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들의 도시, 베를린

이번 호 부터 ‘지구별 문화 통신’을 시작합니다. 인천문화재단은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지원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단의 국제교류 사업을 통해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다른 나라의 문화소식을 소개하는 코너로 운영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줄리아, 나 베를린에 가게 됐어.”
“와우, 언제든 우리 집에 놀러 와, 며칠 지내도 되고.”

나는 줄리아를 쉐핑헨(schöppingen)의 한 레지던시에서 만났다. 쉐핑헨은 독일 북서쪽 뮌스터(Münster) 인근의 작은 마을이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그녀는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 혹은 숨겨져 있던 이야기를 모티프로 작업을 한다. 동갑이기도 했고 관심사도 비슷해 쉽게 친해졌다. 작년 여름 베를린에 잠시 갔을 때 줄리아의 집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 그때 내가 본 베를린은 눈썹이 보일 만큼 짧은 앞머리가 유행이었고, 팔뚝만한 무스타파 터키 케밥(Mustafa’s Kebap)을 먹을 수 있는 곳이며, 거리를 걷다 보면 빈 벽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수많은 그래피티와 힙스터 같은 이들로 가득했다. 바람 불고 비가 흩뿌리는 거리를 걸으며 “아, 언젠가 다시 와야지. 그리고 나처럼 예술가로 사는 사람들을 만나 좀 더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올해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베를린에 다시 오게 되었다. 아! 베를린. 많은 사람이 예술가의 도시,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라 지겹도록 말하는 곳이다. 하긴 쉐핑헨에서 만나는 예술가들 역시 다들 베를린에 산다고 했지. 예술가 아닌 이를 만나기가 더 힘든 곳, 내가 처음 느낀 베를린이다. 마치 도시 전체가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베를린에 예술가가 많이 살게 되었을까? 줄리아가 베를린으로 이사 온 건 2011년, 그때도 이미 베를린에는 수많은 예술가가 모여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알다시피 베를린은 다른 독일지역에 비해 렌트비가 싸다. 물론 물가가 저렴하고, 수많은 종류의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그래서 작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더 많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 들었다. 그런데 정말 이게 다야? 이런 뻔한 이유 때문에 다들 베를린으로 온다고?

“승연, 난 베를린에 살지만 사실 내 영상 작업의 대부분을 베를린에서 찍진 않아. 촬영은 독일의 다른 도시, 다른 마을에서 하고 베를린의 내 스튜디오에서 편집하는걸 좋아해. 사실 베를린엔 예술가가 너무 많아. 그러다 보니 작품을 만들기 위해 지원을 받는 게 매우 어려워. 사실 지원을 받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지. 그렇지만 여기선 여러 사람들에게 쉽게 작업에 관한 조언을 들을 수 있고, 작업실에 초대해 편집 중인 작업을 보여주며 의견을 들을 수 있거든. 물론 난 집에서 먹고 자고 하니 파자마를 입고 편집하러 옆방으로 갈 수도 있고. 하하.”

줄리아는 베를린에 살지만 작업의 배경은 베를린이 아니다. 하긴 나도 서울에 살지만 내 작업이 서울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서울에서 살고 있기에 서울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내가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갔을 때 그곳에서 느끼는 이질감을 작업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 작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하는 건 흥미롭다. 줄리아가 사는 지역은 베를린의 동독지역인 리히텐베르크(Lichtenberg)이다. 그녀가 전에 살던 베를린의 노이퀼른(Neukölln)지역이 힙하고 트렌디했다면, 리히텐베르크는 조용하고 평범한 동네다. 2015년 그녀는 이곳으로 이사 왔다. 줄리아의 집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왠지 내가 상상하던 베를린의 이미지와는 좀 다르다. 관광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주민들도 베를린의 다른 지역에서 본 사람들과 달리 좀 더 거칠게 느껴진다. 그러나 동네를 좀 더 둘러보니 카페, 레스토랑, 수퍼마켓 등 필요한 건 다 갖춰진 곳이다. 여기 주민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오래 전부터 여기 살던, 베를린 출신 사람들?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 옮겨 온 사람들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줄리아, 네게 베를린은 어떤 곳일까? 혹 10년 후에도 베를린에 살고 있을까? 베를린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오가는 것 같아. 특히 예술가들 말이야. 그럼, 진정한 ‘베를리너’는 어떤 사람들일까?”

“글쎄, 난 베를린에 살지만 이곳이 내 고향이라곤 생각하진 않아. 베를린 같은 대도시에 살면서 내가 진정한 베를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흠, 10년 후에 아마 난 베를린에서 살고 있진 않을 걸. 아마 독일의 다른 작은 마을에 살고 있지 않을까? 지금 베를린의 내 집과는 달리 큰 집에 살며 동물들과 여유롭게 살고 싶어. 사실 작업을 하며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꼭 베를린에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 베를린 외 다른 여러 도시 또한 흥미롭고 매력적인 건 분명하니까. 그러나 아직까진 다른 도시가 나를 부르진 않네, 하하… 지금 난 베를린에서 행복해.”


많은 예술가가 살고, 오가고, 스쳐 지나는 곳, 베를린. 베를린은 이방인들의 도시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예술가가 작업을 위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영감을 얻기 위해, 베를린에 모여든다. 그 중 일부는 떠나가고, 일부는 남는다. 줄리아의 말처럼 이방인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베를린은 누군가의 고향이 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베를린에서 사는 동안 베를린은 잠시나마 누군가의 고향이다. 2017년 봄에서 여름까지 베를린에서 살게 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잠시나마 이곳이 나의 따뜻한 고향이 되길. 다시 만나 반가워, 베를린.

참, 나의 베를린 친구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인 줄리아 (Julia Charlotte Richter)를 소개합니다.
(줄리아 홈페이지 가기)

글 / 이승연
사진 / 박준, 줄리아(프로필)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미래의 이야기를 담은 상상의 작업으로 현재를 신화로서 기록하는 것, 이것이 기이한 듯 보이지만 명랑한 내 작업이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현재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베를린 ZK/U 레지던시에 입주 중이다. 이승연




[큐레이션 콕콕] 엽편소설, 담배짬소설, 초단편, 플래시픽션… ‘짧은소설’ 이야기

소설(小說)보다 더 ‘작은’ 소설이 있습니다. 단편소설하면 이 정도는 돼야지 했던 분량이 원고지 100매에서 70매, 그리고 15매로 줄어들고 있다네요. 나뭇잎에 빗댄 엽편(葉篇), 손바닥 크기 분량의 손바닥소설, 스마트폰 시대에 발맞춘 스마트 소설, ‘현상의 강렬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의미의 ‘플래시픽션’, 그밖에 미니픽션, 서든픽션, 마이크로픽션, 마이크로스토리, 쇼트쇼트스토리, 엽서소설, 프로즈트리(Prosetry), 담배짬소설, 커피잔소설이라는 명칭도 있습니다. 휴…. 작품의 분량으로, 이미지로, 재치로, 새로운 형태로, 시대를 반영한 이름 등등으로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네요.

짧은소설은 20세기 초 중남미에서 시작됐습니다. 보르헤스 등 세계적인 작가들이 작품을 남겼는데, 한 줄짜리 극단적 분량도 있었다고 합니다.

“깨어나보니 공룡은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과테말라 작가 아우쿠스토 몬테로소의 작품 ‘공룡’입니다. 시도, 아이디어 조각도 아닌 ‘소설’입니다. 일곱 단어로 된 이 글은 반론 없이 ‘픽션’으로 인정받았고, 몇 백 배 단어를 사용한 작품 해석이 쏟아졌습니다. 아래 패러디 문장을 한 번 보시죠.

“공룡이 깨어났을 때, 신들은 아직도 저기 있었다. 서둘러 나머지 세상을 창조하면서.”(에두아르도 베르티의 ‘또 다른 공룡’)
“작가가 생애에서 가장 짧은 단편을 쓰고 있었을 때, 죽음 역시 가장 짧은 작품을 쓰고 있었다. 이리 와.”(후안호 아바네스의 ‘결말’)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공룡은 저기 없었다.”(파블로 우르반이의 ‘공룡’) 

(아우구스토 몬테로소)

짧은소설은 오랫동안 본격 문학 장르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신속성, 명료성, 간결성 등이 정보화 사회의 속도 및 영상문화와 결합해 주요 서사 장르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네이버 시사상식사전에는 “작가의 세계관과 문학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을 응축시켜 놓는 데 가장 적절한 문학적 방법으로, 분량만으로는 콩트와 비슷하지만 극적 반전을 이루려는 콩트보다 문학적 깊이가 있다”고 소개되어 있네요.

우리나라의 짧은소설 흐름, 최근 쏟아져 나온 작품집 등을 언급하기 전에 프랑스에 있는 ‘소설 자판기’를 공개하려고 합니다. 버튼을 누르면 문학작품이 나오는 일명 ‘짧은 이야기 배급기(Distributeur d’histoire courte)’네요.


(이야기 배급기)

기차역 대합실에 희한한 기계가 놓여 있습니다. 1분, 3분, 5분의 버튼 중 하나를 누르면 선택한 독서시간에 맞는 길이의 이야기가 영수증처럼 흘러나옵니다. 종이 위쪽에는 작품의 장르와 제목, 작가 이름이 인쇄돼 있고, 그 아래는 한 편의 작품입니다. 어떤 작품은 농담 같고, 어떤 작품은 한 편의 짧은 로맨스며, 한 편의 짧은 시도 있다고 하네요.

이 기계와 이야기를 공급하는 ‘short edition’은 프랑스의 소도시 그르노블에서 글쓰기 플랫폼을 운영하던 일종의 출판사였습니다. 작가로 등록된 사람들이 자유롭게 글을 올리면 회원들이 점수를 매겨 추천하고, 회사의 에디터들이 좋은 글을 골라 온라인으로, 또 팟캐스트로 공급하는 사업을 해왔다고 합니다. 누군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단편소설 자판기’를 설치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농담처럼 이야기했고, 장난삼아(?) 실현한 농담이 예상 외로 히트를 칩니다.

(이야기 배급기)

승객은 열차를 기다리며 보내야 하는 시간을 스마트폰이 아닌 ‘문학’과 함께 보낼 수 있고, 철도회사는 예술작품 배급과 후원이라는 ‘의미 있는’ 사업으로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며, 작가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얻었네요.

이 사건은 프랑스 언론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보도됐는데 뉴요커에 실린 기사를 본 샌프란시스코의 한 영화감독이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곤 기계를 주문하고 싶다고 말했죠. 그 감독이 누구냐고요? <지옥의 묵시록>, <대부> 등을 만든 사람이네요. 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그는 단편 문학은 영화를 구상하는 데 좋은 출발점이 된다며 기계에 관심을 갖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판기로 과자, 콜라, 커피가 아닌 예술 작품을 제공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 영상보러가기▶)

이 출판사의 설립자가 코폴라 감독의 메일을 받고 미국에 가서 그를 만나 기계를 설치하는 이야기가 담긴 영상입니다.
자판기를 통해 소개된 작품은 약 10 유로 내외의 고료를 받습니다. 많지 않은 금액이지만 여러 작품이 선정된 작가들도 많고, 무엇보다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작가들이 많다고 하네요.(14,264명의 작가와 20여만 명의 플랫폼 독자, 6만 여편의 작품이 있다) 2015년에 시작된 이 배급기는 현재 프랑스 전역 100여곳 이상의 기차역, 버스정류장, 지하철역, 쇼핑센터 등등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물론 자판기 이용료는 없고요.


한국 작가들의 초단편집이 줄줄이 출간됩니다. 지난해에 나온 소설가 이기호의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조경란의 <후후후의 숲>, 최민석의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에 이어 김솔, 안영실, 구자명, 성석제의 책도 나와 있네요. 출판사 문학동네 관계자는 “소셜미디어 등으로 인한 단문(短文) 학습 탓에 독자들이 점점 긴 글을 외면한다”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라도 짧게 여러 편을 쓰는 게 유리한 만큼 앞으로 초단편이 유망 장르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탁, 사건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만들고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단편이 파헤치는 것이라면 콩트는 발견하는 것, 타격을 주는 것이다. 탁! 그렇게만.” (소설가 이기호)

“짧은 소설은 떠올렸던 몸피 자체의 보존성이 높다. 풍요로운 육체성은 못 갖추지만 정곡을 찌른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는 이장욱)

“보통 소설에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단계가 있다면 초단편은 이 중 하나만 떼서도 쓸 수 있다. 짧다 보니 이미지나 즉물적 느낌이 강해 형식도 자유롭고, 단편과 중장편의 확장도 용이하다.” (소설가 조경란)

문학평론가 조재룡은 “장르별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분량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장르의 분열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이 추세대로라면 소설은 더 짧아질 것이며 장르에 대한 개념도 점차 바뀌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짧은소설에 대한 독자(댓글)의 반응은 어떨까요.

“난 이런 걸 소설로 보지 않는다. 짧은 글만 읽는다는 독자들은 원래 책을 안 읽는 사람일 뿐.”, “정말 한심한 작태이다. 단시간 내 흥미를 추구하는 독자층의 문제라고? 단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수준이 안 되는 저급한 돈벌이 추구일 뿐.”이라는 부정적 의견과 “무언가 대세가 된다는 건 시장의 수요가 있어서 그런 건데. 대세를 조작할 수도 없는 거고. 독자들이 짧은 글을 원한다는데 저런 흐름을 막을 수 있을까? 에헴 에헴 그건 소설이 아니야 이런 식으로? ㅋㅋ 팔릴 만하면 팔릴 것이고 아니다 싶으면 망하겠지. 시장원리로. 저런 책이 무슨 노벨문학상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등의 현실적 관점이 있네요.(아이디 ocad****, kung****, flow**** 님 등)

짧은소설이 부상한(혹은 21세기 문학을 주도하게 된) 이유는 온라인에서 유통과 소비가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담배짬소설’이나 ‘플래시픽션’ 등은 모두 글을 모으는 온라인 창구가 있습니다(smokelong.com, www.flashfictiononline.com, www.vestalreview.net, www.365tomorrows.com). 짧은 글에 주는 ‘마이크로 어워드’도 2007년부터 온라인에서 수상작을 발표했고요(www.microaward.org).

‘낙농콩단’(conte0303.tistory.com)에 ‘콩트’를 쓰는 김영준 씨가 사이트에 모은 10∼20장에 이르는 콩트는 233편에 이릅니다. 미니픽션 연구소(www.minifiction.com)는 2004년 10명의 회원으로 시작했습니다. 이제 일반인을 대상으로 미니픽션을 모집하고 책으로 발간하는 작업을 하고 있네요. 소설가 서진 씨가 운영하는 ‘1pagestory’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A4용지 한 면에 들어가는 원고지 10장 분량의 원고를 모집합니다. 현재까지 730편의 글을 수집했다네요. 한 사람당 하나의 글만 등록되니 전부 730명의 글입니다(pagestory.egloos.com).

 문학평론가 조재룡은 “장르별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분량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장르의 분열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이 추세대로라면 소설은 더 짧아질 것이며 장르에 대한 개념도 점차 바뀌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좋은 것은, 짧다면, 두 배로 좋다.”
스페인 작가 벨타사르 그라시안(1601-1658)의 말입니다. 그는 이런 말도 남겼네요.

“매사에는 양면이 있다. 가장 좋고 유리한 것도 그 칼날 쪽을 붙들고 있으면 고통이 되고, 반대로 불리한 것이라도 그 손잡이를 잡으면 방패가 된다. 매사를 불리하다 생각하며 근심하지 말고, 유리한 쪽을 바라보라.”

‘비정상회담’에 출연하는 이탈리아 대표 알베르토 몬디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은 픽션보다 논픽션이 인기인 것 같더군요. 자기계발서나 에세이, 경제경영책이 많이 팔리는 것 같은데, 이탈리아는 그런 책이 인기가 없어요. 소설을 많이 보는 편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코멘트를 들으면서 우리의 독서문화는 다소 건조하고 현실적이고 쓸쓸한데 이탈리아는 낭만적이네, 하는 얼토당토아니한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서툰 부러움’ 같은 감정이 스쳤달까요.

한참 짧은소설 이야기를 했지만 길고 짧은 게 또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긴 게 좋으면 긴 걸, 짧은 게 좋으면 짧은 걸 읽으면 되지요. ‘어쨔던동’ 우리나라에서도 소설이 좀 인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위 글은 다음과 같은 기사와 블로그 등을 참조하여 작성했음을 밟힙니다.]
– 코폴라 감독도 탐낸 ‘이야기 배급기’
  브런치 2017.2.25.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원고지 100장→50장→20장… ‘손바닥 소설’이 쏟아진다
  조선일보 2017.2.8.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좋은 것은, 짧다면, 두 배로 좋다
– 21세기 문학을 주도하는 ‘짧은 소설’
  한겨레21 2012.10.23.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지금의 나로 이끈 다섯 번의 선택
  ‘비정상회담’의 이탈리아 대표 알베르토 몬디의 성장과 독서
  북클럽오리진 2017.3.10.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글/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대학, 기숙사와 도시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엔 많은 대학교가 있습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육기본통계에 따르면 2016년 우리나라에는 339개의 대학이 있고, 2,831,169명이 이 학교들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일반대학, 교육대학, 산업대학, 전문대학 한정) 2015년 인구총조사에서 20~24세 인구 숫자가 3,385,935명이라고 하니, 최근 우리나라의 20대의 적어도 3명 중 2명은 대학을 경험한다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중 인천에는 2016년 10월 현재 본부를 두고 있는 대학이 7개가 있고, 70,023명이 소속되어 있다고 합니다. 타 지역에 본부를 두고 인천에 추가로 대학을 설립한 캠퍼스가 통계에서 빠져 있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인접한 서울이 48개 대학의 562,690명의 재적생이 있는 것과 비교하면, “인천의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많다고 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인천의 대학들이 겪는 어려움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기숙사 공급부족은 매우 심각한 편입니다. 인천에 있는 5개 대학(인천대학교, 인하대학교, 안양대학교, 인천가톨릭대학교, 경인교육대학교)의 평균 기숙사 수용률은 11.89%로, 광역지자체 중 최하위의 수준이고, 전국 국공립대, 사립대, 국립대법인, 교육대학, 산업대학의 평균 수용율(20.24%)에 크게 밑도는 수준 입니다. 2010년대에 들어 사회에 막 진입한 대학생들의 주거 비용과 주거 수준에 대한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음을 생각해보면, 인천의 대학들은 타 시도의 대학생들에게 그리 친절한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울의 많은 대학들은 2000년대 이후 부족한 대학 재정상황에서도 기숙사 공급을 늘리기 위해서 이른바 ‘민자 기숙사’를 앞다투어 도입했습니다. 기업이 기숙사를 건설하고, 20년 정도의 운영을 통해서 건설비용과 유지관리비용을 회수하는 이 ‘민자 기숙사’는 학생들에게 오히려 대학 인근 지역의 자취 비용보다 더 높은 주거비를 떠안게 했습니다. 대학들은 학생들의 주거복지마저도 상업화에 물들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기숙사 건설에 많은 재정을 투입하는 만큼 대학이 기숙사를 단순히 학생의 주거공급을 넘어 교육의 일환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습니다. 레지덴셜 칼리지(Residential College, 기숙형 대학)라고 불리는 이 교육 방식은 대체로 신입생, 혹은 대학 생활의 전반을 기숙사에서 의무적으로 거주하게 합니다. 기숙사는 단순 거주 공간을 넘어 학습과 공동체 활동, 사회체험, 재능 기부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교수-학생 간, 학생-학생 간의 교류를 확대하고, 이를 통해서 학생들의 학업 성취, 대학생활 적응, 사회적 발달을 위한 교육과 생활의 통합적 공간으로 재정의됩니다. 유럽의 전통적 대학 모형을 통해 만들어진 레지덴셜 칼리지의 운영은 미국에서 ‘생활-학습 연계 프로그램(Living-Learning Program, LLP)라는 이름으로 보편적으로 정착해 있습니다. 인천에서는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가 신입생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레지덴셜 칼리지를 운영하고 있고, 외국 대학이 모여 있는 인천 글로벌 캠퍼스의 경우는 레지덴셜 칼리지를 도입하지는 않지만 4개 대학 총 4,200여 명의 학생 정원에 절반 수준에 달하는 약 2,000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대단위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인천 글로벌 캠퍼스의 학생 수가 정원 대비 27% 선인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재학생 전부가 기숙사 거주가 가능한 것입니다. 거주 비용도 2인실 기준 한 학기(16주)에 100만원 선으로, 서울의 민자 기숙사와 비교하면 비교적 저렴한 편이기도 합니다.

갓 성인이 된 20대 초반의 학생들에게 레지덴셜 칼리지나 대단위 기숙사의 운영은 주거 비용을 경감시켜 주고, 학업 성취와 대학 생활의 적응, 다양한 경험과 대인 관계 형성의 측면에서도 많은 장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숙사를 통한 주거문제 해결이 모든 면에서 장점이기만 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 도시계획에 있어서 대학의 존재는 필수적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새로운 도시를 개발할 때, 많은 도시들이 기존 대학의 이전을 유치하거나, 새로운 캠퍼스의 개발을 시도합니다. 송도국제도시 개발 과정에서 인천대, 인하대 등 인천의 주요 대학은 물론, 연세대 국제캠퍼스를 서울로부터 유치하고, 유수한 외국대학의 글로벌 캠퍼스를 유치했습니다. 최근에는 시흥시가 서울대학교의 캠퍼스를 건립하려는 과정에 있습니다. 많은 도시들이 대학교를 유치하고자 하는 것은 산학협력과 인재유치와 같은 이유도 있을 것이고, 미시적으로는 대학과 대학생들이 도시에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활력을 불어넣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학생들에게도 도시 속의 대학은 큰 기회입니다. 도시 속의 대학을 다님으로써 도시에서 발생하는 사회문제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더 많은 연구와 학업의 동기를 얻거나, 대학에서 얻은 연구의 성과를 도시 속으로 더 쉽게 전달할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학교라는 담장 안의 기숙사 생활은 학생이 도시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줄이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학교 안에서의 많은 성취를 기뻐하는 동안, 학생 개개인이 도시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동기 부여의 순간과 경험을 놓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합니다. 최근 일본 도쿄의 많은 명문 대학들이 지방의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기숙사를 건립하는 노력만큼, 도시 안에서 주거를 구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확대하고 있는 것은 학생들의 주거 복지를 위해서 대학이 할 수 있는 일은 기숙사 건립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천의 대학들이 더 나은 교육환경 제공을 위해서 학생들에게 안정적이고 저렴한 주거 제공을 확대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기숙사 공급, 레지덴셜 칼리지 교육, 주거 보조금 지급과 같은 여러 방법들이 인천의 대학생들에게 대학의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 인천이라는 큰 도시 안에서 더 많은 다양성과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발전하기를 바라 봅니다.

(연세투데이 http://yonseitoday.yonsei.ac.kr/)

(인천글로벌캠퍼스 http://www.sgu.or.kr)

글/ 김윤환(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 강대진(2015). 대학기숙사와 지역주민의 상생모색. 교육시설 22(6). 23-28
– 공효순(2016). 우리나라 기숙형 대학(Residence College)의 효율적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 홀리스틱교육연구 20(4). 67-84
– 김고은, 최막중(2014). 기숙사 건설과 임차료 보조에 의한 대학생 주거지원수단 선호 분석. 주택연구 22(4). 45-63
– 이병식(2014). 변화하는 대학, 도전과 과제: 연세대학교 레지덴셜 칼리지 교육. 교육개발 41(2). 38-43
– 장경석(2013). 대학생 주택정책의 현황과 정책과제. 도시와 빈곤 102. 21-34
– 대학알리미. http://www.academyinfo.go.kr
– 인천글로벌캠퍼스. http://www.igc.or.kr
– 한국교육개발원 (2016). 교육기본통계. 교육통계연보. 국가통계포털 (http://kosis.kr)
– ‘5천억’ 투자한 인천글로벌캠퍼스…왜 텅 비었을까?’. 노컷뉴스. 2016.7.4. (http://www.nocutnews.co.kr/news/4616773)
– ‘위기감 느낀 일본 최고의 명문대학들 “지방학생들, 오라” 손짓…왜?’, 동아닷컴. 2017.2.2.
   (http://news.donga.com/3/all/20170202/82686347/1)




[큐레이션 콕콕] 인천의 역사와 가치까지 매립되면 어쩌죠, 북성포구

인천의 역사와 가치까지 매립되면 어쩌죠, 북성포구

시간과 사건의 접점에서 탄생한 시끌벅적한 뉴스가 아닌 특별한 문화 이슈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큐레이션 콕콕’.
이번 주제는 북성포구입니다.

1890년, 서울에서 내려온 정흥택 형제는 인천 중구 신포동에 상설 어시장을 열었습니다. 소규모 방식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규모가 커진 수산물 유통시장은 일본인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들도 어시장 운영에 뛰어듭니다. 일제는 한인과 일본인이 운영하던 어시장을 제1공설시장으로 합병하고 인천부가 직영하도록 제도를 바꿉니다. 1930년대 초 일제가 북성동 해안 일대를 매립해 대규모 공판장과 어시장을 세우자 북성포구는 수도권 최대의 포구로 명성을 누립니다.
파시(波市)가 열릴 때면 대형 어선 100여척이 정박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하지만 1975년, 연안부두 일대가 매립되고 어시장이 신포동에서 연안부두로 이전하면서 북성포구는 쇠락하기 시작합니다.(네이버 오픈백과 mazi****님)

<인천북성포구살리기시민모임 제공>

쇠락의 징후는 악취를 동반했습니다. 바닷물에 밀려온 해저토가 제대로 빠져나가지 않고 켜켜이 쌓여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민원이 이어졌습니다. 북성포구 매립이 선거 공약으로 제시되기도 했을 정도였다네요. 지난해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이 북성포구 일대 7만여㎡를 매립해 준설토 투기장 조성을 위한 행정절차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사회단체가 나섰습니다. 지역주민, 예술인, 환경·문화·청년운동가, 건축가 등으로 구성된 북성포구살리기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2016.11.22.발족)은 환경청에 ‘부동의’를 촉구하며 매립을 반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시민모임은 북성포구의 환경개선을 위해서는 하수관로 정비와 하수정화시설 설치가 시급하다고 주장합니다. 갯벌은 오염정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갯벌의 정화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하수관로 정비로 악취발생물질의 갯벌 유입을 차단하고, 하수정화시설로 해수가 드나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사인 2017.02.23  http://www.bp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36098)

<한은미, ‘쇠스랑이의 삶’>

북성포구 매립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송도, 청라 등 수많은 갯벌을 잃은 상황에서 북성포구마저 사라지게 될 것을 염려합니다. 시민모임 관계자 중 한 명은 “북성포구는 1883년 인천개항과 함께 한국근현대사의 온갖 영욕을 함께 했고, 지금까지 남은 인천 해안의 유일한 갯벌 포구다. 지금도 갯골을 따라 들어오는 어선들로 인해 선상파시가 열리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인천일보 2016. 11. 18 http://www.incheonilbo.com/?mod=news&act=articleView&idxno=736457)

시민모임은 북성포구 매립이 인천의 역사와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천개항창조도시 재생사업에 북성포구를 포함시켜 북성포구는 물론 주변지역도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자고 강조합니다. 이에 인천시는 “북성포구는 오염된 갯벌 악취를 지적하는 민원이 끊이지 않고,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시켜 달라는 주민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라며 북성포구 전체 32만㎡ 중 가장 냄새가 심한 일부 7만㎡만 매립해 오수정비 시설을 만들 계획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경기일보 2016.11.22 http://www.kyeonggi.com/?mod=news&act=articleView&idxno=1272818)

<‘북성포구 매립사업’>

영상 두 편을 소개합니다. 북성포구 매립을 다룬 기호일보 영상과 (https://www.youtube.com/watch?v=lL9mU2oN8to) 지난해 5월 EBS 다큐 오늘에서 방송한  ‘북성포구를 아시나요’ (https://www.youtube.com/watch?v=tVUaVs-zWIs) 입니다. EBS 다큐 오늘은 1회가 아닌 시리즈로 북성포구를 다뤘네요.

북성포구의 의미를 알리고, 보존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전시도 열렸습니다. 지난 3월 4일부터 15일까지 사진공간 배다리에서 열린 <북성포구전>에는 사진작가 20명과 미술가 4명의 작품이 전시됐습니다.

포구는 시시각각 다양한 스크린을 펼친다. 갈매기를 척후병 삼아 물길 따라 들어오는 어선,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꺾이는 공장의 연기, 긴 낚싯대 드리운 강태공의 실루엣, 울퉁불퉁 식스팩 근육질의 갯벌, 먹구름을 나눠 가진 하늘과 바다. 공장 불빛과 뒤섞이는 붉은 노을 등.(중략) 매립은 직선을 의미한다. 예술가는 있는 그대로의 곡선을 원한다. 직선은 인간에게 속하고 곡선은 조물주에게 속한다. 직선 숭배에 결연히 맞서기 위해 그들은 붓과 카메라를 들었다. – 전시 서문 중에서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북성포구전’ 전시 포스터>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그곳은 어떤 모습일까요. 소설가 양진채는 「인천in」 에 ‘소설로 읽는 인천’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7년 1월 20일의 기사 제목은 ‘북성포구로 가는 길’이네요.(http://www.incheonin.com/2014/news/news_view.php?m_no=2&sq=36289&thread=002002055&sec=3) 그는 민망하기도 하고, 반칙인 줄도 알지만 꼭 하고 싶은 얘기, 이 얘기 아니면 안 되겠다 싶은 얘기가 있어서 자신의 소설 <패루 위의 고래>를 가져왔다고 서두에서 밝힙니다.

포구로 들어온 배는 일곱 척이었다. 꽃게, 갑오징어, 병어, 젓갈용 멸치 등을 갑판 한가운데 펼쳐놓고 그 자리에서 팔았다. 그를 따라 흔들리는 널빤지를 밟고 올라섰다. 난데없이 나타난 포구이기는 했지만 골씨를 따라 배가 들어오는 광경, 싱싱한 생물을 배에서 바로 흥정해서 사는 모습 등을 구경하는 동안 못마땅한 마음이 사라졌다. 싱싱한 갑오징어나 꽃게, 낙지 등은 산 채로 함지박 안에 담겨 있었다. 배가 나란히 붙어 있어 건너다니며 구경할 수도 있었다. 값도 그날 들어온 배와 사러 온 사람들의 수에 따라 결정되고, 배가 막 들어왔을 때와 시간이 지난 후의 값이 또 다르다고 했다. 이 배 저 배를 건너다니며 물건을 보고 값을 묻던 사람들이 하나둘 검은 비닐봉지에 무언가를 사들고 뱃전을 나섰다. 병어를 잔뜩 사던 아주머니가 50년 가까이 이 도시에 살았지만 여긴 처음 와본다고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포구이긴 한 모양이었다. 문득 똥바다요? 하던 아저씨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 동네의 바다가 똥바다로 불렸다는 걸 아는 사람 정도는 돼야 이 포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양진채, <패루 위의 고래> 중에서

작가는 오랫동안 인천에 살았지만 북성포구를 알게 된 것은 10년 안쪽이라고 고백합니다. 인천에 이런 곳이 숨어 있었다니 경이로운 심정이었다고요. 북성포구를 발견한 뒤로는 물때를 확인하고 일부러 그곳을 찾아 생새우, 꽃게, 병어 등을 삽니다. 어느 날은 아름다운 북성포구의 노을도 봅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북성포구를 알고 있었고 찾고 있었다. 포구가 주는 떠남과 돌아옴의 여정, 비릿한 냄새, 염분이 묻어 있는 갯바람 등을 그 쓸쓸함으로 많은 사람을 달래주고 위로해주었다.”

<유광식, ‘선상파시(2011)’>

현덕(1909~?)은 우리나라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인천과 가까운 대부도 당숙 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조선일보 당선작인 <남생이> 외 다수의 작품을 동구 화평동 78번지에서 집필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인천in 2014. 6. 25 http://www.incheonin.com/2014/news/news_view.php?m_no=3&sq=25577&thread=003001000&sec=1) <남생이> 첫 줄에 나오는 ‘호두형으로 조그만 항구 한쪽 끝을 향해 머리를 들고 앉은’에 나오는 호두형 포구가 있던 곳이 바로 북성포구 주변입니다. 작가 현덕은 인천문화재단 ‘2007 대표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네요.

<남생이> 중 인천부두마을 전경. 이상권 그림.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촬영

인천시는 인천의 역사 및 문화유산, 자연환경 분야 등 인천만의 고유한 가치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인천시민으로서, 저 역시 인천의 발전과 성장을 환영하지만 인구 300만의 축포가 ‘매립의 역사’에서 탄생했다는 비판에도 귀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북성포구전> 전시 서문 제목을 공개할까요? ‘북성포구, 거기 있어 줄래요’

이재은 / 뉴스 큐레이터

 




배다리, 도깨비마을이 아닌 책마을

 ‘역사의 숨결, 문화도시 인천 동구’ 라는 문구를 자주 보게 된다. 인천 원도심중 하나인 동구, 동구에서도 특히 배다리는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100년이 넘는 근대건축물들과 1960년대의 생활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 6~70년이 넘게 책방문화를 이끌고 있는 책방지기들을 통해 그야말로 배다리마을만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 문화적 가치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드러내는 방법도 다양하다. 최근 모 방송 매체의 드라마 촬영지로 배다리헌책방이 문화상품으로 소비되면서 배다리는 그야말로 몸살을 앓고 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몇 십 명씩 줄을 서서 책방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있으며, 주말에는 밀려드는 차들로 인해 주차할 곳의 부족으로 불법주차까지 이뤄지고 있다.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던 썰렁한 동네에 관광객들이 몰려와 북적북적 활기찬 온기를 불어 넣어 주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기는 하다. 어찌 보면 즐거운 비명이자 투정인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배다리는 책이 있는 마을, 책 읽는 마을보다 드라마 촬영지로 더 유명해져가고 있다.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은 그 지역의 특성과 동떨어져서는 곤란하다. 적어도 배다리 헌책방거리는 차이나타운 자장면거리와 포토존이 되어버린 동화마을에서의 소비 방식과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관광객이 사진을 찍고, 기념하고, 즐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자장면거리에서는 맛있는 자장면 집을 찾아다니며 맛을 즐기듯이 헌책방거리에서는 읽고 싶은 책, 오래된 보물 같은 책들을 찾아다니는 즐거움이 따로 있는 것이다.

어제는 히잡을 쓴 외국인 관광객이 드라마촬영지인 서점 앞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오지랖이 발동했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 말레이시아에서 왔으며, 서울에서 한 시간이 넘게 걸려 왔는데 힘들다고 한다. 그렇게 힘들게 와서 사진 몇 장 찍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 마을 지도를 보여주며 마을을 소개하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기를 권했다. 볼 것과 보여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분별없이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 이벤트만을 내세워 겉핥기식 관광을 부추기는 일들은 자제해야 한다는 얘기다. 문화를 단지 싸구려 관광 상품처럼 ‘사람의 수와 돈의 가치’만으로 환산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밀려드는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기보다는,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문화들을 더 잘 드러내고, 가치를 재발견하는 작업들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동구청에서는 동네 주민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몇 년 동안 잘 농사지어왔던 텃밭 부지를 경작 금지시켰다. 배다리를 찾는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할 목적으로 꽃밭을 조성할 것이고, 이를 위해 포크레인으로 흙을 갈아엎겠다고 하여 주민들과 크게 마찰이 있었다. 한 번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관광객들을 위해 주민의 삶을 뿌리채 흔들어놓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유채꽃? 양귀비꽃? 어떤 꽃을 관광객이 좋아할까’를 고민하는 대신 해야 할 생각은 따로 있다. 관광객과 검증되지도 않은 경제 효과에 마음을 뺏겨 마을과 주민들을 구경거리로 만들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배다리를 역사문화마을로 가꾸며,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오고 있는 주민들의 뜻을 헤아리고 북돋는 것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올해는 배다리마을이 산업도로 건설로 두 동강이 날 위기를 지켜낸 지 꼭 10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마을공동체가 더 탄탄하게 형성되었고, 배다리 마을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담고 있는 많은 문화예술공간들이 자리를 잡았고, 오래된 책방들이 꾸준히 책 손길을 보태며 다듬어지고 있다. 책방이 단순하게 책만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꾸려오는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옷을 갈아입으면서 60년이 넘게 책방거리를 유지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기실, 이번 ‘도깨비’드라마 촬영지중 하나로 배다리가 뜨거워지면서 책방들도 시나브로 변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 집에 놀러오는 손님을 맞을 준비를 스스로 하고 있는 것이다. 쌓여있는 먼지를 한 번 더 털어내기도 하고, 책을 편안히 볼 수 있게 자리 배치도 바꾸고, 삐걱거리는 책장도 손질하고… 일요일에 쉬던 책방도 밀려드는 손님들을 위해 격주로 문을 열고, 가게 앞 낡은 화분을 손보기도 하며 서서히 단장을 하고 있다. 반짝하는 관광 상품에 눈을 맞추는 대신 더 다양한 책을 갖추고 손님들을 배려하느라 책방의 책손들이 바쁘다.

‘역사의 숨결, 문화도시 인천 동구’의 역사와 문화는 단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켜켜이 쌓아온 삶의 흔적이며, 지금까지도 살아내고 있는 삶의 현장이다. 오래된 도시가 품고 있는 매력은 그 시간만큼 발품을 팔아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배다리는 이상하고, 요상한 도깨비마을이 아닌, 가까이 보아야 예쁘고, 자세히 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는 곳이다. 느린 걸음과 여유로운 마음으로 천천히 발을 담그기를 권한다.

청산별곡 / 생활문화공간 달이네 운영자




다른 광장을 상상하는 시간

인천공간-다시-읽기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광화문광장-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2016년 말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광화문 광장이라는 장소가 새로운 상징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주 주말이면 벌어지는 집회는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주장이 얼마나 강렬하고, 많은 지지를 받는지 보여주는 척도는 ‘광장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가’, 다시 말하면 ‘광장을 얼마나 점거했는가’ 인 것 같습니다. 주말마다 반복되는 이러한 집회들을 통해서 광화문 광장은 ‘시민들의 정치적 통로’로, ‘민주주의의 최전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어떤 사건이 광화문 광장을 하나의 상징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광화문 광장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민들이 어떤 사건을 만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인천에서 최근 열리는 시민들의 집회가 부평역과 구월동 로데오거리로 나뉘어지거나, 예상보다 너무 적은 참여로 집회가 취소되는 일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인천에 ‘광화문 광장’과 같은 공간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센트럴파크-한국관광공사
광장은 유럽 도시 공간의 전통입니다. 유럽의 광장은 본래는 시장이었거나 교회의 앞마당이었지만, 중세를 지나며 도시가 형성되면서 왕, 영주, 주교, 도시의 자치 상인들과 같은 다양한 계층이 개입하며 다양한 형태의 광장을 만들었습니다. 한가지 공통적인 것은 광장들은 하나같이 궁전, 주거지, 교회, 상업 건물과 같은 밀집된 건물들 사이의 빈 공간이고,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사람들이 개입하며 형성된 광장은 모두 다원적 성격을 띤다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프랑코만쿠조는 그래서 광장의 역할을 장터, 지역 주민의 문화 공간, 예술의 장, 전통 의식의 배경, 군중 집회의 공간으로 다양하게 정의하면서, 광장의 주인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광장의 역사는 다릅니다. 우리의 기억에서 광장은 1971년 조성된 여의도 광장과 같은 국가 상징 광장이거나, 큰 관공서 앞에 차로에 둘러싸여 꽃배추 화단이나 기념탑 같은 것이 서 있는 들어가기 힘든 곳이거나, 기차역 앞에 버스나 택시 정류장이 차지하는 역전 광장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장은 항상 발이 닿고 일상적인 일을 하는 곳이 아니라,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찾거나 넓게 텅 비어 빠르게 스쳐 지나갈 뿐인 공간입니다. 광화문 광장 역시 도로에 둘러싸인 ‘교통섬’이라는 비판과, 거대한 왕정 시대의 모뉴먼트가 갖는 권위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인천의 광장은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인천의 광장의 절반 정도는 전철역 출구 앞의 교통광장입니다. 대부분 아주 작아서 사람들이 모이기에 적합치 않고, 좀 넓은 광장은 대체로 조경으로 메워져 있거나, 종종 버스 환승센터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도시공간의 중심이자, 도시 사람들의 삶의 중심인 공간으로서의 광장은 우리 도시 안에는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한국에서 도시공간의 중심에 공적 공간으로서 광장의 위치는 큰 공원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 이후로 도시 사람들의 삶의 질에 대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면서 1인당 녹지 면적, 1인당 공원 면적 등의 수치들이 세계 유수의 도시와 비교되면서, 도심 공원의 필요성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는 1997년부터 여의도 광장이 여의도 공원으로 변화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서 서울숲, 북서울 꿈의 숲과 같은 도심 내 대형 녹지 공원, 청계천 복원과 같은 도심 내 수변공원 조성이 이루어졌습니다. 인천도 1988년부터 1998년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간석동, 관교동, 구월동을 가로지르는 중앙공원을 조성했고, 시민회관이 사라진 자리, 미군부대가 빠져나간 자리 등은 예외없이 공원으로 변신했습니다.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던 다른 열악한 주거지와 달리 수도국산에는 넓은 근린공원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송도와 청라와 같은 최근 계획 도시의 한가운데에는 센트럴파크, 청라중앙호수공원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런 대규모 공원들에는 중간중간에 작은 광장이 포함되어, 우리 도시에서 광장은 공원의 일부로 함몰되었습니다. 일상이 계속 머물러야 할 광장이 ‘여가’라는 비일상을 누리는 공원 속으로 들어가 어색한 동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도시인의 삶의 중심인 유럽의 광장과 달리, 공원의 일부분이 된 광장은 우리의 도시공간에서 불필요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가도, 문화생활도, 상거래도 이루어지는 유럽의 광장 문화와 다르게 우리는 여가는 공원에서, 문화생활은 각 기능에 맞는 문화공간에서, 상거래는 백화점과 아울렛으로 분산됩니다. 도시의 모든 공간을 샅샅이 찾아내어 이런저런 기능을 빼곡하게 채워놓은 우리의 도시 공간에서 ‘비어 있으니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고, 누구나 써도 되는’ 광장 같은 공간은 그 자리를 찾기 힘들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중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여가를 위한 공원 속 광장이 아닌, 도로에 둘러싸여 다가갈 수 없는 광장이 아닌, 일상적 거리와 건물들 사이에 열려있는 광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광장은 표면적으로는 어떠한 기능도 없는 빈 공간이고 누구도 주인이 아니기에-따라서 모두가 주인이기에-, 온갖 기능으로 꽉 메워진 도시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운 복합적인 활동과, 평소에 들을 수 없는 도시의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은 광장이 가장 적합해 보입니다. 그 광장이 도시의 한 가운데에, 우리의 일상이 늘 스쳐 지나가야 하는 곳에 존재할 때, 우리는 도시에 함께 살고 있지만 각자의 일상에 쫓겨 잊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금 더 듣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고,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내 목소리를 누군가 들어주길 원하는 때가 온다면, 광장의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순간도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인천’이라는 도시에서도 광장을 통해 만들어지는 소리는 도시의 여론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가장 미분화된 시간을 살아가는 도시의 삶에서, 타인의 목소리가 뒤섞인 광장은 불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광장을 통해서 끊임없이 이 도시에 새로운 누군가가 존재함을 인식하고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그로 인해 나의 삶도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도시에서 살기에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인천에 살고 있는 300만 명의 목소리를 기능으로 가득찬 도시가 다 담아내기 어렵다는 점에서, 광장의 필요성은 더욱 도드라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행복한 주말을 보내는 송도 센트럴파크의 풍경을 바라보며, 광장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김윤환/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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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첫 주말 촛불집회 6000여명 참석…‘박근혜 즉각 퇴진’ 촉구’. 경향신문. 2016.12.11.
‘강추위도 녹인 인천 촛불 “가자 광화문으로”’. 뉴스1뉴스. 2016.11.24. 
‘인천서 박 대통령 하야 반대 집회 참가 인원 적어 무산’. 뉴스1뉴스. 2016.11.24.




[큐레이션 콕콕]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도깨비

큐레이션-콕콕

 

2017년에도 ‘인천문화통신 3.0’의 뉴스 큐레이션은 계속됩니다. 지난해에는 한국사회에서 펼쳐지는 문화현상 중 그때그때 주목할 만한 이슈를 소개했지만 올해는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합니다. 시간과 사건의 접점에서 탄생한 시끌벅적한 뉴스가 아닌 특별한 문화 이슈를 속 깊게 들여다보는 ‘큐레이션 콕콕’,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도깨비’입니다.

드라마는 지난 1월에 종영했지만 ‘도깨비’ 열풍은 여전합니다. 인천시는 도깨비 관광 코스를 개발해 홍보에 나섰고 촬영지 중 하나였던 배다리 한미서점은 TV 속 달콤 현장을 탐방하러 온 관광객들로 북적입니다. 그림책이나 신화에나 등장할 것 같은 도깨비가 도깨비 책방으로, 도깨비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소환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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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람은 아닌 상상의 존재입니다. 특정한 모습이 없고 기록마다 형태가 각각 다릅니다. 한국의 도깨비는 한복을 입고 갓을 쓴 스타일로 자주 묘사됩니다. 전래동화 속의 도깨비는 사람을 괴롭히거나 혼내주는 걸 좋아하기보다 순하고 우직하며, 따돌림을 당하면 화를 내고, 체면을 중시하는가하면 시기와 질투도 많습니다. 메밀묵, 막걸리, 이야기, 노래, 씨름, 장난을 좋아하고 붉은색을 싫어합니다. 인적 없는 야산이나 폐가에 거주하며 이따금 민가로 내려와 소를 지붕에 올려놓거나 솥뚜껑을 솥 안에 집어넣는 장난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로 사람을 홀리는 도깨비, 빈 쌀독에 쌀을 채워 넣는 도깨비, 바늘을 무서워하는 도깨비 등이 있다고 하네요.

도깨비에 관한 이름은 매우 많습니다. 전라도에서는 도채비, 도체비, 도치기, 다른 지역에서는 도까비, 토재비, 토째비, 톡깨비, 홀개비, 홀깨비, 도깨기, 도째비, 터깨비 등으로 호명됩니다. ‘독갑이’ 또는 ‘귓것’으로도 불렸으며 한자로는 독각귀(獨脚鬼) 등으로 표현됩니다. 보통 한자의 ‘귀’를 도깨비로 알지만 도깨비와 귀신은 다릅니다. 도깨비는 방망이를 가지고 다니거나 빗자루 등으로 변신해 사람을 속이고 골탕 먹입니다. 왠지 멍청하고 잘 속아 넘어가는가 하면 속이려고 하다가 결국 자신이 속고 마는 우둔함 등은 도깨비가 주는 친근감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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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와 남원 사이에 있는 원색장 마을에는 도깨비에게 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 논에는 돌이 많았는데 도깨비한테 잘못하면 도깨비가 심술을 부려 돌을 가져다 놓고, 잘하면 돌을 치워준다는 전설이 ‘도깨비 소환’(새전북신문 2017.2.16.) 이란 글에 자세히 나와 있네요.

옛날에 자갈이 많아서 농사가 안 되는 곳이 있었는데 가끔 도깨비가 와서 논을 떼 매어 가겠다고 심술을 부리곤 했다. 농부는 짐짓 시치미를 떼며 자갈이 많이 있어야 농사가 잘되는데, 자갈이 없어서 어차피 농사도 못 지으니까 떼 매어 가려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 도깨비는 어디선가 돌을 주워다가 논바닥에 퍼부었다. 농부는 손뼉을 치며 이제 돌이 많아서 우리 농사 잘 되겠다고 좋아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심술을 부리며 도깨비가 자갈을 모두 주워서 가져갔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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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한국형 신화 및 귀신 콘텐츠를 사용한 작품은 <위대하고 찬란하神 도깨비> 이전에도 <월하의 공동묘지(1967)>, <전설의 고향(1977-1989)>, <은행나무침대(1996)>, <여고괴담(1998)>, <왕꽃선녀님(2004-2005)>, <오 나의 귀신님(2015)>, <곡성(2016)> 등이 있었습니다. 웹툰 <신과 함께>는 한국의 민속 신들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이미 공연한 뮤지컬 외에도 영화, 드라마로 제작 중입니다. 이들 작품이 어느 정도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고 볼 때, 우리 고유의 정신적 문화유산인 신화의 세계관에서 도깨비는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있을까요?

한국의 전통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계보는 크게 환인(桓因)계와 옥황상제(玉皇上帝)계로 구분합니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무속 신들은 대부분 옥황상제 계보로 바리공주 신화도 여기에 속합니다. 환인계 신화는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의 알타이족 신화에서 영향을 받았고, 옥황상제계 신화는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도교 및 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도깨비는 이 두 계보에 속하지 않고, 한반도 내에서 자생한 정신적 유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욱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는 한국 신화에서 도깨비가 처음 등장한 것을 신라시대 처용이 짓고 고려시대 8구체 향가로 발전된 처용가(處容歌)로 봅니다. 처용은 원래 용의 아들로, 신라 헌강왕을 따라 수도 서라벌에 와서 벼슬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밤 역신(疫神)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는 것을 발견하는데 이때 처용이 춤을 추며 부른 노래가 ‘처용가’입니다. 처용의 노래를 들은 역신은 처용이 자기를 발견하고도 아무 해를 끼치지 않고 춤추며 노래만 부른 관대함에 감복해 누구든 대문에 처용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붙여두면 그 집에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떠나갑니다. 처용가에 나오는 역신이 도깨비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도깨비의 특성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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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를 신으로 숭배하는 신앙과 대중화된 도깨비 설화는 어느 정도 일관성을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부각됩니다.

  1. 메밀묵, 팥시루떡, 돼지고기, 술을 좋아한다.
  2. 성격이 괴팍하고 영악하며 장난을 좋아하는 반면, 간혹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어리숙하고 친절한 모습도 보인다.
  3. 사람과 친하고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4. 간혹 크게 될 사람을 만나는 경우 그 사람의 미래를 알려주기도 한다.
  5. 특히 여자를 좋아하는 호색한이다.
  6. 불로 변하고 불을 다스릴 수 있다.
  7. 재물을 불러 모으는 힘이 있다.
  8. 외딴 산속이나 해안지역, 혹은 바다에 자주 출몰한다.
  9. 말의 피를 대단히 무서워한다.

드라마 <도깨비>의 인물설정은 한국의 전래 도깨비 신앙 및 설화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도깨비 김신(공유 분)과 도깨비 신부 지은탁(김고은 분)을 처음 이어주는 매개물은 메밀꽃인데 이 점은 메밀묵을 좋아하는 도깨비의 특성을 연상시킵니다. 박욱주 교수는 ‘공유’의 <도깨비>, 한국 도깨비 설화와 얼마나 일치하는가(크리스천투데이 2017.2.12.)를 시작으로 도깨비 및 저승사자 관련 글을 세 차례에 걸쳐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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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의 마지막회는 2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누군가는 이 드라마가 삶에 대한 책임감과 성실함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흔히 운명은 정해져 있고, 바꿀 수 없다고 하지만 ‘운명을 질문하고 그 답’을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존재지만 저마다 어떤 운명의 길에 놓여 있는 걸까요? “너의 삶은 너의 선택만이 정답이다. 그대 삶은 그대 스스로 바꿔놓은 것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네요.

사실 얼마나 더열심히 최선을 다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매일 전력질주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포기하지는 말아야겠단 생각은 한다.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는 가장 큰 죄를 지음으로써 영원한 벌을 받고 싶지 않다. 죽음 앞에서 후회가 남을 순 없지만 죽음의 신에게 너의 삶을 응원했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 재계 순위 1-10위만 신이 응원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삶의 책임감을 일깨워준 도깨비씨(브런치 블로그 2017.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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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는 재정난을 이유로 드라마 협찬을 중단했다가 4년 만에 ‘도깨비’를 후원했습니다. 드라마에는 인천의 곳곳이 등장하는데 동구 송현근린공원과 배다리 헌책방골목, 중구 아트플랫폼과 자유공원, 계양구 서운고등학교, 서구 청라국제도시 일원, 연수구 송도국제도시 일원 등입니다. 인천시와 인천관광공사는 드라마 촬영지를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포토존 이벤트와 할인상품 등을 제공할 예정이며, 영화 세트장과 촬영소를 인천에 조성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천아트플랫폼에서도 촬영이 많이 진행됐고, 은탁이 사는 곳으로 등장해 대사에서도 ‘해안동 인천아트플랫폼’이 여러 번 언급되기도 했었죠.

김신 : 그래서 어디 사시는데요?

은탁 : 인천 해안동 아트플랫폼 근처요. 대표님은 어디신대요?

김신 : 전 좀이따 아트플랫폼 근처일듯 싶네요. 30분 후에.

은탁 : 지금 저한테 데이트 신청 하시는 거예요?

김신 : , 저 마음 먹었거든요. 지피디님이랑 데이트하기로. 근처에 오시면 연락주세요.

30분 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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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한 ‘인천 도깨비 여행’은 여행 지역과 테마에 따라 원조 도깨비 코스, 웰니스 도깨비 코스, 로맨틱 도깨비 코스로 구성되는데 ‘원조 코스’는 배다리 헌책방골목과 송현근린공원, 자유공원, 제물포 구락부 등 원도심 촬영지와 차이나타운, 동화마을을, ‘웰니스 코스’는 메타세콰이어길이 있는 수도권매립지와 청라호수공원, 경인아라뱃길, 정서진을, ‘로맨틱 코스’는 송도 경원재 앰배서더호텔, 송도센트럴파크, 동북아트레이드빌딩과 포토존이 설치된 인천종합관광안내소 등을 구경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광정책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미명 아래 지역주민의 피해를 방치한다는 지적과 시에 중ㆍ장기적 관광정책이 없다는 비판적 시각이 그것입니다. 배다리 헌책방골목은 주말이면 500~600명이 몰려드는데 방문객들로 동네가 활기를 띠기도 하지만, ‘관광객으로 몸살’(시사인천 2017.2.13.)을 앓기도 합니다.

한미서점 김시연(48) 사장은 “관광공사가 이곳을 관광지화하면서 한 차례도 이곳 사정이 어떻고 무엇이 필요한지 양해를 구한 적은 없었다”며 “헌책방거리가 의미나 성격에 맞게 잘 소개되기 위해 상인들과 협의를 하는 것이 아닌 무작정 관광지화, 상품화만 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도깨비 촬영 순례’ 안 반가운 배다리상인(경인일보 2017.2.20.)

<위대하고 찬란하神 도깨비>는 동남아 및 미주로 수출됐으며 일본에서는 <鬼-도깨비>라는 제목으로 3월부터 방송된다고 합니다. 도깨비는 물론, 저승사자, 칠성신, 삼신 할매 등 한국문화를 알리고 한류 문화콘텐츠의 새로운 힘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면 좋겠네요.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뉴스 큐레이션 – 2017년의 키워드들, 그리고 사랑

아쉬움은 지우고 기대는 품는다. 잊지 못할 한해였지만 다가오는 해의 새로움도 궁금하다. 올해 마지막 큐레이션은 2017년을 주도할 주요단어와 사랑으로 채운다.

20대 트렌드 키워드
 01

‘대학내일’이 2017년을 주도할 20대 트렌드 키워드를 발표했다. 주체적으로 홀로 섬을 의미하는 ‘나로서기(나로서+홀로서기)’, 궁극의 소비를 통해 자기만의 만족을 찾는 ‘겟꿀러’, 흔적 없는 소통을 나누는 ‘팬텀세대’ 등이 이에 속한다.

취업과 스펙에 집착했던 청년들이 ‘갭이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갭이어는 ‘학업을 잠시 중단하거나 병행하면서 봉사, 여행, 진로탐색, 교육, 인턴, 창업 등을 체험하고 그 안에서 흥미와 적성을 찾으며 진로를 설정하는 기간’을 말한다.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저돌적 삶에서 여유와 휴식을 즐기며 자신에게 집중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이들의 움직임이 2017년의 문화 흐름에 긍정과 명랑의 기운을 불어넣을 것이다.

트위터 코리아가 국내 이용자들의 트윗과 계정을 분석해 분야별 키워드 및 순위를 발표했다. 사회 분야에서는 대통령, 최순실, 촛불집회, 세월호가 1위부터 4위를 차지했다. 음악분야에서는 방탄소년단,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분야에서는 복면가왕이 1위에 올랐다. 가장 많은 팔로우 증가율을 기록한 언론사는 허핑턴포스트. 문장이 아닌 단어 하나로, 어느 때는 전부 숫자로만, 드물게는 이모티콘을 타이틀에 배치해 임팩트를 준 보도 효과를 톡톡히 본 것 같다. 때때로 그림언어가 문자언어가 되고, 둘이 조화를 이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가 돈이 없지 생각이 없냐, 2017년 키워드들
 02

2017년에는 어떤 단어가 대한민국을 정의하고 주름 잡을까. 한국일보가 트렌드 도서를 통해 2017년의 풍경을 선보였다. 건강을 상징하는 웰빙이 음식뿐만 아니라 생활 곳곳에 녹아드는가 싶더니 올해 먹방과 쿡방으로 넘어온 라이프스타일에서 건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전문가들은 미래 지향적인 건강 개념이 혀끝에서 느껴지는 자극이나 지금 당장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에 압도당했다고 말한다. 내일의 안위가 보장되지 않는 헬조선 국민들에게 건강은 사치일까?

미래가 불확실하므로 결혼하지 않는다. 혼자 살면서 고양이를 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린아이 사진에는 ‘네 자식 너나 귀엽지’라는 댓글이 달리지만 고양이 사진에는 ‘네 고양이 나도 귀엽지’라는 호의적 멘트가 붙는다.

내년은 프로 불편러들의 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여성혐오, 장애인 조롱, 인종차별 등 사회적 약자에 가해지는 폭압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 최근 사전 허락 없이, 혹은 남녀 배우 중 한 사람에게만 통보한 뒤 키스신(베드신)을 촬영한 것에 대한 프로 불편러들이 비판이 이어졌다. 정치적 올바름(PC)이냐 지나친 트집 잡기의 ‘PC 정신병’이냐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누군가 사소하게 폄하한 일이 어떤 이에게는 트라우마가 되고, 잠깐의 불안이 진한 상처로 남을 수 있음을 잊지 말자.

따듯함에 대한 갈망, 휘게 라이프

03

휘게(hygge)는 행복한 감정, 긴장을 풀어도 되는 느낌을 말한다. 따듯한 욕조에서의 반신욕, 친구가 건넨 핫팩, 고구마를 호호 불어먹는 시간 등이 ‘휘게 라이프’의 작은 모습이다. 옥스퍼드 사전이 휘게를 올해의 단어 후보로 뽑았다. 단순함을 추구하는 흐름 속에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강조하는 삶.

휘게는 웰빙에서 유래한 덴마크어로 “휘겔리한 시간 보내세요”처럼 사용한다. 이 표현에는 어지러운 환경에서의 스트레스를 가족, 친구, 공동체 구성원들과 더불어 풀고 편안함을 얻고자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퇴근 후 아늑한 곳에서의 차 한 잔, 함께여서 즐거웠던 산책 등이 충만한 기쁨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다.

[연애를 영화로 배웠네] 연애, ‘올해도 글렀어’라는 당신에게

04
‘연애를 OO으로 배웠네’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들이 문화콘텐츠에 연애 경험담을 엮어 쓰는 글이다. “다들 나라 망치느라 바쁜 와중에도 부지런히 외모도 가꾸고, 썸도 타고, 결혼도, 출산도, 이혼도 잘 하셨구나.” 그런데 나는? 올해 대체 뭘 했지? 연애는 또 물 건너 간 건가?

‘500일의 썸머’로 연애를 배운 어느 기자의 팩션이 연애 포기자, 혹은 연애 불능자를 위로한다. 영화에는 “누구의 여자친구가 되는 건 불편해요. 남녀가 만나면 누군가 상처를 입죠.” 같은 고백과 “당신이 틀렸어요. 언젠가 알게 될 거예요. 사랑을 느꼈을 때.” 같은 응답이 넘쳐난다. 연애를 젊은 남녀의 사랑으로 제한하지 않는다면 영화 속 수많은 재잘거림과 그 대화를 인용한 기사 본문에서 진심어린 삶의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하늘이 점지해 놓은 그 누구를 기다리는 톰인가요? 아니면 그런 환상은 종량제봉투에 담아 버리자고, 지금 서로 즐거우면 그만 아니냐고 생각하는 썸머인가요?”

어떤 상황에서는 쿨 피플이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부뚜막 고양이처럼 날뛰는 인간이 된다. 내 성격 때문일까, 상대의 조건 때문일까, 관계가 주는 기운 때문일까? 날씨나 바이오리듬에 민감한 성정을 타고난 것은 아닐까? 시시때때로 돌변하는 자신에게 우리는 올해도 똑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나는 누구인가? 올해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연애뿐만 아니라 멋지게 뽐내고 싶었던 성과도 올해는 글렀다. 하지만 어김없이 신선한 새해는 오고, 우리는 또 누군가를, 그리고 또 다른 나를 만날 것이다. 굿 럭.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뉴스 큐레이션(2016.12.6~12.19)

더 이상 ‘큰’ 문화를 외면할 수 없었다. 나라와 문화를 짚어야 했다. 12월 첫째 주 뉴스 큐레이션은 다소 무겁다. 그만큼 진지하다.

한 떨기 꽃잎 같던 서울
 01

취직이나 창업이 아닌 ‘창직’(직업을 창조하다)이 대세라더니 ‘문화창작자’라는 직업도 있다. 문화창작자 전현주 씨가 한양도성을 걸었다. 높은 곳에 오르면 “야호!”라고 외칠 법도 한데 지나가던 사람들은 청와대가 어느 쪽이냐고만 묻는다. 어느 하루, 옛사람들은 해도 뜨기 전에 집을 나서 짚신과 고무신을 신고 도성 안팎을 걸었다. 산꼭대기에서 궁궐을 보고 ‘저기 우리 임금이 산다’고 감탄했다. 요즘 사람들은 감탄에 인색하다. 대통령이 사는 곳이 궁금해 먼 길 올라온 사람도 ‘야호’나 ‘히야’를 내뱉지 않는다. 눈 크게 뜨고 내려다보기만 한다. ‘둥근 모양 한 떨기 꽃잎’은 한양을 주제로 한 과거시험에서 나왔던 표현이다. 포근하고 아련하다. 오늘의 서울도 둥근 한 떨기 꽃잎 같을까? 성곽 어느 즈음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도성길을 걷던 행인은 자연스럽게 그의 시를 떠올린다. 잊으려야 절대 잊히지 않는 구절을 읊조리면서 땀을 닦고, 또 닦는다. 입술을 침으로 적시고 오늘의 서울과 이 나라를 호명한다.

아무것도 하지말라
 02
유교 경전 ‘예기’에 나오는 이념이다. 천하공전, 즉 진리가 행해지면 천하가 공적인 것이 되고 검증된 이들이 등용돼 믿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는 뜻이다.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념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념의 실현은 어렵다. 나쁜 역사는 반복되고, 지겹게 되풀이된다. 정원의 뱃사공이었던 등평에게 빠져 억만금을 뿌린 문제가 있었고, 한언에게 빠져 온갖 혜택을 베풀다 그가 죽자 그의 동생으로 갈아탄 무제가 있었다. 무제는 신선술이니 방술이니 하는 도술에 현혹됐고, 어디선가 도깨비처럼 나타난 사이비 도사들은 불로장생을 위시해 욕망을 악용했다. 옛말에 ‘군주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요구가 있었다. 공자도, 한비자도, 도가에서도 군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능히 다스릴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변명도 이타적 인간을 전제하면 믿을 게 못 된다. 모름지기 군주는 사리사욕에 휘둘리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되, 욕망 다스리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 나라의 군주가 배워야 할 것은 ‘베껴 읽기’가 아닌 ‘옛 것 읽기’ 습관이다.

사람됨에 기여하는 문화
 03

여기, 팔순 노인의 말을 들어보자. 지난 50년간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했고, 문학과 예술, 정치, 사회에 두루 관심 보였던 인물이다. “문화 콘텐츠 장사였지 사람됨에 기여한 문화는 아니었다.” “자유와 규범 사이에도 질서는 있어야 한다.” “타인의 존중이 자신의 인간성에 충실한 것이다.” “거대한 우주에서 사람은 다 낮은 존재다. 진정한 자기 인식은 저절로 자기를 낮춘다.” 말로 내뱉는 것은 쉬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노인, 최근 200자 원고지 6만5000 장에 달하는, 19권의 전집을 출간했단다. 말 하는 건 그런대로 쉽다면, 글은 어떨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또 어떻고? ‘상대방에게 아름답게 절하는 자세는 누구나 다 좋아한다’는 그의 마지막 문장을 곰곰 생각해본다. 말 따로, 행동 따로. 거짓 고갯짓, 거짓 참회, 거짓된 반성이 너무 많다.

지옥에 빠진 일상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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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그런 그림이. 당시 SNS에서 난리가 났었다. 그 그림은 2014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 걸리지 못했다. 마당에 건다는, 광장에 건다는 걸개그림. 민중의 해원과 공동체의 신명을 위해 그려 세상에 소개한다는 그림. 특별전에 걸리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아귀도와 같은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재구성했다.” 4대강, 촛불, 위안부, 강정, 팽목항이 요리조리, 시민군 청년과 바리데기 처녀가 음양으로 얽히고설켜있다. 작가는 불태우고 녹인다. 뾰족한 걸 세운 뒤 탁탁 내리친다. 2년 전의 이 그림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향해 존재하고 있을까. 다시 한 번 ‘세월오월’을 낱낱이 봐야 한다면 그 시간은 왜 지금, 여기여야 할까.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뉴스 큐레이션(2016.11.15~2016.12.05)

2017년 최고의 키워드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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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잘 살자는 움직임이 뜨겁다. 촛불 하나는 우습지만 모이면 붉디붉다. 다수에 묻혀 나를 져버리자는 게 아니다. 나도 좋고, 당신도 좋은 게 좋은 거다. 가습기 살균제 파동, 경주 지진 피해,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사건’ 등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이 높은(늘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함께 잘 살자고 외치면서도 내가 누구인지 고민하고, 앞으로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지 걱정한다. 2017년, 대한민국의 트렌드는 ‘나’다. 부를 좇고, 내 집 마련으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집요함이 아닌 이기적인 휴가로 나만의 만족을 찾고, 간섭받지 않는 삶을 사는 걸 말한다. 회사도, 사회도, 국가도, 내 미래를 책임지지 못한다. 싫은 게 있다면 아웃을 외침. 때때로 주체적인 결별 선언이 필요하다.

관태기에 지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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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관계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인간관계에 권태를 느낀다. 혼자가 편하다. 스트레스 받고 눈치 보는 관계를 유지하느니 차라리 자발적 아웃사이더를 선택한다. 3포 세대, 5포 세대, 7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 집 마련, 희망, 꿈)까지 보이지 않는 힘에 눌려 ‘포기’의 숫자를 늘리고 있는 청춘, 2030을 대변하는 많은 이름들. 관태기는 관계와 권태기의 합성어다. 인간관계에 따라붙는 말말말. ‘스트레스’, ‘힘들다’, ‘어렵다’, 그리고 인맥과 스펙. 에라, 모르겠다. 영화도 혼자 보고(혼영), 밥도 혼자 먹고(혼밥), 술도 혼자 마시자(혼술).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일 뿐이라고? 얼마든지 그렇게 살아도 외롭지 않을 자신 있다고?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그게 거짓 처방일지라도.

마음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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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과 책방이 다르듯, 약국과 약방은 다르다. 공간과 명칭의 재발견, 혹은 다시보기는 소수의 손길을 거쳐 시대와 세대에 의해 재정의된다. ‘방’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아담하고 따듯한 이미지. 친구가 내민 종이 상자에 ‘마음약방’이라고 적혀 있다. 상자를 열어보니 영화처방, 그림처방, 요리레시피, 산책지도가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작은 거울 하나. 마음을 치유하는 자판기에는 ‘용기 부전, 예민성 경쟁 과다증, 꿈 소멸증, 자존감바닥 증후군, 미래막막증, 월요병 말기, 급성 연애세포 소멸증’ 등의 병명이 적혀 있다. 달랑 500원을 넣고, 처방이 필요한 증상을 누르면 퐁당, 약이 떨어진다. 진짜 그 병을 앓고 있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런 병 따위 없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처방약은 곱게 받아든다. 플라시보 효과가 선보이는 ‘신약 월드’가 펼쳐질지도 모르니까. ‘마음약방’은 서울시민청과 대학로 서울연극센터에 1, 2호점이 있다. 약효과를 본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조금씩 웃고 있다.

1인 가구 가족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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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 혼밥, 혼행(혼자 여행하기)에 이은 혼찍(혼자 가족사진 찍기)의 탄생. 1인 가구의 주인이 가족사진을 찍으러 온다. 혼자 사는 1인 가구에게 가족은 무슨 가족? 반려 강아지, 고양이, 만화책, 노트북, 핸드폰이 그들과 함께 한다. 가족으로 작업복을 꼽고, 가족으로 이어폰을 가지고 온다. 허공을 데려온 사람도 있다. “여백 같은 시간에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은 혼자 있는 공간의 압박감이에요. 가족 같은 물건이 많이 있지만 혼자 사는 삶의 무게감을 표현하고 싶어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어요.” 지난여름, 인천발전연구원은 ‘싱글이 행복한 소비 도시 인천 만들기’라는 보고서에서 현재 약 25만명인 인천의 1인 가구수가 2020년에 28만8천만, 2035년에는 40만 가구에 육박할 것으로 내다봤다. 15년 후쯤이면 인천지역 전체가구의 30%가 1인 가구일 거라고 한다. 인천시, 인천문화재단 등이 후원하는 ‘1인 가구 가족사진’ 프로젝트는 아트팀 ‘쁘레카’가 서울 합정동에서 진행한다. 12월 22일까지 참여할 수 있다.

이재은(뉴스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