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권번 출신 가수 장일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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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 인천 미두장(米豆場)이 번창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외지인들이 모여든다. 그에 따라 인천 땅에 외식업과 여관업, 그리고 유흥업이 생겨나 호황을 누리게 된다. 그런 인천 사회의 모습 중에 기생조합이었던 권번(券番)이 등장한다. 고 신태범(申兌範) 박사의 저서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인천권번 기생 명단 초일기(草日記)가 등장하는데 기생 중에 장일타홍(張一朶紅)의 이름이 보인다. 그녀의 전직이 인천권번 기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1935년 8월호 잡지『삼천리』의 기사에도 인천권번의 장일타홍이 서울 컬럼비아레코드회사 소속 유행가수라고 쓰고 있다.

장일타홍은 당시 우리나라 톱클래스 가수 중의 한 명이었다. 여러 신문에 그녀의 활발한 활동상이 기사화되어 있다. 그러나 1940년 3월 “방송예술가 실연(實演)의 밤” 출연 이후 돌연 종적을 감추고 만다.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그래서 그것이 은퇴로 이어진 것인지, 그녀의 동정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장일타홍의 출생 기록이나 가계(家系), 결혼 생활 등 개인 신상에 대해서 지금까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1934년 9월 조선중앙일보 후원으로 열린 삼남지방 수재민 위문 ‘전조선 순례 음악회’ 참가자 프로필에 일타홍이 ‘애초 인천의 한 부요한 가정 출신이었는데 돌연한 부친의 병사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급기야 기적(妓籍)에 몸을 두게 된 애화의 주인공’으로 기술하고 있다. 데뷔는 경성에서 개최된 명창대회에서 영예의 1등을 차지하면서 이루어졌다.

오늘날까지 장일타홍의 노래로 확인된 곡은 1934~5년에 콜롬비아에서 취입한 20곡으로 음반 10장 분량이다. 특기할 것은 그녀가 부른 노래가 ‘신민요곡’을 빼고는 대부분이 경기민요였다. 그녀의 출생지, 성장지가 인천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타홍(一朶紅)! 이름과 같이 그녀는 한 송이 붉은 꽃으로서 웃음을 파는 신세이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가요사를 장식한 인천 인물로 우뚝 선다.

김윤식/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직원들의 기부 참여, 조직과 구성원이 함께 성장하는 길 아닐까요? 인천아트플랫폼 오병석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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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금 활동을 외부로 시작하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부 조직원들의 이해와 동력입니다. 지난 해 ‘아트레인’ 사업을 준비하며 가장 우선시했던 부분도 재단 임직원과 모금 사업의 명분, 사업의 방향 공유였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직원 모두가 한 뜻으로 참여해 내부에서 외부로 펼쳐나가는 기부금 사업의 첫 시작을 만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아트레인의 내부 기부자를 만나봅니다. 든든한 지지자이자 사업을 함께 만들어가는 동반자, 인천문화재단의 소중한 직원인 아트플랫폼의 오병석 과장님을 만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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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천아트플랫폼이 개관을 준비하던 시기부터 근무하셨죠. 인천문화재단은 어떻게 입사하게 됐나요?
A.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인천의 여러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활동을 해왔어요. 20대 시절 약 7년 정도를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직장인이 됐어요. 건축을 전공했던 터라, 건설 현장에서 관리 감독하는 영역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일에 치여 살다보니 뭔가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와중에 인천문화재단의 공고를 접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전까지는 그냥 삶을 살아가는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된 일들이었다면, 인천문화재단 같은 경우에는 꼭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Q.
일반 기업과 문화재단에서의 근무는 많은 부분이 다를 텐데요. 직접 체감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A. 건설업에 종사했던 당시에는 아무래도 현장을 관리하다보니 원거리에서 근무를 하거나,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하다 지쳐 돌아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일에 바빠서 아이를 돌봐주거나 같이 함께 할 시간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큰 아이와 많이 친해질 수가 없었죠. 재단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건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점이에요. 기본적으로 집과 회사가 가깝다보니 퇴근이 늦어도 예전보다는 가정에 충실할 수가 있게 되었거든요. 덕분에 둘째 아이와는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많았고, 두 아이와 예전보다 많이 가까워 진 느낌이 들어요. 무엇보다도 아빠가 일하는 직장이 아이들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보니, 문화나 예술로 가족이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일들도 생긴 것 같아요. 
 
Q.인천아트플랫폼 그때 개관준비팀으로 근무하셨는데, 당시 상황이 궁금합니다.
A. 정말 재단 직원 모두가 함께 준비했던 시간이었죠. 개관준비팀으로 시작했는데, 거의ㅣ 모두가 처음 경험하는 일이 많았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어요. 해야 할 일들은 많은데, 사람이 적다보니 개관식 행사나 오프닝을 재단의 여러 팀이 함께 나눠서 해야 했어요. 그때 당시에 함께 준비했던 직원들은 대부분 이와 비슷한 영역에서 성장하고 있어요. 다만, 개관 당시 함께 했던 직원들 중에 아트플랫폼에 지금까지 계속해서 남아있는 동료가 거의 없어요. 함께 했던 추억에 헤어짐이 아쉽기도 했지만, 다들 좋은 곳에서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요. 개인적인 생각으로 아트플랫폼은 말 그대로 ‘정거장’이 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봐요. 모두가 이곳에서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누군가는 새로운 곳에서 시작하고, 그만큼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면 되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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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금 아트플랫폼에서 주로 하고 계시는 일을 소개해주세요.
A. 저는 아트플랫폼의 대관과 시설운영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촬영을 비롯해 외부에서 요청하는 다양한 행사들을 점검하고 대관 관리하는 일을 도맡고 있는데요. 그러다보니 행사시 안전 대책, 대관의 진행 검토 등을 체크하고 있어요. 일반적으로 행사가 진행되면 시설 관리나 안전에 있어서 일일이 체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많아요. 운영진 측과 매우 디테일하게 협의해 진행해야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Q.
학창시절부터 공부방 교사 활동을 하셨다고 했는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는 함께 하고 싶지만, 선뜻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고,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A. 특별한 목표나 사명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때 당시 대학을 다니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학생운동의 일환이었던 것 같아요. 학생으로 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여 혹은  참여 방식이었죠. 지역사회에서 교육의 보편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줄어들었으면 했고, 인천에서도 어려운 아이들, 청소년이 그 공부방을 통해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들어간 때가 92년도였는데, 인천에 운영한지 몇 년 되지 않은 신생 공부방이 좀 있었어요. 아무래도 사회복지분야에 활동하는 현장 활동가나 자원봉사자들 중에 남학생이 많지 않다보니 여러 공부방에서 저를 필요로 하는 일이 많았죠. 시설을 수리한다거나, 힘을 쓰는 행사를 한다거나…(웃음) 공부방에서 활동하는 누나들에게 전화가 오면 동네마다 불려다녔던 것 같아요. 그 덕분에 그때 이미 마을축제,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 등을 경험해봤던 것 같네요.

Q. 20년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추억이 있을까요?
A. 다른 곳보다도 부평 열우물마을에 위치한 해님공부방이 기억나요. 한 3개월쯤? 짧은 시간을 함께 했는데도 특별히 기억에 남아요. 10월 15일에 30주년 기념 행사를 한다고 연락도 왔더라고요.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꼭 다녀올 생각이에요. 그 곳에 가면 저의 20대 시절을 함께 했던 누나들도 만날 수 있겠죠. 결국 어떤 시절을 돌아보면, 그 시절의 추억은 사람인 것 같아요. 남는 건 사람이거든요. 30주년을 축하하는 의미로 30글자 메시지를 보내달라고 했는데, 30글자에 맞춰서 생각나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보냈어요. 해님공부방이 유난히 떠오르는 이유도 거기 있어요. 사람이 남은 공부방이거든요. 그 곳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친구가 성장해서 실무자로 활동을 하기도 하고, 이후에 든든한 후원자가 되죠. 지역사회에서의 선순환구조가 잘 만들어지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Q.
사실 재단에서 기부금사업을 하겠다고 발표한 후, 내부 구성원들에게 지지를 요청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과장님께서는 너무나 선뜻 그리고 흔쾌히 참여하셨던 걸로 기억해요. 원래 기부를 많이 하는 편이신지, 아트레인 기부금사업은 어떻게 동참하셨는지 궁금해요.
A. 솔직히 기부를 많이 하거나 하는 편은 아니에요. 그리고 아트레인도 동참을 요청하지 않았다면, 적극적으로 그렇게 참여하진 못했겠죠. 하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함께 했으면 한다는 요청을 했고, 그 의미와 뜻을 알기 때문에 참여하는데 고민은 없었어요. 그리고 내가 이 조직에서 일하며 얻게 되는 것에 비해 기부하는 금액이 많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내 생활비를 조금 덜 쓰면 되는 거고, 내가 함께 하는 것처럼 다른 동료들도 함께 하는 일이고, 결국엔 내가 몸 담고 있는 조직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재단에서 상조회 총무를 하는 일이나, 족구 동아리에 참여하는 일이나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요. 업무적인 대화가 아니면 사실 직원들 간에 소통할 기회가 많지 않아요. 그건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상조회 총무로 하면 부가적인 일은 많아지지만 그만큼 동료들의 경조사를 챙길 수가 있어요. 사람과 사람 간에 느낄 수 있는 정이거든요. 족구도 그래요. 저는 사실 족구를 매우 좋아하거나, 잘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재미있어요. 왜냐면 그 기회를 통해 직급이나 직책에 상관없이 만나게 되고, 레지던시 입주 작가와도 만나요. 그러면 그 시간동안은 이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직장 동료라는 관계에서 나아가 사람을 만나게 되고, 인간적인 관계를 통해 조직이 함께 성장하는 원동력을 발견하는 거죠. 작은 기부금이지만 나 스스로와 재단이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Q.마지막으로 재단 직원이기도 하지만, 기부자의 입장에서 아트레인 사업에 대해 따뜻한 한마디를 부탁드려요.
A. 조직 내부에 함께 있기 때문에 이 기부금이 얼마나 투명하게 운영되고, 잘 집행되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믿고 기부하는 부분이니까 알아서 잘 운영되리라 생각해요. 그냥 앞으로도 많은 동료들, 더 많은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밝은 미소와 즐거운 기운으로 직원들을 맞이하는 오병석 과장님과 업무가 아닌 이야기로 만날 수 있어 기뻤습니다. 조직을 생각하는 마음, 아트플랫폼을 아끼는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바쁜 업무 중에 대화를 나눠주신 오병석 과장님께 감사드립니다.


6인천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아트레인의 탑승자를 찾습니다.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 기부 캠페인 아트레인은 인천 시민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개인 혹은 법인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며, 기업 후원의 경우, 기업의 경영철학과 사회적 책임 실현을 위한 사회공헌 사업을 문화예술로 함께 만들어드립니다.
아트레인 참여 문의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032-455-7114, artrain@ifac.or.kr

정리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주현수




가수 이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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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자(李花子, 1916~1950)는 인천 권번(仁川 券番) 출신의 유행가 가수였다. 권번은 기생조합으로 기생으로서의 기본인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 1930년대 후반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가수 이화자는 부평 태생으로 인천 권번 출신이다. 이화자에 대해서는 1938년 8월호 잡지 『삼천리』에 실린 이서구(李瑞求)의 「유행가수 금석(今昔) 회상」에 나온다.

“요사이 신인으로 이화자, 조영심(趙影心) 두 미희가 전속진에 가담되어 있다. <중략>이화자의 신민요는 선우일선에 비하야 선이 굵다. 그 대신 깊은 맛이 있다. 이 점에 이화자의 새로 개척할 길이 있지나 않을까 한다.”

이밖에 1940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의 ‘춘계 독자 위안회’ 출연 기사가 있다. 여기에는 오늘날에도 기억되는 손목인(孫牧人), 장세정(張世貞), 이난영(李蘭影), 김정구(金貞九) 등 쟁쟁한 가수들과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

이화자는 1935년 「초립동」이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데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립동」은 이른바 신민요 스타일의 작품으로 이 노래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레코드 상점 앞에 모여 섰고, 이화자의 사진과 노래 가사가 인쇄되어 레코드 상점마다 배포될 정도로 첫 곡부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938년 “백만 번의 갈채를 거듭한 이화자 독점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꼴망태목동」이 대히트하면서 마침내 ‘민요의 여왕’으로 군림한다.

“선이 굵은 구수한 목소리의 넋두리 같은 표현과 콧소리의 간드러지는 흥얼거림 등 독특한 창법이 특징”이었던 이화자는 이어 1940년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 듯한 「화류춘몽(花柳春夢)」과 또 다른 가요 「살랑 춘풍(春風)」등을 내놓아 팬들의 가슴을 사로잡는다. 꼭 한 곡, ‘자서곡(自敍曲)’이라고 이름 붙여 그 1년 전인 1939년에 발표한 「어머님 전 상백(上白)」 노래 또한 당시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이화자의 최후는 비참했다. 아편에 손을 대, 끝내 아편 중독자가 되고 광복 후 서울 종로 단성사 뒷골목 단칸방에서 만신창이로 혼자 생활하다가 1950년, 30대의 나이에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윤식/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지역과 함께 문화경영으로 상생하는 기업인. 경인기계 구제병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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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하는 기부자는 40여년 넘게 인천과 함께 한 기업,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기업, 경인기계의 구제병 대표이사입니다. 인천 중구에 위치한 경인기계는 산업 및 공조용 냉각탑을 연구하고 생산하는 국내 유일의 냉각탑 기업입니다. 냉각탑(Cooling Tower)이란 산업용으로 만든 수냉식 에어컨 실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업 공정이나 건물의 냉방 과정에서 뜨거워진 물을 냉각해 재사용하도록 순환시키는 장치로, 데워진 냉각수를 다시 사용하지 않고 버리게 되면 하천의 온도가 상승해 지구환경을 파괴한다고 합니다.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선정한 우수 가업승계 기업인이자, 중소기업문화대상을 수상한 문화경영 실천 기업인 경인기계의 구제병 대표이사(인천문화재단 이사)님을 만나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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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경인기계 회사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경인기계는 1960년 선친께서 설립하신 공조기 제작업체 ‘한국이연공사’를 모태로 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10년 넘게 운영해오다 1972년에 인천 송림동에 공장을 준공하며 이전했고, 상호를 ‘경인기계 공업사’로 변경했었죠. 이후 75년에 지금의 상호인 ‘(주)경인기계’로 법인을 설립해 지금까지 걸어왔죠. 그 와중에 회사는 동구 송림동에서 중구 항동으로 이전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Q. 경인기계가 인천에 자리잡은 이후 40년이 넘게 성장하고 있는데요. 그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A. 사실 1972년에 송림동에 자리잡을 때는 경영상의 문제로 이전했던 터라, 저에게 송림동은 피난처와 같은 공간이었죠. 그 시절에는 어려움이 참 많았어요. 당장 사업에 들어가는 자금을 마련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시절이었거든요. ‘경인기계’로 변화 과정을 거치며 냉각탑 제조 전문업체로 자리잡기 위해 운영에 몰두했습니다. 80년대에 들어서 미국의 전문 기업과 기술제휴를 맺으면서 사업이 회복되기 시작했죠. 그 당시에 외국 기술제휴는 상공부의 인허가를 받아야 할 수 있는 사안이었는데, 정말 좋은 기회를 잡았던 셈이죠. 그 덕분에 큰 공사들을 시작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고, 사업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독자적으로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부분에 많은 투자를 했고, 중소기업으로는 드물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도 참여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죠. 그렇게 40여년을 인천에 뿌리내리며 인천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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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대표님께서는 인천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이 곳 인천에서 보내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인천의 기억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A. 저는 영종도에서 태어나서 아주 어렸던 유년시절은 동구 송월, 만석동 일대에서 자랐습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기도 전에 서울로 이사를 간 터라, 나고 자라던 당시의 기억보다는 인천에 계속 살고 있는 친척들을 만나러 놀러오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인천을 오는 기차는 굉장히 더디게 움직였죠.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에서 충청도에 가는 느낌과 비슷한 것 같네요. 서울에서 인천을 오가는 일이 지금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제물포역에서 한번 정차하면 3~40분을 서 있기도 했어요. 그래도 여행하듯 경인선을 따라 인천에 도착하면 가족들과 함께 작약도나 주안 염전에 놀러 다닐 수 있어서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는 작약도에 배를 타고 놀러가는 게 최대의 피서였던 것 같아요. 섬에서 산과 바다를 뛰놀던 그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아있고, 그립던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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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 기부를 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기부에 대한 철학이나 신념을 가지고 계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A. 할머님 때부터 모태 신앙을 가진 집안이었어요. 부모님이 내리교회에서 결혼식을 하실 만큼독실한 신자셨고, 저 또한 교회를 다니며 성장해왔습니다. 그 덕분에 주변에 소외된 이웃,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사는 방식이 낯설지는 않습니다. 성장 과정에서의 느낌과 경험들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이죠.
가능한 어려운 이웃, 함께 살아가야 할 곳들에 도움의 손길을 보내려고 하는 편입니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인하대학병원에서 치료비가 어려운 이웃에게 전하는 기금이나 탈북주민의 자립을 위해 지원하기도 했고, 몇 해 전부터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아너소사이어티(1억원 이상 기부 약정)로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별도의 선교재단을 통해 독거노인을 비롯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어려운 이웃들에게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Q.
실제로 구제병 대표님의 기부 활동이 사내 임직원들을 움직이기도 했다고 들었는데요. 직원들이 기부에 다함께 참여하고 있다면서요?

A. 전 직원이 급여 1% 나눔 운동에 동참했는데, 처음에는 연말에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 모여서 자발적으로 계속해서 실행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부를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경우도 많은데, 직원들이 우연히 알게 되면서 자발적으로 동참하기도 했어요. 이 뜻을 이해하고 함께해 주는 직원들에게 참 감사하죠. 
 
Q. 경인기계는 몇 해 전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과 모범이 되는 중소기업에게 수여하는 중소기업문화대상을 받았을 만큼 문화경영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기업입니다. 실제 회사 내에서 문화경영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나요?
A. 일단 임직원 모두가 함께 문화를 누리고 즐겼으면 하는 뜻이 있어요. 한번은 중소기업청 대강당에서 ‘경인 가족 문화의 밤’이라는 행사를 했었습니다. 그때 ‘아나야’라는 국악그룹을 초청해서 직원들만을 위한 공연을 한 적도 있어요. 가족적인 분위기로 임직원이 화합하는 장이기도 했고, 공연이 끝나고 나서 많은 식구들이 만족했어요. 또 사내에는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중창단도 있는데, 구내식당에서 매주 연습도 하고 중소기업청이나 청와대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외교부로부터 주한세네갈 명예영사로 임명받아 한국과 세네갈의 다양한 교류를 위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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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올해는 인천문화재단의 이사로도 활동 중이신데요. 기업의 경영인으로써 문화재단의 이사에 참여하시게 된 계기와 이 역할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문화예술에 관심은 많았지만 문화재단이라는 기관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게 사실입니다. 오히려 재단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죠. 기업과 문화가 잘 조화되면 지역에서 보다 풍성한 문화적 가능성, 기업의 문화적 경영이 확산되지 않을까 싶어서 경영인으로서 재단 이사라는 자리에 함께하게 됐습니다. 또 문화재단의 입장에서도 보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재단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탄탄히 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또한 재단 운영에 함께하는 이사진으로, 문화예술의 기부에 동참하는 것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경인기계가 사회적 가치 창출을 위한 문화경영의 전략적 동반자로 인천문화재단과 협력할 기회를 얻은 셈이죠.

Q.말씀하신 것처럼 구제병 대표님은 재단의 이사진이자, 아트레인의 소중한 기부자이십니다. 마지막으로 기부자의 입장에서 아트레인 사업을 위한 따뜻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A. 기부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특별한 의견이 없어요. 나 한 사람의 작은 뜻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은 거죠. 재단에서 계획하고자 하는 사업에 잘 사용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제가 기업을 하는 입장이다 보니 나와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좋은 곳에 기부를 하고 싶지만, 기부할 곳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간혹 있어요. 재단을 소개하고 연결할 지점들이 있는 셈이죠. 인천의 기업들에게 기업 경영과 인천의 문화예술이 상생하고, 지역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임을 설명한다면 함께 할 수 있는 범위가 보다 넓어질 것입니다.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세금 혜택도 받고 좋은 일도 할 수 있는 아주 소중한 기회죠. 좋은 뜻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 방법을 몰라서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기부처를 확대할 수 있는 방법을 더 적극적으로 찾아냈으면 합니다.

문화예술과 기업의 상생,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고민하시는 구제병 대표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재단이 앞으로 고민해야 할 지점들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습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인터뷰를 위해 시간을 내주신 구제병 대표이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07_1(주)경인기계
소재지 : 인천광역시 중구 서해대로 307
대표번호 : 032-885-9001


6인천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아트레인의 탑승자를 찾습니다.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 기부 캠페인 아트레인은 인천 시민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개인 혹은 법인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며, 기업 후원의 경우, 기업의 경영철학과 사회적 책임 실현을 위한 사회공헌 사업을 문화예술로 함께 만들어드립니다.
아트레인 참여 문의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032-455-7114, artrain@ifac.or.kr

정리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주현수




한국 여자 아나운서 1호 이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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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중의 하나가 이옥경(李玉慶 1902~미상)이다. 순수 문화 예술인이라기보다는 방송인 혹은 언론인의 범주에 두는 것이 옳겠지만 ‘문화’의 개념을 좀 더 넓게 확장해서, 인천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인 이옥경을 소개한다.

“약 40년 전, 조선 여성으로 고등여학교를 다닌 이옥경 여사는 인천해관 관리이자 제령학교 영어 강사였던 이학인 씨의 무남독녀로 인천 최초의 일본 여학교 출신이다. 그녀는 경성방송국의 초대 여자 아나운서였다. 부군 노창성 씨는 금년에 작고했다.”

이 글은 1955년에 출판된 고일(高逸) 선생의 저서『인천석금(仁川昔今)』「외국인 학교」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천 최초의 일본 여학교는 오늘날의 인천여자고등학교를 말하는 것이다.

이옥경은 여학교 졸업 후 동경의 일본여자음악학교를 중퇴했다고 한다. 그녀는 워낙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는데 거기에 일본어 실력까지 유창해 1927년 한국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오늘날 같은 공개채용이 아니라 남편 노창성(盧昌成, 1896~1955)의 추천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노창성은 조선총독부 체신국 직원으로 방송국 설립의 기술 일을 맡아하고 있었는데, 개국이 가까워 시험 방송을 하던 중 아나운서가 모두 남자여서 청취하는 시민들이 딱딱하게 느낄 것 같아 미모에다 고운 목소리를 겸비한, 거기에 일본어까지 능통한 부인 이옥경을 추천했다는 것이다.

당시 모 잡지는 “그의 빛나는 두 눈동자, 배꽃같이 하얀 살결 동그스름한 그에 얼굴, 호리호리한 몸맵시, 명랑한 목소리는 그때의 방송국 안 여러 사람들의 눈을 황홀케 한 때가 많았다.”고 쓰고 있다. 이옥경의 아나운서 생활은 그리 길지는 않았고, 그 후 5남매의 어머니로서 평범한 삶을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로 알려진 노라 노는 그녀의 딸 노명자였다.

김윤식/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신포동의 떡 빚는 글쟁이, 성광떡집 이종복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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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포국제시장 골목 가운데 작게 보이는 간판, 성광떡집.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는 이 곳 떡집은 시인이자 문화 활동가인 이종복 작가의 생활터전입니다. 오토바이로 신포동 일대를 오가며 따끈한 떡을 실어 나르는 떡집 사장님, 신포동에서 나고 자란 이종복 시인이 생각하는 인천은 어떤 지역이었을까요? 방앗간에서 떡을 빚으며 글을 쓰는 이종복 시인과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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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방앗간 사장님이자 문화 활동을 하는 시인이라고 해야 할 텐데요. 어디에 더 주안점을 두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요?
A. 부모님과 둘째 형님에 이어 방앗간을 물려받아 운영하는 떡집 사장이지만, 정체성은 시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신춘문예에도 몇 차례 응모해보기도 했는데 고배를 마셨죠. 그러다 같은 동네에 사는 김구연 시인을 만나면서 많은 부분을 깨닫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인천을 공부하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을 보낸 시절은 ‘죽음’이 아닌, ‘죽임’이 일상적인 시절이었어요. 사회 저변에 폭력이 일상화되면서 이에 대한 두려움도 컸어요. 그런 상황에서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이나 돌출되는 감정들을 느꼈고, 이를 스스로 정화하고 내면을 다루는 방식을 찾다보니 ‘시’가 보였죠. 시(詩)라는 단어의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는 포괄적 내용을 집약하는 상징적인 장르에요. 그렇게 시인으로 활동한지 어느덧 25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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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버지와 형님에 이어 가업을 물려받으셨는데, 방앗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A. 조부의 당숙이 김대건 신부였습니다. 당시 저희 집안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인천으로 내려와야 했던 상황이었죠. 조부께서 그렇게 인천에 정착하셨고, 저의 아버지부터 인천에서 태어나 살아오셨어요. 아버님께서는 항아리를 구워 파는 일도 하셨는데, 1947년부터 방앗간을 시작하셨죠.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 둘째 형님이 물려받았고, 잠시 일을 도와준다고 함께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맡게 되었네요. 그 해가 1988년인데, 방앗간을 하지 않았다면 제가 법학도였으니 사법고시를 준비했겠죠. 사실 어린 시절에는 집안 배경 탓에 신학과를 가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이런저런 연유로 일반 대학을 진학하면서 법대를 가게 되었는데, 그 갈림길들이 매우 다른 삶을 만들었네요. 사실 방앗간을 이어받는다는 일이 어렵다거나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서 해 오셨던 일이고, 제가 살아왔던 삶의 모든 부분이 방앗간과 함께 했던 터라 어색한 일도 아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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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 때문에 신포동에 관한 기억은 다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신포동은 어떤 모습인가요?
A. 제가 태어나고 자란 신포동은 당시 인천에서 최고의 번화가이자 유일한 도심이었죠. 신포동과 동인천 일대만 벗어나도 인천은 논과 밭, 염전과 바다였어요. 송도, 화도진, 제물포, 주안… 지금이야 도심이 되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과수원이나 염전, 허허벌판의 대지였으니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여기 신포동 인근 일대 뿐이었어요. 이 일대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문화를 가진 곳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외국인 선교사, 화교, 일본인이 한데 어우러져서 인종이나 문화적 괴리감도 없었으니까요.
  
Q. 그럼 그 당시 기억과 달라진 모습이 나타난 지점은 언제부터였나요?
A. 군대를 다녀왔을 때였어요. 강제징집으로 군대를 다녀왔는데, 작은 내무실 안에 전국 팔도에서 모인 청년들이 있었죠. 거기서 처음으로 인천이 아닌 전국의 지역을 만났어요. 제대하고 돌아오니 세상이 좀 달라지고 있었어요. 또 어린 시절에 보던 인천의 모습과 다른 지점들이 보이기 시작했죠. 어릴 때는 다양한 문화가 유연하게 흐르던 인천이었다면, 청년 시절에 보게 된 인천은 서울을 향해 치열하게 싸워가는 팔도 각지의 사람이 모인 지역이더군요. 이 모습을 보면서 지역의 문제, 인천의 정체성 등을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이 문제가 저를 지금까지 오게 한 평생의 숙제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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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천의 정체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올해는 특히나 가치, 정체성이라는 단어가 이슈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모습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요즘 인천이 가치 재창조라는 단어를 주목하면서 여러 사업들을 하고 있어요. 예컨대 과거의 인천 인물을 찾아내고, 이를 정리한다거나 인천의 외형에 주목하면서 섬을 비롯한 자연에 주목하죠.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죠. 이런 사업들을 펼치면 인천 시민들에게 가치와 자존감이 자발적으로 생겨날 수 있을까요?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긍심과 가치의 이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문화적 경험과 양분을 주입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예술, 인문학적 소양을 통해 ‘사람’을 키워내는 것, 그것이 인천의 정체성을 만들고 가치를 키우는 최우선적인 일이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일은 시간이 매우 필요한 작업이라는 거죠.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만들어가는 과정을 문화적 관점으로 실행해야 하고, 그 과정을 사회적 약속을 통해 지켜야 합니다. 유럽이나 일본에 비해 우리는 아직 시작 단계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성급하게 움직이며 정체성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보다 조금 더 천천히 긴 호흡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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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재단이 기부금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이제 정확히 1년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초기단계지만 기부자의 입장에서 보시기에 아트레인 기부금사업을 평가하자면 어느 지점이 좀 더 보강되어야 할까요?
A. 인천문화재단은 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 어떤 사업이 실행되는지 모두 다 보여요.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기부 영역만큼은 일반적인 사업보다도 더 투명하게 외부로 노출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부자가 몇 명이고, 현재 기부금이 얼마가 모였고, 어떤 사업에 어떻게 집행되었는지 적극적으로 노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은 돈이라도 기부를 한다는 건 그만큼 그 단체 혹은 기관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다는 의미거든요. 그런데 지금 인천문화재단 홈페이지에는 이런 정보들이 나와 있지 않아서 조금 아쉽습니다. 재단도 자랑을 해야 합니다. 얼마나 사업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는지, “우리가 이만큼 노력해서 문화예술을 위한 기부금을 이만큼 모으고 있고, 이런 사업에 쓰고 있습니다” 뻔뻔하다고 느껴질 만큼 보여줘야 해요. 물론 인력이 부족하고 사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는 점은 이해해요. 하지만 방안을 강구하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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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아트레인을 통해 모인 기부금이 어떻게 쓰였으면 하는지, 특별히 생각하시는 지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아트레인의 기부금은 지원금을 받아 창작 활동을 하거나 수혜를 받고 있는 예술인이나 단체가 또 다른 지원의 영역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사업이 되어야 해요. 예술창작의 역량 평가 등 일반적인 지원사업의 기준과 잣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수혜자를 발굴해서 문화예술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사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누가 이 사업으로 수혜를 받았는지, 그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모든 부분이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하죠. 사업의 방식도 일반적인 공모 형태는 지양하길 바랍니다. 기부금을 낸다는 것은 누군가가 진심으로 단체를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뜻이죠. 그만큼 소중하고 책임감 있게 쓰여야 하는 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업을 만드는 일은 어렵고 힘든 영역임이 분명하지만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천문화재단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언제나 많은 이야기를 해 주시는 이종복 선생님과의 시간이었습니다. 말씀해주신 지점들을 실행 과정에 반영함으로써 기부자를 위한, 인천 시민을 위한 문화재단이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바쁜 시간을 내어주신 이종복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성광방앗간(조선떡집)
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동 3, 신포국제시장 내 위치
전화번호 : 032-772-5093


6인천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아트레인의 탑승자를 찾습니다.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 기부 캠페인 아트레인은 인천 시민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개인 혹은 법인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며, 기업 후원의 경우, 기업의 경영철학과 사회적 책임 실현을 위한 사회공헌 사업을 문화예술로 함께 만들어드립니다.
아트레인 참여 문의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032-455-7114, artrain@ifac.or.kr

정리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주현수




한국 최고의 액션배우 장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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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출신이면서 인천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듯 평생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은데 배우 장동휘(張東暉, 1919~2005)도 그런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왜 인천에서 출생했거나 활동했던 이력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는지…

하기야 『인천시사』에도 그의 이름 한 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무슨 말을 하랴. 앞서 소개한 여러 배우들도 모조리 누락되어 있다. 이들에 대해 인천사에 기록하고 알리는 것이 인천인으로서 긍지를 가지게 하는 일이 아닐까. 거듭 강조하거니와 인천 인물 하나를 더 찾아내 기록하고 시민들이 함께 마음에 새기는 것이야말로 인천의 뿌리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야기가 옆으로 나갔다. 장동휘가 영화에 데뷔한 것은 나이 38세인 1957년으로 김소동(金蘇東)이 감독한 영화 「아리랑」에 첫 출연하면서였다. 그 후 그는 성격배우, 액션배우로서 1960년대 초반부터 10여 년간 박노식(朴魯植), 허장강(許長江), 황해(黃海), 독고성(獨孤星) 등과 함께 한국 액션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영화배우로서 그의 행로는 분명하지 않다. ‘1938년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에 있던 악극단 <칠성좌>에서 연기 활동을 시작했고 광복 후에는 악극단 <낙천지>의 멤버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1936년 고교를 졸업한 이후 1939년 악극단 <콜롬비아>에 몸담으면서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6ㆍ25때는 예술단으로 종군, 국군 위문 활동을 벌이며 장병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렸다’는 기록도 보인다.

‘인천의 유명한 장사’였다는 소문처럼 그는 건장한 체격과 독특한 마스크, 특유의 너털웃음, 상대를 압도하는 눈초리, 그리고 당당한 목소리로써 그만의 카리스마를 창출했다. 주로 전쟁 영화와 범죄 영화에서 통쾌한 액션을 연기함으로써 남성미 물씬 풍기는 한국 최고의 액션 스타 1세대로 이름을 날렸다.

평생 단 한 번도 TV 출연을 하지 않은 것이나 나이트클럽 출연 자제 등 외고집 영화 인생을 산 장동휘. 그는 진정 선 굵은 영화인으로 세인의 가슴 속에 추억된다.

김윤식/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인천 역사의 기록자들,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강덕우, 강옥엽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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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자유공원에서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길목에는 경관이 아름다운 한옥 한 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일본식 정원과 한옥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이곳은 인천 시민들을 위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입니다. 인천만이 간직한 역사가 축적되어 있는 곳, 인천시 역사자료관의 강덕우, 강옥엽 박사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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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A. 나라에 국사가 있듯이 시에는 시사가 있죠. 역사자료관은 인천시의 시사편찬업무를 중심으로 인천의 역사 자료를 발굴, 수집하고 연구를 통해 기록을 축적하는 기관입니다. 우리에게 삼국사, 고려사, 조선사의 기록들이 있기 때문에 당대의 시대상이나 사회상을 알 수 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후세를 위해 기록을 남기는 과제인 시사편찬을 주 업무로 하고 있습니다. 시사편찬은 통상 10년의 주기로 작업을 합니다. 시사편찬위원회가 1965년에 구성되었으니 어느 덧 50년이 흘렀어요. 45년 해방 후 최초로 우리 손으로 만든 향토사가 73년에 나왔으니 오랜 시간이 걸렸죠. 그만큼 자료를 축적하고 펴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후부터는 83년과 93년, 2003년, 2013년까지 총 5차례에 걸쳐 10년 단위로 발간을 했고, 이후부터는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을 맞아 인천 체육의 발자취, 2014년은 시사편찬위원회 구성 50주년 기념 인천의 옛 지도, 지명 등의 자료, 올해는 인천의 건축을 집대성한 발간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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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역사자료관이 위치하고 있는 이 곳 공간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남다른 공간인데요. 건물의 조성과 연혁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A. 지금 역사자료관은 중구 송학동 응봉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어요. 제물포구락부와 자유공원이 이웃해서 있죠. 이 일대는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모여든 외국인들의 별장들이 많았던 곳이고, 이 공간 역시 당시 평양에서 무역과 잡화상 운영을 하다가 인천에서 부를 축적했던 ‘코노 다케노스케(洞野竹之助)’의 별장이었습니다. 대문에서 건물로 이어지는 돌계단과 정원의 나무들도 당시 모습을 가지고 있어요. 해방이 되면서 일본식 별장은 허물어졌고, ‘동양장’이라는 서구식 레스토랑과 ‘송학장’이라는 사교클럽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1966년 당시 인천시장의 지시로 매입해 한옥건물이 지어졌고 인천시장의 관사로 사용되었어요. 그 당시에는 인천시청(현 중구청)과 가까운 위치와 고급 주택지가 밀집한 동네라 관사가 자리하기 최적의 장소였겠죠. 이후에 최기선 시장이 당선되면서 2001년부터 인천시 역사자료관으로 시민들에게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공관으로 사용되는 동안 총 17명의 시장이 이곳에 머물렀어요. 따지고 보면 이 응봉산 기슭이 일본인에게 빼앗긴지 장장 80여 년 만에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셈이라고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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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역사자료관 내에서는 어떤 자료들을 접할 수가 있나요?
A. 아무래도 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고, 한옥이다 보니 자료관으로 활용하는 데 한계는 있지만 공간을 그대로 보존해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습니다. 크게 향토자료들을 수집하는 공간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공간, 연구실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자료들은 인천지역 자료를 비롯해 타 지역의 자료, 서적, 고문서 등이 있고, 복도 공간을 활용해 사진전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Q. 시사편찬이라는 중요한 업무 외에도 시민들이 접할 수 있는 다른 일들도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A. 역사자료관의 주요 업무는 시사편찬위원회 운영이지만 인천의 문화와 역사를 담아내는 인천역사문화총서 발간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통권 76호가 출간되었고요. 인천의 주요한 역사적 이슈들을 중심으로 한 학술대회와 더불어 시민들에게 인천의 역사를 알릴 수 있는 향토사 강좌도 격월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벌써 79회째 개최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사업들은 역사의 대중화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꾸준히 행하고 있습니다. 8월 마지막주에 이어 다음 향토사 강좌는 11월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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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강옥엽 박사님께서는 역사자료관에서 활동하신지 어느 덧 16년이 되셨는데요. 처음 자료관과 인연을 맺으며 만났던 인천의 기억, 인천에 대한 느낌은 어떠셨나요?

A. 고향이 인천이 아니어서,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인천으로 왔어요. 그 때가 2000년이었는데, 인천을 접하면서 가장 먼저 느꼈던 것은 참 다이내믹한 도시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인상적이었어요. 전철만 타면 한시간만에 서울을 갈 수 있기에 서울인 것 같지만 서울이 아닌 지방도시의 느낌이 있었어요. 그렇다보니 자꾸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려하는 모습도 있었고요. 또 시골과도 같은 향토적 특성도 있었는데, 그 향토사를 만들어 온 지역의 여러 연구 자료들을 토대로 지금의 자료관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자료들은 정말 보물과도 같은 존재들이죠.

Q. 한국 현대사의 흐름에서 경제, 산업, 문화의 도시였던 인천이 많은 부분을 내외적 요인으로 인해 잃었다는 관점도 있는데요, 실제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현대사에서 인천은 어떤 도시이고, 인천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A. 한국 현대사에서 인천은 애증이 교차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봐요. 다시 말하자면 인천이라는 도시의 가치가 현대사에서 퇴색되었다고 할 수가 있어요.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의 도시로 변했던 까닭에 광복 이후에 가장 많은 피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인천이 전쟁의 교두보로 자리하면서 대부분의 산업시설이나 공장들도 많이 파괴되었어요. 사실상 식민지배 기간 동안 가장 많은 탄압을 받았던 지역이죠.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많은 피난민이 모여들기도 했는데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라 계획적인 공단 지역이 되었죠. 그렇게 현대사 흐름에서 나라의 발전을 위해 내어주고 함께 보듬으며 성장했는데 지금의 인천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경인고속도로, 항만, 철도 등 산업화의 부작용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죠. 한국의 역사에서 인천의 아픈 역사는 빼놓고 말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지금 그 역사를 외면하고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게 한국의 현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은 경제자유구역이 만들어지고 인천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성장하면서 인천이 가진 역동적인 힘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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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기부, 나눔의 영역에서 문화예술은 사실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기부 활성화를 위해서 재단이 보다 더 노력해야 하겠지만, 박사님들이 생각하시기에 문화예술 분야에 기부가 필요한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인천문화재단이 설립된 지 10년이 지났습니다만 이 문화예술에 대한 기부사업은 이제야 시작한 셈이에요. 사실 좀 더 빨리 했었어야 하는 사업이었죠. 지금이라도 본격적인 추진을 하니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아트레인에 함께하는 이유는 다른 것보다 문화재단의 이 활동들을 지지하고 함께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뿐입니다. 통상적으로 기부라는 것은 문화 복지 쪽으로 많이 생각하지만 그 영역이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맥락에서 보자면 기부문화가 더욱 풍성해지고 폭이 넓어져야 지역이 발전하고 모든 분야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거죠. 사실 이 아트레인 기부 캠페인은 인천문화재단이 인천의 시민들과 소통하는 다양한 방법 중에 하나라고도 생각해요. 이제 시작하는 단계이고, 노력해가는 과정이니까 보편적인 문화예술의 활성화를 위해서 보다 많은 분들이 함께 동참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Q. 인천을 연구하는 분들이기에 지역에 대한 사랑이 남다를 것이라 생각됩니다. 두 분께서 특별하게 생각하는 인천의 지역 혹은 공간이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인천의 역사성을 가진 모든 공간이 특별합니다. 중구 개항장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업무를 하는 이 역사자료관은 당연히 특별하고, 굳이 한 가지를 꼽자면 자유공원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자유공원은 대한민국 근대사의 흔적을 압축해서 가지고 있는 장소죠. 인천의 역사적인 흐름이 자유공원에는 타임캡슐처럼 쌓여있어요. 자유공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갖는 상징성이 인천에 있죠. 저희에게 자유공원은 공기와도 같은 존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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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트레인 기부금 사업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하고 성장했으면 하는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장기적인 방향성을 갖고 움직여야 하는 사업임에 틀림이 없어요. 단기간에 성과를 내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움직여지는 사업이 아니라 인천문화재단의 기존 사업과는 다른 형태로 문화예술에 있어 소외된 예술인, 시민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그런 형태의 사업들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단 내·외부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하고 성장해가야겠죠. 인천 시민의 많은 수가 아트레인의 1구좌 후원을 하는 것도 길게 본다면 목표로 잡을 수 있어요. 하지만 단순히 기부자가 많아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를 얻는 것을 목표로 잡는 거죠.

Q. 마지막으로 인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는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인천시 역사자료관은 시정의 방향과 발전에 기여하는 아주 기초적인 기관이고, 우리 시대의 문화와 역사의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지역 문화의 기초를 만드는 그 바탕에 역사가 있고, 그 활동을 자료관이 하고 있는 셈이죠. 인천문화재단과 마찬가지로 역사자료관 역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기관이에요. 시의 자료를 집적하고 단순히 시사를 편찬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정의 가장 하부를 구축하는 기관으로써 많은 시민들에게 지역의 역사를 알리고 함께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연구, 수집하는 모든 자료들을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인천시청 홈페이지 등을 통해 항상 공개하고 있어요. 물론 자료관 역시 시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향토사강좌, 사진 전시 등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관심과 동참으로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구축해가기 위해 보다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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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항상 밝은 웃음으로 반겨주시는 강덕우, 강옥엽 박사님의 인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긴 시간을 내 주셨던 두 박사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
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39번길 74(송학동 1가 2-2)
전화번호 : 032-773-3498
개방시간 : 오전 10시~오후 5시(토·일요일, 공휴일은 정원 관람만 가능)


6인천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아트레인의 탑승자를 찾습니다.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 기부 캠페인 아트레인은 인천 시민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개인 혹은 법인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며, 기업 후원의 경우, 기업의 경영철학과 사회적 책임 실현을 위한 사회공헌 사업을 문화예술로 함께 만들어드립니다.
아트레인 참여 문의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032-455-7114, artrain@ifac.or.kr

정리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주현수




배우 도금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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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금봉(都琴峰, 1930~2009) 역시 인천이 낳은 또 한 명의 유명 여배우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여성영화인사전』에 나와 있는 연보와 활동 기록 정도다. 본명이 정옥순(鄭玉順)이란 것과 만주 용정의 광명여중을 졸업한 것 외에 인천에서의 자취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그녀는 연보의 기록대로 1957년 조긍하(趙肯夏) 감독의 영화 <황진이>에 일약 주인공 ‘황진이’로 데뷔한다. 그 이전에는 ‘악극단에서 지일화(池一花)라는 예명으로 자못 날리던 시절’을 구가하고 있었다고 한다. 도금봉의 <황진이>는 아주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도금봉’이란 이름은 이때 얻게 된 것인데 황진이가 살았던 송도의 ‘도’와 가야금을 잘 탔다는 황진이의 일화에서 ‘금’을 가져왔고 영화계에서 우뚝 솟은 봉우리가 되라는 뜻에서 ‘봉’을 넣었다고 한다. 그 뒤에 또 한 번 히트를 친 영화가 1959년에 개봉된 <유관순>이었다. 이어 1961년에는 당대 최고의 미녀 배우 김지미(金芝美)와 ‘양귀비’ 역할 대결을 펼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도금봉은 “타고난 미모와 늘씬한 자태”에 이른바 “세기의 요우(妖優)”라는 수식어가 증명하듯이 “독특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로 스크린”을 누빈 최고의 인천 출신 스타였다. 그녀는 1960년대 화려한 전성기를 지내고, 간간히 활동하다가 1997년 <삼인조>라는 영화에 전당포 노파 역으로 출연한 것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출연 영화 500여 편에 1963년 제2회 대종상여우주연상, 같은 해 4월 동경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 1972년 제10회 대종상여우조연상, 1974년 제12회 대종상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인천 출생 그 하나만 겨우 밝혀진 배우 도금봉. “등대불 번쩍이고 갈매기 하늘을 헤엄치는 항도 인천의 로맨티시즘을 타고났을 도금봉”이라고 한 당시 《경인일보》의 표현만이 쓸쓸하다.

김윤식/시인,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예술 아지트 ‘미추홀구락부’로 초대합니다. 조각가 김길남

1인천문화재단은 2015년부터 문화예술 기부캠페인 ‘아트레인’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인천문화통신 3.0에서는 인천의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기부자인 아트레인의 탑승자들을 차례로 만나보고자 합니다. 이번 인터뷰는 인천문화재단의 6기 이사진 중 한분이자 인천에서 창작 활동 중인 김길남 조작가과 함께 합니다. 재단 운영에 참여하는 이사진이면서 아트레인의 후원자인 김길남 작가는 자유공원 인근에 거주하며 ‘미추홀 구락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천 문화예술의 또 다른 거점인 ‘미추홀 구락부’에서의 대화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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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간단한 소개와 근황을 부탁드립니다.

A. 인천에서 나고 자랐어요. 한국전쟁 당시 평양에서 피난 온 부모님께서 인천에 정착하며 신흥동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까지 이 근방에서 다니고 인천에서 미술교사 생활과 대학에서 전임 활동을 했었고, 대구에서 잠시 있었네요. 그리고 줄곧 인천에서만 있었고, 인천에서 작업하고 생활한 사람입니다. 우리 인천에 참 훌륭한 선후배 예술인들이 있었어요. 이미 작고하신 분들도 많고, 활동의 반경을 서울로 옮겨간 분들도 많아서 함께 했었다면 힘이 되었을 텐데 좀 아쉬운 면이 없잖아 있죠. 상황이 이렇다보니 부족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맡아야 하는 일들을 하면서 제 개인 작업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혼자 하는 작업에 익숙한 예술인인데, 어쩌다보니 예술의 공공적 성격에 따른 옷들도 입고 있어요. 단체나 협회의 운영에도 관여하고 있고, 재단의 이사로도 참여하고 있는데, 이런 부분에 함께 하는 게 아직도 어색하긴 합니다. 그런 차이의 한계에서 왔다 갔다 하며 살고 있는 생활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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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인천에서 줄곧 살아오셨는데요.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인천과 지금의 모습에는 어떤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A. 이 동네만 보자면 동인천 역사를 제외하고는 크게 변한 지점은 없는 것 같아요. 덕분에 이 지역, 이 일대 공간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힘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공간이 주는 힘은 세트를 아무리 만든다고 해도 완벽히 흉내를 낼 수가 없거든요. 이쪽에서 학교를 나왔는데, 동네 골목골목마다 제 흔적들이 다 남아있어요. 공부보다도 몸으로 움직이고, 운동하는 걸 더 좋아했던 것 같네요. 특히나 이 일대 중에서도 인천제일교회는 저의 아지트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큰 기계가 많지 않던 시기였다보니 리어카에 흙을 담아서 옮겼는데, 교회 증축하고 공사하는 흙의 1/3은 제가 다 퍼날렀어요.(웃음) 
 
Q. 인천의 문화와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은데요. 지역에서 꾸준히 창작활동을 해 오신 입장에서 인천 문화예술의 현재는 어떻게 보고계신지 궁금합니다.
A. 지속적으로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서울이 너무 가까이 있다 보니 인천의 발전이 더디다는 이야기입니다. 긴 세월의 흐름을 보면 인천은 근대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이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출발점이었어요. 그런데 서울을 중심으로 한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인천의 가치가 저평가되고 경제, 문화, 사회 등 모든 측면의 투자가 미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역은 그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있어야하는데, 우리는 계속해서 서울과 비교를 하다보니 그 부분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게 사실이에요.

지금 인천을 언급되는 이미지들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대다수입니다. 좋은 이미지로 가시화할 수 있는 이미지보다 아프고 상처받은 역사와 문화들이 주를 이루죠.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이런 이미지가 계속해서 인천을 대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 인천의 인구 분포나 도시의 성장 속도를 보면 뽑아낼 수 있는 키워드가 굉장히 많습니다. 인천이라는 도시는 이미 복합적이고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도시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도시의 규모나 경제 성장 사이즈에 비해 문화예술은 턱없이 부족해요. 예술대학도 없고, 미술관도 없습니다. 그나마 인천문화재단이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문화예술의 토대가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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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근 들어 시민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문화예술 공간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아요. 운영 중인 이 공간 ‘미추홀구락부’도 그런 맥락에서 운영되고 있는 것 같은데, 공간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송도에 살다가 2년 전에 이 동네로 이사를 왔습니다. 자유공원을 가다가 들어오거나, 차이나타운과 조계지 부근에서 산책을 하다가 오는 사람도 있어요. 주변 풍경과는 조금 색다른 분위기를 궁금해하며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미추홀구락부’라는 이름은 자유공원 아래쪽에 있는 제물포구락부에 빗대어 지은 이름인데, 제물포구락부가 예전 사람들의 사교의 장이었다면 지금 이 곳은 현대인들이 즐길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어요. 사실 이 공간은 인천에서 사진 작업을 하셨던 부친의 자료들을 보관하며 사진박물관을 준비하려던 공간입니다. 행정적으로 해결이 좀 어려워서 사용하지 않는 공간으로 놔두다가 2015년 4월부터 카페로 운영하며 생활하고 있어요. 이 공간 일대는 역사적 가치가 굉장히 농축된 지역이에요. 문화예술콘텐츠가 보다 풍성해지면서 지역의 예술인들이 모이는 곳, 시민들이 편안히 즐길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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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재단 이사로써, 재단이 진행하는 문화예술기부캠페인 아트레인에 탑승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인천의 문화예술을 위해 아트레인 사업이 앞으로 어떻게 성장했으면 하는지 궁금합니다.
A. 인천문화재단의 모금사업은 당연히 해야 하고, 꼭 필요한 사업입니다. 아직 초기 단계다보니 관계자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널리 알리는 일이 필요한 것 같아요. 문화재단에서 나오는 각종 홍보물이나 책자에 아트레인을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조금 더 넓혔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현금과 현물 기부뿐만이 아니라, 예술인들에게는 작품이나 재능의 기부, 시민들에게는 자원봉사 등의 기부도 적극 활용해야 할 것 같아요. 반드시 금전적 기부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민들이 재단 사업에 자부심을 갖고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형태, 참여하는 사람들이 즐겁고 기분 좋게 함께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요? 얼마 전에 인천아트플랫폼에 생활문화예술센터가 오픈했는데, 그런 공간에서야말로 자원봉사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지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무더운 여름날 장시간 동안 인천 문화예술에 대한 고민과 우려, 재단의 사업 방향과 앞으로의 기대를 들려주신 김길남 작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앞으로의 창작 활동을 응원하며, 문화예술의 또 다른 거점이 될 미추홀 구락부를 기대합니다.

미추홀구락부
연락처 : 032-817-4521
영업시간 : 오전8시~오후10시
위치안내 : 중구 내동 2-29, 성공회내동교회에서 송학로 19번길을 따라 홍예문 위쪽에 위치


6인천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아트레인의 탑승자를 찾습니다.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 기부 캠페인 아트레인은 인천 시민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개인 혹은 법인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며, 기업 후원의 경우, 기업의 경영철학과 사회적 책임 실현을 위한 사회공헌 사업을 문화예술로 함께 만들어드립니다.
아트레인 참여 문의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032-455-7114, artrain@ifac.or.kr

정리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주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