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상경 重庆上庆
3개월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한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 국제교류사업인 <중국십방아트센터>교류사업에 에 참여한 작가의 소식을 격호로 싣습니다. 

 

 2018년 3월 20일 저녁 중국 중경(충칭)에 도착했다. 세번이나 방문한 중국을 우연하게도 모두 중경에서 보냈다. 작년 여름, 중국 리장의 아트레지던시에 참여 중, 중경에 사는 작가들을 만난 인연으로 나흘 정도 관광을 왔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인천문화재단 ‘인천-충칭’ 문화예술 국제교류 사업을 통해서 중경의 예술 기관들을 탐방할 수 있었는데 그때 방문했던 십방아트센터는 나에게 따뜻한 인상을 주었다. 낡았지만 운치 있는 독특한 구조의 건물은 햇빛이 잘 들었고 의외로 많았던 스태프들은 다들 무척 친절했다. 무엇보다 긴 복도에 가지런히 나열된 높은 층고의 복층 작업실을 보는 순간 ‘여기 한 번 올만 하겠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6개월이 지난 지금 다시 중경에 도착한 나는 공항에 마중 나온 Jing과 함께 곧장 훠궈(hot pot) 식당으로 향했다.

베이징 출신의 Jing은 십방아트센터에서 레지던시 관련 일을 맡고 있다. Jing이 올해 2월 국제교류사업 때문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만난 적이 몇 번 있기 때문에 편하고 반가웠다. 그는 트래픽 때문에 나보다 조금 늦게 공항에 도착하는 바람에 결국 사용하진 못했지만, 도착 출구에서 나를 기다리며 푯말을 들고 있으려고 했다. 그가 푯말을 보여줬다. 아니 이것은…! 내가 얼굴에 물감을 칠하고 퍼포먼스를 하는 장면을 출력해서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 친구의 유머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작가 출신인가보다. 돌발행동이 꽤 창의적이고 재밌다. 물론 실제로 사용했다면 결과도 굉장히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중경은 베이징, 톈진, 상하이와 같은 직할시로서 그 중 유일하게 서부에 있다. 자그마치 3000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으니 인천 인구의 10배다. 면적은 대한민국의 2배가 조금 넘는다니 역시 중국의 규모는 남다르다. 지리적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기 때문에 안개가 많이 끼고 날씨 또한 덥고 습하다. 덥고 습한 날씨에 반항이라도 하듯이 중경의 가장 유명한 음식은 훠궈(hot pot)다. 그 매운맛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이나 베이징에서 먹은 훠궈랑은 차원이 다른 매운맛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괴롭게 먹는 것 같지만 며칠이 지나면 보글보글 끓는 빨간 고추기름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침샘을 자극한다. 경험상으로는 번듯하게 잘 차려진 식당보다 현지인들이 잘 가는 후줄근한 곳에 가야 진짜 훠궈를 경험할 수 있다. 웃옷을 벗고 시끄럽게 떠들며 먹고 있는 아저씨가 있다면 원조 훠궈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십방아트센터가 있는 왕지아핑(Wangjiaping)이라는 지역은 약간 낙후된 곳으로 노동자와 서민들이 거주하던 지역이다. 레지던시에서 가장 가까운 전철역 양지아핑(Yangjiaping)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서쪽으로 20분 정도 가야 한다. 반대 방향으로 15분쯤 걸어가면 중국의 미술대학 중 두 번째로 알아준다는 사천예술대학교가 있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작가 장 샤오강도 이 대학 출신이다. 2005년에 여기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새로운 캠퍼스가 만들어지면서 학교 대부분이 이전하는 바람에 여기 구 캠퍼스는 몇 가지 수업을 진행할 뿐 역사를 보여주는 관광지가 된 것 같다. 10년 전 사천예술대학에서 추진한 엄청난 스케일의 벽화들이 동네의 수많은 아파트와 건물의 외벽에 넘쳐나는 것을 보면 대대적인 차원에서 지역 발전에 힘썼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Jing의 말에 의하면 사천예술대학의 캠퍼스 이전으로 이곳은 내림세를 타며 다시 낙후됐지만 최근 정부에서 이 지역을 다시 중경의 예술 중심지로 발전시키기로 하였고, 따라서 십방아트센터는 본연의 의무에 더 충실하게 활동한다고 한다. 십방아트센터는 예술에 관심이 별로 없는 지역 시민들 일지라도 예술을 함께 공유하며 소통하고자 하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지역과 사회를 연구하는 작품을 지원한다. 멋진 취지와 열정으로 형성된 비영리 기관 십방아트센터의 대표 정투(Zeng Tu)는 사천예술대학의 Cross Media 과의 교수이기도 하다.

컨셉이나 사상을 배제하고 오로지 재료의 연구에만 집중한 작품들을 만드는 것이 수업의 취지였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생각을 빼고 재료와 물질에만 집중하니까 오히려 생각이 더 도드라지는 것 같다.

 어느 정도 지역에 익숙해지고 작업실도 모양새를 갖춰갈 때 즈음 나의 예전 작업과 앞으로 이곳에서 진행할 작업에 대한 발표 날짜가 잡혔다. 넓은 소파가 있는 편안한 회의실에서 디렉터 정투와 다수의 관계자, 그리고 레지던시 작가들이 함께했다. 20분 발표와 20분 질의응답이 있었고 사천미대의 학생이 영어-중국어 통역을 해줬기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됐다. 내 뒤로 두 명의 작가가 발표를 이어갔고 3시에 시작한 미팅은 6시 반이 넘어서 끝났다. 이전에도 느낀 점이지만 중국 작가들은 토론과 발표에 꽤 자발적이고 열정적이다. 형식과 예우가 갖춰진 환경에서 예술에 대한 평가, 조언, 비판은 작가에게 귀중한 선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봤을 때 한국에서는 작품에 대한 비판에 예민해서인지 서로 조심하고 말을 아끼는 것 같다.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는 비평보다 지적하고 가르치려 하는 평가에 위축된 게 아닌가 싶어 아쉬움이 있는 부분이다.

 어느덧 레지던시에 온 지 3주가 지났다. 여느 레지던시와는 조금 다르게 지원일과 입주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은 십방아트센터는 각각의 작가들이 입실하고 퇴실하는 시간이 자유롭다.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1년도 넘게 있는 것 같다. 그 때문에 처음 왔을 때는 기존의 작가들과 친해지기가 조금 힘들었다. 같은 기수라는 동질감이 없고 무엇보다 영어를 잘하는 작가가 너무 없었다. 대부분의 식사를 근처 식당에서 사진으로 주문해서 혼자 먹었는데 저번 주부터 여기 작가들과 부엌에서 함께 식사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친해지니까 다들 착하고 친절하고 요리도 잘한다. 식사 준비됐으니 와서 먹으라는 문자가 오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 전철역  대형마트 수입코너에 한국 고추장부터 된장, 김치까지 다 판다고 하니 언제 시간을 내서 한국요리를 대접해줘야겠다. 

글, 사진/ 박경종 작가

 

박경종 작가는 페인팅, 애니메이션, 설치,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현실을 빗댄 상상의 공간을 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인천문화재단 예술활동지원 역량강화 분야에 선정되어 중국 중경에 위치한 십방아트센터에서 3개월 레지던시 활동을 하고 있다. (웹사이트 바로가기 ▶)




4. 개항장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 하시겠습니까?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의 국제교류사업인 일본의 요코하마 뱅크아트1926 및 인도의 산스크리티재단과의 교류 사업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소식을 격호로 싣습니다.

동경 시나가와 구(品川区) 신반바 역(新馬場駅) 인근에서 마츠리(祭り)가 열리고 있다. 마츠리는 열리는 계절마다 의미가 다른 종교적 의식이다. 가을의 마츠리는 추수하기 전에 오는 태풍을 잠재워 보내려고 사흘간 춤추며 밤을 지새우는 신앙의식이다. 사진ⓒ노기훈

자전거를 타고 다시 요코하마(橫濱)로 돌아오는 밤길은 여러 가지로 고되었다. 일본 최초의 기차역이라는 곳에 도착해서 정차장을 살펴보았다. 그곳은 신바시 정차장을 재건축한 철도역사전시실이었다. 근대식 은빛 연와로 마감한 건물은 조명장치가 잘 되어 있어서 한밤중인데도 시오도메(汐留)의 높은 빌딩숲 사이에서 운치 있게 빛났다. 2층에 지나지 않는 신바시 정차장은 열차 한 량 정도 길이만 남은 최초의 철로를 유리관 안에 보관하고 있었다. 최초라는 명성에서 유추할 수 있는 넓고 깊은 스케일에 비해 현시점에 볼 수 있는 역사(驛舍)는 이미 역사(歷史)가 되어버린 중후함에 비해 작고 초라했다. 그곳은 탐미적이고 과시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서 단지 신바시 정차장의 외관을 본래와 같은 장소에 최대한 꾸밈없이 재현해 놓는다는데 초점을 맞춘 듯했다. 일본 최초의 역사를 재현해 놓았으니 어느 쪽이나 구 서울역보다는 장엄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넓이와 높이 모든 면에서 구 서울역에 비하면 헤비급과 라이트급 차이였다.

1872년에 문을 연 일본 최초의 역사인 신바시 정차장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철도역사전시실이다. 1층 전시실 바닥을 유리로 깔아 개업 당시의 기초석 일부를 관람 할 수 있다. 사진ⓒ노기훈

그런데 골똘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이쪽 계열에서는 크기가 작고 너절한 것이 모더니스트들이 상상력을 발휘했던 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정취가 있어서, 생각하기에 따라 보다 깊은 풍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카이라인이 화려한 마천루와 나란히 놓인 구시대의 유물을 보면서 단지 건축물의 크기만으로 같은 링 위에 올리는 건 공정치 못한 승부 같았다. 내가 상상하던 19세기 후반 신바시 정차장의 상징은 중세에서 근대로 시공간의 축을 본격적으로 바꾸면서, 칼과 주인이 있던 봉건시대에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한 메이지 시대의 맥락으로 이동시킨 신문물이었다. 그 와중에 기차는 요코하마로 달리는 매 순간 매캐한 연독(煙毒)을 씩씩거리면서 질주하는, 그야말로 근대적인 ‘컬처쇼크’였다. 역과 역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기차로 인한 최초의 만남과 이별이라는 낭만을 선물하던 신바시 정차장은 급격하게 팽창하는 20세기 과학기술사의 진보를 지나며 최초라는 훈장만 남기고 사라져야 했다. 신바시 정차장은 곧 국제도시로 성장한 동경에 걸맞은 세련된 도회지의 풍속을 건축물에 녹아낸 JR신바시역에게 명패를 빼앗겼다. 그 쓸쓸한 영주의 퇴장을 지켜보는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낡고 오래된 것들은 쉽사리 아스러져 잊혀졌다. 그나마 신바시 정차장과 같은 상징적인 건축물들은 예우가 좋은 편이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 간 수많은 구시대의 잔해들을 어떻게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아카렌가(赤レンガ) 창고는 “메이지 말기부터 다이쇼 초기까지 요코하마 항의 창고로 이용되었다. 격동의 20세기를 뚫고2002년 당시의 모습을 남긴 채 문화, 상업 시설로 다시 태어났다.”라고 공식 홈페이지에서 설명하고 있다. 2017년,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의 메인 전시장으로도 활용된 아카렌가 창고는 1층을 아트숍으로 꾸미고 2,3층을 이용해 미디어 작품을 선보였다. 사진ⓒ노기훈

요코하마를 둘러보고 부러웠던 지점은 강자로 살아온 나라가 역사를 보존해 나가는 일종의 우월감이었다. 인천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2013년, 인천 개항장에 도착한 나는 인천 개항장 투어를 신청했다. 인천을 설명하던 문화해설사가 인천개항박물관을 가리키며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근대적 양식의 건축입니다.”라고 이야기 한 건축물들과 양식은 흡사하지만 크기에 있어서는 족히 5배는 뻥튀기한 건축물들이 요코하마 구도심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믿기 힘들지만 100년이 넘은 건물의 내부는 기적에 가까운 리모델링이 이루어져 지금도 주화를 관리하거나 미디어 아트를 교육하는 대학기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요코하마 구시가지 쪽에 있는 근대식 건물들을 보면서 장막에 갇혀있던 어느 건축물에 대한 이미지가 점점 불투명도를 높여 형상을 갖추면서 알싸한 감정이 일었다. 건축에 문외한인 나에게 요코하마에서 보는 건축물들은 잊었던 뭔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건 바로 1993년 시작된 문민정부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추진한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장면이었다.

1995년 8월에 첨탑 제거로 시작된 조선총독부 철거는 1996년 12월 대회의실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완료됐다.
사진출처: MBC 뉴스 동영상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건축물’의 정의는 ‘토지에 정착하는 공작물 중 지붕과 기둥, 또는 벽이 있는 것과 이에 부수되는 시설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시멘트 덩어리가 시간의 풍파를 켜켜이 쌓아가고 있는 과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피아식별에 따라, 피동이냐 자동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도시의 곳곳에서 흘러간 것들을 추억할 수 있는 단서를 채택할 것이냐 인멸할 것이냐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사안이다. 그럼 강자들은 어떻게 당당하게 자신들의 유산-건축물을 합법적으로 상속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요코하마 개항기념관은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로 개항 50주년을 기념해 시민 기부금으로 1917년 준공되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전소되어 1927년에 재건축되었다. 사진ⓒ노기훈

 내가 요코하마에서 작업실로 쓰고 있는 ‘BankART스튜디오 NYK’는 인천으로 치자면 아트플랫폼이 속한 개항장 지역과 유사점이 많은 요코하마 간나이(館内)에 지역에 있다. 요코하마는 에도(현 도쿄)시대 말기부터 일본을 대표하는 항만도시로 발전했다. 인구가 부산광역시보다 조금 많다고 하면 도시 규모 면에서 이해가 쉬울 것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나의 짧은 경험으로 비춰보건대 도쿄와 요코하마는 서울과 인천과의 관계와 흡사한 점이 많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구별문화통신 1호에서 했기 때문에 패스. 몇몇 유사성으로 판단에 이르는 건 독단에 가깝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감으로 일어나는 일이므로 혀가 짧고 뇌가 정리되지 않은 예술가적 영역으로 남겨주시길. (그러고보면 괜찮은 작가들은 예술가적 감각을 기초로 하고 최종 목적지를 이미지로 해서 이걸 논리적으로 구현하는 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단, 성공적으로)

1859년 미일 수호 통상조약으로 개항한 요코하마는 서양문물이 관동지방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써 세계가 요동치던 당시 개항만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문제는 100년이 넘게 지나서도 개항시기에 다져진 인프라와 자의식만으로 버텼다는 것이다. 요코하마시는 닛케이 지수가 나날이 최고점을 갱신하고 있던 70년대 말에 들어서야 낡고 쇠락한 요코하마의 도시 이미지에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낭만과 역사가 있는…’이라고 둘러대기에는 다가올 21세기의 국제도시로서 출항할 동력이 부족했다. 이러한 고민에 따라 요코하마시는 21세기 미래의 항구도시 프로젝트, 즉 ‘미나토미라이 21(MinatoMirai21)’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조선 부지와 부두에 국한되어 있던 구도심 지역을 문화 관광지로 개발하여 하드웨어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요코하마 시민을 대상으로 한 공모에서 ‘미나토미라이21’이라는 이름이 결정되었다. 일본어로 미나토(港)는 항구, 미라이(未來)는 미래라는 뜻이다. 사진ⓒ노기훈

몸이 만들어졌으면 비타민을 먹어야 한다. 근육질 몸에 아무 옷이나 입을 수는 없다. 요코하마시는 ‘미나토미라이 21’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 2004년, 시민의 주체적인 참가와 창조활동의 핵심인 예술가들의 결집을 촉구하여 문화예술 창조도시로서의 변모를 골조로 하는 ‘창조도시 요코하마(Creative City Yokohama)’라는 소프트웨어를 설치한다. 이 창조 패키지에서 ‘어려울 때일수록 문화예술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구동된 프로그램이 바로 ‘뱅크아트(BankART) 1929’와 ‘요코하마 트리엔날레’다.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의 메인 전시장인 요코하마 미술관 1층 내부의 모습이다. 2001년부터 시작한 트리엔날레는 올해로 6회째를 맞이했다. 이번 주제는 ‘섬과 별자리와 갈라파고스’로 상반된 가치관이 복잡하게 얽힌 세계의 모습을 살펴봤다. 사진ⓒ노기훈

드디어 뱅크아트까지 왔다. 뱅크아트를 소개하기 위해서 지면을 이만큼 할애했다. 여기서는 정책적인 의사결정이나 기타 문화예술도시로 변모 과정 등은 글의 성격상 관련 전문가들에게 남겨두기로 하고 나의 직분에 맡게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있는 ‘뱅크아트 스튜디오 NYK’ 이야기만 해보겠다.

 뱅크아트는 예상대로 Bank(은행)과 ART(아트)의 합성어다. 그리고 1929도 서기 1929년이다. ‘뱅크아트 1929’는 조선총독부가 광화문 안에 들어서고 3년 뒤인 1929년에 요코하마 개항장 주변에 건설된 구 후지은행과 구 제일은행 등 근대 석조 건물을 문화예술 활동 기지로 활용하는 프로젝트이다. 그래서 ‘은행’과 ‘1929’를 전면에 내세운다. 

일본은 한국정부가 조선총독부를 철거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자신들이 그걸 그대로 옮겨가겠다고 제안했다. 이제 막 올림픽을 치러낸 GDP 만달러도 안되는 한국인의 입장으로 봤을 때 ‘경제 대국인 일본도 당장에 급하고 보니까 일단 아무 말이라도 하고 보네’라고 허언에 가까운 실언이라고 혀를 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히도 조선총독부 첨탑이 내려앉은 1995년 바로 그 해에 요코하마에 있는 어느 한 오래된 건물이 정말 여기서 저기로 장기알 옮기듯 이동하게 된다. 

때는 1929년, 뉴욕주식거래소의 전례 없는 대폭락으로 시작된 전세계적인 경제대공황이 몰아 닥치고 역사의 장난인지 돈 없어 망하겠다는 그 해에 혈세를 모아 MOMA(뉴욕현대미술관)가 건립된다. 동시에 요코하마에는 고대 로마의 신전 양식으로 건축된 제일은행 요코하마 지점이 들어선다. 그리고 60여 년이 흐른 1995년, 구 제일은행 요코하마 지점이 마치 한 량의 기차가 되어 바사미치(馬車道)에서 미나토미라이(港未來)까지 놓인 철길에 미끄러져 120m를 이동하게 된다. 

구 제일은행이 미나토미라이 방면으로 옮겨가고 있다. 전체 제일은행 건물의 10분의 1정도에 해당하는 발코니만 이동한 모습이다. 사진출처: 광주광역시 공식블로그

 요코하마시는 아이랜드 타워의 일부로 재현된 구 제일은행을 ‘YCC(Yokohama Creative Center) 요코하마 창조도시센터’로 전환해 예술가들의 활동공간으로 지원했다. 고풍스럽고 우아한 외관을 뽐내는 역사적 건축물의 주인을 당당히 예술가들의 몫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강자로 살아온 국가가 건설한 역사적 건축물이나 항만시설, 창고 등은 새로운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하여 도심부 재생의 거점이 되었다.

반면, 일제강점기 건물인 조선총독부는 우리 땅 위에 새긴 주홍글씨와도 같았다. 얼마나 싫었던지 조선총독부 철거 당시 나라의 수장이던 김영삼 대통령 조차 공식 인터뷰에서 “일본 놈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라고 외교적 참사에 가까운 폭탄 발언으로 블랙코미디를 연출했다.

내가 있는 곳은 바로 그 ‘창조도시 요코하마’라는 구호 아래에 예술가의 거점으로 리모델링한 두 곳 중 하나다. 레지던시와 큰 관련이 없는 곳이 구 후지은행과 구 제일은행을 개조한 ‘뱅크아트1929 요코하마’이고, 레지던시 활동의 본거지가 일본 우편선(郵船) 창고를 개조한 ‘뱅크아트 스튜디오 NYK’이다.

요코하마시는 운영주체를 공모하여 무상임대로  NPO 민간법인에 위탁하여 문화예술 활동을 운영한다. 이와 관련한 ‘뱅크아트 스튜디오 NYK’의 주요 활동은 전시기획과 전시공간임대를 기반으로 사진, 미술, 건축, 퍼포먼스, 음악, 무용 등 모든 예술장르를 대상으로 국제 레지던시를 운영하고, 수요일마다 2층에 있는 도서관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아트스쿨을 연다. 또한 1층에 미술 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점을 운영하고 때로 출판업무도 담당하며 그 옆으로 카페와 펍을 겸하는 공간이 있어 회합의 장소로 사용한다.

‘뱅크아트 스튜디오 NYK’와 더불어 2005년 도쿄예술대학이 구 후지은행 건물로 이전해왔으며, 구 제일은행은 2009년 5월부터 ‘YCC 요코하마 창조도시센터’로 전환되었다. 현재 ‘뱅크아트 스튜디오 NYK’ 가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
1. 네이버 지식백과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2. 출처: 아카렌가(赤レンガ) 창고 공식홈페이지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사진출처
1. MBC 뉴스 동영상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2. 광주광역시 공식블로그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글,사진/ 노기훈 작가

 

노기훈은 2017년 인천아트플랫폼-뱅크아트 스튜디오의 국제교환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8월부터 11월까지 일본에 체류한다. 사진카메라와 영상카메라로 주로 찍어 내는 활동에 관심이 많으며 사진과 기행문을 동시에 써서 글로 찍기도 한다. 인천역에서 출발하여 노량진역까지 최초의 철도 경인선을 따라서 사진 찍었으며, 지금은 일본 1호선인 사쿠라키초역에서 신바시역까지 걷고 있다. 




3. 자전거로 사쿠라기초에서 신바시까지 달리기 2편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의 국제교류사업으로 일본의 요코하마 뱅크아트1926, 인도의 산스크리티재단과의 교류 사업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소식을 격호로 싣습니다.

다마강(多摩川)은 가나가와현(神奈川県), 도쿄도(東京都)의 경계를 가르며 흐르는 강이다. 주말이면 도쿄 쪽 강변에서 골프연습을 한다. 사진ⓒ노기훈

시장을 빠져나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마음 맞는 이가 있다면 자리를 깔고 앉아 나마비루(生ビール)라도 한 잔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아있는 일정 따위는 아무렇게나 되어버리자 하는 식이라 신바시(しんばし)까지 가지는 못할 일임을 알지만, 그래도 짧은 기간 일본을 체감하기에는 이곳에서 살아온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얻는 깊이와 넓이만큼 알찬 과외도 없을 것입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그러한 이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의 경험으로 이끌어 보건대 구하던 일은 예상치 못한 연으로 닿게 되어 평생의 기억에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덥고도 습하기까지 하더니 저녁 무렵부터 여름비가 내렸던 날이었습니다. 나는 우산도 없이 초저녁부터 요코하마 이세자키초 어디에선가 알코올에 조금씩 젖어 들었습니다. 일본어 틈에서 태풍이라는 말을 찾기 쉬웠던 야키도리집의 텔레비전은 연신 히로시마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곧이어 도쿄로 향해 닥칠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태풍이 오기를 기다리면서2차로 고가네초에 있는 스탠딩바를 선택했고 그곳에서 한 일본인을 만났습니다. 자세히 코를 기울이면 미소된장보다 오래 묵은 곰팡이향이 나는 한국식 된장의 냄새가 호두나무에 배어, 닦아도 닦아도 닦아 낼 수 없던, 테이블을 힘주어 닦을 때의 인상이 표정으로 굳어버린 한국인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무뚝뚝한 바였습니다. 노래의 절정에서 굵고 단단해지는 복성을 가진 이미자의 보이스를 그대로 닮은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흐르는 강물처럼’이 일단락을 지나 숨을 고르는 틈을 타서 그 일본인은 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칸코쿠진?”
“하이, 와따시와 칸코쿠진”

취기가 오른 우리에게 현해탄을 가르는 국적도, 아버지뻘이라는 나이차도 별반 문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서로 건배하고 또 건배하고, 술기운에 입에서 나온 서로 다른 말들은 의미를 만들지 못하는 열악함을 극복하고 어딘가의 다른 세계에서 만나 무난히 수긍되고 있었습니다.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허례허식처럼 하는 말로 그는 나에게 물어왔습니다.

“어떤 일본 음식을 제일 좋아하냐”

‘스시(すし)’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며 두어 시간을 북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북한의 미사일을 요격하지 못했다는 대대적인 뉴스가 끝나고 볼품없는 연예인이 케이크를 먹으며 품평하는 오락 프로그램을 견디고 나서 그는 회전초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고 저는 흔쾌히 따랐습니다. 

스시가 아무리 한국에서 대중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꽤나 비싸게 마음먹어야 시도하게 되는 음식입니다. 소문을 듣고 일본에서는 현지음식으로 싸게 맛보겠다는 기대와는 달리 일본에서도 역시나 스시는 ‘김밥천국’에서 맛볼 수 있는 가벼운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들어간 스시 집은 일본의 물가를 폭탄처럼 투하했습니다. 그 안 좋은 경험 때문에(혀는 덕분에 호강했습니다) 모르는 음식점을 찾아 들어가기 전 메뉴판을 보고 꼭 가격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이보다 더 쓸모 있는 요령은 바깥에서 노렌(暖簾)이 처진 틈 사이로 손님들의 옷매무새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럴 필요도 없이 이국에 놓인 혼자라는 전제를 떼버리고 마음껏 스시를 시켜 먹었습니다. 원하는 종류의 스시를 소리쳐 주문하는 일은 발음이 익숙하지 못한 외국인에게 늘 곤혹이었는데 이곳 사장님은 한국어 기초반 수준의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아셨습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사장님은 서울에 사는 50대 여성을 정부로 두고 있었습니다) 옆에 일본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은 성대 끝에 걸린 빗장을 소리나게 꽝하고 열어젖혔습니다. 우리는 술에 좀 취해 있다고 생각이 들어 나마비루 대신 손이 닿기 좋게 초밥레일 위에 배치된 녹차티백과 찻잔을 집었습니다. 다음 스텝을 어찌할 줄 몰라 망설이던 나의 컵을 가로챈 노구치 상은 컵을 버튼에 가져다 대어 압력을 주면 자동으로 뜨거운 물이 나오는 시스템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차를 우렸습니다. 저에게 그것은 소변기에서나 보던 꺼림칙한 일이었습니다. 당시를 회상해보면, 취기가 올라 있었지만 상온에서 적당히 숙성된 마구로(まぐろ)의 질감을 입은 메마른 혀에 닿던, 그 진한 녹차의 씁쓰름한 감촉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자전거는 일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교통수단이다. 한국과 다르게 방범등록이 의무화되어 있어 도난당했을 때 다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대중교통수단이 매우 비싸 자전거 이용이 보편화되어 있다. 사진ⓒ노기훈

한국에서 일본에 도착한 지 열흘 밖에 지나지 않은 청년이 탄 자전거는 요코하마에서 출발하여 츠키지(築地) 시장을 지났습니다. 자전거의 주인은 시장을 빠져나오며 얼마 전 우연히 합석한 일본사람을 생각했고, 그러는 동안 도쿄와 요코하마의 중간지대인 가마타역(蒲田駅)에 도착했습니다. 생각을 했기 때문에 풍경은 생각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마타역에 왔다는 것은 오늘 왕복할 구간의 4분의 1정도를 오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역 인근에는 맛깔스러운 음식점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뭔가 먹어야 한다면 이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몸을 너무 혹사시켜서 그런지 한참을 비어있던 위는 괜찮은 식당을 찾아 먹을 여유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를 세워 놓고 근처 소바 집에 들어가서 메뉴를 슬쩍 보고 A세트를 주문했습니다. 운 좋게도 가츠동과 차가운 소바였습니다.

밥을 먹으며 두리번거렸습니다. 창가 자리를 골라 앉아 역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가와사키역(川崎駅)에서도 생각한 것이지만 가마타역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어디 가서 자신을 도쿄 사람이라고 소개할지 아니면 요코하마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어필할지 궁금해졌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국토가 큰 나라의 선술집에 가면 다른 지방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흔히 처음에 나누는 대화는 ‘너는 어디 출신이냐’ 혹은 ‘다른 어느 지방을 가봤냐’를 서로 공유해 가면서 진행되고는 합니다. 가령 중국에서는‘저는 내몽고에서 왔습니다’라고 운을 떼는 북방사람이 멀리 광저우 출신과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만나 청도 맥주를 들이켜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저는 훗카이도 하코다테에서 시덴을 타고 1시간 정도 남쪽으로 가면 있는 야치가시라라는 곳에 삽니다. 간혹 바이어를 만날 때면 JR을 타고 삿포로에 가서 단골 칭기스칸 집의 양고기 안심과 삿포로 맥주를 즐깁니다’라고 말하는 일본식 낭만도 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일본 사람이라면 요코하마를 비롯한 도쿄일대를 간토(関東)라고 엮어서 부릅니다.

그럼 시야각을 좁혀보자면, 가와사키에사는 사람은 요코하마와 도쿄의 자기장 안에서 휘둘리며 유행처럼 요코도쿄라고 불러야 하는 정체성이 입혀질 수도 있겠습니다. 대개는 도쿄에 빨려 들어가고 싶은 기분일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부천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깊게 생각할수록 이런 경계라는 것들이 허무하게만 느껴집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는 제가 도시를 볼 수 있는 것은 빌딩의 높이가 달라지는 추이를 바라보는 것이 다 일지도 모릅니다. 이마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부천(富川)과 가와사키(川崎市)가 바다를 두고 강물을 불러일으키고 요코하마(橫濱)와 인천(仁川)은 바다를 마주보는 관문이 되며 도쿄(東京)와 서울(京城)은 육지와 바다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오랜 세월을 한 나라의 수도로 번성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입니다.

서울과 도쿄는 같은 표준시를 쓰지만 경도가 12.8도 정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일출과 일몰이 한 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 사진ⓒ노기훈

그런 이치로, 도쿄로 가까워질수록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을 피해서 달려야만 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오후 느지막한 시간대로 접어들수록 거리의 사람들은 각자의 탈 것을 이용하여 이동했습니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서 자세가 아직도 불안했지만 슬쩍이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튀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들의 속도감에 맞춰 천천히 달렸습니다. 저는 일본사람의 일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강한 나라의 일원으로도 손색이 없는 것 같아 비로소 근대시민이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난여름, 파리 중심가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프랑스인의 일본사람이냐는 물음에 한국사람이라고 답하자 실망하던 그의 미간의 주름들이 떠오르며, 국제무대에서 일본과 한국과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작 자전거를 타면서 질서와 법칙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서로의 편의를 돕는 나라에 머물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각기 다른 신분에 살고 있다는 중세의 유물이 조금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서 더 인간적이고 실리적인 듯했습니다. 어설프게 민주적이지 않아 오히려 편리했습니다. 집에서 벗어나면 누군가로 인해 기분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한국의 거리는 민감한 이가 아니더라도 기분 나쁘지 않고는 사는 일이 인내가 돼버렸습니다. 더군다나 여성들은 매일같이 마그마가 튈지 모르는 지옥 언저리에서 근근이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태까지 지켜본 바로 일본에서 그런 일을 겪는 일은 ‘정말 네가 오늘 더럽게도 재수가 없었구나’하는 상황으로 재난을 당했다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도쿄의 놀이터는 대부분 검은 흙으로 땅이 이루어져 있다. 놀이터마다 기구의 생김새가 달라 구별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사진ⓒ노기훈

가츠동을 먹고 다리는 힘을 얻었습니다. 잘 정돈된 보도블록을 따라 자전거 무리들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도록 왼쪽 방향으로 자전거를 탔습니다. 다리에 힘에 빠지면 도쿄 쪽으로 고개를 들어 힘을 얻었습니다. 열차들은 동서남북으로 빠르게 스쳐지나 갔습니다. 날이 점점 어두워져 가면서 주인 몰래 헤드라이트를 켠 부지런한 자전거들도 보았습니다. 하늘은 아직도 맑았습니다. 조도만 옅어져 빌딩 숲 안을 조금 어둡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하늘을 대고 스포이드툴로 찍으면 하늘색 표본으로도 삼아도 손색없었던 하늘이 점점 분홍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검은 흙으로 땅을 삼은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아이들도 피곤한 눈으로 벤치에 걸터앉아 부모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빌딩 속에 은신해 있던 신사(神社)들이 조금씩 빛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모르는 신사 앞에서 손뼉을 쳤습니다. 일본 곳곳에 있는 8만여 개의 신사 중 저와 부합하는 하나의 신을 떠올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이곳이 그곳이기를 바라는 예의도 잊지 않았습니다.

신사(神社)의 입구에는 경내와 속계의 경계를 나타내는 도리이(鳥居)가 있어 신전까지 참배 길이 통한다. 사진ⓒ노기훈

기도를 떠올리며 신이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어둠도 무섭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 안으로만 돌아가자는 일념으로 도쿄를 헤쳐나갔습니다. 지형지물이 많아 인도로는 도저히 다닐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 자동차가 다니는 옆으로 신세를 좀 졌습니다. 자동차 보다 빠른 사이클이 신경질적으로 저의 옆을 스치며 지나갔습니다. 오히려 차들이 저를 비호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시나가와역(品川駅)으로 가는 고가도로 위에서 멀리 소실점이 보이는 요코하마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전거에서 내려 사진을 찍고 좀 오랜 시간을 들여 생각을 했습니다. 녹슬어 보이는 철로의 쇳가루들을 보면서 역설적이게도 부식되지 않는 강인함을 보았습니다. 경인선을 만든 똑같은 재료일까도 잠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열차들은 레일을 따라 아주 세밀한 간격으로 번갈아 지나갔습니다. 멀리 도쿄 쪽을 보니 오다이바(お台場)의 풍경이 보일 것 같기도 했습니다. 저곳에서 일본의 젊은이들이 데이트하며 한껏 즐기고 있겠지라는 생각에 이르자 자전거에 올라 있는 힘을 다해 페달을 밟았습니다. 고통에 다르면 생각은 멈추게 됩니다. 이윽고 건물들이 수직으로 솟아 있고 호텔이 비일비재한 시나가와역에 도착했습니다. 시나가와역에서 신바시로 가는 길은 일본식 아파트쯤으로 되어 보이는 연립주택이 많았습니다. 시나가와구가 일본에서 인구가 제일 많다더니 그 영역이 오타구인시나가와역까지 미치고 있나 봅니다. 베란다 크기로 집의 크기가 손쉽게 예측되는 일본식 연립주택을 지나 더욱 어두워진 도쿄의 중심부로 들어왔습니다. 구글맵을 켜 지도를 봤습니다. 30분만 더 달리면 신바시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열차를 기점으로 거의 5시간을 도로를 따라 달렸지만, 가래는커녕 기침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코막힘도 없었습니다. 일본의 전자제품이 발달한 이유가 먼지가 없고 공기가 좋아서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큰 구름처럼 확연히 보이는 미세먼지가 서서히 사람을 죽이고 있는 한국 보다 차라리 방사능의 위험이 있어도 지금의 일본이 더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 같았습니다. 어릴 적 했던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서 나오던 장면들이 한국과 일본에서 재현되고 있었습니다. 타국에 머무른 지 불과 한 달도 안 된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이 아닌 어떤 곳이라도 지옥에서 벗어난 쾌감만이 있는 환상의 공간처럼, 순진하게도 그리 보였습니다.

시나가와역(品川駅)은 1872년 도카이도 본선(東海道本線) 첫 개통 당시 개업한 역이다. 신바시역(新橋駅)이 기점이지만 지금의 JR신바시역은 구신바시역의 역사를 이어받지 못한 관계로, 시나가와역은 일본 최초의 철도역 중에서 가장 기점에 가까운 역이다. 사진ⓒ노기훈

도쿄의 빌딩 숲에 있으니 그저 달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볼 틈이 없었습니다. 그때 미명만이 남아있는 도쿄의 하늘을 대신해 새로운 불빛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그 불빛은 이미 나타나 있었습니다. 거대한 해가 떨어져야만 보였던 것입니다. 빛들의 시간이 점차 시작되었습니다. 도시의 표면을 밝히는 조명들이 빛의 속도로 어딘가에 맞붙이치고 다시 어디론가 가서 부딪치고 해서 끝까지 사그라지지 않고 엉키고 엉켰습니다. 자전거를 몰아 도쿄의 중심지로 들어갈수록 나는 빛에 이끌려 더 어두운 곳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완연한 어둠이 된 도쿄의 중심을 따라가면서 이쯤이면 거의 다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오래된 건물이 멀리 보였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멀리서도 뭔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호가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그곳을 향해 단번에 달려갔습니다. 도착하여 건물의 주변을 돌았습니다. 건물의 뒤편에서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철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글,사진/ 노기훈 작가

 

노기훈은 2017년 인천아트플랫폼-뱅크아트 스튜디오의 국제교환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8월부터 11월까지 일본에 체류한다. 사진카메라와 영상카메라로 주로 찍어 내는 활동에 관심이 많으며 사진과 기행문을 동시에 써서 글로 찍기도 한다. 인천역에서 출발하여 노량진역까지 최초의 철도 경인선을 따라서 사진 찍었으며, 지금은 일본 1호선인 사쿠라키초역에서 신바시역까지 걷고 있다. 




원색동화 속 낡은 손톱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의 국제교류사업으로 일본의 요코하마 뱅크아트1926, 인도의 산스크리티재단과의 교류 사업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소식을 격호로 싣습니다.

자이푸르(Jaipur, 인도 라자스탄 주의 수도) 근처의 성곽 도시 아메르(Amer)의 길거리에서 휘황찬란한 색상의 종교화 복사본을 여러 장 구매했다. 종교화를 판매하는 젊은 청년은 수북이 쌓인 프린트를 뒤적여 다양한 종류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가 권하는 그림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몇 장을 골랐다. 믿는 종교가 없는 내가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종교화를 구매하게 된 상황이 웃기기도 했다. 풍요의 여신인 락슈미(Lakshmi)와 그녀가 뿌리고 있는 금화를 보자 왠지 이 그림을 집에 걸어두면 행운을 불러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종교화들을 사는 사람들의 심리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신들의 숫자는 정해져 있는데, 그들의 모습을 표현한 스타일이나 구상은 끝이 없다. 현대미술을 공부해 온 나에게 이 그림들은 상당히 키치적 이다. 종교화를 보면서 성스러움을 느낀다기 보다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신들의 모습을 통해 이해하기 쉽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이 종교화들은 상당히 실용적이며 대중적이다. 원색 복사본의 저렴한 가격도 이러한 실용성에 한몫했다. 그러나 여러 힌두교 사원들과 신상들을 관찰하다 보니, 이러한 미적 감수성을 단순히 키치적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힌두교의 변천사와 이 종교 특유의 유연성, 그리고 이러한 미적 감수성이 인도의 미술품과 사원들에 나타나는 양상 때문이다.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섬기는 기독교나 이슬람교와는 다르게 힌두교는 다신교이다. 그리고 이 다양한 신들의 이야기는 라마야나(Ramayana)나 마하바라타(Mahabharata) 신화를 통해 전해진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신들의 이야기가 오랜 시간에 걸쳐 편집과 수정의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서유기에 등장하는 손오공의 원조로 여겨지는 ‘하누만(Hanuman, 원숭이 신)’은 처음 라마야나가 씌여진 시기에서 1000년이나 지난 후에 추가되었다고 한다. 인도는 다양한 부족과 문화를 포용하는 과정에서 각 부족이 섬기는 지역의 신들을 같이 포용하게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가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와 같은 종교 서사시에 더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그 규모가 크다고 하는 악샤르담(Akshardam) 사원은 이렇듯 새로 추가된 신생 종교 신화를 경험 할 수 있는 장소 중에 하나이다. 이 사원은 힌두교의 새로운 종파에 의해 지어졌는데, 이 종파는 스와미나라얀(Swaminarayan)이라는 7살에 모든 힌두 종교의 가르침을 배우고 11살에 인도 전역으로 성지순례를 떠난 요가수행자(yogi)를 섬긴다.

그는 1781년에 태어나서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종교적 가르침을 얻고 요가를 수행하기 위해 순례를 떠났다. 그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한 이 종파는 많은 추종자들이 있으며, 인도 외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와 뉴저지 지역에도 비슷한 모양의 사원을 가지고 있다.

내가 방문했던 사원은 델리(Delhi) 중심에 위치해 있는데, 인도 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이유로, 혹은 관광의 목적으로 이곳을 방문한다. 이 종파는 기존 힌두교의 전통과 인도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보다 인간적인 도덕에 대한 가르침을 전수하려고 한다. 기독교의 예수와 비슷하게 스와미나라얀 또한 소외된 계층과 여성, 아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멸시를 비판한다.

이 사원과 내가 구매한 원색의 종교화 프린트의 유사점은 이 두 가지의 대중성과 상품성에 있다. 악샤르담 사원은 거의 놀이공원의 규모로 입장하기 전에 모든 소지품을 입구에 맡겨야 한다 (심지어 핸드폰도 금지되어 있어 사진을 촬영하지 못했다). 또 이 사원 단지(complex) 내에는 전시관이 있는데, 고대 브라만교(Brahman敎) 경전인 리그베다(Rig-Veda)의 내용이 롯데월드의 ‘신밧드의 모험’과 같이 배를 타고 따라가면서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자연사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디오라마 로 이루어진 이 보트 투어는 이 곳이 사원이라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게 만든다. 전시관 옆에는 상영관도 있는데, 이곳에서는 스와미나라얀의 일생을 영화화한 2시간짜리 영화의 일부분이 상영되고 있다. 이 영화는 여느 볼리우드 영화에 못지않게 휘황찬란하다. 아쉽게도 저녁의 분수 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사람들에게 듣기로는 이 공연은 리그베다의 중요 내용을 레이져와 영상 프로젝션, 음악을 통해 보여준다고 한다. 이 정도면 온 가족이 같이 나들이 나와도 좋을 것 같지 않은가. 사원 단지의 건축물들은 2005년에 지어졌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다. 단지 옛 사원들에 비해서 붉은 사암으로 조각된 외부가 깨끗하다는 점이 이 사원의 나이를 추측하게 한다. 내부도 외부에 못지 않게 정교하고 화려하다.

특히 스와미나라얀 조각상을 모신 사원의 중앙은 온갖 보석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동화의 세계에 들어온 듯한 인상을 주는 이 장소는 외국인인 나에겐 총천연색 종교화 프린트를 봤을 때처럼 특별히 성스럽다기 보단 다소 어색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아름다운 동화세계에서 스와미나라얀이 신던 신발, 실제 손톱과 머리카락이 보관되어있는 진열장은 동화세계의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현실의 조각과 같이 충격적이었다. 이것들이 실제로 스와미나라얀 수도사 몸의 일부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오래된 인간 신체의 일부분이 줄 수 있는 그로테스크함과 이를 에워싸고 이상세계의 결합은 내게 특별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출구 쪽엔 스와미나라얀과 사원 건축에 관련된 책들, 전생과 카르마(karma, 업)에 관한 책들 그리고 이 종파에서 만들어내는 건강식품 및 미용제품 등이 판매되고 있었다. 이 사원에서 나오면서 나는 아주 특별한 놀이동산, 혹은 광고를 보고 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많은 현대인들에게 사원은 신성한 장소라기 보다는 가족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긴 비행 끝에 집에 돌아와 돌돌 말린 종교화 프린트들을 다시 펼쳐보니 인도의 느낌이 다시 확 밀려온다. 컬라풀함과 신비로움, 그러나 역시나 키치적인 이미지들,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인도 문화와 종교의 특이함을 그리고 왠지 행운을 불러올 것 같은 여신의 그림을 내 방 벽에 붙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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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치(Kitsch): 예술작품과는 달리 실용적인 용도를 가지고 있는 대상으로, 그 대상과 대상을 관찰하는 자 사이에 비판적인 거리가 없는 경우
– 디오라마(Diorama): 3차원의 실물 또는 축소 모형

 

글, 사진 / 이영주

 

이영주는 2017년 인천아트플랫폼-산스크리티 레지던시의 국제교환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9월부터 10월 중순까지 인도의 델리와 자이푸르에서 한달 반 간 체류했다. 인도 전통미술에서 묘사되는 종교적 상징과 체계에 관심을 가지고 출발한 이 여정은 30미터 가량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기록했다. 이영주는 신화와 꿈의 서사구조를 이용하여 개인의 역사와 정체성을 애니메이션 영상 설치와 퍼포먼스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웹사이트 바로가기 ▶)




2. 자전거로 사쿠라기초에서 신바시까지 달리기 1편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의 국제교류사업으로 일본의 요코하마 뱅크아트1926, 인도의 산스크리티재단과의 교류 사업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소식을 격호로 싣습니다.

일본에서 전차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국도만큼 조밀하게 짜여져 있는 전철의 총연장은 2만 7천km정도로 세계 15위권에 지나지 않지만, 수송량은 연간 80억명, 수송분담률 29%로 단연 세계 1위의 철도 국가이다. 1872년 일본 최초로 개통된 요코하마 사쿠라키초역(桜木町駅)에서 도쿄의 신바시역(新橋駅)까지 철도길은 아직도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사진ⓒ노기훈

오늘은 일본 최초의 철도라는 사쿠라키초역(桜木町駅)에서 신바시(新橋駅)까지 왕복 60km를 자전거를 타고 달렸습니다. 갈 때는 신나게 달렸는데 올 때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갈 때는 밝았는데 올 때는 어두웠거든요.

갈 때부터의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일본의 낮은 한국보다 훨씬 맑습니다. 하늘도 파랗고 대기오염이 없어 태양이 눈으로 바로 들어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그 빛을 좀 더 빨리 맞받아 나가는 기분인데, 그럼에도 선글라스를 굳이 챙기지 않는 이유는 운전을 해야하는 경우만 제외하면 사진을 찍는 사람이 탈색된 풍경을 바라보는 것에는 여러 아쉬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이 아프기도 한 빛을 맞으면서도 계속 자전거를 몰아 나가기로 했습니다.

요코하마 사쿠라기초역은 제가 살고 있는 간나이역 인근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단지 한 정거장 거리입니다. 뱅크아트NYK 스튜디오에서도 걸어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이 인천역과 인접한 것과 같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고 사쿠라키초역에 도착해서 구글맵을 체크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기필코 도쿄에 다녀 오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걸어가면서 보는 모습이 아니면 자전거를 타니 사진을 찍기 더욱 어려웠습니다. 괜찮은 풍경이 보이면 자전거에서 내려 사진을 찍었는데 걸어가면서 연속적으로 보는 풍경과는 멀어지게 되어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만, 거리에 차가 함부로 주차되어 있지 않은 미나토미라이 일대를 관망하면서 같은 기획으로 탄생했지만 처지가 다른 송도와 청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도 어서 빨리 불법주차 단속이 엄격하게 시행되어 비상정지 깜빡이가 면죄부가 되는 상황이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에 있는 대규모 테마파크가 있다. 그곳에는 높이 112.5m에 480명이 탑승할 수 있는 세계 최대급인 관람차 코스모클록21이 있다. 정상에서 도쿄를 바라보면 도쿄타워가 보인다. 사진ⓒ노기훈

거리는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평일에는 검은색 정장 차림에 표정 없는 직장인들만 간혹 보이던 곳인데 주말만 되면 도시 구성원에 대한 대대적인 일제검속이 이루어진 것처럼 평상복 차림에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해맑은 모습으로 신도시 일대를 빽빽이 메우는 곳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자전거 횡단보도에서 살짝 삐그덕하며 자전거에 오르는 바람에  옆에 지나가던 아이에게 부딪힐 뻔해서 “어디 주변도 살피지 않고 올라? 뭐야 정말?”이라며 아이 어머니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화난 일본사람의 표정을 본 첫경험이었습니다.

계획된 도심구역이라 그런지 미나토미라이의 보도는 직선에 가깝게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옆 쪽으로 휑하니 잡초만 돋아나 있는 공터도 여럿 보였습니다. 빌딩숲 속 개발의 틈에서 비켜나간 자리에는 땅이 살아나고 풀을 키웠습니다. 인간이 가꾼 빌딩이 올라간 만큼 사람마저 시스템에 집어넣어 능력에 따라 공평하게 속을 층층이 꿰차는 것처럼 규율과 법칙으로만 가득 차 보이는 일본에서도 흙이라는 빈틈이 자라나고 있는가 봅니다.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후달리는 허벅지를 한번 보고 그리고 옆으로 지나가는 전차를 확인하고 멀리서 날아오는 요코하마만의 바다 냄새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킁킁거리며 앞으로 달렸습니다. 해를 보니 북쪽으로 가던 방향이 동쪽으로 우회하는가 싶더니 장엄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요코하마역을 장면의 밖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빌딩과 수로로 큼지막하게 구획을 나눈 몸통 위로 아무렇게나 꼬아놓은 듯 보이지만 정확한 계획에 따라 날실과 씨실로 나뉜 옷가지를 덮은 식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요코하마의 심장은 요코하마역이었습니다. 웅크리고 있던 요코하마역이 에반게리온처럼 천천히 일어나 휴일을 즐기는 일본사람들에게 일제히 환호를 받을 것 같았습니다.

요코하마역 일대는 종합쇼핑몰, 먹거리타운, 레저시설이 밀집해 있는 요코하마 최대의 중심지이다. 사진ⓒ노기훈

실제로 요코하마역은 JR 5개 노선, 사철 4개 노선, 시영지하철, 각종 버스 등이 있는 대규모 터미널입니다. 나리타 공항에서 요코하마에 오자면 NEX티켓으로 요코하마역에 오는 것이 가장 싸고 편리하고, 하네다 공항에서도 새벽 2시 20분까지 있는 직항버스를 타면 바로 도착하는 곳도 요코하마역입니다. 위에서 밑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그리고 기차로 버스로 가로질러 다른 곳으로의 절차가 이곳이 요코하마라면 필히 요코하마역이 대장입니다. 일본 제2의 도시로써 도쿄의 명을 받아 요코하마는 작동합니다.

역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밖으로 드러난 위용을 보면서 내심 부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자전거를 타며 인파로 인해 속력을 내지 못하고 가끔은 놀래 서있기도 하면서 요코하마역을 빠져나왔습니다.

지금까지 봤던 미래 도시와 같은 모습들이 차츰 시들해졌습니다. 건물이 점차 낮아지며 사람들도 뭔가 의기소침해 보였습니다. 어깨가 구부정한 노인들이 넓은 도로에서 작은 도로로 빠져나오는 차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이런 느낌이 일본의 교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의 골목길에는 불법주차된 차들이 거의 없다. 차를 소유하지 않아도 될만큼 철도가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다. 때문에 굳이 중심지에 살지 않아도 되기에 부동산 투기 현상도 한국보다 덜하다. 사진ⓒ노기훈

사진과 자전거를 동시에 다루는 일은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는 지나 있었습니다. 벌써부터 안장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내심을 발휘해서 조금 지나면 자전거가 맞추든 내가 맞추든 누구든 서로에게 맞추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도쿄로 흡수되어 가는 요코하마 쪽은 짱구의 집같은 일반적인 주택이 많았습니다. 문득 인천 도화동의 어느 집 대문 앞에서 보았던 모란이 생각났습니다. 모란꽃은 뭔가 사진을 찍게 만드는 힘이 있었던 피사체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주택은 담이 거의 없고 현관문이 바로 골목길과 연결된 형태가 많은데, 집주인에게 허용된 그 작은 틈 사이에도 예쁘게 가꾼 작은 화분이나 취향에 따라 자신들이 모시는 신과 닮은 도자공예품을 가져다 놓습니다. 과한 집은 집에 물건들이 차고 넘쳐 현관에 이른 듯 현관을 애써 찾아야만 볼 수 있을 정도로 풀과 장식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일본의 마니아틱한 영화들을 보면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한 할머니가 사는 그런 집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 집의 현관을 살피면 그 집의 도로의 차선을 넘겨서 집 앞을 사유재산화한 불편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나 하나 뿐이라는 생각은 공공이 마련한 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사고라는 점을 몸소 습관화하고 있습니다.

더욱 조심스럽게 교통 안내선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동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횟수에 비례해서 배는 텅텅 비게 되어 역 근처로 가서 뭔가 먹을까 하다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어느 하나 뒤떨어져 보이지 않는 이 많은 일본 음식들 속에서 괜히 주변부만 서성이며 가격만 확인하다가 다시 자전거에 타게 되었습니다. 무리해서라도 가와사키까지 가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음식들을 가려나가기로 했습니다.

수로와 철도가 만나는 풍경. 철도가 집을 가르고 수로가 마을을 양분하는 모습은 일본에서는 일상적인 모습이다. 사진ⓒ노기훈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보이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요코하마와 도쿄 일대의 특색으로 느껴졌습니다. 잔잔히 흐르는 수로들 위로 오래되어 보이는 철제 보강제를 밟고 전철들이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쉴 새없이 다녀서 아주 긴 열차 한대가 시간을 들여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2층짜리 좁은 집들이 차 하나가 지나갈 듯한 길을 마주보고 서로 이웃하며 있었습니다. 골목 사이로 간혹 너풀거리는 빨래만 차선을 넘어 허공을 침범하고 있었습니다.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지 않는 사람들과 빨리 달리지 않는 차들을 보면서 문득 얼마 전 요코하마 관계자로부터 들은 내용이 기억났습니다. 요코하마시가 2003년 ‘창조도시 요코하마’ 프로젝트를 추진할 당시 소음 규제와 관련한 전문가가 도심재개발 사업에 투입되어 간나이 쪽 도심을 설계했다는 말이었습니다. 소음을 공해 차원에서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 저는 한낱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서 그 도시를 다루는 의미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인천에서 출발했다면 어디쯤 왔을까? 지금 보이는 일본의 모습을 인천의 어딘가와 견준다면 어디가 괜찮을까? 사진을 찍기로 마음먹고 다니는 길이라 주변의 정황들이 사진 속에서 인천과 도쿄의 관계로 맺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 반대로 인천과 요코하마의 중간지대에 있는 풍경이 있다면 어떤 것일지도 보고 싶었습니다. 인천도 분명 아닌데 일본은 더더욱 아닌 그런 풍경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 감지되게 될지 궁금해져 왔습니다. 점점 요코하마와 도쿄의 중간이라는 가와사키시에 가까워져 가면서 이러한 생각은 더더욱 심해졌습니다. 마침 운이 좋게 조시키라는 곳에 큰 시장이 있어 그곳을 횡단해 가면서 눈요깃거리가 많아져 눈을 믿고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지나가면서 본 풍경 중에서는 가장 소리를 크고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장은 어딜 가나 시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인들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습니다. 음식의 가격은 간나이의 절반 밖에 되질 않았습니다. 아케이드가 눈이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자전거에 내려 천천히 구경하면서 일본어 소리에 집중했습니다. 어디선가 들은 듯한 단어들이 나와서 내용을 안다 싶으면 그새 또 다른 단어가 나와 귀를 막았습니다. 그래도 그 미묘한 억양과 표정으로 신포시장에서 봤던 상인들의 얼굴을 기억해 내게 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배가 고파져서 신포닭강정을 닮은 일본식 닭 튀김 가라아게를 시키려고 했는데 뒤에서 먼저 외친 고등학생 때문에 밀려나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뒤돌아 다시 가던 길에 가기 위해 자전거를 대고 근처 편의점에서 에너지 음료를 사서 바로 다 들이켰습니다. 아직 도쿄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글,사진/ 노기훈 작가

 

노기훈은 2017년 인천아트플랫폼-뱅크아트 스튜디오의 국제교환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8월부터 11월까지 일본에 체류한다. 사진카메라와 영상카메라로 주로 찍어 내는 활동에 관심이 많으며 사진과 기행문을 동시에 써서 글로 찍기도 한다. 인천역에서 출발하여 노량진역까지 최초의 철도 경인선을 따라서 사진 찍었으며, 지금은 일본 1호선인 사쿠라키초역에서 신바시역까지 걷고 있다. 




여신과 여성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이번 호 부터는 인천아트플랫폼의 국제교류사업으로 일본의 요코하마 뱅크아트1926, 인도의 산스크리티재단과의 교류 사업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소식을 격호로 싣습니다.

델리의 전철역 – 여자들 만 탈 수 있는 칸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처음엔 혼자 밖에 나가지 못했던 내가 이제는 지하철을 타고 델리(Delhi)의 시내를 누빈다. 그러나 나는 가방에 항상 페퍼 스프레이를 가지고 다닌다. 레지던시에는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꼭 돌아오고, 거리에서 남성과는 이야기를 하거나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한다.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나 스스로에게 통행 금지시간을 적용시켰다. 옷은 헐렁한 긴바지에 긴팔을 입는다. 델리의 지하철은 서울의 지하철 같이 깨끗하고 연결이 잘 되어 있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기 전에 보안 검사를 꼭 지나가야 한다. 비행기를 타듯이 가방을 엑스레이 기계에 통과시키고, “Ladies” 라고 씌여진 줄을 따라 가면여자 경찰이 몸 수색을 한다. 이런 보안 경비는 지하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슈퍼마켓, 영화관, 쇼핑몰, 박물관, 심지어는 거리의 시장에서도 보안 검사를 한다.

지하철 안 여성 전용 칸

보안 검사를 지나서 드디어 지하철 플랫폼에 도착하니 여성 전용 칸을 표시해둔 팻말이 보인다. 최대한 보수적이게 옷을 갖춰 입은 나의 걱정과는 달리 지하철 안의 여성 전용 칸에는 민소매 티셔츠와 스키니 청바지를 입은 여성들이 보인다. 그러나 전통 사리(인도의 전통의상)를 입은 여성들도 절반 이상 된다. 여성 칸과 혼용 칸 사이엔 문이 없어서 그 너머로 서있는 남성들이 보인다. 여성 전용 칸의 전체적인 색상이 밝고 풍부하다면 혼용 칸의 색상은 이와 대조적으로 칙칙하다. 어떤 남성들은 두 칸을 잇는 연결 부위에 앉아있다. 공중 화장실에서와 같이 사회적으로 규정된 남녀의 분리된 공간을 여러 공공 장소에서 경험할 수 있다. 레스토랑에서는 여성이 혼자 온 경우 가족을 위한 구역에 자리를 잡는 것이 좋다. 이렇게 남성과 여성의 공간을 나누게 된 것은 전통적인 관습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화두가 된 인도에서의 여성에 대한 범죄 때문이기도 하다.

쇼핑몰 입구의 보안 검사

인도에 간다고 말했더니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말렸다. 여자가 혼자 여행하기엔 너무 위험한 나라 아니냐고. 그렇다. 2010년도 이후로 가장 눈에 띄는 인도에 관한 뉴스 기사들은 죄다 성폭행 사건에 대한 것들이다. 그래서인지 델리에 도착하는 첫날부터 내가 가장 인상 깊게 관찰하게 된 것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제도와 여성의 권리, 그리고 인도 신화와 종교 간의 연관성이다. 인도는 거대한 나라이고, 그 인구의 숫자가 중국과 맞먹는다. 그에 반면 면적은 중국의 1/3밖에 되지 않는다. 땅덩이가 크고, 인구 밀도가 높은 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또 인도는 가까운 미래에 중국 다음으로 큰 경제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인도의 수도인 델리는 한국이 개발도상국이었을 때와 같이 현대적인 삶이 빠르게 전근대적인 삶의 모습을 대체해 나가고 있다. 여성에 대한 범죄는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전통사회와 현대사회의 마찰이라고 생각한다. 

지하철 역의 광고 : 여자아이를 버리지 마세요. 여자아이를 존중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남녀의 성비가 5대 1이 될 것입니다.
* 이 광고는 인도에 아직 남아선호사상이 존재하고, 여자아이를 시집 보낼 때 예물을 차려야 하는 관습의 부작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들의 뿌리는 오랫동안 남성우월주의를 지지해온 전통사회의 악습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슬람교를 믿는 중동의 국가들에서도 여성에 대한 범죄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그 외에 델리와 같은 대도시에 현저한 빈부격차도 이러한 범죄에 일조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교에서 묘사하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 문제를 종교와 연관시켜 생각해 보고자 했다. 인도는 힌두교 신자가 거의 80%이고, 그 다음으로 이슬람교(14.2%), 기독교(2.3%), 시크교(Sikh, 1.7%), 불교(0.7%), 자이나교(Jaina, 0.4%) 등의 종교 신자들이 있다. 이 글에선 인도에서 가장 많은 신자가 있는 힌두교를 다루도록 하겠다.

힌두 종교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묘사된다. 여성의 가치는 그녀의 신체적 미와 정절에 의해 평가되고, 결혼은 여성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대한 결정으로 표현된다. 힌두교의 중요 세 신들(Trimurti)인 브라마(Brahma, 창조자), 비슈누(Vishnu, 수호자)와 시바(Shiva, 파괴자)는 모두 남성으로 묘사되고, 그들의 배우자인 사라스바티(Sarasvati), 락슈미(Lakshmi) 그리고 파르바티(Parvathi)는 그들의 반쪽이자 여신들이다. 기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힌두교에서도 최초의 여성은 남성의 욕구에 의해 그의 몸의 일부분을 추출해서 태어나게 된다. 이러한 창조설은 여성의 자율성을 상징적으로 남성에게 가둔다. 모든 인간이 여성의 자궁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종교의 이러한 창조설들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인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 힌두교는 두 가지의 성스러운 신화, <마하바라타(Mahābhārata)>와 <라마야나(Ramayana)>가 그 내용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힌두교에서 섬기는 다양한 신과 여신들은 모두 이 두 가지 서사에 등장한다. 인도의 전통화와 조각들에 묘사되는 인물들은 모두 이 신화들의 등장 인물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 서사 신화들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 인도의 전통미술과 문화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이 신화들은 그리스 신화가 그렇듯이 상징적이고, 고대 사회의 철학과 사회 관습, 정치적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신화들은 <리그베다(Rigveda)>나 <우파니샤드(Upaniṣad)>와 같이 좀 더 형이상학적인 성서와 달리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쓰여진 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현재까지도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의 내용과 인물들은 춤과 연극, 미술의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힌두 종교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음양오행설과 비슷하게 여성과 남성의 조화가 우주를 이루고 있고, 이는 시바와 샥티(Shakti)라는 신과 여신으로 상징화 된다. 이 세가지 신화들에 등장하는 신과 여신들은 모두 시바와 샥티의 아바타(Avatar. 권화, 부활한 존재)들이다. 여기까지는 우주와 세계에 대한 조상들의 이해가 상당히 철학적이고, 사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신화들 각각 그것들이 구전되고 기록되는 과정에서 당시 기권 세력에게 유용하게 내용이 덧붙여지고 수정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이 신화들의 세계에는 신과 인간 그리고 악령들이 존재한다. 높은 지위에 태어난 인간들은 신과의 관계에 의해, 혹은 정신적 수양을 통해 신적인 능력과 지위를 획득하기도 한다. 이렇게 수양을 통해 신적인 능력을 획득하는 사람들은 거의 남성들이다. 그들은 모두 어린 시절의 교육과 결혼, 그리고 가정을 이루는 과정을 거친 후 출가하여 수양의 길을 떠난다.이 신화들에서 여성은 사랑과 정절을 통해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에, 그리고 남성은 정신적 완성의 길을 갈 것을 제시한다.

신화에서 주로 묘사되는 사건들은 여러 왕권들과 부족 사회들이 결혼과 교혼을 통해 자신들의 혈통을 유지하고, 영역과 영향력을 획득하거나 잃는 과정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전쟁들은 선과 악의 싸움이기도 하다. 신화에서 다루어지는 인간 여성들은 남성들의 싸움의 원인을 제공하거나 싸움 끝에 교환되는 전리품이다. 그들은 누군가의 부인이거나 딸로서, 그 아름다움과 정절이 항상 강조된다. 여성이 자신의 남편에 대한 정절을 죽음을 무릅쓰고 지켰을 때 그녀는 신들에게도 존경을 받게 된다. (한국 설화에도 이러한 이야기들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일부다처제가 자주 언급되는데, 이것은 왕가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제도로 제시된다. 남자아이의 출생은 이렇게 혈통을 유지하는데 온갖 신경을 쓰는 고대 사회에선 최고로 중요한 일임이 당연하고, 이는 이 두 가지 신화에서 번복해서 발견되는 요소들이다. 예외적인 경우로는 드라우파디(Draupadi)라고 불리는 공주가 다섯 명의 형제들과 결혼한 부분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찾아본 결과, 이는 인도에 존재하는 여러 부족들 중에 일처다부제를 시행하는 부족이 있었고, 이 부족의 관습을 대변할 수 있는 여신이 드라우파디라고 한다.

인도에서 가장 많이 숭배되는 라드하와 크리슈나(Krishna). 크리슈나는 그의 헌신적인 추종자들인 고피(양 혹은 염소 치기의 부인)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라드하(왼쪽)는 크리슈나의 아내로 고피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고 한다.

유디쉬트라가 두르요다나의 도박에서 그의 아내인 드라우파디를 잃자, 승자는 드라우파디의 옷을 벗길 것을 요구한다. 크리슈나 신이 드라우파디의 기도를 듣고, 그녀의 옷이 영원히 벗겨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다 몸져 누운 공주

라드하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는 크리슈나

결국 다신교인 힌두교는 이렇게 다양한 부족과 종족들을 인도라고 하는 한 나라에 포용시키는 지혜로운 장치였다고 여겨진다. 내가 인도의 종교 관습에 대해서 높이 사는 점은 바로 이 유연성이다. 사회가 변화하면 종교와 전통 관습도 그에 따라 변하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점점 교육 받은 여성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인도는 세계의 다른 나라들처럼 남성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남녀평등주의로 이동해 가야 할 것이다. 종교 또한 이러한 사회적 방향을 반영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인도는 개정된 서사 신화가 필요할 수도 있다. 이는 인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세계의 종교들은 과거의 관습을 현대적인 눈을 통해 다시 재해석하고 개정해야 할 것이다. 

파괴의 여신 칼리(Kālī)

파괴의 여신 칼리-2

번영과 부의 여신 락슈미와 그의 남편 비슈누

12년 전, 그러니까 2005년에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났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나도 류시화 시인의 『지구별 여행자』를 읽었었고, 동양의 사상과 종교, 인류 7대 문명의 발원지인 인도에 가면 인간의 역사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때 잘 모르고 떠난 인도여행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여행으로 기억한다. 처음 인도를 접했을 때의 느낌은 감춰졌던 이 세상의 일부분을 목격한 듯한 ‘센세이션(sensation)’이였다. 서양의 문화와 도시적인 삶에만 익숙했던 나에게 인도는 사람이 사는 모양새가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나라이다. 또한 서양식 미술교육을 주로 받아온 나에게 인도의 미술과 건축은 전혀 다른 미의 기준점을 제시해 주었고, 이것이 유럽 중심주의 적인 관점의 가치가 사물과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지,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다시 찾은 인도는 12년 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인도는 너무도 다양한 얼굴을 가진 나라임에는 변함이 없다. 10월 초엔 두르가(Durga, 전쟁의 여신)라는 여신을 섬기는 축제가 열린다. 여신을 숭배하는 만큼, 여성을 존경하고 여성이 남성과 같은 권리와 지위, 그리고 자유를 가질 수 있는 날이 곧 오기를 바랄 뿐이다. 

파르바티의 또 다른 아바타 전쟁의 여신 두르가

 

글, 사진 / 이영주 작가

 

이영주는 2017년 인천아트플랫폼-산스크리티 레지던시의 국제교환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9월부터 10월 중순까지 인도의 델리와 자이푸르에서 한달 반 간 체류했다. 인도 전통미술에서 묘사되는 종교적 상징과 체계에 관심을 가지고 출발한 이 여정은 30미터 가량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기록했다. 이영주는 신화와 꿈의 서사구조를 이용하여 개인의 역사와 정체성을 애니메이션 영상 설치와 퍼포먼스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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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가 멍때릴 날! 멍때리기 대회, 세계로 나아가다.2

6월1일 발행되었던 인천문화통신3.0 22호의 지구별문화통신에 실렸던 <전세계가 멍때릴 날! 멍때리기 대회, 세계로 나아가다.> 후속편으로 8월 27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개최된 <제4회 국제 멍때리기 대회>를 소개합니다. 본 행사는 인천문화재단의 2017 국제교류지원사업에 선정되었습니다.

2017년 8월 27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제 4회 국제 멍때리기 대회가 개최되었다.

유럽에서의 첫 대회라는 타이틀처럼 어쩌다 이 대회가 유럽에까지 건너가게 되었는지 새삼스럽게 놀랍다.

비영리 공공미술 단체인 로테르담의 Frank foundation(프랭크 파운데이션)이 우리를 로테르담에 초대한 주최다.

로테르담은 실험적인 퍼포먼스가 많이 열리는 도시로, 멍때리기 대회 역시 그러한 부분에서 로테르담에 소개되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풍차와 치즈로만 알고있는 낯설고 동화같은 나라의 이미지만 가지고 있던 터라, 실험적인 퍼포먼스가 많이 열리는 도시라는 로테르담의 소개는 설레이고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인천문화재단의 국제교류지원 사업을 통해 주춤하던 진행은 급물살을 타고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프랭크파운데이션도 멍때리기 대회를 위해 팀을 꾸렸고, 우리도 한국에서 준비할 것들을 준비해 나갔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순풍에 돛을 단 듯 마냥 쉬이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각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에다가 그 동안 대회에 사용한 물품을 현지 조달 가능한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적당한 것들을 찾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종종 발생했고, 일은 느리게 진행되곤 했다.

더욱이 시차때문에 이곳에서 한참 일할 시간이면 그들은 잠을 자야 하는 시간이어서 고작 하루에 4-5시간정도 제대로 소통을 하고, 나머지는 이메일을 통해 천천히 진행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시간은 흘러갔고 진행은 속도가 붙지를 않았다.

해외에서 진행되는 멍때리기 대회 업무를 도와주고 있는 사부장(사승현)과 나는 8월 16일 출국해서 17일부터 열흘가까이 대회를 위한 준비를 현지에서 하게되었다.

실제 함께 진행하던 현지 스텝들과의 만남은 이메일과 메신저로 소통하던 때보다는 조금 덜 답답했지만, 현지에서 겪어야 할 또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생기기도 했다.

현지에서도 우리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4회 국제 멍때리기 대회 홍보물을 꾸준히 업로드하고, 홍보를 위해 현지 스텝들과 플라이어를 뿌리기도 했다. 그리고 운이 좋게 전국방송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에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을 때에는 정말 뛸 듯이 기뻤다.

게다가 생방송 인터뷰였기 때문에, 해당 시간 전까지 몇개의 문장을 외워서 짧게 인터뷰에 응했다.

대회명 ‘Space-out competition’은 우리말 ‘멍때리기 대회’처럼 제목 자체로 사람들이 쉽게 대회의 의미를 파악하고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사람들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러면서 대회가 가지고 있는 메세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하고 있었다.

대회를 치루기 전, 대회 전반에 대한 설명을 하고 스텝들에게 각각의 역할을 지정하고 역할에 대한 설명을 해야하는 전체 스텝회의에는 한국어, 영어, 네덜란드어, 이란어가 난무하는 다소 복잡한 상황에서 진행이 되었었다. 이 또한 유럽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웃기고도 험난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롤러코스터같은 열흘을 보내고 마침내 대회 당일이 되었다. 긴장감, 불안감, 기대감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다. 현지 스텝들도 이른 시각부터 대회 준비로 분주했다. 주문한 물건들이 하나둘 대회 장소인 Schowburgplein(스카우부르크플레인)이라는 광장으로 도착했고, 우리도 한국에서부터 준비해온 물품들을 챙기고 무대를 만들고 경기장을 만드느라 정신없이 없었다.

대회는 오후 3시부터 시작이지만 2시부터 이미 출전 선수들은 현장에 많이 와 있었고, 대회를 즐기려는 모습들이었다.

‘각자 자신의 직업에 관련된 의상’을 입고 오라는 공지에 충실하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을 말해주는 의상들을 입고 왔다. 대학 졸업의상을 입은 사람, 안전모를 쓰고온 건설업자 또 곤충을 채집을 하는 도구를 챙겨 온 사람들을 포함해 여러 코스튬을 장착하고 왔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대회는 무리 없이 잘 진행 될 것이라는 안도감이 생기기도 했다.

롤배너를 통한 소리없는 진행을 하는 퍼포먼스와 멍때리기체조라는 사전 행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대회가 시작이 되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진지했고, 우승을 하려는 목표보다는 즐기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들도 광장의 인조잔디 위에서

편하게 앉거나 누워서 대회를 관전했다. 관객도 선수도 모두 멍때리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잡히고 화창한 날씨는 그런 무드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90분간의 멍때리는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은 종료를 알리는 휘슬소리에 요가매트위에 드러눕거나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멍때리는게 쉽지 않았었다는 의미였을까.

유럽에서의 대회답게 수상자들도 다양했다. 1위와 스페셜상은 네덜란드 현지인에게 돌아갔고, 2위는 한국인 예술가 그리고 3위는 아프리카 출신의 여성에게 돌아갔다. 1위에게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모양의 황금색깔 트로피와 다음 대회 개최지에 초대권(항공권 및 숙박권)이 주어진다.

특히 초대권을 수여하는 이유는, 다음 우승자에게 전 대회 우승자가 직접 트로피를 전달해주는 ‘전통’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4회 대회 우승자는 10월에 개최 될 제 5회 국제 멍때리기 대회를 위해 대만 타이페이 초대권이 주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트로피를 주고, 항공권과 숙박권으로 다른 나라에 초대되어지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그 또한 이 대회가 가진 매력일 것이다.

멍때리기 대회는 바쁜 도심의 공간에서 개최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는 멍때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집단과 바쁜 사람들의 시각적 대조를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기 때문이다. 즉, 참가 선수들은 가장 요란한 장소에서 아이러니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대회장 밖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된다. 선수들은 대회 자체를 위해 열심히 멍때리는 경기를 치루지만 한편으로는 관객에게는 멍때리는 퍼포머로 보여지게 된다.

경기장 안과 밖에서 각자 다른 시선으로 이 대회를 보고 느낄 수 있다. 그 모든게 하나로 엮여 멍때리기 대회를 완성하는 것이다.

대회가 끝나고 참여했던 선수 중 몇몇은 이 대회가 가진 의미에 대해 크게 공감하고 격려하는 말을 건냈다.

굳이 긴 설명이 뭐가 필요할까. 멍때리기 대회는 그 이름 자체로 모든게 설명되어지고 있었다.

지난 호 <멍때리기 대회 세계로 나아가다> 다시 보기 ▶

글/ 웁쓰양
사진제공/ 웁쓰양컴퍼니

웁쓰양은 <도시놀이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도시에서 예술과 결합된 소비없이 놀이할 수 있는 방식을 실험하고 있다.




1. 일본の요코하마の감상기에서 적응기로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이번 호 부터는 인천아트플랫폼의 국제교류사업으로 일본의 요코하마 뱅크아트1926, 인도의 산스크리티재단과의 교류 사업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소식을 격호로 싣습니다.

가마쿠라(鎌倉)는 요코하마에서 전철로 20분 거리로 아주 가깝다. 절과 영화촬영지로 유명한 바닷가가 있어서 주말이면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사진ⓒ노기훈

일본 레지던시에서의 생활. 당신이 만약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일본 레지던시의 매력은 어디까지일까? 지금 일본 레지던시에 있는 나는 이 방대하고 활기찼던 경험들을 단지 글과 사진으로만 풀어내야만 하는 고욕이 눈앞에 있다. 벌써 2달이 거의 다 되어버린 10월 중순에 펜을 집어 들었다. 일본에 온 이후로 일기는 하루하루 고행처럼 계속해서 써왔지만 그걸 그대로 까내서나의 생활을 남들에게 일일이 간증하는 수치스러움과 차별을 두고자 여기 ‘지구별 통신’ 페이지에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은밀하게 조합된 실용적인 글쓰기를 하고자 한다. 여기 있었던 일들을 자랑하자니 벌써부터 흥분해서 어느정도 과잉상태이다.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첫 문장을 고심하다가 ‘눈앞에 있다’라는 형용으로 마무리 지었다. 보이는 것과 관련된 미사여구는 시각예술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신중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그런 경솔함 따위를 상쇄할 정도의 이미지가 이번 요코하마 뱅크아트1926 NYK레지던시(이하 뱅크아트레지던시)에 참여함으로 인해 생겨버렸다.

뱅크아트1926 NYK레지던시에서 바라본 요코하마. 인천으로 치자면 송도인 미나토미라이가 멀리보인다. 사진ⓒ노기훈

2017년 8월 15일에 시작된 일본 생활이 추석을 지나 11월을 바라본다. 소위 기억이라는 것이 온전하게 이미지로 치환될 수 있는 유통기한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대개 보존력은 비일상적인 경험의 수효에 따르고 이미지의 형태는 사진적이다) 일본 레지던시 생활은 당장 주머니 속 화첩처럼 꺼낼 볼 수 있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정말 사진집이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다. 과거를 평가하는 출제위원이 와서 문제지를 내주고 ‘2017년 당신은 뱅크아트레지던시에 있었다. 2017년 8월 15일부터 2017년 10월 10일까지의 하루하루를 사건 순으로 낱낱이 서술해 보라’고 하면 정답에 버금가는 오답은 간단히 적을 수 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겪은 생활은 현재진행형으로 쭉 이어져가고 있어서 기억으로 용해되기에는 너무도 생생한 현실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고 지금 눈앞에만있을 것 같다. 이번 글이 일본 레지던시 생활을 풀어내는 첫 장이다. 그러므로 좀 과장되게 들리겠지만 이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을 담아 일본 생활에 대한 감격을 기록해 나가고 싶다.

나는 이 글을 누군가가 아주 오랜 후에라도 봤을 때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작가가 작업을 실행해 나가는 과정은 인지와 수용 그리고 결과물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요코하마에 있는 뱅크아트가 아니더라도 일본에서 작업하고자 하는 누군가가 필히 당면할 문제가 있다면 이 ‘지구별 통신’이라는 기획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 일대는 쇼핑의 천국이다. 주말에는 다양한 공연과 행사가 열려 가족단위 관광객이나 젊은 커플들이 많이 찾는다. 사진ⓒ노기훈

나는 수치스럽지만 일본인과 한국인이 비슷하다고 한다면 외향적인 유사성을 제외하고는 전혀 다른 발달 단계라고 생각한다. 키가 자연스럽게 커진 성인과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다리뼈를 이어 붙인 애어른이 같은 속도로 달릴 수는 없다. 일본에게는 근대로 서서히 변화해 간 과정이 있어서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이야기 할만한 기억의 추이가 있다. 그게 나쁘든 좋든 공동의 기억은 한 국가를, 한 사람을 지탱해 주는 내적인 힘이 된다. 하지만 기억상실을 한 이후에 자기도 모르게 부잣집 도련님이 되어 있다면 개인적으로 봐서는 지극히 황송한 일일 테지만 남들 앞에서 좋은 자가용을 타고 즐기는 것이 유일한 낙일 뿐, 기억을 불러 올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1926~1991) 같은 건 애당초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른들과도 항상 사이가 좋지 못하다. 언젠가 다리가 아파와 병원에 가봤자 아버지를 원망하며 다시 떼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게 그 기간은 마치 프로포폴에 취해 기억나지 않는 시간이다.

하지만 국가를 바라보는 관점과 별개로 인천과 요코하마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나라를 비교할 때는 크게는 중세나 근대, 현대로의 이행과정 작게는 전체적인 환경에서 비롯되는 깨끗한 느낌이나 버스 줄서기를 할 때의 질서정연함과 같은 것들이 평가 되는데 도시를 비교하자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도시는 도시마다 천차만별이어서 개별적인 비교 단위로 삼는 것도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 된다.

그 많은 도시 중에 인천과 요코하마. 인천과 요코하마는 둘이서만 속삭이는 공통된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하인천을 걸어 다녔을 때 보았던 그 기시감과 다르지 않다. 인천에서 생활을 한 사람이면 뱅크아트를 가기 위해 간나이 지역에 오면 데자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축이 난장판이 돼버린다. 잃어버린 오래된 형을 찾아와 흔적을 뒤쫓는 기분으로 요코하마는 인천에게 있어 평행이론에 근접한 도시상을 만들어 낸다.

인천과 요코하마라는 두 도시는 카페에 앉아서 서로의 과거를 이야기 하며 맞장구 칠 수 있는 요소가 너무도 많아 몇 시간이고 수다를 즐길 수 있는 반죽이 잘 맞는 선후배다. 타지에서 인천에 도착하여 인천이라는 도시가 주는 압박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나로서는 요코하마 역시 도쿄와는 다른 힘이 있다는 것을 마치 인천을 경유하여 다다른 끝판 대장에 선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장소에서 커왔지만 같은 조건에서 잉태한 기억을 요코하마와 인천은 손위아래처럼 공유하고 있다.

요코하마 바샤미치 거리의 오래된 카페 앞에 있는 수반마우(水飯牛). 거리에 말과 소를 물 먹이던 곳이 남아있다. 바샤미치는 말 길을 뜻한다. 사진ⓒ노기훈

이렇게 수도의 변방에 위치한 두 도시가 악수를 하고 작가를 교환했다. 나는 2017년 8월 15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힘들 정도로 유달리 비슷한 두 지역에서 자신들이 선정한 작가를 보내는 것을 보면   단지 좋은 작업만을 해오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나는 유심히 고민을 해봤다. 어떤 교류라는 측면에서 나라 대 나라도 아니고 도시 대 도시도 아닌, 정말 개인으로서 이러한 새로운 환경에 부딪히며 내가 무언가를 대변하여 유익하게 작용하는 지점이 어디에 있을까. 불면의 나날들을 이기고 나서 나는 몇 가지 유사점에 주목했다. 최초의 개항지라는 점, 그로 인해 최대의 중국인 마을이 있다는 점, 야구에 환장하지만 정작 야구를 잘하지 못하는 팀을 가지고 있고 광역시 내부의 각 지역마다 분별된 입지차이가 있어 경제적으로나 인적 구성이나 편차가 심하다는 점. 도쿄와 서울의 변방이라는 이미지가 족쇄처럼 따라다닌다는 점. 생각나는 것들 몇 개만 추려보아도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비슷했다. 처음에는 몸이 이것들을 다 소화하지 못해서 이상한 곳에 엉겨 붙으며 도처에 널린 작업거리들을 물색하고 다닌다고 거의 방전상태에 빠졌다. 인천에서 본 20세기 초의 풍경들이 요코하마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는데 그것을 지키고 다듬는 방법에는 좀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미리 밝혔다시피 나에게 그것은 20세기 중반과 후반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는 여기에 서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남았다. 아마 그걸 알고 싶은 욕구가 작업을 추동하는 일부분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러한 면에서 인천을 경험한 작가에게는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의 원천이 그야말로 널리고 널려 있었기에 매일 약에 취해 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작업은 하이(high) 보다는 로우(low)에서 진척되는 법. 정신을 가다듬고 매일 끄적거려 내려간 작업리스트를 분별하고 여과하니 남은 건 역시나 처음에 기획하였던 ‘일본 1호선(가제)’이었다.

신주쿠 공원은 넓이 58만3,000제곱미터, 주변 둘레 3.5킬로미터에 이르는 신주쿠 일대가장 큰 공원이다.  뱅크아트 스튜디오와 인접한 미나토미라이선 바샤미치역에서 전철을 타면 신주쿠까지 환승 없이 50분만에 도착한다.  급행을 타면 40분도 안되어 도착한다. 인천하고 참 비슷하지 않은가? 사진ⓒ노기훈

인천역에서 노량진역까지의 거리가 32.94km이니까 요코하마 사쿠라키초역(桜木町駅)에서 도쿄 신바시역(新橋駅)까지 거리는 29.40km 정도로 엇비슷했다. 중간에 부천시와 가와사키시가 동일하게 전통과 근대로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점도 비슷했다. 뱅크아트의 실무를 맡아보는 츠자와 상의 도움으로 1호선에 관한 책상 앞 리서치를 완료하고 직접 경험해 보기 위해 거의 망가지다시피 한 크림색 자전거를 뱅크아트로부터 빌렸다.
안장은 조절이 안되고 타이어도 힘이 빠져 있었지만 뭔가 큰 기대가 되었다. 이건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책상 앞에 붙여져 있던 작업리스트들이나 레퍼런스를 모두 떼어내고 ‘저는 지금 작업기간입니다’라는 문장만 붙여 놓았다. 요코하마와 인천에서 발견했던 유사성을 한국 1호선과 일본 1호선이라는 직선적 동선에서도 발견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시각에서 비롯된 유사성들이 물론 누구에게나 동일한 시각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지만 도시라는 생태가 비슷한 경로를 통해 지금의 요코하마와 인천으로 변모해 왔듯이, 도시의 단위가 아니더라도 철도라는 긴 여정에서 발견 하게 되는 역사적인 기시감과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이미 신바시역에서 첫 기차가 출발하기 기다리는 1872년 10월 14일 어느 누군가가 느꼈을 시공간의 압축감을 그대로 이어받으며 저만치 노량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사진/ 노기훈 작가

 

노기훈은 2017년 인천아트플랫폼-뱅크아트 스튜디오의 국제교환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8월부터 11월까지 일본에 체류한다. 사진카메라와 영상카메라로 주로 찍어 내는 활동에 관심이 많으며 사진과 기행문을 동시에 써서 글로 찍기도 한다. 인천역에서 출발하여 노량진역까지 최초의 철도 경인선을 따라서 사진 찍었으며, 지금은 일본 1호선인 사쿠라키초역에서 신바시역까지 걷고 있다. 




예쁘지요 지긋지긋하게

대문짝만한 열쇠

200년도 더 된 집에서 살았다고? 아이고, 깜짝 놀란 나는 엘리자에게 되물었다.

“응, 잘 모르겠지만 1800년대 중반쯤…? 아빠의 아빠의 아빠가 샀을려나? ”

200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그녀는 무심하게 말한다. 200년… 우리 할머니가 여든다섯이니 할머니가 살아온 시간보다 두 배 이상 오래됐다. 30년마다 재건축 한다고 들썩거리는 한국 아파트를 얘기를 하면 그녀는 뭐라 할까?
엘리자와 나는 런던에서 학교를 같이 다녔다. 틈만 나면 그녀는 이탈리아의 집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을 하곤 했다.

“우리집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곳이야. 나중에 승연을 꼭 데려가고 싶어.”

그런데 문제가 있다. 엘리자의 고향은 너무 예쁜데, 엘리자 표현에 따르면,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미들오브 노웨어(Middle of Nowhere)’다. 정말? 그럴 수가 있나?

엘리자의 집자랑을 2011년부터 장장 6년 넘게 듣다 얼마전 드디어 그녀의 집에 가게 됐다.
밀라노 공항에 내려 엘리자 집까지 가는 길은 차로 한 시간 거리다. 간질간질한 햇살을 맞으며 그녀 집으로 향한다. 차는 어느새 산길로 들어섰다. 길 밑으로 거대한 호수가 내려다 보인다. 사실 엘리자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영락없이 바다인줄 알았다. 엄청나게 큰 호수다. 마조레 호수 (Lago Maggiore)다. 이탈리아 말로 ‘커다란 호수’란 뜻이다. 마조레 호수를 사이에 두고 북쪽은 스위스, 남쪽은 이탈리아다.

“우리 동네사람들은 아침이면 북쪽 스위스로 일하러 갔다가 오후가 되면 이탈리아 집으로 돌아와.”

엘리자 말로는, 스위스 사람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을 싫어한다. 스위스에서 월급을 받아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한 이탈리아에서 생활하니 배라도 아픈건가? 뭐, 두 나라간에 복잡한 신경전은 그들 사정이고, 나로선  매일 호수를 건너 스위스로 출근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해안도로 아닌 ‘호수도로’를 따라 산으로 올라가니 아기자기한 집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집 앞에 널린 빨래를 보니 새삼 이탈리아에 왔다는 게 실감난다. 런던의 색이 회색이나 벽돌색이고, 프랑스 낭트의 색이 하얀색 같은 무채색이라면 이곳은 노란색이거나 주황색이다.
엘리자 집은 구릉 위에 자리잡았다.

마을로 들어선 후에도 한참을 더 올라갔다. 노란색 삼층집이다. 햇빛에 바랜 노란색이 정겹다. 대문에는 ‘마니니(magnini)’라 쓰인 문패가 걸렸다. 고풍스러운 중세를 떠올리게 하는 글자체다. 집 앞에 도착은 했는데 웬걸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게 쉽지 않다

일단 문을 걸어 잠근 묵직한 철 막대기를 옆으로 밀어내야 했다. 다음에는 키덮개를 올리고
비밀번호를 누르는 게 아니라, 손바닥만한 열쇠를 큼직한 열쇠구멍에 넣는다. 이렇게 말하면 간단한 듯 보이지만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단 손으로 잘라 만든 듯한 열쇠는 투박하다. 한 마디로 열쇠구멍과 잘 안맞는다. 박물관에서나 보던 골동품이라 해도 이상할게 없다. 잘 돌아가지조차 않는 열쇠로 이리저리 낑낑거리며 문을 여는 엘리자를 보니 마치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햇살이 너무 뜨겁다. 문은 계속 안열리고 땀은 계속 흐른다.
번호키를 누르고 바로 집안으로 들어가는게 익숙한 나로선 이 모든 상황이 어색하고 신기하다.

“아….이 열쇠가 아닌 것 같아.”

엘리자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고, 엘리자를 바라보는 나는 엉뚱한 공상에 빠진다. 그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데 이 정도 노력은 해야겠지.
열쇠로 문을 열 수 없는 엘리자는 이내 문을 이리저리 흔들어댄다. 문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엘리자는 다시 열쇠를 구멍에 끼워넣는다. 끼기긱… 이리도 돌려보고 저리도 돌려본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삐거걱… 드디어 열쇠가 돌아갔다. 드디어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이탈리아 시골집의 요란한 환영식이다.

 

다른 시간

세상에나, 밖은 한낮인데 집안은 캄캄하다. 쿵쾅쿵쾅, 엘리자가 계단을 올라가 창문을 여니 환한 햇살이 집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건 또 뭐람? 환한 햇살을 받은 집안은 따뜻한 고향집이 아니라 왠지 스산하다. 집을 너무 오래 비웠나? 어쩌면 우리 때문에 집이 방금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부엌, 방, 거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신기하다. 방문은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잠긴다. 그럼 딱 갇히기 십상 아닌가? 집에서 누굴 가둬야만 했던 일이라도 있었나? 엄마가 외출할때 아이를 방에 두고 나가야 했나? 문이 왜 이래? 엘리자에게 묻자 그녀는 시큰둥하다.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그녀도 왜 안팎에서 잠기는지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한다. 바닥은 돌바닥이다. 바닥 역시 오래되고 낡아 반질반질하다. 벽의 칠은 벗겨졌다. 도대체 이집에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를 놀래킨 건 방문과 돌바닥뿐만이 아니다. 윗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방, 부엌과 거실 곳곳에는 인물 사진이 가득하다. 딱 미술관에 걸린 초상화 같은 포즈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게 아니라 노려보는 것 같다.
집에 무슨 초상화가 이렇게 많담? 집안 곳곳에서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 갑자기 몸이 자꾸 움츠러들었다. 이 사람들이 다 누구야? 엘리자에게 물었다.

“아하하. 웃기지. 나도 몰라. 아마 여기 살았던 친척이겠지. 가끔 보면서 나도 놀래. ”

엘리자도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웃는다. 수녀복을 입은 여자, 드레스와 정장을 입은 커플. 빛바랜 아기 얼굴…
이들은 웃고 있는데 나는 뭔가 스산한 기분이다. 온 집안이 모르는 사람들 사진으로 가득하다니… 누군지 기억도 못하는 사람들 사진, 그러니까 초상화 같은 사진을 걸어 놓은 것도 신기한데 이걸 지금까지 치우지 않고 내버려둔 건 더 신기하다. 부엌에 가니 더 놀랍다. 할아버지의 아버지쯤이 쓰지 않았을까 싶은 숫가락, 나이프까지 모든게 다 그대로 있다. 엘리자는 부엌에서 ‘달걀 스탠드’를 보더니, 어이없다는 말한다.

“아이고, 이게 아직도 있네!” 

난 가족들이 일부러 고히 물건을 간직해온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모든 물건이 옛날 그대로 다 남아있는 모습이 과거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이 돌아와 다시 살기 시작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것 같다. 난 마치 박물관에 온 마냥 사진을 이것저것 찍었다.

“승연, 여기로 내려와봐!”

갑자기 엘리자가  뒤뜰에서 나를 불렀다. 빛바랜 노란색 벽에 달린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콸 쏟아진다.

 “마셔봐. 산에서 흘러온 물이야”

혹 배앓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 머뭇거리는데 엘리자는 괜찮다며 자꾸 권한다. 서울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나는 산에서 흘러온 물을 먹는 게 낯설었다. 

한 모금 샘물을 넘겨본다. 얼음물 같다. 수도꼭지 양쪽엔 백년도 더 되보이는 국자가 걸렸다. 사진 찍기엔 예쁘지만 좀 쓸쓸하다. 녹이 슨 채 같은 자리에 걸려있던 국자를 보니 좀 처량하다. 좀 전까진 오래된 물건이 여지껏 남아있는게 신기하고 부러웠는데 지금은 그냥 버려진듯 그 자리에 남아 있는게 아닌가 싶어 좀 씁쓸하다.
밤이 되니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린다. 몇년이 됬을지도 모르는 커다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내가 도대체 어디에 와있나 싶다. 엊그제까지는 베를린에 있었는데 어느새 비행기를 타고 밀라노에 왔다. 그리고 차를 타고 한시간, 이름 모를 작은 마을에 와 200여년 된 집, 그리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 사진이 걸린 방에 덩그러니 누웠다. 낮에는 집안의 가구와 식기를 보며 시간이 멈춘 곳 같았는데, 이렇게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다행이다. 여기서도 시간이 흐르긴 흐르고 있다.

 

노 비지니스 월드

런던에서 엘리자가 수없이 말한 그대로다. 참 예쁜 동네다. 집앞 골목에 피어난 꽃, 오래된 집, 넓은 호수, 저 멀리 보이는 산에서부터 심지어 마당의 작은 벌레까지 너무 예쁘다. 집 바로 앞에 호수가 있고 이곳에선 언제든지 사람들에게 부대끼지 않고 수영을 한다. 방에서 창문을 열면 하늘, 호수, 산이 넘실거린다. 집에는 방이 열 개쯤 있다. 방마다 고가구가 가득하다. 집이 너무 오래되어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여기저기 수리를 해야하는것만 빼면  참 고풍스럽다. 한국 같으면 어땠을까? 200여년간 집을 팔지 않고 계속 자식들이 물려받아 관리하는게 가능했을까? 집을 개조해 다르게 쓰거나, 팔거나, 아니면 게스트하우스 같은 식으로 사용하진 않았을까? 여기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집을 다른 방식으로 쓸 수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집을 처음 산 엘리자 아빠의 아빠의 아빠가 쓰던 물건이 그대로 남아있고 그들 사진까지 그대로 걸려있다. 그렇게 20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낡은 벽을 살피던 엘리자가 말한다. 

“벽이 많이 낡았지? 우리 삼촌이 내년에 다시 칠한다고 했어. 벽이 바뀌면 다시 한번 놀러와”

그런데 왜 이게 일년식이나 걸린담? 한국같으면 하루이틀이면 끝날텐데…

“어휴, 아니야 아니야! 벽을 다시 칠하는게 얼마나 복잡한데…벽의 문양 있잖아? 삼촌이 직접 만들었어. 모든 재료를 여기까지 가져 오고, 또 칠해야 하잖아. 어휴, 생각만해도 힘드네… 아마 내년 여름에 또 고치지 않을까 싶은데… 내년엔 뭐 다 끝나겠지?” 

휴우, 그렇구나. 모든게 이런식이다. 이탈리아 시골에선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모든게 천천히 이루어진다. 불편하게 살고 느리게 산다. 와이파이가 없으면 핸드폰 인터넷을 쓰면 되고, 난방이 안되면 겨울엔 사용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한다. 냉장고가 없으면 차가운 샘물에 과일을 담가둔다. 먹을만큼 장을 봐서 그때그때 요리하면 된다고 말한다. 나는 답답하다. 동네엔 수퍼 한 개, 미용실 한 개, 그리고 동네 카페 한 개가 전부다. 다른 가게가 하나둘씩 더 생길법도 한데 사람들은 필요성을 못 느낀다. 나는 잘 모르겠다. 200년 된 집에서 인터넷, 냉장고 없이 샘물을 떠다 먹는 생활. 집안에는 오랜 친척들이 쓴 물건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들은 더이상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한편 여름마다 이곳에 와 집을 고치고 사는 삶이 낭만적이면서 여유로와 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왜 엘리자가 밀라노에서 대학을 졸업 후 왜 그렇게 런던으로 오고 싶어했는지, 런던에서 살고 싶어 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녀에게 물었다. 엘리자, 근데 넌 여기서 살고 싶진 않아?

“아니. 여기서 살 순 없지. 내가 여기서 뭘 하겠어. 하하하. 정말 눈물 날 정도로 난 우리집이 좋아. 아름다운 곳이야. 그치만 여기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 내가 할일이 아무것도 없어.”

미스테리다. 그렇게 좋은데 여기서 왜 일을 만들어 보지 않을까? 요즘 한국에서 유행이 되어버린 마을 살리기 같은 공동체 사업이 여기선 필요가 없나? 사람들은 동네슈퍼에서 장을 보고 집을 가꾸고 집앞 호수에서 수영을 하며 오래전부터 살아온 방식 그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렇게 몇백년을 묵묵히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겠지… 변하지 않아도 즐거워 보인다.
의심도 든다. 정말인가? 내가 본게 전부일까? 궁금한게 아직 많다. 내년에 다시 한번 와야겠다.

 

글, 사진 / 이승연

클릿슈즈를 신고 북악스카이를 달리는 꿈을 꾸는 여자.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개인활동 외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인천문화재단 국제교류프로그램인 베를린 zk/u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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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환상

매일 만지고 싶어

아기 코끼리가 알록달록하다. 새하얀 큐브에 앉아 방실방실 웃으며 나를 맞는다. 마치 자기를 봐달라고 하는 것 같다. 아기 코끼리 옆에는 가재가 물구나무를 서고, 바다 코끼리는 겹겹이 쌓인 의자사이에 끼어있다. 한 바탕 소동이라도 벌어진 것 같다.
아기 코끼리, 가재, 바다 코끼리 모두 풍선이다. 바람을 꽉꽉 채운 모습이 답답하다. 숨도 쉬지 못할만큼 빵빵하다. 바늘로 콕 찔러 줄까? 주변을 둘러보니 제법 사람이 많다. 사람들 시선을 피해 발소리를 내지 않고 살금 살금 아기 코끼리에게 다가갔다. 옷깃에 단 브로치를 떼어내 옷핀 바늘을 빼내고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

콕!

옷핀 끝이 아기코끼리 몸에 닿자 스으으윽~! 바람이 빠지며 아기 코끼리는 바닥에 축 늘어져버린다. 아기 코끼리 다음은 가재다. 콕! 힘들게 물구나무를 서던 가재는 바닥에 편히 눕는다. 바다 코끼리도 콕! 바다 코끼리도 의자 사이에서 빠져나와 몸을 축 늘어트리고 숨을 돌린다. 이제 모두 편안해졌다.  이번엔 내 몸을 한 번 찔러볼까?  바늘을 손끝에 가져간다. 콕! 손가락이 따금하며 내 몸에서도 스으으윽~! 바람이 빠져나간다. 어어어~! 무슨일이지 생각할 틈도 없이 나도 그들 옆애 납작하게 누웠다. 몸은 볼품없이 축 늘어졌는데 마음은 왠지 편안하다. 바람을 꽉 채우고 예쁘게 안보여도 괜찮다. 더 이상 묘기를 부리고 살지 않아도 괜찮다. 만날 뗑그렁하게 영원히 여기 머물고 싶다고는생각이 들던 그 순간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려온다. 끼이익,  누군가 문을 화악 밀며 들어오자 순식간에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모두 빵빵하던 원래 모습 그대로. 

나는 다시 빵빵한 아기 코끼리 앞에 서 있다. 좀전과 똑같다. 아기 코끼리 옆에선 가재가 물구나무를 서고, 바다 코끼리는 겹겹이 쌓인 의자사이에 끼어있다. 모두 아이들 풍선처럼 보이지만 풍선이 아니다. 나도 들은 바는 있어 진작 알고는 있었다. 코끼리나 가재가 차갑고 무거운 철 조각이나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간 풍선 같다. 눈앞에서 바라보면서도 이게 철 조각이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이게… 이게 철이라고? 진짜?
한참 코끼리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마술사가 기다란 풍선을 이리저리 접을 때 나는 끽끽거리는 소리, 풍선 바람이 스으으윽~! 빠지는 소리마저 들려온다.
아… 살짝만 만져보면 안될까? 눈 깜짝할 동안이면 되는데.. 1초만, 아니 0.5초, 아니 0.1초면 되는데.. 정말 살짝, 손끝만 살짝 데보고 싶은데..아.. 정말이지 살짝만…
아.. 만지고 싶은 충동을 멈추는 게 너무 힘들다. 내 몸은 점점 더 아기 코끼리에 가까워지고 나를 감시하는 눈길은 점점 더 늘어난다. 슬쩍 손을 움직이기만 해도 옆에 서 있던 경비원이 내게 성큼성큼 다가올 기세다.

‘도대체 몇명이 지키는거야?  흥, 난 아무 짓도 않았는데 다들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구! 잠깐! 이거 혹시 진짜 풍선 아냐?  그래서 이렇게 철통 같은 경비를 하는 거 아냐? 의심은 점점 커져간다. 에라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아기코끼리를  안고 있다. 믿을 수가 없다.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삑! 삑! 삑! 요란한 경보음이 터져 나오고 경비원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온다. 

아, 어디로 가지? 일단 작업실로 가져가야겠다. 그런데 작업실 어디에 놓지? 반지하 작업실은 너무 좁은데…

오만 가지 생각을 하며 경비원들을 피해 도망치는데 너무 무겁다. 풍선이 왜 이렇게 무거워!? 팔에 힘이 점점 빠진다. 풍선같던 아기 코끼리가 너무 무겁다. 정말 무겁다. 아이고, 망했다… 작업실에 둘 데도 없는데…아..놓치면 안되는데…근데 너무 무거워…어어어어어… 팔에 힘이 풀리며 아기 코끼리를 놓쳐버렸다. 땡가당! 나는 땡가당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렸다. 여기가 어디지? 갤러리다. 그것도 런던에 있는 갤러리다. 런던의 ‘뉴폿 스트릿 갤러리(New Port Street Gallery)’다. 나는 여기서 자꾸 공연한 환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풍선 집착남

뉴폿 스트릿 갤러리에선 제프쿤스(Jeff Koons)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컬렉션 3,000여점을 소장한 뉴폿 스트릿 갤러리는 재작년 문을 연 ‘신상 갤러리’인데 건물 외관이 뾰족한 심슨머리 같다.

제프쿤스.
철로 풍선같은 작품을 만들고, 세계에서 제일 비싸다고 할만한 가격으로 작품을 팔아치우는 예술가 또는 사업가다. 나는 그에 관해 별 관심은 없었다. 사실 여기 오게 된 것도 제프쿤스보다 데미안 허스트가 새로 오픈한 갤러리가 궁금했던 이유가 크다. 그런데 막상 그의 작품을 보다 보니 갑작스레 ‘갖고 싶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다. 이유는 정말 단순하다. 매일 만지고 싶다. 그냥 계속 만지고 싶다. 이게 전부다. 매일 쓰다듬고 만지고 싶다. 가끔은 지인들을 초대해, 이게 뭐 같아? 철로 만들었을까? 풍선 같지 않아? 철일까, 풍선일까? 키득키득 웃으며 장난을 걸고 싶다. 물론 그들은 아기 코끼리를 절대 만질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안된다. 오로지 나만 만질 것이다.
갤러리에서 작품을 보다 이걸 당장 집에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처음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이렇게 단순할줄이야. 명색이 작가라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거나 심오하게 끌리거나 하는 식의 이유가 있어야 작품을 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단지 만지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갖고 싶다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안될 이유는 뭐람? 한 가지 이유면 충분하지 않나?

그런데 가만 보니 제프쿤스는 ‘풍선집착남’ 이다. 그는 거의 모든 작품을 풍선처럼 만들었다.  풍선이지만 풍선이 아니다. 바람이 빠지며 사라져 버리는게 자연스러운 동물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제프쿤스씨, 이들이 얼마나 답답할지 상상해 봤어요? 이래도 되는 거예요?

“왜 안되나요? 그들은 바람을 가득 채운채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을 가졌어요. 사람들은 그들의 완벽한 모습을 좋아하는거구요. 나는 사라지지 않을 환상을 파는 겁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바람이 빠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제프쿤스는 시간이 흐르면 사라져 버리고 말 순간을 현재에 영원히 고정시켰다. 보기엔 가볍지만 실제론 매우 무겁겠지?이유야 어쨌든 제프쿤스의 작품은 이게 진짜 풍선인지 아닌지 헷갈릴만큼 황홀한 환상 속에 빠뜨린다. 컬러풀하게 만든 인형같은 풍선은 어릴적 추억을 몽실몽실 떠오르게 하고, 작은 흠하나 잡을 곳이 없 이 완벽하다. 질투 때문에 신경질이 날 정도다.
제프쿤스는 왜 빵빵한 풍선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을까? 풍선 바람이 빠지는 건 자연스러운데 말이다. 숨이 들이키고 내쉬는 게 삶이라면, 그는 풍선을 불 때마다 삶과 죽음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자 재기발랄하던 아기 코끼리, 바다 코끼리, 가재 등이 순간 안쓰럽다.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인간의 욕심은 이들을 옴싹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반짝거리고 빛나지만 실재는 다르다. 다시 아기 코끼리를 바라본다. 반짝 반짝 빛나는 아기 코끼리에 반사된 내 모습이 동글동글 굴곡진다. 이 또한 실제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다. 그 때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미술관의 샤먼

마치 교회 성가대가 부르는 노래같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천천히 걷고 있다. 노래소리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 나도 눈을 감고 이들을 따라 원을 그리며 걷는다. 시냇가를 따라 걷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산 속으로 간다, 폭포수를 지나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온몸에 물방울이 떨어진다. 발랄한 아이 목소리, 수줍지만 강한 목소리, 쓸쓸한 목소리, 슬프지만 담담한 목소리 등 온갖 소리가 들려온다. 이들의 목소리를 따라 행복했던 기억, 괴로웠던 일, 슬펐던 감정이 떠오른다. 그 한 가운데 한 여인이 서있다. 하얀색 긴 머리를 늘어뜨린 샤먼 같다. 나는 그녀를 따라 걸으며 꿈을 꾼다.
나를 한동안 이런 꿈에 빠지게 한건 케나다 작가 자넷 카디프(Janet Cardiff))의 사운드 설치 작업이다.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터빈홀(Turbine Hall)에 원을 그리듯 설치한 수십여개의 스피커에선 각각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온갖 목소리가 내 몸을 감싸고 돈다. 온전히 나를 위해 들려주는 소리 같다. 마치 노래처럼. 갑자기 울컥했다. 오늘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피곤한데, 오늘밤 신세를 지려한 친구집에는 갈 수 없다. 나 혼자 외톨이가 된 것 같았을 때 만난 이가 자넷 카디프다. 미술관으로 나를 위로해줄 샤먼을 보낸 여자다.

나는 런던에서 제프쿤스와 자넷 카디프를 만나 이런저런 환상에 빠져들었다. 나 또한 이들처럼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황홀한 환상을 건네줄 순 없을까? 아직 자신은 없다. 다만 내가 계속 작품을 만들어 간다면 언젠가는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 작품을 보고 누군가 위로를 받게 된다면, 잠시나마 황홀한 환상에 빠져든다면 나는 행복할 것 같다. 설사 그 환상이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환상은 현실과 부딪치며 끊임없이 고통과 아픔을 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환상 없이 살 순 없지 않은가?

 

글, 사진 / 이승연

클릿슈즈를 신고 북악스카이를 달리는 꿈을 꾸는 여자. 나는 사라져도 내 이야기가 이야기로 남는다면? 나는 이런 상상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서울 및 런던, 독일에서 활동 중이며 개인활동 외 영국 작가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와 함께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 라는 이름의 아티스트 듀오로도 활동하고 있다. 인천문화재단 국제교류프로그램인 베를린 zk/u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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