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이곳에서

에덴동산과 자전거

주르륵, 사과주스에 탄산수를 따른다. 거품이 톡톡 터지는 모습이 상쾌하다. 독일에 온 이후로 이곳 사람들처럼 사과주스에 탄산수를 섞어 마시기 시작했다. 내가 매일 아침 독일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작은 의식인 셈이다.
방금 사 온 따뜻한 브레첸(broechen)과 살라미 몇 개 그리고 토마토와 모차렐라를 간단히 챙겨 스튜디오 앞 사과나무 아래에 앉는다. 따뜻한 햇살과 바람에 이마가 간질간질하다. 참으로 호사롭고 여유로운 아침이다. 뉴턴은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중력을 발견했다는데, 나는 사과나무 아래서 혹시 내가 에덴동산에 도착한 것은 아닐까 상상한다.
아침을 먹은 후 가방에 사과와 물과 수건을 챙긴다. 물론 어젯밤 슈퍼마켓에서 산 와인 한 병도 빼먹지 않는다. 신발끈을 단단히 조이고 덜컹거리는 고물 자전거를 끌며 밖으로 나온다. 야심차게 페달을 밟으며 드디어 출발!

독일식 아침 사진

비릿한 소똥 냄새와 지저귀는 새소리를 느끼며 오솔길을 가른다. 넓은 들판을 신나게 달린다. 길가에 있는 블루베리를 따 먹고 근육이 섹시한 말이나 장발 당나귀를 구경하며 눈동자가 가로로 일자인 염소에게 풀을 건넨다. 매일 아침 반복되는 나의 일상이다. 사람보다 동물을 더 자주 만나고 상상 속 에덴동산의 사과나무가 있는 이곳은 독일의 작은 마을인 쉐핑헨 (Schöppingen)이다.

 
쉐핑헨 자전거 도로 풍경   매일 달렸던 쉐핑헨 오솔길

쉐핑헨 은 독일 북서부 뮌스터(Münster)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곳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동화 같은 마을이다. 양과 말, 당나귀, 토끼, 닭, 개, 고양이, 돼지, 소, 염소 등 모든 동물이 사람들과 식구처럼 살아간다. 두 해 전 여름과 지난겨울에 이곳에서 넉 달 동안 지낼 기회가 있었다.
18세기 농장을 개조해 만든 아티스트 레지던시 ‘쉐핑헨 쿤스트 돌프(Künstlerdorf Schöppingen)’가 내 작업실이었다. 전 세계에서 온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몇 개월씩 머물며 작업을 한다. 글 쓰는 작가부터 설치와 영상, 사진, 그림 등 다양한 분야와 배경의 사람이 모여든다. 매년 2000여 명이 지원하는데, 그중 작가 20여 명만이 초대받는다.
쉐핑헨 에서는 늘 ‘자전거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매일 자전거를 타고 호숫가를 달려간다. 호수로 가는 길에서 염소와 말, 소, 사슴 등을 만난다. 경쟁률 1000 대 1을 뚫고 생활비를 받으며 독일에 체류 중인 해외 아티스트의 가장 주요한 일과였다. 사실 야심 찬 마음으로 이곳에 오긴 왔다. 그런데 당장 뭘 해야 할지 모르니 자전거나 타며 동물 구경을 할밖에….

 
장발 당나귀와 염소들

쉐핑헨 레지던시 스튜디오에서 바라본 정원

하루에 네 시간만

쉐핑헨 레지던시 사무실 식구들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한다. 오전 8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늦잠이라도 자는 날엔 마음이 다급해진다. 필요한 일이 있어 허겁지겁 사무실로 달려가 보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쉐핑헨 레지던시 사무실 앞

“몇 년 전에 온 한 예술가는 밤에 일하고 아침에 자는 스타일이었는데,
그 예술가가 처음 도착할 때 한번 보고 떠날 때까지 못 만난 적도 있어요. 하하하.”

쉐핑헨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시그런(Sigrun)과 조셉(Josef)가 웃으며 말한다. 조셉은 레지던시 대표이고 시그런은 여직원 우타(Uta)와 함께 레지던시 운영을 담당한다. 조셉과 시그런은 부부다. 이 부부의 집은 작가들이 사는 레지던시 건물과 붙어 있다. 집에서 일터까지 5분 거리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종종 마트와 동네 산책길에서 이 부부를 만난다.
레지던시 안이 아닌 동네 마트에서 이따금 만나다 보니 꼭 이웃 주민처럼 친근하다. 가끔은 작가들을 집에 초대하기도 한다. 부부는 예술가가 쉐핑헨 레지던시에서 아무런 불편 없이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자신들의 일이라 말한다. 예술가가 이곳을 떠나기 전에 전시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입주해 있는 지역에 관계된 작업을 해야 한다는 조항도 없다. 부부는 그저 머물다가 떠나는 예술가들을 묵묵히 지켜봐 줄 뿐이다.
사실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으면 매일 유유자적 있을 것만 같지만 실제로 이곳에선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함께 머물고 있는 예술가들이 매주 서로의 스튜디오를 돌며 작업을 보여주고 작업 중인 작품의 고민과 이야기를 나눈다. 사무실 식구들이 주체가 돼 돌아가는 스튜디오 오픈이 아니라 작가가 자발적으로 필요해 작가들을 초대하는 식이다. 어떤 날은 작업실에서, 어떤 날은 레지던시 부엌에서 와인을 마시며 자연스럽게 열린다. 때로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나지막이 촛불을 켜고 낭독회도 한다. 물론 독일어라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왠지 그저 분위기에 취해 어떤 내용인지 알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레지던시 사과나무

레지던시 건물 내부

어느 주말에 시그런과 조셉은 쉐핑헨 보다 더 작은 마을인 릴케쉔(Reelkirchen)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시그런의 고향이기도 한 그곳에는 시그런의 성(castle)이 있다.

“성이라고요? 왕비처럼?”

나는 캐슬(Castle)이라는 말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성을 샀다고? 알고 보니 유토피아라고 작은 팻말이 붙어 있는 이 성은 시그런이 어렸을 적 종종 이 앞을 지나다니며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대저택이란다. 부부는 몇 년 전 이 저택이 매우 싼 가격에 나온 사실을 알게 됐다. 이곳에서 한번 살아보는 게 시그런이 어릴 적부터 상상하던 오랜 꿈인 것을 알고 있던 조셉은 그녀와 함께 이곳을 가꾸어 보기로 결정한다. 시그런이 꼬마였을 때부터 꿈꾸던 일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주말마다 부부는 쉐핑헨 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이 성에 와서 집을 수리하고 가꾸며 자신들의 미래를 준비한다. 이들은 쉐핑헨 레지던시에서 곧 은퇴를 하면 이곳으로 이주할 계획을 하고 있다. 이곳 역시 예술가들과 함께 꾸려 나간다고 한다.

시그런의 성 릴퀘센 건물

유토피아가 붙어 있는 성의 입구

처음에는 레지던시 사무실을 하루에 네 시간만 운영한다는 것이 좀 신기했다. 그런데 하루에 네 시간씩만 일해도 이곳에서 항상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작가들이 운영하는 각종 토크와 행사가 열리고 매년 9월에는 쉐핑헨 의 주요 연례행사인 ‘사과축제’와 ‘빛 예술의 밤’이라는 행사도 열린다. 이 모든 일들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네 시간 동안 기획하고 운영한다는 사실이 참 신기할 뿐이다. 매일 아침 8시 반이면 어김없이 사무실 불이 켜진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8시 반부터 12시 반까지는 미스터리한 레지던시 사무실이 열리는 시간이다.

 
레지던시 풍경과 쉐핑헨 레지던시 건물

사과축제(Apfelfest)와 빛 예술의 밤(Lichtkunst-Nacht )

9월 어느 날 쉐핑헨 구 타운홀에 기다란 깃발이 펄럭였다. 1년 중 단 이틀로, 쉐핑헨 마을에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날이다. 매년 쉐핑헨 의 상징 같은 행사가 열린다. 이날만은 어린아이에서 할아버지·할머니까지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낮에는 전시와 야외 공연을 하고 벼룩시장도 열린다.
나는 ‘Apfelfest’(사과 축제)에 참가했다. 자전거를 타며 만난 여러 동물들 행렬도 깃발을 만들어 쉐핑헨 구 타운홀에 걸었다. 쉐핑헨 에 와서 매일 자전거만 타고 놀러 다닌 것 같지만 그래도 사실 놀기만 하진 않았다. 그림도 그렸다. 내가 만난 동물들이 나와 함께 어딘가를 향해 행렬하는 그림이다. 제목은 ‘모든 존재는 여행을 한다’다. 작품의 이야기를 잠시 소개한다.

 
사과축제날 쉐핑헨 거리
 
<자화상: 모든 존재는 여행을 한다> 설치 사진과 전시 팸플릿

자화상: 모든 존재는 여행을 한다

내 고향은 서울입니다.
이곳엔 123 층 건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암소와 염소, 양, 말, 닭 등은 쉽게 볼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동물들을 독일 쉐핑헨 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들은 숨을 쉬고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닭고기와 쇠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치즈, 우유를 먹고 마십니다.
그러나 나는 이들과 친밀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매일 이 음식들을 먹으며 마치 100 만 명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가고 그들은 나에게 다가옵니다.
결국에 나는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윤회의 바퀴 속에 있습니다.
이 그림에 있는 동물들은 모두 사라짐을 향한 자신의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가끔 이 사실은 나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때론 끝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도 됩니다.

나는 동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동물 그 이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윤회의 바퀴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을 그리고 나는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합니다.

이 그림은 나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이건 나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자화상,
그리고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몇 달 후 쉐핑헨 타운홀은 이 그림을 구매했다. 활기찬 낮과 달리 밤이 되자 온 마을이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했다. 공원과 레지던시 스튜디오, 숲, 교회 안팎, 마을 구석구석에 작품을 설치한다.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행사라도 작품의 수준과 기획력이 매우 높다. 이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작가들이 방문한다. 온 마을이 화려하게 밤새도록 반짝거린다.

 
애플 페스티벌   <빛예술의 밤> 설치작품

시골 생활은 지루하고 재미없을 거라 상상했는데 웬걸, 내 삶이 훨씬 풍요로워진 느낌이다. 좋은 공기를 마시고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다. 자전거를 타고, 작업을 하며, 또 전시를 한다. 뮌스터와의 거리도 30분밖에 안 걸리다니…. 아… 한번쯤은 이곳에서 이렇게 살아 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한번쯤 다른 삶을 꿈꿔 보지 않나? 독일이란 이름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독일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 딱딱하고 고지식할 것이라는 선입견만이 팽배하다. 내게 두 번에 걸친 쉐핑헨 레지던시 경험은 독일인의 삶을 하나 둘 배워 가는 시간이었다. 독일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국인의 삶과는 어떻게 다른지, 각각의 의미는 무엇인지 차이를 살펴보게 되었다. 한국이 아닌 이국의 다른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한국인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할 것이라 믿는다.

쉐핑헨 거리 풍경

·사진 / 이승연

 

이승연(Seung youn LEE)
고대사와 신화, 또는 상상의 극한을 보여 주는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고대’라는 재료를 갖고 미래를 얘기한다. 최근에는 물리학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드로잉을 기반으로 철과 나무, 패브릭,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 작업한다. 2012년에서 2017년까지 영국인 알렉산더와 ‘더 바이트 백 무브먼트’아티스트 듀오로 활동했다. 당시의 신화적·종교적·사회적 관심은 개인작업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영국 서머싯 하우스, 국립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 문화역 서울 284, 영은 미술관,
켄 파운데이션, 베를린 ZK/U, 등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처럼 영원히 남을 작업을 꿈꾼다. (웹사이트 바로가기▶)




Yaloo Castle Site at Fukuoka 2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 국제교류사업인 <후쿠오카성 재건축 기념 기획 전시>에 참여한 작가의 소식을 싣습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작년 여름에 있었던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에서의 레지던시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인천재단 후원의 Yaloo Castle Site의 계기가 된 나의 첫 후쿠오카 생활에서 인상 깊었던 몇 가지를 적어본다.

카와바타 시장에 전시된 야마카사

환영식 티세레모니 자원봉사자 분들, 말레이시아 작가 Sum Yen과 함께

대학원 졸업 후 작업에 계속 집중하고자 레지던시를 연이어 다녔다. 후쿠오카 아트 뮤지엄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다른 레지던시들과 성격이 매우 달랐다. 대부분의 사설 재단 레지던시는 자유분방하고 매우 사적인 분위기다. 숙소와 스튜디오만 제공하고 작가의 자율성을 존중한다. 대신 모든 일을 작가 스스로 해결한다. 아시안 아트 뮤지엄은 후쿠오카시 소속으로 회계팀, 학예팀 모두가 공무원이다. 계약 기간 내 작업 활동에 관련된 모든 결정이 여러 단계의 승인을 거쳐야 했다. 이런 경직된 시스템 안에 작가로서 창작 활동을 장려받는다는 것 자체가 생소했다. 답사, 자료 수집, 강의, 워크숍, 전시 기획, 협업, 전시 설치까지 모든 과정은 많은 회의와 준비과정을 거쳤다.

얄루파크 전시협업 회의중

처음엔 이런 번거로움이 불편하고 창작에 제약을 준다 느껴졌다. 하지만 ‘네 작업이니까, 너 혼자 알아서 해’라던지 오픈 스튜디오, 렉쳐 프로그램, 전시 때만 급하게 작가를 쪼아 작업 내놓으라 하는 태도가 아니라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든 활동을 위해 공정한 과정을 꼼꼼히 거치고 작가가 목표한 최상의 작업을 풀어내는 것이 곧 팀의 성공이라는 목표로 함께 일한다는 점이 뜻깊게 느껴졌다.

야마카사 장인 스튜디오 방문

교외로 야마카사 장인을 인터뷰하러 갔을 때는 출장으로 분류하여 출장비가 나오기도 했다. 봉투를 건네는 큐레이터분이 부끄러워하실 정도로 적은 액수였지만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거치는 절차와 격식이 오히려 고마웠다. 작은 부분까지 업무로 분류된다는 게 오히려 존중받는 느낌이었다. 여름 내내 다양한 강의, 워크숍, 행사, 수많은 미팅, 전시까지 신나게 임했다. 작업실에 혼자 앉아 작업에 몰두하는 것도 좋지만 관객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작업을 소개하고 그분들의 의견을 듣는 것도 의미 있다. 미국 각지를 다니며 강의 경험은 많지만, 일본에서 일반 미술관 관객을 위한 강의나 워크숍은 처음이었다.

싱가포르 학생들과 애니메이션 워크숍

대체적인 작업에 대한 반응은 어디든 비슷하지만 동, 서양 관객들의 감성과 배경 지식에 따라 작품별 이해도나 선호도가 조금 갈린다. 예를 들어 미국 중부의 농업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얄루농장> 작업 시리즈물을 한국이나 일본에서 소개할 때 부연설명도 길어지고 관객호응도 밍밍하다. 미국에서라면 설명이 길어질 홍삼이나 케이팝을 소재로 한 작업은 관객들과 내가 같은 맥락 속에 있기에 부연설명 없이도 유연한 소통이 가능하다. 강의 중 흥미로웠던 부분은 미국 관객에게 ‘작업이 오리엔탈 하네요’ 또는 ‘일본적이에요’라는 코멘트를 종종 들었는데 일본에서는 ‘참 한국적이네요’라는 코멘트를 들었다. 같은 해 겨울, 한국에서 한 강의에서는 한 관객분이 ‘작업이 되게 중국적이네요’라고 말했다.

강의사진

일본에서 최연소 관객은 유치원 단체 관람객으로, 작업 하나하나에 서로 느껴지는 바를 필터 없이 나누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학급에서 가장 우수하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모범생이 가장 진부한 질문과 해석을 해낸 점도 재밌었다. 여자 어린이들은 부끄러웠는지 질문이나 응답을 전혀 하지 않았던 점이 아쉬웠다. 후쿠오카 지역사회 문화 종사자들을 접촉하고 큐레이터분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후쿠오카가 아시아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후쿠오카에 아시아 최초로 아시아 아트 뮤지엄이 생긴 것도 같은 이유라 한다. 무시무시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핑계로 사용된 ‘아시아니즘’이 처음에는 순수한 개화 운동사상이었다는 것도 배웠다. 후쿠오카 출신 개화 학자들은 당시 유럽처럼 아시아도 함께 뭉쳐 서양 강대국에 맞서야 한다는 이론을 세우고 다른 아시아 국가의 개화 학자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꾀하여 그들의 자국 개혁과 개화 활동을 돕는다. 지리적 위치가 큰 몫을 한 건 물론이다. 그러나 일본이 식민주의 노선을 택하고 아시아니즘이 공식 사상으로 채택되면서 처참하게 의미가 변질되었다.

후쿠오카 전통주택 가정을 방문

일부 학자들, 그들의 자손과 제자들은 계속해서 좋은 뜻을 이어가고 있다. 후쿠오카에는 아시아를 울타리 삼아 다양한 분야의 학자와 작가들이 아직도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후쿠오카 아트 뮤지엄도 그 산물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친일파를 가려내는 것만큼이나 복잡하고 미묘한 후쿠오카 아시아니즘의 유래와 역사인 듯하다. 대중매체와 인기 역사 서적에만 의존하지 않고 나름의 책임감을 가지고 자주적으로 역사를 공부하고 비판적 시각을 길러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후쿠오카시 소속 공공 기관이고 학예 팀 대부분이 일본인 공무원이라는 한계가 아쉽지만, 그 딱딱함이 무색하게 내가 머무는 잠깐 사이에도 수많은 아시아 작가들과 학자들이 끊임없이 방문하고 활발한 연구, 전시가 이어지는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지리적 문화적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아시아’ ‘한국’ ‘일본’이라는 인위적, 물리적 울타리 또는 정체성이 어떤 의미인지 한 번 더 깊게 생각해보는 계기도 되었다.

 
후쿠오카 시립 박물관 야마카사 축제 모형   하카타역에 설치된 카자리야마

레지던시 관련 사전 조사를 할 당시에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야마카사 축제였다. 하카타 주민들이 건물 10층 높이의 거대한 가마를 이고 마을 사람들의 건강과 안녕을 빈다는 이 축제는 구역별로 가마를 만들어 경주를 연다고 한다. 사진으로 접한 대형 가마들은 아름다웠고 나에게 최적의 리서치 주제였다.

야마카사 경주 리허설

 
야마카사 경주 리허설   가마 제장 장인과 가마꾼으로 활약하고 있는
나카무라 작가와 함께

도착 전 사전 조사를 할 때는 야마카사 장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었다. 창작 과정, 장인만의 노하우나 에피소드 등이 궁금했다. 조사과정에서 더 흥미롭게 관찰했던 점은 야마카사 축제를 계승하고 있는 사람들의 지역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특유의 배타성이었다.

 
야마카사 가게   주인 아저씨 어릴 적 모습과 그의 아버지

야마카사 축제 참여를 통해서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계승하는 지역 사회 사람들은 일 년 내내 축제를 준비한다. 여름 한 달을 통째로 할애해야 하는 축제 특성상 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실제로 후쿠오카 곳곳에 축제 기간 동안 문이 닫혀있는 가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야마카사 축제를 사랑하는 하카타 사람들은 다양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야마카사 전통을 지켜낸다. 조사하면서 놀라웠던 점은 영어로 된 자료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장대한 축제는 해외에 많이 소개됐을 법한데 말이다. 야마카사 협회 관계자를 만났을 때 여쭤봤다. 굳이 외지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일부러 노력해서 알리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 축제는 그들만의,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일본 밖 사람들에게 알려져 축제 본연의 가치가 흐려지는 걸 원치 않는 것이다. 여러 언어로 친절하게 설명하는 안내문과 웹사이트를 만드는 데 힘쓰지 않는다. 지역사회 관광 상품 개발에 큰 공을 들이고 관광객 유치에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세계 대부분 도시와는 대조적이다. 자본주의와 세계화를 대하는 하카타 사람들의 대담한 태도가 인상 깊었다.

쿠시다 신전에 위치한 야마카사 협회 방문

야마카사 기록을 빌려 신난 얄루작가

글·사진/ 얄루

얄루(Yaloo)
얄루 작가는 인천에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다. 미국 시카고 예술학교에서 학부를 전공하였고 대학원에서는 비디오 아트를 공부했다. 현재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히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비디오 아트 계에서 권위 있는 프로그램인 비디오 데이타 뱅크에서 린블루멘탈 수상을 하였으며2016년 뉴욕한인예술재단이 주최하는 비쥬얼 아트 어워드에서 금상을 받았다. 벨기에 리지 비엔날레, 퀘벡 비엔날레 등 전세계 크고 작은 도시에서 다수의 전시 경험이 있다.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해드랜드 아트센터, 퀘백 라반데 비디오 등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하면서 역량을 쌓는 중이다.




인천 중구에서 이집트 예술가가 전하는 이야기3. 알싸한 계절과 예술

Chilly season and Art

여름 열기에 고추를 말리는 계절이 다가왔다. 중구의 거의 모든 길가에는 넓은 그물이나 천이 펼쳐있고 그 위에는 풋고추들이 널려있는데, 이 빨간 고추들이 갈색으로 변해서 바싹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햇살 아래 놓여있게 된다. 매운 국물, 김치 그리고 그 외 절인 채소 음식에 필요한 고춧 가루와 고추장을 만들기 위해 식당과 가정집들은 고추를 말린다.

With the summer heat, comes the season for drying hot chilly peppers. Almost every sidewalk in Jung-gu was covered in a large net or a piece of cloth with fresh hot peppers on top of it, sitting in the sun for days, until they turn brown and brittle. Restaurants and houses dry them to make the chilly powder and chilly past, both are necessary ingredients for making spicy soup, kimchi and other pickled vegetables.

중구 , 인천
Jung-gu, Incheon 
©Lamis Haggag

전시회 개막 준비 중에 나의 작품에 쓰일 재료를 구하느라 인천과 서울을 바쁘게 오가야만 했고, 이 시기에 나는 일민 미술관에서 열렸던 플립북(Flip Book) 전시회 그리고 국립 현대미술관(MMCA)에서 열렸던 아크람 자타리(Akram Zaataridml)전시와 <예술과 기술의 실험 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 (E.A.T)>의 고문서 전시회에 가볼 기회가 있었다.

In preparation for my exhibition opening, I had to run back and forth between Incheon and Seoul to source some materials for my work, during which I had the chance to visit the ‘flip Book’ exhibition at the Ilmin museum and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Seoul (MMCA) for the Akram Zaatari show and the archival exhibition of ‘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 (E.A.T) group.

아크람 자타리 전시,현대미술관, 서울
Source: Akram Zaatari Exhibition, MMCA, Seoul
©Lamis Haggag

인천 수산시장
Incheon fish market

전시회 이후, 나의 한국에서의 체류와 전시회가 끝나가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함께 ‘인천 수산시장’에 가보았다. 먼저 우리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시장의 각기 다른 구역들(활어, 건어, 해초, 젓갈 구역)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각 구역들은 점포의 특색에 따라 세분되어 있었다. 우리는 횟감으로 생선을 골라 손질을 부탁하고 점포 안에 앉아 잘게 손질된 회를 먹었다. 전에 내가 말한 대로, 난 세상에서 두 번째로 자극적인 맛을 가진 생선인 홍어를 먹어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나의 고국에서는 회색 숭어를 소금에 저린 이집트 전통 생선 요리인 Fessekh가 있는데, 이 음식이 햇볕 아래에서 발효되면 독성이 생겨 심지어 사람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봄철이면 이집트인들은 이 냄새 고약한 음식을 오일과 레몬에 담가 먹는데, 이러한 전통은 콥트 달력에 따른 입춘(立春)을 의미하는 ‘Sham El Nesseem’을 기념하기 위한 전통 중 하나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After my exhibition I went with my friends on a trip to ‘Incheon General Fish Market,’ to celebrate my residency and exhibition coming to an end. We first strolled down the market and checked out the different sections the market had to offer: the fresh fish, the dried fish and seaweed and the shredded seafood in chilly sauce sections. Each section is divided into subsections with the shops having their own specialties. We then picked the fish we wanted cleaned and cut and sat inside one of the booths in the market to eat the raw neatly sliced fish. We had made the decision earlier that I was to try the Skate ray fish, the 2nd most pungent fish in the world, as I was told. In my home country we have the Ancient Egyptian tradition of salting grey mullet fish (Feseekh) and fermenting it in the sun, a dish that can cause food poisoning and in some cases death. But still Egyptians insist on eating the very smelly dish, soaked in oil and lemon every year around springtime. The tradition comes as part of our celebration of ‘Sham El Nesseem,’ which signifies the beginning of the spring season based to the Coptic calendar.

인천 수산 시장, 인천
Incheon General Fish Market, Incheon
©Lamis Haggag

인천 수산 시장, 인천
Incheon General Fish Market, Incheon
©Lamis Haggag

인천 중구와 작별
A farewell to Jung-gu, Incheon

인천 중구에 왔을 때부터 나는 일본과 중국 건축물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중구를 떠나기 위해 친구 호영과 함께 걷고 있는데, 그는 어떤 지역이 어느 나라의 양식에 속하는지 구분할 수 있는 매우 미묘한 차이점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차이나타운과 일본 거리 사이에 놓인 자유공원 방면으로 나있는 계단에는 각기 다른 스타일의 불빛들이 늘어져 있었다. 상반된 모습이 매우 미묘했지만, 몇 번을 바라보니 그 차이점이 매우 명확했다. 친구 호영이 알려주기 전까지 나는 이러한 작은 차이를 알지 못했지만, 그 다름이 너무나도 명확해졌다.

I had noticed since I arrived to Jung-gu, Incheon the difference in architecture between the Japanese and Chinese areas, which clearly set them apart. However, my friend Ho-young during a walk together, as I was bidding Jung-gu one of many good-byes, showed me a very subtle difference that was to determine which territory belonged to whom during their reining times. The stairs leading up to Freedom Park and in between Chinatown and the Japanese street are lined on each side with a different style of lights. The differences are so subtle yet so clear to the trained eye. I had never noticed them until Ho-Yong pointed them out, then they became too clear.

중구, 인천
Source: Jung-gu, Incheon
©Lamis Haggag

짧았던 서울 방문
A quick visit to Seoul

최근 몇 년 중 가장 강한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할 것이 예상되던 어느 날, 서울에 일주일 동안 머물기 위해 가방을 쌌다. 나의 방문 계획은 빡빡했고 서울을 더욱 깊게 경험해 보고자 했으며, 결국 난 그리 했다. 더 많은 미술관, 박물관, 기념비, 가게, 한국 전통 식당과 카페들을 방문하였다. 나는 도시를 거니는 것을 즐겼다. 무엇보다 스님들의 대규모 집회 기간에 조계사 절 방문은 잊지 못할 경험 중 하나였다. 무수히 많은 경찰에 둘러싸여 스님들은 절 밖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집회 참가 스님들은 조직의 몇몇 노스님들의 부패를 규탄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였다. 또 다른 인상 깊은 방문은 파주 책 마을에 있는 문화단지로, 이 단지는 책 발간과 편집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으로도 유명하다. 문화단지 내의 건축물은 인상 깊었으며, 창조적인 현대 건물과 함께 미래 도시적인 느낌을 풍긴다.

On the day of what was expected to be the strongest Typhoon in the last few years in South Korea, I was to take my bags and visit Seoul for a week, and so I did… My visit was very full, and I got to experience Seoul with more depth. I had the chance to visit more galleries, museums, monuments, stores, traditional and contemporary Korean restaurants, cafes; I enjoyed some walks around the city, etc. Among my most memorable experiences was my visit to ‘Jogyesa’ temple during a large Monk Rally. The Monks were chanting outside the temple while surrounded by an exuberant number of policemen. My understanding was that they were protesting the doings and corruption of some of the elder Monks in the Organization, and asking for reform. Another impressive stop was Paju book city, a cultural complex famous for publishing and editing books and making movies. The architecture of the area was impressive; it looked like a future city with its creative contemporary buildings.

정은영 전시, Korea Artist Prize 수상자, MMCA, 서울
Source: Siren Eun Young Jung Exhibition, Korea Artist Prize nominee, MMCA, Seoul
©Lamis Haggag

한국과의 작별
A farewell to Korea

나의 한국 체류는 짧았지만 달콤했다. 오랜 기간 동안 머물렀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바쁘게 일하고 새로운 장소를 찾아 다니고 문화를 경험하다 보면 시간은 매우 빠르게 지나간다.  한국에서 나의 경험, 특히 인천 중구에서의 경험은 마법과도 같다. 나에게 있어 인천 중구는 색다른 시간에 색다른 장소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건물들은 아직까지 매우 안락한 장소로 느껴진다. 언젠가 한국에 다시 방문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 때가 되면 약 3개월 동안 나의 집이었던 중구는 방문할 곳 중 하나가 될 것이다.

My stay in Korea had been sweet and short. It may seem like a long time, but when you are busy working and trying to explore a new place and culture, time flies by so quickly. My experience in Korea in general and Jung-gu, Incheon specifically seemed so magical. To me, Jung-gu, Incheon seemed like it belonged to different places at different times, a complex yet very welcoming place. I have a feeling I am to return back to Korea, and when I do, Jung-gu, will be one of my stops for it has been my home for almost 3 months.

미메시스 뮤지엄 , 파주
Mimesis Museum, Paju
©Lamis Haggag

/ 사진
라미스 하가그(Lamis Haggag)
작가 정보 : 바로가기
번역 김영모




인천 중구에서 이집트 예술가가 전하는 이야기2. 내가 아는 세계

Notes by an Egyptian Resident Artist in Jung-gu 2 – ‘The World As We Know It’

인천에서 생활한 지 거의 두 달이 되어간다. 인천 중구는 고지대에 자리 잡았고, 지역 건축물들의 분위기로 인해 마치 천상의 작은 세계에 와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거나 중구 이외의 지역을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고대 이집트 예술품은 전통을 표현하고 있으며, 모든 예술품은 세계를 표현하고자 제작되었다. 고대 예술품이 담고 있는 세계관에 따르면, 세계란 땅의 선(대지의 신 Geb)과 하늘의 선(하늘의 여신 Nut) 그리고 그사이의 기둥들이 지탱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세계 이외의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세계관은 내가 인천 중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같다.

Incheon has been my home for almost two months now. Jung-gu, Incheon has had this effect on me that makes it hard to exit the area and roam around in other places, the nature of the architecture and elevation separates it from the surrounding areas and gives you the feeling that it is on top of the world, a fantastic small world. In Ancient Egyptian art making traditions; every artwork was made as a representation of the world. Meaning, you would have the earth line (‘Geb’ the Earth God) the Skyline (‘nut’ the sky goddess) and the pillars, to support the structure of that world, and together they conceive the world in between. Whatever existed outside the peripheries of such world did not matter as much. This is how I have come to perceive Jung-gu, Incheon thus far.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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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의 저녁 식사와 커피
Dinner and coffee in Incheon

한국에 온 외국인이라면 집에서 음식을 요리하여 먹는 것보다 밖에서 해결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다는 것을 매우 짧은 시간에 알게 되었고,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인천에서 먹는 한국 음식에 관한 경험들로 하루하루가 이어진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음식을 주문할 때 사진을 보고 결정하거나 일정한 기준 없이 음식을 주문하였다. 지금은 한국 음식과 식당에 더욱 익숙해졌다. 그래서 나는 묵사발(Acorn noodle soup), 묵밥(cold Acorn soup with rice), 전(Korean pie, 물론 묵으로 만든 전), 불고기(Spicy Beef stew) 또는 자장면과 같은 한국식 중국요리 중에서 내가 무엇을 먹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으며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 잔치국수, 비빔밥이나 생선구이는 다양한 밑반찬들과 함께 나온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커피가 서양 음료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커피는 내가 가본 그 어느 나라에서보다 대중적인 음료이다. 그러므로 지역 주민들을 비롯해 내 스튜디오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Turkish 커피라고도 불리는 Arabic 커피를 선보이고 있다. 평상시 카이로 길가의 상점에서도 마실 수 있는 이 커피에는 질 좋은 원두 가루와 카르다몸 향신료가 첨가되어 있다. 이 커피의 맛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는 수십 년 전에 사람들이 Fegan 이라 불리는 자기로 된 커피잔을 통해 커피를 마시는 사람의 미래를 어떻게 점쳤는지를 들려줬다. 또한 커피에 넣는 설탕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커피의 이름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해줬다.

Any foreigner who comes to Korea learns immediately that eating out is much cheaper that cooking at home, thus comes my everyday experience with Korean food in Incheon. At first I used to pick from photos or order things randomly. Now, I am more acquainted with the local dishes and restaurants. I now get to pick and choose whether I feel like having Acorn noodle soup (Muk), cold Acorn soup with rice, Korean pie—which is also is made out of acorn— Spicy Beef stew, Chinese food that was first invented in Korea such as the soy bean noodles. Janchi gooksoo noodles, bimbap, bibimbap or Grilled fish with so many side dishes that combined would make a full main dish. Unlike what I expected, coffee—in the western sense—is much more common in Korea than any other place I have visited before. Hence, I began to introduce residents of the area or visitors to my studio to Arabic coffee, which we also call Turkish coffee. This coffee, which we usually drink at local coffee shops in the streets of Cairo, consists of very fine coffee grind and cardamom spice. The reaction to the taste here has varied from really appreciating it to absolutely not. I then tell people while drinking it stories about how people, a few decades ago used to read the future of a coffee drinker in their porcelain cup or as we call it ‘Fengan.’ I also tell them about the five different names we have for the coffee as the amount of sugar changes.

강화에서 먹은 국수, 강화도, 인천
Ganghwa Noodles, Ganghwa Island, Incheon
©Lamis Haggag

Dakmianga, Incheon
©Lamis Haggag

강화로의 두 번째 방문
Second visit to Ganghwa

소창체험관에서 개최된 소창 면직물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강화도를 방문하였다. 나에게 강화도는 육지보다는 편안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해안 도시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섬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특히 한국말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도전으로 다가온다. 내가 강화도를 방문했을 때에는 매년 열리는 ‘세대를 잇다’ 축제 준비로 한참 바빴던 시기였다. 바쁜 와중에도 지역주민들은 나를 매우 따스하게 반겨주었다. 3시간 워크숍 동안 참가자들은 한국어와 아랍어로 표기한 라이노컷 디자인의 ‘소창’ 표지를 만들었다. 이번 워크숍은 소창과 같이 유지되고 보존될 가치가 있는 오랜 전통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하고자 개최되었다. 이집트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값비싸고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면직물을 생산했었지만 값싼 면직물 수입을 통해 쇠퇴하였고, 이러한 수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이들은 관련 종사 농부들로 하여금 면직 생산을 중단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강화는 소창 면직물을 보존하고 유지할 기회를 여전히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소창 면직물 역사에 대해서 강화 지역 참가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소창 면직물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란 오직 소창 면직물이 아기 기저귀로 사용된다는 것뿐이었다. 나 역시 대부분 많은 양의 소창 면직물이 공장을 통해 판매되고 있으며 일반 대중에게는 쉽게 보급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워크숍 후 행사 주체자는 나에게 잔치국수를 사주었고, 그 후엔 한 달 전에 개장했다는 소식을 들어가 보고 싶었던 ‘조양 방직 카페’로 데려갔다. 방직카페는 한때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공장으로 소창 면직물을 생산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카페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조양 카페는 골동품 수집가가 소유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실내에 모든 세부적인 것들은 놀라울 만큼 훌륭하였다. 오래된 방직 기계가 놓여 있으며 서랍에는 사용설명서가 있었다. 카페의 모든 것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미술품과 공예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This time my visit to Gnghwa Island was to conduct a workshop of linocut on So-change fabric at the So-chang experience center. Ganghwa island feels like a coastal city, always more relaxed than the mainland. But getting access to the island is very challenging, especially to a non-Korean speaker. Once I got there I was welcomed as usual by the very friendly residents, even though they were busy preparing for Sedaereul Itta festival, a festival that is part of a series of festivals taking place this year. We had a 3-hour workshop, during which the participators made a Korean and Arabic sign of the word So-change surrounded by linocut designs of their own. The target of the workshop was to show appreciation for an old tradition that is worth maintaining, which is that of the So-chang. In my home country, what was once the best and most expensive cotton in the world has been replaced by imported cheap cotton and local farmers are sometimes forced into terminating their activity for the rich to make money off of imported goods. However, I feel there is still a chance to help save the So-chang fabric in Ganghwa Island. When introducing the history of the So-Chang fabric, the participators who all live on the island, were not totally familiar with it. Their only knowledge of it was of the fabric being used as baby diapers. I also learnt from them that it is mostly sold through the factories in large amounts, which makes it less accessible to the public.

Afterwards, the organizers took me for Noodles with anchovy soup (Janchi gooksoo) and then we headed to a place I was looking forward to visit since I heard about its opening a month ago, the ‘Joyang Bangjik’ café. The oldest factory in South korea, which was transformed into a coffee shop, which also happens to be a So-change factory.
The café was overwhelming as it is owned and ran by an antique collector, the detail in every corner and the size were breathtaking. The space had old sewing machines from the factory that still had their manuals in the drawers. Every part of it was well preserved and complemented with artworks and artifacts, within a contemporary setting

소창체험관, 강화도, 인천
So-Chang experience center, Ganghwa Island, Incheon
©Lamis Haggag

조양 방직, 강화도, 인천
Joyang Bangjik, Ganghwa Island, Incheon
©Lamis Haggag

조양 방직, 강화도, 인천
Joyang Bangjik, Ganghwa Island, Incheon
©Lamis Haggag

동대문부터 양기 시장까지

동대문 시장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인천아트플랫폼’에서 프로젝트의 수행을 위해 한국 전통 면직물을 찾아보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시장엔 모든 것들이 있었고 판매하는 물건의 종류에 따라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집트 시장과 매우 흡사하지만, 동대문 시장이 훨씬 잘 체계화되어 있다. 그다음으로 알게 된 시장이 동인천에서 한복 천을 살 수 있는 양기 시장이다. 양기 시장은 한결 조용하고 돌아다니기에 복잡하지 않아 언제나 그렇듯 선물을 받는 느낌이었다.

동대문 시장,서울
Dongdaemun Market, Seoul
©Lamis Haggag

일 아타바 시장, 카이로
El-Ataba Market, Cairo
출처 : 바로가기

 글/사진
라미스하가그(Lamis Haggag)
작가정보 : 바로가기

번역
김영모




Yaloo Castle Site at Fukuoka 1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 국제교류사업인 <후쿠오카성 재건축 기념 기획 전시>에 참여한 작가의 소식을 싣습니다.’

 

2017년 여름 후쿠오카 아시안 미술관에서 3개월간 아티스트 레지던시 활동한 인연으로 2018년 봄, 후쿠오카 성 재건축 기념 전시회에 초대되었다. 인천재단 국제 교류지원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성황리에 전시를 마치고 돌아왔다. 여러 차례의 연재를 통해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과의 첫 인연부터 전시의 전 과정을 나누고자 한다.

 
  뮤지엄 렉쳐
ⓒ얄루 &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뮤지엄 전경   작가의 뮤지엄 스튜디오
ⓒ얄루 &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리서치 중 현지인과 촬영
ⓒ얄루 &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뮤지엄은 일본 정부가 정의한 아시아 경계 안에서 아시아의 근현대 미술을 자주적으로 연구하고 수집하는 공공 미술기관이다. 미국에서 오랜 기간 동안 공부하고  작가로  갓 데뷔한 차라 미국, 유럽 중심의 관점에서 미술을 바라보는 것은 당연했다.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의 존재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알게 되자마자 작가로서 한 발자국 성장할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레지던시를 지원하였다. 후쿠오카 체류 3개월 동안 후쿠오카의 오래된 전통 중 하나인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博多祇園山笠)축제, 지역 특산물, 아시안 아트 뮤지엄의 아카이브에 대해서 공부했다. 후에 인천재단 국제 교류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가능했던 후쿠오카 재건축 기념 전시  ‘Yaloo Castle Site’ 작업 또한 이 연구의 산물이다.

얄루 캐슬 사이트 전시 일부 사진
ⓒ얄루 &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지난 2017년 11월, 후쿠오카 재건축 기념 전시를 준비하기에 앞서 사전 답사 초청을 받았다. 다시 찾은 후쿠오카는 무더웠던 여름만큼이나 겨울 또한 진하게 추웠다. 다행히도 4개월 만에 다시 찾은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은 여전히 나를 정겹게 맞아주었다. 함께 밤을 지새우며 동지애를 쌓았던 경비아저씨들부터 내가 부린 작업 욕심을 다 받아주시느라 고생을 많이 한 국제교류 학예팀까지 모두가 진심으로 반겨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도착하자마자 이번 답사 일정에 대해 차근차근 되짚었다. 전시 장소를 직접 방문하고 간단한 테크(tech) 체크를 해야 한다. 규슈지방 1세대 부토 계승자인 노부오 하라다 작가님과의 협업 여부 확답을 듣고 작가님의 일정에 맞춰 촬영까지 진행한다면 성공적인 방문이 될 것이다.

답사 당시 마이즈루 공원 성터
ⓒ얄루 &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전시 장소는 옛 성터에 자리 잡은 마이즈루 공원으로 해마다 후쿠오카에서 가장 성대한 벚꽃축제가 열리는 곳이며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2018년 벚꽃 개화기에 맞춰 후쿠오카 성의 재건축을 완료하고 그 기념으로 후쿠오카시, 후쿠오카 미술관,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미술관이 공동으로 준비하여 ‘Art in Fukuoka Castle’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일본 국내 작가들과 국외 작가들을 선발하여 공원 곳곳에 벚꽃과 유적지에 어우러지는 예술 작품을 설치한다. 관람객들이 벚꽃 구경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현대 미술도 감상하고 대중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국제교류 학예팀과 그동안의 주고받은 이메일과 영상통화를 통해서 간략히 들었던 정보는 나를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일본 벚꽃 축제 기간 캐슬에서 전시라니! 게다가 벚꽃 축제는 몇천 명에서 몇만 명까지의 인파가 몰린다고하니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내 작업을 선보이는 것은 처음이다.

답사 당시 마이즈루 공원 성터
ⓒ얄루 &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직접 방문한 후쿠오카 성은 미리 접한 설계도를 통해 상상했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17세기에 지어진 성곽으로 거주의 목적보다는 방어의 목적으로 지어진 것 같았다. 일자로 길게 늘어진 건물은 작은 직사각형의 방이 연이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모든 방을 잇는 통로가 한가운데 관통해서 지나간다. 출입구는 공원 쪽으로만 나 있고 반대편 벽은 총이나 대포 입구 크기가 겨우 맞았을 법한 작은 창문이 있었다. 창문 밑은 절벽에 가깝다. 천장이 높지만, 출입구는 낮고 좁다. 학예팀은 이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입구가 작은 성에서 덩치가 큰 작업은 불가능하다고 몇 번 주의를 주셨다. 지난여름 후쿠오카에서 선보인 ‘Yaloopark, Yes! Sebum’ 작업처럼 공간을 쉽게 변환하는 큰 규모의 비디오 프로젝션 작업이 익숙한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다.

<얄루파크> 전시 전경
ⓒ얄루 &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얄루 파크> 전시 전면에서 노부오 하라다 작가와 얄루 작가
ⓒ얄루 &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노부오 하라다 작가님과의 면담을 통해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의 방향과 메시지를 전달했다. 지난여름 후쿠오카 생활을 바탕으로 전통, 관습, 대중문화, 자본주의, 글로벌리즘 등을 작가 고유의 시선으로 이해하고 표현해내는 비디오 콜라주로 만들어 프로젝션 조형물 시리즈로 풀어낼 것이다. 노부오 하라다 작가님의 퍼포먼스를 서사의 한 조각으로 넣고 싶다 말씀드렸다. 하라다 작가님은 본래 후쿠오카 출신으로 경영학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다가 실험예술에 빠져 처음에는 퍼포먼스를 나중에 부토 댄스를 전수하기 이른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귀향을 결심한 그는 규슈지방 최초의 부토댄서가 되어 부토 보급에 힘쓴다.

하라다 작가님과 이와모토 학예사님이 얄루 스튜디오를 방문
ⓒ얄루 &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지난여름 국제 교류팀 이와모토 후미오 학예사님의 소개로 처음 뵌 노부오 하라다 작가님과 함께 야타이(후쿠오카 시그내쳐 포장마차)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도쿄 실험 예술의 황금기에 활발히 활동하다가 스팟라이트를 떠나 규슈지방에 실험 예술 보급에 힘쓰는 교육자가 되기까지 격변하는 시대의 예술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에게서 듣는 도쿄 에피소드들엔 지금 현대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이름들이 캐주얼하게 등장한다. 사적인 이야기에선 말을 아끼셨지만, 보수적인 규슈지방에 부토댄서인 아내와 후쿠오카에 정착하면서 남부의 전통과 관습에서 겪었을 수많은 마찰과 갈등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후쿠오카에 돌아온 후 퍼포먼스를 할 때 화장을 곱게 하고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입기 시작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교과서에 적히고 유명 예술 잡지에 나오는 예술사만을 접했다면 학교를 떠나 다양한 환경에서 묵묵하게 작업하고 있는 작가들을 만나면서 익숙했던 예술의 ‘거대 서사’에 앞서 ‘개인의 서사’를 생각하게 된다.

촬영 당시에 하라다 작가
ⓒ얄루 &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글/ 얄루 작가
사진/ 얄루&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얄루(Yaloo)
얄루 작가는 인천에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다. 미국 시카고 예술학교에서 학부를 전공하였고 대학원에서는 비디오 아트를 공부했다. 현재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발히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비디오 아트 계에서 권위 있는 프로그램인 비디오 데이타 뱅크에서 린블루멘탈 수상을 하였으며2016년 뉴욕한인예술재단이 주최하는 비쥬얼 아트 어워드에서 금상을 받았다. 벨기에 리지 비엔날레, 퀘벡 비엔날레 등 전세계 크고 작은 도시에서 다수의 전시 경험이 있다.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해드랜드 아트센터, 퀘백 라반데 비디오 등에서 레지던시 작가로 활동하면서 역량을 쌓는 중이다.




인천 중구에서 이집트 예술가가 전하는 이야기1.
중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Notes by an Egyptian resident artist in Jung-gu1
Welcome to Jung-gu

약 한 달 전, 나는 중구에 첫발을 디뎠다. 그리고 인천아트플랫폼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마주했다. 첫날부터 중구는 나에게 사뭇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선사했다. 이런 익숙함은 내 고국인 이집트의 관습과 비슷한 면을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한국의 현대 가정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된 모습이나 중구문화회관에서 본 이미지 때문에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낯설다는 이 감정은 어디에서 온 걸까. 나는 언어장벽에서 비롯되었으리라고 추측했다. 사실 지금까지 방문했던 나라는 모두 내 모국어인 아랍어나 로마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글자를 읽을 수조차 없는 장소를 방문해보는 경험은 나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요한 분위기도 내가 느꼈던 낯선 감정의 또 다른 이유였음을 알았다. 내가 기억하는 이집트는 갈수록 악화된 생활환경 때문에 언제나 억압된 분노를 품고 있었다. 캐나다의 경우, 특히나 지금 사는 토론토는 부조리한 틀로 인해 시민들이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천은 달랐다. 나에게 인천은 평화로운 환경의 대명사였다.

중구처럼 풍부한 문화와 역사로 가득 찬 곳에 도시와 함께 숨 쉴 때 나는 안정감이 차오르는 걸 느낀다. 문화와 역사가 공간을 구석구석 층층이 감싸 안으며 발산하는 온기야말로 캐나다로 온 뒤 진정 그리워하고 있는 부분이다. 중구를 떠난 후 내가 가슴으로 기억하는 것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자유공원에 올라 항구를 바라보거나 제물량로를 걸어 내려갈 때, 곳곳의 작은 요소들은 언제나 내 시선을 붙잡고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나는 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사람들에게 인사하다가 모퉁이를 돌아 닭국수집에 들렀고, 식사 후에는 닭국수집 맞은편의 카페로 향했고, 꽃집 맞은편의 교통경찰관에게 인사했고, 중구에 도착한 첫날 나에게 소고깃국을 끓여주었던 술집 주인과 그의 딸에게 잠깐 들렀다. 그리고 마침내 내 목적지로 향했다. 이 모든 것들이 이곳, 중구에서의 내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였다.

I arrived to Jung-gu a little over a month ago to the beautiful architecture of Incheon art platform. Since the first day, I encountered a familiar yet foreign feeling. Perhaps the familiarity stems from the similarity I find in some of the customs we have in Egypt. Or perhaps in the visuals I came across in the contemporary household in Korea, or the images I saw in the museum of culture in Jung-gu. The foreign feeling however, I believe comes from the Language barrier. It is the first time I visit a place where I can’t read the alphabet. All countries I visited before either spoke Arabic, which is my first language, or used Latin alphabet. The other reason for those foreign feelings stems from the serenity I detect here. Egypt for as long as I can remember has been filled with suppressed anger due to the deteriorating living conditions. While Canada, which is my current place of residence, seems to burden its residents with an unjustifiable stress pattern, especially in the city of Toronto, where I reside. However, Incheon for me is the definition of a peaceful environment.

I find comfort in being in a culturally rich and historical place such as Jung-gu. It provides layers and layers to explore and encompass the space with warmth, something that I really miss in Canada. When I take a walk up Freedom Park and look at the port or when I take a walk down Jemullyang-ro which I now know by heart, new details catch my attention every time and stir thoughts in me. I now walk around and greet people, I first stop by the chicken noodle place around the corner, then the café opposite from it, then the traffic policeman across from the flower shop and the bar owner and her daughter who made me a beef stew the first day I arrived, and afterwards I head to my destination. Each one of them has become part of my life here in Jung-gu.


인천과 개항장
언어 장벽으로 인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어떻게든 채우고 싶었던 나는 인천의 문화에 대해 배우고자 했다. 하지만 이 도시에 대한 문학 서적 중 영어로 된 책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각자료를 대신 이용하거나 영어로 말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과 대화하며 도시와 문화에 대해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이 공간이 지켜온 유구한 역사에 대해 알아갈수록 나는 스스로 겸허해짐을 느꼈다.

나는 바다에 특별한 애착이 있다. 덕분에 어느 장소를 가더라도 바다와 호수와 강을 자연스럽게 찾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지중해의 한 도시에서 자랐고, 나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성장했다. 카이로를 가로지르는 대교를 건너며 나는 매일 나일강을 떠올렸다. 하지만 왠지 인천의 항구는 가깝지만 멀게 느껴졌고, 사실 지금까지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좀 더 가까이에서 탁 트인 전경의 항구를 볼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는 걸 아직은 포기하지 않았다.

Incheon and the open port
I wanted to learn about the culture in Incheon, to get a better understanding of what I am lacking because of language, but I was unable to find any English literature about the city. So, I began to read the city and the culture though the visuals and through talking to the few people who speak English. There is a sense of humbleness that I feel here, which I believe comes from the fact that this place has witnessed so much history.

I have this connection to water that compels me to seek the view of the sea, ocean, lake or river, wherever I am. My father is from a city of the Mediterranean, and I grew up in Cairo where the image of the Nile River while crossing the main bridge above Cairo was a daily encounter for me. However, the port here seems so close yet so far away, inaccessible to me till now. Still, I am in search for a clear and close viewing point.


강화도로의 여행
크게는 인천, 구체적으로는 중구에서의 내 삶에 대해 시각적인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중구에서만 나는 직물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고 소창이라는 이름의 섬유를 알게 되었다. 소창은 100% 면직물로 강화도에서만 나는 특산품이다. 200개의 공장 중 10개만 남아 다음 세대로 물려온 소창 직물 산업은 시간과 현대의 소비패턴을 거스른다.

수리(Suri)는 문화 이벤트를 기획하고 강화도 장인의 작품을 홍보하는 청풍이라는 팀에 소속된 코디네이터로, 이번 여행 전반에 걸쳐 동행하며 지역에 대해 안내해주었다. 우리는 강화도 외포항젓갈수산시장에서 여정을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매우 맛있는 일본식 밴댕이 피자를 먹어볼 기회를 얻었다. 밴댕이 피자는 보통 고대 이집트의 달력에 따라 춘절을 축하하며 이집트에서 먹곤 했던 젓갈을 연상시켰다. 다음 목적지로 우리는 소창체험관을 방문했다. 강화도의 토종 새와 특산품이 새겨진 스탬프를 직물에 찍기도 하고 소창의 역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시청하며 체험관을 마음껏 즐겼다. 쑥차를 마신 후 기념품을 한 아름 선물 받기도 했다. 체험관을 나와서는 안내에 따라 자동차를 타고 오늘날까지 4대에 걸쳐 소창을 생산해온 공장으로 향했다. 생산 과정의 정교함은 물론이거니와 직조기의 아름다운 형태와 주변 풍경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소창의 다양한 사용처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해주던 거주민들의 모습도 매우 인상 깊었다. 공장 견학 후에는 나의 거주지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면직물을 두 손 가득 들고 인천 아트 플랫폼으로 돌아왔다.

A trip to Ganghwa Island
I began to compose a visual story for my project at the residency about Jung-gu specifically and Incheon in general. I was in search for fabric that is made in the area, and I found out about the So-Chang fabric, a 100% cotton fabric, that is local to Ganghwa Island. With about 10 factories out of 200 left that have carried on from one generation to the other. The So-Chang industry, defies time and our modern consumerist patterns.

Suri, a coordinator from Cheongpoong team (a team that organizes cultural events and promotes the work of Ganghwa Island artisans) guided and accompanied me throughout the whole trip. First, we began at the salted fish market, where I was treated to a tasty Japanese Sardinella(UM) Pizza, which reminded me of the salted fish we eat in Egypt (usually in celebration of Spring time as per the Ancient Egyptian calendar.) Then we visited the So-Change experience center, where I played with stamps they have of local birds and products on the fabric and watched a documentary about the history of So-Chang. Then after having ‘Mugwort’ tea (ssook) and given so many souvenirs (Seon-mool.) I was driven to the factory, where the center gets their So-Chang. The factory has been working for four generations. The meticulousness of the steps of production, the visual of the beautiful well-crafted machines along with the surrounding landscape and the eagerness of the residents to tell me about the many uses of the So-Chang fabric was overwhelming. I returned back to Incheon Art Platform with so much fabric for my project at the residency.



중구의 모습
중구에서의 내 경험은 사람과 나누었던 교류와 결코 잊지 못할 다양한 중구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지하철에 앉아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다음 식사 장소를 고르기 위해 돌아다녔던 기억. 한국 고유의 음식과 다양한 퓨전 음식을 체험하던 기억. 거리의 상인들이 호객하는 모습을 보며 아침에 내 잠을 여러 번 깨우곤 했던 카이로의 전통 가구 상인을 떠올리던 기억. 한국어를 못해서 손짓, 발짓을 동원하는 외국인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고 알고 있는 한 두 마디 영어를 써서라도 소통하고자 노력해주던 사람들. 지하철로 가는 길목의 나무에 걸려있던 그물을 바라보며 알렉산드리아의 나무 사이에서 그물을 짜는 어부의 모습을 떠올리던 기억. 이 모든 추억과 중구에서의 또 다른 기억들은 앞으로도 내 생각의 일부가 되고 진한 향수로 남아있을 것이다.

Images from Jung-gu
My experience in Jung-gu is based mostly on simple interactions with the people and on a variation of visuals that I will not forget. Sitting in the subway reading Han Kang’s, ‘The Vegetarian’and walking around to select my next dining experience. Exploring the Korean cuisine and the different fusions. Listening to the street vendorscalling for their merchandise and thinking of the Robabekya (old furniture) vendor that I have so many times woken up to in the morning in Cairo. Talking to the people with my hands and one or two English words that they know and appreciating their patience in dealing with a non-Korean speaker. Watching the fishing net hung between the trees on my way to the subway station and remembering the image of fishermen weaving their nets between the trees in Alexandria. All those memories and many more shall become part of my thoughts and future reminiscences.

글/사진
라미스 하가그(Lamis Hagg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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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공서윤




자연과 문화 그리고 사람이 중심이 되는 축제
라트비아 ‘2018 BALTICA’ 축제에서 ‘아리랑’을 외치다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 국제교류사업인 <인천아라리, 발티카로 떠나는 예술여행>에 참여한 작가의 소식을 싣습니다.’

 

발트3국의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는 매년 돌아가면서 BALTICA 축제를 주최한다. 전통연희단 잔치마당이 BALTICA 축제에 참가한 것은 2007년 에스토니아, 2017년 리투아니아에 이어 이번이 3번째이다. 3개의 나라에서 열리는 BALTICA 축제에 모두 참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다행히도 인천문화재단의 국제교류 지원으로 6월 16일부터 21일까지 진행된 라트비아의 ‘2018 BALTICA’ 축제에 참가하게 되었다.

라트비아는 발트해를 끼고 있는 발트3국 중의 하나이며 인구 190만의 아주 작은 나라이다. 인천이 인구 300만의 도시이니 그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겠다. 이 축제는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RIGA)에서 열렸고 축제기간에 도시는 전통의상을 입은 지역사람들로 북적였다. 최근 한국 여행객들에게 인기를 얻으며 관광을 온 한국 사람도 간간이 마주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60명밖에 거주하고 있지 않고 주라트비아 한국대사관도 불과 3개월 전에 문을 열어 이제 막 우리나라와의 교류가 시작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 교류의 시작점에 축제 무대를 통해 우리나라의 그리고 인천의 음악을 전하고 왔다.

개관 3개월이 된 주라트비아 한국대사관에서 전체 단원과 한성진 대사 대리님과의 간담회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축제가 열릴 때마다 모든 참가팀을 초청해 반겨주는 라트비아 대통령 부부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낮이 가장 긴 날, 남은 밤마저 낮으로 물들이다.
2018 BALTICA 축제의 가장 큰 테마는 바로 ‘하지(Summer Solstice)’이다. 일 년 중 해가 가장 긴 시기를 말하며 위도가 높은 지역에서 나타나는 ‘백야’와 비슷하다. 밤 11시가 넘어야 어스름 해가 지기 시작하고 새벽 3시쯤 해가 다시 뜨기 시작한다. 생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신기한 자연현상이 마냥 신기하기도 하고 덕분에 떠오르는 해를 보며 어리둥절 뜬 밤을 지새우는 경험도 해보았다. 이 축제는 이런 현상을 고스란히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축제이다. 라트비아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 시기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특별한 치즈와 맥주를 만들어 이웃과 나누어 먹기도 한다. 그리고 이 축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Ligo’ 노래를 함께 어울려 화음을 맞추어 부른다. 축제 기간 중 어딜가나 사람들이 ‘Ligo’ 노래를 부르는 통에 우리는 가사의 의미를 물어보기도 전에 따라 부를 수 있었다. 나중에 우리팀 가이드를 통해 물어보니 ‘Ligo’ 는 “함께하자”, “Let’s do it”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리랑을 부르면 마음으로 통하고 함께 부르듯이 라트비아의 ‘Ligo’도 같은 결을 하고 있었다. 이 노래를 함께 부름으로서 가장 쾌청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이 시기를 즐기고 있었고 같은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었다.

밤 9시가 넘은 시간에도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라트비아의 여름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하지 기간에 만들어 먹는 특별한 치즈를 잔치마당 팀에도 나누어 주고 있는 라트비아 꼬마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하지 기간에 만들어 먹는 특별한 맥주를 축제 관람객과 함께 나누는 모습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축제에 참가하며 ‘Ligo’ 노래가 들리는 것 외에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바로 꽃과 식물들이었다. 일 년의 계절 동안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장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는 이 시기를 라트비아 사람들은 너무도 좋아했다. 예로부터 이 시기에 여자들은 곳곳에 피어있는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머리에 쓰고 다녔고 남자들은 나뭇잎을 엮어 머리에 쓰고 다녔다고 한다. 축제 중에도 전통의상을 입은 라트비아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화관을 쓰고 있었다. 축제 무대를 꾸미고 구역을 알리기 위한 장치들도 모두 꽃과 나뭇잎으로 장식했다. 거창하고 세련된 무대는 아니었지만, 자연과 어우러지며 풀 내음 나는 무대가 훨씬 정감이 갔다.

축제 메인 무대에서 Ligo 노래를 부르는 라트비아 지역 예술단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초록빛 가득한 축제 메인무대 주변의 시설물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어른들, 아이들 모두 머리 위에 싱그러운 꽃이 피어있다.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직접 만들어본 화관, 그리고 이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라트비아 지역예술단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서로 다름을 보고, 느끼고, 즐기는 축제
이번 축제에는 총 10개국의 해외 초청팀(한국, 중국, 미국,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조지아, 폴란드, 벨라루스, 독일, 헝가리)과 200여 개의 라트비아 지역예술단이 참가했다. 그동안 많은 해외 초청공연을 다녀봤지만 200개가 넘는 지역예술단이 참가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라트비아 각 지역에서 모인 예술단들은 전통의상과 함께 화관을 쓰고 조금씩 다른 ‘Ligo’ 노래를 불렀다. 마치 아리랑을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등과 같이 지역별로 다르게 표현하는 것 같았다. 200여 개의 예술단이 축제 기간에 곳곳에서 공연했고 축제는 ‘Ligo’ 노래로 넘쳐났다. (이 축제를 통해 ‘Ligo’ 노래 하나는 확실히 배우고 왔다.) 대부분 노래를 하는 공연이기 때문에 공연이 길어지면 지루할 법도 했지만 그런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전통의상을 입고 축제에 참가하면서 관람객들에게 친절히 인사하고 기꺼이 사진도 함께 찍어주면서 축제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 또한 해외 초청팀의 공연들도 다른 나라의 문화와 예술적인 부분들을 충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함께 즐겨주었다. 축제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어느 누구의 잇속이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문화를 보고 느끼고 즐기는 것, 30주년을 맞은 BALTICA 축제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싶다.

전통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어주는 라트비아 지역 예술단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숲 속에 펼쳐진 라트비아 전통춤 워크숍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라트비아 문화부 장관의 초청 자리에서 한국 참가팀의 소감을 전하고
아리랑을 불러 소개하는 서광일 대표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가슴 벅찬 문화 국가대표의 무대
잔치마당 공연의 주제는 ‘인천아라리’로 인천의 소리를 전통예술로써 표현했다. 인천 바닷가에서 불리던 ‘배치기’, ‘술비타령’의 노래와 함께 만선 풍어를 기뻐하던 풍물굿과 춤을 선보였다. 사물 악기의 압도적인 사운드와 상모놀이의 퍼포먼스는 외국인들의 시선을 가히 사로잡았다. 악기를 잘 치기보다 잘 즐기는 공연이 되고자 말 한마디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관객 모두가 손뼉 치며 참여하는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휘날리는 태극기를 뒤로한 공연은 우리나라에서 하는 공연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 고유의 신명과 흥을 손짓과 발짓, 북채와 장구채 끝으로 전할 때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 국가대표로서의 사명감과 책임감을 느낀다.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숨이 턱으로 차오를 때까지 달리는 선수들의 마음은 무대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장구를 메고 뛰는 연희자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입장하는 축제 개막식의 참가팀 퍼레이드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전광판에 소개되는 한국의 잔치마당팀 소개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축제 메인무대 공연을 하고 있는 잔치마당팀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해외 초청팀 중 가장 큰 호응을 얻었던 한국의 잔치마당 공연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가보지 않았던 나라에 가는 것,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 그 사람들과 음악으로 공감하고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설렘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의 존재조차도 생경한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에게 우리 음악을 전하는 가슴 벅참은 이후 또 다른 기회를 만드는 동력이 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우리의 공연을 펼치므로 우리나라 음악의 우수성과 독창성 그리고 누구의 음악과도 어울릴 수 있는 포용성을 알리고 인정받는 것이 우리가 해외에서 공연하는 이유이다. 축구 국가대표가 국민의 응원으로 힘을 내어 골을 넣듯이 우리의 음악과 예술로 국가대표가 된 공연자들에게도 뜨거운 응원이 함께해주길 바라본다.

 

 

신희숙(申熙淑, Shin hee sook),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경영기획팀장

인천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전공하였고 동대학교 문화대학원 지역문화기획학과를 수료하였다. 인천문화재단 전문인력 양성사업으로 전통연희단 잔치마당에서 기획․홍보 업무(2009~2011)를 시작했고 인천문화재단 문화교육팀 문화이용권사업을 담당(2012~2015)했었다. 현재는 전통연희단 잔치마당에서 경영기획팀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2018 BALTICA’ 축제에 잔치마당팀의 통역으로 참가했다.




TAGMAN과 사람들

Tagman Trailer 영상 스틸컷

중국 중경에서 시작한 태그맨(Tagman) 퍼포먼스 작업은 우연과 필연을 거쳐 흥미롭게 진행됐다. 작년 여름부터 구상해오던 프로젝트였는데 사실 중경에서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근본적인 주제와 컵셉은 큰 변화 없이 유지했지만, 그 외에 많은 부분을 수정하며 현지 상황에 맞췄다. 비록 의도대로 진행하지 못한 부분도 생겼지만, 만들어가는 과정이 유연해졌고 활동 범위 또한 방대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중경의 거리를 활보한 태그맨은 예측 불허한 상황들을 마주하며 조금씩 조금씩 완성됐다.

Tagman Drawing 영상 스틸컷

태그맨 프로젝트는 드로잉과 영상이 혼합된 퍼포먼스 작업이다. 삶의 조각들을 의미하는 태그는 SNS에 수집되는 파편화된 일상을 대변하고 그 태그들로 형성된 태그맨은 원시적인 설인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정보 집합체가 된다. 태그맨은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그 사건들은 다시 파편화되어 SNS에 또 다른 태그맨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그림을 조각내서 태그를 만드는 태그맨의 행위는 자신의 삶을 조각내서 가상세계에 공유하며 공감을 사고자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재구성한다.

현지 관계자들의 걱정 섞인 만류에 의해 첫 번째 목적지였던 쥐팡베(Jiefangbei) 거리에서의 프로젝트를 취소했다. 중경을 대표하는 거리인 만큼 경비가 살벌하기 때문에 평범하지 않은 행동으로 군중이 모이게 되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 이유다. 약간의 불만이 있지만, 충분히 우회 가능한 문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개인적인 견해로 만든 도마 위에 타지의 법과 규율을 올려놓을 생각이 없다. 처음부터 이 프로젝트의 의도에 그런 것은 없었다. 그리고 나로 인해 DAC 레지던시에 불이익이 생기는 것도 불필요한 모험이다. 다른 사회에서 경험하는 문화적 충돌은 추후의 화두를 위해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따라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다른 거리를 모색했고 세 군데의 거리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양지아핑 (YangJiaPing)

DAC 레지던시에서 가장 가까운 큰 번화가다. 한식이 너무 먹고 싶어서 이곳에서 한식당을 찾아 헤맸던 적이 있었는데 그날 저녁 작업실로 돌아가는 길에 광장에서 나와서 춤을 추는 엄청난 인파를 보았다. 중국에서는 매일 저녁 해가 지면 사람들이 동네 광장에 나와 춤추며 운동도 하고 신나게 논다. 작업실 근처 슈퍼마켓 앞 광장에도 저녁이면 수십 명의 사람이 모여 춤판을 벌였지만, 이곳 광장은 굉장히 넓기 때문에 춤추는 그룹들만 해도 열 팀이 훌쩍 넘는다. 엄청난 스케일이다. 그때 바로 알았다. 이곳에서 퍼포먼스를 시작하리라는 것을…… 

Squre Dance(광장춤?)이라고 한다.

조용히 나타나서 구석에서 춤을 추고 있었는데 노래가 끝나자 아주머니들이 나를 끌고 가더니 센터에 넣어 줬다.

예전에 좀 놀아봤기 때문에 그럭저럭 잘 따라 했다.

 

양른지예 (YangRenJie)

외국인 거리라고 불리는 놀이동산인데 거리에 상인이 너무 많아서 나도 거리의 상인이 돼버린 느낌이 들었다.

 

씨지예 (XiJie)

사천미대의 신 캠퍼스가 있는 지역으로 젊은 사람이 많고 현대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멋진 동네다. 사람들의 반응도 재밌었고 호응도 좋았다.

Tagman 퍼포먼스 영상 스틸컷

중국에서 작업했던 과정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SNS와의 연동이다. 중국은 중국 밖의 인터넷 세계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의도한 현실과 가상의 연결고리는 막혀있는 셈이다. 따라서 온라인 공간과 중국에서 준비해온 태그맨 퍼포먼스를 연동할 수 없었다. 다만 중국에서도 태그맨 퍼포먼스는 뜻밖의 가능성을 보여주긴 했다. 

씨지예에서 누군가 공유한 영상 스틸컷

중국 ‘따우인’이라는 영상공유 앱에 누군가가 개시한 영상이 꽤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베이징에 있는 Jing의 친구가 우연히 퍼포먼스를 보고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11만 명의 공감, 500개의 댓글과 250회 공유는 꽤 괜찮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퍼포먼스에 관한 정확한 정보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수치가 나의 작업에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예술의 대중적 소비를 실험하고자 했던 나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준 것은 확실하다. 

 

#Tagman and the Vortex of Dancing Fingers
   보고전 오프닝

전시 큐레이팅과 서문을 써준 DAC Director 정투(Zeng Tu) (오른쪽)

전시 오프닝 사진, 십방아트센터 제공

사천미대에서 국제 공공미술 워크숍 강의를 한 덕에 학생들도 많이 방문해서 풍성한 전시 오프닝이 됐다.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정도 많이 든 것 같다. 공항에 앉아 있으니 벌써 그리운 마음이 든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즐기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한국에 돌아가면 그동안 밀린 일정에 쫓겨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겠지만 중경의 좋은 추억과 따뜻한 마음, 고마운 얼굴들을 잊지 않도록 자주 떠올리고 오래 간직하고 싶다.

 

글, 사진 박경종 작가

 

박경종 작가는 페인팅, 애니메이션, 설치,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현실을 빗댄 상상의 공간을 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인천문화재단 예술활동지원 역량강화 분야에 선정되어 중국 중경에 위치한 십방아트센터에서 3개월 레지던시 활동을 하고 있다. (웹사이트 바로가기 ▶)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




빈 시간에 가득한 사건들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인천아트플랫폼 국제교류사업인 <중국십방아트센터>교류사업에 에 참여한 작가의 소식을 격호로 싣습니다.

 

어느덧 중경에 온 지 한 달 반이나 지났다니 시간이 참 잘 간다. 타지에 있으면 매일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며 사소한 발견에 의미를 두어 곱씹어서 생각한다. 덕분에 짧은 시간이지만, 돌이켜보면 많은 장소와 경험이 떠올라 시간이 금세 지나간 것 같다. 사실 이곳에서 체감하는 하루의 속도는 한국에서 보낸 하루보다 훨씬 더 느린데도 말이다. 현지 작가의 말에 의하면 예전부터 ‘젊어서는 쓰촨성에 살지 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 느리고 게으르기 때문에 진취적이지 못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중경도 예전에는 쓰촨성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범주 안에 들어간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춥고 더운 동부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성격은 빠르고 급하지만, 이와 정반대의 날씨에 사는 서부 사람들은 말도 느리고 태평하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게을러 보일 수도 있을 것이고 느긋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본 중경 사람들은 바짝 열심히 일하고 잘 쉬는 것 같다. 나도 중경의 후덥지근한 날씨와 잦은 폭우 속에서 느리지만 알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단기 레지던시의 아쉬운 점은 미술 재료와 도구들을 어느 정도 갖추는 게 좋을지 판단하기 모호하다는 점이다. 특히 외국에서는 더 그렇고 나처럼 여러 매체를 다루게 된다면 고민이 많아질 것이다. 장비를 비롯한 작업 환경조성에 너무 많은 공을 들이기엔 시간이 아깝다. 그렇다고 불편함을 감수해서 작업하기엔 효율성이 너무 떨어진다. 꼭 필요해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촬영 카메라 받침대, 페인팅 테이블, 선반 2개, 그림 걸이 패널은 유효기간이 3개월이기 때문에 오직 시간의 효율성을 중심으로 제작했다. 스튜디오 주변에서 쓰다가 남은 목재들을 주워다가 만들었고 약간의 부실함과 마감처리는 너그럽게 눈감아 주었다.

위의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서 드릴, 망치, 못, 피스는 직접 구매했지만, 그 밖의 장비들은 DAC의 목공실에서 빌려 사용했다. 나무를 자르는 작업 역시 톱밥이 많이 날리기 때문에 목공실에서 해결했다. 이번에 목공실을 사용하면서 알게 된 점은 작가레지던시 이외의 시설들이 특이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목공실, 음악작업실, 사진 스튜디오, 서예교실, 원단염색실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춰 있는데 그곳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이자 책임자가 상주한다. 이러한 시설은 공용공간이 아닌 책임자의 개인 작업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레지던시 입주 작가들은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협업과 작업을 의뢰할 수도 있다. 나의 경험으로 비춰봤을 때 이 방식은 꽤 영리한 세팅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전문 시설들은 아무나 함부로 사용하면 위험할뿐더러 장비가 고장 나기도 쉽다. 다양한 시설을 보유해도 관리가 안 되면 득보다 실이 많고, 일정 시간 방치되면 수습이 굉장히 어려워진다. 보여주기식 행정에서 자주 생기는 일이다. DAC는 전문 예술가이자 시설 책임자의 개인사업 활동을 후원하면서 그들의 시설이 지속해서 활성화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책임자들은 장기간 무료로 작업실을 사용하며 기관을 통한 다양한 교류에 참여할 수 있다. 아울러 레지던시 작가들도 꼭 필요하다면 매일 출퇴근하는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내가 허락을 받고 목공실 기구를 사용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모두 DAC와 마찬가지로 지역 예술과 관계가 있고 문화 연구와 개발이라는 공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Wenchuan Liang의 개인전

동료 레지던시 작가의 개인전 오프닝이 있었다. 도자를 굽는 작가인데 몇 점의 회화 작품을 포함하여 벽에 거는 조소 작품을 다수 선보였다. 판매촉진을 위해 DAC 레지던시 전시공간이 아닌 디자인 가구 전문점에서 도자기 전시를 진행했다. ADC (Art and Design Center)에 위치한 꽤 큰 규모의 가구 매장이었다. 솔직히, 전시 관람을 위해 매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는 아쉬움이 컸다. 아무래도 크고 멋진 가구들이 많다 보니 작품이 그저 소품처럼 보이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웬첸의 작업이 천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 년의 레지던시 기간 동안 90여 점의 작품을 만들었다니 참 부지런하다. 작품을 하나하나 보다 보면 멀지 않은 곳에 진열된 또 다른 작품에 자연스럽게 다가가며 편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구성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의 아쉬움은 차츰 사라지고 오히려 큰 가구들이 도자 작업을 위한 조연 역할을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구에서부터 메인홀 벽까지 걸려있는 조소 작업은 작가의 예술성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쇼케이스 역할을 했다. 그 앞에 멈춘 사람들은 작품에 감탄하며 그 매력에 푹 빠져있었다. 흙으로 구운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곱고 섬세하게 만들어진 작품은 전부 어린아이의 옷 모양을 하고 있었다. 레이스 한 올까지 정교하게 재연한 작품은 마치 깨끗이 빨아 놓은 보들보들한 아기 옷처럼 보이지만, 사실 물질적으로 돌에 더 가깝다. 작가가 현재 겪고 있는 가족사와 자신의 어린 딸과의 관계를 반영한 작품인 것 같다. 아름답고 애잔하면서 정성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Tagman 퍼포먼스 작업

중경 거리의 사람들을 그리는 것은 내가 DAC 레지던시에서 펼치는 작업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 때문에 나는 외출 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거리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점점 사라지는 거리의 노동자 방방, 밖에 나와서 카드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가게 안에서 마작을 하는 사람들, 뛰어노는 아이들, 거리의 고양이와 개들, 오토바이와 자동차, 해가 질 무렵 광장에 나와서 춤을 추는 아주머니들까지 이 도시를 느끼게 해주는 모든 것을 작은 그림으로 그린다. 어차피 외부인의 시점에서는 도시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릴려고 노력했고, 그 그림을 다시 거리에 나온 시민들과 나누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행복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300개의 그림을 인쇄해서 약 2000개의 태그를 만들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정보화되는 현시대를 표현함과 동시에 예술의 소비 가능성을 실험하는 작업이다. 한국에서 1년 가까이 계획했던 작업인데 어쩌다 보니 중경에서 첫 시작을 했다. 중국은 한국과 다른 형식의 SNS와 정보 공유 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특정 부분 수정이 필요했지만, 퍼포먼스 작업을 다른 환경에 맞추어 현지화하는 것 또한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레지던시 매니저 Jing 도 기대에 찬 목소리로 주말에 사람이 붐비는 거리에 나가서 시민들과 소통하는 퍼포먼스를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었다.

하지만 막연한 기대도 잠시, DAC의 홍보를 담당하는 Shao Lihua와 Hu Ke가 미팅을 제안했다. 그들은 나의 퍼포먼스 작업에 위험 요소가 많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퍼포먼스 장소로 염두에 두던 쥐팡베(Jiefangbei) 거리는 사람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이목을 끄는 행위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는 쥐팡베 거리뿐만 아니라, 어느 명소에서나 해당된다. 쥐팡베는 거대한 고층빌딩에 둘러싸인 중경 도심 중심부에 있는 쇼핑거리이자 유명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광장이다. 재작년에 그곳에서 어느 여 작가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돌아다니는 퍼포먼스를 했는데, 사람들이 공연을 볼려고 모여드니까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공안들이 그녀를 잡아갔다고 한다. 섬뜩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는 사복 공안이 있는데 그들은 정치적 선전이나 선동을 감시하고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예술 활동을 금지하거나 처벌하지 않지만,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하거나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면 즉각 수습에 나설 것이라는 것이다. 아뿔싸, 나는 공안에게 잡혀가고 싶지 않다. 내 작업은 정치적 성격도 없지만, 그들에게 내 작업을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게 뻔하다. 너무나 의심스러워 보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긴장감이 넘치지만, 허탈한 웃음과 함께 머릿속에 다양한 그림들이 그려진다. DAC와 나의 안전을 위해 퍼포먼스 위치와 시간을 조정했고 조만간 진행할 작업이 더욱 기대된다.

 

글/ 사진
박경종 작가

 

박경종 작가는 페인팅, 애니메이션, 설치,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현실을 빗댄 상상의 공간을 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인천문화재단 예술활동지원 역량강화 분야에 선정되어 중국 중경에 위치한 십방아트센터에서 3개월 레지던시 활동을 하고 있다. (웹사이트 바로가기 ▶) (인스타그램바로가기 ▶)




5. 꾿빠이, 요코하마

‘지구별 문화통신’은 인천문화재단이 지원한는 다양한 국제교류사업을 통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소개하는 다른나라 문화소식입니다. 

 

뱅크아트는 전시기획과 임대뿐만 아니라 국제 레지던시, 아트스쿨, 미술전문 서점, 카페와 펍을 운영하며 기금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자생적인 수익 모델을 추구한다. 사진ⓒ노기훈

근대라는 SET

벽면에 각인된 뜻 모를 한자들, 기둥에서 떨어져 나간 각기 생김새가 다른 시멘트 파편, 페인트층이 벗겨져 바깥으로 드러난 색 바랜 안층, 어질러진 무늬가 한 곳에 이르러 표식을 형성한 바닥의 얼개. 뱅크아트의 벽면을 매만지면서 100여 년 전 일본 우편선 창고에 누군가 남긴 암호를 해독하겠다는 추리극이 시작된다. 과거에 남긴 흔적과 교감하는 일이야말로 근대가 심어놓은 낭만이 아닐까. 숨을 깊게 들이 마셔본다. 근대에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원혼으로 떠돌다가 공기를 통해 몸 안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그들은 철부지 몽상가의 이성을 마취시킨다. 결박한 곳에 숨겨놓았던 자의식이 몸에서 빠져나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철철 넘쳐난다. 주워 담기에는 이미 홀로되었다는 해방감에 감성을 담당하는 수도꼭지가 박살이 났다. 시간의 축을 마음껏 왕래하는 타임 루프 영화 속 주인공이 감당해야 하는 선행 의식처럼, 그렇게 영혼이 빠져나간 몸을 다른 이에게 내어줘도 좋다는 식으로 의식은 한결 가벼워진다. 꽉 걸어 잠갔던 이성은 새롭게 맞닥뜨린 이국에서 처참하게 벗겨진다.

일본을 돌아다니며 근대의 모습을 회상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할 거라는 기대에 요코하마 곳곳을 꼼꼼히 바라본다. 길거리의 한복판을 다니며 주변을 어긋남 없이 두리번거린다. 길에서 마주치는 낯선 이의 이국적인 생김새에서 동인도 회사의 홀란트인을 발견하고, 도시를 감싼 염분 가득한 바닷바람에서 대항해 시대의 기운을 느낀다. 요코하마는 근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영화로 재현된 세트장 같다. 현대 문화의 최전선에 선 현대미술 작가라는 자격으로 입장했지만 때아닌 자취들 때문에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별스럽지도 않은 것에 골똘히 무한한 경지 속으로 빠져든다. 때때로 시차를 극복하지 못해 새벽인지 저녁인지 모를 정도로 착란을 일으키며 몸과 정신이 따로 노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집으로 돌아오면 무언지 모를 피로감에 사로잡혀 잠자리에 들 수가 없다. 밤낮이 바뀌어 버린 지 오래되었다. 낮에 있어도 밤에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 말을 상실했고, 혼잣말로 한국어를 내뱉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어릴 적 집 나간 할아버지가 돌아와 장시간의 침묵을 이긴 후 헛기침으로 시동을 걸며 이야기해주는 겨울날의 쓰라린 추억담을 듣는 것처럼, 그저 잡히지 않는 뭔가를 떠올리고 다시 재빨리 주변을 살피고 혼자 피식 웃으면서 나만의 근대를 만들어 간다.

일본에게 근대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기억이다. 나가사키에 있는 군함도(端島)는 1974년 폐광 당시 현장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폐허로 남은 아파트에는 소녀의 체취가 감도는 바비인형과 당시 일본 내 여타의 지역에 비교해 풍족한 경제수준을 보여주는 가전제품이 여전히 남아있다. 군함도에서 하나뿐이었던 교실에는 40년 동안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걸상이 한쪽 다리를 잃고 비스듬하게 누워있다.

만약 한국이 군함도의 주인이라면 어땠을까라는 불온한 상상을 해본다. 일단 교실까지 오르는 긴 계단을 보기 좋게 공장식 나무판넬로 덧대어 무릎이 안 좋은 관광객들도 오르기 쉽도록 개조한다. 내부는 석탄 채굴 당시 풍속에 맞게 정형화된 동작으로 멈춘 미니어처를 투명 아크릴 상자에 넣고, 그걸 어린이들이 가까이 들여다보면 열 감지 센서가 반응하여 익히 듣던 성우의 높고 명쾌한 목소리로 광부의 구구절절한 신세 한탄이 또박또박 읊어지는 설비가 갖춰있다. 상상한 김에 하나 더 하자면, 출구에는 광부의 복식을 가져와 얼굴만 뚫어 놓은 입식 POP가 놓일 것인데, 불특정 다수가 지나간 좁은 구멍은 또 얼마나 불결한 개기름을 끈적하게 쌓아갈 것인가.

시간을 인위적으로 깎고 잘라 각색된 공간에는 정치만 있고 이야기가 없다. 단 돈 5000원도 안 되는 시장통 식당에 할아버지들이 공들여서 하는 이야기는 옆 테이블 앉은 젊은 사람을 겨냥한 듯 적잖이 흥분해서 말을 이어가지만, 눈앞에 그 형태는 보이지 않으므로 막연한 판타지의 영역으로만 인정된다. 보고 싶어 손을 이끌어 달라고 해도 남아 있질 않은데 무얼 보란 말인가? 어르신은 걸걸하게 가래를 끓으며 호통을 치지만 사정이 그러하니 손가락이 저절로 굽어 제 얼굴을 가리키는 격이다. 할아버지의 환상과 경험이 섞인 구술은 언제나 사실과는 괴리된 무용담으로 각색되고 늙은이의 과거 미화쯤으로 여겨진다.

기억의 가소성에 따라 보려고 하는 것만 남으며 진실은 결국 닿을 수 없는 먼 공간에서 막연하게 맴돈다. 왜냐하면 그들이 증언한 진술에 증거가 될 물리적인 배경이 남아 있지 않아, 내 생각은 원점에서 시작하여 오로지 판타지의 영역으로밖에 꾸며낼 수 없는 하이퍼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서, 그들의 옛이야기 속에서 실마리를 간직한 공간적 배경이 동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세대를 넘어 눈으로 공유되어야 한다. 과거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이 중첩되어 만날 때 이야기는 입체적으로 재조직된다. 여러 시공간이 하나의 장소에서 섞이면 전후 맥락을 살핀 다음 현시점에서 좌표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방향감각이 생긴다. 앞으로 가든 좌우로 흔들리든 플롯이 생긴다. 그렇지만 우리 사정은 이러하니 대한민국에서 근대가 뭔지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젊은이들은 할아버지가 이야기해주는 과거사에 무관심한 태도를 짓는다. 건축물의 죽음은 대의 민주주의를 잘못 실현한 관과 정치에 책임소재를 돌릴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에게 다가온 잔혹한 현대사에 맞설 수 없이 먹고 사느라 무감각하게 다져진 미의식에 그저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정도 자조에 끝나면 다행인데, 잘못된 미의식은 형식을 파괴하는데 그치지 않고 숨은 진실마저도 손쉽게 은폐해 버린다. 현재의 편의를 위해 에폭시를 뒤집어쓴 역사적 현장은 베수비오 화산 분출물을 뒤집어쓴 로마인을 보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그로테스크하다. 영양섭취와 유산소 운동을 피하고 성형수술만으로는 건강한 노후를 기대할 수 없다.

후지산에 닿은 태양

에노덴(江ノ電)은 가마쿠라의 핵심 교통수단이다. 쇼난 (湘南) 해안을 따라 달리는 구간은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 등 아름다운 바다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에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일본 사람들도 가마쿠라 역에 에노덴이 들어서면 “카와이”하고 사진부터 찍는다.  사진ⓒ노기훈

일본에서 한두 달이 흐르고, 낭만만이 유일한 무드였다던 근대의 표면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사진기를 들고 도쿄 인근의 요코하마와 가마쿠라를 부단히도 산보했다. 동경에서 남쪽을 따라 요코하마와 가마쿠라로 이어지는 관동지방의 험난한 경로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운명을 거스르는 여정이었다.

에노시마(江の島)에 간 날이면 후지산 정상에 해를 걸쳐두고 백석(白石)과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여행했다는 인근의 이즈반도(伊豆半島)를 생각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한 여인을 사랑한 도시 엘리트의 순애보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감정이입은 어려웠다. 하지만 치고가후치(稚児ヶ淵)에서 멀리 후지산을 바라보며 정상에 남아 있는 잔설이 해와 맞닿을 때는 『설국』 후미코의 붉은 볼을 연상케 하며 사진기법 중 하나인 다중노출을 보는 듯 탄식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두 같은 곳을 지그시 바라보며 끌어안고 있는 일본 연인들이 실제로 그 주변에 있었다.

에노시마의 끝자락에 있는 치고가후치(稚児ヶ淵)에 가면 사가미만(相模湾) 너머로 후지산이 가까이 보인다. 관동대지진으로 융기한 지반 덕분에 바다에 인접한 곳에서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 치고가후치는 수행승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동자승이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고 뒤이어 수행승도 따라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사진ⓒ노기훈

밤이 되면 요코하마에서 도쿄 쪽으로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치밀하고 노출에 순응한 낮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나는 밤이었다. 밤을 통과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듯했다. 큰 유흥가만 제외하면 일본의 밤은 유달리 침착했다. 정돈된 거리의 풍경은 일관된 가로등의 화이트밸런스에 맞춰 낮은 음으로 소리를 냈다. 셔터 소리가 정적을 깨며 혹 누군가 잠에서 깰까 불안해 무음으로 바꿔놓았다. 밤에 미명으로 밝히는 것들은 낮의 햇빛에 압도되어 보이지 않지만 밤이 되면 혼잣말을 하듯 작고 희미하게 주변을 밝혔다. 

새벽 3시가 되면 어김없이 24시간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평일에는 대체로 나긋한 푸념같은 것들이 의미를 갖추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같이 자장가처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주말에는 주정뱅이들의 끊임없는 술자리로 식어버린 라면 냄새와 홉 향 가득한 맥주가 은은하게 풍미를 더했다. 첫 차를 타고 돌아올때면 집 앞에 있는 소바 집 자판기 앞에 섰다. 눈을 감고도 자판기 버튼을 찾아 누를 수 있을 정도로 지겹게 먹은 가츠돈, 소바 세트를 뽑았다. 점원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카운터에 표를 내밀며 “아따다카이 소바”라고 몇 안 되는 일본어를 내뱉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날이 밝아와 있었다.

나카메구로(中目黒駅)는 봄이면 메구로가와를 중심으로 벚꽃이 만개한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골목마다 들어서 있다. 여유로운 일상이 매력적인 동네이다. 저녁이 되면 퇴근한 직장인들이 모여든다. 사진ⓒ노기훈

작업이 일단락된 후에 한동안 뱅크아트에 있는 작업실에 앉아서 도서관에 있는 책을 날리듯 살펴봤다. 나에게는 육성에 대한 갈증만큼이나 책을 넘기는 행위가 중요했다. 하지만 책에 적힌 한자는 매번 나로부터 단절되었다. 나에게 있어 한자는 한동안 짧게 공유되었고, 마치 꿈처럼 재빨리 소멸한 암호 같았다. 그들의 문자는 지나치게 무거운 기호였기에 나는 책 속의 이미지만을 여러번 보았다. 심심할 때면 건물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르는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그들만의 야합의 장소를 살펴보기도 했다. 혹시라도 비밀의 장소를 발견하면 내 나름대로 공간을 명명하며 귀퉁이에 작은 글씨를 새겨 넣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었다는 착각으로 일본 생활은 어리석게 지나갔다. 타국에서 철저히 단절되고자 마음먹은 사람이 고독을 사용하는 방법은 이처럼 어리고 에고가 폭발할 지경에 이를 만큼 과민하게 만든다.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방만한 상태가 지속되면, 껍데기가 떨어져 나간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때 만나는 나는 어느 시기에도 속하지 않은 완전한 나이다. 나에게 남은 것은 한 묶음의 자전적 소설과 풍경으로 떨어져 나간 나의 허물이다. 이때 나에 대한 몰입이 가능해지고 나의 이야기가 보인다. 20대에 여유가 있었으면 자발적으로 유학을 가거나 이민을 가 자신을 대면해 볼 걸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작업하는 사람에게 익숙한 환경을 떠나 세달 동안 이국에서 생활하는 것은 새로운 곳에서 작업 그 자체를 진척시키기보다는 나를 멀리서 바라보고 과거보다 더 깊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라는 의미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사진에 대해 생각했지만 어두운 밤에도 필시 사진에 무언가 찍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달과 빛

뱅크아트 레지던시 인근에 있는 오오카(大岡)강 주변으로 하나미(花見) 시즌에만 한시적으로 포장마차가 허용된다. 벚꽃이 질 때면 포장마차도 철수한다. 사진ⓒ노기훈

레지던시 생활이 두 달이 지나면서 차차 익숙해졌던 11월 즈음에, 웰컴 파티에서 처음 날 본 이후로 ‘기훈 상의 행적이 묘연하다’며 다른 사람들에게 의중을 보인 뱅크아트 디렉터 이케다 상에게 그간 작업해 온 이미지를 펼쳤다. 그 이후로 2018년 1월까지 개인전을 위해 시계는 맞춰졌다.

개인전 <달과 빛>은 2018년 1월 26일에서 2월 4일까지 뱅크아트 1층 갤러리에서 열렸다. 사진ⓒ노기훈

 개인전이 마무리되었고 다시 조선총독부와 김영삼 정부에 관해서 생각해 본다. 식민지 시대에 서울이었던 경성의 도시 구조와 토대는 광복 이후에도 이어졌고 험난했던 50년의 협곡을 지나 그동안 돌보지 못한 상처는 비로소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아리기 시작한다. 조선총독부는 일제가 남긴 국권침탈의 상징적인 공간이기보다 지난 50년 동안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얼굴이었다. 조선총독부 폭파를 통해 문민정부가 원했던 것, 그건 아마 일본이라는 이미지를 광복 후 50년의 역사에서 발견해 낼지도 모르는 미래 세대들에게 엄중히 당부하는 절연의 제스춰일까?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날 친구와 광화문 근처를 걸으며 짧은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온 감회를 이야기했다. 서울시의회 옆에 있던 근대 건축물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서로 아쉬워하며 결국 우리가 보는 풍경은 살아남은 것들의 종합병동과 같다고 합의했다.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미명 아래 지켜지는 저 건물들은 언제 끊길지 모르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버티고 있었다.

내친김에 종로까지 걸어갔다. 퇴근길에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건물을 배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 순간 서울 한복판에 거대하게 솟은 건물들을 보며, 시간이 지나면 철거될 것 같은 건물들을 짐작해 보았다. 20년 전처럼 건축물이 대역죄인이 되어 처형 당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시대가 바뀌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고인이 되었고, 실용적인 것에 우리는 눈을 돌린다. 눈은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느리면 변화에 따라가지 못한다. 역사라는 거대 담론의 옳고 그름에 의해 건축물의 존재가 결정되는 세상은 끝이 나고, 이제는 계산기가 주관하는 숫자의 논리에 건축물의 생명이 좌우되는 세상이다.

건물을 부수는 현장에 피어오르는 먼지와 시멘트 덩어리의 환상적인 콜라보를 지켜보며 그 사라짐을 애석하게 바라보는 부재의 낭만은 인간사의 일정한 시기에만 일어난 과거의 양식, 양태, 관습으로 칭해야 하는 건가. 먼 미래에는 어떠한 이유로 건물이 세워지고 무너질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는다. 단순히 수치(羞恥)라는 유교적이고 낭만적인 이유로 조선총독부가 없어질 줄 누가 알았던가.

건물은 여러 가지 이유로 무너지고 다시 세워졌다.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리스트 빈라덴의 주도하에 뉴욕 중심가에 있던 무역 센터는 단 두 대의 비행기가 관통하며 무너져 내렸다. 요코하마의 도시 재건의 이면에는 2차 대전시 연합군의 폭격과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건축물 붕괴가 큰 계기가 되었다. 해가 정상에 얹히는 후지산을 볼 수 있는 에노시마의 치고가후치(稚児ヶ淵) 역시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지반이 해수면 위로 상승하면서 나타났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일몰을 본다. 일본은 2020년에 개최하는 도쿄올림픽을 위해 도시의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진행 중이다. 도시 곳곳에 평화를 상징하는 오륜기가 말끔히 포스터에 박혀 오색찬란하게 빛난다.

모던 보이와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사이에서

나는 도쿄 진보초(神保町)를 걷다가 이상(李箱)이 죽기 전에 살았던 2층 다락방을 상상해 보았다. 20세기 초에 지은 2층짜리 여인숙이 남아있는 거리에서 할 일 없이 다다미에서 뒹구는 이상을 떠올렸다. 그런데 통이 넓은 정장 바지에 포마드를 잔뜩 바른 장기리 머리를 한 20대 초반의 건축기사 이상이 조선총독부 2층 난간에서 각혈하는 장면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조선총독부는 남아있지 않으므로 실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 조선총독부 사진을 모니터에 띄우고 두 손가락으로 확대하여 검은 난간 속을 질주하는 저 무한한 육면각체의 비밀 속으로 잠입하는 것이 유일한 방편 일 뿐. 이상은 왜 앞날이 창창한 조선총독부 건축 기사직을 그만두고 끽다점이나 하면서 시원찮은 글이나 쓰려고 했을까.

건물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 나는 뱅크아트에 있(었)다. 3달동안 일본 우편선 주식회사 창고에 있으면서 유치한 지적 허영을 즐겼고 지금은 없어진 서울의 어느 건축물을 먼 이국의 감상과 연결 짓는 착각에 빠져들며 다중 노출이라는 착시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간 개념을 찾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중에 쓸모 있는 것만 걸러서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그 현실이라는 단면은 나에게 대한민국이다.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간직한 채 살아가면서 이따금 들춰 볼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철거해야 했을까 보존해야 했을까? 김영삼 전대통령은 금융실명제로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는 쓰레기 종량제를 기필코 해야만 했던 시인이었는가? 건축물의 사라짐을 추앙하던 마조히스트였던가? 그 먼지 가득한 순간을 즐기는 미술가였던가? 우리에게 1990년대는 30년대 식민지보다 훨씬 리얼하게 현실을 가로막은 가짜들로 날갯짓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굳빠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위트와 파라독스와……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그대의 작품은 한 번도 본일이 없는 기성품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하고 고매하리다.’ 

이상의 ‘날개’ 중 일부분

 

 글/사진 노기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