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은 도시는 ‘좋은 문화’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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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도시 인천’ 브랜딩 작업이 한창이다. 인천시가 ‘인천 음악’을 발굴 중이고, 부평은 ‘음악도시 부평’을 의제 설정하며 국비 사업까지 추진 중이다. 이는 인천에서, 혹은 인천사람들로부터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비롯됐기 때문이다. 실은 대중음악뿐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 민중가요 역시 인천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전역에 확산됐다.

얼마 전 만난 김홍탁 씨는 기자에게 ‘인천이 왜 음악도시일 수밖에 없는가’란 질문에 해답을 안겨주었다. 인천에서 낳고 자란 그가 기타를 처음 접한 때는 동산중학교 2년 때였다. 신포동에 살던 그는 친구 집 2층에 세들어 사는 한 미군의 기타소리에 반해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동산고 2학년 때부터는 신포동의 한 미군클럽에서 연주를 했고, 그 소문이 서울에까지 퍼져 서울에서 음악인을 꿈꾸던 가수 윤향기와 같은 동년배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그룹사운드인 ‘키보이스’ 였다. 이후 그는 신중현의 대척점에 서서 우리나라 로큰롤음악을 개척했다. 몇 년 전 만난 가수 송창식 씨도 마찬가지였다. 신흥동에 살던 그는 신포동 거리를 자주 오갔고, 미군클럽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들으며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다. 그런 인천에서의 성장은 훗날 그를 ‘세시봉’의 리더로 만들었다. 송창식은 이후 솔로로 독립하면서 팝송에 우리 전통음악을 접목한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음악을 하게 된 이유에 ‘인천’이라는 공간이 자양분처럼 깔려 있다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은 어떨까. 인천시립교향악단 초대 지휘자인 김중석 선생은 우리나라 클래식의 효시가 ‘인천’이라고 말해줬다. 아펜젤러가 선교를 위해 인천에 들어오며 건반악기를 가져왔고, 교회음악을 중심으로 클래식 음악인들이 성장했다는 것. 그렇게 성장한 사람들이 서울로 가서 활동하며 클래식음악을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그 역시 어린 시절 교회음악을 접하며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꿈을 키웠다.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백건우 씨도 청소년 시절에 인천에서 음악을 연주했을 정도로 인천은 클래식음악의 시발지였다. 민중가요 역시 70년대 후반 부평공단 등 인천의 공단을 중심으로 태동한 음악장르라 할 수 있다. 김민기 씨의 ‘상록수’, 박영근 시인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비롯해 많은 민중가요가 인천에서 태어나 우리나라 민주화의 씨를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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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 ‘세계 기록문화의 보고’라는 사실은 새로울 것도 없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200여 년 앞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인 <상정예문>이 인천에서 나왔고, 세계 최고 목판인쇄물인 ‘팔만대장경’이 인천에서 판각됐다. 활자의 발명은 인류의 문명을 앞당기고 지식을 크게 확산시킨 ‘제 1의 정보혁명’이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인천에 들어서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음악’과 ‘기록문화유산’을 비롯해 유·무형의 역사·문화적 가치는 너무 많아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인천이 이처럼 문화적 가치로 출렁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천이 우리나라의 ‘인후’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과거 고려왕조가 수도로 천도했던 것이나, 조선의 개항지였을 만큼 인천은 요지였다. 해불양수. 인천은 한편 포용의 땅,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유독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인천을 삶의 터전으로 찾아온 것은 바다가 육지를 끌어안듯 안아주고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사람들은 그 어느 도시보다 개방적인 인천의 문화에 동화되며, 혹은 새로운 문화를 퍼뜨리며 ‘다양성의 문화’를 빚어냈고 그 과정에서 찬란한 문화유산들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인천의 문화적 가치를 방치한 채 전략적으로 접근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인천시가 현재 ‘정체성 찾기’ , ‘가치 재창조’ 사업을 추진 중이나 열정과 노력보다는 구호가 앞서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인천만의 가치를 발굴하고, 그 가치를 인천시민들이 맘껏 향유해 ‘좋은 도시에 살아서 행복하다’는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해선 ‘문화’를 우선해야 한다. ‘문화’의 가치를 중시할 때 그 문화의 향기로 인해 모든 분야에서 시민 삶의 질은 저절로 높아질 것이다.

김진국 / 인천일보 문화체육부 부국장




함께하는 업사이클링으로 세상을 바꾸다 – 모두랑 업사이클링 공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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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사이클링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업사이클링(Up-cyling)은 upgrade + recycling의 합성어로 기존의 리사이클링보다 한층 더 발전된 보다 더 적극적인 환경보호 활동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폐소방호스로 가방을 만드는 것처럼 기존의 물건을 새롭게 재탄생시켜 다시 한 번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효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에 제 2의 삶을 다시 주는 것이죠. 인천, 특히 부평을 중심으로 가죽, 한지 등을 활용하여 업사이클링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모두랑 업사이클링 공작소〉를 이끄는 가죽공예가 홍정기 씨입니다. 업사이클링뿐만 아니라 지역 활성화를 위해 24시간 쉼없이 뛰고 있는 그를 삼산1동 주민센터에서 만나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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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홍정기 씨가 생각하는 업사이클링은 무엇인가요?
A. 간단하게 말하면, 업사이클링은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버려지는 제품을 자원으로써 다시 한 번 재활용하는 차원을 넘어서 실용성과 디자인을 더해서 그 자원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고 이끌어내는 작업입니다.

Q. 업사이클링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A.
가죽을 활용할 때는 정형화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가죽을 쓰는데, 제품의 본을 뜨고 남은 가죽은 대부분 처분해야 합니다. 상처도 있고 주름도 있고 농장에서 찍은 마크도 있어서 어떻게 보면 더는 상품으로 쓸 수 없는 가죽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처리 비용이 만만치 않아요. 상품을 많이 만드는 가죽 소파 공장은 1년 동안 6백만 원에서 최대 1천만 원까지 비용이 드는데, 비용 부담이 상당합니다. 가죽공장 입장에선 막대한 처리비용의 부담을 덜고, 우리는 가죽을 선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가죽은 한 번 더 사용하자 하는 취지였습니다. 회의감이 들어서 인조가죽을 만들어보기도 했고, 그나마 만들어지는 가죽을 최대한 활용해보자해서 업사이클링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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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공작소에서는 어떤 종류의 업사이클링을 하나요?
A. 가죽은 물론이고 다른 강사들과 함께 한지공예도 하고 비누, 초 같은 것도 만듭니다. 한지를 활용해서 가구를 만드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분들도 남은 한지가 아까워서 가지고 계시지만 실제로 활용하지 않고 결국 다 버리게 됩니다. 이런 한지들을 활용해서 손거울이나 명함 케이스 같은 소품을 만들기도 하고, 손거울을 만들 때 보통은 두꺼운 종이를 본으로 쓰는데 이것 또한 버려진 폐목을 재활용하는 겁니다. 비누는 호텔에서 사용하는 일회용 비누들을 다시 녹여서 재활용하고, 초도 비누처럼 사용하던 초를 다시 녹여서 재활용하는 데 음료수 캔이나 다 쓴 병에 넣어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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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런 강습이 자주 있나요?
A. 본업으로 가죽공예 강의를 한 건 10년 정도 되고 복지관이나 돌봄 교실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건 5년 정도 됩니다. 주민센터나 구청, 학교, 노인정 등에 가서 재능기부 차원에서 강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군대 내에서 진행하는 경우도 있고, 다양한 곳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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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업사이클링 강습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처음엔 혼자 직접 만든 업사이클링 작품을 작품 1개당 천원도 안 하는 가격으로 저렴하게 판매했고, 판매를 통해 얻은 수익은 기부했습니다. 업사이클링을 알리는 활동을 하면서 기부도 하자는 목적이었죠. 하지만 혼자서 업사이클링을 알리는 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체감해서 강습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Q. 작품 전시회도 할 텐데 기억에 남는 경험을 하신 적이 있나요?
A. 가죽공예가로서 개인 전시회는 꾸준히 열지만, 강습 전시회는 정기적으로 진행하지 않고 있어요. 전시회를 진행하려면, 수강생들이 전시회 비용을 함께 부담해야 해서 모든 수강생의 의견을 취합해야 하기 때문이죠. 정기적인 전시회는 열지 않고 결과 발표회처럼 진행하는 편입니다. 서울에 놀러왔다가 우연히 내 전시회를 찾은 제주도 청년이 있었는데, 가죽공예를 배우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실제로 그 청년은 제주도와 인천을 오가며 가죽공예를 배웠고, 제주도에서 가죽공예 일을 하게 됐어요. 전시를 보러 왔다가 학교에서 수업을 해달라고 부탁했던 선생님도 있었어요. 강남에 있는 학교라 거리도 멀고 청소년 수업은 진행해본 적이 없어서 망설였지만, 선생님의 부탁에 강습을 하게 됐죠. 그걸 계기로 청소년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고, 중학교 이상의 청소년들과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전시가 맺어준 신기한 인연들이죠. 
 
6Q. 업사이클링 강습을 진행하면서 보람을 많이 느끼시겠어요.
A. 처음에는 업사이클링을 알리기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데서 큰 보람을 느꼈는데 지금은 소소한 곳에서 뿌듯함을 느끼고 있어요. 예를 들면, 어렸을 때 업사이클링을 배웠던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 같은 거죠. 친구들에게 업사이클링을 소개하고 자신감있게 이야기하는 걸 보면 보람을 느껴요. 가족 간의 소통 부재를 업사이클링으로 극복하고 변화한 가족도 만났어요. 아이와 엄마가 각각 수업을 들었는데 서로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알게 된 후에 대화의 소재가 생겼다고 해요. 맞벌이 가정이라 어려운 부분이 많았는데 이 기회를 계기로 부모와 자녀 간에 대화도 많아지고 더 친밀해졌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작지만 소소하게 일어나는 변화들이 주는 힘 덕에 계속해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Q. 고민스러운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A. 재정적인 부담이 있죠. 인천문화재단에 지원을 신청하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구요. 인근학교와 주민센터 등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대부분 재능기부로 하고 있어요. 재료비를 받을 때도 있지만, 공작소에서 가져오는 재료로 수업을 하다보니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행히 올해에는 재단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업사이클링 이외에도 지역 활동으로 청년문화상점의 고문 이사부터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업사이클링, 지역 활동, 가죽공예까지 하루가 바쁩니다.
  
Q. 직접 만드신 업사이클링 작품은 얼마나 되나요? 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A.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만드는 것도 의미있지만, 한 가지를 진화시키는 형태를 좋아하다보니 작품 수는 20여개 정도로 많지는 않습니다. 본업이자 주된 활동이 가죽공예여서 그런지 소파 제작용 가죽을 활용해 만드는 작품에 가장 애착이 갑니다. 작품을 만들 때, 중요하게 여기는 포인트는 작품을 단순하게 만드는 겁니다. 멋도 시각적인 차원에서 중요하지만, 멋보다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여깁니다.

‘수적천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물방울이라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단단한 돌을 뚫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죽공예가 홍정기 씨의 작은 고민에서 시작한 업사이클링은 본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줬습니다. 어떤 이는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되었고 어떤 이는 가족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까요. 홍정기 씨 또한 가죽공예가이며 업사이클링 선생님인 동시에 인천과 부평의 발전을 위해 활동하는 지역 활동가이자 기획가라는 다양한 모습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입니다. 혼자 작품을 만들어 판매하며 작게 시작한 업사이클링이라는 작은 물방울은 한 방울에서 멈추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을 바꾸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나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물방울은 무엇일까?

인터뷰 진행 및 정리 / 시민기자 오지현




서시(序詩)의 시인 윤동주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은 전국 유일의 공공 종합문학관입니다. 근대문학을 중심으로 한 근대 한국학 자료 약 3만 점을 소장하고 있는 콘텐츠 중심형 문학관이기도 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 자료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문학관에 직접 오셔서 한국 근대문학이 가진 의미와 매력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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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시(序詩)」의 시인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윤동주의 유고시집으로 1955년 간행된 재판본이다. 연희전문 재학 시절 은사인 이양하가 일제 검열의 통과 여부를 걱정하여 출간을 만류해 시인의 생전에는 시집이 출판되지 못했다. 광복 후 동생 윤일주가 형 윤동주의 시 31편을 골라 초간본(1948)을 간행하였으며, 1955년 출판된 증보판에는 윤동주의 친구였던 정병욱의 자문을 바탕으로 총 93편의 시를 실었다. 5부로 구성된 증보판에는 「서시」가 시집의 첫머리에 실려 있다.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던 해방기~1950년대에 재판을 찍었다는 사실은 윤동주가 일찍부터 큰 인기를 끌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 책은 현재 복각본으로 다시 출판되어 큰 인기를 얻고 있는데, 윤동주에 큰 관심을 갖게 한 커다란 계기를 제공한 책이다.

함태영 / 한국근대문학관 학예사




Would you be my model? 나의 모델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작가 서해영

 

Would you be my model? 나의 모델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작가 서해영

1작가는 여행용 가방을 끌고 거리로 나간다. 가방 안에는 흙과 석고, 조각을 위한 재료들이 담겨있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두상을 만든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던 거리의 예술가들과 조금 다른 점은 돈을 받지도, 만들어진 두상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두상을 만드는 시간조차 일정하게 정해두지 않으며, 5분이든 1시간이든 모델로 참여하는 사람이 원하는 시간 안에 조각을 만든다. 완성된 조각은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찍어 모델과 한 장씩 나눠 갖은 후 부숴버리고 이들이 나눈 시간과 과정은 사진이나 영상과 같은 기록으로만 남는다. 서해영 작가가 지난 3개월 동안 호주 시드니에 머물며 진행한 “Would you be my model?”(2015) 프로젝트다. 이 작업은 다양한 문화, 다른 언어를 갖은 사람들과 시간이나 기억을 공유하는 프로젝트로 불특정 다수에 가까운 개인과 느슨하게 ‘관계 맺기’의 과정을 보여준다. 작가는 본인이 마주한 특정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과 작업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며 우연처럼 불거지는 화학작용을 만들어 낸다.
작가 서해영은 <산에서 조각하기> , <여성미술가를 위한 도구 만들기> 등 관념적이고 결과중심적인 조각을 거부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통해 전통적인 매체의 한계와 가능성을 실험해오고 있다. “Would you be my model?” 프로젝트는 2016년 8월 말부터 9월 말까지 진행되는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 참여전시에서 매주 3일간 진행될 예정이고 누구나 작가의 모델이 될 수 있다.

2Q. 거리에서 사람들의 두상조각을 만들면 참여한 사람이 돈을 주고 갖고 싶어 하거나, 작가로서도 없애지 않고 남기고 싶을 것 같은데?
시드니에서 거리 조각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중에 하나가 “How much?(얼마에요?)”였다. 나는 그때마다 “It’s free~!(공짜)”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대신 조각을 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아쉬워하며 지나갔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 기뻐하며 한참을 기다리면서도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 사실, 대부분의 거리예술가들은 자신의 재능과 예술행위를 돈으로 보상받고, 사람들은 돈으로 그 예술의 가치를 인정(표현)하기 때문에 나의 거리예술은 좀 이상한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돈’을 교환의 가치로 두지 않았던 것은 내가 모델을 만나고 조각을 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 동등한 관계에서의 ‘소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시드니의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흥미로웠고 그 얼굴 속에 담긴 삶의 이야기를 내가 할 수 있는 ‘조각’을 통해서 담아내고 싶었다. 만약 내가 돈을 받고 조각을 만들었다면 그들을 더 닮게 만드는 일에만 열중해야 했을 것이고 자유로운 대화는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대신 즉석사진으로 기억을 공유하고자 했다. 물론, 몇 개의 초상조각은 석고캐스팅을 했다. 작업의 내용과는 모순되지만 내가 만든 것을 부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었고 하루에 1개의 두상은 뜨기 시작했다. 시드니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조각 총 10개가 겉틀 상태로 남겨져 있고 인천아트플랫폼 전시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초상조각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인천은 한국이지만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서울과는 매우 다른 곳이라고 느껴진다. 이주민의 역사가 깊고 그만큼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간다. 인천아트플랫폼이 위치한 중구와 그 주변을 여행하면서 내가 잠시 머무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각으로 담아내고 싶다. 이번에는 인천의 여러 장소에서 사람들의 초상조각을 만들고, 전시장에서 그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업을 할 계획이다.

Q. 기존의 관념적이고 결과중심적인 조각을 거부하는 반모더니즘적 성격이 눈에 띈다. 이런 작업을 진행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오랫동안 전통적인 조각교육을 받아오면서 관념적이고 결과중심의 획일적인 작업방식에 한계를 느껴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조각은 무엇일까” , “현대 조각의 ‘조각’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가지고, 나 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조건과 경험을 반영하는 과정 중심의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면서 새로운 조각의 방법론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Q. 작업 과정에 중심을 둔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하고 있는데 특히 <산에서 조각하기>는 그 의도를 잘 전달하고 있는 것 같다. 작업에 대해 설명해 달라.
배낭을 꾸려 내가 짊어질 수 있는 최대 무게의 작업재료, 도구, 옷과 음식 등을 꾸려 산에 올라가서 산의 풍경, 돌멩이들을 조각으로 만든다. 스스로 운반이 가능한 재료들을 가지고 산에 올라 조각을 하는 작업을 하는 것은 나의 신체적인 조건에 의해 재료의 양과 내용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관습적인 조각의 방법론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산에서 조각하기> 등의 작업들을 통해 ‘등산’이라는 일상적인 노동과 ‘조각하기’라는 미술의 노동을 결합한다. 즉, 내 삶에서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던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상호연결할 수 있게 만들고, 순수한 예술의 영역을 지지하는 전통적 조각의 입장을 위반하는 것이다.
하나의 산 조각을 만들기 위해서는 두 번의 산행이 필요하다. 첫 번째 산행에서 주로 작업 장소를 찾아 재료를 옮겨놓는다. 두 번째 산행에서 추가로 흙과 석고, 물을 운반한 후에 흙으로 조각을 만든다. 조각 과정은 카메라 앵글을 이용해 조각이 실제의 산 풍경을 가리는 형식으로 촬영된다. 카메라 앵글 안에 들어오는 실제 산의 풍경을 흙으로 가리는 방식으로 만든다. 흙 작업은 석고로 겉틀을 뜬 다음, 석고 틀만 가지고 산을 내려온다. 흙 작업에 썼던 흙은 수풀 속에 버리고, 작업실에 가지고 내려온 틀은 다른 물질로 캐스팅한다. 산에서는 재료, 공간, 날씨, 운반, 관찰의 한계에 의해 제한된 조각의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존의 ‘멋진’ 조각이 아니라, 개인의 구체적인 조건과 한계가 반영된 ‘현실적인’ 조각을 만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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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구름을 잡기 위한 도구>와 <여성미술가를 위한 도구 만들기>는 작가가 사용하거나 만지는 도구들을 적극적인 형태로 변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같다. 작업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구름을 잡기 위한 도구>는 인공암벽을 즐겨 하는 내 일상적인 취미활동에서 시작됐다. 인공암벽에 붙어있는 홀드(오르기 위해 만들어진 돌기, 덩어리)를 유기적인 형태로 만들어 비어있는 공간에 설치한다. 이 홀드들은 제작 과정에서 내 손에만 맞게 만들어졌다. 내가 만든 이 홀드들은 도구의 기능과 조각의 형식을 결합하는 방식이다. 완성된 나만의 도구(홀드)들은 흘러가는 구름영상과 중첩하여 암벽타기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벽에 설치했다.
도구와 조각을 결합하는 방식은 <여성미술가를 위한 도구 만들기>라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여성 조각가인 나 자신에게 필요한 도구를 만드는 것으로, 대나무 자나 기타 물건을 이용하여 헤라(조소도구)등을 만드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물건 본래의 기능은 조각을 위한 도구라는 새로운 기능으로 전환되고,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했던 재료와 도구가 조각의 최종적인 결과물로 등장하면서 전형적인 조각의 상황을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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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여성미술가를 위한 도구 만들기> 시리즈는 다양한 형태의 협업과 커뮤니티 과정으로 발전시켜 나갔는데 커뮤니티 작업이 궁금하다.
기존의 획일화된 작업 환경에 문제를 느끼고 여성의 조건과 상황에 맞는 대안적인 작업환경을 만들어보고자 실제 협업을 시도하고 이를 위한 협업의 도구를 제작했다. 다양한 조건과 상황에 놓여있는 여성들과 협업을 한다면, 조금 더 여성의 다양한 조건과 생각들을 반영한 실질적인 도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온․오프라인으로 7명의 여성들을 모집해 한 달 동안 하나의 타피스트리(Tapestry)를 만들어 나갔다. 여성들의 협업을 위해서는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게 만드는 도구가 필요함을 느꼈고, ‘소통’을 위한 도구로 ‘타피 원형 틀’을 만들었다. 이 틀은 원형테이블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 참여자들 간의 물리적인 만남을 갖게 하고, 그 안에서 많은 대화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작업적인 부분에서도 서로 영역에 영향을 끼치는 원형구조와 릴레이 타피스트리 작업방식으로 서로간의 합의점을 찾아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 타피스트리(Tapestry): 손으로 직물을 짜서 이미지를 만드는 섬유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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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천아트플랫폼에서의 작업은 어떻게 진행할 계획인지?
엄마의 고향이 인천 섬이다. 그곳은 ‘백아도’라는 외딴섬으로 인천에서 덕적도로, 덕적도에서 통통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백아도는 누구나 알만한 관광지도 아니고 활발한 어촌마을도 아니며 이제는 군사지역도 아닌 섬이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그곳은 매우 쓸쓸했던 것 같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인적이 많지 않은 엄마의 고향, 백아도를 과거와는 다른 관점, 다른 입장으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고, 엄마가 기억하는 그곳의 모습과 지금 내가 바라본 그곳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고 싶었다. 이러한 나의 관심이 문화적 혜택으로부터 소외된 그곳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작은 시도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천아트플랫폼에 머무는 기간 동안 인천의 다양한 지역의 모습을 작가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보여주는 일을 해보고 싶다.

정리 : 오혜미 / 인천아트플랫폼 큐레이터




불편한 세상을 불편하게 기록하는 작가 ‘최현석’

 

불편한 세상을 불편하게 기록하는 작가 ‘최현석’
스스로 붓을 놓는 날이 오기를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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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마틴 핸드포드의 『월리를 찾아라』라는 얇고 큰 책자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월리와 비슷하게 생긴 인물들이 손톱보다도 작은 크기로 빼곡하게 차여 있고, 월리보다도 더 월리 같은 그 수많은 인물들은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분주하게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우선 책을 펴면 독자는 월리가 놓인 장소를 눈으로 확인한 후, 그 속의 사건들을 한곳 한곳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번 훑고 나서면 이제야 정신을 차리게 된다. ‘나는 월리를 빨리 찾아야 돼!’ 최현석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큰 화폭 앞에 서면 작가가 그린 장소와 상황을 파악해보기도 전에 알록달록한 색채들과 섬세하게 그려진 대상들에 현혹되어 버린다. 그리고 미디어 매체를 통해 알고 있는 사건들이 화면에 등장함으로써, 관람자는 작품 가까이에서 흥미를 갖고 그림 속 상황들을 쉽게 대하길 시작한다. 그러다 한참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아차!’ 알게 된다. 내가 보고 있는 저 그림이 편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기록화라는 것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화려하고 뛰어난 언변으로 가득 찬 미디어 매체를 쉽게 접하는 오늘날, 우리는 미디어 신봉자가 되어가고 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게 되는 그 사건들은 개인의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고 미디어가 전해주는 대로 입력되기도 한다. 수많은 기록 속에서 진정한 기록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작가 최현석은 그렇게 유머라는 코드로 편치 않은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다. 그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Q. 미술의 여러 방식 중 기록화를 접하게 된 배경이 있는가?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의례와 향연이라는 특별전이 열린 적 있다. 그곳에서 마주한 궁중기록화들은 나에게 감응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왜 현대미술을 감상하는 데에 익숙한 나에게 기록화가 감응을 주었는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왜 그렇게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보았다. 기록화는 그동안 현대미술에서 접하지 못했던 매력을 갖고 있었다. 즉 쉽게 읽혀지는 형식과 레이어의 풀이 방식이었다. 그와 함께 기록화라는 도구의 사용 목적이 권력자들의 권위의식을 돋보이게 하는 박제화로서의 수단으로만 활용되어 왔다는 점에 불편함을 느끼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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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기록이 갖는 힘을 역이용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해 사람이 만든 도구이다. 망치를 나쁜 사람이 무기로 사용해서 사람을 때려 죽였다고 했을 때, 그것이 망치의 잘못인가? 망치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다고 망치를 만든 사람의 잘못인가! 그것 또한 아니다. 망치를 사용한 사람의 잘못인 것이다.’
이처럼 기록화는 단순히 도구로 치면 못을 박는 망치처럼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없앨 수 없다면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그 용도를 가치 있게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Q. 작품 활동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작품을 통해 혹시라도 현실에서 마주하는 불편한 것들이, 행복한 삶으로 구현될 수 있는 자그마한 가능성 내지 힌트를 머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꺼져가는 작은 불씨에 장작불 하나라도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이 쓸모없는 행동이 쓸모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라는 자그마한 희망을 갖는다. 예술가는 그 누구보다 목소리를 내는데 두려움이 없고, 행동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예술가가 지니고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Q. 작품 감상 시, 깊게 봐야(생각해야)할 부분이 있다면?
나는 단 한 번도 기록화를 그리는 데 있어서 좋았던 것을 그린 적이 없다. 그래서 작가가 표현한 불편한 지점을 한번 찾아보면 좋겠다. 과거에는 기록화가 박제화였다면, 오늘날 나가 표현하는 기록화는 치부화(畵)이지 않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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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근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가 있다면?
벽화 지우기, 오늘날 상품으로 보이는 종교의 행보, 그리고 인천아트플랫폼에서의 생활 등이 있다.

Q. 기록화를 진행하며 경험한 인상 깊은 에피소드가 있다면?
서울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전반적인 모습을 표현한 기록화 중, 고지도 형상을 빌려 8미터에 달하는 화폭에 담아낸 작품 <국란도(國亂圖)>가 있다. 어느 날 그 작품을 충북 ○○시에 있는 전시관에서 전시할 기회가 생겼는데, 마침 시장님이 감상하시고는 나에게 우리 시를 이렇게 멋지게 그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셨다. 나는 기록화의 언어가 쉬워서 누구나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고 난 후, 좋고 나쁨을 평가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작가가 쉽고 재미있는 언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감상자가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아낸 작품이라 하더라도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반성하게 하는 좋은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토요창의예술학교에서 4주간 중학교 2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참여하게 되었는데, 수업 이전에 걱정했던 중학생의 모습(중2병)보다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매섭고 솔직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다. 그러면서 현대미술로서 기록화가 지니고 있는 가치에 대한 작은 가능성을 다시 한 번 느껴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4Q. 작가로서의 소망이 있다면?
나에게 작가의 의지로서의 소망이 있다면, 더 이상 ‘이상’이 이상으로만 표현되지 않고 현실로서 자연스럽게 구현되는 세상이 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가 더 이상 붓을 들 이유가 사라지는 날이 될 것이다. 그 누가 뭐라 하기 이전에 나 스스로가 붓을 내려놓는 그 날이 반드시 왔으면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작가로서의 자그마한 소망이며 희망일 것이다.

Q. 향후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어쩌다 보니 개인전을 못한지가 3여 년이 흘렀다. 그래서 개인전을 소화할 수 있을 만큼의 작업량을 확보하는데 집중하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 입주 작가로 있는 인천아트플랫폼의 작업환경에 걸맞게 이전에는 쉽게 도전하지 못했던 실험적인 작업들 또한 시도하고자 한다.

정리 : 이아름/인천아트플랫폼 큐레이터




음악과 함께하는 열정의 날개짓 – 락밴드 ‘화려한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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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토요일 오후, 연수구 동춘동에 자리한 연수문화원에서는 <연수 문화 너나들이 축제>가 열렸다. 다양한 생활문화 동호인들이 화합하는 장이었던 축제에서 밴드 동아리의 공연이 단연 백미로 꼽혔다. 공연이 끝난 뒤 ‘화려한 외출’의 멤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02밴드 ‘화려한 외출’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부탁드린다.
서순희 : 다문화가정 밴드, 주부 밴드 등 여러 개의 밴드가 연합해서 활동하고 있는데, 지금 이 팀은 ‘화려한 외출 락밴드’로 가장 활발하게,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팀이다. 혼성 락 밴드로 지난 해 8월 결성되었고, 매주 금요일 밤에 연습을 하고, 다양한 장소에서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화려한 외출’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되었나?
서순희
: ‘화려한 외출’이라는 이름은 오래 되었다. 일명 아줌마 밴드로, 2001년부터 2012년도까지 여성 밴드 활동을 ‘화려한 외출’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기간 해왔다. 같이 활동했던 언니들이 나이가 많아지면서 밴드 활동이 힘들게 되었고, 어쿠스틱 밴드 활동만 하고 있던 중, 작년에 젊고 실력 좋은 친구들을 만나 다시 ‘화려한 외출’이라는 이름으로 팀을 결성하게 되었다. 지금 이 멤버들은 전부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부터 굉장히 오래 음악을 곁에 두고 살아왔던 친구들이다. 각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음악을 통해 함께 모여 화려하게 나래를 펼쳐보자는 의미에서 밴드명을 짓게 되었다.

03멤버 한 분씩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최진용 : 기타를 맡고 있다. 이전에 속해있던 밴드에서 지금 함께 보컬을 하고 있는 정균 씨와 활동했었는데, 정균 씨가 여기 밴드로 옮기게 되면서 합류하게 되었다. 와보니까 좋은 누님(서순희 님)이 계셔서 함께 의욕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김정균 : 보컬을 맡고 있다. 다른 분들하고 함께 직장인 밴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활동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6개월 정도 활동하다가 팀이 와해되었다. 멤버를 구하던 중 누님을 소개받아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박제선 : 건반을 맡고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밴드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누님이 운영하시는 악기사에 자주 방문해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번 놀러오라는 제안에 연습실을 방문했다가, 처음으로 건반을 맡게 되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다.
이한균 : 밴드를 한 지가 꽤 오래 되기는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직장인 밴드라 엎어지는 경우도 부지기수고, 여러 밴드에 용병처럼 지원을 나가는 정도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 밴드에 합류하게 되고 이제야 정착을 하게 됐다.
서순희 : 베이스를 맡고 있다. 밴드 활동을 오래 해왔지만, 그 동안은 기타를 연주했었다. 지난 해 정균 씨의 제안으로 베이스를 처음 맡았다. 마침 갱년기를 지나며 여러 가지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터라 열정을 다시금 불태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도전하게 되었다. 처음 도전해보는 악기이지만 굉장히 매력이 있고, 생활의 다른 부분에 있어서도 많은 동기 부여가 되고 있다.

동인천에서 오랜 기간 ‘허리우드 악기사’를 운영해 오면서 밴드를 만들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 계기가 궁금하다.
서순희 : 악기사를 운영한 지가 30년이다. 내가 가진 재능을 활용해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다섯 살 즈음에는 악기사 일을 마친 후에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라이브 카페에서 연주를 하는 등의 일도 했었다. 그동안 악기사에 방문하는 손님들의 연락처와 음악적 취향들을 물어보고 기록해놓고 있었는데, 열다섯 명 정도에게 연락해서 밴드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그렇게 밴드 활동을 시작했고, 15년이 지난 지금 모양새는 조금 달라졌지만 여전히 밴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직장을 따로 가지고 있으면서, 시간을 따로 내어 연습을 하고 밴드 활동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밴드 활동을 하며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이한균 : 아내도 밴드 활동을 했기 때문에 큰 반대는 없었다. 대학교 때 밴드에서 만났기 때문에, 아내가 활동을 많이 응원해주고 지지해준다.
최진용 : 연습하고 무대에 서는 것을 힘들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궁극적으로 무대에 서서 사람들 앞에서 실력을 보여주고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그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중간의 과정들은, 물론 어려운 순간도 있지만, 그 목표를 떠올리면 전혀 힘이 들지 않는다.
김정균 : 음악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 즐겁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집에서 게임하는 게 힘들지는 않지 않나. 우리에게는 음악이 그런 존재이다.
서순희 :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음악을 하면서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느끼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이 굉장히 긴장도 많이 되는 작업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 멋있다고 박수도 많이 받는다. 그런 긴장감과 짜릿함을 살면서 얼마나 느껴보겠나. 연습하는 과정 자체도 굉장히 재미있다.
김정균 : 오늘도 2주 만에 쉬었는데, 휴일을 공연 일정에 맞췄다. 2003년부터 지금의 아내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는데, 아내가 밴드 활동을 굉장히 반대했다. 어쩌다 한 번 쉬는데, 그날마저도 밴드 연습과 공연을 다니니까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밴드 활동을 반대하느라 아내가 일주일 간 집을 나간 적도 있었다. 딸아이가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고, 아빠가 밴드 활동을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 모습을 보고 아내도 이제는 밴드 활동을 존중해주고 응원해준다. 오늘도 아내와 딸아이가 공연장을 찾아와서 응원해주었다. 아이가 다니는 피아노학원 원장님까지 대동해서 공연장을 찾아준 걸 보면 이제는 많이 좋아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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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외출’ 밴드에서 활동하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최진용 : 같은 밴드를 하더라도,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많이 바뀐다. 서로가 호흡이 맞아야지만 일치된 감정을 통해 관객에게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주를 하면서 스스로 감동을 받기도 한다. 이 팀에 들어와서는 실력을 떠나서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굉장히 좋다는 생각을 했다. 직장인 밴드 치고는 실력도 굉장히 탄탄하고 음악적인 이해도 뛰어나다. 그래서 합이 잘 맞고, 연주하는 게 더 힘이 난다.
김정균 : 전에는 직장인 밴드를 자주 옮겨 다녔었다. 직장을 다니다보니 멤버들끼리 시간을 맞추기도 어렵고, 누구 한 명이 자꾸 늦게 되면 불만들이 쌓이곤 하는데, 자영업을 하다 보니 연습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 감정들이 쌓이다보면 1년, 2년 이상 팀을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누나가(서순희 님) 온 이후에 응집력이 더 강해졌다. 좋은 멤버들도 영입할 수 있었고. 같이 끈끈하게 갈 수 있는 역할을 해주고 계셔서 불안하지 않게, 안정적으로 밴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밴드는 목소리가 나오는 한은 계속 같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즐겁게 활동하고 있다.
박제선 : 밴드를 해서 좋은 것도 있지만,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게 가장 좋다.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이니까.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매주 만나 연습을 하는데 그 시간이 정말 좋다.
이한균 :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멤버들이 스케줄을 많이 양해해준다는 것이다. 하는 일이 기술 영업 쪽이라 지방을 많이 다니고, 한번 가면 며칠씩 있다 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스케줄들을 다 양해해주셔서 참 감사하다. 이전에 활동하던 밴드들이 엎어졌던 게 거의 스케줄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양해해주시는 것에 대해 굉장히 감사함을 느낀다. 두 번째는 나이차가 있고, 혼성 밴드이며, 각자 하는 일에 전부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데도 불구하고, 연습을 하는 데에 있어 대화가 굉장히 잘 통한다는 것이다. 다른 밴드에 있을 때는 자존심의 문제도 있고 해서 서로가 서로를 터치하지 않으려고 했다. 할 말이 있어도 그냥 넘어가고 하다 보니 불만이 쌓이고는 했다. 하지만 이 팀에서는 대화가 굉장히 잘 이루어진다. 이 부분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하는 것도 대화가 되니까 서로에게 불만이 쌓이지 않아 좋다.
서순희 : 직장인 밴드들이 오래 못 가는 이유는 욕심들이 있어서다. 자기만 좋아하는 것을 조금 내려놓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서로 감싸주어야 하는데 부족한 부분은 지적을 하고, 자기만 잘났다고 연주하는 것들 때문에 감정이 상하고 팀이 와해되는 경우가 많다. 멤버들 모두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감싸주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음악동아리고, 음악을 사랑하시는 분들이 모여 있기에 묻고 싶다. 누구에게나 인생을 바꾸어준 노래가 하나씩은 있지 않나. 밴드 활동을 시작하게 만들어 주었다거나, 자신의 인생과 많이 닮아있다거나 하는 노래들이 있는지 궁금하다. 있다면 어떤 노래인지, 이유도 궁금하다.
박제선 : 김건모의 노래 중에 이라는 노래가 있다. 가사가 와 닿아서 좋아하는 노래이다. 가수가 되고 싶다는 아들에게 엄마가 “너는 키가 작아서 안 된다, 공부나 해라” 말하는 노래인데, 그 노래 가사처럼 못생기고 키도 작고, 연주나 노래를 아주 잘하지는 않지만, 노래를 하는 것과 연주하는 것이 그저 즐거워 밴드 활동을 하고 있다.
이한균 : 신해철 1집 수록곡 중에 라는 노래가 있다. 노래 가사를 보면, “그 언젠가 먼 훗날에/반드시 넌 웃으며 말할 거야/지나간 일이라고”라는 구절이 있다. 99년도에 대학 밴드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연습했던 곡이 이 곡이었다. 단지 덩치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선배들이 “너 드럼 해”라고 해서 드럼을 맡게 됐다. 그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연습을 하고 공연을 했었는데, 십여 년이 흐른 지금 가끔씩 힘들거나 지칠 때 이 노래를 들으면 ‘힘든 것도 다 지나갈 테니까 지치지 말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된다.
최진용 : 넥스트 1집에 <아버지와 나>라는 곡이 있다. 배경 음악 위에 신해철이 노래가 아닌 내레이션으로 읊조리듯 이야기하는 곡이다. 곡이 절반 쯤 지나면 기타가 등장해 뒷부분을 끌고 가는데, 내레이션도 감정이 폭발하듯 점점 고조된다. 기타는 사실 목소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곡에서는 폭발할 듯한 내레이션과 함께 기타에도 마치 목소리가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 노래를 학창시절에 들으면서, 기타가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에 굉장한 충격과 자극을 받았다. 그 곡을 계기로 기타 연주를 시작하게 되었고, 여전히 그 곡에서처럼 멋진 연주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서순희 : 80년대 학번 세대에는 대학가요제가 굉장히 성행했고, 밴드 음악이 굉장히 많았다. 고등학교 때 ‘나 어떡해’와 같은 곡을 카세트에 넣고 산에 올라가서 노래를 틀고 춤을 추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불놀이야’라는 노래에서 기타 애드립이 굉장히 멋졌다. 저런 기타 연주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기타 연주를 시작하게 되었다.
김정균 : ‘She’s gone’이라는 노래에 사연이 있다. 친구들보다 생일이 느려 영장이 늦게 나왔는데, IMF이다 보니 취업도 안 되고,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오랫동안 하고 있었다. 군대라도 빨리 다녀오고 싶은데 영장이 나오지 않아 지원하면 바로 갈 수 있는 의경에 지원하게 되었다. 동네 파출소에 발령받을 것을 생각했는데, 기동대에 발령이 났다. 당시 그 곳의 분위기가 굉장히 엄해 가자마자 선임들에게 많이 맞았었다. 흔히 말하는 ‘고문관’ 소리도 듣기도 하고 힘든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크리스마스가 왔는데, 부대 앞에 있는 노래방으로 잠시 외출을 다녀오게 되었다. 그 곳에서 ‘She’s gone’을 불렀는데, 부대에 돌아와 보니 온 중대에서 나를 때리던 모든 선임들이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노래를 정말 잘 하는 친구’로 알려지면서 군 생활도 수월하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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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들에게 음악은 어떤 의미인가?
이한균 : 고객들을 직접 마주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굉장히 심하다. 밴드 활동은 나에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하나의 무기다. 음악을 매체로 한 활동들을 통해 좋은 기운들을 얻고 스트레스도 줄어든다. 육체적으로는 피곤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 든다. 또 하나는 업무 시간 이외의 여가시간을 보통은 그냥 쉬거나, 술을 마시는 등의 시간으로 보내는데, 밴드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알차게 보낸다는 느낌이 든다.
박제선 : 음악을 한 지 벌써 15년이 되었다. 기타면 기타, 피아노면 피아노, 다양한 악기들을 혼자 씨름하며 익혔다. 음악을 계속 해오면서 음악이 꼭 큐브 같다고 느꼈다. 한 면을 다 맞추면 다른 면이 흐트러지고, 다른 면을 맞추면 또 다른 면이 흐트러지지 않나. 여섯 개의 면을 모두 맞추는 법을 배우고 싶은데, 아직까지 그러지 못하고 있다. 연습하면 큐브의 모든 면을 다 맞추게 되는 것처럼 밴드 활동도 열심히 연습해 모든 면을 다 맞추고 싶다.
김정균 : 밴드 활동을 하기 때문에 삶을 더 열정적으로, 성실하게 살게 되는 것 같고 가정에도 더 충실하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 일주일에 한 곡을 연습하는데, 금요일에 멤버들과 모이기 전까지 일주일 내내 한 곡을 반복해서 듣고 연습한다. 출퇴근하면서도 듣고, 차 안에서도 듣고 흥얼거리며 연습을 한다. 그러다 보면 딴생각을 할 틈이 없다. 업무 시간에도, 집에서도 더욱 성실하게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최진용 : 나에게 음악이란 판타지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을 판타지라고 한다면, 음악을 하는 것은 판타지 속에 빠져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직장인 밴드 활동도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굉장히 힘들지 않나. 음악은 그런 현실의 고단함과 지난함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판타지라는 생각이 든다. 음악을 하는 동안에는 판타지에 빠져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 든다. 가장 값어치 있는 삶의 일부이다.
서순희 : 음악은 열정 충전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을 하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것도 물론 좋지만, 연습하는 과정에서 재미를 많이 느낀다. 스스로 열정을 만들어내고 쏟을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간 일을 하며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뒤로 하고 여유롭게 쉴 수 있는 주말 오후. ‘화려한 외출’의 멤버들은 조금도 지친 기색 없이 밝은 표정으로 연습과 공연을 하며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지친 모습으로 그들을 찾은 기자에게도 멤버들은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발걸음도 한결 가벼웠다. 열정이 가지는 힘은 엄청난 전염성을 가지고 있었다. ‘화려한 외출’의 열정이 널리 퍼져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해피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모습을 기대해본다.

인터뷰 및 정리 / 시민기자 김진아




사후(死後) 간행된 김소월의 명작, 소월시초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은 전국 유일의 공공 종합문학관입니다. 근대문학을 중심으로 한 근대 한국학 자료 약 3만 점을 소장하고 있는 콘텐츠 중심형 문학관이기도 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 자료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근대문학관의 함태영 학예사가 소개하는 우리 근대문학의 소중한 자산도 만나보시고, 문학관에 직접 오셔서 한국 근대문학이 가진 의미와 매력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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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死後) 간행된 김소월의 명작, 소월시초

 「소월시초」는 김소월 사후에 출판된 유고시집으로 1941년 박문서관에서 나온 재판본이다. 이 시집은 김소월 평생의 스승이었던 김억이 엮은 것이다. 「소월시초」는 소월의 의도보다는 스승인 김억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시집으로 알려져 있다.
시편 중 53편은 「진달래꽃에 수록되었던 것들이며, 「팔벼개 노래조(調)」를 포함한 나머지 25편은 시인이 생전에 잡지 등에 발표한 것과 소월 사후에 김억이 정리한 유작의 일부로 이루어져 있다. 말미에는 김소월의 유일한 평론인 「시혼(詩魂)」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은 32세로 생을 마감한 김소월의 작품을 최대한 모아 수록했다는 점에서, 소월의 문학 세계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이 책은 1939년 초판에 이어 2년 만에 재판을 찍었는데, 박문서관 발행 박문문고 시집 중에는 이례적인 경우였다.




우리말 시어의 탁월함 – 정지용, <지용시선>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은 전국 유일의 공공 종합문학관입니다. 근대문학을 중심으로 한 근대 한국학 자료 약 3만 점을 소장하고 있는 콘텐츠 중심형 문학관이기도 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 자료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근대문학관의 함태영 학예사가 소개하는 우리 근대문학의 소중한 자산도 만나보시고, 문학관에 직접 오셔서 한국 근대문학이 가진 의미와 매력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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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시어의 탁월함 – 정지용, <지용시선>

<지용시선>은 해방 후 정지용이 <정지용 시집>(1935, 시문학사)과 <백록담>(1941, 문장사) 등 두 시집에서 25편의 시를 직접 선별해 펴낸 시집이다. 이 시집은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4부까지는 <지용시집>에서 고른 14편을 싣고, 5부와 6부에는 <백록담>에서 고른 11편을 실었다. 초기의 실험적인 작품은 대부분 제외했고, 대신 4부에 종교(카톨릭) 체험을 소재로 한 신앙시 5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만큼 정지용에게 신앙이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을유문화사에서 나왔는데, 을유문화사 대표를 지낸 정진석은 생각만큼 책이 팔리지 않아 아쉬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예술 통해 함께 꿈꾸고 나눠요.”- 송도고등학교 ‘미남 융합미술부’ & ‘ABC 건축동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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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희가 미술 쪽으로 진로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림만 그리는 미술부 활동이 아니라 특색 있고 다양한 활동을 해보고 싶어요.” 연수구 옥련동에 위치한 송도고등학교에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하고 주도적인 활동을 이어나가는 두 개의 동아리가 있다. ‘미남 융합미술부’와 ‘ABC 건축동아리’이다. 두 동아리는 지난해와 올해 인천문화재단이 진행하는 시민문화활동 지원사업에 각각 선정되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동아리를 담당하고 있는 조형은 미술교사는 처음 학생들이 교무실로 자신을 찾아와 동아리 활동을 제안했던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02아이들의 제안으로 시작한 동아리 활동
“작년에 처음 이 학교에 발령받으면서 미술부를 담당하게 되었어요. 3월 초, 구체적인 계획보다는 개괄적인 계획만 가지고 있었을 때였는데, 아이들이 먼저 교무실로 찾아왔어요. 이후 아이들과 수차례 면담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여 구체적인 활동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조 선생님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3년간 미술 분야의 진로를 꿈꿔왔다. 하지만 입시에만 치우쳐 미술학원에서 일상을 보내고, 미술부 활동도 미술대회를 준비하는 것이 전부였던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단일한 형태의 미술만을 공부했어요. 미술대회에 나가 상을 타오는 것이 미술부 활동의 전부였죠. 하지만 학교 밖으로 나와 보니 미술에는 훨씬 다양한 형태와 분야가 있었고, 그만큼 다양한 진로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이들에게도 그 점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림을 그리는 기술을 다지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련된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폭 넓은 사고를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아이들이 활동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 잘 맞아떨어졌죠.”

주도적으로 동아리 활동을 이어나가는 학생들은 대부분 1,2학년 학생들이다.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진로를 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 고민하고 탐색하려 노력했다. 교사는 지나친 개입보다는 학생들의 옆에 서서 함께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택했다. “시작부터가 아이들의 제안이었잖아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거의 맡기고 있어요. 동아리를 통해 하고 싶은 활동에 대해 묻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죠. 지난해에는 아이들이 재능기부 활동과 전시, 벽화그리기 등의 활동을 제안했어요. 아이들이 제안한 활동을 토대로 어떤 장소에서 어떤 사람들과 함께 활동을 하면 좋을지, 적재적소에 맞는 활동을 고민했어요. 학교 축제 때 교내 전시를 하는 방법이나 지역의 경로당을 찾아 재능기부를 하는 방법을 아이들과 함께 찾았어요. 건축동아리의 경우에는 같은 예술 분야이기는 하지만 미술과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건축분야에 관한 공부를 하기로 했어요. 함께 건축박람회를 다녀오기도 하고 다양한 논문들을 찾아보며 함께 공부하고 있어요. 제가 부족한 부분은 주변의 지인이나 인맥들을 동원해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천 소재 대학교의 건축학과 학생들을 멘토로 섭외하여 동아리 활동을 진행하는 방법을 계획하고 있어요.”

03옆에서 함께 가는 교사, 뒤에서 밀어주는 학교와 지역사회
“학교의 분위기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동아리 활동 뿐 아니라 미술교과 수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아이들이 정말 적극적이에요. 주요 과목이 아니기 때문에 미술 수업을 등한시할 수도 있는데, 결코 수업에 불성실한 태도로 임하지 않아요. 1학년 때 전교생이 일주일에 한 번 인성교육을 받는데, 그 영향이 크다고 생각해요. 주변에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자랑을 하고 다닐 정도예요. 굉장히 즐겁게,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해주는 아이들 덕분에 교사로서의 보람과 즐거움이 컸고 그러한 에너지를 받아 동아리 활동과 학교의 전반적인 활동에 자극을 받게 되었어요.”

송도고등학교의 학생들 뿐 아니라 교장, 교감선생님을 비롯한 다른 선생님들도 미술동아리와 건축동아리의 활동에 많은 응원과 지지를 보내고 있다. “교장, 교감 선생님께서 동아리 활동에 관심이 무척 많으세요. 과학중점학교이고 일반계 고등학교이기 때문에 동아리가 활성화되기 전에는 미술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들이 이렇게 많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셨대요. 하지만 동아리 활동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진행한 활동들을 보시고는 더 많은 지원을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문화예술교육이 학교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담당교사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학교 자체의 협력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학교는 많은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시고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셔서 좋습니다.”

학교의 지지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관심과 지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송도고와 연수구 노인복지관이 MOU 체결이 되어있어요. 학생들과 재능기부 활동을 기획 중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굉장히 반갑게 생각해주시고 연수구에 있는 가장 큰 노인정을 연결해주셨어요. 미술부 인원이 조금 많다보니 소규모보다는 규모가 큰 노인정을 찾아 직접 연결해 주신 거죠.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어울리는 기회를 통해 스스로 지역의 구성원임을 인식하고 지역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이들이 단순히 그림을 잘 그려서 얻는 뿌듯함이 아니라 어울림을 통해 자아 효능감을 얻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인천문화재단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문화재단의 지원도 아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민문화활동 지원사업에 선정되어서 지원을 받게 되었는데, 덕분에 재료비와 같은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동아리 활동에 따르는 제약도 덜 수 있었습니다. 재료 준비도 넉넉하게 해서 더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활동할 수 있었고, 마지막 날에는 함께 활동했던 사진을 액자에 넣어 선물해드렸어요. 작품을 만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진도 남겨드리니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미술동아리의 경우 올해에는 아쉽게도 지원사업에 선정이 안 되었지만, 지난해 진행한 활동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올해도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혼자서는 절대로 할 수 없었을 활동들이에요. 다른 선생님들과 학교 전체, 그리고 지역사회가 모두 협조해주셔서 가능했습니다.”

조 선생님은 스스로 인천문화재단의 팬이라고 말할 정도로 다양한 활동을 해 왔다. 실제로 그녀는 인천문화재단에서 지원하는 연구모임을 통해 다른 선생님들을 만나 문화예술교육에 대해 연구하기도 하고, 지역문화예술교육 기획자 양성과정 ‘그로잉 업’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좋아해서 전공을 하게 되었고, 미대를 졸업했어요. 사실 인천에서 나고 자랐지만 인천지역의 특색이나 인천지역의 다양한 문화, 예술 활동에 대해 알지 못했죠. 개인 작업을 지역과 연관 시킬 생각도 하지 못했었어요. 대학 졸업 이후 스페이스빔과 연이 닿았고, 그 계기로 인천문화재단을 알게 되었어요. 문화예술교육이 진행되려면 미술의 형태가 단독적이기 보다 통합된 형태로, 다양한 분야와 연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활동을 진행할 때 미술교사 개인이 진행하기는 어렵지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인천문화재단인 것 같습니다.”

팬이지만, 조 선생님이 재단에 바라는 부분도 있다.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예술분야의 진로를 꿈꾸는 아이들은 사교육을 찾아 밖으로 나가기가 쉬운데, 학교에서도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학교문화예술교육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예술분야 동아리를 담당하시는 선생님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미술교사끼리, 음악교사끼리 모이는 것이 아니라, 문화예술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기획하고자 하는 선생님들이 모이는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관련 교사 연수도 수년간 초등 교사에게만 국한되어 있는데, 중등교사를 대상으로 한 연수가 있었으면 합니다. 함께 모여 고민을 나누고 사례를 공유한다면 더 많은 발전이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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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안에서 꿈꾸고 밖에서 펼치는 아이들
점심시간을 틈타 미술동아리와 건축동아리의 학생들도 만날 수 있었다. 학생들과 동아리를 구성한 과정과 동아리 활동을 통해 얻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이승훈(ABC 건축동아리)
처음에 대여섯 명 정도 건축에 관심이 있고 그 쪽으로 진로를 생각한 친구들이 건축동아리를 만들어보자고 모였어요. 조형은 선생님께 도움을 청해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건축박람회를 다니면서 건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쌓고 모형만들기와 같은 체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올해 ‘프로젝트 W’를 기획 중인데, 건축을 처음 접하는 친구들이 백색의 종이에 스케치를 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만든 프로젝트 명이에요. 1학기 때는 건축박람회를 방문하여 관련 지식을 쌓았고 2학기 때는 직접 모형을 만들어보고 벽화 그리기와 같은 봉사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백광현(美남 융합미술부)
기존에도 미술부가 있기는 했지만, 미술과 관련된 보다 다양한 활동을 하고 싶어서 C.O.A.라는 이름의 미술동아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조형은 선생님의 도움으로 재능기부와 같은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어요. 원래는 미술치료 분야에 관심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학생이다 보니 전문성이 부족할 것 같아 재능기부를 선택했어요. 어르신들과 함께 어울리며 많은 것을 배우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올해는 미술 관련 논문을 쓰는 ‘미남 융합미술부’와 함께 이름을 변경하여 활동을 진행하게 되었어요. 경제와 사회문화 등 다른 분야와 미술을 접목시켜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있는 중이죠. 사례를 들어서 논문을 쓰는데, 최근 송도에 지어진 아트센터가 가지는 경제적 가치와 전망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윤규선
지난해 경로당을 방문하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부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도와드렸어요. 예시를 들어드리면서 비슷하게 그리실 수 있도록 하거나, 생각하신 그림을 직접 부채에 옮길 수 있도록 도와드렸습니다. 이외에도 장승 만들기와 같은 활동을 했는데,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고구마와 수박 같은 간식들도 챙겨주시고 많이 가까워 질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규민
제 경우에는 만화 쪽으로 진로를 생각하고 있어서 평소에 미술관 같은 곳을 별로 다녀보지 않았고 전통 미술에도 역시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지난해 학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송암미술관을 다녀왔는데, 전시 주제가 전통과 관련된 것이었어요. 그동안 전통은 멋도 없고 재미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편견을 깰 수 있었습니다. OCI 미술관 창작 스튜디오에도 다녀왔는데, 그곳에서는 실제 작가 분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신기하고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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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목고나 특성화고와 달리 일반고에는 희망진로가 각각인 학생들이 모여 있지만, 교육과정을 통해 서로 다른 학생들의 수요를 모두 충족할 수 있는 학교는 드물다. 송도고의 미술동아리와 건축동아리 활동은 학생들의 적극적인 진로탐색과 학생들을 위한 교사의 열정, 그리고 학교와 지역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이 시너지를 발휘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예술을 꿈꾸는 아이들이 학교 안에서 답을 찾고 그 꿈을 밖으로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취재 및 정리 : 시민기자 김진아




인천을 떠난 사람들, 인천에 정착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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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서구 지역 이주배경 홈그룹 가족들이 다같이 월미공원 나들이를 했다.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며 게임도 하고, 음식도 나눠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오랜만에 한국이민사박물관을 찾았다. 중구에 위치한 ‘한국이민사 박물관’은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이한 2003년, 이민자들이 해외에서 보여준 개척자적인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뜻을 모아 건립한 국내 최초 이민 테마 박물관이다. “배 속에서 배 기름 냄새가 나서 구역질이 나고… 열흘을 굶고 있으니 기운이 하나도 없어…” 초기 이민자들이 탄 최초의 이민선 갤릭호 ‘함하나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 그들이 묵었던 열악한 환경 속의 객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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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크면서 조금씩 할 일이 늘어나고 있다. 일본 유학생이나 관광객들에게 한국의 정보를 소개하면서, 인천 정보도 함께 알리고 있는데 아쉽게도 여전히 대다수가 서울을 시작으로 한국을 알아 간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한국에 몇 번 온 경험이 있거나 오래 머무는 분들 중에서는 일부러 인천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시는 분들이 종종 있다고 하니 다행이다. 지난 3월, 일본 기타큐슈시와 요코하마시(두 도시 모두 인천의 자매도시다) 파견 공무원들에게 인천을 안내할 기회가 있었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인데도 인천에 애정을 갖고 인천만의 관광요소나 문화적인 가치를 재발견하려고 노력했던 모습이 참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인천 사람들도 좀 더 인천을 잘 알려는 노력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인천에 계속 살았지만, 서울에 일하러 다니고 인천은 그냥 먹고 자는 집만 있는 곳 같은 느낌이다. 나 역시 서울에서 일하는 부분이 있다보니,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 주말이라도 틈틈이 짬을 내 강화도에 있는 시댁을 찾곤 한다. 갈 때마다 ‘인천에는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여러 곳이 있겠구나’ 싶다. 내가 사는 지역에 관심을 갖고 그런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 지금 자라나는 우리 인천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지역에서 함께 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 자매도시와의 교류 사업 등에 참여하는 기회 등을 제공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천을 이끌고 나갈 다음 세대의 육성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곳 인천에서 자녀들을 키우는 입장이라서 더욱 그렇다. 나와 같은 이주배경 가정들에게는 이 지역을 잘 알고 지내는 기회가 더욱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우리 이주배경가족들이 이 이민사박물관에 찾아가면 얻어가는 것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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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인천 시민들도 이민사박물관을 많이 방문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고향인 인천시를 떠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이국땅에서 일했던 그들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되었으면 한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살면서, 다음 세대를 위해 학교를 건립한 것은 물론, 이국 땅에서도 한국 문화를 잊지 않고 살아갔던 그들의 삶에 배울 점이 많지 않은가. 또한 이곳 인천에서 새로운 가족을 구성해 정착한 이주배경 가정들 역시 배울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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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자들이 자발적으로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새로운 지역 활성화의 원동력이 된 사례는 많다. 인천시의 자매도시인 고베시 <믹스루트 칸사이>, 유럽의 <유럽평의회 인터컬츄럴시티 프로젝트> 등이 그것이다. 다함께 어울려 사는 지역사회 만들기야말로 바로 지역 공동체의 출발이다. 그리고 아마 그 첫걸음은 각자의 가족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야마다 다까코(인천시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