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세상에 일부러 잠입한 듯한, 세상에서 일부러 혼자인 듯한, 작가 ‘신민’

 

소외된 세상에 일부러 잠입한 듯한, 세상에서 일부러 혼자인 듯한, 작가 ‘신민’

여린 종이로 제작된 작가 신민의 작품은 거칠게 다루기에는 겁이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거친 질감, 뭉뚱그린 외형과 달리 종이 한 장 한 장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그녀의 작품은(금방 찢어지는 종이의 속성이 무시된 채) 외형의 모습처럼 강한 강도를 갖는다. 신민은 동시대의 나와 나의 주변인들, 그리고 제 3자를 작품 속에 반영하고 있다. 어쩌면 자본주의라는 미명하에 삶의 당연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소외와 차별을 받는 사람들을 작품 속에서 발견해볼 수도 있다. 야무지지 못하고 무기력해보이고, 어쩌면 아파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의 작품들은 금방 찢어져 소멸될 수 있는 종이 한 장이 아니라, 단단해져버린 덩어리가 되어 어지간한 힘에도 버틸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작가 신민은 비판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맥도날드 작품으로 많이 알려진 신민 작가와의 만남에서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은 한 기업의 CEO가 근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 속으로 위장 잠입했던 TV 프로그램 ‘언더커버 보스’처럼 작가도 작품 제작을 위해 일부러 맥도날드에 위장 잠입한 것인가, 그리고 일부러 그들만의 세상인 듯(혼자인 듯) 작품의 분위기를 조성했나였다.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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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주술적인 느낌을 준다.

A. 사람들이 전시를 본 후 화내고 슬퍼하고, 내게 고민을 던지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굉장히 기쁘다. 내가 생각하는 창작은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반응을 얻는 행위인 것 같다. 어릴 때 나름대로 노력해도 원하는 것을 쟁취하지 못하는 경험을 수도 없이 반복해오면서 초월적인 존재, 힘에 대한 갈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귀신을 불러내는 주술인 ‘분신사바’, 소원을 이루어주는 부적이나 기도 등을 몰래, 굉장히 열심히 했다. 작품을 처음 시작할 때에도 주술 행위를 하듯 의도적으로 하기보다는 무의식적인 흐름에 따라 완성했다. 사회적인 메시지가 들어있는 작업은 아니었다. 이렇게 만든 작품에 기운이 서려있는 것을 보고, 신이 나서 계속 주술의 방식으로 작업을 양산했는데 얼마 안 가서 결국 비슷비슷한 소원과 응답에 싫증을 느꼈다. 그리고 방에 쌓여있는 작품들을 보면서 내가 여성들, 그것도 상처 입은 모습의 여성들만 만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맥도날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사실 (원래는) 여성에 관련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맥도날드에서 런치세트 할인시간 때마다 정말 엄청난 양의 감자튀김, 햄버거, 콜라, 아이스크림, 커피를 담고 만들고 포장하면서 몸이 상하고, 관절이 아팠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아팠던 것 같다. 런치 시간이 끝나면 감자포대가 어마어마하게 버려지는데, 이 포대를 보고 느낌이 왔다. 그날부터 매일매일 퇴근할 때마다 쓰레기를 챙겨 와서 아르바이트생의 군상 조형물을 만들었다. 이 작업은 미술 잡지보다 오히려 시사지에서 보도해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전시를 보고 공감해주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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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작품에서 과감하고 (날 것 같은) 거친 느낌이 든다. 대화를 할 때도 작품처럼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오묘하게도 작가를 대할 때, 그리고 작품을 바라볼 때에 동일한 단어가 떠오른다. ‘일부러’, ‘잠입’, ‘홀로 조용히’…. 그러한 느낌은 조각상들이 (홀로가 아닌) 함께 모여 있는 <모의 생일잔치>(2007)를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어찌 보면 작품 속 인물들은 한 공간 속에 함께 모여 있지만, 히키코모리를 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즉 무서운 세상 바깥에 놓여도 겁 하나 낼 것 같지 않은 작품 속의 그들은, 오히려 소외되어 보이고 그들만의 세상 깊숙이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판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A. 나는 담력이 없다. 계획된 잠입 같은 것은 해 본 적 없다.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쉽게 피곤해져서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한다. 생일도 가족과 친구들 양쪽에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혼자 보내왔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보다 혼자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훨씬 보람차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깨달았다. 그래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인간관계에 금이 가도 괜찮았다. 이런 삶의 방식이 작품에도 드러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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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어떠한 특정한 사건, 정확한 타겟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의 대표 작품인 <견상(犬 狀)자세 중인 알바생>(2014)과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을 중심으로 작품의 타겟과 내용을 짧게 설명해주면 좋겠다.
A :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화나 나서 만들게 된 맥도날드 작업들은 청년들의 보편적 상황과 나의 상황의 동일한 지점, 자본주의 시대에 맥도날드가 갖고 있는 상징성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삶의 현장에서 수집한 질 좋은 미국산 감자포대가 작품 제작 의도와 잘 맞아떨어졌고, 생각한 대로 작품이 잘 나오게 된 느낌을 경험할 수 있었다. 맥도날드 작업 이후로는 전쟁 성범죄에 노출된 여성의 상황을 스포츠의 속성을 차용하여 표현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Q :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 제작하는가?
A : 우선 종이로 캐스팅을 하고, 그 위에 연필 등으로 드로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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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
<경숙>, <은숙>, <은주언니>, <딸기코의 딸들> 등 작가의 대다수의 작품에는 여성들이 중심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작가가 작업 중인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여성들에게 주목하는 이유가 있는가?

A : 일상에서 혼이 나갈 대로 나간, 소리를 지르지 못하는 여성의 상황을 흔하게 발견하게 된다. 그냥 넘어갈 수가 없고, 잊을 수가 없어서 그림으로 그리고 만든다..


Q :
아까 최근의 고민을 언급했는데 바로 ‘태도’에 관한 얘기였다. 작가의 실제 경험을 체화시킨 후 작품에 녹여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리서치에 기반한 창작) 사이에서의 고민이으로, 태도의 진정성에 관한 문제인 것 같은데?

A : 맥도날드 작업으로 예기치 않은 관심을 받았고, 운 좋게 인천아트플랫폼에도 입주하였다. 이곳에서는 시간과 돈을 아낄 수 있고, 경력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선발되는 곳이기에 작업이 실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현재 작업을 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하고 있는지, 실적에 좋은 이야기를 실적을 쌓기 좋은 모양으로 하는지 계속 스스로 묻고 있다. 부끄럽지만, 이게 고민이다.
Q :
마지막으로 <인천문화통신 3.0>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 영상 작업에 출연해 주실 여성 출연자 분들을 찾고 있다. 신체 노출은 없고, 얼굴도 공개되지 않을 것이다. 참여하고 싶거나 관심있는 독자분들의 연락을 기다리겠다. 의향이 있다면 8월 17일(수)까지 핸드폰(010-2649-1879)으로 이름과 연락처를 보내주셨으면 한다.

○ 자 격 : 작가가 제작한 의상을 착용하고, 기괴하고 격렬한 움직임에 참여할 수 있는 여성분
○ 모집인원 : 10명
○ 일 시 : 8월 19일(금), 오후 1~7시
○ 장 소 : 인천아트플랫폼 공연장(인천역 도보 7분)
○ 사 례 : 참가비 5만원(지원금 사용 절차상 입금이 조금 늦어질 수 있음.), 식사 제공

글 / 이아름(인천아트플랫폼 큐레이터)




영화를 좋아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하품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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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마지막 수요일, 아침부터 학산생활문화센터 ‘마당’의 4층 소극장을 찾는 이들이 있다. 더운 날씨에도 이들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고, 직원들은 익숙하게 그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이날은 한 달에 한 번, ‘하품학교 영화감상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날이다. 이 달의 영화는 ‘매드맥스’. 중장년층 이상의 어르신들도 있고, 아이와 함께 온 젊은 어머니까지 관객층이 다양하다. 사실 무료로 영화를 상영하는 곳은 여기 말고도 많은데, 특별히 이 이른 시간에 이곳을 찾게 되는 이유가 궁금했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 하품학교의 민후남 교장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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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부터 2016년까지
하품학교는 학산문화원이 생기고 첫 번째로 만들어진 동아리다. 하품을 하면서 우리의 뇌와 신체가 새로운 활력을 갖게 되듯, 지루한 일상에 영화로 활력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품학교’라는 이름이 탄생했다고 한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하품 나오는 지루한 영화만 보는 게 아닐까’ 오해할 수도 있을텐데, 참 재미있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품학교를 시작으로 학산문화원에 뚜벅뚜벅 남구, 미술관 체험프로그램, 문학기행 등의 다양한 동아리가 만들어졌는데, 그때부터 13년 동안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아리가 바로 하품학교라고 한다. 처음에 하품학교는 매우 적은 인원으로 시작했는데, 민후남 교장이 4번째 회원이었다고 한다. 회원이 된 동기는 간단했다. ‘하품학교’를 알리는 현수막을 보고, ‘하품’이라는 단어가 궁금했다는 것. ‘왜 하품학교인가요?’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다른 회원들도 비슷한 호기심을 안고, 혹은 무료로 영화를 보는 것이 좋아서 하품학교를 찾아오곤 한다. 지금은 200~300여 명이 넘는 많은 사람이 하품학교와 함께 하고 있으니 14년 동안의 성장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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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새로운 시도
기자가 찾은 날, 오전 10시 영화감상 프로그램에 참여한 주민의 수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2016년 여름, 현재 하품학교는 더 많은 주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중이다. 학산문화생활센터 ‘마당’으로 이전하면서 저녁 7시에서 오전 10시로 시간을 바꿨기 때문이다. 노년층이나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 등 저녁 시간 참여가 어려운 분들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오전으로 영화감상 프로그램 시간대를 바꿔서 운영한 지 3개월째, 노년층 관객들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이날 만난 관람객은 “영화를 보는 것이 즐거워서 장소를 옮겼음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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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품학교가 영화를 즐기는 방법
하품학교는 언제나 누구나 쉽게 영화를 보고 싶을 때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시도한 프로그램이 바로 ‘하품학교 영화감상 프로그램’이다. 오전에만 시간이 나는 주민들을 위해 영화를 상영하고 영화가 끝나면 평론가가 영화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그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함께 가지는 것이다. 하품학교에서 오래 활동한 회원들은 보다 깊게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데, 그런 공간이 또 있다. 바로 평화시장에 위치한 하품학교 분교이다. 1년 정도 된 이곳에서 하품학교 회원들과 주민들이 함께 어울려 영화를 즐긴다고 한다. 이렇게 두 개의 센터를 운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천 곳곳에서 더 많은 주민이 가볍게 혹은 깊이 있게 원하는 대로 영화를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20대부터 80대까지 영화로 소통하다
하품학교의 회원 연령층은 매우 다양한데,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영화’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20대 대학생부터 영화가 유일한 취미였던 80대 노년층까지 영화를 보고 각자의 시각에 따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굉장히 흥미롭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관람했을 때, 나이에 따라 반응이 특히 도드라졌다고 한다. 같은 영화를 관람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누는 이 과정에서 젊은 회원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고, 중장년층 이상의 회원들은 젊은이들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한 토론으로 시작했지만 개인의 삶을 토로할 수 있는 시간으로 바뀌기도 한다.

하품학교의 한 해 마무리, 하품영화제
하품영화제는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하품학교의 축제로 2004년부터 시작, 올해 13회를 앞두고 있다. 초기에는 주제와 키워드를 선정하고 그에 맞는 기존 영화를 상영함으로써 더 많은 주민과 영화를 함께 본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 영화를 직접 만들어보자는 욕심과 열의가 커졌고, 회원들이 뜻을 모아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회원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만든 작품은 개막식에서 상영되며, 하품영화제의 시작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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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에서 감독으로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만드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비전문가인 하품학교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들은 매년 작품을 만들고, 영화제에 올리고 있다. 봄부터 주제와 키워드를 선정하고 시나리오 작업과 촬영을 한다. 진행 스탭, 연기하는 배우, 편집 작업까지 모두 회원들이 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3분 이내의 짧은 다큐멘터리 혹은 영화가 되어 하품영화제의 개막식을 빛내고 있다. 회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다루는 경우도 있다. 민후남 교장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두 편이 있다. 첫 번째는 몸이 아픈 아버지, 철부지 동생과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난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자기 자신이 큰딸로 연기하면서 마음은 아팠지만, 더욱 실감나게 연기를 할 수 있었다고. 두 번째는 딸이 시집 가기 전 둘이 떠난 여행을 영상으로 남겼던 다큐멘터리다. 나래이션 녹음을 하면서 눈물을 쏟던 그녀를 바라보던 회원들까지 감정에 이입해 함께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고… 이처럼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서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한편, 자신들의 작은 영화제를 알차게 만들어가고 있다.

편안하고 언제나 찾을 수 있는 곳, 하품학교
민후남 교장은 하품학교에 바라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저 자신처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언제나 편안하게 오래오래 영화를 볼 수 있는 또 주민들에게 더 많은 영화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은 게 다라고 한다. 그녀에게 하품학교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듯,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공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작은 바램이다.

하품학교는 처음에는 그냥 순수하게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이 모인 작은 동아리였다. 지금은 300여 명이 넘는 회원들과 함께 영화를 즐기고 제작까지 하는 모임으로 성장했다. 많은 사람이 쉽게 영화를 볼 수 있는 하품학교 영화감상 프로그램, 좀 더 진지하게 영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평화시장 분교, 1년의 결실을 공유하는 하품영화제까지 하품학교는 인천의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을 위해 영화를 중심에 놓고 고민과 도전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그 결과 어떤 사람은 한 달에 한 번 즐겁게 영화를 보는 여유를 갖게 됐고, 어떤 이는 새롭게 자신의 꿈을 발견하고 영화감독이 됐다. 2004년 작은 시도로 시작된 하품학교가 바꾸는 인천을 기대해본다.

글 / 시민기자 오지현




이해조 「빈상설」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은 전국 유일의 공공 종합문학관입니다. 근대문학을 중심으로 한 근대 한국학 자료 약 3만 점을 소장하고 있는 콘텐츠 중심형 문학관이기도 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 자료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문학관에 직접 오셔서 한국 근대문학이 가진 의미와 매력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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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조 「빈상설」
이해조의 「빈상설」은 <제국신문> 1907년 10월 5일부터 이듬해인 1908년 2월 12일까지 연재된 소설이다. 이 작품은 근대 문물과 제도가 유입되던 근대계몽기 서울의 명문 양반가를 배경으로 하여 축첩으로 인한 가정비극을 다룬 가정소설 유형의 신소설이다.

「빈상설」은 이해조의 두 번째 신소설 작품이자 이인직의 「혈의누」에 이어 인천이 등장하는 두 번째 신소설이기도 한데, 초창기 중요 신소설들에 인천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우리나라 양대 신소설 작가인 이인직과 이해조가 인천을 매우 중요한 도시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인천은 집에서 쫓겨난 주인공 이난옥이 아버지를 찾아 제주로 가던 도중 조난을 당했다가 구조되어 상륙하는 곳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 때 이난옥의 눈에 비친 인천은 외국인지 우리나라인지 모를 정도로 외국인이 많은 국제 항구도시로 형상화된다. 인천은 이국 풍물이 가득한 기회의 도시였던 셈이다.

함태영 / 한국근대문학관 학예사




“우리의 ‘인식’은 수 없이 많은 오해들의 합이다.” – 프로젝트 그룹 ‘멜팅다츠’

 

“우리의 ‘인식’은 수없이 많은 오해들의 합이다.” – 프로젝트 그룹 ‘멜팅다츠’

‘멜팅다츠’는 연출, 극작, 무대 디자인, 음악 등 서로 다른 4가지의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인 프로젝트 그룹으로 인천아트플랫폼에 3개월(2017년 6~8월) 간 단기 입주 작가로 들어오면서 인천과의 첫 만남을 시작하였다. 리더인 연출가 이수은은 15년 넘게 해외에서 생활하면서 본인이 느낀 ‘인식’에 대한 선입견과 ‘한국인들은 이럴 거야’라는 외국인들의 편견에 대해 작업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모임 ‘멜팅다츠’는 처음 방문하는 도시에 대한 낯선 시각을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고, 이를 공연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멜팅다츠’ 구성원들에게 인천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은 없다. 그들은 인천과 아무런 연고가 없을뿐더러 인천을 딱히 의식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굳이 인천에 대해 ‘인식’이라는 어려운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려는 것일까? 이 질문에 구성원들 모두는 “전혀 모르기 때문”이라고 웃으며 답했다. ‘인식’에 대한 작품 활동을 하는데 있어 선입견은 가장 큰 방해물이기 때문이란 말도 덧붙였다. 이들은 인식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한 채 오늘도 인천시민들을 만나 그들에게 인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1“인천 분이세요?”, “인천은 어떤 곳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천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인천에 대한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그냥 편하게 들려주시겠어요?” ‘멜팅다츠’는 인터뷰 대상과 평범하게 대화를 나눈다. 설문도 아니고 조사는 더더욱 아니다. 무리한 질문을 하지도 않으며 흑백처럼 단정적인 답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들어주고 그 생각을 노트에 옮겨 적을 뿐이다. 그렇게 하나, 둘 모인 시민들과의 인터뷰는 영상, 음악, 퍼포먼스 등으로 재구성되어 인천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공연으로 탄생할 예정이다. 멜팅다츠는 ‘인천 시민들이 본인들의 터전인 인천에 대해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바’를 인터뷰하고 이야기를 들어왔다. 이 과정을 통해 멜팅다츠 자신은 인천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구축해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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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멜팅다츠’의 소개를 부탁한다.
A : 멜팅다츠는 이번에 인천아트플랫폼에 입주하면서 만든 팀 이름이다. 저(연출가 이수은)는 무대 & 의상 디자이너,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2006년부터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과 협업을 많이 했는데, 대부분 ‘콜렉티브 작업방식’을 추구했다. 그런데 이 작업방식은 팀 구성원들 간에 잦은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했고, 그럴 때마다 우리가 왜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과 협업을 하는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다양한 작가들의 작업방식을 공연 결과물에 녹여내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작업 주제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지고 서로 소통하고 합을 맞추어 가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작업을 해 보고 싶었다. 공연예술이란 예술가와 예술가, 예술가와 관객 사이의 대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 공연 프로젝트마다 형식, 장르, 작업 방식들에 자유롭게 접근하여 공연으로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방식이나 새로운 개념을 원하는 건 아니다. 단지 작업의 중심을 제작 결과에서 제작 과정으로 옮겼을 뿐이다. 저와 허영균 작가가 먼저 팀을 결성하고, 손지희 무대 디자이너, 싱어송라이터 도재명 작가가 합류했다.

Q : ‘인천 사랑’ 단체티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사람들의 시선에서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
A : 인천에서 작업하는 동안 쭉 입으려고 만들었다. 옷을 입는 것 자체로 ‘작업 모드’가 된다. 인천을 잘 모르기 때문에 ‘표어’처럼 인천 사랑을 내세웠다. 신기하게도 옷을 입으니 실제로 인천에 대한 애착이 생긴다. 또한 단기로 입주한 팀이기 때문에 아트플랫폼을 오가는 분들과 서로 인사하고 지내려면 눈에 잘 띄어야 한다는 생각에 옷을 맞추기도 했다. ‘인천 사랑’이라는 글이 적힌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우리에 대한 인천 사람들의 반응도 궁금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입고 다니지?’ 생각했는데 사람들과의 경계를 허무는 데 이 티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셔츠를 입고 있을 때와 입지 않았을 때가 다르고, 입고 있을 때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태토가 더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연스럽게 웃게 되는 효과도 있다. 옷을 입지 않았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무표정이지만, 이 티셔츠를 입게 되면 작업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은 물론이고, 웃는 표정과 열린 마음까지 자연스레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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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인천 시민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텐데, 인천에 대한 선입견은 무엇이었나?
A : 인천 토박이가 적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다. 타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정착한 땅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인천 사람들은 바보다, 다 내어 주고 빼앗기고 그러고 산다. 인천은 서울쓰레기 매립지, 안 좋은 것은 다 인천으로 온다“ 이런 말을 들으면, 인천의 주변 도시와 인천의 지리적 한계(서울을 보완하는 역할), 인천을 구성하는 인구 성향(가령 외지인 유입, 화교, 실향민 등)이 복합적인 영향을 받아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거나, 의견이 모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한 다양성이, 결국 인천이 “개방적” 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인천 사람들은 ‘짜다’는 선입견이 있다고 멋쩍어하는 분들도 있었다. 이 단어도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현실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우리가 인터뷰하면서 만난 인천 분들은 오히려 반대의 성향을 가진 분들이셨다.

Q : 각자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인데 추후 활동계획이 궁금하다.
A : 도재명은 현재 영화음악 작업 중이고, 허영균은 7월 26일부터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음악극 <보물섬> 드라마투르기로 작업에 참여한다. 허영균은 개인적으로 예술-공연예술출판사 1도씨를 운영하고 있는데, 하반기에는 각각 희곡집과 공연의 전 과정을 기록하는 책을 출판할 생각이다. 각각 1도씨 희곡선, 1도씨 추적선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손지희는 7월 말에 대학로 ‘열린극장’에서 연극<사우나>, 9월에 국립민속국악원의 <나운규 아리랑> 무대 디자인을 준비하고 있다. 이수은은 ‘마술피리’를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연출하고 10월 ‘대구오페라페스티벌’에서 ‘피델리오’ 협력연출, 11월에는 국악과 현대무용을 실험적으로 접목시켜는 공연 프로듀서로 참여한다. 독일 공연창작집단 <오퍼 디나모 웨스트 Oper Dynamo West> 창단멤버로 10년째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공연 작업을 하는데, 내년에는 음악극<바하유람기>, 연극<마담 고질라(가제)>를 독일과 한국에서 공연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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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공연을 찾아주실 인천시민들께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A : 정보나 사실이 아니라, 인천에 대한 이야기가 감각적으로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망상을 부추기는 공연일 수도 있으니, 오감을 열어두고 관람하길 바란다. 공연을 보기 전에, 스스로 ‘인천은 어떤 곳이지?’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그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본다면 공연을 즐기기 더 좋을 것이다. 객관적이고 통계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수집하는 일이 우리의 최종 결과물은 아니다. 우리는 주관적 편견이 무엇이고 각각의 편견 조각들이 모여져, 편견의 구조로 만들어진 인천의 한 모습이 궁금하다. 관객들은 우리가 본 인천의 인상, 혹은 편견에 대해 솔직해지면 되는 그런 공연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관객도 우리도 <개항하는 마음 그 자체다.>

프로젝트 그룹 ‘멜팅다츠’는 인천아트플랫폼 단기 입주 작가로써 작품과 공연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인천에 대한 인천시민들의 인식을 그들에게 다시 보여주려 한다. 그 결과물은 오는 9월 <2016 인천아트플랫폼 오픈스튜디오> 기간 중에 인천아트플랫폼 공연장에서 만날 수 있다.

글 : 고승용(인천아트플랫폼)




서흥초 기타동아리-너랑나랑 기타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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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요일 저녁,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텅 빈 초등학교. 조용하던 음악실에 환한 불이 켜졌다. 아름다운 통기타 선율이 흐르고,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더해진다. 인천 동구에 위치한 서흥초등학교에는 학부모와 지역주민이 함께하는 기타동아리가 있다. 앙증맞은 책상과 의자에 앉아, 귀여운 그림이 가득한 칠판을 배경으로 기타를 연주하는 그들을 만나보았다. 시작은 작년이었다. 서흥초등학교가 행복배움학교(인천형 혁신학교)로 지정되면서, 학부모 회장인 이정휘 씨는 학교를 아이들과 선생님만의 배움터가 아니라 학부모들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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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휘 : 학부모 동아리를 만들고 활성화하기 위해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어요. 직장 생활을 하시는 학부모님들도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을 찾다보니 기타를 배워보자는 결론이 나왔죠. 학부모 대상이라고 하면 제한적인 부분이 있어 마을공동체의 느낌으로, 지역주민들도 참여하고, 우리 학교를 졸업한 친구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어요.

아이들의 엄마로, 주부 또는 직장맘으로 자신만의 시간 없이 바쁘게 지내던 그들은 하나 둘씩 기타동아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동희: 학급의 학부모 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학부모회장 언니가 내미는 동의서를 받게 되었어요. 올해 3월에 신학기가 되고 뒤늦게 합류했어요. 원래는 악기를 다뤄본 적도 없는데 여기에 와서 처음 하게 된 거죠. 늦게 합류한 만큼 따라잡고 싶어서 다른 멤버들을 많이 괴롭혔어요. 옆에 언니들이 귀찮은 기색 없이 잘 가르쳐주고 도와주셔서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이애경 : 예전에 기타를 배웠었어요. 20대 때, 신포 지하상가 끝에 있는 악기점에서 악기를 사면 강습을 해주고는 했었죠. 그렇게 잠깐 기타를 배웠는데 시간이 지나니 기타를 배우거나 쳐 볼 기회가 아예 없는 거예요. 오래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학교에서 학부모 동아리를 만든다고 해서 참여하게 되었어요.

정영선 : 큰 아이가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기타를 하나 장만했는데, 아이가 금방 질려하면서 기타가 잠자고 있게 된 거예요. 마침 학교에서 기타를 가르쳐주고 함께 연습한다고 해서, 악기의 ‘악’자도 모르지만 용기를 내서 참여하게 되었어요.

차연정 :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웠는데, 원해서 다닌 게 아니라 엄마의 강요로 다니다보니 흥미가 없었어요. 음악을 즐겼다기보다는 억지로 다녔던 거죠. 그동안 기타를 배우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돼서 못 배우다가 마침 저녁에 수업을 한다고 해서 찾게 되었어요. 노래를 듣고 부르고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편인데, 기타수업과 함께 음악을 즐기면서 힐링을 하고 있어요. 또, 아이도 기타를 배우고 있는데 ‘너만 해라.’ 강요하는 게 아니라 같이 배우는 입장이 되니 서로 마음도 이해할 수 있고 이야기 거리도 많아지고 해서 대화가 편해진 것 같아요.

한준희 : 초등학교를 다닐 때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기타반도 있었는데, 중학교에 올라간 이후에 기타가 멋있고 재밌어 보였어요. 마침 엄마가 학부모 기타동아리 활동을 시작하면서, 같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제안하셔서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녀들은 무언가를 배우고 자신들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게 일주일에 한 번, 이 시간뿐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시간을 내서 참여하게 된다고 말했다. 익숙하지 않은 악기를 다루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에게 화도 나지만, 연습 끝에 함께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낼 수 있는 데에 희열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모일 수 있는 이유는 단지 기타나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함께 모여 기타를 연습하는 시간은 친한 언니, 동생들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만든 데에는 기타반 강사 박수희 씨의 역할이 한 몫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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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희
: 저도 기타를 본격적으로 배운 지는 10년째에요. 지금 동아리 참여하는 분들의 나이에 시작을 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늦게 시작한 셈이죠. 그때도 강좌를 들으면서 시작했는데, 동아리의 형태로 함께 묶이니까 그 멤버들과 1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기타를 치게 되었어요.배다리에서 기타교실을 열었었는데, 서흥초의 김창진 선생님께서 그 소식을 듣고 학부모 기타동아리의 강사가 되어주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어요. 이전에 방과후학교 강사로 수업을 진행했던 경험이 있는데, 기대했던 것과는 차이가 많았어요. 수업을 듣는 아이들도 즐거워서 하기보다는 마지못해 오는 아이들이 많았고, 선생님들이 방과후 강사를 섭외하고 수업을 만드는 과정을 주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해 소홀히 하거나 강사를 배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학교는 달랐어요. 시스템도 훨씬 좋고 참여하시는 분들도 진짜 좋아서 오시는 분들이어서 저도 가르친다는 생각보다는 동아리의 일원으로 즐겁게 참여하고 있어요. 사실 소음을 발생시키는 동아리의 경우 공간을 마련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지원을 받기도 어렵고, 우리만의 공간을 가지려면 임대료도 드니까요. 공간 마련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학교가 지역주민들에게 공간을 나누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특히 초등학교는 정말 가까이들 있잖아요. 하지만 학교가 동네 주민들하고 너무 격리되어있고, 문을 딱 걸어잠그고 열어주지 않으니까 아쉬웠는데 학교에서 이 수업을 제안해주었고, 학교와 지역주민 간에 교류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흔쾌히 오게 되었어요.

서흥초 학부모가 아닌 지역주민 김혜례 씨도 활발하게 참여하는 동아리 멤버 중 한 명이다.

김혜례 : 친한 동생의 소개로 참여하게 되었어요. 제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손님으로 오던 동생이 미용실에 있는 기타를 보고 치냐고 묻기에 폼으로 갖다 놓은 거라고 대답을 했죠, 그랬더니 학교에서 기타 수업을 듣고 있는데, 함께 해보지 않겠냐고 묻더라고요. 고 1때 옆집 오빠가 기타를 치는 모습을 보고 그게 너무 멋있어서 아빠에게 기타를 사달라고 졸라 얻어낸 기타였어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 기타가 너무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제가 잘 치지 않아 동생이 가지고 있었는데, 다시 돌려달라고 부탁을 했죠. 수요일이 미용실 쉬는 날이라 매주 참여하고 있어요.

올해로 두 해 째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기타동아리는 무대에 서서 다른 사람들에게 연주를 들려주는 것도 계획 중이다.

이정휘 : 11월 즈음에 학교 학예회가 있어요. 아이들 동아리 발표회인데 학부모들도 함께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있어요. 작년에는 학부모 합창 공연을 했는데, 올해는 기타동아리 공연을 목표로 연습 중이에요. 또, 동구청에서 ‘나들이 강좌’라고 해서 수업을 열면 수강료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올해 저희 동아리가 선정됐거든요. 10월 즈음 선정된 동아리들의 발표회가 있는데, 그 무대에도 설 예정이에요.

정금선 : 저는 저질 체력이기도 하고, 아이가 세 명이라 아이들 학원시간에 맞춰 집에 데려다주고 바로 수업에 오려면 힘들기도 해요. 하지만 연습하면 할수록 욕심이 나요. 하이코드를 잡아보고 싶다는 욕심도 나고, 11월에 있는 학예회 때도 사람들에게 엄마들이 이렇게 기타도 친다는 것을 보여주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주를 해보고 싶어요.

엄마로, 아내로만 사는 삶에 지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취미로 시작했던 기타는 그녀들의 일상을 하나둘씩 바꾸기 시작했고, 더 멋진 엄마, 더 멋진 아내,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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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 우리 아이가 어버이날에 편지를 썼는데, 엄마를 ‘기타 잘 치는 사람’이라고 써왔더라고요. 평상시에 기타 연습을 하는 모습이 아이에게 좋게 보였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학교에 있는 기타로 연습을 했는데, 한번 수업을 듣고 일주일이 지난 후에 다시 오면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더라고요. 20년 전 창고에 넣어두었던 기타가 떠올라서 집에 연락했더니, 다행히도 아직 기타가 있어서 다시 가지고 온 날부터 이를 악물고 연습을 했어요. 그런 모습을 아이도 자랑스러워 해주니까 더 자신감이 붙더라구요.

장동희 :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는데, 그러다 보니 저희 아이도 저와 똑같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이가 2학년이 되고부터 학부모 모임에도 조금씩 참여를 하기로 결심했고, 동아리 활동도 시작하게 되었어요. 아이들이 1학년일 때부터 이어져 온 학부모 모임에 뒤늦게 합류하다 보니 겉도는 느낌이 많았는데, 동아리에서는 가족처럼, 언니, 동생처럼 챙겨주니까 재미있게 활동을 하고 있어요. 언니들도 그렇고 선생님도 그렇고 용기를 많이 주시니까 더 열심히 연습하고 활동하게 돼요.

이춘화 : 남편이 브라질에 있는데, 12월에 한국에 들어와요. 기타를 배우면서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남편이 전화로 “기타 잘 배우고 있냐”고 물어봐 줄 때면 더 열심히 해서 한국에 들어왔을 때 연주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같이 활동하는 분들이 잘 끌어주고 계셔서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함께 해야겠다 싶구요.

자신의 이름 대신 ‘진영 엄마’, ‘희진 엄마’로 불리기 일쑤인 엄마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 그들의 이름을 듣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곳 기타동아리에서는 모두가 서로를 서로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매 시간마다 출석부를 부르고, 새로운 사람이 올 때마다 자기소개를 하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는 사람들. 기타를 잡으며 엄마나 아내가 아닌 스스로를 다시 찾아가고 있는 그들의 행복한 웃음이 앞으로도 끊이지 않기를 바란다.

글 / 시민기자 김진아




‘여권 없는 해외여행’, 인천의 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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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아무리 작은 섬도 그 자체로 하나의 왕국이다. 그래서 섬으로의 여행은 여권 없는 해외여행이다! 잠깐만 배를 타도 일상을 벗어나 다른 세상과 만날 수 있다. 인천에는 168개나 되는 섬이 있고, 게다가 섬들은 수도권의 안마당이나 다름없다. 과거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는 위성 도시 인천의 문화정체성 확립에 방해자였다. 하지만 인천 섬들의 가치가 재발견된다면 서울은 오히려 인천의 든든한 후원자로 바뀌고, 서울을 비롯한 2,500만 수도권 인구의 일상 탈출 욕구는 인천 섬 여행 문화를 향유할 수요자 풀(Pool)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숨겨진 인천 섬 왕국의 유물들을 발굴해 내는 일이야말로 인천 가치 재발견의 중요한 진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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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천시는 2조 3230억 원이란 거액을 투입해 인천 168개 섬들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섬 프로젝트’를 본격 추진하기로 했다. 관(官) 주도와 개발 위주 사업이 아닌 주민 주도의 자연경관을 최대한 보존해 섬의 가치를 높이는 사업을 한다니 환영할 일이다. 인천시는 4가지 추진전략을 세우고 모든 섬을 1시간 내 접근이 가능하도록 백령도 공항 건설이나 영종도 제2연안여객터미널 확충 등 시설투자는 물론 인천의 섬들을 매년 12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애인(愛仁)섬’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또 6차 산업을 육성해 섬의 경제기반을 조성, 주민 소득 증대에 기여하고 선착장 주변 문화 공간 확충과 해수담수화 시설, 신재생 에너지 자립 섬 조성사업 등도 계획하고 있다.

6차 산업 기반 조성을 통한 주민 소득 증대나 신재생에너지 자립 섬, 해수담수화를 통한 물 문제 해결 등의 인프라 구축은 섬들을 위해 꼭 필요한 사업들이다. 하지만 섬 관광의 측면에서 본다면 인천시의 섬 프로젝트는 일견 우려스러운 점도 적지 않다. 섬 문화 가치 발견보다는 시설투자와 물량주의 관광에 더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닌가 싶어서다. 관광객의 무한 증가가 꼭 섬에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인천의 이름난 섬들은 주말이나 성수기면 너무 많은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들 중 절반 이상은 섬에 돈 한 푼 쓰고 가지 않는다. 섬의 수용 역량을 초과하는 관광객 유입은 오히려 섬에 독이 된다. 그래서 관광객을 무한정 늘리는 것보다는 관광객 차량 입도금지와 입도객 총량제 등을 도입해 재방문율을 높이기나 ‘체류시간 늘리기’처럼 전략을 수정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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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접근성 개선도 반드시 이루어져야할 숙원 사업이다. 하지만 가깝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멀다고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가까우면 그만큼 일찍 돌아보고 빠져나간다. 먼 것이 매력일 수도 있다. 부러 오지를 찾아다니는 세상 아닌가. 그래서 섬의 접근성 개선을 위해서는 제2여객터미널 확충 등을 통한 섬 여행 시간 단축보다는 전천후 여객선 도입, 야간운항 허용과 시설지원, 여객선 공영제, 해사안전법 개정 등을 통한 안전성과 접근성 확보로 정책 방향을 바꾸는 것이 더 실효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백령도 같은 원도의 경우 소형공항 건설은 바람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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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 프로젝트는 4개의 추진 전략이 있지만 결국 핵심은 섬 관광업의 활성화를 통한 주민소득 증대다. 그런데 아쉽게도 인천 섬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가치 재발견 전략이 부족해 보인다. 가깝다는 것 말고도 왜 인천 섬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이 있어야 섬 관광도 지속가능하다. 섬 선착장 주변 문화 공간 확충 같은 시설 투자보다 문화가치 재발견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 ‘168개 애인 섬 만들기’ 같은 관광객 유인 전략은 실패한 여수의 ‘365 생일 섬 프로젝트’만큼이나 추상적이다.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요즘 세계의 여행 추세는 에코투어리즘이 대세다. 변화하는 시대 트렌드에 맞는 컨셉의 정립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환경 파괴로 논란이 되고 있는 굴업도는 리조트 개발 포기를 선언하고 ‘인천 바다의 제주, 화산섬 굴업도’라는 컨셉의 에코뮤지엄 조성으로 가는 것은 어떨까. 과거 잘못된 개발로 파괴된 섬의 자연환경을 복원하는 것도 섬의 가치를 재발견해 인천 섬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는 방안의 하나다. 논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황금갯벌을 없애고 간척 사업을 했으나 논에 물을 댈 담수호가 소금 호수가 되는 바람에 황무지로 버려져 있는 백령도의 1백만평 간척지와 40만평의 백령호를 역간척을 통해 다시 갯벌로 환원시킨다면 어떨까. 천혜의 비경에 시너지 효과를 더한 백령도는 분명 생태 섬 관광의 메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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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천의 와덴해 섬, 랑어욱이 역간척으로 성공한 대표적 사례다. 랑어욱은 1923년부터 시작된 간척으로 섬이 황폐화됐는데 1986년, 역간척을 택했다. 10년이 지나 갯벌 생태계가 복원되자 랑어욱은 생태관광의 메카가 됐다. 덕분에 독일에서 가장 가난 했던 섬마을은 생태관광만으로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마을 중 하나가 됐다. 인천시가 이런 사례에 주목해 섬 프로젝트를 보완한다면 고맙겠다. 그것만이 눈앞의 성과에 매몰되지 않고 미래자원으로서 인천 섬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길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글 /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




‘구도(球都) 인천’, 그 자부심에 덧붙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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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한국 근대문화의 발상지이며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근대적인 외교와 무역이 시작된 곳이고, 그래서 근대 초기의 건축과 음식문화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야구 역시 인천의 그런 특성과 내력이 낳은 한 가지 산물이다. 선교사 질레트(한국명 길예태)가 YMCA 서울지부의 청년들을 모아서 최초의 한국인 야구팀을 만들고 외국어학교 학생팀과 성동원두(훗날 동대문운동장. 오늘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터)에서 경기를 벌였던 1904년 무렵이 공인된 한국야구역사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정식으로 수입되기 이전부터 부두와 외국인 주거지역 근처 공터 곳곳에서 미국인 병사들과 일본인 학생들에 의해 야구가 시작된 것도 인천이었고, 본격적으로 야구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도 인천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개 근대문화란 빛인 동시에 어둠이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지만, 동시에 식민지로 전락해가며 전통문화를 강제 폐기당하던 시절의 흔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근대적인 복식문화란 ‘단발령’이라는 문화적 폭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근대적인 여행문화란 ‘철도부설’이라는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의 전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듯 말이다.
야구 역시 외세의 물결을 타고 들어온 것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야구라는 것 역시 원래 미국에서 시작된 공놀이고, 일본 사람들이 일찍부터 즐겼던 스포츠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어지간한 다른 문화들과 달리, 한국에서 야구만큼은 굴종 대신 저항 속에서 싹을 틔웠고, 막연한 추종보다는 자발적인 열기 속에서 뿌리를 내렸다는 점이다.

‘황성 YMCA 야구단’이 결성되고,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3.1운동을 벌여 민족의 독립의지를 안팎에 과시하는 숨가쁜 세월을 막 지났을 무렵, 인천에서 ‘한용단(漢勇團 : 용감한 남자들이라는 뜻)’이라는 한국인 학생야구단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주말마다 인천항 근처 웃터골(지금의 제물포고등학교 운동장 자리)이라는 곳에서 일본인 학생이나 직장인들로 구성된 팀과 경기를 벌이곤 했는데, 많을 때는 수천 명의 관중들이 몰려들어 그것을 관전하곤 했다. 황성 YMCA 야구단의 경기가 열리던 성동원두에 모인 사람들이 오직 신기한 서양식 공놀이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렸다면, 한용단의 경기가 열리던 웃터골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드디어 응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용단은 일본인 야구팀과 종종 야구대결을 벌였고, 한용단을 응원하는 것은 일본 경찰들의 눈을 피해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한용단이 결국 일본인 팀과의 경기에서 일본인 심판의 편파판정 때문에 억울한 역전패를 당했을 때 한국인 관중들이 집단적으로 항의했던 사건 때문에 강제 해산됐다거나, 해체된 한용단의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고 ‘고려야구단’이라는 팀을 재결성해 해방 이전 한국 야구사에 민족적인 흐름을 이어간 자세한 사정을 굳이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다만 인천은 단지 야구가 처음 전해지고 시작된 곳이라는 의미를 넘어, 야구라는 서양문화를 주체적이고 민족적인 문화로 승화시킨 곳이라는 점을 짚고 강조하고 싶다.

오늘날 야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관중과 시청자를 끌어 모으는 스포츠이며, 가장 많은 경제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산업분야다. 하지만 만약 그 역사를 더듬어갈수록 낯이 붉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족보를 가진 것이었다면 어쨌을까, 생각해볼수록 아찔하고 그래서 참 다행스럽다.
‘구도(球都)인천’. 그 네 글자는 인천에 살면서 야구를 사랑하는 이들이 가지는 한 가지 자부심이다. 하지만 그 자부심 안에 혹 ‘야구가 처음 도입된 곳’이라거나 ‘50년대와 60년대에 국내 최강의 야구팀을 가졌던 곳’이라는 의미만을 담아두었던 이들이 있다면, 한두 가지쯤 더해줄 필요가 있다. 이곳 인천은 한국인들이 비로소 야구라는 낯선 공놀이를 즐기기 시작한 곳이며, 후대의 야구팬들 역시 그것을 당당하게 즐길 수 있게끔 해준 곳이라는 뜻 말이다.

글 / 김은식(작가, 『삶의 여백 혹은 심장, 야구』 저자)




일확천금의 도시, 인천! – 춘원 이광수의 장편 <재생>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은 전국 유일의 공공 종합문학관입니다. 근대문학을 중심으로 한 근대 한국학 자료 약 3만 점을 소장하고 있는 콘텐츠 중심형 문학관이기도 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 자료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문학관에 직접 오셔서 한국 근대문학이 가진 의미와 매력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01 일확천금의 도시, 인천! – 춘원 이광수의 장편 「재생」
「재생」은 춘원 이광수가 1924년 11월 9일부터 이듬해 9월 28일까지 총 218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장백산인(長白山人)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장편소설이다. 「무정」과 「개척자」에 이은 3번째 장편소설로 삽화는 우리 근대 삽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석영 안석주(1901~1950)가 그렸다.

이 작품은, 돈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돈을 선택하는 여인과 돈으로 인해 사랑하던 애인에게 배신당한 남자가 후일 부자가 되어 복수를 꿈꾼다는 내용을 가진 전형적인 통속 대중소설이다. 사랑과 다이아몬드 사이에서 결국 후자를 선택하고 사랑을 배신한다는 저 유명한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장한몽」(1913))의 이광수 식 버전이다.

이 작품에서 인천은 애인에게 배신당한 남자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일확천금을 꿈꾸는 곳으로 등장한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여인이 자신을 버리고 부자의 첩으로 가자 남자는 여인에 대한 복수, 즉 500만 원을 벌기 위해 인천에 내려와 미두중매소(오늘날의 증권회사)의 직원으로 취직하는 것이다. 현재 국민은행 신포동 지점 자리에 있었던 인천 미두취인소는 오늘날의 선물거래소와 같은 곳으로, 일제강점기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들던 곳이다. 이광수는 이 작품에서 인천과 미두취인소를 “거의 모든 계급, 모든 종류 사람들이 갑작부자를 바라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곳”으로 그렸다. 또한 「재생」에는 월미도도 등장하는데, 월미도는 더위를 식히는 피서지이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인상 깊게 묘사되어 있다.

함태영 / 한국근대문학관 학예사




보여지는 인천이 아닌 느껴지는 인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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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가 한동안 인기였다. 88년도를 살아가던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드라마는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는 흥미를, 그 시절을 관통해온 세대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드라마의 배경은 서울 도봉구 쌍문동이지만 이 드라마의 주 촬영지는 바로 인천이다. 아직도 옛 모습을 갖추고 있는 동네 인천은 과거를 회상하는 드라마, 영화의 주 촬영지이다.

그러나 미디어가 조명하는 것과는 달리 인천은 과거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것처럼 평상에 앉아 찬거리를 다듬는 주민들도, 매일매일 친구들이 모이는 누구네 집도 더 이상 흔한 풍경이 아니다. 저층 주거지, 구도심 지역은 점차 개발되고 점점 이웃이란 개념이 옅어지고 있다. 활기차던 골목은 점점 죽어가고 죽어간 골목에는 곧 신작로가 들어선다. 뛰어 놀던 아이들도, 짖어대던 강아지도, 동네에서 살아가던 주민들도 사라지고 머물지 않는 차들만이 길을 가득 메운다.

문화를 만든다는 CJ가 TVN을 통해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를 만들고 과거의 미담을 담아냈지만 사실 그것은 과거의 삶을 재조명한 것에 불구하다. 골목과 동네의 풍경은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네 골목어귀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노래 소리, 번듯한 극장은 아니지만 모여서 함께 보던 TV,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축하하고 즐겼던 동네잔치 등. 대중 매체 같이 큰 영향력을 갖지는 못하더라도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피부로 느껴지는 문화다.

세월은 흐르고 강산이 변해 옛것을 무작정 붙들고 있을 수만은 없겠지만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는 공동체는 그 모습은 바뀔지언정 여전히 소중한 가치이다. 동네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힘겨운 일들을 함께 털어내고 즐거운 일들을 상상하는 공동체 속에서의 삶은 재미있는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충족감과는 비할 수 없다.

‘응답하라 1988’에서도 평상은 동네 사람들의 수다의 장이다. 그 위에서는 함께 하는 일거리들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동등하게 자리한다. 그리고 평상은 만든 사람은 있지만 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머물고 누구나 무엇이든 한다. 골목에 평상이 사라지고 나서 함께 사라진 것은 바로 동네주민들 간의 소통인 셈이다. 모여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곳, 서로가 서로에게 신뢰를 쌓는 곳이 바로 평상이며 이 작은 평상의 역할은 그리스 아테네의 광장과 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서로간의 소통과 관계를 맺는 공론장이다.

공론장은 주민자치위원회처럼 행정적으로 보장된 형태일 수도 있고 동네도서관이나 놀이터 같이 작은 것일 수도 있다. 크기나 형식을 떠나 그 안에서 얼마나 자유롭고 평등한 소통이 시작되는가를 살펴보고 그 시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함께 키워나가는 것이야말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걸어가다보면 다양한 걸림돌을 만날 것이며 어쩔 때는 넘어지기도 제자리걸음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하는 한걸음이 소중하고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함께하는 것이 지금의 동네에, 인천에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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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거창한 담론으로 그리고 상업적 시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세세한 소통의 과정, 사람들이 살아가며 만들어 내는 일상적인 것으로 볼 때 거대 매스미디어가 아니라 동네의 소소한 문화가 보인다. 그리고 이 문화는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소비되지도 않고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 동네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으로 자리를 잡는다. 보고 즐기는 즐거움이 아니라 내 피부에 느껴지는 즐거움, 만든 것을 보는 즐거움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즐거움이 바로 동네를 키우고 인천을 키우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미디어가 보는 인천은 산, 바다, 공항, 항만, 신도시와 구시가지 등의 다양한 모습을 갖춘 매력적인 곳이다. 인천이 매스미디어에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천의 다양함이 TV와 스크린에서 배경으로만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한다. 동네가 떠들썩한 인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나가는 인천이 되었으면 한다. 이것이야 말로 인천의, 인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한다.

라정민
청소년인문학도서관 느루 청년활동가/사회적협동조합 인천여성영화제 교육기획자




축구의 문화적 가치 창조를 위한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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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여성들은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또 하나 여성들이 싫어하는 이야기가 축구 이야기다. 그렇다면 여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의 결정판은? 바로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다. 이 정도면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아재 개그’는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다. 당연히 지금은 아니다. 군대는 몰라도 축구라면, 위의 이야기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해묵은 유머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여성들 중에서 열성 축구팬을 찾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기장에서 여성들의 응원이 더 열성적일 때도 있고, 심지어 아줌마들도 축구단을 구성해 슛을 날린다.

문화를 논하기 위한 지면에서 뜬금없는 축구 이야기는 사실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인천이 품고 있는 축구의 문화적 가치를 엿보기 위함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축구를 문화 현상으로 해석한다. 더 나아가 「축구자본주의」 같은 책에서는 경제적 관점에서 축구를 해부하고 있다. 경제까지는 아니더라도 필자는 축구와 문화 사이에는 분명 교집합의 빗금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인천을 들여다본다. 인천은 축구와 문화를 접목시킬 수 있는 최고의 여건을 갖춘 도시다. 스포츠는 스토리텔링이 접목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축구 또한 예외가 아니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유로2016’에서 8강의 기적을 일군 아이슬란드나 지난 시즌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챔피언 레스터시티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 때문에 최근의 스포츠 관련 보도 또한 단순한 스코어를 나열하는 것이 아닌, 경기 이면에 감추어진 이야기에 주목하곤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축구 도시’로서 인천의 무한한 가능성이 엿보인다. 인천에는 축구에 얽힌 기막힌 스토리텔링 소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스토리텔링은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19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성공회 소속 선교사로 추정되는 ‘시드니 J 파커’라는 한 영국인이 1901년 겨울에 강화를 방문했다. 그는 강화에서 어떤 축구클럽을 접하게 된다. 바로 강화학당 축구팀이다. 한복 유니폼(?)을 차려입은 이 축구팀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그해 3월 21일 영국 성공회 발행잡지인 ‘모닝컴(Morning Calm)’의 편집자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편지는 ‘편집자에게 지면에 반영될 만한 흥미로운 사진을 보낸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DEAR Mr. EDITOR, I here with send you a few more photographs which you may find interesting enough for the pages of Morning Calm.)

편지는 이어 “강화학당 축구팀이 G. A. 브라이들 목사에게 수년간 훈련을 받았다(Kang Hoa School fooball team, which has been carefully trained for some years by Rev. G. A. Bridle. )”며 “선수들이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고, 좀더 체계적인 훈련을 받는다면 잉글랜드 리그 진출도 가능하다.(The boys play a very good game, and after a little more training would be quite capable of taking part in some of the league matches in England )”는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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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이 편지는 한 세기 넘는 세월 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채 봉인돼 있었다. 그러다가 2007년 한국 근대 해군 창설과 관련한 옛 자료를 조사하던 인천 강화문화원이 서울 성공회대학교에 보관중인 옛 마이크로필름을 확보, 필름의 내용물을 분석하다가 바로 이 내용을 담은 8줄 가량의 영문 문서와 사진 1장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경인일보(2007년 7월20일자)에 ‘1901년 강화에 축구팀 있었다’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338740)라는 제목으로 최초 보도돼 체육계와 역사학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무려 115년 전에 잉글랜드 리그 진출도 가능한 축구팀이 우리나라에 존재했었다니… ‘유로2016’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바로 호날두의 소속팀인 레알마드리드(1902년 창단)보다 앞선 시기, 조선의 강화에 축구팀에 존재했다는 것 아닌가. 이 소식을 접했을 때의 흥분을 필자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이처럼 소중한 역사를 담은 문헌이 아직까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헌의 내용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대한민국의 축구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 근대 축구의 보급 연도(1904년)는 물론 국내 최초 공개 축구 경기 연도(1905년) 등 대한민국 근대 축구사를 수년 앞당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 체육회는 물론 인천시 등 그 어떤 공공기관도 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이 강화 축구팀의 스토리를 통해 다양한 문화적 파생상품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소설도 좋고 영화도 좋고, 요즘 유행하는 웹툰도 좋다. 야구에서는 이미 ‘YMCA 야구단’ 같은 영화로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진 바 있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심도 깊은 조사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조사와 연구를 토대로 학술대회 등을 통해 한국의 근대축구사를 재정립한다면 인천은 ‘대한민국 축구의 발상지라’는 새 타이틀을 갖게 된다. 인천시가 추진하는 ‘인천 가치재창조 사업’의 내용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니던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같은 재미없고 진부한 스토리텔링은 무시해도 된다. 그러나 ‘강화의 축구 이야기’ 처럼 인천의 위상을 드높이고 시민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는 소재라면 마땅히 새로운 조명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임성훈 / 경인일보 인천본사 문화체육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