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 남아있는 새

독일에서 하는 흥정

“흠, 최소 2주에서 3주정도 걸리겠는데요? 그림이 꽤 섬세해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아요’

베를린 동부 외각에 위치한 레이저 컷팅 회사(LKM-GmbH)에서 받은 연락이다. 영어에서 독어로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이메일을 주고 받고 인턴의 도움을 받아 통화를 한 후 며칠을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받은 연락이다. 앞이 캄캄해졌다. 다음 주 오픈하우스에 맞춰서 작품설치를 하려면 최소 일주일내로 컷팅이 되어야 하는데 어떡해야 하나? 기계에 버튼만 누르면 알아서 잘라주는 아주 간단한 일인데, 이게 왜 2주씩이나 걸린다는 거지? 게다가 가격도 한국과 비교해서 훨씬 비싸게 느껴졌다. 어휴 한국이라면 넉넉히 3일이면 충분할텐데.. 결국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한나, 오늘 너를 하루만 빌릴 수 있을까?(Hanna, Can I borrow you one day?)

“응? 나를 빌린다고?”

어, 우리가 너무 급해서 말이지, 아무래도 LKM을 직접 가야 할 것 같은데 알렉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독어를 못해서 말이야.

결국 사무실에 양해를 구하고 인턴 한나(Hanna)와 레지던시에서 한시간 거리인 LKM을 찾아갔다. 도착해 보니LKM은 생각보다 매우 큰 레이저컷팅 회사다. 철이 잘라지는 괴음과 공장안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새하얀 곱슬 머리를 한 채 무표정하게 이야기하는 담당자를 보고 주눅이 들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대화 내내 가격도 들쑥 날쑥 약속한 날짜도 들쑥 날쑥이다. 아니 내가 아는 독일인의 이미지와 너무 다르잖아? 간결하고 직설적이고 정직한 독일인의 이미지는 착각이었던가? 어쨌든 결과적으론 가격은 처음에 생각한 것보다 3분의 1일 이상이 줄었고 컷팅은 바로 내일 가져갈 수 있다고 한다. 독일에서도 흥정이 된다는 사실은 정말 의외다. 팁이 있다면 독어를 할 줄 아는 친구와 같이 갈 것, 그리고 상냥한 얼굴로 예산을 먼저 이야기 하지 말 것 두 가지다.

 

하룻밤의 마법

다음날 컷팅이 다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운반을 위해 벤을 빌렸다. 베를린에는 포니밥(Pony Bob)이란 앱이 있는데 무거운 짐을 운반해주는 소셜 네트워크다. 필요한 날짜와 시간, 장소를 올려놓으면 가능한 사람이 연락을 해온다. 베를린 시내에서 짐을 옮길 경우 택시를 타는것보다 훨 저렴해 작가들이 주로 이용한다고 한다. 참고로 가격은1시간에 30유로지만 짐의 무게. 거리에 따라 흥정역시 가능하다. 우리 역시 포니밥에서 온 사람과 같이 갓 잘라진 반짝반짝한 철을 받아 레지던시로 돌아왔다. 철은 바로 잘랐을 때는 깨끗한 은회색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거무스름하게 변한다. 그리고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면 붉게 부식이 되기 시작한다. 작품이 설치 될 베를린 레지던시는 기차역을 개조해 만든곳이라 철근 기둥, 벽돌 벽, 바닥 콘크리트등이 거칠게 노출이 되어있다. 그래서 이에 어울리는 자연스럽게 부식된 붉은색의 철 작품을 옥상에 설치하고 싶었다. 그래서 철을 인위적으로 부식시키기 위해 물뿌리게에 소금물을 담아 칙칙 뿌렸다. 소금물 때문에 부식이 빨라지기 때문이다. 달밤에 옥상지붕에 올라가 비닐 장갑을 낀 채 진지한 표정으로 작품에 소금물을 뿌리는 모습이란…하하하…기괴하면서 우스꽝스럽다. 그날 밤 폭우가 내렸다. 소금물을 뿌려 옥상에 세워둔 상태라 걱정이 되어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맙소사, 하룻밤 사이에 철이 빨갛게 부식이 되다니..나도 모르게 꺅 소리를 질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코르텐스틸의 붉은색, 너무 매혹적이다. 아직은 완벽히 부식이 안되서 부분 부분 본색이 섞여있긴 했지만 이건 설치 후 천천히 자연스럽게 부식되는게 나을것 같아 그대로 지붕에 설치하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하룻밤새 마술처럼 변해버린 붉으스름한 철을 보고 있으니 내가 마치 연금술을 부린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레지던시의 세모지붕

지붕에 비스듬히 앉아 레지던시를 내려다보니 기분이 상쾌하다. 다만 지붕으로 올라가는 길은 몹시 험난하다. 우선 건물 2층으로 올라가 오른쪽 끝 막다른 벽으로 간다. 그리고 천장에 대롱 대롱 매달린 고리를 주욱 밀면 천장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열린 문쪽으로 3단 사다리를 기댄다. 그리고 조심조심 천장에 열린 문을 향해 올라간다. 사다리 마지막 칸에서 양 벽의 손을 기대고 문 안쪽으로 폴짝 뛰어 올라간 후에는 천장이 낮아 허리를 90도로 구부려야 한다. 그리고 핸드폰 라이트를 킨 후 어두컴컴한 길을 30미터쯤 걷다보면 천장에서 45도 각도에 또 다른 문이 나온다. 이 문을 다시 열고 사다리 세칸을 밟고 올라오면 이곳이 바로 레지던시 지붕위다. 다행히 비가 안와 작업하기 딱 좋은 날이다. 런던에 있을 땐 사다리에 올라가는것 조차 보험에 가입 후 올라갈 수 있어 일이 두 배 세 배 더 오래 걸렸다. 심지어 보험을 들지 않으면 문제는 더 커졌다. 사다리에 올라가 벽에 작품을 거는 아주 간단한 설치조차 따로 인력을 고용해 작업을 해야 해 비용이 두 배 세 배로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를린에선 옥상에 올라가는것도 내 맘대로, 사다리에 올라가는것도 내 맘대로다. 누구하나 신경쓰지 않는다. 심지어 설치를 도와주는 독일 친구 네드(Ned)는 장갑조차 끼지않고 작업을 한다. 옥상에 와서 살펴보니 바닥에 바로 구멍을 내 고정시킬 경우 물이 샐 염려가 있어 이음새를 사용해 벽쪽으로 연결해 옆에서 고정해주는 방식을 선택했다. 설치 방식 역시 그때 그때 바뀐다. 참 별일이다. 베를린이 원래 이런건지, 아님 독일이 원래 이런식인지, 작업을 하며 기존에 알던 독일인, 그리고 독일의 이미지가 많이 바뀐다. 

설치를 도와주는 Ned는 리펑(Refoung)의  멤버다. 리펑은 레지던시 지하실에 작업실을 내고 이곳의 시설물 관리에서부터 의자, 벤치, 책상, 심지어 간이식 집까지 뚝딱뚝딱 만드는 천하무적 메이커들이다. 최근엔 물탱크를 재사용하여 만든 작은 회의실이 내방 왼쪽에 세워졌는데 마치 노란 우주선 같다. 그들의 작업실인 지하실에는 여러가지 공구가 가득하고 그들은 항상 무언가를 만든다. 아쉬운게 있다면 이 모든 공구들은 이 그룹의 소유라는거다. 레지던시 자체에서 가지고 있는 공구는 하나도 없고 필요할 때마다 이들에게 빌려써야 하는 시스템이다. 또한 설치와 관련된 모든 일도 이들이 한다. 우리 역시 이런 이유로 네드와 함게 일하게 되었다. 

 

남아있는 새와 떠나간 새

레지던시 건물 오른쪽 삼각 지붕에는 알렉스가 만든 ‘남아있는 새’(The Birds Who Staye)가 설치되었다. 죽은 아기새다. 알렉스는 올 봄 이곳에서 지내면서나는것을 연습하다 떨어져 죽은 많은 아기새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떨어져 죽은 아기새의 모습에서 과거 이곳에서 근무했던, 경계를 넘지 않은 동독사람들을 떠올렸다. ZK/U는 기차역을 개조한 건물로 과거 분단시절 서베를린에 위치한 지역이었지만 동독사람들이 근무한 특이한 곳이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서독으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들의 사회시스템에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경계를 넘지 않았다.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떨어져 죽은 아기새의 모습에서 과거 이곳에서 근무한, 경계를 넘지 않은 동독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정문 쪽 굴뚝 두개에는 마주보고 있는 크낙새, 그리고 꽃으로 둘러쌓인 두루미 왕관을 쓴 할머니 형상이 있다. 작품 제목은’떠나간 새’(The Birds Who Left)다. 함흥에서 피난 온 우리 할머니다.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나는 할머니에 관한 작품을 만들어 레지던시 건물 지붕에 세웠다.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을 지켜보는, 이를테면 어처구니인 셈이다. 경계를 넘어 온 할머니에게서 두루미와 크낙새를 떠올렸다. 새에겐 경계가 없다. 작은 굴뚝위에 올라간 작품은 할머니의 피난 시절을 상상하며 그린 작품이다. 꽃이 피어나는 왕관이다. 제일 꼭대기에는 두루미 한마리가 있다. 두루미는 막 꽃 왕관의 중앙을 넘어서고 있다.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새, 또 가족단위로 이동하는 유일한 새가 두루미다. 동생을 남겨두고 넘어온 할머니가 두루미 같았다. 두루미는 경계를 막 넘어가는 중이다. 몸은 이미 한쪽으로 쏠린 상태이지만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큰 굴뚝위에 올라간 서로 마주보고 있는 크낙새 또한 마찬가지다. 크낙새는 북한 함흥에서 주로 거주하는 텃새로 이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텃새가 이동해 다른곳에 자리를 잡는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상상했다. 크낙새 역시 경계를 넘어온 방향을 서로 바라보고있다. 돌아가고 싶은건 아니다. 그녀의 삶은 이미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굴뚝에 설치된 이 설치작품은 함흥에서 온 내 할머니이자 분단된 나라에서 북한을 고향으로 둔 많은 이들의 모습이다. 할머니와 크낙새, 두루미는 경계를 넘어 온 모든 사람들의 상징일 지도 모른다.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발견했다. 하룻밤만에 4마리의 새가 옥상위에 올라앉으니 신기한 듯 했다. 손가락으로 가리 치켜 도대체 언제 설치가 된거냐며 놀라워했다. 베를린 레지던시 옥상에 4마리의 새를 남겼다. 이들은 이곳에서 지역 주민들, 그리고 국경을 넘어온 터키 이민자 아이들, 시리아 난민 어린이들을 바라볼 것이다. 베를린에 남기고 온 이 새들은 이들이 마주하게 될 다채로운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여러사람들에게 계속 전해지고 진화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로 기억되기를.

 

글, 사진 / 이승연

클릿슈즈를 신고 북악스카이를 달리는 꿈을 꾸는 여자.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개인활동 외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인천문화재단 국제교류프로그램인 베를린 zk/u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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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뮌스터와 카셀로 떠난 미술탐방 여행

지난 7월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레지던시 입주작가들과 함께 독일에서 열리는 뮌스터 조각프로젝트와 카셀 도큐멘타 탐방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호 지구별 문화통신에서는 탐방에 참여한 2분의 작가님을 통해 독일의 뮌스터와 카셀 소식을 전합니다.

 


《조각프로젝트 2017(Skulptur Projekte 2017)》와 《도큐멘타 14(Documenta 14)》를 관람하기 위한 탐방 여행을 다녀왔다. 올해는 미술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유럽여행을 한번쯤은 고려하는 소위 ‘그랜드투어’의 해다. 정확히 10년 전에도 유럽의 대표적인 4대 미술행사(베니스비엔날레, 카셀도쿠멘타, 뮌스터조각프로젝트, 아트바젤)를 탐방하는 여정의 ‘그랜드투어’의 붐이 일었다. 그해 여름, 유럽에 방문했던 나는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를 관람했지만 일정이 허락지 않아 나머지 행사들은 방문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올해는 인천아트플랫폼의 지원으로 레지던시 동료 입주작가들과 독일의 뮌스터(Münster)와 카셀(Kassel)에서 각각 열리는 두 행사를 관람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번 탐방을 가기 몇 주 전부터 동료작가들과 몇 차례의 강연을 들으며 각각의 행사가 출범하게 된 역사적 계기와 현재까지의 전개과정에 대해 사전 학습을 했기에 떠나기 전부터 큰 기대와 궁금증을 안고 있었다.

조각프로젝트 2017, 시가 흐르는 도시
울창한 숲길과 호수, 낮은 건물과 그 위로 드러나는 하늘이 인상적인 도시 뮌스터에서 《조각프로젝트》가 처음 개최된 것은 1977년이다. 10년을 주기로 열려 올해로 5회째를 맞는다. 뮌스터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라도 작품을 더 볼 생각에 마음은 분주했다. 올해 프로젝트를 계기로 새로 선보인 예술가 36명(팀)의 작업과, 1회부터 4회까지 전시 후 뮌스터에 영구적으로 설치된 ‘퍼블릭 컬렉션’ 38점이 도시 전역에 설치되어 있다. 미술관 및 전시공간, 공원과 외부공간에 산재한 작품들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지도를 통해 도시 전체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어떻게 이동해야 효과적인지 동선을 짠 후, 도시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움직여 헤매고 그곳을 체험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작품을 발견할 수 있다. 종이에 인쇄된 지도, 구글맵 등의 어플리케이션이 필요하고,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을 갈 때는 자전거를 빌려 이동할 수 있다.

호수가 시작되는 풀밭에서 발견한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의 <Giant Pool Balls>, 도심 골목에서 청량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다니엘 뷔랭(Daniel Buren)의 <4 Gates>, 숲 속에서 만난 댄 그래험(Dan Graham)의 <Octagon for Münster>, 땅 밑으로 침하되는 경험을 주는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의 <Square Depression>, 이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심심찮게 등장하는 토마스 슈테(Thomas Schütte)의 <Cherry Pillar> 등의 작품들을 그렇게 찾아다니며 만날 수 있었다. 이 도시에 사는 거주자들은 이 작품들을 마주하는 순간이 하나의 일상일 뿐이겠지만, 방문객으로서 나는 마치 도시를 지시하는 응축된 시어를 마주하는 것 같았다. 일리야 카바코프(Ilya Kabakov)의 작품을 보면서 시와의 비유를 떠올렸는데, 그의 작품에서 정말 시를 만났기 때문이다. 높이 솟은 안테나 모양의 작품을 올려다보면 허공에 시가 적혀 있고 이를 읽기 위해서 관람자는 누워야만 한다. 몸을 기울여 누워 시를 읽다보다 보면 자연스레 뮌스터의 하늘을 볼 수밖에 없고 풀의 촉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처럼 뮌스터에서 작품과의 만남은 이 도시의 자연과 주변 환경을 돌아보게 하고 그곳의 삶을 가늠하게 하는 것이었다.

뮌스터의 자연과 삶의 시간이 또 다른 방식으로 압축된 작업들도 많은 이들의 흥미를 끌었다. 제레미 델러(Jeremy Deller)는 뮌스터 시에서 시민에게 할당해 준 농장을 경작하는 이들과 협업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작가는 이들에게 10년 동안 식물들과 기후의 상태를 기록하고 농장의 일상을 일기로 기록하도록 요청했고 이번 프로젝트에서 30권의 책으로 묶어 이를 전시하였다. 무려 10년이란 시간의 결과물은 동일한 형태의 책 속에 담겼지만, 책을 열면 농장에서 보낸 각자의 삶은 개별화되고 구체화되어 펼쳐진다. 직접 쓴 일기, 전통행사나 사소한 모임들의 기록, 각종 사진, 날씨보도나 경작에 관한 내용의 신문 스크랩, 때로는 아무 기록이 없는 공백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기록을 이어간 것을 볼 수 있다.

인상적인 작품 중에는 삶의 면면을 다루기보다는 보다 큰 우주적 시각을 보여준 작업도 있었다.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는 작년에 폐장된 아이스링크의 내부공간을 변화시키는 작업 <After ALife Ahead>를 선보였다. 땅을 파내거나 쌓아 굴곡진 언덕과 웅덩이를 만들고, 콘크리트와 자갈들이 널려 있다. 고동과 해조류가 사는 수조가 있고 벌과 벌집이 보이고 한 켠에는 푸릇한 새싹들이 무리지어 나고 있는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현장에서는 몰랐지만 인큐베이터에 증식시킨 암세포도 있었다고 한다. 천장에는 열고 닫는 기계장치가 장착된 피라미드 모양의 창이 있다. 생명체와 무생명이 공존하는 현장은 인간의 삶 너머 행성의 파국 및 재건과 함께 억만년의 시간을 담고 있는 듯 했다.
본질적이고 영원한 아름다움을 간직할 것만 같은 미술작품도 실상 트렌드에 민감하고 변화가 빠르다고들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세월의 거리를 두고 보면 빠른 것처럼 보이는 그 걸음이 오십보백보이거나 제자리인 경우도 허다하다. 뮌스터의 조각프로젝트는 1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흐른다. 도시의 자연과 일상 속에서 시가 된 조각들은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감지하고 있는 걸까. 스스로 조각이라는 매체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을 하고 도시 공간과 공적 영역에서 그것을 실험해 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도큐멘타 14, 기록과 증언의 바다
독일의 중부 도시 카셀에서 열리고 있는 《도쿠멘타 14》는 《조각 프로젝트 2017》과는 사뭇 다른 인상을 준다. 《조각 프로젝트 2017》이 조각이라는 미술의 매체를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도쿠멘타 14》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된 의제를 시작으로 미술의 실천과 담론을 조직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최 당시의 정치·사회·경제적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이제까지의 도큐멘타 전통을 이번에는 어떻게 이어갈까. ‘아테네로부터 배우기’라는 이번 주제는 사회정치적 이슈와 미술 실천의 접점을 어떻게 드러낼까. 카셀과 함께 공동 개최지로 지목한 아테네를 지금의 유럽에서 지정학적으로 시급한 의제로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배운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치적 첨예함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도쿠멘타의 명성과 이번 주제가 주는 낯섦은 가기 전부터 이런저런 궁금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아테네’라는 지리적 설정은 현재 유럽이 직면한 상황에 대한 묵직한 이슈라는 것은 행사의 메인 광장인 프리드리히광장(Friedrichsplatz)에 도착하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광장에 설치된 마르타 미누힌(Marta Minujín)의 <The Parthenon of Books>은 아테네의 파르테논을 1:1 비율로 제작한 후 건축물의 외면을 십만 권의 금서로 둘러싼 작품이다. 이곳 광장에서 나치가 엄청난 양의 책을 불태운 사건이 있었고, 도쿠멘타의 출발이 이에 대한 반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의미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아테네 파르테논은 서구 문명의 우월성과 민주주의의 상징이라는 정체성이 각인된 곳으로, 민주주의를 지향해 온 오랜 시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 불안정성이 노정되어 있어 위협받을 수 있다는 통찰이 이 작품과 함께 하는 것 같다.

광장의 또 다른 한편에는 히와 케이(Hiwa K)의 작품 <When We were Exhaling Images>가 설치되어 있다. 나란히 쌓아올린 오렌지색 파이프의 내부에 소소하고 사적인 물건들을 배치하여 누군가 살았음직한 흔적을 남겨놓았다. 난민들이 임시로 거주하는 실제공간처럼 구현한 것이다. 이를 접하면서 아테네가 시사하는 바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최근의 아테네는 그리스의 경제 위기, 협력 체제로 출범한 유럽연합의 갈등의 심화, 지구 곳곳의 난민과 이주민의 문제, 테러 위협과 삶의 불안정성으로 확장되는 여러 문제들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이번 도쿠멘타는 카셀의 35개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전시와 퍼포먼스 외에도 영화, 다큐멘터리 상영과 퍼블릭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되었지만 모두 관람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했다. 주전시장인 프리데리치아눔(Fridericianum), 예전의 우체국 건물을 전시공간으로 사용하는 노이에노이에갤러리(Neue Neue Galerie), 도큐멘타 전용 전시관인 도큐멘타 할레(Documenta Halle), 노이에갤러리(Neue Galerie), 카셀중앙역(Kassel Hauptbahnhof) 등 주요 전시공간을 중심으로 관람하였다. 전반적으로 시각적 스펙터클을 강조한 작업보다는, 크고 작은 역사, 대안적인 기억들, 주목받지 못했던 사건의 기록과 내러티브를 집요하고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작업이 많았다.

방대한 양의 작업들 속에서 내가 대면한 것은 도쿠멘타의 명칭처럼 기록과 증언이었다. 수많은 시각이미지와 자료들이 전쟁과 역사, 개인의 기억과 삶의 흔적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증거하고 있었다. 기록과 증거의 목록은 방대했지만, 무엇보다 주변적이고 드러나지 않았던 이야기들에 더 관심이 갔다. 프리데리치아눔의 지하 전시장에 상영되는 벤 러셀(Ben Russell)의 작품 <Good Luck>은 수리남의 불법 금광과 세르비아의 국영 구리광산의 광부들과 작업현장, 그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일상을 기록한다. 노이에갤러리에서 전시된 <Rose Valland Institute>는 유럽의 유대인이 소유했던 재산의 몰수와 그 영향력을 조사하고 기록한 예술 프로젝트이다. 전쟁 후에 나치가 몰수한 예술품의 반환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전시장에는 이와 관련한 자료들을 전시하였다. 또한 생전에 카셀에서 활동한 예술가이자 두 팔을 모두 잃어 장애가 있었던 트랜스젠더 로렌자 뵈트너(Lorenza Böttner)의 드로잉, 페인팅, 그리고 아카이브 자료들은 생전에 주목받지 못했지만 역동적이었던 개인의 삶을 증언하고 있었다.

여행은 미적·문화적 산물을 통해 도시의 면면을 이해하는 과정임과 동시에, 예술작업의 의미가 도시의 맥락 속에서 확장되는 효과를 몸으로 체험하고 느끼는 여정이다. 다른 삶과 도시, 그곳의 문화를 접하는 경험은 늘 새로운 관심거리와 새로운 질문을 만드는 계기가 되곤 한다. 도큐멘타 참여작가인 올리버 레슬러(Oliver Ressler)의 작품에 나온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어쩌면 오래된 질문을 되뇌고 있다. 도쿠멘타에서 접한 유럽의 정치적 상황과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들에 치열하게 반응하는 미술실천들에 깊은 공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아시아 한국의 상황 속에서 시차와 거리감을 느끼는 내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글,사진/ 이정은

삶과 사회에 대한 소소한 관심들을 전시기획과 미술비평으로 풀어내며 살고 있다.
현재 인천아트플랫폼에 입주해 있다.




하늘아래 미술관 미리 혹은 다시 보기

지난 7월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레지던시 입주작가들과 함께 독일에서 열리는 뮌스터 조각프로젝트와 카셀 도큐멘타 탐방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호 지구별 문화통신에서는 탐방에 참여한 2분의 작가님을 통해 독일의 뮌스터와 카셀 소식을 전합니다.

 

‘하늘아래 미술관’이라는 모토로 10년마다 열리는 공공미술의 현장 뮌스터 조각프로젝트 (Münster Skulptur Projekte)와 5년을 주기로 진행되며 ‘미술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실험 현장’이라 불리는 카셀 도큐멘타(Kassel Dokumenta)가 동시에 펼쳐지는 이번 독일의 여름은 유난히 더욱 뜨겁다. 필자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진행한 2017 IAP 예술현장학습-독일 현대미술 탐방 프로그램의 일한으로 현장을 방문해 세계적 미술행사의 열기를 직접 체험하였고 그 중에 뮌스터시의 2017년 조각프로젝트를 소개하며 어떻게 예술과 도시가 함께 어울려 40년의 긴 호흡을 함께 할 수 있는지 생각 해 보고자 한다.

올 여름 인구 32만 명 독일 북서부의 중소도시 뮌스터(Münster)에서는 1977년부터 시작되어10년 주기로 도시 전역에서 펼치는 조각프로젝트(Skulptur Projekte) 행사가 6월 10일에서 10월 1일까지 진행되고 있다.
매해 전 세계의 살기 좋은 도시를 선정하는 LivCom-Awards 기관에서 뮌스터 시는 2004년 1위를 수상할 정도로 복지와 자연, 문화 환경이 잘 갖춰져 있으며 인구의 20프로에 가까운 6만 여명이 대학생인 교육도시이고 뮌스터 돔(St.Paulus Dom)을 비롯하여 시내 곳곳에 중세시대의 성당이 즐비한 가톨릭 종교의 도시이기도 하다.

구서독의 평온한 작은 도시였던 뮌스터에서 지금은 행사 방문자 수만 60만 명에 가까운(2007년 기준) 조각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 첫 구상은 1973년 뮌스터 시에서 구입 할 예정이었으나 당시의 시민들에겐 상당히 ‘모던한’ 작품이었던 조각가 조지 리키(George Rickey)의 ‘3개의 회전하는 사각형’(Drei rotierende Quadrate)에 대한 언론과 시민들의 반발로부터 시작된다. 

이 작품에 대한 논란과 토론이 계속되자 당시 서독의 주립은행이 1975년 당시130,000DM(65,000유로)가격을 지불하고 조지 리키의 작품을 뮌스터 시에 선사하기로 결정하고, 베스트팔렌 주립미술관 관장 클라우스 부쓰만(Klaus Bußmann)과 세계적 큐레이터 카스퍼 쾨니히(Kasper König)는 뮌스터 시민들에게 현대예술에 대한 경험과 이해를 더욱 높이기 위한 아이디어로 1977년부터 예술가들 초대해 뮌스터의 역사와 문화, 사회적이거나 또는 지형적인 관계를 예술과 접목시켜 예술과 공공성의 관계를 토론할 수 있는 전반적인 실험장의 형태로 뮌스터 조각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올해 5회째를 맞이하는 조각프로젝트는 카스퍼 쾨니히(Kasper Koenig)가 1회부터 꾸준히 총감독을 맡고 있고 브리타 페터스(Britta Peters)와 마리아네 바그너(Marianne Wagner)와 큐레이터로 함께 준비했으며 19개국의 작가 35명이 참여하고 있다. 준비기간 동안 세 개의 매거진이 발간되었는데 첫 번째 ”Out of Body”는 퍼포먼스에 관한, 두 번째 “Out of Time”은 시간, 마지막으로 “Out of Place”는 장소특성화에 관한 테마를 가지고 사회와 신체, 시간, 장소의 개념들이 점점 증가하는 디지털화 시대에 어떻게 달라지고 또한 예술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전시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이 조각프로젝트에 초대된 세계적인 작가들은 꾸준히 “예술과 공공장소 그리고 도시의 주변 환경과의 관계”에 관한 작업을 진행하고, 여타 2-3년 주기의 비엔날레나 아트페어 성격의 행사와는 비교가 안되는 10년이라는 오랜 준비기간 동안 스스로 전시할 공간을 찾아서 작업을 진행한다. 작업들이 시내 중심가와 시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원형산책로 프로메나데(Promenade)주변과 하펜(Hafen), 아호수(Aasee)를 비롯한 시 전역에 전시되기에 많은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작품을 자연스럽게 향유하고 또한 뮌스터 방문객들에겐 시내 안 밖으로 도보나 자전거를 타고 조각 작품을 찾아다니며 입장료가 없이 누구나 부담 없이 작품을 즐길 수 있다.
올해는 예외적으로 Marl이라는 뮌스터 근교 작은 도시에서도 몇 작품을 선보이며 각 도시의 공공콜렉션을 교환해 다른 장소에서 선보이고 또한 이전보다 관람객과 상호작용을 실험하고 질문하는 퍼포먼스와 비디오작업들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등 이 시대의 조각의 개념과 공공영역의 예술에 대한 재규정을 반영하며 예술을 통해 비판적 경험 장을 만들어 다양한 장르의 사회적, 철학적, 정치적 관계를 질문하고 있다.

지난 2012년 카셀 도쿠멘타에 참여하기도 했던 프랑스출신의 피에르 위그는 2016년 폐장되어 곧 허물어 질 아이스링크에 3미터의 땅을 파고 피라미드 모양의 개폐식 천장의 창문을 통해 공간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프로젝트를 보여준다. 우리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몰두하면서 예술로 표현할 수 있는 레퍼토리의 경계를 없애고 예술, 기술 그리고 자연의 결합 속에서 ‘실재’에 관한 개념을 확장시킨다. 사라져가는 공간을 재해석해서 현대미술을 보여주는 이 작업 속에서 시민들은 자신들이 즐겨 찾던 장소가 허물어지기 전, 그 공간 안에서 새롭게 펼쳐진 작업을 통해 자연스레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며 현대 미술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 해 본다.

뉴욕에서 작업하고 있는 니콜 아이젠만 역시 뮌스터 시민들의 산책로 프로메나데(Promenade)주변에 연못을 설치하고 다섯 피규어를 함께 전시하고 있다. 공공장소에서 통상 마주치기 쉬운 장면이지만 장식적이며 고전적 방법을 벗어나 매력적이거나 영웅화된 형상이 아닌 뭔가 어색하고 반영웅적인 형상을 통해 공공장소 안에서 오래된 연못의 장식품으로써의 조각품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일상적이나 새로움을 담은 이 작품 역시 뮌스터 조각프로젝트의 성격을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터키출신의 아이세 에크만은 뮌스터 항구 북쪽의 주말이면 항시 관광객이 즐비한 강기슭과 상대적으로 공장지대의 음습한 남쪽기슭을 가로지르는 물속에 수면보다 살짝 낮은 길을 만들었다. 분단되어 보일 수 있는 양쪽 지역의 공간을 ‘물 위‘ 다리가 아니라 ‘물 속‘ 다리로 연결시켜 관람객들이 마치 물위를 걸어 다니는 듯 직접 체험 할 수 있다. 여름철의 친절한 이벤트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시(詩)적이면서도 점차 수송과 운반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가는 뮌스터 항구의 장소를 선택해 뮌스터 특정장소의 의미를 되짚어보거나 유럽의 난민문제나 종교적 상징 등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주변 환경과 시민, 관광객의 경험으로 완성되는 작업을 통해 공공장소에서의 예술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2013 베니스비엔날레 영국 대표 작가였으며 2004년 터너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제레미 델러는 이번 뮌스터 조각프로젝트에서 2007년부터 10년간 진행해 온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다. 10년전 54개의 뮌스터 주말정원클럽에 2017년까지 각자의 정원에서 발생하는 개인적인 사소한 일부터 작물의 성장 과정이나 기후의 변화 등을 자연스럽게 사진이나 글, 스케치로 기록하며 ‘정원일기’를 작성해 줄 수 있는지 제안했고 그 중에 다양한 국적의 주말정원클럽의 시민들이 만든 지난 10년간의 기록을 대략 30권의 녹색 정원일기장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번 델러의 작품은 시민들에게 일상생활에서 예술과 문화에 다가갈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고 사회적, 환경적, 미학적 기능 안에서 삶을 어떻게 함께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지 실험하고 또한 주변 자연환경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역과 현지인이 배제된 단기간의 보여주기식 공공기획과 행정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데 작가의 모습보다는 지역주민이 직접 주인공이 되어 흥미와 관심을 갖고 10년 동안 참여하여 진행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독일대표작가로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했던 히토 슈토이얼은 영상작업과 설치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Hell Yeah We Fuck Die‘ 라는 제목은 온라인 음악잡지 빌보드지 중에 지난 10년간 영어 음악차트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었던 다섯 단어의 나열이다. 이 단어들은 다시 음악작곡을 위한 베이스역할을 하고 다시 빛나는 글자 모양으로 설치되었다. 로버트 실험장면의 영상은 LBS건물 (작품이 전시 되고 있는 장소)이 건설되기 전 기존에 위치했던 옛 뮌스터 동물원과의 장소특정적 관계를 통해 동물들의 생존지역과 현대산업기술의 관련성 그리고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새롭게 인식하며 고민하게 만든다. 또 다른 영상작업에서는 터키의 남동쪽이며 시리아와의 국경지역인 Cizre배경으로 핸드폰 SIRI 소프트웨어를 연결시켜 전쟁 속에서 컴퓨터 기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물음을 던지고 있다.

대략 살펴본 올해의 전시 작품처럼 40년 전, 뮌스터 시민에게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불러일으키고자 시작된 뮌스터 조각프로젝트는 어느새 10년 주기라는 호흡처럼 서서히 세계의 공공미술의 모범이 되어가고 있다. 필자가 유학생활을 했던 당시의 뮌스터 2007년 조각프로젝트를 되돌아보면 뮌스터 시민들은 100여 일간의 프로젝트 진행기간 동안 전시를 본다는 생각보다 여유롭게 산책하듯 주변의 작품들을 지나치고 발견하며 자연스럽게 일상 속으로 맞이했다. 시나 개인 기증자가 구입한 작품은 영구 설치되어 더욱 더 일상의 한 조각으로 도시에 존재하게 된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이 프로젝트가 한 번도 도시를 직접 변화 시키고자 노력하지 않았던 것처럼 앞으로도 작품이 도시에 원래 존재했던 것처럼 일부분으로 흡수되어 공공장소 안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프로젝트로서 역할을 하고 진행되길 개인적으로 바라며,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10년 후 다시 뮌스터를 방문 했을 때에는 여전히 ‘조각’이 무엇이라 불리며 이해되고, 어떠한 작업들이 익숙함과 새로움의 관계 속에 어떤 모양새로 하늘아래 펼쳐질 지 기대해 본다.

 

글, 사진/ 안상훈

서른 나이에 독일로 떠나 뮌스터, 베를린에서 10년 넘는 시간을 흘러 다니다가
올해 귀국해 인천아트플랫폼 8기 입주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의 예술가 부엌

마약 하는 여자
‘쏴아악’ 수돗물이 쏟아지고 ‘탁!탁!탁!’ 마늘이 잘린다. 그릇은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고 파리는 ‘윙~윙’거리며 자꾸 몸에 달라붙는다. 싱크대 구석에는 비눗물과 식초를 담은 컵이 놓여있다. 영국 작가, 알렉스가 야심 차게 만든 ‘파리 잡는 컵’을 들여다보니 파리 몇 마리가 둥둥 떠 있다. 흠, 효과는 있지만, 부엌에서 익사한 파리를 보자니 영 찜찜하다. 냉장고를 여니 고약스러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누군가 먹다 만 파스타를 그대로 넣어두었다. 벽지에 바르는 풀이 바짝 말라붙은 것 같다. 썩은 양파, 끈적끈적한 파프리카도 있다. 도대체 누구 거야! 소리는 지르지 못하고, 인상을 구기며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냉장고가 더럽건 말건 누군가는 부엌 한쪽에선 막 요리한 노란 커리를 먹기 시작하고, 누군가는 슈퍼에서 사 온 독일 소시지가 크기만 하지 짜다고 불평한다. ZK/U 베를린 레지던시 부엌은 지나치게 활기차다. 눈을 감고 여기서 나는 온갖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엉뚱하게도 내가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기분이다. 머나먼 이곳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란 느낌 때문인가? 이래저래 애증이 엇갈리는 레지던시 부엌에서 나도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고 미숫가루를 꺼내 든다.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물과 섞어 미숫가루를 타는데, 옆에서 토마토를 자르던 아일랜드 작가, 레베카가 자꾸 힐끔거린다. 그녀에게 물었다. 한번 마셔볼래?

“정말? 고마워! 근데 이게 뭐야? 무슨 마약처럼 보이는데… 하하, 영화에서 많이 봤잖아? 지퍼 백에 담긴 밀수품 가루…”

풉! 그러고 보니 색이 좀 다르긴 해도 오해하기에 십상이다. 나는 담배도 안 피우는데 순식간에 베를린에서 마약 하는 여자가 돼버렸다. 그나저나 미숫가루를 뭐라고 해야 하나?

‘이건 미숫가루라는 건데, 콩을 갈아 만들어. 아, 콩뿐만 아니라 콩이랑 비슷한 쌀, 보리 같은…뭐라 그러지? 그러니까 ‘콩 친구들’ 있잖아? 콩이랑 비슷한 곡물들…’

멥쌀이 영어로 떠오르지 않아 대충 ‘콩 친구들’이라 설명하면서 나도 속으론 좀 우습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이 소리를 들은 다른 작가들까지 귀를 쫑긋거리며 우리 대화에 끼어든다. 그들이 진지하게 묻는다. ‘콩 친구들’, 그들이 과연 누구인지, 미숫가루에 꿀이나 설탕 대신 다른 걸 넣으면 어떤지… 아이고,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그 후 미숫가루를 한 모금 입에 넣을 때까지 한참 시간이 흘렀다. 아이, 못 살겠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방송 쿠킹쇼
ZK/U 베를린 레지던시엔 작업실이 열세 개 있다. 그런데 부엌은 달랑 하나뿐이다. 처음엔 어떻게 스무 명이 부엌 한 개를 같이 쓰나 의아했는데 뜻밖에 잘도 굴러간다. 매일 누군가와 같이 써야 하는 불편만 빼면 말이다. 부엌 찬장엔 각자의 방 번호가 붙어있다. 냉장고 역시 방 번호에 따라 칸칸이 나눠쓴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곳을 침범했다간 따가운 눈초리를 받는다. 웬일이람. 베를린에만 가면 천장 높은 유러피언 키친에서 우아한 브런치나 다이닝을 즐길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뭐 단체생활이 따로 없다. 게다가 부엌 한가운데 긴 테이블은 ‘요리 프로그램’을 떠올린다. 다들 나란히 서서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여러 요리 프로그램을 동시에 시청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난다.

처음 여기서 지내기 시작했을 때는 부엌에 가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내가 뭘 먹는지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다른 작가들 시선이 불편했다. 게다가 내가 뭘 만드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온갖 과정이 드러나는 것도 어색했다. 다행히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을 조금씩 즐기게 되었다. 단, 피곤하거나 괴로워 조용히 밥만 먹고 싶은데 누군가 자꾸 말을 거는 날만 빼고

레지던시에서 열리는 이벤트 중 하나는 ‘Thursday Dinner’다. 부엌이 가장 활기찬 날이다. ‘목요일 저녁’이란 이름 그대로 작가들이 매주 돌아가며 음식을 준비하는 날이다. 식사 후에는 ‘아티스트 토크’가 이어진다. 어쩌면 단조롭다고 할 수 있는 레지던시 생활에서 이번 주 ‘목요일 저녁’은 누가 하는지, 무슨 음식을 하는지는 이곳의 빅 이슈다. 

지금 이곳엔 이집트, 캐나다, 호주, 한국, 영국, 스웨덴, 중국, 독일, 아일랜드, 이란, 벨기에, 칠레 등에서 온 작가들이 머문다. 이렇게 다양한 국적을 가진 작가들이 요리하다 보니 종종 흥미로운 일이 종종 생긴다. 이집트 작가, 라미스(Lamis)는 호무스(hummus)를 직접 만들어 먹는다. 직접!

“아주 간단해, 일단 병아리 콩을 갈고 거기에 식초, 레몬, 마늘, 그리고 올리브 오일을 섞어. 그리고 ‘적당히’ 소금과 후추를 뿌려주면 되는 거야, 기호에 따라 ‘적당하게’. 간단하지?”

그녀가 알려준 대로 ‘적당히, 적당하게’ 넣고 뿌리는 게 간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좋아하는 중동 음식 중 하나가 호무스다. 한국에서 종종 생각나는 음식 중 하나였는데 베를린 레지던시에서 이집트 작가에게 호무스 만드는 법을 배울 줄이야! 그녀가 알려준 대로 호무스를 만들어보지만 ‘적당히’ 넣으라는 말이 참 모호한 탓인지 나는 왠지 사 먹는 게 더 나을 것도 같다. 여기 와서 알았다. 미역의 미끌미끌한 촉감을 싫어하는 유럽인들이 많고, 김밥을 만들어주어도 간장을 주르륵 부어 먹을 만큼 짠맛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미역을 불리건, 된장을 풀건 음식을 할 때마다 밀려오는 질문에 하나둘 대답하다 보면 만들고 먹고 치우는 데 두세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무슨 음식인지, 어느 나라 음식인지, 재료는 어디서 샀느지, 어떻게 만드는지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에서부터 한식의 종류는 어떤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식혜나 수정과 같은 디저트 얘기까지 하다 보면 도무지 끝이 없다. 어쩌면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다만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낱낱이 공개되고, 매번 원치 않는 비평을 받는 것만 빼면 말이다. 레지던시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그 시간만큼은 누구나 국가별 대표선수가 되어 생방송 쿠킹쇼의 주인공이 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제발 청소 좀 합시다
“PLEASE look back at what you are leaving behind after cooking.”
한참 웃었다. 이게 뭐람, “밥 먹고, 제발 청소 좀 하자!”는 단체 이메일이라니… 지금 내가 고등학교 기숙사에 있나? 전 세계 훌륭한 작가들이 모여 있는 베를린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선 종종 이런 이메일을 받는다. 사실 내가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 한국에서부터 받았던 잔소리 메일이다. 지난번에 지냈던 독일 다른 레지던시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이런 메일을 받아도 할 말은 없다. 내 눈으로 직접 ‘아티스트 키친’의 실상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엌의 청결도가 이 모양이다 보니 한 달에 한 번 있는 ‘부엌 대청소 날’ 빠지기라도 하면 엄청난 눈총을 받는다. 이해하자고 들면 어느 정도는 이해된다. 여러 사람이 부엌 하나를 쓰자니 깨끗한 부엌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국적별, 성격별로 설거지하는 방법, 물건 놓는 장소, 냉장고 사용 방법이 전부 다르다. 부엌을 관찰보다 보니 나라별로 음식에 관한 믿음, 체질에 관한 의견 또한 전부 다르다는 것도 흥미롭다. 예를 들어, 아침에 커피를 꼭 마셔야 하는 사람, 글루틴이 들어가지 않은 빵만 먹는 사람, 카페인이 들어간 차는 마시지 않는 사람, 우유 말고 두유만 마시는 사람, 이슬람 금식 기간인 ‘라마단(Ramadan)’을 지키는 사람, 라마단 시간을 피해 새벽에 먹는 사람, 고기를 좋아하지만 양고기는 먹지 않는 사람 등 정말 식성도 문화도 다양하다. 다양한 작업만큼이나 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일인 가구가 많아지면서 밥을 해 먹는 사람이 줄었다고 하는데 이곳만큼은 정반대다. 많은 작가들이 매일 새로운 요리를 시도하고 배우는 일에 열정적이다. 때로는 작업실에서 작품 만드는 것보다 부엌에서 밥을 할 때 한결 열정적이다. 어쩌면 음식을 만드는 게 작품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기 때문일까? 작품으론 만족하기 어려운 다른 이들과의 소통을 음식으로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레지던시 부엌에서는 음식만 만드는 건 아니다. 여러 회의, 아티스트 토크 또한 여기서 이루어진다. 긴 식탁은 회의 탁자가 되고, 선반 위 하얀 벽은 프로젝터를 쏘는 스크린으로 변한다. 가끔 다른 작가의 사생활 같은 각가지 가십, 혹은 작업에 관한 고민, 불평도 흘러 나간다.
매달 열리는 레지던시 ‘오픈 하우스’ 때 부엌 전시장으로도 바뀐다. 부엌 한쪽에 영상을 쏘고 식탁 가운데 작품을 전시한다. 미팅, 발표, 요리, 식사, 전시, 파티,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이 레지던시 부엌이다. 부엌이자 사교장, 전시장, 사무실, 커뮤니티 공간이다. 각기 다른 국적의 작가들이 각 나라의 고유한 음식을 보여주는 문화 공간이다.

‘음식’ 하면 자연스럽게 잘 차려진 음식과 맛있게 먹는 모습이 떠오른다.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 역시 전시를 하면 자신의 작품이 사람들과 소통하고 좋아해 주길 바란다. 누군가와 음식을 나눠 먹는 건 그와 생활을 공유하는 일이고, 작품을 만들고 선보이는 것 또한 내 이야기를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도 난 북적북적한 레지던시 부엌에서 밥을 한다. 온갖 논평이 끊이지 않는 생방송 쿠킹쇼에 한국을 대표해 참가한다. 하루도 빠지지 않는, 피곤하고 동시에 즐거운 ‘데일리 이벤트’다. 여기 머무는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만큼 다양한 인생과 작업을 부엌에서 발견한다. 음식을 같이 만들고, 밥을 같이 먹으며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매일 새로운 음식과 새로운 작품이 만들어지는 곳, 그곳이 베를린의 예술가 부엌이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은 더러움에 종종 화들짝 놀라지만 한국의 깨끗한 내 집에 돌아가면, 어쩌면 간절히 그리울 2017년 여름이다.

 

글ㆍ사진/ 이승연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미래의 이야기를 담은 상상의 작업으로 현재를 신화로서 기록하는 것, 이것이 기이한 듯 보이지만 명랑한 내 작업이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현재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베를린 ZK/U 레지던시에 입주 중이다. 이승연




베를린과 할머니

함흥 운흥리, 용숙씨
베를린에 오기 전 경기도 하남의 할머니집을 찾았다. 우리 할머니 이름은 김용숙, 고향은 함흥이다. 나는 이름밖에 알지 못하는 곳, 북한 함흥.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함흥에서 살았던 집 기억나?

“그럼, 기억나지. 함흥 운흥리! 아주 큰 집이었어. 이짝 동쪽 대문으로 들어오면 소나무, 과일나무가 있고, 아름답게 만든 정원이 있고, 그리고 가운데 이짝으론 마루가 있고 창문을 열면 아까 그 정원이 보이고, 왼쪽에는 다다미방,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있었어. 커다란 마루에서 밖을 바라보면 앵두나무, 소나무, 포도나무가 보였어.”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할머니는 큰 집에서 산다. 근사했던 북한 집과 달리 남한 집은 동네 집장사가 지은 탓에 건축비보다 수리비가 더 많이 들어갔지만…
할머니가 함흥을 떠나 남한으로 온 건 겨우 스무살 때 일이다.

“따라랑 따라랑 6.25 나가지고 흥남에서 배 타고 왔어. 1.4 후퇴 때 말이지. 미군들이 함흥까지 들어왔다가 다시 후퇴를 하면서 피난민을 다 배에 실었어. 배에 다 실어가지고 거제도에 내려놨어. 피난 나왔다가 바로 돌아간다 생각했지. 다 같이 피난갈 이유도 없었고, 원래는 내가 남기로 했는데, 아버지가 나도 같이 가자고 그러더라고. 집 지켜야 한다고 동생 두 명은 집에 남았어. 친척이나 친구들? 가들은 다 안 나왔어.”

따~라앙랑 따~라앙랑,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퀴리부인처럼 여성 화학자가 되고 싶었던 우리 할머니 용숙씨는 어느날 갑자기 고향을 등지게 된 일이 어이없는지 따라랑 따라랑, 전쟁을 신나게 표현한다.

베를린ZK/U레지던시에서 지내다보니 통속적이지만 북에서 피난 온 할머니와 동서로 분단되었다 통일된 베를린 역사가 겹쳐보인다.

“바로 다시 돌아갈 줄 알았지!”

할머니가 맨몸으로 남한에 나온 이유다. 하지만 결국 할머니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선을 자신도 모르는 새 넘어버렸다. 여든여섯 할머니가 함흥 운흥리에 다시 갈 수 있을까 모르겠다. 베를린에 온 지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아직 베를린 장벽에 가보지 않았다. 오늘은 왠지 그곳에 가봐야 할 것 같은 날이다.

 

너무 낮지만 견고한 장벽
유치하고 단순하다. 장벽과 철조망이란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휴전선과 마찬가지로 베를린 장벽은 벽을 세워 동독과 서독을 분리했다. 너와 내가 다르니깐 나는 여기 살고 너는 저기 살란 식 아닌가? 마치 초등학교 때 책상에 선을 긋고 짝꿍에게 넘어오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동서독 분단 시절, 동독에 위치한 베를린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었고 결국 서베를린은 동독에 완전히 둘러싸인 섬 신세가 돼버렸다. 우리나라로 치면 평양의 절반에 남한사람들이 산다는 거 아닌가? 당시에는 서베를린을 공산주의 국가인 동독 안의 자본주의 국가, 서독 지역이란 이유로 ‘육지 속의 섬’이라 불렀다. 결과적인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독이 서베를린을 포기하지 않은 건 서독에 이롭게 작용했다. 장벽 저 편에서 높게 세워지는 빌딩들을 바라보며 동독사람들은 서독의 풍요를 부러워했고 많은 동독 사람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다. 누군가는 성공했고 누군가는 총을 맞고 쓰러졌으며, 긴 세월이 흐른 후 결국 장벽은 허물어졌다. 만약 평양이 절반씩 남북으로 나뉘어 한편에 남한 사람들이 살았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까? 독일처럼 이미 통일을 이루었을까? 통일이 되었다면 어느쪽으로 되었을까 하는 식의 공연한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오스트 반호프(Ostbahnhof)역에 도착했다. 레지던시에서 동쪽으로 40분 정도 떨어진 곳이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걷다 보니 저 멀리 장벽이 보인다. 드디어 왔다.

그런데 막상 장벽을 마주하니 좀 당황스럽다. 왜 이렇게 낮아? 게다가 두께마저 얇다. 낮고 얇은 장벽을 빼곡히 채운 건 전세계 작가들의 그래피티다. 베를린 사람들은 이곳을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1.3k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야외 갤러리다. 도로변이 구동독이고 반대편 슈프레(Sprre.R) 강변 쪽이 구서독이다. 베를린 장벽 뿐만 아니라 수프레 강 역시 동서독을 나누는 국경이었다.

벽을 따라 걷다 보니 장벽에 그려진 그림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장벽 반대편으로 길을 건넜다. 그제야 그림들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여전히 뭔가 아쉽다. 그림이 너무 많고, 그 앞을 오가는 차가 너무 많아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기 어려운 탓이다.

종종 손상된 그림도 보인다. 멋대로 장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훼손하면 안된다는 경고가 무색하게 낙서를 막는 건 쉽지 않은가 보다. 나로선 장벽을 빽빽하게 채운 그림보다 인상적인 건 벽 두께다.

고작 한 뼘 정도 두께다. 수많은 이들이 이렇게 얇은 장벽 때문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니 참 허무하다. 장벽 위는 아치형으로 둥글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장벽 위에는 사람들이 넘을 수 없게 날카로운 철조망이라도 설치해놓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치형의 모양이라 뭔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사람들이 장벽 위를 잡고 넘기 힘들게 하려고 둥글게 만들었다고 한다. 장벽 한편에서는 부서진 베를린 장벽 조각을 판다. 장벽의 잔해라는 돌덩이를 상자에 담아 파는데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곳 베를린 장벽의 다른 이름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다.

과거에 목숨을 걸어야 넘을 수 있었던 장벽은 이제 전 세계 관광객이 찾는 관광지로 변했다. 베를린 시민들은 분단의 상징을 갤러리로 바꾸었다. 독일 사람들이 과거 베를린 장벽과 역사를 간직하고 기억하는 방식이다.

 

신념 또는 맹신
장벽을 보고 레지던시로 돌아오니 건물 앞에 있는 공원에선 늘 그렇듯 터키 아이들이 뛰어논다. 레지던시가 위치한 지역은 베를린 서쪽, 시멘스트라세(Siemensstraße)인데 터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덕분에 주변에는 저렴한 케밥 식당과 터키 수퍼마켓 등이 많다. ZK/U레지던시는 특이하게 공원 한가운데 있어 항상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이곳 베를린 ZK/U 레지던시는 기차역을 개조해 문을 열었다. 과거의 플랫폼은 현재 테라스로 변신했다. 그 때문인지 매일 아침 식사를 들고 나와 테라스에서 먹을 때마다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우연히 흥미로운 사실을 한 가지 알게 됐다. 베를린이 동서로 나뉘었을 때 기차역은 서독에 위치했지만 동독 사람들이 근무했다고 한다. 동독에서 만든 기차가 지나가는 곳이라 동독 사람들이 관리하는 희안한 기차역이었다. 기차역을 가운데 두고 공원이 만들어진 이유다. 공원이 일종의 국경 역할을 한 셈이다. 공원을 지나 도로만 건너면 서독이었다. 레지던시 디렉터, 마티아스 아인호프(Matthias Einhoff)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에 아주 큰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 여기서 일했어요. 이를테면 ‘스트롱 빌리버 (Strong Believer)’들이라 할까? 마음만 먹으면 쉽게 서독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이들은 결코 동독을 떠나지 않았죠. 자기들 체제에 대해 대단한 믿음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머물었던 곳이 바로 이 곳입니다.”

 

베를린의 함흥 할머니
레지던시 건물에서 공원 끝 도로까지는 100m가 채 안 돼 보인다. 과거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거리다. 당시 여기서 일했던 동독 사람들은 매일 서독 사람들을 만나면서, 공원 너머 서독의 모습을 바라보며 동요하지 않았을까? 마티아스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믿음을 가진 ‘스트롱 빌리버’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한편 의아하다. 반대로 서독에서 동독으로, 혹은 남한에서 북한으로 가지 않은 사람들 또한 스트롱 빌리버들 아닌가? 과거 서독 지역에서 동독 사람들이 일하던 기차역에서는 이제 전세계 예술가들이 머물며 작업한다. 동독 사람들이 종일 바라보았을 기차역 앞 공원에서는 매일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치고, 터키 아이와 독일 아이가 함께 뛰어논다.

할머니는 피난을 떠날 때 곧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 자기 의지로 내려왔지만, 곧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경계를 넘었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가 지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걸 알았어도 할머니는 배를 탔을까? 할머니 의지와 상관없이 생긴 경계는 수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건재하다.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나는 할머니에 관한 작품을 만들어 레지던시 건물 지붕에 세우려 한다.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을 지켜보는, 이를테면 어처구니인 셈이다. 나는 런던으로, 베를린으로, 파리로 여행을 다니지만 할머니는 유럽에 와보지 못했다. 허리도 아프고 귀도 잘 안들리는 할머니가 여기까지 직접 올 순 없으니 작업을 통해서나마 할머니를 이리 모시고 와 베를린을 보여주고 싶다.
할머니 모습을 한 어처구니는 함흥에서 온 내 할머니이자 분단된 나라에서 북한을 고향으로 둔 많은 이들의 모습이다. 한편 베를린 사람들에겐 수십년 전 동서독 분단시절을 상기시킬 것이다. 어처구니를 세우고 나면 공원에서 뛰어노는 터키 아이들에게 할머니 얘기를 해주고 싶다. 우리 할머니나 너희들이나 이유가 무엇이건 경계를 넘었구나. 쉽지 않겠지만 경계 또는 국경을 넘은 너희들이 예쁘게 자라기를 기도하겠다고.

 

글ㆍ사진/ 이승연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미래의 이야기를 담은 상상의 작업으로 현재를 신화로서 기록하는 것, 이것이 기이한 듯 보이지만 명랑한 내 작업이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현재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베를린 ZK/U 레지던시에 입주 중이다. 이승연




베를린의 ‘놀라운 방’

빨간 깃발의 유혹, 미 컬렉터스 룸
한적한 일요일 오후, 베를린 한복판의 미테(Mitte) 거리를 설렁설렁 걷는다. 베를린의 핫 플레이스가 모여 있는 곳이다. 하얀 건물에 내걸린 빨간 깃발 하나가 눈길을 잡아 끈다. 비가 내려 축축이 젖은 잿빛 길바닥과 빨간 깃발, 그리고 ‘Me’라고 쓰인 하얀 글자가 경쾌하게 어우러진다. 바람에 우아하게 펄럭이는 깃발이 마치 “안으로 들어와 보지 않겠어?” 하며 나를 유혹한다. 가만히 살펴보니 ‘Me’라고 쓰인 큰 글자 아래 ‘컬렉터스 룸 베를린 스티프퉁올브리히트(collectors room berlin stiftung olbricht)’라고 작은 글자가 쓰여 있다. 미 컬렉터스(Me Collectors)라고? ‘미(Me)’라면 ‘나’를 말하나? 내 방 컬렉션…? 아니면 무슨 컬렉터의 방이라고…? 얼핏 미술관처럼 보이는데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슬쩍 보이는 모습은 카페나 레스토랑 같다. 호기심이 생겨 1층 문을 잡아당기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커피를 마신다. 세련된 디자인의 카페다. 전시공간은 카페를 지나 안쪽에 위치한다. 얼핏 밖에서 짐작하기엔 작은 공간인 줄 알았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오니 꽤나 크다. 높은 천장에 하얀색 벽으로 마감한 전형적인 갤러리다.

 

시그마 폴케의 점(dot)
카페 안쪽 전시공간에서는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시그마 폴케(Sigma Polke)’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는 익숙하지만 시그마 폴케에 대해선 잘 몰랐다. 기존 이미지를 차용한 작품, 여러 종류의 실험적인 프린트 작품, 얼핏 팝아트처럼 보이는 작품들이 전시장 곳곳을 가득 채웠다. 1950년대 이후 대량 생산과 이미지의 복제 기술 발달은 예술가들의 이미지 생산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시그마 폴케는 이렇게 말했다.

“신문이나 TV에 종종 행복한 중산층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건 독일의 경제적 성장을 선전하기 위한 장식에 지나지 않아요!” 

그는 이런 가식적인 모습을 확대된 망점, 그리고 이미지를 중첩시켜 낯설게 만들어버렸다고 하는데 사실 내겐 이런 설명보다 영상으로 본 사소한 에피소드가 더 강하게 기억에 남았다. 

“사이프러스(Cyprus)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죠. 한밤중에 배가 고파 잠에서 깼어요. 냉장고에 둔 케이크가 생각났죠. 벌떡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케이크가 없어요!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니죠! 그런데 낙담하던 그 순간, 냉장고 안의 조명이 갑자기 내 눈 앞에 반짝반짝 아른거리기 시작했어요. 반짝반짝…”

그 후 폴케는 파란색, 분홍색, 은색으로 반짝이는 사각형을 그린 시리즈를 선보였다. 포장지처럼 반짝이는 종이를 잘라 이미지를 출력해 만든 작업이다. 냉장고 안을 비춘 조명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었다니, 참 소소하고 귀여운 사람 아닌가? 이뿐만이 아니다.

“어느 날 프린트를 하는데 프린터가 고장 났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프린트된 이미지가 너무 멋있는 거죠! 난 프린터가 고장 났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작품을 계속 출력했어요. 날마다 어떤 우연한 효과가 나타날까 기대하면서 말이죠. 정확히 17일 후 누군가 프린터를 수리해버렸고, 더 이상 멋진 이미지를 만들 수 없었어요. 도대체 누가 프린터에 손을 댄 거야?! 난 너무 실망했죠.”

그의 많은 작품은 전후 독일에서 통독까지 격동의 변화를 경험한 폴케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 메시지를 담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뜻밖에 사소하고 우연한 경험으로 만든 작품도 많다. 그는 일상적이며 평범한 경험을 무심코 흘려보내지 않고 매순간 새롭게 바라본다. 작업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무작정 뭔가 거대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빠지고 이내 불안해진다. 폴케는 거대한 이야기 대신 매일매일 경험하는 작은 일들을 ‘순간의 작품’으로 표현한다. 말은 쉽지만, 쉽지 않은 일 아닌가? 폴케의 많은 작품은 이미지가 확대된 망점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도, 풍경도 점으로 이루어진다. 가까이서 보면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언뜻 프린트된 것처럼 보이지만 폴케는 이 점을 전부 하나하나 손으로 그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 눈에는 세상이 점들로 보여요. 나는 점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점들은 내 형제이고, 나 또한 점이에요.” 

점…? 그가 말한 점은 무엇일까? 매일매일 스쳐가는 모든 일상,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과장된 행복,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순간을 말하는 것일까? 작가 역시 세계 안에서, 많은 점과 함께 살아가며 큰 그림을 이루고 있을 뿐이란 의미일까? 아티스트로 살아가는 내게 점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점이란 아마도 점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우주가 아닐까 싶다. 커다란 우주, 나와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은 각각이 독립된 존재를 가진 커다란 점, 곧 우주이다.. 폴케의 점에서 우주를 생각한다.

 

분더캄머, 호기심 캐비닛
1층 기획전에 이어 미 컬렉터스 룸 2층의 ‘올브리히트 컬렉션’인 <분더캄머(Wunderkammer)> 상설전을 둘러본다. 독일어 ‘분더캄머’는 ‘놀라운 방’이란 뜻이다. 르네상스 시절, 유럽의 귀족들은 이국적이고 신기한 물건을 방 안 가득히 수집해 사람들에게 보여주곤 했는데, 그런 방을 ‘분더캄머’ 혹은 ‘호기심 캐비닛(Cabinet of Curiosity)’라고 불렀다. 이름 그대로 분더캄머에서는 기이하고 괴이한, 또는 자연에서든 예술에서든 기존 규범이나 관습에서 벗어난 온갖 물건을 볼 수 있다. 미 컬랙터스룸의 분더캄머 역시 해골, 괴상한 동식물, 난장이와 거인의 초상, 기이한 산호, 정교한 시계, 마술 도구, 여러 종교적 소품 등을 전시한다. 베를린이 아니더라도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종종 이런 식의 ‘분더캄머’를 만난다. 비슷한 형식의 전시인데도 나는 늘 분더캄머에 빠져든다. 괴상한 모습을 한 여러 작품 또는 물건이 내 안의 무엇인가를 흔든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릴 만큼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물건들, 그리고 이를 보면서 상상하게 되는 기이한 이야기에 매료되고, 내 작업 또한 이처럼 기이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길 바라기 때문이다. 한편, 이처럼 평범하지 않고, 예외적이고, 놀라운 물건들만 모아둔 게 이상하다. 예술작품이란 꼭 이렇게 예외적이고 기이해야했을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면 예술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런 물건을 만들거나 애써 수집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늙은 아기처럼 생긴 생긴 인어, 고슴도치 같은 물고기, 겹겹이 쌓인 해골 더미를 보며 내 호기심은 점점 커진다.

 

개인 컬렉션으로 만든 미술관
알고 보니 미 컬렉터스 룸(Me Collectors Room)은 독일 에센 출신 컬렉터인 ‘토마스 올브리히트(Thomas Olbricht)’의 개인 갤러리다. 2010년 오픈했는데 유럽에서 제일 큰 규모의 컬렉션 룸으로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까지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한다. 오로지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해 이렇게 큰 건물을 지었다. 컬렉터라고 하면 막연히 예술과 관련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의학자이자 화학자다. 특히 내분비학을 연구했다고 하니 영국 유학시절 즐겨 찾던 ‘웰컴 컬렉션이(Welcome Collection)’이 떠오른다. 의학과 예술에 관한 갤러리인 웰컴 컬렉션 역시 ‘웰컴’이 자신의 컬렉션으로 만든 뮤지엄이자 미술관이다. 웰컴과 올브리히트, 두 사람 모두 의학을 공부했고, 개인 컬렉션으로 미술관을 만들었다. 의학자이지만 예술을 사랑했다. 이들은 컬렉터인 동시에 예술과 과학 콜라보레이터가 아닐까 싶다.

유럽의 여러 미술관에서는 종종 다양한 컬렉터의 소장품 전시를 볼 수 있고, 컬렉터의 오래된 집을 개조한 미술관도 많지만, 미 컬렉터스 룸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에서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작품을 수집한 개인 컬렉터가 새로 지은 최신 건물이다. 단지 개인 컬렉터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건물을 새로 지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예술가 못지않게 예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이 컬렉터다. 컬렉터가 작품을 사는 건 단순한 쇼핑이 아니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컬렉터가 어떤 작품을 사느냐에 따라 아트마켓의 흐름은 순식간에 바뀐다. 컬렉터는 아티스트를 지원할 뿐 아니라 큐레이터나 평론가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신진 아티스트를 찾아낸다. 폴 세잔(Paul Cézanne) 역시 모이즈 드 카몽도 (Moise de Camondo)라는 프랑스 컬렉터 눈에 띄어 세상에 알려졌다.
미 컬렉터스 룸의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컬렉션을 공개하고 싶은 이들에게 미술관을 빌려준다는 것이다. 자연히 미 컬렉터스 룸 전시는 2~3개월에 한 번씩 새로운 컬렉터에 의해 교체된다. 베를린의 미 컬렉터스 룸은 컬렉터가 수집한 작품을 위한 미술관, 컬렉터의 작품으로 구성되는 미술관이다. 한 마디로 컬렉터만을 위한 특별한 미술관이다. 한편 자기가 수집한 작품을 보여주고 싶은 개인 컬렉터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놀랍고 부럽다. 유럽 컬렉터의 컬렉션 규모는 한국의 컬렉터와 사뭇 차원이 다르다. 심지어 베를린의 미술관과 갤러리 정보가 실린 아트 맵에는 아예 ‘프라이빗 컬렉션(Private Collection)’ 항목이 따로 있다. 베를린에서 컬렉터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큐레이터의 기획에 의한 전시 아닌 순수한 개인 컬렉터의 컬렉션을 보는 재미가 기대된다.

비 내린 일요일 오후, 미 컬렉터스 룸의 두 가지 놀라운 방을 둘러보았다. 시그마 폴케의 점으로 둘러싸인 방,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기괴한 물건과 호기심으로 가득찬 방이다. 베를린 어딘가에 숨어 있을 또 다른 분더캄머를 찾아보고 싶다. 참 미 컬렉터스 룸(Me Collectors Room)의 ‘Me’는 ‘Moving Energies(움직이는 에너지)’의 약자다. 두 개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놀라운 에너지가 나를 움직인다. 언젠가 나도 나만의 작은 놀라운 방을 갖고 싶다.

 

글ㆍ사진/ 이승연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미래의 이야기를 담은 상상의 작업으로 현재를 신화로서 기록하는 것, 이것이 기이한 듯 보이지만 명랑한 내 작업이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현재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베를린 ZK/U 레지던시에 입주 중이다. 이승연




전세계가 멍때릴 날! 멍때리기 대회, 세계로 나아가다.

2014년 10월, 서울 시청 앞 잔디광장에서 첫 멍때리기 대회를 개최할 당시만 해도 이 대회가 몇 회를 더 개최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재미삼아 <제 1회 멍때리기 대회>라는 타이틀을 붙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올해까지 6번의 대회가 개최가 되었으니 앞날은 모를 일이다.
멍때리기 대회를 기획할 당시 나는 소위 ‘번 아웃(Burn out)’이라고 하는 소진증후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매일 나가던 작업실에서 붓을 들고 뭘 그려야 할지도 모른 채 허둥댔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정쩡하게 일상을 보내지 말고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보기로 결심을 했다. 그러나 쉬기로 결심하기 전과 후에도 여전히 초조함과 불안감이 괴롭혔다. 쉬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던 여러 날 중 문득 이런 단어가 떠올랐다. “멍때리기 대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때리는 집단을 등장시키는 모습을 상상하니 묘한 흥분감이 생겼다.
멍때리기 대회는 그야말로 그렇게 멍 때리던 어느 날 머릿속에 불현듯 떠올랐다. 바쁜 도심 속에 한가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집단을 등장시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목적이다. 바쁘게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조금은 약올리려는 생각과 멍때리는 집단과의 시각적 대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대회를 다듬어 나갔고 현재의 멍때리기 대회가 완성이 되었다.

2014년도 첫 홍보물을 SNS에 개시하며 참가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온라인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성황리에 첫 대회를 치르게 되었다. 

그 해 겨울, 중국에 사는 텐텐이라는 분에게 메일한통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는 이 대회를 북경에서 개최하고 싶다고 했다. 그들 역시도 고도성장을 하는 도시로 여느 바쁜 도시인의 삶과 다를 바 없었고 대회가 가진 의미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첫 이메일을 주고받은 지 8개월 만에 China Newsweek와 Oh, Not Galley의 주관으로 <제 2회 북경 국제 멍때리기 대회>라는 이름으로 2015년 7월 북경시내 한복판에서 대회를 치뤘다.
북경대회의 경험을 통해 이 대회의 국제대회로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고, 실제로 더 많은 나라의 여러 도시에서 매년 국제 대회를 개최하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후 2016년 봄까지 국내에서 조차 대회를 다시 개최할 수 있을지 조차 불투명했다. 몇몇의 공공기관에 제안서를 보내보았지만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러다 수원문화재단을 통해 겨우 <제 3회 국제 멍때리기 대회>를 치르게 되었고 곧바로 한강사업본부와 함께 한강 이촌 청보리밭 일대에서 <2016 한강 멍때리기 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특히 <2016 한강 멍때리기 대회> 개최 이후 갖은 Vice magazine과의 인터뷰는 세계 다른 나라 네티즌들의 반응을 더 크게 끌어냈고 이후로도 여러 세계 유명 매체를 통해 보도가 되었다.( 자세히보기 ▶ )
이후 루마니아, 호주, 슬로바키아, 콜롬비아, 미국, 캐나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 카타르, 방콕, 대만 등등 여러 나라의 매체와 인터뷰를 하거나 대회 개최 의뢰를 물어오는 메일을 받았다. 그 중 가장 적극적으로 대회 개최를 원했던 곳은 루마니아의 수도 부크레슈티의 한 사업가의 제안이었는데, 제법 오랜 시간 공들여 제안서를 만들고 서로 스폰을 찾기 위해 대사관과 연락하거나 여서 기업들을 찾아보았지만 아쉽게도 개최할 여건을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마침내 올 8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유럽에서의 <제 4회 국제 멍때리기 대회>  개최를 앞두고 있다. 작년 말 비영리 공공미술 단체인 FRANK Foundation의 Erwin Nederhoff씨의 제안으로 네덜란드 개최를 준비하게 되었는데 이 단체도 역시 비영리 단체이다보니 재원을 마련하는 길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인천문화재단의 국제교류 사업을 통해 사업비 일부를 충당하게 되면서 준비에 속도가 붙게 되었다. 

멍때리기 대회는 몇 개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퍼포먼스이면서, 시각 예술이면서 스포츠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자세히보기 ▶) 참가자들에게는 각자 자신의 직업을 대표하는 옷을 입고 오게 함으로써 그들이 모두 모였을 때 작은 도시로 보이게 계획했고, 참여자들의 멍때리는 모습은 단순히 대회 선수일 뿐 아니라, 대회 밖 바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메시지를 던지는 퍼포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 예술점수와 기술점수를 합쳐 우승자를 가리기까지 한다. 즉, 어떤 관점에 주목해서 이해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시각도 차이가 생기게 된다. 특히 FRANK Foundation은 실험적인 퍼포먼스로써의 가치와 대회가 가진 의미, 이렇게 두 개의 시선을 중심으로 멍때리기 대회를 이해하고 있다. 아직 대회 준비를 위해 갈 길이 멀지만, 유럽에서 이 대회가 어떻게 읽히고 받아들이게 될지 무척 궁금하고 설렌다. 이렇게 매년 세계 여러 도시에서 이 대회가 개최된다면 머지않아 전 세계가 멍 때릴 날도 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다시 하게 된다. 물론 나는 점점 멍때릴 시간이 부족해지겠지만 말이다. 

 

글/ 웁쓰양
사진제공/ 웁쓰양컴퍼니

웁쓰양은 <도시놀이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도시에서 예술과 결합된 소비없이 놀이할 수 있는 방식을 실험하고 있다.




베를린의 쾌락동산

평평한 지구보다 더 기이한 상상
베를린을 걷다 말문이 턱 막히는 세상을 만났다. 갤러리, ‘알트 문즈(Alte Münze)’에서 열린 <BOSCH. VISIONS ALIVE> 전시다. 세상에나,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다.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포스터를 보자마자 그에게로 달려갔다. 입장료는 비쌌고, 전시 공간은 허름한 창고 같았지만 나는 꿈꾸듯 그에게 빠져들었다. 중세 시대의 그림이 멀티미디어 이미지로 변신했다. 쿠션에 기대 몸을 누이고 그림을 바라본다.
코끼리와 기린은 새하얗다. 물가의 유니콘은 물을 마신다. 사람들은 벌거벗은 채 딸기와 블루베리를 정신없이 집어 먹는다. 집채만 한 딸기와 블루베리다. 마음 같아선 나도 그들 사이에 달려들어 거대한 딸기를 먹고 싶지만 다가갈 수는 없다. 그들처럼 옷을 홀딱벗고 게걸스럽게 먹을 자신이 없다.


딸기는 포기하고, 하늘을 본다. 사람들은 거대한 새를 타고 파닥파닥 날아다닌다. 거대한 유리구슬이 연못에 둥둥 떠있다. 가만 보니 남녀가 구슬 안에서 사랑을 나눈다. 연못에 둥둥 떠 있는 유리구슬 안의 사랑이라니… 심지어 금이 쩍쩍 갔다. 금방 구슬은 깨져버리고 물 속으로 가라앉을지 모르는데 남녀는 개의치 않는다. 문득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부엉이 눈과 마주쳤다. 심장이 덜컹거린다. 보면 안될 것이라도 보았나? 고작 부엉이 눈빛에 흔들리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구슬과 부엉이를 지나 걷다 보면 히에로니무스 보쉬도 만난다. 깨진 달걀껍질 같은 몸이다. 달걀껍질 안에서는 손가락만한 사람들이 술을 벌컥벌컥 마신다. 보쉬 몸 안에 들어간 사람들을 보자니 갑자기 내 몸 속에서도 사람들이 기어다니는 것 같다. 갑자기 온몸이 간질거린다.



보쉬는 1500년경 사람들이 지구를 평평하다고 생각하던 시절 이런 그림을 그리고, ‘쾌락의 동산’ (Tuin der lusten)이란 제목을 붙였다. 하지만 내가 지금 보는 건 움직이는 영상이다. 그것도 하나의 화면이 아닌 여러 개의 다발적 화면이다. 영상으로 바뀐 보쉬의 그림은 좀 더 기괴하고 자극적이다. 눈 앞에서 수녀옷을 입은 돼지, 하늘을 나는 물고기, 칼이 꽃힌 거대한 귀가 날아다니고 기묘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보고 있자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전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상황을 바라보는데 나는 엉뚱하게도 마음이 설렌다. 난 왜 마음이 두근거릴까? 내가 늘 그리고 싶었던 기이하지만 유머러스한 그림과 닮았기 때문이다. 엉덩이에 장미꽃이 꽃힌 남자가 내 주변을 둥둥 떠다닌다. 엉덩이와 장미꽃이라니… 남자는 고통을 느끼겠지만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질투가 날만큼 보쉬의 엉뚱한 상상력이 부럽다. 더욱 놀라운건 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중세에 어떻게 이런 상상을 했을까? 보쉬는 죽음 후의 세계가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후 세상을 이렇게 집요하게 그려낼 수 있나? 그의 상상대로 죽음 후에는 과연 이런 세상이 펼쳐질까? 내가 죽으면 나도 ‘쾌락의 동산’에 가게 될까?

축 처진, 뭉뚝한 어깨 위의 슬픔보쉬 그림을 보다 보니  베를린 홈볼트 대학 근처, 노이에 바헤(Neue Wache)에서 만난 케테 콜비츠(Kethe Kollwitz)가 떠오른다.


1867년 독일 출생의 케테콜비츠는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아들과 손자를 연이어 잃은 후 ‘죽은 아들과 엄마’(Pietà)’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제목 그대로다. 엄마가 어깨를 주욱 늘어트리고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이다. 아들을 잃은 엄마라고 하기에는 너무 담담한 모습이라 가슴이 더 먹먹하다. 세상을 원망하며 절규할 법도 한데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그저 아들을 바라볼뿐이다. 그녀를 만난 곳은 홈볼트 대학 인근의 거리다. 혼잡한 거리 한 복판에 있는 노이에 바헤 건물에 우연히 들어섰을 때 ‘죽은 아들과 엄마’와 마주쳤다.


넓은 실내에는 오직 엄마와 아들, 그리고 나뿐이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느닷없이 작품과 마주했다. 당황스럽다. 게다가 짐작하기도 힘든 슬픈 이야기인 탓에 더욱 곤혹스럽다. 실내는 시끄러운 바깥 거리와 다르게 엄숙하고 고요하다. 엄마와 아들을 다시 찬찬히 바라본다. 고개를 숙인데다 머리를 감싼 스카프 때문에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슬픔에 빠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축 처진, 유난히 뭉뚝해보이는 어깨에 모든 슬픔을 올려놓은 것 같다. 아들의 바짝 마른 종아리도 눈에 띈다. 전쟁의 화염 속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아들의 마른 몸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엄마 머리 위의 동그란 천창에서 햇살이 내리쬔다. 마치 천국에서 떨어지는 빛 같다. 햇살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내가 ‘죽은 아들과 엄마’를 혹은 느닷없이 만난 것처럼 케테 콜비츠는 아들, 손자를 갑작스레 떠나보냈을 것이다.
보쉬가 죽음 후 세상을 그려냈다면 케테 콜비츠는 아들과 손자를 떠나보낸 엄마의 슬픔을 담담하게 표현했다. 아들과 손자는 어떤 마음으로 전쟁에 나갔을까? 자발적인 참전일까? 참전해야만 했을까? 나라면 어땠을까? 베를린 거리 한복판에서 어머니의 축 처진 어깨에 놓인 슬픔을 마주하며 살아남은 자, 그리고 떠난 자들의 심정을 헤아린다.

따뜻한 노란색 천으로 감싸진 누에고치의 심정 전쟁의 아픔을 보여주는 또 다른 공간이 있다.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Jüdisches Museum Berlin)이다. 위에서 바라본 건물도, 대각선으로 과감하게 뚫려있는 창문도 칼로 베어놓은 모양이다. 건물의 유명세 때문에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나? 칼집을 내어 박물관 전체를 잘라 놓은것 같아 나는 좀 섬뜩하다. 박물관 내부 전시를 보려면 정해진 동선으로만 이동해야 하는 것도 다소 강요처럼 느껴진다.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 유대인들이 남긴 편지와 물건을 살펴보고, 음성으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갖가지 사연을 읽다보니 마음이 아프지만 너무 세련되게 슬픔을 포장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편, 정해진 동선으로 걷다 보면 유대인의 역사를 시대별로 살펴보게 되는데 이를 통해 당시 유대인들의 상황을 잘 이해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의 입장에서 지나치게 슬픔을 강요받는 기분이다.


홀로코스터 타워에 들어가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벽을 타고 내려온다. 어둡고 고요한 곳에서 한줄기 빛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천국으로 가는 입구 같다. 너무나 비극적인 사건을 너무나 은유적으로 표현한 공간 탓에 나로선 조금 불편하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을 세련되게 포장해 죽음을 홍보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대대적인 상설전시보다 내게 더 와 닿은건 지하에서 전시 중인 스페인 작가 요그질(Jorge Gil)의 크리살리다스(Crisalidas)라는 작품이다. 크리살리다스는 스페인어로 번데기, 누에고치다. 제목 그대로 노란색 누에고치 안에 사람이 꽁꽁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있다. 노란색 담요 같은 천이 몸을 감쌌으니 따뜻할 법도 하지만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게 마음에 걸린다. 그 옆에는 누에고치 허물뿐이다.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누에고치를 계속 보고 있으려니 내가 꼭 거꾸로 매달린 채 꼼짝달싹 못할 것 같은 기분이다. 몸이 꽉꽉 조여 너무 답답하고, 여기서 떨어지면 어떡하지 불안하고, 피가 머리쪽으로 쏠려 힘들어, 엄마,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날아오를 수 있을까? 그런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수많은 목소리가 아우성친다.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 심정이 크리살리다스를 봤을 때 내 기분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마치 영원히 죽지않을 듯
다시 보쉬의 ‘쾌락의 동산’을 떠올린다. 물가에선 괴기스러운 물고기가 뭍으로 걸어 나온다. 물고기에 잡아 먹히는 사람들, 생전 많이 먹은 죄로 음식을 토해내는 사람들, 엉덩이에 꽃힌 나팔 때문에 괴로운 사람들, 하프에 온몸이 감겨 고통받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보쉬가 살았던 시대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음악을 연주하는 게 죄악시 되었을까? 그는 왜 악기로 고문당하는 사람을 그렸을까? 보쉬가 상상한 세계는 몽환적인 동시에 기괴하며,  삶은 악으로 둘러쌓여 있다. 과연 그럴까? 인간은 사악하기에 전쟁을 하고, 케테 콜비츠는 아들과 손자를 잃어야만 했을까? 미래에 또 다시 홀로코스터 같은 비극이 일어날까?


햇살 좋은 어느날, 베를린에서 마주한 세 가지 죽음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훗날 나는 과연 어떤 죽음을 맞을까? 나 또한 보쉬가 그린 쾌락 아닌 쾌락의 동산에 가게 될까? 나는 보쉬 아닌 내가 상상한 세상으로 가고 싶다. 그곳이 어떤 세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죽음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다.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살려고 애쓰다 보면 그 세상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지 않을까? 영원히 죽지 않을 듯 살다보면 말이다.

글ㆍ사진/ 이승연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미래의 이야기를 담은 상상의 작업으로 현재를 신화로서 기록하는 것, 이것이 기이한 듯 보이지만 명랑한 내 작업이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현재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베를린 ZK/U 레지던시에 입주 중이다. 이승연




이방인들의 도시, 베를린

이번 호 부터 ‘지구별 문화 통신’을 시작합니다. 인천문화재단은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지원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단의 국제교류 사업을 통해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다른 나라의 문화소식을 소개하는 코너로 운영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줄리아, 나 베를린에 가게 됐어.”
“와우, 언제든 우리 집에 놀러 와, 며칠 지내도 되고.”

나는 줄리아를 쉐핑헨(schöppingen)의 한 레지던시에서 만났다. 쉐핑헨은 독일 북서쪽 뮌스터(Münster) 인근의 작은 마을이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그녀는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 혹은 숨겨져 있던 이야기를 모티프로 작업을 한다. 동갑이기도 했고 관심사도 비슷해 쉽게 친해졌다. 작년 여름 베를린에 잠시 갔을 때 줄리아의 집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 그때 내가 본 베를린은 눈썹이 보일 만큼 짧은 앞머리가 유행이었고, 팔뚝만한 무스타파 터키 케밥(Mustafa’s Kebap)을 먹을 수 있는 곳이며, 거리를 걷다 보면 빈 벽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수많은 그래피티와 힙스터 같은 이들로 가득했다. 바람 불고 비가 흩뿌리는 거리를 걸으며 “아, 언젠가 다시 와야지. 그리고 나처럼 예술가로 사는 사람들을 만나 좀 더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올해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베를린에 다시 오게 되었다. 아! 베를린. 많은 사람이 예술가의 도시,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라 지겹도록 말하는 곳이다. 하긴 쉐핑헨에서 만나는 예술가들 역시 다들 베를린에 산다고 했지. 예술가 아닌 이를 만나기가 더 힘든 곳, 내가 처음 느낀 베를린이다. 마치 도시 전체가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베를린에 예술가가 많이 살게 되었을까? 줄리아가 베를린으로 이사 온 건 2011년, 그때도 이미 베를린에는 수많은 예술가가 모여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알다시피 베를린은 다른 독일지역에 비해 렌트비가 싸다. 물론 물가가 저렴하고, 수많은 종류의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그래서 작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더 많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 들었다. 그런데 정말 이게 다야? 이런 뻔한 이유 때문에 다들 베를린으로 온다고?

“승연, 난 베를린에 살지만 사실 내 영상 작업의 대부분을 베를린에서 찍진 않아. 촬영은 독일의 다른 도시, 다른 마을에서 하고 베를린의 내 스튜디오에서 편집하는걸 좋아해. 사실 베를린엔 예술가가 너무 많아. 그러다 보니 작품을 만들기 위해 지원을 받는 게 매우 어려워. 사실 지원을 받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지. 그렇지만 여기선 여러 사람들에게 쉽게 작업에 관한 조언을 들을 수 있고, 작업실에 초대해 편집 중인 작업을 보여주며 의견을 들을 수 있거든. 물론 난 집에서 먹고 자고 하니 파자마를 입고 편집하러 옆방으로 갈 수도 있고. 하하.”

줄리아는 베를린에 살지만 작업의 배경은 베를린이 아니다. 하긴 나도 서울에 살지만 내 작업이 서울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서울에서 살고 있기에 서울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내가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갔을 때 그곳에서 느끼는 이질감을 작업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 작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하는 건 흥미롭다. 줄리아가 사는 지역은 베를린의 동독지역인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이다. 그녀가 전에 살던 베를린의 노이퀼른(Neukölln)지역이 힙하고 트렌디했다면, 리히텐베르크는 조용하고 평범한 동네다. 2015년 그녀는 이곳으로 이사 왔다. 줄리아의 집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왠지 내가 상상하던 베를린의 이미지와는 좀 다르다. 관광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주민들도 베를린의 다른 지역에서 본 사람들과 달리 좀 더 거칠게 느껴진다. 그러나 동네를 좀 더 둘러보니 카페, 레스토랑, 수퍼마켓 등 필요한 건 다 갖춰진 곳이다. 여기 주민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오래 전부터 여기 살던, 베를린 출신 사람들?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 옮겨 온 사람들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줄리아, 네게 베를린은 어떤 곳일까? 혹 10년 후에도 베를린에 살고 있을까? 베를린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오가는 것 같아. 특히 예술가들 말이야. 그럼, 진정한 ‘베를리너’는 어떤 사람들일까?”

“글쎄, 난 베를린에 살지만 이곳이 내 고향이라곤 생각하진 않아. 베를린 같은 대도시에 살면서 내가 진정한 베를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흠, 10년 후에 아마 난 베를린에서 살고 있진 않을 걸. 아마 독일의 다른 작은 마을에 살고 있지 않을까? 지금 베를린의 내 집과는 달리 큰 집에 살며 동물들과 여유롭게 살고 싶어. 사실 작업을 하며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꼭 베를린에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 베를린 외 다른 여러 도시 또한 흥미롭고 매력적인 건 분명하니까. 그러나 아직까진 다른 도시가 나를 부르진 않네, 하하… 지금 난 베를린에서 행복해.”


많은 예술가가 살고, 오가고, 스쳐 지나는 곳, 베를린. 베를린은 이방인들의 도시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예술가가 작업을 위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영감을 얻기 위해, 베를린에 모여든다. 그 중 일부는 떠나가고, 일부는 남는다. 줄리아의 말처럼 이방인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베를린은 누군가의 고향이 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베를린에서 사는 동안 베를린은 잠시나마 누군가의 고향이다. 2017년 봄에서 여름까지 베를린에서 살게 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잠시나마 이곳이 나의 따뜻한 고향이 되길. 다시 만나 반가워, 베를린.

참, 나의 베를린 친구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인 줄리아 (Julia Charlotte Richter)를 소개합니다.
(줄리아 홈페이지 가기)

글 / 이승연
사진 / 박준, 줄리아(프로필)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미래의 이야기를 담은 상상의 작업으로 현재를 신화로서 기록하는 것, 이것이 기이한 듯 보이지만 명랑한 내 작업이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현재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베를린 ZK/U 레지던시에 입주 중이다. 이승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