
이곳엔 123 층 건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암소와 염소, 양, 말, 닭 등은 쉽게 볼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동물들을 독일 쉐핑헨 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들은 숨을 쉬고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닭고기와 쇠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치즈, 우유를 먹고 마십니다.
그러나 나는 이들과 친밀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매일 이 음식들을 먹으며 마치 100 만 명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가고 그들은 나에게 다가옵니다.
결국에 나는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윤회의 바퀴 속에 있습니다.
이 그림에 있는 동물들은 모두 사라짐을 향한 자신의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가끔 이 사실은 나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때론 끝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도 됩니다.

나는 동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동물 그 이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윤회의 바퀴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을 그리고 나는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합니다.

이 그림은 나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이건 나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자화상,
그리고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몇 달 후 쉐핑헨 타운홀은 이 그림을 구매했다. 활기찬 낮과 달리 밤이 되자 온 마을이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했다. 공원과 레지던시 스튜디오, 숲, 교회 안팎, 마을 구석구석에 작품을 설치한다.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행사라도 작품의 수준과 기획력이 매우 높다. 이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작가들이 방문한다. 온 마을이 화려하게 밤새도록 반짝거린다.

 
애플 페스티벌   <빛예술의 밤> 설치작품

시골 생활은 지루하고 재미없을 거라 상상했는데 웬걸, 내 삶이 훨씬 풍요로워진 느낌이다. 좋은 공기를 마시고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다. 자전거를 타고, 작업을 하며, 또 전시를 한다. 뮌스터와의 거리도 30분밖에 안 걸리다니…. 아… 한번쯤은 이곳에서 이렇게 살아 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한번쯤 다른 삶을 꿈꿔 보지 않나? 독일이란 이름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독일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 딱딱하고 고지식할 것이라는 선입견만이 팽배하다. 내게 두 번에 걸친 쉐핑헨 레지던시 경험은 독일인의 삶을 하나 둘 배워 가는 시간이었다. 독일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국인의 삶과는 어떻게 다른지, 각각의 의미는 무엇인지 차이를 살펴보게 되었다. 한국이 아닌 이국의 다른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한국인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할 것이라 믿는다.

쉐핑헨 거리 풍경

·사진 / 이승연

 

이승연(Seung youn LEE)
고대사와 신화, 또는 상상의 극한을 보여 주는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고대’라는 재료를 갖고 미래를 얘기한다. 최근에는 물리학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드로잉을 기반으로 철과 나무, 패브릭,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작업한다. 2012년에서 2017년까지 영국인 알렉산더와 ‘더 바이트 백 무브먼트’아티스트 듀오로 활동했다. 당시의 신화적·종교적·사회적 관심은 개인작업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영국 서머싯 하우스, 국립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 문화역 서울 284, 영은 미술관,
켄 파운데이션, 베를린 ZK/U, 등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처럼 영원히 남을 작업을 꿈꾼다. (웹사이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