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넓어지는 도시, 더 어려워지는 계획 ‘수도권 매립지’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자체나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하게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날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2011년 가을, 송영길 전 인천시장은 청라국제도시로 관사를 옮겨 2개월 동안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당시 청라국제도시와 검단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악취와 관련된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수도권 대부분 폐기물을 처리하는 수도권매립지를 지목하였습니다..

수도권매립지는 1992년 서울특별시가 사용해 온 난지도 매립장(지금의 마포구 월드컵공원)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농경지 목적으로 매립된 김포매립지 중 약 600만 평을 수도권 시·군이 사용하는 폐기물을 매립하기 위해 조성하였습니다. 단일 매립지가 이정도 규모인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미 25년 이상 된 이 매립지는 현재 제3매립장을 조성하여 이용 중이고, 매립이 종료된 제1매립장과 그 주변은 난지도의 경험을 살려 골프장, 야생화단지 등으로 꾸며졌습니다. 지난 10월 매립이 종료된 제2매립장 또한 공원과 체육시설 등으로 변화할 예정입니다.

본래 이 매립지는 2016년까지 사용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2010년에 이르러 서울특별시와 환경부를 중심으로 폐기물 매립 기간 연장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었습니다. 대체 매립용지가 마련되지 않았고, 쓰레기 종량제 이후로 폐기물량이 줄어들어 매립 가능한 용량에 여유가 생긴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되었습니다. 이전부터 악취 등의 피해를 겪어온 인천시와 지역사회의 반발이 매우 컸고, 2015년 인천광역시, 서울특별시, 경기도, 환경부는 4자 협의체를 구성하여 오랜 논의 끝에 몇 가지 단서를 붙여 2025년까지 수도권매립지 사용을 연장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도시 문제를 행정기관이 해결하려 할 때, 대부분 그곳의 관할 행정기관이 어디인지를 우선 확인할 것입니다. 만수동에 생긴 민원을 구월동에 넣지 않고, 주안동 도시정비사업을 부평구청에서 관할하진 않으니까요. 그러나 수도권매립지 사용기한 연장논의는 어떤 도시라도 해당 행정구역의 공간적 범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림 1> 수도권매립지의 위치.
1992년 이래 바다 쪽으로 계속 늘어난 매립장이 2025년 이후에도 확장된다면 인천의 경계를 넘어 경기도 김포시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수도권매립지 사용기한 연장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자는 인천광역시와 서울특별시였습니다. 수도권매립지 폐기물 반입량의 약 2/3를 차지하는 서울특별시는 지자체 내에 대체 부지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라서 반입 연장에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택지를 꾸준히 개발중인 인천광역시는 처음에는 연장에 반대했지만, 여러 협상안을 통해서 연장에 합의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이 협상안은 최초에 공유수면 간척지를 폐기물 매립지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서울시와 환경부의 토지소유권을 인천광역시가 갖고, 반입수수료를 인상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인천시는 현실적으로 대체지를 찾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 당시 부채로 인한 재정난을 고려해서 기한 연장을 결정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협의의 과정입니다.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게 명령하고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위계가 같은 두 지방자치단체가 서로 협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인천의 공간 활용 방안을 주변 지방자치단체의 합의를 통해 결정한 점이 눈길을 끕니다. 최종적으로 합의가 되고 나서 끝까지 연장 반대를 주장한 지역 주민들은 환경단체 등과 연계하여 지역 경계를 넘어선 연대와 네트워크를 형성합니다. 이렇듯 도시 공간의 문제는 단순히 그 공간내의 문제만이 아닌, 공간외 사람들과 함께 엮습니다.

지방자치제도를 실시한 지 20년이 넘었고, 민선 자치단체장이 7기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행정부는 지방자치를 더욱 강화하여 지자체가 실질적으로 지방정부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변화를 바라고 있습니다. 얼핏 “우리 지역의 일은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도시 공간을 계획하고 운영하는 데 더 많은 협의와 협력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인구가 감소하는 지역에서는 인구 증가를 위한 전략적 투자 및 외부 자원의 유치를 위해서, 또는 인프라 중복투자로 인한 경쟁력 감소를 피하고자 지자체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수도권과 같은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교통, 폐기물, 하수 등과 같은 도시기반시설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택지 개발, 산업단지 유치 등을 위해 다양한 협조와 양보, 지원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국토부의 수도권 택지 공급 계획과 서울시 내 그린벨트 해제 여부를 놓고 국토부와 서울시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협의한 것도 이러한 예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약 10여 년 간 수도권의 많은 지자체가 내놓았던 무수히 명멸한 각종 계획에는 비슷한 단어들을 지속해서 접해왔습니다. ‘국제업무’, ‘바이오’, ‘IT’, ‘R&D’, ‘MICE 산업’, ‘한류’, ‘K-Pop’, ‘관광’, 그리고 최근에 화두인 ‘4차 산업’입니다. 수도권의 많은 지구단위계획은 크게 다르지 않은 지향점을 두고 달려왔습니다. 이 계획 중 일부는 성공하고, 일부는 느린 걸음으로 걷거나 뒷걸음질 치기도 하고, 일부는 종이 위에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유사한 기능과 목표를 가진 여러 도시들-역시 어딘가는 성공하고, 어딘가는 실패한- 을 주변 국가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예로 상하이의 푸동과 린강, 텐진의 유지아푸, 선전, 광저우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림 2> 무산된 용산국제업무지구 계획 조감도(좌)와 최근 진행 중인 잠실 국제교류복합지구 마스터플랜(우).
인천경제자유규역(IFEZ)의 경쟁상대가 푸동과 홍콩, 싱가포르이기 전에 위에 나타난 서울의 지구단위계획일지도 모릅니다.

중앙정부의 계획을 통해 추진된 경제특구보다, 지방자치단체들이 계획한 신도시는 기능과 목표의 중복과 투자유치에 어려움을 겪곤 합니다. 그래서 계획 단계에서 적절한 투자를 얻지 못해 무산되기도 하고, 기반시설이 잘 조성된 도시가 적절한 입주기업을 찾지 못해 비어있거나, 목표만큼 인구가 증가하지 않아 고민하기도 합니다. 세계적인 허브를 꿈꾸며 계획된 공간이 불과 4~50km 떨어진 다른 지자체의 유사한 공간과 경쟁해야 합니다. 도시가 지닌 역사성과 강점이 그 도시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 도시의 ‘테루아’가 오늘날의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지 못하기도 하고, 미래에 주목 받는 산업과 멀어질 때 지자체와 계획가는 우리 도시 안에 세계적인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어 침체와 답보의 상황을 돌파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도시 계획은 정부와 공공의 추진으로 성공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민간 투자와 경제의 영역에서 완성됩니다. 또한, 세계화 이후 작은 지방자치단체의 힘으로 세계 단위의 경제적,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시를 만들기는 무척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나라에서 도시와 주변 지역들이 협력하여 산업을 육성하고 도시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를 ‘세계 도시지역(Global City-Region)’이라 합니다. 한 도시를 계획하는데 주변 도시의 생각과 이해가 점차 필수적으로 되고 있습니다.

공공은 시민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시공간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공공의 계획가도 먼 훗날에 사람들이 편리하게 머물고 이동하도록 적합한 도시를 만들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도시는 발전할수록 국가와 대륙의 경계를 넘어, 더욱 더 넓은 세계와 연결 됩니다. 이에 따라 계획가가 생각해야 하는 고민의 영역도 방대해지고 점차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글·이미지 김윤환(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사스키아 사센(2016). 세계경제와 도시. 푸른길
서형준(2017). 옹호연합모형을 활용한 수도권매립지 사용연장 정책과정에 대한 사례분석. GRI 연구논총, 19(2)
신상준(2017). 정책네트워크와 공공갈등 –수도권매립지에 관한 정책형성과정을 중심으로. 한국정책학회보, 26(3)
정원욱,김숙진(2016). 수도권매립지 입지갈등의 전개: 네트워크 효과로서의 영역 개념을 중심으로. 대한지리학회지, 51(4).




빛나는 도시의 그림자, 부평 삼릉 줄사택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자체나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하게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날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도시 공간에는 집단의 기억이 머물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상암월드컵경기장을 떠올려 봅시다. 20년 정도 축구경기와 공연과 행사가 무수히 열렸고, 영화관과 마트와 예식장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상암월드컵경기장이 응원하는 팀의 홈구장이고 주말마다 가는 마트이며 사랑하는 부부의 시작점이고 처음 가 본 콘서트장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 상암월드컵 경기장에서 겪은 집단의 기억은 2002년 독일과의 4강전 무대일 것입니다. 심지어 그때 태어나지 않은 학생에게도 집단의 기억이 전달되어 먼 훗날 상암경기장이 사라져도 일정 기간 이 기억은 유지될 것입니다. 2002년의 서울 광장이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서울광장에 새겨진 가장 강렬한 기억 중 하나가 거리 응원인 것처럼 말이지요.

어떤 오래된 공간은 가끔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중구의 차이나타운과 개항장 문화지구가 꼭 그렇습니다. 작년 여름에 제가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도시’ 1편에서 말씀드렸던 상하이처럼 오랜 시간 식민통치의 유산으로 취급돼 주목받지 못하던 조계지의 옛 석조건물들을 문화공간으로 재발견하고 집단의 기억에서 지워진 옛 일본식 주택들에서 개항과 근대화의 기억을 꺼낸 것이죠. 이제 이곳에는 다시금 깨어난 과거의 기억과 그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오늘의 삶이 뒤섞여 더 재미있고 역동적인 공간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대표적인 집단의 기억으로 다른 시간이나 현재마저 잊히기도 합니다. 최근 박물관 건립과 관련하여 의견이 다양하게 오고 가는 부평의 삼릉 줄사택을 보면 어떤 도시 공간에서는 현재가 잊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현재 부평공원 자리에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이 있었고 이 공장은 미쓰비시의 소유였습니다. 그들은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이 거주할 사택을 철길 건너편에 지었고, 이중에 일부가 현재까지 남아 삼릉(三菱, 미쓰비시) 줄사택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식 주택인 ‘나가야(長屋) 형태’로 지어졌는데 옆집 벽을 맞대어 줄줄이 늘어서 짓는 연립주택 형태입니다. 그래서 ‘줄’사택이지요. 현재 가장 크게 남은 곳은 ‘미쓰비시 줄사택 유적지’로 70여 채가 남아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이 유적지 외에도 일부 인근에 나가야 형태로 잘게 나뉜 필지들이 몇 군데 더 있고, 오랜 시간 건물의 외면은 변했지만, 당시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부평동 삼릉 줄사택
(출처: 중부일보 바로가기)

현재 줄사택 일부를 보존하며 마을박물관을 짓거나 부족한 주민이용시설을 확충할 공공 마을도서관이나 장난감 대여점 등을 마련하기 위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너무 낡은 건물이기에 철거하고 새로운 시설을 짓는다는 의견은 기본적으로 일치합니다. 오래되며 낮고 좁은 도시를 높고 넓은 도시로 바꾸는 것. 우리는 이러한 변화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줄사택은 80년 가까이 된 건축물이므로 보수해 생활하기에 한계가 있고 이미 상당수 집이 비어 있어 철거하는 데 크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도시 공간을 개선해 역사문화공간을 만들거나 재건축, 재개발 과정에서 현재 그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잊어지기 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사회학자 사스키아 사센은 세계적인 도시들을 연구하며 독특한 특징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첨단산업이 모여 있고 부유한 사람들이 많은 도시에 역설적으로 가난한 이민자들과 비정규적이고 낮은 임금을 받는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적인 도시의 대규모 사무실이 밀집한 곳에는 높은 임금을 받는 전문직 종사자들도 많지만 그들이 사무실을 운영하기 위해 경비와 유지보수 및 청소 등 낮은 임금의 임시직 종사자들도 함께 필요로 하게 됩니다. 또 사센은 가정에 있던 많은 여성들이 전문직종에 진출하면서 이전에는 적었던 가사노동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또 다른 도시사회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이런 직종의 종사자들을 ‘불안정한(Precarious)’과 ’노동자(Proletatiat)’를 합쳐 ‘프리케리아트(Precariat)’라 불렀습니다. 마르크스가 단결하자고 했던 노동자 계급보다 프리케리아트는 더 불안정하고 더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평균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근로하고 더 적은 임금을 받습니다. 그래서 주거지역을 선택하는 데 제약을 훨씬 많이 받습니다. 직장과 집이 더욱 가까워야 합니다. 많은 경우 임시직으로 고용되기 때문에 지금 일자리에서 해고돼도 언제든 다른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대도시에 거주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도시 중심일수록 더 비싼 임대료를 내야 합니다. 이런 악조건 때문에 많은 저소득 노동자들은 더 넓고 저렴한 주거를 찾아 교외로 나가지 못하고 도시에서 낡고 오래되고 좁은 주거공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자가소유는 꿈도 꾸지 못하고 그런 공간을 임차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건축과 재개발을 앞둔 오래된 주택과 상가건물의 옥탑, 반지하, 그리고 쪽방과 고시원 같은 곳 말입니다.

최근 화재사고가 발생한 종로구 국일 고시원
(출처 조선일보 바로가기)

하지만 우리 도시는 계속 이런 공간을 없애고 싶어 합니다. 인천뿐만 아니라 어디나 그렇습니다. 재건축과 재개발로 흔적도 없이 낡은 공간을 없애 버리기도 하고 도시재생이나 역사문화공간 만들기로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켜 겉모습을 유지한 채 공간 안의 사람들을 바꿔 버리기도 합니다. 한때 광풍과 같았던 뉴타운이 전자라면 연남동·후암동·익선동은 후자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더욱 쾌적한 삶의 공간과 더 좋은 일자리와 더 많은 문화적 경험을 위해 도시 공간에서 계속 낡고 좁은 공간을 지워 버리고 새로운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 무조건 잘못된 방법은 아닙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도시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워져야 하고 변화해야 합니다. 이런 변화는 당연하고 도도한 흐름일 뿐입니다.

다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도시가 부분부분 새로워질 때마다 별다른 방법 없이 밀려나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뉴스에서 재개발에 항의하는 세입자들이나 젠트리피케이션에 어려움을 겪는 상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고시원과 쪽방과 낡은 재개발 지역 주택의 세입자들이 도시에서 여기저기로 밀려다니는 것을 우리는 대체로 잘 알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얼마 전 또다시 날씨가 추워지자마자 종로 고시원 화재 같은 사고가 벌어지고 나서야 열악한 주거공간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고 정치가나 행정가들은 대책을 마련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욱 화려하게 빛나는 도시 공간을 꿈꾸는 동안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도시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 빛이 닿지 않은 도시의 그늘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글 김윤환(도시공간 연구자)

[참고문헌]

데이비드 하비(2014). 반란의 도시. 에이도스
사스키아 사센(2016). 세계경제와 도시. 푸른 길
“인천 부평구 미쓰비시 줄사택 박물관 조성 사업 표류”. 중부일보. 2018. 11. 11.
“’강제동원 흔적’ 미쓰비시 줄사택, 구청장 공약사업의 전쟁터 됐나”. 인천일보. 2018. 11. 14.

 




지식의 전당의 내일 – 인천의 도서관들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자체나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하게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날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청나라에서 강희제의 명으로 1782년 ‘사고전서’라는 3,500권이 넘는 방대한 양의 백과사전을 편찬했을 때, 청나라 황실은 이 책들은 소실을 우려해서 여러 사본을 만들어 보관했다고 합니다. 마치 조선이 실록을 여러 사본으로 만들어 전국 각지에 보관한 것과 같지요. 그런데 청나라는 이 사본을 단 8부만 만들어 보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자금성 내, 혹은 황실의 행궁이나 정원과 같은 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정조는 사고전서가 제작된 사실을 알고 어떻게든 한 부를 구입해 규장각에 두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청나라 황실은 40여 년에 걸쳐 단 8부만 만든 백과사전을 절대 조선에 내어주지 않았다고 하지요.

어릴 때부터 글을 익히고, 책을 읽는 것이 당연시 된 동양의 사회에서도 이렇게 집대성된 지식은 황실의 것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책에 접근하는 것이 제한되었습니다. 서구 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그저 장식이 아니라 글을 배우지 못했고, 글을 알더라도 함부로 성서를 읽는 것조차 허락 받지 못한 중세의 평민들에게 예수의 삶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였던 것을 떠올려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책을 통해 지식과 진리에 접근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서구가 근대로 접어들며 국가 권력을 귀족과 성직자의 손에서 ‘국민’에게로 가져왔을 때, 귀족과 성직자의 지혜가 모인 서고는 ‘공공’도서관이 되었고, 그들의 컬렉션이었던 미술품은 ‘공공’미술관에 전시되어 모든 사람들 앞에 놓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지식과 예술에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은 권력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있다는 것의 상징입니다.

모두에게 열린 지식의 궁전은 점차 즐거움의 공간이 되고, 문화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도서관 서가에 소설이 꽂힌 것은 19세기의 일입니다. 책으로 진리와 지혜를 구하는 것을 넘어, 즐거움과 상상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대의 필요에 맞추어, 지역의 요구에 부합하여 도서관은 다양한 문화 행사와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무수히 늘어난 ‘작은 도서관’은 책을 보는 공간을 넘어, 도서관이 지역 커뮤니티를 위한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21세기에 들어서 도서관은 지식의 보관이 ‘책’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남겨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도서관은 지역과 공공의 문화기반시설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책과 열람실 위주의 모습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을 시작했습니다.

2001년, 일본 센다이 시에 도요 이토가 설계한 ‘센다이 미디어테크’ -‘도서관’이라는 이름조차 사용하지 않은- 도서관이 문을 열었을 때, 건축계에서는 독특한 구조의 해결 방법이나, 자유로운 평면 구성, 도시로 열린 투명한 외피에 감동했습니다. 또한 이 도서관은 주차장을 제외한 지상 7개 층 중 단 세 층에만 열람실과 서가를 할애했습니다. 그 중에는 디지털 도서관도 있어서, 비디오 테이프, CD, DVD 등으로 제작된 영상자료나 전자책 등을 비치해 두었습니다. 4개 층은 공연장, 갤러리, 스튜디오, 녹음실 등을 계획했습니다. 1층 로비에는 한 가운데에 이벤트를 열 수 있는 오픈 스퀘어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 곳을 방문했던 2006년에는 오픈스퀘어에서 일본 전통 연극을 공연하고 있었지요. 센다이 미디어테크는 책을 모으고, 읽는 곳 이상으로, 센다이 시의 문화적 중심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4년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가 설계하여 시애틀에 문을 연 시애틀 중앙도서관의 서가는 매우 독특합니다. 서가는 일반적인 건물처럼 여러 층으로 구분되지 않고, 거대한 램프(Ramp, 경사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책이 늘어날 때 램프 공간의 밀도를 조절해서 공간을 늘리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책을 보관할 수 있고, 전자책이나 DVD같은 형태로 변화하더라도 능동적으로 공간 구성을 바꾸어 대응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림1> 센다이의 문화적 중심공간이 된 센다이 미디어테크(좌), 완만한 경사로로 서가를 배치한 시애틀 중앙도서관(우)

도서관은 지식 저장의 수단이 책으로부터 전자책, 영상매체 등으로 다변화 되는 것을 받아들였고, 도서관의 기능이 책을 보관하고 읽는 공간에서 공공의 복합문화거점이 되는 것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에 맞추어 조금씩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도서관은 어떤 변화에 반응해야 하고, 어떻게 변모해야 할까요.

최근 수 년간, 정보와 지식의 전달에서 책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인터넷입니다. 일상 생활에 밀착된 정보는 블로그를 통해 얻고, 일반적인 검색 자료는 위키피디아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인터넷 세계에서 구하기 어렵다던 전문가 수준의 자료도 이제는 간편하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학은 인터넷을 통해 강의를 무료로 제공하고, 구글 스칼라를 통해서 해외에 게재된 논문을 무료로 다운받을 수도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강조된 인터넷을 통한 지식과 정보의 전달을 최근에 더 유심히 보게 되는 이유는 인터넷의 컨텐츠들이 텍스트에서 사진과 영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일상 정보는 인스타그램과 같은 이미지 중심 SNS를 통해서 주고 받습니다. 뉴스 또한 이미지 중심의 카드뉴스의 형태로 제작됩니다. 더욱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유튜브로 대표되는 동영상 서비스입니다. 단순한 일상적 지식을 넘어, 유명 석학의 강연도 유튜브를 통해 전달됩니다. 더 어린 세대일수록, 더 이상 정보검색을 위해 네이버나 구글 대신 유튜브를 이용한다고도 하지요.

이런 변화는 지식이 생산되어 일반 대중에게 전달되는 시간을 현격하게 단축시켜 주고, 지식에대한 접근성에서는 책의 형태를 압도합니다. 아직은 여전히 종이로 된 ‘책’의 필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점점 더 많은 지식이 책의 형태에 의존하지 않고 만들어지고, 확산될 것입니다. 이미 수 년 전 우리는 ‘TED’의 유행을 통해서 이런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사람들은 책이 아닌 유튜브로 TED 영상을 봄으로써 세계적 석학이나 경영인, 예술가의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또다른 중요하게 생각되는 점은 인터넷에 기댄 지식의 생산과 전달이 방향성이 없다는 점입니다. 책을 쓴 사람이 읽는 사람에게 단방향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과는 다르게, 최근의 인터넷 공간은 모든 사람들이 지식을 생산하고, 소비하고, 다른 사람의 지식에 덧대고, 수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과정 또한 개정판을 기다려야 했던 책과 달리 거의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지요.

우리가 도서관을 그저 책의 보관소로 여기지 않는다면, 도서관은 언젠가 이러한 지식의 생산과 전달의 양상을 반영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인터넷 접근을 위해 더 많은 PC를 설치하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통해서 세상 모든 곳에서 인터넷에 접근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도서관은 그 단계를 넘어서, 사람들이 모여서 지식을 생산하고, 수정하고, 전달하는 공간으로 변모할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저는 도서관의 미래를 최근 부각되는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림 2>공유업무공간을 넘어서 창조의 인큐베이터로 변화하고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좌). 을지로 위워크(우)

혼자서도 노트북 하나면 창업할 수 있는 시대에 독립 사무실을 갖추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여러 시설과 장소를 제공하는 코워킹 스페이스는 최근 2~3년 사이 공유경제의 부각과 맞물려 대단히 주목받고 있습니다. 코워킹 스페이스는 단순히 책상과 프린터, 인터넷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용자들에게 필요한 강의를 마련하기도 하고, 서로 멘토링을 할 수 있도록 소개해주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각자의 생각을 보완하고, 발전시키고, 때로는 협업과 동업자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코워킹 스페이스가 가능성을 인정받는 이유는 그저 새로운 형태의 임대업으로서의 가능성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시너지에 있습니다. 공간을 공유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생각과 지식을 공유하며 더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도서관은 이미 같은 공간에서 같은 책을 나누어 보면서 기초적인 공유경제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누적된 책과 지식은 미래 지식을 만드는데 중요한 기반과 참고자료로서의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또 책으로 만들어지지 못한 지역사회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오래된 지식과 기억들이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될 수도 있습니다.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한 교육프로그램 운영의 경험은 새로운 지식창조자들에게 필요한 교육과 도움을 주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지역단위로 연결된 공공도서관의 네트워크는 다른 도서관 이용자들과의 연결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공이 운영하는 도서관은 민간의 코워킹 스페이스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낮은 문턱의 공간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미래의 인천의 도서관이 인천 사람들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자유롭게 공유하는 공간이 되기를 기대하는 이유입니다.

 

글·사진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강숙희(2010). 인천광역시 공공도서관 상호협력 활성화 방안에 관한 연구. 한국도서관·정보학회. 41(3)
노영희(2016). 공유경제의 도서관 적용에 관한 연구. 한국비블리아학회지. 27(3)
윤희윤(2017). 공공도서관 정체성의 혼란과 극복방안.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48(3)
홍소람,박성우(2015). 코워킹 스페이스로서의 공공도서관 무한창조공간 개념 분석. 한국도서관·정보학회. 46(4)




멈춰진 미래 – 인천의 빈 공간들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자체나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하게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날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최근 도시와 지방 정책의 여러 쟁점 중에서도 특히 ‘인구 감소’ 문제가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 많은 분들께서 알고 계실 겁니다. ‘이촌향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의 인구 유출은 ‘지방 소멸’을 염려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많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인구 증가를 위해 아주 다양하게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지방 중소도시의 인구 감소 추세는 쉽게 변화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방 중소도시의 풍경은 흔히 잘 변하지 않습니다. ‘시내’의 오래된 건물과 가게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터미널이나 역의 모습도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어디 한 군데에서 크게 재건축이나 재개발 사업이 벌어지는 일도 흔치 않습니다.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이 지속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에 비하면 인천은 오히려 최근 들어 많은 곳이 변모했습니다. 예전 모습을 간직한 원도심도 있지만 지난 10년간의 인천은 다른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달라졌습니다. 서구와 남동구에 비해 비교적 덜 개발되었던 지역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경제자유구역 사업으로 바다는 인천을 대표하는 스카이라인의 도시로 바뀌었습니다. 인천국제공항은 꾸준히 확장되어 제2터미널이 문을 열었고, 영종도 곳곳은 공항 배후 도시로 변화하였습니다. 원도심은 80년대에 대규모로 지어졌던 주공아파트가 상당수 재건축되었고, 개화기의 오랜 역사가 있는 곳들은 그때 기억을 되살리는 공간들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패션이나 음식, 인테리어, TV 프로그램처럼 도시에도 어떤 트렌드가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도시가 지속적으로 변모하는 것, 다시 말하면 도시 개발이나 재개발의 결과는 과거나 지금이나 매번 비슷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계획 당시 도시 계획은 항상 더욱 나은 방향과 훨씬 좋은 미래를 위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면에서 인천은 도시계획의 백화점 같은 공간이기도 합니다. 70년대 택지개발 공간과 8-90년대 대규모 아파트 건설 공간,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민간 주도의 국제도시 공간, 최근 근대 유산 중심의 도시재생 공간을 한 도시 안에서 모두 찾을 수 있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기획되어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인천경제자유구역 개발은 도시계획 트렌드의 변화 관점에서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경제자유구역 개발에 이르러 우리는 도시개발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집이 지어지는지에 관심 두기보다 외국 기업의 투자가 얼마나 들어오는지, 랜드마크 건축물이 언제쯤 지어지는지, 새로운 관광지 개발은 언제 이루어지는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도시를 만들 때 목표는 국가 내부에서 필요한 주택공급을 넘어서 세계적인 금융과 물류와 사람들의 흐름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1990년대, 국제도시와 경제자유구역 계획의 초석이 되는 세계적인 트렌드에 부합되는 도시를 만드는 송도정보화신도시계획은 국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에서 독립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인천이 바라는 도시는 세계 수준의 정치·경제적 네트워크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세계 도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외국인과 외국 기업이 인천에 머무르길 바랐습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천은 공간적으로 다른 세계 도시와 유사한 모습이 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이른바 ‘참조도시 전략’입니다.

송도국제도시 마스터플랜은 참조도시 전략 안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의 공간 구조를 도입하는 것부터 주요 대도시의 스카이라인, 건축물의 상징적 형태, 공간감 등을 유사하게 하기 위해 블록의 크기나 특징적인 공간들을 벤치마킹하기까지 많은 부분을 참조하였습니다. 특히 유럽과 미국의 도시 공간들을 주로 참조하였습니다. 이를테면 공간구조에서는 비엔나의 방사상 구획과 파리의 주요 대로들과 런던의 도시 내 다양한 요소가 뒤섞인 것을 참조하고, 공간감에서는 필라델피아의 블록 사이즈와 뉴욕의 센트럴 파크와 베니스의 대운하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마 몇몇 떠오르는 공간이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센트럴파크 바로 옆의 상징적인 초고층 빌딩은 다른 디자이너의 작품이지만 묘하게 새로 재건된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연상시킵니다.

 
 
<위: 암스테르담의 운하(좌)와 송도 커넬워크(우). 아래: 뉴욕의 세계무역센터(프리덤타워)(좌)와 송도 동북아트레이드센터(우).>

이러한 전략은 실제 외자 유치와 개발 계획에 이르러 더욱 심화 됩니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참조한 도심 공원은 그대로 센트럴 파크의 이름이 붙었습니다. 세계적인 골프 선수가 디자인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골프장도 그의 이름이 붙었습니다. 암스테르담의 작은 운하들을 낀 공간은 송도 한 부분의 쇼핑몰이 되었습니다. 개발이 진행되다가 안타깝게 무산된 여러 프로젝트들도 이름에서부터 다른 나라의 무언가를 이식해오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파라마운트 무비 테마파크’ ‘밀라노 디자인시티’ ‘영종 브로드웨이’. 지금은 미단시티로 이름이 변경된 영종도 운북복합레저단지 개발 사업에 최초로 당선된 컨소시엄이 제시한 네이밍은 신향(新香)이었습니다. 이름에서부터 홍콩(香港)을 벤치마킹하고, 홍콩과 같은 공간이 되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런 계획들이 국제도시의 구석구석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 어떤 계획은 예정보다 느리고 달라지더라도 조금씩 진전되고 있지만, 많은 계획들이 무산되거나 기약을 잃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이 될 것 같았던 100층이 넘는 두 초고층 빌딩 계획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계획이 자리 잡았던 공간들은 도로로 블록만 조성된 채 여전히 비어 있습니다.

<운북 복합레저단지(현 미단시티) 2006년 우선협상대상 컨소시엄의 계획조감도>

세계적 트렌드에 부합하는 도시가 되기 위해 우리는 또 하나의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데이비드 하비의 표현을 원용하면 ‘도시는 기업 자본과 개발업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동북아시아의 정치·경제적 중심 도시가 되기 위해 인천의 국제도시는 기업이 개발하고 기업이 투자해야 하며, 좋은 제안서와 뛰어난 추진력을 가진 디벨로퍼가 필요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업들은 다른 세계도시와 비슷하게 금융산업과 생산자 서비스업처럼 당시에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넓은 땅에 ‘국제업무지역’의 이름을 붙여 두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이 오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중에 많은 땅은 여전히 비어있거나 오피스텔이 되었거나 대형 쇼핑몰이 될 예정입니다. 다국적 기업이 어떤 지역에 새로 자리를 잡기 위해 고려하는 많은 요소는 어쩌면 한 지방자치단체가 모두 만족시키기엔 어려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인천의 국제도시는 해낼 수 있으리라 믿으며 시도했고 어렵지만 여전히 시도하고 있지요.

많은 계획이 부침을 겪는 것을 계획의 실패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모든 도시 계획은 많은 계획가와 학자와 행정가와 시민이 최선의 도시를 만들기 위해 애쓴 결과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을 세우지만, 모든 변화의 요소와 가능성을 모조리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내다보는 도시계획은 계획이 길수록 더 많은 수정이 꾸준히 필요합니다. 지속적으로 계획의 진행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것 또한 의미 있고 중요한 과정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심지어는 도시계획에서 마스터플랜의 불가능을 인정하고 작은 목표를 하나씩 이루어 나가며 전진하는 점진주의 시각도 존재합니다. 이런 관점을 받아들여 오늘날 거의 모든 대규모 개발은 마스터플랜을 세우면서도 단계적 개발계획을 수립합니다. 인천경제자유구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최종적인 마스터플랜을 달성하기 위해 목표들이 단계적으로 짜임새 있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가득 채워진 주거단지와 아직 더 적합한 사람과 기업을 기다리는 업무지역을 보며, 어쩌면 마스터플랜을 달성하기 위한 단계가 아니라 정말 ‘어떤 땅의 쓰임새는 도시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5년이나 10년 후에 결정하겠다’는 유보적인 태도가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8년에 예측하는 2020년과 1995년에 예측하는 2020년의 간극은 너무나 넓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후반에 ‘굴뚝 산업’으로 불리던 제조업이 오늘날 인공지능 등 최신 기술과 결합해서 ‘4차 산업’으로 부각되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글,사진 제공/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샤론 주킨(2015), 무방비 도시, 국토연구원
게오르그 짐멜(2005),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새 물결
데이비드 하비(2005),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간들, 문화과학사
SoA(2016), “송도신도시: New City for Non Place on the New Place”, 확장도시 인천. 마티




삶의 마지막과의 단절 – 인천가족공원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봄 소풍으로 만월산을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약사사를 거쳐 야트막한 만월산 능선에 다다랐을 때, 처음으로 건너편의 산을 보았습니다. 만월산 너머엔 비슷한 높이의 금마산이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마산의 사면 전체는 나무 대신 묘지로 빼곡히 메워져 있었습니다. 처음 본 낯선 광경에 그것들이 묘지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선생님께 무엇인지 물어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가 막연하게 알았던 죽음 이후에 묘라는 안식처가 있음을 처음 알게 되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 날 제가 보았던 거대한 공동묘지는 ‘인천가족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시민들의 마지막 삶을 배웅하고 있습니다.
인천가족공원은 대단히 큰 규모의 공원묘지입니다. 어르신들에게는 ‘망우리 공동묘지’로 익숙한 인천가족공원은 현재는 수도권 대표 공원묘역으로, 그 규모만 해도 83만 2,800㎡에 달하며 망우산의 서쪽 사면을 메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원에 설치한 승화원, 여러 봉안당, 홍보관, 외국인 묘지를 제외한 순수 내국인 묘지 개수만 해도 166만 개에 이르며 그 크기는 8,729㎡입니다. 약 37만㎡ 크기인 송도국제도시의 센트럴 공원과 비교했을 때 센트럴 공원의 약 4.5배가 묘지로 조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천에 살면서 생각보다 이 공간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불과 500m 남짓 떨어져 있는데도 그렇습니다. 지하철에서 도착지를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올 때만 이 근처 어딘가에 위치한 인천가족공원이 떠오르게 됩니다. 우묵한 호리병 모양 지형이라서, 다른 곳을 가려다 지나치는 일도 없습니다. 선친이나 가족 중 한 분이 이곳에 모셔져 있지 않다면, 굳이 이곳까지 찾아가는 일은 없을 법합니다.

공동묘지는 일상생활과는 참 먼 곳입니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한 문화권에서 묘지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그리 동떨어진 공간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도성과 성저십리 내에 묘를 만드는 것을 금지했지만, 한양도성 밖에서 묘는 암묵적으로 허용되었습니다. 선산이나, 선영을 만들 수 없던 평민들은 마을 인근에 있는 산 하나를 공공묘역으로 만들었고 그 묘역을 ‘북망산’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유교적 전통에서 조상의 묘와 마을 사람들의 묘는 항상 가까운 곳에 두고 유지 보존해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가깝지만 먼 나라인 일본은 화장이 일찍이 일반화되어 마을 신사나 절에 유골함을 안치했고, 프랑스에서 묘지는 일상생활과 밀접한 장소였습니다. 파리에는 도시 한 가운데 이농상 묘지라는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이곳은 수도자의 설교 공간이면서 온 가족이 소풍을 가고 장터가 열리던 일상적인 생활 공간이었습니다.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을의 납골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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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의 이농상 묘지의 15C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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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로 접어들었을 때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서구의 묘지는 가장자리로 이전되면서 공원의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파리의 유명한 몽마르트르 묘지, 몽파르나스 묘지 등이 바로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유럽의 근대적 묘지는 도시 가장자리로 물러나게 되었지만 언제든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시민들의 일상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러한 서구의 공원묘지가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었지만, 우리의 묘지는 유럽과는 다르게 급격히 시민들의 삶과 분리되었습니다. 경성부는 당시 한양도성 외곽에 산재했던 묘를 한곳에 모아 도시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망우리 공원과 같은 공동묘지를 여럿 조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묘지를 구분하는 차별 정책의 일종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 묘지에 행려병자 등의 시신을 대강 매장하고 관리를 소홀히 하여, 공동묘지 인근에서는 들개가 인골을 물고 다니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공동묘지는 사람들에게 점차 기피시설로 인식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과학적’으로 여겨졌던 화장장은 당시 부족한 기술로 인해서 오히려 악취의 원인이 되었고, 사자의 안식을 위했던 과거의 장례의 이미지를 시신을 ‘빠르게 처리하는 공장’의 이미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묘지와 화장장은 오염원이자 혐오시설의 이미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에도 이런 인식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시 외곽에 형성된 공동묘지와 화장장은 도시가 확장되고 개발될 때마다 더욱더 멀리 밀려나야만 했습니다. 전쟁 이후에 부흥주택과 재건주택이 지어졌던 홍제동에서는 195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화장장 이전에 대한 민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현재에도 서울시의 시립 승화원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으며, 시립묘지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있습니다. 인천도 마찬가지로, 1930년대에 인천 주안에 설립되었던 화장장은 70년대에 현재의 인천가족공원으로 이전했고, 도화동에 있던 중국인 묘지는 선인재단의 학교 건설로 인해 만수동으로 옮겨지다가 주택개발에 밀려 인천가족공원으로 다시 이장해야만 했습니다.

 
과거 공원화되지 않은 인천가족공원 묘지
출처(자세히 보기 ▶)
  묘지가 정비되고 납골당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현재의 인천가족공원 출처(자세히 보기 ▶)

1990년대 이후에 산지에 묘지가 설치되면서 산림 훼손에 대한 문제점이 계속 지적되자 화장과 봉안당은 우리나라의 새로운 장례문화로 정착하였습니다. 또한, 과거와 달리 공원의 형태로 조성된 묘지는 이제 오염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죽은 자의 공간은 도시와 어울리지 못하고 격리되어 있습니다. 장묘시설은 학교와 어린이집 같은 교육시설로부터 200m 내에 건립될 수 없게 법적으로 규정되었고, 봉안당 설치와 관련해서도 지역 주민들의 극심한 반대에 마주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비록 그 지역에 설치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도시 사람들의 삶과 망자의 공간은 공존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6월 <청라 시티타워역 희망탑>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오늘 현대인들의 삶은 더 복잡해졌고 인구는 점점 증가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내 집, 나의 동네에 머무르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매일같이 일터와 학교로 이동해야 하고, 내 집을 마련하지 못하면 끊임없는 이사를 거듭 반복해야 합니다. (실제로 2016년 인천시 거주 가구 중 약 42% 정도가 무주택 가구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도시 위에서 부유(浮游)하는 시대, 혹은 세대를 이어 이웃이 유지될 수 없는 시대에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1900년대 직후에 내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고 돌보던 전통적 마을 공간 속에서 나타난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는 더는 유효하지 않아 보입니다. 이미 오랫동안, 망자의 공간은 우리 동네에 없어야 하는 혐오시설이고, 먼 곳의 어딘가에 있는 무관심한 공간입니다.

장례문화가 일종의 산업이 된 오늘, 지난 백 년에 걸쳐 도시 안에서 밀려난 망자의 공간은 더는 도시 공간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적절하게 도시 공간을 분배하고 활용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결국 도달할 망자의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산 사람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먼 곳으로 밀려난 모습이, 마치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도시인의 삶과 같다는 생각에 슬프고 허무한 마음이 듭니다.

 

글/사진제공 김윤환(도시지역전문가)

[참고문헌]
기세호(2017), 근대화로 인한 묘지와 도시 사이의 거리 변화에 관한 연구-파리와 서울의 비교를 통해-,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석사학위논문
송승석(2015), 인천 중화의지(中華義地)의 역사와 그 변천, 인천학연구 22
정일영(2016), 일제 식민지기 사자공간의 배치와 이미지형성-공동묘지와 화장장을 중심으로-, 사림 57
인천시설공단 (자세히 보기 ▶)
“弘濟洞 火葬터를 옮겨라”. 경향신문 1958년 8월 9일.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墓地滿員 묻힐 땅이 없다”. 경향신문 1981년 4월 10일.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장묘문화 화장중심 개혁’ 시민운동 전개”. 동아일보 1998년 10월 1일.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사는 것(living)이 곧 사는 것(buying)이라지만 – ㅎ 프리미엄 아울렛과 ㅌ 쇼핑몰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흔히들 우스갯소리 삼아 “사는 것(living)은 곧 사는 것(buying)”이라고들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도시의 삶에서 숨을 쉬듯이 우리는 무언가를 계속 삽니다. 끼니때 밥을 사 먹고, 요리하려고 식자재를 삽니다. 계절이 바뀌면 새 옷을 사고, 길 가다 눈에 띈 장신구도 또 하나 삽니다. 게다가 더워진 날씨에 아이스 커피를 자주 사 마시기도 합니다. 다 써버린 두루마리 휴지와 세제를 사서 채워 두어야 하고, 낡은 칫솔과 닳아버린 샤워타올도 새로 삽니다. 줄줄이 상품을 나열하지만, 우리가 사는 것은 상품뿐만 아닙니다. 출퇴근할 때마다 버스나 지하철 요금도 내고, 머리를 자르면 서비스 비용을 내고, 영화나 공연을 보기 위해 티켓을 사며,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도 입장권을 삽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들기 전까지 우리는 거의 매 순간 무언가를 구매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는 도중에도 무언가 구매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구매하는 것들만큼이나 구매의 공간 또한 무척 다양합니다. 거리의 양옆은 온갖 가게들로 메워져 있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재래시장이나 대형마트에 갈 겁니다. 새로운 계절이 올때마다 한 번쯤은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가서 세일하는 상품이 없나 뒤적여 보겠지요. 그리고 가끔은 주말에 시간을 내어 작년에 가격이 비싸서 구매하지 못했던 옷을 사기 위해 아울렛에 가볼 것입니다. 오늘은 이 중에서 도시 한가운데까지 진출한 아울렛과 거대 규모의 쇼핑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아울렛은 본래 재고상품이나 B급 상품을 생산자가 저렴하게 판매하는 팩토리 아울렛(Factory Outlet)에서 출발했습니다. 인천에서도 가구공장이나 구두 공장에서 운영하는 아울렛 매장을 만날 수 있지요. 그러나 최근 10년간 사람들에게 익숙한 아울렛은 이른바 ‘프리미엄 아울렛’이 아닐까요. 미국의 아울렛 기업이 한국의 유통자본과 합작하여 시작한 프리미엄 아울렛은 10년 사이에 대도시 근교의 필수적인 유통 형태로 자리 잡았습니다. 대도시 근교에 고속도로로 접근할 수 있는 곳에 넓게 자리 잡은 아웃렛이 주말마다 방문자로 가득 차는 것은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습니다.

프리미엄 아울렛은 넓은 땅이 필요하기도 하고, 이에 따른 개발 비용을 절감해야 하기에 대체로 도시 내 보다는 교외에 자리 잡았습니다. 다만 고속도로와 인접해서 쉽게 오고 갈 수 있게 했지요. 이런 방식 으로 입지가 정해진 초기 프리미엄 아울렛이 여주, 이천, 파주 등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2016년 송도에 ㅎ 프리미엄 아울렛이 문을 열었을 때, 약간의 신기함과 어색함이 있었습니다. 고속도로로 한 시간 남짓 달려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도시 한 가운데에 생긴 것입니다.

도시 한가운데의 아울렛은 간혹 찾아가던 쇼핑의 공간인 아울렛을 일상의 구매공간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교외에 위치한 아웃렛에 들릴 때는 주말 하루를 온전히 빼내야 했습니다. 오전부터 쇼핑하면 점심을 먹고 오후에 돌아오는 공간이었죠. 그러나 도시의 아울렛은 퇴근할 때 들를 수 있고, 어제 가면, 오늘 또 가는 데 어려움이 없는 접근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형마트를 찾는 정도의 수고로 아웃렛을 방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웃렛은 매장 구성에서 교외 아웃렛과 약간의 차이를 둡니다. 매장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전 지하 1층에는 다른 아울렛에 비해서 규모가 큰 식당과 식품관을 두는 것입니다. 이곳에 인기 있는 식당과 식품 매장을 둠으로써, 쇼핑 목적으로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저 음료나 빵을 사기 위해 이곳에 오도록 유인하는 것입니다. 기존 아울렛의 키 테넌트(Key Tenant: 모객을 위한 핵심 점포)는 수입명품 매장으로 1층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ㅎ 프리미엄 아울렛은 쇼핑 편의시설 정도의 위상이었던 식당을 키 테넌트 수준으로 격상시켰습니다. 아울렛이 이벤트적 공간에서 일상적 공간으로 변형된 것입니다.

이러한 공간의 변형은 2017년 ‘ㅌ 스트리트’라고 하는 쇼핑몰이 ㅎ 아웃렛 옆에 나란히 문을 열면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도시의 대형 쇼핑몰은 하나의 수직적인 대형건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만, 최근의 경향은 이것을 옆으로 길게 늘여 일종의 길과 같은 형태로 만듭니다. 이미 송도에 만들어진 커낼워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형태의 쇼핑몰은 쇼핑몰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더 많은 개방감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쇼핑몰 안을 걷는 사람들은 이 공간에 대해 특정 시설을 이용한다기보다, 도시 일부분처럼 받아들입니다.

또한 이 쇼핑몰은 최근의 복합쇼핑몰의 흐름에 맞게 쇼핑 이외의 활동에 대한 공간 배분이 무척 많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식당의 비중이 높고 모객시설로써 영화관을 두었으며 옥상의 스포츠센터에서 풋살을 할 수도 있습니다. 복합쇼핑몰은 이러한 구성을 통해서 판매시설을 넘어서 접근성 좋은 레저 공간으로 위상을 확대합니다. 쇼핑몰에서 쇼핑과 여가를 동시에 향유하는,  이른바 ‘몰링’을 즐기는 소비자를 뜻하는 ‘몰고어(mall-goer)’라는 개념이 등장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레저와 쇼핑을 결합한 ‘레저핑’, 쇼핑몰과 바캉스를 결합한 ‘몰캉스’라는 용어도 등장했습니다. ㅌ 쇼핑몰은 스스로 ‘걷고 싶은 거리’로 규정하고, 하남과 고양에 문을 연 ㅅ 쇼핑몰은 자신의 정체성을 ‘테마파크’라고 말합니다. 최근 쇼핑몰은 도시 사람들의 하루 여가의 모든 부분을 거의 충족시켜 줄 수 있도록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쇼핑몰의 운영 전략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도시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거대 아울렛과 쇼핑몰에서 단순히 편리함의 장점만을 만끽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아울렛과 쇼핑몰이 만드는 경험의 규격화의 측면입니다. 우리나라의 거대 유통 자본 세 곳에서 개발하는 무수한 아울렛은 지역적 맥락을 일부 고려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동일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매장의 종류도 거의 같고 식당의 구성도 유사합니다. 과거부터 이러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특히 프랜차이즈 일색의 구성이 규격화를 초래한다고 비판받았지요. 그래서 최근에는 다양한 팝업스토어를 기획하고,  각 지역의 유명 음식점과 제휴하여 입점하도록 합니다. 이런 방식이 보편화하면서 프랜차이즈의 규격화는 완화되었지만, 지역적 맥락은 더욱 빠르게 사라지며 쇼핑몰의 특성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ㅁ 빙수’는 압구정의 명물이었지만 이제는 ㅎ 백화점의 판매시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ㅇ빵’은 군산의 명물이었지만 역시 ㄹ백화점의 여러 식품관 메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공간적 제약을 넘어서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좋은 경험을 나누어 준다는 평등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의 규격화, 특히 유통자본에 의한 규격화는 도시민들의 삶의 경험을 통제합니다. SNS 마케팅의 범람으로 여러 지역의 새로운 핫플레이스들이 매일같이 등장하는 오늘날, 대형 유통자본과의 제휴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인증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젊은 힙스터들의 유행이 유통자본의 검증을 거쳐 대중들에게 취향으로 쥐어지는 것이지요. 이러한 경험의 규격화는 우리 도시 구석구석의 새로운 창조성을 무너트릴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웃의 관심을 통해서 검증되며 자라나야 하는 지역의 작은 시도들은 대개 이 인증서를 받지 못하고 소멸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우려는 이러한 스트리트 형태의 쇼핑몰이 도시의 가로를 대체하는 일종의 ‘유사가로’를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ㅌ 쇼핑몰의 중앙 통로에는 스스로 ‘송도 가로수길’이라는 키치적 명칭이 붙어있습니다. 사람들은 장벽과 같은 밋밋한 건물의 뒷면과 지하주차장 출입구를 마주치는 도시의 가로보다는 지속해서 변화하는 풍경을 따라 이 길을 걸을 것입니다. 걷는 동안 얻는 시각과 청각의 경험, 공통의 기억과 체험은 쇼핑몰 내부, 블록의 안쪽으로 수렴합니다. 이것은 쇼핑몰 운영의 관점에서는 대단히 성공적일 수 있으나, 도시 전체의 측면에서는 구분 짓기와 경계선 만들기에 가깝습니다. 건물이 길과 접하고 도시와 만나는 면을 스스로 차단하고 뒤로 돌아앉음으로써 가로 전체를 걸을 이유가 없는, 그저 기능적으로 자동차만 지나가는 길로 격하시킨 것입니다.

일본의 롯폰기 힐스 등 초거대 쇼핑몰은 도쿄에서 손꼽는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고, 재난 대비 방재 교육 뿐 아니라 지역축제, 마치즈쿠리(마을만들기) 참여와 같은 지역사회를 위한 사업을 꾸준히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쇼핑몰이 도시 공간과 도시 사람들에서 분절된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존재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도록 하는 것이 판매시설의 본질이지만, 도시공간의 한 부분으로서 공공성을 함께 만들어 가기를 기대해봅니다.

 

글,사진 제공/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석혜탁(2018). 쇼핑은 어떻게 최고의 엔터테인먼트가 되었나. 미래의 창
박진빈(2013). 전후 미국의 쇼핑몰의 발전과 교외적 삶의 방식. 미국사연구 37
백인열,강우성(2016). 대규모 복합쇼핑몰의 활성화 방안에 관한 한국과 일본사례의 비교연구. 유 통연구 21(3)




더 먼 곳을 향한 욕망 – 청라 시티타워역 희망탑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몇 달 정도 시간이 지나긴 했습니다만,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이사 철이면 이사차량이 매일 드나듭니다. 이런 광경은 제게 무척 생경했습니다. 이른바 원룸촌이나 하숙집에서 살 땐 특별히 이사철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꾸준히 떠나고, 다시 그 빈자리에 누군가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상적인 ‘집’의 이미지는 평온하고 따듯한 가족의 정주 공간이겠습니다만, 오늘날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집이란 언제든 삶의 필요에 따라 옮겨질 수 있는, 분명 머물지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현재 어떤 주거지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해답은 ‘내가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거주에 동원할 수 있느냐’이겠지만, 이외에도 많은 요소를 고려합니다. 아이들의 학교는 가까운가, 출근은 수월한가, 주변에 쇼핑할 곳이 있나, 공원이나 문화시설은 넉넉한가 등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동네는 사실 거의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이 질문들의 끝을 약간 고쳐서 거주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학교, 직장, 쇼핑, 공원 등 편의시설에 ‘가기 편리한가?

이런 이유로 대도시의 삶에서 교통의 편리함은 삶의 편리함으로 귀결되고는 합니다. 2018년 3월, 현재 인천의 차량 등록 대수가 150만 대가 넘습니다. 인천 300만 인구를 어림잡아보면 두 명이 한 대 이상의 개인차량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더 곧고, 넓고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도로에 대한 요구가 높아집니다. 그래서 나날이 새로운 도로가 개통되고 확장되며, 계획됩니다. 또한 대중교통에 대한 요구가 커집니다. 양적으로 늘어난 대중교통은 질적으로도 효율성과 편의성이 제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천 지하철 노선이 추가되고, 이에 맞추어 버스 노선도 조정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부족하여 인천발 KTX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연결과 이동의 편리함에 대해 사람들의 높아진 욕구는 도시 내부뿐만 아니라 도시 밖 임의의 공간으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이렇듯 도시 내외부의 연결을 순조롭게 하도록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도시 행정가가 당연히 노력해야 하는 일이며, 자랑할 만한 일이 되었습니다. 작년부터 내세운 인천의 슬로건 ‘All ways Incheon’은 인천시민의 삶에 이동과 교통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상징하며, 아울러 인천시가 이러한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신기한 것은 ‘도시’라는 단어는 공간적인 영역과 경계의 의미를 분명히 담아내는데, 정작 오늘날의 훌륭한 도시는 머물기 좋은 곳보다는 이동하기 편리한 곳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인천에서 아주 오랫동안 이동의 권리로 정부와 다투었던 곳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서울지하철 7호선 청라 연장사업입니다. 청라국제도시 계획 당시부터 논의되었던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연장안은 개발과 분양과정에서 무수한 홍보에도 불구하고 사업성 부족으로 취소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2011년 LH 토지 조성 원가에 지하철 7호선 건설 비용이 이미 포함되었는데, 이것은 아파트 분양 가격으로까지 영향을 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로 인해 LH는 이 비용을 법적으로 반환할 의무는 없다고 하지만, 지하철 건설을 완전히 백지화하는 것은 더는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2013년 이후에도 몇 차례 계획노선 변경과 이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가 시행되었고, 수도권매립지와 연관된 정치적 협력 등 여러 일을 거쳐야 했습니다. 비로소 2017년 12월이 되어서야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였고 근 10년 만에 지하철 건설 논의를 현실화하였습니다. 물론 지하철을 이용하려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겠지요.

7호선 연장사업이 확정되고, 지역사회에서는 정거장 확보를 위한 무수한 방법을 동원해야만 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청라에 정거장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을 반영하여 청라호수공원에 미디어 타워를 활용한 ‘7호선 청라 시티타워역 희망탑’을 만들었습니다. 이 희망탑에 굵게 새겨진 역명에서 시민들의 복잡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이제 이곳에 ‘시티타워역’이 개통하기를 기원하는 일입니다.

7호선 청라 시티타워역 희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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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을 위한 도시’의 관점에 따르면 7호선 연장에 대한 지역사회의 요구는 간결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7호선 연장 논의가 지지부진했던 사이에 공항철도가 건설되자 지하철 5, 9호선 환승을 통해 청라국제도시를 비롯한 서구 지역과 서울 주요 업무지역과의 접근성이 크게 개선되었기 때문입니다. 5년 단위로 시행한 통계청의 ‘인구 표본조사’에서 2005년과 2015년에 집계된 통근·통학 인구수를 살펴보면 이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2005년과 비교했을 때 2015년 인천에서 서울로 출퇴근하거나 통학하는 중학생 이상 인구가 40% 이상 껑충 뛰었습니다. 아울러 인근 부천으로 통근·통학한 인구도 29% 가까이 늘었습니다. 같은 기간에 인천 인구가 14%나 증가했으니, 서울과 부천에 직장과 학교가 있는 많은 사람이 인천을 주거지로 택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005년 서울과 부천으로 통근·통학하는 사람 셋 중 한 명이 인천 부평구에 거주합니다.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부평구의 인구수가 많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경인고속도로와 지하철 1호선이 인천과 외부지역을 연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발지 인구수 비율
중구 2,888 2.14%
동구 2,676 1.98%
남구 19,060 14.11%
연수구 9,106 6.74%
남동구 17,812 13.18%
부평구 42,575 31.51%
계양구 22,171 16.41%
서구 18,386 13.61%
강화군 422 0.31%
옹진군 3 0.00%
135,099 100.00%

2005년 인천 각 구별 서울 도착 통근·통학 인구 수
(출처: 2005 인구총조사 중 통근·통학(10% 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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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인천 각 구별 서울 도착 통근·통학 인구 수(출처: 2005 인구총조사 중 통근·통학(10% 표본)이후 2015년까지 10년간 인천은 외부지역으로 편리하게 이동하는 여러 방법이 생겼습니다. 2007년 인천국제공항철도가 김포공항역까지 개통되면서 서울 지하철 5호선을 환승 이용 할 수 있게 되었고, 2009년 지하철 9호선 개통으로 서울 접근성이 더욱 향상되었습니다. 2012년에는 지하철 7호선이 부평구청까지 연장 운행되었습니다. 도로교통에서는 제3경인고속화도로(330번 국도)가 2010년에, 청라IC가 2013년에 차례대로 개통되면서 인천 시내에서도 공항고속도로를 진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옥철’의 원조였던 지하철 1호선 외에도 인천 바깥 지역으로 이동하는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동의 선택지가 다양해지면 인천의 많은 지역에서 주거지가 새롭게 개발되었고, 결과적으로 서울과 부천으로 통근·통학하는 인천 구별 인구수가 고르게 분포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2015년에 서울로 통근·통학하는 인구 중 4분의 1이 부평구에 여전히 거주하지만, 서구에는 20%, 남동구와 계양구에는 각각 15% 이상의 사람들이 거주합니다. 특히 마포, 양천, 강서구 지역으로 통근·통학하는 사람들은 서구에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공항철도와 공항고속도로의 존재는 인천의 여타 지역보다 서구 지역민에게 많은 이동의 기회를 가져다준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지하철 7호선이 청라국제도시 지역민에게 가져다줄 가능성 또한 각별하게 보입니다. 작년 봄,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수도권 평균 통근시간을 1시간 36분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현재 7호선 부평구청역에서 강남구청역까지 지하철운행이 약 1시간 걸립니다. 절대 짧지만은 않은 통근시간이 수도권 광역급행철도 GTX 건설의 당위성으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만약 청라국제도시에서 7호선을 이용하게 되면, 일반적인 통근 거리에서도 직접 접근이 가능하고 청라는 우리나라의 가장 큰 중심업무지역으로 손꼽히게 됩니다. ‘이동의 가능성’에서 이것은 무시할 수 없는 강점입니다.

출발지 인구수 비율
중구 5,322 2.78%
동구 3,172 1.66%
남구 19,978 10.44%
연수구 15,466 8.08%
남동구 30,012 15.68%
부평구 48,324 25.25%
계양구 30,303 15.83%
서구 37,596 19.64%
강화군 1,141 0.60%
옹진군 84 0.04%
191,398 100.00%

2015년 인천 각 구별 서울 도착 통근·통학 인구 수
(출처: 2015 인구총조사 중 통근·통학(20% 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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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포구 강서구 양천구
중구 413 3.05% 109 1.88% 587 4.15%
동구 204 1.51% 101 1.74% 92 0.65%
남구 1120 8.28% 553 9.54% 767 5.42%
연수구 926 6.85% 333 5.75% 692 4.89%
남동구 1775 13.12% 816 14.08% 1309 9.26%
부평구 3071 22.71% 1284 22.16% 2306 16.31%
계양구 2478 18.32% 1185 20.45% 3368 23.82%
서구 3431 25.37% 1359 23.46% 4886 34.55%
강화군 100 0.74% 54 0.93% 123 0.87%
옹진군 7 0.05% 0 0.00% 10 0.07%
13525 100.00% 5794 100.00% 14140 100.00%

2015년 인천 각 구별 서울 마포구, 강서구, 양천구 도착 통근·통학 인구 수
(출처: 2015 인구총조사 중 통근·통학(20% 표본). 바로가기 ▶)

청라국제도시와 송도국제도시에 대한 여러 비판이 존재합니다. 처음의 청사진에서 제시한 것처럼 청라가 국제업무 기능을 수행한다면, 아침마다 청라를 향해 출근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7호선의 연장은 타 지역에서 청라까지 이동해야 하는 시민들의 수요가 투영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어떤 시각에서는, 7호선 연장을 위한 오랜 시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라국제도시가 계획대로 진전되지 않자 서울에 일자리를 의존해야 하는 도시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도시도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적 규모의 도시들도 가까이에 인접한 도시와 도시권(City-Region)을 형성합니다. 모든 도시가 한 도시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으며 함께 발전해갑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동과 연결은 필수적입니다. 처음에 강조했듯이 많은 이동과 연결의 기회를 제공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 도시에서 자신의 기회를 찾으려고 합니다. 지하철 7호선 희망탑에서 가능성을 엿보는 이유입니다.

 

글, 사진제공/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김윤환 외(2016). 확장도시 인천. 마티.
존 어리(강현수·이희상 역)(2014). 모빌리티. 아카넷
국가통계포털(바로가기 ▶) 인구총조사
Igor Calzada(2015). Benchmarking future city-regions beyond nation-states. RSRS. 2(1)




점거의 민주주의, 옛 시민회관 쉼터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안역 옛 시민회관 사거리 앞에는 ‘옛 시민회관 쉼터’가 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곳은 한때 인천시민들의 문화공간이었던 인천시민회관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나신 인천 토박이라면, 시민회관에서 종종 상영하던 심형래, 김청기 감독의 영화를 보신 기억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민회관은 1994년 개관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 그 기능을 넘겨주었고, 2001년 건축물 노후로 철거되어 그 자리에 공원이 조성되었지요. 이곳에는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이름의 기념비가 몇 개 있습니다. 이것들은 공통으로 하나의 사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986년 5월 3일에 벌어졌던 ‘5.3 민주항쟁’입니다.

5.3 민주항쟁은 1986년 3월부터 서울,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청주에 이어 개최된 당시 야당인 신한민주당의 직선제 개헌 추진을 위한 개헌 현판식을 계기로,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사회 각계의 다양한 요구가 폭발한 시위를 말합니다. 이전까지의 다른 지역에서 열린 개헌 현판식 집회는 최대 30만 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였습니다. 그러나 인천 5.3 민주항쟁이 이전 집회와 다른 것은 민주항쟁이 발생하기 직전에 일어난 4월 30일 여야 대타협에 대한 반발로, 정당 행사의 차원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의 요구가 직접 드러난 ‘중심이 없는’ 집회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시민회관에서 12시에 개최 예정이었던 신민당의 개헌 현판식은 최대 10만 명으로 추산된 시민들과 경찰들의 대치에 가로막혀서 열리지 못했고, 집회의 중심에는 학생운동을 진행한 대학생, 노동계, 종교계 등을 비롯한 일반 시민들이었습니다. 오후 5시 반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기까지, 짧게나마 시민회관 사거리를 중심으로 발생한 시위현장의 가장자리에서는 경찰과 경계를 놓고 정면으로 부딪혔습니다. 반면, 안으로는 군사정권의 질서를 무너트린 해방구였습니다.

인천 5.3 민주항쟁 정신 계승비(좌)와 86년 5.3 민주항쟁 당시 모습(우)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나 도시의 한 영토를 점령하는 것은 저항의 주된 방법이었습니다. 1832년 6월 프랑스 파리봉기 배경으로 다룬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보신 분들이라면 온갖 가구들로 쌓아 올린 바리케이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2010년부터 아프리카와 중동을 강타한 ‘아랍의 봄(Arab Spring)’,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보름 넘도록 시민들로 메웠던 ‘2011 이집트 혁명’도 그 예입니다. 우리나라 또한 많은 노동운동가가 공장에서, 첨탑에서, 크레인 위를 점거해 왔고, 6월 항쟁에서는 시민들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곳곳을 점령했습니다. 그것을 국가가 제한할 수 없었을 때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도시의 한 공간을 점령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이 하나의 의사표현을 하는 거대한 장치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야기를 잠깐 돌려서,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élixGuattari)는 하나의 질서 속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을 ‘전쟁’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철학자 이진경의 해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새로운 삶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시도가,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보존하며 통합하는 것을 기능으로 하는 국가와 충돌하는 사태”를 이들은 전쟁이라는 개념으로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들루즈와 가타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권력이 만든 현재의 질서를 ‘공간에 홈을 팝니다.’라고 합니다. 아무런 표시가 없는 맨 땅에 그어놓은 홈은 경계가 되고, 때로는 그곳으로 움직여야만 하는 통로가 됩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던 땅 위의 사람과 사물에게 홈으로 표시한 질서는 주어진 제약입니다. 이를테면 인천 송도 커넬워크 옆이나 서울 세종대로를 예로 들수 있습니다. 반면, 앞에서 이야기한 ‘전쟁’을 만드는 존재들(들루즈와 가타리는 이들을 ‘전쟁기계’라고 부릅니다)은 이 홈을 따르지 않고 다시 공간을 ‘매끄럽게’ 만듭니다. 권력은 전쟁기계를 제압해서 기존의 홈을 유지하든 포섭하여 새로운 홈을 만들어 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권력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때, ‘점거’는 무엇보다도 효과적이고 강력한 투쟁이자 대화의 수단이 됩니다. 비록 작은 공간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질서에 저항하는 공간을 용인하게 되면, 전체의 질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라면 한 학생이 수업 중에 자더라도 당장 수업을 하는 데 문제는 없겠지만, 그 학생을 깨우지 않는다면 곧 모든 학생이 자버리고 말겠죠. 행군할 때 한 군인이 발을 맞추지 않는 것을 너그럽게 봐준다면 부대의 제식은 곧 무의미해지고 말 것입니다. 국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권력은 지속해서 작은 점령과 이탈을 찾아내어 다시 질서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질서 속으로 짓눌린 많은 사례만큼이나 새로운 질서를 만든 사례들을 보아왔습니다. 1871년 파리시민, 노동자들의 봉기로 구성한 ‘파리 코뮌’ 정부의 설립과 해체,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전자라면 그로 인해 촉발된 1917년 ‘러시아 혁명’과 ‘6월 민주항쟁’은 후자일 것입니다. 권력의 질서가 사람들의 생각을 외면할 때, 점거는 권력을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시 공간 안에서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점거의 방법을 택해 왔고 지금도 택하고 있습니다.

OWS(Occupy Wall Street: 월스트리를 점령하라) 는 1%의 월스트리트에 대항하기 위해 99%의 모두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좌) 일자리, 교육, 의료보험 등 모든 미국 사회의 문제제기와 토론이 이루어졌다.(우)

지금까지의 많은 점거는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선택이었기 때문에 폭발적이고 단기적이었습니다. 많은 점거는 빠르게 소멸하였거나 혹은 빠르게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점거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나의 예는 2011년 가을, 뉴욕의 경우입니다. 서브프라임 위기 이후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Occupy Wall Street, OWS)은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황소상을 둘러싸며 시작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월스트리트 부근의 주코티 공원을 점거하였습니다. OWS는 점거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습니다. 바리케이드를 쌓고, 밖을 향해서 버티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사람을 모두 받아들이는 열린 점거를 진행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금융자본의 욕심으로 인해 처한 자신들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리버티 스퀘어(주코티 공원)’를 운영하기 위한 일종의 직접 민주주의를 실험합니다.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은 점거가 순간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적인 것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리버티 스퀘어 안에서 음식을 기부받아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노래를 부르며 회의와 이야기를 합니다. 밤에는 침낭과 텐트 안에서 잠을 잡니다. 도시에서 각자의 일상을 그대로 옮겨서 점거했던 것이죠.

2016년의 서울 또한 변화한 점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전히 많은 시민단체가 집회를 추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무대를 설치하고 플래카드나 전단지를 만듭니다. 그러나 집회 선동자의 뜻에 따라 거리행진을 하고 점거의 가장자리에서 권력과 싸우는 등 과거의 점거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은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각자 자유로운 발언을 하며 공감하는 시간을 만듭니다. 노동조합, 대학 학생회가 아닌 ‘장수풍뎅이 연구소’, ‘끝나고 치맥’과 같은 유머 넘치는 깃발의 등장은 점거한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투쟁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들이 ‘전쟁기계’일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인천의 5.3 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약 30년이 되었지만, 그 날을 한 번쯤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당시의 투쟁적이고 공격적인 점거의 모습이 2018년의 모습과 완전히 단절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약자는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에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점거는 어떤 모습으로든 계속해서 이루어지며 또 사라집니다. 오늘날의 도시 공간 속의 점거를 되돌아보고 민주화를 위해 애쓴 사람들의 노력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기 위해, 우리 도시에서 32년 전의 점거를 다시 기억해 봅니다.

 

글, 사진제공/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고병권(2012).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그린비
데이비드 하비(2014). 반란의 도시. 에이도스
이진경(2002), 노마디즘 1,2. 휴머니스트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2001), 천 개의 고원. 새물결
“그 날, 1986년 5월 3일”, OBS, 2017년 7월 1일 방송
이상철. 촛불을 바라보는 세가지 시퀀스. 뉴스앤조이, 2017.9.3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함께 있지만, 함께 있지 않은 –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8년 4월 27일은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이 문을 연 지 100일째 되는 날입니다. 매년 세계 여러 나라의 공항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천국제공항은 지난 3월 한 달 동안 3만 편이 넘는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매우 중요한 공항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인천국제공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제2여객터미널이 개항하고, 몇 차례 방문하며 드는 생각은 ‘공간이 무척 친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외형은 기존의 제 1 여객터미널과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공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할 내부 공간 구성은 제1터미널과 매우 유사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지하층으로 연결된 지하철, 1층의 입국장, 3층의 출국장, 그 사이를 분리해주는 2층의 사무실들, 그리고 4층의 식당 배치는 제1여객터미널이나 제2터미널 모두 공통으로 일치합니다. 출입국심사대를 중심으로 반드시 나누어져야 하는 일반 구역과 면세 구역의 구성은 당연합니다만, 이렇게 층별 구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나니, 제2여객터미널에 처음 찾아오더라도 그 동안 제1여객터미널을 이용해 왔다면 전혀 어렵지 않게 공항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출국장에 배치 된 항공사 부스의 형태와 색깔도 유사하고, 커다란 알파벳 사인의 색깔까지도 같습니다. 올려다보이는 지붕의 형태는 다르지만, 4층을 작게 만들어 출국장을 두 개 층 높이로 탁 트여 놓은 것도, 각 층을 이동하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여객터미널의 중앙과 바깥쪽 통유리벽 따라서 배열한 것도 같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문제가 있지 않다면, 제 2여객터미널에 도착해서 비행기에 탑승하기까지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익숙하게 여객터미널을 이용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자동 발권기계와, 셀프 수하물 위탁 카운터가 늘어난 오늘의 공항에서는, 마음만 먹는다면, 비행기에 탑승할 때까지 단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출국하기 위해서는 티켓, 여권과 탑승 검사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 가방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인천국제공항 제 1여객터미널(좌)와 제 2여객터미널(우).
공간 구성, 사인물 등 제 1 여객터미널과 유사점이 많은 제 2여객터미널이 낯설지 않습니다.
(출처: 박준철기자의 에어포트 통신 ‘날다, 떠나다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오늘 제가 공항에 대해서 독자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 점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지만, 서로 대화와 교류가 없어도 되는 그런 장소 이야기입니다.

지난여름,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도시” 1편과 3편에서, 우리는 어떤 장소가 더 많은 의미가 있게 되고, 더 중요해지고, 더 많은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장소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랫동안 축적해 온 기억과 역사를 느낄 수 있고, 사람들이 상호 작용하는 “정통성”의 장소들의 필요성을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장소는 사람들의 공통된 기억, 장소 안에서 맺어지는 사람들 간의 관계, 장소의 정체성이 없어도 무방한 곳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공항은 이런 장소 중에서 대표적인 곳입니다. 공항은 모두 다른 디자인을 가진 듯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처음 찾아온 외국인도 이해하기 쉽게 다른 나라의 공항과 비슷합니다. 오늘 문을 연 공항이라 하더라도, 공항을 이용하는 데 있어 불편하지 않거나, 감성적으로 아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단 한마디 대화 없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é)는 이렇게 역사성도, 사람끼리의 관계도, 정체성도 없는 장소를 ‘비-장소(non-place)’라고 부르길 제안했습니다. 이곳에서 필요한 것은 사람들 간의 대화와 행위의 교류가 아니라 공적으로 증명된 매개체입니다. 그래서 오제는 비-장소에서 개인은 타인과 같은 공간 있으면서도 고립을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공항으로 예를 들자면,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 대신 커다랗게 설치된 사인물과 전광판을 이용하고,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여권을 보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이런 수준의 교류는 각 여행자와 공항 당국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여행객들 사이에선 어떠한 수준의 교류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곳은 온전히 ‘장소’이며, 어떤 곳은 완벽히 ‘비-장소’라고 규정짓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분명, ‘비- 장소’의 성격을 짙게 띠는 장소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마르쿠스 오제는 비-장소의 예로 고속도로, 쇼핑몰, 테마파크 등을 듭니다. 오직 도로 표지판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운전자들이 모이는 고속도로, 각자 쇼핑에 전념하다가 신용카드만 제시하면 되는 쇼핑몰, 같은 방식으로 자유 이용권을 하나 들고 모든 이용객이 각자의 놀이기구를 찾는 테마파크 같은 곳들은 사람들에게 공통된 기억이나 정체성을 주기 힘든, 비-장소입니다.

1990년대 초, 오제가 처음 비-장소의 개념을 제시할 때, 비-장소가 생겨난 이유가초근대성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교통과 통신은 극도로 발달해서 세계를 ‘좁히고’, 사람들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기 보다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대면으로 소통하기보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통해 만나고, 물물교환이나 현금보다는 신용카드와 전자결제가 더 익숙해지는 극도로 근대화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장소는 오랫동안 여러 사람이 교류하고, 공통된 기억을 만들고, 장소의 정체성이 생겨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삶의 필요에 따라 지속적으로 장소를 옮겨 다니고,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며 도시를 떠다닙니다. 근대 이전에 사람들이 거대한 흐름으로 같이 움직였다면 , 오늘의 현대인은 마치 꽃가루처럼 각자의 경로를 찾아 옮겨갑니다. 오제는 비-장소에서개인을 ‘고립’된다고 표현하지만, 어쩌면 관계로부터 독립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몇 년 전부터 편의점 계산대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법 합니다. 어떤 사람은 편의점에서 물건을 구매하며 점원과 이야기를 나누기를 꺼립니다. 밤늦은 시간에 아르바이트생은 술에 취한 손님과의 대화가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몇 년 전부터 편의점 계산대가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1 상품입니다” 또는 “증정품을 받아가세요” 같은. 그리고 이제는 RFID 기술과 인공지능의 발달로 무인 편의점이 등장했고,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편의점은 작은 예의 하나일 뿐, 많은 소비공간에서, 아니 많은 도시 공간에서 우리는 이러한 고립을 경험합니다. 점점 더 많은 공간이 ‘비-장소’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띠는 것이지요.

최근 도시에서 사람들이 정체성 짙은 장소를 찾는 것, 오래된 공간들이 주목받고, 이를 반영한 예스러운 인테리어 디자인이 유행하는 것, 젠트리피케이션을 걱정하며 어떤 장소들이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대부분 장소가, 심지어는 가장 많은 기억을 공유하고, 정체성이 명확할 것 같은 ‘마을’과 ‘집’ 마저도 ‘비-장소’의 성격이 점점 짙어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여 정보를 공유하고, 유대를 쌓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구였을지 모를 수십 년 전의 사람들과 같은 장소 안에 머물며 목소리와 눈빛을 나누는 경험을 아쉬워하는 것이 오늘의 도시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글, 사진제공/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마르크 오제 (이상길·이윤영 역), 2017, 비장소, 아카넷
전상인, 2014, 편의점 사회학, 민음사
정헌목, 2013, 전통적인 장소의 변화와 “비장소(non-place)”의 등장, 비교문화연구 19(1)
정혜진, 2015, 비-장소적 시각에서 본 공항건축의 특성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계획계 31(11)
인천국제공항공사 홈페이지 (홈페이지 바로가기 ▶)




인천사람 되기, 인천사람 만들기 – 인천SK행복드림구장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3월이 되자 다시 포털의 스포츠 페이지에 프로야구의 각 팀의 올해 전망이나 선수의 각오가 담긴 인터뷰, 스프링캠프에서의 연습경기 결과와 같은 기사들로 메워지고 있습니다. 2018년의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조금 가볍게, 야구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프로야구는 급격하게 팬이 늘어났습니다. 2006년 300만 명을 간신히 넘긴 관중 수는 2011년에는 680만 명에 도달했고, 최근 2년간은 800만 명이 넘는 관중이 매년 야구장을 찾으면서, 국민 스포츠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인천도 예외는 아니어서, 2006년 야구장을 찾은 관객이 331,143명이었던 것에 반해, 2007년엔 곧바로 두 배에 가까운 656,426명이 이른바 ‘직관’을 했습니다. 2012년에는 인천의 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한 해 관중이 100만 명을 넘기도(1,069,929명) 했습니다. 인천은 꾸준히 80만 명을 상회하는 관중을 동원하는, 나름 ‘빅마켓’이 된 것입니다.

프로야구는 탄생한 이후 꾸준히 사랑을 받았지만 2010년대의 인기가 유례가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천 야구도 마찬가지로 오랜 역사의 자부심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지역 구단의 역사가 다사다난하기도 하였고 전통적으로 스몰마켓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던 것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최근 10년간 급상승한 프로야구의 인기를 보며, 과거와 달라진 도시와 야구, 더 나아가 도시와 프로스포츠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1982년 프로야구의 탄생, 1983년 프로축구와 프로씨름의 시작이 당시 독재정권에 의한 3S 정책의 일환이며, 정치적 목적이 있었음을 다시금 부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여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확실한 것은 국가가 직접 지역과 운영 기업을 선정하고, 구단의 운영까지 개입했던 이유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끼는 여가의 시간과 공간을 국가가 원하는 한 지점에 몰아넣음으로써, ‘야구를 보는 즐거움’을 ‘정권에 대한 만족감’으로 치환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이유로 누적되어 온 지역감정이 각 지역에 하나씩 배분된 야구에 투영된 것은 어쩌면 당시 독재정권의 목적이 성공적으로 달성되었음을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지역감정을 간혹 벌어지는 선거에 드러내기보다, 매일 벌어지는 역동적인 야구에 투영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짐작하다시피, 인천야구의 역사는 이러한 틀로 읽어내기 조금은 애매하지요. 인천 야구는 오랜 역사와 우수한 고교팀의 인기를 갖고도 프로 구단을 운영할 기업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어야 했고, 그래서 오랜 시간 여러 기업으로 팔려야 했으며, 한때는 구단이 도시를 두고 떠나고 그 빈자리는 어제까지 다른 도시의 구단에서 뛰던 선수들이 새로운 유니폼을 입고 나타나 인천을 대표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천의 프로야구 역사에서 대부분 시간은 영광보다는 아쉬움과 빈약함으로 기억되고는 했습니다.

게다가 인천에서 프로야구를 소비할 계층의 사람들은 인천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많지 않았지요. ‘외지인의 도시’ 인천에는 인천에서 태어난 사람만큼이나 충청에서, 호남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영호남보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지역감정과 맞물려, 인천의 야구팀은 인천에 사는 사람들의 선택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많은 인천시민들은 고향의 팀을, 부모님의 고향의 팀을 선택했습니다. 숭의야구장의 청보 핀토스나 태평양 돌핀스를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3루를 채운 홈 팬만큼이나 1루를 메운 빙그레 이글스나 해태 타이거즈의 팬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옛 숭의야구장의 경기 모습.
인천시민들은 세대에 걸쳐 야구의 문화와 기억을 공유하기 어려운 역사와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출처: KBSn스포츠 “인천 야구의 기억” 중.  동영상 바로가기▶ )

그래서 현대 유니콘스가 우승을 거듭하던 90년대 후반에도 연간 관중 50만 명을 넘지 못하던 스몰마켓 인천에서의 2012년 100만 관중 동원은 단순히 한 야구단을 운영하는 그룹의 성공으로 보기엔 더 많은 함의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레이더스의 선수들을 잔뜩 데려다가 갑자기 인천 야구팀이 되었던 SK 와이번스는 어느덧 인천에 있던 그 어느 야구단보다도 오래 인천에 자리 잡은 야구팀이 되었습니다. 2008년 이후 야구 관중의 계층이 다양화되고 젊은 층과 여성 관중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인천에 옮겨와 산 외지인들의 인천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나의 팀’으로 인천의 팀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인천은 프로야구가 시작되고 25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도시인들 다수의 사랑을 받는 ‘프랜차이즈 팀’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1983년과 다른 것은 지역사회에 프로야구단이 주입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프로야구의 문화 속에서 도시의 사람들이 자신의 팀을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SK 와이번스는 프로야구계의 조정에 의해서 인천에 이식된 팀이었기에,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도시에 융화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이것은 실은 마케팅의 결과물이지만, 인천의 대중문화의 한 켜를 두텁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들입니다. 지역 연고 선수를 영입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는 것, 다양한 기부를 하는 등이 있겠지만, 인천SK행복드림구장에서도 이런 융화의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홈런이 나오면 울리는 뱃고동 소리나, 초대형 전광판 위에 장식된 인천의 랜드마크들이 인천의 이미지를 환기시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응원 문화가 자리 잡았음에도 꾸준히 불리는 응원가 ‘연안부두’는 기성세대와 젊은 야구팬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바로 응원 구호인데, 10개 구단 중에 8개 구단이 ‘최강 OO’를 사용하고, LG 트윈스가 ‘무적 LG’를 사용할 때 SK 와이번스는 ‘인천 SK’를 외치지요. 이렇게 함께 ‘인천’을 외치면서, 우리는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쉬움을 느낄 때, 이것을 한 스포츠의, 혹은 한 기업의 성공과 실패뿐만 아니라, 일정 부분 우리 도시의 성공과 실패로 인식하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됩니다.

인천SK행복드림구장의 빅보드. 전광판 위에 인천의 랜드마크와 상징적 이미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 출처 :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

「주어진 인천의 풍경들」(인천문화통신3.0 34호)에서 인천의 지방정부는 공통으로 어떤 인천의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인천 사람들이 어떤 하나의 정체성을 갖기를 바라는 것일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도시가 야구만이 아니라 다양한 프로 스포츠의 연고를 지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수 있습니다. 모든 지방정부는 프로 스포츠를 지원하면서, 스포츠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통해 관람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지역에 대한 애정과 동일시, 함께 관람하는 지역민들과의 유대감 형성과 같은 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이것은 함께 환호하거나, 파도타기를 할 때, 경기 후 돌아가면서 응원가를 부를 때, 버스나 지하철에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발견할 때와 같이 소소하고 흔한 순간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여가를 즐기다가, 나도 모르게 조금 더 인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글, 사진제공/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김은식, 2003, 『삶의 여백 혹은 심장 야구』, 한겨례출판사.
심은정, 2014, 「제5공화국 시기 프로야구 정책과 국민여가」, 역사연구 26.
유관호,박두용, 2009, 「프로야구·축구 관람객의 연고지 사회인식 요인 분석」, 한국체육정책학회지 13.
임수원,이근모, 2003, 「영·호남팀 프로야구경기가 지역감정에 미치는 영향, 한국스포츠사회학회지」, 16(1).
한국야구위원회 홈페이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