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연주자는 정밀 묘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인천신포니에타> 이종욱 대표 인터뷰

오는 8월 9일에 <인천 신포니에타>에서는 김중석 교수님께서 작곡하신 <몽유도원>을 초연한다. 안평대군이 도원에 다녀온 꿈의 내용을 화폭으로 고스란히 담아낸 안견의 몽유도원도. 음악으로 재구성한 <몽유도원>을 감상해보며 저마다의 꿈을 꿔본다.

<인천 신포니에타> 창단 배경에 대해 궁금합니다
제가 인천과 처음 연을 맺은 게 1994년도에요. 당시 대학을 바로 졸업하고 인천 청소년 교향악단 지휘자로 오게 되었죠. 그러다 1998년도부터 2004년까지는 인천 챔버 오케스트라 악단으로 활동했었어요. 당시만 해도 인천에 실력 있는 젊은 연주자가 많지 않았고, 출중한 연주자들은 무조건 서울 무대에 서야 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어요.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바라보면서 인천에서 악단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을 했고 2005년에 <인천 신포니에타>를 창단했죠.

<인천 신포니에타> 대표사진, 인천신포니에타 제공

 일반적으로 오케스트라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지만, 신포니에타의 개념은 생소하게 다가옵니다. 심포니에타의 의미와 매력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심포니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규모’라는 개념이고 ‘에타’는 앞의 의미를 반대되게 만들어줍니다. 다시 말하면 ‘심포니에타’는 크지 않다는 의미이죠. 챔버오케스트라와 비슷한 형식이라 보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요즘에는 현악기 중심의 오케스트가 많이 배출되고 여러 악기가 종합적으로 소리를 내다보니 그 웅장한 면에서는 오케스트라를 쫓아갈 수 없어요. 하지만 현악기 고유의 섬세한 음악을 표현하기에는 심포니에타가 아주 적합한 규모이죠.

인천지역의 음악 영재를 발굴하고 후견인 역할로서 노력을 기울이고 계시는데, 이러한 활동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제가 94년도에 인천 청소년 교향악단에 있을 때만 해도 전국 청소년 교향악단이 2~3개 팀밖에 없었어요. 당시 인천에서는 예술고등학교도 없던 열악한 환경이라 음악을 진로로 결정한 아이들을 위해 선배로서 이끌어주자는 마음이 컸죠. 연주자로 활동했지만, 사실 주된 업무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기도 했고요. 저희와 협연을 했던 아이들이 5명밖에 없지만, 그 친구들 모두가 좋은 결실을 맺는 것을 지켜보며 큰 보람을 느꼈고, 아이들에게도 이러한 경험이 큰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이번에 운이 좋게도 ‘공영장상주단체’에 선정되면서 아이들을 무료로 지도할 수 있는 뜻밖의 기회가 생기게 되었고요.

<인천 신포니에타> 이종욱 대표

 민간에서 지역악단으로 성장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주변에 도움을 주셨던 분들이 있으신가요?
우리 단체를 10여 년간 후원해주시는 ‘일륜회’라는 단체가 있어요. 일륜회는 인천 음악발전을 위한 ‘하나의 바퀴’라는 의미로 지어졌죠. 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일륜회는 배경숙 전 인하대 법학대학교수를 주축으로 결성되어 현재는 조애진 육아방송 대표이사가 회장을 맡고 계셔요. 인천시립교향악단이 시립이 되기 전부터 후원했던 단체로서 인천신포니에타도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후원해 주고 계시죠.

최근에 진행된 연주회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고 싶으신가요?
2005년부터 2016년까지는 김중석 교수님께서 <인천 신포니에타>가 발전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조언과 음악적 방향을 제시해주셨고, 작년에는 이정일(울산대 교수, 코리아 심포니)교수님께서 저희 악단에 예술 감독으로 취임하시면서 몇 가지 변화가 생겼죠. 교수님께서 작년 연주회의 모든 프로그램을 맡으셨는데 대부분 현대곡을 메인으로 선정하셨죠. 현대곡을 보통 난해하게 생각하지만, 선곡하신 곡은 긴장감을 늦추기보다는 계속 긴장감을 갖고 들어야 하는 재밌는 곡들이 많았어요. 작년에는 저희를 찾아주셨던 여러 분들로부터 아낌없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죠.

뛰어난 클래식 연주자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으나, 여전히 클래식 음악 소비와 저변이 확대되지 못한 상황입니다. 문화예술 교육자로서 이러한 간격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 고민해보셨는지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실력이 빼어난 연주자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지만 관객 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이유는 학생들의 입시 영향이 제일 크다고 생각해요. 공연이 매진되었던 적이 1994년도, 2006년도 두 차례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 때만해도 학교 음악 선생님께서 방학만 되면 아이들에게 연주회 감상문을 과제로 내주셔서 아이들이 음악회에 많이 왔었죠. 공연이 끝나고 아이들과 사진을 찍는 동안에 잠깐 얘기를 나눠보면, 뜻밖에도 연주회를 처음 경험해본 아이들이 꽤 많더라고요. 비록 과제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계기마저 없다면 끝끝내 아이들은 공연장을 찾지 않을뿐더러 기본적인 에티켓마저 몰랐을 거예요. 그런데 요즘에는 아이들이 치열한 입시 경쟁에 시달리다 보니 이러한 경험마저도 굉장히 소모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대중들이 클래식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악단에서는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시나요?
클래식 연주단체는 정밀 묘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대상을 흡사하게 묘사하듯 클래식 연주자들도 작곡가의 의도대로 공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죠. 클래식 원곡이 변질되면 그 음악의 가치도 떨어지기 때문에 흥미위주로 음악을 편곡하고 변형하는 작업을 개인적으로는 반대합니다. 그래서 대중들과 함께하고 조율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일지 제 나름대로 고심하던 끝에 1시간 20분을 초과하지 않고 공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죠.

<인천 신포니에타> 악단, 인천신포니에타 제공 

 매년 <Virutoso of incheon 인천을 빛낸 음악인>이라는 주제로 레퍼토리 공연을 꾸준히 선보이고  계십니다. 올해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어떤 점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2006년부터 시리즈를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천 출신이거나 인천에서 활동하는 분 중에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연주가와 작곡가를 모시고 연주를 계속 해왔죠. 아무래도 인천이 서울과 물리적으로 인접해 있기 때문에 시민들은 인천보다 서울에서 공연을 보고, 아울러 연주자들도 서울 무대에서 연주하기를 선호하죠. 인천이 사각지대라는 느낌을 줄곧 받았던 것 같아요. 그럴수록 인천 출신의 연주자들과 공연하는 무대를 많이 선보여 인천 시민들이 점차 지역에 대한 애향심을 고착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죠. 이번 9월 30일 공연에서는 나은아 교수님께서 피아졸라의 <사계>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2014. 12.10 Four seasons2.MP4_000320247, 인천신포니에타 제공

오는 8월 9일에 정기연주회를 맞이합니다. 간단한 소개와 함께 <Virutoso of incheon>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요?
<Virutoso of incheon>의 경우에는 연주자들이 원하는 곡으로 레퍼토리를 구성하는 반면에 정기연주회는 대중들이 원하는 레퍼토리로 함께 구성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재작년까지 예술 감독이셨고 현재는 예술 고문으로 활동하는 김중석 교수님께서 <몽유도원>이라는 초연 작품을 연주하시죠. 안평대군이 아꼈던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교수님께서 음악으로 표현한 곡인데 몽환적인 매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 곡을 관객에게 처음 선보이시는 거라서 더욱 뜻깊은 정기공연이 될 것 같습니다.

<인천 심포니에타>의 향후 계획에 대해서 들어볼 수 있을까요?
클래식 연주자들은 정밀 묘사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특별히 이벤트성 연주회를 하려는 계획은 없습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나름대로 준비한 연주를 무대에서 묵묵히 공연하는 게 솔직한 목표입니다.

글/ 사진
이진솔(정책연구팀)




“세대 간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확장하는 판을 만들고 싶어요”
문화예술단체<작당> 김인숙 대표

<작당>김인숙 대표를 만나기 위해 송림동으로 향하는 여정은 예사롭지 않았다. 오르락내리락. 달과 맞닿을 만큼 경사가 높은 인천 동구 송림동 주민들의 여름나기는 더욱 고되게 느껴졌을 것 같았다. 이러한 마음을 읽었는지 올해 5월부터 <작당>에서는 <솔빛아래 달빛 보면>이라는 야무진 축제를 선사하고 있다. 한때 소나무가 우거졌던 송림동 마을.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황홀한 달빛 속에서 울려 퍼지는 하모니가 며칠 동안 지속된 폭염 더위를 잠시 잊게 할 것 같다.

문화예술단체 <작당>을 창단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서울에서 교육활동을 하면서 몇 명의 저소득층 청소년들을 만났었어요. 하지만 1년 단위로 일을 진행하다 보니 그 친구들과 관계를 연속적으로 유지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때마침 위기 청소년 친구들도 만나게 되었는데 어른으로서 그 친구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 답을 찾다 보니 오랫동안 그들을 자주 만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더라고요. 저도 청소년기에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어른이 필요했었거든요. 그 역할을 우리가 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송림동에서 ‘작당’을 만들게 되었죠.

서울에서 활동하시다가 유년기를 보냈던 인천 동구 송림동으로 돌아오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그 친구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익숙한 동네를 찾다 보니 바로 여기가 떠올랐어요. 저렴한 임대료도 큰 이점이었죠. 그리고 무엇보다 서울에는 많은 단체와 프로그램들이 있었어 학생들 선택의 폭이 넓은데, 반면 이곳의 몇몇 위기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마땅히 있을 곳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했죠.

살았던 동네를 직접 기획하면서 동네를 바라보는 대표님의 시선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신혼 때까지 이곳에서 지냈었어요. 그 때는 동네에서 빨리 도망가고 싶었고, 청년기에는 잠만 잤죠. 이 동네가 정체성을 만드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동네로 다시 돌아와서 이 일을 시작할 때 여기서 자랐다는 이유로 주변의 분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죠. 동네가 주는 안정감이 저희가 지탱할 수 있는 큰 버팀목이 되었죠.

작당을 창단했을 때 지역민들의 반응이 어땠나요?
처음에는 조금 후미진 2층 다방에서 시작했는데 사무실 공간만 있었어요. 그래서 구청에서 운영하는 공간만 빌려 수업을 진행했죠. 그때 영화교육을 수강하러 온 아이들이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다니니까 어르신들께서 그 모습을 귀엽게 바라봐 주셨어요. 주민들이 저희에게 가장 많이 했던 두 질문이 생각나요. “뭐 먹고사냐?” “도대체 뭐 하는 곳이냐?”

올해 초에 작업실을 옮기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동네에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다 보니까 주민들과의 소통의 한계를 많이 느꼈어요. 그러나 공간을 옮긴 이후로 주민들 접촉이 이전보다 늘어났고 배너 하나를 건물 앞에 세우더라도 지나치시지 않고 물어보시죠. 그래도 여전히 주민들과의 장벽은 높은 편이에요. 왜냐하면 주민센터에서 진행하는 기술교육은 익숙하지만, 문화예술은 낯설어 하시거든요. 그 분들에게 접근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어요.

동네에서 문화를 기획하면 예상치 않는 어려움도 겪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혹은 <작당>을 유지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가끔 이 동네에서 기획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요. 너무 낙후된 동네에서 내가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닌가. 그래도 초창기에 참여했던 청소년 5명이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데 그것이 저에게 큰 힘이죠. 저도 그 친구들에 대한 책임감이 굉장히 커졌고, 제가 이 동네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주죠. 그리고 지역 어르신들과 어려운 기획을 잘 마무리 짓다 보면 심리적인 보상이 따라오는 것 같아요. 처음 <자서전 프로젝트>에서 만난 분들과도 추후에 다른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도 있었죠. 비록 새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마다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금세 활력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아이들이 어떻게 이곳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나요?
영화 제작하는 프로그램으로 모교를 방문하면서 1기가 시작되었죠어요. 동산중학교의 친구들이 참여했는데, 다음 프로그램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친구들과 함께 오래 할 수 있는 장기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친구들 중심으로 기획단을 꾸리게 되었죠.

<작당>이 생긴 지 대략 4년이 되어가는데, 아이들의 모습이 많이 변화했나요?
행사의 규모가 커졌지만 아이들이 많이 성장했다고 느꼈어요. 처음에 영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들이었거든요. 예술 교육기획자로 성장하기까지 몇 가지 단계들이 있는데, 한 단계로 진입하기까지 굉장히 더디게 간다는 느낌을 받았죠. 근데 영상 편집을 잘하는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도움을 주더라고요.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서로가 부족함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소그룹이 형성되더라고요. 또한 회의를 진행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책임감도 형성되고요.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많으실 것 같아요
교육 프로그램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단기적인 프로그램이 아니다 보니 큰 성과는 없지만, 이 친구들이 성장하면서 우리와 함께 같이 무엇인가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이 친구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죠. 그리고 <우리동네 스타>는 지역 어르신들이 지원군이 되어 주는 계기가 되었죠. <도시청년 게릴라> 프로젝트도 기억에 남아요. 그 이유는 저희의 오기와 패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1년 차에 진행했던 프로젝트죠. 현재 작당의 전체적인 방향과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올해 5월부터 10월까지 <솔빛아래 달빛 보면> 축제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특정 대상에 중점을 두고 진행했던 이전 프로그램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달’이라는 컨셉으로 송림동의 지역 특색을 살려 축제를 기획하신 것 같습니다. <솔빛아래 달빛 보면> 축제의 기획 배경이 궁금합니다.
이번 축제는 정말 단순한 이유에서 시작했어요. 정말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죠. 우선 이 동네의 높은 지형과 확 트인 풍경이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이 곳에 어쿠스틱한 감성을 담아 젊은 가족들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죠. 축제 준비 기간에 젊은 사람이 이 동네에 얼마나 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우리 동네 스타> 어머니들께서 주변에 많이 소개를 해주셨어요. 덕분에 젊은 연령층들이 많이 오셨고, 가능성도 엿볼 수 있던 것 같아요.

주민들의 참여로 인한 결과로 볼 수도 있겠네요.
<솔빛아래 달빛 보며>축제는 소규모로 진행해요. 한 번밖에 진행하지 않았는데, 회차를 거듭할 수록 참여하겠다는 주민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아티스트를 섭외할 계획이었는데, 현재 송년 1,2동 주민센터분과 솔숲 지역아동센터 분들도 참여할 예정이라 다시 기획을 구성하고 있죠. 보통 지역아동센터의 아이들이 하모니카 공연을 동네 밖에서 진행하는데, 이번처럼 동네에서 진행하는 공연은 처음이라고 하더라구요.

만약에 <솔빛아래 달빛 보며>가 첫 기획이면 어려우셨을 것 같아요. 기존에 주민들과 함께했던 지나온 시간과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참여 의지를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지만, 저희는 이 기회를 통해 동네에 또 다른 판을 열어 드릴 수 있어 그것에 만족하고 있어요. 많은 분이 참여하시면서 동네에 이러한 부분에 갈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이번 축제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팁이 있을까요?
축제 장소에서 음식을 판매하지 못하기 때문에, 원하시는 음식을 직접 가지고 오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돗자리는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누워서 하늘 보고 편안하게 공연을 즐기시면 좋을 것 같네요.

대표님이 그리시는 송림마을은 어떤 모습일까요?
여러 세대 간의 관계를 맺는 게 저의 가장 큰 목표에요. 앞으로도 여러 세대를 엮는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고요. 주민을 포함한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얼마 전에 네트워크 간담회를 열었는데 이런 판이 계속 확장되었으면 좋겠어요. 서로 공유하는 장이 마련되어서 다른 이웃과도 기획을 했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마을 전체가 한 학교가 되어 아이들이 수업을 자유롭게 받을 수 있고, 기관과 전문가들이 연계되어 하나의 프로젝트가 마을 곳곳에서 진행되는 거에요. 이런 소소한 커뮤니티의 형성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이 돌아올 수 있는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글/사진
이진솔(정책연구)




“나의 일상 참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이면 좋겠어요”
<앤드씨어터> 전윤환 대표

“젊음이 무기일 수도, 독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2013년 서울연극제에서 한 수상자의 소감이 강한 인상으로 뇌리에 스쳤었다. 바로 전윤환 연출가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인의 꿈을 꾸었지만 녹록치만은 않은 연극계의 현실은 당시 젊은 나이였던 그를 단단히 만든 계기가 된 것 같았다. 5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장마가 시작되었던 주말 오전, 짖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작했던 인터뷰에서 그의 무늬를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젊은 나이에 극단 <앤드씨어터>를 창단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앤드씨어터는 2008년도에 창단했는데, 당시 제가 대학교 3학년이었어요.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했던 주변 선배들이 졸업 후 좋은 극단에 입단하지만, 배우로 무대에 오르기가 어렵더라고요. 무대에 오르는 그 시간 동안 많은 선배가 다른 일로 전향하거나 어렵사리 연극을 포기하는 모습을 흔히 보기도 하고요. 극단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대학교 3학년 때 지속할 수 있는 작업 환경을 위해서 극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동문과 함께 사업자등록을 냈어요. 그때부터 일 년에 한 번씩 대학로 소극장을 대관해서 공연을 했어요.

서울 대학로에서 극단 연출뿐만 아니라 ‘혜화동 1번지’ 동인으로도 활동하고 계시는데. 인천으로 시선을 돌린 이유가 있는가요?
인천에서 작업해야겠다는 생각은 막연히 가지고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학과를 가야겠다는 꿈을 꿨던 곳이 바로 인천이었기 때문에 언젠가 고향에 가서 작업을 진행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다 2013년에 ‘인천아트플랫폼 초이스’에 <미래도둑> 작품이 선정되면서 인천에서 공연할 첫 기회가 생겼었죠. 때마침 그 작품이 서울연극제 ‘미래아 솟아라’에서 연출상을 받았는데 저한테는 의미있는 작품을 인천에서도 선보일 수 있었어 뜻깊었었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그 공연의 출발점으로 인천을 본거지로 두면서 활동한 것 같아요.

인천아트플랫폼의 어떤 부분이 그곳에서 작업하고 싶은 마음을 생기게 했나요?
아무래도 공연장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었어요. 블랙박스씨어터였던 공간이었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라서 충분히 변형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창고를 개조한 공연장이라서 층고도 높을 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이색적이고요. 인천에서 첫공연을 한 후에는 2015년부터 인천에서 레지던시 활동을 3년 동안 시작하게 되었죠.

인천으로 오신 후, 과거와 비교할 때 작품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시나요.
지역에 대한 생각을 앞서 말씀드렸던 <미래도둑> 작품을 하면서 시작한 것 같아요. 서울에서 공연할 때 매진사례를 이뤘던 작품이 인천에서는 4,5명의 관객만 오니까 배우들이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 이후로 인천에서는 관객을 어떤 작품으로 만나야할지를 다양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었어요. 서울에서는 작업할 때는 주로 하고 싶은 실험을 했다면 인천에서는 기획의 측면을 더 강하게 고민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2013년 이후로 2년 동안에는 연구가, 예술가, 지역주민, 문화 활동가들과 인천에 대해 리서치를 했고 그 결과, <터무늬있는연극 X 인천>공연을 두 차례나 진행했죠.

<터무늬있는연극X 인천>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터무늬있는연극X인천>은 손에도 지문이 있듯이 땅에도 지문이 있다는 생각에 착안해서 기획했어요. 여러 아티스트들이 영감을 받은 장소에서 장소가 지닌 역사성과 고유한 무늬를 바탕으로 공연을 만드는 작업이죠. 2015년도에 인천시가 관광도시로서 부상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인천시가 갖고 있는 고유한 무늬가 쉽게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실제로 관광버스를 타고 4곳을 돌아다니며 작업을 진행했었죠. 2017년도에는 인천역을 향하는 지하철 1호선에서 40명의 관객들과 새로운 형식으로 작업을 해보았어요.

“저는 항상 이 전철을 타요. 1호선 전철을. 그래서 이 전철타고 (잠실에서) 엔드씨어터 연습실이 있는 인천역으로 가요. 제가 출근 할 때 사람들은 서울로 출근을 타고, 제가 퇴근할 때는 인천 사람들은 인천으로 돌아와요. 마치, 밀물이 갈 때 썰물이 오는 것처럼. 근데 더 재밌는 것은 인천역 개찰구가 맨 앞에 있었어 종착지에 도착할 때에 사람들이 맨 앞으로 몰려와요. 한번은 사람들이 앞으로 오는데, 괜히 거꾸로 가고 싶어서 마지막 칸 까지 가본 적이 있어요. 다같이 일어나서 마지막 칸으로 가보실까요?” – <터무늬있는연극X인천>에서 사용된 배우의 음성

관객들의 반응이 어땠나요?
인천 관객들이 많이 좋아하셨어요. 본인이 익숙한 장소를 걷고, 그 장소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알았던 이야기가 나오면 더 반갑게 느껴지고요. 사실은 <터무늬있는연극 X 인천>은 관객과 퍼포머(performer)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요. 관객들이 직접 장소를 찾아가는 모습은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죠. 이러한 면에서 관객은 퍼포머가 되기도 하는데 마치 어렸을 때 보물찾기를 하듯이 그러한 경험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올해 <터무늬있는연극>을 부평으로 선정한 이유가 있나요?
아트플랫폼 레지던시에서 3년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고 싶었어요. 아트플랫폼 극장과 중구의 관객들을 중심으로 만나다 보니깐 다른 환경에 놓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게다가 장편 연극을 선보이고 싶었다는 목표가 있었는데, 이번 공연장상주단체를 신청하면서 1년 동안 래퍼토리를 공연할 수 있게 되었죠.

젊은 지역 기획자를 많이 배출하는 상황에서 지역 기획자가 가장 고려해야 하는 사항은 무엇일까요?
사실 자기가 속해있는 곳이 지역이기 때문에 활동하는 모두가 지역기획자라고 생각해요.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기획을 통해 과연 어떤 분을 만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죠. 연극 할 때는 주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내가 하고 싶은 방법론에 중점을 두어 작업 했다면, 인천에서 기획할 때는 내 작업이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만날 것인지에 대해 굉장히 중요하게 느껴졌거든요.

2018년 7월 6일에 부평센터에서 <도처의 햄릿>을 공연하십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4주년이 된 시점에서 인천 지역민들에게 <도처의 햄릿>을 선보이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혜화동 1번지’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있던 해부터 지금까지 세월호 연극제를 계속하고 있어요. 그중 <도처의 햄릿>이 세월호 연극제에 출품했던 작품 중 하나에요. <도처의 햄릿>은 세월호 사건이 한해가 지난 2015년부터 공연을 했는데 그때마다 느꼈던 것은 왜 인천은 세월호의 당사자성을 안 가지는지 대한 의문이었어요. 인천에서 떠난 배인데 왜 인천에서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는지 궁금했었죠. 때마침 올해 신재훈 연출가께서 세월호 연극제 출품작으로 공연했던 <비온래 라이브>를 인천아트플랫폼에서 공연했었어요. 그래서 그 작업의 연장선상으로 저희 팀도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되었죠.

고전 <햄릿>에 ‘도처’라는 단어가 붙었는데, 원작을 어떻게 각색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처음 배우들에게 세월호 사건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고백의 과정이었어요. 세월호 연극을 1년에 한편씩 하는 배우도 연극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는데, 과연 내가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할 수 있는지에 확신이 서지 않았죠. 단원들도 세월호 연극마저 어떤 미학을 추구하는 것이 도의적으로 맞는지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더라고요. 그래서 세월호 사건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을 했고, 결국 ‘나의 일상의 참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협의를 했죠. 누구는 미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어떤 이는 예술가로서 검열당했던 이야기를 고백하죠. 이런 일상의 참사를 고백하며 햄릿이 다르게 보이는 지점을 골랐고, 그 장면을 재현하는 형식으로 기획했어요. 그리고 이러한 일상의 참사가 한 곳이 아닌 도처 곳곳에 있을 수 있어 ‘도처’라는 말을 앞에 붙였죠.

각색하는 과정에서 배우들과 많은 얘기가 오갔을 것 같습니다.
저희 팀은 몇 년간 뉴 다큐멘터리 연극을 하고 있어요. 어떤 배역으로 무대에 서기보다는, 전윤환이라면 전윤환 자체로 무대 위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자신의 가장 사적이고도 작은 이야기를 통해서 보편성을 획득하는 거예요. 이번 <도처의 햄릿> 작업은 자신의 상황을 재현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죠.

<햄릿>의 명대사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가 <도처의 햄릿>에서는 어떤 의미로 해석되었나요?
‘To be or not to be’가 ‘이대로냐 이대로가 아니냐로’도 해석할 수 있더라고요. 내가 일상에서 겪은 참사들이 여전히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인 상황에서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인가 혹은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의미로 재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관객이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주시길 바라는가요.
본인의 일상 참사에 대해서 한번 감각 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글| 이진솔(정책연구팀)
사진| 김규환
사진 제공| 앤드씨어터 서현민




“무속음악 독주회를 여는 게 꿈이에요.”
연희단 <비류> 백승철 대표 인터뷰

6월 14일 부평역 근처 카페에서 연희단 <비류> 백승철 대표를 만났다. 아직은 대표라는 직함이 익숙하지 않은 그로부터 ‘청년 백승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을 수 있었다. 모든 청년들이 한번은 겪듯이 그도 자신의 진로에 방황했었던 시간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연희는 자신의 꿈을 선명하게 만든 안식처였다. 그래서일까. 연희 장르가 대중들에게 한발자국 멀어질 때, 그와 그의 단원들이 한발자국 가까이 다가가려는 여정이 고되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연희단 <비류>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연희단<비류> 인천 출신 연희 전공자로 구성된 팀이다. 타악을 중심으로 기악과 소리 단원들이 모인 전문단체로서 다양한 작업을 시도한다.

연희에 대해서 일반 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을 부탁드린다.
국악은 쉽게 생각하면 한국의 음악이다. 사물놀이, 풍물놀이, 판소리, 민요를 다 아우르는 게 국악이라고 보면 된다. 그 중에 연희를 저희는 쉽게 ‘논다’라고 표현하는데, ‘사자놀이’, ‘소고놀이’같이 끝에 ‘놀이’가 붙어있으면 연희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아기들이 무동 타고 연두발 상모 돌리고, 줄타기하는 활동 모두가 연희의 일환이다.

어떻게 풍물을 시작하였는가 
사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하고 싶은 게 마땅히 있지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사물놀이 동아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현재 <비류> 예술 감독님이신 정돈연 선생님을 만나면서 사물놀이에 더욱 깊은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예술 감독님의 첫인상은 어땠나 
첫인상이 무척 강하셨다. 신체가 왜소하신데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기에 동아리 멤버 5명 모두가 압도되었다. 지도를 부탁드리러 갔을 때 선생님 앞에서 말도 꺼내지 못해서 제자분에게 대신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의 반대가 있지 않았나 
당연히 부모님께서 반대가 심하셨다. 다른 애들은 빠르면 초등학교, 늦어도 중학교부터 사물놀이를 시작하는데, 고등학교 3학년 돼서야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일 년 동안 아버지와 말을 안 하다시피 지냈었다. 다행히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야 아버지께서 마음을 열어주기 시작하셨다.

연희단 <비류>를 창단하기로 한 이유가 있는가
대학교 졸업할 당시에 예술 감독님께서 먼저 팀을 꾸려 보도록 제안을 해주셨다. 그래서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주변 후배들을 섭외했고, 현재 8명의 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연출 담당자가 대표를 맡는 경우가 많다. 현재 대표님과 연출 선생님과의 역할이 어떻게 구분되었는가
공연 운영이나 전반적인 사업을 제가 맡아서 한다면, 감독님께서는 공연 연출과 작품에 대한 조언을 주로 하신다.

처음 <비류>를 창단했을 때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 같다. 대부분 젊은 청년들로 단원이 구성되어 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나름대로 10, 15년이나 국악을 준비했던 친구들이라서 실력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다만, 새로운 작품을 하다 보면 인원이 필요할 경우가 많이 생긴다. 그럴 때마다 외부 객원을 섭외해서 작업을 같이해야 하는데 그 친구들에게 줄 인건비가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려면 친구들과 만나면서 지속해서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제한된다는 점이 안타깝다.

공연을 연출할 때 중점을 두는 부분이 있는가
관객 반응에 따라서 공연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다. 그래서 관객과 어떻게 소통할지를 항상 고민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여건을 많이 조성하려고 노력한다.

연희라는 장르의 특색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단체와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전통연희 기반으로 ‘극’이라는 요소를 결합해서 새로운 창작품을 만든다는 점이 차이점일 수 있다. 시나리오도 단원들과 함께 작성하고, 거기에 맞는 음악을 적절히 배치하기도 한다.

<염라대왕이 사자를 만나는 날> 공연에서는 사회적 문제를 함께 고민해보고 소통하는 장을 마련했다면, 이번 6월 말 <풍물유희 흥 플러스>에서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가
<염라대왕 사자를 만나는 날>처럼 창작 연희극을 만들 때 사회 이슈를 많이 담으려고 노력한다. 한편 <풍물유희 흥 플러스>의 작품은 레퍼토리 공연이다. 창작한 작품을 10~15분 동안 관객 앞에서 펼치고 평가를 받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했던 작품을 그대로 선보이지 않는다. 기존의 것들을 정리하며 새롭게 창작하고, 관객 앞에서 공연을 선보이면서 반응을 살피고 함께 발전시켜 나아간다.

전통과 현대를 조화롭게 균형을 맞춰가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대표님께서는 진정한 전통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대학교 졸업반을 앞두고 있었을 때 장래가 걱정돼서 전통이 무엇인지 곰곰이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 현재 계승된 국악이 조선 시대에도 똑같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비록 40년 전에 사물놀이라는 장르가 나온 후에 국악의 흐름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이전에도 김덕수 선생님 같은 분들이 계셨을 것이다. 그래서 전통을 지키는 명목하에 선생님께서 하셨던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게 전통을 지키는 일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전통은 그 자리에 머무는 게 아니라 계속 진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전통을 지킬 수 있고, 대중들이 계속 관심을 가질 때 비로소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지역마다 저마다 다른 풍물을 펼치는데 연희 <비류> 에서도 인천의 특색을 찾아볼 수 있는가 
팀 이름을 정하는 과정에서부터 지역적 특색을 많이 살리려고 했다. 백제 비류 왕자가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팀 이름을 비류로 정했었다. 아직 작품으로 지역적 특색을 나타내지 않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웃다리 농악밖에 정보가 없는 상황이다. 연주 작품이든 극작품이든지 간에 지역특색을 고려해서 작품을 창작할 예정이다.

농업기반의 공동체 문화와 두레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다시 과거에 잊혀진 풍습이 새롭게 재해석되거나 다시 그 가치가 인정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연희단의 역할도 이러한 흐름에 맞춰서 앞으로 변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대표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 역할은 딱 하나다. 좋은 공연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더 많이 국악에 관심을 보일 거로 생각한다. 이 분야의 역할을 현대적으로 정립하는 것은 40년 전 김덕수 선생님과 그 멤버들이 사물놀이라는 작품을 통해 이미 이루었다고 본다. 대신 앞으로의 국악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는 우리가 고민을 많이 해볼 필요가 있다.

김덕수 선생님께서 젊은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사물놀이를 출범시켰듯이, 젊은 청년들로 구성된 연희단 <비류>에게도 남다른 계획과 큰 포부가 있을 거라고 짐작된다.
솔직히 사물놀이 이후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선 사물놀이 구성이 너무 훌륭하기 때문이다. 우리 팀 내에서도 새로운 장르가 하나 나오면 최상의 시나리오겠지만, 많은 시도를 하고 여러 장르를 복합해서 새롭게 작품을 구성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창작하고 싶은 작품이나 계획이 있는가
무속음악을 시작하면서 개인적으로 독주회를 하고 싶은 목표가 생겼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사물놀이는 친숙한데 무속음악은 어렵게 느낀다. 대중들이 보기 편하게 작품을 재구성하고, 한 시간 프로그램으로 독주회를 펼쳐 보는 게 목표이자 꿈이다. 현재 그 생각으로 5년 동안 무속음악을 공부했는데 아마 5년은 더 공부해야 할 것 같다.

 

인터뷰. 최기현(예술지원), 이진솔(정책연구)
글/사진 이진솔

 




“언젠가 바다가 보이는 거리에서 공연하고 싶어요”
극단 <나무> 기태인 대표

공연과 행사로 활기가 넘쳐났던 5월. 그 여운을 잠시 뒤로한 채 이번 6월에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교감하는 공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오는 6월 14일 남동소래아트홀에서는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인생 이야기 <이야기 하루>의 공연이 시작한다. <이야기 하루>를 통해 전달되는 그분들의 이야기에는 아이들이 모두 헤아리기 어려운 삶의 깊이와 짙음이 묻어있다. 

극단 명을 <나무>라고 지은 계기가 있는가요.
예전 ‘사다리’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했을 때 일본 어린이 극단과 교류 사업을 했던 적이 있었다. <만남>이라는 작품으로 모인 한국과 일본팀 6명이 자그마한 초등학교에 방문했었는데 공연을 마치고 출발하려고 할 때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묘하게 푹 파인 나무에 앉아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에게 그 좁은 공간이 놀이터였던 것이다. 그 당시 아이들을 감싸고 있던 나무의 모습이 인상 깊어 예술단체를 만들면 ‘나무’라는 이름을 지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극단명의 의미에 친환경을 크게 표방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폐기물로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극단 <나무>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우리는 환경에 중점을 두기보다 생활에서 익숙하게 쓰이는 물건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길 원한다. 쉽게 말하면 재활용품을 하나의 오브제로 보고 있다. 재활용품은 일상에서 가까운 소재이기 때문에 쉽게 지나치지만, 한편으로는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벨로시랩터의 탄생>이라는 작품은 신문지를 활용하여 멸종된 공룡을 표현하는 거리 공연이다. 관객은 공연을 통해 즐거움을 얻지만, 공연이 끝나고 돌아갈 때 ‘왜 신문지로 공룡을 만들었지?’라고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기를 기대한다.

오브제로 쓰이는 물건을 신중하게 선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도 명확해야 하지만, 물건의 선택도 중요하다. 표현하려는 이야기와 오브제 사이에 간극이 좁을수록 좋다. 아무거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에 맞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국자로 공연을 하면 그것은 ‘부엌에서 쓰는 물건’, ‘우리 엄마가 항상 잡는 물건’ 등의 서브 텍스트들이 있다. 이러한 부분을 살려서 작품을 만들어간다.

6월 14일에 공연하는 작품 <이야기 하루>에서 종이를 오브제로 선정한 계기가 있는가요?
빈 우유병으로 로켓을 만들어 달나라에 다녀오는 4명의 광대 이야기 <상상놀이 얘들아! 같이놀자>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이야기 하루>작품이 떠올랐다. 어느 날 우연히 종이를 보았는데 종이의 질긴 질감을 사용해서 인생 이야기를 표현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다루는 이야기를 아이들이 공감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출가의 입장에서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고,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어린이들에게 ‘인생’ 이야기를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우리 옆집 사는 할아버지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듯 전달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공연할 때 좌석에 앉은 아이들의 표정은 물음표일 때가 많다. 그러나 아이가 공연 내용을 전부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전제로 이 작품을 시작했다. 공연이 끝나고 아이와 부모가 작품에 대해 묻고 답하며 둘 사이에 새로운 만남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작품에 대해 공감하기 어려운 아이들도 먼 훗날에 그 이야기를 회고하는 날이 언젠가 올 것이다. 궁극적으로 작품에서 ‘삶은 아름답다’, ‘삶은 즐겁고, 좋은 추억의 연속이다’를 전달하고 싶다. 계몽적이거나 교훈적이기 보다는 넌지시 던질 뿐이다. 너희들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가 너의 삶에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드러내려고 한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작품을 제작하는가요?
우리 작품의 대부분은 공동창작이다. 단원들과 주제 하나를 제시하고 파생되는 아이디어를 함께 그려가며 이야기를 구성한다. 특정 대본을 가지고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신(Scene)을 구성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통해 신을 정리하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매번 진행되는 공연이 하나의 대본을 완성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연기는 굉장히 창의적인 작업이라 생각하는데, 대본이 배우들의 상상력을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야기 하루>는 2013년 초기에 제작한 작품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할아버지의 감정선이 섬세해졌고 작품에서 표현하려는 텍스트가 명확해졌지만, 안타까운 점도 있다. 공연 초기에 총 네 분의 배우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악사 분이 계셨는데 도중에 연주자께서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당시에 아코디언은 이 작품을 아우르면서 할아버지의 향수를 자극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게다가 연주자께서 배경음악을 직접 작곡, 편곡하면서 부산국제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쾌거도 이뤘다. 그 분이 떠나기 3개월 전 이 작품을 계속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분이 문득 생각나면서 이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그 분의 음악을 최대한 살려서 국악으로 진행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분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강하다. 앞으로 그 역할을 대신할 누군가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쯤 그 부분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 극과 달리 인형극이 주는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요?
배우가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을 인형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형은 관객에게 상상력을 자극하고 다른 여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매력을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이 표현하는 이미지는 굉장히 효과적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이러한 부분의 표현이 인형이 아닌 창작자의 몫이기에 충분한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Robot PEPUM>과 <벨로시랩터의 탄생> 등 거리공연도 선보이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공연하는 느낌은 공연 무대와 매우 다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공연장이라는 문턱을 부스고 관객과 가까이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관객에게 더욱 현실감 있는 작품을 선보여야 하고 환영이라는 장치에 더 큰 노력을 기울인다. 공룡을 완벽한 모습으로 제작하기보다 특징을 살려 제작할 때 비로소 공룡 안에 있는 배우의 까만 다리가 보이지 않게 되며, 관객들은 공룡이 살아있다고 느낀다. 이것이 바로 환영이라는 장치인데 공룡의 실제 무게감을 살리기 위해 입과 다리의 움직임, 목의 각도 등을 짐작하면서 몇 차례 수정작업을 거친다.

여러 지자체에서 거리공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거리공연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은 어떤가요?
2006년 <Robot PEPUM>이라는 거리 퍼포먼스를 했고 이후에도 거리공연에 흥미가 생겨 신문지 공룡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손꼽히는 몇 개 팀 정도밖에 없었는데 현재는 무용, 미술 등 다양한 장르들이 거리공연을 채우고 있다.

인천에서 진행되는 거리공연에서 인천만의 특수성이나 보완해야 할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인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거리공연 수요는 많이 늘어났다. 하지만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콘텐츠가 현저히 부족하여 매번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과거보다 거리공연을 펼칠 기회는 확실히 많아졌다. 그러나 공연장과 별개로 콘텐츠 제작을 위한 환경들이 빠른 시일 내로 구축되어야 거리축제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거리공연을 펼칠 때 거리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공연하고 싶은 특정 거리가 있는가요?
언젠가는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싶다. 비록 어떤 식으로 관객에게 다가가야 할지 구체적인 구상은 없지만, 그곳이 바다가 보이는 거리였으면 좋겠다.

 

사진/글
이진솔(정책연구팀)




“십년 후에는 젊은 연극인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극단<십년후>인터뷰 송용일 대표

죽마고우였던 두 친구의 약속으로 맺어진 극단 <십년후>가 5월 24일에 인천중구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자’는 극단의 꿈을 실현하는 송용일 대표와 단원들. 그들의 의지와 묵직함이공연을 마치고 공연장 밖으로 향하는 순간 뜨겁게 느껴진다. 오늘도 극단 <십년후>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진한 울림으로 관객들과 마주할 것이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극단 <십년후> 창단 배경이 궁금합니다.
친구 사이였던 최원영 박사님과 장진호 교수님 두 분이 10년 만에 만나 아름다운 세상을 한번 꿈꿔보자는 의미에서 <십년후> 극단을 만들었어요. 1994년도에 창단했는데, 당시 최원영 박사님은 미국 유학 생활을 끝마치고 귀국했을 시점이었고, 장진호 교수님도 일본에서 연극 유학을 마쳤을 때였거든요. 창단한 이듬해에 저는 <십년후> 극단의 공연 무대를 제작하면서 두 분과 인연이 닿았고요. 그러다 장진호 교수님이 대경 대학교에 정식 교수로 임용되면서 제가 연출을 맡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최원영 박사님께서 5년 전 리더십 교육으로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저에게 극단 대표 직책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셨죠. 

과거에 연출만 담당하셨을 때와 현재 대표 직책을 맡으면서 연출 할 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극단의 색깔과 틀이 바뀐 것은 없어요. 다만 점차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저도 타협하는 부분이 생긴 것 같아요. 과거에는 <십년후>가 대극장에서만 공연했었어요. 그때의 마인드는 5천만 원을 투자하면 1억 벌자는 생각이었죠. 무대미술에 과감한 시도를 많이 했었거든요. 지금은 작품뿐만 아니라 극단 전체를 관리해야 하니까 경제적인 부분이 제일 걱정이더라고요. 대극장에서 공연하면 관객을 어떻게 채워야할지 고민이 되고, 제작비 문제를 생각해야 하니까 점점 움츠러들더라고요.

극단의 모토가 ‘사랑하며 살겠습니다’입니다. 25년 동안 극단을 유지할 수 있던 원동력도 ‘사랑’인가요?
‘사랑하며 살겠습니다’에 내포된 의미는 사람 중심의 극단이 되자는 거예요. 배우들이 이곳에서 배우의 꿈을 실현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기 계신 사람들이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극단을 24년 동안 버텨온 힘이 바로 이러한 부분이라 생각해요.현재 극단체제가 대부분 오디션 제도로 바뀌었지만, 여기서는 계속 유지하고 있어요. 배우들과 함께 밥을 먹고 연기를 하면서 공공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모토를 실현하기 위해 극단에 구체적인 규칙이 있나요?
연출가 입장을 연기자에게 강요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움직이려고 해요.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랑하는 마음은 저절로 생기고요. 제가 연출을 맡았지만 가능하면 우리 배우들이 큰 무대로 올라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고 하죠.
한때 종합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펼쳤던 <삼신할머니와 일곱아이들> 작품이 매진사례를 겪은 적이 있었어요. 그때 거액을 투자하는 조건으로 유명 배우를 주인공으로 써달라는 투자자의 제안이 있었거든요. 연출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좋은 조건이었는데 최원영 (전)대표님께서 거절했죠. 유명배우가 주인공을 맡는다면 편하게 공연할 수 있지만, 우리 단원들이 들러리가 된다는 (전)대표님의 의견이었어요. 눈앞에 있는 이익을 좇기보다는 우리 사람을 키워서 그만큼 유명한 배우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전)대표님의 의지이기도 하고요. 초창기에 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배우들과 끈끈한 관계를 형성한 것 같아요.

다른 극단과 가장 큰 차별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여기 오신 분들이 스스로 어려운 길을 택해서 온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극단에 있을 때만이라도 편한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해요. 편해야지만 배우들이 연기를 잘 한다는 게 제 생각이기도 하고요. 최원영 (전)대표님이 계셨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인문학 강연을 했어요. 그런 방법들이 <십년후>만의 틀을 형성할 수 있던 토대라고 생각해요. 이제는 <십년후>에 새로운 누가 와도 <십년후>의 정체성이 그 사람에게 동화되지 우리가 그 사람한테 동화되지 않을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어요.

창작극을 고집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해외에서 유명한 명작을 그대로 가져와서 공연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국내 작품을 세계적으로 만들고 싶은 포부가 있었어요. 당시에 모든 공연에 외국작품은 흥행하고 국내작품은 흥행이 안 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거든요. 국내 공연을 아동극이라고 스스로 치부해버렸으니까요. <흥부 놀부>전을 연극으로 제대로 만들면 세계적인 상품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아쉬움이 매번 있었죠. 그 계기로 <삼신할머니와 일곱아이들>이라는 창작극을 만들었는데 그 작품으로만 10년 동안 순회공연을 여러 번 거쳤던 것 같아요.

창작극을 선정하거나 기획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성 코드가 있는가요?
일단은 관객이 연극을 볼 때 재밌어야 해요. 재미라는 것은 웃음의 재미도 있지만 감동의 재미도 있어야 하지요.연극을 보고나서 실망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게 첫 번째예요. 그 다음에 연극 자체가 사람들의 생각을 선도하는 매개체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험극이나 관객을 소외시키는 연기는 연극이 아니라 미술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해요. 그 영역은 철저히 작가 중심이지요. 연극은 종합예술이에요. 즉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함께 호흡하는 공연을 펼쳐야 한다는 거죠.

대부분 작품에서 사회적인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기보다는 소소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같습니다. 작품마다 극단 <십년 후>가 전달하고 싶은 사회적 메시지가 있는가요?
항상 작품에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를 극을 통해 투영하고 살펴보는 거죠. <삼신할머니와 일곱아이들>이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내용이었다면 <신포동 장미마을>은 자본에 매몰된 사람들의 인간성 상실을 보여주죠. <소문>은 고인 최진실 씨의 자살 사건을 계기로 만든 작품이었어요. 인터넷 댓글의 심각성을 작품에 담은 거죠. <소문>에 귀머거리 ‘선이’라는 인물이 등장해요. 젊고 이쁘장한 ‘선이’는 듣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이 매우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결국 소문의 희생양은 ‘선이’가 되죠. 소문과는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 희생자가 되는 상황을 코믹하게 표현했어요.

<성냥공장 아가씨>,<신포동 장미마을> 등 인천을 배경으로 한 창작극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역민들의 반응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반응은 상당히 괜찮은 편이에요. 다만, 지속해서 관계를 쌓을 수 있는 관객층이 두터워졌으면 좋겠고 문화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인천 시민들이 더 많아졌으면 합니다.

지역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극단 ‘십년 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요?
실제로 <신포동 장미마을>의 모티브는 작년에 했던 시민창작 뮤지컬 <보물지도>였어요. 작년에 ‘인천왈츠’를 위해 시민 20명과 같이 <보물지도> 대본 작업을 했는데 ‘보물지도’라는 소재가 꽤 인상 깊었어요. 그래서 그 소재를 살려서 <신포동 장미마을>을 연출했죠. 신포동 원도심에 재개발이 안 돼 있다 보니, 여기 어딘가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가상의 극을 다루고 싶었어요.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주옥같은 작품이 많을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처음 창작했던 <삼신할머니와 일곱아이들>이 애착이 많이 갑니다. 앞으로 계속 키우고 싶은 작품은 <성냥 공장아가씨>, <소문>이고요. <성냥공장 아가씨>는 인천의 폐공장에서 공연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어요.

2006년 전국 연극제 대통령상, 우현 예술상 등에 이어 최근에 인천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10년 후에는 어떤 극단으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앞으로의 십년 후에는 제가 아니고 또 다른 구성원이 이끌 것으로 생각해요. 그때 “<십년후>라는 극단이 열심히 했구나, 인천에서 활발히 활동했구나”라고 되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연극제에 저희 말고도 젊은 연극인들이 많이 나와서 다양한 작품을 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글/사진
이진솔, 최기현




극단 <미르> 이재상 대표 인터뷰
“제게 연극의 목표는 한 발자국씩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극단 <미르>가 창단 10주년을 맞이했다. 대표 이재상에게 10주년은 <미르>가 어떤 색을 간직하고 있는지를 돌이켜 보는 시간이다. 올해 4월, 그는 <미드나이트 포장마차>를 시작으로 앞으로 2년에 걸쳐 극단 레퍼토리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극단의 색깔을 되짚어 보기 위한 그의 긴 여정을 이제 시작하려 한다.


Q.<미르>가 창단한 지 10주년이 되었지만, 연극인의 삶은 살아온 것은 자그마치 30년입니다. 연극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연극을 시작한 계기는 조금 우스워요. 처음에는 시가 잘 안 써져서 연극을 3년만 해보자고 결심을 했죠. 책상 앞에서 고민만 하다가는 글이 나오지는 않더라고요. 때마침 합창단에서 만났던 선배님이 극단을 만든다는 소식에 그 문을 두드렸어요. 그때 이후로 연극이 저랑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틀었죠.

Q. ‘미르(MIR)’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MIR에는 세 개의 의미가 담겨 있어요. 하나는 우리나라의 옛말인 ‘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죠. 두 번째는 러시아어로 ‘평화로운 세계’라는 의미가 있어요. 마지막으로는 ‘Moving Island on the Road(길 위에 움직이는 섬)이라는 약자예요. 저는 인간 자체가 하나의 섬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길 위에서 온전하게 자신의 세계를 지키면서 걸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위로 하늘의 뜻을 살피고, 주변을 보살피고, 인간 개인은 자신의 세계를 지키며 묵묵히 길을 걷자’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MIR에는 제가 생각하는 인생의 가치관이 모두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미르>를 10년 동안 운영하시면서 가장 큰 변화나 전환점이 있으셨나요?
<미르>는 신중히 생각해서 창단한 두 번째 극단이기 때문에 큰 변화는 많지 않았어요 다만, 처음에 레퍼토리 시스템을 목표로 한 달에 3~4개의 작품을 연속 공연한 적이 있는데 관객이 늘지 않는 거예요. 한 달에 2편 이상 연극을 보는 일이 일반적으로 어려웠던 거죠. 그래서 전용 극장이 생기기까지 레퍼토리 시스템은 무리라는 생각을 했죠. 이번에 10주년이라 레퍼토리 시스템을 다시 점검하지만, 여전히 전용 극장에 대한 아쉬움은 큽니다. 언젠가는 전용 극장에서 관객들과 함께 레퍼토리가 발전, 성장, 소멸하고 재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날이 곧 다가올 거로 생각해요.

Q. 10년의 세월이 말해주듯 그동안에 굵직하고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셨습니다. 이번 10주년을 기념하여 <미드나이트 포장마차>,<보이체크>,<현자를 찾아서> 작품을 선정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작품마다 선생님께 어떤 의미가 있나요?
MIR레퍼토리는 기본적으로 제가 만든 작품과 고전작품을 공연하겠다는 생각을 토대로 만들었습니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다루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외부 연출을 하므로 굳이 다른 작가의 작품을 MIR에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죠. 지금도 이 생각에는 큰 변화는 없습니다. 만약 MIR에서 다른 작가의 작품을 공연한다면 다른 사람이 연출하거나, 그 작품이 고전만큼이나 큰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겠죠. 이번 10주년 창단도 제 작품 2개와 고전작품 1개를 묶어서 시즌 별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미드나이트 포장마차>는 가족의 의미와 사회의 정을 그렸고, <보이체크>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소외 문제, <현자를 찾아서>는 자신의 길에 대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적절한 앙상블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택한 작품의 양식으로나, 형식 면에서도 조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Q. 포장마차에서 실제로 <미드나이트 포장마차>공연을 펼쳐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드나이트 포장마차>야 말로 조명 없이도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는 공연 도중에 창문 틈새로 소음이 들렸는데도, 객석 입장에서는 위화감 없이 관람할 수 있었어요..

Q. 인천과 일본을 넘나들면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인천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선생님과 극단 <미르>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인천은 제가 백일 때부터 자라왔던 곳이고, 연극인으로 성장할 수 있던 베이스캠프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예술가에게는 ‘활동하는 지역보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렸을 적 인천에서 연극 수업을 할 때 여건상 어려움이 있어 친구들이 서울로 많이 떠났었죠. 그러나 그 와중에 인천에서 몇몇 좋은 선배님들을 만나서 연극에 대한 공부 방향과 태도를 꾸준히 잡을 수 있었어요. 여전히 저의 경험과 책이 제 스승이라고 생각하지만, 연극에 대한 방향성과 태도는 그 당시 선배들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인천에서 그런 선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인천에 계속 머무르고 있습니다.

Q. 지역 극단으로 꾸준히 나아가기 위해 지향하는 가치가 있을까요?
연극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데 지역성이 모호한 현시대에서 지역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단지 서울의 물리적인 인접함이 인천의 특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서울이 가까우니 인력 유출이 심각한 수준이죠. 하지만, 그 반대로 인력유입도 매운 쉬운 환경이라 인천의 배우들이 다른 지역의 배우들로부터 기회를 박탈당할 수 있는 우려도 있죠. 현재, MIR의 바람직한 모습은 기본을 닦고 성장한 선배들이 후배양성을 도와주고 여러 지역, 여러 나라에서 공연을 펼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직 선배들도 삶에 여유가 있지는 않지만, 조금씩 좋은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Q. 오랫동안 극단을 유지할 수 있던 원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저에게 연극은 제가 살고자 하는 삶의 목표나 방법과 가장 근접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만두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극단이란 연극적 철학이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단을 처음 창단했을 때도 단원모집을 따로 하지 않았죠. 그리고 우리 극단은 탈퇴가 매우 쉬운 극단이기도 해요. 단 가입할 때는 연수과정을 우선 거치는데 서로 어울리는지 판단하는 데 약 1년이라는 시간을 갖습니다. 또한, 조금 다른 길과 꿈을 갖고 극단에 들어와도 별로 문제를 삼지 않지만, 극단에 있을 때는 극단의 규칙과 정신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보니 재미있는 구성이 되었습니다. 단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그룹, 연기를 배우러 들어온 그룹, 들락날락 하는 객원들이 있죠. 가끔 본인들을 ‘정신적인 단원’이라고 말하는 그룹도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MIR와 함께한 많은 이들이 크게 평가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태지윤
글/사진 이진솔




마음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인처너(Incheoner)들과 함께 나눔의 메카, 인천을 만들어갑니다.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정명환 회장

인천문화재단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인천지부와 함께 2017년 한 해 동안 인천에서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들을 소개하였습니다. 다양한 환경, 다양한 직업의 기부자들을 찾아뵈며, 나눔과 기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담았습니다. 

오늘은 이번 해 마지막 시간으로, 더불어 사는 사회를 통해 행복한 인천을 만드는 대표적인 기관,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정명환 회장님을 만나봅니다. 오랜 시간 시민들과 함께 지역사회발전을 위해 노력하며, 더욱 따뜻한 인천을 만들어가고 계신 회장님의 열정과 헌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Q. 안녕하세요. 정명환 회장님,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A. 반갑습니다.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9대 회장을 맡게 된 정명환입니다. 저희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사랑의 열매로 많이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모금기관입니다. 모두를 위한 한 번의 기부(One Gift for All)를 모토로 전 국민이 참여하는 모금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아너소사이어티 회원분들을 통해 인천 곳곳에 계신,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인천인들을 만나보셨을 겁니다. 인천사람:인처너(Incheoner)라는 단어가 실제 사전에 등록된 단어입니다. 지난해 우리 인천이 따뜻한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인처너(Incheoner)들 덕분에 나눔의 메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역의 나눔문화를 이끄는 회장으로서 벅찬 마음과 함께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감에 어깨가 무겁습니다. ‘나눔으로 행복한 인천’을 위해 함께해주시는 모든 분들이 있어 항상 든든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업사회공헌으로 함께하는 인천국제공항공사, 한국지엠한마음재단 등 모든 기업사회공헌 관계자 분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Q. 인천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신 것 같습니다. 오래전부터 지역발전을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헌신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천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A. 인천에서 사회 첫발을 디디면서 인천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벌써 50년이 다 되어가니 인천은 저의 제2의 고향입니다. 명지대학을 나와 대한통운에 입사했고 73년도에 인천으로 발령을 받았지요. 45년 전 그때의 인천은 회색 도시였죠. 새마을 운동은 최고조에 달했고, 인천항으로 모든 양곡, 목화를 수입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회사에서 5년 생활을 한 후, 주안역 인근에서 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젊고 에너지 넘치는 청년이 열심히 사업하면서 동네 모든 모임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니 주변 분들이 다들 좋아해 주셨어요. 저희 집 가훈이 도불원인(道不遠人), 사람을 멀리하면 도가 아니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거고 만남이라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이웃을 멀리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게 나누고 베풀며 살다 보니 최초 민선 시의원에 사람들이 나가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싫다고 만류했지만,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시고 도와주신 덕에 초대 시의원이 되었습니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열심히 살다 보니 남들이 좋게 봐주셔서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Q. 이웃과 무언가를 나누고 함께 하는 일에 익숙한 분이셨기에 지역 사회에 큰 뜻에도 함께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타고난 성향도 있겠지만 그 시작은 쉽지 않을 텐데요.
A. 자라온 과정이 필요하죠. 남을 돕는다는 것이 태어나자마자 갖는 습관이 아니니까요. 저는 서울 태생인데 좀 힘들게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재수하면서 채소 장사도 해보고, 대학도 재수하면서 이것저것 많은 경험을 했었죠. 명지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학장님 구두를 닦아 용돈을 벌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집안이 불교 가정인데 대학생 때부터 저는 교회를 다니게 되었지요. 웨슬리 야학에서 3년간 교장을 했었습니다. 아현동, 공덕동 인근에 정말 어려운 아이들을 도우면서 나눔과 봉사에 눈을 뜨게 되었어요. 어렸을 적부터 물질적 환경이 풍부하지 못하더라도 정신적인 자세만은 바르고 진실하게 살자. 행동으로 보여주자.라는 저만의 삶의 자세가 있었어요. 긍정적인 마인드였지요. 인천이 제 삶의 터전이 되면서 자연스레 이러한 삶의 교훈이, 그리고 습관이 이곳으로 옮겨진 셈입니다.

Q. 회장님께서 저희 재단에서 특강을 해주셨을 때, 인처너(Incheoner)를 강조하시면서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바탕으로 시민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말씀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나눔을 위해서는 지역에 대한 애정, 이웃에 대한 사랑이 선행되어야겠네요. 인천사랑운동을 앞장서서 전개하시기도 하셨지요.
A. 인천인 모임에 있어서 ‘인천인’이라고만 쓰는데 저는 ‘인천, 인천인’이라고 두 가지를 항상 함께 쓰고 싶습니다. 인천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인천에 산다고 하면 인천만의 지역 문화와 정서를 공유하고 지역주민으로서의 정주성, 일체성을 갖고 당당한 시민이 되어야겠지요. 인천은 흔히들 다른 지역 출신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어찌 되었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일전에 인천사랑을 주제로 청소년 아카데미를 세 번이나 열었었지요. 교육이라는 것이 그 효과가 당장 나오지는 않지만, 문화예술과 마찬가지로 씨앗을 심는 일이기 때문에 조금은 멀리 봐야 한다고 봅니다. 

Q.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남과 비교하며 사는 요즘 세상에서, 회장님처럼 건강한 가치관을 지니고 계신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회장님 이력 중 한국레크리에이션 협회장을 하신 것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A. 제가 인천에서 레크리에이션 협회 회장은 15년 정도 했었어요. 우리가 살면서 자는 시간이 1/3, 일하는 시간이 1/3, 여가시간이 1/3입니다. 여기서 여가는 레크리에이션, 즉 영어로 리-크리에이션이지요. 즉, 나를 잘 가꿀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걸 잘 활용하면 좋은데, 여기서 문화예술이 여가생활에 절대적이죠. 저 또한 문화예술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연극 분야에 관심이 많아요. 30대 후반에 연극을 보러 아주 열정적으로 서울 방방곡곡을 다녔어요.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조금씩 보고 느껴가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예전에 한참 연극을 보러 다닐 때는 매주 수요일마다 꼭 명동이나 충무로를 갔어요. 지금 유명한 소리꾼, 춤꾼들과 같이 어울리며 문화예술을 가까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Q. 문화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분이시군요. 앞으로 인천문화재단과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함께 인처너(Incheoner)들이 더욱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인천의 나눔문화를 확산시켜 나갔으면 합니다.
A. 오래 전부터 인천의 문화예술을 지켜본 시민 한 사람으로서, 지금의 우리 문화예술을 둘러보면 시민의식이 많이 성장한 걸 볼 수 있습니다. 문화예술이 발전되면 시민들의 삶이 정신적으로 좀 더 풍요로워지겠지요. 앞으로 인천의 나눔문화 확산을 위해 다양한 고민이 함께 수반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이전 회장님들께서 많은 노력을 하셔서 인천의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인천인들을 만나왔습니다. 모금하고 싶은데 선뜻 어느 곳에, 어떻게를 고민하다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위대한 기회를 주자. 생각은 있지만, 현실이 급하기에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전도사가 되자. 자신을 위하고 남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Q. 사회복지와 문화예술이 함께 만들어가는 따뜻한 인천을 상상해봅니다. 마지막으로 향후 회장님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A. 여기는 명예직이고, 참 명예로운 자리입니다. 제가 두 달 동안은 매우 우울했어요. 남들에게 아무리 좋은 일을 권유한다지만 결국 돈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이기에, 거절당하거나 하면 상처를 받았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내가 먹고살기 위해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내가 노력하는 것이기에 지금은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으로서 민간복지의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열정과 지혜를 모으고자 합니다. 역대 회장님들께서 만드느라 고생하신 아너소사이어티를 잘 끌고 가면서 한분 한분께 감사드리며 겸손한 자세로 임하고자 합니다. 더불어, 이렇게 나눔 문화를 선도하신 분들의 명예의 전당이 저희 사무실에 있습니다. 향후 이 명예의 전당을 더욱 많은 시민들과 함께하는 공간으로 내보내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좀 더 많은 시민들과 함께 인천의 나눔을 선도하고 계신 분들의 모습을 나누고자 합니다.

‘누구나 삶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삶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눔에 참여하는 우리 주변의 보석 같은 분들이 계시지요’. 올 한 해 동안 아너분들을 만나 뵈며, ‘참된 어른’이라는 공통의 키워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따뜻하고 깊은 마음씨와 삶에 대한 열정을 한가득 품고 있는 기부자들은 주변 사람에게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하는 우리 사회의 보석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유난히 추운 올겨울, 더욱 행복한 인천을 위해 애써주시는 정명환 회장님을 비롯한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직원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으로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인천문화재단이 따뜻하고 행복한 인천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겠습니다.

 

인천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아트레인의 탑승자를 찾습니다.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 기부 캠페인 아트레인은 인천 시민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개인 혹은 법인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며, 기업 후원의 경우, 기업의 경영철학과 사회적 책임 실현을 위한 사회공헌 사업을 문화예술로 함께 만들어드립니다. 
아트레인 참여 문의 : 
인천문화재단 기획홍보팀 032-455-7114, artrain@ifac.or.kr

인터뷰 정리 / 인천문화재단 유영이




인천의 공연장을 찾아서

와컴퍼니 박주형 대표 인터뷰
“우리의 이야기로 세계적인 공연을 만들다”

인천문화재단은 지역 공연콘텐츠 강화, 공연장과 예술단체의 교류 활성화, 지역 우수 공연프로그램 향유 기회 증진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사업’을 시행해오고 있다. 와컴퍼니는 올해 처음으로 본 사업에 참여한 단체로서, “우리의 이야기로 세계적인 공연을 만들다”라는 큰 포부를 가지고 계양문화회관의 상주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본 사업에 처음으로 함께하게 된 상주단체를 인터뷰한다는 것 자체도 그랬지만, 한 해의 끝자락에도 여전히 <정글라이프>와 <달그림자> 공연 준비로 분주한 와컴퍼니의 모습이 내겐 굉장히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박주형 대표가 말하는 상주단체사업의 보완점 역시 눈에 띄는 부분이었다. 이 문제는 이미 앞선 인터뷰에서도 여러 상주단체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바 있었다. 1년이란 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 이는 물론 개선이 필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해보면 이는 상주단체들이 한 해가 짧게 느껴질 정도로 인천의 지역문화활성화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그간 인터뷰했던 공연장과 상주단체들은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겨울의 차가운 흙속에서도 씨앗은 꽃피우기위해 자라는 중이다. 박주형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Q)2017년부터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사업에 상주단체로 참여하고 계신다. 와컴퍼니에 대해 간단한 소개 부탁드린다.
저희 와컴퍼니는 “우리의 이야기로 세계적인 공연을 만들다”라는 큰 포부를 가지고 창작 뮤지컬, 연극, 콘서트를 제작 및 기획하고 있는 공연전문예술단체입니다. 기존 무대의 대본 및 음악의 표현방식에서 벗어나 신선하고 창의적인 작업을 통해 새로운 무대를 만들고 있습니다. 와컴퍼니의 ‘와(WA)’는 같이 ‘와’서 함께 놀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는 ‘와 뮤지컬 그라운드’로 시작을 했지만, 뮤지컬 이외에도 연극이나 어린이 뮤지컬 콘텐츠, CCMC라고 기독교 음악으로 만든 뮤지컬 음반 사업 등을 함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뮤지컬’이라는 말을 빼고 보다 포괄적으로 ‘와컴퍼니’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어요. 

Q)뮤지컬뿐만 아니라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게 된 계기가 있나? 
사실 저는 오래전부터 연극을 먼저 했었어요. 그러다가 지금은 H스타 페스티벌로 바뀌었지만, 당시엔 GM대우 전국뮤지컬 페스티벌이라는 게 있었는데, 거기서 제가 최우수연기상을 받게 되었어요. 그렇게 지내다가 1회 때 작곡상을 받은 이연석 감독과, 연출상은 받은 김규종 연출가와 함께 작업을 시작하게 된 거죠. 물론, 뮤지컬 배우로도 굉장히 오랫동안 활동을 했고, 대학 강의 및 기획 일을 함께 시작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뮤지컬도 만들었죠. 말하자면 뮤지컬이 좋아서 뮤지컬을 하게 된 거지, 이전에도 이미 연극을 포함해 다양한 장르를 해왔던 거죠. 앞으로도 여러 장르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Q)12월 상주 공연장인 계양문화회관에서 <달그림자>와 <정글라이프>를 공연한다. 어떤 작품들인지 궁금하다. 
일단  제작자로서 말하자면 <정글라이프>는 인정받은 작품이다, 라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어요(웃음). <정글라이프>는 주로 ‘뮤지컬계의 미생’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사실 창작자로서 저희들도 미생이었고, 아직까지도 미생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저희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이 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 작품에서 부정적인 면만을 표현하기 위해서 ‘정글’을 생각했던 건 아니에요. 마치 정글의 여러 동물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있듯, 우리도 각자 표현방법이나 살아가는 방식들이 다 다르거든요. 그래서 여기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이 굉장히 독특합니다. 이원순 사원은 원숭이, 하예나 대리는 하이에나, 홍호란 부장은 호랑이, 사수미 과장은 사슴, 이렇게 각각의 인물들의 이름은 동물을 형상화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재밌는 건 신입사원 피동희인데, ‘핏덩이’라는 뜻이죠.  정글푸드라는 회사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으로서 이 인물이 뭐가 될지는 모른다는 거죠.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정글라이프는 세상의 축소판이에요.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 뮤지컬에는 타악기가 굉장히 많이 들어가요. 아프리카 타악기가 거의 120개 정도가 들어가죠. 오프닝에 나오는 사운드도 라이온킹을 생각하면서 만들었어요. 음악에 관심을 갖고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Q)<달그림자>도 마찬가지로 동물이 나오는 어른을 위한 동화인 것 같다.
온 가족들이 즐겨보는 그런 뮤지컬을 만들고 싶어서 <달그림자>를 만들게 되었어요. 달그림자에는 강아지, 고양이, 맷돼지, 그리고 말 못하는 봉구라는 소년이 같이 살아가고 소통하는 그런 내용이에요. 그래서 동물적인 움직임도 상당히 있고, 귀엽고 아기자기한 부분들이 많아요. 사실 <정글라이프>를 만들 때도 그랬지만, <달그림자>를 만들 당시 우리나라에는 라이센스 뮤지컬이 굉장히 판을 치고 있었을 때였어요. 당시엔 히트된 뮤지컬이 2개 정도 밖에 없었고, 대부분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이런 것들만 했었죠. 그래서 저희는 왜 우리나라 뮤지컬은 없을까, 우리 이야기로 창작뮤지컬을 만들어보자, 라고 생각했죠. <달그림자>는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이 뮤지컬은 라이브 공연으로 이뤄져요. 국악기가 라이브로 연주되죠.   

Q)이 밖에도 <워로드>, <빛소리> 등의 레퍼토리도 있는 거로 알고 있다. 간단한 소개 부탁드린다. 
<워로드>는 2015년 공연예술 창작산실 뮤지컬 쇼케이스에 선정되어 쇼케이스 공연을 했던 작품이에요. 아쉽게도 아직 본 공연까지는 못 갔어요. 이 공연은 한국전쟁 때 마포 형무소에 있던 죄수들을 소재로한 블랙 코미디에요. 전쟁이 나자 형무소의 교도관들이 죄수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는 내용을 담았어요. 앞으로 기회가 되면 본 공연으로 한 번 올릴 생각이 있는 작품이에요. <퓨전 국악 난타 뮤지컬 빛소리>는 찾아가는 퍼블릭 프로그램이에요. 작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최한 신나는 예술여행이란 프로그램으로 11개 지역정도를 다녔고, 올해는 계양문화회관에 상주단체로 오면서 계양구지역을 다녔어요. 각 지역의 초등학교나 복지시설, 장애인시설, 심지어는 계양동 캠핑장까지 말이죠. 아마 <빛소리>의 경우엔 기존의 정형화된 공연이라고 관람하면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관객들과 함께 하는 공연이기 때문에, 아이들한텐 아이들 버전이 있고, 노인들에겐 노인 버전이 있죠. 학교 같은 경우엔 선생님이 앞에 나와서 국악장단에 맞춰 춤도 춰야해요(웃음).

Q)인천에서 집중적으로 활동을 하신 게 올해가 처음이실 텐데, 다른 지역과 인천의 차이가 있다면? 활동하는데 있어서 인천만의 장점이나 혹은 단점이 있는지 알고싶다. 
저희는 서울을 연고지로 전국 투어공연을 다니는 단체였습니다. 올해부터는 인천 계양문화회관의 상주단체로 활동하게 됐는데, 사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부터 상당부분 흥미가 있었어요. 우선, 인천 지역문화예술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 지역을 대표하는 공연 창작을 통해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는 인천의 이미지를 바꾸겠다는 큰 포부를 갖고 상주단체사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렇게 많은 공연들을 유치하고 준비하게 되었죠. 물론 예산 운영에 적지 않은 리스크가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목표로 한 공연을 모두 할 수 있게 되어 만족하고 있어요. 다만, 아직 인천 지역 공연장의 인지도가 부족하고, 지역 주민들의 공연관람문화가 자리잡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관객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어린이 공연이나 찾아가는 공연은 문제될 게 없지만, 다른 공연들엔 어려움이 있어요. 이번 12월 공연을 통해 공연장에 대한 관객들의 인식이 변화되길 바라요. 

Q)공연장으로서 계양문화회관은 어떤 곳인가? 계양문화회관 만의 특색이 있는지 궁금하다. 
우선, 환경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계양문화회관은 아름다운 계양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공연장이에요. 공기 좋고 쾌적한 환경의 공연장에서 공연을 관람하실 수 있을 거예요. 다만, 극장 시설이 조금 노후화되어 있는 것 같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공연 관람 문화가 아직 잘 자리 잡히지 않은 것 같아요. 물론 이런 부분은 공연장뿐만 아니라 저희도 상주단체로서 좀 더 노력을 해야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긍정적인 건 계양문화회관의 감독님들과 직원 분들이 좋은 분들이라는 점이에요. 저희가 상주단체로 활동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계세요.  

Q)벌써 한 해가 다 되어간다. 올해 활동하면서 느꼈던 본 사업의 장점이나, 보완할 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린다. 
상주단체 사업에 처음 참여하게 되어서, 이전에 어떤 방식으로 운영됐는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아마 작년보다는 더욱 개선된 환경 속에서 상주단체 사업이 진행됐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본 사업은 상주단체의 역량 강화뿐만 아니라, 공연장 활성화에 한몫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하기엔 1년이라는 기간이 조금 짧은 것 같아요. 상주단체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작품을 발전시켜야하는데, 1년이란 기간은 창작 공연을 개발하고 완성도를 높이기에도, 또한 주민들에게 알려져 지역을 대표하는 공연 단체로 자리 잡기에도 부족하다고 봐요.

Q)앞으로의 활동계획과 함께, 와컴퍼니의 공연을 관람하러 올 시민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린다. 
올 한해 인천에서 공연하면서 많은 관객분들을 만나 뵙고 즐겁게 공연했습니다. 12월 계양문화회관에서 공연되는 <달그림자>, <정글라이프> 공연 역시도 열심히 준비했고요. 특히 <달그림자>는 계양문화회관에서 처음으로 올린 창작공연이에요. 이뿐만 아니라 어린이 뮤지컬과 찾아가는 뮤지컬 등 상주단체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요. 그럼에도 물론 부족한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2018년도에는 <달그림자> 공연을 장기공연으로 더욱 발전시켜 많은 시민분들이 보실 수 있게 노력할 거예요. 더 나아가 계양문화회관뿐만 아니라 인천의 다른 지역에서도 투어 공연을 했으면 해요. 와컴퍼니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우리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한국 창작뮤지컬을 제작하고 좋은 무대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인터뷰 정리, 사진 / 인천문화통신 3.0 시민기자 박치영




인천의 공연장을 찾아서

부평올스타빅밴드 정유천 대표 인터뷰
“스윙재즈는 음악도시 부평의 정체성이에요”

인천문화재단은 지역 공연콘텐츠 강화, 공연장과 예술단체의 교류 활성화, 지역 우수 공연프로그램 향유 기회 증진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사업’을 시행해오고 있다. 부평올스타빅밴드는 4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모여 스윙재즈공연을 하는 부평아트센터의 상주단체이다. 이 단체의 음악적 기원은 부평 미 8군 클럽에서 연주되던 스윙재즈에 있는데, 정유천 대표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왜 부평이 음악 도시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인터뷰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해방 이후 한국에 주둔한 미군 부대와 그 주변에서 스윙재즈를 연주하던 밴드들은 부평의 혼종적인 동시에 활력이 넘치는 음악적 계보를 만들어 냈다. 이는 과거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한류라는 글로벌 기류를 타고 세계를 훨훨 날아다니는 케이-팝의 기틀을 만든 것이 바로 미군 부대와 그 주변 클럽에서 활동하던 밴드들이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는 미 8군 클럽에서 케이-팝까지 이르는 시간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는 일이기도 하다. 정유천 대표와의 인터뷰는 마치 보물 상자를 열어보는 기분이었다. 그 보물들은 어떻게 다시 닦아서 사용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정유천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사업에 상주단체로 참여하고 계신다. 부평올스타빅밴드에 대해 간단한 소개 부탁드린다.
부평올스타빅밴드는 2005년 창단된 단체로, 해방 이후 스윙재즈를 기반으로 미 8군부대에서 활동했던 하우스밴드들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해방 이후에 부평엔 애스컴(ASCOM)이란 미군수지원사령부가 있었는데, 지금은 물론 캠프 마켓(Camp Market) 하나만 남았지만, 당시에는 그에 몇 배나 되는 미군 부대가 주둔해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내의 미 8군 클럽을 비롯해 영외에 수많은 클럽들이 생겼는데, 그 클럽들에서 주류를 이루던 음악이 스윙재즈였어요. 이러한 부평의 음악적 정체성을 이어받아 스윙재즈를 연주하는 밴드를 만들고 싶어 부평올스타빅밴드를 창단하게 되었습니다.

2. 우선, 11월 11일에 <스윙플러스 콘서트>라는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던데 어떤 공연인지 소개 부탁드린다.
작년에 저희가 옛날 부평의 미군 부대 애스컴과 그에 따른 음악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스윙&애스컴 토크 콘서트>를 연적이 있어요. 그땐 현미 선생님이나 당시 활동했던 가수분들이 오셔서 옛날 미군 부대에서 나온 음악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어요. 올해는 11월 11일에 부평아트센터 해누리 극장에서 <스윙플러스 콘서트>라는 공연을 합니다. 이전에는 과거의 것을 재현했다면, 이번엔 재현뿐만 아니라 보다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보자 해서, 다른 장르의 뮤지션들과 콜라보레이션하는 형태로 진행할 계획이에요. 한국블루스음악의 디바라는 별칭을 얻고있는 강허달림, 전자바이올린으로 활동하시는 제니유, 우즈베키스탄의 ‘기작’이란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아크 마리아라는 우즈베키스탄 연주자 아크밀 등과 함께하면 어떠한 소리가 날지 협연해보려 해요. 말하자면 빅밴드 형태에서 좀 더 발전적인 시도를 해보는 음악회에요. 그래서 ‘스윙’에다 ‘플러스’를 붙여 <스윙플러스 콘서트>라는 제목을 지은 거죠.

3. 당시 주둔해 있던 미 8군부대가 부평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많다고 알고 있는데, 각각의 지역마다 차이가 있고, 부평 쪽에선 특히 스윙재즈가 많이 연주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큰 도시엔 거의 다 미군 부대가 주둔해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부산, 경기도 평택, 파주, 의정부, 동두천 등등이 다 그렇죠. 인천만 해도 월미도에 있었고. 제가 부평올스타빅밴드를 만들면서 궁금했던 게 있었어요. 전설적인 로큰롤의 대부 신중현 선생님의 경우 미 8군부대 공연을 많이 했는데, 그분 자서전을 보면 부평 얘긴 거의 없어요. 어떻게 보면 당시 부평엔 엄청난 규모의 미군 부대가 있었는데도, 부평에서는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셨더라고요. 왜 선생님께서는 여기서 공연을 하지 않았을까?, 그게 제 의문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나름대로 유추를 해봤는데, 그게 부대 특성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의정부나 동두천 같은 쪽의 미군 부대에는 주로 보병들이 많았어요. 당시 보병들은 주로 생활이 어려워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자원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사람들에겐 로큰롤이 익숙했던 거죠. 반면, 부평에 있는 애스컴의 특징은 그게 군수 지원 사령부였다는 거예요. 여기엔 보병들이 아니라 직급이 높았던, 지금으로 치면 화이트컬러 쪽 사람들이 주둔해있었던 거죠. 듣는 음악이 달랐던 거예요. 미 8군 클럽에서의 음악은 사실 미군들을 위한 음악이잖아요. 그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윙재즈가 부평의 지역 특성으로 자리 잡았던 거죠. 당시 활동했던 선배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거의 기타, 드럼 베이스 등 리듬악기에 트롬본 색소폰 등 브라스악기가 추가된 형태의 6~8인조를 구성해 연주했더라고요.

4. 수용자층의 차이가 음악 장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얘긴 거 같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밴드 연주자들이 많이 모였을 것 같다. 
 얘기를 좀 더 해보자면 지금으로 따지면 부평2동과 3동인데, 당시엔 이 두 지역 간에 연결고리 같은 게 있었어요. 부평3동의 경우는 주로 클럽과 주점, 그리고 양부인들이 많았던 동네인데, 그래서 예술가들이 거기서는 살 수 없었죠. 그래서 그곳과 가까운 부평2동에 음악가들이 한 백여 명씩 모여 살았던 것 같아요. 뿐만 아니라 60~70년대에는 교통이 지금처럼 편하지 않았잖아요. 뭐 70년대에는 통행금지까지 있었던 시절이니까. 그런데 각 미 8군 클럽으로 출퇴근하기 좋았던 곳이 바로 부평2동(삼능)이었던 거예요. 왜 그랬냐면 미군에서 직접 이곳까지 와서 밴드들을 픽업해서 각 부대의 클럽으로 데려갔던 거예요. 당시 미군 부대가 밴드들을 픽업하던 장소가 지금의 동수역 2번 출구 당시 삼부약국 인근이었는데 그곳에서 미군클럽에서 연주하는 밴드들을 실고 가고 실고 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밴드가 그걸 타고 이 부대 저 부대로 흩어졌다가 다시 미군트럭을 타고 이쪽으로 퇴근을 했죠. 이런 걸 보면 역사적인 사실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조사되어야하는데,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을 하나하나 만나서 그들이 어떻게 음악을 해왔는지 집중적으로 조사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부평엔 역사적으로 음악적 특성이 분명히 있어요.

5. 왜 부평이 ‘음악도시’라 불리는지 알 것 같다. 부평올스타빅밴드 내부에 당시에 활동하셨던 분들도 있다고 알고 있다. 재밌는 에피소드 같은 것도 많을 것 같은데.
 제가 직접 경험한 건 아니라,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들려드리기 힘들지만 한 가지 재밌는 게 있어요. 당시 미 8군부대에서 음악을 하려면 꼭 오디션을 봐야 했어요. 지금 우리나라도 오디션 프로그램이 열풍이 불고 있지만, 사실 그 원조는 미 8군 오디션이라 할 수 있죠. 오디션을 미군 차원에서 관리했던 거예요. 당시 얘기를 들어보면, 보통 3명의 심사위원과 무대가 있고, 연주하기 원하는 연주자들이 거기서 자기들 레퍼토리를 적어낸 후 몇 번째 곡 해보라 하면 연주하는 방식으로 오디션을 봤는데, 미군 부대에서 그걸 들어보고 클래스(등급)를 매겨요. 예를 들면, A, B, C, D이런 식으로요. 그게 밴드들이 받을 수 있는 공연료로 산정됐던 거죠. 재밌는 게 이게 전국에서 통용되었던 거란 점이에요. 그렇게 받은 클래스를 가지고 밴드들이 전국에 있는 미군 클럽에서 쇼 비즈니스를 했던 거죠. 대표적으로 현미, 한명숙, 최희준, 패티김 등이 다 미 8군 출신들이에요. 그들의 특징이 뭐냐면, 음악을 굉장히 잘했다는 점이죠. 미 8군 클럽에서 일하려면 백프로 실력 없인 안 됐어요. D 클래스를 받으면 공연을 못 했죠.

6. 미군 말고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도 있었는지 궁금하다. 
있었죠. 근데 당시 미군 부대에서 하는 공연에 비해 규모가 매우 작았어요. 60년대 당시 미군 부대에서 공연해서 벌어들인 돈이 120만 달러였는데, 그해 우리나라가 수출해서 벌어들인 것이 100만 달러 정도에 불과했어요. 미군 부대에서 벌어들인 게 더 많았죠. 당시 일반 공연 같은 경우는 무대도 작고 퀄리티도 떨어졌어요. 미 8군 클럽에서 연주한다는 건 미군들의 수준에 맞춰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 수준에 맞추려면 웬만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죠. 엄청난 연습이 필요했어요. 미 8군 출신 가수나 밴드들이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의 기틀을 거의 다 쌓았다고 봐도 무방해요. 해방 이전 우리나라 음악의 주류가 트로트 음악이었는데, 당시엔 그럴 수밖에 없었죠. 일제강점기 이다보니 일본 음악 엔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이건 역사적으로 사실이죠.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형태는 트로트 음악이 아니라 미 8군 밴드 음악과 비슷해요. 엔카는 5음계를 쓰는 데 반해 지금의 대중음악은 대부분 8음계를 쓰죠. 이런 식으로 대중음악 판이 8음계로 바뀌고 거기서부터 케이-팝(K-POP)이 나올 때까지 그 기틀을 미군  8군 클럽 무대 출신 음악가들이 만든 거라 할 수 있죠. 당시 미군 8군 클럽 무대 출신 작곡가분들이 쓴 곡을 보면 다 팝(POP)스러워요. 특히 한명숙 선생님의 「노란셔츠 입은 사나이」 같은 경우는 완전 컨츄리음악이에요.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거의 획기적인 전환기였던 거죠.  

7. 과거 얘기를 하다 보니, 최근의 대중음악계나 후배 밴드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실지 궁금해진다. 
제가 부평올스타빅밴드 단장이지만, ‘락캠프’라는 라이브클럽을 20년째 운영하면서 수많은 인디밴드들을 보고 있는데, 슬픈 마음이 들어요. 인디밴드에 개성 있는 음악과 연주도 좋고, 곡도 잘 쓰는 뛰어난 뮤지션들이 너무 많은데, 빛을 못 보고 있어요. 우리나라 음악 시장이 너무 편협하게 되어 있는 건 아닌지. 이렇게 모든 대중음악시장이 아이돌음악으로 채워지는 게 대중음악의 다양성이란 면에서는 지루함도 가져올 텐데, 왜 이게 그대로 묵인된 채 2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을까, 슬프죠. 똑같이 평등하게 기회를 줘야 하는 건데, 왜 대형기획사에서는 시시때때로 아이돌들이 툭 튀어나오고, 반면 인디밴드는 10~20년을 어렵게 음악 해도 라디오에서 음악 한 번 안 틀어줄까.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스크린 쿼터제 처럼 대형기획사소속 가수나 연예인들의 방송출연 횟수를 어느 정도 제한하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인디 씬들은 밴드뿐만 아니라 레이블이나 기획자들도 영세하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부나 문체부 방통위등에서 어떤 대안을 만들어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8. ‘주니어빅밴드예술학교’라는 퍼블릭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계신다고 들었다. 어떤 프로그램인가? 
주니어빅밴드예술학교는 상주단체 퍼블릭 프로그램으로 사업계획을 세운 건데, 작년 9월부터 시작됐어요. 인천 관내 초등학생 중 신청받아서 현재 18명 정도 악기를 배우고 있어요. 지금 우리나라 음악의 전반적인 환경을 보면, 브라스 연주자들이 많이 부족해요. 제 어린 시절엔 각 학교마다 밴드부가 있어서 브라스 악기(금관악기)를 배울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기타나 드럼은 많이 배우는데 브라스를 배울 데가 없어요. 대중음악이든 클래식이든 다 브라스 연주가 필요한데, 이러다간 앞으로 우리나라 음악 시장 전체에 문제가 많이 생길 수도 있을 거에요. 그래서 이걸 누군가는 청소년 교육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아직은 그런 것이 부족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일단 저희라도 브라스 연주자들을 키우기 위해 학생들을 모아 일주일에 한 번씩 악기강습을 하고 있어요. 이걸 계기로 훌륭한 연주자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게 아니더라도 학생들에게 어릴 때부터 이런 체험을 통해 악기의 멋있는 소리를 많이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요.

9. ‘주니어빅밴드’말고도 앞으로 ‘시니어빅밴드예술학교’라는 프로그램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들었다. 
지금은 아무래도 예산을 많이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라 구상단계에 머물러 있어요. 지원사업뿐만 아니라 인천의 기업들과 메세나를 통해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면 하고 싶은 사업이에요. 지금 제가 58년생인데, 제 주변 나이들은 이제 은퇴할 나이가 되고 있어요. 근데, 이 친구들을 보면 사실 아직 굉장히 젊어요. 지금 100세 시대라는데, 그렇게 보면 앞으로 40년을 더 살아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일 문제가 뭐냐면 소일거리, 심심풀이로라도 뭔가 할 게 없다는 거예요. 그런 은퇴한 분들을 모아서 주니어 빅밴드처럼 악기를 가르쳐 취미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서로 모여서 악기도 같이 배우고 공연하고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술도 한잔하면서 인생을 즐기는 거죠. 요새 마을공동체 얘기가 많은데, 악기를 배워 자연스럽게 자신이 사는 아파트나 공원을 무대로 마을 연주회를 열면 이런것도 마을공동체의 한부분이 되는 거죠.

10. 벌써 한 해가 다 가고 있다.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 사업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장점이나 보완할 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린다. 
상주단체가 되기 전과 지금이 완전 달라요. 상주단체가 되기 전에는 지속성을 갖고 활동하기가 힘들었어요. 1년에 한두 번 정도 자력으로 공연을 했는데, 연습장도 없어서 제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클럽에서 테이블 다 치우고 연습을 했죠. 지금은 상주단체 프로그램 때문에 많은 혜택을 보고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저희 같은 경우엔 부평을 기반으로 활동하는데, 부평아트센터의 상주단체라는 게 편리함을 주죠. 공연장 담당자들과도 지역을 공통으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기도 하고요. 부평이 음악도시가 되는 데 저희가 협조를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반면에, 행정적인 부분에서 상주단체 사업이 보완되어야 할 점도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1년 단위로 상주단체를 선정하잖아요. 그러다보니 단체 입장에서는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못 세우게 돼요. 예를 들면, 시니어빅밴드를 만들고 싶은데 내년에 저희가 상주단체로 선정될지 아닐지는 모르는 거기 때문에 장기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하기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특히 4월이나 5월 중에 상주단체 발표가 나는데, 그러다 보니 상반기 사업을 잘 못 한다는 것도 문제예요. 공연단체 입장에서 급하게 할 수 있는 게 공연밖에 없게 되는 거죠. 더 좋은 중장기적인 프로그램이 있어도 그걸 실행하기에 시간적인 제약이 있는 것 같아요.

11. 앞으로의 활동계획과 함께, 부평올스타빅밴드의 공연을 관람하러 올 시민들께 한 마디 부탁드린다. 
부평의 음악적 정체성인 스윙재즈를 보다 많이 홍보하는 걸 통해 부평이 음악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보다 노력하려해요. 지역의 역사와 가치를 좀 더 잘 알리고 싶어요. 또한, 인천 지역의 문제가 될 수있는 은퇴하시는 시니어들의 문제들을 음악적으로 풀 수 있을지 더 고민하려 해요. 11일 공연에 대해선, 저희 공연은 분명 흔하게 볼 수 있는 공연은 아니에요. 저희는 MBC, KBS 악단이나 전국노래자랑 악단에서 활동할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분들이 모인 단체에요. 정말 훌륭한 공연 볼 수 있는 기회니까 오셔서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특히 스윙재즈는 신나고 가벼운 맛도 있어요. 즉, 스트레스 하나 안 받으면서 볼 수 있는 공연이란 거죠(웃음). 이런 게 스윙재즈 음악이구나, 경험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오셔서 많이 즐겨주세요.

 

글, 인터뷰 정리 / 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박치영
사진 제공 / 부평올스타빅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