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콕콕] 변월룡

변월룡, 러시아 이름은 펜 바를렌(1916~1990). 1940년 러시아 최고 미술학교인 레핀아카데미에 한인 최초로 입학했습니다. 수석 졸업 후 1951년에 데생과 교수가 됐고요.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습니다. 소련 주류사회에 진입했지만, 심한 인종차별을 받았고 조국이라고 여긴 북한에서는 귀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합니다. 남한에서는 얼마 전까지 그의 존재조차 몰랐습니다.

변월룡은 연해주 유랑 촌에서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학교 미술 교과서 삽화를 맡아 ‘월룡이는 자기가 그린 교과서로 공부한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어릴 때부터 미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변월룡
출처 : 한국경제
  자화상(1963년. 미완성 작품)
출처 : 인천투데이

1953년 6월 그는 소련의 지시에 따라 북한 교육성 고문관으로 파견됩니다. 북의 미술교육 재건이 그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당초 3개월만 머물 예정이었으나 북한 당국이 평양미술대학 학장 및 고문을 맡기면서 체류 기간은 1년 3개월로 늘어납니다. 이 기간에 변월룡은 교재를 만들고 교육방식과 커리큘럼을 새로 짭니다.

변월룡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혁명 이념을 전파하는 선전미술은 물론 자신이 교류한 작가 및 예술가들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습니다. 러시아 인민들의 삶의 현장과 한국전쟁 당시 포로교환 장면, 평양과 개성의 풍경도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장르로는 유화·판화·데생·수채화·포스터를 아울렀고, 내용으로는 인물화·풍경화·전쟁화·역사화를 망라했습니다.

햇빛 찬란한 금강산, 캔버스에 유채, 1953
출처 : 연합뉴스

변월룡을 국내에 소개한 사람은 미술평론가이자 기획자인 문영대 씨입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학하던 1994년 그는 국립러시아미술관에서 우연히 변월룡의 그림을 봅니다.
“화장실로 가는 복도에 걸린 그림에 한국적인 정서가 배어 있었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과 아이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절대 외국인이 그릴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면 그릴 수 없는 색감과 비율이 느껴졌어요. 그때는 펜 바를렌이 고려인인지도 몰랐죠.”
이름을 메모했다가 수소문했고, 그가 레핀아카데미 교수였음을 알게 됩니다. 역시 화가인 아들 펜 세르게이를 찾아가 유족들이 보관해온 그림을 보면서 변월룡의 방대한 작품 세계와 만나게 됩니다.

2012년 문영대 씨가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컬처그라퍼)이란 평전을 내면서,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백년의 신화: 한국근대미술 거장전’의 첫 순서로 변월룡을 택하면서, 국내에 변월룡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 봄에는 삼청동 학고재 갤러리와 인천아트플랫폼에서도 전시가 열렸습니다.

문영대 씨는 변월룡이 “통일 한국 미술사에서 남과 북을 잇는 연결 고리 구실을 할 작가”라고 강조합니다. “변월룡의 작품은 한국근대미술사의 공백을 메워줍니다. 일본을 통해 서양미술을 배우면서 인상주의 이후 현대미술을 먼저 접한 작가들에 비해 러시아에서 활동한 그는 뿌리격인 리얼리즘 전통에 충실합니다.”

1960년 동판화 ‘북조선은 재일동포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한다’
출처 : 매일경제

변월룡이 그린 노동자들의 초상에는 주인공의 이름이 들어있습니다. 선전의 주인공으로 삼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대상을 존중한 겁니다. 항구에서 일하는 고려인 여성 ‘한슈라’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노동 영웅처럼 중심에 크게 배치된 이 여인은 자녀를 많이 출산해 국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은 고려인입니다. 후덕한 여인의 건강한 미소를 엿볼 수 있죠. 작가는 평범한 노동자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사회주의적 신념을 형상화하는 동시에, 정치적 목적에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숭고함을 담았습니다.

‘사회주의 노동영웅 어부 A. S. 한슈라의 초상’
출처 : 중앙일보

변월룡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를 존경했지만 레핀대 동료들은 “동판화에 있어서만큼은 변월룡이 렘브란트보다 낫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변월룡은 회화를 전공했으나 판화에도 애착이 있었고 특히 동판화 기술이 매우 훌륭했습니다. 들판의 버드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그린 ‘바람’(1959)은 섬세함과 역동성을 풍부하게 담아낸 수작으로 꼽힙니다.

변월룡의 동판화, ‘비(버드나무)’
출처 : 중앙일보

화가로서, 미술교육자로서 변월룡의 삶은 순탄했습니다. 소수민족 출신으로 러시아 최고의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대학원까지 나와 교수가 되었습니다. 레핀대 부교수에서 정교수가 되는 데 25년 걸리는 등 가슴 한편에 민족 차별의 응어리가 있었지만 미술가동맹회원으로 개인화실까지 배정받아 맘껏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에도 참가했습니다.

전용 택시를 타고 출근할 정도로 작품이 잘 팔렸고, 사할린에서 포르투갈까지 유라시아 대부분 국가를 여행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두루 해외여행을 다닌 걸 두고 안톤 우스벤스키 국립러시아미술관 큐레이터는 “그가 정치적으로 신뢰받는 인물이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변월룡은 1961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거의 해마다 자신이 태어난 연해주 지방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와 조선이라는 두 개의 조국,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개의 고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에도, 북에도 그가 스며들 자리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고, 평생 한국식 이름을 고수했습니다. ‘변월룡’을 그대로 썼습니다. 그림을 완성한 뒤에도 곳곳에 우리말로 흔적을 남겼습니다.

‘풍경’ 부분 확대
출처 : kbs news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러시아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러시아 화가 변월룡을 한국 미술사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전시회 몇 번으로 선뜻 포용될 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의미 있는 하나의 출발점으로 바라볼 수는 있을 겁니다. 냉전에 가려 지금껏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한 화가를 역사의 무대로 불러낼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힘, 그리고 대중의 관심 덕분입니다.

1990년 5월 2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변월룡은 끊임없이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변월룡의 1985년 작품 ‘어머니’
출처:세계일보

글 / 이재은

*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1. 분단의 비극이 낳은 ‘잊힌 거장’ 변월룡 개인전, 학고재에서
뉴스핌, 2019.4.17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2. 연해주 출신 천재미술가 변월룡 작품, 인천에 온다
인천투데이, 2019.5.21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3. 소수 민족 차별을 넘어선 탁월한 필력…러시아서 되찾은 천재 한인 화가 변월룡
매일경제, 2019.4.24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4. 고국이 버린 비운의 화가···그 작품 보러 관람객 몰렸다
중앙일보, 2019.5.13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5. 남북이 모두 잊은 천재화가 ‘뻰 봐를렌’…변월룡을 만나다
연합뉴스, 2019.4.17.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6. ‘고려인 화가’ 변월룡의 삶과 숨은 이야기들
KBS News, 2016.3.26.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7. 변월룡, 사회주의 예술가의 휴머니즘
이데일리, 2019.5.12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내 방이 온 우주가 되어간다_백화점과 새벽배송 사이에서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자체나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하게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날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류 역사 대부분의 “쇼핑”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그것을 파는 곳에 찾아가서 상품을 몇 개 살펴보고, 물건을 구매하여 집에 들고 오는 것이죠. 이 방식은 근본적으로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습니다. 소비자들은 더 많은 선택권을 얻길 원할때, 그 해결책은 더 큰 규모의 시장입니다. 구멍가게가 사라지고 흔히 백화점과 대형마트가 들어서는 큰 변화를 마주하는 동안, 근본적으로 물건을 직접 보고 구매하는 행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온라인 쇼핑은 오랫동안 당연했던 생각, “물건은 직접 보고 산다”라는 진리를 깨끗하게 무너뜨렸습니다. 쇼윈도는 제품의 상세 사진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의류, 가구, 먹거리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상품을 스마트폰 하나면 구매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들은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선택지가 늘었습니다. 대규모 쇼핑 사이트와 포털의 쇼핑 탭이 발달하면서, 같은 상품을 사더라도 매번 가격을 비교해가며 다른 업체에 주문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SNS나 카페를 통한 공동구매, 해외 구매대행 업체가 무수히 늘어나면서 단순히 소매상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유통경로 자체가 다변화되었습니다. 아마존이나 알리바바와 같은 외국의 세계적인 유통기업을 논외로 하더라도, 국내의 주요 인터넷 쇼핑 플랫폼 업체들은 동종업체는 물론, 거대한 유통 대기업과도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우리가 새 TV를 사러 흔히 전자제품 매장이나 백화점으로 갔지만, 이제는 국내 인터넷 쇼핑몰과 해외 직구까지 포함한 대여섯 개의 선택지에서 가장 나은 구매 조건을 찾습니다.

<그림 1> 한 중고차 판매 사이트 광고. 몇 년 전 TV 홈쇼핑에서 수입차가 판매되어 화제가 되었는데,
이제는 중고차를 스마트폰으로 구매할 수 있다고 홍보하기 시작합니다. 인터넷 쇼핑으로 살 수 없는 물건이 몇 개나 남았을까요.
(출처 : 케이카 홈페이지_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온라인 쇼핑에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사는 물건을 직접 볼 수 없다는 것,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제품의 종류일 뿐이지 내게 배송될 상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매와 획득의 시점이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물건을 사고 나서 내 손에 들어올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죠.
과거에 흔히 하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봅시다. 먼 미래에 과학이 발전하면, 우리는 인터넷 쇼핑 사이트에서도 촉각이나 후각을 체험하면서 구매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홀로그램으로 옷을 입어보는 것처럼 피팅을 하고, 냄새를 맡으면서 신선한 과일을 고를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상상은 여전히 상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마 시간이 계속 흐른다고 하더라도 이런 미래는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좀 더 편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더 빠른 배송’과 ‘더 쉬워진 반품’입니다.
좁은 땅과 밀도가 높은 도시에 사는 덕분에, 우리는 엄청나게 빠른 물류 이동의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흔히 농담처럼 말하는 ‘옥뮤다 삼각지대’-한 택배회사의 물류 센터인 옥천 물류 센터에서 배송 물품이 며칠 동안 머무는 것을 말하는 인터넷 신조어-에 빠지지 않는다면, 오늘 아침에 결제한 물건은 대체로 내일 점심에 받아볼 수 있습니다. 대형 마트에 이런저런 생필품을 아침에 주문하면 바로 그날 저녁에도 받아볼 수 있습니다. 한때 당일 배송을 강조하는 한 인터넷 서점 업체에서 점심시간에 주문한 책을 다음날 배송하게 되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는 일화가 SNS에서 퍼지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한 스타트업 기업이 시작한 신선식품 새벽 배송은 밤 11시에 주문하면 새벽 7시 전에 현관 앞에 물건이 도착합니다. 새벽 배송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여러 업체가 앞다투어 제공하는 서비스가 되었습니다. 이 ‘배송 경쟁’의 결과, 이제 하루 이틀 사이에 대부분의 물건이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이 일상화되었습니다. 게다가 물건이 도착했을 때 제품에 하자가 있거나, 실제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쉽게 반품할 수 있습니다. 극도로 억제된 물류비용 덕분에 배송이나 반품에 드는 비용은 고작 3~4천 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림 2> 고도로 발달한 우리나라의 택배 서비스는 넓은 세상을 현관 앞에 가져왔습니다. (출처 : ㅍㅍㅅㅅ_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도시는, 특히 도시의 서비스업은 소비자들의 새로운 요구를 찾아서 더 자잘하게 분화되고, 더 전문적인 서비스를 위하여 변화하여 왔습니다. 이로 인해 한때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 대부분의 생활을 집 밖에서 해결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일은 회사에서, 밥은 식당에서, 공부는 카페에서, 여가는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복합 쇼핑몰에서 보낼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심지어는 가사노동이 집 안에서 사라지고, 식당과 편의점, 세탁소와 빨래방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믿기도 했습니다. 교통의 발달을 통한 이동성의 증가는 도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서비스를 쉽고 싸게 이용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 생각들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습니다. 도시에서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이동성 또한 점점 더 혁신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대중교통과 자가용의 틀을 넘어서 공공 자전거 서비스와 택시 서비스, 퍼스널 모빌리티 등을 더 자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도시 사람들은 이러한 이동성 증가를 통해서 더 많은 도시공간을 옮겨 다니며 서비스를 구매하고 여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내 집, 내 방안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필요한 물건은 인터넷 쇼핑을 통해 택배로 받습니다. 배달대행 서비스로 동네의 맛집에서 배달 주문해서 식사합니다. VOD 서비스로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SNS와 유튜브로 사람들을 소통합니다. 물론 여전히 주말마다 쇼핑몰은 붐비고, 힙한 거리는 사람들로 메워집니다. 방안으로 불러들인 생활은 정말 일부분일 뿐이지만, 과거에 비하면 대단히 커진 것 또한 사실입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사나흘 정도의 휴가를-어떤 사람들은 더 긴 시간을- 온전히 집안에서 보낼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것입니다.

지난여름, 저는 쇼핑이 일종의 레저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했던 쇼핑은 이제 인터넷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집 앞 구멍가게, 문구점, 학교 앞 서점, 단골 정육점 등 생활 편의시설에 대한 필요성이 점점 줄어들고, 백화점과 마트는 레저의 영역으로 옮겨집니다. 지난달, 부평과 구월동의 백화점 건물이 오랫동안 팔리지 못하다가 어렵사리 새 주인을 찾았습니다. 무수히 많은 전철 이용자들이 퇴근길에 가득 메울 거라고 믿었던 사실과 다르게 10년 동안 민자 역사 쇼핑몰 한 곳은 20년이 가깝도록 대부분이 빈 건물로 남아있었습니다. 백화점 간의 경쟁과 건물 규모의 문제, 인근 부천시와 직면하는 상권 문제, 원도심의 쇠퇴 문제 등이 공실문제의 가장 큰 원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속사정에는 백화점과 마트에 가는 일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내와 방안에서 있어도 과거보다 더 많은 것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제 우리는 온 세계로 자유롭게 갈 수 있고, 방 안에 온 세계를 담을 수도 있습니다.

글  / 김윤환(도시공간연구자, 건축사)

참고문헌
존 어리(2012). 사회를 넘어선 사회학. 휴머니스트
존 어리(2014). 모빌리티, 아카넷
석혜탁(2018). 쇼핑은 어떻게 최고의 엔터테인먼트가 되었나. 미래의 창
“롯데百, ‘앓던 이’ 인천점·부평점 매각 성사”. 머니투데이. 2019.5.10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한국 경제를 망친 가장 큰 단일 직종은 역시 택배기사일지 모른다”. ㅍㅍㅅㅅ. 2017.3.9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큐레이션 콕콕] 인천의 술

‘소성주’는 인천탁주의 브랜드 이름입니다. 소성주라는 이름은 신라시대 경덕왕 16년, 지방통치 제도로 개편할 때 개칭한 이름 ‘소성현’에서 따왔습니다. 인천탁주는 1974년에 인천에 있던 11개 양조회사가 만든 회사로, 45년의 역사를 지녔습니다. 현재 인천탁주를 운영하는 정규성 대표의 할아버지는 1938년에 대화주조(주)를 만들었고, 아버지가 회사를 이어받았습니다. 정 대표는 1988년부터 회사를 맡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술을 한 모금도 하지 못하는 거로 알려진 인천탁주 정규성 대표(62)는 막걸리가 잘 팔리기 시작한 때를 2010년으로 기억합니다. 웰빙 붐이 불고, 사람들이 건강을 많이 생각하게 된 데다 언론에서 일본인들이 우리 막걸리를 찾는 장면을 자주 보도한 겁니다. “그걸 보면서 사람들 인식이 바뀐 것 같아요. 그때 전국적으로 막걸리 업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했어요. 70~80% 정도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부평에 있는 인천탁주 제1공장
출처:인천in

1990년 1월 인천탁주는 쌀막걸리를 개발합니다. 먼저 쌀에 균을 넣고 48시간 동안 증식합니다. 증식된 쌀은 발효실로 옮겨 수차례 담금을 하죠. 1차 담금은 증식된 쌀에 효모를 섞어 발효실에서 배양합니다. 2차 담금은 누룩과 술밥을 발효시키는 작업입니다. 72시간 동안 숙성해 3‧4차 담금까지 진행해야 소성주 특유의 깊은 맛이 살아납니다. 걸러낸 원액에 물을 섞어 알코올 6%로 맞추면 소성주가 탄생합니다.

소성주는 반제품입니다.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한 방부제를 넣지 않고 효모가 서서히 발효되는 방식으로 출시됩니다. 반제품이기 때문에 병뚜껑도 완전 밀폐가 아니라 공기가 들어갈 수 있게 빈틈을 두었습니다. 병을 비스듬히 두면 새는 것은 이 때문이죠. 젊은 사람들은 막 출하된 술이 입에 맞는다고 하고, 술꾼들은 5일 지난 소성주가 제맛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네요.

부평 공장 2층에는 막걸리 박물관이 있습니다. 막걸리를 담았던 유리병부터 지금의 용기인 페트병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죠. 인천 막걸리의 변천사와 12간지를 담은 라벨 디자인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정규성 대표는 기부활동을 많이 하는 거로 알려져 있습니다. 2014년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 주는 ‘아너 소사이어티’ 상을 받았고, 2017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재)인천인재육성재단에 천만 원을 기부했습니다. 올해 2월에는 (사)한국막걸리협회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네요.

인천유나이티드 선수단의 라벨이 들어간 소성주
출처:OSEN

대대로 내려오던 우리 전통술의 맥이 끊긴 것은 일제강점기 때입니다. 1934년 전국의 주류 제조장은 청주 121, 소주 442, 조선주 683, 기타 21곳 등 4천2백여 개에 달했습니다. 인천은 1919년 조일양주(주)의 금강학과 증전옥의 선학, 심견인시의 선학 등이 알려져 있었지만, 일제가 수탈 목적으로 양조 행위에 과도하게 세금을 부과하면서 인천을 비롯한 전국의 지역 술 제조가 상당 부분 소멸했습니다.

삼양춘은 인천에서 만날 수 있는 전통주입니다.
조선시대 서울·경기·인천 지역 소수 양반가에서만 빚어 마셨던 삼양주(三釀酒)를 젊은 세대 취향에 맞게 복원한 정통 프리미엄 발효주죠.

삼양춘의 아버지 강학모 대표(59)는 특산주 양조장 ‘송도향’을 토대로 잊혀가던 고급 전통주를 다시 세웠습니다. 공기업에서 20여년간 직장생활을 하던 그를 양조업으로 이끈 건 ‘어머니의 밀주’에 대한 추억입니다. 어린 시절, 동네 결혼 잔칫집과 상갓집에서는 어머니의 밀주가 어김없이 등장했고, 그는 명절 한 달 전부터 밀주를 빚느라 밤을 새우던 어머니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강 대표는 한국전통주연구소, 가양주협회 등을 수차례 드나들며 삼양춘을 개발했습니다. “연구 기관마다 강의하는 스타일과 술 빚는 방식에 차이가 컸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 중에서 차별화된 술을 빚어내는 것이 큰 숙제였어요. 인천의 전통주를 찾던 중 우연히 세 번 빚는 술인 삼해주현의 설화를 만나게 됐고, 여기에서 삼양춘이 탄생한 겁니다.” 세 번 빚고 옹기에서 100일 저온 숙성한 발효주로 부드럽고 알싸하며 톡 쏘는 맛이 일품이라고 하네요.

삼양(三釀)은 “세 번 빚는다”라는 말에서, 춘(春)은 “술은 겨울에 빚어 봄에 마셔야 맛있다”라는 옛말에서 따왔습니다. 강화섬쌀과 전통 누룩, 물만을 사용해 빚어냅니다. 두 잔만 마셔도 취기가 온몸을 감싸지만, 다음 날에 숙취가 전혀 없어 ‘앉은뱅이 술’의 전형이라고 애주가들은 말합니다.

출처:조선비즈

송도향은 프리미엄 탁주와 약주 삼양춘(三釀春)을 제조하는 양조장입니다. 30평 내외의 규모로 국내에서 가장 작은 양조장이며, 소규모 전통주 시설 견학이 가능합니다. 강 대표는 “다양한 우리 전통주를 알리고 싶어서 이런 공간을 열었다며, 소통을 통해 전통주 문화 소비에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습니다. 삼양춘 갤러리는 1층 양조장, 2층 갤러리로 구성돼 있네요.

2018년 삼양춘 약주와 탁주는 대한민국 주류 대상에서 각각 1등과 대상을 받았습니다. 지난해 11월에는 송도국제도시에서 진행된 ‘제6차 OECD 세계포럼 인천의 밤’에서 공식 만찬용 술과 건배주로 선정되기도 했네요. 삼양춘 약주(청)는 15도입니다. 목 넘김이 부드럽고 과실 향이 풍부하며 달콤하게 시작해서 알싸하고 쌉쌀한 마무리가 특징입니다. 삼양춘 탁주는 와인 도수와 비슷한 12.5도로 풍부한 과실 향과 걸쭉하고 묵직한 바디감, 부드러운 목 넘김의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인천의 전통주를 알리고 새로운 주류 문화를 만들기 위한 강 대표의 바람은 끝이 없습니다. 국내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국어·영어·일본어 전통주 체험 행사를 준비 중이며 낮은 도수 의 탄산 막걸리와 삼양춘을 다시 끓여 받아낸 증류식 소주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민초들의 시련을 달래주는 값싼 막걸리와 희석식 소주 중심의 술 문화를 넘어 사케, 와인과 경쟁해도 밀리지 않는 고급 전통주를 만들고 싶다”고 언급했네요.

‘청산녹수’ 양조장이 운영하는 전통주 쇼핑몰 ‘술팜’에서 판매되는 다양한 제품들
출처:주간동아

인천 동구의 옛 양조장(현 스페이스빔)에서는 해마다 배다리 전통주학교가 열립니다. 지난 2월 제10기 수강생을 모집했는데요. 전통 방식의 양조기법과 발효음식 제조를 배웁니다. 세부 수업 과목이 ‘우리나라 전통주 빚기(초ㆍ중ㆍ고급 과정)와 맛있는 김치 담그기’, ‘몸에 좋은 유기 발효 식초 만들기’, ‘각종 효소 청 만들기’, ‘여러 가지 와인 만들기’, ‘유명 양조장과 발효음식 명소 투어’, ‘국내 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술 맛보기’, ‘우리나라 전통주 빚어 맛보기’, ‘효소, 발효, 미생물, 식품 화학, 누룩, 미네랄 강의’, ‘술과 관련한 인문학 강의(세계의 술, 술의 역사, 음주 예법, 술과 시, 주막 이야기, 칵테일)’ 등이네요.

“배다리 전통주학교는 잊혀가는 음식문화유산인 전통주 빚기와 각종 된장, 간장, 김치, 식초 등 발효음식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만드는 법을 알리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전통주 빚는 법과 발효음식 만드는 법을 습득해 가정생활에 활용하는 것뿐 아니라 관련 산업에 진출해 우리나라 음식문화유산을 지키는 데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유진용 배다리 전통주학교 교장의 말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양조장
출처:주간동아

글 · 이미지 / 이재은

*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1. “막걸리는 인체에 부담이 없는 술이다”
인천in, 2015.9.8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2. [인터뷰] 송도향 강학모 특산주 양조장 대표 “전통 방식 그대로 천천히 기다린 것이 비결”
중부일보, 2019.6.2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3. 인천 배다리 전통주학교 수강생 모집
인천투데이, 2019.2.13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4. 세계를 사로잡을 인천의 전통주
굿모닝인천, 2019.2.18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5. 송도향 삼양춘 약주, ‘2018 대한민국 주류대상’ 베스트 오브 2018에 선정
조선비즈, 2018.3.13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6. [썰물밀물] 인천전통술 삼양춘과 가치재창조
인천일보, 2018.3.14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7. ‘술술~’ 넘어가는 인천 전통주의 매력 속으로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 2019.3.4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큐레이션 콕콕] 인천의 벽화

벽화. 시멘트벽에 그림만 그렸을 뿐인데 범죄율이 줄어들고 지역 경제가 활기를 띱니다.

“풋풋한 청춘의 ‘생얼’은 계속될 수 없다. 파운데이션, 파우더, 아이섀도, 립스틱……. 구불구불한 골목에 색조 화장을 한 벽화가 길게 이어진다. 어쩔 수 없이 마을은 늙는다. 잡티로 거뭇해진 낡은 담벼락에 붓 터치를 한다. 다크서클 같은 어두운 골목에 색이 들어오면 마을 곳곳에 빛이 든다.”

유동현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의 말입니다.

인천에도 저마다 특징을 가진 벽화마을이 있습니다. 송월동 동화마을, 배다리 헌책방거리, 열우물 벽화마을, 차이나타운 삼국지 벽화거리, 노적산 호미마을 등이 대표적이죠.

 
중구 송월동 동화마을
출처 : 아시아투데이
  중구 차이나타운 삼국지 벽화거리
출처 : 연합뉴스
 
동구 배다리 헌책방거리
출처 : 조선일보
  동구 창영동
출처 : Daum카페(homihomicafe)

호미마을에는 낡은 골목과 지저분한 빈터를 호미질해서 생기를 넣어보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호미질’은 벽화 그리기로 시작했죠. 봉사자와 주민의 손길이 만나 퍼즐 맞추듯 담장을 채웠습니다. 열우물은 마을에 열 개의 우물이 있어 열우물(十井), 또는 십정리라고 하기도 하고 추위에도 얼지 않는 큰 대동 우물이 있어 열(熱)우물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열우물 마을의 벽화 역사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가 닥친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95년부터 십정동에 거주하던 이진우 ‘거리의 미술’ 대표가 동네를 환하게 만들기 위해서 시작했죠. 2002년 열우물 프로젝트 추진위원회가 구성된 뒤 수차례 중단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벽화 그리기는 최근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열우물은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합니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2016), SBS 드라마 ‘가면’(2015) 등에 모습을 보였죠. 하루아침에 인기 여행지가 돼 주말이면 나들이객과 사진 동호회 회원들이 몰려왔습니다. ‘한류 열풍’에 중국인 관광객도 모습을 보였고요.

 
평구 십정동 열우물 벽화마을
출처 : 한국일보
  오는 6월 18일까지 동구 만석동 우리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이진우 작가 연작
출처 : 경인일보

문학산 끝자락에 위치한 호미마을은 1950년대에 한국전쟁 피난민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1960년대 동양제철화학 공장이 들어서면서 활성화됐습니다. 인천 화학공업의 중심지였고 수인선 협궤열차의 종착역이었던 송도역을 품고 있었죠. 덕분에 마을은 언제나 왁자지껄했습니다. 하지만 화학공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공해와 소음으로 주민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고, 동양제철화학 공장이 군산으로 이전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골목에 버려진 쓰레기로 몸살을 앓던 중 텔레비전에서 ‘게릴라 가드닝’이란 걸 접하게 되었어요. 낙후된 동네를 찾아다니며 밤새 쓰레기를 치우고 화단을 만들더라고요. 직접 실천해보니 놀랍게도 화단을 만든 후 쓰레기 불법 투기가 줄었어요. 골목이 깨끗해지고, 화단에 예쁜 꽃들이 피니까 곰팡이로 뒤덮여 시커메진 담장이 눈에 띄더라고요.
그래서 벽을 흰색으로 칠했는데 너무 밋밋한 거예요. 비영리봉사단체인 네오맨벽화사업단과 함께 벽화를 그렸죠. 예전에는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마을에 도깨비가 나온다고 아이들의 출입을 막기도 했는데 벽화가 생긴 이후에는 철마다 아이들 손 붙잡고 산책 오기도 해요.”
노적산 호미마을 대표로 활동하는 유현자 씨의 이야기입니다.

 

미추홀구 노적산 호미마을
출처 : 미디어인천신문

벽화 사업이 언제나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촬영 소품으로 쓴다고 화분과 의자를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거나 허락 없이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깨뜨리기도 합니다. 스태프라고 소개하기에 커피를 외상으로 주었는데 알고 보니 도둑이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열우물 마을의 주민은 촬영 협조 차원으로 받은 적은 돈 때문에 이웃끼리 원수가 된 경우를 고백하기도 합니다.

마약 투약 혐의를 받는 가수 겸 배우 박유천(33) 씨가 구속되면서 그의 이름을 딴 ‘박유천 벚꽃길’이 철거됐습니다. 지난 4월 말, 계양봉사단은 계양구 서부천에 조성된 280m 길이의 박유천 벚꽃길 벽화, 안내판, 명패 등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박유천 보고 싶다’ 등의 글과 그의 모습을 담은 벽화에 흰색 페인트를 칠하고 인터뷰 내용, 드라마 대사, SNS의 언급을 담은 34개 명패도 모두 없앴습니다. 계양봉사단은 2013년에 박씨 팬클럽 ‘블레싱유천’에서 550만원을 기부받아 벚꽃길을 조성했었죠.

출처:연합뉴스

깜짝 놀랄 만한 소식도 있습니다.
인천 내항의 사일로 시설이 2019년 독일 ‘아이에프 디자인 어워드(iF Design Award)’에서 본상을 받았습니다. 지난해 ‘아름다운 공장 프로젝트’ 본상 수상에 이어 2년 연속 상을 받은 겁니다. 독일 아이에프(iF) 디자인 어워드는 미국의 IDEA, 독일의 REDDOT과 함께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로 꼽히는데, 올해는 52개국에서 6400여 개의 출품작을 제출해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사일로 슈퍼그래픽은 1979년 인천 중구 월미도에 건립된 곡물 저장고(사일로·Silo)를 도시 랜드마크로 탈바꿈하고자 추진된 사업입니다. 시와 인천항만공사는 지난해 1월 총예산 5억5000여만 원을 투입해 곡물 저장고에 높이 48m, 길이 168m, 폭 31.5m의 크기의 초대형 벽화를 완성했습니다. 벽화 전체 도색 면적은 2만 5000㎡로 축구장 4배 규모이고, 벽화 제작에 무려 86만 5400리터의 페인트를 사용했다고 하네요. 지난해 11월 ‘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벽화’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는데 이전 기록인 미국 콜로라도 푸에블로 제방 프로젝트(1만 6554㎡)보다 8446㎡ 정도(1.4배) 더 크다고 전해집니다.

사일로 디자인은 한 소년이 물과 밀을 가지고 저장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순수한 유년 시절을 지나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을 계절의 흐름으로 표현했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북 커버에 그리고 성장 과정을 의미하는 문구가 16권의 책 제목으로 디자인됐습니다. 100일 정도의 제작 기간이 소요됐다고 하네요.

 

인천 내항 사일로
출처 : 위키트리

글·이미지 / 이재은

*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1. 인천항 곡물저장고 벽화, 2년 연속 ‘iF 디자인’ 본상 수상
인천투데이, 2019.3.18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2. 인천항 곡물 저장고 벽화, 미국 제치고 세계 최대 벽화 기네스북에 등재
매일경제, 2018.12.17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3. “예쁜 골목벽화…아이들과 산책하는 동네 됐어요”
인천시 인터넷신문I-View, 2019.5.20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4. “응팔 촬영지라 부럽다고?…동물원 원숭이 된 기분”
한국일보, 2015.12.17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5. [웹툰·갤러리] 골목 벽화 색즉시공
인천시 인터넷신문I-View, 2019.5.7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자율주행 기술과 도시공간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자체나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하게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날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1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세계가전전시회)에서는 지난 전시와는 다른 모터쇼를 선사하였습니다. 많은 자동차 생산업체들이 지난 몇 해 동안 자율주행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운전자가 필요 없는 자동차뿐 아니라, 그 안에서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자율주행 기술에서 가장 앞섰다고 평가되는 구글이나 독일의 자동차 제조사들처럼 우리나라의 자동차 제조사와 통신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이 자율주행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서울대 연구진이 개발한 자율주행차가 여의도 일반 도로에서 시험 운행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출시된 자동차에는 대부분 레벨2와 레벨3 사이의 자율주행 기술이 탑재해 있습니다. 단거리에서 일부분 조향과 속도 조절, 주변의 상황을 온전히 자동차에 맡길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한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얼마 전 한 통신회사는 레벨4 수준의 자율주행 기술을 테스트하기 위해 인천 경제자유구역에서 자율주행 인프라를 구축하기로 하였습니다. 여기서 레벨4는 스티어링 휠과 페달이 사라지는 레벨5 수준의 완전 자율주행에 조금 미치지 못하지만, 대부분 사람이 운전에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기술을 말합니다.

<그림 1> 이제 자동차 제조사는 자율주행 자동차의 작동 방법보다 사용자가 누릴 수 있는 환경에 중점을 둡니다.
CES 2019에서 기아자동차가 출품한 R.E.A.D 시스템에 운전석 탑승자의 얼굴을 분석하여 감정 정보를 추출하고,
운전자의 상태에 맞게 내부 환경을 조절합니다. 
(사진 출처: 스마트경제 _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인천에서 추진되는 자율주행 인프라는 아직 레벨5 수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자율주행 자동차의 대중화는 그리 먼 미래가 아닙니다. 또한 이것은 운전자 개인에게 편안한 환경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도시 공간에 큰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동차 수의 증가는 주차 공간의 면적을 증가시킵니다. 거의 모든 건축물은 면적에 비례하여 주차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동차가 늘어나며 필요한 주차면 수는 점점 늘어났고, 자동차 크기가 커지면서 자동차 1대당 주차장 면적도 넓어졌습니다. 늘어나는 주차 수요는 야외 주차장들로는 감당하기 어려워서, 이제 주차장도 지상과 지하 여러 층으로 켜켜이 쌓아 올려야만 합니다. 10년쯤 전부터 아파트 단지 계획에서는 보편적으로 주민들의 안전과 쾌적한 생활을 위해 지상에는 공원의 형태를 조성하고 지하는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과거 단층 야외 주차장 방식으로는 고층 아파트에 사는 거주자들의 소유 차량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완전자율주행 차량의 대중화는 주차장 조성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운전자는 이동할 때마다 자동차 주차 문제를 우선 생각했지만, 완전자율주행 차량은 그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완전자율주행은 운전자 없어도 스스로 자동차가 움직일 수 있으니, 자동차는 운전자-완전 자율주행차량에서는 아무도 운전하지 않으니 그냥 ‘사용자’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만-가 이동할 때 달려오고, 그렇지 않을 때 더 먼 곳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직장인을 출근을 시키고 집에 되돌아간다거나, 가족을 놀이공원에 데려다주고 자동차는 30분쯤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연료를 소모하면서까지 승용차 주차가 운전자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정한 이유는 번화한 도시일수록 토지의 가격이 그만큼 상승하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경우, 공영주차장 1개의 면적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 대략 8천만 원에서 2억 원까지 추산하고 있습니다. 도심 한가운데 값비싼 업무용 토지를 아침 출근부터 저녁 퇴근까지 주차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은 공간의 효율성이 상당히 떨어집니다. 건축물에서 주차장이 차지하는 면적이 줄어든다면, 해당 공간만큼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아예 현재의 지하주차장이나 주차타워와 비슷한 양식의 건물을 짓지 않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이는 현재의 건축 비용을 절감할 뿐만 아니라 건축자재를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환경오염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도심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든, 녹지를 확보하여 탄소 발생을 줄이든 주차장이 감소한다면 혼잡한 도시도 조금 숨통 트일 수 있습니다.

완전자율주행 차량의 보편화는 ‘개인적인 대중교통’의 수요를 좀 더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자가용에 준하는 택시 서비스가 보편화할 수도 있습니다. 도시 대중교통에서 자율주행 기술이 보편화하면서 ‘무인버스’, ‘무인택시’가 활성화될 것입니다. 현재 기관사 없이 운행하는 인천지하철 2호선처럼 말이지요. 버스는 노선이 이미 정해져 있어 큰 차이가 없겠지만, 택시는 지금과 다른 형태로 운영될 수 있습니다. 카카오택시나 티맵택시 사례와 같이 콜택시 애플리케이션이 많이 보급되어 있으나, 여전히 빈 택시가 승객을 찾아 헤매는 방식은 비효율적입니다. 무인택시는 공공이나 민간 사업자들이 마련한 몇 군데의 거점에서 대기하다가 승객이 택시 탑승을 원하면 가까이 위치한 곳에 승객을 태워 도착지에 내려주고 다음 거점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굳이 자동차를 굳이 소유하지 않아도 됩니다. 운전자 없이 택시를 이용하는 것은 자신의 자가용에 탑승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죠. 점차 상승하는 자동차 구입 및 유지 가격으로 인해, 자가용 구매보다 무인 택시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늘어날 것입니다. 또한 특정 시간대에 승차 거부와 택시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심야에는 승객이 없는 빈 택시가 도로를 메우는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림2> 미국의 유통회사 아마존은 지속적인 연구개발의 결과로
2016년에 30분 이내에 상품을 배송하는 무인배송시스템 Prime Air의 시범 운영을 진행했습니다.

(사진 출처: 아마존_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자율주행의 기술이 가져올 수 있는 또 하나의 변화는 도시가 더 입체화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자율주행이 자동차뿐 아니라, ‘드론’이라 불리는 무인항공기 기술과 연결되었을 때 가능합니다.

이미 2013년에 미국의 유통회사 아마존에서는 드론으로 개별 가정에 상품을 배송하는 서비스를 시험했습니다. 여전히 아마존, DHL, 알리바바 등의 유통기업들은 무인항공기를 통한 배송 시스템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물류 수송이 도로 교통에서 완전히 해방되면서 신속한 수송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기업은 이 기술의 현실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드론 기술은 제도적으로 사생활 침해와 보안, 해킹을 통한 범죄 이용 등을 완화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인천의 경우, 공항 주변과 휴전선 부근 등에서 드론 이용이 금지되었고, 서울의 경우 허가받지 않은 대부분 시가지에서는 날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드론 배송 기술이 향상된다면, 도시 공간도 지금과 같은 규제에서 벗어나 이에 적합하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도시의 하늘에는 상업적인 물류 배송을 위한 드론 경로가 제일 먼저 지정될 것입니다. 마치 비행기 항로가 평면적인 이동경로와 이동고도가 정해져 있듯이 무인 항공기 도로를 구획하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 기존 도로의 상공을 이용하겠지만, 산이나 강과 같은 지형에서는 기존의 도로와는 별개로 하늘길이 정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건축적으로는 개별주택의 옥상이나 마을 단위로 드론 착륙장이 생길 것입니다. 아파트의 베란다도 마찬가지로, 어쩌면 현재 아파트 평면에서 많이 계획되는 에어컨 실외기실이 드론 착륙대로 활용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행정적으로는 무인항공기를 위한 하늘길을 법적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입체 지적에 대한 논의가 확대될 것입니다. 현재 지적제도에서 대지, 전, 답 등으로 구분하는 지목은 하나의 평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도시가 발달하면서 단일 토지를 복합용도로 이용하는 사례가 매우 빈번해졌고, 한 토지를 여러 지적 용도로 사용하거나 지목과 실제 이용이 달라지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행정기관이 토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지상과 지하를 구분하는 입체지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꾸준히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무인항공기 이용이 활성화되면 이러한 입체 지목의 필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행정기관의 토지관리가 더욱 용이해질 수 있다고 예상됩니다.

자동차 자율주행 기술과 무인항공기의 보편화는 굉장히 먼 미래처럼 보이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기술로 산업, 일자리, 일상생활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면서 도시공간도 바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공간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는지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글/ 김윤환(도시공간연구자, 건축사)

[참고문헌]
김순자 외(2016). 드론 택배 도입을 위한 각국의 정책과 발전방안에 대한 연구. 물류학회지, 26(1).
김영수,지종덕(2014). 입체지적 도입을 위한 지목세분화에 관한 연구. 한국지적저보학회지, 16(1).
김영수,지종덕(2013). 한국 입체지적을 위한 지목체계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 한국지적정보학회&서울특별시 춘계학술대회 논문집.
이승준(2017). 자율주행자동차의 도로 관련법상 운전자 개념 수정과 책임에 관한 시론 –독일의 논의를 중심으로-. 형사법의 신동향, 56.
“SKT, ‘인천경제자유구역’에 5G 자율주행 인프라 구축한다”. 로봇신문. 2019.4.29.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큐레이션 콕콕] 쓸모없이, 대충 사는 ‘무민세대’

직장인 박모 씨는 지난 연말 모임에서 짚신을 선물 받았습니다. 송년회 주제를 ‘쓸모없는 선물 교환식’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쓸모없는 선물의 단골 아이템은 한물간 제품들입니다. 2019년을 앞두고 2018년 달력이나 다이어리를 주거나 주차금지 표지판, 보도블록, 인공 잔디, 업소용 현관 발판, 버스 손잡이 등 일상에서 쓰지 않는 물건을 건네는 식이죠. 스마트폰이 아닌 일반 휴대전화 충전기, 짚신, 굴렁쇠 등 시기가 지난 제품도 ‘쓸모없는 교환식’에서는 쓸모가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에 ‘쓸모없는선물’ 해시태그를 검색한 모습
출처:MNB

청년들은 왜 쓰지 못하는 선물에 열광할까요. 값지거나 유용한 것을 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재미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저렴하면서도 폼 나는 ‘가성비 갑’인 선물은 좀처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쓸모를 버리는 방식’을 택하는 겁니다. 이들은 선물의 상한선을 정한 뒤 해당 가격대에 맞는 것을 골라옵니다.

전문가들은 쓸모없는 선물 교환식을 ‘무민세대’의 놀이 문화로 분석합니다. 무민세대는 무(無‧없을 무)와 민(mean‧의미하다)의 합성어로 무의미한 것에서 의미를 찾는 젊은 층을 지칭하는 신조어입니다. 극심한 경쟁과 피로에 지친 청년들이 의미 없는 행위에서 위안을 얻는 거죠. 이들 세대는 선물의 가치가 쓸모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실용성은 떨어져도 웃음과 즐거움을 준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직장인 A씨의 ‘쓸모없는 선물 교환식’ 모습
출처:MNB

무민세대는 지난해 유행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방향은 사뭇 다른데, ‘소확행’이 일상을 유지한 채 경험과 물건으로 삶의 질을 높인다면, ‘무민세대’는 생활의 일부 혹은 전체를 내려놓거나 버리겠다는 모양새를 취합니다. 전자가 삶의 질을 높이는 부가가치라면 후자에는 마이너스적인 삶을 통해 지향점을 바꾸겠다는 반전의 메시지가 담겨 있죠. 무민세대는 한국 사회에 지상 명제처럼 자리 잡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문장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생각이 ‘대충 살자’입니다. 최근 2, 30대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가치관으로 너무 열심히, 지나치게 경쟁하지 말고 그저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하자는 겁니다. 이런 태도가 유머와 대중문화의 일부로 활용되면서 젊은 세대의 달라진 생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충 살자’ 시리즈는 높은음자리표를 지나치게 축약해 그린 베토벤의 악보를 보고 “대충 살자, 베토벤의 높은음자리표처럼”이라고 하거나 관자놀이에 헤드폰을 낀 캐릭터 아서를 보고 “대충 살자, 귀가 있어도 관자놀이로 노래 듣는 아서처럼”이라고 말합니다. 이밖에 “대충 살자, 숫자 풍선 들기 귀찮아서 머리에 낀 황정민처럼” “대충 살자, 걷기 귀찮아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북극곰처럼”, “대충 살자, 하우스 지붕에 누워서 자는 고양이처럼” 등 수많은 ‘짤’이 있습니다.

 

출처:다음 카페 ‘안밤 TV가 빛나는 밤에’

카카오톡에서는 대충 그린 듯한 이모티콘이 인기입니다. 이런 걸 돈 주고 사다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낙서 같은 것도 있습니다. ‘대충하는 답장’ 묶음은 그림판으로 그린 듯한 얇은 선으로 사람의 상반신을 그리고 표정만 다르게 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를 출시한 범고래 작가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수억 연봉의 스타 작가가 됐죠.

서점가에도 변화는 찾아왔습니다. 김신회의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김수현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손힘찬의 『오늘은 이만 좀 쉴게요』 등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완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출간 6개월 만에 14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외에도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힘 빼기의 기술』, 『빵 고르듯 살고 싶다』, 『한 번 까불어보겠습니다』 등이 열띤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대충’의 가치관은 드라마 소재로도 등장합니다. 웹드라마 ‘사랑병도 반환이 되나요?’는 세상의 부조리에 발끈하며 열정을 갖고 사는 먹방 BJ 발끈 언니와 의욕 없이 사는 대충살자 TV 운영자 슈렉을 다룬 작품입니다. tvN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의 박선호는 여전히 ‘대충 살자’는 캐릭터로 출연하고 있고요.

출처:세계일보

20·30세대에 만연한 ‘대충 살자’는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좌절과 체념에서 탄생했습니다. 어떻게 해도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세계, 끝없는 열정을 강요받는 사회에서 일종의 포기를 선택한 거죠. 이룰 게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허무주의로 비칠 수 있지만, 이들 세대의 ‘대충’은 사회의 틀에 억지로 자신을 맞추기보다 다른 삶을 좇는 재충전에 더 가깝습니다.

책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로 인기를 끈 하완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운이 좋은 시대를 사는 세대가 있는 반면, 지금처럼 운이 없는 시대에 태어난 세대가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자신이 살아야 할 힘든 시대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애를 쓰며 살아 내고 있다. 그들 스스로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으니 그들에게 맞는 희망이 바로 거기에 있다.”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베트남, 라오스, 태국, 말레이시아, 미국, 멕시코, 쿠바, 아이슬란드, 스페인 등을 여행한 손모 씨(31.여)는 “대충 살지 않기 위해 떠났다, 지금은 꿈을 다시 찾았다”고 고백합니다.

“결혼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나이가 정해져 있는지 의문이 생겨요. 누구랑 만나서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나요? 누군가에게는 대책 없이 대충 사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대충 살기 위해 떠난 여행은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지금까지 바쁘게 살아온 날들이 힘들기는 했어도 헛된 시간들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시간들이잖아요. 그런 것처럼 이 여행 또한 나를 만든 날들의 연장선일 뿐이에요. 잘하거나 잘못했다고 평가할 만한 가치가 될 수는 없죠.”

직장인 최모 씨는 “한 번도 대충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대충 살자 시리즈를 보고 진심으로 웃을 수 있다”며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열심히만 살아왔는데 완벽하지 않은 사진이나 상황을 보면 ‘조금은 대충 살아도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 조금 위안이 된다”고 털어놓습니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한국의 2,30대는 슬라임을 주물럭거리며 마음의 안정을 느낀다.
출처:한국일보

전문가들은 대충 살자 시리즈가 청년 세대의 새로운 언어라고 분석합니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대표되는 위로 담론과 달리 대충 살자 시리즈는 젊은이들의 자조나 해학에 가깝다며 “요즘 청년들은 몇 년 전 청년들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다. 부조리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풍자 등의 방식으로 꼬집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는 “열심히 살아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얻어낸 게 결국 ‘생존’뿐이란 걸 깨달은 청년들이 자신을 경쟁 밖에 위치시킴으로써 작은 행복이라도 찾으려 하는 시도”라고 평가합니다.

올해 초 취업포털 사람인이 성인남녀 1,18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30 세대 절반 정도가 자신을 무민 세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20대는 그 비율이 47.9%, 30대는 44.8%였죠. 무민 세대가 된 이유로는 ‘취업, 직장생활 등 치열한 삶에 지쳐서’(60.5%·복수 응답)란 응답이, 무민 세대 등장 원인으로는 ‘수저 계급 등 개선 불가능한 사회구조’(57.4%·복수 응답)가 가장 많았습니다.

출처:세계일보

올 7월 글로벌 헬스 서비스 기업 시그나그룹은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가 갈수록 떨어지고 스트레스는 주요국 최고 수준이라는 조사 결과를 내놨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중국, 인도 등 23개국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 한국의 웰빙지수는 51.7점으로 23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ASMR을 들어야만 잠을 자고, 장난감을 손에 쥐어야 안정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슬픈 열풍’일지 모릅니다.

글·이미지 이재은

*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1. [대충 삽시다] ① ‘무민(無mean)세대’ 새로운 가치관…“대충 살자”
헤럴드경제, 2019.1.31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2. [대충 삽시다] ③ 허무주의 vs 재충전, ‘대충 살자’의 진짜 의미
헤럴드경제, 2019.1.31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3. “경쟁에 지친 청춘들을 응원합니다”
파이낸셜뉴스, 2019.1.1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4. ‘무민세대’의 놀이문화… 쓸모없는 선물 교환하며 “해피뉴이어”[줌인톡]
머니S MNB, 2018.12.25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5. ‘아프니까 청춘’ 언제까지?…무민세대의 외침 ‘대충 살자’ [S스토리]
세계일보, 2018.10.27.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6. 한국 2030 절반이 ‘무민 세대’인 이유
한국일보, 2018.10.2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나의 바다, 나의 그랜드투어

황토빛 아시아

“아시아 대륙의 끝이라고?”
말레이시아 친구 제이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싱가포르가 아니고?”
제이슨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재차 묻는다.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제이슨에게 말했다.
‘싱가포르는 섬이잖아, 섬!

제이슨과 말레이반도 최남단 탄중피아이(Tanjung Piai)에 가는 날이다. 대륙의 끝에 간다는 비장한 마음도 잠시, 그의 차를 타고 조호바루에서 80km를 달려 너무나 편안하게 탄중피아이에 도착했다. 문득 지난겨울에 갔던 유럽대륙의 끝이라 알려진 포르투갈 호카곶(Cabo da Roca)이 떠오른다. 이때도 관광버스를 타고 편안하게 도착했었지….피식 웃음이 난다. 대륙의 끝, 세상의 끝일지도 모르는 곳에 가는데, 이렇게 쉽게 가도 되는지 마음이 어수선하다. 엄청난 바람이 몰아치던 호카곶과는 다르게 탄중피아이는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고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외국인은 20링깃, 현지인은 5링깃이라는 입장료 때문일까? 국립공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방에 떨어진 쓰레기와 조악한 조형물이 신경을 거슬린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나무다리에서 카메라를 들고 경주하듯 걷는다. 빨리 건너가서 일단 좀 앉고 싶은 마음뿐이다.

탄중피아이 조형물

바다를 향해 뻗은 나무다리

우리에겐 아시아 대륙의 끝이지만, 과거 유럽인들에겐 아시아 식민지배의 관문, 새로운 대륙의 시작이었을 탄중피아이에 드디어 도착했는데 왠지 좀 시시한 것 같아 기운이 빠진다. 대륙의 끝 혹은 시작, 어쩌면 세상의 끝과 시작이라는 낭만적인 감상에 빠지기엔 팔토시를 입고 소리치는 제이슨과 버려진 쓰레기들이 자꾸 나의 감상을 방해하기 때문일까? 문득 꼼지락거리는 다리 달린 물고기 비슷한 것이 시선을 잡아끈다. 물고기도 아닌 것이 육지 동물도 아닌 것이 지느러미 같은 다리로 빠르게 진흙 위를 걸어 다닌다. 말뚝 망둥(mudskipper)이다. 말뚝망둥이는 360도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고 한다. 이런, 온 사방을 다 볼 수 있으면 앞으로 걸어야 하나 뒤로 걸어야 하나…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눈을 가진 이 망둥이는 어쩌다 진흙 속에서 살게 되었을까? 잠시나마 이들처럼 전지전능한 눈이 달리면 어떨까 하는 짜릿한 상상에 빠진다. 주변엔 거대한 뿌리를 가진 맹그로브(mangrove) 나무가 가득하다. 나무 몸통의 옆 가지가 주욱 뻗어 나가 뿌리로 합쳐진다. 이 나무들은 옆의 나무뿌리와 얽히고 또 그 옆의 나무뿌리와 합쳐진다. 맹그로브 나무는 이렇게 옆의 나무뿌리와 얽히고설켜 쓰나미를 막는 역할을 한다. 중생대 백악기 말기부터 존재했다고 하니 이들은 공룡이 왜 사라졌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맹그로브 나무

말뚝망둥이

탄중피아이의 바다는 황토빛이다. 작년 겨울 유럽대륙의 끝이라 불리는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본 검푸른 대서양 바다와는 영 다르다. 누런 황토 바다가 눈앞에서 넘실거린다. 호카곶처럼 세상의 끝이라면 떠올릴 법한 가파른 절벽, 혹은 거대한 파도가 휘몰아치는 깊은 푸른색의 바다가 아니다. 아시아 대륙의 끝에서 만난 바다는 탁한 황토빛이다. 거센 바람 대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쬔다. 전망대 바닥엔 친절하게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방향을 표시한 화살표가 붙어있다. 끝, 종착지가 아니라 경유지 같다. 바다 곳곳엔 엄청난 기계 소음을 낼법한 거대한 배가 유유히 떠다닌다. 게다가 그 옆에는 커다란 건설현장도 보인다. 수백 년 전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이 거친 대서양을 건너 말라카 해협을 따라 탄중피아이에 도착했을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에게 탄중피아이는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으로 갈 수 있는 동남아의 관문이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대륙의 발견, 곧 식민시대의 시작이 바로 이곳 탄중피아이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탄중피아이의 황토빛 바다

거대한 배가 떠있던 탄중피아이의 황토빛 바다

나에게 탄중피아이는 대륙의 시작과 끝이라기보다 경계의 장소, 처음과 끝으로 가기 전 잠시 머물다 가는 곳으로 느껴진다. 땅과 하늘 사이, 바다와 육지 사이, 그 어딘가의 공간에선 황토 빛 바다가 출렁인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서 자라는 맹그로브 나무, 서로의 뿌리를 얽히고설켜 거대한 쓰나미를 막는 맹그로브 나무에서 함께 역경을 헤쳐가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신비한 맹그로브 나무와 말뚝망둥이, 대륙의 끝에서 만난 또 다른 건설 현장, 살이 타들어 갈듯한 뜨거운 날씨, 황토빛 바다, 숨어있는 원숭이들, 여기저기 버려진 쓰레기들, 이곳은 마치 신비하고 영험한 장소 같으면서 또 혼란스러운 현실 세계다. 과거나 미래로의 공상에 빠지기엔 눈앞의 어지러운 현실이 자꾸 나를 붙잡는다. 난 지금 어디에 서 있나. 말레이시아의 끝인가 시작인가, 싱가포르의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인도네시아의 위인가 아래인가.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땅 위인가 바다 위인가. 혼란스러운 이곳이 마치 아시아의 얼굴, 어쩌면 우리 모두의 얼굴처럼 느껴진다.

전망대 바닥에 붙어있던 방향표시

탄중피아이에 도착한 수백 년 전 유럽인들을 떠올리니 시간은 어느새 그들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간다. 거대한 바람과 파도가 휘몰아쳤던 유럽대륙의 끝, 포르투갈 호카곶으로 다시 돌아간다.


검푸른 유럽

우르릉 쾅쾅, 샤아아아~

파도 소리가 마치 천둥번개처럼 요란하다.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소리에 덜컥 겁이 난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데다 바람까지 불어 꼴이 말이 아니다. 타박타박 바다를 향해 걷는다. 하필 오늘따라 운동화가 아닌 단화를 신고 나와 산길을 걷기가 영 불편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탁 트인 절벽 아래로 대서양이 펼쳐진다. 구름 틈새로 빠져나온 빛이 바다에 툭 떨어진다. 빛이 떨어진 바다가 하얗게 반짝인다. 하얀 바다를 본 적이 있었나… 반짝이는 하얀 바다는 계속해서 점점 더 넓어진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지 거대한 대서양 어딘가에서부터 밀려오는 파도가 이상하리만큼 천천히 움직인다. 모든 게 가짜 같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포르투갈인들이 말하는 ‘사우다테(슬픔)’가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나는, 내 인생은, 우리는, 저 바닷속으로 모두 사라져버리는 게 아닌가. 대항해 시절 포르투갈인들은 이 거대한 바다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시절 그들이 바라본 바다는 한번 떠나면 돌아올 수 없는 세계가 아니었을까? 저 수평선 넘어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길래 무모하리만큼 용감한 항해를 시작했을까? 그들에겐 정말 이곳이 세상의 끝이었을까? 끝이었기에 시작을 향해 나아간 걸까?

포르투갈 호카곶

호카곶에서 바라본 바다

사실 이곳이 ‘세상의 끝’이라는 말은 참 자기중심적이다. 이곳은 유럽대륙의 최 서쪽이라는 이유로 세상의 끝이라고 알려졌다. 또한 포르투갈의 시인 카몽이스(Camoes)는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Aqui Ondi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ca)’이라 말한 곳으로 매우 유명하다.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든다. 심지어 버스를 타면 친절하게 ‘세상의 끝’ 바로 앞까지 데려다준다. ‘세상의 끝’이라는 말에 너무 큰 환상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자기를 중심으로 정한 끝이 아닌가. 그들이 정한 시작과 끝. 그리고 내가 정한 시작과 끝, 결국엔 내가 가는 곳, 우리가 가는 모든 곳이 각자의 시작이자 끝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곳은 과연 나에게 끝일까? 아니라면 과연 그곳에 언제 갈 수 있을까?

포르투갈에서 바라본 다양한 수평선

포르투갈에서 바라본 다양한 수평선

나에게 이곳은 거대한 대서양 바다를 만난 곳, 바다 넘어 다른 세상을 상상하게 한 곳, 하얀 바다를 본 곳, 무거운 파도를 느낀 곳, 그리고 리스본에 머무는 동안 한 번도 생각지 못한 포르투갈인들의 ‘사우다테’를 느낀 곳이다. 세상의 끝, 포르투갈 호카곶을 다녀와 2018년 세마(SeMa) 창고 개인전에서 선보인 드로잉 시리즈 ‘수평면 환상’의 일부를 소개한다.

이승연, 수평면 환상(14개의 드로잉 시리즈), 28x28cm, 펜드로잉, 2018
세상 끝에 도착하니 수평선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수평선이 아니라 수평면이다.

내게 이곳은 세상의 끝, 누군가에겐 세상의 시작, 누군가에겐 오줌싸는 곳, 물론 나도 덤불속에

2018 세마창고 개인전 설치사진

우연일지 필연일지 2년에 걸쳐 아시아 대륙의 끝과 유럽대륙의 끝을 가볼 수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황토빛 바다와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의 여정은 다시 아시아로 돌아간다. 시간은 다시 호카곶에서 말라카로 넘어간다. 수백 년 전 포르투갈인들이 폭퐁 같은 이 대서양 바다를 건너 도착한 말라카 해협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바다 위를 걷다

바다 위를 걷는다. 바다 위에서 뛰기도 하고 음식도 먹고 커피도 마신다. 게다가 공연도 보고 수영도 하고 잠도 잔다.
우연히 크루즈를 타게 되었다. 망망대해 바다에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싱가포르에서 출발하는 겐팅 드림 크루즈다. 말레이반도를 따라 피낭, 푸켓, 랑카위, 포트클랑, 6일간 4개의 기항지, 싱가포르, 태국, 말레이시아 3개국을 지나가는 여정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다섯 밤을 잔다니…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탄 겐팅드림호가 지나갈 말레이 해협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본 대항해 시대를 기념한 동상의 주인공들이 지나간 길과 겹치기도 한다. 몇백년 전 그들이 지나간 바닷길을 직접 지나간다고 하니 기분이 묘하다. 호카곶에서 바라봤던 거대한 대서양 바다가 떠오른다. 지구가 터질듯한 엄청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눈앞의 바다를 건너기로 결심했던 포르투갈인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 옛날, 이 망망대해를 배 타고 몇 달을 걸쳐 항해해왔던 사실이 한편 경이롭다. 그들이 탄 배는 지금처럼 호화롭지도, 튼튼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바다를 건너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을까? 거대한 배에 잠시 탔다고 탐욕스러운 식민주의자들의 감정을 헤아리는 내 모습이 놀랍다. 한편 이들이 대서양 바다를 건너와 첫 식민지로 삼은 말라카 말레이인들의 심정도 동시에 떠오른다.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 영국, 일본까지 말라카 해협을 통해 들어온 이들에게 식민지배를 받아야 했던 그 당시 말레이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포르투갈에서 본 대항해 시대 동상

겐팅드림크루즈

오늘날 말라카 해협은 세계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항로이다. 이곳을 지나지 않고 우회하면 3일이 더 걸리기 때문이다. 전 세계 선박이 실어 나르는 화물의 ¼정도가 이곳을 지나간다고 하니 현대의 실크로드로 불릴만하다. 실크로드이지만 동시에 해적 출몰이 전 세계에서 가장 번번한 곳 역시 말라카 해협이라고 한다. 수심이 얕아 배가 천천히 지나가기 때문이다.
어쨌든 크루즈에서 보내는 3일째, 크루즈 안 시간은 바깥세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어제 내린 기항지 태국 푸켓은 싱가포르보다 한 시간이 느리다. 다만 크루즈 안에서의 시간은 출발지인 싱가포르 시각을 따르기에 배에서 나오는 순간, 한 시간을 버는 셈이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다 보니 디지털 핸드폰 시계는 계속 오류가 난다. 전자시계는 믿을 수 없기에 아날로그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다. 초호화 배를 타고 3000여명의 승객이 여행하는 거대한 배이지만 바다 한가운데서, 어쩌면 지구 한가운데서 전자기기는 아무런 힘을 못 쓴다.
이곳에선 3000여명, 30여 개국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는데 웨스턴, 아시아, 하랄, 인디언 음식까지 정말 다양하다. 한쪽에선 인디언 가족이 손으로 카레를 먹고, 다른 한쪽에선 히잡을 쓴 이슬람 여인들이 하랄 뷔페 앞에 줄을 선다. 또 다른 한쪽에선 싱가포르, 혹은 홍콩 관광객들이 아이들과 함께 접시를 여러 개 쌓아놓고 식사를 한다. 아침부터 요가, 시네마, 모노폴리부터 각종 게임, 수영장, 스파, 저녁엔 공연과 주크클럽 등 크루즈 안은 잠시도 한가할 시간이 없다. 크루즈는 부유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조용히 여행하는 거라 생각했다. 비싸고 심심하고 느린 여행이 내 머릿속 크루즈였다. 실제 와본 크루즈는 내 상상과는 반대의 세계다. 크루즈를 타기 전엔 말레이반도를 따라 항해하는 2200킬로의 거대한 여정과 이 길에 얽힌 이야기를 상상했다. 크루즈는 별세계다. 거대한 역사적 사실을 되새기며 상념에 빠지기엔 크루즈 안은 너무 바쁘다.

크루즈 내부

그러나 움직이는 바다를 보고, 움직이는 수평선을 보고, 힘차게 나아가는 뱃길을 보니 바다가 더는 쓸쓸히 바라만 보는 곳이 아니라고 느낀다. 선미에 서서 바다에 새겨졌다 사라지는 거대한 뱃길을 바라보는 건 이곳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바다 위에선 금방 사라져 버리는 이 뱃길처럼 우리는 매 순간을 붙잡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가? 크루즈 안에선 1분 1초가 바쁘다. 그런데도 매 순간에 뱃길처럼 계속 사라진다.

선미에서 바라본 뱃길


전진하는 지구

크루즈는 움직이는 지구 같다. 단 매일 자전하는 지구가 아닌 매일 전진하는 지구다. 지구가 매일 한 바퀴씩 도는 걸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크루즈 안에선 배가 움직이는지 잘 알지 못한다. 바다에는 수많은 길이 숨어있다. 바다에 들어와 바다를 바라보니 반짝이는 바닷길이 보인다. 햇빛이 바다를 내리쬐는 찰나의 순간 바다엔 길이 난다. 때로는 배가 지나갈 만큼 넓게, 때로는 가느다란 실처럼, 때로는 미로처럼 바다에 길이 생긴다. 빛이 사라지면 길도 사라진다.

햇빛이 만든 바닷길

햇빛이 만든 바닷길

바다에는 움직여야만 보이는 길도 있다. 양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다. 배가 나아갈 때 선미에 서면 바닷길이 갈라지며 생기는 마술 같은 길을 볼 수 있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바닷길이 갈라지며 길을 만든다. 움직이지 않으면 길은 곧 사라진다. 작년 겨울 포르투갈 라고스에서 지내며 바라본 검푸른 대서양 바다에선 길을 보지 못했다. 바다 밖에서 바라본 바다는 쓸쓸했다. 눈앞의 파도보다 저 멀리 갈 수 없는 수평선을 바라봤다. 존재하지 않는 수평선, 수평면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고 그렸다. 아마 영원히 갈 수 없는 곳이기에 수평면을 바라보며 본 환상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시아 탄중피아이에서 바라본 바다는 황토빛이었다. 세상 끝 어수선한 모습에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대륙의 끝, 세상의 끝이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한 기항지처럼 느껴졌다.
이번 겨울 말라카 해협에 들어와 바라본 바다에선 더는 수평선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곳에선 매일 바다 위에서 길을 찾는다. 매일 아침 문득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마법 같은 길이 나타나길 기다린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길을 기록하기 위해 배 안을 바쁘게 걸어 다닌다. 거대한 바다에, 거대한 지구에 잠시 흔적을 남겼다 사라지는 이 길은 결국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마법처럼 나타났다가 곧 사라져버리는 이 길처럼 내 찰나의 순간도 빛이 나길 꿈꾼다.

말라카 해협을 항해하는 여러 배들이 만든 작은 바닷길

말라카 해협을 항해하는 여러 배들이 만든 작은 바닷길

글 / 이승연
사진 / 저기요 스튜디오

이승연(Seung youn LEE)
고대사와 신화, 또는 상상의 극한을 보여 주는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고대’라는 재료를 갖고 미래를 얘기한다. 최근에는 물리학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드로잉을 기반으로 철과 나무, 패브릭,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작업한다. 2012년에서 2017년까지 영국인 알렉산더와 ‘더 바이트 백 무브먼트’ 아티스트 듀오로 활동했다. 당시의 신화적·종교적·사회적 관심은 개인작업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영국 서머싯 하우스, 국립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 문화역서울 284, 영은 미술관, 켄 파운데이션, 베를린 ZK/U, 등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처럼 영원히 남을 작업을 꿈꾼다.

페이스북: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큐레이션 콕콕] 21세기 발명품

세상을 바꾼 수많은 발명품 중에서 최고는 무엇일까요? 특허청 ‘페이스북 친구(페친)’들이 선정한 세계 10대 발명품을 소개합니다.

출처: 뉴스웨이

6위부터 10위는 자동차(4.7%), 금속활자(3.9%), 안경(3.6%), 백신(3.6%), 가스레인지(3.3%)입니다. 5위는 텔레비전(5.4%), 4위는 세탁기(5.5%)네요. 3위는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성장한 개인용 컴퓨터(7.0%)입니다. 페친들은 “디지털 시대의 주인”, “PC가 3위라니” 등의 댓글을 남겼습니다.

2위는 유효 응답 10.4%의 인터넷입니다. 인터넷은 1969년 미국 국방성이 구축한 연동 망으로 전 세계를 하나로 묶는 데 엄청난 공헌을 했죠.

1위는 유효 응답 11.2%의 냉장고입니다. 냉장고를 선정한 페친들은 “살면서 제일 많이 쓰는 물건”, “이제 곧 여름이니까 최고”, “냉장고가 없었으면 상한 음식을 먹고 식중독으로 많이 고생했을 것” 등 생활의 편리함에 감사하는 댓글을 많이 남겼네요.

상위 10위에 안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전문가 선정 100대 발명품에는 볼펜, 선풍기, 신용카드, 아라비아숫자, 전자레인지, 형광등, 토스터, FM 라디오 등이 포함됐습니다.

출처: 뉴스웨이

Toptenz의 JEFF DANELEK는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10가지 혁신 기술을 꼽았습니다. 특별한 순서 없이 나열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발명(혹은 발견)을 만나보시죠.

1. 라디오(Radio)
오늘날 라디오는 운전자들을 잠들지 못하게 하는 수단으로 거의 차 안에서만 유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철조망을 사용하지 않고 수백, 수천 마일 떨어진 곳까지 사람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제품이었죠. 제2차 세계대전 후 텔레비전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라디오는 가정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출처: Toptenz

2. 인터넷(The Internet)
인터넷은 컴퓨터를 현재의 괴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전달을 허용하고, 혁명을 촉진하며, 빛의 속도로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사고팔게 하고, 오래된 친구들을 찾아 인사하고, 최신 유튜브를 보고, 삶의 파트너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출처: Toptenz

3. 텔레비전(Television)
텔레비전은 베이비시터, 뉴스, 선생님, 연예인, 이야기꾼입니다. 유능하게 작용할 경우 텔레비전은 그 어떤 것보다 유용합니다.

출처: Toptenz

4. 항생제(Antibiotics)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기 전까지 거의 모든 벌레는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존재였습니다. 항생제의 등장으로 세균 감염 사망률이 낮아지고 수명이 길어졌죠.

출처: Toptenz

5. 잠수함(The Submarine)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짜증스러운(?) 무기로 사용된 잠수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그 어떤 것보다 큰 파괴력을 가졌습니다. 원자력 발전이 등장하면서 잠수함은 세계의 모든 1급 해군에서 수도 전함이 되었고, 과거의 해군 전쟁을 쓸모없게 만들었습니다.

출처: Toptenz

6. 로켓(Rocketry)
3천 년 전 중국인이 처음 발명한 로켓은 20세기에 효과적인 ‘테러 무기’ 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주에 접근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죠. 로켓이 없었다면, 우리는 달이나 태양계의 행성을 방문하지도, 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려놓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사용할 수도, 날씨를 예측하고, 국제전화를 걸 수도,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도 없었겠죠.

출처: Toptenz

7. 자동차(The Automobile)
하룻밤 사이에 말과 마차는 시대착오적으로 변했고, 거의 모든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었습니다. 상품을 대량으로 트럭에 실으면서 자동차는 시장에서 혁명적인 존재가 되었죠.

출처: Toptenz

8. 비행기(The Airplane)
비행기는 사람이 몇 시간 안에 전 세계 어디든 날아갈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행성을 축소시켰습니다. 1903년에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육상 비행한 것이 동력 비행의 시초입니다.

출처: Toptenz

9. 개인 컴퓨터(The Personal Computer)
1976년에 스티브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공개했습니다. 그들의 예언대로 그것은 역사가 되었습니다. 컴퓨터는 어디에나 있으며 우리는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합니다. 많은 사람은 컴퓨터가 없는 상태를 “거의 벌거벗은 것처럼” 느끼기도 하죠. 사람들은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책을 쓰고, 부동산을 팝니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합니다.

출처: Toptenz

10. 원자력(Nuclear Power)
인류는 하룻밤 사이에 지구를 변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파괴적인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과 인간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원자력 발전소는 양날의 칼입니다.

출처: Toptenz

지난 2017년 ‘발명의 날(5월 19일)’을 맞아 특허청은 우리나라를 빛낸 발명품 10선을 선정했습니다. 전문가 그룹이 선정한 발명품 25선에 대해 누리꾼들이 특허청 페이스북을 통해 온라인 투표를 했는데요, 최고의 발명품은 ‘훈민정음’이었습니다. 30% 이상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2위 거북선에 이어 금속활자와 온돌이 뒤를 잇고, 5위부터 8위까지는 커피믹스, 이태리타월, 김치냉장고, 천지인 한글자판이 차지했습니다. 첨성대와 거중기가 다시 근대 이전의 발명품으로 9와 10위에 이름을 올렸네요.

언문이나 암글로 천대받던 훈민정음은 민족의식의 각성과 더불어 국문과 국서로 표현됐습니다. 주시경 선생에 의해 한글이란 이름을 얻었죠. 1377년 충북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백운화상 초록 불조 직지심체요절’은 우리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훨씬 앞섰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출처: 동아일보

생활을 바꾼, 21세기 최고의 발명품은 무엇일까요?

기혼여성이나 혼자 사는 자취생들은 ‘물티슈’라고 대답합니다. 물티슈 2~3장을 발바닥 아래 깔고 이리저리 오가며 청소하거나 기저귀를 간 뒤 물티슈로 아기의 엉덩이를 닦아주고, 여성들은 화장용 물티슈로 세안을 대신합니다. 황사와 미세먼지 영향으로 청결을 유지하기 위한 용도로 물티슈는 없어서는 안 될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물티슈는 99% 이상이 물이지만 제품의 변질을 막기 위해 함유된 방부제 등이 나머지 1%에 포함된다고 합니다. 피부에 자극을 일으키거나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네요. 한국소비자원은 개봉 후 1~3개월 이내에 최대한 빨리 사용해야 미생물 번식으로 생기는 2차 오염을 막을 수 있다고 전합니다.

글 / 이재은 뉴스큐레이터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1. 특허청 ‘페친’선정, ‘인류를 바꾼 최고의 발명품’ 톱 10
중앙일보, 2019.3.29. (자세한 내용 보기▶)

2. 네티즌이 뽑은 세계 최고의 발명품 10
뉴스웨이, 2018.5.22 (자세한 내용 보기▶)

3. 10 Important Inventions of the 20th Century
Toptenz, 2010.9.9 (자세한 내용 보기▶)

4. 21세기 자취생의 발명품 물티슈?
아시아경제, 2018.5.23 (자세한 내용 보기▶)

5. 한국 최고의 발명품은 ‘훈민정음’
동아일보, 2017.5.19 (자세한 내용 보기▶)




원도심이 젠트리파이어를 맞이할 때 – 싸리재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자체나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하게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날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몇 년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젠트리피케이션은 무척 익숙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새롭게 떠오르는 가게나 거리가 SNS에 올라오면 그곳을 쫓아 유행을 즐기면서도, 사람과 가게가 사라지고 새롭게 생기는 일들이 거듭 반복되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이 거리의 색깔이 남아있을지를 생각합니다. 서울의 오래된 주거지역들엔 짧은 기간 동안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트렌디한 상업화’의 파도가 덮치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홍대에 인접한 상수동과 연남동이 파도에 휩쓸렸습니다. ‘경리단길’로 유명한 이태원과 공장이 많던 성수동이 그 뒤를 이었고, 망원동, 후암동, 익선동 등의 주거지가 어김없이 먹거리와 작은 상점으로 변화하면서 유행의 최전선에 도달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지방 도시들도 이러한 트렌드에 합류했습니다. 과거 ‘육군중앙경리단’이 인접하여 이름 붙여진 ‘경리단길’을 따라서 부산의 ‘해리단길(해운대+경리단길)’, 전주의 ‘객리단길(객사길+경리단길)’, 수원의 ‘행리단길(행궁로+경리단길)’, 경주의 ‘황리단길(황남동+경리단길)’ 등이 무수히 생겨났습니다. 인천 부평에 ‘평리단길’이라고 붙여진 골목에도 다양한 카페와 음식점 등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최근 원도심 지역에서도 새로운 흐름과 변화가 조금씩 감지되고 있습니다. 개항장 일대를 중심으로 카페나 음식점 등이 생겨나지만, 최근 사람들의 관심 끄는 이야기는 대체로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년 전 여름, 이태원의 한 거리에 다양한 음식점을 열며 성공한 한 외식 사업가가 개항장 내동에 두 개의 음식점을 열게 되면서 동인천이 언론에 잠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봄부터 민간 사업자를 중심으로 한 도시재생그룹이 창립되자 인접한 싸리재의 몇몇 폐건물에 식당과 갤러리 등이 생겨났습니다. 블로그나 SNS 등에서 해당 가게들은 이미 유명명소가 되었고, 싸리재에서는 해당 도시재생그룹 이외에도 창업한 상점들이 일부 포착되고 있습니다.

한때 인천 최고의 번화가였던 경동 거리가 쇠퇴하고 다시 활성화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염려와 우려의 시선들이 오가며 이에 대한 근거들도 분명합니다. 인천의 주요 일간지에서 연재 기사로 다룬 내용에 따르면, 2006년부터 2018년 말까지 경동의 상업·업무용 건물의 매매 103건 중 42%인 44건이 2017년과 2018년 사이에 집중되었습니다. 또한 이 일간지가 최근 거래된 건물 중 소유주를 파악한 20개의 건물에서 4곳을 제외하고는 타 지역의 개인이나 법인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지역이 활성화되어 부동산 가격이 상승했을 때, 부동산을 매각하며 단기 이익을 낼 가능성에 대해서 우려하는 이유입니다.

 
 
가구점이었던 기존 건물에 뉴트로한 분위기의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서면서 변화한 싸리재 골목
(좌) 2017년 11년 경동거리 (참고:네이버 지도), (우) 2019년 4월 경동거리

쇠락했던 싸리재 골목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우려는 가로 활성화의 영향으로 현재 상점의 임대인, 인근 주거지의 거주자들이 타의적으로 이주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홍대의 높은 임대료를 피해서 음식점, 카페, 술집이 상수동 주택가로 옮긴 경우와 마찬가지로 익선동의 낡은 도시형 한옥에 도시재생 스타트업 기업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그곳에 머문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상업화된 익선동에서 누군가는 그곳에 생동감을 얻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집을 빼앗겼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싸리재의 미래도 그럴 수 있다는 염려도 이런 경험에서 시작됩니다.

싸리재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도시재생그룹은 이러한 우려에서 비켜나는 부분이 어느 정도 있습니다. 싸리재는 주거지 한복판으로 상업시설이 밀려든 상수동이나 익선동보다 낙후하였지만, 기존 상권이 남아있어, 거주자 축출로 이어지는 젠트리피케이션 굴레가 비교적 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익선동이나 연남동 등에서 ‘세탁소, 문구점 등 주민편의시설이 사라지는 대신 카페와 펍이 들어서면서’ 동네 주민들의 기본생활권이 붕괴되었지만, 싸리재는 가구점 위주의 상권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젠트리피케이션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산부인과 건물을 개조하여 만든 카페겸 전시공간
(좌)2017년 11월(참조 : 네이버 지도) (우) 2019년 11월 상가건물

표면적으로 지역 내 노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시 등을 통해 노포와의 공존을 내세우는 싸리재의 도시재생그룹은 최근 레트로 유행을 따르면서 오래된 지역의 물리적 환경만을 취하여 지역의 성격을 바꾼 여타 지역의 도시재생 민간기업과는 차별되는 점입니다. 젠트리파이어가 기존의 상권과 공존하려는 시도는 서울의 많은 지역의 실패와 대비되는 부분입니다. 서울의 많은 지역에서 젠트리파이어들은 거리에 색깔을 바꾸고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그로 인해 기존의 상점은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젠트리파이어들조차도 장기적으로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다른 지역으로 떠나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들이 떠난 자리는 높은 임대료를 지출할 수 있는 프랜차이즈 상점이나 병원 등으로 대체되었고, 결국 거리는 다시 몰개성화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싸리재의 도시재생그룹이 자신들의 새로운 가게를 늘려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역의 노포들을 발굴하고 알리려는 것은 장기적으로 거리의 개성을 유지하는 전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샤론 주킨의 표현을 빌리면 ‘정통성’을 가지려는 것이죠. 이들이 이 지역의 역사와 노포를 강조하고 도시재생그룹의 대표 스스로가 이 지역 출신임을 강조하는 것 또한, 지역의 역사적 맥락과 연결을 생각하되 단기적인 이익에만 목표를 두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싸리재의 도시재생그룹이 ‘뜨는 동네’에서 단기적인 시세 차익을 노리는 외부 투자자들과 일견 다른 면모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싸리재가 또다른 익선동과 연남동이 될 수 있다는 지역 사회의 우려는 당연합니다. 이 그룹은 이미 해당 지역에 20여 개의 건물을 구입하여 지역재생에 활용하고자 합니다. 젠트리파이어들이 임대 상인으로 지역에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투자자들과 협력하여 건물을 구매하는 것은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오랫동안 머물기 위한 긍정적인 해석으로 볼 수 있지만. 이와는 달리 거리 활성화를 통해 차익을 더 크게 얻으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지역사회도, 도시에 관심을 두는 외부인도, 어쩌면 싸리재의 도시재생그룹 또한 전자를 바랄 수 있지만, 미래의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기존의 노포들과 공생하겠다는 목표는 어쩌면 이들의 손을 떠난 문제입니다. 가로가 활성화되어 땅값이 상승할 때, 노포들의 임대료를 올리는 것은 해당 건물의 토지주와 노포 상인 간의 문제이며 도시재생그룹이 이해당사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낙후한 거리에 자본이 빠르게 투입되었을 때, 지방자치단체의 선제 역할과 제도적 방편이 필요합니다. 건물이 매매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임대 상인들이 권리를 보호받는지, 새롭게 들어서는 상점이 거주민들의 삶의 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낡은 건축물들을 철거하거나 개조를 할 때, 보존하여야 하는 건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인근 임대료가 함께 상승하면서 임대 상인들이 무분별하게 축출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 관찰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지방자치단체의 몫입니다. 성수동의 사례에서 보듯 지방자치단체는 조례를 통해 임대료 상승을 억제하거나 계약 기간을 보장하는 방편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화여대 앞의 경우처럼 지방자치단체의 주선으로 지역의 토지 및 건물주들이 무분별한 개발과 급격한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지 않도록 단체를 조직하여 거리의 개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낙후된 지역에 젠트리파이어들이 진입하여 ‘뜨는 거리’가 되면, 그것은 분명 황금알을 낳는 거위일 수 있으나, 급등하는 지가에 따라 임대료가 올라가면서 유명한 프랜차이즈 카페가 입점하는 것은 거위의 배를 가르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인천시가 오래된 가게를 발굴하여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개발하는 계획을 세우고 아울러 자문위원회와 싸리재 주변 근대문화유산을 활용한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 방지를 위한 TF팀을 구성하는 것은 매우 반가운 소식입니다. 차이나타운과 개항장 일대에서 인천의 근대 모습을 간접적으로 경험하였듯 인접해 있는 싸리재가 산업화 시대에 인천 원도심의 오래된 기억과 가치를 가장 트렌디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글/ 김윤환(도시공간연구자, 건축사)
사진/ 이진솔 (정책연구팀)

[참고문헌]

김다윤, 김경민, 김건 (2017). 주거지 상업화 젠트리피케이션이 빈곤밀집지역에 끼치는 영향. 서울도시연구, 18(2), 159-175.
김준우, 김용구, 전동진 (2018). 신포동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한 연구. 인천학연구, 29, 303-320.
윤혜수 (2016). 새로운 소상공인의 취향과 공간적 실천. 문화와 사회, 227-281
“[인천 싸리재 리포트·(1)자본 유입 우려 시선]외부자본의 힘, 쇠퇴한 경동거리 흔드나.” (경인일보 2019. 3. 27. 8면)
“[인천 싸리재 리포트·(2)변화를 이끄는 사람들]민간 주도 ‘개항로 프로젝트’ … 도시재생 실험 도전장” (경인일보 2019. 3. 28. 8면)
“[인천 싸리재 리포트·(3끝)우려의 시선들]지역가치 훼손 막을 ‘안전장치’ 서둘러야” (경인일보 2019. 4. 1. 7면)
“개항기 번화가 ‘싸리재’ 다시 주목받는다” (경인일보 2019. 4. 5. 1면)
“오래된 가게, 손때 묻어나는 ‘스토리텔링’” (경인일보 2019. 4. 11. 3면)




내가 만난 ‘빠빠라기(하늘을 찢고 온 사람)’

완벽한 인공도시

“이렇게 멋진 집에서 산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너무 행복해요!”
“꿈을 드디어 이루었어요”

거대한 스크린에선 행복에 흠뻑 취한 사람들이 계속 등장한다. 이들에게 세상은 완벽하고 아름답다. 꿈꾸던 행복을 금방이라도 잡을 것만 같다. 집을 구경하라며 여기저기서 웃으며 손짓하는 사람들을 지나 일단 화장실로 도망친다.
이곳은 조호바루(Johor Bahru)의 포리스트 시티(Forest City)다. 포리스트 시티?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땐 숲이 가득한 자연 친화적인 에코 도시로 생각했다. 오늘 아침 머물고 있던 마사이 지역에서 그랩(말레이시아 콜택시)을 타고 40분을 달려 포리스트 시티에 도착했다. 기대를 안고 중앙 건물로 들어선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로비에 설치된 도시 모형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아파트와 콘도가 즐비하다. 게다가 여러 건물엔 새빨간 SOLD OUT 스티커가 붙었다. 물론 거대한 아파트와 콘도가 들어선 도시 모습이 낯선 건 아니다.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는 한국 신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설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리스트 시티’의 도시계획은 규모부터 남다르다. 아니 도시 계획이라기보단 마치 새로운 국가 건설처럼 느껴진다. 촘촘하게 들어선 높디높은 건물들, 쇼핑몰, 국제학교, 그리고 도시 조경까지 완벽하게 계획된 모습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이 건설된 땅조차 거대한 바다를 메워 만들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말레이시아 조호 술탄은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목적으로 바다를 메꿔 아파트와 콘도, 빌라 등 새로운 고급 주거지역을 건설하고 이를 외국인에게 팔고 있다고 한다. 이곳의 아파트 가격은 평범한 말레이인들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비싸다. 물론 많은 말레이인이 이에 반대했었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자기 나라에 들어와 자신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호화 아파트를 짓고 이들만의 삶을 따로 건설해 사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한편에는 이들이 조호바루에 돈을 투자해 경제가 활성화되는 걸 환영하는 사람들도 많다.

‘포리스트 시티’ 도시 모형

포리스트 시티 아파트들

‘포리스트 시티’의 가장 큰 고객은 중국인이다. 중국계 말레이인이 아닌 중국본토에서 온 중국인들이다. 한국인들도 10% 정도 된다고 한다. 이곳에는 국제학교도 많다. 방금 구경한 모델하우스는 더욱 이상하다. 부엌에는 플라스틱 음식 모형에 인조 꽃, 그리고 말레이시아에서 머물며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수입 토마토 깡통 수프, 이태리 요리책이 펼쳐져 있다. 테이블 장식 또한 굉장히 가식적이다. 테이블엔 묵직한 접시 중 냅킨, 양초와 꽃병이 놓여져있고 물론 포크와 나이트가 함께 세팅되어있다. 더욱더 놀라운 건 ‘포리스트 시티’에선 집을 살 때 모델하우스에 전시된 소파, 티비, 세탁기, 장식장 등 모든 가구를 함께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오는 사람들은 각자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 오면 된다. 번거롭게 가구를 사고 집을 가꾸는 데 노력을 하는 대신 돈만 내면 편하게 모델 하우스 같은 집에 들어가 살게 되는 것이다.

 
조호바루에 건설되는 신도시 모델 하우스 장식 중

누군가에 의해 완벽하게 설계된, 완벽하게 장식된 곳에서 모두가 똑같은 삶을 산다고 상상하니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이건 초호화 감옥이 아닌가. 누군가 만들어준 공간에 편하게 몸만 들어가 서 살면 되는 곳,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수많은 아시아인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또 씁쓸했다.
‘포리스트 시티’는 말레이시아지만 싱가포르에서 얼마나 가까운지 끊임없이 광고한다. 말레이시아보다 싱가포르가 훨씬 커다랗게 그려진 지도에선 이곳이 싱가포르인지 말레이시아인지 헷갈린다. 또한 ‘포레스트 시티는 싱가포르보다 얼마나 저렴하게 집을 살 수 있는지 끊임없이 광고한다. 도대체 이곳 사람들은 왜 이렇게 싱가포르에 집착할까? 조호바루를 단지 싱가포르에 붙어있는 도시로밖에 말할 수 없는 걸까? 그뿐만 아니라, 이곳엔 국제학교가 있어 아이들 교육에도 적합하다며 아이를 둔 가족들을 유혹한다. 나로선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수많은 광고를 보며 도대체 이곳 사람들이 생각하는 조호바루의 정체성이 무엇일지 의문이 들었다. 한편으론 아시아인들의 서구를 향한 왜곡된 열망을 적나라하게 보는 듯해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도대체 서구 문명이란 무엇이길래 말레이시아인들에겐 어색한 나이프와 포크, 이태리 요리책과 토마토 캔으로 우스꽝스럽게 집을 장식해야 하는지, 왜 국제학교에 이토록 목을 매는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일하고 놀아야 하는지, 무엇이 과연 올바른 가치인지, 수많은 감정이 오고 갔다.

싱가포르가 훨씬 커다랗게 그려진 말레이시아 조호바루 지도

한편 이런 혼란스러운 감정 한가운데서도 이렇게 예쁜 집을 내 취향대로 가꾸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는 내 모습도 있었다. 이곳이라면 한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좋은 집을 저렴하게 살 뿐만 아니라 풍요롭고 여유롭게 지낼 수 있으니 마음이 흔들린다. 무엇보다 집 가격이 한국보다 너무나 저렴했고 광고처럼 싱가포르까지 40km, 30분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가 무척 매력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끊임없이 소리치는 것처럼 싱가폴에서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널찍하고 조용한 조호바로에 집을 짓고 사는 상상을 하니 또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치는 반나절을 보내고 나니 배가 너무 고팠다. 결국 우리나라의 수제비 같은 미 훈 꾸웨(mee hun kueh)를 허겁지겁 먹고 배탈이 나버렸다.
기이하고 완벽한 인공도시, 내가 느낀 포리스트 시티의 모습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타박만 하기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안락한 삶의 욕망을 무의미하게 넘겨버릴 수 없다. 포리스트 시티에서 서구 문명을 향한 아시아인의 욕망을 마주하니 작년 겨울 모로코(Morocco) 북부 물레이 이드레스(Moulay Idris) 에서 만난 한 영국 여인이 떠오른다.

모로코에서 만난 붉은 머리 영국여인

모로코 물레이 이드레스에서 만난 중년의 붉은 머리 영국 여인, 그녀는 모로코를 사랑했다. 그녀는 물레 이드레스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곳이라 끝없이 찬양했다. 물론 물레 이드레스로 가는 길은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할 정도로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나 순수하다니…? 이들의 거칠지만 천진할 정도로 뻔뻔한 모습, 다른 면의 순수함(?)을 이야기 하는 건가?
숙소에서 처음 만난 그녀와 점심을 함께 하기로 하고 카페로 갔다. 그녀는 모로코 남자들만 앉아 있던 카페에서 혼자 나를 기다렸다. 그곳에 있던 유일한 백인 여자이다. 물론 이슬람인이 아닌 그녀가 카페에 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슬람 남자들만 있는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며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이곳의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레이 이드레스로 향하는 길목

물레이 이드레스 골목 길

그녀는 모로코 사람들이 너무나 순수하며 도시가 자유로운 영혼으로 가득 차 있다고 거듭 말했다. 자신이 조금만 젊었다면 이곳의 남자와 데이트를 했을 거라 아쉬워했다. 하긴 영국에서 짧지 않은 유학 생활을 보내고 여러 유럽인과 작업을 하며 만나 온 그들을 생각하니 그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난 종종 영국인들의 친절을 퍼포먼스형 친절이라 놀리곤 했다. 사람들 앞에선 맛이 없어도 맛있는 척, 반갑지 않아도 반가운 척, 원하지 않아도 원하는 척,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엔 이 모든 걸 거추장스러워하는, 다 내려놓고 편하게 지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사회적 압박감이 있다고 느꼈다. 물론 모든 사회에서 공공예절이란 게 있지만, 특히나 영국에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예의 바르고 유머러스하고 어색하지 않게 끊임없이 대화를 유도하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부담이 크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런 그들이 모로코에선 완전히 다른 상황에 마주한다. 사람들은 대놓고 보이는 거짓말을 하며 대가를 바란다. 열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귀찮을 정도로 정도로 말을 시킨다. 동시에 친절하게 짐을 들어주고 택시 잡는 걸 도와준다. 이국적인 음식이 넘치고 쓰레기는 사방에 널려있다. 당나귀와 사람, 오토바이가 함께 섞여 다닌다. 거리는 거칠고 시끄럽고 온갖 냄새로 진동한다. 그러나 동시에 눈이 부시게 찬란한 자연을 보며 이곳이 순수하고 자유롭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처음엔 거친 모로코 거리가 매우 설렜다.

아름다운 물레이 이드레스 풍경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난 답답하고 불편해졌다. 그녀는 모로코가 더 발전되지 않고(그녀의 말에 따르면 망가지지 않고) 이 순수한 풍경을 계속 지켜졌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말했다. 왜? 왜 많은 모로코인이 오래된 집을 좀 더 현대적으로 고치면 안되는거지? 왜 더는 항구가 생기면 안 되는 거지? 어린 아이들이 종일 길에 앉아 물건을 팔지 않아도 되고, 더 관광객들에게 처절하리만큼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나라로 변모해야 하는 거 아닌가? 좀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좀 더 국제적인 매너를 갖춘 현대화된 모로코는 왜 안 되는 거지? 모로코도 가난을 벗어나고 발전해 나가야 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그녀는 영국인이지만 프랑스어를 잘 구사하고 유럽의 여러 문화를 즐겨왔다. 깨끗한 집에 살며, 좋은 음식을 먹는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멋있게 산다. 물론 몇 달씩 일을 안 하고 모로코에서 지내도 될 만큼 여유롭기도 하다. 그녀는 유럽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모로코에선 또 유럽과는 다른 순수하고 거친 자유를 맛 보고 싶어 한다. 그녀에게 모로코는 유럽처럼 국제적으로 발전되어서도 안 되고 , 항구에 무역항이 생겨 바다를 망가트려서도 안 되고, 있는 그대로,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아니 지금보다 더 순수했던 십여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녀와 친하게 지내는 모로코 남자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평소보다 비싼 가격을 주고 음식을 먹었다. 그녀는 친절한 그들에게 계속 고마워했다. 외로워 보였고 내 마음은 쓸쓸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처음으로 버스를 탔다. 한 시간 여 만에 도착한 버스엔 사람들이 아귀다툼으로 몰려들었다. 난 그들 사이에 껴서 거의 압사당할 뻔했다. 심지어 버스에는 모두가 다 앉아서 갈 수 있을만큼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왜 이렇게 아수라장이 되어야 하는지, 왜 이렇게 밀쳐야만하고 왜 모든게 어수선해야만 하는지..매일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상상하니 가슴이 답답해 터질것 같았다.

물레이 이드레스에서 탄 버스안

“이곳은 ‘문명화’ 되지 않아 순수하네.”
중국을 여행한 프랑스 친구가 농담처럼 했던 말이다.
“우와 여기는 꽤 문명화됐는걸?”

역시 태국을 여행한 영국 친구가 한 말이다. 난 그들이 이런 식으로 식민지배의 당위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버럭 화를 냈었다. 그러나 모로코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난 이들의 뻔뻔한 거짓말에 지쳤고 아수라장이 된 거리 모습을 보며 ‘문명화’란 단어에 어느 정도 공감하기 시작했다. 이런 내가 잘못된 걸까? 단지 문화 차이인 걸까? 문명, 문명화(Civilization)란 과연 뭘까? 과연 적절한 단어일까? 문명화란 단어를 생각하다 보니 시간은 이제 지난겨울에 다녀온 말레이시아 말라카로 넘어간다.

아름다웠던 물레 이드레스 풍경을 걸으며

말라카의 식민주의 그림자

말라카에선 길을 걷는 게 즐겁다. 오래된 유럽식 건물에 쓰인 한자가 꽤 이국적이다. 붉은 등 아래를 장만옥이 유유히 걸어오는 상상에 빠진다. 유럽의 뒷골목을 걷는 듯, 차이나타운을 걷는 듯, 그저 길을 걷는 게 즐겁다.

말라카 거리를 걸으며

붉은 등이 걸린 말라카 거리

말라카를 칭하는 수많은 수식어 중 ‘아시아 최초의 유럽 식민지’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16세기부터 시작된 포르투갈 침입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다시 일본까지 400여 년에 이르는 식민역사를 보고 있자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 때문에 말라카가 유명한 관광도시가 된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전 세계에서 이 침략의 흔적(?)을 찾아 말라카를 방문한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통치 시절 유적들은 인기 있는 관광상품이다. 포르투갈인들이 지은 성곽 ‘에이 파모사(A’ Famosa)’와, 세인트 폴 성당, 그리고 네덜란드 광장엔 항상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말라카에 들어오고 나서 그 후에 네덜란드인과 전투를 하고 또 영국인들이 들어와 어떤 일이 일어났고, 마지막으로 일본인들이 들어오고 또 어떤 일이 생겼고…수많은 이야기가 들려온다. 많은 사람이 말라카를 침략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일본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이들이 어떤 건축물을 남겼고, 어떤 일을 했고, 말라카가 왜 전략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었는지 이야기한다. 궁금했다. 기나긴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 말레이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몇 세대를 거쳐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 이들의 삶, 이들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찾기 힘들 걸까?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실감이 안 가는 건가? 종교적 관용으로, 혹은 용서의 마음으로 모든걸 잊은 걸까?

포르트갈인들이 지은 성곽 에이 파모사

1511년에 지어진 에이 파모사 성 앞에서

영국 식민지배 시절 시작된 바바뇨냐(BaBa NyoNya) 문화가 관광상품의 하나로 주목받는 점도 흥미롭다. 뇨냐는 중국인과 결혼한 말레이 여성을 칭하는 말로 중국 남성과 말레이 여성의 결합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냈다. 중국과 말레이 전통이 오묘하게 결합한 의상, 중국과 말레이 음식이 변형된 뇨냐음식은 매우 인기다. 독립운동가의 박물관은 찾기 힘들지만 바바뇨냐 박물관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처음엔 중국인 남성과 말레이 여성이 결혼해 만든 문화가 뭐가 그리 특별한 건가?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의아했다. 그런데 이런 문화가 만들어진 건 영국이 통치하던 시기였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당시에 이슬람이 국교가 아니었기에 말레이 여성이 중국인과 결혼해도 이슬람 전통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 현재 독립된 말레이시아에선 중국 남성이 말레이 여성과 결혼하면 이슬람으로 개종을 해야 한다. 말레이 여성이 이슬람을 포기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종교가 두 인종 간의 결합을 막는 셈이다. 지금 현존하는 바바뇨냐들은 아마 몇십년 후면 사라질지도 모른다. 뇨냐 여성은 말레이 여성이지만 이슬람인이 아니다. 돼지고기가 들어간 뇨냐 음식을 만들고 타이트한 뇨냐 전통 의상을 입는다. 이들의 문화가 앞으로 몇십년 후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하니 아쉬웠다. 아이러니하게 말레이시아는 식민시절에 더 자유롭고 풍요로웠다고 하면 큰 오해일까?

노냐 음식을 팔던 레스토랑

인형사이즈로 만든 뇨냐 의상

빠빠라기는 누구일까

말레이시아의 조호바로와 모로코의 물레 이드리스, 그리고 다시 말레이시아 말라카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빠빠라기(하늘을 찢고 온 사람)’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빠빠라기’는 남태평양 사모아 제도의 투이아비 추장이 유럽을 방문하고 돌아와 원주민들에게 백인 문명에 관해 이야기한 책이다. ‘빠빠라기’는 추장이 만난 백인을 칭한다. 오래전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던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부터 흰 돛배를 타고 도착한 백인들이 투이아비 추장에겐 마치 ‘하늘을 찢고 온 사람’처럼 보인 것이다. 그는 서양문명에 대해 경이감을 느꼈다기보다는 오히려 환멸과 분노를 느꼈다.

21세기를 사는 나는 과연 문명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사모아 제도의 투이아비 추장처럼 내가 사는 문명에 관해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번 겨울 조호바로의 포리스트 시티를 둘러보며 아시아인들의 서구사회를 향한 왜곡된 열망이 가득 찬 모습을 마주했다. 거대한 자본으로 포레스트 시티를 사들이고 세계 곳곳에 투자하는 중국인의 모습, 그러나 마냥 비판만 하기엔 내 마음 깊은 곳엔 나 역시 안락한 삶을 원하는 욕망을 숨길 수 없었다. 포리스트 시티의 거대한 자본에서 난 빠빠라기의 모습을 보았다. 모로코 물레이드레스에서 만난 붉은 머리 영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순수 문명이란 무엇인지, 과연 순수한 문명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래전 하늘을 찢고 사모아 섬에 도착한 빠빠라기처럼 모로코가 티 없이 순수하다고 예찬하는 그녀는 어쩌면 모로코인들에게 빠빠라기 일지 모른다. 물론 말레이시아 말라카를 침략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인들은 그 시절 말레이인들에겐 빠빠라기였다. 그러나 여전히 식민시대의 흔적이 관광 상품화되어 전 세계 관광객을 맞이하는 말라카엔 그 시절 빠빠라기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사모아 섬의 추장 투이아비가 본다면 그의 눈에는 우리가 또 하나의 빠빠라기로 비치지 않을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이미 빠빠라기가 되고 말았다.

나는 지난 2년간 틈틈이 지구 반바퀴를 둘러보았다. 사하라와 애틀란스 산맥 같은 대자연을 넘나들며 느낀 대자연과 인간의 경계, 이슬람 국가 모로코에서 난생처음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고민한 문명의 경계, 인도네시아 발리와 다민족 국가 말레이시아를 여행하며 느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통해 아시아인으로 느낀 21세기 문명과 문명화란 무엇인지 질문한다. 변화하는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21세기의 보통 사람의 모습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한다. 이는 곧 21세기 모던 아이덴티티, 그리고 역사적으로 예술가에게 주어진 가장 오래된 질문, 나는 누구인가, 곧 당신은 누구인가에 관한 나의 작업이기도 하다.

‘다른 원주민들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어린아이처럼 그저 감각과 순간 속에서 살고 있을 때 사모아의 추장 투이아비는 맑은 이성의 눈으로 자연과 인간을 그윽이 바라보고 있었다. 선교사를 통해 빠빠라기(백인, 문명인)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았고, 성년이 되어 빠빠라기들의 나라를 직접 보고 돌아온 추이아비 추장은 원주민 동포를 향해 그 이상한 나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빠빠라기>(투이아비 저) 중에서-

이승연, ‘모로코에서 만난 영국여인의 초상’, 150x150cm, 2018
모로코에 다녀와서 만든 타피스트리1

그녀의 눈에 가난하고 어지러운 모로코는 순수, 그 자체로 보인다. 그녀는 모로코가 변화 발전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모로코에 와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기로 변신했다.

이승연,’놈모의 여왕’,150x150cm, 2018
모로코에 다녀와 만든 타피스트리 작품2

아프리카의 신 놈모과 유럽여왕이 만났다. 모로코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위성 안테나는 유럽을 향한다. 아프리카는 뒤처졌고 유럽은 앞섰을까? 놈모는 아프리카의 도곤족에 등장하는 우주에서 온 신이다.

글/ 이승연
사진/ 저기요 스튜디오

이승연(Seung youn LEE)
고대사와 신화, 또는 상상의 극한을 보여 주는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고대’라는 재료를 갖고 미래를 얘기한다. 최근에는 물리학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드로잉을 기반으로 철과 나무, 패브릭,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작업한다. 2012년에서 2017년까지 영국인 알렉산더와 ‘더 바이트 백 무브먼트’ 아티스트 듀오로 활동했다. 당시의 신화적·종교적·사회적 관심은 개인작업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영국 서머싯 하우스, 국립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 문화역서울 284, 영은 미술관, 켄 파운데이션, 베를린 ZK/U, 등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처럼 영원히 남을 작업을 꿈꾼다.
페이스북: (바로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