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과 여성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이번 호 부터는 인천아트플랫폼의 국제교류사업으로 일본의 요코하마 뱅크아트1926, 인도의 산스크리티재단과의 교류 사업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소식을 격호로 싣습니다.

델리의 전철역 – 여자들 만 탈 수 있는 칸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처음엔 혼자 밖에 나가지 못했던 내가 이제는 지하철을 타고 델리(Delhi)의 시내를 누빈다. 그러나 나는 가방에 항상 페퍼 스프레이를 가지고 다닌다. 레지던시에는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꼭 돌아오고, 거리에서 남성과는 이야기를 하거나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한다.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나 스스로에게 통행 금지시간을 적용시켰다. 옷은 헐렁한 긴바지에 긴팔을 입는다. 델리의 지하철은 서울의 지하철 같이 깨끗하고 연결이 잘 되어 있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기 전에 보안 검사를 꼭 지나가야 한다. 비행기를 타듯이 가방을 엑스레이 기계에 통과시키고, “Ladies” 라고 씌여진 줄을 따라 가면여자 경찰이 몸 수색을 한다. 이런 보안 경비는 지하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슈퍼마켓, 영화관, 쇼핑몰, 박물관, 심지어는 거리의 시장에서도 보안 검사를 한다.

지하철 안 여성 전용 칸

보안 검사를 지나서 드디어 지하철 플랫폼에 도착하니 여성 전용 칸을 표시해둔 팻말이 보인다. 최대한 보수적이게 옷을 갖춰 입은 나의 걱정과는 달리 지하철 안의 여성 전용 칸에는 민소매 티셔츠와 스키니 청바지를 입은 여성들이 보인다. 그러나 전통 사리(인도의 전통의상)를 입은 여성들도 절반 이상 된다. 여성 칸과 혼용 칸 사이엔 문이 없어서 그 너머로 서있는 남성들이 보인다. 여성 전용 칸의 전체적인 색상이 밝고 풍부하다면 혼용 칸의 색상은 이와 대조적으로 칙칙하다. 어떤 남성들은 두 칸을 잇는 연결 부위에 앉아있다. 공중 화장실에서와 같이 사회적으로 규정된 남녀의 분리된 공간을 여러 공공 장소에서 경험할 수 있다. 레스토랑에서는 여성이 혼자 온 경우 가족을 위한 구역에 자리를 잡는 것이 좋다. 이렇게 남성과 여성의 공간을 나누게 된 것은 전통적인 관습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화두가 된 인도에서의 여성에 대한 범죄 때문이기도 하다.

쇼핑몰 입구의 보안 검사

인도에 간다고 말했더니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말렸다. 여자가 혼자 여행하기엔 너무 위험한 나라 아니냐고. 그렇다. 2010년도 이후로 가장 눈에 띄는 인도에 관한 뉴스 기사들은 죄다 성폭행 사건에 대한 것들이다. 그래서인지 델리에 도착하는 첫날부터 내가 가장 인상 깊게 관찰하게 된 것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제도와 여성의 권리, 그리고 인도 신화와 종교 간의 연관성이다. 인도는 거대한 나라이고, 그 인구의 숫자가 중국과 맞먹는다. 그에 반면 면적은 중국의 1/3밖에 되지 않는다. 땅덩이가 크고, 인구 밀도가 높은 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또 인도는 가까운 미래에 중국 다음으로 큰 경제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인도의 수도인 델리는 한국이 개발도상국이었을 때와 같이 현대적인 삶이 빠르게 전근대적인 삶의 모습을 대체해 나가고 있다. 여성에 대한 범죄는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전통사회와 현대사회의 마찰이라고 생각한다. 

지하철 역의 광고 : 여자아이를 버리지 마세요. 여자아이를 존중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남녀의 성비가 5대 1이 될 것입니다.
* 이 광고는 인도에 아직 남아선호사상이 존재하고, 여자아이를 시집 보낼 때 예물을 차려야 하는 관습의 부작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들의 뿌리는 오랫동안 남성우월주의를 지지해온 전통사회의 악습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슬람교를 믿는 중동의 국가들에서도 여성에 대한 범죄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그 외에 델리와 같은 대도시에 현저한 빈부격차도 이러한 범죄에 일조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교에서 묘사하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 문제를 종교와 연관시켜 생각해 보고자 했다. 인도는 힌두교 신자가 거의 80%이고, 그 다음으로 이슬람교(14.2%), 기독교(2.3%), 시크교(Sikh, 1.7%), 불교(0.7%), 자이나교(Jaina, 0.4%) 등의 종교 신자들이 있다. 이 글에선 인도에서 가장 많은 신자가 있는 힌두교를 다루도록 하겠다.

힌두 종교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묘사된다. 여성의 가치는 그녀의 신체적 미와 정절에 의해 평가되고, 결혼은 여성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대한 결정으로 표현된다. 힌두교의 중요 세 신들(Trimurti)인 브라마(Brahma, 창조자), 비슈누(Vishnu, 수호자)와 시바(Shiva, 파괴자)는 모두 남성으로 묘사되고, 그들의 배우자인 사라스바티(Sarasvati), 락슈미(Lakshmi) 그리고 파르바티(Parvathi)는 그들의 반쪽이자 여신들이다. 기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힌두교에서도 최초의 여성은 남성의 욕구에 의해 그의 몸의 일부분을 추출해서 태어나게 된다. 이러한 창조설은 여성의 자율성을 상징적으로 남성에게 가둔다. 모든 인간이 여성의 자궁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종교의 이러한 창조설들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인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 힌두교는 두 가지의 성스러운 신화, <마하바라타(Mahābhārata)>와 <라마야나(Ramayana)>가 그 내용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힌두교에서 섬기는 다양한 신과 여신들은 모두 이 두 가지 서사에 등장한다. 인도의 전통화와 조각들에 묘사되는 인물들은 모두 이 신화들의 등장 인물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 서사 신화들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 인도의 전통미술과 문화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이 신화들은 그리스 신화가 그렇듯이 상징적이고, 고대 사회의 철학과 사회 관습, 정치적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신화들은 <리그베다(Rigveda)>나 <우파니샤드(Upaniṣad)>와 같이 좀 더 형이상학적인 성서와 달리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쓰여진 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현재까지도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의 내용과 인물들은 춤과 연극, 미술의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힌두 종교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음양오행설과 비슷하게 여성과 남성의 조화가 우주를 이루고 있고, 이는 시바와 샥티(Shakti)라는 신과 여신으로 상징화 된다. 이 세가지 신화들에 등장하는 신과 여신들은 모두 시바와 샥티의 아바타(Avatar. 권화, 부활한 존재)들이다. 여기까지는 우주와 세계에 대한 조상들의 이해가 상당히 철학적이고, 사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신화들 각각 그것들이 구전되고 기록되는 과정에서 당시 기권 세력에게 유용하게 내용이 덧붙여지고 수정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이 신화들의 세계에는 신과 인간 그리고 악령들이 존재한다. 높은 지위에 태어난 인간들은 신과의 관계에 의해, 혹은 정신적 수양을 통해 신적인 능력과 지위를 획득하기도 한다. 이렇게 수양을 통해 신적인 능력을 획득하는 사람들은 거의 남성들이다. 그들은 모두 어린 시절의 교육과 결혼, 그리고 가정을 이루는 과정을 거친 후 출가하여 수양의 길을 떠난다.이 신화들에서 여성은 사랑과 정절을 통해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에, 그리고 남성은 정신적 완성의 길을 갈 것을 제시한다.

신화에서 주로 묘사되는 사건들은 여러 왕권들과 부족 사회들이 결혼과 교혼을 통해 자신들의 혈통을 유지하고, 영역과 영향력을 획득하거나 잃는 과정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전쟁들은 선과 악의 싸움이기도 하다. 신화에서 다루어지는 인간 여성들은 남성들의 싸움의 원인을 제공하거나 싸움 끝에 교환되는 전리품이다. 그들은 누군가의 부인이거나 딸로서, 그 아름다움과 정절이 항상 강조된다. 여성이 자신의 남편에 대한 정절을 죽음을 무릅쓰고 지켰을 때 그녀는 신들에게도 존경을 받게 된다. (한국 설화에도 이러한 이야기들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일부다처제가 자주 언급되는데, 이것은 왕가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제도로 제시된다. 남자아이의 출생은 이렇게 혈통을 유지하는데 온갖 신경을 쓰는 고대 사회에선 최고로 중요한 일임이 당연하고, 이는 이 두 가지 신화에서 번복해서 발견되는 요소들이다. 예외적인 경우로는 드라우파디(Draupadi)라고 불리는 공주가 다섯 명의 형제들과 결혼한 부분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찾아본 결과, 이는 인도에 존재하는 여러 부족들 중에 일처다부제를 시행하는 부족이 있었고, 이 부족의 관습을 대변할 수 있는 여신이 드라우파디라고 한다.

인도에서 가장 많이 숭배되는 라드하와 크리슈나(Krishna). 크리슈나는 그의 헌신적인 추종자들인 고피(양 혹은 염소 치기의 부인)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라드하(왼쪽)는 크리슈나의 아내로 고피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고 한다.

유디쉬트라가 두르요다나의 도박에서 그의 아내인 드라우파디를 잃자, 승자는 드라우파디의 옷을 벗길 것을 요구한다. 크리슈나 신이 드라우파디의 기도를 듣고, 그녀의 옷이 영원히 벗겨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다 몸져 누운 공주

라드하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는 크리슈나

결국 다신교인 힌두교는 이렇게 다양한 부족과 종족들을 인도라고 하는 한 나라에 포용시키는 지혜로운 장치였다고 여겨진다. 내가 인도의 종교 관습에 대해서 높이 사는 점은 바로 이 유연성이다. 사회가 변화하면 종교와 전통 관습도 그에 따라 변하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점점 교육 받은 여성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인도는 세계의 다른 나라들처럼 남성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남녀평등주의로 이동해 가야 할 것이다. 종교 또한 이러한 사회적 방향을 반영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인도는 개정된 서사 신화가 필요할 수도 있다. 이는 인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세계의 종교들은 과거의 관습을 현대적인 눈을 통해 다시 재해석하고 개정해야 할 것이다. 

파괴의 여신 칼리(Kālī)

파괴의 여신 칼리-2

번영과 부의 여신 락슈미와 그의 남편 비슈누

12년 전, 그러니까 2005년에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났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도 류시화 시인의 『지구별 여행자』를 읽었었고, 동양의 사상과 종교, 인류 7대 문명의 발원지인 인도에 가면 인간의 역사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때 잘 모르고 떠난 인도여행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여행으로 기억한다. 처음 인도를 접했을 때의 느낌은 감춰졌던 이 세상의 일부분을 목격한 듯한 ‘센세이션(sensation)’이였다. 서양의 문화와 도시적인 삶에만 익숙했던 나에게 인도는 사람이 사는 모양새가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나라이다. 또한 서양식 미술교육을 주로 받아온 나에게 인도의 미술과 건축은 전혀 다른 미의 기준점을 제시해 주었고, 이것이 유럽 중심주의 적인 관점의 가치가 사물과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지,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다시 찾은 인도는 12년 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인도는 너무도 다양한 얼굴을 가진 나라임에는 변함이 없다. 10월 초엔 두르가(Durga, 전쟁의 여신)라는 여신을 섬기는 축제가 열린다. 여신을 숭배하는 만큼, 여성을 존경하고 여성이 남성과 같은 권리와 지위, 그리고 자유를 가질 수 있는 날이 곧 오기를 바랄 뿐이다. 

파르바티의 또 다른 아바타 전쟁의 여신 두르가

 

글, 사진 / 이영주 작가

 

이영주는 2017년 인천아트플랫폼-산스크리티 레지던시의 국제교환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9월부터 10월 중순까지 인도의 델리와 자이푸르에서 한달 반 간 체류했다. 인도 전통미술에서 묘사되는 종교적 상징과 체계에 관심을 가지고 출발한 이 여정은 30미터 가량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기록했다. 이영주는 신화와 꿈의 서사구조를 이용하여 개인의 역사와 정체성을 애니메이션 영상 설치와 퍼포먼스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웹사이트 바로가기▶)




[큐레이션 콕콕] ‘욜로(YOLO)’ 권하는 사회

인생은 한 번뿐이다, 지금을 즐겨라, 아득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인내하지 말라, 행복을 위해 아낌없이 소비하라!

2017년 대한민국은 ‘욜로(YOLO) 권하는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욜로는 2004년 미국의 리얼리티 쇼 출연자인 애덤 메시가 처음 썼고, 2011년 캐나다 출신 래퍼 드레이크가 가사에 욜로를 사용하며 널리 퍼졌습니다. ‘좌우명(The Motto)’이란 곡에서 그는 ‘You Only Live Once? that’s the motto nigga YOLO’라고 노래했죠.

국내에서는 ‘꽃보다 청춘-아프리카 편’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배우 류준열이 캠핑카로 아프리카를 혼자 여행하는 여성에게 놀라움을 표하자 그녀는 ‘YOLO’라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이 영상이 전파를 타고 번지면서 욜로는 ‘여행’과 더불어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고 향유하는 욕망의 아이콘으로 소비됩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인내의 요구에 갑갑함을 느꼈던 청년들은 현재를 즐기라는 욜로의 부추김(?)을 희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줄지 않는 청년 실업률, 경기 침체 등에서 탈피해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던 거죠. 안락함에서 만족을 찾는 덴마크의 ‘휘게’, 느긋한 삶을 누리는 프랑스의 ‘오캄 라이프’처럼 욜로도 ‘일상과는 다른’ 달콤한 행복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취업전문사이트 ‘사람인’ 조사에 따르면 2-30대 남녀의 84.1%가 욜로족, 혹은 욜로 라이프를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현재를 즐겨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가 가장 많은 표를 얻었네요.

TV도 이런 흐름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MBC ‘무한도전’은 욜로 라이프 특집을 방송했고, 올리브 TV의 ‘어느 날 갑자기 100만원’은 출연진이 백만 원으로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낭만적인 섬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에피소드를 담은 ‘윤식당’, 한가로운 시골에서 세 끼 밥을 해먹는 반복되는 삶을 그린 ‘삼시세끼’ 등에도 욜로 라이프가 반영됐네요.

영미권에서는 욜로가 ‘중2병스럽게’ 쓰이는 속어라고 합니다. 미숙한 이들이 무모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핑계처럼 대는 말, 자신의 치기 어린 행동을 꾸미는 포장 언어라는 인식이 있답니다. 배우이자 뮤지션인 잭 블랙은 SNS에 “YOLO는 라틴어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카르페 디엠’ 대신 쓰는 말이 분명하다”고 올리기도 했네요.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현재의 행복을 위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고 있다며, 욜로족과 욜로 라이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들립니다.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말은 마케팅으로 활용하기 쉬운, ‘선동적인 멘트’라는 겁니다. ‘지르자!’, ‘하고 싶은 건 하자!’는 구호를 현재의 자기만족에 대입하기 시작하면 먹고 싶은 건 먹고, 가고 싶은 데는 가고, 갖고 싶은 건 다 갖자는 식으로 얼마든지 가지를 뻗을 수 있습니다.

‘무한도전’의 욜로 특집은 멤버들이 방송국에서 준 진행비로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을 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스쿠터를 사고, 한 끼에 20만원 하는 고급 호텔요리를 먹고, 드론을 띄우고, 부모님께 꽃배달을 합니다. (남의 돈으로) 마음껏 지르는 거죠. 예능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은 마음만 먹으면 이 정도의 소비는 크게 무리하지 않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꽃보다 청춘’의 좌충우돌 여행은 제작진의 진행과 염려 안에서 안전하고, ‘윤식당’ 출연자들은 사업 실패에 대한 리스크 없이 일하면서(촬영하면서) 돈을 법니다. 시청자들은 그 많은(?) 돈을 어떻게 탕진하는지, 낯선 외국에서 어떻게 식당을 꾸려나가는지를 궁금해하고, 그들의 행위에서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나의 욜로’는 없고 ‘당신의 욜로’는 저기 있네요.

매년 발행되는 소비 트렌드 분석서 <트렌드 코리아 2017>은 혼밥, 혼술, 1인 경제, 미니멀리즘, 욜로 라이프 등을 현재 지향적 사고가 반영된 올해의 키워드로 꼽았지만 20대들은 욜로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싶은 이상’이 아닌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현상에서 홧김에 돈을 쓰는 ‘시발비용(비속어 시발과 비용이 결합)’, 재물과 재산을 허투루 써서 몽땅 없앤다는 뜻의 탕진과 재미가 결합된 합성어 ‘탕진잼’ 같은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죠.

최근 욜로적 소비보다 절약하는 습관을 일컫는 짠돌이 문화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김생민의 영수증’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김생민은 의뢰자가 보낸 한 달 치의 영수증을 분석한 뒤 재무 설계를 해줍니다. 충동적인 지출에는 ‘스튜핏(Stupid·멍청이)’, 아껴 쓴 사례에는 ‘그뤠잇(Great·훌륭해)’이라고 외치죠. 그 영어 단어는 금세 유행어가 됐고, ‘생민하다’, ‘생민스럽다’는 용어도 등장했습니다. ‘돈은 안 쓰는 것이다’, ‘저축은 공기와 같은 것’, ‘커피 마시지 말고 면수(국수 삶은 물)를 마셔라’, ‘샴푸 값이 많이 드는 긴 머리는 잘라라’, ‘껌과 커피는 누가 사줄 때 먹는 것’ 등은 모두 ‘생민하다’는 신조어에 담긴 뜻이라네요.

경제관념을 정립해준다는 취지는 좋지만 2017년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커피 몇 잔 덜 마시면 OOO를 할 수 있다’는 논리는 시대착오적으로 보입니다. 지금의 청년들은 은행 정기예금 이자가 25% 안팎이었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으니까요. 

욜로 신드롬은 다 이 광고 속 노랫말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그때 사람들은 그 노래를 이렇게 패러디해서 불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망하셨지, 인생을 즐기다…”

“정말로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별다른 구호가 필요하지 않다. 인생이 한 번뿐이라는 이야기만큼이나 마땅하고도 중요한 사실은, 누구나 자기 인생을 산다는 거다. 걱정 없이 지금만 즐기는 듯 보이거나 앞날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듯 보이거나, 결국 하나뿐인 자기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과 결정이다.” -황선우, ‘욜로의 50가지 그림자’ 중에서

 

* 본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했습니다.
1. ‘욜로 라이프, 현재에 충실하라!’
   이미선, 에이비로드, 2017년 2월호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2. ‘YOLO(욜로)’, 영미권 속어인데 한국서는…
   매일경제, 2017.7.5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3. 20代 해외여행 11년새 고작 0.7%P ↑… ‘젊은 욜로族’은 허상
    문화일보, 2017.10.11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4. 욜로에 반기 든 짠돌이 청년들
    아시아경제, 2017.10.9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5. 욜로의 50가지 그림자
    두산매거진, 2017.9.15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6. ‘욜로’의 의미를 되짚어봐야 할 때
    한국금융신문, 2017.9.23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7. 욜로 대신 짠돌이 갈아탄 2030 ‘김생민 신드롬’
    스카이데일리, 2017.10.5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글, 이미지 / 이재은 뉴스큐레이터




보는 도시 인천, 느끼는 도시 인천.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린시절 국민학교 사회 시간을 기억해보면, 3학년 한 학기는 각자의 고장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 마을, 우리 구, 우리 시. 인천에 대해서 처음으로 배웠던 때, 인천을 설명하던 표현은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도 ‘수도권의 관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부터 새롭게 사용되고 있는 인천의 브랜드는 “All ways INCHEON”입니다. 1883년 개항 이후 약 150년 가까이 인천의 아이덴티티는 교통의 시작점이자 수도권의, 나아가서 우리나라의 입구와 같은 역할에서 정의되는 것 같습니다. 21세기 들어서 공항이 이러한 이미지에 많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만, 전통적으로 인천의 아이덴티티를 만든 것은 역시 항구와 바다일 것입니다.

누구나 아시다시피 인천의 바다는 여러 의미가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쳐오며 바다는 해안가를 따라 생겨난 공장의 차지였고, 수출의 통로였습니다. 경기만의 수많은 섬들과 태안, 서산에 이르는 여객선 운항의 중심도 인천의 연안부두였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 접경이라는 점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해군 제2함대가 인천에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해안가가 철책이 둘러있어, 인천에 산다 하더라도 인천의 바다를 느끼고 즐기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바다의 도시 인천에 정작 바다가 없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지난 2014년에는 인천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사진공간 배다리가 주최한 ‘해안선은 없다’라는 사진전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이번 이야기에서 바다와 해변의 얘기를 하는 이유는, 바다가 우리의 도시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각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의 바다에서 그러한 감각의 경험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서구 회화에서 원근법을 발명한 이래, 오랫동안 서구의 도시와 그를 본받은 다른 세계의 도시들은 직선의 잘 정리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더 이성적이며, 더 아름답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근대건축의 아버지인 르 코르뷔제는 사람의 몸을 통해 ‘모듈러’라는 너무나 인간적인 길이 체계를 고안하고도 그것을 통해 ‘살기 위한 기계’인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건설하고, ‘빛나는 도시’를 그려냈습니다. 1800년대 중반 파리 시장 오스망의 파리 대개조나 1871년 시카고 대화재 이후 도시 재건에 영향을 준 도시미화운동 등 무수한 도시 계획이 주는 선명함과 명료함 또한 이러한 믿음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명함과 명료함은 도시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도시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모형으로 바라보며, 지도로 관찰하는 통치자의 더 쉬운 통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더 쉬운 통치를 위한 더 쉬운 관찰, 즉 ‘가독성(legibility)’의 확보는 권력을 가진 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가들은 도시의, 그리고 국가의 모든 것들, 인구, 사회, 자연의 모든 측정 가능한 것들을 숫자와 지도로 만들어 냈습니다. 근대 국가가 지도와 통계의 확보에 골몰한 것은 그들의 통치 대상을 한 눈에 더 잘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최근의 도시는 권력자의 목적을 넘어서 스스로 시각화를 촉진하고 있습니다. 고도로 자본주의화 된 도시는 이제 소비의 공간이 되어 도시 속 사람들에게 소비를 권장하는 거대한 간판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건축가 로버트 벤츄리는 건축물을 ‘Duck(오리)’와 ‘Decorated Shed(장식된 창고)’로 구분합니다. 그는 건축물에서 장식을 걷어내기 위해 결국은 건물 전체가 거대한 상징이 되어버린 모더니즘 건축을 오리를 파는 오리모양 건물로 비유하면서 경직성을 비판하고, 창고와 같이 도로에 면하는 앞면을 적합하게 디자인한다면 어떤 용도로든 쓸 수 있는 건물의 유용함을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더 상업적인 건축물에도 어울리고, 급변하는 자본주의 사회에도 더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시대의 건축과 도시 공간은 평범한 네모진 건축물의 파사드와 공공 교통과 광장과 거리를 빠짐없이 간판과 조명과 각종 상징들로 장식하여 도시 사람들의 눈을 끊임없이 유혹해 왔습니다. 더 많은 소비를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최근의 어떤 흐름은 도시의 삶을 ‘보고 소비하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걷는 것’ 입니다. 제주의 올레길에서 시작한 걷기 문화는 이제 도시 안으로 스며들어 있습니다. 강화군처럼 지자체들이 자체적으로 둘레길을 조성하기도 하고, 구도심의 새로운 여가문화는 차량을 통한 접근보다는 골목을 걷도록 유도합니다. 도시의 일상적 삶에서 벗어난 공간에서 더 느린 이동을 통해서, 도시 사람들은 시각 외의 다른 감각을 더 많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어떤 공간의 경험이 보는 것뿐 아니라 소리와 촉감, 냄새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또 도시 내에서의 자전거 사용의 증가와 전동휠과 같은 퍼스널 모빌리티의 보급은 속도를 포기하지 않고서도, 또 더 많은 일상적 도시 공간에서도 사람들을 자동차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해방시킴으로써 도시 공간을 더 많은 감각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바다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특별히 무엇인가를 더 찾아내지 않더라도 시각 외의 모든 감각들을 더 적극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란 생각이 듭니다. 처음 해변에 도착하면 넓은 시야와 푸른 색깔이 사로잡지만, 그 바다와 해변에 더욱 오래 머물게 하고, 기억에 남는 것은 냄새와, 소리와 촉감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인천은 그동안 인천의 바다를 시민들로부터 분리해 둠으로써, 인천에서 만날 수 있는 어떤 중요한 경험과 기억의 권리도 막아 두었던 것은 아닐까요.

관광지가 아닌 곳으로의 여행이 늘어나는 것은 시각 이외의 감각의 경험이 더 공간을 체험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바다를 시민들에게 되돌려 줌으로써 다양한 감각으로 도시를 경험하는 것은 정말 시작일 뿐입니다. 도시 공간들은 서로 저마다 다른 냄새와, 소리와, 촉감과 맛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을 하나씩 찾아낼 때 인천은 더 많은 색깔과 개성을 가진 도시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지금까지의 도시 공간을 만들어 온 방식과는 역시나 조금은 달라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까지 더 깨끗한 도시, 더 보기 좋은 도시, 시각적으로 풍성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많은 다른 감각은 악취나 소음으로 취급받으며 도시에서 배척받았습니다. 또 지키고 싶은 어떤 소리나 맛은 잘 지어진 공연장 건물이나 음식 문화의 거리 입간판 같은 것을 통해 시각적 요소로 흡수되어 왔습니다. 최근의 도시 계획의 추세도, 사람들의 취향도 그렇듯 어떤 냄새나, 소리, 맛과 촉감은 위로부터의 계획 없이도 그냥 존재함으로써 더 가치있고 사람들이 찾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공간에서 또 다른 감각을 만들어 내려는 공간 계획이 도시 공간을 더 밋밋하게 만들 것입니다.

저는 종종 관광(sightseeing)과 여행(travel)이라는 두 단어가 주는 미묘한 차이를 생각하곤 합니다. 언젠가부터 단체 관광보다 개인 단위의 여행이 더 선호되고, 에어비앤비나 게스트하우스 같은 숙박 방식이 유행하고, 여러 도시를 하루 이틀씩 여행하는 것보다 한 도시에 오래 머무는 여행이 각광받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어떤 장소에 대한 기억이 단순히 보는 것만으론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란 생각을 합니다. 누군가 인천으로 여행을 온다면, 우리가 인천을 보여줄 것인지, 인천을 느끼게 해줄 것인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여행뿐 아니라 일상의 인천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도시 공간에서 눈을 감고 있어도 행복한 공간은 얼마나 될까요.

 

글/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J. Scott. 전상인 역. 2010. 국가처럼 보기. 에코리브르
R. Venturi et al. 이상원 역. 2017. 라스베이거스의 교훈. 청하.
김윤식. 1994. 항도 인천의 모습. 황해문화. 3
박상문. 1999. 인천에는 바다가 없다. 황해문화. 25
김미영, 전상인. 2014. ‘오감(五感) 도시’를 위한 연구방법론으로서 걷기. 국토계획. 49(2)




전세계가 멍때릴 날! 멍때리기 대회, 세계로 나아가다.2

6월1일 발행되었던 인천문화통신3.0 22호의 지구별문화통신에 실렸던 <전세계가 멍때릴 날! 멍때리기 대회, 세계로 나아가다.> 후속편으로 8월 27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개최된 <제4회 국제 멍때리기 대회>를 소개합니다. 본 행사는 인천문화재단의 2017 국제교류지원사업에 선정되었습니다.

2017년 8월 27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제 4회 국제 멍때리기 대회가 개최되었다.

유럽에서의 첫 대회라는 타이틀처럼 어쩌다 이 대회가 유럽에까지 건너가게 되었는지 새삼스럽게 놀랍다.

비영리 공공미술 단체인 로테르담의 Frank foundation(프랭크 파운데이션)이 우리를 로테르담에 초대한 주최다.

로테르담은 실험적인 퍼포먼스가 많이 열리는 도시로, 멍때리기 대회 역시 그러한 부분에서 로테르담에 소개되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풍차와 치즈로만 알고있는 낯설고 동화같은 나라의 이미지만 가지고 있던 터라, 실험적인 퍼포먼스가 많이 열리는 도시라는 로테르담의 소개는 설레이고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인천문화재단의 국제교류지원 사업을 통해 주춤하던 진행은 급물살을 타고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프랭크파운데이션도 멍때리기 대회를 위해 팀을 꾸렸고, 우리도 한국에서 준비할 것들을 준비해 나갔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순풍에 돛을 단 듯 마냥 쉬이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각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에다가 그 동안 대회에 사용한 물품을 현지 조달 가능한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적당한 것들을 찾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종종 발생했고, 일은 느리게 진행되곤 했다.

더욱이 시차때문에 이곳에서 한참 일할 시간이면 그들은 잠을 자야 하는 시간이어서 고작 하루에 4-5시간정도 제대로 소통을 하고, 나머지는 이메일을 통해 천천히 진행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시간은 흘러갔고 진행은 속도가 붙지를 않았다.

해외에서 진행되는 멍때리기 대회 업무를 도와주고 있는 사부장(사승현)과 나는 8월 16일 출국해서 17일부터 열흘가까이 대회를 위한 준비를 현지에서 하게되었다.

실제 함께 진행하던 현지 스텝들과의 만남은 이메일과 메신저로 소통하던 때보다는 조금 덜 답답했지만, 현지에서 겪어야 할 또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생기기도 했다.

현지에서도 우리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4회 국제 멍때리기 대회 홍보물을 꾸준히 업로드하고, 홍보를 위해 현지 스텝들과 플라이어를 뿌리기도 했다. 그리고 운이 좋게 전국방송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에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을 때에는 정말 뛸 듯이 기뻤다.

게다가 생방송 인터뷰였기 때문에, 해당 시간 전까지 몇개의 문장을 외워서 짧게 인터뷰에 응했다.

대회명 ‘Space-out competition’은 우리말 ‘멍때리기 대회’처럼 제목 자체로 사람들이 쉽게 대회의 의미를 파악하고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사람들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러면서 대회가 가지고 있는 메세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하고 있었다.

대회를 치루기 전, 대회 전반에 대한 설명을 하고 스텝들에게 각각의 역할을 지정하고 역할에 대한 설명을 해야하는 전체 스텝회의에는 한국어, 영어, 네덜란드어, 이란어가 난무하는 다소 복잡한 상황에서 진행이 되었었다. 이 또한 유럽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웃기고도 험난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롤러코스터같은 열흘을 보내고 마침내 대회 당일이 되었다. 긴장감, 불안감, 기대감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다. 현지 스텝들도 이른 시각부터 대회 준비로 분주했다. 주문한 물건들이 하나둘 대회 장소인 Schowburgplein(스카우부르크플레인)이라는 광장으로 도착했고, 우리도 한국에서부터 준비해온 물품들을 챙기고 무대를 만들고 경기장을 만드느라 정신없이 없었다.

대회는 오후 3시부터 시작이지만 2시부터 이미 출전 선수들은 현장에 많이 와 있었고, 대회를 즐기려는 모습들이었다.

‘각자 자신의 직업에 관련된 의상’을 입고 오라는 공지에 충실하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을 말해주는 의상들을 입고 왔다. 대학 졸업의상을 입은 사람, 안전모를 쓰고온 건설업자 또 곤충을 채집을 하는 도구를 챙겨 온 사람들을 포함해 여러 코스튬을 장착하고 왔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대회는 무리 없이 잘 진행 될 것이라는 안도감이 생기기도 했다.

롤배너를 통한 소리없는 진행을 하는 퍼포먼스와 멍때리기체조라는 사전 행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대회가 시작이 되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진지했고, 우승을 하려는 목표보다는 즐기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들도 광장의 인조잔디 위에서

편하게 앉거나 누워서 대회를 관전했다. 관객도 선수도 모두 멍때리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잡히고 화창한 날씨는 그런 무드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90분간의 멍때리는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은 종료를 알리는 휘슬소리에 요가매트위에 드러눕거나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멍때리는게 쉽지 않았었다는 의미였을까.

유럽에서의 대회답게 수상자들도 다양했다. 1위와 스페셜상은 네덜란드 현지인에게 돌아갔고, 2위는 한국인 예술가 그리고 3위는 아프리카 출신의 여성에게 돌아갔다. 1위에게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모양의 황금색깔 트로피와 다음 대회 개최지에 초대권(항공권 및 숙박권)이 주어진다.

특히 초대권을 수여하는 이유는, 다음 우승자에게 전 대회 우승자가 직접 트로피를 전달해주는 ‘전통’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4회 대회 우승자는 10월에 개최 될 제 5회 국제 멍때리기 대회를 위해 대만 타이페이 초대권이 주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트로피를 주고, 항공권과 숙박권으로 다른 나라에 초대되어지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그 또한 이 대회가 가진 매력일 것이다.

멍때리기 대회는 바쁜 도심의 공간에서 개최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는 멍때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집단과 바쁜 사람들의 시각적 대조를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기 때문이다. 즉, 참가 선수들은 가장 요란한 장소에서 아이러니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대회장 밖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된다. 선수들은 대회 자체를 위해 열심히 멍때리는 경기를 치루지만 한편으로는 관객에게는 멍때리는 퍼포머로 보여지게 된다.

경기장 안과 밖에서 각자 다른 시선으로 이 대회를 보고 느낄 수 있다. 그 모든게 하나로 엮여 멍때리기 대회를 완성하는 것이다.

대회가 끝나고 참여했던 선수 중 몇몇은 이 대회가 가진 의미에 대해 크게 공감하고 격려하는 말을 건냈다.

굳이 긴 설명이 뭐가 필요할까. 멍때리기 대회는 그 이름 자체로 모든게 설명되어지고 있었다.

지난 호 <멍때리기 대회 세계로 나아가다> 다시 보기 ▶

글/ 웁쓰양
사진제공/ 웁쓰양컴퍼니

웁쓰양은 <도시놀이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도시에서 예술과 결합된 소비없이 놀이할 수 있는 방식을 실험하고 있다.




1. 일본の요코하마の감상기에서 적응기로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이번 호 부터는 인천아트플랫폼의 국제교류사업으로 일본의 요코하마 뱅크아트1926, 인도의 산스크리티재단과의 교류 사업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소식을 격호로 싣습니다.

가마쿠라(鎌倉)는 요코하마에서 전철로 20분 거리로 아주 가깝다. 절과 영화촬영지로 유명한 바닷가가 있어서 주말이면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사진ⓒ노기훈

일본 레지던시에서의 생활. 당신이 만약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일본 레지던시의 매력은 어디까지일까? 지금 일본 레지던시에 있는 나는 이 방대하고 활기찼던 경험들을 단지 글과 사진으로만 풀어내야만 하는 고욕이 눈앞에 있다. 벌써 2달이 거의 다 되어버린 10월 중순에 펜을 집어 들었다. 일본에 온 이후로 일기는 하루하루 고행처럼 계속해서 써왔지만 그걸 그대로 까내서나의 생활을 남들에게 일일이 간증하는 수치스러움과 차별을 두고자 여기 ‘지구별 통신’ 페이지에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은밀하게 조합된 실용적인 글쓰기를 하고자 한다. 여기 있었던 일들을 자랑하자니 벌써부터 흥분해서 어느정도 과잉상태이다.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첫 문장을 고심하다가 ‘눈앞에 있다’라는 형용으로 마무리 지었다. 보이는 것과 관련된 미사여구는 시각예술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신중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그런 경솔함 따위를 상쇄할 정도의 이미지가 이번 요코하마 뱅크아트1926 NYK레지던시(이하 뱅크아트레지던시)에 참여함으로 인해 생겨버렸다.

뱅크아트1926 NYK레지던시에서 바라본 요코하마. 인천으로 치자면 송도인 미나토미라이가 멀리보인다. 사진ⓒ노기훈

2017년 8월 15일에 시작된 일본 생활이 추석을 지나 11월을 바라본다. 소위 기억이라는 것이 온전하게 이미지로 치환될 수 있는 유통기한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대개 보존력은 비일상적인 경험의 수효에 따르고 이미지의 형태는 사진적이다) 일본 레지던시 생활은 당장 주머니 속 화첩처럼 꺼낼 볼 수 있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정말 사진집이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다. 과거를 평가하는 출제위원이 와서 문제지를 내주고 ‘2017년 당신은 뱅크아트레지던시에 있었다. 2017년 8월 15일부터 2017년 10월 10일까지의 하루하루를 사건 순으로 낱낱이 서술해 보라’고 하면 정답에 버금가는 오답은 간단히 적을 수 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겪은 생활은 현재진행형으로 쭉 이어져가고 있어서 기억으로 용해되기에는 너무도 생생한 현실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고 지금 눈앞에만있을 것 같다. 이번 글이 일본 레지던시 생활을 풀어내는 첫 장이다. 그러므로 좀 과장되게 들리겠지만 이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을 담아 일본 생활에 대한 감격을 기록해 나가고 싶다.

나는 이 글을 누군가가 아주 오랜 후에라도 봤을 때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작가가 작업을 실행해 나가는 과정은 인지와 수용 그리고 결과물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요코하마에 있는 뱅크아트가 아니더라도 일본에서 작업하고자 하는 누군가가 필히 당면할 문제가 있다면 이 ‘지구별 통신’이라는 기획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 일대는 쇼핑의 천국이다. 주말에는 다양한 공연과 행사가 열려 가족단위 관광객이나 젊은 커플들이 많이 찾는다. 사진ⓒ노기훈

나는 수치스럽지만 일본인과 한국인이 비슷하다고 한다면 외향적인 유사성을 제외하고는 전혀 다른 발달 단계라고 생각한다. 키가 자연스럽게 커진 성인과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다리뼈를 이어 붙인 애어른이 같은 속도로 달릴 수는 없다. 일본에게는 근대로 서서히 변화해 간 과정이 있어서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이야기 할만한 기억의 추이가 있다. 그게 나쁘든 좋든 공동의 기억은 한 국가를, 한 사람을 지탱해 주는 내적인 힘이 된다. 하지만 기억상실을 한 이후에 자기도 모르게 부잣집 도련님이 되어 있다면 개인적으로 봐서는 지극히 황송한 일일 테지만 남들 앞에서 좋은 자가용을 타고 즐기는 것이 유일한 낙일 뿐, 기억을 불러 올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1926~1991) 같은 건 애당초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른들과도 항상 사이가 좋지 못하다. 언젠가 다리가 아파와 병원에 가봤자 아버지를 원망하며 다시 떼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게 그 기간은 마치 프로포폴에 취해 기억나지 않는 시간이다.

하지만 국가를 바라보는 관점과 별개로 인천과 요코하마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나라를 비교할 때는 크게는 중세나 근대, 현대로의 이행과정 작게는 전체적인 환경에서 비롯되는 깨끗한 느낌이나 버스 줄서기를 할 때의 질서정연함과 같은 것들이 평가 되는데 도시를 비교하자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도시는 도시마다 천차만별이어서 개별적인 비교 단위로 삼는 것도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 된다.

그 많은 도시 중에 인천과 요코하마. 인천과 요코하마는 둘이서만 속삭이는 공통된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하인천을 걸어 다녔을 때 보았던 그 기시감과 다르지 않다. 인천에서 생활을 한 사람이면 뱅크아트를 가기 위해 간나이 지역에 오면 데자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축이 난장판이 돼버린다. 잃어버린 오래된 형을 찾아와 흔적을 뒤쫓는 기분으로 요코하마는 인천에게 있어 평행이론에 근접한 도시상을 만들어 낸다.

인천과 요코하마라는 두 도시는 카페에 앉아서 서로의 과거를 이야기 하며 맞장구 칠 수 있는 요소가 너무도 많아 몇 시간이고 수다를 즐길 수 있는 반죽이 잘 맞는 선후배다. 타지에서 인천에 도착하여 인천이라는 도시가 주는 압박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나로서는 요코하마 역시 도쿄와는 다른 힘이 있다는 것을 마치 인천을 경유하여 다다른 끝판 대장에 선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장소에서 커왔지만 같은 조건에서 잉태한 기억을 요코하마와 인천은 손위아래처럼 공유하고 있다.

요코하마 바샤미치 거리의 오래된 카페 앞에 있는 수반마우(水飯牛). 거리에 말과 소를 물 먹이던 곳이 남아있다. 바샤미치는 말 길을 뜻한다. 사진ⓒ노기훈

이렇게 수도의 변방에 위치한 두 도시가 악수를 하고 작가를 교환했다. 나는 2017년 8월 15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힘들 정도로 유달리 비슷한 두 지역에서 자신들이 선정한 작가를 보내는 것을 보면   단지 좋은 작업만을 해오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나는 유심히 고민을 해봤다. 어떤 교류라는 측면에서 나라 대 나라도 아니고 도시 대 도시도 아닌, 정말 개인으로서 이러한 새로운 환경에 부딪히며 내가 무언가를 대변하여 유익하게 작용하는 지점이 어디에 있을까. 불면의 나날들을 이기고 나서 나는 몇 가지 유사점에 주목했다. 최초의 개항지라는 점, 그로 인해 최대의 중국인 마을이 있다는 점, 야구에 환장하지만 정작 야구를 잘하지 못하는 팀을 가지고 있고 광역시 내부의 각 지역마다 분별된 입지차이가 있어 경제적으로나 인적 구성이나 편차가 심하다는 점. 도쿄와 서울의 변방이라는 이미지가 족쇄처럼 따라다닌다는 점. 생각나는 것들 몇 개만 추려보아도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비슷했다. 처음에는 몸이 이것들을 다 소화하지 못해서 이상한 곳에 엉겨 붙으며 도처에 널린 작업거리들을 물색하고 다닌다고 거의 방전상태에 빠졌다. 인천에서 본 20세기 초의 풍경들이 요코하마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는데 그것을 지키고 다듬는 방법에는 좀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미리 밝혔다시피 나에게 그것은 20세기 중반과 후반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는 여기에 서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남았다. 아마 그걸 알고 싶은 욕구가 작업을 추동하는 일부분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러한 면에서 인천을 경험한 작가에게는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의 원천이 그야말로 널리고 널려 있었기에 매일 약에 취해 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작업은 하이(high) 보다는 로우(low)에서 진척되는 법. 정신을 가다듬고 매일 끄적거려 내려간 작업리스트를 분별하고 여과하니 남은 건 역시나 처음에 기획하였던 ‘일본 1호선(가제)’이었다.

신주쿠 공원은 넓이 58만3,000제곱미터, 주변 둘레 3.5킬로미터에 이르는 신주쿠 일대가장 큰 공원이다.  뱅크아트 스튜디오와 인접한 미나토미라이선 바샤미치역에서 전철을 타면 신주쿠까지 환승 없이 50분만에 도착한다.  급행을 타면 40분도 안되어 도착한다. 인천하고 참 비슷하지 않은가? 사진ⓒ노기훈

인천역에서 노량진역까지의 거리가 32.94km이니까 요코하마 사쿠라키초역(桜木町駅)에서 도쿄 신바시역(新橋駅)까지 거리는 29.40km 정도로 엇비슷했다. 중간에 부천시와 가와사키시가 동일하게 전통과 근대로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점도 비슷했다. 뱅크아트의 실무를 맡아보는 츠자와 상의 도움으로 1호선에 관한 책상 앞 리서치를 완료하고 직접 경험해 보기 위해 거의 망가지다시피 한 크림색 자전거를 뱅크아트로부터 빌렸다.
안장은 조절이 안되고 타이어도 힘이 빠져 있었지만 뭔가 큰 기대가 되었다. 이건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책상 앞에 붙여져 있던 작업리스트들이나 레퍼런스를 모두 떼어내고 ‘저는 지금 작업기간입니다’라는 문장만 붙여 놓았다. 요코하마와 인천에서 발견했던 유사성을 한국 1호선과 일본 1호선이라는 직선적 동선에서도 발견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시각에서 비롯된 유사성들이 물론 누구에게나 동일한 시각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지만 도시라는 생태가 비슷한 경로를 통해 지금의 요코하마와 인천으로 변모해 왔듯이, 도시의 단위가 아니더라도 철도라는 긴 여정에서 발견 하게 되는 역사적인 기시감과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이미 신바시역에서 첫 기차가 출발하기 기다리는 1872년 10월 14일 어느 누군가가 느꼈을 시공간의 압축감을 그대로 이어받으며 저만치 노량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사진/ 노기훈 작가

 

노기훈은 2017년 인천아트플랫폼-뱅크아트 스튜디오의 국제교환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8월부터 11월까지 일본에 체류한다. 사진카메라와 영상카메라로 주로 찍어 내는 활동에 관심이 많으며 사진과 기행문을 동시에 써서 글로 찍기도 한다. 인천역에서 출발하여 노량진역까지 최초의 철도 경인선을 따라서 사진 찍었으며, 지금은 일본 1호선인 사쿠라키초역에서 신바시역까지 걷고 있다. 




[큐레이션 콕콕] 숫자3의 비밀

동화 속 주인공은 왜 첫째나 둘째가 아닌 셋째일까요? 왜 그림책에는 삼 형제나 세 자매가 많을까요? 꾸며낸 이야기 속에서 대개 첫째와 둘째는 부모의 기대와 사랑을 듬뿍 받는 아이로, 셋째는 바보, 몽상가, 잠꾸러기, 게으름뱅이로 등장합니다.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첫째와 둘째는 지나치게 평범해지지만 셋째는 정이 많고, 동물과의 교감 능력이 뛰어나고, 베풀기도 잘하는 매력덩어리로 변신하죠. 영웅은 자신의 영웅다움을 세 번에 걸쳐 증명하고, 주인공은 세 가지 임무를 완수하며,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세 가지 마법 도구가 필요합니다. 세 가지 수수께끼를 풀어야 문이 열리고, 피 세 방울이 있어야 자식을 살릴 수 있고….

신호등은 왜 빨강, 노랑, 초록 세 개일까요?
메달은 왜 금, 은, 동만 있을까요?
우리는 승부를 결정할 때 가위, 바위, 보를 합니다. 가위바위보는 왜 삼세판을 하는 걸까요?
한국인의 이름은 대부분 세 음절이고요, 우리는 아침, 점심, 저녁 삼시세끼를 먹습니다.
크기는 대, 중, 소로, 등급은 상, 중, 하로 나누죠.
계급은 크게 세 층위인 귀족, 평민, 천민으로 분류했고, 더위를 물리치는 초복, 중복, 말복도 더하거나 빼기 없이 딱 3으로 명명됩니다.
물체의 상태를 나타내는 고체, 액체, 기체도 3의 법칙을 따르고 있죠.

우주는 하늘, 땅, 물, 세 부분으로 이해되고, 인간은 육체, 영혼, 정신으로 나뉩니다. 인생의 주요단계는 유년 시절, 성인 시절, 노년 시절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삶은 탄생, 현존, 죽음으로 정리되죠. 생성, 존재, 소멸이라고 하기도 하고요.
기독교적인 우주론은 세상을 하늘, 땅, 지옥으로 표현하고, 믿음, 소망, 사랑은 서로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는 미덕으로 간주합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佛寶), 부처님의 가르침(法寶), 부처님의 제자(僧寶)를 가장 귀한 세 가지 보물이라고 말합니다.

‘숫자 3’은 생명 탄생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남자란 뜻의 1과 여자란 뜻의 2가 결혼해 3이란 아이를 낳죠. 아버지, 어머니, 아이는 가족을 구성하는 원천적인 세 요소로 인류의 지속적인 삶을 보장합니다. 3은 생명과 결실의 표현이며, 그래서 안정된 숫자고, 자신만의 고유한 역동성을 갖고 있죠. 이 밖에 369게임, 삼진아웃, 삼신할머니, 스리쿠션, 삼족오(전설 속의 새. 황금빛의 세 발 달린 신성한 까마귀) 등 일상생활에서 쉽게 ‘숫자 3’을 접할 수 있습니다.

원시 부족들은 수 인식의 ‘제로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이 수의 크기를 표현하는 방법은 ‘하나, 둘, 그리고…… 많다’ 뿐이었죠. 하나와 둘 이상을 넘어서면 이내 혼란에 빠지고 ‘여럿’, ‘무더기’, ‘다수’라는 식의 단어를 썼습니다. 그들에게 수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어서 냄새나 색깔, 소음 등 어떤 사물을 지각하듯이 받아들였습니다. 오래 전부터 숫자 3은 복수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었죠.

3은 사물의 의미를 설명하는 숫자입니다. 노자는 “도는 하나를 창조했고, 하나는 둘을, 둘은 셋을, 그리고 셋은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말했습니다. 1은 점, 2는 선이지만 3은 면을 만들어 공간을 획득합니다. 삼각형은 어느 꼭짓점을 향해도 그 정점으로 말미암아 운동성이 느껴지죠. 왈츠의 3박자, 삼각관계 등 ‘3’만큼 우리 삶 곳곳에 깔린 수학적 정서는 많지 않습니다.

“3은 최초의 홀수로 완전한 숫자이다. 숫자 3 속에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숫자 3이 부정적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 사람이 있으면 그 안에 반드시 바보 한 명이 끼어 있다’, ‘뜰에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세 번째 사람은 놀림감이 된다’는 속담이 그것입니다. 두 사람이 모이면 파트너십이 형성되지만 한 사람이 더 끼면 방해가 될 뿐이라는 의미겠죠. 이와 유사하게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면, 제3자는 할 말이 없다’는 관용구도 있네요.

숫자는 우리가 사는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가격, 전화번호, 시간, 버스 번호, 거리, 속도, 무게, 집주소, 나이 등등 우리는 날마다 숫자와 부딪치며 살아갑니다. 의미망이 다양한 언어와 달리 숫자는 시간을 확인할 때나 지폐를 셀 때, 휴대전화 번호 등을 확인할 때만 필요한 평범한 도구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숫자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 7을 행운의 숫자라고 하는 걸까요? 왜 4층, 혹은 13번째 집에서 사는 걸 꺼려할까요? 숫자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 예술이나 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미신이나 소문이 우리의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다가 비성적인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거죠. 숫자는 디테일하고 세심한 언어로 여러 층위를 품고 있는 문자(소리)언어와는 기능이 다르지만 때때로 자신만의 고유한 무게와 생명력으로 보이지 않는 마력을 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나 어떤 날을 쓸모 있게 정리하고 싶을 때 숫자를 사용합니다. 역사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개인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죠. 숫자 ‘100’을 생각보세요. 100일 휴가, 100일째 만남, 100세 장수마을, 100대 국정과제, 100일 기자회견 등등. 이날은 어제나 그제와 다름없는 시간 속에서 등장한, 단순히 달력에서 숫자가 바뀐 결과일 뿐일까요? ‘100’은 이를 데 없이 아름다운 완성의 숫자입니다. 불완전함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완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고, 완전수인 100을 맞이하여 새로운 의의, 새로운 가치를 찾는 거죠.

숫자는 대상을 섬세하게 세분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숫자에는 마법의 작용이 숨어있는 것 같기도 하죠. 세상의 관계와 사건을 이해하는 데 숫자는 적지 않은 도움을 줍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주변을 관찰하고, 중요성을 부여하고,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숫자들과 더불어 말이죠.

9월이 지나면 2017년도 세 달밖에 남지 않겠네요.
아직 세 달이나 남았습니다.

 

* 본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기사와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1. 우리가 몰랐던 숫자3의 친숙함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2. 숫자3을 말하다(경희대학교 소리방송국)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3. EBS 교양-세상의 모든 법칙 ‘숫자 3의 비밀은?’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4. EBS 지식프라임-‘3’의 비밀: 주인공은 왜 셋째일까?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5. [밀물 썰물] 숫자 3(부산일보 2011.2.14.)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6. 『숫자의 감춰진 비밀』, 오토 베츠 지음, 푸른영토, 2009.
7. 『숫자의 탄생』, 조르주 이프라 지음, 부키, 2011.

 

글, 이미지 / 이재은 뉴스큐레이터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도시3: 젠트리피케이션을 마주하며.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경리단길의 유명한 쉐프가 동인천에 새로운 가게들의 문을 열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재밌었던 건 인터넷 상에서 플랫폼의 종류에 따라서 반응이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었습니다. 많은 블로거들은 가게를 방문하고 동인천 구도심에 젊은이들이 찾을 새로운 공간이 생겨난 것에 기뻐하고 만족해 했습니다. 반면 SNS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가게들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동인천이 거대한 바람에 휩쓸릴 것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최근 몇 년간 도시와 부동산에서 가장 뜨거운 문제인 젠트리피케이션 말이죠.
젠트리피케이션은 1964년 영국의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가 영국의 하층계급 주거지가 재개발을 통해 중산층 주거지로 변화되면서, 중산층이 저소득층을 특정지역에서 축출하는 현상을 정의한 단어였습니다. 이 단어는 이후 구미의 대도시, 아시아의 신흥 대도시들에서 유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활용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폭넓게 의미의 확장이 일어났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젠트리피케이션은 주로 주거보다는 상업시설, 특히 소규모의 근린생활시설에서 벌어지는 ‘상업 젠트리피케이션’과 ‘소매업 젠트리피케이션’, 언론 매체와 SNS를 통해 특정 지역이 떠오르는 ‘매스미디어 젠트리피케이션’,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매장이 대거 몰려들며 이루어지는 ‘프랜차이즈 젠트리피케이션’, 여행명소화 되면서 지역 상권의 성격이 변화하는 ‘투어리즘 젠트리피케이션’, 거주나 영업의 목적보다는 투자를 통한 자산 증식 목적으로 자본이 유입되며 이루어지는 ‘부동산자산 젠트리피케이션’ 등으로 정의되는 식입니다.
이렇게 확장된 의미 속에서, 최근의 우리나라에서의 젠트리피케이션은 대체로 주거지역의 급격한 상업화와, 이 과정에서 원주민과 임대상인들의 축출과정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듯 합니다.

‘원주민과 상인들의 축출’이 문제가 되어 젠트리피케이션이 이슈가 되었다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도시 개발의 역사에서, 원주민 축출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느 아시아의 신흥 국가들처럼 한국도 급작스럽게 몰려든 사람들의 도시를 재구조화 하면서 도시를 더 부유한 사람들의 공간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달동네 재개발, 광주대단지 사건, 뉴타운 사업에 이르기까지 항상 기존 거주지의 전면적인 철거와 원주민의 축출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빈 공간은 아파트와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원주민보다 더 부유한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바로 오늘까지도, 우리나라의 도시공간은 훌륭한 상품이며 무엇보다 안정적인 자산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국가가 앞장서서 경제성장을 위해 이것을 종용해 왔습니다.
세입자와 임차인 보호의 관점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은 갑작스럽게 생겨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2010년 대에 시행된 뉴타운 사업에서도 사업지의 세입자들이 사업 진행에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대부분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상인들의 임대보호를 위한 상가임대차보호법이 제정된 것은 2001년에 일이지만, 여전히 1991년 제정된 일본의 차지차가법에 비해 임차인 보호의 열악함이 지적되며 끊임없이 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나라의 도시 개발은 지역의 물리적 기억을 지우고 사람들을 축출하는 방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은 좌측부터 1985년 옥수동 재개발 전경, 2000년대 후반 은평 뉴타운과 진관동 구도심, 2017년 아현 뉴타운 사업지의 염리동. (출처: 서울사진아카이브, 시사in, jtbc 한끼줍쇼 방송 화면)

그럼에도 최근 급작스럽게 젠트리피케이션이 이슈가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세 가지가 지적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동산 투자가 확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잉여자본이 건설산업과 부동산으로 투자되어 순환된다는 데이비드 하비의 이론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부동산은 국가의 용인과 비호 아래 가장 강력한 자산 취급을 받았습니다. 땅을 사고, 아파트를 사던 것이 이제는 골목의 근린상업시설과 다세대 주택이 대상이 된 것이지요. 평균 수명의 증가는 은퇴 이후 30년의 삶에 대한 안정을 소구하게 하고, 그 결론으로 임대 수익과 부동산 투자를 얻어낸 베이비부머 이후의 세대들에게 이러한 부동산 투자는 꼭 거대 자산가가 아니어도 선택해야 할 미래가 되었습니다. 2016년 7월 26일 한겨레 신문의 음성원 기자의 기사 “’58년 개띠’의 상가 사냥,’94년 개띠’를 몰아내다”의 데이터 분석에 참여한 신수현(서울시 통계데이터분석팀)씨의 이후 뒷이야기는 더욱 명료하게 이러한 상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당시 분석 대상인 건물 소유주 중에 해당 지역에 여러 건물을 소유한 경우는 거의 드물었습니다. 연남동에 투자한 사람들이 꼭 거대 자산가는 아닐 겁니다.”
두 번째는 자영업자의 증가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지속된 불황, 정년단축과 조기퇴직, 청년실업 등의 문제는 이들을 자영업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임대상인들의 문제가 표면적으로 더 많이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비단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뿐만 아니라 프랜차이즈 산업의 문제점이 꾸준히 지적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최근 ‘공정함’에 대한 사회적 요구의 증가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임대인과 임차인의, 원주민과 이주민의 관계에 대한 문제 제기의 시작은 도시공간 속에서 드러나는 ‘공정함’에 대한 사회의 요구의 한 모습일 것입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는 도시 공간에 대한 무수한 분석과 대안이 존재합니다. 도시계획, 법과 제도, 인식개선 등 무수한 해법들이 다양한 연구를 통해서 제시됩니다. 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도시 공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그래서 도시 공간을 상품으로만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남으로써 사람들을 축출하고 배제해왔던 오랜 방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Naked City(‘무방비 도시’로 2015년 번역, 출간)’라는 책으로 유명한 도시사회학자 샤론 주킨은 도시의 일종의 연속성으로서 ‘정통성(authenticity)’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면서, 이 개념에 “도시에서 살고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속적인 집을 만들어주는 문화적 권리”의 의미를 덧붙였습니다. 어떤 지역이 갖는 정통성은 그 지역이 오랜 시간 축적해온 것들입니다. 지역의 사람, 공간, 행위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독특한 정통성은 도시 속에서 그 지역만의 매력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 매력이 어떤 계기로 널리 알려졌을 때, 그 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낯선 느낌의 상점과 음식점, 공연장과 전시공간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서울에선 이런 지역들이 무수히 명멸했습니다. 홍대, 이태원, 성수동, 연남동, 상수와 망원동 등. 인천도 북성동, 신포동, 배다리와 같은 지역들이 정통성을 가진 공간으로 부각되어 왔고, 최근에는 십정동과 같은 곳에서도 공장 지역의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상업공간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역의 정통성에 매료되어 자리잡는 새로운 가게와 공연장들이 원주민들의 주거지와 세탁소, 철물점을 대신할 때, 그리고 그렇게 ‘뜬’ 지역의 임대료가 상승해 새로운 가게와 공연장이 떠나고 흔한 프랜차이즈와 대기업의 음식점들로 변해갈 때 우리는 이 지역의 생명력을 고민해야 합니다. 모두가 이런 변화와 더불어 낡은 건물들을 대신해 고층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지역의 발전이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변해버린 공간이 예전의 매력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여느 상업지역처럼 흔한 곳이 되었다고 합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것을 자본이 도시를 ‘균일화’시킨다고 말합니다. 어느 도시 공간을 특별하게 만들었던 이유가 자본의 힘으로 인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도시 안의 여러 지역들이 ‘정통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지역의 사람, 공동체의 보호가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샤론 주킨의 말처럼 “정통성의 ‘외관’과 ‘체험’을 보존”하는 수준에서 머물고 말 것입니다. 누군가 떠나고,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재개발이든, 젠트리피케이션이든, 도시재생이든, 지금까지 도시를 재구조화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축출의 방식에서는 반드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최근 다양하게 등장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해법들이 임대료와 지가의 최대한 느린 상승과 임차 상인들의 조금 더 긴 계약기간 보호를 유도하는 것, 지역 주민과 이해관계자들의 공동체 형성 등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들에 대해 그러했지만, 특히 도시 공간은 ‘부동산’으로 불리며 자산과 상품의 면모 만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더 높은 지가, 더 많은 임대료가 도시 공간 활용의 절대선처럼 인식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꾸준히 도시 공간이 생명력을 가지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때입니다. 공공도 지금까지의 도시 개발에 대한 방관과 동조에서 벗어나서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의 연속성과 지역의 정통성을 지켜가는 방법을 마련하길 기대해 봅니다.

 

글/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김상일, 허자연(2017), 서울시 상업 젠트리피케이션 실태와 정책적 쟁점, 서울연구원
김현아, 서정렬(2016), 젠트리피케이션, 커뮤니케이션북스
샤론 주킨. 민유기 역(2015). 무방비 도시. 국토연구원
신정엽, 김감영(2014), 도시 공간 구조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의 비판적 재고찰과 향후 연구 방향 모색, 한국지리학회지, 3(1).
이선영(2016), 닐 스미스와 젠트리피케이션, 그리고 한국, 공간과사회, 26(2)
정원오(2016), 도시의 역설, 젠트리피케이션, 후마니타스
“‘58년 개띠’의 상가 사냥, ‘94년 개띠’를 몰아내다”, 한겨례신문, 2016.7.26
“뉴욕, 런던, 서울 거리 비슷해져…젠트리피케이션 영향”, 한국일보, 2016.7.12

 




예쁘지요 지긋지긋하게

대문짝만한 열쇠

200년도 더 된 집에서 살았다고? 아이고, 깜짝 놀란 나는 엘리자에게 되물었다.

“응, 잘 모르겠지만 1800년대 중반쯤…? 아빠의 아빠의 아빠가 샀을려나? ”

200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그녀는 무심하게 말한다. 200년… 우리 할머니가 여든다섯이니 할머니가 살아온 시간보다 두 배 이상 오래됐다. 30년마다 재건축 한다고 들썩거리는 한국 아파트를 얘기를 하면 그녀는 뭐라 할까?
엘리자와 나는 런던에서 학교를 같이 다녔다. 틈만 나면 그녀는 이탈리아의 집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을 하곤 했다.

“우리집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곳이야. 나중에 승연을 꼭 데려가고 싶어.”

그런데 문제가 있다. 엘리자의 고향은 너무 예쁜데, 엘리자 표현에 따르면,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미들오브 노웨어(Middle of Nowhere)’다. 정말? 그럴 수가 있나?

엘리자의 집자랑을 2011년부터 장장 6년 넘게 듣다 얼마전 드디어 그녀의 집에 가게 됐다.
밀라노 공항에 내려 엘리자 집까지 가는 길은 차로 한 시간 거리다. 간질간질한 햇살을 맞으며 그녀 집으로 향한다. 차는 어느새 산길로 들어섰다. 길 밑으로 거대한 호수가 내려다 보인다. 사실 엘리자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영락없이 바다인줄 알았다. 엄청나게 큰 호수다. 마조레 호수 (Lago Maggiore)다. 이탈리아 말로 ‘커다란 호수’란 뜻이다. 마조레 호수를 사이에 두고 북쪽은 스위스, 남쪽은 이탈리아다.

“우리 동네사람들은 아침이면 북쪽 스위스로 일하러 갔다가 오후가 되면 이탈리아 집으로 돌아와.”

엘리자 말로는, 스위스 사람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을 싫어한다. 스위스에서 월급을 받아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한 이탈리아에서 생활하니 배라도 아픈건가? 뭐, 두 나라간에 복잡한 신경전은 그들 사정이고, 나로선  매일 호수를 건너 스위스로 출근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해안도로 아닌 ‘호수도로’를 따라 산으로 올라가니 아기자기한 집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집 앞에 널린 빨래를 보니 새삼 이탈리아에 왔다는 게 실감난다. 런던의 색이 회색이나 벽돌색이고, 프랑스 낭트의 색이 하얀색 같은 무채색이라면 이곳은 노란색이거나 주황색이다.
엘리자 집은 구릉 위에 자리잡았다.

마을로 들어선 후에도 한참을 더 올라갔다. 노란색 삼층집이다. 햇빛에 바랜 노란색이 정겹다. 대문에는 ‘마니니(magnini)’라 쓰인 문패가 걸렸다. 고풍스러운 중세를 떠올리게 하는 글자체다. 집 앞에 도착은 했는데 웬걸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게 쉽지 않다

일단 문을 걸어 잠근 묵직한 철 막대기를 옆으로 밀어내야 했다. 다음에는 키덮개를 올리고
비밀번호를 누르는 게 아니라, 손바닥만한 열쇠를 큼직한 열쇠구멍에 넣는다. 이렇게 말하면 간단한 듯 보이지만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단 손으로 잘라 만든 듯한 열쇠는 투박하다. 한 마디로 열쇠구멍과 잘 안맞는다. 박물관에서나 보던 골동품이라 해도 이상할게 없다. 잘 돌아가지조차 않는 열쇠로 이리저리 낑낑거리며 문을 여는 엘리자를 보니 마치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햇살이 너무 뜨겁다. 문은 계속 안열리고 땀은 계속 흐른다.
번호키를 누르고 바로 집안으로 들어가는게 익숙한 나로선 이 모든 상황이 어색하고 신기하다.

“아….이 열쇠가 아닌 것 같아.”

엘리자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고, 엘리자를 바라보는 나는 엉뚱한 공상에 빠진다. 그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데 이 정도 노력은 해야겠지.
열쇠로 문을 열 수 없는 엘리자는 이내 문을 이리저리 흔들어댄다. 문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엘리자는 다시 열쇠를 구멍에 끼워넣는다. 끼기긱… 이리도 돌려보고 저리도 돌려본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삐거걱… 드디어 열쇠가 돌아갔다. 드디어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이탈리아 시골집의 요란한 환영식이다.

 

다른 시간

세상에나, 밖은 한낮인데 집안은 캄캄하다. 쿵쾅쿵쾅, 엘리자가 계단을 올라가 창문을 여니 환한 햇살이 집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건 또 뭐람? 환한 햇살을 받은 집안은 따뜻한 고향집이 아니라 왠지 스산하다. 집을 너무 오래 비웠나? 어쩌면 우리 때문에 집이 방금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부엌, 방, 거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신기하다. 방문은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잠긴다. 그럼 딱 갇히기 십상 아닌가? 집에서 누굴 가둬야만 했던 일이라도 있었나? 엄마가 외출할때 아이를 방에 두고 나가야 했나? 문이 왜 이래? 엘리자에게 묻자 그녀는 시큰둥하다.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그녀도 왜 안팎에서 잠기는지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한다. 바닥은 돌바닥이다. 바닥 역시 오래되고 낡아 반질반질하다. 벽의 칠은 벗겨졌다. 도대체 이집에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를 놀래킨 건 방문과 돌바닥뿐만이 아니다. 윗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방, 부엌과 거실 곳곳에는 인물 사진이 가득하다. 딱 미술관에 걸린 초상화 같은 포즈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게 아니라 노려보는 것 같다.
집에 무슨 초상화가 이렇게 많담? 집안 곳곳에서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 갑자기 몸이 자꾸 움츠러들었다. 이 사람들이 다 누구야? 엘리자에게 물었다.

“아하하. 웃기지. 나도 몰라. 아마 여기 살았던 친척이겠지. 가끔 보면서 나도 놀래. ”

엘리자도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웃는다. 수녀복을 입은 여자, 드레스와 정장을 입은 커플. 빛바랜 아기 얼굴…
이들은 웃고 있는데 나는 뭔가 스산한 기분이다. 온 집안이 모르는 사람들 사진으로 가득하다니… 누군지 기억도 못하는 사람들 사진, 그러니까 초상화 같은 사진을 걸어 놓은 것도 신기한데 이걸 지금까지 치우지 않고 내버려둔 건 더 신기하다. 부엌에 가니 더 놀랍다. 할아버지의 아버지쯤이 쓰지 않았을까 싶은 숫가락, 나이프까지 모든게 다 그대로 있다. 엘리자는 부엌에서 ‘달걀 스탠드’를 보더니, 어이없다는 말한다.

“아이고, 이게 아직도 있네!” 

난 가족들이 일부러 고히 물건을 간직해온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모든 물건이 옛날 그대로 다 남아있는 모습이 과거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이 돌아와 다시 살기 시작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것 같다. 난 마치 박물관에 온 마냥 사진을 이것저것 찍었다.

“승연, 여기로 내려와봐!”

갑자기 엘리자가  뒤뜰에서 나를 불렀다. 빛바랜 노란색 벽에 달린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콸 쏟아진다.

 “마셔봐. 산에서 흘러온 물이야”

혹 배앓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 머뭇거리는데 엘리자는 괜찮다며 자꾸 권한다. 서울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나는 산에서 흘러온 물을 먹는 게 낯설었다. 

한 모금 샘물을 넘겨본다. 얼음물 같다. 수도꼭지 양쪽엔 백년도 더 되보이는 국자가 걸렸다. 사진 찍기엔 예쁘지만 좀 쓸쓸하다. 녹이 슨 채 같은 자리에 걸려있던 국자를 보니 좀 처량하다. 좀 전까진 오래된 물건이 여지껏 남아있는게 신기하고 부러웠는데 지금은 그냥 버려진듯 그 자리에 남아 있는게 아닌가 싶어 좀 씁쓸하다.
밤이 되니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린다. 몇년이 됬을지도 모르는 커다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내가 도대체 어디에 와있나 싶다. 엊그제까지는 베를린에 있었는데 어느새 비행기를 타고 밀라노에 왔다. 그리고 차를 타고 한시간, 이름 모를 작은 마을에 와 200여년 된 집, 그리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 사진이 걸린 방에 덩그러니 누웠다. 낮에는 집안의 가구와 식기를 보며 시간이 멈춘 곳 같았는데, 이렇게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다행이다. 여기서도 시간이 흐르긴 흐르고 있다.

 

노 비지니스 월드

런던에서 엘리자가 수없이 말한 그대로다. 참 예쁜 동네다. 집앞 골목에 피어난 꽃, 오래된 집, 넓은 호수, 저 멀리 보이는 산에서부터 심지어 마당의 작은 벌레까지 너무 예쁘다. 집 바로 앞에 호수가 있고 이곳에선 언제든지 사람들에게 부대끼지 않고 수영을 한다. 방에서 창문을 열면 하늘, 호수, 산이 넘실거린다. 집에는 방이 열 개쯤 있다. 방마다 고가구가 가득하다. 집이 너무 오래되어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여기저기 수리를 해야하는것만 빼면  참 고풍스럽다. 한국 같으면 어땠을까? 200여년간 집을 팔지 않고 계속 자식들이 물려받아 관리하는게 가능했을까? 집을 개조해 다르게 쓰거나, 팔거나, 아니면 게스트하우스 같은 식으로 사용하진 않았을까? 여기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집을 다른 방식으로 쓸 수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집을 처음 산 엘리자 아빠의 아빠의 아빠가 쓰던 물건이 그대로 남아있고 그들 사진까지 그대로 걸려있다. 그렇게 20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낡은 벽을 살피던 엘리자가 말한다. 

“벽이 많이 낡았지? 우리 삼촌이 내년에 다시 칠한다고 했어. 벽이 바뀌면 다시 한번 놀러와”

그런데 왜 이게 일년식이나 걸린담? 한국같으면 하루이틀이면 끝날텐데…

“어휴, 아니야 아니야! 벽을 다시 칠하는게 얼마나 복잡한데…벽의 문양 있잖아? 삼촌이 직접 만들었어. 모든 재료를 여기까지 가져 오고, 또 칠해야 하잖아. 어휴, 생각만해도 힘드네… 아마 내년 여름에 또 고치지 않을까 싶은데… 내년엔 뭐 다 끝나겠지?” 

휴우, 그렇구나. 모든게 이런식이다. 이탈리아 시골에선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모든게 천천히 이루어진다. 불편하게 살고 느리게 산다. 와이파이가 없으면 핸드폰 인터넷을 쓰면 되고, 난방이 안되면 겨울엔 사용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한다. 냉장고가 없으면 차가운 샘물에 과일을 담가둔다. 먹을만큼 장을 봐서 그때그때 요리하면 된다고 말한다. 나는 답답하다. 동네엔 수퍼 한 개, 미용실 한 개, 그리고 동네 카페 한 개가 전부다. 다른 가게가 하나둘씩 더 생길법도 한데 사람들은 필요성을 못 느낀다. 나는 잘 모르겠다. 200년 된 집에서 인터넷, 냉장고 없이 샘물을 떠다 먹는 생활. 집안에는 오랜 친척들이 쓴 물건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들은 더이상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한편 여름마다 이곳에 와 집을 고치고 사는 삶이 낭만적이면서 여유로와 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왜 엘리자가 밀라노에서 대학을 졸업 후 왜 그렇게 런던으로 오고 싶어했는지, 런던에서 살고 싶어 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녀에게 물었다. 엘리자, 근데 넌 여기서 살고 싶진 않아?

“아니. 여기서 살 순 없지. 내가 여기서 뭘 하겠어. 하하하. 정말 눈물 날 정도로 난 우리집이 좋아. 아름다운 곳이야. 그치만 여기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 내가 할일이 아무것도 없어.”

미스테리다. 그렇게 좋은데 여기서 왜 일을 만들어 보지 않을까? 요즘 한국에서 유행이 되어버린 마을 살리기 같은 공동체 사업이 여기선 필요가 없나? 사람들은 동네슈퍼에서 장을 보고 집을 가꾸고 집앞 호수에서 수영을 하며 오래전부터 살아온 방식 그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렇게 몇백년을 묵묵히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겠지… 변하지 않아도 즐거워 보인다.
의심도 든다. 정말인가? 내가 본게 전부일까? 궁금한게 아직 많다. 내년에 다시 한번 와야겠다.

 

글, 사진 / 이승연

클릿슈즈를 신고 북악스카이를 달리는 꿈을 꾸는 여자.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개인활동 외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인천문화재단 국제교류프로그램인 베를린 zk/u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웹사이트 바로가기▶)




[큐레이션 콕콕] ‘新’ 문화공간&동네방네 아지트

근대 유흥공간으로 우리나라에 등장했던 다방과 카페는 오늘날의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다방은 커피를 파는 곳이었고, 카페는 여급의 시중을 받으면서 술을 마시는 술집이었죠. 요즘은 대개 나이 든 분들이 차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다방, 카페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에서 음악을 듣거나 작업을 하고, 또 친구를 만나는 장소로 여겨집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더러 변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유지되는 것에 환호하기도 하지만 세월은 많은 것을 변화시키죠.

‘다방’이라는 용어는 고려시대에 처음 등장하는데 다사(茶事)와 주과(酒果) 등의 나랏일을 주관하는 국가 관사가 다방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외국 사신을 접대했던 곳을 다방이라고 했죠. 하지만 우리가 아는 본격적인 의미의 다방은 커피의 보급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다방의 역사는 커피의 역사와 출발을 같이 합니다.

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커피를 마셨고, 덕수궁에 돌아와 ‘정관헌(靜觀軒)’이라는 서양식 건물을 짓고 서양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셨죠. 개항 후, 최초로 커피를 팔았던 곳은 인천의 대불호텔이었습니다. 경인선 개통 전까지 서울로 가려는 사람들이 인천에서 하루씩 묵는 일이 잦아 숙박업이 성행했는데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가 짓고, 아펜젤러 목사도 묵은 것으로 알려진 대불호텔은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서양식 호텔이었습니다.

서울에는 러시아인이 지은 ‘손탁호텔’, 일본인 주인의 ‘청목당’이 있었는데 1914년 ‘조선호텔’이 생기기 전까지 최고급 식당이자 찻집, 장안의 명물이었다고 합니다. 소공동에 있는 조선호텔은 호텔식 다방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호텔 1층이나 지하에 자리 잡은 커피숍의 기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처음 창업한 다방은 1927년 봄 영화감독 이경손이 묘령의 여인과 함께 종로구 관훈동에 개업한 ‘카카듀’입니다. 하지만 장사가 안 돼 금방 문을 닫았죠. 근대 문물을 경험한 해외 유학파 출신과 이른바 문화예술인들은 지식을 나누고 토론도 하는 유럽식 살롱 문화를 다방을 통해 실현하고 싶어했습니다. 일본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영화배우를 하던 김인규가 종로에 ‘멕시코’를 열었고, 역시 일본에서 유학한 이순석은 1930년대 소공동에서 ‘낙랑파라’를 운영했습니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수필가로 잘 알려져 있는 이상도 1933년에 기생 금홍과 ‘제비’라는 다방을 개업했죠. 돈이 없어서 차를 구비해 놓지 못할 정도였는데 어느 날 금봉마저 봇짐을 싸서 집을 나가버립니다. 이상과 금홍, 다방 ‘제비’의 사연은 많이 알고 계시겠지만 이상이 이후 인사동에 카페 ‘쯔루(鶴)’를 내고 종로 광교 다리 근처에 다방 ‘식스나인(69)’ 개업을 시도하고, 명동에 ‘무기(麥)’를 냈다가 실패해 문을 닫았다는 건 잘 몰랐을 거예요.

다방은 끽다점, 찻집, 티룸으로 불렸고, 외래 문물의 표상이었습니다. ‘멕시코’, ‘에리제’ ‘프라타나(플라타너스)’, ‘비너스’ 같은 이름에서 보듯, 다방은 이국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당시의 다방은 ‘이국적인 정취’와 더불어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모던한 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곳’이었죠.

193851일자 삼천리엑 실린 기사에 새로 생기는 나전구도 이 새 봄을 기다려 남창을 열것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당시의 다방은 ‘차만 파는 곳’이 아닌 ‘차를 마시는 기분을 파는 다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북촌에 그런 다방이 많았는데, ‘차를 마시는 기분을 파는 다방’은 귀족적이고 폐쇄적이고 고답적이며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등의 고전음악을 들려주는 대신 찻값은 비쌌습니다. ‘차를 마시는 다방’에는 상인, 관리, 회사원 등이 출입했고 ‘차를 마시는 기분을 파는 다방’에는 주로 예술가, 거리의 철학자, 실업자, 유한마담, 여급, 대학생들이 드나들었죠.

영화배우 김연실이 운영했던 ‘낙랑’은 예술인들의 안식처이자 창작의 산실이었는데 문인들은 이곳에 모여 시상을 닦거나 소설을 구상하다가 돌아갔습니다. 영화인들은 외국 영화나 외국 배우를 비평했고, 화가의 개인전이나 시집 출판기념회도 열렸죠. ‘낙랑’은 차를 파는 곳 이상을 지향했고 전시회나 연주회를 열며 문화와 예술의 산실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했습니다.

제비다방에 갑바머리박태원과 이상이 마주앉아 담소하고 있다.

20세기에는 (여급을 두고 술을 마시는) 카페보다 다방이 ‘조금 더 건전한 곳’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의 카페는 그때의 다방만큼이나 건전합니다(?). 책방 같은 카페, 도서관 같은 카페, 갤러리 카페, 음악 카페 등의 명명이 전혀 어색하지 않죠. 그 카페들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누군가의 아지트가 돼가고 있습니다.

아지트는 비합법적 활동이나 혁명 운동의 선동 지령 본부(활동가나 혁명가의 은신처), 혹은 사적 모임의 집회 장소라는 두 가지를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비밀기지, 지하본부, 선동본부 등의 의미가 더 익숙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어두운 기색이 탈색되고 알 수 없는 무게감도 덜어졌네요.

아지트는 곧 비밀장소인데, 누군가에게 알려줄 수 없는 나만의 장소라기보다 마음에 드는 장소, 계속 찾고 싶은 장소, 다시 가고 싶은 장소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책방과 도서관, 카페나 쉼터 같은 문화공간들이 긍정적인 의미의 비밀스럽고 좋은 ‘아지트’를 표방하며 변신하는 거겠죠.

인천문화재단이 진행한 ‘동네방네 아지트’는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동네 카페와 서점, 갤러리, 목공소 등을 아지트처럼 편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됐습니다. 재단은 지원사업 공모를 통해 인천지역 4개 권역에 20곳의 동네 아지트를 선정하고 유명 시인과 뮤지션을 초대해 공연을 펼쳤습니다.

도시가 갖고 있는 높은 문화성, 다양성과 익명성은 현대의 젊은이에게 둘도 없는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타인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운 ‘익명성’이 그대로 타인 배제, 인간소외로 이어지면 안 되겠죠. 혼자 작업을 하거나, 생각을 하거나, 음악을 들을 때의 카페도 분명 마음을 끌지만 그곳에서 때때로 타인과 눈빛을 마주치게 되면 그곳은 가정과 직장의 공간을 초월한 신비의 ‘제3의 공간’이 됩니다.

제3의 공간은 미국의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Ray Oldenberg)가 자신의 저서 『The Great Good Place』에서 언급했습니다. 산업화 시대에 가정은 제1의 공간이고, 직장이나 일터는 제2의 공간이었습니다. 제3의 공간은 이에 속하지 않는 별도의 곳이죠. 여가나 취미를 위한 곳일 수도 있고, 자기발전이나 배움, 친목을 위한 곳일 수도 있습니다. 20세기 초 경성에서 다방이 그런 역할을 했다면 21세기인 지금은 카페와 광장, 공원과 단골 술집, 책방과 도서관이 그 역할을 하고 있죠. 서열과 격식이 없는 곳, 좋은 음악과 책이 있는 곳, 맛있는 차와 음식이 있는 곳, 그 모든 걸 혼자만 갖거나 아는 것이 아닌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에게는 제3의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른바 자유의 공간. 제3의 공간이야말로 도시에 필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생활환경에서 가장 자유롭게 주체성을 찾을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우리는 누구의 아랫사람, 누구의 남편, 누구의 엄마라는 삶의 무게를 덜고, 오로지 ‘나’, ‘자기’의 행복을 발견합니다. 익명성이 도시화의 특징이라지만 face-to-face가 인간의 본능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서울시는 가리봉의 역사문화 가치를 재생하고자 근로자 숙소였던 벌집을 매입,
앵커시설 조성공사 착수 전까지 전시회 등 주민 공간으로 임시 사용 중이다.”

 

 

* 본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기사와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1. 행복을 만드는 제3의 공간, 아지트
    브런치 블로그(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2. 인천문화재단 ‘동네방네 아지트 위크, 시가 있는 작은 콘서트’]카페·서점·갤러리·목공소… 마을곳곳 동시다발 문화난장
    경인일보. 2017.8.17.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3. 동네방네 아지트 ‘시가 있는 작은 콘서트’ 성황
    인천in 2017.8.28.(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4. ‘인천광역시 발전과 제 3공간’, 신무호, 『현대사회와 행정』, 2002.
5. 『다방과 카페, 모던보이의 아지트』, 장유정, 살림, 2008.

 

글, 이미지 / 이재은 뉴스큐레이터




런던환상

매일 만지고 싶어

아기 코끼리가 알록달록하다. 새하얀 큐브에 앉아 방실방실 웃으며 나를 맞는다. 마치 자기를 봐달라고 하는 것 같다. 아기 코끼리 옆에는 가재가 물구나무를 서고, 바다 코끼리는 겹겹이 쌓인 의자사이에 끼어있다. 한 바탕 소동이라도 벌어진 것 같다.
아기 코끼리, 가재, 바다 코끼리 모두 풍선이다. 바람을 꽉꽉 채운 모습이 답답하다. 숨도 쉬지 못할만큼 빵빵하다. 바늘로 콕 찔러 줄까? 주변을 둘러보니 제법 사람이 많다. 사람들 시선을 피해 발소리를 내지 않고 살금 살금 아기 코끼리에게 다가갔다. 옷깃에 단 브로치를 떼어내 옷핀 바늘을 빼내고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

콕!

옷핀 끝이 아기코끼리 몸에 닿자 스으으윽~! 바람이 빠지며 아기 코끼리는 바닥에 축 늘어져버린다. 아기 코끼리 다음은 가재다. 콕! 힘들게 물구나무를 서던 가재는 바닥에 편히 눕는다. 바다 코끼리도 콕! 바다 코끼리도 의자 사이에서 빠져나와 몸을 축 늘어트리고 숨을 돌린다. 이제 모두 편안해졌다.  이번엔 내 몸을 한 번 찔러볼까?  바늘을 손끝에 가져간다. 콕! 손가락이 따금하며 내 몸에서도 스으으윽~! 바람이 빠져나간다. 어어어~! 무슨일이지 생각할 틈도 없이 나도 그들 옆애 납작하게 누웠다. 몸은 볼품없이 축 늘어졌는데 마음은 왠지 편안하다. 바람을 꽉 채우고 예쁘게 안보여도 괜찮다. 더 이상 묘기를 부리고 살지 않아도 괜찮다. 만날 뗑그렁하게 영원히 여기 머물고 싶다고는생각이 들던 그 순간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려온다. 끼이익,  누군가 문을 화악 밀며 들어오자 순식간에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모두 빵빵하던 원래 모습 그대로. 

나는 다시 빵빵한 아기 코끼리 앞에 서 있다. 좀전과 똑같다. 아기 코끼리 옆에선 가재가 물구나무를 서고, 바다 코끼리는 겹겹이 쌓인 의자사이에 끼어있다. 모두 아이들 풍선처럼 보이지만 풍선이 아니다. 나도 들은 바는 있어 진작 알고는 있었다. 코끼리나 가재가 차갑고 무거운 철 조각이나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간 풍선 같다. 눈앞에서 바라보면서도 이게 철 조각이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이게… 이게 철이라고? 진짜?
한참 코끼리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마술사가 기다란 풍선을 이리저리 접을 때 나는 끽끽거리는 소리, 풍선 바람이 스으으윽~! 빠지는 소리마저 들려온다.
아… 살짝만 만져보면 안될까? 눈 깜짝할 동안이면 되는데.. 1초만, 아니 0.5초, 아니 0.1초면 되는데.. 정말 살짝, 손끝만 살짝 데보고 싶은데..아.. 정말이지 살짝만…
아.. 만지고 싶은 충동을 멈추는 게 너무 힘들다. 내 몸은 점점 더 아기 코끼리에 가까워지고 나를 감시하는 눈길은 점점 더 늘어난다. 슬쩍 손을 움직이기만 해도 옆에 서 있던 경비원이 내게 성큼성큼 다가올 기세다.

‘도대체 몇명이 지키는거야?  흥, 난 아무 짓도 않았는데 다들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구! 잠깐! 이거 혹시 진짜 풍선 아냐?  그래서 이렇게 철통 같은 경비를 하는 거 아냐? 의심은 점점 커져간다. 에라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아기코끼리를  안고 있다. 믿을 수가 없다.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삑! 삑! 삑! 요란한 경보음이 터져 나오고 경비원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온다. 

아, 어디로 가지? 일단 작업실로 가져가야겠다. 그런데 작업실 어디에 놓지? 반지하 작업실은 너무 좁은데…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며 경비원들을 피해 도망치는데 너무 무겁다. 풍선이 왜 이렇게 무거워!? 팔에 힘이 점점 빠진다. 풍선같던 아기 코끼리가 너무 무겁다. 정말 무겁다. 아이고, 망했다… 작업실에 둘 데도 없는데…아..놓치면 안되는데…근데 너무 무거워…어어어어어… 팔에 힘이 풀리며 아기 코끼리를 놓쳐버렸다. 땡가당! 나는 땡가당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렸다. 여기가 어디지? 갤러리다. 그것도 런던에 있는 갤러리다. 런던의 ‘뉴폿 스트릿 갤러리(New Port Street Gallery)’다. 나는 여기서 자꾸 공연한 환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풍선 집착남

뉴폿 스트릿 갤러리에선 제프쿤스(Jeff Koons)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컬렉션 3,000여점을 소장한 뉴폿 스트릿 갤러리는 재작년 문을 연 ‘신상 갤러리’인데 건물 외관이 뾰족한 심슨머리 같다.

제프쿤스.
철로 풍선같은 작품을 만들고, 세계에서 제일 비싸다고 할만한 가격으로 작품을 팔아치우는 예술가 또는 사업가다. 나는 그에 관해 별 관심은 없었다. 사실 여기 오게 된 것도 제프쿤스보다 데미안 허스트가 새로 오픈한 갤러리가 궁금했던 이유가 크다. 그런데 막상 그의 작품을 보다 보니 갑작스레 ‘갖고 싶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다. 이유는 정말 단순하다. 매일 만지고 싶다. 그냥 계속 만지고 싶다. 이게 전부다. 매일 쓰다듬고 만지고 싶다. 가끔은 지인들을 초대해, 이게 뭐 같아? 철로 만들었을까? 풍선 같지 않아? 철일까, 풍선일까? 키득키득 웃으며 장난을 걸고 싶다. 물론 그들은 아기 코끼리를 절대 만질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안된다. 오로지 나만 만질 것이다.
갤러리에서 작품을 보다 이걸 당장 집에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처음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이렇게 단순할줄이야. 명색이 작가라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거나 심오하게 끌리거나 하는 식의 이유가 있어야 작품을 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단지 만지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갖고 싶다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안될 이유는 뭐람? 한 가지 이유면 충분하지 않나?

그런데 가만 보니 제프쿤스는 ‘풍선집착남’ 이다. 그는 거의 모든 작품을 풍선처럼 만들었다.  풍선이지만 풍선이 아니다. 바람이 빠지며 사라져 버리는게 자연스러운 동물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제프쿤스씨, 이들이 얼마나 답답할지 상상해 봤어요? 이래도 되는 거예요?

“왜 안되나요? 그들은 바람을 가득 채운채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을 가졌어요. 사람들은 그들의 완벽한 모습을 좋아하는거구요. 나는 사라지지 않을 환상을 파는 겁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바람이 빠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제프쿤스는 시간이 흐르면 사라져 버리고 말 순간을 현재에 영원히 고정시켰다. 보기엔 가볍지만 실제론 매우 무겁겠지?이유야 어쨌든 제프쿤스의 작품은 이게 진짜 풍선인지 아닌지 헷갈릴만큼 황홀한 환상 속에 빠뜨린다. 컬러풀하게 만든 인형같은 풍선은 어릴적 추억을 몽실몽실 떠오르게 하고, 작은 흠하나 잡을 곳이 없 이 완벽하다. 질투 때문에 신경질이 날 정도다.
제프쿤스는 왜 빵빵한 풍선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을까? 풍선 바람이 빠지는 건 자연스러운데 말이다. 숨이 들이키고 내쉬는 게 삶이라면, 그는 풍선을 불 때마다 삶과 죽음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자 재기발랄하던 아기 코끼리, 바다 코끼리, 가재 등이 순간 안쓰럽다.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인간의 욕심은 이들을 옴싹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반짝거리고 빛나지만 실재는 다르다. 다시 아기 코끼리를 바라본다. 반짝 반짝 빛나는 아기 코끼리에 반사된 내 모습이 동글동글 굴곡진다. 이 또한 실제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다. 그 때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미술관의 샤먼

마치 교회 성가대가 부르는 노래같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천천히 걷고 있다. 노래소리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 나도 눈을 감고 이들을 따라 원을 그리며 걷는다. 시냇가를 따라 걷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산 속으로 간다, 폭포수를 지나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온몸에 물방울이 떨어진다. 발랄한 아이 목소리, 수줍지만 강한 목소리, 쓸쓸한 목소리, 슬프지만 담담한 목소리 등 온갖 소리가 들려온다. 이들의 목소리를 따라 행복했던 기억, 괴로웠던 일, 슬펐던 감정이 떠오른다. 그 한 가운데 한 여인이 서있다. 하얀색 긴 머리를 늘어뜨린 샤먼 같다. 나는 그녀를 따라 걸으며 꿈을 꾼다.
나를 한동안 이런 꿈에 빠지게 한건 케나다 작가 자넷 카디프(Janet Cardiff))의 사운드 설치 작업이다.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터빈홀(Turbine Hall)에 원을 그리듯 설치한 수십여개의 스피커에선 각각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온갖 목소리가 내 몸을 감싸고 돈다. 온전히 나를 위해 들려주는 소리 같다. 마치 노래처럼. 갑자기 울컥했다. 오늘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피곤한데, 오늘밤 신세를 지려한 친구집에는 갈 수 없다. 나 혼자 외톨이가 된 것 같았을 때 만난 이가 자넷 카디프다. 미술관으로 나를 위로해줄 샤먼을 보낸 여자다.

나는 런던에서 제프쿤스와 자넷 카디프를 만나 이런저런 환상에 빠져들었다. 나 또한 이들처럼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황홀한 환상을 건네줄 순 없을까? 아직 자신은 없다. 다만 내가 계속 작품을 만들어 간다면 언젠가는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 작품을 보고 누군가 위로를 받게 된다면, 잠시나마 황홀한 환상에 빠져든다면 나는 행복할 것 같다. 설사 그 환상이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환상은 현실과 부딪치며 끊임없이 고통과 아픔을 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환상 없이 살 순 없지 않은가?

 

글, 사진 / 이승연

클릿슈즈를 신고 북악스카이를 달리는 꿈을 꾸는 여자.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개인활동 외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인천문화재단 국제교류프로그램인 베를린 zk/u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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