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큐레이션 – 2017년의 키워드들, 그리고 사랑

아쉬움은 지우고 기대는 품는다. 잊지 못할 한해였지만 다가오는 해의 새로움도 궁금하다. 올해 마지막 큐레이션은 2017년을 주도할 주요단어와 사랑으로 채운다.

20대 트렌드 키워드
 01

‘대학내일’이 2017년을 주도할 20대 트렌드 키워드를 발표했다. 주체적으로 홀로 섬을 의미하는 ‘나로서기(나로서+홀로서기)’, 궁극의 소비를 통해 자기만의 만족을 찾는 ‘겟꿀러’, 흔적 없는 소통을 나누는 ‘팬텀세대’ 등이 이에 속한다.

취업과 스펙에 집착했던 청년들이 ‘갭이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갭이어는 ‘학업을 잠시 중단하거나 병행하면서 봉사, 여행, 진로탐색, 교육, 인턴, 창업 등을 체험하고 그 안에서 흥미와 적성을 찾으며 진로를 설정하는 기간’을 말한다.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저돌적 삶에서 여유와 휴식을 즐기며 자신에게 집중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이들의 움직임이 2017년의 문화 흐름에 긍정과 명랑의 기운을 불어넣을 것이다.

트위터 코리아가 국내 이용자들의 트윗과 계정을 분석해 분야별 키워드 및 순위를 발표했다. 사회 분야에서는 대통령, 최순실, 촛불집회, 세월호가 1위부터 4위를 차지했다. 음악분야에서는 방탄소년단,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분야에서는 복면가왕이 1위에 올랐다. 가장 많은 팔로우 증가율을 기록한 언론사는 허핑턴포스트. 문장이 아닌 단어 하나로, 어느 때는 전부 숫자로만, 드물게는 이모티콘을 타이틀에 배치해 임팩트를 준 보도 효과를 톡톡히 본 것 같다. 때때로 그림언어가 문자언어가 되고, 둘이 조화를 이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가 돈이 없지 생각이 없냐, 2017년 키워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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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는 어떤 단어가 대한민국을 정의하고 주름 잡을까. 한국일보가 트렌드 도서를 통해 2017년의 풍경을 선보였다. 건강을 상징하는 웰빙이 음식뿐만 아니라 생활 곳곳에 녹아드는가 싶더니 올해 먹방과 쿡방으로 넘어온 라이프스타일에서 건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전문가들은 미래 지향적인 건강 개념이 혀끝에서 느껴지는 자극이나 지금 당장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에 압도당했다고 말한다. 내일의 안위가 보장되지 않는 헬조선 국민들에게 건강은 사치일까?

미래가 불확실하므로 결혼하지 않는다. 혼자 살면서 고양이를 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린아이 사진에는 ‘네 자식 너나 귀엽지’라는 댓글이 달리지만 고양이 사진에는 ‘네 고양이 나도 귀엽지’라는 호의적 멘트가 붙는다.

내년은 프로 불편러들의 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여성혐오, 장애인 조롱, 인종차별 등 사회적 약자에 가해지는 폭압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 최근 사전 허락 없이, 혹은 남녀 배우 중 한 사람에게만 통보한 뒤 키스신(베드신)을 촬영한 것에 대한 프로 불편러들이 비판이 이어졌다. 정치적 올바름(PC)이냐 지나친 트집 잡기의 ‘PC 정신병’이냐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누군가 사소하게 폄하한 일이 어떤 이에게는 트라우마가 되고, 잠깐의 불안이 진한 상처로 남을 수 있음을 잊지 말자.

따듯함에 대한 갈망, 휘게 라이프

03

휘게(hygge)는 행복한 감정, 긴장을 풀어도 되는 느낌을 말한다. 따듯한 욕조에서의 반신욕, 친구가 건넨 핫팩, 고구마를 호호 불어먹는 시간 등이 ‘휘게 라이프’의 작은 모습이다. 옥스퍼드 사전이 휘게를 올해의 단어 후보로 뽑았다. 단순함을 추구하는 흐름 속에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강조하는 삶.

휘게는 웰빙에서 유래한 덴마크어로 “휘겔리한 시간 보내세요”처럼 사용한다. 이 표현에는 어지러운 환경에서의 스트레스를 가족, 친구, 공동체 구성원들과 더불어 풀고 편안함을 얻고자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퇴근 후 아늑한 곳에서의 차 한 잔, 함께여서 즐거웠던 산책 등이 충만한 기쁨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다.

[연애를 영화로 배웠네] 연애, ‘올해도 글렀어’라는 당신에게

04
‘연애를 OO으로 배웠네’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들이 문화콘텐츠에 연애 경험담을 엮어 쓰는 글이다. “다들 나라 망치느라 바쁜 와중에도 부지런히 외모도 가꾸고, 썸도 타고, 결혼도, 출산도, 이혼도 잘 하셨구나.” 그런데 나는? 올해 대체 뭘 했지? 연애는 또 물 건너 간 건가?

‘500일의 썸머’로 연애를 배운 어느 기자의 팩션이 연애 포기자, 혹은 연애 불능자를 위로한다. 영화에는 “누구의 여자친구가 되는 건 불편해요. 남녀가 만나면 누군가 상처를 입죠.” 같은 고백과 “당신이 틀렸어요. 언젠가 알게 될 거예요. 사랑을 느꼈을 때.” 같은 응답이 넘쳐난다. 연애를 젊은 남녀의 사랑으로 제한하지 않는다면 영화 속 수많은 재잘거림과 그 대화를 인용한 기사 본문에서 진심어린 삶의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하늘이 점지해 놓은 그 누구를 기다리는 톰인가요? 아니면 그런 환상은 종량제봉투에 담아 버리자고, 지금 서로 즐거우면 그만 아니냐고 생각하는 썸머인가요?”

어떤 상황에서는 쿨 피플이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부뚜막 고양이처럼 날뛰는 인간이 된다. 내 성격 때문일까, 상대의 조건 때문일까, 관계가 주는 기운 때문일까? 날씨나 바이오리듬에 민감한 성정을 타고난 것은 아닐까? 시시때때로 돌변하는 자신에게 우리는 올해도 똑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나는 누구인가? 올해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연애뿐만 아니라 멋지게 뽐내고 싶었던 성과도 올해는 글렀다. 하지만 어김없이 신선한 새해는 오고, 우리는 또 누군가를, 그리고 또 다른 나를 만날 것이다. 굿 럭.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뉴스 큐레이션(2016.12.6~12.19)

더 이상 ‘큰’ 문화를 외면할 수 없었다. 나라와 문화를 짚어야 했다. 12월 첫째 주 뉴스 큐레이션은 다소 무겁다. 그만큼 진지하다.

한 떨기 꽃잎 같던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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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이나 창업이 아닌 ‘창직’(직업을 창조하다)이 대세라더니 ‘문화창작자’라는 직업도 있다. 문화창작자 전현주 씨가 한양도성을 걸었다. 높은 곳에 오르면 “야호!”라고 외칠 법도 한데 지나가던 사람들은 청와대가 어느 쪽이냐고만 묻는다. 어느 하루, 옛사람들은 해도 뜨기 전에 집을 나서 짚신과 고무신을 신고 도성 안팎을 걸었다. 산꼭대기에서 궁궐을 보고 ‘저기 우리 임금이 산다’고 감탄했다. 요즘 사람들은 감탄에 인색하다. 대통령이 사는 곳이 궁금해 먼 길 올라온 사람도 ‘야호’나 ‘히야’를 내뱉지 않는다. 눈 크게 뜨고 내려다보기만 한다. ‘둥근 모양 한 떨기 꽃잎’은 한양을 주제로 한 과거시험에서 나왔던 표현이다. 포근하고 아련하다. 오늘의 서울도 둥근 한 떨기 꽃잎 같을까? 성곽 어느 즈음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도성길을 걷던 행인은 자연스럽게 그의 시를 떠올린다. 잊으려야 절대 잊히지 않는 구절을 읊조리면서 땀을 닦고, 또 닦는다. 입술을 침으로 적시고 오늘의 서울과 이 나라를 호명한다.

아무것도 하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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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경전 ‘예기’에 나오는 이념이다. 천하공전, 즉 진리가 행해지면 천하가 공적인 것이 되고 검증된 이들이 등용돼 믿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는 뜻이다.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념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념의 실현은 어렵다. 나쁜 역사는 반복되고, 지겹게 되풀이된다. 정원의 뱃사공이었던 등평에게 빠져 억만금을 뿌린 문제가 있었고, 한언에게 빠져 온갖 혜택을 베풀다 그가 죽자 그의 동생으로 갈아탄 무제가 있었다. 무제는 신선술이니 방술이니 하는 도술에 현혹됐고, 어디선가 도깨비처럼 나타난 사이비 도사들은 불로장생을 위시해 욕망을 악용했다. 옛말에 ‘군주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요구가 있었다. 공자도, 한비자도, 도가에서도 군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능히 다스릴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변명도 이타적 인간을 전제하면 믿을 게 못 된다. 모름지기 군주는 사리사욕에 휘둘리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되, 욕망 다스리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 나라의 군주가 배워야 할 것은 ‘베껴 읽기’가 아닌 ‘옛 것 읽기’ 습관이다.

사람됨에 기여하는 문화
 03

여기, 팔순 노인의 말을 들어보자. 지난 50년간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했고, 문학과 예술, 정치, 사회에 두루 관심 보였던 인물이다. “문화 콘텐츠 장사였지 사람됨에 기여한 문화는 아니었다.” “자유와 규범 사이에도 질서는 있어야 한다.” “타인의 존중이 자신의 인간성에 충실한 것이다.” “거대한 우주에서 사람은 다 낮은 존재다. 진정한 자기 인식은 저절로 자기를 낮춘다.” 말로 내뱉는 것은 쉬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노인, 최근 200자 원고지 6만5000 장에 달하는, 19권의 전집을 출간했단다. 말 하는 건 그런대로 쉽다면, 글은 어떨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또 어떻고? ‘상대방에게 아름답게 절하는 자세는 누구나 다 좋아한다’는 그의 마지막 문장을 곰곰 생각해본다. 말 따로, 행동 따로. 거짓 고갯짓, 거짓 참회, 거짓된 반성이 너무 많다.

지옥에 빠진 일상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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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그런 그림이. 당시 SNS에서 난리가 났었다. 그 그림은 2014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 걸리지 못했다. 마당에 건다는, 광장에 건다는 걸개그림. 민중의 해원과 공동체의 신명을 위해 그려 세상에 소개한다는 그림. 특별전에 걸리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아귀도와 같은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재구성했다.” 4대강, 촛불, 위안부, 강정, 팽목항이 요리조리, 시민군 청년과 바리데기 처녀가 음양으로 얽히고설켜있다. 작가는 불태우고 녹인다. 뾰족한 걸 세운 뒤 탁탁 내리친다. 2년 전의 이 그림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향해 존재하고 있을까. 다시 한 번 ‘세월오월’을 낱낱이 봐야 한다면 그 시간은 왜 지금, 여기여야 할까.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뉴스 큐레이션(2016.11.15~2016.12.05)

2017년 최고의 키워드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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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잘 살자는 움직임이 뜨겁다. 촛불 하나는 우습지만 모이면 붉디붉다. 다수에 묻혀 나를 져버리자는 게 아니다. 나도 좋고, 당신도 좋은 게 좋은 거다. 가습기 살균제 파동, 경주 지진 피해,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사건’ 등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이 높은(늘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함께 잘 살자고 외치면서도 내가 누구인지 고민하고, 앞으로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지 걱정한다. 2017년, 대한민국의 트렌드는 ‘나’다. 부를 좇고, 내 집 마련으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집요함이 아닌 이기적인 휴가로 나만의 만족을 찾고, 간섭받지 않는 삶을 사는 걸 말한다. 회사도, 사회도, 국가도, 내 미래를 책임지지 못한다. 싫은 게 있다면 아웃을 외침. 때때로 주체적인 결별 선언이 필요하다.

관태기에 지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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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관계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인간관계에 권태를 느낀다. 혼자가 편하다. 스트레스 받고 눈치 보는 관계를 유지하느니 차라리 자발적 아웃사이더를 선택한다. 3포 세대, 5포 세대, 7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 집 마련, 희망, 꿈)까지 보이지 않는 힘에 눌려 ‘포기’의 숫자를 늘리고 있는 청춘, 2030을 대변하는 많은 이름들. 관태기는 관계와 권태기의 합성어다. 인간관계에 따라붙는 말말말. ‘스트레스’, ‘힘들다’, ‘어렵다’, 그리고 인맥과 스펙. 에라, 모르겠다. 영화도 혼자 보고(혼영), 밥도 혼자 먹고(혼밥), 술도 혼자 마시자(혼술).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일 뿐이라고? 얼마든지 그렇게 살아도 외롭지 않을 자신 있다고?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그게 거짓 처방일지라도.

마음약방
03

서점과 책방이 다르듯, 약국과 약방은 다르다. 공간과 명칭의 재발견, 혹은 다시보기는 소수의 손길을 거쳐 시대와 세대에 의해 재정의된다. ‘방’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아담하고 따듯한 이미지. 친구가 내민 종이 상자에 ‘마음약방’이라고 적혀 있다. 상자를 열어보니 영화처방, 그림처방, 요리레시피, 산책지도가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작은 거울 하나. 마음을 치유하는 자판기에는 ‘용기 부전, 예민성 경쟁 과다증, 꿈 소멸증, 자존감바닥 증후군, 미래막막증, 월요병 말기, 급성 연애세포 소멸증’ 등의 병명이 적혀 있다. 달랑 500원을 넣고, 처방이 필요한 증상을 누르면 퐁당, 약이 떨어진다. 진짜 그 병을 앓고 있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런 병 따위 없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처방약은 곱게 받아든다. 플라시보 효과가 선보이는 ‘신약 월드’가 펼쳐질지도 모르니까. ‘마음약방’은 서울시민청과 대학로 서울연극센터에 1, 2호점이 있다. 약효과를 본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조금씩 웃고 있다.

1인 가구 가족사진전
  04

혼술, 혼밥, 혼행(혼자 여행하기)에 이은 혼찍(혼자 가족사진 찍기)의 탄생. 1인 가구의 주인이 가족사진을 찍으러 온다. 혼자 사는 1인 가구에게 가족은 무슨 가족? 반려 강아지, 고양이, 만화책, 노트북, 핸드폰이 그들과 함께 한다. 가족으로 작업복을 꼽고, 가족으로 이어폰을 가지고 온다. 허공을 데려온 사람도 있다. “여백 같은 시간에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은 혼자 있는 공간의 압박감이에요. 가족 같은 물건이 많이 있지만 혼자 사는 삶의 무게감을 표현하고 싶어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어요.” 지난여름, 인천발전연구원은 ‘싱글이 행복한 소비 도시 인천 만들기’라는 보고서에서 현재 약 25만명인 인천의 1인 가구수가 2020년에 28만8천만, 2035년에는 40만 가구에 육박할 것으로 내다봤다. 15년 후쯤이면 인천지역 전체가구의 30%가 1인 가구일 거라고 한다. 인천시, 인천문화재단 등이 후원하는 ‘1인 가구 가족사진’ 프로젝트는 아트팀 ‘쁘레카’가 서울 합정동에서 진행한다. 12월 22일까지 참여할 수 있다.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뉴스 큐레이션(2016.11.01~2016.11.14)

가만한 당신
지난 몇 주간 ‘성’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성추행, 성추문. 김 씨 박 씨 모 씨. 여성인 나는 피해자와 같은 방에 앉아있는 심정으로 기사를 읽었다. 한숨을 푹푹 쉬다가 아차, 큐레이션 마감해야지. 좋은(?) 문화계 소식 찾아 클릭 삼매경. 전자책을 무료 배포하는 무보수 CEO와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꼼꼼하게 정리한 기사를 스크랩한다. 사회혁신 디자인을 외치는 에치오 만치니 인터뷰와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도 있다. 11월 첫째 주 큐레이션은 ‘가만한 당신’으로 시작한다.

[가만한 당신] 요세프 하마츠

01
“그만한 일로 상처받지 마.” 당사자에게는 분통 터지는 충고다. ‘그만한 일’이라니. 상처 받은 자의 인생길을 좌에서 우로 꺾었을 수도 있다. 누군가 전쟁의 종언을 선언했다고 해서 모두에게 진짜 끝은 아니다. 요세프 하마츠는 나치 전범들을 찾아 복수를 감행했던 유대인 조직의 리더였다. 비밀결사조직 ‘나캄(어벤저스)’은 “모든 살인과 대량학살에 대해 참고만 살지 않는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싸웠다. 요세프 하마츠는 작전을 계획대로 행하지 못한 걸 안타까워했다.

지금은 상식으로 알려진 가치를 일구려고 노력했고,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았고, 죽은 뒤 산 자의 기억 속에 아련히 존재하는 이들의 삶에 주목하는 ‘가만한 당신’ 시리즈. 최윤필 선임기자는 평생 베트남전과 함께 산 저널리스트 로버트 팀버그, “내 장애는 당신들의 영감이 아니”라고 말했던 코미디언 스텔라 영의 삶을 촘촘하게 기록한다. 가만히 우러러볼 필요는 없다. 그들의 인생, 혹은 나의 오늘을 가만가만 질문해보는 걸로 충분하다.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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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치오 만치니가 정의하는 디자인은 ‘실용성이 있으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도록 의상이나 제품, 작품, 건축물 등을 설계하거나 도안하는 일’을 넘어선다. 21세기는 기술혁신이 아닌 사회혁신이 디자인의 자극제가 된다. 의미 있는 사례를 남들보다 빠르게 인식하고, 사람들이 더 쉽고 지속가능하게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 디자인의 역할이다.
자전거가 똑똑한 운송수단으로 탈바꿈한 이유? 정답은 디자인이다. 새로운 자전거 주차장, 공유자전거와 결제 체계, 자전거 도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늘 해오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선택을 하는 것,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려면 디자인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 과도한 스토리텔링에서 탄생한 조형물이나 표지판은 혁신은커녕 역사의식을 퇴보시킬 뿐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인천의 중구와 동구에 펼쳐진 곱지 않은 디자인은 과연 합리적일까. 혁신적일까.

그레그 뉴비 “읽는 것이 힘…누구나 읽을 자유 누려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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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지적정보를 전자책으로 만들어 무료 배포하는 ‘구텐베르크 프로젝트’(Gutenberg Project). 1971년 7월 4일, 미국 독립선언문을 전산화해 지인들에게 e메일로 배포한 것이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2016년 현재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홈페이지(www.gutenberg.org)에는 5만3000여권의 전자책이 무료로 등록돼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등의 작품, 핀란드 문학을 영원히 보존하고 싶다며 핀란드 청년이 자국어 책을 스캔해 올린 것, 미국 오리건주 농부가 자신의 아몬드 농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한 것 등. “역사의 혁명적인 사건들은 모두 문서화에서 시작됐습니다. 읽는 사람들에게 힘이 있습니다.”

밥 딜런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04
본명은 로버트 알렌 짐머맨. ‘밥 딜런’은 영국 웨일스 출신 시인 딜런 토마스의 이름에서 따 왔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민요에서 비상업적이고 공동체적인 가치를 재발견해 현대적으로 바꾼 포크음악. 포크송을 청년들의 상징으로 만든 대표주자. “사람이라고 불리기까지, 그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만 하나? 포탄 사용이 영원히 금지되기 전에 얼마나 많이 포탄을 쏘아야 하나?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에 흩날리고 있네.” 아임 낫 데어(I’m Not There)는 밥 딜런의 7가지 자아가 투영된 영화다. “밥 딜런 음악은 나를 거의 문학적으로 사로잡았다” vs “노망 난 히피들의 썩은 전립선이 향수에 젖어 주는 상” 12월 10일, 그는 시상식장에 나타날까? 사진과 영상, 주간지와 일간지, 웹진 기사 수십 개가 링크돼 있는 단 하나의 글. 부족한 듯 넘치는 밥 딜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타인의 하루를 훔치는 여자 최성문

05
텍스트보다 이미지에 주목할 만한 기사 하나를 소개한다. 기자가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라디오 방송국 복도였다. 지난해 12월 31일이었는데 그녀는 이듬해가 아닌 그해 달력을 들고 왔다. “365명이 만든 달력입니다. 노숙인, 외국인 노동자, 탈북 새터민, 발달장애 어린이, 암병동 환자, 문화예술인, 농촌 주민이 각자 숫자 하나씩을 써서 만든.” 지난 10월에는 달력 가제본을 어깨에 들쳐 메고 나왔다. 그때 그녀를 담은 사진은 어떤 색깔일까. 어떤 분위기일까. 한국으로 시집온 필리핀인 레오노라 이 팍손이 쓴 숫자, 몽골과 터키, 네팔에서 받아온 숫자들. 타인의 하루 하루로 모두의 하루를 꿈꾸는 삶. 하루를 쓰는, 하루를 사는, 하루를 공유하는, 여기 사람의 얼굴이 있다.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뉴스 큐레이션(2016.10.18~10.30)

동시대성
  01
쉽게 말하면 ‘동년배’ 정도의 의미일까. 컨템포러리(Contemporary)는 신세대, X세대, 실크세대 등 특정 기간으로 묶인 ‘동일 세대’를 뜻하는 용어다. 혹은 현대, 현대성, 현대인을 지칭한다. 지금의 예술은 현재라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에 의해 탄생된다. “시류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의 틈을 만들어내는 것, 그 시대와 거리를 두고 시차를 만들어내는 것. 상관없어 보이는 여러 장면을 합치는 것. 시간들을 함께 놓기.” 이건 철학자들의 이야기. 다른 나라의 예술(인)과 우리나라를 연결할 것 없이, 여기 살아있는 예술가들을 ‘동시대성’으로 이어붙일 것 없이 육체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늙는 인간 개개인을 가여워하자. 연습도 많이 했고 연주도 뛰어나지만 ‘세대’에서 좌절한 어느 기타리스트에 관한 짧은 이야기.

나의 모든 사랑이며 영원한 전부인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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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고유명사가 아닌 숫자로 시작한다. 너는 호모 사피엔스 7341874089명 가운데 한 명이고, 집에서 직장까지 58분이 걸리며, 하루 평균 2074㎉를 섭취한다. 지난해 먹은 라면은 일흔여섯 개고 1년에 육류를 47.6㎏ 정도 먹는다. ‘너’를 설명하는 어떤 표현은 네 옆의 누군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스마트폰 중독인 너, 자녀 1인당 양육비로 3억을 쓰는 너, 부부의 연소득 1년치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절대 빚은 갚을 수 없는 너, 자살률 1위에 빛나는, 인구 10만명당 28.5명이 자살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너.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 호모 사피엔스는 말한다. 이런 시대에도, 이런 나라에서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다고. 사는 게, 잡은 줄을 탁 놓아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귀한 것이라고. 천년만년 살아남으라고.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알겠니? 너, 그런 너를 위한 콩트. 나는 너다.

스마트폰이 진짜 우리의 두뇌
  

 ‘세대’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역사적 구분, 출생연도, 생애주기 단계에 따라 수많은 세대 용어가 만들어지고 또 사라진다. Z세대는 1995년 이후에 태어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를 붙들어 맨다. 그 이전 세대는 성인이 된 뒤에 디지털 문화를 겪었지만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혹은 유년시절부터 경험했다. 호모 사피엔스(지능을 가진 현생인류)에서 호모 디지쿠스(디지털 시대의 신인류)로의 진화. 호모 디지쿠스들은 인터넷(모바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영상매체에 친숙하고 텍스트도 이미지처럼 덩어리 단위로 읽는다. 선생, 지식의 권위도 달라졌다. 교실 안에서든, 교실 밖에서든 어른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엄지세대는 아주 자연스럽게 두 눈 앞에 혹은 두 손 안에 자기 머리를 들고 다닌다. 그 머리는 엄청난 양의 정보가 저장되어 있는 가득 찬 머리다.” 지식은 자신의 스마트폰 속에 있다. 차이는 다름을 만들어낸다. Z세대뿐이겠는가. Y세대, 밀레니얼 세대….

가난한 자, 시방 위험한 짐승들
 
 04

가난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비리나 부정부패를 저지르기 쉽고, 성격도 원만하지 않아 조직문화에 융화되기 힘들다. 설마 그럴까? 기자는 여기저기 의견을 묻는다. “가난을 극복한 게 자랑은 아니니까요.” “많은 개인적 경험 탓에 회사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에요.” 가난을 전염병으로 여기며 기피해온 사회. 가난을 숨기는 시대의 에티켓을 따르는 사람들. 대개 가난하지만 아무도 가난한 척 하지 않는 시대.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미당의 시를, 기자는 떳떳하게 인용하지 못한다. “가난이 ‘댁에게 이런 꼴을 보게 해 몹시도 송구한’ 바바리맨 같다”는 비유가 못내 서글프고, 한심하고, 쓸쓸하다.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뉴스 큐레이션(2016.10.04~10.17)

샤프심으로 매트릭스를 연출한 상상의 비결

01
‘T Times’는 뉴스 홍수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꼭 읽어야 할 지식과 정보, 꼭 느껴야 할 감동, 내 삶을 바꿀 통찰을 전한다. 카드뉴스는 이미지 중심의 시대에서 문자 텍스트를 멀리하는 현대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물건을 전혀 다른 이미지로 표현한 일본의 아트 디렉터 타나카 타츠야 이야기. 그의 상상과 손을 거치면 도넛이 암벽이 되고, 메모리칩이 그랜드 피아노로 변신하고, 초밥이 침대가 된다. 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미니어처 사진 일기’를 올린 그는 사물을 보는 색다른 관점을 강조한다. 소인과 피그미족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새로운 생각을 끄집어낼 수 있다. 그의 기발하고 세밀한 미니어처가 우리의 일상을 자극한다.

야한 소설 쓰는 여학생과 변태교사, 그들의 용기
02
‘성’에 대한 모든 궁금증이 ‘빨간책’에 들어있다. 극본, 호연, 연출의 조화로운 3박자로 호평 받은 드라마스페셜 ‘빨간 선생님’은 1980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움과 추억을 소환하는 ‘응답하라’ 시리즈와 달리 ‘빨간 선생님’은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좀 더 극적으로 담아냈다. 속물 선생이 사랑에 눈 뜨게 되지만 그의 인간적인 선택은 비극을 담보로 한다는 이야기. 자세한 줄거리는 아래 기사를 참조하시라. 청소년들의 호기심, 존경과 애정이 오가는 사제지간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참신한 소재에 대한 기대에 더해 새로운 PD와 작가 발굴의 장인 드라마 스페셜은 앞으로 아홉 작품을 더 선보일 예정이다.

주먹을 불끈 쥔, 당당하고 우아한 소녀
   03

오는 10월 29일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광장에서 열린다. 소녀상 제작을 맡은 김창기 작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멀리 일본을 응시하며 서 있는 당당하고 온화한 소녀상을 만들었다. 김운성 작가가 조각한 ‘원래의 소녀상’이 좋은데 왜 바꾸느냐는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인천만의 이미지를 넣어야한다는 강박도 마음에 부담이 됐다. 김창기 작가의 소녀상은 주먹을 불끈 쥐고 서 있다. 얼굴은 온화하지만 손발에서 긴장이 느껴진다. 초등학교 6학년 딸아이를 세워 아이의 발을 모형 떠서 만들었다. “아빠 나 그렇게 고생 안 했는데, 그렇게 아파하지 않았는데.” 아이의 말에 울컥, 작업하면서 운 것도 여러 번이었다. 전국에 퍼져있는 평화의 소녀상, 뜻은 하나이면서도 모양은 하나가 아니다. 오른손 끝에 나비가 앉아있고(광주), 나비 날개를 뒤로 한 채 날아오르고(이화여대 정문), 긴 머리를 땋은 버선발의 소녀가 앞으로 나아간다(부천). 앞모습은 없다. 김 작가가 만든 앞모습은 거울이고, 자신을 보게 하는 그곳에 ‘반성의 의미’를 담았다.

 모바일 드라마, SNS 예능의 인기
 
04

웹 드라마는 ‘모바일 드라마’ 또는 ‘SNS 드라마’로 불린다. 10분 안팎의 짧은 러닝타임, 기존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소재로 포털사이트와 유튜브, 페이스북 등 SNS 플랫폼을 통해 방송된다. 여성 동성애, 조선시대로 타임슬립한 여고생, 다양한 남자친구의 모습을 1인칭 시점으로 촬영한 것 등 내용과 촬영 기법이 독특하다. 아이돌 멤버의 대거 출연도 기존 드라마와 다른 점이다. 웹예능의 경우 불법 도박, 세금 문제, 이혼 등 출연자들의 과거를 거침없이 공개하는 등 과감한 방식을 시도했다. 웹콘텐츠의 시장은 밝다. 2013년 7편, 2014년 23편에 이어 지난해에는 67편으로 제작편수가 뛰었고, 올해는 200여 편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짧아지고, 편해지고, 가벼워진다. 이 변화가 대세고 흐름이라면 ‘잘’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관건은 콘텐츠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느냐다.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뉴스 큐레이션(2016.09.20~10.03)

요약이 당신을 유혹한다.
01
스압 주의. 게시글이 길어 스크롤을 계속 내려야 하니 그 압박에 주의하라는 말이다. 읽기 싫으면 누르지 말거나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 신조어의 생애주기는 점점 짧아진다. ‘스압’은 지고 ‘요약’이 뜬다. 짧고 간결하게 내용을 전달하는 ‘정보 다이어트’가 인기다. 매체는 넘쳐나고 알고 싶은 건 많다. 400쪽 분량의 책을 20분 만에 ‘읽어내고’ 구매를 결정한다. 신문의 긴 호흡보다 핵심만 간추린 카드뉴스에 호감을 갖는 독자가 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 않아도 드라마와 예능의 줄거리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다양한 정보를 빠르게 읽어내면서 피로를 최소화하기. 콘텐츠 과잉의 시대, 요약이 당신을 유혹한다.

언젠간 쓸모 있을지 모를 짧은 지식
 02
‘아르바이트’는 일/노동을 뜻하는 독일어. 우리나라에서는 기간제 일자리 혹은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로 정착했다. 독일 격언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아르바이트 마흐트 프라이)’는 나치가 강제수용소 정문에 이 문구를 걸었던 역사 때문에 현재는 배척받는 문구가 됐다. 프리랜서의 ‘랜서’는 창을 의미하는 ‘랜스’에서 나왔다. 돈을 받는 대가로 창을 들고 싸워주는 용병이 현재의 자유계약 개인사업자를 뜻하는 단어의 어원이 됐다. 당장은 쓸데없지만 언젠가 쓸모 있을지 모를 짧은 지식. 더 궁금하면 아래를 클릭하시라. 총 440개의 지식이 올라와 있다.

자크 아탈리의 ‘21세기 사전’
 
03

작가이자 칼럼니스트 고종석 씨가 친구에게 하듯 편하게 말한 지 꽤 됐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미래를 헤아려보는 건 힘든 일이야.”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는 ‘21세기 사전’(1998년)에서 영어가 보편어가 되지 않을 것,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가 나타날 것, 다시 ‘유목’과 ‘유목민’을 중심으로 한 유목 문명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고종석은 아탈리와 동의하거나 혹은 다르게 생각한다. 21세기 끝 무렵이 되면 (문학적 전통이 깊은 언어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영어가 보편어로서 전 세계를 평정할 것이고, 장기적으로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이 21세기 안에 이뤄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탈리가 예측한 지금 이 세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도 없고, 마냥 부정할 필요도 없어. 우리의 경험이나 상상력에 기반해서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버리면 그만이야. 아무튼 과거(불과 20년도 안 된 과거이지만)에 쓰인 ‘현재에 대한 예언서’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야.”


당신은 정상인입니까
 
04

13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대상 수상작 ‘내추럴 디스오더(Natural Disorder) 2015’. 덴마크로 입양된 한국계 남성이자 뇌성마비 장애인 야코브 노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장애 때문에 겪는 취업‘장애’, 장애에서 탄생한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 등을 연극, 애니메이션 등으로 표현했다. 미래의 DNA 기술이 장애 아이를 걸러내는 데 쓰일 거라는 전망 속에서 ‘미래에 남지 않을, 멸종할 인류’로 살아가는 불편을 예술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담겼다. 인간은 누구나 정상성의 압박을 받는다. 이 사회에서 제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강박. 그 과정에서 타자를 배제하고 묘한 차별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쉬쉬하는 추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궁정의 광대” 야코브 이야기.

5전 국민이 인천을 보고 있다
 05

드라마는 꼭 여기서 찍어야 한다는 법도 없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소, 바로 송도국제도시다. 청라 커널웨이 수변공원이 ‘애정신 장소’로 주목 받을 때 송도에서는 ‘주인공 집’이 조명된다. ‘닥터스’의 금수저 의사 진서우(이성경)를 위한 송도 오크우드 프리미어 호텔의 120평 최고급 펜트하우스, ‘동네변호사 조들호’의 조들호 전 부인(박솔미)는 더샾퍼스트월드 아파트 63층에서 ‘살았다’. ‘W’의 강철도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송도를 질주했다. 인기 장소로의 급부상은 넓은 도로와 적은 차량 덕분.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혜리)이가 뛰어다니던 부평 십정동 열우물 마을은 철거를 앞두고 인적이 드물었지만 드라마 영향으로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지 않는 도시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인천만큼 공항과 항구, 섬과 달동네, 원도심과 신도심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곳은 드물다. 마약 밀매, 범죄와 폭력 이미지에서 벗어나 ‘키스하는 도시’로의 반가운 변화.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뉴스 큐레이션(2016.09.06~09.19)

‘친구와 술 한 잔’ 하기 위해 시인은 두 달 동안 시를 쓴다.
01
늦여름, 혹은 초가을의 기운도 없이 거인의 발로 성큼 ‘가을’이 왔다. 시를 읽기에도, 술 마시기에도 좋은 계절. 오랜만에 청탁 전화를 받고 시인은 그날부터 시를 생각한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잠을 자면서도 시재(詩材) 생각뿐이다. 친구의 호출도 마감 이후로 미룬다. 수십, 수백 시간 만에 완성한 시를 보내고 원고료를 받는다. ‘가을이니까’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신다. 두 달간 쓴 시를 보내고 받은 돈을 쓰는 데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두 편에 5만원. 20만원을 받으면 좀 나을까? 문인들은 시를 ‘계산’하는 일이 까다롭다고 말한다. 순간적 감응으로 완성할 수도, 몇 년에 걸쳐 다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돈이야 계절이야, 뭐가 됐든 시인들은 계속 시를 쓰고, 술을 마신다. 시가 그리운 독자들은 시집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 간다.

인천에서 자란, 이런 ‘돌아이’ 감독
 02
그 영화 봤어? 물어보기 전에 주위를 돌아보자. 최초의 인간을 다룬 <시발, 놈:인류의 시작>은 제목부터 만만한 영화가 아니다. 뻔뻔해서 웃기고, 황당해서 박수가 나온다. 마냥 가벼울 거라고 예상하면 오산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장 자크 아노의 ‘불을 찾아서’, 무성영화의 클래식한 아우라 등이 백승기 감독다운 방식으로 표현된다. 인천을 배경으로 한 처녀작 <숫호구> 이후 내적 진화를 했다는 평가와 ‘힘찬 패기’라는 감상 뒤에는 ‘깊이 없는 해프닝’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꿈으로 꼭 뭔가를 이뤄야 하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즐기면 안 되나? 도전은 쉬운 줄 아나?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창작, 만들자마자 예술이다.

물은 거꾸로 흐르면 안 되는 거야
 
03
토대는 꼰대였지만 성소수자 아들, 파업 공표 엄마 등 시대를 앞서가는 설정이 있었다. ‘흥행보증수표’ 김수현 작가의 최근작은 방송사 처지에서 볼 때 방영을 하면 할수록 손해인 민폐작으로 마감했다. ‘그래, 그런거야’는 변함없는 꼰대적 구조에 성차별적 장면만 남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혼전순결’ 운운도 촌스럽고 ‘개념녀’의 이분법도 구식이다. ‘여자니까 참아야 한다’는 안이함은 굳이 여성주의를 언급하지 않아도 낡은 사고방식임이 분명하다. 자기 복제와 매너리즘은 잘 이용하면 스타일이 되지만 안주하면 몹쓸 굳은살이 된다.

 

음식 포르노는 가라
 
04
음식의 모양과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사람은 음식보다 사람에 포커스를 맞춘 프로그램을 견디지 못한다. 크게 벌어지는 입술과 목젖의 움직임, 점점 커지는 눈동자에 집중하는 화면은 어쩐지 포르노와 비슷하다. 중림동 새우젓(글쓴이)은 온갖 장르에서 소비된 음식에의 탐닉을 고백한다. 정확히는 음식에 관한 문장과 상상 속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다. ‘봄봄’의 봄감자, ‘운수 좋은 날’의 설렁탕, ‘날개’의 아달린 알약, ‘올리버 트위스트’의 꿀꿀이죽과 ‘소공녀’의 오이 샌드위치가 존재하는 시공간은 가히 황홀경의 세계다. 어느 쯤에 다다르면 종교의 경지. 재료 써는 소리, 가스레인지 켜는 소리, 찌개 끓는 소리를 듣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지는 선(禪)의 순간에 도달한다. 웹툰과 영화, 요리 영상 소개까지 음식에 대한 애정으로 알알이 차 있는 글이다.

5로이터 사진전, 이 한 장의 사진
 05

영단어 ‘photography’는 빛으로 그린 그림이고 한자어 ‘寫眞’은 진실을 베낀다는 뜻이다. 기술보다 본질. 건축가 승효상은 ‘사진’이라는 단어에서 더 큰 울림을 느끼고, 사진의 가치는 기억의 재생에 있다고 말한다. 이 한 장의 사진. 난민들이 임시 거주지 앞에 나와 물통과 식기에 빗물을 받는다. 난민선에서 두 달 넘게 표류하다 미얀마 남쪽 해상에서 구조된 로힝야족 난민과 방글라데시 이주자들이다. 오늘은 불안하고 내일은 캄캄한데 그때, 단비가 내렸다. 헐벗은 그들의 얼굴에 한 줄기 행복이 지나간다.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뉴스 큐레이션(2016.08.16~09.05)

올림픽 말고도 브라질은 깊다
 1
‘브라질’은 붉은 염료를 함유한 나무 이름에서 유래했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나라. 아마존과 축구, 삼바의 나라. 세계랭킹 상위 선수의 노 메달과 중계방송 아나운서들의 막말논란이 이슈가 되는 가운데 한겨레가 브라질의 역사와 도시화의 고민을 다룬 애니메이션을 소개했다. <리우 2096>은 2096년 물 부족으로 고통 받는 가상의 미래를 그렸다. <보이 앤 더 월드>는 일자리를 구하러 떠난 아빠를 찾아 나선 꼬마 쿠카의 길을 따라간다. 거대도시와 자연파괴 등 지금 브라질의 고민을 담았다. 단지 그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있다는 구실로 애니메이션을 소개한 걸까. “과거를 모르고 사는 건 어둠 속을 걷는 것과 같다”는 영화 속 대사를 인용한 ‘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 이슈, ‘낡은 새로움’의 반란
 2
한국 사회를 달구고 있는 페미니즘의 언어를 최근 출간된 소설 두 편에서 찾는다. 새라 워터스는 영화 ‘아가씨’의 원작 <핑거 스미스>의 작가로 <게스트> 역시 레즈비언을 소재로 했다. 두 여성에게 치근대던 남자는 그녀들의 거부에 “여성 참정권 운동가죠?”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는 SNS에서 이어졌던 ‘메갈 인증 퍼레이드’와 맞물려 읽힌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죠?”를 현대어로 번역하면 “페미니스트죠?”고, 페미니스트들에 따르면 최근 이 말은 “메갈이죠?”로 해석할 수 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집 <체체파리의 비법>에는 “한 남자가 아내를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지만, 충분히 많은 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생활 방식이라고 부른다”는 문장이 나온다. 이는 강남역 살인사건 때 제기된 ‘여성혐오 범죄냐, 아니냐’를 떠올리게 한다. 최승자, 김혜순, 김민정 등 국내 문학에서도 페미니스트 계열로 분류되는 이들이 연달아 시집을 출간했다. 기자는 묻는다. “1970, 80년대 문학은 노동자의 입이었다. 21세기 페미니즘에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초등학교? 아니, 대학교 6학년입니다
 
  3

부모는 빨리 졸업하라고 성화고 학생들은 자꾸 졸업을 미룬다. 더 나이 먹기 전에 취업해서 밥벌이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부모의 말에 자식들은 “지금 졸업하면 밥벌이 못한다”는 대답으로 응수한다. 이러다 초등학교보다 대학을 더 오래 다니겠다는 말도 나온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2016년 휴학경험자는 44.6%로 두 명 중 한 명 꼴에 이른다. 병역의무를 위한 휴학이 가장 많지만 인턴이나 봉사경험을 쌓기 위해, 자격증 준비, 학비 마련을 위한 쉼도 만만치 않다. 연합뉴스 기자들이 휴학생을 인터뷰했다. 꿈이 있어서 더 괴롭고, 공부에 지쳐 휴학해도 얼마 못가 다시 영어학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휴학 중인 학생들의 공통적인 감정은 ‘불안’. 뭔가에 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휴학은 ‘고통의 유예’일 수밖에 없다. 백수보다 휴학생이라는 단어가 그나마 위안이 되니까.

성인 10명 중 6명은 학창시절 꿈꾸던 모습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전체 33.1%만이 하는 일과 공부에 만족한다. 10명 중 6명은 노력하면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을수록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도, 목표 성취에 대한 기대도 적다. 세계일보가 ‘그 많던 우리들의 꿈’을 여러 가지 통계로 밝혔다.

시급 1만원의 꿀알바? 수문장 교대의식, 두 번은 못하겠다
 
4
머니투데이가 폭염 속 극한 알바로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 체험기를 실었다. 노력 대비 보수가 좋은 ‘꿀알바’라고 알려져 있지만 직접 해본 기자는 “두 번은 못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면접과 실기시험까지 보지만 3대 1이 넘는 경쟁률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시급에 있다. 행사준비, 공개훈련까지 6시간을 일하고 일급 6만원을 받는다. 돈도 돈이지만 더위와 ‘철릭’이라고 부르는 복식, 장검의 무게 등으로 행사 시작 전부터 지친다. “교대의식 도중에 쓰러진 사람도 있어요.” 누군가 속삭인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6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연극배우는 여름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전한다. 간신히 행사를 마친 기자는 수고했다는 말에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개별 노동자의 노고는 직접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내년도 최저임금은 시급 6470원. 하지만 청년, 저학력 고령자, 비정규직, 여성 등 여전히 최저임금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5루저의 해방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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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네이메헌 국제걷기대회’, 올해 100회를 맞았다. 참가자가 많아 추첨을 통해 선발, 4일간 매일 인근 마을을 걷고 정해진 시간에 종착지에 돌아오면 메달을 받을 수 있다. 걷기대회에 나선 기자는 찌는 듯한 햇볕과 더위 속에서 “비행기 삯이 160여만 원이고 걷는 거리가 총 160㎞니까 1㎞마다 1만원” 따위(?)를 계산하고, “걷고 나면 뭔가 깨닫는 게 있을까? 장에서 숙변 제거하듯이 뇌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뇌까린다. 메달은 무리다, 쉬엄쉬엄 걷자 싶어 메디컬센터에서 마사지를 받고 나오니 자신과 비슷한 ‘루저’들이 다리를 절뚝이며 걷고 있다. 그때부터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풍경이, 함께 걷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왜 저렇게 뒤처졌을까, 어디가 아픈 걸까, 친구들이 버리고 간 걸까. 그곳에서 만난 외국인에게 몇 번이나 들은 말. “두 유 노 원주?” 고향이 원주인 기자조차 한 번도 참여해보지 못한 그 ‘원주국제걷기대회’는 지난해 스물한 번째 대회를 치른, 원주에서 가장 만족도 높은 문화행사다. 숨 막히는 더위가 물러가면 올해는 원주의 가을을 느껴볼까 싶다. 앞만 보며 가는 게 아닌 뒤처진 루저로서의 해방감을 즐기면서.

 

이재은(뉴스 큐레이터)




뉴스 큐레이션(2016.07.19~08.01)

월요일=정기휴관일, 모두 닫힘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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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은 ‘예술인도 쉰다’. 생산적인 일로 방학의 하루를 채워보자고 마음먹고 발걸음을 옮겼지만 곳곳에서 ‘월요일은 정기휴관’이라는 문구와 마주한다. 20대 언론 ‘고함20’, 대학생 기자의 월요일 하루를 따라가 본다. 부암동의 서울미술관도 윤동주 문학관도 쉰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도 닫았다. 세종대왕 동상 아래 ‘세종이야기’도 월요일에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미처 모르고 나왔다. 더위에 몸은 지치지만 누구 탓도 아니다. 다행히 시민청은 열려 있었다. 시민들이 찍은 한강 사진전, 시민이 참여해서 바꾸거나 꾸밀 수 있는 ‘사물을 읽다’전 관람. 애초의 의도에서 벗어났지만 기자는 ‘월요일이라고 모두 닫힘은 아님’을 깨닫고 그 속에서 의외의 즐거움을 맛본다. 예술은 특정 요일에 특별히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잠깐 앉았던 공기침대도 그에게는 예술이었다.

포스트잇 추모가 불러낸 ‘정동(情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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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진보적 지식 담론 영역에서 ‘정동(affect)’이라는 용어가 자주 출현하고 있다. ‘정서’와 다르고 ‘감정’이라는 단어와도 다른 정동은 ‘공기 중에 있는 어떤 것(something in the air)’으로 모호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문화과학>이 ‘정동과 이데올로기’라는 여름호 특집을 발간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한계가 있다지만 ‘정동’이 한국사회의 연구주제로 빠르게 떠도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기괴한 작동 방식이나 내면 분석, 미래의 가능성을 응시하려는 이론적 갈증”에 정동이 어떤 역할을 할지 궁금하다. 세월호와 강남역, 구의역이 불러낸 ‘정동적 힘’이 지속의 방식으로 깊이 끓길 바란다.

포켓몬 고, 스토리가 파워다
 
3 

포켓몬스터는 달랐다. 초등생을 위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유년의 비밀과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간을 그린 명작이었다. 아이들은 만화 속 괴물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어른이 주인인 사회에서 타자로서 존재하는 인물. 이인화 교수는 ‘포켓몬 고’ 게임의 인기를 스토리에서 찾는다. 모바일, 위치기반, 증강현실, 지적재산권의 융합이 게임을 탄생시켰지만 본질은 스토리에 있다는 것. 이제 게임 작가는 가상과 실제의 스토리텔링을 전개하며 ‘방대한 혼합 현실의 설계사’가 된다. 게임에 문외한인 탓에 “어떤 게임의 위대함은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위대함이다. 게임은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게 만들고 사이좋게 하는 도구가 된다”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진부해서가 아니라 ‘너무 핫해서(뜨거워서)’ 종종 놓칠 수밖에 없는 창조성이라는 단어가 위대하게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포탄’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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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끝난 전시지만 의미 있는 작업인 것 같아서 소개한다.(지난 7월 22일부터 3일간 열렸다) 매향리의 연습용 포탄과 탄피로 만든 천여 점의 조각상이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프로젝트’전으로 서울광장에서 소개됐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기도 했던 김서경, 김운성 부부조각가의 작품이다. 매향리는 주한미군의 공군폭격 훈련장이 있던 곳이다. 장기 투쟁 끝에 2005년 폐쇄되었지만 아직도 수십만 발의 포탄이 쌓여 있다. 포탄에서 새싹이 피어나고, 나비가 앉는다. 붙어있는 두 포탄이 키스를 한다. 다양한 글자가 새겨져있기도 한데 그 중에는 ‘死드’도 있다. 올해로 정전협정 63주년을 맞았지만 이 땅은 아직 평화롭지 않다. “우리 안에 드리워진 전쟁의 기운을 걷어내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평화선언을 해야 합니다.” 2백여 점의 작품은 마을에 기증하고 남은 8백여 점은 지자체와 상의 후 상설전시장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5고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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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의 기억’. ‘곱다’는 뜻의 그 고운이 아니다. ‘고운’은 고등학생 운동의 준말. 고등학생 신분으로 매주 시위에 나가고, 전교조 소속 해직교사를 위해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민주 학생회를 만들기 위해 유인물을 뿌리다 학교에서 쫓겨났던 고등학생들이 사반 세기만에 만났다. 하명희, 박명균 두 작가가 1990년대 고교생 운동을 다룬 소설 <나무에게서 온 편지>와 <나는 언제나 술래>라는 책으로 그 시절을 회상한다. “어른들이 하지 못하니까 우리가 했던 것이다. 고교 시절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한다는 것은 우리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소설을 쓰면서, 내 삶에서 가장 좋은 자양분을 얻었던 때가 그 시절임을 깨달았다.” 고운을 했든 안 했든 모두가 힘들었던 시절.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사람들. ‘고운 세대’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재은(뉴스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