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행복해요” – 연극동아리 ‘행복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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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남동구 간석동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바로 시민문화공동체 문화바람이다. 이곳에는 생활문화예술 동아리 연합 놀이터 소속의 많은 동아리가 있다. 그 중 기자가 만난 동아리는 연극동아리 <행복한 사람들>이다. 2014부터 결성되어 올해 2년 차로 의욕과 열정이 넘쳐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했다. 그들의 주 활동지인 문화바람에서 <행복한 사람들>의 최진숙 회장님을 통해 귀 기울여 들어보았다.

 02그들의 시작
처음 시작은 문화바람의 연극 강습이었다고 한다. 최진숙 씨의 강력한 주장으로 만들어진 문화바람의 연극 강좌가 <행복한 사람들>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이전에도 극단 MIR가 주관한 ‘시민 누구나 연극하자’ 프로그램에 2년 동안 참여하며 연극을 배웠고, 이 과정에서 연극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고 한다. 이후 2번 정도 연극동아리를 운영했으나, 아쉽게도 정기 발표회를 하지도 못하고 끝내게 되었고 그녀에겐 연극에 대한 열망과 아쉬움이 너무나도 컸다. 이후 아쉬움을 가지고 있던 그녀에게 2013년 문화바람의 시민 강좌는 발판이 되어줬다. 이 연극 강좌에서 발표회를 하고 이후 수강생들과 뜻을 함께 모아 지금의 <행복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가슴 속 아픔을 꺼내다.
<행복한 사람들>은 기존의 연극 대본을 쓰는 대신, 그들이 마음에 품어온 이야기를 연극으로 풀어냈다. 어린이 극단인 야의 대표님과 단원들의 합의로 이 작업은 시작됐다. 단원들은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던 기억이나 아버지로 인한 아픔, 첫사랑과 같이 각자 마음깊이 숨겨놨던 아픔과 기억들을 꺼내놓았다. 이런 기억들을 글로 쓰고 이야기로 나누면서 기획한 연극이 바로 ‘행복한 여자’(아트홀 소풍, 2014)였다.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각본을 쓰고 연습하는 과정 내내 아픈 기억을 계속 되새겨야 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고, 괴로운 마음에 포기하고 숨어버리려는 단원들도 많았지만, 결국 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그 아픔과 고통을 이해했기 때문에 더욱 서로를 다독이며 북돋워 줬고, 그 위로에 용기를 얻은 사람들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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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회의 발표회를 진행하기까지…
2014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진행한 행복한 여자1과 2 이후 행복한 사람들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전까지는 자신들의 이야기로 연극의 각본을 만들었지만, 이 과정이 너무 힘들고 쉽지 않은 작업일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할지 몰라서 고민에 빠진 것이다. 수많은 고민과 회의 끝에 선택한 것이 기막힌 동거였다. 기막힌 동거는 내 집 하나 마련하기 어려운 현대사회를 꼬집는 시대 풍자물로 방 한 칸을 두고 방을 빌린 숙자와 아영, 아영의 남자친구 동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이전까지 행복한 사람들 단원들의 힐링 차원으로 극을 올렸다면, 기막힌 동거를 기점으로 더 전문적으로 연극을 다루게 된 것이다.

기막힌 동거와 시작된 인연
행복한 사람들은 정기 발표회 2회 이후로 그들을 이끌어줄 전문적인 연출가가 부재했다. 학창시절 연극을 했던 단원도 있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그때 실제 전문 연극배우로 활동하는 단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전문적인 조력자가 필요했던 그들은 한밤의 사발면 의식으로 인연을 맺게 됐다고 최진숙 씨는 이야기했다. 행복한 사람들에 그가 영입됨으로써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연출지도 이외에도 정기 발표회 당시 조명, 음향, 포스터, 사진 등의 극의 외부적인 부분에서 아예 실제 종사자분들로 팀을 꾸려서 도움을 줬다고 한다.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포스터를 준비하던 그들에게 그는 너무나도 고마운 조력자가 되어줬다. 큰 도움이 되어준 실제 전문가분들과 단원에게 감사하면서도 보답을 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도 미안할 뿐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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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들의 열정과 의외성에 놀란 지인들
그들은 정기발표회를 하면 가족들이나 주변의 지인들을 초대한다고 한다. 관객으로 온 그들의 지인들은 우선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고 왔다가 프로같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감탄을 하곤 한다. 행복한 사람들의 연극을 보며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알고 지내던 사람의 이외성을 발견한 것이다. 지난 정기발표회 연극에서 부부단 원 중 남편분이 5만원이 그려진 속옷을 보이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 장면을 보며 평소에 생각할 수 없던 과감한 모습에 연기에 대한 열정을 느꼈다고 한다. 단순히 지인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로 왔던 그들은 연극을 보며 그들의 열정에 감명받고 다음 발표회를 기다리는 마니아가 됐다.

행복한 사람들이 나와 우리에게 미친 영향
인생에서 엄청난 전환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고 싶은 연극을 할 수 있어서 자아실현에서 만족도가 크고 가족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행복한 사람들에는 부부 단원이 있는 데, 이 부부가 연극을 같이 하게 된 계기는 남편이었다. 그는 젊었을 적부터 연기에 대한 꿈이 있던 사람으로 탤런트 시험과 개그맨 시험까지 봤다. 이후 어쩔 수 없이 꿈을 접고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지만, 연기와 연극에 대한 열망은 항상 품어왔던 그였다. 그런 그의 권유로 부부가 행복한 사람들의 단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처음엔 아내가 활동을 부담스러워하고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기 발표회가 가까워지면서 더 연습하자고 하며 열정적으로 변했고, 극에선 너무나 멋지게 자신의 역할을 소화했다. 시작과 달리 연극에 흥미를 붙이면서 부부 공통의 취미가 생긴 것이다. 남편은 자신의 꿈과 열정을 실현함과 동시에 아내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행복한 사람들의 가족들의 응원
행복한 사람들은 연극과 연기에 대한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사람들의 열정이 모여 만들어졌다. 그러한 행복한 사람들 활동이 그들의 가족들에게도 변화를 일으켰다.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 부모님의 삶을 존중하게 되고 그들의 배우자 또한 마찬가지로 개인 취미 시간을 인정해준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이 부모님의 새롭게 끊임없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도전하는 모습을 응원해준다고 한다. 부부 단원의 딸들은 행복한 사람들 연습실로 직접 찾아와 부모님의 연극 연습을 구경하고, 팬케이크를 직접 만들어 단원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최진숙 씨의 자녀들도 엄마의 연기에 대해 평하고 지적하면서도 엄마의 공연에 자신들의 친구들을 관객으로 초대하며, 엄마의 열정적인 모습을 자랑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는 나이가 먹고 부모가 되더라도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지켜나가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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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아마추어 동아리로서 가지고 있는 고민
가장 기본적인 고민은 재정적인 문제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정기발표회 3회를 준비하며, 인천문화재단 지원 신청을 했다. 설마 되겠냐 하는 마음이었지만, 운 좋게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기 공연 준비 이외에 문화바람과 놀이터 일원으로서 부담하는 비용과 같이 부가적인 비용이 드는 것은 항상 고민되는 문제이며, 이것은 행복한 사람들 이외에도 아마추어 동아리로 활동하는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그녀는 이야기했다. 두 번째는 전문적인 인력 지원이다. 좀 더 좋은 공연을 보여주고 싶지만, 그들의 능력으로는 한계점이 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좋은 코치를 해줄 전문가가 필요하지만 시민아마추어동아리에게 그러한 도움을 구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다 같이 연극을 보러 가서 공부를 한다고 한다. 실제로 연극을 관람하면서 배우들의 표정 연기와 몸 쓰는 연기까지 꼼꼼하게 본다. 그러한 것들이 도움이 되지만 실질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가능하다면 전문인력 배치와 전문인력을 유입할 수 있는 경제적인 지원 또한 이뤄졌으면 하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다.

행복한 사람들의 의미
그녀는 진부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행복한 사람들은 가족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행복한 사람들이 연습 이후 혹은 그 외의 시간에 같이 모이게 돼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연극과 별개로 돈독해지고 소속감이 생겼다고 한다. 물론 정기 발표회를 준비하며 의견충돌이 있었던 그들이다. 전문적으로 연극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합을 맞추는 과정에 그리고 재정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저 하고 싶은 연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던 것과 달리 스태프로서 활동하기도 하고 홍보도 해야 하고 여러 부분에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에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갈등도 있었지만, 정기 발표회 이후 더 많은 땀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 후 화해하고 더 사이가 좋아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 더 돈독해지며 힘이 되어주는 가족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꿈이 있지만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가장 먼저 시작을 위한 한 발자국을 떼는 것이 제일 어렵다. 그러나 용기를 갖고 도전했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이야기했다. 우선 한 발자국 내밀어 다가오면 우리가 함께 도와줄 수 있으므로 망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스스로 채워야 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함께 하고자 하면 어렵지 않기에 용기를 가지고 말하고 싶다.

연극동아리 <행복한 사람들>은 이제 막 2년 차가 된 시민문화예술동아리로 앞으로 활동 방향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다고 했다. 최진숙 씨는 자아실현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환원할 수 있는 재능기부 또한 하고 싶다는 바람 또한 내비쳤다. 다섯 명이라는 적은 인원으로 그들의 꿈을 펼치기 위해 수많은 고민과 마주하겠지만, 그들의 연극에 대한 열정과 열의를 비춰볼 때 <행복한 사람>들의 앞으로는 더욱 밝으리라는 것이라는 것을 기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터뷰 및 정리 : 시민기자 오지현




그곳에 가면 살고 싶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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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풍경사진을 보며 감동받은 이유를 그곳이 시골이든 도시든 가보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거주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단지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어떤 곳에 살고 싶다는 마음은 그 장소가 방문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마치 이곳이 과거 내가 살았던 것 같은 아니면 확실히 이곳에 살아야만 할 것 같은 어떤 운명적인 만남처럼 행복한 곳이다. 프로이트는 어머니의 육체에 대해 “우리가 과거에 이미 그 안에 존재했음을 그토록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다른 장소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그곳에 잠시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거주하고 싶은 욕망은 ‘내 안에서 전혀 불안하게 하지 않는’ 어머니를 남몰래 되살아나게 하는 곳이다.

25년 전 중구청 앞 네거리에 운명처럼 첫눈에 반해 작업실을 만든 곳이 있었다. 2층 적산가옥으로 이름 모를 풀씨가 지붕에 꽃을 피울 만큼 낡은 곳이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아담한 정원에는 모란이 탐스럽게 피고 지던 곳이다. 고흐의 작업실처럼 나무 계단 위로 올라다니며 매일 창작의 꿈을 꾸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 주인집 아들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건물을 헐고 5층 빌딩을 짓는 바람에 나는 이곳을 떠나야만 했고, 주인 역시 과도한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일이 바빠서, 또 외국으로 삶을 이주한 후에도 몸은 이 곳을 떠나 있었지만 마음은 늘 이 곳을 잊지 못했다. 결국 지금은 홍예문 근처, 창문을 열면 손바닥 만한 바다가 보이는 곳에 공간을 만들어 다시 돌아왔다. 
내가 이곳을 다시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항구에서 뱃고동소리가 들리고 가끔 바다 안개가 홍예문 정상으로 올라오는 곳. 사계절 자유공원의 숲길로 산책이 즐거운 곳이다. 그런데 자유공원은 최근 눈과 귀가 피곤할 정도로 과도한 조명과 음악 소음이 넘쳐나 편하지 않다. 중구 일대 구도심도 마찬가지다.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과도한 장식들로 넘쳐난다. 화장기 들뜬 분칠된 얼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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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문화적 가치란 무엇인가? 그런 것이 따로 있기는 한 것인가? 개항장 최초의 역사들, 근대 건축물과 각종 기념비와 박물관, 차이나타운, 섬들의 가치, 해양 다문화적 성격 등을 인천의 특별한 문화적 가치로 보는 것은 인천 시민들이 욕망하는 기대치의 신화들이다. 지금 이러한 것들은 인천이라는 장소 특정성으로 규정하기에는 현실 공간에 존재하더라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부풀린 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실례로 최초의 철도 시발점인 인천역에는 조악한 기관차 돌조각이 볼품없이 서 있고 관광안내소 건물 뒤편에 심은 철도 시발 기념 식수 은행나무는 방치되어 있다. 차이나타운은 중국음식거리로 변질된 지 오래고, 그 옆 송월동은 동화마을 판타지로 마을 전체가 상품이 되었다. 다른 지역 벽화마을은 주민들이 나서 철거할 정도로 실패한 지 오래인데, 그 전철을 이제야 밟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관광객들로 넘쳐나 단기간에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언제까지 흥할 수 있을까? 급조된 것들은 오래된 역사 문화적 가치를 얻을 수 없다. 믿음과 신뢰가 바탕이 되지 못한다면 그곳을 다시 찾지 않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최근 인천의 섬을 창조적으로 활성화한다고 무의도에 카지노를 설치하고 백령도에 비행장을 만든다고 한다. 또 다른 섬들에는 골프장과 리조트를 만든다고 하는데 그 중 무엇 하나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문화적 가치란 타 지역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해서 유사한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런 곳은 세상에 많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장소, 그 장소가 가진 특성을 살려서 차이를 만들어낼 때 고유한 문화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적어도 인천의 문화가치라고 한다면 불필요하게 덧붙여진 장식들을 걷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중구청 일대 일본거리는 껍데기만 일본풍으로 덮은 짝퉁 거리가 된지 오래다. 더 이상 중,동구 일대 인천의 원도심이 특색 없는 도시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원도심의 오래된 가옥을 허무는 것도, 무분별한 주차장 만들기도 그만둬야 한다.

원도심에는 낡고 허름한 집 역사만큼이나 그곳을 오랜 세월 묵묵히 지켜온 주인들이 있다. 중고 서점, 카페, 음식점, 재래시장… 오래된 가게들이 유산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역사와 추억이 깃든 것들은 시간이 만든 아우라다. 한 번 훼손되면 다시 복원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부실 공사로 중단된 월미은하모노레일 재공사, 대책 없는 국제선여객터미널 이전, 산업도로 신설로 배다리 마을공동체를 두 조각내는 것은 인천의 문화정체성과 가치를 죽이는 일이다. 이런 일들에 소요되는 비용의 1/10만이라도 좋다. 원도심의 낡은 가옥을 시가 매입하고 문화예술가에게 기획이나 창작을 할 수 있는 거주공간을 만들어 준다면 전국의 문화예술가들뿐 아니라 외국에서까지 좋은 작가들이 몰려들 것이다. 더불어 갤러리 유치에 인센티브를 주고, 문화 공연이 가능한 카페와 오래된 음식점이 활성화되도록 한다면 어떨까? 그들이 만들어내는 뛰어난 창작물은 반드시 인천을 소재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천에 거주하면서 생산한 작품들은 결국 인천의 문화적 가치를 높여줄 것이다. 인천은 아직도 광역시 중 유일하게 시립미술관이 없는 곳이다. 언급조차 되지 않는 걸 보면 시에서는 아예 의지가 없는 모양이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쉬바빙 같은 마을에서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고, 인천을 기록한 사진과 영화를 보고, 연주도 듣고 연극도 관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술가들이 몰려들고 그들의 창작행위가 365일 이루어지는 작은 축제들이 있는 곳, 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게 만드는 곳이 되는 것만큼 좋은 문화적 가치는 없을 것이다.

이영욱(사진가)




광복 후 인천에서 발행된 향토월간지 문학산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은 전국 유일의 공공 종합문학관입니다. 근대문학을 중심으로 한 근대 한국학 자료 약 3만 점을 소장하고 있는 콘텐츠 중심형 문학관이기도 합니다. 한국근대문학관은 근대문학(1890~1948)의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상설전시 외에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한 기획전시, 문학관의 희귀 소장품을 분기별로 전시하는 작은전시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 자료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근대문학관의 함태영 학예사가 소개하는 우리 근대문학의 소중한 자산도 만나보시고, 문학관에 직접 오셔서 한국 근대문학이 가진 의미와 매력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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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인천에서 발행된 향토월간지 <문학산>
<문학산>은 정부 수립 후 인천에서 발행된 향토월간지 창간호입니다. 이 잡지는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처음 발굴 ․ 공개하는 것으로, 그 동안 전혀 알려지거나 전해진 바 없는 매우 희귀한 자료입니다.
“지역 문화의 향상과 전통적 도의정신 함양”을 표방하며 창간한 이 잡지는 인천의 연혁 ․ 공업 ․ 노동 ․ 금융 등은 물론 정치 ․ 문학 ․ 철학 ․ 보건위생 ․ 외신 ․ 경인철도 및 여객선 시간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통권 몇 호가 발행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창간호가 곧 종간호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향토지라기보다 종합 잡지 체제인 이 잡지는 광복 후 1940년대 후반 인천과 국내외 여러 현실 정보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있는 것’에 대한 긍정, 인천다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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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는 말을 들으며 내가 살고 있는 인천이 가진 문화적 가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문득 생각해 본다. 인천은 전체 면적이 약 1,00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국내에서 가장 큰 도시이기도 하면서 약 30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또 국내 최초의 근대적 개항이 있었던 항구 도시이며, 경제자유구역과 세계 1위의 국제공항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천은 외지 유입 인구가 87%에 이르고, 인천을 떠나고 싶다는 시민도 48%에 이르는 등 정주 의식이 희박한 곳이기도 하다. 또 제조업 중심의 공단 지대 조성으로 인해 각종 환경오염 문제가 제기되어 왔고 서울과 지역적으로 가까운 까닭에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과 투자가 미미하여 문화의 불모지, 문화의 변방 도시라는 평가를 오랫동안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정주 의식이 약하다는 것이 꼭 부정적인 것일까? 그것이 바로 인천이 가지고 있는 지역적 특색이자 인천의 고유한 문화적 가치가 될 수도 있다. 정주 의식이 희박하여 뜨내기들이 많다는 일종의 열등감이 오히려 인천의 인천다움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다. 서울의 변방 도시로서 문화의 불모지로 인식된다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 문화가 지역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삶의 총체적 모습을 의미한다면 문화의 불모지라는 말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인천은 그 나름대로 독특하고 고유한 삶의 모습을 온전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 도시’에 대한 강박과 열등감은 인천의 ‘있는 것’에 대한 올바른 시선과 판단을 가로막는다. 송도 신도시와 인천국제공항이 동북아 허브 도시로서 인천이 갖는 지역적 상징성을 보여준다는 생각도 좀 더 비집고 들어가 보면 ‘인천다움’에 대한 근본적 성찰보다는 ‘문화 도시’로서 내세울 만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열등감이 자리한 까닭이 아닐까.

문학에 미적 범주라는 것이 있다. 어떤 작품에서 ‘있는 것’에 대해 긍정하며 그것에 만족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면 우아미, ‘있는 것’을 긍정하면서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있어야 할 것’을 향해 나아가는 내용을 담고 있으면 숭고미라 한다. 반면 ‘있는 것’에 대해 부정하며 ‘있어야 할 것’을 향해 노력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면 비장미라고 한다. 우리 인천의 발전은, 문학 작품의 감상에 빗대어 말하자면 비장미의 특성이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천의 ‘있는 것’들은 긍정의 대상이기보다는 버리고 숨기거나 고쳐 바꾸어야 할 부정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있어야 할 것’을 위해 애써 노력해 왔으나 우리가 정작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부정적이었다. 서울과 비교하면서, 혹은 다른 광역시와 비교하면서도 인천은 늘 ‘다름’보다는 ‘모자람’과 ‘결핍’에 방점을 두고 이를 개선해 오려고 노력해 왔다. ‘다름’과 ‘부족함’이 함의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비장미가 결코 우아미나 숭고미가 될 수 없듯이, 인천이 갖는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도 먼저 인천의 ‘있는 것’에 대한 긍정적 수용, 그리고 ‘다름’에 대한 합리적인 인식이 바탕이 되어야 논의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문화 도시’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이 화려하고 편리한 복지에 있다면 문화 도시로 가는 것은 어쩌면 시간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인천다움은 화려함과 편리함의 그늘에서 점차 사라질 지도 모른다. ‘문화 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있는 것’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얼마나 뒷받침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아닐까 싶다. ‘무엇’이 있어야 문화 도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무엇’을 있게 하려는 노력에만 집중하다 보면 늘 본질적인 고민은 뒷전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왜 있어야 되는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천의 ‘인천다움’은 이러한 물음이 전제될 때 비로소 드러나게 될 것이라 본다. 문화 도시를 향한 인천의 노력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결국 경제적 논리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는 숭고미가 아니라 비장미가 될 것이다. 인천의 문화적 가치를 생각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 인천의 ‘있는 것’에 대한 긍정적 내면화이다. 요컨대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라는 당위적 필요성보다는 ‘무엇이 어떻게 있는지’에 대해 관심과 긍정적 이해가 더욱 필요하다.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오래도록 인천에 있어 오며 인천의 특성을 형성해 온 것들에 대한 구성원들의 온전한 관심과 이해가 선행될 때 인천의 ‘인천다움’은 올바른 모습을 찾을 수 있으며 이것이 인천의 진정한 문화적 가치를 형성할 것이다.

이동구(광성고등학교 교사)




10년의 인연, 사람 냄새 가득한 사진집단 人

 

인천 서구 원당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진동아리 사진집단 人이 있다. 2005년부터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어느새 10년이라는 기록과 추억을 만들어가고 있다. 2016년 5월, 비 내리는 화요일, 사진집단 人의 아지트인 Long Black에서 4대 회장인 최우경(아톰) 씨, 총무 정은경(엘라) 씨과 사진집단 人의 회원인 이영희(가이아) 씨, 임봉(블루보리) 씨, 김지숙(미셰린) 씨, 이선혜(소니아) 씨, 이선희(가을이) 씨와 함께 그들의 10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sub09_01 Q. 사진집단 人 동아리는 어떻게 생기게 됐나요?
A. 2005년 원당중학교 개교기념으로 학부형과 민간인 대상으로 진행된 평생학습프로그램의 사진반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3개월간 무료로 진행되던 사진반이 폐강되면서 이에 대한 아쉬움으로 당시 사진반을 수강하던 30명 중 5명이 한 뜻이 되어 사진집단 人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때 1기 멤버가 현재 회장인 최우경(아톰) 씨와 이영희(가이아) 씨이다.

Q. 사진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모두 다 각자의 이유가 있었다. 최우경(아톰) 씨는 사진집단 人의 같은 회원인 오숙경(처음처럼) 씨의 권유와 함께 평소에 배우기 어려운 사진을 무료로 배울 수 있어서 선택하게 되었다. 이영희(가이아) 씨는 남편의 권유로, 임봉(블루보리) 씨는 수많은 취미를 배웠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았는데 사진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합동작업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아서 시작했다. 김지숙(미셰린) 씨는 처음에 아이들을 잘 찍고 싶어서 시작했고… 처음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유로 사진을 선택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엄마가 아닌 자기 자신만을 위한 취미로서 사진을 즐기고 있다.

Q. 각자 추구하는 사진 스타일이 다를 것 같은데, 본인이 좋아하는 사진스타일이 있나요?
A. 딱 하나를 선택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다양한 시선에서 볼 수 있는 열린 해석을 할 수 있는 사진을 좋아한다. 처음 사진을 본 사람들이 사진집단 人의 사진을 어렵다고 얘기할 때도 있을 정도다. 길에 핀 들꽃이나 하늘처럼 일상 생활의 사소한 부분을 담아내기도 하고, 인물 사진을 즐겨 찍으면서도 사물의 디테일함을 잡아내는 작업도 좋아한다. 개인마다 추구하는 스타일이 있지만, 사진집단 人은 전반적으로 관람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많은 이야기가 담긴 사진을 주로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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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사진집단 人의 모토로 재능기부를 통한 사회적 환원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
A. 대표적으로 3개가 있다. 첫 번째는 장수사진 프로젝트로 서구청의 평생학습동아리 우수프로젝트에 1등으로 당선되어 2009년부터 3년간 진행했다. 독거노인 혹은 생활이 어려운 노인 분들을 대상으로 장수하시라는 의미로 사진을 찍어드리는 활동이었다. 두 번째는 다문화가정프로젝트로 다문화 가정의 가족사진을 찍어주고 액자를 만들어 선물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2012년부터 시작, 4년 동안 총 130가정에게 사진을 선물했다. 세 번째 프로젝트는 원당 프로젝트로 인천의 과거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이다. 약 2~3년 동안 진행한 프로젝트로 사진집단 人 모두가 인천 곳곳의 같은 자리에서 매달 1번씩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어 변화의 기록을 남겼다. 변화를 사진으로 기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었지만, 그 이후 개발이 더뎌지면서 자연스럽게 잠정적으로 중단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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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현재까지 8번의 사진전을 진행했는데, 사진전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A. 전시회는 보통 10월~11월 중에 열리고 8월쯤부터 주제를 정하기 시작한다. 1인당 총 5점의 사진을 출품하고, 전체 스토리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한 해당 약 90점 이상의 작품이 전시된다. 2015년에 진행된 전시회는 상상바라보기라는 이름으로 기획되었으며, 말 그대로 사진을 보며 대중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열린 해석을 하며 소통하고자 했다. 실제로 사진집단 人의 회원들이 순번을 정해서 전시회를 지키는 것도 소통하기 위한 일환이다. 처음에는 낯설어하거나 사진을 어려워하는 관람객이 우리의 설명을 듣고 작품을 더 잘 이해하게 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전시회를 관람하는 경우도 많다. 지금은 우리의 사진전을 기다리는 매니아층도 생겼다.

Q. 매해 전시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어떤가요?
A. 전시회를 준비할 때마다 장소 섭외가 가장 어렵고 힘들다. 순수 아마추어 동아리인 우리 입장에서 전문 갤러리는 재정적으로 너무 부담스럽다. 다행히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계양역 같은 역사 내에서 전시회를 진행해 왔지만, 대관을 꺼려하는 경우도 있어서 항상 장소 섭외는 우리에게 큰 과제이다. 대관하게 되더라도 2주라는 기간은 작품을 보여주기에 너무 짧다. 19명의 회원이 1인당 5점의 작품을 출품하니, 최소 90여 점 이상의 작품이 전시되는 셈이다. 오랜 시간 공들여서 90여 점 이상을 전시하는데 2주는 너무나도 짧고 아쉽다.

Q. 재단의 지원을 받으면 도움이 되나요?
A. 매해 전시회를 준비할 때 개인 부담금이 적지 않게 소요되고, 전시회뿐만 아니라 대관비와 출사 혹은 장비 등 지출할 부분이 꽤 많다. 적은 비용이지만, 도록 발간 지원금은 사진집단 人의 전시회 준비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우리와 같은 아마추어 문화예술동아리에게 지원해주는 인천문화재단은 항상 고마운 존재다. 앞으로도 우리와 같은 많은 아마추어 문화예술동아리에 적극적이고 다양한 지원을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Q. 10년 동안 사진집단 人가 잘 유지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A. 가장 큰 원동력은 끈끈한 결속력과 유대감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진집단 人을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사진집단 人에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이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그래도 우리를 더욱 하나로 뭉치게 해준다. 평일에 활동할 수 있는 정규반과 직장인을 위한 직장반도 같이 운영하고 있다. 사진집단 人의 일원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다. 또한, 모든 회원은 전시회에 꼭 참여하도록 하는 데 이를 통해 소속원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고 활동할 수 있도록 서로서로 이끌어가는 것이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Q. 여러분들에게 사진과 사진집단 人은 어떠한 의미인가요?
A. 사진은 우리에게 있어 인생의 활력소이자, 나를 위한 유일한 시간이면서, 잊고 있던 나의 감성과 정서를 찾을 수 있는 소중한 도구다. 주부가 아닌 온전히 나만을 위한 나를 찾을 수 있도록 위로가 되어준다. 혼자 사진을 취미로 영유할 때는 자칫 게을러지거나 나태해질 수 있는데, 사진집단 人이라는 동아리 일원으로서 소속감과 의무감을 가지게 해 나를 잊지 않게 해준다. 그렇기에 사진집단 人은 아름다운 구속이며, 사람 냄새나는 모임이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사진집단 人이 지금까지 보내온 10년의 세월처럼 변함없이 지속하며 이 관계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첫 번째 전시회에서 최근 여덟 번째 전시회까지의 사진을 살펴보면 우리의 발전을 볼 수 있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혼자일 때 불가능했던 것들이 사진집단 人인 이라는 우리가 되어 가능했다. 앞으로도 그러길 바란다. 그리고 사진에 관심 있으시다면 주저하지 않고 우리 사진집단 人에 손을 내밀어 주셨으면 좋겠다. 젊은 분들도 환영이다.

각자의 카메라를 소중하게 들고 모인 사진집단 人에게 사진은 단순한 취미 그 이상이다. 처음에 그저 가족들을 잘 찍어주기 위해 시작했지만, 지금의 그녀들에게 사진은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닌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이 되었다. 몇 시간 동안 길게 이어지는 인터뷰에도 지치지 않고 사진과 사진집단 人을 이야기하는 그녀들의 눈빛은 젊은 날 소녀의 눈빛처럼 생기 있고 밝게 빛났다. 앞으로도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 사진을 찍고 싶다는 사진집단 人의 앞날을 응원한다.

 

취재 및 정리 : 시민기자 오지현




1930년대 예술가들의 숨결이 담긴 김억의 <망우초>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은 전국 유일의 공공 종합문학관입니다. 근대문학을 중심으로 한 근대 한국학 자료 약 3만 점을 소장하고 있는 콘텐츠 중심형 문학관이기도 합니다. 한국근대문학관은 근대문학(1890~1948)의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상설전시 외에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한 기획전시, 문학관의 희귀 소장품을 분기별로 전시하는 작은전시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 자료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근대문학관의 함태영 학예사가 소개하는 우리 근대문학의 소중한 자산도 만나보시고, 문학관에 직접 오셔서 한국 근대문학이 가진 의미와 매력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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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예술가들의 숨결이 담긴 김억의 <망우초>
 <망우초(忘憂草)>는 1934년 시인 안서(岸曙) 김억(金億)이 낸 한정판 번역시 선집(한성도서주식회사 초판)이다. 책 뒷면의 판권지를 보면 ‘망우초’의 ‘호화판’이라고 소개하고 한정판 25부를 발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집 한 권 안에 그림 9점과 글씨 6점, 모두 15점이 수록되어 있으며 모두 당대를 풍미한 문인과 화가들(춘원 이광수, 상허 이태준, 석영 안석주 등)이 직접 책 낱장 위에 그리고 쓴 것이다. 당시 안서 김억 선생이 책을 갖고 여러 예술가들을 찾아다니면서 빈 지면에 하나씩 작품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1930년대 한국 문학 및 미술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국내 유일본이다.




사진으로 나누는 일상의 이야기 <선린동 사진구락부>

 

햇볕 따스한 4월의 봄날. 차이나타운 해안성당 맞은편에 자리한 카페 모노그램에서 < 선린동 사진구락부(이하 구락부) >의 회원들을 만났다. 운 좋게도 기자가 < 구락부 >를 방문한 날은 생일파티가 열리는 날로, < 구락부 >의 많은 회원들이 모여 있었다. 인천문화재단에서 진행한 ‘화교학교 사진반 수업’을 계기로 만들어진 < 구락부 >는 올해로 2년째 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다양한 전시회와 아카이빙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서은미 사진작가를 비롯하여, < 구락부 >의 회장 손미영 씨, 총무 왕언리(앨리스) 씨, 화교학교의 선생님이자 < 구락부 >의 회원인 손세혜, 추계홍, 사서범 선생님을 만나 < 선린동 사진구락부 >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선린동 사진구락부 >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모임을 구성하게 된 계기와 현재 진행하고 있는 활동이 궁금하다.
서은미
2014년 인천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사업인 [무지개다리] 사업을 통해 사진반을 개설했다. 학생반, 인천대 유학생 반, 성인반의 3개 반이 있었고, 성인반은 화교학교의 졸업생과 선생님, 학부모 등이 함께했다. 사진반 수업이 진행되었던 2014년 12월에 아트 플랫폼에서 수업을 정리하는 전시가 있었고, 그 후에 성인반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모임을 진행하면서 이어져 오고 있다.
앨리스
한 달에 한 번, 매월 두 번째 수요일에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각자 한 달 동안 사진을 찍어오고, 그 사진을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일주일에 한 장 정도 사진을 찍어오고, 사진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한다. 얼마 전 벚꽃이 한창일 때는 같이 사진을 찍으러 나가기도 했다.

지난 해 <114년의 기억, 한국인천화교중산중소학>이라는 책을 출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출간한 계기와 과정이 궁금하다.
서은미
아카이빙을 통해 모은 자료집의 일종이다. 회원 중 대부분이 화교학교 출신이거나 선생님이기 때문에, 무지개다리사업의 일환으로 지원을 받으면서 화교학교의 역사와 기록을 아카이빙하기로 하고 1년여 동안 자료를 모았다. 작년 12월에 그 결과물로 책이 나온 것이다. 1902년에 화교학교가 설립된 이후로 2015년 당시 현재까지의 기록들을 모을 수 있었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전시회에는 주로 어떠한 작품을 담는가?
서은미
맨 처음 열었던 사진전은 < Re:선린동 2014 >로, 사진반 수업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진행되었다. 사진전 제목은 선린동을 다시 불러낸다는 의미를 가졌다. 그 직후 < 화교 생활사 사진전 >이라는 이름의 전시회를 진행했다. 인천대에서 진행된 전시회였는데 < 구락부 >의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서 사진을 모았다. 이후에도 세 명의 회원이 따로 사진전을 열기도 했고, < 114년의 기록 > 출판기념회 때도 사진전을 열었다. 작년 전시 때는 회원 네 명이 여행을 다니면서 찍은 사진으로 < 네 명의 여자가 찍은 사계여행 >이라는 이름의 전시회를 열었다. 재작년에 대만으로 사진 워크숍을 다녀왔는데, 올해는 몽골로 사진 워크숍을 가는 것을 계획 중에 있다.

다양한 예술분야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사진을 소통의 수단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사진에 주로 어떤 내용을 담는가?

서은미
우선은 재단에서 사진반 수업을 연 것이 첫 번째 계기였다. 화교학교의 선생님들이 한 분 두 분 모이기 시작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됐다.
손세혜
처음에는 재밌겠다는 생각만으로 시작했다. 전에는 핸드폰으로 좋아하는 풍경을 찍는 정도로만 사진을 찍었었는데, 사진을 배우고 나서는 달라졌다. 오히려 사진을 배운 이후에 사진을 찍는 장소가 훨씬 줄어들었다. 무엇을 찍고 싶다고, 사진을 찍으러 어디를 가야겠다고 마음은 먹지만, 현실적으로 멀리 가기는 힘들어서 아직까지는 근처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다.

지금껏 찍은 사진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은?
앨리스
몽골에서 찍었던 별 사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구락부>의 다른 회원과 함께 몽골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찍었던 별 사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서은미
손미영 회장님은 동네를 많이 돌아다닌다. 일상에서 골목의 요모조모를 사진에 많이 담는다. 손세혜, 추계홍, 사서범 회원은 화교학교 선생님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학생들의 모습을 많이 찍는다. 사서범 선생님은 매주 여행을 떠날 정도로 국내 곳곳을 여행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여행 다니면서 남긴 사진들이 인상적이다.

손미영 회장님은 동네 사진을 특히 많이 찍는다고 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손미영
원래 인천에서 화교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하고 대만으로 갔다. 대만과 중국에서 각각 10여년씩을 살고, 인천으로 돌아온 지 5년이 되었다. 인천으로 돌아와서 일을 쉬고 있었는데, 마침 사진반 수업이 열려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진을 잘 찍어야지라는 생각보다는 사람들과 같이 모여서 어울리는 것이 재미있어서 계속 활동을 했다. 사진반 수업을 들으면서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를 하려 고 동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동네 사진을 찍고 있다. 처음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인물의 모습을 담고 싶었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골목의 오래된 모습과 같이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을 찍는다. 사진을 찍는 것 뿐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좋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회원들과 언니 동생하며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것도 즐겁다.

추계홍 선생님과 사서범 선생님은 화교가 아니라 대만 분들이신데, 화교학교에 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추계홍
대만에서 대체복무를 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한국에 와서 1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군인 신분으로 1년간 복역을 했고, 제대한 이후에도 계속 남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서은미 선생님이 아들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것도 좋았고, 학교의 아이들도 정말 귀여워서 학교에 남게 되었다.
사서범
인터넷에서 모집공고를 보고 화교학교에 오게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은 적응이 되었고 편해졌다. 벌써 7년차 선생님이다.

서은미 작가님은 인천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데, 특별히 화교학교에 관심을 가지고 < 구락부 >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서은미
지금은 다 이사를 가버리고 없지만, 모교인 축현국민학교와 남인천여중이 이 동네에 있었다. 학창시절에 놀던 동네였던 것이다. 이 동네에서 지낸 물리적인 시간은 길지 않다. 하지만 이 동네에서 지냈던 추억들이 삶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동네에 대한 애착, 애증 같은 것들이 남아있다. < 인천 이지안 >이라는 개인작업을 진행할 때 인천의 다양한 사람들과 작업하면서 도시 ‘인천’의 특징을 잡으려고 시도했었다. 인천은 개항도시이고 중국, 일본 등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는데, 화교만이 이곳에 정착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화교 분들과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중, 문화다양성을 주제로 한 [무지개다리] 사업에 참여하여 화교학교에서 사진반 수업을 열게 되었다.

기자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지만 차이나타운이라는 말을 들으면 관광지 정도로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곳에 오랜 기간 화교사회가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화교학교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화교사회가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의 사진전과 활동은 화교사회를 알리며 지역사회에 소개하고 또 소통하고 있는데, <구락부>활동을 시작하기 전과 후에 변화한 점이 있는지?
손세혜
학교가 개방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인 것 같다.
서은미
그렇다. 작년 가을에 열린 제 3회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 화교 소학교 학생들이 찍은 영화의 시사회를 열었다.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영화제에서 많은 작품이 상영됐는데,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찍은 영화가 큰 주목을 받은 것이다. 올해도 영화수업이 진행되고, 학생들이 직접 촬영을 하고 편집까지 거쳐 영화를 만들 계획이다. 전시나 보도 덕에 화교학교가 많이 노출되고, 찾아오는 사람도 늘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지역사회가 화교학교나 화교 사회에 조금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이전에는 학교가 개방이 안 되어 있었나?
손세혜
이전에는 화교학교와 지역사회의 교류가 아예 없었다. 원래 폐쇄적인 사회였는데, 사진 수업을 통해 외부인이 화교학교에 처음 들어오게 되었고, 수업을 하면서 화교학교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을 외부에 전시를 하는 등의 교류가 생긴 것이다.
서은미
화교를 피사체로, 대상으로 외부인이 작업한 사진은 있었지만, 자체적으로 사진을 찍고 전시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더 큰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화교 사회 내부에서도 좋은 반응이 있었다. 학생들의 사진도 전시되었는데, 학생들의 사진들은 성인반의 사진보다도 더 다양한 것들을 담고 있었다. 화교 사회 내부에서 많은 어른들이 학생들의 작업 결과를 보면서 “기특하다, 기대 이상이다”하며 좋아했고, 영화제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결과물들이 있었기에 계속해서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화교학교가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꼭 <구락부>의 활동 덕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화교학교와 화교사회가 이 전보다는 더 많이 알려지고 소통하고 있는 데에 일조한 것 같아 뿌듯하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사진전이 있는가?
서은미
1년에 한 번은 사진전을 열자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작년에 화교학교의 역사에 대한 아카이빙으로 사진을 모았던 것처럼 ‘화교 생활사 아카이빙’을 계획하고 있다. 14년도에 생활사 사진 공모전 때문에 모아놓은 사진들이 있어서 더 많은 자료들을 추가해 책을 발간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 선린동 사진구락부 >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앨리스
다른 회원들보다 늦게 참여하게 되었지만, 함께 사진을 찍고 사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이 아닌 다른 일상의 이야기도 나누는 것이 참 즐겁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 말고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 구락부 >에서 좋은 인연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 인연을 통해 또 다른 인연들도 만나게 되었다.
추계홍
재미있다.
사서범
한국에서 친구들이 많지 않았는데, <구락부>에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사진도 찍으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다.
손세혜
제일 많이 놀 수 있는 나이에 한국에서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곳에서 지내는 생활이 매우 단조로웠다. 대학친구들도 다 대만에 있고, 집과 학교만을 오갔기 때문에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생활이 아니었다. <구락부>에서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나게 되었고, 여가 활동을 전보다 더 많이 즐기게 되었다. 심심할 때면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고 오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사진기를 메고 밖으로 나가거나, 사진전을 보러가거나, 사진을 찍기 위해 좋은 장소들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손미영
이 모임이 끝까지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정말 좋다.
서은미
처음 사진반 수업을 기획하고 진행할 때는, 폐쇄적인 이 곳의 특성상 참가자 모집도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모임이 이어져오고 있고, < 구락부 > 의 회원들이 비타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주말 내내 심하게 앓았는데, < 구락부 > 모임에 오면 기운을 차리게 된다. 한 달에 한 번 정기모임 말고도 수시로 모인다. 오늘처럼 회원의 생일이 있으면 챙기기도 하고, 이 곳(카페 모노그램)에서 함께 커피수업도 듣는다. 일상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 선린동 사진구락부 >는 사진을 통해 화교사회를 지역사회에 소개하는 모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직접 만나본 < 구락부 >의 회원들에게서 사진에 대한 더 큰 열정과 애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순히 화교사회를 소개하는 수단으로 사진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통해 일상을 다시 발견하고, 그 일상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고 있었다. 재단에서 시작한 작은 수업 하나가 많은 사람의 일상을 변화시켰고, 이제 그들에게 사진은 소중한 일상이자 세상과의 통로로 자리매김했다. 사진을 통해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는 < 선린동 사진구락부 >,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인터뷰 및 정리 인천문화통신 시민기자 김진아




어린이를 독자로 한 최초의 월간지 <아이들보이>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은 전국 유일의 공공 종합문학관입니다. 근대문학을 중심으로 한 근대 한국학 자료 약 3만 점을 소장하고 있는 콘텐츠 중심형 문학관이기도 합니다. 한국근대문학관은 근대문학(1890~1948)의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상설전시 외에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한 기획전시, 문학관의 희귀 소장품을 분기별로 전시하는 작은전시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 자료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근대문학관의 함태영 학예사가 소개하는 우리 근대문학의 소중한 자산도 만나보시고, 문학관에 직접 오셔서 한국 근대문학이 가진 의미와 매력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어린이를 독자로 한 최초의 월간지 <아이들보이>
육당 최남선이 1913년 9월 창간한 월간 잡지이다. 어린이를 독자로 한 최초의 월간지이며, “아동잡지”란 말도 이 잡지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1914년 10월까지 총 13호가 발행되었으며, 매호 50쪽 분량이다. 이 잡지는 근대 잡지 중 가장 화려하고 강렬한 표지 디자인을 특징으로 하는데, 조선왕실 최후의 화원(畵員)인 심전 안중식(1861~1919)의 작품이다. 옛날이야기와 우화, 교훈적이고 역사적인 이야기, 화보사진, 서양 동화 번역, 과학상식, 만화, 퀴즈, 독자투고 등이 주 내용이다. 1910년대 출판문화나 한국 근대 아동문학 및 근대 동화의 초창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수동적 다양성에서 창조적 다양성으로

 

우리나라 도시들 가운데 서울을 빼놓고 인천만큼 거대하고 현기증 나는 변화를 겪어온 도시는 없을 듯싶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그러니까 지금부터 110여 년 전, 인천의 인구는 고작 2만5천 명을 웃도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개항 이후에도 한 동안 자그만 항구도시에 불과했던 셈이다. 개항 전에는 그야말로 한적한 어촌 마을이었을 것이다. 그런 곳이 지금은 300만 인구에 육박하는 거대도시가 되었다.

100년 사이에 인구가 100배로 증가했다. 이 사실 속에는 인천의 모습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듯하다. 이 정도의 폭발적 증가는 다른 곳에서 대량의 인구가 끊임없이 유입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주지하다시피 인천에는 전국 각지에서 이주해 터를 잡은 주민들이 또는 그들의 2세, 3세가 원주민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특정지역 출신이 많기는 하지만,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까지 포함하여 지역적 뿌리가 다른 사람들이 이웃이거나 동료인 곳이 바로 이 도시이다. 다른 어느 도시보다 원주민의 텃세(?)가 없는 것은 이런 까닭이 아닐까 한다. 뿐만 아니라 개항기에는 일본인들이 흘러넘쳤고 서양인들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한다. 중국인들은 많이 떠나버렸지만 아직도 한편에서 후손들이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최근에는 공단을 중심으로 상당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었다. 송도신도시에선 조깅을 즐기는 외국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인천이란 곳은 다양한 출신과 국적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정착한 (물론 한동안 머물다 떠나기도 했지만) 다원적 도시이다.

도시의 팽창과 격변은 주민뿐 아니라 인천의 조감도에도 참으로 다채로운 색깔과 모습을 입혀 주었다. 바다야 원래 인천의 자랑이었지만, 지금은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섬과 대문짝만한 강화도까지(강화도와 함께 선사시대와 고려의 유산까지) 인천에 편입되었다. 인천은 대지와 바다와 섬을 두루 갖춘 행운의 도시이다. 오래된 역사뿐 아니라 최근의 역사도 이곳엔 차곡차곡 쌓여 있다. 육이오 전쟁 통에 대다수가 파괴되기는 했지만,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의 유산인 서구식 석조건물과 일본식 적산가옥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중국 붐을 타고 차이나타운에는 중국풍의 건물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산업화 시대를 상징하는 공장들이 여전히 도시 곳곳에 군락을 이루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다는 최첨단 빌딩 동북아무역센터가 위용을 자랑한다. 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길다는 인천대교를 건너면 세계적 수준의 인천국제공항이 있다. 그러나 구도심 뒤편에는 좁은 골목 양옆으로 낡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뜻하는 것은 한 마디로 다양성이 아닌가 한다. 인천을 구성하는 주민도 다양하고 풍경도 참으로 다양하다. 이렇게 풍부한 다양성은 국내 어떤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서울특별시는 특별하니까 예외로 하자). 그런데 다양성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문화적 창조의 비옥한 토양이자 원동력이 되지만,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갈등과 분규의 원인이 되거나 기껏해야 이질적 요소들이 지리멸렬하게 병존하는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인천의 다양성은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사실 이 도시의 혼란스런 모습은 시민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외부의 힘에 의해 타의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서울 중심의 논리에서 파생된 현상, 다시 말해 서울 집중화의 부대현상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그러니까 역사와 지정학적 조건에 따른 다소간 우연적 산물인 셈이다.

이유가 어떠하든 인천은 다양한 출신과 문화가 공존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지금은 이 다양성을 도시의 정체성으로 수용하면서 다양성의 긍정적 측면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본다. 이질적 요소가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도시,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창조적으로 공존하는 역동적 도시가 결국 인천이 지향해야 할 미래상일 것이다. 수동적, 종속적 다양성을 창조적 다양성으로 변환하는 이 어려운 과업을 누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방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건강하고 성숙한 시민의식이 없으면 이러한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시민사회, 지역의 지도층과 엘리트, 교육기관이 무엇보다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의제가 아닌가 한다.

최성을 인천대학교 총장




혜미씨와 금희씨

 

 

지난 4월 8일(금)에는 좀 바빴다. 정보산업고에서 사전투표하고 상경해서 인사동 여자만에서 구중서, 정희성 두 선배를 모시고 즐거운 점심을 들고 여자만 앞 인사동사람들에서 차도 한잔 하노라니 벌써 오후 다섯시, 일정 때문에 먼저 일어서 낙원표구에 가 표구 맡기고 6시에는 홍대 앞 카페 꼼마에서 열린 문학동네 시상식에 참석했다. 제자 김금희 군이 제7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덕으로 오랜만에 젊은 문단 공기를 쐰 셈인데 예정에 없는 즉석 축사까지 하곤 대학 은사 정병욱 선생의 사모님이 수를 다하셨다는 전갈에 강남성모병원으로 문상을 갔다. 빈소에서 임형택 선배를 비롯한 대학 선후배들과 담소하다가 길이 멀어 10시반쯤 서둘러 인천 길을 더듬어 귀가했다.

그뒤 시상식에서 받은 수상작품집을 틈틈이 뒤적거리다가 장강명의 소설 「알바생 자르기」에서 나도 모르게 멈췄다. 칙릿(chick lit)의 기풍이 물씬한 이 단편 역시 대도시 서울의 젊은 직장여성들을 생생하게 포착할 줄 아는 작가답게 은영(최과장)과 혜미(비정규직)의 밀당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갑을관계임에도 두 여성이 상투형으로 단일화되지도 않았거니와, 특히 후자의 생존술은 놀랍게 치밀해서 자칫 밉상으로 보이기도 할 만큼 리얼하다. 그런데 그녀는 인천에 산다. 서두에 “혜미 씨는 집이 멀어요” 할 때 웬지 불길하더니 기어코 “혜미 씨가 인천에서 1호선 타고 오거든요”에 이르러 하릴없다. 야간대학을 나온 비정규직 신세로 퇴근하면 종로에 있는 영어학원에 출석해야 하는 이 시대 청춘의 평균적 초상! 그녀가 바로 인천인 것이다.

서두에 어느 날의 서울 일정을 개관했지만 새삼 인천과 서울의 문화적 거리를 실감한 바, 상경하기 전 투표하러 들른 정보산업고는 옛 인천고 자리다. 볼품없는 파싸드 너머에 엎드린 정보산업고를 보니 절로 인천고 교사(校舍)가 그립다. 불 타기 전 송림학교와 마주본 인천고 역시 붉은 벽돌 집이었다. 그나마 지금도 여전한 창영학교가 위안이다. 붉은 벽돌의 이 세 학교가 배다리 철교를 마주보고 건재했다면 절로 배다리 일대가 향기로웠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제는 더 이상 근대건축물들을 부수지 말아야 한다. 이러구러 상경해 인사동에 오니 더욱 그렇던 것인데, 내가 가져간 두점의 글씨(廣山과 南田)를 알아보고 장황을 추천하는 표구사 주인의 응대에 내심 놀랬다. 빈소에서 나눈 대화조차 죄송하지만 재미있고 유익했으니 긴 하루가 길지 않았다.

오늘의 인천은 어디에 있는가? 외형적으로는 대구를 넘어 한국 제3의 도시라고 자랑해도, 과연 인천은 제3의 도시일까? 대구보다 아니 광주보다도 인천의 위치에너지는 낮다. 정치적 후순위는 그렇다쳐도 문화는 어떤가? 정치는 낮은데 문화가 높을 수도 있겠지만 인천은 아니다. 인천정치의 현주소는 인천문화의 현주소다.

이 곤경에서 벗어날 길은 어디 있을까? 갑자기 문화 문화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아시다시피 문화에 비약은 없다. 교양의 원말인 독일어 Bildung이 ‘형성’이듯 일상의 지속적인 축적 위에서 문화로 가는 길이 스스로 열릴 것이다. 그러니 예전에는 뭣도 있었고 또 뭣도 있었고 또 뭣도 있었는데, 하며 자대(自大)하지 말 일이다. 자대하면 곧 지금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자소(自小)하게 되니 헛애만 키일 뿐이다. 옛일을 아는 건 물론 좋은데, 그게 오늘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그저 복고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공연히 사라진 옛것을 애도하지 말고 혜미 씨를 여여(如如)히 즉 지금의 간난을 포옹하고 미래로 투척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그리고 그 도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혜미 씨가 등장하는 이 작품집의 맨앞에 인천 작가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가 위치한다. 부산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란 그는 인천을 살며 인천을 사유한다. 혜미 씨이면서 혜미 씨가 아닌 우리의 김금희들이 바로 인천 문화의 오늘이요 내일이 아닐까.

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 한국작가회의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