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마을 공동체를 꿈꾸는, 서구 아라마을 문화기획단

아라마을 문화기획단을 만나러 가는 길… 필자는 초행길에서 십중팔구 헤매는 탓에 출발 전 지도 앱을 여러 번 확인했건만, 역시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기자가 늦다니 이런 실례가 또 있나’라고 생각하면서 진땀을 흘리며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인터뷰 장소와 점점 더 멀어졌다. 혼자서는 도저히 못 가겠다 싶어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자 마중 나갈 테니 기다리라는 답이 돌아왔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유쾌한 에너지가 가득 차 있어 긴장이 풀어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라마을 문화기획단의 고지혜 대표였다.

손에 손잡고 마을을 넘어

고지혜 대표와 함께 인터뷰 장소의 문을 열자 화기애애하게 데워진 공기가 훅 쏟아져 나왔다. 아라마을 문화기획단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소식에 하지은, 이희영, 허기연, 김민정, 전희진 회원이 이른 아침부터 자리해준 것이다. 뜨거웠던 그 날의 인터뷰를 전한다.

아라마을 문화기획단은 어떤 계기로 만드셨나요?
고지혜 특정 기획을 통해 만들어진 건 아니고, 마을 공동체 활동에 뜻이 맞은 서구 검암·경서 지역의 시민문화예술 동아리들이 모여 결성하게 됐습니다. 누가 먼저 나선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요. 활동도 인천 마을 공동체 만들기 지원센터에 넣은 첫 기획안이 덜컥 선정되면서 시작하게 됐어요.

첫 기획안 선정 이후 2018년도를 정말 바쁘게 보내셨겠어요?
고지혜 네, 기획안이 통과되고 첫 달에는 마을 주민들과의 주먹밥 소풍, 두 번째 달에는 마을 공동체를 잘 꾸리기 위한 교육을 받았고요. 세 번째로는 ‘서구 청소년 인권법’을 진행했습니다. 청소년 인권센터 ‘내일’의 하유미 강사님을 모셔서요. 그리고 8월에는 간재울중학교에서 ‘아라스 물총놀이’, 9월에는 검암초등학교에서 ‘강강술래 프로젝트’, 12월에는 인천문화재단 짝꿍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아모르 파티’를 개최했어요. 성과 발표와 정산까지 마치고 나니 에너지가 전부 소진된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늘 뭔가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 금방 다음 기획을 궁리하게 돼요.

 

정말 에너지가 대단하세요. 다른 회원분들의 참여계기도 궁금해지는데요.
허기연 전 대표님의 제안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했다가 이제 누구보다 자발적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김민정 멀티플레이가 안 돼서 처음에는 다른 동아리 활동과 병행하지 못하다가 대표님이 일손이 부족해 애쓰는 걸 보고 몇 번 도우러 왔다 갔다 하다 푹 빠졌지요. 저는 처음에는 자의는 없었어요(웃음).
전희진 대표님과 ‘우주최강 미녀들의 캘리그라피(우미캘)’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아라마을 문화기획단 결성 소식을 듣고 참여하게 됐어요. 검암동 주민이다 보니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희영 저는 계양구 주민이에요. ‘길 위의 독서’라는 동아리의 대표이고요. 서구 주민은 아니지만, 마을 공동체를 위한 기획과 행사를 주최하는 고지혜 대표의 뜻에 공감해 아라마을 문화기획단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동네에서 주민 스스로 판을 벌이고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던 기획들이 좋았고 즐겁게 활동하고 있어요.

 

와서 함께 즐기자

아라마을 문화기획단의 활동 중 특히 ‘아라스 물총놀이’와 ‘강강술래 프로젝트’가 많이 회자되고 있어요.
허기연 간재울중학교의 장소 지원을 받은 ‘아라스 물총놀이’는 정말 여러모로 재밌고 의미 있었어요. 아이들은 물총을 쏘고 물풍선을 터뜨리며 학업 스트레스를 풀고 어른들도 오랜만에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시원하게 여름을 즐긴 행사였지요. 참여자 모두 만끽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전희진 ‘강강술래 프로젝트’는 참여한 주민 모두가 손에 손잡고 운동장을 돌았던 것도 좋았지만, 부대행사로 마련한 전통공예와 전통놀이를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마을 어른과 아이가 하나 된 시간이었습니다.
김민정 김포에 사는 제 동생이 ‘강강술래 프로젝트’에 왔었는데 많이 부러워하더라고요. 자기 동네는 신도시라 이런 끈끈한 마을 기획이 없다면서. 같이 놀 수 있는 행사가 김포에도 있었으면 했어요.
이희영 강강술래 때 제가 신나서 운동장 도는 걸 목격한 제 조카가 이모가 그런 것도 하냐며 놀라더라고요. 저는 계양구에 거주 중이지만, 이제 여기 주민이나 다를 바 없다고 느껴요. 좋은 활동이라면 지역을 따지지 않고 참여하며 돕고 배우고 싶습니다.
하지은 돌이켜보면 마을 주민이 함께해서 참 좋았다 싶어요. 또, 물총놀이는 간재울중학교, 강강술래는 검암초, 인권교육은 고잔마을 측에서 장소 지원을 해주셔서 가능했지요. 마을 모두가 우리 기획과 함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규모 있는 행사를 진행하다 보면 보람도 크지만, 어려움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고지혜 정산 문서로 우리의 활동을 가늠하는 게 아니라 직접 와서 봐주셨으면 해요. 이건 아라마을 문화기획단뿐 아니라, 다른 시민동아리들이 지원금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지원을 통해 얼마나 성장했는지 등을 알려면 와서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더 의욕적으로 할 수 있을 거예요.
김민정 저도 와서 보셔야 지원하는 기관과 동아리 사이에 신뢰가 생긴다고 생각해요. 피드백은 지역 기여를 위한 노력으로 이어질 테고요.
전희진 시민동아리가 이용할 수 있는 대관 장소가 부족한 것도 알아주셨으면 해요. ‘아라스 물총놀이’나 ‘강강술래’는 저희 뜻을 좋게 봐주신 학교 측에서 장소 지원을 해주셨지만, 짝꿍 페스티벌 ‘아모르 파티’를 개최했던 장소는 대관에 어려움이 있었어요.
고지혜 저희 아라마을 문화기획단은 열심히 기획하고 활동하고 있으니까 저희 활동을 더 많은 분이 함께 해주셨으면 해요. 문화재단과 기관 직원분들도 언젠가 오셔서 함께 즐기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고지혜 대표는 필자도 시민동아리 대표라고 하자 올해 활동 프로그램 교환을 제안했고 단체 사진 촬영 때는 테이블에 세팅도 해주셨다. 그 유쾌함이 아라마을 문화기획단을 이끄는 동력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라마을 문화기획단을 한마디로 표현해달라고 하자 ‘새로운 시도, 마중물, 특별하고 재밌는 경험, 나에게 에너지를 주는 동시에 에너지가 소진되는 곳, 미친 척하고 미친 듯 놀 수 있는 즐거움을 주는 곳’ 등의 대답이 연이어 나왔다. 애정이 진하게 묻어있는 한 마디들이 좋은 에너지가 되어 전달되었다. 마을에 들어설 때는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마을을 나설 때는 연대의 연결점이 된 기분이었다. 긍정적 관점과 넘치는 에너지로 마을 공동체의 놀이문화를 새롭게 짜고 있는 아라마을 문화기획단의 활동은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서, 보고, 함께 즐기자.

글·인터뷰 / 생활문화동아리 일일 시민기자 김태겸




함께 계절을 만끽해요 – 절기(節氣) 체험 동아리 ‘학산 마실’

미추홀구 학산생활문화센터 ‘마당’에서 마을 주민들과 사계절의 정취를 나누는 ‘학산 마실’이 호평 속에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주민들에게 편히 놀러 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이름 ‘학산 마실’. 그곳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지 기대되는 마음에 활동가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가벼웠다. 

열정을 잇다

‘학산 마실’의 민후남 대표는 학산문화원 영화감상동아리 ‘하품학교’의 교장으로 지난 16년 동안 종횡무진 활동했다. 워낙 영화광인 데다 영화를 보고 친구와 나눴던 얘기들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었기에 그 특별한 즐거움을 주민들과도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몸이 피곤하거나 무료하면 산소 공급을 위해 하품하는 것처럼, 영화를 통해 일상에 하품 같은 활력을 붙어 넣자’ 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그 후 16년간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함께 볼 영화와 이야기할 주제를 선정했다. 어느덧 60대가 된 민후남 대표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하품학교’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자 자존감을 높여준 고마운 존재였다.”라고 한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수없이 크고 작은 영화제가 생기고 비슷한 영화 감상 프로그램이 늘어나면서 ‘하품학교’는 변화의 기로에 서게 됐다. 그때 민후남 대표의 마음에 떠오른 단어가 ‘마실’이었다. 16년의 열정은 그렇게 새로운 절기(節氣) 체험 동아리 ‘학산 마실’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학산 마실’ 활동가들과 멘토, 학산문화원 기획실장이 함께하는 회의   8월 마실’ 포스터 이미지 제작 중인 이혜숙 주민활동가

향기로운 ‘마실’

민후남 대표와 뜻을 같이한 여러 주민활동가가 합류하여 ‘학산 마실’을 만들고 운영하는 데는 멘토인 드라마고 ‘퍼포먼스 반지하’ 대표의 도움이 컸다. 공존을 위한 마을 생태계 조성에 힘써온 멘토와의 기획 회의에서 ‘절기(節氣)’라는 주제 단어를 떠올릴 수 있었고, 절기 공부를 통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즐길 놀이 개발에 이를 수 있었다고 한다. 올해 문을 연 마을 절기 축제 ‘마실’은 사계절에 맞춰 네 번 열리며 지난봄(6월), 여름(8월), 가을(10월) 행사를 성황리에 마쳤다. 현재는 12월 19일에 있을 겨울 ‘마실’을 앞두고 기획 회의와 준비에 한창이다.

“멘토 선생님이 절기에 관한 공부 거리를 가져오시면 우리는 이 절기에는 이런 게 맞겠다 싶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요. 지난 ‘8월 마실’ 때는 연잎밥을 만들어 먹었는데 흔치 않은 체험이고 맛도 있다고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봄 감자, 가을 고구마처럼 계절 간식을 나눠 먹기도 하고 꽃차 만들기, 그림 그리기, 오카리나 배우기 등도 함께해요. 활동가들의 재능기부로 진행되는 체험 프로그램에 이어 삼삼오오 앉아서 영화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어느새 공간은 계절로 가득하지요.” 민후남 대표는 오후 3시부터 밤 9시까지 진행되는 ‘마실’을 위해 공간을 비워주고 참여부터 마무리까지 따듯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는 학산문화원이 있어 의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 전문가와 기관이 보내는 신뢰를 밑거름 삼아 주민들의 아이디어와 실천이 모이고, 그 활력으로 직조된 마을의 이야기가 주민들 삶에 퍼져나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분명 향기로울 것이다.

 
‘6월 마실’ 그리기 체험 ‘모두 함께 그리는 아까시 나무’   ‘8월 마실’ 만들기 체험 ‘더위를 닦아내는 나만의 손수건 만들기’

그리고 봄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이혜숙 주민활동가에게 ‘학산 마실’이란 어떤 존재인가 물었더니, 잠시 말을 고르다가 “제법 스트레스. 그러나 어디까지나 긍정적 의미의 스트레스다.”라고 답했다.

“어느덧 올해는 ‘겨울 마실’만 남았는데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습니다. 저는 학산문화원에서 ‘그림책 놀이터’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마실’과 함께 하게 되었어요. 그리기 체험, 홍보물 디자인을 주도하고 있는데, 6월부터 두 달 간격으로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다 보니 제법 스트레스예요. 기획부터 제막까지는 계속 바쁘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잘 해내고 싶은 데서 오는 긍정적인 스트레스지요.”

행사 소식을 듣고 찾아온 아이들과 부모들로 북적북적한 학산생활문화센터 ‘마당’에서, 준비해온 간식과 식사를 나눠 먹을 때 주민들 사이에서 물씬 피어오르는 정이 특히 좋다는 이혜숙 활동가는 앞으로도 계속 마을 주민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획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덧붙였다.

‘마실’ 오세요

민후남 대표의 2019년은 어떻게 기록될까.
“‘하품학교’가 침체기에 있던 중에 ‘학산 마실’ 활동을 시작하면서 기획 공부를 많이 하게 됐고 ‘마실’을 잘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설픈 구석이 있을지 몰라도 꾸준히 살을 붙여나가고 싶어요. 저는 미추홀구 토박이에요. 말하자면 여긴 엄마의 자궁 같은 곳이죠. 그리고 학산문화원은 IMF 외환위기 시절 나를 쓰러지지 않게 잡아준, 전환점이자 성장의 공간이었습니다. 새로 시작한 ‘학산 마실’이 올해 걸음마를 무사히 떼었으니 내년에는 잘 걸을 수 있도록 다시 열심히 키워보려 합니다.”

(좌) 민후남 ‘학산 마실’ 대표, (우) 이혜숙 ‘학산 마실’ 활동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네 번 피고 지는 동안 사람은 무수히 넘어지고 일어선다. 삶은 쉴 새 없이 희비극을 오간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으로 이루어진 마을 공동체의 이야기는 행간에 희망을 품고 피고 지는 삶들로 페이지를 더하며 새롭게 쓰인다. 16년을 한결같이 미추홀구의 주민 문화예술 활동가로 헌신한 민후남 대표와 시작을 알린 ‘학산 마실’ 동아리가 탐스럽게 피워낼 다음 계절이 기대되는 이유다. 주민의 일상과 삶에 친숙하게 맞닿은 기획으로 ‘함께, 즐겁게, 놀자’ 하는 ‘학산 마실’의 다음 일정은 미추홀구 학산문화원 홈페이지와 SNS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술은 매일 먹는 음식이고 언제나 곁에 있는 친구이며 쉽게 만나는 들풀 같은 것이다.
– ‘빵과 인형극단’ 예술감독 피터 슈만

 

글·인터뷰 / 생활문화동아리 일일 시민기자 김태겸




해금 동아리 ‘해금꽃비’를 만나다

눈부신 아침햇살이 마당 한가득 들어찬 청소년문화공간 다누리에서 해금꽃비김희자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해금을 가까이에서 많이 접한 경험이 없어 흔히 국악을 전공한 분들이 하는 악기라고만 생각했는데 인천에 해금 동아리가 있다고 하여 궁금증이 더욱 커졌습니다.

동아리가 처음 만들어진 이야기를 해주세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 시작했어요. 어느 날 딸이 아주 감동적인 친구 결혼식장에 다녀왔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친구의 아버지가 축가로 색소폰 연주를 했는데 너무 감동적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우리 딸이 결혼할 때 축가로 연주할 악기를 하나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찾아보기 시작했죠. 살면서 음악은 전혀 접해본 적이 없어서 인터넷으로 오카리나, 기타, 드럼 등 여러 악기를 찾아 고민하다가 신부 엄마가 한복을 입을 때를 생각해서 국악기를 선택하게 되었어요. 음악으로 힐링한다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도 이해해 보고 싶기도 했고요.

악기를 선택하신 후에 어떻게 배우게 되셨나요? 
엄청나게 검색해봤지만 거의 없었어요. 어렵게 찾아보니 인천에는 세 곳 정도가 있었는데 그중에 서구여성회관 프로그램이 시간대가 맞아서 만 3년 전에 입문하게 되었죠.

해금 연주를 처음 시작할 때 어떠셨어요?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어요. 저보다 몇 년을 앞서 배우신 분들도 있었는데 한결같이 어렵다더라구요. 그 이후로 ‘대금 10년, 해금 30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때 ‘아차! 악기 잘못 골랐다’ 싶기도 했어요. 그래도 노력은 했죠.

그런데 어떻게 동아리를 만들게 되셨나요?
같이 배우는 분들에게 어떻게든 무대를 만들어 볼 테니 공연 준비를 하자고 제안했어요. 공연 준비로 연습하면서 실력을 키울 수 있는 확실한 계기를 만들어 본 거죠. 이때 여덟 명이 같이 연습을 시작했고 그 후에 동아리로 발전하게 되었어요. 그때 저희는 정말 열심히 연습했고 실력도 급성장하게 되었죠.


‘해금꽃비’에 대한 이야기 좀 해주세요.

저희 단원은 현재 8명이고 2년 전에 만들어졌어요.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 있고요. 가정주부도 있지만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분들이 함께하고 있어요. 정기모임은 매주 목요일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합니다.

동아리에 강사 선생님이 따로 계신가요?
아니요, 저희는 서구여성회관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곳 프로그램을 통해 수업을 받았어요. 최근에는 해금 강좌가 인기라서 인터넷으로 수강신청을 하려면 경쟁률이 너무 높았죠. 그러던 중 부평구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강사 지원프로그램을 통해 개인 레슨을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실력이 많이 향상될 수 있었어요. 저는 강사의 역할이라기보다는 동아리 운영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다행히 회원 개개인이 재능을 갖고 있어 곡을 선정하는 담당, 음원을 제작하는 담당이 따로 있어요.

해금이라는 악기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해금은 찰현악기라고 해요. 밀어서 내는 악기라는 뜻인데 이런 유형의 악기는 원시 악기라고 해서 어느 나라에나 있는 악기죠. 중국의 얼후하고도 비슷한데 얼후의 소리는 개량되었다고 볼 수 있고, 해금은 명주실을 사용하여 전통 그대로의 소리를 갖고 있죠. 

해금을 처음 배우고자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주세요.
해금은 명주실에 말총 활을 쓰기 때문에 스틸보다는 부드럽지만, 계속 연습을 하다 보면 손이 아프고 관절도 아플 수 있어요. 해금은 고정된 것이 없고 공중에 떠 있는 줄을 양손으로 모두 이용하여 소리를 내기 때문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어렵다고 할 수 있죠.

해금은 악보를 보고 연습하나요?
국악은 정간보를 사용합니다. 요즘엔 기존 곡을 연주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 땐 오선지에 있는 음을 손가락 기호로 표시해 연습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이유로 해금을 시작하셨지만, 동아리 활동을 통해 삶의 변화가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저는 동아리 모임 시간을 최대한 많이 활용하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니 너무 열심히 연습해서 몸에 탈이 나기도 했지만요. 그리고 집에서 연습하면 시끄럽게 소리가 날 수밖에 없으니 가족들이 피해를 많이 받았겠죠?(하하) 그리고 예전에는 야외에서 운동을 많이 했는데 동아리 하면서는 실내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아졌죠.

동아리의 재정적인 운영은 어떻게 해나가세요?
엄마들이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이 쉽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따로 회비를 걷지는 않아요. 작은 공연을 통해 받는 출연료를 모아서 부평생활문화센터 모임 공간을 대관하거나 공연 유니폼을 맞출 때 보태어 사용합니다. 최근엔 부평구문화재단의 동아리 지원금을 받아서 저희에겐 큰 힘이 되었고 정말 고마웠죠.

‘해금꽃비’라는 이름은 누가 만드셨어요?
저희 팀원들이 여러 이름 가운데 투표로 결정했어요. 해금이라는 악기로 촉촉하게 적셔주는 꽃비가 되면 좋겠다는 이름입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해금이라는 악기로 일면식도 없는 8명이 모였잖아요. 처음에는 동아리에 대해 생각하는 점이 모두 달랐어요. 그래서 팀 화합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예를 들어 우리는 ‘공연을 위한 팀’이라고 여기면서 실전처럼 연습에 매진하는 등 최소한의 규칙에 합의부터 했죠. 비록 아마추어이지만, 공연이 있을 때는 의상을 갖추고 리허설을 반드시 하는 등 단 10분의 공연을 위해 많은 기다림과 노력을 해요. 이때 그 시간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 개인 비용으로 처리하다 보니 좀 어려울 때가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작게는 ‘회원들의 생일 파티는 꼭 해주자’라는 소소한 계획도 있고, 크게는 인천을 넘어 전국 국악 경연 대회라든지 국악방송 등에도 나가고 싶은 계획이 있습니다. 점차 공연 기회와 지역을 넓혀갔으면 좋겠어요. 인천시에서 하는 특별한 행사에도 참여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동아리 인원도 늘려가야겠지요.

해금에 처음 입문하신 분들이 ‘해금꽃비’에 들어와 활동할 수 있나요?
처음 해금을 접하시는 분이라면 반드시 전공자에게 배우시고, 기본 실력을 갖추셨을 때 저희와 같이 활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인원이 좀 많아지고 활동량도 많아지면, 해금이라는 악기를 동아리에서도 배우고 즐길 수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어요.

다른 장르와의 협연도 가능할까요?
다양한 악기와 협연도 가능합니다. 오카리나, 기타, 하모니카, 가야금도 좋고요. 다만 모두가 연습 시간을 맞추는 일이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동아리 자랑 한 번 해주세요.
동아리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부분들을 회원들이 정확히 나눠서 각자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재정, 음식, 의상, 음원, 선곡, 자원봉사 활동을 담당하는 회원들이 다 따로 있죠. 물론, 분위기도 아주 화목하고 좋습니다. ‘해금꽃비’ 많이 불러주세요.

‘해금꽃비’는 활동 범위를 계속 넓혀 여러 사람에게 해금이라는 악기를 소개하는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금이 가진 처연한 소리가 모든 장소에 어울리지 않아 국악이 어울리는 행사가 많으면 좋겠고, 특히 아이들에게 해금을 소개하는 자리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전공자를 통해 기본을 익히는 것이 중요한데 배울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 아쉬움도 전하셨고요. 마지막으로 해금뿐만 아니라 우리 국악기에 대한 강좌 프로그램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건네시면서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글 · 인터뷰 / 생활문화동아리 일일 시민기자 허명희




다문화밴드 ‘너나우리’ 를 만나다.

배다리 청과물 시장 맞은편, 악기점이 늘어선 도로변에 자리한 허리우드 악기사 2층에는 뮤직 갤러리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여러 동아리 중 다양한 국적에서 온 다문화 밴드가 있어 그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중국, 일본, 모로코, 필리핀, 베트남이 고국인 그들은 결혼이민으로 한국에 살며 밴드 ‘너나우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때마침 연습을 마치고 악기를 정리하는 시간이어서 다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먼저 동아리 소개를 해 주세요.
‘너나우리’는 어쿠스틱도 하고 밴드도 하는 다문화 밴드지만 외국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한국 아줌마들도 있어요. 결혼 이민자와 한국 아줌마가 서로의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는 모임입니다.  

다문화 밴드인 만큼 회원들이 어느 나라에서 오셨는지 소개도 해주세요.
(선생님) 현재 회원이 10명이에요. 처음에 다문화 센터에 가서 이런 모임을 만들려고 하니 도와달라고 했어요. 처음 오신 분들은 주로 중국 분들이 많았고 지금은 일본, 모로코, 베트남, 필리핀, 페루에서 오신 분들도 있어요. 

동아리가 처음 만들어지게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선생님) 2017년에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노래를 선정하여 중창단을 꾸리기 시작했어요. 결혼 이민자들이 노래를 통해 한국어도 배우고 발음 교정도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죠. 그 당시에는 15명 정도가 함께 했어요. 그 당시 한국 아줌마인 송도숙 언니가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주셔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죠. 중창단이기 때문에 화음 부분에서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송도숙 선생님은 어떤 마음으로 함께 하시게 되었나요? 
(송도숙) 우리 선생님이 하시는 거라면 뭐든지 OK입니다. (모두 웃음)

‘너나우리’ 모임에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선생님) 저희가 처음 만난 게 2017년 7월이었어요. ‘만남’, ‘걱정 말아요 그대’ 등 좋은 한국 노래에 화음을 넣어서 10월에 첫 공연을 했어요. 3개월 동안 정말 열심히 했지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분이었어요.

힘들지 않으셨어요?
(마유미) 선생님이 하자!라고 해서 우리는 그냥 열심히 따라갔어요. 그때는 한국어 발음을 잘 못해서 어려웠는데 그래도 외국인이라는 특성이 있다 보니 공연도 하게 된 거죠.

한국 노래를 배우는 건 어떠셨어요? 어렵지 않았나요?
(마유미) 들어본 적도 없는 노래라서 어려웠어요, 그래도 모두 다 똑같이 어려워했는데, 선생님이 쉽고 재밌게 알려주시니까 잘 배울 수 있었어요.
(선생님) 여기 오는 분들은 기본적으로 노래를 좋아하는 분들이 오세요. 리리는 정말 차이나 가수라고 여겨질 정도로 노래를 잘 부르고, 유튜브 방송도 해요. 아스마 씨도 모로코 가수예요. 노래로 요양원 봉사도 다닐 정도거든요.

그럼 중창단에서 밴드 활동은 언제,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선생님) 중창단을 하면서 ‘악기를 좀 배워보자’라고 했는데 모두 흔쾌히 좋다고 했어요. 2018년부터 다 같이 통기타를 배우고, 다문화행사에서 공연 요청이 들어왔어요. 그러다 통기타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젬베도 배우게 되었죠.

집에서 가족들의 반응은 어떠세요?
(마유미) 우리 가족은 아주 좋아합니다. 음악도 배우고 한국에 적응해가는 것도 좋아해요, 스트레스도 풀리고 언니들한테 한국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어요. 배우는 것이 많아서 아주 좋아해요.
(리리) 좋아요. 애들도 좋아하고. 항상 응원해줍니다.
(선생님) 리리의 경우, 우리가 올해 동구 화도진 축제에서 시민 노래자랑에 나갔는데 70팀 중에서 예선을 통과해 12팀이 뽑혀서 본선에 진출했어요. 리리의 딸이 동영상을 찍어서 엄마 목소리라고 좋아하고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고 다녔어요.

분위기가 너무 좋아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을 것 같아요, 이야기 좀 해주세요.
(모두) 중구에 있는 ‘흐르는 물’에서 세계음악소동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저희가 초대되었어요. 그날 저는 한복을 입고 젬베를 치고 리리는 치파를 입고, 마유미 씨는 기모노를 입고, 모두 전통 옷을 입고 한 시간 정도 공연했는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선생님이 계셔서 좋은 이야기만 하시는 거 아닌가요?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야스미) 힘든 거 없어요. 너무 재밌어요. 매주 월,화요일만 기다려지고 여기에 오는 게 너무 좋아요.

‘너나우리’는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나요?
(선생님) ‘너나우리’가 점점 커나가는 걸 보면서 밴드를 만들고 싶은데 아직은 첫발을 뗀 정도이고 내년에는 밴드다운 밴드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타악도 퓨전 타악을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가능하면 체계적으로 음악을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마유미 씨가 대북, 건반, 노래 등 못 하는 게 없고 아스마 씨도 리듬감이 정말 좋거든요,

선생님은 예전부터 여성밴드 활동도 활발히 하신 거로 알고 있는데 다문화 밴드를 하면서 색다른 즐거움이 있을까요?
(선생님) 보람이 많죠. 우리 리리가 언젠가 ‘선생님을 만나서 인생이 많이 바뀌었어요’라고 말했을 때 정말 울컥했어요. 스테파니라는 친구를 위해 <파니>라는 노래를 만들어 평화창작가요제에 내보기도 했죠. 한국 생활에 정착했지만, 조금은 다른 생김새와 서툰 한국어 때문에 결혼 이민자에 대해 편견을 갖고 보는 분들이 아직은 많거든요. 예전보다 좋아지긴 했지만, 여기 있는 이민자들이 음악을 통해서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제가 오히려 너무 보람되죠

우리 동아리 자랑 한 번 해주세요.
(선생님) 우리 같은 동아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결혼이민자와 한국 아줌마가 함께하는 동아리 중에서 전통춤을 추는 동아리는 있지만, 악기를 다루는 밴드 동아리는 독보적이라고 생각해요.
(아스마) 사이가 좋고 가족 같아요.
(송도숙) 다국적이라는 기분이 안 느껴져요.
(리리) 한국에 있는 친정집 같은 느낌이에요.
(선생님) 속상한 이야기를 터놓으면 친정 언니들처럼 편이 돼줘서 든든하다고 송년회 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음식을 갖고 와서 같이 나누어 먹기도 해요.

선생님이 회원들에게 이 자리에서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선생님) 제가 올해 몸이 아팠어요. 지금까지 공연이 있을 때마다 제가 꼭 같이 다녔는데 올해는 다문화축제에서 초청공연을 할 때 저 없이 공연했어요. 공연 동영상을 병원에 있는 저에게 보내줘서 새벽에 봤는데 너무 잘하고 대견해서 엉엉 눈물이 나더라고요. ‘이제 나 없이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에… (눈물) 저 없이도 되어야 하고요.

‘너나우리’에 들어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선생님)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 멤버가 워낙 가족같이 끈끈하다 보니 이들 사이로 들어오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고, 지금 어느 정도 중급단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실력이 초급이신 분들이 따라오기는 쉽지 않아요. 그래서 초급반 클래스가 개설되어야 하는데, 리리와 송도숙 언니가 교육을 맡아주시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회원분들이 선생님이나 다른 동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마유미) 다문화이신 분들이 여기에 꼭 오라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선생님한테는 항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눈물)
(아스미) 우리 멤버들 절대 헤어지지 말고, 끝까지 가요.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송도숙) 살면서 기회가 많이 주어져도 놓치는 사람이 많죠. 여기 계신 분들은 기회를 잘 잡았어요, 선생님만 믿고 따라가면 행복해질 거라 생각해요.

선생님의 노력과 열정과 애정으로 하나가 된 ‘너나우리’이지만, 그 마음을 볼 수 있는 회원이 있어 선생님은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웃음과 눈물이 섞인 기분 좋은 수다였습니다.

*한국말이 서툰 회원의 말은 최대한 그대로 옮기려고 하였습니다.

글 · 인터뷰 / 생활문화동아리 일일 시민기자 허명희




발달장애인합창단 ‘예그리나’ 김상구 지휘자를 만나다.

지난 9월, 2019 동아시아 생활문화축제에 합창단 연합 콜라보레이션 공연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난히 눈에 띄는 합창단이 있었는데 바로 발달장애인 합창단 예그리나입니다.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하모니를 만들어가며 무대에 오르기 위해 애쓴 지휘자의 지도 방식과 그들의 현재와 미래가 몹시 궁금하였습니다. 햇살 드는 카페 한구석에서 김상구 지휘자를 만났습니다.

축제 이후에 아이들과 어떻게 지내셨나요?
매해 진행하는 전국 장애인 합창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연습에 매진 중입니다. 올해는 11월 25일 부산에서 개최해서 일박 이일로 다녀올 예정입니다. 난타북 팀도 있는데 같이 움직이려고 해요.

‘예그리나 합창단’이 만들어진 이야기 좀 해주세요.
2003년도에 처음 창단했습니다. 처음에는 강좌 프로그램으로 진행했는데 나중에는 강사 섭외가 어려워서 초청공연 있을 때만 모이다가 2017년 9월에 제가 들어오면서 정기연습을 진행하는 합창단이 되었습니다.

지휘자님은 어떤 계기로 전임 지휘자가 되셨나요?
저는 성악을 전공했어요. 사회복지 분야는 따로 공부했는데 협회에서 사회복지사로 일을 하다가 인천시에서 주관하는 문화행사에 합창단 초청을 받았어요. 평소 나에게 있는 달란트를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부천에 있는 장애인 합창단을 도와드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인천에도 합창단 지도자가 없어서 제가 돕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죠.

처음 오셨을 때와 지금이랑 합창단원들의 변화는 있나요?
처음에는 친구들이 20명 이내였어요. 합창단이라고 하기에는 인원이 너무 적어서 협회 산하시설(자립지원센터 등)에 자조모임식으로 해서 현재 장애인 친구들이 27~28명쯤 되고 비장애인 어머니들까지 모두 합하면 40명 정도 됩니다.

합창단 활동을 원하는 친구들의 연령 제한이나 조건이 있나요?
없습니다. 저희 친구들은 오히려 장애가 좀 심한 편이긴 합니다. 기존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가능해요. 지금 제일 어린 친구는 고등학교 3학년이고 나머지는 성인으로 나이가 가장 많은 친구는 서른여덟 살입니다.

합창단의 활동량은 어느 정도예요?
작년에는 장애인 친구들만 합창했습니다. 그런데 활동량이 많아지니 실력 있는 공연을 원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비장애인이 재능기부로 함께 하고 있는데, 많지는 않고 현재 열 분 정도가 있으십니다. 감사한 마음에 제가 음료수도 챙겨드리고 여러모로 마음을 표현하니 지휘자가 이렇게까지 애쓰는 게 안쓰럽다며 지속적으로 함께 해주고 계세요.(하하)
요즘엔 저희가 활동도 많이 하고 좀 알려져서 그런지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분들은 어떤 마음에서 오는 걸까요?
어딘가에서 음악 활동을 하셨던 분들이 많이 오세요. 우리 친구들은 20대, 30대이지만 지적 수준은 초등학교, 중학교 수준입니다. 연습 시간은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인데 편안하고 친밀한 분위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45분 정도는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장난치고 그래요. 이때 친구들이 그분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자기소개도 하고 얘기도 하죠. 이런 과정에서 아이들과 친해지기도 하고 보람도 느끼시는 것 같아요.

예그리나 합창단은 기관이나 단체에 속해 있나요?
인천지적발달장애인 복지협회에서 운영하는 합창단입니다만, 따로 예술단 단체 등록을 해서 공모사업도 신청하고 운영도 하고 있어요. 이 예술단에는 브라스 앙상블, 중창단, 난타, 합창단 그리고 팝 밴드도 있습니다.

합창단 활동을 하시면서 힘든 적이 있었나요?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이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긴 합니다. 게다가 일과를 마치고 저녁 6시 이후에 연습을 하므로 에너지가 더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날씨 영향도 받는 편인데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은 날에 아이들도 힘들어합니다. 이런 날은 연습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친구들과 레크리에이션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해요. 그리고 합창단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도 처음에 모두 좋았던 것은 아니고요.

합창단의 목표나 계획이 있으신가요?
공모사업을 신청할 때 일시적으로 프로그램을 신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친구들을 전문예술가로 훈련해서 자립 생활을 할 수 있게 기반을 만든다는 목표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죠. 공모사업의 심사위원분들은 사실 부정적이에요. 장애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는 인정하지만, 이 친구들이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는 회의적이더라고요. 발표회 정도의 수준일 거라고 단정하시는 것 같아요. 사실 친구들이 갖는 자긍심과 자부심은 프로 이상인데도 말이죠.

공모사업을 통해 꼭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하고 싶으신 말씀이 많으신 것 같아요. 조금 더 이야기해주세요.
공모사업을 통해 복지관이나 강당 등을 대관해서 발표회 한 번 하고 끝내는 사업은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순회공연 공모사업을 신청할 때 출연료 지급 명단에 친구들 이름 한 명 한 명 모두 넣습니다. 심사 때 이것에 대해 부정적인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럴 때 저는 이것은 발표 프로그램이 아니라 예술가로 훈련하기 위한 레슨이고 예술 활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부분을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대답하죠. 결과는 예산 축소로 돌아오지만, 금액이 적더라도 아이들이 예술 활동으로 출연료를 받았다는 경험을 얻게 되는 건 큰 보람이 됩니다. 특히 이 부분은 기업과의 매칭도 고민하고 있어요. 기업에서도 장애인 고용기준과 관련해 서로 필요한 부분이 잘 맞으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목표는 친구들이 예술을 통해 자립할 수 있도록 성장하는 것이에요. 비장애인이 하는 것을 장애인이 못한다는 생각은 편견입니다. 장애인도 음대 졸업하고 해외 활동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어요.

예그리나 합창단에 들어오고 싶거나 관심 있는 분들은 어떻게 가입할 수 있을까요?
일단, 발달장애인으로 등록되어 있어야 하고, 발달장애, 지적장애, 자폐성 장애 모두 지원이 가능합니다. 연락처는 협회로 하시면 돼요. 연습 장소는 사회복지회관(간석동 소재) 대강당에서 매주 수요일, 목요일 저녁 6시부터 7시 반까지 하고 있습니다.

예그리나 합창단만의 특징이나 자랑거리를 말씀해주세요.
보통 제조업 등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직장에서 3개월 이상 견디지 못해요. 스스로가 비장애인과 함께 있을 때 상대방의 모든 말과 행동을 아주 예민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견디기 어려운 거죠. 사소한 것도 비교당하고 차별받는다고 여겨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문에 예그리나 합창단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노래하고 어울리는 것 자체가 나도 할 수 있고 해냈다는 자신감을 주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하는 합창단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도 없애줍니다.

지휘자로서 활동하는 동안 가장 기억나는 점은 무엇인가요?
일단 친구들이 무척 밝아졌어요. 소극적인 친구들도 적극적으로 바뀌고. 처음 오디션 할 때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울면서 부르던 소심한 친구가 나중에는 웃으며 아주 좋아하던 기억이 납니다. 얼마 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전 키움과 SK 2차전 때 경기장에서 애국가 제창을 저희가 했는데 이때도 친구들이 너무너무 좋아했죠. 전혀 안 떨려 했어요. 다만 집중을 못 할 수 있기 때문에 계속 말을 걸면서 저만 보게 했죠. 3일간 진행했던 합창제에도 나갔는데 아이들이 무척 즐거워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장애인 예술의 가치도 비장애인의 예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지휘자님으로부터 또 다른 고민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합창단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바로 단원 모집에 어려움을 느끼고 계셨죠. 협조 공문을 정말 많이 보냈지만, 실제로 여러 기관에서는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선뜻 보내주기까지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어렵게 신입 단원이 들어오면 훈련된 기존 친구들과 잘 지낼 때까지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도 필요하다고도 하네요. 인터뷰하던 날 따스한 햇살을 받던 지휘자님의 환한 모습처럼 합창단 예그리나 지휘자님의 노력과 계획이 꽃으로 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글 · 인터뷰 / 생활문화동아리 일일 시민기자 허명희




통기타클래식사관학교 조주은 회장을 만나다.

통기타 동아리 이름이 사관학교라니!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통기타 동아리를 운영하고 있다지만, ‘통기타+클래식+사관학교’라는 이름에 숨겨진 의미가 몹시 궁금하여 연수구 동춘동 먹거리타운 한복판에 있는 연습실을 찾아갔다. 수수한 모습이지만, 다부진 눈매를 가진 회장님은 만나자마자 일정 급수의 레벨을 넘어선 사관생도(회원)가 실전 연습을 한다는 라이브 카페 ‘빈센트’를 보여주셨다. 그렇게 나의 호기심은 더욱 정점으로 치달았다. (빈센트는 회장님이 운영하는 어쿠스틱 라이브 카페이다.)

‘통기타 클래식 사관학교’(이하 사관학교)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저는 원래 부산에서 여러 선배와 음악 활동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동춘동에서 가수 백영규 씨가 일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사무실을 만들었어요. 음악 하는 사람들과 주로 밤에 일했었는데 ‘단체 하나 만들어 좋은 일 좀 하면서 살자!’라는 마음에 시작했죠. 하지만 일 년도 채 안 되어 그 팀이 와해되고 그로부터 3년 후 후배와 함께 새롭게 만들었죠. 그렇게 사관학교가 생겨난 지 4년 정도 되었습니다.

동아리에 통기타와 클래식기타가 같이 있나요?
제가 원래 클래식기타를 전공했어요. 5년 전쯤 일렉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죠. 여기 와서 통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도 만났고 그렇게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이게 되더군요.

사관학교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되었나요?
공연을 전쟁에 비유하자면, 전쟁에 대비해서 언제든, 어디든 무대에 올라가도 악보만 보면 자유자재로 칠 수 있게 자기 나름의 히든카드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동아리에 처음 들어오면 무조건 150개 코드를 외우고, 코드 이론, 화성학 이론, 음악의 멋을 살릴 수 있는 악상기호 등을 익혀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만족하는 음악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을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동아리의 목적이고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회원들이 잘 따라오나요?
못 견디는 사람도 있어요. 왜냐하면 영업하러 오시는 분, 술 마시러 오시는 분 등 다양한 분이 오는데 저희는 진짜 기타를 열심히 배우러 오는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저희는 연습실을 24시간 개방하여 언제든지 연습하러 오시는 분들이 편안히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실력 배양, 인재 양성이라고 할 수 있죠. (하하)

확실한 실력 배양과 인재 양성을 위한 장치가 있나요?
물론이죠. 수시로 점검을 합니다. 코드 준비 상태를 점검하고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올라갈 때는 시험을 봅니다. 혹시라도 낙제되면 다시 초급반으로 내려갑니다.

시험은 어떻게 보나요?
칠판을 이용해 코드 이론, 화성학 이론을 설명하고 여러 회원들이 채점을 합니다. 완전히 학교식이에요. 다른 동아리를 경험했던 분들은 여기에서 제대로 배운다는 느낌이 든다고 이야기도 합니다. 손가락 운지 자세도 최소 8개월간 기초를 확실히 다지고 전체 코스는 2년 정도 바라보고 있어요.

회원들이 동아리에서 경험하는 기타 훈련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세요.
코드 15개를 각각 1초 안에 잡기, 듀엣을 만들어 2주간 화음까지 구성하여 연주하며 노래하기, 곡이 완성되면 무대에서 실전 연습하기, 잘 되면 무대 위에서 감정을 넣어 노래 부르기 등 이렇게 자꾸자꾸 하다 보면 자연스레 업그레이드되는 것을 본인들도 느끼게 되죠.

클래식 기타반은 따로 있는 건가요?
네, 클래식 기타반이 따로 있습니다. 일요일만 운영해요.

정기모임은 언제 있나요?
초급반, 중급반, 핑거스타일반이 있고, 모두 시간을 다르게 배치해서 토요일에 진행합니다. 그리고 숙제도 있어요. 모임 시간에 와서 숙제하면 저에게 딱 걸리죠.

이렇게 까다롭고 어렵게 규율을 정한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회사에 다니다 그만두고 음악을 선택했는데, 당시 마땅히 답을 해 줄 선생님이 없었어요. 퇴직금을 받고 기타 교본을 사서 부산 통도사라는 절에 들어갔었죠. 먼 곳 구석에 있는 암자로 가서 남들은 고시 공부할 때, 저는 기타 공부를 8개월간 했죠. 나중에 든 생각이지만, 가까운 곳에 좋은 선생님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누구든 기타를 통해 소통하고 싶고 정말 배우기를 갈구하고 싶거나 기타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 나는 좋은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비싼 기타를 사서 오는 회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비싼 기타 가격보다는 손이 3천만 원짜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엄격한 교육방식에서 오는 스트레스보다 즐기기를 원하는 회원들의 불만은 없나요?
가끔 있지요. 저는 개념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임에서 나가시라고 말합니다. 그쪽 면에서는 좀 냉정하죠. (하하) 저희는 60대가 3명 정도 계시는데, 그분들이 말씀하시길 왜 진작에 이렇게 정확하게 교육받지 못했는지 후회된다고 합니다. 지금이라도 이렇게 배우지 않으면 앞으로 기회는 없을 것 같다고까지 말씀하세요.

 

회원 모집은 어떻게 하고 계세요?
네이버밴드로 하고 있습니다. 영흥도, 선재도, 부천, 안산 등지에서도 오시는 분들도 있어요.

회장님이 동아리를 만들고 직접 운영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내가 가진 음악의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은 거죠. 생각과 느낌은 아는데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분들을 돕고 싶어요. 가르치는 형식을 통해 느끼는 감정을 표현으로 공유할 때 가장 즐겁기 때문입니다.

동아리 회비가 있나요?
월 5만 원입니다. 현재 30명 정도의 회원이 있고 연습실 월세 내고, 운영비 내고, 나머지가 교육비입니다. 주 2회 정기모임을 하고 한 번에 3시간씩 교육을 합니다.

동아리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바로 공연이죠. 평소에 하지 못했던 것을 ‘같이’해보는 경험이죠. 최근에 참여한 ‘2019 동아시아 생활문화축제’도 그랬죠. 무대도 컸고… 평소에는 3~4명 정도가 공연하러 다닙니다.

어려운 점은 없으셨어요?
회원 간의 파벌이 생기면 힘들어요. 사람이 많고 동아리가 오래되면 조금씩 파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요인은 여러 가지인데 경제력, 연령, 실력 등 다양한 요소로 발생하죠. 그래서 인간관계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동아리 자랑 좀 해주세요.
첫째는 좋은 분들이라는 점, 둘째는 서로 돕는다는 점입니다. 기타 수리도 해주고, 몸이 아프면 걱정해주고 어려운 점 있으면 서로 도우려고 애쓰고 챙겨주는 모습입니다. 회원들의 연령대는 평균 40대 초반에서 60대 중반까지 있는데 기타에 대한 로망이 있는 분들이라고 볼 수 있죠. 비슷한 취미를 공유하고 있어서 그런지 끈끈합니다.

4년간 동아리 활동하면서 선생님 개인적인 삶에 변화가 있었나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 기타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맘껏 돕는다는 것을 저의 사명으로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듀엣가요제를 기획하고 있어요. 다른 팀들과 네트워크를 맺어서 같이 하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가요제 출전팀은 특공대가 되겠죠. 상품도 준비할 겁니다. (하하)

앞으로 동아리의 목표가 있다면요?
회원들이 버스킹 공연 등 무대 실전 경험을 많이 쌓게 해드리고 싶어요. 우물 안 개구리가 되면 겸손하기가 어려워지거든요. 다른 곳과 많이 만나봐야 겸손해지는 법도 배우게 됩니다. 기타 치는 사람들은 그래도 순수한 열정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인천에서 활동하는 많은 동아리와 교류하고 싶습니다.

나지막한 부산 억양의 조주은 회장님과 인터뷰하는 동안 ‘통기타’ 자체에 대한 애정과 체계적인 기타 교육을 절실히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회장님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 데서 왔으니 국밥 한 그릇 대접해야 한다”라며 들어간 돼지국밥집에서도 뜨끈한 국물과 함께 동아리 인터뷰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글·인터뷰 / 생활문화동아리 일일 시민기자 허명희




언어가 달라도 음악으로 소통하는 ‘기타랑’의 Kiara 회원을 만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금요일 저녁 7시, 주안 시민지하상가에 위치한 아트애비뉴27을 찾았다. 이 동아리에 외국인 회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금증 한 보따리를 등에 메고 말이다. 바로 기타 동아리 ‘기타랑’의 회원 키아라(Kiara)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곳에는 앳된 얼굴에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는 키아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뷰를 돕기 위해 키아라를 가르치는 기타 선생님도 자리를 함께했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인터뷰를 위해 조용한 교실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아라~ 기타 들고 다른 곳으로 가자.” 기타 선생님이 한국어로 말을 건네자, 키아라는 자연스럽게 기타를 들고 선생님과 우리를 따라나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안녕하세요. 아라입니다.”

한국에 온 지 1년 반이 된 미국인 키아라는 현재 인천 남부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키아라의 한국 이름은 김아라(이하 아라)이다. 키아라와 비슷한 발음을 가진 김아라로 한국 이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나 我(아)에, 열매 蓏(라) 한자로 쓰인 이름인 아라는 “I bear fruits”(결실을 맺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2009년도에 친구가 보여준 샤이니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처음 한국 K-pop에 빠졌다는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서 글로벌 문화를 공부했다고 한다.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안녕하세요”, “김아라입니다”, “영어 선생님이에요”, “이거 핸드폰이에요”, “몰라요”, “알아요”, “괜찮아요”라고 간단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아라는 혼자서 교재를 가지고 한글 공부를 했다고 한다.

 

“외국인 아라, ‘기타랑’ 문을 두드리다”

2019년 4월 아라는 직장 동료인 친구들의 소개로 처음으로 기타 동아리 ‘기타랑’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아라는 ‘기타랑’ 문을 열고 들어온 첫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아직 한국어에 서툴지만,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보디랭귀지도 써가면서 회원들과의 소통을 이어갔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만국 공용어인 음악으로 소통하는 사이 아닌가. 그렇다면 기타랑 회원들도 그랬을까? 기타랑 선생님은 아라가 처음 동아리에 들어온 날에 당황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영어로 수업을 진행해야 하나’하고 당황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이 언젠가 싶을 정도로 지금은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아라에게 말을 건넨다. 아라 역시 눈치껏 제법 알아듣고 반응한다.

“너무나도 다른 우리, 배려가 시작되다”

하지만 이런 순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비단 아라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아라와 기타 동아리 회원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일단 20대인 아라와 40대 중반의 기타 동아리 회원들 사이에는 약 20년이 넘는 나이 차이가 존재한다. 아라를 위해 팝송을 선곡하기도 했지만, 20대인 아라가 알기에는 너무 오래된 팝송이었다. 게다가 아라는 한국에서 흔하지 않은 채식주의자였다.
이들에게는 서로 다른 차이를 좁혀가는 여정들이 있었다. 아라가 첫 뒤풀이에 참석한 날은 모두 안되는 영어를 사용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뒤풀이가 끝나고는 너도나도 아라의 귀가를 걱정하며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아라를 위한 배려가 시작됐다. 한국 문화를 잘 몰랐던 아라는 처음에는 회원들의 친절이 의아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의미에서 문화 충격이었다고 전한다. 또한 회원들은 매번 뒤풀이를 하러 갈 때마다 채식주의자 아라를 위해 음식에 고기가 들어가는지 앞장서서 확인에 나선다. 그리고는 가게 사장님께 고기를 빼달라고 당부하기도 한다. 최근에 아라의 친구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는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아라와 친구를 위해 노래방에 데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기타랑’에는 아라를 위한 세심한 배려들이 습관처럼 스며들기 시작했다.

“잊지 못할 한국 문화, 뒤풀이 문화”

“한국 생활을 뒤돌아봤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일 것 같아요?”라는 질문에 아라는 자신 있게 “뒤풀이 문화”라고 대답했다. 뒤풀이 문화를 영어로 번역을 하면 뭐가 될까? after party?? reception?? 정도일까? 하지만 둘 다 한국 특유의 뒤풀이 문화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아라는 말한다. 처음 뒤풀이에 참석하던 날, 서로의 잔이 비웠는지를 보고 서로 챙겨주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아라는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조심스러웠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제는 “뷰티풀”, “판타스틱!”이라고 외치며 뒤풀이 문화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다.
활동을 시작한 지 약 4년이 된 기타 동아리 ‘기타랑’은 매주 금요일에 뒤풀이를 꼭 한다. 아라는 매주 참석하지 못해도 적어도 2주에 한 번씩 뒤풀이에 참석한다고 한다. 기타 실력에 상관없이 동아리 회원들이 모이는 뒤풀이에는 매번 약 20명가량의 회원들이 참석해 노래도 부르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그야말로 흥겹게 논다. 흥이 많은 아라도 뒤풀이에서 선뜻 ‘Let it go(렛잇고)’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우기도 했다. 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아라의 뒤풀이 퍼포먼스는 마치 한편의 뮤지컬을 연상케 했다며 뒤풀이의 생생함을 더했다.

“기타랑 덕분에 이제는 누구와도 공감할 수 있어요”

“기타랑 모임을 시작한 이후 가장 큰 삶의 변화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아라는 주저 없이 말했다. “뭔가 공통된 것이 있으면 누구와도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이요.” 거리를 지나다 종종 자신의 어깨를 부딪치고 가는 사람들 때문에 문화 충격을 받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이 모임에 있었으면 어땠을까’하고 이제는 그들의 다른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아라에게서만 그치지 않았다. 변화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 아라의 기타 선생님은 아라를 대하는 회원들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인끼리만 모임을 해온 터라 다른 언어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라를 위해 세심한 배려를 하는 동아리 회원들을 보며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언어를 넘어서, 나이를 넘어서, 취향을 넘어서 회원들은 서로를 배려하는 방법을 실천해갔다.

언어는 소통을 이어주는 아주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기타랑’은 생활예술을 통해 언어가 채우지 못하는 많은 부분을 채워주고 이어주고 있었다. ‘2019 동아시아 생활문화축제’ 연합공연과 ‘기타랑’ 동아리에서 MT를 함께하며, 아라와 회원들은 끊임없이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소통을 이어갔다. 내년 8월이면 아라는 미국으로 돌아간다. “감사합니다.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 영어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미리 인사를 전했다. 비록 아라의 모든 말들이 그대로 전해지지는 않았더라도 감사의 마음만은 이미 모두에게 전해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인터뷰 내내 특유의 밝은 에너지를 전해주던 아라, 그리고 그런 아라를 복덩어리, 마스코트라고 부르며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던 기타 선생님, 아라를 위한 배려의 방법을 고민하며, 다른 언어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실천하는 회원들… 이들은 오늘 또 기타를 연주하며 무엇을 주고받을까? 스며드는 빗소리보다 더 촉촉이 마음을 적시는 그들의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글·인터뷰 / 생활문화동아리 일일 시민기자 김인숙




부평홀릭포크댄스를 만나다.

‘부평홀릭포크댄스’를 사진으로 처음 만났을 때 깜찍한 의상과 모자, 구두를 신고 조심스럽게 한 스텝 한 스텝 밟는 동작이 눈에 아른거렸습니다. 인천에 이런 동아리가 있다니! 실버문화에 대한 궁금함과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안고 김연주 대표를 만났습니다.

부평홀릭포크댄스 김연주 대표

처음에 부평홀릭포크댄스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저는 분당에 살다가 부평으로 이사 온 후 아무 연고가 없는 데다 무릎을 수술한 후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든 상황이라 생활이 질적으로 너무 떨어졌습니다. 이런 가운데 마침 부평생활문화센터에서 6개월간 무료로 포크댄스를 가르쳐준다는 홍보물을 접하고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해 신청하게 되었어요. 배우는 과정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 자존감도 높아지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 의지하게 되면서 이 모임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수강생은 많았나요?
50명 가까이 모였어요. 선착순이라 살벌했죠. 저는 마지막 한자리에 가까스로 들어갔답니다.

강습이 끝난 후에도 계속 모이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렇게 끝내지 말자’, ‘부평에 포크댄스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계속 이어가자’라고 제가 제안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었어요. 광고는 특별히 안 했지만, 입소문이 나서 30명 정도의 인원이 모였죠.

어떤 분들이 모이셨나요?
평균연령은 60대가 넘습니다. 75세 넘는 분들도 여러 명 계시고 남성 회원은 현재 4명이지만, 포크댄스는 남녀 구별 없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성비와 상관없이 할 수 있는 댄스예요.

선생님, 포크댄스란 게 어떤 춤을 말하나요?
쉽게 말해서 여고시절 체육 시간에 배웠던 춤이에요, 혼자나 둘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돌아가면서 추기도 하는 춤이죠, 동작도 쉽고 오늘 시작하시는 분도 함께 어울려서 할 수 있어요. 남녀의 구별도 없고 특별히 짝꿍도 필요 없는 춤입니다.

외부 활동은 많으신가요?
예, 많죠, 봉사활동도 다니고 요양원도 다니고 있어요. 초기에는 매주 수요일마다 봉사활동을 다녔는데 외부 행사가 많아지다 보니 점차 줄어들었어요. 외부 공연을 다닐 때, 동아리 인원이 많고, 연세가 있다 보니 교통, 의상, 식사 비용 등 재정적인 어려움과 이동의 불편함이 좀 많은 편이에요.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제가 사실은 쇼그렌증후군이 있는 환자예요. 그래서 활동에 많이 빠지기도 하고 못 가기도 하는 편인데 모두가 절 배려해주시고 눈치를 보거나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제가 지금 대표를 맡고 있는데도 말이죠. 모든 것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모임이 자꾸 기다려지죠. 부평홀릭포크댄스라는 이름도 회원들과 같이 지었고 우리 동아리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합니다.

동아리에서 만난 회원 중 인상적인 분이 있나요?
네. 처음 뵈었을 때 머리숱이 거의 없고, 몸도 왜소하고, 춤 동작도 잘 안 되어서 ‘계속할 수 있을까?’, ‘잘 남아있게 될까?’라고 걱정되던 한 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꾸준히 나오시고 열심히 배우면서 지금은 동아리에서 주된 멤버이기도 해요. 회원들이 약자에 대한 배려를 참 잘해주시고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세요. 먹을 것도 자주 나누면서 분위기가 좋습니다.

이렇게 멋진 모임은 언제 하시나요?
오전 10시부터 12시. 매주 수요일마다 부평생활문화센터에서 합니다.

포크댄스 동아리는 부평구에만 있나요?
제가 알기로는 서울에 있고, 분당에 지부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인천은 저희가 처음이고 다른 곳에는 없는 거로 알고 있어요.
포크댄스가 유행이 지난 춤이라서 인기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쉽고 무리되지 않는 동작으로 저희는 무릎이나 허리에 힘을 가하지 않고 자세에 집중할 수 있어서 딱 좋습니다.

회원 구성은 어떻게 되시나요?
서울에 사는 분들도 있고 가끔 홍보물을 접하고 일부러 찾아오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남녀가 함께 있어도 매너를 중요하게 여기고 스킨십이 전혀 없습니다. 건강하고 건전한 활동을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동아리가 앞으로도 잘 유지되려면 어떤 게 필요할까요?
일단, 공간을 대관하기가 너무나 어려워요. 분기별로 선착순인데 자녀들에게 부탁해서 사용하는 날짜를 일일이 체크해서 신청해야 합니다. 만약에 선정이 안 되면 마당으로 나가서 모임을 해야 하겠죠. 이렇게 대관 경쟁을 해야 하는 게 조마조마합니다. 안정된 공간이 가장 필요해요.

회비가 있나요?
월 2만 원이에요. 행사가 있을 때 밥도 먹고 음료수도 먹고 강사비도 좀 드리며 알뜰히 쓰고 있어요. 의상이나 모자, 화관 등 개인용품은 개인 비용으로 지출하거나 강사님께 빌려서 사용하고 있고요.

포크댄스가 실버문화로 정착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인천에서도 구별로 포크댄스 동아리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일단 가능한 장소가 있어야 해요. 강좌든, 동아리든 말이죠. 구청에 있는 의원실이나 주민센터, 학교 강당 같은 곳을 저렴한 대관료로 개방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장소만 있다면 얼마든지 포크댄스 동아리가 만들어질까요?
당연하죠. 장소만 있다면 포크댄스는 얼마든지 실버 세대들의 좋은 문화로 확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어르신들의 개인적인 취미활동이라고 보는 사람들에게 우리 동아리를 지원(공간, 강사, 재정 등)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혹시 동아리 사진을 보셨나요? 이분들의 표정과 모습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화려한 의상을 입는 것은 각자의 기분을 좋게 하고 우울감을 넘어서게 하고, 무엇보다 가족들이 좋아합니다. 집에 가서도 가족에 대한 서비스의 질이 달라지죠. 기분이 좋으니까요. 여럿이 함께하는 가운데 행복하고 자존감도 높아지다 보니 주변까지도 그것이 옮겨지는 것 같아요. 이것이 개인을 넘어 사회적으로도 좋은 것 아닐까요?

힘든 점은 없으세요?
사람 때문에 힘든 것은 전혀 없어요. 대관 때문에 힘든 것 말고는요. (하하)

앞으로 동아리의 목표가 있다면요?
부평에서부터 포크댄스 동아리가 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다른 구에서도 포크댄스 동아리가 많이 생겨나면 재밌을 것 같아요. 원주에 공연 갔을 때 즉석에서 25명이 모여서 모임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충분히 가능하다고 느꼈었거든요.

마지막으로 동아리 회원 한 분 한 분에게 “포크댄스 동아리 왜 하세요?”라는 질문을 한다면 뭐라고 말씀하실 것 같으세요?
‘자존감. 화합. 가족 같은 살핌’ 이런 이야기를 할 것 같아요. 건강에 좋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설렘을 갖게 한다는 이야기도 나올 것 같고요. 우리 동아리에 꼭 한번 놀러 오세요.

인터뷰하는 시간 동안, 막연하게만 들리던 실버들의 문화에 대해 실마리를 찾아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동아리를 찾아가면 반갑게 맞이해주는 사람이 있고, 평소에 입을 수 없는 화려한 옷을 입는 순간 자존감과 자신감을 함께 입게 되고, 평소 배운 것을 갖고 즐겁게 사회 공헌 활동을 하며 이런 관계들이 일상을 사는데 활력소가 되어주는 동아리! 부평홀릭포크댄스 동아리였습니다.

글 · 인터뷰 / 생활문화동아리 일일 시민기자 허명희




동네 어르신들 계신 곳이 우리의 무대, ‘우리 동네 스타’

동네 어르신들이 모이는 장소가 곧 무대다. 숭의동 경로당, 마을 정자, 화도진 공원 등 오래된 동네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익숙한 풍경과 무료한 일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동구의 스타, ‘우리 동네 스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우리 동네 스타’ 김청자 회원, 김행자 대표

시작은 영화처럼
여느 때와 같은, 별일 없는 날이었다. 늘 지나다니는 미림극장 골목을 걸어가고 있는데 그날따라 극장 앞 홍보 배너에 눈길이 갔다. 추억극장 미림과 문화예술단체 작당이 기획한 실버 영상프로젝트 ‘우리 동네 스타’에 참여할 50~70대 어르신을 모집한다는 소식이었다. 2016년, 그곳에서 만난 참여자 중 뜻이 맞는 멤버끼리 다시 뭉쳐 어르신을 위한 공연과 행사를 여는 동호회, ‘우리 동네 스타’를 만들었다고 한다. 단체의 첫걸음을 전하는 대표 김행자 씨의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우리 동네 어때서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심각한 낙후된 도시. 인천 동구에 관한 이미지와 뉴스는 토박이들의 삶을 담아내기에 비좁다. 외부에서 구도심에 부정적 평가를 매길 때, ‘우리 동네 스타’는 송림동에 있는 평상, 경로당, 팔각정 골목, 화도진 공원 등에 모여 있는 어르신들을 찾아가 함께 노래하고 즉흥극을 선보이고 퀴즈를 맞히며 작은 축제를 이어왔다. “가면 어르신들이 예상보다 훨씬 좋아하세요. 작당 선생님들과 기획 논의를 하고, 장소를 고르는 과정에서 고민도 많고 어르신들이 좋아하실지 걱정도 크지만, 막상 찾아가서 공연하면 너무나 좋아들 하시니까요. 스피드 퀴즈 ‘몸으로 말해요’나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노래 프로그램’을 하면요, 다 일어나셔서 퀴즈 맞히고 춤추며 노래하고 그래요.” 도시 곳곳을 무대로 삼은 애정 담긴 기획과 공연에는 이곳이 속절없이 낡은 풍경으로만 남지는 않을 것이란 메시지로 묻어난다. ‘우리 동네 스타’는 단체의 단골 레퍼토리 ‘내 나이가 어때서’를 개사해 동네를 배경으로 뮤직비디오를 찍은 적이 있다고 한다. 개사곡의 제목은 ‘우리 동네 어때서’였다.

 

꿈은 숨으로 이어지고
‘우리 동네 스타’의 의미를 물었을 때 김청자 씨의 눈가가 붉어졌다. “저는 암 환자예요. 두 번 걸렸지요. 두 번째 발병했을 때는 내 목숨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혼자서 모진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여기를 우연히 알게 되면서 많이 건강해지고 활달해졌어요. 비슷한 또래 할머니끼리 모여 웃으며 활동하고, 공연에서 어르신들과 웃고, 즐거워요. 보람되고요.” 가입 초반에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참여를 거의 못 했지만, 이제는 공연 기획에도 열심히 활동 중이라는 김청자 씨의 눈은 이내 다음 공연을 향한 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르신들이 모인 평상마다 찾아다니며 노래, 즉흥극, 퀴즈 프로그램을 선보였던 ‘송림동 평상 편’이 김청자 씨의 대표 기획 공연이다. 앞으로도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며 웃음을 나누고 보람을 느끼기를 바란다는 김청자 씨의 소박한 꿈은 한 사람을 기꺼이 살아가게 하는 숨이 되고 있다. ‘우리 동네 스타’ 동료들과 어르신 관객들은 그 숨으로 빚은 빛나는 특별한 하루를 선물 받을 것이다.

목표는 웃음을 주는 스타
동호회 ‘우리 동네 스타’는 2016년부터 <찾아가는 인터뷰>, <골목길 마실 콘서트>, <수다 반상회>, <송림동 평상 >편 등 지역 곳곳을 누비며 바쁘게 활동 해왔다. 여러 활동으로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더는 두렵지 않게 되었다는 김행자 씨는 ‘동호회 멤버, 작당 선생님들과 함께 꾸준히 활동하여 더 많은 동네 어르신들을 만나고 싶다’라며 ‘웃음을 주는 스타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덧붙였다. 김행자 씨의 긍정 에너지를 주 동력원으로 삼아 어르신에게 웃음을 주는 ‘우리 동네 스타’는 지금도 어김없이 주 1회 모여 연습에 매진 중이다.

 

멤버는 상시 모집
인터뷰 끝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을 자유롭게 해달라는 주문을 하자 “‘우리 동네 스타’ 멤버는 상시 모집 중이니 언제든 작당으로 연락 달라”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하신다. “두 명만 더 왔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요. 내년에는 두 명 더 충원해서 공연했으면 합니다. 아무나 오셔도 상관없어요. 활동은 우리가 다 리드해드리니까요. 인천지역 어르신들, 관심 많이 가져주세요. 회비 없어요!”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한마디, 지친 나를 안아주면서/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준다면/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 노사연 <바램> 가사 중에서

인터뷰에 응해주신 두 분은 ‘우리 동네 스타’ 활동 중 기억에 남는 한순간으로 봄·가을 소풍을 꼽았다. 한강 유람선을 타고, 화담숲의 단풍을 구경하고…엄마로 살 때는 여비며 집안일 걱정에 갈 엄두를 못 냈던 곳에 발걸음을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동호회 활동의 즐거움이라고 전하셨다.

지역 어르신들을 찾아가 공연과 행사를 통해 일상의 기쁨을 길어 올리는 어르신 동호회 ‘우리 동네 스타.’ 오래 기억하고 지켜볼 가치가 있는 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오는 길거리에는 가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역할을 가진다는 것이 사람을 이토록 빛나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눈앞에서 한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분들을 보며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중에서

글 · 인터뷰 / 생활문화동아리 일일 시민기자 김태겸




아픔을 어루만지며 위로하는 치유의 목소리, 직장인 노래 동아리 <민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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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밤 지새우고~’ 힘든 시대와 시기를 견뎌온 때마다 우리 곁에는 바로 노래가 있었다.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치유하기도, 힘을 주기도 한다. 요즘 우리에겐 그러한 노래가 필요하다. 인천 문화바람에는 이처럼 나를 위해, 또 내 아이가 살아갈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바로 직장인 노래동아리 ‘민아리’다. 세상을 향해 작은 울림을 보내고 있는 동아리의 회장 이상욱 씨를 만나 그들의 울림에 귀기울여보았다.  
  01민아리의 의미와 시작
민아리는 직장인 민중가요 동아리의 준말이기도 하고 백성 민(民)과 함께 가슴앓이의 앓이를 조합한 말이기도 하다. 또 정화 작용이 있는 미나리를 언어유희로써 활용하기도 했다. 공통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위로하거나 치유하기 위한 마음을 담았다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
민아리는 2013년 여름, 문화바람 내 동아리 회원들의 의견이 하나로 모이며 시작됐다. 문화바람의 기타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이상욱 씨는 회원들과 20대 시절의 이야기를 하다가 민중가요에 대해 향수나 애정, 갈증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이 마음이 모여 동아리를 결성하게 됐다. 처음에는 6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20명의 회원이 민아리와 함께하고 있다.

민중가요의 매력
민중가요라고 하면 저항적이거나 전투적인 노래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노래도 많다. 꽃다지와 같은 그룹을 비롯해 인디밴드 등이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민중가요를 만들어 내고 있다. 민중가요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가사다. 대중가요도 물론 좋지만, 사랑을 주로 다루는 대중가요와 달리 민중가요는 세상의 여러 면모를 담고 있어 폭이 넓다. 구분을 떠나 노래 자체가 좋다는 것도 매력이다. 무심코 듣고 좋아서 흥얼거리던 노래가 알고 보니 민중가요였다는 것을 알고 동아리에 들어온 회원이 있을 정도다.

일상과 동아리 사이에서
직장인 동아리인 만큼 자주 모일 수는 없지만 일주일에 한 번 연습을 하고 간단한 회의를 한다. 각자 출근 시간과 생활패턴이 달라 뒤풀이까지 하고 나면 힘들기도 하지만, 공통의 관심사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 좋아하는 것을 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너무 좋다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시간이라 기다려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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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한 번, 그들의 축제
민아리는 2014년 첫 번째 정기공연을 시작으로 올해 12월, 세 번째 정기공연을 마쳤다. 그들에게 첫 번째 공연은 민아리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였다. 민중가요 기존의 이미지를 쇄신시키고, 다른 동아리 회원들에게 민중가요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포부로 첫 무대를 진행했다고 한다. 세 번째 공연의 키워드는 ‘갈증’이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많은 것이 담겨있는 말이다. 원래는 12월 3일에 공연장 대관 예약을 했지만, 조건과 상황을 고려해 고민한 결과 6일로 미뤄 문화바람 3층에 위치한 소풍에서 공연을 진행했다. 많은 관객이 공연장을 찾아 민아리의 노래를 듣고 함께 하는 것도 좋지만, 좀 더 밀도있고 뜻깊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심사숙고한 결과였다. 작년과 올해 정기공연에 민아리 회원 두 분이 잔잔한 무대에서 추모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 회장은 기타 반주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노랫소리가 안 들려 옆을 돌아보니 노래를 부르던 회원이 감정에 몰입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감수성에 흠뻑 젖을 수 있는 무대도 있지만, 재미있는 율동을 가미한 무대도 만들어진다. 이상욱 회장은 뻣뻣한 자신의 동작 때문에 율동을 해야 하는 무대에 서는 것이 걱정이었는데, 파트너가 더 뻣뻣해서 불행 중 다행(?)으로 자신이 더 돋보일 수 있었다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을 보는 민아리
그는 매주 토요일마다 광장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시민 한 명 한 명이 바뀌어 가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감동적이라고 했다. 일반 시민으로도 그렇고, 민아리의 일원으로서 민아리가 해야 하는 역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고.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자리에서 민아리가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무대에 서다 보면 관객들에게 힘과 에너지를 받는 경우도 있는데, 더 크게 하나된 목소리가 울려 퍼져 내 아이가 살아가는 미래가 조금 더 좋은 사회와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도 갖고 있다.

민아리로 바뀌고 채워진 삶
집과 회사만을 오가며 쳇바퀴 도는 삶이었는데, 동아리를 하게 되면서 정신적으로 윤택해졌다. 이전에는 나와 내 가족만을 생각했다면, 민아리 활동을 하면서 가정을 넘어 사회를 돌아보며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기쁨과 함께 그것을 함께 공감하며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게 너무 기쁘다.

민아리의 의미
나에게 민아리는 인생의 황금기인 40대를 활발하게 보내도록 해주는 소중한 곳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친한 친구들이나 동료여도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시각과 견해의 차이가 발생하는 데, 민아리에서만큼은 직업과 환경을 떠나 모두가 좋아하는 공통적인 관심사만을 가지고 이야기 나누며 누릴 수 있기에 행복하고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좋은 인연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라며, 우리의 작은 활동으로 조금이라도 세상이 바뀌길 바란다.

그가 꿈꾸는 민아리
그냥 회원들끼리 모여서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이고 아직 멀기도 하지만 꿈꾸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고 했다. 민아리가 다양한 연령대가 공통적인 관심사를 두고 하나 되어 어울리는 것이 큰 장점인만큼, 은퇴하고 나면 실버 민아리를 결성하여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되면 환갑이 넘어서도 같이 노래를 공유하고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처럼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싶다고.

2015년 직장인 민중가요동아리 민아리 2회 정기공연 영상 보러 가기

글 / 오지현(인천문화통신 3.0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