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를 느끼며 걷는 인천둘레길

역사와 문화를 느끼며 걷는 인천둘레길
『인천의 둘레길과 종주길, 이야기를 담다』(인천광역시, 2019) 소개- ①

안홍민(인천문화유산센터 연구원)

인천의 둘레길을 아시나요? 등산이나 걷기를 좋아하시면 분들은 잘 아실 수도 있지만 아마 인천시민들 중에서도 “인천에 둘레길이 있었나?”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분도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자주 걸어갔던 길이 인천둘레길인 줄 모르고 걷는 경우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인천둘레길은 인천의 산과 하천, 해안과 갯벌, 구도심 그리고 섬까지 인천의 곳곳을 잇는 길입니다. 계양산에서 시작하여 천마산, 만월산, 문학산, 청량산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인천의 S자 녹지축을 무분별한 도시개발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지역 시민사회가 자발적으로 일어나 녹지축을 잇는 둘레길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인천의 해안과 구도심, 섬까지 길을 이어나가며 총 16개 코스의 인천둘레길이 완성되었습니다.

인천둘레길은 자연환경적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인천 곳곳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여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시민들에게는 건강하게 숨 쉴 수 있는 녹지 공간의 역할을, 동식물에게는 생명을 지켜나가는 소중한 생태 공간의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인천둘레길입니다.

그런데 둘레길에는 자연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는 인천의 역사와 문화가 깃들어 있습니다. 인천이 오랜 시간 만들어온 수많은 역사의 모습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전설들, 또 많은 사람의 이야기들까지. 물론 둘레길은 그냥 걸어도 좋은 길입니다. 하지만 둘레길에 얽힌 역사와 문화의 이야기들을 알고 걷는다면 그 길을 걷는 재미도 배가되고 더욱 가치 있는 둘레길 여행이 될 것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인천문화재단은 지난해 인천광역시와 함께 『인천의 둘레길과 종주길, 이야기를 담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이 책은 인천둘레길에 얽힌 역사, 설화, 유적, 지명 등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제1코스인 계양산부터 제16코스인 장봉도까지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이 소개됩니다.

계양산성이나 문학산성, 참성단 등 인천의 유구한 역사가 담긴 문화유산들,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천마산의 아기장수 이야기 등 설화들, 인천 근대 개항의 역사가 담긴 개항장의 모습들, 대도시 인천의 사람들의 삶이 모습이 녹아 있는 달동네의 구불구불한 골목길 등 총 9장의 내용 속에서 인천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글의 구성은 둘레길을 코스의 순서대로 걸으며 그곳에서 만나는 여러 장소마다 얽힌 다양한 역사와 문화이야기들을 어렵지 않은 문체로 풀어가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책을 읽어 보면 독자 스스로가 둘레길을 걸으며 체험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우리는 인천이라는 도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인천이라는 도시의 내면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책은 둘레길과 함께 인천의 종주길도 소개합니다. 우리 국토의 중요한 줄기인 한남정맥(漢南正脈)의 인천구간에 종주길이 설정되었습니다. 종주길을 걸으며 산의 정상에서 바라본 인천 곳곳의 모습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책과 함께 둘레길을 걸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이 책과 함께 떠나는 둘레길 여행, 그동안 몰랐던 인천의 참모습을 알아가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소래산과 인천 역사

인천광역시 남동구와 경기도 시흥시의 경계를 이루는 소래산은 보물 1324호로 지정된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으로 유명하다. 소정방이 와서 소래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의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평지에 우뚝 솟은 산이란 점에서 옛날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산이었다.

흔히 문학산을 조선시대 인천도호부의 주산(主山), 진산(鎭山)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도호부의 관아가 문학산 북쪽 가까이에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오해다. 하지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도호부의 읍치에서 동쪽으로 24리 떨어져 있는 소래산이 진산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광역 단위를 달리해 있고, 소래산 마애보살입상도 시흥시에 속해 있어 인천과의 관련성을 느끼기 쉽지 않지만, 소래산 전체를 비롯해 시흥시 북부를 포함한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인천도호부의 관할 구역이었다.

그런데 지난 2004년 시흥시의 지표조사 과정에서 소래산 마애보살입상 바로 아래 평지에 귀면(鬼面) 암막새 하나가 발견되었다. 막새는 기와로 지붕을 얹은 뒤 가장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처마 끝에 놓는 기와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둥근 모양의 수키와에 연결되면 수막새, 넓적한 암키와에 연결되면 암막새라 하는데, 소래산에서 발견된 것은 암막새다.

소래산에서 발견된 귀면(鬼面) 암막새

귀신 모양이라고 하여 귀면(鬼面)이라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어리숙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치아를 다 드러낸 입이나 지나치게 작게 묘사된 코, 한쪽으로 쏠린 듯한 눈동자에서 약간은 바보스러운 친근함을 느낄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이 완전한 형태는 아니고 크기도 가로가 11.8㎝, 세로가 5.3㎝, 두께가 2.2㎝에 불과하지만 다행히 얼굴을 알아보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었던 이 막새는 역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연구자들의 견해가 일치하는 소래산 마애보살입상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 같다. 거대한 벽에 새긴 보살상이 있으니, 그것과 연관된 사찰이나 관리용 건물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 기와와 막새를 얹었던 것은 아닐까?

귀면 암막새 탁본

소래산이 고려시대에도 인천의 관할 구역이었고 그런 큰 공력을 들여 불상을 새길만 한 주체로는 인천을 본향으로 하여 고려 왕실과 통혼관계를 꾸준히 맺으며 세력을 떨쳤던 인주이씨 가문을 우선 떠올려 볼 수 있다. 비록 현재의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소래산과 주변의 유적, 유물을 인천의 역사라는 틀 안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소래산이 중요한 것은 인천도호부의 진산이란 것이다. 부평도호부의 진산이 부 관아 뒤쪽에 있는 계양산이었듯 대부분 지역의 진산과 관아는 가까이 있다. 그런데도 인천도호부는 가까운 문학산을 두고 동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는 소래산을 진산으로 삼았다. 추정에 추정을 거듭하는 이야기지만 삼국시대 이래 인천의 읍치가 소래산 가까운 곳에 있다가 조선초기에 현재의 문학산 근처로 옮겨졌을 가능성은 없을까?

조선의 정조 임금은 재위 21년째인 1797년 8월 16일에 김포에서 출발해 수원 현륭원(사도세자 릉)으로 행차하는 도중에 부평도호부를 통과해 인천도호부 경내에 들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바람 깃발 휘날리며 해문을 돌아오니 / 風旂獵獵海門廻
소래산 좋은 경치에 눈이 번쩍 뜨이네 / 秀色蘇來眼忽開
높다란 군자봉을 서로 가리켜 보이어라 / 君子峰高入指點
혹 그 안에 숨은 인재가 있지 않을는지 / 儻非中有隱淪才

〈인천으로 가는 도중에 읊어서 부아에 걸도록 명하고 고을 수령 황운조로 하여금 쓰게 하다〉라는 제목처럼 이 시는 인천부사 황운조가 받아써서 도호부 관아에 걸어 두었을 것이다. 지엄한 임금의 명령이니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고, 임금이 직접 읊은 시이므로 관아에서도 격이 가장 높은 곳에 두었을 것이다.

이처럼 소래산은 인천의 역사와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역사적으로 계양산과 문학산이 주목받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래산에 무관심한 게 현실이다. 그러나 인천광역시의 옛 역사를 온전히 살펴보려면 강화군과 옹진군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계양산, 문학산, 소래산을 같은 수준에서 조사하고 연구해 나갈 필요가 있다.

 

글 /
김락기(인천역사문화센터장)




인천역사 서포터즈 <부평구 근현대문화유산> 탐방기

인천역사문화센터에서는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인천의 문화유산을 온라인으로 홍보하는 인천역사 서포터즈를 운영하고 있다. 서포터즈 역량 강화를 위해 상·하반기 전체답사를 진행하였는데, 2019년 하반기 전체답사는 “부평구 일대 근현대문화유산”을 주제로 진행했다.
부평은 일제강점기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전쟁물자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조병창을 비롯한 군수 공장들이 들어섰다. 그 흔적들은 현재도 다양한 형태로 남아있다.

10월 13일 가을,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부평토굴(부평지하호)이었다. 인평자동차고교와 고물상 사이의 샛길을 따라 올라간 곳에 위치한다. 2016년 부평문화원의 조사를 통해 확인된 토굴은 현재는 사유지이며, 2018년부터 토굴 일부를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부평토굴(부평지하호)안내도 ⓒ부평문화원

안내도를 통해 확인되는 부평의 토굴은 총 24개소에 이른다. 토굴은 A구역, B구역, C구역, D구역 4개로 분류하고 있으며, A구역은 총 7곳으로 산곡동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B구역은 총 4곳으로 현재는 존재하지 않아, 위성사진을 통해서 위치만 추정할 수 있다. C구역은 7곳으로 새우젓을 숙성했던 곳이고, D구역은 총 6곳으로 군부대 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중 우리가 탐방한 곳은 C구역 6호 토굴이다. 부평문화원 김규혁 팀장님의 안내에 따라 차례대로 C구역의 토굴을 외부에서 확인했고, 6호는 내부로 직접 들어갔다.

 

C구역 지하호 외부와 내부

미리 준비한 손전등이 있었지만, 내부로 들어갈수록 너무나 깜깜해 당황스러웠다. 100여 미터 끝까지 들어가는 동안 토굴을 파기 위해 정을 꽂아 구멍을 낸 흔적들과 낙서를 볼 수 있었다. 끝에 다다르자 아무것도 모르고 토굴로 끌려와 강제 노동했던 징용자들을 생각하며 손전등을 모두 끄고 잠시 묵념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손전등을 켜지 않고 눈을 떴을 때도 어둠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잠깐의 어둠에도 이렇게 떨리는데 당시 이곳에서 강제로 일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부평토굴은 일본 육군 조병창 부근에 위치하여 1910년~1920년대 사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 부평지하호에 대한 관련 문서자료를 찾은 것이 없어 당시 사람들의 증언으로 추측만 가능하다. 일본 오사카 육군 조병창 근처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토굴들이 여럿 발견되었다고 하며, 이러한 상황으로 추정해 볼 때 부평에 있는 토굴도 이와 비슷한 용도였을 것이다.

두 번째로 탐방한 곳은 근현대 건축물인 미쓰비시 줄사택, 부영주택, 철도관사 건물이었다.
『관영주택과 사택』을 집필하신 서울시민생활사박물관의 홍현도 학예사의 안내를 받아 탐방을 시작했다. 사택과 주택건물은 일제강점기 한반도로 들어온 일본인 관료와 직원들을 위한 필수 시설들이었다. 이 건물들은 아직 그 가치를 평가받지 못한 비지정문화재이다. 비지정문화재는 제도적 보호 대상이 아니지만, 향후 지정문화재가 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적극적인 보호가 필요하다. 2018년에 답사했을 때만 해도 줄사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일부만 남기고 나머지 (줄사택은) 완전히 사라진 채 공사가 한창이다. 제도적 보호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부평 남부역에 위치한 옛 철도관사다. 부평역은 굉장히 번화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철도관사 일부가 남아 상점과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안내가 없었다면 이곳이 근현대 건축유산이라는 걸 절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인천에는 중구와 강화 외에도 많은 곳에 문화유산들이 있음을 새삼 느낀다. 인천에 있는 다양하고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널리 알려져 지켜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부영주택   구사택

 
줄사택 공사현장   옛철도관사

부평구 근현대건축물

글 · 사진 / 이정화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따라 걷다 – 인천둘레길

우리는 일생 동안 수많은 길을 걷는다. 걷는다고 표현했지만 길이란 단순히 걸어서만 이동하는 곳은 아니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도로도 있고 기찻길도 있다. 또한 바다와 하늘에도 보이지 않을 뿐이지 배와 비행기가 다니는 수많은 길이 있다. 우리의 삶은 길을 벗어나서는 생각하기 힘들다.

우리는 길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접한다. 길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확인하고 그들의 행동과 생각을 알아 간다. 또한 다른 이들과 접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소통과 교류를 하기도 하지만 다투고 분열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길에는 기쁨이 있고 슬픔이 있고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역사도 있고, 문화도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길은 문명의 소통을 상징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에는 고대 로마가 문명의 중심지였음을 나타내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 동서 문명 간의 교류사에서 실크로드라는 길이 차지한 역할은 굳이 따로 말할 필요도 없다.

대한민국 제3의 도시 인천에도 많은 길이 있다. 그 길들은 도시 한복판에도, 바닷가에도, 산속에도, 먼 외딴 섬에도 있다. 또한 인천은 한국이 세계와 통하는 항구와 공항이 있어 바닷길과 하늘길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러한 인천의 다양한 길 중 역사와 문화, 자연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인천둘레길’이다.

인천둘레길은 평소에 걷기나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일 것이다. 물론 많은 일반 시민들은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둘레길이라는 명칭을 모르더라도 평소에 걸어봤던 길일 수 있다.

인천둘레길은 S자 녹지축으로 일컬어지는 인천의 녹지 공간을 무분별한 개발로부터 지키고 많은 시민들이 그곳을 경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2010년부터 조성되었다. 인천의제21실천협의회(현 인천지속가능발전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산이나 하천 주변의 아름답고 걷기 좋은 길을 이어나갔다.

인천둘레길 코스
출처: 인천지속가능발전협의회 안내책자

인천둘레길은 계양산(제1코스)부터 시작하여 천마산, 원적산, 만월산, 인천대공원, 장수천, 소래습지, 문학산, 청량산 등을 거쳐, 송도국제도시, 남서쪽 해안길, 중구와 동구의 구도심까지 이어지는 14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강화도 마니산과 옹진군 장봉도에도 각기 15, 16코스가 지정되어 있다. 인천둘레길은 기본적으로 인천의 소중한 환경과 생태를 경험해 보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공부해보면 그곳에는 다양한 역사와 문화의 이야깃거리들이 쌓여 있다. 그러한 이야깃거리들은 인천의 둘레길을 걷는 즐거움을 더 크게 만들어 준다.

1코스부터 9코스는 주로 산을 지나거나 하천 주변을 따라가는 길이다. 계양산성의 유구한 역사와 이규보의 삶이 스며있는 계양산(1코스), 과거 민중들의 한과 아기장수 설화가 깃든 천마산(2코스), 인천의 역사가 시작된 미추홀의 중심지 문학산(8코스) 등을 경험할 수 있다.

8코스와 9코스가 이어지는 삼호현

계양산의 이규보 시비(詩碑)

둘레길에서는 산을 걷는 즐거움과 함께 도시의 발달과 변천을 경험할 수도 있다. 인천의 구도심을 걷는 11~14코스가 바로 그곳이다. 산지 코스를 지나 인천의 구도심인 중구와 동구 지역의 11~14코스에 들어서면 더욱더 많은 인천의 추억들이 전한다. 구도심의 복잡한 골목길과 달동네를 지나며 도시 서민들의 애환을 느낄 수 있는 11코스, 중구 근대 개항장과 자유공원, 차이나타운을 지나는 12코스, 전쟁의 아픈 기억이 있지만 지금은 문화와 여가의 공간이 된 월미도를 돌아보는 13코스, 북성포구·만석부두·화수부두 등 인천의 옛 부두를 지나는 14코스까지…이 네 개의 코스에는 근현대 인천 도시의 발전 모습과 그에 얽힌 수많은 추억들이 담겨 있다.인천둘레길에는 자연과 생태, 역사와 인간, 문화가 함께 녹아있다. 인천둘레길에 얽힌 다양한 역사와 문화의 이야기에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여 공부해보자. 그렇게 공부하고 난 뒤에는 둘레길을 걷는 즐거움이 더욱 커질 것이다.

월미산(13코스)에서 바라본 바다 풍경

북성포구(14코스)의 모습

글 · 사진 /  안홍민(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강화에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 석탑이 있다고?

강화 장정리 오층석탑 ⓒ문화재청

강화에는 보물 제10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석탑이 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오랜 세월을 견뎌낸 석탑이라니, 게다가 보물이라고 하니 흥미가 생겼다. 강화 하점면 장정리로 차를 몰았다. 화장실만 덩그러니 있는 공터에 차를 세우고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탑을 보러 다가갔다. 그런데 저 멀리 그 보물이라는 석탑의 자태는 자못 실망스러웠다. 형태는 온전하지 못하고 3층 이상의 탑신, 5층 옥개석, 상륜부도 모두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그나마 남아 있는 옥개석도 군데군데 깨져 있었다.

아, 온전하지 못한 형태라도 보물로 지정이 되는구나. 고려시대 탑이 뭐가 있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없다. 일단 고려시대에 현존하는 탑은 거의 손에 꼽을 만큼 적고, 현존하는 것이라면 모조리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니 온전하지 못하면 어떠리. 고려시대 만들어졌다는 것만으로 그 가치는 충분하다. 신라의 완전한 균형미를 담은 3층 석탑을 이어받아 고려시대에는 신라시대 양식이 가미되었지만, 좀 더 다양하게 다각 다층탑으로, 개성미를 뽐내는 것들이 많다.

원래 이 탑은 무너진 상태로 발견되어 석재가 주변에 굴러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1960년대 수리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수리라고 하기보다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석재를 없으면 없는 대로 남겨둔 채 남아 있는 것만 쌓아 놓았다. 그러니 지금 오층석탑이 세워져 있는 자리도 원래 석탑의 자리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석탑이란 원래 절에 있는 건축물이다. 이 석탑이 정말 봉은사에 있던 석탑이라면 주변에 절이 들어설 수 있을만한 절터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절터가 들어설 만한 장소가 없다. 이 근처 어딘가 절이 있었을 것이고 거기 있었던 석탑일 텐데, 아직 절터를 찾지는 못했다. 온전하지 못한 이 석탑은 지금 석탑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자태를 하고 있지만, 고려시대 아마도 강화 천도시기에는 이 근처에 절이 있었을 것이며, 왕이나 주요 관리가 와서 나라의 안위든 개인적인 안위든 부처님께 빌곤 했던 곳이리라.

이 석탑은 봉천산 자락에 있는데, 근처에는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이것 또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615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음봉씨 시조설화와 관련성은 1775년(영조 51)에 세워진 <하음백봉우유적비(河陰伯奉佑遺蹟碑)>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석조여래입상을 보호하고 있는 석상각(石像閣)도 유적비와 같은 연도인 1775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그 전부터 구전되어 오던 내용을 비석에 새기고 각을 세워 기린 것이다. 이 석조여래입상 또한 불교와 사찰을 암시하는 유물이다. 사찰의 구성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불상은 지역적 특색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불상이다.

고려시대 강화천도 시기 강화도에는 왕과 관리들이 머물 궁궐만 지은 것이 아니다. 고려 세조의 창릉, 태조의 현릉을 강화로 이장하였고, 국교가 불교인 국가답게 개성 주위에 있던 주요 사찰도 이름 그대로 옮겨왔다. 강화천도 시기 고려 궁궐에 대한 조사와 위치 재비정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 많았지만, 당시 사찰에 대한 조사는 눈에 띄게 이루어진 것이 없다.

이 일대에 대한 발굴과 추가 조사가 이루어져 절터의 흔적이라도 발견된다면 큰 수확이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강화의 고려시대 보물들은 모두 차로 그 앞까지 갈 수 있다. 이번 주말에는 강화에 있는 고려시대 보물을 찾으러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문화재청

 글/ 홍인희 연구원(인천역사문화센터)




문학산에서 발굴된 특별한 유적

문학산(文鶴山), 수많은 유적과 이야기를 품은 산
남산(南山)으로 불리기도 했던 문학산은 인천도호부 읍치(邑治)의 안산(案山 : 풍수지리에서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위치한 산을 의미)이자 인천을 상징하는 산이다. 지금도 시민의 휴식처가 되어 주는 문학산은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비고가 높아 인천 전역을 조망하기도 좋다. 아울러 문학산은 고대(古代) 인천의 모습을 보여주는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비류백제의 도읍이라고 전하는 문학산성을 비롯해 백제 우물, 백제 사신이 중국으로 떠날 때 출항지로 알려진 능허대(凌虛臺), 선학동 일대의 백제토기산포지 등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문학산은 전근대시기(前近代時期) 전설들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사모지고개에 얽힌 백제 사신의 이별 이야기, 술바위와 삼해주 설화, 갑옷바위와 배바위 이야기, 안관당과 인천부사 김민선 설화 등 문학산은 역사는 물론 다양한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능허대와 아암도
ⓒ화도진도서관
  학익동에서 바라본 문학산과 사모지 고개
ⓒ화도진도서관

 
문학산 기슭의 갑옷바위
ⓒ화도진도서관
  문학산 기슭의 갑옷바위
ⓒ화도진도서관

 

문학산에서 발견된 또 다른 인천 고대의 흔적
이토록 많은 역사의 흔적과 다채로운 이야기를 품은 문학산에서 몇 년 전 깜짝 놀랄 만한 유적이 확인되었다. 바로 문학산 제사유적이다. 유적을 확인한 미추홀구청은 바로 조사계획을 세우고 발굴조사를 의뢰했다. 발굴조사단이 선정되고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자 유적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사결과 이 유적에서는 가로세로 약 3.5m 내외의 제단(祭壇)과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시대 간돌화살촉, 통일신라시대 토제(土製) 잔(盞)과 완(碗 : 음식을 담던 낮은 높이의 용기), 통일신라~고려시대에 이르는 기와 조각, 상감청자 조각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토제 잔 유물은 겹겹이 포개져 바위틈이나 제단 주변에 묻힌 상태였는데 이런 점은 제사 후 의도적으로 묻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문학산의 제사유적에서는 어떤 제사가 이루어졌을까? 발굴조사단은 문학산 제사유적이 바다와 관련이 깊다고 보았다. 이런 추정이 나오게 된 이유는 사모지고개 설화와 유적의 입지 때문이다. 제사유적에서 약 150m 떨어진 사모지고개는 중국으로 떠나는 백제(百濟)의 사신(使臣)들이 능허대(凌虛臺)의 한나루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으로 배웅 나온 가족들의 이름을 세 번 불렀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아울러 유적이 위치한 곳은 바다가 조망되는 서쪽 능선이고 큰 바위에 기대어 제단이 만들어진 점도 이런 추정에 뒷받침하는 근거로 보았던 것이다.

 
문학산 제사유적 모습
ⓒ한국고고인류연구소
  제사유적에서 발견된 토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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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화원년명(淳化元年銘) 기와 출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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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사유적 주변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기와 조각 모습
ⓒ한국고고인류연구소

 

풀어야할 숙제, 제사유적의 성격
그렇게 문학산의 제사유적은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의가 이루어진 곳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제사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논란거리가 있다. 문학산 제사 유적이 과연 항해의 안전을 기원한 유적이었냐는 문제다. 서해안 일대의 전근대(前近代) 포구(浦口) 주변으로는 다수의 제사유적들이 확인된다. 대표적인 것이 부안의 죽막동 유적, 부안 격포리 유적, 흑산도 상라산 유적, 영암 월출산 유적 등이다. 이들 유적은 대부분 서해안 항로 상 기항지(寄港地)로서 해양교류와 관련이 깊다. 그리고 이들 유적에서는 항해의 안전을 위한 제사를 지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제사의 흔적들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제사를 지내고 의도적으로 파손해 묻은 여러 가지 유형의 토기(異形土器 : 특수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상형 토기)와 흙이나 쇠로 만든 모형 말이 공통으로 확인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흙이나 쇠로 만든 말 즉 모형말 유물이다.
일반적으로 말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존재로서 제사 의례에 제물(祭物)로 사용되었는데, 바다를 낀 포구의 제장(祭場 : 제사를 치르던 곳)에서는 수신(水神)에게 바치는 제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말은 전근대시기에 중요한 이동수단이자 군사물자였다. 이 때문에 제사에 바치는 제물로 살아있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모조마를 만들어 제사에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제사에 모조마를 사용하는 사례는 고대~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문학산의 제사유적에서는 말과 관련된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출토된 유물들을 볼 때 청동기시대~고려시대 전기까지 제사행위가 이루어졌지만, 바닷길의 안전을 위해 제사를 지낼 때 표식적(標式的)으로 나타나는 말과 관련된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산 제사유적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현재로서는 정확한 제사유적의 조성 목적은 알 수는 없다. 다만, 인천에서 최초로 발견된 제사유적이라는 점에서 볼 때 유적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문학산 제사유적에 이어 계양산성에서도 제사유적이 확인되었는데 이들을 비교한다면 유적의 성격을 규명할 단서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인천지역 역사학계가 풀어야 할 숙제가 늘어났다.

부안 죽막동 유적 출토 모형 말
ⓒ한국학중앙연구원
월출산 유적 출토 모형 말
ⓒ목포대박물관

 

글/ 정민섭 연구원(인천역사문화센터)




다시 못 올 그날들을 추억함 :
다문화가족 친구들과 함께 한 <2018 삼별초 역사탐방>

고려 무인집정자 최우(崔瑀, ?∼1249)가 집권하던 때 만든 삼별초(三別抄)는 “날쌔고 용감한 자를 특별히 가려 뽑은 3개 부대(좌별초, 우별초, 신의군)”라는 뜻으로, 13세기 대몽항전의 가장 강력한 전투집단이었다. 1231년(고종 18)부터 시작된 몽골과의 전쟁에서 39년 만에 고려의 항복과 동시에 강도(江都,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결정하자 삼별초는 곧바로 이를 거부하고 강도에서 봉기하였다.

다문화 시대 삼별초 역사 이해
1270년(원종 11) 6월 강화도에서 거병하여 진도를 거쳐 1273년 2월 제주도에서 종말을 고한 삼별초 항쟁은 대몽항쟁에 이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국사에서 삼별초 항쟁은 ‘삼별초의 난’, ‘호국의 항쟁’ 등 시대에 따라 극단적으로 평가되어 왔다. 다문화 시대인 오늘날에는 축적된 연구 성과를 토대로 삼별초 역사를 ‘반란집단’이나 ‘호국의 화신’으로만 규정하는 편협한 일국사(一國史)의 관점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사 관점에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원나라의 고려 지배가 나비효과처럼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이어진 것같이 ‘원 간섭기’ 역사가 이후 한국사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고, 삼별초 항쟁도 해당 지역 사회의 역사와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제주도가 말(馬)의 고장이 된 것도 삼별초 항쟁 이후부터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속담으로 대표되는 제주도의 말 문화는, 우리 선조들이 700여 년 전 토착인들과 이주한 몽골인들이 어울려 만들어 낸 다문화사회의 결과물이었다.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는 2018년 11월 22일(목)부터 25일(일)까지 3박 4일간 인천 관내 다문화가족 중고생들과 함께 강화도-진도-제주도 삼별초 항쟁유적을 답사하는 <2018 삼별초 역사탐방>을 진행했다.

2018년은 고려 건국 1,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준비한 <2018 삼별초 역사탐방>은 고려 강화도성이 있던 인천광역시의 역사도시 위상을 높이고, 다문화 미래세대에게 향토 역사유산 이해를 통한 자긍심 함양과 고려 삼별초 항쟁 지역 간 역사문화 교류를 통한 역사 이해 증진을 목적으로 기획한 프로그램이었다.

다문화가족 친구와 비()다문화가족 친구가 함께하다
<2018 삼별초 역사탐방>은 기획부터 미래세대에 초점을 맞추되 사회적 약자 및 소외계층과 함께하는 방향이었다. 참가대상은 자연스럽게 다문화가족 중고생으로 정해졌고, 탐방 목표도 “다문화 시대 미래세대의 한국역사 이해 확대와 향토 역사유산 애호 및 자긍심 확대에 기여”로 설정하였다.

인천광역시교육청과 (인천시 거점센터인) 부평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협의를 통해 다문화가족 중고생이 비(非)다문화가족 친구들과 동행하는 형식으로 탐방단을 구성했다. 계양구·남동구·중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추천한 31명이 참가했는데, 중학생이 27명(1학년 13명, 2학년 9명, 3학년 5명), 고등학생이 4명(모두 1학년)이고, 남학생이 23명, 여학생이 8명이었다.

삼별초, 살기 위해 봉기하다
탐방 첫째 날, 강화도에서는 안양대 김형우 교수님의 안내로 강화 읍내 고려궁지와 외포리 삼별초항쟁비를 답사하면서 강화천도와 삼별초 봉기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고려궁지 승평문 앞에서 김형우 교수님의 설명을 듣는 모습

교수님은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면 그들에게 칼을 겨누었던 자신들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봉기하게 되었다”고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해 주었다. 북방 유목민족 전사집단에 그러한 관행이 있다는 것을 삼별초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별초가 진도를 향해 출발했다는 외포리 포구 근처에 세워진 삼별초항쟁비에서

항쟁비 인근 망양돈대에 올라서는 인솔자 선생님의 지도로 ‘나는 대장이다’ 게임을 하면서 서로 얼굴을 익혔다.

망양돈대 안에서 황은숙 선생님이 가르쳐 준 ‘나는 대장이다’ 놀이

점심을 먹고 748년 전에는 배를 타고 갔지만 우리는 전세버스를 타고 진도로 향했다.

세월호 항적과 같았던 삼별초 항로
탐방 둘째 날도 날씨는 맑고 춥지 않았다. 진도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삼별초 전문가 공주대 윤용혁 명예교수께서 안내하셨다. 신비의 바닷길 기념탑을 잠깐 구경하고 나서 삼별초가 왕으로 세웠던 승화후 왕온(王溫) 무덤으로 향하였다. 윤 교수님은 무덤 앞에서 “따뜻한 이름을 가진 온왕께서 여러분들을 반기시는 모양”이라고 말문을 열며 시종 넘치는 유머 감각으로 삼별초 항쟁 의미에 대해 설명하셨다.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했던 승화후 왕온 무덤에서

윤 교수님과 동행한 사모님도 30여 년 경력의 교육자로서, “자신이 경험한 소중한 추억을 일기로 남겨 자신만의 자랑거리로 삼으라”는 ‘적자생존’의 경험담을 재미있게 얘기해 주셨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분위기를 돋우셨고 삼행시 짓기도 했다. 친구들이 즉석에서 지은 용장성 삼행시 중에는 “감한/ 군 배중손은/ 중의 최고인 용장성을 쌓았네” 처럼, 번득이는 재치가 만만치 않았다.

삼별초 궁궐이 있었던 진도 용장성에서 기념촬영

윤 교수님은 빔프로젝터를 직접 가지고 오는 열정을 보이셨다. 개경이 있는 북쪽을 향해 자리 잡은 용장성(龍藏城) 유적지에서 PPT로 세월호 항로와 같았던 삼별초 항로와 그 운명에 대해 강의할 때는 분위기가 자못 숙연해지기도 했다. 친구들은 온왕 무덤과 용장성에서 보고 들은 삼별초 이야기를 잊지 못할 것이다.

신안선 유물을 보는 학생들

 

점심을 먹고 목포로 이동하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전시관을 견학하였다. 700여 년 전 중국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다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국제무역선이었던 ‘신안선’에 친구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아직은 실물을 직접 봐야 내용을 더 잘 이해하는 듯했다. 첫째 날 낯설었던 친구들이 하룻밤을 자더니 서로 이야기도 나누고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졌다. 전시관 견학 후 광주공항에서 제주도로 날아갔다. 비행기를 처음 타보거나 제주도를 처음 가는 친구가 적지 않았다. 설레고 약간은 흥분한 표정들이었다.

삼별초가 쌓은 환해장성, 제주 역사문화의 상징
셋째 날, 제주도에서 첫 일정은 고구려 담덕(광개토대왕) 이야기를 주제로 한 마상공연 관람이었다. 아이들은 역시 공부보단 노는 걸 더 좋아했다. 금릉 해안에서 비양도가 바라보이는 비췻빛 맑은 바다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모두 즐거웠다.

비양도가 바라보이는 금릉해변에서

제주도에서 삼별초 항쟁 역사는 제주학 전문가 김일우 박사께서 설명해 주었다. 항몽의 거점 항파두성(缸坡頭城) 유적지에서 “제주도는 삼별초 항쟁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으로, 3년여 항쟁 끝에 제주도에서는 고려 사람들과 몽골 사람들이 어울려 독특한 말(목장) 문화를 만들어냈다”고 하면서 “전쟁을 통해 만난 것이 안타깝지만 이민족과의 접촉을 나쁘게만 볼 게 아니다”라고 의미를 말씀해 주셨다. 고개를 끄덕이며 친구들이 진지하게 경청했다. 전시관을 나와 바다가 바라보이는 토성을 직접 걸어보기도 했다.

삼별초의 제주 근거지 항파두성 유적지에서 기념촬영

제주도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 탐방은 국립제주박물관에서도 이어졌다. 제주도의 다른 이름이 ‘탐라(耽羅)’인데, 탐라는 ‘한라산 아랫 마을’이란 뜻으로 고려 때 바뀐 ‘제주’보다 훨씬 오랫동안 사용된 이름이라고 한다. 박물관에서 김 박사님의 안내로 제주의 자연환경이 빚어낸 역사와 문화를 둘러본 후 마지막 일정인 화북 환해장성(環海張城)을 답사했다.

연대에서 환해장성의 의미를 설명하는 모습

“바닷가에 담장처럼 쌓은 환해장성은 제주 역사문화의 상징이다.” 박사님은 봉화를 피우던 연대(煙臺)에 올라 장성을 바라보며 설명해 주셨다. 환해장성은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쌓았다가 삼별초가 다시 빼앗아 쌓은 이래  1830년대까지 왜구와 이양선의 습격으로부터 제주를 지키기 위해 제주 사람들이 계속 쌓았다고 한다. “제주도는 화산섬이라 땅은 척박하였지만 ,전복 등 해산물의 보고였지요. 중앙정부는 특산물을 계속 징발해야 했기 때문에 제주 사람들이 뭍으로 나가는 것을 막아야 했습니다.” 환해장성은 외부의 침입자를 막는 것뿐만 아니라 내부 통제용 성격도 있었다고 설명하셨다.

제주도의 전설적인 자선 사업가 김만덕(1739∼1812)은 눈동자가 두 개라는 이야기, 김만덕의 눈동자는 두 개가 아니라는 논문을 쓴 다산 정약용 이야기 등 김일우 박사님이 들려주는 제주 사람들 이야기에 친구들은 귀를 기울였다. 강화도에서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이어진 삼별초 역사탐방은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환해장성을 답사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친구들의 우정과 배려심을 확인하다
첫째 날 저녁 진도에 도착했을 때 목이 매우 아프고 열이나 힘들다고 얘기한 중학교 1학년 친구 3명이 있었다. 같은 학교에서 온 친구들은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학생 부모님들과 상의한 후 인솔자 고현정 선생님이 진도 병원 응급실로 바로 데리고 갔다. 이튿날 아침에 2명은 나았지만 1명은 열이 내리지 않아 다시 병원엘 갔다. 밤사이 친구가 힘들어해서 덜 아픈 두 친구가 번갈아 간호했다고 한다. 

아픈 친구는 출발 전날에도 감기 기운이 있었지만, 다문화 친구들과 함께 탐방하고 싶어 부모님께 졸랐다고 했다. 잘 먹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귤도 까주고 땀도 닦아주고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빌려주는 모습을 버스에서 보았다. 마지막 날 밤 다행히 컨디션을 회복했는지 간식 시간에 그 친구들은 다른 친구들이 먹기 좋게 치킨과 피자를 테이블마다 옮겨다 놓고, 다 먹은 후에는 정리까지 말끔하게 해 놓고 올라갔다. 그 친구들이 대견했다.

신분증을 두고 와 공항에서 팩스로 받거나, 늦잠을 자서 호텔 아침밥을 먹지 못하거나, 치아 교정기를 잃어버리거나, 휴대폰을 놓고 다니거나, 지갑을 분실했다가 되찾는 등 크고 작은 일이 있었지만 3박4일을 큰 탈 없이 마칠 수 있었던 건 친구들이 서로를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역사탐방 몇 달 전에 다문화 친구를 괴롭히다 친구를 숨지게까지 한 안타까운 일이 인천에서 있었던 까닭에, 첫째 날 인천역에서 14∼17살 친구들을 처음 만난 순간 이번 탐방의 목표를 “안전과 즐겁게”로 생각을 고쳐먹었던 기억이 난다.

김포공항에서 해산 후 귀가하는 길에 참가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좋은 경험을 하게 해줘서 고맙다”는 문자를 받고는 기분이 참 좋았었다. 지금도 <2018 삼별초 역사탐방>을 회상하면 돌발 상황에 식은땀을 흘리며 뛰어다니던 게 떠오르지만, 탐방을 함께 한 친구들에겐 무엇보다 한때의 즐거운 추억이었기를 하는 바람이다.

글 · 사진 /
정학수(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고등학생의 낙서, 징역 4개월 집행유예 4년

1940년 10월 28일 월요일 오후, 인천공설운동장(현재의 도원동 숭의아레나) 야구장 매표소 창구 뒤쪽에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 ‘선지일체(鮮支一体)’라는 낙서가 발견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 탄압으로 조직적인 활동이 어려워진 시점에서 돌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낙서가 나타났으니 일제 당국으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지일체’란 조선과 일본이 하나라는 일제의 기만적 선전 문구인 ‘내선일체(內鮮一体)’를 당시 중국을 가리키는 지나(支那)로 바꾸어 조선과 중국이 하나라는 의미였으니, 발견 직후 인천 경찰은 배후에 중국과 연계된 세력이 있는 걸로 판단했음직도 하다.
‘범인’ 수색에 골몰하던 때 단서는 의외로 쉽게 발견되었다. 매표소 전면 외벽에 앞의 조선독립만세와 같은 필체로 ‘대동상업 입장료(大東商業入場料)’라 쓴 또 다른 낙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대동상업학교(대동세무고등학교의 전신, 서울 종로구 계동 소재)와 관련된 사람이 썼다고 판단한 경찰은 현재의 중구 신흥동에 살며 대동상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18세의 현명림(玄明臨)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체포해 심문했다.
처음에는 낙서한 사실을 부인했으나, 인천상업학교, 인천고등여학교, 인천중학교 습자 담당 교사들의 필적 감정 결과 동일 필체라는 게 밝혀져 나중에는 인정했다고 한다. 현명림은 황해도 옹진군 출신으로 8살 때 인천공립창영소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입학, 같은 학교를 졸업한 후 15세 때 대동상업학교 1학년으로 입학하여 기차로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하던 학생이었다.
일제 경찰의 보고문서에 따르면, 대동상업학교에 입학한 뒤에 포스터에 흥미를 가져 책이나 공책에 연필로 포스터 연습을 위한 낙서를 많이 했다고 한다. 낙서가 발견된 건 10월 28일이었지만 낙서한 날은 2주 이상 앞선 10월 12일 토요일 오후였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는데, 하교하여 3시 30분경 집에 왔다가 혼자 산책하러 나가 공설운동장까지 간 것이다. 야구장 입구에 도착해서 보니 알파벳으로 뭔가 낙서한 게 있어 그걸 보고 낙서 생각이 들어 먼저 매표소 앞쪽에 ‘대동상업 입장료’라 쓴 뒤, 안으로 들어가 ‘조선독립만세’와 ‘선지일체’라 썼는데, 조선이란 말을 우선 쓰고 났더니 다음 떠오르는 단어가 독립만세여서 그렇게 썼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해 11월 19일 인천경찰서장이 경기도 경찰부장 등에게 보고한 문서와 이 문서를 받아 경기도 경찰부장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11월 22일 보고한 문서에는 현명림이 단순히 평소의 버릇대로 낙서한 것으로 평소 온순한 성격에 학업 성적도 늘 상위권일 뿐만 아니라, 사상적 배후 관계도 ‘전연’ 없으며, 그동안 사상 방면의 서적을 읽은 일도 ‘전연’ 없다는 식으로 현명림의 행위가 우발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어 반성의 의사가 분명하여 정상을 참작해야 한다고 기록하며 결국 기소유예가 적당하다는 의견을 붙여 보고했다. 실제 현명림의 행위가 우발적이었는지, 임대업을 하는 현명림의 부친 등 가족들이 구명에 힘써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인천 경찰의 이런 의견은 경성지방법원 검사에 의해 묵살되고 기소되어 1941년 1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고, 판결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 집행유예 4년이었다.
1940년 가을 시점을 생각해 보면 일본 제국주의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전선을 확대하며 조선 등 식민지에서 강압적 통치를 일삼던 때였다. 당시 고등학생을 나이만으로 현재의 고등학생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경찰조차 사상 문제가 없고, 포스터 제작에 취미를 가진 온순한 학생의 우발적 행위라 판단한 사건이 징역 4개월, 집행유예 4년의 판결을 받았다는 건 일제 당국의 위기감이 그만큼 컸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편 그렇게 온순한 학생조차도 ‘조선’이란 단어 다음에 자연스럽게 ‘독립만세’를 제일 먼저 떠올릴 정도로 조선 사람들의 독립 염원이 충만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사건 이후 현명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현재까지는 알 수 없다. 학교는 다시 다닐 수 있었을까? 4년이라는 긴 집행유예 기간에 자책하며 지냈을까? 의문이 든다. 아주 평범한 한 사람의 삶이 식민지라는 시기를 만나 어떻게 어그러지는지 보여주는 사례이자 식민지 인천의 한 청소년을 기억하게 하는 사례이다.

인천공설운동장 1947년 항공영상(인천광역시 지도포털 편집)

글 / 김락기(인천역사문화센터)




강화 돈대(墩臺), 340년 역사의 흔적

강화도에는 다양한 시대의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그래서 강화도에 오면 한국사를 파노라마처럼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강화의 다양한 문화유산 중에서도 강화를 상징하고, 강화의 역사적 특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다면 돈대(墩臺)를 꼽고 싶다.
강화를 방문해서 해안 근처를 지나다 보면 곳곳에서 돈대와 쉽게 마주칠 수 있다. 돈대는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진 경관 좋은 곳에 있는 경우가 많아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사진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올해는 강화에 돈대가 축조된 지 340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으로부터 340년 전인 1679년(숙종5) 조선왕조는 강화도에 돈대를 쌓았다. 중국에서 기원한 군사시설인 돈대는 강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한산성 등 다른 방어시설에서도 돈대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강화 돈대는 다른 어느 곳의 돈대보다 역사적, 군사적으로 특별하고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조선왕조는 두 차례의 치욕적인 호란을 거치면서, 왕조의 보장처이자 국가 방어의 요충지인 강화도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강화도 방어 시설 정비에 나선다. 특히 조선 숙종 대에 큰 노력이 이루어졌는데, 지금 우리가 강화읍을 방문하면 볼 수 있는 강화산성이 수축한 것도 숙종 대이다. 돈대 역시 강화도의 방어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축조한 시설이다.
강화를 사방으로 둘러싼 돈대는 강화가 전략적 요충지이며, 국가방어의 중요한 보루임을 상징한다. 강화의 읍치에 산성을 쌓고 해안가에 돈대를 축조함으로써 강화도는 요새의 섬이 되었다. 이처럼 섬 하나를 요새화하기 위해 섬 주변에 조밀하게 돈대를 쌓은 경우는 강화가 유일하다.

강화돈대 위치도

돈대의 축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당시 병조판서였던 김석주(金錫胄, 1634~1684)였다. 김석주는 왕실의 외척으로서 숙종 초 대단한 권력을 누린 권신이자 공작 정치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1680년 남인이 대거 숙청되고 서인이 권력을 잡은 경신환국(庚申換局)의 중심인물이기도 하다.
김석주는 병조판서로서 1678년 10월 강화도를 살피고 돌아와 숙종에게 지도와 서계(書啓)를 바친다. 그는 강화도의 지세를 살피고서 49곳에 돈대를 설치할 것을 건의한다. 실제 돈대의 축조는 이듬해에 이루어진다. 당초 김석주가 건의한 49돈대 중 불은평(佛恩坪)을 제외한 48개의 돈대가 만들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돈대의 축조에는 어영군(御營軍) 4,262명과 승군(僧軍) 8,900명이 동원되었다. 축조에 걸린 기간은 80일이었다고 한다. 돈대의 성첩(城堞)을 쌓는 데에는 강화도 옆 매음도(현재 석모도)의 해명산 박석이 사용되었다. 해명산 박석은 조선시대 궁궐의 마당에 깔기도 한 석재이다. 해명산에서 박석을 캐서 강화로 옮겨 실제 축조 장소까지 운송하는 작업은 전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석모도 해명산

강화 돈대는 우리 역사의 고난과 아픔이 담겨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19세기 후반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 당시 강화의 돈대에서 수많은 사람이 나라를 지키다 희생당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찾는 유적지이자 관광지인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이 바로 그 장소이다.
48개가 처음 만들어진 후에 6개가 추가 설치되어 강화의 돈대는 모두 54개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전부 온전하게 남아 있지는 않다. 보수나 복원이 이루어진 곳도 있지만, 돌무더기만 남은 곳도 있고 아예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곳도 꽤 있다. 강화의 돈대를 어떻게 관리하고 보존해야 할지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광성보의 손돌목돈대

광성보(광성·손돌목·용두돈대), 덕진진(덕진돈대), 초지진(초지돈대) 등은 일찍이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의 전적지로 개발되어 많은 사람에게 잘 알려져 있다. 강화에 오는 관광객들이나 학생들의 필수 방문 코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명 관광지인 곳 외에도 강화 해안 곳곳에는 다양한 돈대들이 산재해 있다. 아름다운 동막해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초승달 모양의 분오리돈대, 바다 건너 북한 땅을 접할 수 있는 월곶돈대, 오랜 세월의 풍상이 그대로 담겨 있어 신비감마저 주는 초루돈대 등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면 각양각색 다양한 느낌의 돈대를 경험할 수 있다.

분오리돈대

초루돈대

송곶돈대

나들이하기에 좋은 계절 5월이 왔다. 이번 달 주말에는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강화 돈대를 한 번 찾아가는 것은 어떨까? 그곳에서 따뜻한 봄볕을 맞으며 340년 역사의 향기를 느껴보기를 권한다.

글 · 사진  안홍민(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자유공원에서의 단상(斷想)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유공원을 걷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저의 일터인 인천문화재단은 응봉산 자락 자유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동장군이 물러가고 봄이 찾아온 요즈음, 저는 점심 식사 후 운동 겸해서 종종 자유공원에 오를 때가 있습니다. 아직은 다소 쌀쌀한 바람도 불고, 미세먼지의 심술궂은 방해도 있지만 그래도 봄날 자유공원의 풍경은 한가롭고 편안합니다.

공원 여기저기 모여서 담소와 장기로 시간을 보내시는 어르신들, 점심시간 잠시 짬을 내어 아메리카노 한 잔의 여유를 갖는 주변 직장인들, 손 꼭 잡고 데이트를 즐기는 다정한 연인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외국인 관광객들까지….자유공원을 찾으면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그런 일상의 모습에서 저는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데 요새 찾은 자유공원은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자유공원이 가진 역사적 배경과 관계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다시피 올해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3.1운동으로 우리 민족이 독립을 당장 성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3.1운동이라는 전민족적 항거를 통해 독립의 의지를 더욱 결집할 수 있었고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국내외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습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대한국민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한 임시정부 중 한성정부가 있습니다. 한성정부가 중요한 것은 당시 한반도 내에 수립된 유일한 임시정부였다는 것입니다. 1919년 4월 23일 수립된 한성정부는 그해 9월 수립되는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구심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성정부는 인천 특히, 자유공원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 대회가 개최된 곳이 만국공원, 바로 지금의 자유공원이기 때문입니다. 13도 대표자들은 1919년 4월 2일 만국공원에 모여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후 4월 23일 서울 국민대회에서 한성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죠.

우리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모체가 되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성정부 계승을 통해 통합 임시정부가 되었고, 한성정부가 태동한 곳이 바로 만국공원 즉, 오늘날의 자유공원인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현장인 자유공원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올해에는 평소보다 더 의미 깊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자유공원은 100년 전 민족적 에너지의 결집이 이루어진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우국지사들은 민족의 앞날을 고민했고, 임시정부의 수립을 통해 3.1운동의 기운을 이어가려고 했습니다. 자유공원은 독립을 위한 민족의 통합을 상징하는 공간인 것입니다. 인천시민들에게도 자유공원의 역사적 의미를 알릴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자유공원이 과연 통합의 공간일까요?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자유공원은 통합의 공간보다는 갈등과 분열의 공간으로 더 기억되고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로 갈린 우리 사회 갈등의 표본이었습니다.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에 얽힌 문제 때문입니다.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하자는 쪽과 동상을 지키자는 쪽의 대립은 자유공원에서 실제 충돌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지난해에는 동상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각자 나름의 이유는 있겠죠. 우리 근현대사의 갈등과 아픔, 특히 6.25라는 커다란 비극이 얽힌 복잡한 문제입니다. 간단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100년 전 통합의 공간이었던 곳이 오늘날에는 분열의 공간이 되었다는 것은 저의 마음 한편을 아프게 합니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올해, 자유공원이 분열과 갈등을 넘어 통합과 평화의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도 저는 점심시간 자유공원을 걷습니다. 여기저기 일상의 모습들은 여전합니다. 멀리 보이는 월미도의 풍경도 아름답습니다. 맥아더 장군 동상 앞을 지납니다. 동상은 말없이 서 있습니다. 제목은 ‘단상(斷想)’이라고 했는데 생각이 길고 복잡해졌네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글 · 사진/ 안홍민(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