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소에 들어가다 2.

인천 중구에서의 삶은 여유로웠다. 도착한 첫 주에는 업무 일정을 따로 정하지 않고 지역에 익숙해지기 위한 노력만 했다. 한국의 여름은 동남풍에 실려 오는 따뜻한 기온과 습기 때문에 무더위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6월의 한국은 밤낮의 기온 차이 때문에 저녁이면 여전히 미풍이 살랑살랑 불어 천천히 거닐기 딱 좋다. 그래서 나는 주로 오후부터 느릿한 걸음으로 여기저기 다니며 관찰하고 기록하며 인천 중구를 조금씩 알아갔다. 7, 8월이 되면 불볕이 쏟아져 그늘 없이 햇빛 아래 오래 서 있는 건 무리다. 밤이 되어도 후덥지근하기는 마찬가지다. 환경이나 인문뿐만 아니라 기후도 일상에 영향을 준다.

在仁川中區的生活很悠閒剛抵達的第一個禮拜還沒有給自己定下關於駐村計畫的工作行程表每天的行程是關於生活的試圖融入這個地方韓國的夏季因為東南季風帶來溫熱的空氣與濕氣能清楚的感受到炎熱的天氣六月的韓國白天與晚上有著些微的溫度差距在傍晚能感受到微風吹拂是舒服的天氣所以我的調查計畫通常都是從下午到傍晚開始進行在街上隨意的散著步放慢步調每天一點一點的累積對於仁川中區的觀察而到78月氣溫持續攀升在烈陽高照的時段很難在沒有遮蔽物的街道上停留太久就算到了晚上也是屬於悶熱的天氣所以不只是要適應環境人文氣候也是跟每日作息息息相關

자유공원에서
지형적인 특징(한국은 70%가 산과 언덕이며 평지가 적다.) 때문에 이곳에는 유달리 경사진 곳이 많고 건축물도 외부와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자유공원은 거의 예술무대의 최고점이어서 공원을 가는 길이 마치 짧은 등산길 같다. 공원에서 산책하고 가볍게 운동하면 온몸이 개운해진다. 걸음을 멈추고 계단에 앉아 멀리 바다 풍경을 즐길 수도 있다. 공원은 자연을 꿈꾸는 도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낸 자연이다. 나에게 공원은 과도기적 영역과 같다. 인위적인 것과 자연이 교차하고 얽히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자연공원에서 그다지 크지 않은 조류공원 두 곳이었다. 공원은 그 자체가 생태환경을 이루는 곳이고, 잘 관리하면 여러 가지 동물이 자연스럽게 공원에 모여들어 둥지를 틀고 더불어 산다. 그런 곳에 인위적으로 수많은 종류의 새를 가두어 전시하고 있는 모순된 모습이 나에게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在自由公園
因為地形的關係(韓國的地形百分之70都是山地與丘陵少平原)這裡有很多的斜坡建築設施也會伴隨著階梯自由公園幾乎是藝術平台周遭的最高點走上公園的過程很像一段短暫的爬山體驗在這裡散步運動會覺得通體舒暢停下腳步坐在階梯上可以瞭望遠方的海景公園是人造出來的 偽自然目的是讓都市生活的人們對於自然的嚮往有個寄託對我來說公園是個過度場域關於人造與自然的一個模糊地帶所以在裡頭會有一些有趣的現象先讓我印象深刻的是自由公園裡有兩個規模不大的鳥園裡頭圈養了許多種類的鳥類公園本來就會成為一個生態系統當環境好時各種動物自然會到公園聚集築巢成家但這裡刻意的展示鳥類對我來 說有些衝突非常的不自然

 

계단에 앉아 고요함을 즐기다가 돌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이곳의 계단은 돌에 시멘트를 섞어 자재로 사용했다. 돌과 시멘트가 자기 기능을 하다가 시멘트가 마모된 부분에서 돌덩이가 떨어져 나오면 그대로 풀밭에 뒹구는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나는 공원 풀밭에서 시멘트가 묻은 돌을 주워 작품을 만들려고 시도를 해보았다.

當坐在階梯上享受寧靜的時候觀察到了石頭的現象這裡的階梯是以石頭為原料混合著水泥製作而成當石頭與水泥變成了階梯時它們是有功用的物件而當階梯磨損時剝落下的石頭不經意的又回到了草皮上純粹是石頭的身分循環在設施與自然之中於是我在公園的草皮裡頭撿取了一些沾有水泥碎塊的石頭做了一些作品的嘗試

길거리에서 소품을 수집할 때, 나는 버릇처럼 관련된 정보들을 노트에 간단하게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 참고한다. 호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은 노트는 언제든지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할 수 있어 편리하다. 작품을 만들 때 균등비율로 소품들을 복제하는데, 사이즈와 색채의 표현이 아주 중요하다. 실제 삶에서 관찰해본 경험이 있는 재료와 정보는 관객이 받아들이는 첫걸음이 되기 때문이다.

街上採集物件的時候我會帶著小本子在街上做簡易的描繪與記錄提供之後製作物件的必要資訊並拍下照片做參照這樣的小本子非常方便可以隨意的放入口袋裡面以便我突然想做記錄時可以隨時做準備製作作品時我會等比例的複製這些物件作品所呈現的物件尺寸與顏色相當重要是讓觀眾接收訊息的第一步這些資訊來自他們以往在生活中的觀看經驗

 

나에게 익숙한 재질은 신문지를 이용해 만든 펄프로 조형물을 빚는 것이다. 예술무대에는 재활용을 수거하는 곳이 있다. 어떤 작품을 해야 할지 결정하지 않은 초기 몇 주 동안은, 거의 매일 재활용 수거하는 곳을 들여다보며, 재료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종이박스를 크기와 상관없이 모두 작업실로 옮겨 날랐다. 그렇게 모은 종이박스와 신문지, 애써 찾으려 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종이심은 작품을 만드는 훌륭한 주재료가 되었다. 재료를 구하는 것 또한 인연이고 소품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는 중요한 조건 중 한 가지이다. 소품에 색을 입힐 때 주로 색종이와 아크릴물감을 사용했다. 이 두 가지 재료는 아주 다른 색감을 표현해낸다. 색종이는 자체적으로 색감이 풍부하여 소품을 사실감 있게 만들어 준다면, 아크릴물감을 이용하여 회화적으로 표현한 색채는 소품 겉모습을 빈티지하게 표현해준다.

關於材料的收集,以往我比較熟悉的材質是使用報紙紙漿塑造物件的形狀,在藝術平台有一個垃圾與回收間,在我還沒有選地好要製作哪些物件的前幾個禮拜,我幾乎是每天往裡頭看,把我認為可能會用的上的大小的紙箱,帶回到工作室分解,變成往後作品製作的主要材料,當然裡頭也撿的到報紙,甚至是在書局也不容易買到的各種尺寸的紙筒。與材料的相遇也是種緣份,也是影響我選擇物件的條件之一。提供給物件的顏色,我選擇了色紙與壓克力顏料兩種,兩種材質的表現很不一樣,色紙本身就有非常飽和的顏色,讓物件看起來很扎實。而透過壓克力顏料,藉由繪畫性的表現,讓物件表面能有使用過後的痕跡表現。

재료를 수집하여 소품을 만들다 보면 색을 입히기 전부터 매력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이 참 좋다. 광택지는 결과 색채를 띠며 부드럽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에서는 삶의 흔적이나 기록이 없어 민숭민숭한 느낌이 든다. 물론 감상과 현실 사이의 교감도 줄어든다. 내 작품의 포인트는 실물과 소품의 조화이다. 나는 작품을 길거리에서 수집한 소품처럼 생각하는 한편, 관객이 재질을 통해 실물이 아니라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관찰 경험에서 오는 차이가 그 후의 생활 경험 토론으로 이어지게 한다고 생각한다.

收集材料後製作中的物件,在還沒有上色的時候,也是迷人的,我很喜歡物件以這些樣貌的呈現,厚紙板有一些肌理跟顏色,很溫潤。但在這個項目中,它似乎會少了一些關於生活的痕跡與記錄,看上去有些赤裸,當然在觀看上跟現實物件的連結也減少了許多。真假物件在我的作品中是一個切入點,一方面我將作品視為街上物件的採集,第二點,透過觀眾自己從作品材質的提示中辨識到這些物件是假的,這樣的觀看經驗落差,才能有後續生活經驗的討論。

길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한곳의 변화와 차이를 알 수 있다는 점이 바로 관찰하는 재미이다. 세를 내놓은 집 계단에서 역사가 느껴지는 타일을 발견한 적 있다. 나는 그것을 기록하여 내 작품 리스트에 올렸다. 그런데 약 2주가 지난 뒤, 다시 그곳에 갔더니 상가가 들어오고 그 타일은 이미 제거되어 시멘트 자국만이, 타일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상기시켜주었다. 그 일은 도시의 빠른 변화를 의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매 순간에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쉽게 의식하지 못한다. 거리의 풍경은 너무나 평범하고 익숙하며, 특별한 역사적 기념이 될 만한 건축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재료와 만들려는 작품이 차츰 그려지자 전시해야 할 윤곽 또한 그려지는 것 같았다. 바로 인천 중구의 일상이다.

路上觀察有趣的地方在於,只要你留意一些小地方,能知道它的改變與差異。在街上一間正在出租房子外的小階梯觀察到一片非常有歷史痕跡的磁磚,於是我將它記錄下來列入我的作品製作名單,但經過兩個多禮拜後,我再次經過這個店家,這些磁磚已經被剔除掉了,剩下裸露的水泥階梯,這也讓我意識到,一個城市的景象變化是非常快速的,通常在我們沒意識到的當下,已經默默的發生改變,而我們不曾留意,因為這些城市街景對我們來說太普遍太日常,它們並不是特別的歷史紀念建築,也因為這樣,沒人在乎它們,但它們卻也蘊含了豐富的生活紀錄。當材料與製作對象隨著日子的累積也漸漸有了頭緒,似乎開始出現了展覽的輪廓,這個輪廓是關於我在仁川中區的生活印象

 

사진 /
Liao Chao-H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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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장소에 들어가다

대만인에게 가까운 이웃 나라 한국은 낯설지 않다. 대만에서는 정치에 관심있는 이라면 한국의 생활환경에서 대중적 유행, 음식문화에 이르는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한국에 머물며 창작을 해야 한다는 계획을 알게 되었을 때 한국의 생활방식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불안하지는 않았다. 생소한 곳에 가서 3개월 동안 생활해야 한다는 막막함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인천 중구에 도착하여 차이나타운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일식 건축물이 들어선 거리, 한글 광고 간판이 걸린 상점들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으로 보아 항구 중심의 문화발전이 지역공동체를 형성하였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 주민들의 생활패턴과 지역의 인문 역사를 엿볼 수 있었다. 빌딩 숲이 우거진 대도시와 달리 느긋한 일상을 통해 거리의 구석구석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고요함과 문화의 저력이 좋다.

韓國對於台灣人來說不算是個陌生的國家,兩者地理位置相近與對於政治的關心,從生活文化到大眾流行、飲食,在台灣有不少平台可以接收到韓國的這些訊息,當我得知要前往韓國進行駐地創作計畫時,其中並沒有太大的不安是來自於擔心自己不習慣韓國的生活方式,不像是要到一個完全無知的地方過生活3個月。到了仁川中區後,發覺這裡是個經由港口形成文化交融的地方,街上的建築體,從中國城的裝飾到日式建築群的街道與佈滿韓文廣告招牌的店家交錯在一起,形成一個社區。從中可以略知此地居民的生活模式與地方的人文歷史。這裡的生活節奏有別於大樓密集的城市,可以透過生活,緩慢的觀看每一個街角,喜歡這樣的寧靜感與文化底蘊。

 

언어적인 소통 장애는 새로운 생존 방법을 익히는 계기가 되었다
완전히 낯선 한글은 문자를 부호의 구성으로만 식별할 수밖에 없었고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너무 불편했지만, 차츰 소소한 재미를 찾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특히 끼니때가 되면 한글 간판이 가득 들어선 거리를 거닌다. 먼저 음식향을 맡고 가게의 인테리어와 그릇을 보고 손님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그 가게에서 어떤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러나 주문은 아는 것과는 별개이므로 식당 밖에 음식 사진들이 게시된 가게부터 시도를 한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그걸 보여주면서 주문하였더니 매번 원하는 음식을 순조롭게 먹을 수 있었다. 가게 주인은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외국인에게 늘 인내심 있고 우호적이었다. 인천에 온 후 처음 몇 주는 일부러 차이나타운에 가서 익숙한 중국어를 구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 이국 타향에서 친숙한 언어로 속 시원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 너무도 익숙했던 일상이 너무나 평범하지 않은 하루가 되는 날들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늘 공간과 영역이다.
인천 중구에 도착한 다음 날, 나는 지도를 보면서 월미도까지 걸어갔다. 가장 먼저 8번 부두를 지났다. 그곳은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담벼락을 따라 거닐며 철조망 구멍 사이로 안을 들여다볼 때 수많은 철근과 컨테이너들, 그리고 대형 구조물들과 선박들을 얼핏 볼 수 있다. 바닷가 쪽으로 향하여 가다 보면 테마파크가 있다. 산업 중심지에서 갑자기 웃음이 넘치는 레저 장소를 만나면 교통혼잡이나 업무가 주는 긴장감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쾌활함이라는 “바다”의 두 얼굴을 보는 것 같다. 바다에 도착하면 탁 트인 시야가 세상 곳곳을 이어주며 집합과 확산의 연속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특히 나의 감정과 기억을 연결해준다. 대만에 있는 내 집은 바닷가 쪽에 자리하고 있어 나에게 바다는 함께 성장하던 익숙한 곳이고 친절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다.

語文的障礙,也逐漸自我產生一個生存模式。
對於韓文是完全的陌生,在辨識文字上,我只能將韓字看成符號的構成,無法理解,對於這點,在剛開始生活的時候還有些不適,卻也形成一些小樂趣,尤其在用餐的時間,走在充斥著韓文招牌街道上,聞著菜香,起初開始觀察店裡的陳設、器皿,再來是客人用餐的情況,大概都可以知道店裡頭是在賣什麼樣的食物,但點餐又是另一回事,我只能先從店外有貼上餐點圖片的店家進行嘗試,先用手機拍下圖片,進到餐館時秀給店家看,我想點哪一道菜,每次都順利用餐,而店家對於不會說韓文的客人總是很有耐心、友善。剛來到仁川的前幾週,有時會往中國城的餐館跑,能使用中文在異地進行交流,以自己熟悉的語言對談,反 而是一種難忘的體驗,以往的日常變得很不日常。

當進入到不熟悉的環境中,最初的第一印象總是空間場域
抵達仁川中區的第二天,我按著地圖的指示,徒步走到了月尾島,先經過了8號碼頭,這是一個禁止一般民眾進入的地方,只能沿著鐵絲網圍成的牆面繼續往下走,沿途只能透過鐵絲網的孔洞往裡頭窺視,裡面的風景是以數量龐大的鋼筋與貨櫃堆疊而成,還有大型機具與船隻。抵達海岸之前,有一個主題樂園,對於這兩個場景的觀看經驗,從工業重地,突然跳脫到一個充滿歡樂聲的休閒場所,可以清楚得體現到’’海’’給人們的兩個面相,關於交通、事務的嚴謹與充滿歡樂的寄託。到達海邊,望著遼闊的視界,才會發覺到海洋是共享的,它有強大的連結性能連接每個地方,是一個聚集與擴散的中心,更重要的是它連接了感情與記憶,我的部分,在台灣的家靠近海邊,所以海一直是我從小大到大習慣的場域,在這裡讓我倍感親切、安心。

항구는 인천 중구 도시화의 시작점이다. 개항 후, 중구는 두 팔 벌려 경제와 교통의 변혁을 받아들이고 사면팔방에서 흘러 들어오는 문화에 힘입어 오늘날 다양한 거리 풍경을 이루었다. 몇 십년 동안 주민들이 발전시킨 인문문화의 모습이다. 낯선 곳을 가까이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은 거리를 거닐며 건축물이나 풍물에 반영된 모든 가능성과 시간, 사건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주민들의 삶 속에 녹아 있거나 등한시하여 방치한 풍물들이다. 이미 주민들의 일상과 하나가 된 풍물이나 건축물들은 외부인인 나에게 중구를 알 수 있는 매력적인 정보가 되고 창작의 소재가 된다. 나는 늘 카메라, 자, 노트와 펜을 챙겨서 거리에 나선다. 그리고 관찰한 풍물의 크기, 색깔, 재질 등에 관한 정보를 상세히 기록한다. 이들은 나의 창작에 도움이 되고 언젠가 창작을 위해. 모방작품을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港口也就是造就仁川中區城市樣貌的起點,因為開港後,中區成為一個張開雙手的城市,經濟、交通的變革外,最重要的是來自四海的文化力量的進駐,成就現今有著多樣街道景觀的地區風格,這些都是幾十年來居民發展起來的人文樣貌。所以熟悉一個地方最直接的方式是走進街道,觀察建設中物件的任何可能,從中看的到的是時間、事件的痕跡。而我所關注的是那些早已融入居民生活中,又或是早已被居民忽略而閒置的物件,由於這些物件(包括建築的一部分)早已是居民日常生活的,對於外來的我來說,這些都是帶領我認識中區的資訊,是非常有魅力的。這些物件也將成為我的創作題材,我總是會帶著相機、尺、紙筆走上街道 盡量詳細的紀錄著我在街上所觀察到物件的資料,包括尺寸、顏色與材質,蒐集這些資料有助於執行我的創作計畫,將這些物件仿製出來。

 

처음 인천 중구에 왔을 때는 공간분포를 알아볼 수 있게 도와주는 지도가 있어야,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차츰 지역의 삶에 익숙해지면서 방향감각과 신체적인 본능에 따라 거리를 거닐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도시의 면모와 가게, 문방구, 철물점, 맛집들을 알게 되었다. 아무런 계획 없이 거닐다 보니 지역의 경이로움과 특색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창작에 필요한 재료를 구매할 가게와 음식점 이름들을 메모하고 나만의 생활공간을 구축하기 위한 코스를 정하여 차츰 나만의 길로 다니기 시작했다. 삶은 점차 흥미로워졌고, 목적에 따라 재료를 얻고, 식사하며, 일상용품을 살 수 있는 노선들이 지도의 공간분포와 상관없이 정해지면서, 이곳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길 찾기에 집중할 필요가 없게 되자 길에서 눈에 띄는 물건이나 건축물을 더욱 눈여겨 보고 대만에서 본 비슷한 풍경과 다른 점을 찾는 등 사색의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一開始來到仁川中區,皆需透過地圖的指引才能到達每一個想去地方,這時還須倚賴這種空間性分布的地圖,而當逐漸融入到地方生活後,嘗試靠著方向感,與身體的本能擅自在地區隨意的走動,這也讓我無意間偶遇到一些城市樣貌與店家:幾間美術社(文具店)、五金行與好吃的餐廳。在沒有任何打算的情況下閒晃著,更能發現地區的驚奇與特色,。在這些經驗後 ,記錄下一些對於我之後創作所需的採買店家與餐廳,開始築出了幾條只屬於我的生活路徑,這幾條路徑是脫離空間分布的,只服務我個人生活的一切所需才漸漸走出來的路,這變得非常有趣,我開始依目的性:材料取得、吃飯、購買日常用品、運動….等路線,去記憶這些路線,好像真正開始在這邊生活。當心思不在費於找路時,途中就能將專注力放置在觀察路上的物件與建築上的裝飾,去體會這些物件與我在台灣看到的差別是什麼。

글 · 사진/
Liao Chao-H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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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바다, 나의 그랜드투어

황토빛 아시아

“아시아 대륙의 끝이라고?”
말레이시아 친구 제이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싱가포르가 아니고?”
제이슨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재차 묻는다.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제이슨에게 말했다.
‘싱가포르는 섬이잖아, 섬!

제이슨과 말레이반도 최남단 탄중피아이(Tanjung Piai)에 가는 날이다. 대륙의 끝에 간다는 비장한 마음도 잠시, 그의 차를 타고 조호바루에서 80km를 달려 너무나 편안하게 탄중피아이에 도착했다. 문득 지난겨울에 갔던 유럽대륙의 끝이라 알려진 포르투갈 호카곶(Cabo da Roca)이 떠오른다. 이때도 관광버스를 타고 편안하게 도착했었지….피식 웃음이 난다. 대륙의 끝, 세상의 끝일지도 모르는 곳에 가는데, 이렇게 쉽게 가도 되는지 마음이 어수선하다. 엄청난 바람이 몰아치던 호카곶과는 다르게 탄중피아이는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고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외국인은 20링깃, 현지인은 5링깃이라는 입장료 때문일까? 국립공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방에 떨어진 쓰레기와 조악한 조형물이 신경을 거슬린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나무다리에서 카메라를 들고 경주하듯 걷는다. 빨리 건너가서 일단 좀 앉고 싶은 마음뿐이다.

탄중피아이 조형물

바다를 향해 뻗은 나무다리

우리에겐 아시아 대륙의 끝이지만, 과거 유럽인들에겐 아시아 식민지배의 관문, 새로운 대륙의 시작이었을 탄중피아이에 드디어 도착했는데 왠지 좀 시시한 것 같아 기운이 빠진다. 대륙의 끝 혹은 시작, 어쩌면 세상의 끝과 시작이라는 낭만적인 감상에 빠지기엔 팔토시를 입고 소리치는 제이슨과 버려진 쓰레기들이 자꾸 나의 감상을 방해하기 때문일까? 문득 꼼지락거리는 다리 달린 물고기 비슷한 것이 시선을 잡아끈다. 물고기도 아닌 것이 육지 동물도 아닌 것이 지느러미 같은 다리로 빠르게 진흙 위를 걸어 다닌다. 말뚝 망둥(mudskipper)이다. 말뚝망둥이는 360도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고 한다. 이런, 온 사방을 다 볼 수 있으면 앞으로 걸어야 하나 뒤로 걸어야 하나…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눈을 가진 이 망둥이는 어쩌다 진흙 속에서 살게 되었을까? 잠시나마 이들처럼 전지전능한 눈이 달리면 어떨까 하는 짜릿한 상상에 빠진다. 주변엔 거대한 뿌리를 가진 맹그로브(mangrove) 나무가 가득하다. 나무 몸통의 옆 가지가 주욱 뻗어 나가 뿌리로 합쳐진다. 이 나무들은 옆의 나무뿌리와 얽히고 또 그 옆의 나무뿌리와 합쳐진다. 맹그로브 나무는 이렇게 옆의 나무뿌리와 얽히고설켜 쓰나미를 막는 역할을 한다. 중생대 백악기 말기부터 존재했다고 하니 이들은 공룡이 왜 사라졌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맹그로브 나무

말뚝망둥이

탄중피아이의 바다는 황토빛이다. 작년 겨울 유럽대륙의 끝이라 불리는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본 검푸른 대서양 바다와는 영 다르다. 누런 황토 바다가 눈앞에서 넘실거린다. 호카곶처럼 세상의 끝이라면 떠올릴 법한 가파른 절벽, 혹은 거대한 파도가 휘몰아치는 깊은 푸른색의 바다가 아니다. 아시아 대륙의 끝에서 만난 바다는 탁한 황토빛이다. 거센 바람 대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쬔다. 전망대 바닥엔 친절하게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방향을 표시한 화살표가 붙어있다. 끝, 종착지가 아니라 경유지 같다. 바다 곳곳엔 엄청난 기계 소음을 낼법한 거대한 배가 유유히 떠다닌다. 게다가 그 옆에는 커다란 건설현장도 보인다. 수백 년 전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이 거친 대서양을 건너 말라카 해협을 따라 탄중피아이에 도착했을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에게 탄중피아이는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으로 갈 수 있는 동남아의 관문이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대륙의 발견, 곧 식민시대의 시작이 바로 이곳 탄중피아이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탄중피아이의 황토빛 바다

거대한 배가 떠있던 탄중피아이의 황토빛 바다

나에게 탄중피아이는 대륙의 시작과 끝이라기보다 경계의 장소, 처음과 끝으로 가기 전 잠시 머물다 가는 곳으로 느껴진다. 땅과 하늘 사이, 바다와 육지 사이, 그 어딘가의 공간에선 황토 빛 바다가 출렁인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서 자라는 맹그로브 나무, 서로의 뿌리를 얽히고설켜 거대한 쓰나미를 막는 맹그로브 나무에서 함께 역경을 헤쳐가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신비한 맹그로브 나무와 말뚝망둥이, 대륙의 끝에서 만난 또 다른 건설 현장, 살이 타들어 갈듯한 뜨거운 날씨, 황토빛 바다, 숨어있는 원숭이들, 여기저기 버려진 쓰레기들, 이곳은 마치 신비하고 영험한 장소 같으면서 또 혼란스러운 현실 세계다. 과거나 미래로의 공상에 빠지기엔 눈앞의 어지러운 현실이 자꾸 나를 붙잡는다. 난 지금 어디에 서 있나. 말레이시아의 끝인가 시작인가, 싱가포르의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인도네시아의 위인가 아래인가.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땅 위인가 바다 위인가. 혼란스러운 이곳이 마치 아시아의 얼굴, 어쩌면 우리 모두의 얼굴처럼 느껴진다.

전망대 바닥에 붙어있던 방향표시

탄중피아이에 도착한 수백 년 전 유럽인들을 떠올리니 시간은 어느새 그들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간다. 거대한 바람과 파도가 휘몰아쳤던 유럽대륙의 끝, 포르투갈 호카곶으로 다시 돌아간다.


검푸른 유럽

우르릉 쾅쾅, 샤아아아~

파도 소리가 마치 천둥번개처럼 요란하다.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소리에 덜컥 겁이 난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데다 바람까지 불어 꼴이 말이 아니다. 타박타박 바다를 향해 걷는다. 하필 오늘따라 운동화가 아닌 단화를 신고 나와 산길을 걷기가 영 불편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탁 트인 절벽 아래로 대서양이 펼쳐진다. 구름 틈새로 빠져나온 빛이 바다에 툭 떨어진다. 빛이 떨어진 바다가 하얗게 반짝인다. 하얀 바다를 본 적이 있었나… 반짝이는 하얀 바다는 계속해서 점점 더 넓어진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지 거대한 대서양 어딘가에서부터 밀려오는 파도가 이상하리만큼 천천히 움직인다. 모든 게 가짜 같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포르투갈인들이 말하는 ‘사우다테(슬픔)’가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나는, 내 인생은, 우리는, 저 바닷속으로 모두 사라져버리는 게 아닌가. 대항해 시절 포르투갈인들은 이 거대한 바다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시절 그들이 바라본 바다는 한번 떠나면 돌아올 수 없는 세계가 아니었을까? 저 수평선 넘어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길래 무모하리만큼 용감한 항해를 시작했을까? 그들에겐 정말 이곳이 세상의 끝이었을까? 끝이었기에 시작을 향해 나아간 걸까?

포르투갈 호카곶

호카곶에서 바라본 바다

사실 이곳이 ‘세상의 끝’이라는 말은 참 자기중심적이다. 이곳은 유럽대륙의 최 서쪽이라는 이유로 세상의 끝이라고 알려졌다. 또한 포르투갈의 시인 카몽이스(Camoes)는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Aqui Ondi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ca)’이라 말한 곳으로 매우 유명하다.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든다. 심지어 버스를 타면 친절하게 ‘세상의 끝’ 바로 앞까지 데려다준다. ‘세상의 끝’이라는 말에 너무 큰 환상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자기를 중심으로 정한 끝이 아닌가. 그들이 정한 시작과 끝. 그리고 내가 정한 시작과 끝, 결국엔 내가 가는 곳, 우리가 가는 모든 곳이 각자의 시작이자 끝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곳은 과연 나에게 끝일까? 아니라면 과연 그곳에 언제 갈 수 있을까?

포르투갈에서 바라본 다양한 수평선

포르투갈에서 바라본 다양한 수평선

나에게 이곳은 거대한 대서양 바다를 만난 곳, 바다 넘어 다른 세상을 상상하게 한 곳, 하얀 바다를 본 곳, 무거운 파도를 느낀 곳, 그리고 리스본에 머무는 동안 한 번도 생각지 못한 포르투갈인들의 ‘사우다테’를 느낀 곳이다. 세상의 끝, 포르투갈 호카곶을 다녀와 2018년 세마(SeMa) 창고 개인전에서 선보인 드로잉 시리즈 ‘수평면 환상’의 일부를 소개한다.

이승연, 수평면 환상(14개의 드로잉 시리즈), 28x28cm, 펜드로잉, 2018
세상 끝에 도착하니 수평선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수평선이 아니라 수평면이다.

내게 이곳은 세상의 끝, 누군가에겐 세상의 시작, 누군가에겐 오줌싸는 곳, 물론 나도 덤불속에

2018 세마창고 개인전 설치사진

우연일지 필연일지 2년에 걸쳐 아시아 대륙의 끝과 유럽대륙의 끝을 가볼 수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황토빛 바다와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의 여정은 다시 아시아로 돌아간다. 시간은 다시 호카곶에서 말라카로 넘어간다. 수백 년 전 포르투갈인들이 폭퐁 같은 이 대서양 바다를 건너 도착한 말라카 해협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바다 위를 걷다

바다 위를 걷는다. 바다 위에서 뛰기도 하고 음식도 먹고 커피도 마신다. 게다가 공연도 보고 수영도 하고 잠도 잔다.
우연히 크루즈를 타게 되었다. 망망대해 바다에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싱가포르에서 출발하는 겐팅 드림 크루즈다. 말레이반도를 따라 피낭, 푸켓, 랑카위, 포트클랑, 6일간 4개의 기항지, 싱가포르, 태국, 말레이시아 3개국을 지나가는 여정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다섯 밤을 잔다니…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탄 겐팅드림호가 지나갈 말레이 해협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본 대항해 시대를 기념한 동상의 주인공들이 지나간 길과 겹치기도 한다. 몇백년 전 그들이 지나간 바닷길을 직접 지나간다고 하니 기분이 묘하다. 호카곶에서 바라봤던 거대한 대서양 바다가 떠오른다. 지구가 터질듯한 엄청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눈앞의 바다를 건너기로 결심했던 포르투갈인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 옛날, 이 망망대해를 배 타고 몇 달을 걸쳐 항해해왔던 사실이 한편 경이롭다. 그들이 탄 배는 지금처럼 호화롭지도, 튼튼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바다를 건너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을까? 거대한 배에 잠시 탔다고 탐욕스러운 식민주의자들의 감정을 헤아리는 내 모습이 놀랍다. 한편 이들이 대서양 바다를 건너와 첫 식민지로 삼은 말라카 말레이인들의 심정도 동시에 떠오른다.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 영국, 일본까지 말라카 해협을 통해 들어온 이들에게 식민지배를 받아야 했던 그 당시 말레이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포르투갈에서 본 대항해 시대 동상

겐팅드림크루즈

오늘날 말라카 해협은 세계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항로이다. 이곳을 지나지 않고 우회하면 3일이 더 걸리기 때문이다. 전 세계 선박이 실어 나르는 화물의 ¼정도가 이곳을 지나간다고 하니 현대의 실크로드로 불릴만하다. 실크로드이지만 동시에 해적 출몰이 전 세계에서 가장 번번한 곳 역시 말라카 해협이라고 한다. 수심이 얕아 배가 천천히 지나가기 때문이다.
어쨌든 크루즈에서 보내는 3일째, 크루즈 안 시간은 바깥세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어제 내린 기항지 태국 푸켓은 싱가포르보다 한 시간이 느리다. 다만 크루즈 안에서의 시간은 출발지인 싱가포르 시각을 따르기에 배에서 나오는 순간, 한 시간을 버는 셈이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다 보니 디지털 핸드폰 시계는 계속 오류가 난다. 전자시계는 믿을 수 없기에 아날로그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다. 초호화 배를 타고 3000여명의 승객이 여행하는 거대한 배이지만 바다 한가운데서, 어쩌면 지구 한가운데서 전자기기는 아무런 힘을 못 쓴다.
이곳에선 3000여명, 30여 개국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는데 웨스턴, 아시아, 하랄, 인디언 음식까지 정말 다양하다. 한쪽에선 인디언 가족이 손으로 카레를 먹고, 다른 한쪽에선 히잡을 쓴 이슬람 여인들이 하랄 뷔페 앞에 줄을 선다. 또 다른 한쪽에선 싱가포르, 혹은 홍콩 관광객들이 아이들과 함께 접시를 여러 개 쌓아놓고 식사를 한다. 아침부터 요가, 시네마, 모노폴리부터 각종 게임, 수영장, 스파, 저녁엔 공연과 주크클럽 등 크루즈 안은 잠시도 한가할 시간이 없다. 크루즈는 부유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조용히 여행하는 거라 생각했다. 비싸고 심심하고 느린 여행이 내 머릿속 크루즈였다. 실제 와본 크루즈는 내 상상과는 반대의 세계다. 크루즈를 타기 전엔 말레이반도를 따라 항해하는 2200킬로의 거대한 여정과 이 길에 얽힌 이야기를 상상했다. 크루즈는 별세계다. 거대한 역사적 사실을 되새기며 상념에 빠지기엔 크루즈 안은 너무 바쁘다.

크루즈 내부

그러나 움직이는 바다를 보고, 움직이는 수평선을 보고, 힘차게 나아가는 뱃길을 보니 바다가 더는 쓸쓸히 바라만 보는 곳이 아니라고 느낀다. 선미에 서서 바다에 새겨졌다 사라지는 거대한 뱃길을 바라보는 건 이곳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바다 위에선 금방 사라져 버리는 이 뱃길처럼 우리는 매 순간을 붙잡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가? 크루즈 안에선 1분 1초가 바쁘다. 그런데도 매 순간에 뱃길처럼 계속 사라진다.

선미에서 바라본 뱃길


전진하는 지구

크루즈는 움직이는 지구 같다. 단 매일 자전하는 지구가 아닌 매일 전진하는 지구다. 지구가 매일 한 바퀴씩 도는 걸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크루즈 안에선 배가 움직이는지 잘 알지 못한다. 바다에는 수많은 길이 숨어있다. 바다에 들어와 바다를 바라보니 반짝이는 바닷길이 보인다. 햇빛이 바다를 내리쬐는 찰나의 순간 바다엔 길이 난다. 때로는 배가 지나갈 만큼 넓게, 때로는 가느다란 실처럼, 때로는 미로처럼 바다에 길이 생긴다. 빛이 사라지면 길도 사라진다.

햇빛이 만든 바닷길

햇빛이 만든 바닷길

바다에는 움직여야만 보이는 길도 있다. 양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다. 배가 나아갈 때 선미에 서면 바닷길이 갈라지며 생기는 마술 같은 길을 볼 수 있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바닷길이 갈라지며 길을 만든다. 움직이지 않으면 길은 곧 사라진다. 작년 겨울 포르투갈 라고스에서 지내며 바라본 검푸른 대서양 바다에선 길을 보지 못했다. 바다 밖에서 바라본 바다는 쓸쓸했다. 눈앞의 파도보다 저 멀리 갈 수 없는 수평선을 바라봤다. 존재하지 않는 수평선, 수평면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고 그렸다. 아마 영원히 갈 수 없는 곳이기에 수평면을 바라보며 본 환상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시아 탄중피아이에서 바라본 바다는 황토빛이었다. 세상 끝 어수선한 모습에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대륙의 끝, 세상의 끝이 아니라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한 기항지처럼 느껴졌다.
이번 겨울 말라카 해협에 들어와 바라본 바다에선 더는 수평선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곳에선 매일 바다 위에서 길을 찾는다. 매일 아침 문득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마법 같은 길이 나타나길 기다린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 길을 기록하기 위해 배 안을 바쁘게 걸어 다닌다. 거대한 바다에, 거대한 지구에 잠시 흔적을 남겼다 사라지는 이 길은 결국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마법처럼 나타났다가 곧 사라져버리는 이 길처럼 내 찰나의 순간도 빛이 나길 꿈꾼다.

말라카 해협을 항해하는 여러 배들이 만든 작은 바닷길

말라카 해협을 항해하는 여러 배들이 만든 작은 바닷길

글 / 이승연
사진 / 저기요 스튜디오

이승연(Seung youn LEE)
고대사와 신화, 또는 상상의 극한을 보여 주는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고대’라는 재료를 갖고 미래를 얘기한다. 최근에는 물리학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드로잉을 기반으로 철과 나무, 패브릭,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작업한다. 2012년에서 2017년까지 영국인 알렉산더와 ‘더 바이트 백 무브먼트’ 아티스트 듀오로 활동했다. 당시의 신화적·종교적·사회적 관심은 개인작업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영국 서머싯 하우스, 국립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 문화역서울 284, 영은 미술관, 켄 파운데이션, 베를린 ZK/U, 등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처럼 영원히 남을 작업을 꿈꾼다.

페이스북: (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내가 만난 ‘빠빠라기(하늘을 찢고 온 사람)’

완벽한 인공도시

“이렇게 멋진 집에서 산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너무 행복해요!”
“꿈을 드디어 이루었어요”

거대한 스크린에선 행복에 흠뻑 취한 사람들이 계속 등장한다. 이들에게 세상은 완벽하고 아름답다. 꿈꾸던 행복을 금방이라도 잡을 것만 같다. 집을 구경하라며 여기저기서 웃으며 손짓하는 사람들을 지나 일단 화장실로 도망친다.
이곳은 조호바루(Johor Bahru)의 포리스트 시티(Forest City)다. 포리스트 시티?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땐 숲이 가득한 자연 친화적인 에코 도시로 생각했다. 오늘 아침 머물고 있던 마사이 지역에서 그랩(말레이시아 콜택시)을 타고 40분을 달려 포리스트 시티에 도착했다. 기대를 안고 중앙 건물로 들어선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로비에 설치된 도시 모형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아파트와 콘도가 즐비하다. 게다가 여러 건물엔 새빨간 SOLD OUT 스티커가 붙었다. 물론 거대한 아파트와 콘도가 들어선 도시 모습이 낯선 건 아니다.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는 한국 신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설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리스트 시티’의 도시계획은 규모부터 남다르다. 아니 도시 계획이라기보단 마치 새로운 국가 건설처럼 느껴진다. 촘촘하게 들어선 높디높은 건물들, 쇼핑몰, 국제학교, 그리고 도시 조경까지 완벽하게 계획된 모습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이 건설된 땅조차 거대한 바다를 메워 만들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말레이시아 조호 술탄은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목적으로 바다를 메꿔 아파트와 콘도, 빌라 등 새로운 고급 주거지역을 건설하고 이를 외국인에게 팔고 있다고 한다. 이곳의 아파트 가격은 평범한 말레이인들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비싸다. 물론 많은 말레이인이 이에 반대했었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자기 나라에 들어와 자신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호화 아파트를 짓고 이들만의 삶을 따로 건설해 사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한편에는 이들이 조호바루에 돈을 투자해 경제가 활성화되는 걸 환영하는 사람들도 많다.

‘포리스트 시티’ 도시 모형

포리스트 시티 아파트들

‘포리스트 시티’의 가장 큰 고객은 중국인이다. 중국계 말레이인이 아닌 중국본토에서 온 중국인들이다. 한국인들도 10% 정도 된다고 한다. 이곳에는 국제학교도 많다. 방금 구경한 모델하우스는 더욱 이상하다. 부엌에는 플라스틱 음식 모형에 인조 꽃, 그리고 말레이시아에서 머물며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수입 토마토 깡통 수프, 이태리 요리책이 펼쳐져 있다. 테이블 장식 또한 굉장히 가식적이다. 테이블엔 묵직한 접시 중 냅킨, 양초와 꽃병이 놓여져있고 물론 포크와 나이트가 함께 세팅되어있다. 더욱더 놀라운 건 ‘포리스트 시티’에선 집을 살 때 모델하우스에 전시된 소파, 티비, 세탁기, 장식장 등 모든 가구를 함께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오는 사람들은 각자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 오면 된다. 번거롭게 가구를 사고 집을 가꾸는 데 노력을 하는 대신 돈만 내면 편하게 모델 하우스 같은 집에 들어가 살게 되는 것이다.

 
조호바루에 건설되는 신도시 모델 하우스 장식 중

누군가에 의해 완벽하게 설계된, 완벽하게 장식된 곳에서 모두가 똑같은 삶을 산다고 상상하니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이건 초호화 감옥이 아닌가. 누군가 만들어준 공간에 편하게 몸만 들어가 서 살면 되는 곳,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수많은 아시아인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또 씁쓸했다.
‘포리스트 시티’는 말레이시아지만 싱가포르에서 얼마나 가까운지 끊임없이 광고한다. 말레이시아보다 싱가포르가 훨씬 커다랗게 그려진 지도에선 이곳이 싱가포르인지 말레이시아인지 헷갈린다. 또한 ‘포레스트 시티는 싱가포르보다 얼마나 저렴하게 집을 살 수 있는지 끊임없이 광고한다. 도대체 이곳 사람들은 왜 이렇게 싱가포르에 집착할까? 조호바루를 단지 싱가포르에 붙어있는 도시로밖에 말할 수 없는 걸까? 그뿐만 아니라, 이곳엔 국제학교가 있어 아이들 교육에도 적합하다며 아이를 둔 가족들을 유혹한다. 나로선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수많은 광고를 보며 도대체 이곳 사람들이 생각하는 조호바루의 정체성이 무엇일지 의문이 들었다. 한편으론 아시아인들의 서구를 향한 왜곡된 열망을 적나라하게 보는 듯해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도대체 서구 문명이란 무엇이길래 말레이시아인들에겐 어색한 나이프와 포크, 이태리 요리책과 토마토 캔으로 우스꽝스럽게 집을 장식해야 하는지, 왜 국제학교에 이토록 목을 매는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일하고 놀아야 하는지, 무엇이 과연 올바른 가치인지, 수많은 감정이 오고 갔다.

싱가포르가 훨씬 커다랗게 그려진 말레이시아 조호바루 지도

한편 이런 혼란스러운 감정 한가운데서도 이렇게 예쁜 집을 내 취향대로 가꾸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는 내 모습도 있었다. 이곳이라면 한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좋은 집을 저렴하게 살 뿐만 아니라 풍요롭고 여유롭게 지낼 수 있으니 마음이 흔들린다. 무엇보다 집 가격이 한국보다 너무나 저렴했고 광고처럼 싱가포르까지 40km, 30분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가 무척 매력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끊임없이 소리치는 것처럼 싱가폴에서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널찍하고 조용한 조호바로에 집을 짓고 사는 상상을 하니 또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치는 반나절을 보내고 나니 배가 너무 고팠다. 결국 우리나라의 수제비 같은 미 훈 꾸웨(mee hun kueh)를 허겁지겁 먹고 배탈이 나버렸다.
기이하고 완벽한 인공도시, 내가 느낀 포리스트 시티의 모습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타박만 하기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안락한 삶의 욕망을 무의미하게 넘겨버릴 수 없다. 포리스트 시티에서 서구 문명을 향한 아시아인의 욕망을 마주하니 작년 겨울 모로코(Morocco) 북부 물레이 이드레스(Moulay Idris) 에서 만난 한 영국 여인이 떠오른다.

모로코에서 만난 붉은 머리 영국여인

모로코 물레이 이드레스에서 만난 중년의 붉은 머리 영국 여인, 그녀는 모로코를 사랑했다. 그녀는 물레 이드레스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곳이라 끝없이 찬양했다. 물론 물레 이드레스로 가는 길은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할 정도로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나 순수하다니…? 이들의 거칠지만 천진할 정도로 뻔뻔한 모습, 다른 면의 순수함(?)을 이야기 하는 건가?
숙소에서 처음 만난 그녀와 점심을 함께 하기로 하고 카페로 갔다. 그녀는 모로코 남자들만 앉아 있던 카페에서 혼자 나를 기다렸다. 그곳에 있던 유일한 백인 여자이다. 물론 이슬람인이 아닌 그녀가 카페에 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슬람 남자들만 있는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며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이곳의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레이 이드레스로 향하는 길목

물레이 이드레스 골목 길

그녀는 모로코 사람들이 너무나 순수하며 도시가 자유로운 영혼으로 가득 차 있다고 거듭 말했다. 자신이 조금만 젊었다면 이곳의 남자와 데이트를 했을 거라 아쉬워했다. 하긴 영국에서 짧지 않은 유학 생활을 보내고 여러 유럽인과 작업을 하며 만나 온 그들을 생각하니 그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난 종종 영국인들의 친절을 퍼포먼스형 친절이라 놀리곤 했다. 사람들 앞에선 맛이 없어도 맛있는 척, 반갑지 않아도 반가운 척, 원하지 않아도 원하는 척,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엔 이 모든 걸 거추장스러워하는, 다 내려놓고 편하게 지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사회적 압박감이 있다고 느꼈다. 물론 모든 사회에서 공공예절이란 게 있지만, 특히나 영국에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예의 바르고 유머러스하고 어색하지 않게 끊임없이 대화를 유도하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부담이 크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런 그들이 모로코에선 완전히 다른 상황에 마주한다. 사람들은 대놓고 보이는 거짓말을 하며 대가를 바란다. 열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귀찮을 정도로 정도로 말을 시킨다. 동시에 친절하게 짐을 들어주고 택시 잡는 걸 도와준다. 이국적인 음식이 넘치고 쓰레기는 사방에 널려있다. 당나귀와 사람, 오토바이가 함께 섞여 다닌다. 거리는 거칠고 시끄럽고 온갖 냄새로 진동한다. 그러나 동시에 눈이 부시게 찬란한 자연을 보며 이곳이 순수하고 자유롭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처음엔 거친 모로코 거리가 매우 설렜다.

아름다운 물레이 이드레스 풍경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난 답답하고 불편해졌다. 그녀는 모로코가 더 발전되지 않고(그녀의 말에 따르면 망가지지 않고) 이 순수한 풍경을 계속 지켜졌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말했다. 왜? 왜 많은 모로코인이 오래된 집을 좀 더 현대적으로 고치면 안되는거지? 왜 더는 항구가 생기면 안 되는 거지? 어린 아이들이 종일 길에 앉아 물건을 팔지 않아도 되고, 더 관광객들에게 처절하리만큼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나라로 변모해야 하는 거 아닌가? 좀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좀 더 국제적인 매너를 갖춘 현대화된 모로코는 왜 안 되는 거지? 모로코도 가난을 벗어나고 발전해 나가야 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그녀는 영국인이지만 프랑스어를 잘 구사하고 유럽의 여러 문화를 즐겨왔다. 깨끗한 집에 살며, 좋은 음식을 먹는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멋있게 산다. 물론 몇 달씩 일을 안 하고 모로코에서 지내도 될 만큼 여유롭기도 하다. 그녀는 유럽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모로코에선 또 유럽과는 다른 순수하고 거친 자유를 맛 보고 싶어 한다. 그녀에게 모로코는 유럽처럼 국제적으로 발전되어서도 안 되고 , 항구에 무역항이 생겨 바다를 망가트려서도 안 되고, 있는 그대로,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아니 지금보다 더 순수했던 십여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녀와 친하게 지내는 모로코 남자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평소보다 비싼 가격을 주고 음식을 먹었다. 그녀는 친절한 그들에게 계속 고마워했다. 외로워 보였고 내 마음은 쓸쓸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처음으로 버스를 탔다. 한 시간 여 만에 도착한 버스엔 사람들이 아귀다툼으로 몰려들었다. 난 그들 사이에 껴서 거의 압사당할 뻔했다. 심지어 버스에는 모두가 다 앉아서 갈 수 있을만큼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왜 이렇게 아수라장이 되어야 하는지, 왜 이렇게 밀쳐야만하고 왜 모든게 어수선해야만 하는지..매일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상상하니 가슴이 답답해 터질것 같았다.

물레이 이드레스에서 탄 버스안

“이곳은 ‘문명화’ 되지 않아 순수하네.”
중국을 여행한 프랑스 친구가 농담처럼 했던 말이다.
“우와 여기는 꽤 문명화됐는걸?”

역시 태국을 여행한 영국 친구가 한 말이다. 난 그들이 이런 식으로 식민지배의 당위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버럭 화를 냈었다. 그러나 모로코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난 이들의 뻔뻔한 거짓말에 지쳤고 아수라장이 된 거리 모습을 보며 ‘문명화’란 단어에 어느 정도 공감하기 시작했다. 이런 내가 잘못된 걸까? 단지 문화 차이인 걸까? 문명, 문명화(Civilization)란 과연 뭘까? 과연 적절한 단어일까? 문명화란 단어를 생각하다 보니 시간은 이제 지난겨울에 다녀온 말레이시아 말라카로 넘어간다.

아름다웠던 물레 이드레스 풍경을 걸으며

말라카의 식민주의 그림자

말라카에선 길을 걷는 게 즐겁다. 오래된 유럽식 건물에 쓰인 한자가 꽤 이국적이다. 붉은 등 아래를 장만옥이 유유히 걸어오는 상상에 빠진다. 유럽의 뒷골목을 걷는 듯, 차이나타운을 걷는 듯, 그저 길을 걷는 게 즐겁다.

말라카 거리를 걸으며

붉은 등이 걸린 말라카 거리

말라카를 칭하는 수많은 수식어 중 ‘아시아 최초의 유럽 식민지’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16세기부터 시작된 포르투갈 침입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다시 일본까지 400여 년에 이르는 식민역사를 보고 있자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 때문에 말라카가 유명한 관광도시가 된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전 세계에서 이 침략의 흔적(?)을 찾아 말라카를 방문한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통치 시절 유적들은 인기 있는 관광상품이다. 포르투갈인들이 지은 성곽 ‘에이 파모사(A’ Famosa)’와, 세인트 폴 성당, 그리고 네덜란드 광장엔 항상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말라카에 들어오고 나서 그 후에 네덜란드인과 전투를 하고 또 영국인들이 들어와 어떤 일이 일어났고, 마지막으로 일본인들이 들어오고 또 어떤 일이 생겼고…수많은 이야기가 들려온다. 많은 사람이 말라카를 침략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일본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이들이 어떤 건축물을 남겼고, 어떤 일을 했고, 말라카가 왜 전략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었는지 이야기한다. 궁금했다. 기나긴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 말레이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몇 세대를 거쳐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 이들의 삶, 이들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찾기 힘들 걸까?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실감이 안 가는 건가? 종교적 관용으로, 혹은 용서의 마음으로 모든걸 잊은 걸까?

포르트갈인들이 지은 성곽 에이 파모사

1511년에 지어진 에이 파모사 성 앞에서

영국 식민지배 시절 시작된 바바뇨냐(BaBa NyoNya) 문화가 관광상품의 하나로 주목받는 점도 흥미롭다. 뇨냐는 중국인과 결혼한 말레이 여성을 칭하는 말로 중국 남성과 말레이 여성의 결합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냈다. 중국과 말레이 전통이 오묘하게 결합한 의상, 중국과 말레이 음식이 변형된 뇨냐음식은 매우 인기다. 독립운동가의 박물관은 찾기 힘들지만 바바뇨냐 박물관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처음엔 중국인 남성과 말레이 여성이 결혼해 만든 문화가 뭐가 그리 특별한 건가?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의아했다. 그런데 이런 문화가 만들어진 건 영국이 통치하던 시기였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당시에 이슬람이 국교가 아니었기에 말레이 여성이 중국인과 결혼해도 이슬람 전통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 현재 독립된 말레이시아에선 중국 남성이 말레이 여성과 결혼하면 이슬람으로 개종을 해야 한다. 말레이 여성이 이슬람을 포기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종교가 두 인종 간의 결합을 막는 셈이다. 지금 현존하는 바바뇨냐들은 아마 몇십년 후면 사라질지도 모른다. 뇨냐 여성은 말레이 여성이지만 이슬람인이 아니다. 돼지고기가 들어간 뇨냐 음식을 만들고 타이트한 뇨냐 전통 의상을 입는다. 이들의 문화가 앞으로 몇십년 후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하니 아쉬웠다. 아이러니하게 말레이시아는 식민시절에 더 자유롭고 풍요로웠다고 하면 큰 오해일까?

노냐 음식을 팔던 레스토랑

인형사이즈로 만든 뇨냐 의상

빠빠라기는 누구일까

말레이시아의 조호바로와 모로코의 물레 이드리스, 그리고 다시 말레이시아 말라카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빠빠라기(하늘을 찢고 온 사람)’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빠빠라기’는 남태평양 사모아 제도의 투이아비 추장이 유럽을 방문하고 돌아와 원주민들에게 백인 문명에 관해 이야기한 책이다. ‘빠빠라기’는 추장이 만난 백인을 칭한다. 오래전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던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부터 흰 돛배를 타고 도착한 백인들이 투이아비 추장에겐 마치 ‘하늘을 찢고 온 사람’처럼 보인 것이다. 그는 서양문명에 대해 경이감을 느꼈다기보다는 오히려 환멸과 분노를 느꼈다.

21세기를 사는 나는 과연 문명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사모아 제도의 투이아비 추장처럼 내가 사는 문명에 관해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번 겨울 조호바로의 포리스트 시티를 둘러보며 아시아인들의 서구사회를 향한 왜곡된 열망이 가득 찬 모습을 마주했다. 거대한 자본으로 포레스트 시티를 사들이고 세계 곳곳에 투자하는 중국인의 모습, 그러나 마냥 비판만 하기엔 내 마음 깊은 곳엔 나 역시 안락한 삶을 원하는 욕망을 숨길 수 없었다. 포리스트 시티의 거대한 자본에서 난 빠빠라기의 모습을 보았다. 모로코 물레이드레스에서 만난 붉은 머리 영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순수 문명이란 무엇인지, 과연 순수한 문명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래전 하늘을 찢고 사모아 섬에 도착한 빠빠라기처럼 모로코가 티 없이 순수하다고 예찬하는 그녀는 어쩌면 모로코인들에게 빠빠라기 일지 모른다. 물론 말레이시아 말라카를 침략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인들은 그 시절 말레이인들에겐 빠빠라기였다. 그러나 여전히 식민시대의 흔적이 관광 상품화되어 전 세계 관광객을 맞이하는 말라카엔 그 시절 빠빠라기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사모아 섬의 추장 투이아비가 본다면 그의 눈에는 우리가 또 하나의 빠빠라기로 비치지 않을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이미 빠빠라기가 되고 말았다.

나는 지난 2년간 틈틈이 지구 반바퀴를 둘러보았다. 사하라와 애틀란스 산맥 같은 대자연을 넘나들며 느낀 대자연과 인간의 경계, 이슬람 국가 모로코에서 난생처음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고민한 문명의 경계, 인도네시아 발리와 다민족 국가 말레이시아를 여행하며 느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통해 아시아인으로 느낀 21세기 문명과 문명화란 무엇인지 질문한다. 변화하는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21세기의 보통 사람의 모습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한다. 이는 곧 21세기 모던 아이덴티티, 그리고 역사적으로 예술가에게 주어진 가장 오래된 질문, 나는 누구인가, 곧 당신은 누구인가에 관한 나의 작업이기도 하다.

‘다른 원주민들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어린아이처럼 그저 감각과 순간 속에서 살고 있을 때 사모아의 추장 투이아비는 맑은 이성의 눈으로 자연과 인간을 그윽이 바라보고 있었다. 선교사를 통해 빠빠라기(백인, 문명인)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았고, 성년이 되어 빠빠라기들의 나라를 직접 보고 돌아온 추이아비 추장은 원주민 동포를 향해 그 이상한 나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빠빠라기>(투이아비 저) 중에서-

이승연, ‘모로코에서 만난 영국여인의 초상’, 150x150cm, 2018
모로코에 다녀와서 만든 타피스트리1

그녀의 눈에 가난하고 어지러운 모로코는 순수, 그 자체로 보인다. 그녀는 모로코가 변화 발전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모로코에 와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기로 변신했다.

이승연,’놈모의 여왕’,150x150cm, 2018
모로코에 다녀와 만든 타피스트리 작품2

아프리카의 신 놈모과 유럽여왕이 만났다. 모로코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위성 안테나는 유럽을 향한다. 아프리카는 뒤처졌고 유럽은 앞섰을까? 놈모는 아프리카의 도곤족에 등장하는 우주에서 온 신이다.

글/ 이승연
사진/ 저기요 스튜디오

이승연(Seung youn LEE)
고대사와 신화, 또는 상상의 극한을 보여 주는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고대’라는 재료를 갖고 미래를 얘기한다. 최근에는 물리학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드로잉을 기반으로 철과 나무, 패브릭,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작업한다. 2012년에서 2017년까지 영국인 알렉산더와 ‘더 바이트 백 무브먼트’ 아티스트 듀오로 활동했다. 당시의 신화적·종교적·사회적 관심은 개인작업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영국 서머싯 하우스, 국립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 문화역서울 284, 영은 미술관, 켄 파운데이션, 베를린 ZK/U, 등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처럼 영원히 남을 작업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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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線)의 환상

움직이는 산, 이슬람 여인들

아이고, 리아드(Riad)에서 나온 지 열 걸음도 못가서 질문 공세에 시달린다. 매일 아침 머무는 모로코 전통가옥인 리야드의 문을 열자마자 마주치는 풍경이다. 

“차이나? 자포네? 코레?” (‘한국사람입니다’)
“어디로 가세요?” ( ‘가는 길 알아요. 물어보지 마시라고요’)
“광장은 저쪽이에요. 저쪽” (‘난 광장에 안 간다니깐요’)

신발은 먼지와 흙으로 뒤범벅이 됐다. 말과 당나귀, 오토바이와 자전거, 마차와 자동차, 그리고 사람이 함께 뒤섞인다. 수천 개의 좁디좁은 골목이 뒤엉켜 있는 마라케시(Marrakech) 메디나 구시가지에서 구글맵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민트가 꾹꾹 눌러 담긴 알라딘에 나올법한 주전자에서 차를 따른다. 내 몸이 겨우 들어갈 만한 좁디좁은 골목도 이리저리 걷는다. 거리엔 온갖 쓰레기로 넘쳐났고 지릿내가 진동하지만 낯선 이국적인 풍경속을 걷는 게 그저 신난다. 게다가 모로코 전통복장인 젤라바(Jellaba)를 입고 전통신발을 신은 채 수염을 기른 남자들이 거리를 걸어 다닌다. 마치 중세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 하다. 특히 내 눈길을 사로 잡는 건 모로코의 이슬람 여인들이다. 길을 걷는 여성의 대부분이 머리를 감추고 있다. 젊은 여자 대부분은 히잡으로 머리만 가리고, 아이가 있는 엄마나 할머니들은 망토 같은 차도르나 눈만 빼고 얼굴을 다 가린 부르카나 니캅을 쓰고 다닌다. 종종 아이 손을 잡고 가는 니캅을 쓴 여인들을 보는데, 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리면 다들 똑같아 보여 어떻게 찾을까 싶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젤라바에서 부르카까지 온몸을 감싸고 다니는 모습이 거추장스러워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모두가 이렇게 다니니 왠지 나도 이들처럼 히잡을 멋스럽게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모로코 거리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메디나 골목   길에서 마주친 이슬람 여인들

 

이들의 모습은 꼭 움직이는 산처럼 느껴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단색으로 뒤덮은 천이 스멀스멀 움직인다. 머리와 몸을 모두 분홍색으로 휘감은 화사한 산과 온몸을 검은색으로 휘감은 어둠의 산도 보인다. 뒷모습만 보면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영락없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산이다. 이슬람 여인은 얼굴을 숨기니 수줍음이 많을 것 같다고 상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들은 니캅으로 눈만 내놓고 얼굴을 가린 채 아이를 업으면서 장사를 한다. 길가에서 외국인의 손목을 잡아끌며 헤나를 강제로 해주고 돈을 요구한다. 제마 엘프나(Jemaa El Fnaa) 광장에 있는 모자 가게 여인은 우악스럽게 내 머리에 모자를 씌웠다. 반면 우아하게 30분에 120디르함(만 이천 원)인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들도 있으며 단 돈 5디르함(오백 원) 하는 먹다 만 빵을 달라며 테이블 앞에 찾아온 작은 여자아이도 만난다.

문득 처음 아프리카 대륙에 왔다는 설레임과 함께 이슬람 국가인 모로코에서 긴 시간을 처음 보낸다는 두려움에 이들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본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사실 얼굴만 가렸을 뿐이지 사실 내게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지 않나? 그들이 부르카에 자신을 감추듯, 우리 역시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은가? 미래의 이슬람 여인들을 상상한다. 내가 상상한 이슬람 여인들은 온갖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한 부르카를 입는다. 꽃이 만발한 동산 같다. 이슬람 여인의 모습을 통해 누에 꼬치 안에 갇힌 나와 우리의 이야기를 그려본다.

움직이는 산, 이슬람의 여인들

순진한 바람

이국적인 모로코 모습에 설레던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에서 지겹도록 말을 건네는 모로코인들에 의해 지쳐 마음껏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싶어졌다. 제발 힘들게 흥정하지 않고 물건을 사며 깨끗한 곳에서 조용하게 식사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처음엔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가난하지만 집마다 모두 다른 창문과 문을 보며 화려하고 풍요롭다고 생각했다. 돌로 장식된 왕궁의 모습에 감동하며 길에서 우연히 사 먹은 양꼬치에 행복해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가는 좁은 골목에는 햇빛을 받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엔 고급스러운 리야드를 지내러 오는 관광객들이 있었다. 모로코 전통 방식으로 가죽을 다듬는 테너리(tannery)에선 구경 갈 때마다 여행객들에게 강제로 나눠주는 민트를 받아야 했다. 테너리에선 지독한 냄새가 나니 민트가 필요하다는 게 이유다. 테너리엔 맨발로 비둘기 똥을 밟아가며 가죽을 만드는 모로코인들과 이를 강제로 보여주고 설명하며 돈을 받는 또 다른 모로코인, 다른 한 쪽엔 민트를 코에 대고 얼굴을 찌푸린 채 이들을 바라보는 관광객이 있다. 고작 대여섯 살 밖에 안되는 어린아이들이 거리에 나와 크리넥스 몇 개, 쿠키 몇 개를 들고 종일 앉아 있는 모습은 흔하디흔한 모습이었다. 왜 이렇게 가난해야만 하고 왜 그렇게 처절한지. 왜 그렇게 절박해야 하며 또 왜 그렇게 질리도록 호객행위를 해야만 하는지 가슴이 답답했다. 사하라 하실라비드 마을에선 비가 내릴 때마다 진흙으로 짓는 전통 방식의 집이 쉽게 무너졌다. 과연 이렇게 적은 비에도 무너져버리는 집에 사는 방식이 옳은 것인지도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도 하루에 다섯 번 이슬람 아잔이 울릴 때마다 기도하는 모로코인을 보며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를 이해한다는 건 과연 내 순진한 바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로코 왕궁의 화려한 돌장식

전통방식으로 가죽을 만드는 모로코 테너리

사하라 하실라비드 마을의 아이들

한달 여간 지낸 모로코는 가난하지만 화려했고, 화려하지만 또 단조로웠다. 10년 후, 더 나아가서 100년 후에 모로코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움직이는 산처럼 보이던 이슬람 여인들은 여전히 같은 모습일까? 몇 백년 전 질라바와 전통 신발을 아직도 신고 다니는 모로코인들처럼 100년후에도 이 모습은 계속 지켜질까?

모던 이슬람 국가라고요?

작년 겨울 모로코에 이어 이번 겨울엔 말레이시아에 두 달여간 머물렀다. 우연히도 두 나라 모두 이슬람 국가였기에 어떻게 다를지 호기심이 생겼다. 게다가 말레이시아는 인도인과 중국인, 말레이인이 모여 사는 다민족 국가가 아닌가. 심지어 모던 이슬람 국가로 불린다고 하니 어떤 나라일지 무척 궁금했다.
말레이시아는 한 거리에 힌두사원과 모스코, 그리고 절이 공존한다. 이슬람 국가이지만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개방적인 국가다. 말레이시아에서 난 신들이 만찬을 한다면 이곳에 올 거라고 상상할 만큼 다양한 음식에 흠뻑 빠져들었다. 중국, 말레이, 인도음식을 저렴한 가격에 모두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어도 영국처럼 다민족 국가에서 보이는 문화의 다양성이 보이지 않아 의아했다.

 
말레이시아의 중국 사원   말레이시아의 다양한 음식들

말레이시아에서 인도사람이 운영하는 빵집

이들은 서로 섞이지 않으며 사는 지역도 다르다. 심지어 학교마저도 중국인과 말레이인, 인도인으로 구분해서 다닌다. 한 국가에 세 가지 교육 시스템이 있다는 게 나로선 미스테리하다. 중국인은 돼지고기를 좋아하지만, 이슬람인 말레이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리고 힌두계인 인도인은 소고기를 먹지 않는 대신 돼지고기는 먹는다. 한편 이런 다양성을 이용해 여러 음식이 발달했을 법하지만, 서로 배려할 뿐 융화하지는 않는다. 내가 바라본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J는 자기 나라임에도 소수민족의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꼭 말레이시아 땅을 조심히 빌려 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말레이시아의 인구에서 60% 차지하는 말레이인은 겉으로는 주류로써 말레이시아의 주인처럼 보인다. 심지어 나라 이름조차 말레이(말레이 족)와 시아(그리스 어로 땅)가 합쳐진 말레이의 땅 아닌가. 정부는 편파적으로 말레이인에게만 유리한 정책을 편다. 이들은 나라의 지원을 받아 집을 쉽게 살 수 있고 모든 대학시험은 이슬람어로 치러진다. 그런데도 말레이인은 경제권을 중국인에게 빼앗겨 무기력해 보인다. 정부에서 ‘깨어나라  말레이인이여’ 외친다지만 과연 이들이 쉽게 변화할까?

문명과 문명화

두 달여의 시간을 말레이시아에서 보냈지만, 여전히 뭔가 허전하다. 조호바루에선 신시가지를 만들어서 그곳에 아파트를 짓고 외국인에게 팔아 경제를 살리려고 한다지만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 도시가 과연 아파트와 쇼핑몰, 국제학교만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 조호바로의 신시가지에는 여전히 횡단보도와 인도가 보이지 않는다. 길을 걷는 사람들에 관한 배려는 당연히 없다. 로컬 카페 혹은 작은 서점, 갤러리 혹은 작은 상점 등 흥미로운 어떠한 장소도 찾기 힘들다. 모든 건 거대한 체인점 혹은 호커센터 뿐이다. 물론 호커센터에서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건 즐겁다. 그런데 과연 이게 전부인가? 음식 쓰레기를 바닥에 버리지 않고 먹을 수는 없을까? 음악을 밤늦게까지 크게 틀어놓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왜 항상 냅킨을 가지고 다녀야 할 정도로 테이블은 더러워야만 하는 걸까? 왜 화장실을 갈 때마다 인상을 찌푸려야만 할까? 식당 한가운데 거대한 음식 쓰레기통이 있는 건 비위생적이라서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또 그 옆에 앉는 게 과연 자연스러운 일인가? 과연 이런 의문들이 문화 차이일 뿐인 건가 아니면 문명,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단어인 ‘문명화’의 차이인 걸까?

수많은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는 조호바루 거리

조호바루 길거리 음식점

말레이시아에선 사람들이 계속 싱가포르에 다녀오라고 했다. 왜? 말레이시아엔 없는 게 싱가포르에 있기 때문에? 아니면 단순히 옆나라라서? 내가 만난 말레이시아인들은 다들 싱가포르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더라도 싱가포르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이들에게 싱가포르는 물가가 비싼 나라, 깨끗한 나라, 수많은 룰이 있는 답답한 나라로 느껴지는 듯하다. 싱가포르에서 본 말레이시아의 다양한 문화적 풍요로움이 이곳 사람들에겐 필요 없을 수도,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명’, 유럽인들이 타국을 여행하며 가끔 이곳은 아직 ‘문명화(civilization)’ 되지 않아 순수하다, 또는 이곳은 꽤 문명화가 되었다고 말하는, 식민지배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들이 농담으로나마 이런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난 버럭 화를 냈었다. 그런데 내가 말레이시아를 여행하며 문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무척 당혹스러웠다. 내가 그토록 경계한 서양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문명’을 결국 나도 똑같이 바라보고 있는 걸까? 작년 모로코와 사하라 여행을 통해 느낀 이슬람 문화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이번 겨울 아시아 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바라본 또 다른 모던 이슬람 문화, 아울러 이런 고민 속에서도 내 안에서 슬며시 쌓아가기 시작한 또 다른 편견들, 과연 타문화를 이해하는 건 가능한 걸까?

경계에 서서

난 아이러니하게도 모던 이슬람 국가라고 알려진 말레이시아에서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를 느꼈다. 오히려 니캅을 쓴 채 아이를 업고 쿠키를 파는 모로코 이슬람 여인들의 삶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적어도 가난하지만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로코인들이 좋았다. 그들을 따라 재래시장에서 젤라바를 사 입었고 얼굴을 가린 아주머니들 틈에서 젤라바를 꺼내며 어떤 크기가 맞는 거냐고 물었다. 사하라 사막을 걸으며 이곳에선 젤라바가 역시 최고의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젤라바 패션에도 관심이 생겼고 머리에 두르는 다양한 방식의 히잡도 멋스럽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페즈(Fez)에서 머물던 숙소 옥상에서 아잔 소리를 듣는 순간엔 마치 내가 이슬람 신자가 된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분지 지형인 페스에선 저 멀리서 시작된 아잔 소리가 이어지고 이어져 웅장하게 메아리쳤기 때문이다. 천상의 콘서트를 보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페즈 전체가 엄청난 울림을 가진 하나의 콘서트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웅장한 아잔 소리를 들었던 페즈에서

매일 젤라바를 입고 다녔던 모로코 사하라 사막에서

오히려 동남아에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다는 말레이시아에선 많은 부분이 불편했다. 전통이라곤 찾기 힘든 거리풍경, 조호바로에서 수없이 본 높게 솟은 아파트와 대형 쇼핑몰, 말라카(Melaka)에서 관광 상품화가 되어버린 식민시대의 유적들, 동시에 개성 있다고 느낀 건물 모두가 식민시대의 흔적이란 게 씁쓸했다. 말레이시아는 다민족 국가로 알려졌지만 적어도 나에겐 다민족 국가에서 보이는 문화의 다양성은 찾기 힘들었다. 겉으론 개방을 외치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굉장히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로 느껴진다. 말레이시아에선 인종끼리 섞이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이슬람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이슬람인은 이슬람인과 혼인해야 한다. 타 종교인이 이슬람인과 결혼하면 자연스럽게 이슬람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영국 식민지시절에 생긴 바바뇨냐 문화를 홍보하는 말레이시아인들이 아이러니하다. 현재 이슬람인들이 이슬람이기를 포기한 뇨냐여성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그렇다고 내가 모로코를 더 개방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다. 얼마 전 내가 사하라 사막으로 가는 길목이었던 아틀란스 산맥에서 북유럽 여인 두 명이 급진 모로코 이슬람인들에게 살해당했다. 끔찍한 일이다.

말라카의 포르투갈 유적지

결국 문명, 문명화(Civilization)란 과연 뭘까? 난생처음 이슬람 국가인 모로코에서, 그리고 또다시 모던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두 달여의 시간을 보내며 이런 의문은 점점 더 깊어진다. 결국 문명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의 순진한 바램과 달리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건 애당초 불가능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작가로서 내가 보고 느낀 환상을 작품에 담을 뿐이다. 

이승연, ‘세가지 경계’, 150x150cm, 타피스트리 가변설치, 2018, SeMa 창고
모로코 자립형 레지던시(?)여행을 마치고 만든 타피스트리 작품

글 이승연
사진 이승연, 저기요 스투디오

이승연(Seung youn LEE)
고대사와 신화, 또는 상상의 극한을 보여 주는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고대’라는 재료를 갖고 미래를 얘기한다. 최근에는 물리학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드로잉을 기반으로 철과 나무, 패브릭,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작업한다. 2012년에서 2017년까지 영국인 알렉산더와 ‘더 바이트 백 무브먼트’ 아티스트 듀오로 활동했다. 당시의 신화적·종교적·사회적 관심은 개인작업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영국 서머싯 하우스, 국립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 문화역서울 284, 영은 미술관, 켄 파운데이션, 베를린 ZK/U, 등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처럼 영원히 남을 작업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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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loo Castle Site at Fukuoka 5

얄루 성터 전시 기간 동안에 종종 이뤄진 로컬 예술인들과 만남이 계속 이어졌고 내년 초에 전통 텍스타일 마을로 유명한 히로카와 타운과 항구도시 모지코에서 전시와 레지던시를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연재에서는 가까운 미래를 한 번 더 기약하게 된 후쿠오카에서의 마지막 여정을 나누고자 한다.

지난 회에서 언급한 노미짱은 뮤지션 친구가 많다. 전시 준비 기간에 노미짱의 친구들이 참여하는 콘서트를 따라갈 기회가 있었다. 한 층에는 음악 카페가 있고, 다른 층에는 방음 장치가 설치된 작은 합주실이 여러 개 있었다. 시간에 맞춰서 방을 옮겨가며 라이브 음악을 듣는 구조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밴드 Narukorepusinn는 노미짱의 친한 친구이자 이 콘서트를 주관하였다. 내가 듣고 자란 한국식 펑크에 즉흥 연주적 요소가 조금 가미된 친숙한 발칙함이 느껴졌다. 전문적인 음악 지식은 전혀 없지만, 펑크나 즉흥 연주의 에너지에 의존하는 음악을 오랜 기간에 걸쳐 연구한 뮤지션에게 묻어 나오는 특유의 정제된 카오스를 개인적으로 무척 아끼기 때문에 좋은 시간을 보냈다.

전시에 온 Narukorepusinn 밴드의 맴버 사카타와 큐레이터 마사에와 함께

Narukorepusinn 멤버들은 궂은 날씨에도 전시에 찾아와 선물로 밴드의 시디를 전했다. 한국의 음악씬에 관심이 많은 그들은 한국 뮤지션들과 교류하고 언젠가 한국에서도 꼭 공연하고 싶단다. 곧 한국에도 그들의 음악이 알려질 기회가 생기길 바란다.
잠깐 주어진 휴식시간에 옆 방의 팝업샵을 갔다. 제과류와 참여 밴드의 굿즈 셀러들이 있었고 패션디자이너 야마시타 히카루도 있었다. 후쿠오카에서 가장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중 하나인 야마시타 히카루는 콘서트나 플리마켓에 가끔 셀러로 참여하는데 플리마켓 공지가 뜨면 전국 각지에서 그의 팬들이 찾아온다고 노미짱이 말했다. 인디밴드들이 거대 자본에 저항하여 존재하듯 이곳 패션 팬들은 아이돌 상품이나 예술 작품을 수집하듯이 작가주의 패션을 소비한다. 일본 사람들의 응용 미술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한 번 더 경험할 기회가 되었다. 일본에서 일본 현대 미술 시장이 한국보다 훨씬 작다는 비판을 종종 들었는데, 아마 이런 패션 문화도 예술을 대하는 태도나 예술품에 투자에 대한 관점이 아주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작은 일례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분의 옷은 작가주의 옷 치고 매우 저렴했는데, 생산 비용을 줄이기 위해 헌 옷을 수선하거나 원단 생산지역에 직접 가서 원단을 구하기도 한다. 홍보나 판매는 소셜 미디어를 활용하여 다양한 이벤트에 직접 셀러로 참여하면서 중간 비용을 줄인다고 했다. 거칠게 패칭되어 가정에서 만든 느낌이 물씬 나는 그의 옷은 Narukorepusinn 의 음악처럼 장난기가 가득했다. 가장 맘에 드는 원피스를 집어 들고 혹시 얄루캐슬 전시에서 사용한 원단 이미지를 이용해서 옷 수선이 가능한지 여쭤봤더니 흔쾌히 자신의 어시스턴트 미호 히노가 잘 아는 분야라며 연락처를 줬다.

후쿠오카에서 활동하는 패션디자이너 미호 히노와 미팅 중

미호 히노는 나가사키 출신으로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패션 디자이너이다. 도쿄에서 컬렉션으로 정식 데뷔를 했고, 파코 백화점에 월이라는 멀티샵에서 그녀의 컬렉션을 만날 수 있었다. 미호에게 듣고 나름 이해한 바를 정리하자면 프렌차이즈 백화점 파코에 속한 월(WALL)은 하이 패션 멀티샵으로 일본 신인 디자이너의 등용문이라 한다. 각 지점의 패션머천다이저들은 시즌마다 신인 디자이너를 발굴하고 컬렉션을 샵에 소개한다. 후쿠오카의 월은 후쿠오카의 디자이너 소개에도 더 신경 쓴다고 한다. 머천다이저와 디자이너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시즌마다 다음 컬렉션에 대해 함께 회의도 하는데, 전국 각지 컬렉션 현장이나 가게에서 손님들에게 직접 얻은 피드백을 전해 받을 수 있어 큰 도움이 된다고 미호는 말했다. 갤러리 시스템과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호의 작품은 내가 선뜻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지만, 절대 비싸다 여겨지진 않았다. 그녀의 옷엔 콘셉트부터 텍스타일 디자인, 원단 제작, 제봉 등 모든 과정에 세심한 손재주와 작가정신이 뚜렷하다. 게다가 인건비, 와 재료비, 유통비까지 더하면 이해가 안 가는 가격이 아니었다.

미호 콜렉션 사진

나와 나이가 같은 미호는 생각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 얄루 캐슬 이미지의 원단 인쇄 가능 여부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 패션 학교 동기가 후쿠오카에서 멀지 않은 마을에서 패션 연구소를 운영한다고 한다. 그녀도 그곳에 운영자로서 참여하는 데 그곳의 시설을 이용해보겠냐는 제안을 했다. 마이즈루 공원에 철수 기간을 쪼개서 방문하기로 했다.

히로카와 타운 패션랩 ‘키비루’의 일부 모습

히로카와 타운은 후쿠오카에서 두 시간 거리의 산골 마을로 녹차, 딸기 농사로 유명하며 얼마 전까지는 일본 아주머니의 몸빼바지 원단을 제작하는 곳으로 알려졌다. 몸빼바지 수요의 급속한 감소와 꾸준한 인구 감소로 몸살을 겪었는데, 몇 년 전부터 도쿄의 젊은 패션 디자이너 그룹이 죽어가는 전통 텍스타일을 살리고자 장인과의 협업을 진행하다가 히로카와 타운의 투자를 받고 패션제작 관련 시설을 갖춘 실험실과 아티스트 레지던시로도 이용될 호스텔을 짓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내가 갔을 때는 공식적인 오프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호와 유코

미호와 유코는 기차역에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유코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좋아하는 공간 몇 군데를 보여줬다. 그녀의 따뜻한 애정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낡고 버려진 큰 공간들이 아티스트들에겐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곳이었다.

80년대에 개별 관개사업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용된 대중목욕탕

녹차밭

도착한 실험실과 호스텔은 일본의 저명한 건축가가 디자인한 곳으로 전통과 새로운 감각의 은은한 조화가 훌륭했다. 밤새 미호가 얄루캐슬 전시 이미지 일부를 CNC 자수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서 변환했다. 기계가 새로운 파일을 소화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만 실험을 했다. 히로카와산 딸기를 먹으며 셋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손짓 발 짓 더해가며 서로 좋아하는 패션디자이너와 작가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떠들었다.

실험 결과물 중 하나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대화 속에서 함께 이뤄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확인한 우리는 함께 전시를 기획하기로 했다. 이후에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고 2019년 3월에는 예술과 패션이 함께하는 패션쇼를 기획하려고 한다.

글·사진 임지연

임지연(얄루)
얄루 작가는 인천에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다. 미국 시카고 예술학교에서 학부를 마치고 동대학원에서 비디오 아트를 공부했다. 현재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히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비디오 아트 계에서 권위 있는 프로그램인 비디오 데이타 뱅크에서 린블루멘탈 장학금을 수상하였으며2016년 뉴욕한인예술재단이 주최하는 비쥬얼 아트 어워드에서 금상을 받았다. 벨기에 리지 비엔날레, 퀘벡 비엔날레 등 전세계 크고 작은 도시에서 다수의 전시 경험이 있다.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해드랜드 아트센터, 퀘백 라반데 비디오 등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하면서 역량을 쌓는 중이다




내 몸에 사막이 흐른다

난 사하라에서 왔어 
“난 사하라(Sahara)에서 왔어.” 

새파란 젤라바를 입은 그가 민트티를 홀짝이며 말한다. 

‘사하라 마을에서 왔다고? 그곳에 사람이 살아? 사하라가 어디쯤이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하라에 갈 수 있다고, 아니 사하라에 가야겠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난 사하라에서 왔어.’ 

머릿속에서 그의 말이 내내 맴돈다.

모로코 민트티

여긴 모로코(Morocco) 마라케시(Marrakech)다. 어쩌다 보니, 아니 솔직히 말하면 너무 싼 비행기 표를 우연히 발견한 탓(?)이다. 갑작스럽게 영국에서 모로코 마라케시에 도착했다. 단돈 30유로에 유럽 대륙에서 아프리카 대륙으로 넘어온 셈이다. 처음으로 이슬람 국가에 왔다는 호기심과 아프리카 대륙에 왔다는 설렘도 잠시, 마라케시에서 3일 밤을 정신없이 보냈다. 오늘 낮 메디나 시장에서 본 모로코 가죽필통 가격은 10디르함(MAD)에서 180디르함 사이를 오갔다. 아마 떠나는 날까지 가격을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신발은 3일 만에 먼지와 흙으로 뒤범벅이 됐다. 말과 당나귀, 오토바이와 자전거, 자동차와 버스 그리고 사람이 함께 뒤섞였다. 열 걸음을 채 못 가서 ‘어디에서 왔니? (Where are you from?)’라는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차이나? 자포네? 코레?”
“웰컴! 웰컴 투 모로코!”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모두가 “웰컴 웰컴” 하며 외쳤다. 그나저나 난 웰컴이고 뭐고 모로코에 사하라사막이 있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로코에 사하라사막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무턱대고 이곳에 도착한 내 모습이 사실 좀 우습다.

‘그래, 사막에 가는 거야.’

모로코 전통의상인 젤라바를 입고,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고, 새하얀 낙타를 탄 채 사막을 유유히 거니는 상상을 한다.

‘그래, 사하라사막에 가는 거야.’

마라케시 거리

분홍 눈과 아틀라스 신
마라케시에서 사하라사막을 가려면 아틀라스(Atlas)산맥을 넘어야 한다. 아틀라스산맥? 뭔가 익숙한 이름인데…. 아, 하늘을 떠받들어야 하는 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의 그 아틀라스 신! 그럼 이곳의 아틀라스 신은 아프리카 대륙을 지고 있어야만 하는 벌을 받은 건가? 지도를 살펴보니 아틀라스산맥은 모로코뿐만 아니라 알제리와 튀니지에 걸쳐 우뚝 솟은 거대한 산맥이다. 아프리카를 길게 가로지른다. 세계 테마기행이나 신화 속에서 봤던 아틀라스와 사하라라는 이름이 무척 낯설다. 이유야 어떻든 곧 이곳에 간다니 가슴이 뛰었다. 며칠 후 새벽에 일찍 버스를 타고 드디어 사하라로 출발했다. 마라케시에서 사하라까지는 여덟 시간 정도 걸린다.

아틀라스산맥

“산맥을 넘을 때 멀미를 할지도 모르니 비닐봉투를 준비하세요.”

고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멀미가 심하게 난다는 이야기와 멀미가 너무 심해서 버스를 멈춰야 했다는 이야기, 기상이 악화되면 버스를 중간에 멈추고 밤을 새워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별의별 이야기를 들으며 버스를 타고 산맥을 서서히 올랐다. 얼마쯤 지났을까? 버스는 어느새 높은 고개에 올라섰다. 그러자 장관이 펼쳐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이하고 광활한 광경이었다. 난 산맥이라 해서 단순히 거대한 산을 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산맥이라기보다 거대한 대륙처럼 느껴졌다. 아틀라스산맥은 상상한 산맥이 아니었다. 아틀라스산맥을 넘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게 거대한 대륙을 넘고, 지구의 한 부분을 넘는 것이었다.

문득 창밖으로 눈발이 휘날렸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맞는 눈이라니….
그런데 뭔가 낯설다. 주변이 온통 연한 분홍빛이다. 하얀 눈이 아닌 고운 연분홍색 눈이 온 땅을 뒤덮는다. 아틀라스 신이 짊어진 아프리카 대륙의 기운이 강하디강해 눈이 붉게 물든 것일까? 서울에서는 종종 새하얀 눈이 내린 뒤 회색으로 변해 버린 도로의 눈을 보기만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곱디고운 연분홍색으로 뒤덮인 눈을 보니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 와 있는 것 같다. 난 어디로 가는 걸까? 분홍빛 눈이 쌓인 신화 속 세상을 넘어가는 상상을 하는 사이 버스는 산맥의 한가운데에 잠시 멈췄다. 아틀라스산맥에서 파는 양고기 바비큐를 사 먹었다. 짭조름한 것이 참 맛있다. 분홍빛 눈과 아틀라스, 양고기, 사하라, 모로코, 이슬람 등 낯선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분홍빛 눈이 쌓인 아틀라스산맥

8시간을 넘어가는 동안 단 한순간도 눈을 감지 않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피곤했는지 졸음이 밀려왔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 버스는 캄캄한 길을 계속 달렸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도 졸음은 쏟아졌다. 분홍빛 눈이 쌓인 아틀라스산맥을 넘으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에줄(안녕하세요) 사하라
버스는 밤새 내달려 무사히 사하라의 하실라비드 마을에 도착했다. 사막에도 마을이 있었다. 간밤에는 깜깜해 아무것도 보지 못했기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테라스로 나갔다. 거대한 모래 산이 눈앞에 서 있다. 저 거대한 산이 사막의 일부라고? 사막은 금이 쩍쩍 갈라진 보잘것없는 땅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모래 산은 붉은빛을 뽐내며 당당하게 서 있다. 정말 이곳이 사막인가? 빵과 치즈, 토마토, 오렌지 주스, 달걀 등 모로칸식 아침을 먹으며 거대한 모래 산을 보고 또 본다. 사막을 거니는 사람들이 개미만하다. 저 수많은 모래알이 모이고 모여 거대한 산을 이루다니 정말 신기하고 또 신기하다.
나에겐 비장한 첫걸음이지만, 사실 이곳에 사는 베르베르인들에겐 동네 산책하듯 걷는 사하라 사막 산책이다.  사하라 마을에 사는 주민들의 특권이다. 사하라 산책.

하실라비드 사하라사막에서 보이는 거대한 모래산

사하라사막 마을

사막을 걷는다. 발가락뿐만이 아니다. 손, 머리, 눈, 코, 입 … 구석구석 모래가 숨어든다. 처음 본 사막은 출렁출렁 붉은 빛이 넘실댄다. 땅의 여신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붉은 사막이 숨 쉬고 춤춘다. 사막은 바다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파도처럼 바스러진다. 난생처음 바다를 걷듯 거대한 모래산에 오른다. 모래 속으로 발이 쑥쑥 빠진다. 파도를 걷고, 바다를 걷고, 구름을 걷고, 하늘을 걷는다. 걷는 법부터 다시 배우며 모래산에 꼭대기에 오르니 온몸에 지구를 머금는다. 나도 모르게 속삭였다.  ‘애줄 사하라(Azul Sahara)!’ (애줄은 모로칸 아닌 사막에 사는 베르베르족(Berber) 인사말이다)

거대한 모래 산에 오르는 나

파도 같은 물결이 새겨진 사하라사막

그 흔한 낙타도 타지 않은 채 하실라비드 사하라사막에서 여러 날을 보냈다. 그저 매일매일 숙소 앞 사막에 맨발로 올라가 뛰어놀았다. 시시각각 물결치는 모래 언덕을 바라봤다. 척박한 땅일 줄 알았던 사막은 아이러니하게 너무나 풍요로웠다. 오늘은 사막에서 수백만 년 전 물고기를 만났다. 베르베르 아이들이 내민 목걸이 속 생명이다. 수백만 년 전 사하라에 살던 물고기는 이제 화석이 된 채 목걸이 안에서 나를 만났다. 물고기가 지나온 영겁의 시간이 아이들과 나를 감싸고 흘렀다. 그들의 운명은 기나긴 시간을 지나왔다. 수백만 년 후 나는 어떤 흔적으로 남을까. 목걸이 속 물고기만한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을까?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수백만 년 시간이다. 사하라는 척박하기는커녕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사하라 마을의 낙타와 아이들

사막을 걸었다. 매일 걸었다. 여기가 정말 사막인가? 아니면 내가 사막의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무엇 때문에 여기 온 걸까.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을 얻으러 여기 온 걸까.

나는 사막의 이마지겐
난 사하라 사막에서 돌아온 후 사람들에게 사하라사막, 자립형 레지던스를 다녀왔다고 말하곤 한다. 그곳에 머물며 느낀 것을 한국으로 돌아와 작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레지던스를 간다고, 작업을 하러 간다고, 비장한 마음으로 떠난 여행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하라사막은 대자연과 나의 경계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선물했다. 매일 사막을 걸으며 모래알처럼 작아진 나를 발견했다. 사막이 우주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막의 모래를 보며 기나긴 우주를 품은 시간을 상상했다. 

우주 같은 사막

사막에서

그저 우연하게 홀연히 간 사하라사막에서 난 3개월 레지던스에 못지않은 경험을 했다. 그리고 이를 자연스럽게 내 작업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올해 7월, 세마창고(SeMA)에서 전시한 영상 작업 ‘내 몸에 사막이 흐른다’ 작품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베르베르인을 만났다.
‘고귀한 사람’, 이마지겐(imazighen)이란 불린 이들은
사막과 함께 태어나고 사막과 함께 죽는다.
이들은 말한다. ‘나는 사막이에요. 내 몸에 사막이 흘러요.’
베르베르인의 핏줄 속을 걷듯 이들을 따라 사막을 걷는다.

사막에서 붉은 바다를 보고 맹렬한 모래바람을 맞으며 사막의 숲을 보고 지구의 탄생과 소멸을 느낀다.
매일 사막을 걷자 이마지겐처럼 내 몸에도 사막이 흐른다.
나는 사막을 걸은 게 아니었다.
그곳은 지구 또는 우주,
나는 그 어딘가에 있다.

슈크란(고마워요), 사하라

SeMA 전시 전경

영상 작품 ‘내 몸에 사막이 흐른다’ 중 일부

·사진 이승연

 

이승연(Seung youn LEE)
고대사와 신화, 또는 상상의 극한을 보여 주는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고대’라는 재료를 갖고 미래를 얘기한다. 최근에는 물리학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드로잉을 기반으로 철과 나무, 패브릭,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작업한다. 2012년에서 2017년까지 영국인 알렉산더와 ‘더 바이트 백 무브먼트’아티스트 듀오로 활동했다. 당시의 신화적·종교적·사회적 관심은 개인작업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영국 서머싯 하우스, 국립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 문화역 서울 284, 영은 미술관,
켄 파운데이션, 베를린 ZK/U, 등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처럼 영원히 남을 작업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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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loo Castle Site at Fukuoka 4

전시장 앞 흐드러지게 핀 벚꽃

전시를 보러오는 사람보다는 벚꽃축제를 즐기러 왔다가 들러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전시를 개장하자마자 꽤 많은 관람객이 몰렸는데 좁은 통로 일방통행만 가능한 전시 구조 때문인지 빠른 걸음으로 작업을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몹시 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상을 향해 삐쳤던 내가 우스운데, 당시에는 막 완성하고 설치를 한 작업이라 감정의 거리가 좁았던 것 같다. 관객들은 다음 관객들을 위해 멈추지 않고 빨리 지나가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전시 막바지에는 심적 여유가 생겨서 전시장 근처에 머물면서 관객들 반응도 살피고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가끔 관객들에게 직접 작업에 관해 설명도 하고 그들에게 감상을 듣거나 질문에 대답하기도 했다. 공공장소고 후쿠오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봄을 여는 행사인 만큼 다양한 관객을 만날 수 있었다. 틈틈이 다른 작가들의 전시도 방문하면서 공공장소에서 많은 인파가 몰리는 행사에서의 예술가와 예술 작품 역할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해 볼 기회가 되었다.

하나미 중 셀피. 노부오 하라다 작가, 이와모토 후미오 큐레이터와 함께

전시 기간 내내 계속된 아름다운 벚꽃과 향기, 그리고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 구경은 덤으로 얻은 즐거움이었다. 지난 연재에서 소개했던 부토 아티스트 노부오 하라다 선생님이 방문해주셔서 벚꽃 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사케 한 병과 간소하게 준비한 주전부리를 펼쳐놓고 하나미를 해봤다. 협업 결과물을 설명해 드린 것보다 작업 속에서 확대하지 못해 죄송스러운 마음이 컸는데, 다행히 작업을 좋아해 주셨고 다음 작업물에 대한 의견도 내주셨다. 언젠가는 협업 물의 정의를 지킬 수 있는 작업을 꼭 해내겠다고 말씀드렸다.

 

얄루 성터 전시 전경 일부

지난 연재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전시장 사진 몇 개를 공유한다. 성문, 샹들리에, 내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자전적 캐릭터 홍삼 돌과 고장 난 텔레비전 타워 시리즈 등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상상 속 유물이 비디오 조형 형태로 관객들을 맞이한다. 마지막 방에는 방금 지나온 유물들이 VR 진공 공간 속에서 부유하고 있다.

 

얄루 성터 전시 전경 일부

마지막 방에 설치된 가상현실(VR) 작업은 인기가 좋았다. 의외로 VR을 체험을 처음 해보는 관객들이 많았다. 상업 박람회에나 핸드폰 회사의 임시매장에서 행사용으로 준비하는 뻔한 기업 광고용 체험이 아닌 작가의 시선과 상상력이 담긴 VR 작업이 많은 이들에게 첫 경험일 수 있어서 뜻깊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스마트폰 등 디지털 미디어는 일상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많은 콘텐츠가 큰 자본으로 생산되고 유통되고 있다. 자본 제로의 개인 창작자로서 같은 매체를 실험하고 표현하기는 정말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자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 창작자로서 그 매체 안에서 비판적인 시각과 유연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창작된 생산물을 관객과 나누는 것은 그 매체의 자주성과 다양성을 확장하며 민주성을 지킨다. 이 자리를 통해 프로젝트를 지지해주신 인천재단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얄루성터VR 관람객들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후쿠오카의 지역 사회 예술인과 교류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후쿠오카 아시안 미술관에서 도보 십 분 거리에 위치한 대안공간 테트라(Space Tetra)에서 아시안 아츠 에어 후쿠오카(Asian Arts Air FUKUOKA)강의 시리즈에서 발표를 초청받았다. 지난 연재에서 조금 언급했던 것처럼 후쿠오카는 근현대 아시아 역사에서 큰 역할을 차지했고 이 유산이 이어져 아시안 아트 에어같은 풀뿌리 단체가 자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로컬 작가가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전시나 레지던시를 마치고 오면 결과 발표하는 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후쿠오카에 체류 중인 외국 작가들을 초청해서 강연을 열어 아시아 예술 커뮤니티의 친목을 도모한다. 자카르타 출신 연구자이자 큐레이터인 레너드 발토로메스(Leonhard Bartholomeus), 중국 총칭 레지던시를 마친 케이치로 테라에(Keichiro Terae) 작가, 타이완 타이난 레지던시에서 돌아온 마키조노 켄지 (Makizono Kenji) 작가들과 함께 발표했다. 일본 작가들의 발표가 그동안 내가 해왔던 방식과 아주 달라서 신기했다. 일본 작가들은 먹어본 음식, 숙소, 재밌었던 일화 등 현지 사정과 작가들의 레지던시 생활을 주로 설명하고 작업의 과정이나 결과물에 대한 말과 사진은 아꼈다. 작업과정과 전시 결과물만 소개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삼가는 프레젠테이션을 해왔던 나에겐 생소한 발표 문화였다. 질의응답 시간에도 작업보다는 현지 생활에 대한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단체 성격과 커뮤니티 내에서의 접근 방식의 차이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

 
아티스트 토크 사진

레오나드 발토로메스 큐레이터는 자카르타 출신으로 한국에도 자주 소개된 롱그루파(Wrong Groupa)라는 자카르타 대표 풀뿌리 아티스트 콜렉티브의 막내 맴버다. 아시안 아트 에어 강의에서는 롱그루파의 활동을 소개했는데, 사실 그는 개인 연구를 위해 아시안 아트 뮤지엄의 연구자 자격으로 체류 중이었다.

미술관에서 스튜디오 이웃사촌이었던 발토 큐레이터와 얄루 작가

주류 탈식민주의자들의 근현대 인도네시아 풍경화에 대한 시선을 비판하는 논문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의 연구의 요지는 주류 탈식민주의자에게 인도네시아의 근현대 풍경화 식민주의의 폐해이자 잔재를 무조건 비판하지만 발토 큐레이터는 당시 인도네시아 풍경화가에게 서양에서 건너온 새로운 표현기법은 수동적이고 억압의 산물이 아니라 새로운 영감이자 현지 문화와 유산에 공명하는 자주적인 운동이기도 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나이가 비슷한 학자와 벽을 나누며 세계화,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 사상, 아시아 근현대(미술)사를 잠깐이었지만 일상 속 수다에 녹여낼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노미짱이 해준 아침밥. 따뜻한 마음씨가 느껴져 눈물이 찔끔 났다.

노미 키쿠코(Nomi Kikuko) 작가는 이와모토 큐레이터와 십년지기 친구이다. 예산을 아껴 쓰려 고군분투하는 나에게 노미짱은 선뜻 자기 집 방 하나를 내주었다. 때때로 식사나 차를 함께 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쿠오카 현지 작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노미짱은 근처 바에서 파트타임을 하고 있었는데, 그전에는 전화 상담 아르바이트를 했었다고 한다. 후쿠오카의 많은 예술가가 시간 조절이 자유롭고 시급이 좋은 편이라 전화 상담 아르바이트를 많이 한다고 했다. 예의 바르고 조심스러운 일본 사람들조차 전화기 뒤에선 상상 이상으로 심술궂고 험악하다며 웃으며 얘기해줬다. 어디를 가든 작가들은 음지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글·사진 임지연

얄루(Yaloo)
얄루 작가는 인천에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다. 미국 시카고 예술학교에서 학부를 마치고 동대학원에서 비디오 아트를 공부했다. 현재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히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비디오 아트 계에서 권위 있는 프로그램인 비디오 데이타 뱅크에서 린블루멘탈 장학금을 수상하였으며2016년 뉴욕한인예술재단이 주최하는 비쥬얼 아트 어워드에서 금상을 받았다. 벨기에 리지 비엔날레, 퀘벡 비엔날레 등 전세계 크고 작은 도시에서 다수의 전시 경험이 있다.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해드랜드 아트센터, 퀘백 라반데 비디오 등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하면서 역량을 쌓는 중이다




완벽해요 신기하리만큼

독일인들의 작은 일탈, 크리스마스 마켓

“승연! 드디어 뮌스터(Münster)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렸어.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은 정말 유명하거든. 꼭 가봐야 한다고!”

쉐핑헨 레지던시의 사무실 직원 우타(Uta)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한다. 우타는 쉐핑헨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뮌스터에 산다. 최근 우타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뮌스터 크리스마스 마켓 이야기를 계속 들었기에 마켓이 열리면 뮌스터에 나가 봐야지 하고 생각하던 차였다.
사실 크리스마스 마켓이라고 뭔가 특별한 게 있을까 의아했다. 이미 런던 유학 시절 화려한 크리스마스 마켓을 여러 번 본 터라 아마 독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온 거리는 아름다운 조명으로 장식되어 화려하고 사람들은 한껏 들떠 쇼핑하러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그려졌다.
어쨌든 심심하고 건조한 독일인들이 이토록 신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뭔가 색다른 게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게다가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의 역사는 600여 년이나 되었다고 하니, 흠… 덩달아 기대가 된다.

스산하게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쉐핑헨에서 S70번 버스를 타고 뮌스터로 향했다. 쉐핑헨에서 뮌스터까지 버스로 1시간이 걸리고 왕복해서 12유로다. 저렴한 독일물가와 비교하면 꽤 비싼 편이다.
어쨌든 뮌스터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고 싶어 아침 일찍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아저씨가 크리스마스 쿠키를 건넨다. 흩날리는 비를 뚫고 뮌스터에 도착했다. 뮌스터에선 11월부터 크리스마스 마켓 다섯 곳이 열린다. 도시 곳곳에 붉은 장식품이 눈길을 끈다. 거리 한쪽에 작은 통나무집 모양을 한 상점이 줄지어 섰다. 힐끗힐끗 살펴보니 작은 수공예품과 털모자, 장갑, 컵 등을 거리에서 소소하게 판다. 한쪽에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따뜻하게 데워진 글루바인(Glühwein)을 홀짝홀짝 마신다. 음식이라고는 커리브로스터(Currywurst) 와 감자튀김이 전부다.

뮌스터 크리스마스 마켓

달걀에 끼워 준 크리스마스 초콜릿

뭐지? 우리나라 명동의 길거리 마켓보다 훨씬 한산해 보이는데… 이게 특별하다고?’ 

 심드렁하니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 표정은 평소보다 훨씬 밝다. 어떻게 보면 아주 소박한 크리스마스 마켓에 잔뜩 들떠 있는 독일인들이 참 귀엽다. 한국에 사는 나에게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지만 1년에 한 번 있는 크리스마스에 길거리 노점상을 즐기는 독일인들에겐 작은 일탈이었다.
크리스마스 전통은 독일에서 시작됐다던데, 크리스마스를 독일에서 보낸다고 하니 유럽의 다른 친구들은 전통 크리스마스를 보겠구나 하며 부러워했다. 그런데 막상 독일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참 소박하고 간소하다. 평소와 다르게 길에서 따뜻한 글루바인을 마시며 음식을 먹고 소소한 물건을 팔러 나와 사람들을 만난다.
이렇게 작은 이벤트가 독일인들에겐 크리스마스마다 해 오던 특별한 일이 아니었을까? 누군가에게는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고 누군가에겐 종일 쇼핑만 할 수 있는 날이며, 누군가에겐 글루바인이나 쿠키와 커리부로스터가 있는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라는 사실 그 자체로 설레는 것 같다. 화려하고 눈부셨던 런던의 크리스마스와 달리 소소하고 심심한 독일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지나 뮌스터의 구시가지를 걸어갔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인기 있던 감자튀김과 커리부러스트

비스킷으로 치장한 뮌스터 

뮌스터의 구시가지는 참 예쁘다. 정말 너무 완벽해서 이상하리만큼 예쁘다. 건물 못지않게 도시 바닥도 예쁘다. 만질만질한 돌바닥을 보니 수백 년 전 이곳에서 마차를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 오래된 돌바닥 위로 젊은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볍게 달린다. 런던처럼 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없고 파리처럼 지저분한 쓰레기가 굴러다니지도 않는다. 적어도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차분하게 정리돼 있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 마켓에 테러가 일어났다는 사실만 빼면 마치 세트장처럼 모든 게 완벽하다.  

뮌스터 거리

그런데 자세히 둘러보니 도시 전체가 꼭 얇은 비스킷으로 둘러싸인 것 같다. 구시가지의 건물 앞면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찍힌 비스킷 같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뮌스터의 구시가지 거리는 모두 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후 뮌스터는 도시의 반 이상이 전부 부서졌다.
이후 사람들은 원래 건물을 바탕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뮌스터 구시가지엔 건물 48개가 새로 지어졌다. 말이 구시가지이지 사실 새로 지어진 거리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오래전 거리를 잘 살렸다.
몇몇 건물의 앞면은 뒤쪽에서 철봉으로 받쳐 놓았다. 건물마다 문양도 찍혀 있다. 유럽의 오래된 가문들처럼 건물마다 문양들이 새겨져 있어 꽤 인상 깊다. 각 건물에 이야기가 담긴 오래된 로고가 하나씩 있는 셈이다. 나도 언젠가 집을 짓게 된다면 꼭 이런 문양을 만들어 새기고 싶다. 게다가 건물의 지붕 형태도 전부 제각각이다. 뾰족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고 층층이 나뉘어 있기도 하다. 가끔 건물 꼭대기에 사람이 조각돼 있다. 멍하니 건물 하나하나 바라보다 보니 어느덧 해가 넘어간다.

2차 세계대전 후 부서진 뮌스터 거리

 
건물 앞면을 철봉으로 비스듬히 받쳐 놓은 모습   비스킷 같은 뮌스터 건물 앞면

건물에 새겨진 문양

해가 지자 건물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물론 예쁘다. 뮌스터에서 만난 가이드 아네트는 구시가지 쇼핑거리에서 파는 물건들을 계속 설명한다. 그런데 나는 가게에서 파는 화려한 물건들보다 건물에 더 호기심이 간다.

알다시피 뮌스터는 10년마다 열리는 조각전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거리 곳곳에 예술작품이 남아 있다. 조각들이 도시 일부로 너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전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래된 것과 새것이 정겹게 도시에 어우러진다. 너무 예쁘고 완벽해서 마치 트루먼 쇼를 보는 듯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온 도시가 아름다운 비스킷으로 둘러싸인 듯한 환상을 준다. 뮌스터의 밤이 깊어 간다.

뮌스터 거리

뮌스터 조각전이 끝난 후 거리에 남은 공공예술작품

LWL로 오세요

독일에 온 후 특히 쉐핑헨에 머물며 독일 현대미술을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다. 매일 쉐핑헨에서 자전거를 타고 동물들을 만나며 시골생활에 흠뻑 취했다. 그렇기에 뮌스터 거리를 걷다 만난 새하얀 건물 엘베엘 미술관(LWL)을 사실 큰 기대 없이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산타클로스(세인트 니콜라스)가 나를 맞이한다. 그런데 그동안 많이 보던 산타클로스가 아니다. 삐뚤빼뚤 우스꽝스러운 얼굴이다. 설명을 읽어 보니 어린이 드로잉을 바탕으로 작가가 다시 만든 조각 작품이다. 왼쪽에는 착한 일을 한 친구에게 줄 선물 보따리를, 오른쪽에는 익살스러운 블랙 피터(까만 얼굴과 복장을 한 채 회초리를 들고 세인트 니콜라스를 따라다님)를 데리고 있다.

LWL미술관 미술관 입구에 놓인 산타클로스 작품

산타클로스를 지나 LWL미술관 전시장으로 향했다. 1층에는 백남준의 작품을 비롯해 현대 미술품이 전시돼 있다. 새하얀 벽에 걸린 현대미술 섹션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간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이 나왔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며 신전처럼 느껴진다.
밖에서 봤을 땐 모던한 건물이었는데 2층 내부는 너무 멋지게 르네상스 시대의 장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건물 바닥에 놓인 어느 작가의 설치 작품이 눈길을 끈다. 다름 아니라 A4 종이다. A4 종이를 깔아 바닥이 갈라지는 듯한 느낌을 표현했다.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과 바닥에 깔린 종이 설치작품이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LWL미술관은 현대미술뿐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의 작품들도 소장하고 있다. 게다가 미술관 건물 자체가 참 우아하다. 이곳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의 본부로 더욱 유명해진 미술관이라고 한다.

A4 종이를 사용한 설치작품과 미술관 내부

모던한 LWL미술관 내부

결국 시간에 쫓겨 LWL미술관을 다 둘러보지 못하고 나왔다. 기대하지 않고 들어갔다 뭔가에 홀린 듯 몇 시간을 보내고 나온 것이다. 뮌스터와 참 잘 어울리는 미술관이란 생각이 들었다. 새하얀 자태를 뽐내는 모던한 건물의 외형에다 잘 정리된 미술작품 콜렉션과 세련된 건물 내부 한쪽은 오래된 르네상스 형식의 건물 형태를 그대로 살렸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오묘하게 잘 어우러진 곳이다. 공공장소에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진 예술작품들과 깨끗하고 차분하게 정리된 뮌스터 거리의 모습이 미술관과 정말 닮았다.

뮌스터는 내게 이상하리만큼 완벽한 도시로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비스킷처럼 달콤하고 맛있지만 쉽게 부서질 것 같은 도시이기도 하다. 너무 완벽해서 어느 순간 쉽게 부서질지도 모르는 그런 도시 말이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부서진 도시를 이토록 멋지게 재건한 독일인들을 생각하면 이 환상적인 도시가 쉽게 사라질 것 같진 않다. 이런 도시에 사는 독일인들에게는 크리스마스 시즌 거리에서 사람들과 소소하게 와인을 마시고 연주를 하고 음식을 나눠 먹는 게 특별한 일이라니…. 참 신기할 뿐이다.
아마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할 수 있는 그들의 작은 일탈이기 때문일까? 그렇기에 이곳에서 만나는 독일인들마다 뮌스터의 크리스마스를 설레는 목소리로 이야기 해준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3일간 머물던 뮌스터를 떠나 쉐핑헨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탄다.

글 / 이승연
사진 / 저기요 스튜디오

이승연(Seung youn LEE)
고대사와 신화, 또는 상상의 극한을 보여 주는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고대’라는 재료를 갖고 미래를 얘기한다. 최근에는 물리학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드로잉을 기반으로 철과 나무, 패브릭,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작업한다. 2012년에서 2017년까지 영국인 알렉산더와 ‘더 바이트 백 무브먼트’아티스트 듀오로 활동했다. 당시의 신화적·종교적·사회적 관심은 개인작업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영국 서머싯 하우스, 국립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 문화역 서울 284, 영은 미술관,
켄 파운데이션, 베를린 ZK/U, 등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처럼 영원히 남을 작업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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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loo Castle Site at Fukuoka 3

이번 연재는 후쿠오카에서 처음 열린 ‘얄루파크, 예스! 세범(Yaloopark, Yes! Sebum)’전시와 인천재단의 후원이 함께하여 마이즈루 공원에서 열린 ‘얄루 성터(Yaloo Castle Site)’ 전시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나누려고 한다.

 
네브래스카 시티 길거리에 쌓여 있는 옥수수 더미   산책 중 찍은 사진
 2017년 봄에는 레지던시에 참여하며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보냈다. 길거리에는 사람보다 주차된 형형색색의 개인용 트럭이 많았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마른 옥수수 더미를 거대하게 형성하는 곳이었다. 이슥해질 무렵 도착한 후쿠오카는 별천지였다. 수많은 관광객이 바쁘게 지나가고 현지인들의 편의와 욕구를 자극하는 상점들로 가득한 거리가 익숙하지만 신선하고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녁에 도착해 집 앞 지하상가로 장을 보러 갔는데 약국과 슈퍼마켓의 입구가 연결돼 있었다. 자연스럽게 약국을 통해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약국에는 자극적인 삽화와 사진으로 무장한 갖가지 피부미용 상품들이 약보다 더 빼곡하게 진열돼 있었다. 신기하게도 여드름 관리제가 부위별로 있었다. 많은 상품 패키지에 혐오스럽기까지 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게 재미있어 한참 동안 살펴봤다.

 
사과, 유자레몬 콘셉트 모델링

미로처럼 설치된 진열대를 지나자 슈퍼마켓 입구가 나왔다. 입구부터 완벽하게 흠집 없는 형태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과일이 종류별로 분리돼 낱개로 포장돼 있었다. 네브래스카에서는 상처 가득하고 못생긴 사과들이 포장되지 않은 채 한가득 쌓여 있었는데. 표면에 드러나는 욕구와 그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아름답고 완벽하게 일상적인 소비공간에서 표출된다는 게 재미있었다. 이 경험이 ‘얄루파크, 예스! 세범(Yaloopark, Yes! Sebum)’의 소재가 됐다. 

‘얄루파크, 예스! 세범 Yaloopark, Yes! Sebum’ 협업 회의 중

사과와 딸기·유자·복숭아·매실 등 보편적인 과일과 여드름, 머핀톱 등 미용 관심사를 연결지어 VR을 통해 3D 로 조형하고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쇼핑공간을 놀이공원에 비유해 표현했다. 규슈상교대학교 조형학과와 협업해 프로젝션용 나무 스크린을 짰다. 전시장 입구에서 도장을 찍고 동전을 받아 입장한다. 전시내용을 예견하는 비디오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면 각 과일 영상이 대형 과일 모양 스크린에 투사되고 있다.

 
‘얄루파크, 예스! 세범 Yaloopark, Yes! Sebum’ 설치 사진

과일점 뽑기 캡슐에 들어갈 스티커

모든 3D 애니메이션은 VR을 이용해 제작됐다. 딸기코에서 화이트헤드와 블랙헤드가 끊임없이 차오르고 유자에서 여드름이 터져 나온다. 각 영상에서 특유의 과일향과 음향이 함께한다. 모든 사운드를 후쿠오카 출신 프로듀서 시노스케 마쓰미 (Breezesquad)가 담당했다. 전시 끝에는 입구에서 받은 동전으로 뽑기 머신을 사용한다. 캡슐 안에는 미래 과일·피부미용점을 쳐 주는 과일실이 들어 있다. 본래 미니어처 과일 토이를 만들려고 했으나 시간과 예산이 부족해 아쉽게도 스티커로 대신했다.

얄루파크 예스 세범 전시 사진

이번에 처음으로 대형 스크린 제작이 필요한 작업 일곱 점을 한 번에 전시했다. 분업을 위한 전시 도면을 처음 그려봤다. 재료비를 줄이기 위해 미술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과일 스티커 수백 개를 직접 자르기도 했다. 레지던시 팀의 신뢰와 희생이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인 작가로서 평생 남을 귀중한 경험이다. 이 지면을 빌려 한 번 더 감사의 뜻을 전한다. 전시 기간은 짧았지만 다행히 관객이 많이 다녀갔고 좋은 피드백을 얻었다. 이 경험을 통해 2018년 벚꽃축제와 함께 열린 후쿠오카성재건축 기념 아트전에 참여하게 됐다.

 
얄루의 콘셉트 포스터   도착하자마자 받은 전시 안내서와 출입증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이즈루 공원 후쿠오카성에 직사각형 형태의 방이 낮고 좁게 일렬로 이어져 있다. 내가 입구부터 방 일곱 칸까지 전시를 하고 일본의 오카모토 미쓰히로 작가가 뒤를 이어 작업으로 전시를 한다. 얄루파크 예스 세범 전시를 공간에 맞게 변형하는 것도 고민해 봤지만 유적지나 캐슬을 소재로 작업하고 그 건물 안에서 전시할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싶어 새롭게 작업하기로 했다.

후쿠오카성 전시장 외부 풍경

 
설치하러 가는 길에 만난 벚꽃을 이와모토 큐레이터가 감상하고 있다   문화재 보존을 위해 커스텀 제작한 프로젝터 마운트를
마츠라 큐레이터가 조심스럽게 설치하고 있다.

후쿠오카 성에 처음으로 답사 갔을 때를 떠올려 본다. 같은 모양의 방이 일렬로 이어져 한 방향으로만 이동할 수 있는 건물 형태가 시간 흐름과 닮았다. 과거에 지어진 성은 시간 흐름의 증거이자 현재와 과거를 잇는 관문이다. 유적은 과거의 한 조각이면서 미래의 파편이기도 하다. 후쿠오카성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아마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존재할 것이다. 시간의 파괴성과 영속성을 함께 내재하는 역설이 재미있다. 과거 속 후쿠오카성의 전성기를 상상하면서 내가 없을 미래 세상의 이 유적지를 투영해 본다. 그 유적지 속을 걷고 있는 내 먼지 같은 서사와 옥수수 알보다 작은 소우주도 투영해 본다. 후쿠오카에서 분야마다 다양하게 열정적으로 살고 있는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구체화된 질문 중 하나인 시대서사와 개인서사의 미묘한 경계에 대한 고민을 유적과 시간 역설의 틈새를 벌려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조심스럽고 명량하게 표현해 보기로 한다.

 
스튜디오에서 카마치,마츠라 큐레이터와
프로젝션 시험중
  전시팀과 안전모 테스트 셀피

2017년 여름 후쿠오카에서의 시간을 전시 공간 속에 펼쳐질 소우주의 경계로 삼고 기억의 파편을 비디오 조형의 형태로 빚어 투영(projection)하기로 한다. 대체 우주로의 입장을 예견하는 성곽의 문과 바닥에 떨어진 샹들리에, 고장난 텔레비전 타워 탑 시리즈 등 지난 연재에서도 다양하게 조금씩 다뤘던 경험과 소재들을 섞어 살아 숨 쉬는 상상의 유물로서 비디오 조형 시리즈로 표현했다. 인천재단 지원으로 가능했던 마지막 방에는 VR 체험 전시로 관객들이 앞서 경험한 상상유물들이 부유하고 있는 가상 공간을 만들었다. 전시 정황과 설치 사진은 다음 연재에 더 소개하겠다.

전시팀 퇴근길 야마키, 마츠라, 카마치 큐레이터

글·사진 / 얄루

얄루(Yaloo)
얄루 작가는 인천에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다. 미국 시카고 예술학교에서 학부를 마치고 동대학원에서 비디오 아트를 공부했다. 현재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히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비디오 아트 계에서 권위 있는 프로그램인 비디오 데이타 뱅크에서 린블루멘탈 장학금을 수상하였으며2016년 뉴욕한인예술재단이 주최하는 비쥬얼 아트 어워드에서 금상을 받았다. 벨기에 리지 비엔날레, 퀘벡 비엔날레 등 전세계 크고 작은 도시에서 다수의 전시 경험이 있다.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해드랜드 아트센터, 퀘백 라반데 비디오 등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하면서 역량을 쌓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