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콕콕] 걸 크러쉬와 차별 문화

원더우먼은 1941년에 제작된 DC코믹스의 만화 캐릭터입니다. 슈퍼맨, 배트맨과 함께 DC코믹스의 ‘빅3’로 불리죠. 그 슈퍼히어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이 최근 개봉했습니다. 미지의 섬 데미스키라 왕국의 공주 다이애나가 원더우먼이 돼 1차 대전을 겪고 있는 인간 세상을 구한다는 내용입니다. 패티 젱킨스(46. 여)가 연출했네요. CNN은 “여성이 슈퍼히어로 영화의 감독을 맡은 것은 처음이며, 영화의 흥행도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2017.6.6. 조선닷컴) 벌써부터 <원더우먼2> 제작 이야기가 들려옵니다.(자세히보기 ▶)

원더우먼 등장 모습. 사진출처 Youtube 캡처

<원더우먼>은 아마존 데미스키라 왕국의 여성들의 액션을 화려하게 보여줍니다. 35명의 여배우가 6개월 동안 특별 훈련을 받았고, 원더우먼 역을 맡은 배우 갤 가돗은 9개월간의 트레이닝을 거쳐 아마존 전사로 거듭났다고 하네요. 여성 영웅을 단독 주연으로 내세우고 액션에 집중한 영화는 여성 영웅의 가치를 강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만화로 처음 등장한 원더우먼은 강한 힘을 가진 여성 히어로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상징이 되기도 했죠. 남성이 쇠사슬을 걸면 힘을 잃는 무기 등, 일부 설정이 남성의 성적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요.

한국에도 주목받는 여성 원톱 영화가 있습니다. 김옥빈, 김서형 주연의 <악녀>(감독 정병길, 제작 (주)앞에있다) 인데요, 살인병기로 길러진 최정예 킬러 숙희(김옥빈 분)가 자신을 둘러싼 비밀과 음모를 깨닫고 복수에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언론은 <악녀>가 남성보다 더 거칠고 독한 액션을 보여준다고 소개합니다. 숙희는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량 위에 매달리고 남성보다 큰 장검을 휘두르며 액션을 펼친다고 하네요.

영화<악녀> 포스터

이들 영화 소개에 빠지지 않는 단어가 ‘걸 크러쉬’입니다. 걸 크러쉬는 여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멋진 여성을 뜻하는 신조어로, 여성이 다른 여성을 선망하거나 동경하는 마음이나 현상을 말합니다. 소녀(Girl)와 반하다(Crush on)를 합친 단어라고 하네요.

여기서의 선망과 동경은 ‘성적 감정’이 배제된 ‘강한 호감’을 뜻합니다.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은 닮고 싶은 외모와 뛰어난 패션 감각과 센스, 지성 등을 갖추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일반 여성들의 롤모델이 됩니다. 흔히 대상이 가수일 경우에는 ‘허스키한 보이스와 강렬한 퍼포먼스’로, 연기자일 경우에는 ‘센 언니’ 등의 표현으로 걸 크러쉬와 매치하고 패션 분야에서는 ‘걸 크러쉬를 원한다면 투블럭 숏컷’으로 홍보합니다. 걸 크러쉬와 비슷한 단어로 ‘남성이 남성에게 갖는 동경과 찬양’의 의미를 가진 ‘맨 크러쉬’라는 용어도 있다네요.

최근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 씨가 펴낸 책 <영초언니>는 박정희 정권 후반기인 1970년대 중후반, 소위 ‘운동권’에 몸담았던 이들의 젊은 날을 그린 작품입니다. 자전적 논픽션 에세이로, 등장인물이 모두 실명을 쓴 실제 인물이라고 합니다. 제목의 영초언니는 저자의 <고대신문> 4년 선배였던 천영초로, 그를 소개하는 기사에도 ‘걸 크러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오마이뉴스 2017.6.11. 자세히보기 ▶)

“천영초는 1970년대 중·후반 운동권의 상징이었던 인물이다. 그녀는 서명숙과 후배들에게 ‘걸 크러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박정희 독재정권과 남성 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토론하고, 저항하고, 행동하는 여학생들의 서클 ‘가라열’의 리더였다.”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서 저항하고, 행동했던 여자. ‘걸 크러쉬’는 외모나 캐릭터를 동경하는 선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이렇게 ‘아픈 기억’에도 소환됩니다. 

‘걸 크러쉬’이미지, 사진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앞서 <원더우먼>과 <악녀>를 언급했지만 여자가 주인공으로 ‘앞에 섰기’ 때문에 무조건 좋은 영화, 괜찮은 영화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성 영화제는 있는데 왜 남성 영화제는 없느냐’, ‘많은 히어로 중 하나일 뿐인데 왜 원더우먼에 그렇게 열광하느냐’는 남성들(?)의 질문은 악의 없음을 감안해도 충분히 나이브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만 년 전, 지구에는 호모 사피엔스뿐만 아니라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 등 최소 6종의 인간 종이 살아있었습니다. 이후 호모 사피엔스가 유일한 승자로 살아남았고, 그들이 현생인류 ‘인간’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려줍니다.

사피엔스,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알려진 모든 인간사회에서 최고의 위계질서는 성별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곳에서 남자가 더 좋은 몫을 차지했죠. 많은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 남녀 간의 문화적, 법적, 정치적 차이 중 일부는 성별에 따른 생물학적 차이를 반영한 것입니다. 출산은 여성의 일이었고(여성에게만 자궁이 있었고), 사회는 이런 사실 주변에 문화적 개념과 규범을 층층이 쌓아올렸습니다. 하지만 하라리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 또는 차별이 ‘생물학적 근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민주사회에서 자궁을 가진 개인(=여자)은 법적 지위를 갖지 못했습니다. 판사는커녕 평의회 의원도 되지 못했죠. 교육 기회가 적었고, 사업을 하거나 철학적 논의에 참여할 수도 없었습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자궁이 있으면 정치 지도자, 웅변가, 예술가, 상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아테네 여성은 투표에 참가하고, 공직에 선출되며, 연설을 하고, 대학에 다닙니다. ‘자궁 때문에’ 남자보다 뒤쳐질 일은 없죠.

“여성의 자연스러운 기능은 애를 낳는 것이라는 주장, 동성애는 부자연스럽다는 주장에는 그다지 타당성이 없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규정하는 법과 규범, 권리와 의무는 대부분 생물학적 실체보다 인간의 상상력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란 두 개의 X염색체와 하나의 자궁, 많은 에스트로겐 호르몬을 지닌 사피엔스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상상의 인간 질서에 속하는 여성 구성원을 말한다. 그녀가 속한 사회의 신화들은 그녀에게 독특한 여성다운 역할(아기를 키운다), 권리(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의무(남편에게 복종)를 부과한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218-219쪽.(볼드체는 필자)

사진출처 : 브런치

이번에는 10년 전에 출간된 책 이야기입니다. 제목이 <남자 사용 설명서>네요. 여성학자이자 평화학 연구자인 정희진 씨에 의하면 이 책에는 “미니스커트, 숏팬츠보다 짧은 옷 안에 제발 쫄쫄이 속옷 좀 입지 마시라”(33쪽), “콘돔의 사용은 섹스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기 충분하다”(195쪽) 같은 말이 나온다고 합니다. “적절한 시기와 장소에서 남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효과적인 노출법도 제시, 아니 지시하고 있다네요.(한겨레. 2017.6.9. 자세히보기 ▶)

한국사회에서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는 문화는 일상적입니다. 정희진 씨는 이를 두고 “여성 스스로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눈요깃거리는 눈으로 보고 즐기며 만족한다는 의미입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눈요기 대상화’의 빈도가 잦고, 종종 사물화됩니다. 남자든 여자든 ‘눈’을 만족시키는 예쁨과 멋진 사람은 좋은 것, 그 반대의 경우를 대변하는 듯한(?) 장애인과 노인은 나쁜 것, 쓸모없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상투성과 차별적 상상 속에 있나요?
걸 크러쉬는 정말 ‘힙한’ 단어일까요?

▼ 트위터에서 검색했습니다.

모든 미디어는 반페미적 맥락에서 해석 될 수 있고 동시에 페미적 맥락에서 해석 될 수 있음. 어떤 작품이든 100% unfeminist 하지도 않고 100% feminist 하지도 않을 거라는 거다. 원더우먼의 의의를 긍정해도 갤 가돗이라는 배우가 후자거든요. 원더우먼이라는 영화가 여성 인권에 기여하는 바를 그렇게 괜히 과장해가면서 너무 의미가 큰데~ 이 난리 치는 거 정말 이해 안감. @sapphologie

악녀가 보다 더 엄중하게 까이는 것은 그것이 겉으로는 여배우 원톱에 여성주의 시각이라는 포장을 덧씌우고 있으면서 정작 내용은 대놓고 알탕인 영화보다 훨씬 질이 나쁘기 때문이다. @dimentito

악녀는 관객이 기대하는 vs 감독이 보는 ‘여성’ 캐릭터의 괴리가 너무 크네. 감독은 숙희의 성별을 계속 의식하는데 그 여성적 특성이란 것들이 너무 낡고 진부하고 형편없음. @schillingty

 

글, 이미지 / 이재은 뉴스큐레이터 




[큐레이션 콕콕] 별별 플리마켓, 예술시장에서 만국시장까지

플리마켓(flea market), 벼룩시장은 오래된 물건이나 중고용품을 직접 사고파는 시장을 말합니다. 쓰지 않는 물건을 공원 등에 가지고 나와 매매나 교환 등을 하는 시민운동의 하나로 시작됐죠.

벼룩시장은 유럽 야시장에서 유래했습니다.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했는데(‘마르셰 오 뿌쎄’), 시장에는 일정한 자리를 할당받은 ‘정규 벼룩’과 ‘무허가 벼룩’이 섞여 있었습니다. ‘무허가 벼룩’들은 한쪽 귀퉁이에 물건을 내놓고 팔다가 경찰이 단속을 나오면 감쪽같이 없어졌고, 경찰이 가면 원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 모습이 벼룩이 튀는 것 같다고 해서 ‘벼룩시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 프랑스어 ‘뿌셰(Puces)’가 ‘벼룩’이라는 뜻 외에 ‘암갈색’의 의미도 있어 암갈색의 오래된 가구나 골동품을 파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혹자는 ‘벼룩이 들끓을 정도의 고물을 판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네요.

프랑스 외에 유럽 대륙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영국 런던의 소호 지구도 노천 벼룩시장으로 유명합니다. 벼룩시장은 기존의 관광자원 외에 도시가 보여줄 수 있는 일상의 내면으로 인정받았고, 갖가지 물건들로 작지만 이색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 청계천8가 주변 시장에 삼지창(三枝槍)을 비롯해 호랑이 잡는 덫, 엿장수 가위, 요강, 족두리 같은 골동품에서부터 중고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시장은 한국전쟁 후에 형성됐고, 벼룩시장, 개미시장, 만물시장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죠. 지금은 황학동과 동묘공원에서 옛 흔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벼룩시장은 중고품을 사고파는 형태의 플리마켓(flea market)과 직접 만든 창작물을 판매하는 프리마켓(free market)이 결합된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출발은 홍대 앞이었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문화행사 일환으로 첫 문을 열었고, ‘벼룩시장’과 ‘아트’가 결합한 ‘예술 벼룩시장’은 다른 지역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갑니다. 이른 바 ‘아트 벼룩시장’은 중고품이 아닌 ‘아트’를 판매했습니다. 아트는 순수미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수공예작품 모두를 포함하는 용어로, 직접 제작한 물건(작품)이면 누구나 그 물건(작품)을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정원에서 열리는 ‘예술시장 소소’는 올해로 5년째 열리고 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의 신선한 아이디어와 열정의 만남’을 표방한 ‘소소’는 첫 해, 참여작가와 관람객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습니다. 실험적인 미술가의 퍼포먼스, 싱어송라이터 연주, 야외영화상영회, 북 콘서트 등 공연과 예술, 문학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문화예술축제로 운영됐으며 올해도 사전공모를 통해 선정된 95팀이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합니다. 독립출판물, 드로잉, 일러스트, 디자인 소품, 사진, 예술 아카이브 등 소소한 예술품을 주로 출품했다고 하네요.

시민들은 일상에서 예술을 만나고, 작품을 감상하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어서 만족합니다. 참여작가들은 “일반인들에게 작품을 직접 보여줄 기회가 없는데 이런 자리가 있어서 좋다”, “마주 앉아 얼굴을 마주보고 육성으로 소통하는 행위에 대해서 집중하고 싶었다”고 고백합니다. 소소시장이 특히 젊은 예술가들의 마음을 끄는 이유는 관람객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제주의 플리마켓은 이제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자 필수 여행코스로 자리 잡았습니다. 제주 전역에서 열리는 플리마켓 중 상시 장터만 20여 곳이나 됩니다. 매주 토요일 세화포구에서 열리는 ‘벨롱장’은 길게 뻗어난 방파제를 따라 노천 장터가 형성됩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마법 같은 장터가 펼쳐지죠. 제주어로 ‘멀리서 불빛이 반짝이는 모양’을 뜻하는 ‘벨롱’. 벨롱장이 서는 시간은 두 시간뿐입니다. 평소엔 갈매기들만이 날아다니는 조용한 방파제이지만 장이 서는 날에는 어디선가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날씨가 좋을수록 사람이 넘쳐나죠.

‘소랑장’과 ‘아라올레 지꺼진장’은 금요일에 장이 섭니다. 소랑장은 서귀포 법환포구 앞에 있는 제스토리 카페 2층에서 열리는데 실내 장터라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덕분에 사계절 내내 폐장 없이 운영되죠. ‘소랑’은 제주어로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아라올레 지꺼진장’은 제주 농부들이 주축이 된 토박이 장터입니다. 땀 흘려 키운 제철 농산물을 함께 나누고자 시작한 직거래 장터로 기존의 시장에 플리마켓 개념을 도입하면서 풍성하고 재미난 시장으로 거듭났습니다. 친환경 농산물이 있는 농부장을 비롯해 먹거리장, 예술장 등 다양한 분야가 서로 어우러진다고 하네요. (한국관광공사 2016.9. 자세히보기 ▶ )

인천의 만국시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매월 첫째 주 토요일, 아트플랫폼 일대에서 열리는 만국시장은 매달 주제가 바뀌는 색다른 플리마켓입니다. 지난해에는 예술창작, 나눔, 생활이 함께 어우러진 ‘별난마켓’, 각양각색의 개성을 가진 뮤지션을 만날 수 있는 ‘만국음악살롱’,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 영화를 상영하는 ‘별별극장’으로 진행했고, 올해는 마켓과 음악살롱으로 이어갑니다.

인천의 플리마켓은 다양한 문화가 뒤섞였던 개항장을 상징하는 대표공간인 자유공원의 옛 이름을 따 ‘만국시장’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중구 송학동에 위치한 현재의 자유공원은 1888년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입니다. 인천의 개항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온 외국인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만들어졌죠.(경인일보. 2016.10.20. 자세히보기 ▶)

각국공원(1888), 서공원(1914), 만국공원(1945), 자유공원(1957)으로 이어진 공원 명칭의 변천사는 인천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파노라마입니다. 개항의 현장으로 여전히 이국적인 근대풍경을 담고 있고, 근대 인천의 독립운동과 청년운동의 베이스캠프로도 인식됩니다. 전쟁과 분단의 그늘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장소 역시 지금의 자유공원입니다.

‘만국시장’은 인천의 문화사와 경제사를 복원하는 키워드로서의 만국공원을 지역의 문화콘텐츠로 확장했다는 데에도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플리마켓의 확산을 온라인 중고거래와 연결 짓는 시각도 있습니다. 불경기와 불안정한 일자리 등으로 말미암아 온라인 중고물품 거래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진행된다고 하네요. 적은 돈으로도 쓸 만한 물건을 구매하려는 수요층과 적은 돈이지만 경제적 보상을 원하는 공급층이 든든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플리마켓 장터의 상업화를 우려하는 시각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시장이 성장하면 많은 셀러들이 참여를 원하는데, 단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의 셀러들도 모여듦으로써 순수성이 옅어져가는 경향을 보인다는 겁니다. 셀러들 간의 반목이나 호스트의 권력이 방문객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제주레저신문 2014.8.26. 자세히보기 ▶)

한국의 플리마켓은 중고거래라는 플리마켓 역사성에 충실한 형태라기보다 한국의 특성에 맞게 재해석한 기념품을 제작해 판매하는 아트마켓의 특성이 강합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수공예 작품, 실험적이고 대안적인 물건, 마음이 담긴 서비스를 소개하고 판매하죠. 슬로푸드, 욜로라이프, 히피문화 등의 삶의 방식도 이곳에서 공유됩니다. 그래서 플리마켓의 분위기는 리버럴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장은 그 나라와 사회의 생활양식 이상을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다양한 사람과 물품의 만남을 넘어 문화와 예술이 즐거움과 가치의 이름으로 스며드는 자리, 앞으로 플리마켓이 어떻게 변화하고 진화할지 기대해봅니다.

 

글/ 이재은 뉴스큐레이터

 




[큐레이션 콕콕] 명함, 당신 자신과 또 다른 당신의 것

<명함의 뒷면>의 저자 마이크 모리슨 박사는 묻습니다.

“이제까지 쟁취한 모든 경력과 직함, 타이틀을 다 떼어내고 난 후에도 당신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나요? 타이틀을 떼어내면 당신은 당신을 누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소속이나 직책, 연락처가 적혀 있는 ‘앞면’이 아닌, 당신의 명함 ‘뒷면’에는 무엇이 적혀 있나요?”

명함은 남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씁니다. 이름을 쓰고,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적고, 근무처와 조직을 소개합니다. visiting card, 혹은 business card, 이것이 명함의 일반적인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명함은 민영익이 사용한 걸로 추정됩니다. 1883년 민영익은 조선보빙사(지금의 국가 대표 외교사절단)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아서 대통령의 주선으로 6개월간 유럽을 여행했습니다. 이때 영국에서 청나라 공사를 만나 명함을 건넸는데 그 명함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요즈음 널리 쓰이는 명함과 비슷한 크기에 자신의 필체로 직접 이름을 썼네요.

중국에서는 2000년 전 누군가를 찾아갔다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깎은 대나무나 나무 판에 이름을 적었습니다. 이를 ‘알(謁)’이라고 했는데 명함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죠. 주인이 돌아와서 명함을 보고 다시 그 사람을 찾아갔고, 그게 그 시대의 법도였습니다. 그런 명함을 ‘명자(名刺)’라고 했는데 이때의 ‘자(刺)’는 대나무 등을 깎아서 글씨를 새긴다는 뜻입니다. 명, 청 시대에는 종이나 비단에 붓으로 붉은색 글씨를 써서 신분을 밝혔습니다. ‘명첩(名帖)’에 출신 고향, 이름, 감투나 벼슬 등을 적었고, 처음 보는 자리에서 작은 명첩을 건네는 게 당시 학자나 벼슬아치들이 지켜야 할 예의였습니다.

서양에서도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때 카드를 남기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16세기 중엽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던 학생들이 귀국할 때 가르침을 받은 선생님들에게 인사하러 다니면서, 만나지 못하면 이름을 적은 카드를 남겨뒀다고 하네요.

사람들은 더 좋은 직장, 더 높은 직위에 욕심내지만 최고 권력자의 명함은 단순합니다. 달랑 이름만 적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은 부연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이죠. 김일성의 명함은 이름 석 자, 3음절이 전부입니다. 1972년 5월 북한을 방문했던 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에게 받아온 거라고 하네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교환하는 명함은 작은 종잇조각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제 명함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고, 직장인의 소품도 아닙니다. 가정주부나 학생도 명함을 사용하면서 명함은 점점 더 다양화, 대중화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함에 회사 이름 대신 ‘76650’이란 숫자를 써넣고 다닙니다. 사람들이 무슨 숫자냐고 물으면 “당신이 평생 먹는 밥그릇 숫자”라고 말하여 첫 만남의 긴장을 풉니다. 또 다른 세일즈맨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주부가 새 가구를 장만하려고 전화번호부를 찾아 몇몇 가구회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세일즈맨들이 달려와 명함을 놓고 갔고 주부는 그 중에서 눈에 띄는 명함을 발견합니다. “제 명함이 귀하에게 저를 기억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댁의 남편도 즐겁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제 이름은 울프(Wolf) 즉 늑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름만 늑대이지 성격은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부는 폭소를 터뜨렸고 남편 역시 명함을 보고 웃었습니다. 부부는 그 명함의 주인공을 불러 집안의 가구를 새 것으로 바꿨다고 하네요.

죽기 직전, 최후의 뜻을 웅변할 페이지로 명함을 사용한 사람도 있습니다. 구한말 문신 민영환은 1905년, 일제의 을사늑약 강요에 항거하며 자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함에 유서를 적었는데 “학문에 힘쓰고 결심육력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자가 마땅히 땅속에서 기뻐 웃을 것” 등의 구절이 들어있었다고 하네요.

세상에는 독특한 명함이 많습니다. 과자 회사는 먹을 수 있는 명함을 만들고, 자전거 수리점은 임시로 자전거를 수리할 수 있게 플라스틱으로 제작합니다. 요가센터는 구부러진 빨대에 요가자세를 한 여성의 이미지를 넣어 사업을 홍보합니다. 뇌 이미지를 그려 넣은 정신과 전문의 명함도 있네요.


세계의 이상하고 독특한 명함을 감상해보시죠.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자세히보기▶)

아코디언 명함은 앞뒤 2면이 아닌 10면에 취미를 적고, 좋아하는 책 속 구절을 적고, 두고두고 다시 보는 영화를 소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나 그림을 넣어 텍스트만 있는 기존의 명함과 차별화합니다. 어떤 회사에 다니는 것이, 직업적인 타이틀이 정체성의 전부가 아니라면, 다니는 직장은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은 있고, 내세울 학력은 없지만 내세우고 싶은 색깔은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제까지 쟁취한 모든 경력과 직함, 타이틀을 다 떼어내고 난 후에도 당신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나요? 타이틀을 떼어내면 당신은 당신을 누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소속이나 직책, 연락처가 적혀 있는 ‘앞면’이 아닌, 당신의 명함 ‘뒷면’에는 무엇이 적혀 있나요?” “이 명함 쓰면 당신이 좀 달라보일 겁니다” (내용 보러가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함을 건네받은 뒤 휴대전화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버립니다. 종이명함이 사무적이고 낭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자판을 두드려 문자와 숫자를 입력할 필요도 없이 카메라로 찍기만 하면 자동으로 정보가 입력되는 명함관리 앱도 보편화됐습니다.(페이스북에서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광고’로 소개된 명함관리 앱 영상. 영상보러가기▶)

아코디언 명함은 시대에 역행합니다. 스마트한 디지털 시대에 한 장도 아니고 몇 겹으로 된 종이명함이라니요.

‘명함도 못 내밀다’라는 표현을 아실 겁니다. 수준이나 정도 차이가 심해 견줄 바가 못 된다는 뜻이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장 경험이 없는 작자가 왔다가 명함도 못 내밀고 갔다”처럼 쓰입니다. 하지만 아코디언 명함 앞에서 이런 관용구는 어불성설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것이든 적을 수 있고, 그 메시지가 바로 ‘당신 자신’, ‘또 다른 당신의 것’입니다.

가마쿠라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묘지에 갔다. 무척 큰 공원묘지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영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뜨거운 태양 속에서 조용한 둘레 길을 따라 공원 끝까지 갔다. 가와바타 가족의 묘지 앞에 섰을 때 나는 비밀스러운 디테일을 하나 발견했다. 내 주위 모든 묘비 옆에 석제 명함 상자가 있었다. 이승에 있는 사람들이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나러 올 때 자기 명함을 건네야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디테일은 삶과 죽음을 단번에 친밀하게 만든다. 명함 상자의 존재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계속 내왕하는 비밀스러운 권리를 뜻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 위화,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중에서

시대의 흐름도 좋고, 기술의 발전도 환영합니다. 하지만 이승 사람이 저승 사람에게 건네는 명함이 ‘아름다운 디테일’이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조금 다른 수준의 ‘아름다운 스타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당신의 뒷면을 보여주세요.

글/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큐레이션 콕콕] 혼족, 1인용, 1인가구… 확장되는 1인의 세계

신조어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집니다. 혼밥, 혼술, 혼영은 잘 아실 거예요. 혼자 먹고 혼자 마시고 혼자 영화를 보죠. 혼여(혼자 여행가기), 혼놀(혼자 놀기)의 조합도 있네요. 만들기 나름, 붙이기 나름, 줄이기 나름입니다. ‘혼족’의 세상. 1인 가구의 비율이 해가 갈수록 늘더니 1인용 물건과 식품이 쏟아져 나오고, 1인 식당, 1인 노래방도 일반화 됐습니다. ‘1’, ‘홀로’, ‘혼자’의 이미지는 더 이상 외톨이, 쓸쓸함, 외로움의 아이콘이 아닙니다. 확장되는 1인의 세계를 <큐레이션 콕콕>에서 짚어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에는 수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공 뱅상은 어릴 때부터 숫자 1에 담긴 뜻을 배우기 시작하고, 어느 날 숫자 1에 관한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1은 인간이 살고 있는 우주를 뜻한다. 만물이 우주 안에 있고 통일성 속에 있다.
1은 만물의 시작을 나타낸다. 그것은 빅뱅이나 나뉘기 전의 유일한 대륙이다.
1은 만물의 끝인 죽음을 나타낸다. 죽음이란 단일한 것이 단일한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1은 고독의 자각을 상징한다. 인간은 누구나 홀로 세상에 왔다가 홀로 떠난다.
1은 <자아>에 대한 자각을 상징한다. 인간은 저마다 하나밖에 없는 존재다.
1은 오직 하나의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만물을 통합하는 하나의 우월한 힘이 존재한다는 믿음인 것이다.
1에는 이토록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뱅상은 몇 년 동안 1의 다양한 측면에 관해서 공부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2의 의미를 배울 수 있었다.

통계청 조사와 1인가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1인가구 비율은 전체 인구의 약 24%, 그 중 절반 이상이 40대 이하라고 하네요. 그들 중 42%는 하루 두 번 혼밥을 먹고, 약 18%는 하루 세 끼를 혼자 먹습니다. 10명 중 7명은 ‘혼자 살기’에 만족하고, 남성보다는 여성의 만족도가 더 높습니다. (위키트리. 2017.2.24. 자세히 보기▶)

지난해 12월, 가천대신문은 1인 문화에 대한 학우들의 생각을 알아봤습니다. 총 328명이 설문에 참여했는데, ‘긍정적이다’라는 응답이 42.1%, ‘상관없다’가 30.5%였습니다. 부정적인 의견은 30%도 되지 않았네요. 구체적으로 이유를 밝힌 한 학생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습니다. 혼자 사는 유명인의 하루를 다루는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 1인분도 주문 가능한 1인 식당 등, 이제 ‘혼자’는 삶 속에서 형성돼 독특한 흔적을 남기는 하나의 문화가 됐습니다.(가천대신문. 2016.12.9. 자세히 보기▶)

중국집에 전화해서 “1인분도 되나요?”라고 묻는 것이 어쩐지 죄송스럽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1인 가구 400만인 현재, 오히려 이제는 중국집이 싱글들에게 러브 콜을 보낸다. 배달 음식 전단지에 꼭 빠지지 않는 단골 멘트와 함께. ‘1인분도 정성껏 배달해 드립니다.’ 바야흐로 싱.글.대.세.시.대. 그래서 만들었다.

지금은 아쉽게 들을 수 없지만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에서는 매주 토요일 [1인용 음악]코너를 운영해 특별한 상황에 혼자 있는 사람들, 그 순간에 필요한 음악을 틀어주기도 했습니다.

서초구는 1인 가구를 위한 문화교실을 운영하고, 1인 가구로 구성된 동아리에 활동비를 지원합니다. 1인 가구를 겨냥한 벽걸이용 미니 드럼세탁기의 매출은 해마다 증가하고, 은행은 혼족 마케팅인 ‘일코노미’ 전략을 폅니다. 1인과 이코노미(economy)가 결합한 신조어라고 하네요. 선거판도 1인 가구를 겨냥해야 유리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큰손 된 혼족’이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포미족’이라는 용어도 1인 시대와 관련 있군요. 건강(For health), 싱글족(One), 여가(Recreation), 편의(More convenient), 고가(Expensive) 의 알파벳 첫머리를 딴 For me!, 한글로는 ‘포미족’이네요. 평소에는 알뜰한 소비를 실천하지만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에는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는 소비자를 일컫습니다. 눈치 보지 않고, 나를 위해, 나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사는 거죠.

‘독거청년’이라는 말은 중국에서 나왔네요. 어쩔 수 없이 1인가구가 된 노인층과 달리 스스로 선택해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청년 1인가구를 말합니다. 데일리팝의 기사(자세히보기▶)는 독거청년의 생활환경이 아닌 고독에 초점을 맞추고 있네요.

독거청년은 인터넷을 보거나 핸드폰을 만지고, 밥을 먹는 등 생활의 대부분을 혼자하기 때문에 보통의 젊은 청년보다 더 고독함을 더 느낍니다.

“누구도 그들과 대화를 하지 않고 그들 또한 사람을 찾아 소통하길 거부하며 그것이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담아두는 만큼 화려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아도 마음만은 화려한 세계와 멀리 떨어져있는 것이다.”

‘1인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의 문제’에 무게 중심이 쏠린 것 같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가혹한 생활과 심리적인 압박으로 자기감정을 감추고 주도적으로 소통을 하지 않아 우울증을 앓거나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네요. 청년 1인가구의 문제는 사회적 이슈이며 사회가 인식하고 개선해야 할 문제라고 꼬집고 있습니다.

‘혼자 온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깃발 아래 무려 300여명의 시민이 모였습니다. 지난해부터 지난 3월까지, 광화문 광장에 혼자 간 사람들은 ‘이상한 연대감’을 느끼며 ‘혼자가 아닌 혼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과 깃발 밑에 있는데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할지 참 뻘쭘하셨죠? 우리 같이 ‘혼자 온 사람들’ 깃발에 모여 뻘쭘함을 없애 보아요!’

촛불집회에 같이 갈 친구를 구하지 못한 이예슬 씨는 ‘욱’하는 마음에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듭니다. 그래도 혼자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기우, 혼자인 사람들이 깃발을 따라 왔고, 제각각인 혼자들을 끌어안았습니다. 단체 이야기방을 만들고, 여행도 다녀온 그들은 ‘혼자들의 촛불’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만들 예정이라고 하네요. “혼자인 듯 혼자이지 않은 혼자들. 각자의 생각을 인정하는 이들의 느슨한 연대.” 재치 있고, 울림 있는 기자의 멘트를 곱씹어봅니다.(한겨레신문. 2017.3.17. 자세히 보기▶)

다시, 뱅상의 깨달음으로 돌아가 볼까요?

1은 <자아>에 대한 자각을 상징한다. 인간은 저마다 하나밖에 없는 존재다. (…) 뱅상은 몇 년 동안 1의 다양한 측면에 관해서 공부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2의 의미를 배울 수 있었다.

글/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큐레이션 콕콕] 엽편소설, 담배짬소설, 초단편, 플래시픽션… ‘짧은소설’ 이야기

소설(小說)보다 더 ‘작은’ 소설이 있습니다. 단편소설하면 이 정도는 돼야지 했던 분량이 원고지 100매에서 70매, 그리고 15매로 줄어들고 있다네요. 나뭇잎에 빗댄 엽편(葉篇), 손바닥 크기 분량의 손바닥소설, 스마트폰 시대에 발맞춘 스마트 소설, ‘현상의 강렬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의미의 ‘플래시픽션’, 그밖에 미니픽션, 서든픽션, 마이크로픽션, 마이크로스토리, 쇼트쇼트스토리, 엽서소설, 프로즈트리(Prosetry), 담배짬소설, 커피잔소설이라는 명칭도 있습니다. 휴…. 작품의 분량으로, 이미지로, 재치로, 새로운 형태로, 시대를 반영한 이름 등등으로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네요.

짧은소설은 20세기 초 중남미에서 시작됐습니다. 보르헤스 등 세계적인 작가들이 작품을 남겼는데, 한 줄짜리 극단적 분량도 있었다고 합니다.

“깨어나보니 공룡은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과테말라 작가 아우쿠스토 몬테로소의 작품 ‘공룡’입니다. 시도, 아이디어 조각도 아닌 ‘소설’입니다. 일곱 단어로 된 이 글은 반론 없이 ‘픽션’으로 인정받았고, 몇 백 배 단어를 사용한 작품 해석이 쏟아졌습니다. 아래 패러디 문장을 한 번 보시죠.

“공룡이 깨어났을 때, 신들은 아직도 저기 있었다. 서둘러 나머지 세상을 창조하면서.”(에두아르도 베르티의 ‘또 다른 공룡’)
“작가가 생애에서 가장 짧은 단편을 쓰고 있었을 때, 죽음 역시 가장 짧은 작품을 쓰고 있었다. 이리 와.”(후안호 아바네스의 ‘결말’)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공룡은 저기 없었다.”(파블로 우르반이의 ‘공룡’) 

(아우구스토 몬테로소)

짧은소설은 오랫동안 본격 문학 장르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신속성, 명료성, 간결성 등이 정보화 사회의 속도 및 영상문화와 결합해 주요 서사 장르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네이버 시사상식사전에는 “작가의 세계관과 문학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을 응축시켜 놓는 데 가장 적절한 문학적 방법으로, 분량만으로는 콩트와 비슷하지만 극적 반전을 이루려는 콩트보다 문학적 깊이가 있다”고 소개되어 있네요.

우리나라의 짧은소설 흐름, 최근 쏟아져 나온 작품집 등을 언급하기 전에 프랑스에 있는 ‘소설 자판기’를 공개하려고 합니다. 버튼을 누르면 문학작품이 나오는 일명 ‘짧은 이야기 배급기(Distributeur d’histoire courte)’네요.


(이야기 배급기)

기차역 대합실에 희한한 기계가 놓여 있습니다. 1분, 3분, 5분의 버튼 중 하나를 누르면 선택한 독서시간에 맞는 길이의 이야기가 영수증처럼 흘러나옵니다. 종이 위쪽에는 작품의 장르와 제목, 작가 이름이 인쇄돼 있고, 그 아래는 한 편의 작품입니다. 어떤 작품은 농담 같고, 어떤 작품은 한 편의 짧은 로맨스며, 한 편의 짧은 시도 있다고 하네요.

이 기계와 이야기를 공급하는 ‘short edition’은 프랑스의 소도시 그르노블에서 글쓰기 플랫폼을 운영하던 일종의 출판사였습니다. 작가로 등록된 사람들이 자유롭게 글을 올리면 회원들이 점수를 매겨 추천하고, 회사의 에디터들이 좋은 글을 골라 온라인으로, 또 팟캐스트로 공급하는 사업을 해왔다고 합니다. 누군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단편소설 자판기’를 설치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농담처럼 이야기했고, 장난삼아(?) 실현한 농담이 예상 외로 히트를 칩니다.

(이야기 배급기)

승객은 열차를 기다리며 보내야 하는 시간을 스마트폰이 아닌 ‘문학’과 함께 보낼 수 있고, 철도회사는 예술작품 배급과 후원이라는 ‘의미 있는’ 사업으로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며, 작가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얻었네요.

이 사건은 프랑스 언론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보도됐는데 뉴요커에 실린 기사를 본 샌프란시스코의 한 영화감독이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곤 기계를 주문하고 싶다고 말했죠. 그 감독이 누구냐고요? <지옥의 묵시록>, <대부> 등을 만든 사람이네요. 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그는 단편 문학은 영화를 구상하는 데 좋은 출발점이 된다며 기계에 관심을 갖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판기로 과자, 콜라, 커피가 아닌 예술 작품을 제공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 영상보러가기▶)

이 출판사의 설립자가 코폴라 감독의 메일을 받고 미국에 가서 그를 만나 기계를 설치하는 이야기가 담긴 영상입니다.
자판기를 통해 소개된 작품은 약 10 유로 내외의 고료를 받습니다. 많지 않은 금액이지만 여러 작품이 선정된 작가들도 많고, 무엇보다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작가들이 많다고 하네요.(14,264명의 작가와 20여만 명의 플랫폼 독자, 6만 여편의 작품이 있다) 2015년에 시작된 이 배급기는 현재 프랑스 전역 100여곳 이상의 기차역, 버스정류장, 지하철역, 쇼핑센터 등등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물론 자판기 이용료는 없고요.


한국 작가들의 초단편집이 줄줄이 출간됩니다. 지난해에 나온 소설가 이기호의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조경란의 <후후후의 숲>, 최민석의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에 이어 김솔, 안영실, 구자명, 성석제의 책도 나와 있네요. 출판사 문학동네 관계자는 “소셜미디어 등으로 인한 단문(短文) 학습 탓에 독자들이 점점 긴 글을 외면한다”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라도 짧게 여러 편을 쓰는 게 유리한 만큼 앞으로 초단편이 유망 장르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탁, 사건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만들고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단편이 파헤치는 것이라면 콩트는 발견하는 것, 타격을 주는 것이다. 탁! 그렇게만.” (소설가 이기호)

“짧은 소설은 떠올렸던 몸피 자체의 보존성이 높다. 풍요로운 육체성은 못 갖추지만 정곡을 찌른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는 이장욱)

“보통 소설에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단계가 있다면 초단편은 이 중 하나만 떼서도 쓸 수 있다. 짧다 보니 이미지나 즉물적 느낌이 강해 형식도 자유롭고, 단편과 중장편의 확장도 용이하다.” (소설가 조경란)

문학평론가 조재룡은 “장르별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분량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장르의 분열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이 추세대로라면 소설은 더 짧아질 것이며 장르에 대한 개념도 점차 바뀌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짧은소설에 대한 독자(댓글)의 반응은 어떨까요.

“난 이런 걸 소설로 보지 않는다. 짧은 글만 읽는다는 독자들은 원래 책을 안 읽는 사람일 뿐.”, “정말 한심한 작태이다. 단시간 내 흥미를 추구하는 독자층의 문제라고? 단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수준이 안 되는 저급한 돈벌이 추구일 뿐.”이라는 부정적 의견과 “무언가 대세가 된다는 건 시장의 수요가 있어서 그런 건데. 대세를 조작할 수도 없는 거고. 독자들이 짧은 글을 원한다는데 저런 흐름을 막을 수 있을까? 에헴 에헴 그건 소설이 아니야 이런 식으로? ㅋㅋ 팔릴 만하면 팔릴 것이고 아니다 싶으면 망하겠지. 시장원리로. 저런 책이 무슨 노벨문학상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등의 현실적 관점이 있네요.(아이디 ocad****, kung****, flow**** 님 등)

짧은소설이 부상한(혹은 21세기 문학을 주도하게 된) 이유는 온라인에서 유통과 소비가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담배짬소설’이나 ‘플래시픽션’ 등은 모두 글을 모으는 온라인 창구가 있습니다(smokelong.com, www.flashfictiononline.com, www.vestalreview.net, www.365tomorrows.com). 짧은 글에 주는 ‘마이크로 어워드’도 2007년부터 온라인에서 수상작을 발표했고요(www.microaward.org).

‘낙농콩단’(conte0303.tistory.com)에 ‘콩트’를 쓰는 김영준 씨가 사이트에 모은 10∼20장에 이르는 콩트는 233편에 이릅니다. 미니픽션 연구소(www.minifiction.com)는 2004년 10명의 회원으로 시작했습니다. 이제 일반인을 대상으로 미니픽션을 모집하고 책으로 발간하는 작업을 하고 있네요. 소설가 서진 씨가 운영하는 ‘1pagestory’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A4용지 한 면에 들어가는 원고지 10장 분량의 원고를 모집합니다. 현재까지 730편의 글을 수집했다네요. 한 사람당 하나의 글만 등록되니 전부 730명의 글입니다(pagestory.egloos.com).

 문학평론가 조재룡은 “장르별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분량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장르의 분열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이 추세대로라면 소설은 더 짧아질 것이며 장르에 대한 개념도 점차 바뀌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좋은 것은, 짧다면, 두 배로 좋다.”
스페인 작가 벨타사르 그라시안(1601-1658)의 말입니다. 그는 이런 말도 남겼네요.

“매사에는 양면이 있다. 가장 좋고 유리한 것도 그 칼날 쪽을 붙들고 있으면 고통이 되고, 반대로 불리한 것이라도 그 손잡이를 잡으면 방패가 된다. 매사를 불리하다 생각하며 근심하지 말고, 유리한 쪽을 바라보라.”

‘비정상회담’에 출연하는 이탈리아 대표 알베르토 몬디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은 픽션보다 논픽션이 인기인 것 같더군요. 자기계발서나 에세이, 경제경영책이 많이 팔리는 것 같은데, 이탈리아는 그런 책이 인기가 없어요. 소설을 많이 보는 편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코멘트를 들으면서 우리의 독서문화는 다소 건조하고 현실적이고 쓸쓸한데 이탈리아는 낭만적이네, 하는 얼토당토아니한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서툰 부러움’ 같은 감정이 스쳤달까요.

한참 짧은소설 이야기를 했지만 길고 짧은 게 또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긴 게 좋으면 긴 걸, 짧은 게 좋으면 짧은 걸 읽으면 되지요. ‘어쨔던동’ 우리나라에서도 소설이 좀 인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위 글은 다음과 같은 기사와 블로그 등을 참조하여 작성했음을 밟힙니다.]
– 코폴라 감독도 탐낸 ‘이야기 배급기’
  브런치 2017.2.25.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원고지 100장→50장→20장… ‘손바닥 소설’이 쏟아진다
  조선일보 2017.2.8.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좋은 것은, 짧다면, 두 배로 좋다
– 21세기 문학을 주도하는 ‘짧은 소설’
  한겨레21 2012.10.23.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지금의 나로 이끈 다섯 번의 선택
  ‘비정상회담’의 이탈리아 대표 알베르토 몬디의 성장과 독서
  북클럽오리진 2017.3.10.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글/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큐레이션 콕콕] 인천의 역사와 가치까지 매립되면 어쩌죠, 북성포구

인천의 역사와 가치까지 매립되면 어쩌죠, 북성포구

시간과 사건의 접점에서 탄생한 시끌벅적한 뉴스가 아닌 특별한 문화 이슈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큐레이션 콕콕’.
이번 주제는 북성포구입니다.

1890년, 서울에서 내려온 정흥택 형제는 인천 중구 신포동에 상설 어시장을 열었습니다. 소규모 방식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규모가 커진 수산물 유통시장은 일본인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들도 어시장 운영에 뛰어듭니다. 일제는 한인과 일본인이 운영하던 어시장을 제1공설시장으로 합병하고 인천부가 직영하도록 제도를 바꿉니다. 1930년대 초 일제가 북성동 해안 일대를 매립해 대규모 공판장과 어시장을 세우자 북성포구는 수도권 최대의 포구로 명성을 누립니다.
파시(波市)가 열릴 때면 대형 어선 100여척이 정박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하지만 1975년, 연안부두 일대가 매립되고 어시장이 신포동에서 연안부두로 이전하면서 북성포구는 쇠락하기 시작합니다.(네이버 오픈백과 mazi****님)

<인천북성포구살리기시민모임 제공>

쇠락의 징후는 악취를 동반했습니다. 바닷물에 밀려온 해저토가 제대로 빠져나가지 않고 켜켜이 쌓여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민원이 이어졌습니다. 북성포구 매립이 선거 공약으로 제시되기도 했을 정도였다네요. 지난해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이 북성포구 일대 7만여㎡를 매립해 준설토 투기장 조성을 위한 행정절차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사회단체가 나섰습니다. 지역주민, 예술인, 환경·문화·청년운동가, 건축가 등으로 구성된 북성포구살리기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2016.11.22.발족)은 환경청에 ‘부동의’를 촉구하며 매립을 반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시민모임은 북성포구의 환경개선을 위해서는 하수관로 정비와 하수정화시설 설치가 시급하다고 주장합니다. 갯벌은 오염정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갯벌의 정화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하수관로 정비로 악취발생물질의 갯벌 유입을 차단하고, 하수정화시설로 해수가 드나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사인 2017.02.23  http://www.bp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36098)

<한은미, ‘쇠스랑이의 삶’>

북성포구 매립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송도, 청라 등 수많은 갯벌을 잃은 상황에서 북성포구마저 사라지게 될 것을 염려합니다. 시민모임 관계자 중 한 명은 “북성포구는 1883년 인천개항과 함께 한국근현대사의 온갖 영욕을 함께 했고, 지금까지 남은 인천 해안의 유일한 갯벌 포구다. 지금도 갯골을 따라 들어오는 어선들로 인해 선상파시가 열리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인천일보 2016. 11. 18 http://www.incheonilbo.com/?mod=news&act=articleView&idxno=736457)

시민모임은 북성포구 매립이 인천의 역사와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천개항창조도시 재생사업에 북성포구를 포함시켜 북성포구는 물론 주변지역도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자고 강조합니다. 이에 인천시는 “북성포구는 오염된 갯벌 악취를 지적하는 민원이 끊이지 않고,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시켜 달라는 주민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라며 북성포구 전체 32만㎡ 중 가장 냄새가 심한 일부 7만㎡만 매립해 오수정비 시설을 만들 계획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경기일보 2016.11.22 http://www.kyeonggi.com/?mod=news&act=articleView&idxno=1272818)

<‘북성포구 매립사업’>

영상 두 편을 소개합니다. 북성포구 매립을 다룬 기호일보 영상과 (https://www.youtube.com/watch?v=lL9mU2oN8to) 지난해 5월 EBS 다큐 오늘에서 방송한  ‘북성포구를 아시나요’ (https://www.youtube.com/watch?v=tVUaVs-zWIs) 입니다. EBS 다큐 오늘은 1회가 아닌 시리즈로 북성포구를 다뤘네요.

북성포구의 의미를 알리고, 보존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전시도 열렸습니다. 지난 3월 4일부터 15일까지 사진공간 배다리에서 열린 <북성포구전>에는 사진작가 20명과 미술가 4명의 작품이 전시됐습니다.

포구는 시시각각 다양한 스크린을 펼친다. 갈매기를 척후병 삼아 물길 따라 들어오는 어선,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꺾이는 공장의 연기, 긴 낚싯대 드리운 강태공의 실루엣, 울퉁불퉁 식스팩 근육질의 갯벌, 먹구름을 나눠 가진 하늘과 바다. 공장 불빛과 뒤섞이는 붉은 노을 등.(중략) 매립은 직선을 의미한다. 예술가는 있는 그대로의 곡선을 원한다. 직선은 인간에게 속하고 곡선은 조물주에게 속한다. 직선 숭배에 결연히 맞서기 위해 그들은 붓과 카메라를 들었다. – 전시 서문 중에서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북성포구전’ 전시 포스터>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그곳은 어떤 모습일까요. 소설가 양진채는 「인천in」 에 ‘소설로 읽는 인천’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7년 1월 20일의 기사 제목은 ‘북성포구로 가는 길’이네요.(http://www.incheonin.com/2014/news/news_view.php?m_no=2&sq=36289&thread=002002055&sec=3) 그는 민망하기도 하고, 반칙인 줄도 알지만 꼭 하고 싶은 얘기, 이 얘기 아니면 안 되겠다 싶은 얘기가 있어서 자신의 소설 <패루 위의 고래>를 가져왔다고 서두에서 밝힙니다.

포구로 들어온 배는 일곱 척이었다. 꽃게, 갑오징어, 병어, 젓갈용 멸치 등을 갑판 한가운데 펼쳐놓고 그 자리에서 팔았다. 그를 따라 흔들리는 널빤지를 밟고 올라섰다. 난데없이 나타난 포구이기는 했지만 골씨를 따라 배가 들어오는 광경, 싱싱한 생물을 배에서 바로 흥정해서 사는 모습 등을 구경하는 동안 못마땅한 마음이 사라졌다. 싱싱한 갑오징어나 꽃게, 낙지 등은 산 채로 함지박 안에 담겨 있었다. 배가 나란히 붙어 있어 건너다니며 구경할 수도 있었다. 값도 그날 들어온 배와 사러 온 사람들의 수에 따라 결정되고, 배가 막 들어왔을 때와 시간이 지난 후의 값이 또 다르다고 했다. 이 배 저 배를 건너다니며 물건을 보고 값을 묻던 사람들이 하나둘 검은 비닐봉지에 무언가를 사들고 뱃전을 나섰다. 병어를 잔뜩 사던 아주머니가 50년 가까이 이 도시에 살았지만 여긴 처음 와본다고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포구이긴 한 모양이었다. 문득 똥바다요? 하던 아저씨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 동네의 바다가 똥바다로 불렸다는 걸 아는 사람 정도는 돼야 이 포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양진채, <패루 위의 고래> 중에서

작가는 오랫동안 인천에 살았지만 북성포구를 알게 된 것은 10년 안쪽이라고 고백합니다. 인천에 이런 곳이 숨어 있었다니 경이로운 심정이었다고요. 북성포구를 발견한 뒤로는 물때를 확인하고 일부러 그곳을 찾아 생새우, 꽃게, 병어 등을 삽니다. 어느 날은 아름다운 북성포구의 노을도 봅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북성포구를 알고 있었고 찾고 있었다. 포구가 주는 떠남과 돌아옴의 여정, 비릿한 냄새, 염분이 묻어 있는 갯바람 등을 그 쓸쓸함으로 많은 사람을 달래주고 위로해주었다.”

<유광식, ‘선상파시(2011)’>

현덕(1909~?)은 우리나라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인천과 가까운 대부도 당숙 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조선일보 당선작인 <남생이> 외 다수의 작품을 동구 화평동 78번지에서 집필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인천in 2014. 6. 25 http://www.incheonin.com/2014/news/news_view.php?m_no=3&sq=25577&thread=003001000&sec=1) <남생이> 첫 줄에 나오는 ‘호두형으로 조그만 항구 한쪽 끝을 향해 머리를 들고 앉은’에 나오는 호두형 포구가 있던 곳이 바로 북성포구 주변입니다. 작가 현덕은 인천문화재단 ‘2007 대표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네요.

<남생이> 중 인천부두마을 전경. 이상권 그림.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촬영

인천시는 인천의 역사 및 문화유산, 자연환경 분야 등 인천만의 고유한 가치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인천시민으로서, 저 역시 인천의 발전과 성장을 환영하지만 인구 300만의 축포가 ‘매립의 역사’에서 탄생했다는 비판에도 귀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북성포구전> 전시 서문 제목을 공개할까요? ‘북성포구, 거기 있어 줄래요’

이재은 / 뉴스 큐레이터

 




[큐레이션 콕콕]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도깨비

큐레이션-콕콕

 

2017년에도 ‘인천문화통신 3.0’의 뉴스 큐레이션은 계속됩니다. 지난해에는 한국사회에서 펼쳐지는 문화현상 중 그때그때 주목할 만한 이슈를 소개했지만 올해는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합니다. 시간과 사건의 접점에서 탄생한 시끌벅적한 뉴스가 아닌 특별한 문화 이슈를 속 깊게 들여다보는 ‘큐레이션 콕콕’,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도깨비’입니다.

드라마는 지난 1월에 종영했지만 ‘도깨비’ 열풍은 여전합니다. 인천시는 도깨비 관광 코스를 개발해 홍보에 나섰고 촬영지 중 하나였던 배다리 한미서점은 TV 속 달콤 현장을 탐방하러 온 관광객들로 북적입니다. 그림책이나 신화에나 등장할 것 같은 도깨비가 도깨비 책방으로, 도깨비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소환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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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람은 아닌 상상의 존재입니다. 특정한 모습이 없고 기록마다 형태가 각각 다릅니다. 한국의 도깨비는 한복을 입고 갓을 쓴 스타일로 자주 묘사됩니다. 전래동화 속의 도깨비는 사람을 괴롭히거나 혼내주는 걸 좋아하기보다 순하고 우직하며, 따돌림을 당하면 화를 내고, 체면을 중시하는가하면 시기와 질투도 많습니다. 메밀묵, 막걸리, 이야기, 노래, 씨름, 장난을 좋아하고 붉은색을 싫어합니다. 인적 없는 야산이나 폐가에 거주하며 이따금 민가로 내려와 소를 지붕에 올려놓거나 솥뚜껑을 솥 안에 집어넣는 장난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로 사람을 홀리는 도깨비, 빈 쌀독에 쌀을 채워 넣는 도깨비, 바늘을 무서워하는 도깨비 등이 있다고 하네요.

도깨비에 관한 이름은 매우 많습니다. 전라도에서는 도채비, 도체비, 도치기, 다른 지역에서는 도까비, 토재비, 토째비, 톡깨비, 홀개비, 홀깨비, 도깨기, 도째비, 터깨비 등으로 호명됩니다. ‘독갑이’ 또는 ‘귓것’으로도 불렸으며 한자로는 독각귀(獨脚鬼) 등으로 표현됩니다. 보통 한자의 ‘귀’를 도깨비로 알지만 도깨비와 귀신은 다릅니다. 도깨비는 방망이를 가지고 다니거나 빗자루 등으로 변신해 사람을 속이고 골탕 먹입니다. 왠지 멍청하고 잘 속아 넘어가는가 하면 속이려고 하다가 결국 자신이 속고 마는 우둔함 등은 도깨비가 주는 친근감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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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와 남원 사이에 있는 원색장 마을에는 도깨비에게 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 논에는 돌이 많았는데 도깨비한테 잘못하면 도깨비가 심술을 부려 돌을 가져다 놓고, 잘하면 돌을 치워준다는 전설이 ‘도깨비 소환’(새전북신문 2017.2.16.) 이란 글에 자세히 나와 있네요.

옛날에 자갈이 많아서 농사가 안 되는 곳이 있었는데 가끔 도깨비가 와서 논을 떼 매어 가겠다고 심술을 부리곤 했다. 농부는 짐짓 시치미를 떼며 자갈이 많이 있어야 농사가 잘되는데, 자갈이 없어서 어차피 농사도 못 지으니까 떼 매어 가려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 도깨비는 어디선가 돌을 주워다가 논바닥에 퍼부었다. 농부는 손뼉을 치며 이제 돌이 많아서 우리 농사 잘 되겠다고 좋아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심술을 부리며 도깨비가 자갈을 모두 주워서 가져갔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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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한국형 신화 및 귀신 콘텐츠를 사용한 작품은 <위대하고 찬란하神 도깨비> 이전에도 <월하의 공동묘지(1967)>, <전설의 고향(1977-1989)>, <은행나무침대(1996)>, <여고괴담(1998)>, <왕꽃선녀님(2004-2005)>, <오 나의 귀신님(2015)>, <곡성(2016)> 등이 있었습니다. 웹툰 <신과 함께>는 한국의 민속 신들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이미 공연한 뮤지컬 외에도 영화, 드라마로 제작 중입니다. 이들 작품이 어느 정도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고 볼 때, 우리 고유의 정신적 문화유산인 신화의 세계관에서 도깨비는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있을까요?

한국의 전통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계보는 크게 환인(桓因)계와 옥황상제(玉皇上帝)계로 구분합니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무속 신들은 대부분 옥황상제 계보로 바리공주 신화도 여기에 속합니다. 환인계 신화는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의 알타이족 신화에서 영향을 받았고, 옥황상제계 신화는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도교 및 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도깨비는 이 두 계보에 속하지 않고, 한반도 내에서 자생한 정신적 유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욱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는 한국 신화에서 도깨비가 처음 등장한 것을 신라시대 처용이 짓고 고려시대 8구체 향가로 발전된 처용가(處容歌)로 봅니다. 처용은 원래 용의 아들로, 신라 헌강왕을 따라 수도 서라벌에 와서 벼슬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밤 역신(疫神)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는 것을 발견하는데 이때 처용이 춤을 추며 부른 노래가 ‘처용가’입니다. 처용의 노래를 들은 역신은 처용이 자기를 발견하고도 아무 해를 끼치지 않고 춤추며 노래만 부른 관대함에 감복해 누구든 대문에 처용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붙여두면 그 집에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떠나갑니다. 처용가에 나오는 역신이 도깨비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도깨비의 특성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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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를 신으로 숭배하는 신앙과 대중화된 도깨비 설화는 어느 정도 일관성을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부각됩니다.

  1. 메밀묵, 팥시루떡, 돼지고기, 술을 좋아한다.
  2. 성격이 괴팍하고 영악하며 장난을 좋아하는 반면, 간혹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어리숙하고 친절한 모습도 보인다.
  3. 사람과 친하고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4. 간혹 크게 될 사람을 만나는 경우 그 사람의 미래를 알려주기도 한다.
  5. 특히 여자를 좋아하는 호색한이다.
  6. 불로 변하고 불을 다스릴 수 있다.
  7. 재물을 불러 모으는 힘이 있다.
  8. 외딴 산속이나 해안지역, 혹은 바다에 자주 출몰한다.
  9. 말의 피를 대단히 무서워한다.

드라마 <도깨비>의 인물설정은 한국의 전래 도깨비 신앙 및 설화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도깨비 김신(공유 분)과 도깨비 신부 지은탁(김고은 분)을 처음 이어주는 매개물은 메밀꽃인데 이 점은 메밀묵을 좋아하는 도깨비의 특성을 연상시킵니다. 박욱주 교수는 ‘공유’의 <도깨비>, 한국 도깨비 설화와 얼마나 일치하는가(크리스천투데이 2017.2.12.)를 시작으로 도깨비 및 저승사자 관련 글을 세 차례에 걸쳐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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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의 마지막회는 2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누군가는 이 드라마가 삶에 대한 책임감과 성실함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흔히 운명은 정해져 있고, 바꿀 수 없다고 하지만 ‘운명을 질문하고 그 답’을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존재지만 저마다 어떤 운명의 길에 놓여 있는 걸까요? “너의 삶은 너의 선택만이 정답이다. 그대 삶은 그대 스스로 바꿔놓은 것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네요.

사실 얼마나 더열심히 최선을 다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매일 전력질주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포기하지는 말아야겠단 생각은 한다.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는 가장 큰 죄를 지음으로써 영원한 벌을 받고 싶지 않다. 죽음 앞에서 후회가 남을 순 없지만 죽음의 신에게 너의 삶을 응원했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 재계 순위 1-10위만 신이 응원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삶의 책임감을 일깨워준 도깨비씨(브런치 블로그 2017.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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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는 재정난을 이유로 드라마 협찬을 중단했다가 4년 만에 ‘도깨비’를 후원했습니다. 드라마에는 인천의 곳곳이 등장하는데 동구 송현근린공원과 배다리 헌책방골목, 중구 아트플랫폼과 자유공원, 계양구 서운고등학교, 서구 청라국제도시 일원, 연수구 송도국제도시 일원 등입니다. 인천시와 인천관광공사는 드라마 촬영지를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포토존 이벤트와 할인상품 등을 제공할 예정이며, 영화 세트장과 촬영소를 인천에 조성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천아트플랫폼에서도 촬영이 많이 진행됐고, 은탁이 사는 곳으로 등장해 대사에서도 ‘해안동 인천아트플랫폼’이 여러 번 언급되기도 했었죠.

김신 : 그래서 어디 사시는데요?

은탁 : 인천 해안동 아트플랫폼 근처요. 대표님은 어디신대요?

김신 : 전 좀이따 아트플랫폼 근처일듯 싶네요. 30분 후에.

은탁 : 지금 저한테 데이트 신청 하시는 거예요?

김신 : , 저 마음 먹었거든요. 지피디님이랑 데이트하기로. 근처에 오시면 연락주세요.

30분 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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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한 ‘인천 도깨비 여행’은 여행 지역과 테마에 따라 원조 도깨비 코스, 웰니스 도깨비 코스, 로맨틱 도깨비 코스로 구성되는데 ‘원조 코스’는 배다리 헌책방골목과 송현근린공원, 자유공원, 제물포 구락부 등 원도심 촬영지와 차이나타운, 동화마을을, ‘웰니스 코스’는 메타세콰이어길이 있는 수도권매립지와 청라호수공원, 경인아라뱃길, 정서진을, ‘로맨틱 코스’는 송도 경원재 앰배서더호텔, 송도센트럴파크, 동북아트레이드빌딩과 포토존이 설치된 인천종합관광안내소 등을 구경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광정책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미명 아래 지역주민의 피해를 방치한다는 지적과 시에 중ㆍ장기적 관광정책이 없다는 비판적 시각이 그것입니다. 배다리 헌책방골목은 주말이면 500~600명이 몰려드는데 방문객들로 동네가 활기를 띠기도 하지만, ‘관광객으로 몸살’(시사인천 2017.2.13.)을 앓기도 합니다.

한미서점 김시연(48) 사장은 “관광공사가 이곳을 관광지화하면서 한 차례도 이곳 사정이 어떻고 무엇이 필요한지 양해를 구한 적은 없었다”며 “헌책방거리가 의미나 성격에 맞게 잘 소개되기 위해 상인들과 협의를 하는 것이 아닌 무작정 관광지화, 상품화만 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도깨비 촬영 순례’ 안 반가운 배다리상인(경인일보 2017.2.20.)

<위대하고 찬란하神 도깨비>는 동남아 및 미주로 수출됐으며 일본에서는 <鬼-도깨비>라는 제목으로 3월부터 방송된다고 합니다. 도깨비는 물론, 저승사자, 칠성신, 삼신 할매 등 한국문화를 알리고 한류 문화콘텐츠의 새로운 힘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면 좋겠네요.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뉴스 큐레이션 – 2017년의 키워드들, 그리고 사랑

아쉬움은 지우고 기대는 품는다. 잊지 못할 한해였지만 다가오는 해의 새로움도 궁금하다. 올해 마지막 큐레이션은 2017년을 주도할 주요단어와 사랑으로 채운다.

20대 트렌드 키워드
 01

‘대학내일’이 2017년을 주도할 20대 트렌드 키워드를 발표했다. 주체적으로 홀로 섬을 의미하는 ‘나로서기(나로서+홀로서기)’, 궁극의 소비를 통해 자기만의 만족을 찾는 ‘겟꿀러’, 흔적 없는 소통을 나누는 ‘팬텀세대’ 등이 이에 속한다.

취업과 스펙에 집착했던 청년들이 ‘갭이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갭이어는 ‘학업을 잠시 중단하거나 병행하면서 봉사, 여행, 진로탐색, 교육, 인턴, 창업 등을 체험하고 그 안에서 흥미와 적성을 찾으며 진로를 설정하는 기간’을 말한다.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저돌적 삶에서 여유와 휴식을 즐기며 자신에게 집중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이들의 움직임이 2017년의 문화 흐름에 긍정과 명랑의 기운을 불어넣을 것이다.

트위터 코리아가 국내 이용자들의 트윗과 계정을 분석해 분야별 키워드 및 순위를 발표했다. 사회 분야에서는 대통령, 최순실, 촛불집회, 세월호가 1위부터 4위를 차지했다. 음악분야에서는 방탄소년단,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분야에서는 복면가왕이 1위에 올랐다. 가장 많은 팔로우 증가율을 기록한 언론사는 허핑턴포스트. 문장이 아닌 단어 하나로, 어느 때는 전부 숫자로만, 드물게는 이모티콘을 타이틀에 배치해 임팩트를 준 보도 효과를 톡톡히 본 것 같다. 때때로 그림언어가 문자언어가 되고, 둘이 조화를 이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가 돈이 없지 생각이 없냐, 2017년 키워드들
 02

2017년에는 어떤 단어가 대한민국을 정의하고 주름 잡을까. 한국일보가 트렌드 도서를 통해 2017년의 풍경을 선보였다. 건강을 상징하는 웰빙이 음식뿐만 아니라 생활 곳곳에 녹아드는가 싶더니 올해 먹방과 쿡방으로 넘어온 라이프스타일에서 건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전문가들은 미래 지향적인 건강 개념이 혀끝에서 느껴지는 자극이나 지금 당장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에 압도당했다고 말한다. 내일의 안위가 보장되지 않는 헬조선 국민들에게 건강은 사치일까?

미래가 불확실하므로 결혼하지 않는다. 혼자 살면서 고양이를 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린아이 사진에는 ‘네 자식 너나 귀엽지’라는 댓글이 달리지만 고양이 사진에는 ‘네 고양이 나도 귀엽지’라는 호의적 멘트가 붙는다.

내년은 프로 불편러들의 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여성혐오, 장애인 조롱, 인종차별 등 사회적 약자에 가해지는 폭압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 최근 사전 허락 없이, 혹은 남녀 배우 중 한 사람에게만 통보한 뒤 키스신(베드신)을 촬영한 것에 대한 프로 불편러들이 비판이 이어졌다. 정치적 올바름(PC)이냐 지나친 트집 잡기의 ‘PC 정신병’이냐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누군가 사소하게 폄하한 일이 어떤 이에게는 트라우마가 되고, 잠깐의 불안이 진한 상처로 남을 수 있음을 잊지 말자.

따듯함에 대한 갈망, 휘게 라이프

03

휘게(hygge)는 행복한 감정, 긴장을 풀어도 되는 느낌을 말한다. 따듯한 욕조에서의 반신욕, 친구가 건넨 핫팩, 고구마를 호호 불어먹는 시간 등이 ‘휘게 라이프’의 작은 모습이다. 옥스퍼드 사전이 휘게를 올해의 단어 후보로 뽑았다. 단순함을 추구하는 흐름 속에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강조하는 삶.

휘게는 웰빙에서 유래한 덴마크어로 “휘겔리한 시간 보내세요”처럼 사용한다. 이 표현에는 어지러운 환경에서의 스트레스를 가족, 친구, 공동체 구성원들과 더불어 풀고 편안함을 얻고자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퇴근 후 아늑한 곳에서의 차 한 잔, 함께여서 즐거웠던 산책 등이 충만한 기쁨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다.

[연애를 영화로 배웠네] 연애, ‘올해도 글렀어’라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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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OO으로 배웠네’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들이 문화콘텐츠에 연애 경험담을 엮어 쓰는 글이다. “다들 나라 망치느라 바쁜 와중에도 부지런히 외모도 가꾸고, 썸도 타고, 결혼도, 출산도, 이혼도 잘 하셨구나.” 그런데 나는? 올해 대체 뭘 했지? 연애는 또 물 건너 간 건가?

‘500일의 썸머’로 연애를 배운 어느 기자의 팩션이 연애 포기자, 혹은 연애 불능자를 위로한다. 영화에는 “누구의 여자친구가 되는 건 불편해요. 남녀가 만나면 누군가 상처를 입죠.” 같은 고백과 “당신이 틀렸어요. 언젠가 알게 될 거예요. 사랑을 느꼈을 때.” 같은 응답이 넘쳐난다. 연애를 젊은 남녀의 사랑으로 제한하지 않는다면 영화 속 수많은 재잘거림과 그 대화를 인용한 기사 본문에서 진심어린 삶의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하늘이 점지해 놓은 그 누구를 기다리는 톰인가요? 아니면 그런 환상은 종량제봉투에 담아 버리자고, 지금 서로 즐거우면 그만 아니냐고 생각하는 썸머인가요?”

어떤 상황에서는 쿨 피플이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부뚜막 고양이처럼 날뛰는 인간이 된다. 내 성격 때문일까, 상대의 조건 때문일까, 관계가 주는 기운 때문일까? 날씨나 바이오리듬에 민감한 성정을 타고난 것은 아닐까? 시시때때로 돌변하는 자신에게 우리는 올해도 똑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나는 누구인가? 올해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연애뿐만 아니라 멋지게 뽐내고 싶었던 성과도 올해는 글렀다. 하지만 어김없이 신선한 새해는 오고, 우리는 또 누군가를, 그리고 또 다른 나를 만날 것이다. 굿 럭.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뉴스 큐레이션(2016.12.6~12.19)

더 이상 ‘큰’ 문화를 외면할 수 없었다. 나라와 문화를 짚어야 했다. 12월 첫째 주 뉴스 큐레이션은 다소 무겁다. 그만큼 진지하다.

한 떨기 꽃잎 같던 서울
 01

취직이나 창업이 아닌 ‘창직’(직업을 창조하다)이 대세라더니 ‘문화창작자’라는 직업도 있다. 문화창작자 전현주 씨가 한양도성을 걸었다. 높은 곳에 오르면 “야호!”라고 외칠 법도 한데 지나가던 사람들은 청와대가 어느 쪽이냐고만 묻는다. 어느 하루, 옛사람들은 해도 뜨기 전에 집을 나서 짚신과 고무신을 신고 도성 안팎을 걸었다. 산꼭대기에서 궁궐을 보고 ‘저기 우리 임금이 산다’고 감탄했다. 요즘 사람들은 감탄에 인색하다. 대통령이 사는 곳이 궁금해 먼 길 올라온 사람도 ‘야호’나 ‘히야’를 내뱉지 않는다. 눈 크게 뜨고 내려다보기만 한다. ‘둥근 모양 한 떨기 꽃잎’은 한양을 주제로 한 과거시험에서 나왔던 표현이다. 포근하고 아련하다. 오늘의 서울도 둥근 한 떨기 꽃잎 같을까? 성곽 어느 즈음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도성길을 걷던 행인은 자연스럽게 그의 시를 떠올린다. 잊으려야 절대 잊히지 않는 구절을 읊조리면서 땀을 닦고, 또 닦는다. 입술을 침으로 적시고 오늘의 서울과 이 나라를 호명한다.

아무것도 하지말라
 02
유교 경전 ‘예기’에 나오는 이념이다. 천하공전, 즉 진리가 행해지면 천하가 공적인 것이 되고 검증된 이들이 등용돼 믿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는 뜻이다.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념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념의 실현은 어렵다. 나쁜 역사는 반복되고, 지겹게 되풀이된다. 정원의 뱃사공이었던 등평에게 빠져 억만금을 뿌린 문제가 있었고, 한언에게 빠져 온갖 혜택을 베풀다 그가 죽자 그의 동생으로 갈아탄 무제가 있었다. 무제는 신선술이니 방술이니 하는 도술에 현혹됐고, 어디선가 도깨비처럼 나타난 사이비 도사들은 불로장생을 위시해 욕망을 악용했다. 옛말에 ‘군주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요구가 있었다. 공자도, 한비자도, 도가에서도 군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능히 다스릴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변명도 이타적 인간을 전제하면 믿을 게 못 된다. 모름지기 군주는 사리사욕에 휘둘리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되, 욕망 다스리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 나라의 군주가 배워야 할 것은 ‘베껴 읽기’가 아닌 ‘옛 것 읽기’ 습관이다.

사람됨에 기여하는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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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팔순 노인의 말을 들어보자. 지난 50년간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했고, 문학과 예술, 정치, 사회에 두루 관심 보였던 인물이다. “문화 콘텐츠 장사였지 사람됨에 기여한 문화는 아니었다.” “자유와 규범 사이에도 질서는 있어야 한다.” “타인의 존중이 자신의 인간성에 충실한 것이다.” “거대한 우주에서 사람은 다 낮은 존재다. 진정한 자기 인식은 저절로 자기를 낮춘다.” 말로 내뱉는 것은 쉬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노인, 최근 200자 원고지 6만5000 장에 달하는, 19권의 전집을 출간했단다. 말 하는 건 그런대로 쉽다면, 글은 어떨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또 어떻고? ‘상대방에게 아름답게 절하는 자세는 누구나 다 좋아한다’는 그의 마지막 문장을 곰곰 생각해본다. 말 따로, 행동 따로. 거짓 고갯짓, 거짓 참회, 거짓된 반성이 너무 많다.

지옥에 빠진 일상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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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그런 그림이. 당시 SNS에서 난리가 났었다. 그 그림은 2014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 걸리지 못했다. 마당에 건다는, 광장에 건다는 걸개그림. 민중의 해원과 공동체의 신명을 위해 그려 세상에 소개한다는 그림. 특별전에 걸리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아귀도와 같은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재구성했다.” 4대강, 촛불, 위안부, 강정, 팽목항이 요리조리, 시민군 청년과 바리데기 처녀가 음양으로 얽히고설켜있다. 작가는 불태우고 녹인다. 뾰족한 걸 세운 뒤 탁탁 내리친다. 2년 전의 이 그림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향해 존재하고 있을까. 다시 한 번 ‘세월오월’을 낱낱이 봐야 한다면 그 시간은 왜 지금, 여기여야 할까.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뉴스 큐레이션(2016.11.15~2016.12.05)

2017년 최고의 키워드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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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잘 살자는 움직임이 뜨겁다. 촛불 하나는 우습지만 모이면 붉디붉다. 다수에 묻혀 나를 져버리자는 게 아니다. 나도 좋고, 당신도 좋은 게 좋은 거다. 가습기 살균제 파동, 경주 지진 피해,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사건’ 등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이 높은(늘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함께 잘 살자고 외치면서도 내가 누구인지 고민하고, 앞으로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지 걱정한다. 2017년, 대한민국의 트렌드는 ‘나’다. 부를 좇고, 내 집 마련으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집요함이 아닌 이기적인 휴가로 나만의 만족을 찾고, 간섭받지 않는 삶을 사는 걸 말한다. 회사도, 사회도, 국가도, 내 미래를 책임지지 못한다. 싫은 게 있다면 아웃을 외침. 때때로 주체적인 결별 선언이 필요하다.

관태기에 지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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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관계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인간관계에 권태를 느낀다. 혼자가 편하다. 스트레스 받고 눈치 보는 관계를 유지하느니 차라리 자발적 아웃사이더를 선택한다. 3포 세대, 5포 세대, 7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 집 마련, 희망, 꿈)까지 보이지 않는 힘에 눌려 ‘포기’의 숫자를 늘리고 있는 청춘, 2030을 대변하는 많은 이름들. 관태기는 관계와 권태기의 합성어다. 인간관계에 따라붙는 말말말. ‘스트레스’, ‘힘들다’, ‘어렵다’, 그리고 인맥과 스펙. 에라, 모르겠다. 영화도 혼자 보고(혼영), 밥도 혼자 먹고(혼밥), 술도 혼자 마시자(혼술).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일 뿐이라고? 얼마든지 그렇게 살아도 외롭지 않을 자신 있다고?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그게 거짓 처방일지라도.

마음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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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책방이 다르듯, 약국과 약방은 다르다. 공간과 명칭의 재발견, 혹은 다시보기는 소수의 손길을 거쳐 시대와 세대에 의해 재정의된다. ‘방’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아담하고 따듯한 이미지. 친구가 내민 종이 상자에 ‘마음약방’이라고 적혀 있다. 상자를 열어보니 영화처방, 그림처방, 요리레시피, 산책지도가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작은 거울 하나. 마음을 치유하는 자판기에는 ‘용기 부전, 예민성 경쟁 과다증, 꿈 소멸증, 자존감바닥 증후군, 미래막막증, 월요병 말기, 급성 연애세포 소멸증’ 등의 병명이 적혀 있다. 달랑 500원을 넣고, 처방이 필요한 증상을 누르면 퐁당, 약이 떨어진다. 진짜 그 병을 앓고 있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런 병 따위 없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처방약은 곱게 받아든다. 플라시보 효과가 선보이는 ‘신약 월드’가 펼쳐질지도 모르니까. ‘마음약방’은 서울시민청과 대학로 서울연극센터에 1, 2호점이 있다. 약효과를 본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조금씩 웃고 있다.

1인 가구 가족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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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 혼밥, 혼행(혼자 여행하기)에 이은 혼찍(혼자 가족사진 찍기)의 탄생. 1인 가구의 주인이 가족사진을 찍으러 온다. 혼자 사는 1인 가구에게 가족은 무슨 가족? 반려 강아지, 고양이, 만화책, 노트북, 핸드폰이 그들과 함께 한다. 가족으로 작업복을 꼽고, 가족으로 이어폰을 가지고 온다. 허공을 데려온 사람도 있다. “여백 같은 시간에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은 혼자 있는 공간의 압박감이에요. 가족 같은 물건이 많이 있지만 혼자 사는 삶의 무게감을 표현하고 싶어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어요.” 지난여름, 인천발전연구원은 ‘싱글이 행복한 소비 도시 인천 만들기’라는 보고서에서 현재 약 25만명인 인천의 1인 가구수가 2020년에 28만8천만, 2035년에는 40만 가구에 육박할 것으로 내다봤다. 15년 후쯤이면 인천지역 전체가구의 30%가 1인 가구일 거라고 한다. 인천시, 인천문화재단 등이 후원하는 ‘1인 가구 가족사진’ 프로젝트는 아트팀 ‘쁘레카’가 서울 합정동에서 진행한다. 12월 22일까지 참여할 수 있다.

이재은(뉴스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