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인천의 풍경들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우리 동네’ 혹은 ‘인천’라는 말에 첫 번째로 떠오르는 풍경은 무엇인가요. ‘우리 동네’는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살고 계시는 각자의 공간들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천’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공간은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 어쩌면 두 단어에서 같은 공간을 떠올리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다른 공간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오늘은 인천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풍경’이라는 단어에서 생각나는 이미지는 보통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거대하고 평범하지 않은 독특한 자연, 이를테면 깎아지른 듯한 바위 산이나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깊은 숲 속에서 쏟아지는 폭포, 끝을 알 수 없는 산의 이어짐이나 초원, 또는 운해 같은 것들일 것입니다. 큰 검색사이트에서 ‘풍경’ 혹은 ‘landscape’로 검색을 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풍경’이 어떤 느낌의 이미지인지 조금은 감이 오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겪지 못하는, 때로는 상상보다 더 비현실적인 것 같은, 거대하고 신비로워 압도되는 공간들을 ‘풍경’ 이라는 말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 전, 위대한 철학자 칸트는 무수한 자연 중에 어떤 것이 ‘풍경’이 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중요한 단서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칸트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개념을 구분했습니다. ‘아름다움’은 “즉각적으로 감각에 쾌미를 가져다 주는” 것이라면, 숭고함은 “절대적으로 거대한 것”, “모든 비교를 넘어서서 거대한 것”, “그것과 비교하면 나머지는 모두 작은 것”, “감각을 초월하여 있는 것” 등으로 정의합니다. 이것에 덧붙여 숭고는 “자연의 사물에서는 찾아질 수 없는 것이며, 단지 우리의 관념에서만 찾아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회학자 김홍중 교수는 이것을 이렇게 풀이해 줍니다. “자연 자체가 숭고한 것이 아니라, …(중략)… 주체의 세계 구성적 차원과 결합하여 인간화 될 때 숭고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략)… 풍경은 문화에 의해 번역된 자연, 인간에 의해 재현된 숭고한 자연이라는 위상을 획득한다.” 이로써 ‘풍경’은 어떤 놀라운 형태의 자연이라면 가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문화적 토대 속에서 우리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자연의 어떤 부분에서 숭고함을 끌어냈을 때, 그 장면은 비로소 풍경으로 주어집니다.

20세기 독일의 미술사학자 마르틴 바른케는 ‘정치적 풍경’ 이라는 책을 통해서 고전적인 풍경의 개념을 더 넓혀냅니다. 바른케는 자연이 풍경이 되는 것을 넘어서서, 거대한 기념물과 건축물, 성채, 정원과 같이 인간이, 권력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제시하고, 태양과 같은 자연물을 권력의 상징으로 치환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지는 풍경이 정치적인 선택의 결과물임을 보여줍니다. 이제 어떤 사회가 공유하는 풍경은 그 사회의 권력이 선택해서 보여주는 풍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19세기 후반 영국은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도시 공간이 급격히 피폐해지면서, 대조적인 농촌의 전원을 이상적인 영국의 모습으로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남부 잉글랜드의 농촌으로 표상되는 영국적인 전원은 단순히 농촌 공간을 넘어서 ‘영원한 지속의 공간, 계급 없는 사회, 공동체, 조화로움’ 등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이러한 목가적 전원을 그려온 컨스터블과 같은 화가는 런던의 미술계를 통해서 국민 화가로 치켜세워집니다. 20세기 전반기를 휩쓴 두 번의 세계대전 속에서 농촌 풍경은 영국의 이상향이자, 지켜야 하는 조국의 이미지가 됩니다. 1차 대전에서 많은 영국의 군인들은 그들이 지킨 조국을 “시냇물이 흐르고 버드나무가 드리운 녹색 초원”으로 묘사합니다. 그들이 리버풀의 공장지대에서 자랐건, 스코틀랜드의 거친 산악지대가 고향이던, 그들이 지키는 영국은 목가적인 농촌 풍경으로 이해된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공업국가가 된 영국이 스스로의 풍경을 이렇게 정의하고 받아들인 것은 영국 사회가 스스로 어떤 한 자연을 풍경으로 선택해서 받아들였음을 보여줍니다.

비슷한 시기의 미국에서도 ‘미국의 풍경’을 만들어 냅니다. 미국은 19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기나긴 서부 개척의 시기를 걸치면서 그들의 모체였던 유럽과 다른 아이덴티티를 찾아냅니다. 그것은 바로 ‘프런티어’입니다. 아직 개척하지 못한 경계지역을 뜻했던 이 단어는 서부의 황량한 땅을 지속적으로 프런티어로 바꾸고, 다시 앞으로 전진하며 정착지로 바꾸어 온 미국인들의 진보와 변화, 그것에 대한 적응의 역사를 상징하는 단어로 변모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럽의 다양한 국가에서 바다를 건너온 모두 다른 배경의 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아이덴티티가 됩니다. 프런티어는 유럽과 다른 미국의 특성을 만들었고 미국인에게는 영국 출신, 이탈리아 출신, 아일랜드 출신 대신에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미국인들도 프런티어를 이미지로 재현하며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 냅니다. 그들이 찾아낸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정착지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할 황량한 미개척의 땅입니다.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자연의 이미지는 미국이, 미국인이 더 나아가야할 지평이 남아있음을 웅변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요세미티, 그랜드 캐년과 같은 자연이 사진작품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사진작가 안셀 아담스의 작품은 컨스터블의 그림과는 달리 생명이 없는 불모지를 압도적으로 보여줍니다. 비어있는 불모지가 여전히 남아있고, 미국인의 프런티어 정신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죠. 이러한 풍경의 이미지 속에서 서부에 존재하던 인디언의 존재, 인디언을 핍박한 미국인의 역사는 철저히 외면됩니다. 사진 속 프런티어의 풍경은 장엄하고 성스러운, 미국인들이 다함께 나아가야 하는 지향점이 됩니다.

오늘의 사회는 앞에서의 영국과 미국의 과거보다 훨씬 다원적이고, 국가나 도시적 차원에서 공유되는 풍경을 생각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천이 우리에게 꾸준히 보여주고, 내면화 시키고 싶은 인천의 풍경은 분명히 어느정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도시 마케팅이 강조되면서, 우리나라 모든 도시들이 저마다 각자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인천도 “All ways Incheon”이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올해부터 사용하고 있죠. 이 슬로건을 이용한 영상 홍보물들을 보면,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천의 여러 곳들을 담아서 홍보를 하는 듯 하지만, 대부분의 동영상에서 많은 시간을 송도국제도시의 모습을 강조하는데 할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센트럴파크를 중심으로 하는 공간을 집중적으로 제시합니다. 다양한 공간을 비교적 균형있게 보여주는 영상에서도 마지막 슬로건과 함께 제시되는 풍경은 송도국제도시입니다.

인천의 위상은 오랫동안 서울과 연결되어 정의되어 왔습니다. 세계최고의 공항이라는 인천국제공항마저도 수도권의 관문, 나아가 대한민국의 관문이라는 상징성이 워낙 커서, 온전히 인천의 정체성으로 소유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송도국제도시는 인천이 서울에 종속된 정체성, 수도권의 일부분으로서의 정체성을 넘어서 세계적인 도시의 이미지를 갖게 하는 첫 번째이자 가장 큰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천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풍경이 송도국제도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시각적으로 독특한 센트럴파크 주변에 집중함으로써 우리에게 인천에서의 삶이나 여행의 경험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래적이고, 그래서 독특하고 새로울 것이라고, 그래서 다른 나라의 도시들과 비견될 만한 도시라고 강조합니다. 인천의 미래지향적 풍경에 대한 집착은 한때 인천의 브랜드 로고에 페이퍼 플랜에 불과했던 송도 인천타워를 사용할 만큼 적극적이었습니다. 인천타워는 끝내 삽 한 번 뜨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말입니다.

인천의 도시계획은 최근 약간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전히 경제자유구역의 개발에 매진하면서도, 과거에는 철저히 재개발의 대상이었던 구도심을 역사문화지구 등을 비롯해서 기존의 도심의 작은 공간들을 재발견하고, 도시재생을 통해서 도시공간을 유지·보수하는 국가적인 흐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전세계로 열린 도시, 가장 미래적인 도시로서의 인천의 풍경이 조금은 바뀌거나 다양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인천이 보여주는 풍경들을 통해서, 인천이 갖고 싶은 정체성은 무엇인지, 인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길 바라는 정체성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글, 사진제공/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박지향(2006).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도서출판 기파랑
마르틴 바른케. 노성두 역(1997). 정치적 풍경. 일빛
김홍중(2005). 문화사회학과 풍경의 문제. 사회와 이론. 6
주은우(2003). 19~20세기 전환기 자연 풍경과 미국의 국가 정체성. 사회와 역사. 63
Youtube ‘라이브소셜방송온통인천’(바로가기▶)




작아지는 도시를 준비하며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6년 인천의 인구가 300만을 돌파했을 때, 다양한 언론 매체들은 이 사실을 매우 비중 있게 다뤘습니다. 또 인천광역시는 대대적으로 여러 자축 행사들을 진행했습니다. 300만 인구의 인천을 홍보하는 광고도 이곳저곳에 많이 게재되어서, TV에서 광고를 보기도 하고, 서울 지하철에서도 역내, 혹은 차내 광고를 꽤 자주 접했던 기억이 납니다.

광역자치단체의 인구가 300만 명에 도달하는 것이 분명 처음인 것도 아닙니다. 바로 옆에 천만 인구의 서울특별시와 경기도가 있고,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의 인구 또한 300만 명을 상회합니다. 경기도와 경상남도의 경우는 하나의 도시로 보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인구 300만의 도시가 매우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천은 유독 300만 명 돌파를 크게 기념했을까요.

모든 분들이 아시겠지만, 인천의 인구 300만 명 돌파는 고도 성장 시대의 종말과 출산율 감소로 인해, 많은 지방 도시들이 인구의 감소로 인해 때로는 도시의 소멸을 걱정하고, 대도시는 지속적인 교외 확장으로 도심의 쇠퇴를 고민하는 상황에서 이뤄낸 성과이기에 더욱 큰 의미가 있습니다.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우리나라의 인구 5만 이상의 도시 84개 중에 31개의 도시가 인구가 감소했습니다. 이 중 비수도권의 도시는 56개인데, 절반이 넘는 29개의 도시가 인구가 감소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역시 출범 당시 약 230만 명의 인구가 살던 인천광역시가 오히려 인구가 크게 늘었다는 것은 도시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장 역동적이고 발전 가능성이 높은 도시임을 증명하는 지표인 것이고, 인천의 자축은 단순히 어떤 숫자에 대한 자축이 아닌, 그 안에 담겨진 성장의 잠재력에 대한 축하인 것입니다. 오래 전, 르 코르뷔제가 거대도시를 계획하면서 사용했던 상징적인 숫자였던 300만 명은 이렇게 인천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인천은 또 다른 미래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2015년 11월 발표된 『2030년 도시기본계획 보고서』에는 지금까지 익숙하지 않던 낯선 단어가 하나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축소도시(Shrinking city)’입니다. 이 보고서에서는 도시 개발 전략을 도시재생 중심으로 전환해야 하는 배경으로 도시확산에서 축소도시로의 전환을 꼽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성장하고, 확장해오는 것에 익숙한 우리의 도시에서 ‘축소도시’는 무척 역설적인 단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서구의 오래된 산업도시들에서 인구 감소는 익숙한 일입니다. 제가 지난 여름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도시’에서 말씀드렸었던 도시재생이나, 창조도시와 같은 전략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인구가 줄어드는 도시의 자구책들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축소도시’는 인구 감소를 억제하고 다시 인구를 증가시키려는 다른 전략들과는 달리, 인구 감소를 받아들이면서 도시의 새로운 적정 규모를 찾으려는 또다른 대응 전략입니다. 인천의 지방정부는 인구 300만 명 돌파를 기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구 감소를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천 또한, 다른 여느 국내·외 대도시들처럼 오랜 시간 동안 점차 내륙으로 도시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원도심과 농촌지역의 쇠퇴를 겪어왔습니다. <그림 1>은 인천이 광역시가 된 1995년의 인구를 기준으로, 각 구·군의 인구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1995년부터 2015년까지 20년 동안 인천의 인구는 약 25% 증가하였습니다. 구 별로 볼 때 인구가 크게 늘어난 곳은 중구, 서구, 연수구, 남동구 등인데, 영종, 청라, 검단, 송도, 논현 등 대규모 택지개발이 이루어진 곳들입니다. 반면 큰 개발 계획이 적었던 농촌지역과 구 도심 지역인 강화군, 남구, 동구의 경우 인구가 감소하였습니다. 인천의 인구 증가 과정에서 어떤 공간들은 새롭게 형성된 다른 공간에 인구를 내어주었던 것이지요.

지금까지 인천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도시들이 이렇게 인구가 정체되거나 감소하는 공간에 대해서는 비슷한 전략을 취해 왔습니다. 바로 ‘재개발’과 ‘재건축’이죠. 2000년대 이후로 많은 오래된 주택지, 주공아파트 단지 등에서 재개발과 재건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구가 감소하며 쇠퇴하는 지역의 또다른 양상이 드러났습니다. 바로 빈 집입니다.

<그림 2>는 2016년 인천의 각 구·군의 주택 중 빈 집의 숫자입니다. 상주 인구가 많은 곳에 빈 집도 많습니다. 빈 집 숫자에 계산되는 집 중에는 정말 아무도 살지 않게 된 집도 있지만, 이사로 인해서 잠시 빈 집도 있고, 완공되었지만 아직 입주가 시작되지 않은 아파트도 있고, 수리 중이라서 비어 있기도 하고, 별장처럼 종종 쓰거나, 아니면 주택이지만 영업용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집이 많으면 빈 집도 많을 것이고, 쇠퇴하는 지역이 아니고 왕성하게 아파트가 건설되고 있는데 입주 중이라서 빈 집이 많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 3>은 조금 다릅니다. 이 그래프는 각 구·군의 주택 중에서 비어있는 집의 비율을 보여줍니다. <그림 1>에서 인구가 감소하고 있었던 동구, 남구, 강화군 등의 공가율은 인천 전체의 평균보다도 높고, 연수구, 남동구, 서구 등 인구가 증가한 곳들에 비해서 공가율이 높게 나타납니다. 2015년 전국 평균 공가율이 6.5%인데, 이 지역들은 수도권의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전국 평균보다도 상회하는 높은 공가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이 지역은 주택 숫자에 비해서, 사람들이 충분히 모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중구의 경우도, 대규모 아파트가 공급되고 있는 영종 지역으로 인한 착시를 피하기 위해서 아파트를 제외한 주택들의 공가 비율을 보면 동구나 강화도 못지 않게 높은 비율이 드러납니다. 구시가지 지역, 도서 지역의 오래된 지역이 쇠퇴하고 있다는 추정을 충분히 해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전반적으로 모든 곳에서 아파트 공가율에 비해서 비 아파트 주택의 공가율이 높게 관찰된다는 것입니다. 대규모 택지개발사업을 통한 아파트 단지가 인천의 인구를 흡수하는 동안 도시의 다른 공간들은 비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심증을 조금 더 강하게 믿게 하는 근거는 하나 더 있습니다. <그림 4>는 각 구·군의 공가들이 얼마나 오래된 주택들인지 비율을 살펴본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택지개발이 많이 진행되고 있는 지역들은 상대적으로 5년 이내에 지어진 집들의 비율이 높습니다. 송도가 있는 연수구나 영종 지역에 아파트가 많이 건설되고 있는 중구와 같은 경우가 특히 두드러집니다. 반면 쇠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동구, 강화군 등은 30년 이상 된 주택들의 비율이 두드러집니다. 오랫동안 재건축이나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고 쇠퇴하다가 비어가고 있다는 가설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출산율 추세가 지속될 경우 2030년대 초반에 이르면 우리나라의 인구가 감소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습니다. ‘지방소멸’과 같은 책이 한국에서도 많이 읽히기 시작하고, 지방의 농촌 소도시 또한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인한 소멸을 진지하게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비하면 아직 인천의 일부 지역의 쇠퇴는 조금은 이른 걱정 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처럼 꾸준히 인구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을 기반으로 하는 주택 공급과 도시 확장의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인천의 택지 개발에서도 미분양과 수익성 악화로 인한 개발 지연의 문제가 없었던 것도 아니며, 이로 인한 많은 부채는 오랫동안 인천의 지방정부를 괴롭혀 왔습니다. 그림 4에서 붉게 표현된 지어진 지 몇 년 안된 빈 집들이 곧 다 사람들로 채워져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더 보수적인 성장관리 전략과, 몇몇 지역에서는 축소도시 전략이 필요해 질 것입니다.

축소도시는 말 그대로 지금까지 확장해오던 도시를 다시 줄여서, 인구가 감소한 지역을 다시 적정한 규모의 도시로 공간을 재배치 합니다. 넓게 퍼져있는 주거지를 모으고, 빈 공간을 공공 녹지나 농지로 돌려놓습니다. 시가지 면적을 줄임으로써, 지방정부는 도시 공공서비스를 더욱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됩니다. 이미 대도시 중심지의 작은 동들이 주민센터를 공유하는 것도 이런 효율적인 공공서비스 공급의 일환입니다. 아시안게임 주경기장과 같이 도시가 일상적인 수준에서 감당할 수 없는 공공서비스 공급을 하지 않으려는 전략입니다.

공간 재배치를 통해서 생겨나는 빈 땅은 공공 녹지나 농경지로 재탄생 됩니다. 구도심의 밀집된 주택지에 부족한 공원과 녹지를 늘려서,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최근 각광받는 도시 농업과 연계해서, 지역사회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지역 안에서 소비하는, 친환경적 순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푸드 마일리지’라고 하는, 식재료가 생산되어 식탁 위에 오르기까지의 탄소배출량을 최대한 줄이는 친환경적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지요.

도시의 모든 공간이 초고층 빌딩이 밀집한 빽빽한 공간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축소도시는 쇠퇴하고 있는 도시의 어떤 공간들의 미래가 재개발을 통해 가득 메워진 다른 도시를 따라가는 것만 것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낮은 밀도에서 더 높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도 도시가 가질 수 있는 선택지일 것입니다.

 

글, 사진제공/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이희연, 한수경. 2014. 길 잃은 축소도시 어디로 가야하나. 국토연구원
구형수 외. 2017. 지방 인구절벽 시대의 ‘축소도시’문제, 도시 다이어트로 극복하자. 국토정책Brief. 616.
임형백. 2017. 인구감소시대에 축소도시를 활용한 도시계획. 도시행정학보. 30(2)
형시영. 2006. 인구저성장 시대의 도심쇠퇴에 대응한 도시관리정책에 관한 연구. 한국지방자치연구. 8(2)
인천광역시 행정자료실(바로가기▶)
국가통계포털(바로가기▶)




보는 도시 인천, 느끼는 도시 인천.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린시절 국민학교 사회 시간을 기억해보면, 3학년 한 학기는 각자의 고장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 마을, 우리 구, 우리 시. 인천에 대해서 처음으로 배웠던 때, 인천을 설명하던 표현은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도 ‘수도권의 관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부터 새롭게 사용되고 있는 인천의 브랜드는 “All ways INCHEON”입니다. 1883년 개항 이후 약 150년 가까이 인천의 아이덴티티는 교통의 시작점이자 수도권의, 나아가서 우리나라의 입구와 같은 역할에서 정의되는 것 같습니다. 21세기 들어서 공항이 이러한 이미지에 많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만, 전통적으로 인천의 아이덴티티를 만든 것은 역시 항구와 바다일 것입니다.

누구나 아시다시피 인천의 바다는 여러 의미가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쳐오며 바다는 해안가를 따라 생겨난 공장의 차지였고, 수출의 통로였습니다. 경기만의 수많은 섬들과 태안, 서산에 이르는 여객선 운항의 중심도 인천의 연안부두였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 접경이라는 점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해군 제2함대가 인천에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해안가가 철책이 둘러있어, 인천에 산다 하더라도 인천의 바다를 느끼고 즐기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바다의 도시 인천에 정작 바다가 없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지난 2014년에는 인천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사진공간 배다리가 주최한 ‘해안선은 없다’라는 사진전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이번 이야기에서 바다와 해변의 얘기를 하는 이유는, 바다가 우리의 도시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각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의 바다에서 그러한 감각의 경험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서구 회화에서 원근법을 발명한 이래, 오랫동안 서구의 도시와 그를 본받은 다른 세계의 도시들은 직선의 잘 정리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더 이성적이며, 더 아름답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근대건축의 아버지인 르 코르뷔제는 사람의 몸을 통해 ‘모듈러’라는 너무나 인간적인 길이 체계를 고안하고도 그것을 통해 ‘살기 위한 기계’인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건설하고, ‘빛나는 도시’를 그려냈습니다. 1800년대 중반 파리 시장 오스망의 파리 대개조나 1871년 시카고 대화재 이후 도시 재건에 영향을 준 도시미화운동 등 무수한 도시 계획이 주는 선명함과 명료함 또한 이러한 믿음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명함과 명료함은 도시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도시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모형으로 바라보며, 지도로 관찰하는 통치자의 더 쉬운 통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더 쉬운 통치를 위한 더 쉬운 관찰, 즉 ‘가독성(legibility)’의 확보는 권력을 가진 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가들은 도시의, 그리고 국가의 모든 것들, 인구, 사회, 자연의 모든 측정 가능한 것들을 숫자와 지도로 만들어 냈습니다. 근대 국가가 지도와 통계의 확보에 골몰한 것은 그들의 통치 대상을 한 눈에 더 잘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최근의 도시는 권력자의 목적을 넘어서 스스로 시각화를 촉진하고 있습니다. 고도로 자본주의화 된 도시는 이제 소비의 공간이 되어 도시 속 사람들에게 소비를 권장하는 거대한 간판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건축가 로버트 벤츄리는 건축물을 ‘Duck(오리)’와 ‘Decorated Shed(장식된 창고)’로 구분합니다. 그는 건축물에서 장식을 걷어내기 위해 결국은 건물 전체가 거대한 상징이 되어버린 모더니즘 건축을 오리를 파는 오리모양 건물로 비유하면서 경직성을 비판하고, 창고와 같이 도로에 면하는 앞면을 적합하게 디자인한다면 어떤 용도로든 쓸 수 있는 건물의 유용함을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더 상업적인 건축물에도 어울리고, 급변하는 자본주의 사회에도 더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시대의 건축과 도시 공간은 평범한 네모진 건축물의 파사드와 공공 교통과 광장과 거리를 빠짐없이 간판과 조명과 각종 상징들로 장식하여 도시 사람들의 눈을 끊임없이 유혹해 왔습니다. 더 많은 소비를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최근의 어떤 흐름은 도시의 삶을 ‘보고 소비하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걷는 것’ 입니다. 제주의 올레길에서 시작한 걷기 문화는 이제 도시 안으로 스며들어 있습니다. 강화군처럼 지자체들이 자체적으로 둘레길을 조성하기도 하고, 구도심의 새로운 여가문화는 차량을 통한 접근보다는 골목을 걷도록 유도합니다. 도시의 일상적 삶에서 벗어난 공간에서 더 느린 이동을 통해서, 도시 사람들은 시각 외의 다른 감각을 더 많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어떤 공간의 경험이 보는 것뿐 아니라 소리와 촉감, 냄새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또 도시 내에서의 자전거 사용의 증가와 전동휠과 같은 퍼스널 모빌리티의 보급은 속도를 포기하지 않고서도, 또 더 많은 일상적 도시 공간에서도 사람들을 자동차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해방시킴으로써 도시 공간을 더 많은 감각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바다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특별히 무엇인가를 더 찾아내지 않더라도 시각 외의 모든 감각들을 더 적극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란 생각이 듭니다. 처음 해변에 도착하면 넓은 시야와 푸른 색깔이 사로잡지만, 그 바다와 해변에 더욱 오래 머물게 하고, 기억에 남는 것은 냄새와, 소리와 촉감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인천은 그동안 인천의 바다를 시민들로부터 분리해 둠으로써, 인천에서 만날 수 있는 어떤 중요한 경험과 기억의 권리도 막아 두었던 것은 아닐까요.

관광지가 아닌 곳으로의 여행이 늘어나는 것은 시각 이외의 감각의 경험이 더 공간을 체험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바다를 시민들에게 되돌려 줌으로써 다양한 감각으로 도시를 경험하는 것은 정말 시작일 뿐입니다. 도시 공간들은 서로 저마다 다른 냄새와, 소리와, 촉감과 맛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을 하나씩 찾아낼 때 인천은 더 많은 색깔과 개성을 가진 도시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지금까지의 도시 공간을 만들어 온 방식과는 역시나 조금은 달라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까지 더 깨끗한 도시, 더 보기 좋은 도시, 시각적으로 풍성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많은 다른 감각은 악취나 소음으로 취급받으며 도시에서 배척받았습니다. 또 지키고 싶은 어떤 소리나 맛은 잘 지어진 공연장 건물이나 음식 문화의 거리 입간판 같은 것을 통해 시각적 요소로 흡수되어 왔습니다. 최근의 도시 계획의 추세도, 사람들의 취향도 그렇듯 어떤 냄새나, 소리, 맛과 촉감은 위로부터의 계획 없이도 그냥 존재함으로써 더 가치있고 사람들이 찾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공간에서 또 다른 감각을 만들어 내려는 공간 계획이 도시 공간을 더 밋밋하게 만들 것입니다.

저는 종종 관광(sightseeing)과 여행(travel)이라는 두 단어가 주는 미묘한 차이를 생각하곤 합니다. 언젠가부터 단체 관광보다 개인 단위의 여행이 더 선호되고, 에어비앤비나 게스트하우스 같은 숙박 방식이 유행하고, 여러 도시를 하루 이틀씩 여행하는 것보다 한 도시에 오래 머무는 여행이 각광받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어떤 장소에 대한 기억이 단순히 보는 것만으론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란 생각을 합니다. 누군가 인천으로 여행을 온다면, 우리가 인천을 보여줄 것인지, 인천을 느끼게 해줄 것인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여행뿐 아니라 일상의 인천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도시 공간에서 눈을 감고 있어도 행복한 공간은 얼마나 될까요.

 

글/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J. Scott. 전상인 역. 2010. 국가처럼 보기. 에코리브르
R. Venturi et al. 이상원 역. 2017. 라스베이거스의 교훈. 청하.
김윤식. 1994. 항도 인천의 모습. 황해문화. 3
박상문. 1999. 인천에는 바다가 없다. 황해문화. 25
김미영, 전상인. 2014. ‘오감(五感) 도시’를 위한 연구방법론으로서 걷기. 국토계획. 49(2)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도시3: 젠트리피케이션을 마주하며.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경리단길의 유명한 쉐프가 동인천에 새로운 가게들의 문을 열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재밌었던 건 인터넷 상에서 플랫폼의 종류에 따라서 반응이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었습니다. 많은 블로거들은 가게를 방문하고 동인천 구도심에 젊은이들이 찾을 새로운 공간이 생겨난 것에 기뻐하고 만족해 했습니다. 반면 SNS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가게들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동인천이 거대한 바람에 휩쓸릴 것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최근 몇 년간 도시와 부동산에서 가장 뜨거운 문제인 젠트리피케이션 말이죠.
젠트리피케이션은 1964년 영국의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가 영국의 하층계급 주거지가 재개발을 통해 중산층 주거지로 변화되면서, 중산층이 저소득층을 특정지역에서 축출하는 현상을 정의한 단어였습니다. 이 단어는 이후 구미의 대도시, 아시아의 신흥 대도시들에서 유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활용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폭넓게 의미의 확장이 일어났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젠트리피케이션은 주로 주거보다는 상업시설, 특히 소규모의 근린생활시설에서 벌어지는 ‘상업 젠트리피케이션’과 ‘소매업 젠트리피케이션’, 언론 매체와 SNS를 통해 특정 지역이 떠오르는 ‘매스미디어 젠트리피케이션’,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매장이 대거 몰려들며 이루어지는 ‘프랜차이즈 젠트리피케이션’, 여행명소화 되면서 지역 상권의 성격이 변화하는 ‘투어리즘 젠트리피케이션’, 거주나 영업의 목적보다는 투자를 통한 자산 증식 목적으로 자본이 유입되며 이루어지는 ‘부동산자산 젠트리피케이션’ 등으로 정의되는 식입니다.
이렇게 확장된 의미 속에서, 최근의 우리나라에서의 젠트리피케이션은 대체로 주거지역의 급격한 상업화와, 이 과정에서 원주민과 임대상인들의 축출과정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듯 합니다.

‘원주민과 상인들의 축출’이 문제가 되어 젠트리피케이션이 이슈가 되었다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도시 개발의 역사에서, 원주민 축출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느 아시아의 신흥 국가들처럼 한국도 급작스럽게 몰려든 사람들의 도시를 재구조화 하면서 도시를 더 부유한 사람들의 공간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달동네 재개발, 광주대단지 사건, 뉴타운 사업에 이르기까지 항상 기존 거주지의 전면적인 철거와 원주민의 축출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빈 공간은 아파트와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원주민보다 더 부유한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바로 오늘까지도, 우리나라의 도시공간은 훌륭한 상품이며 무엇보다 안정적인 자산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국가가 앞장서서 경제성장을 위해 이것을 종용해 왔습니다.
세입자와 임차인 보호의 관점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은 갑작스럽게 생겨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2010년 대에 시행된 뉴타운 사업에서도 사업지의 세입자들이 사업 진행에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대부분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상인들의 임대보호를 위한 상가임대차보호법이 제정된 것은 2001년에 일이지만, 여전히 1991년 제정된 일본의 차지차가법에 비해 임차인 보호의 열악함이 지적되며 끊임없이 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나라의 도시 개발은 지역의 물리적 기억을 지우고 사람들을 축출하는 방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은 좌측부터 1985년 옥수동 재개발 전경, 2000년대 후반 은평 뉴타운과 진관동 구도심, 2017년 아현 뉴타운 사업지의 염리동. (출처: 서울사진아카이브, 시사in, jtbc 한끼줍쇼 방송 화면)

그럼에도 최근 급작스럽게 젠트리피케이션이 이슈가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세 가지가 지적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동산 투자가 확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잉여자본이 건설산업과 부동산으로 투자되어 순환된다는 데이비드 하비의 이론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부동산은 국가의 용인과 비호 아래 가장 강력한 자산 취급을 받았습니다. 땅을 사고, 아파트를 사던 것이 이제는 골목의 근린상업시설과 다세대 주택이 대상이 된 것이지요. 평균 수명의 증가는 은퇴 이후 30년의 삶에 대한 안정을 소구하게 하고, 그 결론으로 임대 수익과 부동산 투자를 얻어낸 베이비부머 이후의 세대들에게 이러한 부동산 투자는 꼭 거대 자산가가 아니어도 선택해야 할 미래가 되었습니다. 2016년 7월 26일 한겨레 신문의 음성원 기자의 기사 “’58년 개띠’의 상가 사냥,’94년 개띠’를 몰아내다”의 데이터 분석에 참여한 신수현(서울시 통계데이터분석팀)씨의 이후 뒷이야기는 더욱 명료하게 이러한 상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당시 분석 대상인 건물 소유주 중에 해당 지역에 여러 건물을 소유한 경우는 거의 드물었습니다. 연남동에 투자한 사람들이 꼭 거대 자산가는 아닐 겁니다.”
두 번째는 자영업자의 증가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지속된 불황, 정년단축과 조기퇴직, 청년실업 등의 문제는 이들을 자영업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임대상인들의 문제가 표면적으로 더 많이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비단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뿐만 아니라 프랜차이즈 산업의 문제점이 꾸준히 지적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최근 ‘공정함’에 대한 사회적 요구의 증가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임대인과 임차인의, 원주민과 이주민의 관계에 대한 문제 제기의 시작은 도시공간 속에서 드러나는 ‘공정함’에 대한 사회의 요구의 한 모습일 것입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는 도시 공간에 대한 무수한 분석과 대안이 존재합니다. 도시계획, 법과 제도, 인식개선 등 무수한 해법들이 다양한 연구를 통해서 제시됩니다. 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도시 공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그래서 도시 공간을 상품으로만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남으로써 사람들을 축출하고 배제해왔던 오랜 방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Naked City(‘무방비 도시’로 2015년 번역, 출간)’라는 책으로 유명한 도시사회학자 샤론 주킨은 도시의 일종의 연속성으로서 ‘정통성(authenticity)’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면서, 이 개념에 “도시에서 살고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속적인 집을 만들어주는 문화적 권리”의 의미를 덧붙였습니다. 어떤 지역이 갖는 정통성은 그 지역이 오랜 시간 축적해온 것들입니다. 지역의 사람, 공간, 행위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독특한 정통성은 도시 속에서 그 지역만의 매력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 매력이 어떤 계기로 널리 알려졌을 때, 그 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낯선 느낌의 상점과 음식점, 공연장과 전시공간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서울에선 이런 지역들이 무수히 명멸했습니다. 홍대, 이태원, 성수동, 연남동, 상수와 망원동 등. 인천도 북성동, 신포동, 배다리와 같은 지역들이 정통성을 가진 공간으로 부각되어 왔고, 최근에는 십정동과 같은 곳에서도 공장 지역의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상업공간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역의 정통성에 매료되어 자리잡는 새로운 가게와 공연장들이 원주민들의 주거지와 세탁소, 철물점을 대신할 때, 그리고 그렇게 ‘뜬’ 지역의 임대료가 상승해 새로운 가게와 공연장이 떠나고 흔한 프랜차이즈와 대기업의 음식점들로 변해갈 때 우리는 이 지역의 생명력을 고민해야 합니다. 모두가 이런 변화와 더불어 낡은 건물들을 대신해 고층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지역의 발전이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변해버린 공간이 예전의 매력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여느 상업지역처럼 흔한 곳이 되었다고 합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것을 자본이 도시를 ‘균일화’시킨다고 말합니다. 어느 도시 공간을 특별하게 만들었던 이유가 자본의 힘으로 인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도시 안의 여러 지역들이 ‘정통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지역의 사람, 공동체의 보호가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샤론 주킨의 말처럼 “정통성의 ‘외관’과 ‘체험’을 보존”하는 수준에서 머물고 말 것입니다. 누군가 떠나고,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재개발이든, 젠트리피케이션이든, 도시재생이든, 지금까지 도시를 재구조화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축출의 방식에서는 반드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최근 다양하게 등장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해법들이 임대료와 지가의 최대한 느린 상승과 임차 상인들의 조금 더 긴 계약기간 보호를 유도하는 것, 지역 주민과 이해관계자들의 공동체 형성 등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들에 대해 그러했지만, 특히 도시 공간은 ‘부동산’으로 불리며 자산과 상품의 면모 만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더 높은 지가, 더 많은 임대료가 도시 공간 활용의 절대선처럼 인식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꾸준히 도시 공간이 생명력을 가지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때입니다. 공공도 지금까지의 도시 개발에 대한 방관과 동조에서 벗어나서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의 연속성과 지역의 정통성을 지켜가는 방법을 마련하길 기대해 봅니다.

 

글/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김상일, 허자연(2017), 서울시 상업 젠트리피케이션 실태와 정책적 쟁점, 서울연구원
김현아, 서정렬(2016), 젠트리피케이션, 커뮤니케이션북스
샤론 주킨. 민유기 역(2015). 무방비 도시. 국토연구원
신정엽, 김감영(2014), 도시 공간 구조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의 비판적 재고찰과 향후 연구 방향 모색, 한국지리학회지, 3(1).
이선영(2016), 닐 스미스와 젠트리피케이션, 그리고 한국, 공간과사회, 26(2)
정원오(2016), 도시의 역설, 젠트리피케이션, 후마니타스
“‘58년 개띠’의 상가 사냥, ‘94년 개띠’를 몰아내다”, 한겨례신문, 2016.7.26
“뉴욕, 런던, 서울 거리 비슷해져…젠트리피케이션 영향”, 한국일보, 2016.7.12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도시 2.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도시를 정의하는 방법이야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산업혁명 이후 도시는 ‘공장이 많고, 일자리가 많아 사람이 모여든 곳’에 가깝습니다. 우리나라도 산업화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대부분의 도시들은 공업단지가 건설되어 주변 농촌의 인구를 흡수하며 성장한 경우입니다. 서울부터 그렇고, 동남권의 많은 도시들, 그리고 인천도 그렇지요. 일제 강점기부터 있었던 원도심의 많은 공장들, 산업화 시대에 형성된 수출 4,5,6공단과 같은 산업단지, 송도신도시의 인천도시첨단산업단지와 같은 ‘공장’의 건설은 겉모습이 조금씩 달라져 왔을 뿐 도시의 형성과 발전에서 거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면서 한국의 도시 개발에는 ‘문화’라는 키워드가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키워드는 때로는 ‘산업’과 연결되고, 때로는 ‘관광’과 연결되고, 최근에는 ‘도시재생’과 연결되며 도시 개발의 새로운 도구로 각광받았습니다. 인천에서 원도심의 차이나타운을 재발견하고, 근대건축유산을 이용해 다양한 지역 문화예술의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도 이러한 도시개발 전략의 한 예입니다. 근대건축물이 박제되지 않고 오늘에도 계속 문화 공간으로서 생명력을 가지는 것을 보며, 과거의 우리 도시의 기억의 공간에서 미래에 기억할 오늘의 도시 기억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낙후된 도시 공간, 특히 공업 지역을 다른 용도로 변화시키는 시도는 최초로 산업화를 이루었던 유럽의 공업도시들이 경쟁력을 잃어가면서 그것에 대한 대응으로 시도되었습니다. 영국의 대표적 산업도시였던 중부지역의 쉐필드는 한때 영국 철강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대규모 철강회사들이 철강 생산은 물론, 제련을 통한 정밀 공업까지 발전시키면서, 한때 쉐필드에서 영국 철강의 90%가 생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흥 산업국가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되면서 급격하게 쇠퇴하였습니다. 도시 중심부에 있던 철강회사와 관련 업종의 생산시설과 공장 건물들은 폐업으로 인해 비어 있거나, 극빈층의 집단거주지로 변했습니다. 

 

쉐필드 시는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도시 중심부 재생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폐공장은 공연장이나 문화산업공간으로 재활용하고, 이들을 연계하는 공공 공간을 정비하여 도시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창조적 거리이자 관광 요소로 재탄생 시켰습니다. 또한 문화예술 및 연관된 다양한 산업을 촉진 시키고 이와 관련된 인력을 지역 대학에서 양성하여 지속적으로 고용을 늘어나도록 했습니다.
쉐필드의 이러한 변화는 유사한 쇠퇴를 경험한 영국의 산업도시들도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뉴캐슬, 리즈, 노팅엄, 맨체스터, 리버풀과 같은 산업도시들이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고, 런던의 유명한 테이트 모던과 같은 미술관도 같은 맥락의 재생과정입니다.
비단 영국 만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은 최근까지 공통된 과정을 겪어왔습니다. 특히 과거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의 강 주변이나 해안을 차지하고 있던 공장과 창고들이 새로운 기능으로 변화하면서 ‘워터프론트 개발’이라는 수법이 개발된 것이죠. 조선업의 쇠퇴로 코펜하겐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을 위한 거주지로 변화된 스웨덴 말뫼의 경우나, 허드슨 강변의 항구 지역을 매립을 통해 초고급 주거 및 업무지역으로 개발한 뉴욕의 배터리 파크 시티와 같은 사례는 도시에서 공업이 빠져나간 공간을 무엇으로 메워내느냐는 차이가 있을 뿐,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업 중심의 도시 공간에 ‘문화’가 스며들면서,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적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사람들, 이른바 ‘창조 계급’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습니다. 또한 이들을 통한 지식기반산업과 문화산업 중심의 ‘창조도시’의 개념도 부각됐습니다. 창조도시 개념의 주창자인 미국의 사회학자 리차드 플로리다는 “학과 엔지니어링, R&D, 기술 기반 산업, 미술 분야, 음악, 문화, 심미적인 일과 디자인 분야, 또는 보건·금융·법률 등 지식기반 전문직 분야 등”을 ‘창조 부문’이라고 지칭하며, 해당 업종의 종사자들을 ‘창조 계급’으로 지칭했습니다. 도시가 이들을 유치하거나, 양성함으로써 새로운 도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도시계획가인 찰스 랜드리는 침체한 도시의 도시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문화활동을 포함한 창조성과 혁신을 제시하면서 플로리다와는 다른 창조도시를 제시합니다.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도시계획학자인 사사키 마사유키는 지방분권 아래에서 각 지방의 전통적 문화산업과 현대의 첨단 산업간의 창조적 융합을 통한 ‘창조산업’ 육성과, 이를 통한 지역 발전을 모색해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창조도시’의 개념을 활용하여 노후 산업지역이나 원도심 지역을 재활성화 하려는 이론적 검토와 정책적 실행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문화도시 관점에서 이루어지던 지역 관광 활성화나 장소 마케팅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문화예술 인력을 발굴 및 육성하고, 관련된 산업을 유치하려는 시도들입니다. 창원의 도시재생 시범사업을 통해 형성된 ‘창동 예술촌’을 시작으로, 서울의 연희문학창작촌 등의 사례는 전국 각지에서 매우 많은 예술촌이 생겨났고, 인천의 아트플랫폼과 같은 공공이 건립한 창작공간도 늘어났습니다. 인천은 오랫동안 공업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면서 만성적으로 문화공간의 부족에 시달렸고, 문화예술에 대한 접근성 부족의 문제도 심각했습니다. 제가 참여했던 ‘확장도시 인천’에서도 많은 참여 필진들이 인천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문화적 갈증을 서울을 통해서 해소하던 젊은 인천인들의 경험담을 많이 접할 수 있었지요. 인천도 이런 시도를 통해서 다양한 예술공간들과 작은 도서관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밀착한 공공문화시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인 일입니다.

 

그러나 ‘창조도시’를 통한 도시계획의 과정에서 문화예술의 부각이 그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문화예술이 도시계획에 이용되면서 다양한 스케일에서 문제점이 발견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먼저, 각종 재개발 사업, 정비사업, 도시재생사업에서 개발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문화예술이 도구화되기도 합니다. 대규모 건설 사업의 목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부족한 문화예술의 공간을 일부 넣어주는 것이죠. 이것이 ‘창조도시’의 모습으로 포장되기도 합니다. 어떤 문화예술을 중점적으로 유치할 것인가, 그것이 기존 원도심과 역사적으로, 혹은 인적 자원의 면으로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지역사회에 관련된 ‘창조계급’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어느 수준에 도달해 있는가, 관련된 ‘창조산업’은 어떤 것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등에 대한 종합적인 고려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지역사회가 공감대를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대체로 지역 사회는 얼마나 많은 예산 투자로 지역경기 활성화에 기여하는가에 초점이 남아 있고, 정치가들은 결과적으로 잘 조성된 건축물에 집중하며, 여전히 조감도 중심적인 도시계획에 익숙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문화예술 종사자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면 그것이 성공하여도 문제입니다. 문화예술 종사자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고용 형태로 창작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포장되지만 실제론 불규칙적인 수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업의 성공은 필연적으로 주변지역의 지가와 임대료 상승을 불러오고, 이는 사업의 성공에 이바지한 예술가들을 축출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업지역에 이들을 위한 저렴한 주거를 공급한다거나, 문화예술인들이 주변지역에 거주할 수 있도록 바우처를 지급하거나, 사업지 주변에서 문화예술인과 임대계약을 맺는 임대인에게 인센티브가 주어지거나 하는 정책적 고려는 찾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창조도시’가 과연 도시에 창조성을 공급할 수 있는 지속가능성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이유입니다.
작은 규모의 문화기반 도시재생에서도 문제는 발생하고 있습니다. 최근 서울에서 도시재생을 활발히 벌이면서 작은 규모로 여러지역에서 ‘창조도시’ 전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전 오세훈 시장 임기 중에 거대 프로젝트를 통해서 시 규모의 창조도시 전략을 입안 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양상입니다. 가장 먼저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해온 창신숭인 지역의 경우, 자생적으로 시작된 지역라디오 등의 사업을 지속하면서도, 주민공동이용시설을 만들어 지역 내 주요 산업인 봉제 등의 교육을 지원하고, 백남준씨의 생가가 과거에 존재했던 점을 문화적 자산으로 발굴해 지역 내 주택을 매입하여 소규모의 기념관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문화기반 도시재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모든 지역이 이러한 창조적 소재와 역량을 가지고 있느냐는 점입니다. 1970-80년대에 개발된 단독주택지에서 다른 지역과 다른 독특한 창조적 소재를 발굴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인적 구성을 가진 지역에서 새로운 역량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렇다 보니 도시재생의 과정에서 외부 전문가의 이름으로 문화예술인들이 수혈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해당 지역에 대한 애착을 요구하거나 기대하기 어렵고, 원거주민들과 잘 융화되기를 바라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문화예술인들은 부족하나마 공공의 지원을 찾아 전문가의 입장으로 지역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려 하고, 원거주자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이들의 낯선 시도들이 익숙치 않은 경우가 많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문화예술인들은 시 정부에게 자신들을 ‘소모품처럼 소비하는 것’으로 느끼고, 원거주민들은 이들을 ‘아트워싱’의 전위대로 생각하며 배척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도시에서 문화적 자산의 활용을 배제하고 도시계획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워졌습니다. 오히려 모든 공간과 산업에서 문화예술은 더욱 중요하게 강조되어야 할 가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다만 도시계획의 과정에서 현재 우리의 창조도시 전략이 고민하여야 하고 채워나가야 하는 것들이 많은 것 또한 분명합니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이 것은 매우 느리고 점진적인 것이어야 하고, 현실화된 조감도가 성공의 척도가 아니라 그 안의 사람이 척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업화 이래 오랜 시간 동안 해왔던 상전벽해의 도시개발의 리듬을 내려 놓아야 할 것입니다.

  

글/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리처드 플로리다(2008), 도시와 창조 계급, 푸른길.
찰스 랜드리(2005), 창조도시, 도서출판 해남

김연진(2015), 문화적 도시재생 정책으로서의 창작공간 사업과 젠트리피케이션, 서울문화재단, 제7회 서울시 창작공간 국제심포지엄 자료집
앤디 프랫(2015), 문화소비 주도 도심재생 전략의 문제점: 런던 헉스톤 사례, 서울문화재단, 제7회 서울시 창작공간 국제심포지엄 자료집
라도삼(2012), 문화도시의 개념과 문화도시화를 위한 서울시 전략의 반성적 고찰, 도시인문학연구, 4(2)
원도연(2008), 문화도시론의 발전과 도시문화에 대한 연구, 인문콘텐츠, (13)
최병두(2014), 창조경제와 창조도시에 대한 대안들: 탈소외된 노동과 재창조적 축제를 위하여, 공간과 사회, 24(4)
_(2014), 창조도시와 창조계급: 개념적 논제들과 비판, 한국지역지리학회지, 20(1)

“당신의 동네는 ‘아트워싱’으로부터 안전합니까?”, 뉴스위크 한국판, 2017.6.26.
“영국 쉐필드: 철강도시에서 창조도시로”, 김정후 도시건축정책 연구소, (사이트 바로가기▶)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도시 1.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5월 30일에 있었던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인 송현동 구 ‘애경사’ 건물의 철거를 계기로, 인천의 근대 건축물이 다시 재조명되는 듯 합니다. 인천시는 내년부터 인천시 내 근대 건축물을 전수 조사하기로 하였고, 각 구청에 근대 건축물 보호를 요청하였습니다. 인천시는 알려지지 않은 근대 건축물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하니, 이번 일을 계기로 건축 유산이 더 주목받고 보호받는 방향으로 진전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돌이켜보면, 낡고 오래된 건물로만 이해되던 근대 건축물이 보호의 대상으로 존중되고, 그것을 넘어 새로운 도시 명소로 부각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근대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등록문화재 제도’가 도입된 것은 2001년의 일로, 이 제도를 계기로 만들어진 지 50년 이상 된 건조물이나 시설물 중 “근대사에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큰 것, 지역의 역사 문화적 배경이 되고, 그 가치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것, 한 시대의 조형의 모범이 되는 것” 등이 등록문화재 지정을 통해서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등록문화재 소유자에게 유지와 보수 비용, 세금 등의 인센티브를 줌으로써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들이 훼손되지 않고 꾸준히 관리될 방법을 만들게 되었고, “개조, 내부변경, 부분변경, 창조적 모티브의 채용”과 같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현재에도 사용가능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근대 건축물의 수명을 연장하고, 활용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 사회 전반적으로 일종의 복고주의가 유행하면서 잘 보존되고 활용되는 근대건축물이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대를 연상시키는 상업시설, 패션이나 디자인에서 레트로한 경향이 유행을 타게 되었습니다. 또한, 건축과 인테리어에서 속칭 ‘인더스트리얼 모던’이라고 불리는, 인테리어 요소에서 구조나 설비의 날 것을 그대로 보여주거나 혹은 그것을 모티브로 이용하는 방법들이 유행하게 되었죠. 이 과정에서 80년대 건축된 단독주택의 리모델링이 부각되고, 북촌 한옥마을로만 이해되던 도시형 한옥이 전국 각지에서 재발견되며, 나아가 근대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레플리카가 아닌 오리지널로써의 근대 건축물들이 다시 도시 사람들의 시선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천, 서울, 부산, 군산 등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는 도시들은 도시 역사의 스토리텔링을 위하여 이러한 근대 건축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관광 자원화 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1900년대 초중반 건립된 근대 건축물, 특히 서양식 건축물을 적극적으로 재발견하고 건축물에 남아 있는 기억을 되살려 도시의 삶에 역사의 깊이를 심기엔 무척 어려운 부분이 한 가지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많은 근대 건축물들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건립되어 행정기관이나 금융기관 등으로 사용된 건물이고, 이것을 ‘기념’하기에는 이 건축물들에 남겨진 역사적 기억은 침략과 고통의 역사이기에 적절치 못하다는 벽에 부딪히는 것이었습니다.
근대 건축물을 통해 역사 공간을 구성하고 관광 자원화 하려는 시도와 그 공간의 실제 기억 사이의 딜레마에 처한 도시는 우리나라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중국은 근대에 들어서 서구 세계와 접속하면서 해안 주요 도시에 열강의 조계를 내어주어야 했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침략을 받아내야만 했습니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의 수많은 서양식 건축물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근대의 열강 침략의 유산입니다.

이 중에서 상하이의 경우는 생각할 여지를 많이 줍니다. 상하이는 오래된 구도심과 옛 조계 지역을 재건하면서, 이런 역사적 기억을 긍정적 기억으로 치환하는 시도를 합니다.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서양 각국의 침략의 역사였던 조계 지역은 실제로는 중국인들이 더 많이 섞여 살았던 일종의 ‘국제도시’로 이해됩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인 상하이의 역사적인 대구(對句)를 만들어낸 것이죠. 이 해석을 기반으로 상하이의 오래된 주거지와 조계지는 과거 중국에서 가장 코스모폴리탄한 ‘상하이 모던’의 상징 공간으로 이해되고, 오늘날 국제적인 금융 도시인 상하이의 원조와 같은 모습으로 관광 자원화 됩니다. 신텐디, 티엔즈팡과 같은 지역이 근대 주거 건축물 등이 적극적인 외부 보존과 내부 수리를 거쳐 가장 떠오르는 상업 공간과 관광지로 변신한 것입니다.

굳이 근대 건축물을 관광자원이나 공공시설, 전시관 등으로 이용하지 않더라도 역사성을 보존하면서 변화한 도시에 걸맞게 증축되어 업무시설이나 상업 건축물로 이용된 사례들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2006년 완성된 뉴욕의 허스트 타워는 본래 대공황 시기에 6층으로 지어진 업무용 건물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건물은 노후화되고, 기업은 더 많은 사무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이런 경우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재건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허스트 타워의 설계를 맡은 건축가 노먼 포스터는 철거와 재건축 대신 증축을 택합니다. 기존 건축물의 외면을 살리면서 내부에서 기존 건축물을 기단 삼아 182m의 초고층 빌딩을 세운 것입니다.

일본 도쿄의 중심가인 마루노우치 지역도 오래된 업무 지역을 재개발하면서 비슷한 방법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일본 정부가 근대건축 보존을 독려하기 위해서 외관을 보존하면 내부 개조와 용도 전용을 폭넓게 허용해주고, 보존에 대한 보상으로 재건축 과정에서 용적률에 대한 인센티브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1894년 은행으로 만들어진 건물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미츠비시 이치고칸 뮤지엄처럼 증축 없이 내부 개조를 통해 재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도쿄 중심가에서는 1990년대부터 정부 정책에 따라 근대건축물을 보존하면서 고층 증축을 하는 사례가 확산되었습니다. 1993년 기존 건물의 2개 입면만을 남기고 고층으로 증축한 도쿄은행협회빌딩, 1995년 21층의 고층 건물을 증축한 제일생명관(DN타워 21), 1920년에 건설된 건축물의 1/3을 보존하며 초고층 빌딩으로 증축 및 재개발한 일본공업클럽 등이 건설되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 마루노우치가 본격적으로 재개발되면서 2005년 미츠이무로마치 타워가 건립되고, 2013년 고층 증축과 함께 중앙우체국 건물의 입면과 내부구조 일부를 보존하면서 내부를 쇼핑몰로 개조한 ‘키테’(KITTE)등이 개관하면서 마루노우치는 일본 경제의 황금기 기억을 장소에 보존하면서도 현대적인 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심지어 도쿄에서는 이미 없어진 근대건축물을 사진과 도면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재현된 신바시 정류장은 신바시-요코하마 간의 일본 최초의 철도의 시점이었습니다. 1997년 업무용 빌딩과 주택 등으로 재개발되어 사라진 이 역은 발굴조사를 통해 유구가 드러났는데, 옛 건물에 대한 자료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재현된 건물이 원형과 다름을 명시하면서까지 이 건물을 복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모두 도시의 역사와 기억을 박물관에 밀어 넣지 않고, 도시 안에서 계속 생명력을 갖고 이어질 수 있도록 고민한 다양한 모습의 결과들입니다.

한때 낡은 주거지역에서 도시 미화와 관광을 목적으로 ‘벽화마을 만들기’가 대 유행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화동, 동피랑 마을, 부산 감천마을 등의 사례를 통해서 알려진 벽화 그리기는 무수한 지자체에서 벤치마킹 되었지만, 대부분 사후 관리에 실패하거나, 개성 없는 복제품으로 전락했습니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가 이제는 잘 논의조차 되지 않는 벽화마을의 사례는 각 도시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찾는 방법으로 ‘요즘 유행하는 어떤 것’을 잘 찾아 가져오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오히려 도시의 스토리텔링과 정체성 찾기에 더 좋은 방법은 도시에 숨겨져 있는 기억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발견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의 배경으로서의 도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닌, 그때 도시를 살아온 사람들의 여러 작은 기억들을 찾아내어 현재에 다시 내놓는 것이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지난 과거의 향수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되는 도시의 작은 역사가 베낄 수 없는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미 찾아내어 여러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는 근대 건축물들뿐 아니라, 지금까지 도시 풍경을 어지럽힌다고 무시 받았던 오래된 건물들을 적극적으로 재이용하려는 전환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근대 건축은 식민통치의 상징이어서 제거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고도성장기의 건축은 건축적 철학이 부족하거나, 건설 수준이 조악하다고 비판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떠한 건물들은 그 건물이 있었던 동안 간직해온 역사를 통해 가치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오래된 건물은 낮고 낡아서 수익성이 떨어지니 고층의 산뜻한 현대적 건물로 재개발해야 한다’는 과거의 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근대 건축물을 통해 인천의 100년 전을 지금도 느낄 수 있듯, 신포동의 극장들과 번화가, 송림동과 만석동을 채우던 공장들, 양조장들과 같은 50년 전의 구도심의 여러 기억 또한 현재에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개항과 산업화를 관통해오며 인천은 다른 도시들보다 더 많은 기억과 이야기거리를 쌓아왔음에도 더 현대적인 도시와 발전된 미래를 좇아오느라 그것들을 잊어왔습니다. 오래된 건축물과, 그 안에 있는 오래된 기억들을 찾아내어 기억하고,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함으로써 인천경제자유구역과 같이 미래를 꿈꾸는 인천의 다른 한 편에 깊은 역사를 채워나가길 기대해 봅니다.

  

글/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 한지은(2014), 도시와 장소 기억,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 문화재청(2005), (근대문화유산 보존을 위한)등록문화재 제도 안내, 문화재청
– 이토 타케시(2006), 도쿄에 있어서 근대건축보존의 성립과 전개, 서울학연구, (27)
– 이현정,윤인석(2007), 한국 근대건축의 보존과 활용-명동지역의 장소성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28)
– 임태희,이시다 준이치로(2005), 일본 근대건축 보존개념의 변천에 관한 연구-1970-1999까지의 월간 『신겐치쿠(新建築)』誌를 대상으로-, 대한건축학회 논문집-계획계 21(3)

 




지역공동체 2. 도시재생 시대의 지역 공동체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을 만들기’에 이어 ‘도시재생’이 도시 계획의 새로운 대안으로 모색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새로운 정부는 대선공약에 ‘도시재생 뉴딜’을 강조하면서, 앞으로의 도시정책이 ‘낙후 지역 철거-기반시설 공급-아파트 건설’의 방법에서 ‘지역 공동체 보존-기반시설 보완-소규모 정비사업’으로 전환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익숙하게 보아왔던 넓은 빈 토지에 대단위의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 원도심의 좁고 오래된 주택지를 철거하고 초고층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은 더 이상 최선이 아니라는 이러한 전환 속에는 ‘오래된 도시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사라진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 좋다는 인식 또한 깔려 있습니다. 이런 인식 속의 ‘공동체’는 막연하게 ‘삭막한 도시’와 대비되는 ‘따듯하고 인간적인 감정의 공간’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도시의 지역공동체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공동체에 대한 이런 막연한 감정이 일종의 환상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미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학자인 뒤르켐은 전통 사회에서의 통합은 오히려 개인의 자율성이 없이 기존의 사회규범과 가치를 기계적으로 반복할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의 아파트에서 우려되는 빗장 공동체(Gate Community)는 지역 공동체라는 도구를 통해서 도시 안에서 계급 분리를 극단적으로 실행한 예가 됩니다. 최근 오래된 도시의 유지와 재발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은 새로운 도시 문화 형성을 위한 공동체가 생겨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 반면, 결국은 도시 문화를 소비주의적으로 전용하고, 기존 거주자들을 축출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도시에서의 공동체는 지역보다 다른 요소들을 통해 만들어지곤 합니다. 산업혁명 이래 도시 공동체의 중요한 한 축은 ‘노동자’라는 계급 기반의 공동체였습니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에 대한 반발로 벌어졌던 ‘점거’운동 또한 이러한 공동체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또 미적 감수성이나 취향 등도 공동체 형성의 계기가 되는데, 20세기 중반 프랑스 사회학자 마페졸리는 일시적으로 유지되는 선택적인 공동체로서 ‘정서적 공동체’를 제시했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휴대전화, 인터넷은 공간적 간격을 지우고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스마트폰과 SNS는 이제 오히려 공간적으로 더 먼 곳에 있는 사람들과의 공동체가 근린보다 더 가깝고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막스 베버는 이미 1960년대에 이렇게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공동체를 ‘근접성 없는 공동체’라고 부른 바 있습니다.

전통적 농촌사회에 비해서 더 복잡하고, 파편화된 도시 속에서 공동체를 지역 단위로 만들어 내는 것은 이런 관점들에서는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도시 계획 속에서의 지역공동체 재건의 움직임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다양한 ‘물리적 근접성이 없는 공동체’와 동등한 선에서 지역공동체를 하나의 선택지로 제시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존재할 것입니다.

오늘의 도시 속에서의 삶은 점점 더 ‘가정’ 안의 것들을 밖으로 빼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던 일들을 하나 둘씩 도시 속으로 빼내고 가정은 점점 작아지는 것이지요. 청년 1인 가구가 거주하는 원룸, 오피스텔, 고시원 등은 점점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어 주방을 줄인다고 하지만, 한편에서 일어나는 ‘집밥’의 유행은 그들이 밥을 ‘안 해 먹는 것인지’, ‘못 해 먹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합니다. 주방을 줄였지만 침실이 늘어난 것은 아니어서, 방 안의 책상이 좁아 공부할 곳을 찾아 집 밖의 카페와 도서관으로 향하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가정은 맞벌이를 통해 가정경제를 지탱하면서 보육은 가정 안에서의 돌봄 대신에 어린이집을 선택합니다. 때론 어린이집을 마친 이후의 시간도 가족이 아니라 ‘도우미 이모’와 함께 합니다. 이런 단편적인 예들 속에서 도시의 사람들은 주방과 공부방을 가정에서 빼내어 도시 속에서 그때그때 식당과 카페 공간을 구매하고,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도 어린이집과 도우미 이모를 구매함으로써 대신합니다. 저는 극단적으로 가정의 영역을 줄여버린 도시의 삶을 종종 ‘삶의 외주화’라고 부르곤 합니다.

오랫동안 신자유주의적 도시의 삶은 ‘외주화’를 권장해 왔습니다. 가정과 지역의 영역에서 한 부분씩 구매의 영역으로 꺼내 올 때마다 흔히 그것을 ‘블루오션’이라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무수히 늘어난 외주화 된 삶을 모두가 비슷하게 구매할 수 없다는 것도 점차 분명해졌습니다. 그 격차에 대한 절망감이 국가의 공공서비스에 대한 욕구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의 복지정책에 대한 요구말이지요. 그러나 저성장시대에 접어든 국가가 시장을 통해 외주화 된 삶을 공공서비스로 온전히 충족 시켜주는 것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지역 공동체’에 대한 환상과 가능성은 어쩌면 이 지점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시가 처음으로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이 사업은 ‘사람의 가치’와 ‘신뢰의 관계망’을 만들려는 노력이라고 이야기 해왔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미 가정에서 이탈해버리고, 공공서비스가 보완해주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메꿔줄 수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써 지역 공동체를 재발견하겠다는 의도이고, 이를 위해 사라진 지역 공동체를 재건하겠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도시 사회학자 제인 제이콥스가 이야기했던 길가에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골목의 아이들의 안전에 도움이 되는, 근린이 서로의 삶을 일정 부분 보완하는 지역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지요.

국가 권력이 의도적으로 주민 공동체를 형성하고 재건한다는 부분에서, ‘마을 만들기’는 시민사회와 주민 스스로의 자치의 영역인 것처럼 묘사하면서 실질적으론 그들까지 국가의 미시적인 통치 내부로 포섭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공동체 재건은 단순히 일부 복지 수혜 계층에 대한 공공서비스 제공의 수준을 넘어서, 지역 주민 전반이 파편화된 구조에서 서로의 삶을 호혜적인 구조로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최근의 도시재생에서의 지역 공동체 형성은 지역 주민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다양한 성격의 여러 공동체를 동시 다발적으로 시도하고, 이들이 다층적으로 얽혀있는 형태를 띱니다. 연령, 직업, 취향 등 많은 ‘물리적 근접성이 없는 공동체’의 요소들이 전통적 공동체처럼 지역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새롭게 재건하는 지역 공동체는 과거처럼 기존의 규범을 답습하는 장벽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면서 ‘외주화된 삶’을 다시 지역 공동체로, 때로는 가정으로 복원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인천은 계속 비어있는 땅을 찾아내고, 땅이 없을 때에는 갯벌과 바다를 메워가며 높은 아파트로 도시를 채워가면서, 상대적으로 원도심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관심이 소홀했습니다. 이제 도시재생의 시대에서 사람들이 어떤 삶을 바라는지, 그 삶을 위한 지역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이제 깊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글/ 김윤환 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 J. Jacobs(2010),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그린비
– J. Scott(2010), 국가처럼 보기, 에코리브르
– D. Harvey(2014), 반란의 도시, 에이도스
– 김미영(2015),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공동체의 여러 형식, 사회와이론 27
– 박주형(2013), 도구화되는 ‘공동체’ – 서울시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에 대한 비판적 고찰, 공간과사회 23(1)
– 이정민,이만형,홍성호(2016), 근접성 없는 공동체의 사례 연구 – 충북 괴산 탑골 만화방을 대상으로, 한국지역지리학회지 22(3)

 




지역공동체 1. 아파트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을만들기, 지역공동체 또는 마을공동체, 주민자치, 도시재생. 대규모 철거 재개발 방식의 도시 정비 방식에 대한 반성 이후로 최근 몇 년 간 자주 들을 수 있는 단어들입니다. 뉴타운으로 대표되는 철거 재개발 방식에서 드러난 문제점-원 거주자들의 낮은 재정착 비율과 그에 따른 기존 지역 사회의 해체 등이 있습니다.- 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이죠.

서울시는 뉴타운 지정 구역을 해제하고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국토부에서도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지방도시의 낙후된 원도심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천시도 2014년부터 마을공동체만들기 지원센터를 운영 중이고, 원도심 지역에 도시재생사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강화군의 경우에는 이미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설립되어 있지요. 사업지역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대체로 도시기반시설이 낙후되고, 오래된 단독주택이나, 다가구/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곳들입니다. 이렇게 마을만들기나 도시재생에서 특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지역 주민들의 공동체를 재건하는 것입니다. 지역 주민 참여를 기본적인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사업 진행에 있어서 많은 주민들의 높은 이해와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역 공동체와 관련된 많은 연구에서는 공동체의 형성과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에 유리한 조건으로 시간적으로는 오랜 거주기간을, 공간적으로는 단독주택을, 소유형태로는 자가 소유를 꼽습니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한 지역의 주민 구성이 자주 바뀌지 않으면서, 접촉 빈도가 높을수록 유리하다는 것이지요. 이 관점에서, 공간적으로 단독주택과 대비되는 아파트는 오랫동안 지역 공동체 형성의 훼방꾼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과거에는 아파트의 획일적인 디자인과 배치가 ‘병영’에 비교되기도 하고, 주차장 위주의 외부 공간과 주민간 접촉이 줄어드는 동선계획 등으로 인해 주민 간 관계가 익명화, 파편화 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많았습니다. 최근의 아파트는 고급화 되는 과정에서 단지 외부와의 교류를 단절하는 ‘빗장 도시(Gated Community)’가 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룹니다. 과거에나 현재나 아파트 단지는 지역에 섬처럼 존재하며, 단지 밖 마을과 소통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아파트 단지가 이러한 취급을 받는 것에는 일면 억울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는 앞에서 이야기 한 ‘주민 구성의 안정성’의 측면에서 그러하고, 또 하나는 주민 자치와 협력의 경험적인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인천에 대기업에서 분양한 고층의 대단지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한 역사가 어느덧 30년이 넘었습니다. 전국적으로도 전체 주택 숫자 중 아파트의 숫자는 60%에 육박합니다.[1]  지역 공동체를 이야기 함에 있어서, 아파트와 아파트 거주자들을 배제하고 논의할 수 없어졌습니다.


위의 그래프는 2015년 인천시민들이 ‘어떤 형태의 집을 어떤 형태로 소유하고 있는지, 또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얼마나 오래 살고 있는지’를 정리한 것입니다.[2] 인천은 전체 인구의 절반이 5년 이내에 이사 경험이 있는, 주거 이동성이 큰 도시입니다. 40% 이상이 자가 소유를 하지 못하고 임대 기간에 맞추어 이사를 해야 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마을만들기, 도시재생사업 등이 수 년간에 걸쳐 주민참여를 이끌어내는 점진적인 것임을 떠올려보면, 이렇게 짧은 거주 기간은 주민들이 지역에 대해 애착을 갖기도 어렵게 하고, 참여의 결실을 맺기 전에 이사를 떠나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도 합니다.

반면 전체 인천시민 가구 중 50% 이상이 아파트에서 거주하는데, 이 중 절반에 가까운 가구는 5년 이상 현재 거주지에서 꾸준히 머물러 온 사람들입니다. 또한 아파트 가구 중 전체의 68%는 현재 거주 중인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도시에 대한 애착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다른 주거 종류에 비해서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파트 거주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이미 주민자치의 경험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입주자 대표회의, 아파트 부녀회와 같은 주민 모임은 단지 내 문제를 거주하는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주민자치의 경험이 됩니다. 마을만들기사업, 도시재생사업에서 많은 부분이 지역 주민들에게 공동체 형성의 필요성을 재인식시키고, 지역주민을 ‘조직화’하는 역량을 만드는 데에 투자되는데, 아파트의 이러한 주민자치의 경험은 이러한 역량을 미리 갖추도록 돕습니다. 최근 단지 주민에게 회의를 공개하는 등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이 늘어나는 것 또한 긍정적입니다.
최근 아파트 외부 공간에서 지상에 주차장을 없애는 기법이 보편화 되면서, 건설회사들은 이공간에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을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피트니스 센터나, 보육시설, 북카페 등을 넘어 최근에는 애견 놀이터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아파트 거주자들은 이런 공간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아파트의 문제로 지적되어 온 ‘주민 간 접촉 빈도’를 늘릴 수 있게 되고, 새로운 주민 커뮤니티가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커뮤니티 공간을 주민들이 스스로 운영하도록 한다면 공간 자치의 경험 또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천의 아파트 역사가 30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 노후화된 아파트에 대해서 리모델링과 재건축의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도시재생의 눈으로 아파트 단지를 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파트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 형성을 위한 여러 이점이 있는 만큼, 아파트 단지의 마을만들기, 아파트 단지와 인근 지역이 함께 꾸려가는 도시재생과 같은 새로운 시도들이 늘어날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1] 2015년 현재 전국 총 주택 재고 중 아파트의 비율은 59.91%, 인천은 55.24% (2015 주택총조사. 통계청)
[2] 필자는 인구총조사 상 소유 형태 중 ‘전세’, ‘보증금이 있는 월세’, ‘보증금이 없는 월세’, ‘사글세’를 ‘임대’로 정리. 주거 형태 중 ‘연립주택’과 ‘다세대주택’을 ‘연립/다세대’로, ‘비거주용 건물 내 주택’과 ‘주택이외의 거처’를 ‘기타’로 정리. 거주 기간 중 ‘1년 이내’, ‘1년-3년’, ‘3-5년’을 ‘5년 미만’으로 정리. (2015 인구총조사. 통계청)

글/ 김윤환(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 발레리 줄레조(2007), 아파트 공화국, 후마니타스.
– 박인석(2013), 아파트 한국사회, 현암사.
– 곽현근(2013), 지역사회 사회적 자본의 주거관련 영향요인에 관한 연구, 한국공공관리학보, 27(1).
– 김성수,김경준(1998), 지역사회 주민의 공동체의식에 관한 연구, 지역사회개발연구, 23(2).
– 김순은,권보경(2016), 도시공동체의 주민자치와 사회자본, 지방행정연구, 30(1)
– 이종수(2015), 주거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신뢰의 영향요인 분석, 한국주거학회 논문집, 26(1).
– 신중진,정지혜(2013), 지역공동체 회복을 위한 마을만들기의 역할과 과제, 정신문화연구 36(4)

 




대학, 기숙사와 도시

‘인천. 공간 다시 읽기’는 인천의 도시 공간에 대한 글입니다. 인천의 도시 공간 그 자체, 혹은 그 안에서의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명확한 찬반을 주장하거나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의 인천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엔 많은 대학교가 있습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육기본통계에 따르면 2016년 우리나라에는 339개의 대학이 있고, 2,831,169명이 이 학교들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일반대학, 교육대학, 산업대학, 전문대학 한정) 2015년 인구총조사에서 20~24세 인구 숫자가 3,385,935명이라고 하니, 최근 우리나라의 20대의 적어도 3명 중 2명은 대학을 경험한다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중 인천에는 2016년 10월 현재 본부를 두고 있는 대학이 7개가 있고, 70,023명이 소속되어 있다고 합니다. 타 지역에 본부를 두고 인천에 추가로 대학을 설립한 캠퍼스가 통계에서 빠져 있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인접한 서울이 48개 대학의 562,690명의 재적생이 있는 것과 비교하면, “인천의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많다고 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인천의 대학들이 겪는 어려움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기숙사 공급부족은 매우 심각한 편입니다. 인천에 있는 5개 대학(인천대학교, 인하대학교, 안양대학교, 인천가톨릭대학교, 경인교육대학교)의 평균 기숙사 수용률은 11.89%로, 광역지자체 중 최하위의 수준이고, 전국 국공립대, 사립대, 국립대법인, 교육대학, 산업대학의 평균 수용율(20.24%)에 크게 밑도는 수준 입니다. 2010년대에 들어 사회에 막 진입한 대학생들의 주거 비용과 주거 수준에 대한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음을 생각해보면, 인천의 대학들은 타 시도의 대학생들에게 그리 친절한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울의 많은 대학들은 2000년대 이후 부족한 대학 재정상황에서도 기숙사 공급을 늘리기 위해서 이른바 ‘민자 기숙사’를 앞다투어 도입했습니다. 기업이 기숙사를 건설하고, 20년 정도의 운영을 통해서 건설비용과 유지관리비용을 회수하는 이 ‘민자 기숙사’는 학생들에게 오히려 대학 인근 지역의 자취 비용보다 더 높은 주거비를 떠안게 했습니다. 대학들은 학생들의 주거복지마저도 상업화에 물들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기숙사 건설에 많은 재정을 투입하는 만큼 대학이 기숙사를 단순히 학생의 주거공급을 넘어 교육의 일환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습니다. 레지덴셜 칼리지(Residential College, 기숙형 대학)라고 불리는 이 교육 방식은 대체로 신입생, 혹은 대학 생활의 전반을 기숙사에서 의무적으로 거주하게 합니다. 기숙사는 단순 거주 공간을 넘어 학습과 공동체 활동, 사회체험, 재능 기부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교수-학생 간, 학생-학생 간의 교류를 확대하고, 이를 통해서 학생들의 학업 성취, 대학생활 적응, 사회적 발달을 위한 교육과 생활의 통합적 공간으로 재정의됩니다. 유럽의 전통적 대학 모형을 통해 만들어진 레지덴셜 칼리지의 운영은 미국에서 ‘생활-학습 연계 프로그램(Living-Learning Program, LLP)라는 이름으로 보편적으로 정착해 있습니다. 인천에서는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가 신입생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레지덴셜 칼리지를 운영하고 있고, 외국 대학이 모여 있는 인천 글로벌 캠퍼스의 경우는 레지덴셜 칼리지를 도입하지는 않지만 4개 대학 총 4,200여 명의 학생 정원에 절반 수준에 달하는 약 2,000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대단위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인천 글로벌 캠퍼스의 학생 수가 정원 대비 27% 선인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재학생 전부가 기숙사 거주가 가능한 것입니다. 거주 비용도 2인실 기준 한 학기(16주)에 100만원 선으로, 서울의 민자 기숙사와 비교하면 비교적 저렴한 편이기도 합니다.

갓 성인이 된 20대 초반의 학생들에게 레지덴셜 칼리지나 대단위 기숙사의 운영은 주거 비용을 경감시켜 주고, 학업 성취와 대학 생활의 적응, 다양한 경험과 대인 관계 형성의 측면에서도 많은 장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숙사를 통한 주거문제 해결이 모든 면에서 장점이기만 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 도시계획에 있어서 대학의 존재는 필수적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새로운 도시를 개발할 때, 많은 도시들이 기존 대학의 이전을 유치하거나, 새로운 캠퍼스의 개발을 시도합니다. 송도국제도시 개발 과정에서 인천대, 인하대 등 인천의 주요 대학은 물론, 연세대 국제캠퍼스를 서울로부터 유치하고, 유수한 외국대학의 글로벌 캠퍼스를 유치했습니다. 최근에는 시흥시가 서울대학교의 캠퍼스를 건립하려는 과정에 있습니다. 많은 도시들이 대학교를 유치하고자 하는 것은 산학협력과 인재유치와 같은 이유도 있을 것이고, 미시적으로는 대학과 대학생들이 도시에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활력을 불어넣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학생들에게도 도시 속의 대학은 큰 기회입니다. 도시 속의 대학을 다님으로써 도시에서 발생하는 사회문제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더 많은 연구와 학업의 동기를 얻거나, 대학에서 얻은 연구의 성과를 도시 속으로 더 쉽게 전달할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학교라는 담장 안의 기숙사 생활은 학생이 도시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줄이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학교 안에서의 많은 성취를 기뻐하는 동안, 학생 개개인이 도시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동기 부여의 순간과 경험을 놓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합니다. 최근 일본 도쿄의 많은 명문 대학들이 지방의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기숙사를 건립하는 노력만큼, 도시 안에서 주거를 구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확대하고 있는 것은 학생들의 주거 복지를 위해서 대학이 할 수 있는 일은 기숙사 건립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천의 대학들이 더 나은 교육환경 제공을 위해서 학생들에게 안정적이고 저렴한 주거 제공을 확대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기숙사 공급, 레지덴셜 칼리지 교육, 주거 보조금 지급과 같은 여러 방법들이 인천의 대학생들에게 대학의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 인천이라는 큰 도시 안에서 더 많은 다양성과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발전하기를 바라 봅니다.

(연세투데이 http://yonseitoday.yonsei.ac.kr/)

(인천글로벌캠퍼스 http://www.sgu.or.kr)

글/ 김윤환(도시공간연구자)

[참고문헌]
– 강대진(2015). 대학기숙사와 지역주민의 상생모색. 교육시설 22(6). 23-28
– 공효순(2016). 우리나라 기숙형 대학(Residence College)의 효율적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 홀리스틱교육연구 20(4). 67-84
– 김고은, 최막중(2014). 기숙사 건설과 임차료 보조에 의한 대학생 주거지원수단 선호 분석. 주택연구 22(4). 45-63
– 이병식(2014). 변화하는 대학, 도전과 과제: 연세대학교 레지덴셜 칼리지 교육. 교육개발 41(2). 38-43
– 장경석(2013). 대학생 주택정책의 현황과 정책과제. 도시와 빈곤 102. 21-34
– 대학알리미. http://www.academyinfo.go.kr
– 인천글로벌캠퍼스. http://www.igc.or.kr
– 한국교육개발원 (2016). 교육기본통계. 교육통계연보. 국가통계포털 (http://kosis.kr)
– ‘5천억’ 투자한 인천글로벌캠퍼스…왜 텅 비었을까?’. 노컷뉴스. 2016.7.4. (http://www.nocutnews.co.kr/news/4616773)
– ‘위기감 느낀 일본 최고의 명문대학들 “지방학생들, 오라” 손짓…왜?’, 동아닷컴. 2017.2.2.
   (http://news.donga.com/3/all/20170202/82686347/1)




배다리, 도깨비마을이 아닌 책마을

 ‘역사의 숨결, 문화도시 인천 동구’ 라는 문구를 자주 보게 된다. 인천 원도심중 하나인 동구, 동구에서도 특히 배다리는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100년이 넘는 근대건축물들과 1960년대의 생활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 6~70년이 넘게 책방문화를 이끌고 있는 책방지기들을 통해 그야말로 배다리마을만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 문화적 가치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드러내는 방법도 다양하다. 최근 모 방송 매체의 드라마 촬영지로 배다리헌책방이 문화상품으로 소비되면서 배다리는 그야말로 몸살을 앓고 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몇 십 명씩 줄을 서서 책방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있으며, 주말에는 밀려드는 차들로 인해 주차할 곳의 부족으로 불법주차까지 이뤄지고 있다.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던 썰렁한 동네에 관광객들이 몰려와 북적북적 활기찬 온기를 불어 넣어 주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기는 하다. 어찌 보면 즐거운 비명이자 투정인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배다리는 책이 있는 마을, 책 읽는 마을보다 드라마 촬영지로 더 유명해져가고 있다.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은 그 지역의 특성과 동떨어져서는 곤란하다. 적어도 배다리 헌책방거리는 차이나타운 자장면거리와 포토존이 되어버린 동화마을에서의 소비 방식과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관광객이 사진을 찍고, 기념하고, 즐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자장면거리에서는 맛있는 자장면 집을 찾아다니며 맛을 즐기듯이 헌책방거리에서는 읽고 싶은 책, 오래된 보물 같은 책들을 찾아다니는 즐거움이 따로 있는 것이다.

어제는 히잡을 쓴 외국인 관광객이 드라마촬영지인 서점 앞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오지랖이 발동했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 말레이시아에서 왔으며, 서울에서 한 시간이 넘게 걸려 왔는데 힘들다고 한다. 그렇게 힘들게 와서 사진 몇 장 찍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 마을 지도를 보여주며 마을을 소개하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기를 권했다. 볼 것과 보여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분별없이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 이벤트만을 내세워 겉핥기식 관광을 부추기는 일들은 자제해야 한다는 얘기다. 문화를 단지 싸구려 관광 상품처럼 ‘사람의 수와 돈의 가치’만으로 환산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밀려드는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기보다는,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문화들을 더 잘 드러내고, 가치를 재발견하는 작업들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동구청에서는 동네 주민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몇 년 동안 잘 농사지어왔던 텃밭 부지를 경작 금지시켰다. 배다리를 찾는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할 목적으로 꽃밭을 조성할 것이고, 이를 위해 포크레인으로 흙을 갈아엎겠다고 하여 주민들과 크게 마찰이 있었다. 한 번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관광객들을 위해 주민의 삶을 뿌리채 흔들어놓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유채꽃? 양귀비꽃? 어떤 꽃을 관광객이 좋아할까’를 고민하는 대신 해야 할 생각은 따로 있다. 관광객과 검증되지도 않은 경제 효과에 마음을 뺏겨 마을과 주민들을 구경거리로 만들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배다리를 역사문화마을로 가꾸며,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오고 있는 주민들의 뜻을 헤아리고 북돋는 것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올해는 배다리마을이 산업도로 건설로 두 동강이 날 위기를 지켜낸 지 꼭 10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마을공동체가 더 탄탄하게 형성되었고, 배다리 마을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담고 있는 많은 문화예술공간들이 자리를 잡았고, 오래된 책방들이 꾸준히 책 손길을 보태며 다듬어지고 있다. 책방이 단순하게 책만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꾸려오는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옷을 갈아입으면서 60년이 넘게 책방거리를 유지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기실, 이번 ‘도깨비’드라마 촬영지중 하나로 배다리가 뜨거워지면서 책방들도 시나브로 변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 집에 놀러오는 손님을 맞을 준비를 스스로 하고 있는 것이다. 쌓여있는 먼지를 한 번 더 털어내기도 하고, 책을 편안히 볼 수 있게 자리 배치도 바꾸고, 삐걱거리는 책장도 손질하고… 일요일에 쉬던 책방도 밀려드는 손님들을 위해 격주로 문을 열고, 가게 앞 낡은 화분을 손보기도 하며 서서히 단장을 하고 있다. 반짝하는 관광 상품에 눈을 맞추는 대신 더 다양한 책을 갖추고 손님들을 배려하느라 책방의 책손들이 바쁘다.

‘역사의 숨결, 문화도시 인천 동구’의 역사와 문화는 단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켜켜이 쌓아온 삶의 흔적이며, 지금까지도 살아내고 있는 삶의 현장이다. 오래된 도시가 품고 있는 매력은 그 시간만큼 발품을 팔아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배다리는 이상하고, 요상한 도깨비마을이 아닌, 가까이 보아야 예쁘고, 자세히 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는 곳이다. 느린 걸음과 여유로운 마음으로 천천히 발을 담그기를 권한다.

청산별곡 / 생활문화공간 달이네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