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황정순

1

 

02

3

여배우 황정순(黃貞順, 1925~2014)은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출생이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가 있는 인천으로 와 영화학교에 다녔다. 본인의 구술(口述)에 의하면 늘 몸이 아파 학교를 겨우겨우 다녔다고 하는데 4학년 때, 영화학교의 일본인 선생이 싫어 인근 학교(창영학교인 듯)로 전학을 했다고 한다. 이 두 학교를 졸업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무렵 서울 수학여행을 갔다가 유명한 와이즈 뮐러 주연의 ‘타잔’ 영화를 보고 배우에 대한 선망을 가지게 되었고 15세 때인 1940년, 사촌 언니가 사는 서울로 가출해 동양극장 내에 설립된 극단 <청춘좌>에 입단했다. 그 후 극단 <성군> , <자유극장> 그리고 라디오 성우를 거쳐 1950년 극단 <신협>의 창단 멤버로 활동했다.

“무엇보다도 사생활에 건실하다는 점이 기특하게 여겨진다. 여배우라 하면 이 세상 여자와는 좀 다른 지역에 사는 인간인 듯이 자처하여 냄새를 피우고, 활동사진 몇 개에 얼굴이 나타나기만 하면 명동 거리에 치맛바람을 일으켜 마지않는 요즘 세태, 아니 요지경 속 영화계에서는 보기 드문 여배우라는 것이다.”

1956년 영화 「자유부인」에서 ‘최고급품 사나이’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우 주선태(朱善泰)가 황정순에 대해 평한 말이다. 그의 이런 지적이 아니더라도 출연한 수백 편의 연극과 영화에서 그녀가 온 국민에게 남긴 영원한 한국의 주부상, 여성상은 누구도 다시 흉내낼 수 없는 그녀만의 불멸의 캐릭터이다.

황정순이 인천에서 자라 한국 영화사의 큰 획을 그은 대배우요, 한국 여성상의 표본이 되었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인천은 행운이고 복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우리 인천의 영화사(映畵史)조차 단 한 마디도 그녀에 대해 기록해 놓은 것이 없다는 점이다.

김윤식/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인천을 발견한 미술비평가 공주형

1인천문화재단은 2015년부터 문화예술 기부캠페인 ‘아트레인’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개항의 철길 위를 달리는 아트레인(ARTrain)은 시민과 예술가가 함께 문화예술이 풍요로운 도시 인천을 만들고자 합니다. 인천의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기부자, 아트레인의 탑승자를 만나 이들이 말하는 아트레인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이번 인터뷰는 미술평론가이자 전시기획자로 미술과 삶을 함께 마주보기 위한 다양한 저서를 집필하고 있는 공주형 선생님과 함께 합니다. 미술에 관한, 삶에 관한, 인천에 관한 대화를 지금부터 함께 나누어 봅니다.

2
 Q.
최근에 대학 강의를 중심으로 활동 중이신데 근황이 궁금합니다.

A. 한신대학교 교양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동아일보에 [생각하는 미술관]이라는 타이틀로 글을 계속해서 쓰고 있습니다. 요즘은 대학에서 진행하는 노숙인 인문학교육에도 함께 참여하고 있어요. 8주의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는데, 이 분들에게 자존감 회복과 사회 복귀를 위한 바탕이 될 수 있도록 미술과 인문학을 연계한 강의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학생들과의 수업과 연계하는 형태로 구성했는데, 이 수업의 결과를 전시 형태로 구성하려고 생각하고 있고, 8월 7일(일)에 인천아트플랫폼에서 하루 동안 선보이려고 해요.

3
Q.
일반적인 대학 강의와는 다른 형태의 수업인데, 강의를 진행하는 입장에서 많은 생각과 느낌이 있었을 것 같아요.

A. 일단 보통 학생들에게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했어요. 사실 우리는 사회에서 압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듣잖아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거든요. 학생들이 좀 더 넓은 시각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했어요. 그리고 이 강좌는 8주인데, 그 분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전혀 다른 내용으로 강의만 진행된다면 사실 그들의 삶에서 변화를 미칠 수 있는 부분은 없거든요. 이 분들이 변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함께 변해야 해요. 그래서 그들의 삶과 사회가 연결될 수 있도록 학생들과 소통하는 지점을 만들고 싶었어요.
수업을 하면서 놀랐던 부분도 참 많아요. 색깔을 주제로 강의를 하는 날이었는데, 원작은 공개하지 않은 상태로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밑그림을 채색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자유롭게 각자의 방식대로 채색을 하는데, 온통 붉은 색으로 그림을 그린 분이 계셔서 대화를 해봤더니, 모든 게 다 불타버렸다는 설명을 해주시더라고요. 자신의 모습을 그림에 투영시킨 형태였죠. 마음이 참 무거웠었어요.

4

Q. 미술이라는 영역이 삶의 영역으로 조금씩 들어오고 있는 것 같아요. 요즘 보면 도서관에서도 강의를 하시던데 이렇게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좌의 경우 준비해야 하는 지점도 조금은 다를 것 같아요.
A. 아무래도 미술 그 자체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영역으로 점점 연결되어 이야기되는 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도서관에서도 미술과 함께하는 강좌도 늘어나는 것 같아요. 도서관에서 하는 강좌들은 일반적으로 연령대가 조금 높으신 분들이 많은 편입니다. 주부들의 경우 가사일과는 조금 다른 경험을 위해 수강을 하시는데, 일상과는 다른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 그 자체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그리고 일반적인 학생들의 강의보다 수업에 대한 열정도 많은 편이라 듣고자 하는 태도가 확실히 달라요. 각자 사회적인 위치나 삶의 영역이 달라서 강의에서 관심을 갖는 포인트도 다 다르고요. 덕분에 준비를 해야 하는 부분도 좀 많지만 이런 강의들을 하다보면 힘이 들어도 수업을 하는 데 제 스스로 동력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6Q. 올해 상반기에는 새로운 책도 집필하셨는데 책 소개 부탁드립니다.
A. 『문명은 어떻게 미술이 되었을까?』라는 제목으로 3월에 책을 냈습니다. 일반적으로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이나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미술의 가치나 효용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이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고서 미술을 말하면 헛말처럼 떠도는 형태거든요. 미술이 각 시대마다 요구하는 사회적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그 역할에 따라 시대마다 등장하고 중심이 되었던 미술의 특징이 무엇이었는지 함께 말해보고 싶었어요. 그 흐름을 따라 읽다보면 당대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모습도 들어있거든요.

Q. 인천에서 작업을 시작하신 계기가 인천아트플랫폼과의 만남이었다고 어느 기사에서 말씀하셨던데 그 이야기를 좀 부탁드릴게요.
A. 2009년 인천아트플랫폼이 개관할 당시, 연구 분야의 입주 작가로 들어오면서 인연이 시작되었어요. 오랫동안 서울의 갤러리에서 일했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어요. 1998년부터 인천에서 살았지만, 인천을 알 수 있는 기회는 없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에게 인천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지역이라기보다 그냥 추상적인 장소였거든요. 서울로 출퇴근을 하는데 필요한 곳과 일상 생활권역 외에는 잘 알지 못했었는데, 인천아트플랫폼을 만나면서 달라졌어요. 인천에 이런 공간이 있고,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어요. 그간 알고 있던 방법과 다른 형태로 미술을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분들이 계신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흥미로웠어요. 그러면서 서울의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생활권을 온전히 인천으로 이전했습니다. 
  
Q. 인천아트플랫폼이 남다른 공간이자 또 다른 의미겠네요.
A. 말 그대로 멋있었어요. 역사책처럼 글로 배우는 역사의 산물이 아니라, 돌의 형태 하나만 보더라도 지역의 역사를 느낄 수가 있으니까요. 이곳에서 만난 작가들도 제가 그 동안 활동하면서 만났던 작가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거든요. 생각할 것도, 경험할 것도 많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의 미술을 긴 호흡으로 접할 수 있는 전시를 기획하면서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었고, 인천에 계신 분들을 만나기 시작했죠. 이제는 인천이 고향인 남편과 함께 ‘인천’이라는 지역이 공통의 관심사이자 화제가 된 것 같아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천아트플랫폼만큼 나에게 영향을 주거나 변화를 줄 수 있는 장소는 없는 것 같아요.

7
Q.
갤러리에서 활동한 시기를 포함해 인천에서도 참 많은 전시를 기획하고 진행하셨는데요. 지금까지 기획했던 전시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전시가 있다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A. 딱 하나의 전시를 말한다면 2010년에 기획했던 <이사(移徙)사이(間)>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한국근대문학관이 리모델링에 들어가기 전에 공간을 활용해 진행했던 전시였는데요. 그 때 당시에 함께 했던 작가들이 많이 성장하는 모습도 보게 되었고, 미학적으로도 작품의 구성이 너무 좋았어요. 창고를 주관하던 사람들이 ‘이사(移徙)’가고 근대문학관으로 위용을 갖출 ‘사이’를 의미했던 전시였고요. 시간이 새겨진 공간이자 영광과 쇠락의 집합소였던 빈 창고의 속성을 작품으로 표출하려고 했었습니다. 사실 그 공간은 일반 화이트 큐브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죠. 그 어떤 미술 작품보다도 묵직했고, 그 자체만으로도 작가가 개입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면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전시 기획자의 입장에서는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으로 공간을 해석하고 표현해서 자신만의 작품으로 그 곳을 장악해주길 바라는 점이 있어요.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작가들이 각자의 예술적 방식으로 점령해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인천에서 했던 전시기도 했지만 그런 예술적 결과물이 너무 좋았던 터라 가장 기억에 남아있어요. 그 때부터 예술적 관심 자체가 ‘장소’에 대한 부분을 많이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원래는 미술에서 출발했지만 장소라는 하나의 문제가 겹친 셈이죠. 이 장소라는 게 조금 확장한다면 공동체의 문제로도 볼 수 있고, 미술이 어떻게 공공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관심까지도 확대된 것 같아요. 

Q.
아트플랫폼과의 만남을 시작해서 재단의 아트레인에도 함께 참여하셨는데요. 문화예술 기부를 위한 아트레인에 어떤 마음으로 함께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저는 인천문화재단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아마 인천아트플랫폼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 테고, 인천이라는 지역을 이렇게까지 알 수 없었을 테니까요. 재단에서 기획전을 준비하면서 인천에 계신 분들과 인사를 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당연히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외국에 비해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기부가 현저히 낮은 게 사실이기도 하고, 문화예술 예산이 축소되고 있는 것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기부문화를 확산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5
Q.
사실 아트레인을 시작한지 아직 만 1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많은 분들의 관심과 지지로 사업의 큰 틀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역의 예술인이자 기부자의 입장에서 아트레인이 앞으로 어떤 방향성을 갖고 나아갔으면 하는지 개인적인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A. 아직 1년도 안된 초기 단계니까 앞으로 기부에 대한 성격, 관계에 대한 표현 등을 잘 보여줘야 할 것 같습니다. 문화영역답게 좀 더 쉽고, 재미있는 형태로 많은 분들에게 알리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전문영역을 지원하는 사업이 아니라 조금 더 시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자세로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인천아트플랫폼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인천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고 계신 선생님과의 시간이 참으로 뜻깊었습니다. 인천 문화예술의 확장과 발전을 위해 아트레인과 함께하며, 인터뷰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신 공주형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6인천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아트레인의 탑승자를 찾습니다.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 기부 캠페인 아트레인은 인천 시민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개인 혹은 법인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며, 기업 후원의 경우, 기업의 경영철학과 사회적 책임 실현을 위한 사회공헌 사업을 문화예술로 함께 만들어드립니다.
아트레인 참여 문의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032-455-7114, artrain@ifac.or.kr

정리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주현수




40년 한결같은 맛을 지켜온 우정일식 홍혜정 사장님

1인천문화재단은 2015년부터 문화예술 기부캠페인 ‘아트레인’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인천문화통신 3.0에서는 인천의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기부자인 아트레인의 탑승자들을 차례로 만나보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중구 신포동 일대에서 40년 동안 영업을 이어온 일식당 ‘우정일식’의 홍혜정 사장님과 만났습니다. 2대에 걸쳐 인천의 맛을 간직해오고 있는 우정일식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2
Q.
우정일식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저희 가게는 1976년 가을, 선친께서 중구 신포동에 자리를 마련해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1970년생이라 직접 기억하는 부분이 분명하지 않고, 일전에 가게 화재로 예전 자료들이 많이 소멸되어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아 아쉽네요. 개업 당시 함께 하셨던 저의 어머니와 이모님 말씀으로는 신포동 당시 자선소아과 골목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십니다. 연안부두 어시장에서 직접 들여오는 생물로 매운탕, 회 등 일식 요리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Q.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던 당시의 기억은 어떠한가요?
A. 70년대 신포동은 인천 최고, 유일의 번화가였어요. 당시에는 일식식당을 보통 화식집이라고 했는데, 인천에 화식집이 손에 꼽을 정도로 몇 안 되던 시절이었죠. 선친께서는 가게를 시작하기 전 일본인 주방장에게 기술을 직접 배우신 후 독립하셨어요. 아버지께서는 국내 조리사이시면서 1회 자격증 취득자이신데, 무와 사과로 돌려깎기 연습을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선합니다.

5Q. 가게를 운영한 지난 40여년의 시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A. 특별했던 기억인데요. 1987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우리 식당을 방문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평화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오셨었죠. 그날은 신포동 전체가 노란색으로 꽉 차 있었어요. 후보의 수행원들이 노란색 점퍼를 입고 이 일대를 돌아다녔거든요.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가게로 전화가 빗발쳤어요. 국정원(당시 안기부)에서 계속 전화를 해서 예약 인원이 몇 명인지, 메뉴는 무엇인지, 가게 위치와 구조는 어떻게 되는지 등을 물어봤었죠. 그날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대구지리를 맛있게 드시고 가셨어요. 당선되면 꼭 다시 먹으러 오겠다고 말씀하셨었는데, 그 해 대선에서는 낙선하셨더랬죠.

Q. 인천 전역을 보면 참 많이 변했다고들 하죠. 사장님이 기억하시는 인천, 특히 인천역과 신포동 일대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다른가요?
A. 신포동은 사실 인천의 다른 곳보다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전의 모습이 많아 남아있죠.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있던 인천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하고, 연수동이 생기면서 ‘인천 제일’이라는 말조차 유명무실해졌으니까요. 시청 이전 당시 저희 가게도 구월동으로 이전을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선친께서 신포동을 떠나기 싫어하셨던 터라 신포동에서 지금의 위치인 항동으로 자리를 살짝 옮겼습니다.

Q. 1980~90년대 동인천과 신포동이 번화하던 당시의 기억들을 듣다보면, 이 일대에 많은 문화공간들이 있다고 하던데요. 이 당시 10대와 20대의 시절을 보냈던 사장님의 추억 속 공간들을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A.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인천에서 만남의 장소는 단연코 ‘대한서림’ 앞이었어요. 대동학생백화점 2층에는 DJ가 음악을 틀어주던 분식집이 있었구요. 감미당에서 쫄면을 먹고, WAVE에서 청바지를 산 후, 4층 카페에 앉아 파르페를 먹으며 최신 뮤직비디오를 보곤 했죠. 심지음악감상실에서 노래도 신청해보고 지하상가 레코드샵에서는 원하는 음악만으로 구성된 나만의 카세트테이프를 만들어주기도 했었어요. 신포동 칼국수집 골목에서 칼국수를 먹으며 최신 외국영화를 보고, 애관극장이나 미림, 오성극장에서 홍콩 영화를 찾아보곤 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없어진 공간이고 추억 속에 남아있는 문화들이죠.

4

Q. 개인 사업을 하다보면 여가 시간도 많지 않을 텐데요. 문화예술은 주로 어떻게 즐기고 접하시나요?
A. 예전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 외에 다른 문화생활을 즐기려면 서울로 갈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요즘에는 인천에서도 뮤지컬이나 전시회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가게를 운영해야하니 열심히 찾아서 보러다니기는 어렵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보려고 하는 편이에요. 인천문화재단을 통한 문화예술 콘텐츠 개발도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Q. 인천문화재단의 문화예술 기부캠페인 아트레인에 초기부터 함께하고 계신데요. 인천 시민 한 사람으로써 아트레인에 바라는 점이나 문화예술이 앞으로 어떻게 성장하길 바라는지 개인적인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A.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인천문화재단, 인천아트플랫폼 일대가 문화예술인들의 창작 공간과 거주지로 조성되면 어떨까 싶어요. 예전의 서울 홍대 앞처럼 일상과 예술이 함께하는 지역이 된다면 좋지 않을까요? 개항장이라는 옛 모습과 흔적들이 문화예술과 어우러지면 한층 예술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Q. 마지막으로, 우정일식에서 추천하는 여름메뉴가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릴께요.
A. 저희 가게의 주력 메뉴는 매운탕인데요. 더운 여름철에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어서 시원한 소바 정식을 추천합니다. 일반적으로 메밀육수 원액에 물을 타서 내놓는 곳이 많은데, 저희 가게에서는 직접 육수를 뽑아 만들기에 깊은 맛을 느끼실 수가 있답니다.

[아트레인 후원의 집 4호]
상호명 : 우정일식
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03-1(항동5가 1-1)
운영시간 : 11:00 ~ 22:30, 첫째주와 셋째주 일요일 휴무
예약문의 : 032-761-3232
추천메뉴 : 생선회(숙성 선어회), 매운탕, 메밀소바


6인천 문화예술의 생활 속 거점이 될 ‘아트레인 후원의 집’을 찾습니다.
‘아트레인 후원의 집’이란 인천의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공식 업체를 말합니다. ‘재단’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후원의 집’을 홍보하여 이용을 권장하고 ‘아트레인 후원의 집’의 번영을 지원해 매출 신장과 인지도 제고를 지원합니다. 이를 통해 재단과 후원의 집이 상호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고자 합니다. 후원의 집은 인천문화재단과 상호 마케팅이 가능한 상점/업소/업체는 누구나 가능하며, 월 1만원 이상의 기부금 약정 시 업체의 성격과 공동 마케팅 가능 여부 심사에 따라 자격을 부여합니다.
후원의 집 관련 문의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032-455-7114, artrain@ifac.or.kr

정리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주현수




배우 유신방

1

 

2

유신방아주 생소한 이름이어서 누구도 유신방(柳新芳)이 인천과 연관이 있는 배우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여배우 유신방에 대해서는 1932년 1월에 발간된 잡지 『삼천리』의 기사가 해답을 던지고 있다. 그 기사는 2007년 2월에 발간된 『인천학연구』에도 인용이 되어 있는데, 유신방을 ‘영화 <사나이>에 출연한 오향선’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밖에는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 오향선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한때 인천의 명기로 이름을 날렸던 오향선도 기악과 단가는 물론 바둑을 두고 바이올린도 켤 줄 알았으며, 사군자도 치고 글씨도 잘 썼었다.”는 내용이다.

『인천학연구』는 “유신방은 오향선(吳香仙)이란 이름을 쓰던 용동권번의 기생이었는데 미모와 재능이 뛰어나 나운규(羅雲奎)에 의해 캐스팅되었다.”고 쓰고 있다. 오향선이 술집에 놀러온 나운규를 만나 그의 연인이 되고, 영화 <사나이>에 출연함으로써 영화배우 유신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시기는 1927~8년 무렵으로 유신방의 나이 스물세 살이었다.

유신방이 출연한 작품은 모두 나운규의 영화로 1928년 <사나이>, 1929년 <벙어리 삼룡>, 1930년 <아리랑 후편> 총 세 편인데, <벙어리 삼룡>은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당시 영화계로부터 “영화배우로서 제일 얼굴과 체격이 좋았고 언뜻 보기에도 어딘지 깊숙이 끄는 데도 있”지만 나운규를 연애에 빠뜨려 방탕하게 했다는 이유로 “조선 영화계의 요부(妖婦)”라는 부정적인 평판을 받았다.

훗날 유신방은 개성권번에 들어가 흥행에 실패한 나운규의 영화 자금을 대었고, 그와 헤어져서는 불교에 귀의해 금강산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 광복 후까지 인천에서 식당 등을 경영했으며 1970년대까지 생존했었다고 하나 그 이후 행적은 불명하다. 배우로서 오래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인천 출신 여배우였음은 틀림없다.

김윤식/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배우 서일성

1

 

2

3

서일성(徐一星,1906∼1950)은 1960년대의 명배우 신성일(申星一)에 비교할 정도의 큰 인기를 누렸던 명배우였다. 단편적으로나마 남아 있는 기록들이 그런 면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인천 이야기’ 기록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서는 인천이 낳은 이 유명한 배우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 유명한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나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도 전혀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인천시사』 인물란에만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인천 출신이면서도 서울에서만 활동했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서일성은 인천 태생으로 1925년 초창기 신극단 토월회에 참가하여 이백수, 윤심덕 등과 활동했다. 1935년에는 극예술연구회에 참여하여 서울 동양극장을 중심으로 연극 활동에 매진했다. 1939년에는 연출가 박진 등과 함께 극단 아랑을 결성했으며, 8·15 광복 직후인 10월 양백명, 장진 등과 극단 백화를 창단했다. 6․25 동란 때 주안에서 서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북한군에게 협조하지 않아 피살당했다.
일제 때 그의 연기에 대해서는 일본의 유명 연극평론가가 격찬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혼자만으로도 부민관 무대가 꽉 차는 느낌이 들 정도로 중후한 연기를 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부활」 버나드 쇼의 「오로라」,「춘향전」, 「박쥐의 집」, 「백의 민족」 등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그는 미남에다가 게리 쿠퍼처럼 체구가 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유연했고 뛰어난 발성으로 ‘모범 만능’이라는 평가와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당시 최고의 배우였다. 인천에서 이렇다 할 만한 연극 활약은 없었다 해도 인천이 낳은 대배우, 명배우였음은 틀림이 없다.

김윤식/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기업인, 영림목재(주) 이경호 회장

01

 

 


인천문화재단은 2015년부터 문화예술 기부캠페인 ‘아트레인’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인천문화통신 3.0에서는 인천의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기부자인 아트레인의 탑승자들을 차례로 만나보고자 합니다. 지난 5월 24일, 인천아트플랫폼에는 개항의 도시 인천을 상징하는 전통 목선 한 대가 들어섰습니다. ‘개항호’라는 이름으로 C동 공연장 앞에 위치한 이 목선은 인천의 중견기업인 영림목재(회장 이경호)에서 인천의 문화예술을 위해 기부했습니다. 영림목재는 인천에서 기업의 문화경영, 문화예술 후원에 앞장서는 기업으로 인천문화재단 아트레인도 지속적인 후원으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기업, 영림목재의 이경호 대표님과 함께 인천의 이야기를 나눠 보았습니다. 
 

08
Q.
영림목재는 인천에서 설립되어 성장한 기업입니다. 배경과 역사가 궁금합니다.

A. 저는 황해도에서 태어났어요. 한국전쟁으로 피난을 오면서 인천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부친이 평양에 계실 적에 하시던 제재소 일로 인천에서 목재소를 시작하셨어요. 그때 당시에는 간장, 소주, 빵 등을 담아 운반할 목재 상자가 필요했었고, 그 물품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회사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다 부친께서 건강이 나빠지시면서 제가 20대 후반에 경영을 맡게 되었죠. 직원 10명으로 간석오거리에서 시작했었는데, 도화동을 거쳐 지금의 남동공단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Q. 20대 후반이면 굉장히 젊은 시절에 회사 경영을 시작하신 것과 마찬가지네요. 20대 청춘 시절의 꿈과 목표가 있었을 텐데, 회사를 맡게 되었을 당시 어떠셨나요?
A. 저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어요. 사업을 물려받기 직전에는 전자회사 무역부에서 유럽 전역을 다니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죠. 전자 분야가 각광을 받기 시작하던 초기라 모두들 부러워하는 회사이기도 했어요. 그러다 급작스럽게 가업을 이어받아야 하는 상황이 닥치는 바람에 조금은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에요. 청춘의 꿈이었던 전자 회사에 대한 미련은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전자 분야로 작은 회사를 차려 영림목재와 동시에 운영을 하기도 했었어요. 정말 놀랍게도 두 사업이 모두 잘 되고 있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부친의 사업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전자기기 분야는 하나가 성공하면 바로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할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빨라요. 몸은 하나인데, 회사는 두 개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목재회사에 전념하게 되었죠. 그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다. 

 03

Q. 황해도에서 태어났지만 인천에서 자라셨는데요. 어린 시절 기억 속 인천은 어떤 곳인가요?
A. 어린 시절 기억 속 인천은 ‘바다’로 생각이 납니다. 피난민들이 인천 앞바다에서 조개를 캤어요. 썰물에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와 꽃게가 큰 바위 사이에 남아있으면 아이들은 바가지로 물을 퍼내고 잡기도 했었죠. 바위에 굴도 많던 시절이라 굴을 먹는 게 간식이기도 했어요. 그때만 해도 하인천 뒤편으로 어시장이 있었어요. 생선 조각을 들고 꽃게나 망둥어를 많이 잡으러 다녔어요. 망둥어를 잡을 때는 썰물이 아닌 밀물때에 맞춰야 잘 잡혀요. 물이 들어오는 속도에 맞춰서 뻘밭을 걷다보면 망둥어 아가미를 꿰어서 잡아 들고 올 만큼 많이 잡히던 시절이었죠. 인천에서 자랐는데 수영을 못 하는게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바다에서 많이 놀았습니다.

Q. 10대 학창시절부터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시던데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추억들일까요?
A. 고등학교 시절에 과외활동으로 원예반과 합창반, 활동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시립농대와 함께 국화전시회도 했었어요. 꽃을 예쁘게 피우려면 주변 꽃을 잘 다듬고 불을 켜서 관리해줘야 만개하는데, 정말 열심히 했었어요. 합창반은 화음을 배우면서 다른 친구들과 정서적인 교감을 할 수가 있죠. 그리고 당시 남고 학생들이 공식적으로 여학생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거든요. 공부밖에 모르는 순진한 애들이 합창반을 하면서 이성 친구들도 만나면서 그 시절을 즐겼던 것 같네요.


  04
Q.
결국 지금의 이경호 회장님을 만든 게 ‘10대 시절의 경험이 아닐까’ 싶네요.

A. 청소년 시절에 참 많은 것들을 배웠어요. 그때 배웠던 한시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고, 독일어도 배웠죠. 그 덕분에 독일어로 된 합창곡들을 지금도 부를 수 있으니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된 건가요? 삶의 모든 추억과 시작이 이 당시의 배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돌이켜보니 건강하고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네요. 이 모든 게 바탕이 되었기에 지금도 제가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Q. 지금까지도 인천남성합창단의 단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꽤 오랜 역사를 가진 합창단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합창단에 대해 소개 부탁드려요.
A. 인천남성합창단은 올해로 창단 45주년을 맞은 장년의 연륜을 자랑하는 인천 대표 남성합창단입니다. 1971년에 인천의 젊은 청년들이 복음 선교와 인천의 음악 발전을 위해 창단했어요. 지금까지 500회가 넘는 무대를 올렸고, 거쳐간 단원도 400여명에 이릅니다. 우리 합창단보다 오래된 곳은 서울의 한국남성합창단이 유일해요. 저는 2012년부터 단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단원들 대부분이 각자 사업체나 직장이 있어 운영이 쉽지는 않지만, 단원 모두가 단장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6월 초에 필리핀으로 첫 해외 공연을 다녀왔어요. 현지 교민들의 많은 함성과 박수를 경험했고, 좋은 무대를 선보일 수 있어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뜻 깊고 보람된 공연이었습니다. 이 공연을 계기로 인도네시아 측 관계자에게도 초청을 받았는데, 우리 합창단이 해외로도 나아갈 수 있는 초석이 된 것 같아 매우 기쁩니다. 
 
 05

Q. 영림목재는 문화예술 후원과 발전을 위해 많은 지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는 기업의 문화경영 철학이 있나요?
A. 문화경영이란 쉽게 설명하자면 오너의 경영 마인드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문화예술이란 조직의 갈등을 봉합하고 치유할 수 있는 사회적 힘을 지니고 있어요.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보이지 않는 큰 힘이 바로 문화예술인거죠. 때로는 종교 이상의 큰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중소기업들도 조금씩 문화예술에 관심을 갖고 경영에 접목시키는 곳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인천에서도 그런 기업들이 보다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기업 경영자들이 문화예술에 관심을 갖고 지역사회에 참여하다보면 인천문화재단의 활동과 방향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07

Q. 이경호 회장님은 인천문화재단의 이사를 역임하셨고, 재단의 사업에도 지속적인 관심으로 지지해주고 계십니다. 문화예술 기부를 위한 아트레인에도 초반부터 함께 하고 계시는데요. 문화예술을 위한 아트레인 사업의 방향이나 기부금의 사용에 대해 소중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A. 재단이 갖고 있는 그 성격이나 목적에 맞게 뜻깊은 곳에 사용할 것이라 믿습니다. 기부를 했다는 것은 그 단체에 일임했다는 것이니 더 이상 제가 관여할 것은 없어요. 다만 기부금이라는 것은 모아진 이 돈을 사용하는데 목적일 두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활동의 바탕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정도 모금액이 모였다는 것이 알려지고, 지금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아트레인’의 확산이 중요할 것 같아요. 앞으로 문화예술로 성장할 후배세대들을 위한 밑거름으로 이 기금이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재단에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알리고 활동을 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을 테고, 기부금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깊이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 기업인들이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및 정리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주현수


인천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아트레인의 탑승자를 찾습니다.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 기부 캠페인 아트레인은 인천 시민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개인 혹은 법인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며, 기업 후원의 경우, 기업의 경영철학과 사회적 책임 실현을 위한 사회공헌 사업을 문화예술로 함께 만들어드립니다. 아트레인 참여 문의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032-455-7114, artrain@ifac.or.kr

 




인천을 사랑하고 인천을 기억하는, 와카이 슈지 한국닛켄(주) 대표

01

 

 


인천문화재단은 2015년부터 문화예술 기부캠페인 ‘아트레인’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인천문화통신 3.0에서는 인천의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기부자인 아트레인의 탑승자들을 차례로 만나보고자 합니다.

이번호는 그 중에서도 좀 더 특별한 기부자와 만나보았습니다. 아트레인 최초의 외국인 기부자이자, 인천 시민 그 누구보다도 인천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한국닛켄(주)의 와카이 슈지 대표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인천 남동공단에 자리한 한국닛켄은 자동차 부품 제조에 필요한 금속 절삭 공구 전문업체로 30년 동안 인천에서 성장한 중견기업입니다. 대표적인 한일 기술협력 우수기업 한국닛켄은 올해 글로벌 선도기업 10곳에 선정되기도 한 저력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인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와카이 슈지 대표님과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02


Q.
한국닛켄(주)은 동구 만석동에서 시작해 지금의 남동공단에 이전하기까지 인천에서 성장한 기업입니다. 기업의 역사가 어느 덧 30년이 되었는데 사업을 시작한 초반의 기억을 듣고 싶습니다.

A. 제가 일본 닛켄의 해외 파견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한 때가 74년도였습니다. 그리고 1987년에 만석동에 터를 잡고 한국닛켄이라는 별도 법인으로 경영을 시작하게 되었죠. 막 시작했던 그 당시에는 인천역 부근에 동아제분, 동일방직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만석동에 터를 잡았던 그 때는 주변에 아파트도 없었고, 지금의 만석비치타운 건물 앞엔 작은 개천도 있었어요. 그 곳에서 20년간 사업을 운영했고, 2007년에 현재의 남동공단 부지로 이전했습니다. 87년에 만난 만석동은 다른 곳에 비해 특히나 오래된 지역이었어요. 공장도 많지 않았고요.

Q. 경영자로써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당시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경영 철학은 무엇이었나요?
A. 저는 한국닛켄이 만석동 부지에 터를 잡으면 ‘이 회사가 동네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적어도 회사가 있음으로 인해 지역 주민들의 고용 창출부터 가능하니까요. 아무래도 기계를 가동하는 공장이기에 기름을 사용하거나 공해, 소음 등을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용한 오폐수나 기름이 단 한 방울도 외부로 유출되거나, 공해나 소음으로 지역 주민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철칙으로 회사를 운영했습니다. 반드시 우리의 회사가 지역에 도움이 되고, 회사와 지역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20년을 동구와 함께 해왔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만석 파출소, 만석초등학교와 매우 가깝게 지내왔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만석동이라는 동네에서 회사를 받아주는구나’라는 것을 조금씩 느끼게 되었고,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여러 방면 지역에 도움이 되는 환원을 하고자 애썼던 것 같습니다.

02

Q. 인천은 제2의 고향이라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인천의 여러 지역 중 특별히 사랑하거나 아끼는 지역은 어디신가요?
A. 80년대부터 강화도를 참 좋아해서 자주 다녔어요. 자연이 그대로 있고, 역사적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지역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강화도 끝까지 가야 만나는 교동도를 가장 좋아합니다. 예전에는 초지대교도 없이 강화대교를 통해서 들어갔고, 교동도는 배를 타고 들어갔죠. 교동도는 북녘과 가까운 지역이다보니, 남북 분단 이후 농지 정리를 매우 잘해놨어요. 지하수 시설도 잘되어 있어서 아무리 가뭄이 와도 농지가 마를 날이 없어요. 1988년도 이후부터는 사람도 많아지고 가는 길목도 매우 막혀서 예전보다는 가는 경우가 드물지만, 참 좋아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강화도만큼 아끼는 지역은 당연히 만석동이죠. 동인천, 신포동이 따라올 수 없는 오래된 느낌을 그대로 지닌 공간이에요. 아직도 가끔은 그 동네를 걸으며 옛 자취를 바라보곤 합니다. 인천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덕분에 인천의 근현대 발전사나 역사적인 자료를 많이 찾아 봐왔고, 간직하고 있습니다.


05
03
Q.
단순히 비교를 해 봐도 당시와 지금의 모습은 참 많이 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대표님이 체감하시는 한국 혹은 인천의 변화된 모습은 또 다른 의미일 것 같은데요.

A. 7~80년대에 비해 지금은 인천이나 한국 전체가 많이 발전했어요. 그런데 우리 한국의 현재 모습에서 아쉬운 점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사회가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나 혼자가 아닌 함께 산다는 의미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 혼자만 성장하는 것 보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나누고 배려해야 하는데, 고속성장의 그늘인건지 함께 사는 사회의 밸런스가 깨지는 것처럼 느껴져서 안타깝습니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남과 함께 산다는 것이고, 함께 살기 위해서는 나의 이기심을 조금은 내려놓고 타인을 배려하거나 공감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 부분이 예전보다 줄어든 것 같아요.

Q. 사실 대표님은 인천문화재단 외에도 한국 사회의 여러 분야에 기부를 하고 계십니다. 와카이 슈지 대표님께서 가지고 계신 기부철학은 무엇인가요?
A. 특별히 철학이나 신념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단지 기부란, 온전히 그 사람의 성의이고, 이 성의가 좋은 뜻에 올바르게 쓰이면 된다고 봐요. 그리고 무언가를 바라거나 기대하는 바 없이 마음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 그게 기부문화인거죠. 기부를 하고 굳이 감출 필요는 없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하면 좋은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제가 인연을 맺은 게 올해로 벌써 44년이 되었어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만약 그 때, 내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갔었더라면, 한국을 그때 몰랐어도, 지금처럼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까라고 혼자 질문을 해 봐요. 하지만 아무리 스스로 되물어도 그 질문에는 자신이 없네요. 한국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테니까요. 인생을 돌아보며 느낀 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대한민국아, 고맙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만큼 이 곳은 제게 소중한 곳이고, 그렇기에 마음으로 기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04

Q. 대표님께서는 문화와 예술 분야에 다양한 취미활동과 관심을 갖고 계시죠?
A. 기본적으로 예술이라는 장르에 많은 관심이 있어요. 클래식 공연도 좋아하고, 사진, 회화, 도예 등 다양한 분야를 즐기며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한국의 도자기에 관심이 많죠.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술이란 ‘창조’적이잖아요. 이게 전문적인 범위에서 보자면 제조업과 같아요. 장인정신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제조업으로 평생 외길을 걸어온 사람입니다. 제조업과 도자기만 놓고 보아도 이 둘은 모두 ‘창조’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도자기는 가마에 100개를 구워도 50% 도 안되는 작품만이 살아남습니다. 제조업도 비슷합니다. 불량률을 줄여야 하는 것, 0.01%의 불량도 없어야 하는 그 맥락에서 본다면 예술 행위나 이 작품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더 예술분야에 관심이 가고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창조라는 공통점, 예술 작품 그 자체도 좋지만 그 안에 담긴 작가의 노력이 보이는 것 같아서 관심이 많습니다.

Q. 지난해부터 아트레인에 함께 해 주고 계십니다.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아트레인 기부금이 어떻게 쓰였으면 하시나요?
A. 제가 행정이나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사용처나 활용 방법은 전문가 여러분들의 판단에 전적으로 믿고 맡기니 특별한 의견은 없습니다. 인천광역시의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 문화예술 분야에 보다 많은 기부금이 모이고, 이를 통해 더욱 많은 일들을 펼칠 수 있기를 희망해요. 작게나마 생각을 해 본다면 아트레인을 통해 모여진 기부금은 지금처럼 지역의 훌륭한 예술인을 성장시키고,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뜻 깊은 일에 계속해서 쓰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예술인들도 그 당시 그들에게 작품을 창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훌륭한 예술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창작활동에 힘겹게 싸우고 있는 예술인들을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되길 바랍니다. 인천문화재단의 아트레인이 보다 성장하고 많은 기업과 시민들이 지지하고 응원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업과 CEO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철학과 인천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40여년의 이야기를 풀어주신 와카이 슈지 대표님께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글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주현수

 


인천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아트레인의 탑승자를 찾습니다.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 기부 캠페인 아트레인은 인천 시민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개인 혹은 법인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며, 기업 후원의 경우, 기업의 경영철학과 사회적 책임 실현을 위한 사회공헌 사업을 문화예술로 함께 만들어드립니다.
 아트레인 참여 문의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032-455-7114, artrain@ifac.or.kr

 




배우 정암

01

 

02

 03

“조선배우학교 출신이며 일본 전위좌연극연구소에서 수업한 정암 씨가 토월회에서 윤심덕 양과의 역사적인 공연을 한 것은 그녀가 「사의 찬미」라는 레코드를 만들고, 대한해협(현해탄) 깊은 물속에 빠져 자살하기 전이어서 또한 인상적이다.

정암 씨는 인천 개항 후 광무 연간에 사립학교 인명의숙의 설립자이며 박영효의 암살 계획을 추진하다가 「사상팔변가」라는 노래를 남기고 자결한 지사 정재홍 씨의 둘째아드님이다. 그는 무대극인 이경손 각색 「동도(東道)」에서 아버지 역으로 나왔었다. 약 30년 전, 부민관에서 열린 동아일보 주최 제1회 연극콩쿨대회에서는 극단 낭만좌의 단원으로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등장했으며, 제2회 콩쿨대회에서는 박향민 작 「상하의 집」에 출연한 노련한 무대 배우였다.

그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고려영화제작소를 창립하였고, 중외일보 주간이던 이상협 씨가 일본의 가정 비극 소설 「나의 죄」를 우리말로 번안한 소설 「쌍옥루」를 각색해 만든 무성(無聲) 활동사진에서는 어부로 출연하였다. 또 청춘 남녀 사이에서 그 주제가가 크게 유행되었던 영화 「낙화유수」의 주연으로도 데뷔한 일이 있는 등 맹활약을 보인 정암 씨가 다시 고향 인천으로 돌아옴에 따라 인천의 연극 운동은 활짝 꽃을 피웠다.”

 

고일 선생의 저서 『인천석금』의 내용이다. 같이 활동하던 인물이어서 비교적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정암 씨가 다시 고향 인천으로 돌아옴에 따라 인천의 연극 운동은 활짝 꽃을 피웠다.”는 내용은 원우전, 진우촌 편에서 언급한 바대로 1926년 연극단체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를 창설하여 향토 연극 운동을 펼친 것을 말한다. 정암이 출연한 작품은 「햄릿」, 「상하의 집」, 「춘향전」, 「칼멘」, 「사랑의 주검」, 「눈물의 빛」, 「스테파노의 죽음」 등이다.

원우전, 진우촌, 정암, 이 세 사람은 각각 전문 무대미술, 전문 극작가, 전문 연기자로서 어두운 시절 이 땅, 인천의 연극 발전을 위해 활동했던 대표 연극인들이다.

김윤식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인천아트플랫폼의 만남의 장, 모나리자의 하품 조은경 사장

01

 

 


인천문화재단은 문화예술 기부캠페인 ‘아트레인’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인천문화통신 3.0에서는 인천의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기부자인 아트레인의 탑승자들을 차례로 만나보고자 합니다. 아트레인 후원의 집 3호!

카페 ‘모나리자의 하품’의 조은경 사장님을 만나볼까요?

02

Q. 이름부터 독특한 카페 ‘모나리자의 하품’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모나리자의 하품(이하 ‘모하’)은 인천아트플랫폼 H동 1층 커뮤니티홀에 위치하고 있어요. 신선하게 로스팅한 커피와 생과일쥬스가 맛있는 카페랍니다. 요즘은 여름 시즌을 맞이해서 직접 삶은 팥으로 만든 팥빙수를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커피와 차 종류가 중심이었는데, 요즘은 시즌별로 다양한 음료를 만들어보고 있어요. 날씨가 더워지니까 알콜 성분이 없는 칵테일 음료도 많이찾으시는 편이에요.

Q. 항상 궁금했던 부분인데, ‘모나리자의 하품’은 어떻게 탄생한 이름인가요?
A. 카페 이름을 지을 때, 아트플랫폼이라는 공간의 특성을 좀 생각하면서 짓고 싶었어요. 문화와 예술이 흐르는 공간이지만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는 장소였으면 했거든요. 예술을 대중적으로 가벼우면서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느낌을 고민하다가 ‘모나리자의 하품’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카페에서의 나른한 오후를 즐길 수 있는 시간, 이런 느낌도 나지 않나요?(웃음)

Q. 카페를, 그것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A. 전업주부로 살아왔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이 다 성인이 되고 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싶었어요. 문화예술 쪽으로 봉사활동을 해 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천아트플랫폼을 알게 되었죠. 마침 카페 공간을 운영할 사람을 찾고 있더라고요. 카페 운영 경험은 전혀 없었는데, 주부의 내공이 있잖아요. 한번 시작해보자는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올해로 벌써 3년째 운영하고 있네요. 처음 하는 일이다 보니 당연히 어려웠는데, 주변에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꾸준히 할 수 있었어요. 배워가면서 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Q.사실 이 공간은 일반적인 카페라기보다는 아트플랫폼 만남의 광장에 가까운데요. 카페를 운영하면서 생각할 할 지점도 일반 카페들과는 좀 다를 것 같아요.
A. 모하가 위치하고 있는 공간은 아트플랫폼 내에서도 커뮤니티홀이잖아요. 누구나 오가고 쉴 수 있는 공간 한 편에 카페가 위치해 있는 거죠. 건물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과 목표에 부합할 수 있고, 그 성격에 충실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하려고 해요. 아트플랫폼 일대를 찾아오는 방문객 모두가 다녀가고 대화할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그건 카페를 이용하는 손님이든 아니든 원칙적인 부분이거든요. 그러면서도 제 공간처럼도 운영하고 싶어서 다양한 부분을 신경쓰면서 운영하고 있어요.

03Q. 카페 운영이 쉬운 일이 아닌데, 3년이나 운영하면서 어려운 부분은 없으신가요?
A. 처음 시작해본 사업이니까 어렵죠. 전업주부로 살다가 시작한 경우라 집안일을 하신 시간은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으니, 살림에 소홀해지는 부분도 있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다 컸으니까 가능한 것 같아요.(웃음) 카페를 시작하고 나서 저만의 영역이 좀 더 늘어나길 바랬는데, 막상 일을 하다보니까 여기에 몰입하는 느낌이 들기는 해요. 모하는 특별히 쉬는 날이 없어요. 신정이나 구정같은 연휴 당일을 제외하고는 항상 열거든요. 그러다보니 정신없이 바쁘기는 하죠.

Q. 3년간 이 공간을 운영하셨으니 기억에 남은 일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A. 확실히 문화, 예술이 움직이는 공간이다 보니 재밌는 일들이 많은 것 같아요. 커뮤니티홀이다보니 정말 다양한 행사들이 열려요. 예술을 통한 새로운 경험도 할 수 있어요. 카페라는 공간을 그대로 활용한 연극이 펼쳐진 적이 있거든요. 예술가들의 폭넓은 해석이 작품으로 활용되는 현장을 볼 수 있어 너무 신기했죠. 주말에 초등학생 아이들이 참여하는 예술교육프로그램이 있어요. 가끔 아이들 간식을 만들 때가 있는데, 맛있게 먹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늘 기분이 좋아요. 엄마의 마음이라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구요.

Q. 인천문화재단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실 수 있는 분일 것 같아요. 사실 모하는 직원들의 회의 장소이기도 하거든요.
A. 모하를 시작하기 전까진 사실 문화재단이라는 조직을 몰랐어요. 지금도 많은 부분을 아는 건 아니지만 해야 할 일과 하는 일이 정말 많다는 건 느끼죠. 그리고 이런 조직이 있기 때문에‘지역의 문화예술이 계속되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어요. 직원들도 보면 이제 이름은 몰라도 얼굴 친구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재단 직원들에게서 문화예술에 대한 열정이 눈에 보여요. 실행하는 사업들도 보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풍부하더라고요.

Q. 아트레인에 선뜻 참여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캠페인을 시작하기도 전에 안내드렸는데, 너무 흔쾌히 함께 해주셨으니까요.
A. 특별한 의미를 담지는 않았어요. 함께 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까, 당연히 동참한 것 뿐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많은 금액도 아니고 소액으로 기부하는 건데요, 뭘.

04

Q. 재단 입장에서는 개인의 소액 기부자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몰라요. 의미를 담지 않는다 하셨지만 아트레인의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길 바라는지,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을까요?
A. 일단 기본적으로 창작활동이 어려운 예술인들과 문화소외계층 시민들을 위한 사업에 쓰였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창작활동을 지속적으로 하지 못하는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그 산물이 문화소외계층 시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소중한 콘텐츠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창작과 향유가 함께 공존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Q. 마지막으로 인천문화재단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갔으면 하는지 한 말씀 부탁드려요.
A. 지금처럼 활발하게 인천의 문화예술을 위해 많은 사업을 펼쳐주길 바랍니다. 다만 홍보가 보다 더 많이 활성화되면 좋겠어요. 인천문화재단이 지역 문화예술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해야 인천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화재단을 알고, 문화재단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정리 : 기획홍보팀 주현수

 

[아트레인 후원의 집 3호] 카페 모나리자의 하품
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18번길 3, 인천아트플랫폼 H동 1층
운영시간 : 오전10시~오후8시, 휴무는 신정, 구정, 추석 당일
문의 : 032-773-4425, ekjonana@hotmail.com


인천 문화예술의 생활 속 거점이 될 ‘아트레인 후원의 집’을 찾습니다. ‘아트레인 후원의 집’은 인천의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공식 업체를 말합니다. ‘재단’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후원의 집’을 홍보하여 이용을 권장하고 ‘아트레인 후원의 집’의 번영을 지원해 매출 신장과 인지도 제고를 지원합니다. 후원의 집은 인천문화재단과 상호 마케팅이 가능한 상점/업소/업체는 누구나 가능하며, 월 1만원 이상의 기부금 약정시 업체의 성격과 공동 마케팅 가능 여부 심사에 따라 자격을 부여합니다.
후원의 집 관련 문의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032-455-7114, artrain@ifac.or.kr

 




극작가 진우촌

01

 

02

 

03

진우촌(秦雨村, 생몰년 미상)은 인천 태생으로 본명은 종혁(宗赫)이고 우촌은 예명이다.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는 “진우촌이 극작가로 진출한 것은 물산장려회의 희곡 현상 공모에 입선된 후”라고 하나, 다른 기록에는 1925년  『조선문단』에 단막극  「구가정(舊家庭)의 끝날」로 데뷔한 것으로 나와 있다.

진우촌은 1926년 배우이며 연출가인 정암과 무대장치가인 원우전, 언론인 고일과 연극단체인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를 설립하여 인천 연극운동을 전개했다. 한편으로 박아지, 엄흥섭 등과 동인지  『습작시대(習作時代)』를 간행하기도 했다.

“칠면구락부에서는 진우촌이 각색하여 공연한  「춘향전」,  「카르멘」,  「사랑과 죽음」 이외에 수많은 작품을 각색, 연출하였다. 무대 장치는 원우전, 연출은 정암, 각색은 진우촌과 필자가 담당했다.

여담이지만, 필자의 작품인  「눈물의 빛」을 가무기좌(歌舞伎座)에서 공연할 때, 주연 송수안 군이 대사에도 없는 말을 하고, 무대 뒤로 숨은 일이 있었다.  <중략> 진우촌이 배경 뒤에서 극본을 크게 읽어 주었건만, 송 군은 입을 열자마자 첫 마디가, “여보게, 변소가 어딘가? 나, 소변 좀 보고 옴세….” 송 군은 이 한 마디만 남기고 무대 뒤로 사라져서 영영 나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대역을 맡아 본 필자는 하는 수 없이 임기응변으로 시국 강연을 한 바탕 하였고, 노파 역으로 분장한 임창복 군을 나오라고 독촉해 전혀 다른 내용의 희극을 연출하고만 일까지 있었으니 그립기도 한 낭만적 시절이 아니던가 싶다.”

고일 선생의 재미있는 회고담이다. 진우촌은 1938년 극단 낭만좌(浪漫座)에서 전속 극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작품은 장막극  「바다의 남편」을 위시해서 광복 직후 발표한  「두뇌수술」,  「보검」,  「왕소군」,  「죄」 등의 장막극과  「신념」,  「파도」  등 단막극 10여 편이 있다. 연극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당시 인천에서 활발히 연극 활동을 한 선구자인데 정작 인천 사람들은 그를 잘 모르고 있다. 아직 그의 정확한 생몰년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딱한 우리 실정이다.

김윤식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