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과 할머니

함흥 운흥리, 용숙씨
베를린에 오기 전 경기도 하남의 할머니집을 찾았다. 우리 할머니 이름은 김용숙, 고향은 함흥이다. 나는 이름밖에 알지 못하는 곳, 북한 함흥.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함흥에서 살았던 집 기억나?

“그럼, 기억나지. 함흥 운흥리! 아주 큰 집이었어. 이짝 동쪽 대문으로 들어오면 소나무, 과일나무가 있고, 아름답게 만든 정원이 있고, 그리고 가운데 이짝으론 마루가 있고 창문을 열면 아까 그 정원이 보이고, 왼쪽에는 다다미방,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있었어. 커다란 마루에서 밖을 바라보면 앵두나무, 소나무, 포도나무가 보였어.”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할머니는 큰 집에서 산다. 근사했던 북한 집과 달리 남한 집은 동네 집장사가 지은 탓에 건축비보다 수리비가 더 많이 들어갔지만…
할머니가 함흥을 떠나 남한으로 온 건 겨우 스무살 때 일이다.

“따라랑 따라랑 6.25 나가지고 흥남에서 배 타고 왔어. 1.4 후퇴 때 말이지. 미군들이 함흥까지 들어왔다가 다시 후퇴를 하면서 피난민을 다 배에 실었어. 배에 다 실어가지고 거제도에 내려놨어. 피난 나왔다가 바로 돌아간다 생각했지. 다 같이 피난갈 이유도 없었고, 원래는 내가 남기로 했는데, 아버지가 나도 같이 가자고 그러더라고. 집 지켜야 한다고 동생 두 명은 집에 남았어. 친척이나 친구들? 가들은 다 안 나왔어.”

따~라앙랑 따~라앙랑,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퀴리부인처럼 여성 화학자가 되고 싶었던 우리 할머니 용숙씨는 어느날 갑자기 고향을 등지게 된 일이 어이없는지 따라랑 따라랑, 전쟁을 신나게 표현한다.

베를린ZK/U레지던시에서 지내다보니 통속적이지만 북에서 피난 온 할머니와 동서로 분단되었다 통일된 베를린 역사가 겹쳐보인다.

“바로 다시 돌아갈 줄 알았지!”

할머니가 맨몸으로 남한에 나온 이유다. 하지만 결국 할머니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선을 자신도 모르는 새 넘어버렸다. 여든여섯 할머니가 함흥 운흥리에 다시 갈 수 있을까 모르겠다. 베를린에 온 지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아직 베를린 장벽에 가보지 않았다. 오늘은 왠지 그곳에 가봐야 할 것 같은 날이다.

 

너무 낮지만 견고한 장벽
유치하고 단순하다. 장벽과 철조망이란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휴전선과 마찬가지로 베를린 장벽은 벽을 세워 동독과 서독을 분리했다. 너와 내가 다르니깐 나는 여기 살고 너는 저기 살란 식 아닌가? 마치 초등학교 때 책상에 선을 긋고 짝꿍에게 넘어오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동서독 분단 시절, 동독에 위치한 베를린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었고 결국 서베를린은 동독에 완전히 둘러싸인 섬 신세가 돼버렸다. 우리나라로 치면 평양의 절반에 남한사람들이 산다는 거 아닌가? 당시에는 서베를린을 공산주의 국가인 동독 안의 자본주의 국가, 서독 지역이란 이유로 ‘육지 속의 섬’이라 불렀다. 결과적인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독이 서베를린을 포기하지 않은 건 서독에 이롭게 작용했다. 장벽 저 편에서 높게 세워지는 빌딩들을 바라보며 동독사람들은 서독의 풍요를 부러워했고 많은 동독 사람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다. 누군가는 성공했고 누군가는 총을 맞고 쓰러졌으며, 긴 세월이 흐른 후 결국 장벽은 허물어졌다. 만약 평양이 절반씩 남북으로 나뉘어 한편에 남한 사람들이 살았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까? 독일처럼 이미 통일을 이루었을까? 통일이 되었다면 어느쪽으로 되었을까 하는 식의 공연한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오스트 반호프(Ostbahnhof)역에 도착했다. 레지던시에서 동쪽으로 40분 정도 떨어진 곳이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걷다 보니 저 멀리 장벽이 보인다. 드디어 왔다.

그런데 막상 장벽을 마주하니 좀 당황스럽다. 왜 이렇게 낮아? 게다가 두께마저 얇다. 낮고 얇은 장벽을 빼곡히 채운 건 전세계 작가들의 그래피티다. 베를린 사람들은 이곳을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1.3k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야외 갤러리다. 도로변이 구동독이고 반대편 슈프레(Sprre.R) 강변 쪽이 구서독이다. 베를린 장벽 뿐만 아니라 수프레 강 역시 동서독을 나누는 국경이었다.

벽을 따라 걷다 보니 장벽에 그려진 그림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장벽 반대편으로 길을 건넜다. 그제야 그림들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여전히 뭔가 아쉽다. 그림이 너무 많고, 그 앞을 오가는 차가 너무 많아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기 어려운 탓이다.

종종 손상된 그림도 보인다. 멋대로 장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훼손하면 안된다는 경고가 무색하게 낙서를 막는 건 쉽지 않은가 보다. 나로선 장벽을 빽빽하게 채운 그림보다 인상적인 건 벽 두께다.

고작 한 뼘 정도 두께다. 수많은 이들이 이렇게 얇은 장벽 때문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니 참 허무하다. 장벽 위는 아치형으로 둥글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장벽 위에는 사람들이 넘을 수 없게 날카로운 철조망이라도 설치해놓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치형의 모양이라 뭔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사람들이 장벽 위를 잡고 넘기 힘들게 하려고 둥글게 만들었다고 한다. 장벽 한편에서는 부서진 베를린 장벽 조각을 판다. 장벽의 잔해라는 돌덩이를 상자에 담아 파는데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곳 베를린 장벽의 다른 이름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다.

과거에 목숨을 걸어야 넘을 수 있었던 장벽은 이제 전 세계 관광객이 찾는 관광지로 변했다. 베를린 시민들은 분단의 상징을 갤러리로 바꾸었다. 독일 사람들이 과거 베를린 장벽과 역사를 간직하고 기억하는 방식이다.

 

신념 또는 맹신
장벽을 보고 레지던시로 돌아오니 건물 앞에 있는 공원에선 늘 그렇듯 터키 아이들이 뛰어논다. 레지던시가 위치한 지역은 베를린 서쪽, 시멘스트라세(Siemensstraße)인데 터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덕분에 주변에는 저렴한 케밥 식당과 터키 수퍼마켓 등이 많다. ZK/U레지던시는 특이하게 공원 한가운데 있어 항상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이곳 베를린 ZK/U 레지던시는 기차역을 개조해 문을 열었다. 과거의 플랫폼은 현재 테라스로 변신했다. 그 때문인지 매일 아침 식사를 들고 나와 테라스에서 먹을 때마다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우연히 흥미로운 사실을 한 가지 알게 됐다. 베를린이 동서로 나뉘었을 때 기차역은 서독에 위치했지만 동독 사람들이 근무했다고 한다. 동독에서 만든 기차가 지나가는 곳이라 동독 사람들이 관리하는 희안한 기차역이었다. 기차역을 가운데 두고 공원이 만들어진 이유다. 공원이 일종의 국경 역할을 한 셈이다. 공원을 지나 도로만 건너면 서독이었다. 레지던시 디렉터, 마티아스 아인호프(Matthias Einhoff)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에 아주 큰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 여기서 일했어요. 이를테면 ‘스트롱 빌리버 (Strong Believer)’들이라 할까? 마음만 먹으면 쉽게 서독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이들은 결코 동독을 떠나지 않았죠. 자기들 체제에 대해 대단한 믿음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머물었던 곳이 바로 이 곳입니다.”

 

베를린의 함흥 할머니
레지던시 건물에서 공원 끝 도로까지는 100m가 채 안 돼 보인다. 과거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거리다. 당시 여기서 일했던 동독 사람들은 매일 서독 사람들을 만나면서, 공원 너머 서독의 모습을 바라보며 동요하지 않았을까? 마티아스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믿음을 가진 ‘스트롱 빌리버’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한편 의아하다. 반대로 서독에서 동독으로, 혹은 남한에서 북한으로 가지 않은 사람들 또한 스트롱 빌리버들 아닌가? 과거 서독 지역에서 동독 사람들이 일하던 기차역에서는 이제 전세계 예술가들이 머물며 작업한다. 동독 사람들이 종일 바라보았을 기차역 앞 공원에서는 매일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치고, 터키 아이와 독일 아이가 함께 뛰어논다.

할머니는 피난을 떠날 때 곧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 자기 의지로 내려왔지만, 곧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경계를 넘었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가 지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걸 알았어도 할머니는 배를 탔을까? 할머니 의지와 상관없이 생긴 경계는 수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건재하다.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나는 할머니에 관한 작품을 만들어 레지던시 건물 지붕에 세우려 한다.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을 지켜보는, 이를테면 어처구니인 셈이다. 나는 런던으로, 베를린으로, 파리로 여행을 다니지만 할머니는 유럽에 와보지 못했다. 허리도 아프고 귀도 잘 안들리는 할머니가 여기까지 직접 올 순 없으니 작업을 통해서나마 할머니를 이리 모시고 와 베를린을 보여주고 싶다.
할머니 모습을 한 어처구니는 함흥에서 온 내 할머니이자 분단된 나라에서 북한을 고향으로 둔 많은 이들의 모습이다. 한편 베를린 사람들에겐 수십년 전 동서독 분단시절을 상기시킬 것이다. 어처구니를 세우고 나면 공원에서 뛰어노는 터키 아이들에게 할머니 얘기를 해주고 싶다. 우리 할머니나 너희들이나 이유가 무엇이건 경계를 넘었구나. 쉽지 않겠지만 경계 또는 국경을 넘은 너희들이 예쁘게 자라기를 기도하겠다고.

 

글ㆍ사진/ 이승연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미래의 이야기를 담은 상상의 작업으로 현재를 신화로서 기록하는 것, 이것이 기이한 듯 보이지만 명랑한 내 작업이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현재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베를린 ZK/U 레지던시에 입주 중이다. 이승연




[큐레이션 콕콕] 걸 크러쉬와 차별 문화

원더우먼은 1941년에 제작된 DC코믹스의 만화 캐릭터입니다. 슈퍼맨, 배트맨과 함께 DC코믹스의 ‘빅3’로 불리죠. 그 슈퍼히어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이 최근 개봉했습니다. 미지의 섬 데미스키라 왕국의 공주 다이애나가 원더우먼이 돼 1차 대전을 겪고 있는 인간 세상을 구한다는 내용입니다. 패티 젱킨스(46. 여)가 연출했네요. CNN은 “여성이 슈퍼히어로 영화의 감독을 맡은 것은 처음이며, 영화의 흥행도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2017.6.6. 조선닷컴) 벌써부터 <원더우먼2> 제작 이야기가 들려옵니다.(자세히보기 ▶)

원더우먼 등장 모습. 사진출처 Youtube 캡처

<원더우먼>은 아마존 데미스키라 왕국의 여성들의 액션을 화려하게 보여줍니다. 35명의 여배우가 6개월 동안 특별 훈련을 받았고, 원더우먼 역을 맡은 배우 갤 가돗은 9개월간의 트레이닝을 거쳐 아마존 전사로 거듭났다고 하네요. 여성 영웅을 단독 주연으로 내세우고 액션에 집중한 영화는 여성 영웅의 가치를 강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만화로 처음 등장한 원더우먼은 강한 힘을 가진 여성 히어로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상징이 되기도 했죠. 남성이 쇠사슬을 걸면 힘을 잃는 무기 등, 일부 설정이 남성의 성적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요.

한국에도 주목받는 여성 원톱 영화가 있습니다. 김옥빈, 김서형 주연의 <악녀>(감독 정병길, 제작 (주)앞에있다) 인데요, 살인병기로 길러진 최정예 킬러 숙희(김옥빈 분)가 자신을 둘러싼 비밀과 음모를 깨닫고 복수에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언론은 <악녀>가 남성보다 더 거칠고 독한 액션을 보여준다고 소개합니다. 숙희는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량 위에 매달리고 남성보다 큰 장검을 휘두르며 액션을 펼친다고 하네요.

영화<악녀> 포스터

이들 영화 소개에 빠지지 않는 단어가 ‘걸 크러쉬’입니다. 걸 크러쉬는 여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멋진 여성을 뜻하는 신조어로, 여성이 다른 여성을 선망하거나 동경하는 마음이나 현상을 말합니다. 소녀(Girl)와 반하다(Crush on)를 합친 단어라고 하네요.

여기서의 선망과 동경은 ‘성적 감정’이 배제된 ‘강한 호감’을 뜻합니다.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은 닮고 싶은 외모와 뛰어난 패션 감각과 센스, 지성 등을 갖추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일반 여성들의 롤모델이 됩니다. 흔히 대상이 가수일 경우에는 ‘허스키한 보이스와 강렬한 퍼포먼스’로, 연기자일 경우에는 ‘센 언니’ 등의 표현으로 걸 크러쉬와 매치하고 패션 분야에서는 ‘걸 크러쉬를 원한다면 투블럭 숏컷’으로 홍보합니다. 걸 크러쉬와 비슷한 단어로 ‘남성이 남성에게 갖는 동경과 찬양’의 의미를 가진 ‘맨 크러쉬’라는 용어도 있다네요.

최근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 씨가 펴낸 책 <영초언니>는 박정희 정권 후반기인 1970년대 중후반, 소위 ‘운동권’에 몸담았던 이들의 젊은 날을 그린 작품입니다. 자전적 논픽션 에세이로, 등장인물이 모두 실명을 쓴 실제 인물이라고 합니다. 제목의 영초언니는 저자의 <고대신문> 4년 선배였던 천영초로, 그를 소개하는 기사에도 ‘걸 크러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오마이뉴스 2017.6.11. 자세히보기 ▶)

“천영초는 1970년대 중·후반 운동권의 상징이었던 인물이다. 그녀는 서명숙과 후배들에게 ‘걸 크러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박정희 독재정권과 남성 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토론하고, 저항하고, 행동하는 여학생들의 서클 ‘가라열’의 리더였다.”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서 저항하고, 행동했던 여자. ‘걸 크러쉬’는 외모나 캐릭터를 동경하는 선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이렇게 ‘아픈 기억’에도 소환됩니다. 

‘걸 크러쉬’이미지, 사진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앞서 <원더우먼>과 <악녀>를 언급했지만 여자가 주인공으로 ‘앞에 섰기’ 때문에 무조건 좋은 영화, 괜찮은 영화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성 영화제는 있는데 왜 남성 영화제는 없느냐’, ‘많은 히어로 중 하나일 뿐인데 왜 원더우먼에 그렇게 열광하느냐’는 남성들(?)의 질문은 악의 없음을 감안해도 충분히 나이브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만 년 전, 지구에는 호모 사피엔스뿐만 아니라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 등 최소 6종의 인간 종이 살아있었습니다. 이후 호모 사피엔스가 유일한 승자로 살아남았고, 그들이 현생인류 ‘인간’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려줍니다.

사피엔스,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알려진 모든 인간사회에서 최고의 위계질서는 성별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곳에서 남자가 더 좋은 몫을 차지했죠. 많은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 남녀 간의 문화적, 법적, 정치적 차이 중 일부는 성별에 따른 생물학적 차이를 반영한 것입니다. 출산은 여성의 일이었고(여성에게만 자궁이 있었고), 사회는 이런 사실 주변에 문화적 개념과 규범을 층층이 쌓아올렸습니다. 하지만 하라리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 또는 차별이 ‘생물학적 근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민주사회에서 자궁을 가진 개인(=여자)은 법적 지위를 갖지 못했습니다. 판사는커녕 평의회 의원도 되지 못했죠. 교육 기회가 적었고, 사업을 하거나 철학적 논의에 참여할 수도 없었습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자궁이 있으면 정치 지도자, 웅변가, 예술가, 상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아테네 여성은 투표에 참가하고, 공직에 선출되며, 연설을 하고, 대학에 다닙니다. ‘자궁 때문에’ 남자보다 뒤쳐질 일은 없죠.

“여성의 자연스러운 기능은 애를 낳는 것이라는 주장, 동성애는 부자연스럽다는 주장에는 그다지 타당성이 없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규정하는 법과 규범, 권리와 의무는 대부분 생물학적 실체보다 인간의 상상력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란 두 개의 X염색체와 하나의 자궁, 많은 에스트로겐 호르몬을 지닌 사피엔스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상상의 인간 질서에 속하는 여성 구성원을 말한다. 그녀가 속한 사회의 신화들은 그녀에게 독특한 여성다운 역할(아기를 키운다), 권리(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의무(남편에게 복종)를 부과한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218-219쪽.(볼드체는 필자)

사진출처 : 브런치

이번에는 10년 전에 출간된 책 이야기입니다. 제목이 <남자 사용 설명서>네요. 여성학자이자 평화학 연구자인 정희진 씨에 의하면 이 책에는 “미니스커트, 숏팬츠보다 짧은 옷 안에 제발 쫄쫄이 속옷 좀 입지 마시라”(33쪽), “콘돔의 사용은 섹스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기 충분하다”(195쪽) 같은 말이 나온다고 합니다. “적절한 시기와 장소에서 남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효과적인 노출법도 제시, 아니 지시하고 있다네요.(한겨레. 2017.6.9. 자세히보기 ▶)

한국사회에서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는 문화는 일상적입니다. 정희진 씨는 이를 두고 “여성 스스로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눈요깃거리는 눈으로 보고 즐기며 만족한다는 의미입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눈요기 대상화’의 빈도가 잦고, 종종 사물화됩니다. 남자든 여자든 ‘눈’을 만족시키는 예쁨과 멋진 사람은 좋은 것, 그 반대의 경우를 대변하는 듯한(?) 장애인과 노인은 나쁜 것, 쓸모없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상투성과 차별적 상상 속에 있나요?
걸 크러쉬는 정말 ‘힙한’ 단어일까요?

▼ 트위터에서 검색했습니다.

모든 미디어는 반페미적 맥락에서 해석 될 수 있고 동시에 페미적 맥락에서 해석 될 수 있음. 어떤 작품이든 100% unfeminist 하지도 않고 100% feminist 하지도 않을 거라는 거다. 원더우먼의 의의를 긍정해도 갤 가돗이라는 배우가 후자거든요. 원더우먼이라는 영화가 여성 인권에 기여하는 바를 그렇게 괜히 과장해가면서 너무 의미가 큰데~ 이 난리 치는 거 정말 이해 안감. @sapphologie

악녀가 보다 더 엄중하게 까이는 것은 그것이 겉으로는 여배우 원톱에 여성주의 시각이라는 포장을 덧씌우고 있으면서 정작 내용은 대놓고 알탕인 영화보다 훨씬 질이 나쁘기 때문이다. @dimentito

악녀는 관객이 기대하는 vs 감독이 보는 ‘여성’ 캐릭터의 괴리가 너무 크네. 감독은 숙희의 성별을 계속 의식하는데 그 여성적 특성이란 것들이 너무 낡고 진부하고 형편없음. @schillingty

 

글, 이미지 / 이재은 뉴스큐레이터 




지역공동체 2. 도시재생 시대의 지역 공동체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을 만들기’에 이어 ‘도시재생’이 도시 계획의 새로운 대안으로 모색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새로운 정부는 대선공약에 ‘도시재생 뉴딜’을 강조하면서, 앞으로의 도시정책이 ‘낙후 지역 철거-기반시설 공급-아파트 건설’의 방법에서 ‘지역 공동체 보존-기반시설 보완-소규모 정비사업’으로 전환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익숙하게 보아왔던 넓은 빈 토지에 대단위의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 원도심의 좁고 오래된 주택지를 철거하고 초고층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은 더 이상 최선이 아니라는 이러한 전환 속에는 ‘오래된 도시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사라진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좋다는 인식 또한 깔려 있습니다. 이런 인식 속의 ‘공동체’는 막연하게 ‘삭막한 도시’와 대비되는 ‘따듯하고 인간적인 감정의 공간’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도시의 지역공동체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공동체에 대한 이런 막연한 감정이 일종의 환상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미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학자인 뒤르켐은 전통 사회에서의 통합은 오히려 개인의 자율성이 없이 기존의 사회규범과 가치를 기계적으로 반복할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의 아파트에서 우려되는 빗장 공동체(Gate Community)는 지역 공동체라는 도구를 통해서 도시 안에서 계급 분리를 극단적으로 실행한 예가 됩니다. 최근 오래된 도시의 유지와 재발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은 새로운 도시 문화 형성을 위한 공동체가 생겨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 반면, 결국은 도시 문화를 소비주의적으로 전용하고, 기존 거주자들을 축출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도시에서의 공동체는 지역보다 다른 요소들을 통해 만들어지곤 합니다. 산업혁명 이래 도시 공동체의 중요한 한 축은 ‘노동자’라는 계급 기반의 공동체였습니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에 대한 반발로 벌어졌던 ‘점거’운동 또한 이러한 공동체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또 미적 감수성이나 취향 등도 공동체 형성의 계기가 되는데, 20세기 중반 프랑스 사회학자 마페졸리는 일시적으로 유지되는 선택적인 공동체로서 ‘정서적 공동체’를 제시했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휴대전화, 인터넷은 공간적 간격을 지우고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스마트폰과 SNS는 이제 오히려 공간적으로 더 먼 곳에 있는 사람들과의 공동체가 근린보다 더 가깝고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막스 베버는 이미 1960년대에 이렇게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공동체를 ‘근접성 없는 공동체’라고 부른 바 있습니다.

전통적 농촌사회에 비해서 더 복잡하고, 파편화된 도시 속에서 공동체를 지역 단위로 만들어 내는 것은 이런 관점들에서는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도시 계획 속에서의 지역공동체 재건의 움직임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다양한 ‘물리적 근접성이 없는 공동체’와 동등한 선에서 지역공동체를 하나의 선택지로 제시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존재할 것입니다.

오늘의 도시 속에서의 삶은 점점 더 ‘가정’ 안의 것들을 밖으로 빼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던 일들을 하나 둘씩 도시 속으로 빼내고 가정은 점점 작아지는 것이지요. 청년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 오피스텔, 고시원 등은 점점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어 주방을 줄인다고 하지만, 한편에서 일어나는 ‘집밥’의 유행은 그들이 밥을 ‘안 해 먹는 것인지’, ‘못 해 먹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합니다. 주방을 줄였지만 침실이 늘어난 것은 아니어서, 방 안의 책상이 좁아 공부할 곳을 찾아 집 밖의 카페와 도서관으로 향하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가정은 맞벌이를 통해 가정경제를 지탱하면서 보육은 가정 안에서의 돌봄 대신에 어린이집을 선택합니다. 때론 어린이집을 마친 이후의 시간도 가족이 아니라 ‘도우미 이모’와 함께 합니다. 이런 단편적인 예들 속에서 도시의 사람들은 주방과 공부방을 가정에서 빼내어 도시 속에서 그때그때 식당과 카페 공간을 구매하고,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도 어린이집과 도우미 이모를 구매함으로써 대신합니다. 저는 극단적으로 가정의 영역을 줄여버린 도시의 삶을 종종 ‘삶의 외주화’라고 부르곤 합니다.

오랫동안 신자유주의적 도시의 삶은 ‘외주화’를 권장해 왔습니다. 가정과 지역의 영역에서 한 부분씩 구매의 영역으로 꺼내 올 때마다 흔히 그것을 ‘블루오션’이라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무수히 늘어난 외주화 된 삶을 모두가 비슷하게 구매할 수 없다는 것도 점차 분명해졌습니다. 그 격차에 대한 절망감이 국가의 공공서비스에 대한 욕구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의 복지정책에 대한 요구말이지요. 그러나 저성장시대에 접어든 국가가 시장을 통해 외주화 된 삶을 공공서비스로 온전히 충족 시켜주는 것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지역 공동체’에 대한 환상과 가능성은 어쩌면 이 지점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시가 처음으로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이 사업은 ‘사람의 가치’와 ‘신뢰의 관계망’을 만들려는 노력이라고 이야기 해왔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미 가정에서 이탈해버리고, 공공서비스가 보완해주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메꿔줄 수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써 지역 공동체를 재발견하겠다는 의도이고, 이를 위해 사라진 지역 공동체를 재건하겠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도시 사회학자 제인 제이콥스가 이야기했던 길가에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골목의 아이들의 안전에 도움이 되는, 근린이 서로의 삶을 일정 부분 보완하는 지역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지요.

국가 권력이 의도적으로 주민 공동체를 형성하고 재건한다는 부분에서, ‘마을 만들기’는 시민사회와 주민 스스로의 자치의 영역인 것처럼 묘사하면서 실질적으론 그들까지 국가의 미시적인 통치 내부로 포섭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공동체 재건은 단순히 일부 복지 수혜 계층에 대한 공공서비스 제공의 수준을 넘어서, 지역 주민 전반이 파편화된 구조에서 서로의 삶을 호혜적인 구조로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최근의 도시재생에서의 지역 공동체 형성은 지역 주민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다양한 성격의 여러 공동체를 동시 다발적으로 시도하고, 이들이 다층적으로 얽혀있는 형태를 띱니다. 연령, 직업, 취향 등 많은 ‘물리적 근접성이 없는 공동체’의 요소들이 전통적 공동체처럼 지역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새롭게 재건하는 지역 공동체는 과거처럼 기존의 규범을 답습하는 장벽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면서 ‘외주화된 삶’을 다시 지역 공동체로, 때로는 가정으로 복원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인천은 계속 비어있는 땅을 찾아내고, 땅이 없을 때에는 갯벌과 바다를 메워가며 높은 아파트로 도시를 채워가면서, 상대적으로 원도심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습니다. 이제 도시재생의 시대에서 사람들이 어떤 삶을 바라는지, 그 삶을 위한 지역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이제 깊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글/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 J. Jacobs(2010),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그린비
– J. Scott(2010), 국가처럼 보기, 에코리브르
– D. Harvey(2014), 반란의 도시, 에이도스
– 김미영(2015),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공동체의 여러 형식, 사회와이론 27
– 박주형(2013), 도구화되는 ‘공동체’ – 서울시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에 대한 비판적 고찰, 공간과사회 23(1)
– 이정민,이만형,홍성호(2016), 근접성 없는 공동체의 사례 연구 – 충북 괴산 탑골 만화방을 대상으로, 한국지역지리학회지 22(3)

 




베를린의 ‘놀라운 방’

빨간 깃발의 유혹, 미 컬렉터스 룸
한적한 일요일 오후, 베를린 한복판의 미테(Mitte) 거리를 설렁설렁 걷는다. 베를린의 핫 플레이스가 모여 있는 곳이다. 하얀 건물에 내걸린 빨간 깃발 하나가 눈길을 잡아 끈다. 비가 내려 축축이 젖은 잿빛 길바닥과 빨간 깃발, 그리고 ‘Me’라고 쓰인 하얀 글자가 경쾌하게 어우러진다. 바람에 우아하게 펄럭이는 깃발이 마치 “안으로 들어와 보지 않겠어?” 하며 나를 유혹한다. 가만히 살펴보니 ‘Me’라고 쓰인 큰 글자 아래 ‘컬렉터스 룸 베를린 스티프퉁올브리히트(collectors room berlin stiftung olbricht)’라고 작은 글자가 쓰여 있다. 미 컬렉터스(Me Collectors)라고? ‘미(Me)’라면 ‘나’를 말하나? 내 방 컬렉션…? 아니면 무슨 컬렉터의 방이라고…? 얼핏 미술관처럼 보이는데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슬쩍 보이는 모습은 카페나 레스토랑 같다. 호기심이 생겨 1층 문을 잡아당기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커피를 마신다. 세련된 디자인의 카페다. 전시공간은 카페를 지나 안쪽에 위치한다. 얼핏 밖에서 짐작하기엔 작은 공간인 줄 알았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꽤나 크다. 높은 천장에 하얀색 벽으로 마감한 전형적인 갤러리다.

 

시그마 폴케의 점(dot)
카페 안쪽 전시공간에서는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시그마 폴케(Sigma Polke)’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는 익숙하지만 시그마 폴케에 대해선 잘 몰랐다. 기존 이미지를 차용한 작품, 여러 종류의 실험적인 프린트 작품, 얼핏 팝아트처럼 보이는 작품들이 전시장 곳곳을 가득 채웠다. 1950년대 이후 대량 생산과 이미지의 복제 기술 발달은 예술가들의 이미지 생산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시그마 폴케는 이렇게 말했다.

“신문이나 TV에 종종 행복한 중산층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건 독일의 경제적 성장을 선전하기 위한 장식에 지나지 않아요!” 

그는 이런 가식적인 모습을 확대된 망점, 그리고 이미지를 중첩시켜 낯설게 만들어버렸다고 하는데 사실 내겐 이런 설명보다 영상으로 본 사소한 에피소드가 더 강하게 기억에 남았다. 

“사이프러스(Cyprus)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죠. 한밤중에 배가 고파 잠에서 깼어요. 냉장고에 둔 케이크가 생각났죠. 벌떡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케이크가 없어요!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니죠! 그런데 낙담하던 그 순간, 냉장고 안의 조명이 갑자기 내 눈 앞에 반짝반짝 아른거리기 시작했어요. 반짝반짝…”

그 후 폴케는 파란색, 분홍색, 은색으로 반짝이는 사각형을 그린 시리즈를 선보였다. 포장지처럼 반짝이는 종이를 잘라 이미지를 출력해 만든 작업이다. 냉장고 안을 비춘 조명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었다니, 참 소소하고 귀여운 사람 아닌가? 이뿐만이 아니다.

“어느 날 프린트를 하는데 프린터가 고장 났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프린트된 이미지가 너무 멋있는 거죠! 난 프린터가 고장 났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작품을 계속 출력했어요. 날마다 어떤 우연한 효과가 나타날까 기대하면서 말이죠. 정확히 17일 후 누군가 프린터를 수리해버렸고, 더 이상 멋진 이미지를 만들 수 없었어요. 도대체 누가 프린터에 손을 댄 거야?! 난 너무 실망했죠.”

그의 많은 작품은 전후 독일에서 통독까지 격동의 변화를 경험한 폴케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 메시지를 담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뜻밖에 사소하고 우연한 경험으로 만든 작품도 많다. 그는 일상적이며 평범한 경험을 무심코 흘려보내지 않고 매순간 새롭게 바라본다. 작업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무작정 뭔가 거대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빠지고 이내 불안해진다. 폴케는 거대한 이야기 대신 매일매일 경험하는 작은 일들을 ‘순간의 작품’으로 표현한다. 말은 쉽지만, 쉽지 않은 일 아닌가? 폴케의 많은 작품은 이미지가 확대된 망점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도, 풍경도 점으로 이루어진다. 가까이서 보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언뜻 프린트된 것처럼 보이지만 폴케는 이 점을 전부 하나하나 손으로 그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 눈에는 세상이 점들로 보여요. 나는 점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점들은 내 형제이고, 나 또한 점이에요.” 

점…? 그가 말한 점은 무엇일까? 매일매일 스쳐가는 모든 일상,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과장된 행복,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순간을 말하는 것일까? 작가 역시 세계 안에서, 많은 점과 함께 살아가며 큰 그림을 이루고 있을 뿐이란 의미일까? 아티스트로 살아가는 내게 점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점이란 아마도 점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우주가 아닐까 싶다. 커다란 우주, 나와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은 각각이 독립된 존재를 가진 커다란 점, 곧 우주이다.. 폴케의 점에서 우주를 생각한다.

 

분더캄머, 호기심 캐비닛
1층 기획전에 이어 미 컬렉터스 룸 2층의 ‘올브리히트 컬렉션’인 <분더캄머(Wunderkammer)> 상설전을 둘러본다. 독일어 ‘분더캄머’는 ‘놀라운 방’이란 뜻이다. 르네상스 시절, 유럽의 귀족들은 이국적이고 신기한 물건을 방 안 가득히 수집해 사람들에게 보여주곤 했는데, 그런 방을 ‘분더캄머’ 혹은 ‘호기심 캐비닛(Cabinet of Curiosity)’라고 불렀다. 이름 그대로 분더캄머에서는 기이하고 괴이한, 또는 자연에서든 예술에서든 기존 규범이나 관습에서 벗어난 온갖 물건을 볼 수 있다. 미 컬랙터스룸의 분더캄머 역시 해골, 괴상한 동식물, 난장이와 거인의 초상, 기이한 산호, 정교한 시계, 마술 도구, 여러 종교적 소품 등을 전시한다. 베를린이 아니더라도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종종 이런 식의 ‘분더캄머’를 만난다. 비슷한 형식의 전시인데도 나는 늘 분더캄머에 빠져든다. 괴상한 모습을 한 여러 작품 또는 물건이 내 안의 무엇인가를 흔든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릴 만큼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물건들, 그리고 이를 보면서 상상하게 되는 기이한 이야기에 매료되고, 내 작업 또한 이처럼 기이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길 바라기 때문이다. 한편, 이처럼 평범하지 않고, 예외적이고, 놀라운 물건들만 모아둔 게 이상하다. 예술작품이란 꼭 이렇게 예외적이고 기이해야했을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면 예술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런 물건을 만들거나 애써 수집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늙은 아기처럼 생긴 생긴 인어, 고슴도치 같은 물고기, 겹겹이 쌓인 해골 더미를 보며 내 호기심은 점점 커진다.

 

개인 컬렉션으로 만든 미술관
알고 보니 미 컬렉터스 룸(Me Collectors Room)은 독일 에센 출신 컬렉터인 ‘토마스 올브리히트(Thomas Olbricht)’의 개인 갤러리다. 2010년 오픈했는데 유럽에서 제일 큰 규모의 컬렉션 룸으로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까지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한다. 오로지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해 이렇게 큰 건물을 지었다. 컬렉터라고 하면 막연히 예술과 관련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의학자이자 화학자다. 특히 내분비학을 연구했다고 하니 영국 유학시절 즐겨 찾던 ‘웰컴 컬렉션이(Welcome Collection)’이 떠오른다. 의학과 예술에 관한 갤러리인 웰컴 컬렉션 역시 ‘웰컴’이 자신의 컬렉션으로 만든 뮤지엄이자 미술관이다. 웰컴과 올브리히트, 두 사람 모두 의학을 공부했고, 개인 컬렉션으로 미술관을 만들었다. 의학자이지만 예술을 사랑했다. 이들은 컬렉터인 동시에 예술과 과학 콜라보레이터가 아닐까 싶다.

유럽의 여러 미술관에서는 종종 다양한 컬렉터의 소장품 전시를 볼 수 있고, 컬렉터의 오래된 집을 개조한 미술관도 많지만, 미 컬렉터스 룸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에서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작품을 수집한 개인 컬렉터가 새로 지은 최신 건물이다. 단지 개인 컬렉터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건물을 새로 지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예술가 못지않게 예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이 컬렉터다. 컬렉터가 작품을 사는 건 단순한 쇼핑이 아니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컬렉터가 어떤 작품을 사느냐에 따라 아트마켓의 흐름은 순식간에 바뀐다. 컬렉터는 아티스트를 지원할 뿐 아니라 큐레이터나 평론가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신진 아티스트를 찾아낸다. 폴 세잔(Paul Cézanne) 역시 모이즈 드 카몽도 (Moise de Camondo)라는 프랑스 컬렉터 눈에 띄어 세상에 알려졌다.
미 컬렉터스 룸의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컬렉션을 공개하고 싶은 이들에게 미술관을 빌려준다는 것이다. 자연히 미 컬렉터스 룸 전시는 2~3개월에 한 번씩 새로운 컬렉터에 의해 교체된다. 베를린의 미 컬렉터스 룸은 컬렉터가 수집한 작품을 위한 미술관, 컬렉터의 작품으로 구성되는 미술관이다. 한 마디로 컬렉터만을 위한 특별한 미술관이다. 한편 자기가 수집한 작품을 보여주고 싶은 개인 컬렉터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놀랍고 부럽다. 유럽 컬렉터의 컬렉션 규모는 한국의 컬렉터와 사뭇 차원이 다르다. 심지어 베를린의 미술관과 갤러리 정보가 실린 아트 맵에는 아예 ‘프라이빗 컬렉션(Private Collection)’ 항목이 따로 있다. 베를린에서 컬렉터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큐레이터의 기획에 의한 전시 아닌 순수한 개인 컬렉터의 컬렉션을 보는 재미가 기대된다.

비 내린 일요일 오후, 미 컬렉터스 룸의 두 가지 놀라운 방을 둘러보았다. 시그마 폴케의 점으로 둘러싸인 방,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기괴한 물건과 호기심으로 가득찬 방이다. 베를린 어딘가에 숨어 있을 또 다른 분더캄머를 찾아보고 싶다. 참 미 컬렉터스 룸(Me Collectors Room)의 ‘Me’는 ‘Moving Energies(움직이는 에너지)’의 약자다. 두 개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놀라운 에너지가 나를 움직인다. 언젠가 나도 나만의 작은 놀라운 방을 갖고 싶다.

 

글ㆍ사진/ 이승연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미래의 이야기를 담은 상상의 작업으로 현재를 신화로서 기록하는 것, 이것이 기이한 듯 보이지만 명랑한 내 작업이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현재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베를린 ZK/U 레지던시에 입주 중이다. 이승연




[큐레이션 콕콕] 별별 플리마켓, 예술시장에서 만국시장까지

플리마켓(flea market), 벼룩시장은 오래된 물건이나 중고용품을 직접 사고파는 시장을 말합니다. 쓰지 않는 물건을 공원 등에 가지고 나와 매매나 교환 등을 하는 시민운동의 하나로 시작됐죠.

벼룩시장은 유럽 야시장에서 유래했습니다.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했는데(‘마르셰 오 뿌쎄’), 시장에는 일정한 자리를 할당받은 ‘정규 벼룩’과 ‘무허가 벼룩’이 섞여 있었습니다. ‘무허가 벼룩’들은 한쪽 귀퉁이에 물건을 내놓고 팔다가 경찰이 단속을 나오면 감쪽같이 없어졌고, 경찰이 가면 원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 모습이 벼룩이 튀는 것 같다고 해서 ‘벼룩시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 프랑스어 ‘뿌셰(Puces)’가 ‘벼룩’이라는 뜻 외에 ‘암갈색’의 의미도 있어 암갈색의 오래된 가구나 골동품을 파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혹자는 ‘벼룩이 들끓을 정도의 고물을 판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네요.

프랑스 외에 유럽 대륙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영국 런던의 소호 지구도 노천 벼룩시장으로 유명합니다. 벼룩시장은 기존의 관광자원 외에 도시가 보여줄 수 있는 일상의 내면으로 인정받았고, 갖가지 물건들로 작지만 이색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 청계천8가 주변 시장에 삼지창(三枝槍)을 비롯해 호랑이 잡는 덫, 엿장수 가위, 요강, 족두리 같은 골동품에서부터 중고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시장은 한국전쟁 후에 형성됐고, 벼룩시장, 개미시장, 만물시장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죠. 지금은 황학동과 동묘공원에서 옛 흔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벼룩시장은 중고품을 사고파는 형태의 플리마켓(flea market)과 직접 만든 창작물을 판매하는 프리마켓(free market)이 결합된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출발은 홍대 앞이었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문화행사 일환으로 첫 문을 열었고, ‘벼룩시장’과 ‘아트’가 결합한 ‘예술 벼룩시장’은 다른 지역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갑니다. 이른 바 ‘아트 벼룩시장’은 중고품이 아닌 ‘아트’를 판매했습니다. 아트는 순수미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수공예작품 모두를 포함하는 용어로, 직접 제작한 물건(작품)이면 누구나 그 물건(작품)을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정원에서 열리는 ‘예술시장 소소’는 올해로 5년째 열리고 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의 신선한 아이디어와 열정의 만남’을 표방한 ‘소소’는 첫 해, 참여작가와 관람객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습니다. 실험적인 미술가의 퍼포먼스, 싱어송라이터 연주, 야외영화상영회, 북 콘서트 등 공연과 예술, 문학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문화예술축제로 운영됐으며 올해도 사전공모를 통해 선정된 95팀이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합니다. 독립출판물, 드로잉, 일러스트, 디자인 소품, 사진, 예술 아카이브 등 소소한 예술품을 주로 출품했다고 하네요.

시민들은 일상에서 예술을 만나고, 작품을 감상하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어서 만족합니다. 참여작가들은 “일반인들에게 작품을 직접 보여줄 기회가 없는데 이런 자리가 있어서 좋다”, “마주 앉아 얼굴을 마주보고 육성으로 소통하는 행위에 대해서 집중하고 싶었다”고 고백합니다. 소소시장이 특히 젊은 예술가들의 마음을 끄는 이유는 관람객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제주의 플리마켓은 이제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자 필수 여행코스로 자리 잡았습니다. 제주 전역에서 열리는 플리마켓 중 상시 장터만 20여 곳이나 됩니다. 매주 토요일 세화포구에서 열리는 ‘벨롱장’은 길게 뻗어난 방파제를 따라 노천 장터가 형성됩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마법 같은 장터가 펼쳐지죠. 제주어로 ‘멀리서 불빛이 반짝이는 모양’을 뜻하는 ‘벨롱’. 벨롱장이 서는 시간은 두 시간뿐입니다. 평소엔 갈매기들만이 날아다니는 조용한 방파제이지만 장이 서는 날에는 어디선가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날씨가 좋을수록 사람이 넘쳐나죠.

‘소랑장’과 ‘아라올레 지꺼진장’은 금요일에 장이 섭니다. 소랑장은 서귀포 법환포구 앞에 있는 제스토리 카페 2층에서 열리는데 실내 장터라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덕분에 사계절 내내 폐장 없이 운영되죠. ‘소랑’은 제주어로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아라올레 지꺼진장’은 제주 농부들이 주축이 된 토박이 장터입니다. 땀 흘려 키운 제철 농산물을 함께 나누고자 시작한 직거래 장터로 기존의 시장에 플리마켓 개념을 도입하면서 풍성하고 재미난 시장으로 거듭났습니다. 친환경 농산물이 있는 농부장을 비롯해 먹거리장, 예술장 등 다양한 분야가 서로 어우러진다고 하네요. (한국관광공사 2016.9. 자세히보기 ▶ )

인천의 만국시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매월 첫째 주 토요일, 아트플랫폼 일대에서 열리는 만국시장은 매달 주제가 바뀌는 색다른 플리마켓입니다. 지난해에는 예술창작, 나눔, 생활이 함께 어우러진 ‘별난마켓’, 각양각색의 개성을 가진 뮤지션을 만날 수 있는 ‘만국음악살롱’,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 영화를 상영하는 ‘별별극장’으로 진행했고, 올해는 마켓과 음악살롱으로 이어갑니다.

인천의 플리마켓은 다양한 문화가 뒤섞였던 개항장을 상징하는 대표공간인 자유공원의 옛 이름을 따 ‘만국시장’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중구 송학동에 위치한 현재의 자유공원은 1888년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입니다. 인천의 개항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온 외국인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만들어졌죠.(경인일보. 2016.10.20. 자세히보기 ▶)

각국공원(1888), 서공원(1914), 만국공원(1945), 자유공원(1957)으로 이어진 공원 명칭의 변천사는 인천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파노라마입니다. 개항의 현장으로 여전히 이국적인 근대풍경을 담고 있고, 근대 인천의 독립운동과 청년운동의 베이스캠프로도 인식됩니다. 전쟁과 분단의 그늘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장소 역시 지금의 자유공원입니다.

‘만국시장’은 인천의 문화사와 경제사를 복원하는 키워드로서의 만국공원을 지역의 문화콘텐츠로 확장했다는 데에도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플리마켓의 확산을 온라인 중고거래와 연결 짓는 시각도 있습니다. 불경기와 불안정한 일자리 등으로 말미암아 온라인 중고물품 거래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진행된다고 하네요. 적은 돈으로도 쓸 만한 물건을 구매하려는 수요층과 적은 돈이지만 경제적 보상을 원하는 공급층이 든든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플리마켓 장터의 상업화를 우려하는 시각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시장이 성장하면 많은 셀러들이 참여를 원하는데, 단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의 셀러들도 모여듦으로써 순수성이 옅어져가는 경향을 보인다는 겁니다. 셀러들 간의 반목이나 호스트의 권력이 방문객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제주레저신문 2014.8.26. 자세히보기 ▶)

한국의 플리마켓은 중고거래라는 플리마켓 역사성에 충실한 형태라기보다 한국의 특성에 맞게 재해석한 기념품을 제작해 판매하는 아트마켓의 특성이 강합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수공예 작품, 실험적이고 대안적인 물건, 마음이 담긴 서비스를 소개하고 판매하죠. 슬로푸드, 욜로라이프, 히피문화 등의 삶의 방식도 이곳에서 공유됩니다. 그래서 플리마켓의 분위기는 리버럴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장은 그 나라와 사회의 생활양식 이상을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다양한 사람과 물품의 만남을 넘어 문화와 예술이 즐거움과 가치의 이름으로 스며드는 자리, 앞으로 플리마켓이 어떻게 변화하고 진화할지 기대해봅니다.

 

글/ 이재은 뉴스큐레이터

 




전세계가 멍때릴 날! 멍때리기 대회, 세계로 나아가다.

2014년 10월, 서울 시청 앞 잔디광장에서 첫 멍때리기 대회를 개최할 당시만 해도 이 대회가 몇 회를 더 개최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재미삼아 <제 1회 멍때리기 대회>라는 타이틀을 붙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올해까지 6번의 대회가 개최가 되었으니 앞날은 모를 일이다.
멍때리기 대회를 기획할 당시 나는 소위 ‘번 아웃(Burn out)’이라고 하는 소진증후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매일 나가던 작업실에서 붓을 들고 뭘 그려야 할지도 모른 채 허둥댔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정쩡하게 일상을 보내지 말고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보기로 결심을 했다. 그러나 쉬기로 결심하기 전과 후에도 여전히 초조함과 불안감이 괴롭혔다. 쉬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던 여러 날 중 문득 이런 단어가 떠올랐다. “멍때리기 대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때리는 집단을 등장시키는 모습을 상상하니 묘한 흥분감이 생겼다.
멍때리기 대회는 그야말로 그렇게 멍 때리던 어느 날 머릿속에 불현듯 떠올랐다. 바쁜 도심 속에 한가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집단을 등장시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목적이다. 바쁘게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조금은 약올리려는 생각과 멍때리는 집단과의 시각적 대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대회를 다듬어 나갔고 현재의 멍때리기 대회가 완성이 되었다.

2014년도 첫 홍보물을 SNS에 개시하며 참가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온라인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성황리에 첫 대회를 치르게 되었다. 

그 해 겨울, 중국에 사는 텐텐이라는 분에게 메일한통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는 이 대회를 북경에서 개최하고 싶다고 했다. 그들 역시도 고도성장을 하는 도시로 여느 바쁜 도시인의 삶과 다를 바 없었고 대회가 가진 의미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첫 이메일을 주고받은 지 8개월 만에 China Newsweek와 Oh, Not Galley의 주관으로 <제 2회 북경 국제 멍때리기 대회>라는 이름으로 2015년 7월 북경시내 한복판에서 대회를 치뤘다.
북경대회의 경험을 통해 이 대회의 국제대회로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고, 실제로 더 많은 나라의 여러 도시에서 매년 국제 대회를 개최하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후 2016년 봄까지 국내에서 조차 대회를 다시 개최할 수 있을지 조차 불투명했다. 몇몇의 공공기관에 제안서를 보내보았지만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러다 수원문화재단을 통해 겨우 <제 3회 국제 멍때리기 대회>를 치르게 되었고 곧바로 한강사업본부와 함께 한강 이촌 청보리밭 일대에서 <2016 한강 멍때리기 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특히 <2016 한강 멍때리기 대회> 개최 이후 갖은 Vice magazine과의 인터뷰는 세계 다른 나라 네티즌들의 반응을 더 크게 끌어냈고 이후로도 여러 세계 유명 매체를 통해 보도가 되었다.( 자세히보기 ▶ )
이후 루마니아, 호주, 슬로바키아, 콜롬비아, 미국, 캐나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 카타르, 방콕, 대만 등등 여러 나라의 매체와 인터뷰를 하거나 대회 개최 의뢰를 물어오는 메일을 받았다. 그 중 가장 적극적으로 대회 개최를 원했던 곳은 루마니아의 수도 부크레슈티의 한 사업가의 제안이었는데, 제법 오랜 시간 공들여 제안서를 만들고 서로 스폰을 찾기 위해 대사관과 연락하거나 여서 기업들을 찾아보았지만 아쉽게도 개최할 여건을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마침내 올 8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유럽에서의 <제 4회 국제 멍때리기 대회>  개최를 앞두고 있다. 작년 말 비영리 공공미술 단체인 FRANK Foundation의 Erwin Nederhoff씨의 제안으로 네덜란드 개최를 준비하게 되었는데 이 단체도 역시 비영리 단체이다보니 재원을 마련하는 길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인천문화재단의 국제교류 사업을 통해 사업비 일부를 충당하게 되면서 준비에 속도가 붙게 되었다. 

멍때리기 대회는 몇 개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퍼포먼스이면서, 시각 예술이면서 스포츠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자세히보기 ▶) 참가자들에게는 각자 자신의 직업을 대표하는 옷을 입고 오게 함으로써 그들이 모두 모였을 때 작은 도시로 보이게 계획했고, 참여자들의 멍때리는 모습은 단순히 대회 선수일 뿐 아니라, 대회 밖 바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메시지를 던지는 퍼포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 예술점수와 기술점수를 합쳐 우승자를 가리기까지 한다. 즉, 어떤 관점에 주목해서 이해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시각도 차이가 생기게 된다. 특히 FRANK Foundation은 실험적인 퍼포먼스로써의 가치와 대회가 가진 의미, 이렇게 두 개의 시선을 중심으로 멍때리기 대회를 이해하고 있다. 아직 대회 준비를 위해 갈 길이 멀지만, 유럽에서 이 대회가 어떻게 읽히고 받아들이게 될지 무척 궁금하고 설렌다. 이렇게 매년 세계 여러 도시에서 이 대회가 개최된다면 머지않아 전 세계가 멍 때릴 날도 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다시 하게 된다. 물론 나는 점점 멍때릴 시간이 부족해지겠지만 말이다. 

 

글/ 웁쓰양
사진제공/ 웁쓰양컴퍼니

웁쓰양은 <도시놀이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도시에서 예술과 결합된 소비없이 놀이할 수 있는 방식을 실험하고 있다.




[큐레이션 콕콕] 명함, 당신 자신과 또 다른 당신의 것

<명함의 뒷면>의 저자 마이크 모리슨 박사는 묻습니다.

“이제까지 쟁취한 모든 경력과 직함, 타이틀을 다 떼어내고 난 후에도 당신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나요? 타이틀을 떼어내면 당신은 당신을 누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소속이나 직책, 연락처가 적혀 있는 ‘앞면’이 아닌, 당신의 명함 ‘뒷면’에는 무엇이 적혀 있나요?”

명함은 남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씁니다. 이름을 쓰고,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적고, 근무처와 조직을 소개합니다. visiting card, 혹은 business card, 이것이 명함의 일반적인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명함은 민영익이 사용한 걸로 추정됩니다. 1883년 민영익은 조선보빙사(지금의 국가 대표 외교사절단)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아서 대통령의 주선으로 6개월간 유럽을 여행했습니다. 이때 영국에서 청나라 공사를 만나 명함을 건넸는데 그 명함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요즈음 널리 쓰이는 명함과 비슷한 크기에 자신의 필체로 직접 이름을 썼네요.

중국에서는 2000년 전 누군가를 찾아갔다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깎은 대나무나 나무 판에 이름을 적었습니다. 이를 ‘알(謁)’이라고 했는데 명함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죠. 주인이 돌아와서 명함을 보고 다시 그 사람을 찾아갔고, 그게 그 시대의 법도였습니다. 그런 명함을 ‘명자(名刺)’라고 했는데 이때의 ‘자(刺)’는 대나무 등을 깎아서 글씨를 새긴다는 뜻입니다. 명, 청 시대에는 종이나 비단에 붓으로 붉은색 글씨를 써서 신분을 밝혔습니다. ‘명첩(名帖)’에 출신 고향, 이름, 감투나 벼슬 등을 적었고, 처음 보는 자리에서 작은 명첩을 건네는 게 당시 학자나 벼슬아치들이 지켜야 할 예의였습니다.

서양에서도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때 카드를 남기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16세기 중엽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던 학생들이 귀국할 때 가르침을 받은 선생님들에게 인사하러 다니면서, 만나지 못하면 이름을 적은 카드를 남겨뒀다고 하네요.

사람들은 더 좋은 직장, 더 높은 직위에 욕심내지만 최고 권력자의 명함은 단순합니다. 달랑 이름만 적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은 부연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이죠. 김일성의 명함은 이름 석 자, 3음절이 전부입니다. 1972년 5월 북한을 방문했던 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에게 받아온 거라고 하네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교환하는 명함은 작은 종잇조각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제 명함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고, 직장인의 소품도 아닙니다. 가정주부나 학생도 명함을 사용하면서 명함은 점점 더 다양화, 대중화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함에 회사 이름 대신 ‘76650’이란 숫자를 써넣고 다닙니다. 사람들이 무슨 숫자냐고 물으면 “당신이 평생 먹는 밥그릇 숫자”라고 말하여 첫 만남의 긴장을 풉니다. 또 다른 세일즈맨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주부가 새 가구를 장만하려고 전화번호부를 찾아 몇몇 가구회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세일즈맨들이 달려와 명함을 놓고 갔고 주부는 그 중에서 눈에 띄는 명함을 발견합니다. “제 명함이 귀하에게 저를 기억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댁의 남편도 즐겁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제 이름은 울프(Wolf) 즉 늑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름만 늑대이지 성격은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부는 폭소를 터뜨렸고 남편 역시 명함을 보고 웃었습니다. 부부는 그 명함의 주인공을 불러 집안의 가구를 새 것으로 바꿨다고 하네요.

죽기 직전, 최후의 뜻을 웅변할 페이지로 명함을 사용한 사람도 있습니다. 구한말 문신 민영환은 1905년, 일제의 을사늑약 강요에 항거하며 자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함에 유서를 적었는데 “학문에 힘쓰고 결심육력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자가 마땅히 땅속에서 기뻐 웃을 것” 등의 구절이 들어있었다고 하네요.

세상에는 독특한 명함이 많습니다. 과자 회사는 먹을 수 있는 명함을 만들고, 자전거 수리점은 임시로 자전거를 수리할 수 있게 플라스틱으로 제작합니다. 요가센터는 구부러진 빨대에 요가자세를 한 여성의 이미지를 넣어 사업을 홍보합니다. 뇌 이미지를 그려 넣은 정신과 전문의 명함도 있네요.


세계의 이상하고 독특한 명함을 감상해보시죠.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자세히보기▶)

아코디언 명함은 앞뒤 2면이 아닌 10면에 취미를 적고, 좋아하는 책 속 구절을 적고, 두고두고 다시 보는 영화를 소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나 그림을 넣어 텍스트만 있는 기존의 명함과 차별화합니다. 어떤 회사에 다니는 것이, 직업적인 타이틀이 정체성의 전부가 아니라면, 다니는 직장은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은 있고, 내세울 학력은 없지만 내세우고 싶은 색깔은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제까지 쟁취한 모든 경력과 직함, 타이틀을 다 떼어내고 난 후에도 당신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나요? 타이틀을 떼어내면 당신은 당신을 누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소속이나 직책, 연락처가 적혀 있는 ‘앞면’이 아닌, 당신의 명함 ‘뒷면’에는 무엇이 적혀 있나요?” “이 명함 쓰면 당신이 좀 달라보일 겁니다” (내용 보러가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함을 건네받은 뒤 휴대전화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버립니다. 종이명함이 사무적이고 낭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자판을 두드려 문자와 숫자를 입력할 필요도 없이 카메라로 찍기만 하면 자동으로 정보가 입력되는 명함관리 앱도 보편화됐습니다.(페이스북에서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광고’로 소개된 명함관리 앱 영상. 영상보러가기▶)

아코디언 명함은 시대에 역행합니다. 스마트한 디지털 시대에 한 장도 아니고 몇 겹으로 된 종이명함이라니요.

‘명함도 못 내밀다’라는 표현을 아실 겁니다. 수준이나 정도 차이가 심해 견줄 바가 못 된다는 뜻이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장 경험이 없는 작자가 왔다가 명함도 못 내밀고 갔다”처럼 쓰입니다. 하지만 아코디언 명함 앞에서 이런 관용구는 어불성설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것이든 적을 수 있고, 그 메시지가 바로 ‘당신 자신’, ‘또 다른 당신의 것’입니다.

가마쿠라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묘지에 갔다. 무척 큰 공원묘지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영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뜨거운 태양 속에서 조용한 둘레 길을 따라 공원 끝까지 갔다. 가와바타 가족의 묘지 앞에 섰을 때 나는 비밀스러운 디테일을 하나 발견했다. 내 주위 모든 묘비 옆에 석제 명함 상자가 있었다. 이승에 있는 사람들이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나러 올 때 자기 명함을 건네야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디테일은 삶과 죽음을 단번에 친밀하게 만든다. 명함 상자의 존재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계속 내왕하는 비밀스러운 권리를 뜻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 위화,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중에서

시대의 흐름도 좋고, 기술의 발전도 환영합니다. 하지만 이승 사람이 저승 사람에게 건네는 명함이 ‘아름다운 디테일’이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조금 다른 수준의 ‘아름다운 스타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당신의 뒷면을 보여주세요.

글/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지역공동체 1. 아파트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을만들기, 지역공동체 또는 마을공동체, 주민자치, 도시재생. 대규모 철거 재개발 방식의 도시 정비 방식에 대한 반성 이후로 최근 몇 년 간 자주 들을 수 있는 단어들입니다. 뉴타운으로 대표되는 철거 재개발 방식에서 드러난 문제점-원 거주자들의 낮은 재정착 비율과 그에 따른 기존 지역 사회의 해체 등이 있습니다.- 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이죠.

서울시는 뉴타운 지정 구역을 해제하고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국토부에서도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지방도시의 낙후된 원도심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천시도 2014년부터 마을공동체만들기 지원센터를 운영 중이고, 원도심 지역에 도시재생사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강화군의 경우에는 이미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설립되어 있지요. 사업지역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대체로 도시기반시설이 낙후되고, 오래된 단독주택이나, 다가구/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곳들입니다. 이렇게 마을만들기나 도시재생에서 특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지역 주민들의 공동체를 재건하는 것입니다. 지역 주민 참여를 기본적인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사업 진행에 있어서 많은 주민들의 높은 이해와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역 공동체와 관련된 많은 연구에서는 공동체의 형성과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에 유리한 조건으로 시간적으로는 오랜 거주기간을, 공간적으로는 단독주택을, 소유형태로는 자가 소유를 꼽습니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한 지역의 주민 구성이 자주 바뀌지 않으면서, 접촉 빈도가 높을수록 유리하다는 것이지요. 이 관점에서, 공간적으로 단독주택과 대비되는 아파트는 오랫동안 지역 공동체 형성의 훼방꾼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과거에는 아파트의 획일적인 디자인과 배치가 ‘병영’에 비교되기도 하고, 주차장 위주의 외부 공간과 주민간 접촉이 줄어드는 동선계획 등으로 인해 주민 간 관계가 익명화, 파편화 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많았습니다. 최근의 아파트는 고급화 되는 과정에서 단지 외부와의 교류를 단절하는 ‘빗장 도시(Gated Community)’가 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룹니다. 과거에나 현재나 아파트 단지는 지역에 섬처럼 존재하며, 단지 밖 마을과 소통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아파트 단지가 이러한 취급을 받는 것에는 일면 억울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는 앞에서 이야기 한 ‘주민 구성의 안정성’의 측면에서 그러하고, 또 하나는 주민 자치와 협력의 경험적인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인천에 대기업에서 분양한 고층의 대단지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한 역사가 어느덧 30년이 넘었습니다. 전국적으로도 전체 주택 숫자 중 아파트의 숫자는 60%에 육박합니다.[1]  지역 공동체를 이야기 함에 있어서, 아파트와 아파트 거주자들을 배제하고 논의할 수 없어졌습니다.


위의 그래프는 2015년 인천시민들이 ‘어떤 형태의 집을 어떤 형태로 소유하고 있는지, 또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얼마나 오래 살고 있는지’를 정리한 것입니다.[2] 인천은 전체 인구의 절반이 5년 이내에 이사 경험이 있는, 주거 이동성이 큰 도시입니다. 40% 이상이 자가 소유를 하지 못하고 임대 기간에 맞추어 이사를 해야 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마을만들기, 도시재생사업 등이 수 년간에 걸쳐 주민참여를 이끌어내는 점진적인 것임을 떠올려보면, 이렇게 짧은 거주 기간은 주민들이 지역에 대해 애착을 갖기도 어렵게 하고, 참여의 결실을 맺기 전에 이사를 떠나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도 합니다.

반면 전체 인천시민 가구 중 50% 이상이 아파트에서 거주하는데, 이 중 절반에 가까운 가구는 5년 이상 현재 거주지에서 꾸준히 머물러 온 사람들입니다. 또한 아파트 가구 중 전체의 68%는 현재 거주 중인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도시에 대한 애착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다른 주거 종류에 비해서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파트 거주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이미 주민자치의 경험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입주자 대표회의, 아파트 부녀회와 같은 주민 모임은 단지 내 문제를 거주하는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주민자치의 경험이 됩니다. 마을만들기사업, 도시재생사업에서 많은 부분이 지역 주민들에게 공동체 형성의 필요성을 재인식시키고, 지역주민을 ‘조직화’하는 역량을 만드는 데에 투자되는데, 아파트의 이러한 주민자치의 경험은 이러한 역량을 미리 갖추도록 돕습니다. 최근 단지 주민에게 회의를 공개하는 등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이 늘어나는 것 또한 긍정적입니다.
최근 아파트 외부 공간에서 지상에 주차장을 없애는 기법이 보편화 되면서, 건설회사들은 이공간에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을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피트니스 센터나, 보육시설, 북카페 등을 넘어 최근에는 애견 놀이터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아파트 거주자들은 이런 공간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아파트의 문제로 지적되어 온 ‘주민 간 접촉 빈도’를 늘릴 수 있게 되고, 새로운 주민 커뮤니티가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커뮤니티 공간을 주민들이 스스로 운영하도록 한다면 공간 자치의 경험 또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천의 아파트 역사가 30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 노후화된 아파트에 대해서 리모델링과 재건축의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도시재생의 눈으로 아파트 단지를 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파트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 형성을 위한 여러 이점이 있는 만큼, 아파트 단지의 마을만들기, 아파트 단지와 인근 지역이 함께 꾸려가는 도시재생과 같은 새로운 시도들이 늘어날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1] 2015년 현재 전국 총 주택 재고 중 아파트의 비율은 59.91%, 인천은 55.24% (2015 주택총조사. 통계청)
[2] 필자는 인구총조사 상 소유 형태 중 ‘전세’, ‘보증금이 있는 월세’, ‘보증금이 없는 월세’, ‘사글세’를 ‘임대’로 정리. 주거 형태 중 ‘연립주택’과 ‘다세대주택’을 ‘연립/다세대’로, ‘비거주용 건물 내 주택’과 ‘주택이외의 거처’를 ‘기타’로 정리. 거주 기간 중 ‘1년 이내’, ‘1년-3년’, ‘3-5년’을 ‘5년 미만’으로 정리. (2015 인구총조사. 통계청)

글/ 김윤환(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 발레리 줄레조(2007), 아파트 공화국, 후마니타스.
– 박인석(2013), 아파트 한국사회, 현암사.
– 곽현근(2013), 지역사회 사회적 자본의 주거관련 영향요인에 관한 연구, 한국공공관리학보, 27(1).
– 김성수,김경준(1998), 지역사회 주민의 공동체의식에 관한 연구, 지역사회개발연구, 23(2).
– 김순은,권보경(2016), 도시공동체의 주민자치와 사회자본, 지방행정연구, 30(1)
– 이종수(2015), 주거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신뢰의 영향요인 분석, 한국주거학회 논문집, 26(1).
– 신중진,정지혜(2013), 지역공동체 회복을 위한 마을만들기의 역할과 과제, 정신문화연구 36(4)

 




베를린의 쾌락동산

평평한 지구보다 더 기이한 상상
베를린을 걷다 말문이 턱 막히는 세상을 만났다. 갤러리, ‘알트 문즈(Alte Münze)’에서 열린 <BOSCH. VISIONS ALIVE> 전시다. 세상에나,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다.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포스터를 보자마자 그에게로 달려갔다. 입장료는 비쌌고, 전시 공간은 허름한 창고 같았지만 나는 꿈꾸듯 그에게 빠져들었다. 중세 시대의 그림이 멀티미디어 이미지로 변신했다. 쿠션에 기대 몸을 누이고 그림을 바라본다.
코끼리와 기린은 새하얗다. 물가의 유니콘은 물을 마신다. 사람들은 벌거벗은 채 딸기와 블루베리를 정신없이 집어 먹는다. 집채만 한 딸기와 블루베리다. 마음 같아선 나도 그들 사이에 달려들어 거대한 딸기를 먹고 싶지만 다가갈 수는 없다. 그들처럼 옷을 홀딱벗고 게걸스럽게 먹을 자신이 없다.


딸기는 포기하고, 하늘을 본다. 사람들은 거대한 새를 타고 파닥파닥 날아다닌다. 거대한 유리구슬이 연못에 둥둥 떠있다. 가만 보니 남녀가 구슬 안에서 사랑을 나눈다. 연못에 둥둥 떠 있는 유리구슬 안의 사랑이라니… 심지어 금이 쩍쩍 갔다. 금방 구슬은 깨져버리고 물 속으로 가라앉을지 모르는데 남녀는 개의치 않는다. 문득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부엉이 눈과 마주쳤다. 심장이 덜컹거린다. 보면 안될 것이라도 보았나? 고작 부엉이 눈빛에 흔들리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구슬과 부엉이를 지나 걷다 보면 히에로니무스 보쉬도 만난다. 깨진 달걀껍질 같은 몸이다. 달걀껍질 안에서는 손가락만한 사람들이 술을 벌컥벌컥 마신다. 보쉬 몸 안에 들어간 사람들을 보자니 갑자기 내 몸 속에서도 사람들이 기어다니는 것 같다. 갑자기 온몸이 간질거린다.



보쉬는 1500년경 사람들이 지구를 평평하다고 생각하던 시절 이런 그림을 그리고, ‘쾌락의 동산’ (Tuin der lusten)이란 제목을 붙였다. 하지만 내가 지금 보는 건 움직이는 영상이다. 그것도 하나의 화면이 아닌 여러 개의 다발적 화면이다. 영상으로 바뀐 보쉬의 그림은 좀 더 기괴하고 자극적이다. 눈 앞에서 수녀옷을 입은 돼지, 하늘을 나는 물고기, 칼이 꽃힌 거대한 귀가 날아다니고 기묘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보고 있자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전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상황을 바라보는데 나는 엉뚱하게도 마음이 설렌다. 난 왜 마음이 두근거릴까? 내가 늘 그리고 싶었던 기이하지만 유머러스한 그림과 닮았기 때문이다. 엉덩이에 장미꽃이 꽃힌 남자가 내 주변을 둥둥 떠다닌다. 엉덩이와 장미꽃이라니… 남자는 고통을 느끼겠지만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질투가 날만큼 보쉬의 엉뚱한 상상력이 부럽다. 더욱 놀라운건 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중세에 어떻게 이런 상상을 했을까? 보쉬는 죽음 후의 세계가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후 세상을 이렇게 집요하게 그려낼 수 있나? 그의 상상대로 죽음 후에는 과연 이런 세상이 펼쳐질까? 내가 죽으면 나도 ‘쾌락의 동산’에 가게 될까?

축 처진, 뭉뚝한 어깨 위의 슬픔보쉬 그림을 보다 보니  베를린 홈볼트 대학 근처, 노이에 바헤(Neue Wache)에서 만난 케테 콜비츠(Kethe Kollwitz)가 떠오른다.


1867년 독일 출생의 케테콜비츠는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아들과 손자를 연이어 잃은 후 ‘죽은 아들과 엄마’(Pietà)’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제목 그대로다. 엄마가 어깨를 주욱 늘어트리고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이다. 아들을 잃은 엄마라고 하기에는 너무 담담한 모습이라 가슴이 더 먹먹하다. 세상을 원망하며 절규할 법도 한데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그저 아들을 바라볼뿐이다. 그녀를 만난 곳은 홈볼트 대학 인근의 거리다. 혼잡한 거리 한 복판에 있는 노이에 바헤 건물에 우연히 들어섰을 때 ‘죽은 아들과 엄마’와 마주쳤다.


넓은 실내에는 오직 엄마와 아들, 그리고 나뿐이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느닷없이 작품과 마주했다. 당황스럽다. 게다가 짐작하기도 힘든 슬픈 이야기인 탓에 더욱 곤혹스럽다. 실내는 시끄러운 바깥 거리와 다르게 엄숙하고 고요하다. 엄마와 아들을 다시 찬찬히 바라본다. 고개를 숙인데다 머리를 감싼 스카프 때문에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슬픔에 빠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축 처진, 유난히 뭉뚝해보이는 어깨에 모든 슬픔을 올려놓은 것 같다. 아들의 바짝 마른 종아리도 눈에 띈다. 전쟁의 화염 속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아들의 마른 몸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엄마 머리 위의 동그란 천창에서 햇살이 내리쬔다. 마치 천국에서 떨어지는 빛 같다. 햇살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내가 ‘죽은 아들과 엄마’를 혹은 느닷없이 만난 것처럼 케테 콜비츠는 아들, 손자를 갑작스레 떠나보냈을 것이다.
보쉬가 죽음 후 세상을 그려냈다면 케테 콜비츠는 아들과 손자를 떠나보낸 엄마의 슬픔을 담담하게 표현했다. 아들과 손자는 어떤 마음으로 전쟁에 나갔을까? 자발적인 참전일까? 참전해야만 했을까? 나라면 어땠을까? 베를린 거리 한복판에서 어머니의 축 처진 어깨에 놓인 슬픔을 마주하며 살아남은 자, 그리고 떠난 자들의 심정을 헤아린다.

따뜻한 노란색 천으로 감싸진 누에고치의 심정 전쟁의 아픔을 보여주는 또 다른 공간이 있다.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Jüdisches Museum Berlin)이다. 위에서 바라본 건물도, 대각선으로 과감하게 뚫려있는 창문도 칼로 베어놓은 모양이다. 건물의 유명세 때문에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나? 칼집을 내어 박물관 전체를 잘라 놓은것 같아 나는 좀 섬뜩하다. 박물관 내부 전시를 보려면 정해진 동선으로만 이동해야 하는 것도 다소 강요처럼 느껴진다.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 유대인들이 남긴 편지와 물건을 살펴보고, 음성으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갖가지 사연을 읽다보니 마음이 아프지만 너무 세련되게 슬픔을 포장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편, 정해진 동선으로 걷다 보면 유대인의 역사를 시대별로 살펴보게 되는데 이를 통해 당시 유대인들의 상황을 잘 이해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의 입장에서 지나치게 슬픔을 강요받는 기분이다.


홀로코스터 타워에 들어가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벽을 타고 내려온다. 어둡고 고요한 곳에서 한줄기 빛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천국으로 가는 입구 같다. 너무나 비극적인 사건을 너무나 은유적으로 표현한 공간 탓에 나로선 조금 불편하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을 세련되게 포장해 죽음을 홍보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대대적인 상설전시보다 내게 더 와 닿은건 지하에서 전시 중인 스페인 작가 요그질(Jorge Gil)의 크리살리다스(Crisalidas)라는 작품이다. 크리살리다스는 스페인어로 번데기, 누에고치다. 제목 그대로 노란색 누에고치 안에 사람이 꽁꽁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있다. 노란색 담요 같은 천이 몸을 감쌌으니 따뜻할 법도 하지만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게 마음에 걸린다. 그 옆에는 누에고치 허물뿐이다.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누에고치를 계속 보고 있으려니 내가 꼭 거꾸로 매달린 채 꼼짝달싹 못할 것 같은 기분이다. 몸이 꽉꽉 조여 너무 답답하고, 여기서 떨어지면 어떡하지 불안하고, 피가 머리쪽으로 쏠려 힘들어, 엄마,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날아오를 수 있을까? 그런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수많은 목소리가 아우성친다.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 심정이 크리살리다스를 봤을 때 내 기분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마치 영원히 죽지않을 듯
다시 보쉬의 ‘쾌락의 동산’을 떠올린다. 물가에선 괴기스러운 물고기가 뭍으로 걸어 나온다. 물고기에 잡아 먹히는 사람들, 생전 많이 먹은 죄로 음식을 토해내는 사람들, 엉덩이에 꽃힌 나팔 때문에 괴로운 사람들, 하프에 온몸이 감겨 고통받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보쉬가 살았던 시대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음악을 연주하는 게 죄악시 되었을까? 그는 왜 악기로 고문당하는 사람을 그렸을까? 보쉬가 상상한 세계는 몽환적인 동시에 기괴하며,  삶은 악으로 둘러쌓여 있다. 과연 그럴까? 인간은 사악하기에 전쟁을 하고, 케테 콜비츠는 아들과 손자를 잃어야만 했을까? 미래에 또 다시 홀로코스터 같은 비극이 일어날까?


햇살 좋은 어느날, 베를린에서 마주한 세 가지 죽음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훗날 나는 과연 어떤 죽음을 맞을까? 나 또한 보쉬가 그린 쾌락 아닌 쾌락의 동산에 가게 될까? 나는 보쉬 아닌 내가 상상한 세상으로 가고 싶다. 그곳이 어떤 세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죽음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다.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살려고 애쓰다 보면 그 세상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지 않을까? 영원히 죽지 않을 듯 살다보면 말이다.

글ㆍ사진/ 이승연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미래의 이야기를 담은 상상의 작업으로 현재를 신화로서 기록하는 것, 이것이 기이한 듯 보이지만 명랑한 내 작업이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현재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베를린 ZK/U 레지던시에 입주 중이다. 이승연




[큐레이션 콕콕] 혼족, 1인용, 1인가구… 확장되는 1인의 세계

신조어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집니다. 혼밥, 혼술, 혼영은 잘 아실 거예요. 혼자 먹고 혼자 마시고 혼자 영화를 보죠. 혼여(혼자 여행가기), 혼놀(혼자 놀기)의 조합도 있네요. 만들기 나름, 붙이기 나름, 줄이기 나름입니다. ‘혼족’의 세상. 1인 가구의 비율이 해가 갈수록 늘더니 1인용 물건과 식품이 쏟아져 나오고, 1인 식당, 1인 노래방도 일반화 됐습니다. ‘1’, ‘홀로’, ‘혼자’의 이미지는 더 이상 외톨이, 쓸쓸함, 외로움의 아이콘이 아닙니다. 확장되는 1인의 세계를 <큐레이션 콕콕>에서 짚어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에는 수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공 뱅상은 어릴 때부터 숫자 1에 담긴 뜻을 배우기 시작하고, 어느 날 숫자 1에 관한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1은 인간이 살고 있는 우주를 뜻한다. 만물이 우주 안에 있고 통일성 속에 있다.
1은 만물의 시작을 나타낸다. 그것은 빅뱅이나 나뉘기 전의 유일한 대륙이다.
1은 만물의 끝인 죽음을 나타낸다. 죽음이란 단일한 것이 단일한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1은 고독의 자각을 상징한다. 인간은 누구나 홀로 세상에 왔다가 홀로 떠난다.
1은 <자아>에 대한 자각을 상징한다. 인간은 저마다 하나밖에 없는 존재다.
1은 오직 하나의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만물을 통합하는 하나의 우월한 힘이 존재한다는 믿음인 것이다.
1에는 이토록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뱅상은 몇 년 동안 1의 다양한 측면에 관해서 공부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2의 의미를 배울 수 있었다.

통계청 조사와 1인가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1인가구 비율은 전체 인구의 약 24%, 그 중 절반 이상이 40대 이하라고 하네요. 그들 중 42%는 하루 두 번 혼밥을 먹고, 약 18%는 하루 세 끼를 혼자 먹습니다. 10명 중 7명은 ‘혼자 살기’에 만족하고, 남성보다는 여성의 만족도가 더 높습니다. (위키트리. 2017.2.24. 자세히 보기▶)

지난해 12월, 가천대신문은 1인 문화에 대한 학우들의 생각을 알아봤습니다. 총 328명이 설문에 참여했는데, ‘긍정적이다’라는 응답이 42.1%, ‘상관없다’가 30.5%였습니다. 부정적인 의견은 30%도 되지 않았네요. 구체적으로 이유를 밝힌 한 학생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습니다. 혼자 사는 유명인의 하루를 다루는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 1인분도 주문 가능한 1인 식당 등, 이제 ‘혼자’는 삶 속에서 형성돼 독특한 흔적을 남기는 하나의 문화가 됐습니다.(가천대신문. 2016.12.9. 자세히 보기▶)

중국집에 전화해서 “1인분도 되나요?”라고 묻는 것이 어쩐지 죄송스럽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1인 가구 400만인 현재, 오히려 이제는 중국집이 싱글들에게 러브 콜을 보낸다. 배달 음식 전단지에 꼭 빠지지 않는 단골 멘트와 함께. ‘1인분도 정성껏 배달해 드립니다.’ 바야흐로 싱.글.대.세.시.대. 그래서 만들었다.

지금은 아쉽게 들을 수 없지만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에서는 매주 토요일 [1인용 음악]코너를 운영해 특별한 상황에 혼자 있는 사람들, 그 순간에 필요한 음악을 틀어주기도 했습니다.

서초구는 1인 가구를 위한 문화교실을 운영하고, 1인 가구로 구성된 동아리에 활동비를 지원합니다. 1인 가구를 겨냥한 벽걸이용 미니 드럼세탁기의 매출은 해마다 증가하고, 은행은 혼족 마케팅인 ‘일코노미’ 전략을 폅니다. 1인과 이코노미(economy)가 결합한 신조어라고 하네요. 선거판도 1인 가구를 겨냥해야 유리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큰손 된 혼족’이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포미족’이라는 용어도 1인 시대와 관련 있군요. 건강(For health), 싱글족(One), 여가(Recreation), 편의(More convenient), 고가(Expensive) 의 알파벳 첫머리를 딴 For me!, 한글로는 ‘포미족’이네요. 평소에는 알뜰한 소비를 실천하지만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에는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는 소비자를 일컫습니다. 눈치 보지 않고, 나를 위해, 나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사는 거죠.

‘독거청년’이라는 말은 중국에서 나왔네요. 어쩔 수 없이 1인가구가 된 노인층과 달리 스스로 선택해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청년 1인가구를 말합니다. 데일리팝의 기사(자세히보기▶)는 독거청년의 생활환경이 아닌 고독에 초점을 맞추고 있네요.

독거청년은 인터넷을 보거나 핸드폰을 만지고, 밥을 먹는 등 생활의 대부분을 혼자하기 때문에 보통의 젊은 청년보다 더 고독함을 더 느낍니다.

“누구도 그들과 대화를 하지 않고 그들 또한 사람을 찾아 소통하길 거부하며 그것이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담아두는 만큼 화려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아도 마음만은 화려한 세계와 멀리 떨어져있는 것이다.”

‘1인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의 문제’에 무게 중심이 쏠린 것 같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가혹한 생활과 심리적인 압박으로 자기감정을 감추고 주도적으로 소통을 하지 않아 우울증을 앓거나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네요. 청년 1인가구의 문제는 사회적 이슈이며 사회가 인식하고 개선해야 할 문제라고 꼬집고 있습니다.

‘혼자 온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깃발 아래 무려 300여명의 시민이 모였습니다. 지난해부터 지난 3월까지, 광화문 광장에 혼자 간 사람들은 ‘이상한 연대감’을 느끼며 ‘혼자가 아닌 혼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과 깃발 밑에 있는데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할지 참 뻘쭘하셨죠? 우리 같이 ‘혼자 온 사람들’ 깃발에 모여 뻘쭘함을 없애 보아요!’

촛불집회에 같이 갈 친구를 구하지 못한 이예슬 씨는 ‘욱’하는 마음에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듭니다. 그래도 혼자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기우, 혼자인 사람들이 깃발을 따라 왔고, 제각각인 혼자들을 끌어안았습니다. 단체 이야기방을 만들고, 여행도 다녀온 그들은 ‘혼자들의 촛불’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만들 예정이라고 하네요. “혼자인 듯 혼자이지 않은 혼자들. 각자의 생각을 인정하는 이들의 느슨한 연대.” 재치 있고, 울림 있는 기자의 멘트를 곱씹어봅니다.(한겨레신문. 2017.3.17. 자세히 보기▶)

다시, 뱅상의 깨달음으로 돌아가 볼까요?

1은 <자아>에 대한 자각을 상징한다. 인간은 저마다 하나밖에 없는 존재다. (…) 뱅상은 몇 년 동안 1의 다양한 측면에 관해서 공부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2의 의미를 배울 수 있었다.

글/ 이재은(뉴스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