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호흡하는 공연기획자 조화현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오늘과 호흡하는 공연기획자 조화현

류수연

조화현

공연기획자, i-신포니에타 단장
제2회·제3회 순천만국제교양악축제 예술감독과 제8기 인천문화재단 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경인방송 iFM 김성민의 시사토픽에서 <조화현의 문화톡톡>을 맡고 있다.

◆ 본 인터뷰는 2021년 3월 24일, 화상회의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밝혀 둔다.

류: 단장님, 안녕하세요? 항상 가까이에서 뵙다가 이렇게 화상회의로 뵈니까 또 다른 기분인 것 같아요.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화면 뒤로 보이는 집안이 너무 정겨워 보이네요. 지금은 어디신지, 또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조: 하하. 그렇게 보이나요? 저는 오늘 여수에 있고요. 보시다시피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요즘은 주로 꽃을 심고 꽃을 가꾸고 이렇게 지내고 있어요.

류: 지금은 여수에 계시는군요. 여수는 지금 봄꽃이 한창이겠어요? 전에 여수에 갔던 적이 있는데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특히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먹기만 하다 온 기억이 있어요.

조: 그러셨군요. 여기 음식은 정말 맛있죠. 채소 맛이 다른 건 아마도 흙이 좋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여기는 남쪽 지역이라 꽃들이 빨리 펴서 봄꽃이 아주 만개했어요. 인천은 어떤가요?

류: 여기도 벚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만개했다고 할 순 없어요. 다음 주면 인천에도 꽃이 만개하지 않을까 생각돼요.

조: 아. 제가 내일 인천에 가려고 하는데 꽃을 보고 올 수 있겠어요.

류: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해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이 많이 줄어들었던 해였지만, 그래도 단장님께서는 주목할 만한 여러 활동들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어떤 활동들이었는지 잠시 소개 좀 해주세요.

조: 작년에는 정말 힘든 해였어요. 공연도 다 취소되어서, 사실 평소의 절반도 못했던 한해였어요. 그래도 열심히 하려고 더 노력을 많이 했던 해이기도 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2004년부터 실내악단 i-신포니에타를 창단하고 <해설 있는 클래식>이라는 콘셉트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실내악공연을 추구해왔거든요. 그런 경험들이 작년과 올해 많이 현장에 적용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올해는 정말 공연을 거의 하지 못했어요. 가장 최근에는 지난 2월 27일에 여수난화예술창고에서 우리 i-신포니에타 단원들과 거의 자비로 <시골집 음악회>를 열었고, 3월 1일에는 삼일절 기념으로 옹진군청의 초청받아 덕적도에서 연주했어요. 사실 그 이후로는 아직 한 번도 공연을 하지 못했네요.

류: 3개월 동안 2번의 공연이라니……. 말씀만 들어도 공연계가 얼마나 위축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작년에 온라인 공연도 많이 추진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부분들이 공연 현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졌나요?

조: 사실 온라인 공연의 효과에 대해 저는 조금 아쉬움이 많았던 것 같아요. 작년에 사전 녹화로 공연도 해봤고, 또 실시간으로도 공연을 했었는데요. 일단 녹화보다는 실시간이 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녹화는, 제가 봐도 너무 재미가 없고 한계가 많았어요. 그나마 실시간이 그보다는 괜찮은데, 그럼에도 공연영상, 음향 등 퀄리티 문제는 정말 심각하게 다가왔어요.

류: 구체적으로 어떤 지점들이 그랬는지요?

조: 아무래도 온라인으로 실시간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현장공연보다 많은 것들이 더 필요하거든요. 특히 영상 촬영을 위한 스텝과 제반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부분들을 개인단체의 공연에서는 해결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다 보니 지자체나 관에서 주도하는 공연에 비해서는 녹화의 퀄리티가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류: 말 그대로 부익부 빈익빈이 되는 거군요?

조: 그렇죠. 그냥 공연을 촬영하면 관객에게 전달력이 너무 떨어지니까요. 현장에서 느끼는 공연의 느낌이 온라인으로 그냥 옮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 부분에 대한 지원이나 플랫폼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류: 단장님 말씀을 들으니까 슬프다는 생각이 드네요. 열심히 연주했는데 그만큼의 공감을 얻어내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조: 많은 연주자들이 막막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코로나로 인해 활동을 못하는 예술인들이 너무 많거든요. 사실 예술가들의 생계가 연주만으로 꾸려지진 않아요. 연주도 하고 개인 레슨이나 학교 강연도 많이 나가거든요. 그런데 현재는 공연도 없고, 레슨이나 강연 등도 다 막혀버렸으니까 정말 힘든 상황이죠. 그래서 실제로 실업 상태인 예술인들이 많아요. 온라인 공연을 쉽게 대안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여기에 따른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몰리고 있는 것도 문제고요. 기금 딴 것으로 공연하면 되지 않느냐고 쉽게 이야기하는데,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인프라와 스텝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연주하고 녹화해서 올리는 공연으로는 관객들에게 다가설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대면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공연들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공연은 소통이니까요. 특히 연주는 더더욱 그렇고요. 실제로 학교에서 하는 공연은 계속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단 10명이라도 꼭 듣고 싶어 하는 아이들과 만나서 소통하는 공연을 하고자 노력했지요. 그리고 그런 공연을 했을 때 아이들 역시 굉장히 행복해하고 만족해하더라고요. 특히나 코로나로 문화생활이 더욱 취약해진 아이들이 숨통이 트인다고 하더라고요.

류: 단장님 말씀을 들어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지역 공연을 살리기 위해서는 소규모 공연들이 더 활성화되어야 하고, 그런 것들이 온라인에서도 이어질 수 있으려면 그에 맞는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좀 더 많은 지원책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조: 네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좀 더 현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 대표적인 것이 작년에 진행했던 <발코니 콘서트>라고 봐요. 코로나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발코니 콘서트가 확산되었잖아요. 그래서 저희 i-신포니에타도 그런 공연을 했었거든요. 연수구청에서 요청을 받아서 진행했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류: 어떤 공연이었는지 자세히 좀 말씀 부탁드릴게요.

조: 작년 코로나19 이후 4월에 진행했던 건데 당시에 언론에도 많이 보도되어서 들어보셨을 거예요. 처음에 시작한 계기는 고남석 연수구청장님의 제안이 있었어요. 여러 공연이 취소되면서 급박하게 발코니 콘서트를 기획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i-신포니에타와 연수구립관악단의 협업으로 시작되었어요. 우리 i-신포니에타는 2020년 4월부터 한두 달 정도 진행했고, 구립악단은 좀 더 오랫동안 진행했던 것으로 압니다. 급박하게 진행되긴 했지만, 당연히 자신감은 있었어요. 그동안 정말 다양한 무대를 많이 경험했으니까요. 발코니 콘서트는 놀이터 같은 아파트단지의 중심을 공연장으로 상상하면서 레파토리를 짰어요. 공연장소가 아파트 가운데 위치해 있어서 발코니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이며, 장소가 넓으니까 무대를 배치하기도 좋고요. 혹시 내려오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펜스를 적절하게 쳐서 사회적 거리두기도 유지될 수 있도록 구성했고요. 총 공연 시간은 30분 정도로 구성했는데, 다들 아파트 발코니에서 감상하면서 반응이 참 좋았어요.

류: 제가 생각해도 주민들이 너무 좋아하셨을 것 같아요. 저도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 그런 공연이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조: 실제로도 그랬어요. 처음에서 신청한 몇몇 아파트 중심으로 하루에 2번씩 공연했었는데, 이게 소문이 퍼지면서 점점 더 요청이 많이 들어오게 되었지요. 코로나로 인해 모든 것이 침체되었던 시기라서 저희도 관객들도 서로 정말 에너지를 많이 받았어요.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아파트 많은 사람들이 누가 클래식을 듣겠냐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실제 아파트에서 공연을 해보니 호응이 너무 좋은 거예요. 클래식을 처음 듣는데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았고요. 공연 끝나면, 어르신들이 자기 집의 냉장고를 털어왔다며 비닐봉지에 과일 같은 것을 담아서 저희에게 주고 그러셨어요. 너무 감동이었죠.

류: 뭔가 가슴이 굉장히 뜨끈해지는 것 같아요.

조: 그렇죠. 공연할 때마다 저희도 뭉클했으니까요. 그런데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계속 진행하기는 어려웠어요. i-신포니에타는 개인악단이기 때문에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계속 무료공연을 진행하기는 어렵거든요. 단장의 입장에서는 단원들이 적절하게 연주비를 받는 것도 중요하니까 계속하기는 어려웠죠. 그 점이 아쉬웠어요.

류: 이제 날씨가 풀리고 있으니까, 올해도 그런 공연들이 분명 생겨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에는 i-신포니에타의 음악이 다시 인천의 아파트에서 울려 퍼질 수 있겠지요. 또 코로나 중에 기억에 남는 공연이나 활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조: 음. 또 기억에 남는 건 야외 북콘서트 같은 거였어요. 제가 정이연 작가, 이길보라 작가, 이지현 작가 등과 음악이 있는 북콘서트를 했었는데 정이연 작가와 북구도서관 야외공연으로 가을하늘 아래에서 정말 많은 분들과 특히 작가가 감동하는 콘서트를 했고요, 그중에서 특별한 기억에 남는 것은 서구문화재단에서 온라인으로 진행한 이길보라 작가와의 북콘서트였어요. 이길보라 작가는 우리가 ‘코다(CODA, Child of deaf adult)’라고 말하는 경우예요. 부모님께서 모두 청각장애인이신데 본인이 귀가 들리는 청인(聽人)인 경우 이렇게 부르더군요. 그래서 북콘서트 자체도 굉장히 특이하게 기획되었어요. 저와 이길보라 작가 사이에 두 분의 수화통역사를 모시고 수화로 통역하면서 진행되었거든요. 그리고 청각장애인 예술가들이 오셔서 수화 뮤지컬도 진행했고요.

류: 정말 특별한 기획이었네요. 얼마 전에 코다이신 분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굉장히 인상 깊게 보았던지라 어떤 느낌이었는지 궁금해요.

조: 저도 이런 기획은 처음이라 굉장히 특별한 느낌이었어요. 처음에는 온라인으로 북콘서트를 진행할 건데 음악과 함께 해달라고해서 그냥 평범한 공연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청각장애인 분들도 많이 볼 거라는 얘기를 듣게 되면서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일단은 자막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노래 가사나 음악에 대한 설명 등을 먼저 보내드렸어요.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 공연을 진행하면서는 생각이 더 많아졌어요.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분명 4명이 대화를 진행하는데 그중에서 저만 수화를 못 하니까 궁금했지만 멍하니 바라보게만 되더라고요, 청각장애인 분들은 평소에 이런 느낌이겠구나,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고요. 음악이라는 것이 귀로 듣는다고 생각했는데, 수화 뮤지컬을 보면서는 이것이 또 다른 음악이 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에 또 충격이었어요. 수화가 우리가 오직 손으로만 대화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손과 표정과 입 모양이 모두 어우러진 것이더라고요. 또 수화도 나라별로 달라서 그 자체로 각기 배워야 하는 언어라는 것도 놀라웠어요.

류: 기획 자체도 굉장히 좋고, 그래서 관객에게 다가가는 것도 많은 북콘서트였을 것 같아요. 북콘서트는 작가와 대담자가 나와서 대화를 하는 것이 전형적인 모습인데, 음악이 어우러짐으로 인해 그런 전형성이 파괴된 것도 인상적이네요. 이런 방식의 북콘서트는 어떻게 기획하고, 언제부터 시작하셨는지도 궁금해집니다.

조: 제가 처음 북콘서트를 생각하게 된 것은 사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어요. i-신포니에타 창단하고 10주년기념으로 콘서트하우스 현 공연장을 시작하면서 많은 현실에 부딪쳤거든요. 처음엔 매일 연주하고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이라는 문제 안에서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어요. 매일 연주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유료관객을 유치하는 것도 힘들고 연주자들은 무료로 공연을 하게 할 수도 없었지요. 좀 더 다른 특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작가를 모시고, 작가를 위한 연주를 하고, 그 작가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올 수 있는 그런 공연을 기획하게 되었죠. 동인천에 이런 공연장이 있다고 소개도하고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 바로 <조화현의 똑똑 톡톡 북&토크 콘서트>고요, 음악이 있는 공연이었어요. 2014년부터 시작한 북콘서트가 소문이 나면서 점점 도서관이나 기초문화재단 등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요.

류: 작가 자신을 위한 음악이라서 작가님들이 오시면 참 좋아하실 것 같아요.

조: 실제로 작가들이 굉장히 좋아하세요. 북콘서트라는 것이 작가에게는 자기 생각을 다 드러내는 것이라 긴장도 되고 힘들기도 한 부분이 있는데, 공연이 있으니까 또 다르게 느껴지시나 봐요. 제가 북콘서트 전에 미리 작품도 다 읽고 그 작가와 작품을 통해 연상될 수 있는 음악을 준비하거든요. 그러니까 작가 입장에서는 배려해준다는 느낌을 받으시는 것 같아요.

류: 저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관객만이 아닌 자기 자신도 위안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 같아요.

조: 이런 방식의 북콘서트가 얼마 후 꽤 알려져서 수원과 청송, 순천에서도 이런 북&토크콘서트를 기획해달라고 연락이 와서 여러 차례 진행하기도 했어요.

류: 책을 매개로 다른 예술 영역들이 만나는, 이런 기획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저도 언젠가 북콘서트 같은 것을 할 기회가 생긴다면 음악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 그럼 꼭 저를 불러주세요. (웃음) 이런 기획들은 제가 2006년 시작했던 <박물관으로 떠나는 음악여행>에서 김미혜 동시작가와 <동시 따먹기> 같은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어린이들이 직접 동시의 주인공이 되어 무대에서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지요.

류: 근황에 대해 듣다 보니 어느덧 많은 이야기들을 나눈 것 같아요. 이제 조금 진지한 문제로 넘어가 보면 어떨까요?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여러 활동들을 하셨지만,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느끼는 어려움과 문제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 인천의 예술인으로서 느끼는 문제점이나 보완책 같은 것을 말씀해 주시면 어떨까요?

조: 코로나 초반까지 저는 두렵거나 그렇진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이런 상황에는 좀 오랫동안 학습이 되어 있는 편이었거든요. 왜냐하면 예술인에게는 보릿고개가 있어요. 보통 기금사업이 11월에 끝나 정산하고 나면 1월까지는 수입이 거의 없어요. 1월부터 지원 서류를 준비하고, 지원사업에 선정된다 해도 4월쯤에나 지원이 시작돼요. 그래서 실제로 작년에 4월까지는 예전처럼 버텨내고 또 빨리 적응했던 면도 있었어요. 그 시기가 길어지면서 점점 힘들어졌지만요. 그럼에도 계속 조금 더 재미있게, 단원들이 덜 힘들게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를 계속 고민해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극복하려고 하는 만큼 현실적인 지원에 있어서 아쉬움이 드는 것들도 많아지더라고요.

류: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지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조: 문화예술이, 그리고 저는 음악인이니까 음악이 해줄 수 있는 역할은 참 많아요. 특히 이렇게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는 더 그렇고요. 그런데 연주자 역시 한 명의 생활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연주자의 삶이나 생계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요. 제일 힘들었을 때가 공연이 다 취소되는데, 단원들에게 무엇 하나 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기금은 받았는데, 시나 기관에서는 공연을 취소하라는 말만 내려오고, 작년에 실제로 받은 기금이 8, 9월에서야 겨우 집행할 수 있었어요. 공연이 취소되거나 마냥 미뤄졌으니까요. 그냥 모든 것이 정지된 거죠. 아무래도 행정이 느릴 수밖에 없으니 그사이에 연주자들의 생계는 무너져 버렸죠. 사실 예술가들에게는 자신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무대가 더 절실한데, 창작기금을 받는 것만으로 그 기회를 메울 수는 없지요, 그나마도 사각지대에서 받지 못하는 예술인들도 태반이고요. 이번 코로나 속에서, 예술인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정책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 절실하게 느꼈어요.

류: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이네요. 사실 행정이라는 것이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더 그런 것 같아요. 모니터링이나 서류 처리가 대표적인 문제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조: 네, 정말 그래요. 모니터링 같은 경우에도 한 번에 처리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어떤 공연이든 최소한 절반 정도는 보고 모니터링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여러 차례의 공연일 경우에도 단 한 번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아요. 현장과 과정보다는 서류 중심의 모니터링도 많고요. 현장에서 무대를 기획하는 사람으로서는 그런 부분에 아쉬움이 많죠. 예술단체의 평가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서류정산보다는 현장 평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류: 갑자기 <킹덤>을 쓴 김은희 작가의 인터뷰가 떠오르네요. 넷플릭스에서 작업하면서 가장 좋은 점이 뭐냐고 물었더니 “의견 안 주고 돈만 준다.”라고 하면서 웃었던 거였어요. 간섭이 전혀 없다는 거였죠.

조: 하하. 우리 예술인 지원에도 좀 필요한 내용인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이번에는 기금 사업에 거의 지원을 안 했는데, 거기에도 비슷한 이유가 있어요. 같은 공연을 해도 기금을 받을 때와 초청을 받을 때의 대우가 너무 다르거든요. 기금 받는 프로그램 안에서는 전문 연주자에 대한 대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서류도 너무 많고요. 컴퓨터에 입력을 하는데 같은 서류를 제출하는 등 반복적인 일이 많아요. 스마트화된 시대라면 거기에 맞추어 행정을 바꾸어야 하는데 아직 그게 안 되는 거죠. 문화를 전문적으로 아는 분들이 지속해서 행정담당을 해주셔야 하는데 자주 바뀌니까 고질적인 문제들이 고쳐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고요.

류: 불필요한 행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네요. 이제 조금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마지막으로 예술인의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조: 음, 저는 ‘지원도 초청처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초청하는 것처럼 지원하는 것이 곧 예술인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일인 것 같아요. 초청이든 지원이든 같은 문화 활동을 하는 거니까요. 거기에 차별을 두고 문화 활동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좀 고쳐져야 할 것 같아요. 그게 곧 문화적 퀄리티를 높이는 방법이 되는 거죠. 지원금도 인쇄물이나 홍보물 지원보다는 실질적으로 공연자에게 믿고 지원할 수 있는 그런 공연문화와 지원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공연을 하는 예술인들도 비정규직이 아닌 생활이 보장되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류: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꼭 많은 분들에게 이 말씀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엔 꼭 오프라인에서 정답게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조: 저 역시 말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꼭 오프라인에서 봬요.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나와 우리가 연결되는 문화예술강의의 즐거움: 최서연 씨 인터뷰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나와 우리가 연결되는 문화예술강의의 즐거움최서연 씨 인터뷰

홍봄

“무용을 가르칠 때 내가 빨간색이고, 엄마일 때는 파란색이라면 문화강의를 듣는 나는 비로소 내 색깔이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주체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자 인천에 있는 자원들과 연결되는 시간이라고 느낍니다.”

최서연 씨(40세)는 인천에서 나고 자라 지금도 인천에 살고 있다. 인천을 고향이라 생각하지 않으며 컸지만, 지금은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한 아이의 엄마이자 무용강사로 학생들과 만난다. 그리고 인천지역에서 열리는 각종 문화예술교육의 열혈 수강생이다.
지난 3월 말 연수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최 씨는 그동안 들었던 강의와 그곳에서 있었던 기억을 하나둘 끄집어내며 들뜬 표정을 했다. 지금은 다양한 강의를 듣는 것이 삶에 스며들었지만, 처음은 다른 시민들처럼 낯설고 궁금했다.

최 씨가 처음 문화예술 강의를 듣게 된 계기는 반려동물과의 이별이었다. 2017년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그는 인천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하늬바람에서 <반려동물과 문화예술> 강좌가 열린 것을 보고 지원했다. 누구나 조금의 관심만 가지면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 그는 이후부터 <즉흥연극 워크샵>과 <야근대신 바느질>, <창의적 삶 조직하기>, <i신포니에타와 함께하는 클래식 톡톡 ‘들어봄직, 알아봄직’>, <펜 하나로 꺼내는 일상여행> 등 모두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배우고 또 배웠다. 처음 강의를 들으러 다니던 시절에는 4~5살이었던 아이도 동반해서 다녔는데, 그때 받은 배려들이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최 씨는 “당시에 아이를 데려오는 사람이 혼자 밖에 없었어요. 강의는 듣고 싶은데 엄마라서 애는 봐야 하고 난감했죠. 그래도 배우고 싶은 욕심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다녔는데 혹시나 민폐가 될까 항상 걱정했어요. 한 번은 성인들이 집중해서 듣는 강의에 아이를 데려갔다가 안 데려갔더니 오히려 사회자분이 아이를 찾으시더라고요. 열린 강좌이기 때문에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나 와도 된다면서요. 그때 생각했어요. ‘아, 나를 배려해주시는구나. 여기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장이 열리나.’ 그게 큰 힘이 됐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있어 문화예술강의가 하나의 ‘환기’라고 설명했다. 자기 업무와 꼭 해야 되는 역할 외에 나를 돌아보고 환기하고 치유하는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친구와의 수다도 좋지만 너무 자주 하면 소진하는 기분이 든단다. 그때 관심분야의 강의를 들으면 꽉 채워지는 느낌이다.

또한 최 씨는 지역에서 이뤄지는 강의들이 인천이라는 터전으로 삶을 확장하는 매개가 된다고 말했다. 그에게 인천이라는 곳은 잠만 자는 곳이었고, 항상 서울에 가서 일하고 서울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세월 지나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내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예술 강의를 들으며 이런 생각은 더 짙어졌다.

최 씨는 “인천에서 여러 강의를 듣다보면 내가 사는 동네에 안정감이 느껴져요. 아는 가게가 생기고 아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곧 경계심이 풀린다는 것이죠. 인천에 대한 애정이 생기고 궁금하고, 또 찾아보게 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지역의 일원이 되는 경험을 하는 것 같아요. 이런 활동으로 느슨하지만, 네트워크가 생긴 게 가장 좋아요.”라고 소감을 말했다.
그렇기에 그는 더 많은 동네 거점을 활용한 강의들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부러 가야하는 공간보다 시민들이 종종 가는 카페나 식당, 주민센터 등 원래 사람들이 오는 장소에서 뭔가를 했으면 하는 생각도 있다.

최 씨는 “다들 문화를 향유하고 싶고 접하고도 싶은데 방법 잘 모르는 시민들이 많아요. 도서관이나 인천아트플랫폼 같은 곳 말고도 주민들이 자주 오는 장소, 사람들이 편안하게 드나들 수 있는 곳에서 강의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홍보도 중요하겠지요. 인천문화재단 홈페이지를 검색해서 강의 정보를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어린아이를 키워서인지 모르겠지만 전시든 뭐든 온 가족이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더 많아지고 알려졌으면 합니다. 너무 좋은 것을 저만 혜택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참 아쉬워요.”라고 제안했다.

그는 지역 문화강좌의 열혈 수강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무용 강사로 살아가고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용을 통해 스스로 자기를 돌아볼 수 있고 나에서 우리가 될 수 있는 법을 가르친다. 몸으로 움직이면서 배려를 배우고, 상상의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가르친다는 것이 최 씨의 교육 방침이다.

최 씨는 “모든 움직임은 무용이 될 수 있어요. 서로 다른 몸짓을 하면서 다양성을 읽고 이해할 수 있죠. 처음에 이 친구가 어떻게 표현해도 놀리거나 틀렸다고 하지 않도록 받아주는 연습을 한 달 동안 해요. 비난받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 생각이 들면 아이들도 눈치를 보지 않게 되죠. 수업 안에서 서로의 경계를 허물려고 그룹이 교체되는 활동을 계속해요.”라고 설명했다.

문화예술을 가르치고, 또 배우는 그는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연결되는 것’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단다. 개인이 고립되기 쉬운 사회에서 문화수업들을 통해 연결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서로 돌보고 챙길 수 있도록 소그룹 단위의 프로그램들이 많이 늘어났으면 한다.

최 씨는 “요즘 사람들은 꾸준히 내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아요. 문화예술이 일회성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원데이 강좌나 가볍게 참여할 수 있는 강의들이 있으면 좋겠어요. 프로그램을 개설하기 전에 타깃을 두고 조사나 연구를 해도 좋고요. 공간 접근성이 좋든, 내용이 친숙하든 다리가 될 만한 것이 있었으면 해요. 본질을 갖추면서도 사람들이 ‘괜찮네’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죠.”라고 말했다.

배우는 것이 정말이지 즐겁다는 그가 앞으로 꿈꾸는 삶은 지금의 배움을 토대로 더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동네를 만드는 것이다. 마을에서 어르신과 엄마들, 아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벌이고 싶고, 지금은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최 씨는 “제가 사는 중구에는 학령기 아이들 키우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문화 자원이 정말 많아요. 그런 자원을 활용해서 아이들을 안전하게 키울 수 있고, 어르신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문화예술로 가는 길이 아닌가 싶어요. 제 나이 50살이 되기 전에는 지역에 도움이 되면서 재미있는 동네를 만들 수 있도록 역할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어요. 그게 무엇이 됐든 연대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미래를 그리며 웃어 보였다.

인터뷰 진행/글: 홍봄(기호일보 사회부 기자)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김주리

김주리는 자연 요소의 물질적 속성이 상호 관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생멸의 은유를 포착해 물질의 순환과 그 안에서 일시적으로 머무는 시간 경험을 조형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모습 某濕 Wet Matter》(송은아트스페이스, 2020), 《일기(一期)생멸(生滅)》(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2017) 등의 개인전과 《Breaking Ground》(자와르 칼라 켄트라, 인도, 2018) 등 국내외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0년 제10회 송은미술대상전 대상, 2012년 소버린 아시안 아트 프라이즈를 수상했으며, 영국 빅토리아 앤 알버트 미술관, 중국 허난 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모습 某濕 Wet Matter(젖은 흙, 혼합재료, 연필나무향, 505×208×240cm, 2020)

# Q&A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내게 물과 흙이라는 물질은 단순 재료가 아니라 매개체로서, 질료 자체가 가진 미학적 의미를 작업으로 형상화해왔다. 우연히 점토 덩어리가 물통에 담겨 해체되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이 순간의 경험은 내게 물질과 시간,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작업이 취하고 있는 태도는 가벼운 풍자나 냉소주의도 아니고, 사회 현실에 대한 관념주의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접근과도 차이가 있다. 단순한 동병상련, 연민과도 다르다. 좋고 싫음,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렇다’는 것이다. 마치 사람은 흙으로 빚어져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처럼, 머물러있지 않고 일시적이거나 변해가는 과정에서 작업의 메시지가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찰나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내는 좀 더 큰 단위의 시간을 탐색하고, 그것을 작업에 반영하고자 한다. 물질을 작업의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원초적인 원소가 가지는 힘과 그에 파생되는 상상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과 흙, 빛, 소리, 불 등의 매체가 지닌 물질적인 메타포와 시간성을 탐구하는 일은 내게는 지속적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모습 某濕 Wet Matter2(젖은 흙, 혼합재료, 연필나무향, 505×208×240cm, 2020) 표면 질료의 디테일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업(또는 전시)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A. 개인전 《모습 某濕 Wet Matter》(송은아트스페이스, 2020)을 꼽을 수 있겠다. 전시 제목 “모습”은 겉으로 나타난 모양이라는 의미와 젖어있는 상태의 어떤 물질(某濕)을 가리킨다. 문제적 상황의 다층적인 의미를 포함한 전시 제목이 암시하듯, 다중적 오브제가 자아내는 감각을 통해 흙과 물이 지닌 생명의 감각을 체현할 수 있는 형태로 전시를 구성했다. 젖어있는 상태로 유지되는 ‘젖은 흙’은 중국 단동의 압록강 하구 습지 풍경을 모티브로 삼았다. 작품의 거대한 크기는 대상을 한 번에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나는 이를 통해 빛과 색, 질감과 냄새, 소리, 온도, 무게감과 같은 부분적 감각을 활용하여 보이는 것 너머를 감지하는 시지각적 경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했다.

모습 某濕 Wet Matter1(젖은 흙, 혼합재료, 연필나무향, 610×160×680cm, 2020)

전작 <휘경; 揮景>(2011-2017) 시리즈에서는 흙으로 빚은 인체와 건축물에 물을 부어 형상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통해 구축과 훼손에 관한 사회적 맥락과 근원적인 질료의 순환을 이야기했고, <일기(一期)생멸(生滅)>(2017)을 통해 빛과 소리, 냄새, 습도 등의 공감각적인 체험이 가능한 인공 풍경을 조성하여 작업 영역의 확장을 꾀했다.

일기(一期)생멸(生滅)Ⅰ(대부도 흙, 물, 검은 잉크, 들쑥, 백묘국, LED, 목재, 파동기, 흙이 물과 만날 때의 사운드, 타이머, 가변크기, 2017) 일기생멸Ⅰ(계단부분)(흙, 물, 계단에 중력에 의해 흐르게 설치, 가변크기, 2017)

Q.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A. 낯선 곳을 여행할 때, 산책을 하거나 영화를 볼 때, 지인과 대화를 나눌 때와 같은 찰나의 경험과 환기의 순간이 그리고 장소와 환경으로부터 받는 에너지가 작업의 초기 단서가 되기도 한다. 2016년 프랑스의 지방 소도시를 여행하며 인상에 남았던 식물을 서울의 길거리에서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조사 끝에 식물의 이름이 ‘백묘국’이라는 것과 햇빛을 받으면 잎의 색이 하얗게 질리며 생생해지는 반면, 습기가 많은 곳에서 죽어갈 때는 초록빛의 색으로 물든다는 아이러니한 특징을 알게 되었다. 백묘국은 <일기생멸>(2017) 작업에 중요 모티브가 되었다. 그 무렵 작업을 위해 머물던 대부도의 환경 역시 작업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2017년에는 영국과 인도에서 연이어 작업하면서 경험한 기후로 인한 열기, 불에 대한 단상 등은 오랫동안 생각해온 자연의 원소이자 물리적 대상인 ‘불’에 대해 다시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직접 가마에 장작으로 불을 때본 경험은 흙과 물, 불과 땅에 대한 고민을 작업으로 연결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일기(一期)생멸(生滅)Ⅲ(대부도 흙, 물, 검은 잉크, 들쑥, 백묘국, LED, 파동기, 사운드, 타이머, 가변크기, 2017)
일기(一期)생멸(生滅)Ⅰ(덩쿨 부분, 2017) 재배중인 백묘국

Q. 예술,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에 대하여

A. 나는 창작자이자 관람자 그리고 이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는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작업이 어떤 메시지로 남을 수 있을지, 나와 내 주변 나아가 사회의 어떤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해오고 있다. 내 작업의 특성상 전시 공간과 작품의 긴밀성, 관객의 시선과 동선, 대상과 마주했을 때의 몸의 감각과 내재된 기억은 작품의 이해와 소통을 돕는 큰 요소들이다. 전시공간에 일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감각하고 향유하는 관객의 경험이 있을 때 비로소 작업이 완성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한된 시간동안 관객의 몸에 어떻게 감각되고 기억되는가는 작업의 방향을 결정지을 때 큰 부분을 차지한다. 작업의 주요 언어로 작동하는 자연의 미디어는 인간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원소로서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분모가 된다.

Evanescent Landscape – Falcon Pottery(흙, 물, 244×108×53cm, 2017)
영국 세라믹 비엔날레 《Place and Practices》 전시 전경(스포드 공장, 스토크온트렌트, 영국, 2017)

Q. 앞으로의 작업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최근에는 공간 설치 위주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작품과 공간이 상호작용하며 생성되는 에너지는 공간의 특이성과 함께 극대화되기도 하고 공간적 제약이 따를 때도 많다. 이러한 공간 특정적인 작업은 전시 이후 발생되는 변형 또는 폐기에 대한 고민이 따른다. 무엇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반복의 순환과 좀 더 긴 시간 동안 유지되는 예술 작업과의 변별성에 관한 실험을 진행할 계획이다. 나는 스스로 긴 호흡을 갖고 작업에 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지속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동력과 에너지를 잃지 않고 작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호흡의 강도와 깊이를 조절해가며 곡괭이 같은 작업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Landscape-scene03 (디테일)(흙, 물, 360×360×55cm, 2015) 휘경;揮景-h07(흙, 물, 70×70×36cm, 2012)

Q. 작품 창작의 주요 도구, 재료는?

A.

글/사진: 김주리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김보민

김보민은 회화와 드로잉, 벽화 등의 방식으로 개인적 경험을 여러 징후들과 연결시켜 작업한다. 산수화의 맥락 안에서 전통, 현대, 산수, 풍경 그리고 도시가 뒤섞여 엉키는 문화적 지평을 묘사한다. 감정적 경험을 풍경에 대입하고, 기록 밖으로 밀려났던 이야기들을 상상으로 일궈 화면을 구성한다. 전통 기법을 바탕으로 재료의 실험과 변주를 통해 매체의 가능성과 한계를 실험한다. 개인전으로는 《나는 멀리 있었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서울, 2019), 《먼 목소리》(포스코미술관, 서울, 2016) 등이 있다. 《해가 서쪽으로 진 뒤에》(우란문화재단, 서울, 2020), 《One Shiny Day》(뉴델리 인도국립현대미술관, 뉴델리, 인도, 2019), 《정글의 소금》(베트남여성박물관, 하노이, 베트남, 2018), 《Permeated Perspective》(두산갤러리 뉴욕, 미국, 2013) 등 국내외 여러 전시에 참여했다. 뉴욕 폴록-크라즈너 재단 그랜트와 중앙미술대전 우수상을 수상했다.

가회도(모시에 수묵담채, 244x185cm, 2009)

# Q&A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개인적 경험을 여러 징후들과 연결시켜 회화와 드로잉, 벽화 등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산수화의 맥락 안에서 전통과 현대, 산수와 도시의 풍경에서 뒤섞이는 문화적 지평을 묘사해왔다. 역사와 사건, 현재의 시간대가 하나의 축으로 이어지면서 작품 속에서 시각화되고, 나의 감정적 경험을 풍경에 대입하여 기록 밖으로 밀려났던 이야기들을 화면에 담는다. 또한 전통 기법을 바탕으로 재료의 실험과 변주를 통해 매체의 가능성과 한계를 실험하는 것과 동시에, 현대의 실경과 옛것의 교차편집 방식을 통해 전통과의 단절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나는 멀리 있었다(I Was Far Away)》 전시 전경(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서울, 2019)

나의 작품 중 <가회도(Map of Gahoe)>(2009)라는 작업은 북촌 지역을 담고 있다. 이 지역은 많은 사료가 남아있어 연구하기 좋았다. 나는 옛 지도를 보는 것도 구글 지도를 보는 것도 좋아한다. 그러나 웹 지도는 업데이트 과정에 따라 이전의 자료가 지워진다. 나는 이런 점에 아쉬움을 느꼈다. 1세기가 넘도록 그려져 서로 다른 시간대가 한 장면에 공존하는 중세 유럽의 지도처럼, 나는 서로 다른 시간과 이야기가 한 면에 쌓여있는 지도를 그려보고 싶었다.

포옹(비단에 먹과 호분, 31.8×40.9cm, 2018)

나의 작업 과정은 먼저 화판에 장지를 고정하고, 그 위에 색을 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색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것이 좋아 배채를 즐겨 사용한다. 그 위에 원단을 배접해 바탕을 만들고, 화면을 구성해, 밑그림을 그린 후, 전체적인 분위기와 표현 방법을 정해 작업을 진행한다. 이렇게 그림이 완성되면 마감재로 마무리한다.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업(또는 전시)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A. 2019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렸던 《나는 멀리 있었다》는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즈(Burton Holmes)가 1901년 조선의 거리를 찍은 흑백 영상에서 추출한 장면들을 바탕으로 풀어낸 전시였다. 나는 장면 속 인물의 신체를 지우는 대신 거동의 흔적을 남겼다. 이를 통해 거리를 두고 조선을 바라보는 여행자의 시선과 나의 시선을 동일시하면서도, 인물을 타자의 시선에 남겨두지 않고, 그들이 거기에 있었음을 증명하고 기억하면서 상실된 세계를 붙잡고자 했다. 영상 촬영이 홈즈의 미적 호기심 혹은 오리엔탈리즘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일제 강점기의 폭압적 시선이나 전통에 대한 문화적 강박에서 자유로운 거리를 유지한 여행자의 시선을 빌려, 우리의 일부였던 상실된 세계를 바라보고 싶었다. 한때 우리의 일부였으나 먼 곳에 있는 것의 자취를 더듬어 본 전시였다.

고요의 바다(모시와 마에 수묵담채, 금분, 호분, 150x150cm, 2015-2016) (비단에 먹과 호분, 가변크기, 2018)

불확실성과 가능성은 나의 작업의 분기점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 단절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나는 새로운 형상과 이야기를 발견하고자 했고 이 전시는 그런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내가 모르던 내 안의 무엇을 발견하는 방법이다. 새로운 것이 초점 안으로 들어왔고, 좋은 것과 싫은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다시 만들어지고 있었고, 이 변화의 시기는 적절했던 것 같다.

원서도(모시에 수묵담채, 테이프, 150x50cm, 2007) 삼청Ⅰ(모시에 수묵담채, 테이프, 150x50cm, 2008) 삼청Ⅱ(모시에 수묵담채, 테이프, 150x50cm, 2008)

Q.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A. 나는 도시 환경과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래서 새로운 생각을 위한 새로운 풍경이 필요하다. 우리의 전통회화에서도 큰 영감을 받는다. 진경산수화가 그려지던 시기에 실학, 한글 창제, 진경 문학 등의 문화 흐름이 있었다. 이는 중국을 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을 발견하려는 시도였다. 나는 정선의 그림을 통해 그가 우리 땅을 어떻게 보고, 그렸는지, 관습처럼 이어져 온 표현 방식에서 탈피하여 어떻게 자신의 것을 만들었는지 살피면서 환경을 시각화하는 방법에 흥미를 느꼈다. 정선의 그림을 들고 현장을 다니며, 그와 나의 다름을 실감했다. 오늘의 우리는 도시에서 생활한다. 풍경의 변화에 따라 관점도 바뀌기 때문에, 과거의 방식만으로 표현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전통매체와 다른 매체들을 혼용한다.

우물(벽면에 테이핑, 드로잉 설치, 가변크기, 2020)

Q. 예술,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에 대하여

A. 나는 상실된 것을 호출해 현실과 연결한다. 연결을 통해 제3의 의미를 파생시키고, 그 역사와 시간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단절된 공간을 가상으로 연결하고, 오래된 필름 속 인물을 불러내 사라져버린 세계와의 관계회복을 꿈꾼다. 전통은 반복되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전통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에는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관객과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전통의 현대화라는 관습적인 수식에서 벗어난, 보다 구체적인 질문과 시선이 필요하다. 나는 관객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런 것들을 점검하며 다양한 피드백을 듣고, 점검하면서 생생한 의미를 만들고자 한다. 이를 통해 작품의 외연을 넓히고,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감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렬차(벽면에 테이핑, 드로잉 설치, 가변크기, 2019)
《1919년 3월 1일 날씨 맑음(One Shiny Day)》 전시 전경(대구미술관, 대구, 2019)

Q. 앞으로의 작업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문을 열어 낯선 것을 만나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나는 세상과의 관계를 통해 나를 넓힌다. 나는 서구문화의 이입에 의한 타자의 시선이 개입된 개항기에 관심을 가져왔다. 근대화를 둘러싼 사건과 질문이 응축된 시기다. 서울과 평양을 가상의 철도역으로 연결하는 <렬차(The Train)>(2018)와 숭례문의 소실과 복원에 대해 이야기한 <숭례문(Sungnyemun)>(2019)은 사라져버린 세계와의 관계 회복이라는 나의 작업의 주제 의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다층적인 관점들은 전통과 현대의 재맥락화, 제도로서의 전통과 제도 밖 전통에 대한 나의 고민과 질문에 맞닿아있다. 내게 전통은 목표가 아니라 방향이다. 나는 근대화와 도시형성 그리고 우리가 만든 도시 풍경에 대한 관심사를 보다 깊고 넓게 발전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숭례문(Sungnyemun)》 전시 전경(산수문화, 서울, 2019)

Q. 작품 창작의 주요 도구, 재료는?

A.

글/사진: 김보민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문지혜(청년 사진작가)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청년 사진작가 문지혜

“아이들에게 사진을 설명할 때 조리개나 셔터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무도 듣지 않아요. 밝게 찍고 싶은지, 어둡게 찍고 싶은지. 아니면 어떤 느낌을 내고 싶은지. 이런 조언을 해주는 정도가 제 역할이죠. 주민자치나 역량강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시민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수업을 들은 후 전시를 하면 스스로 작가가 됩니다. 그렇게 보면 요즘은 누구나 예술가가 아닌가 싶어요.”

인천에서 사진을 찍는 문지혜(33) 씨는 본인을 ‘예술가’ 또는 ‘작가’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사진을 전공하고 또 가르치는 일과 작품 준비를 동시에 하고 있지만 예술가로 불리기에는 겸연쩍다. 그는 예술의 영역을 나누기 보다 일상생활 속에서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시민들과 가까이 서서 예술을 바라보는 문 씨의 생각은 구분이 없었고 유연했다.

문 씨는 ‘사진을 찍는 예술강사’로 스스로를 설명한다. 그가 규정한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것이 현재 주력하고 있는 작업이다. 문 씨는 ‘사진 찍는 예술강사가 기록하는 부평 이야기’를 테마로 매일 부평캠프마켓을 기록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집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보이는 캠프마켓을 무의식적으로 찍어오다가, 지난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사진을 남긴다.

문 씨는 “지역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만들고 싶었는데, 일반사람들은 관련 문서나 자료를 해석하고 공부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너무 상세하게 들어가면 시민들이 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저는 시민과 찍는 사람의 중간 입장에서 그 정도를 조율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매일 찍은 사진에 글을 곁들여 보는 이들에게 쉽게 다가갈 방법으로 기획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가 기록하는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2018년 인천문화재단에서 진행한 ‘한·중 사진가, 강화도를 만나다’였다. 1박 2일 동안 강화도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강의를 듣는 과정에서 감명을 받았다는 것. 특히 과거 누군가가 조사해 둔 자료를 통해 역사를 편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도 기록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좋은 역사든, 나쁜 역사든 사람들이 알고, 서로 이야기하면서 선택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지금 특별히 미군기지를 기록하는 이유는 아직 활용방안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활용방안을 찾아가는 논의와 그 이후에 시민들이 미군기지를 접하는 과정에서 문 씨의 사진이 하나의 기록으로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미군기지 근처에 쭉 살아오면서도 실제 어떤 문제가 있었고 그 가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주민들이 많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서다.

문 씨가 도시재생사업 대상지를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문 씨는 올해 부평구 주민 8명과 굴포천 일대를 기록하고 자료집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지난해에는 서구 가정집에서 도시재생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주민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느낀 점은 주민참여 사업들에 좀 더 목적부여가 됐으면 하는 것이다.

문 씨는 “도시재생이나 문화도시를 조성한다고 해서 주민참여 프로그램이 많이 진행되는데, 깊숙이 들어가면 내용이 다 똑같고 목적 부여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큰 틀만 바뀌고 내용은 똑같다고 할까요. 내년에 주민들과 좀 더 의미 있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 중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사진을 찍는 예술강사’라는 정체성처럼 문 씨에게 가르치는 일은 중요한 삶의 부분이다. 지난 2015년부터 예술강사로 일해온 그는 아이들이 사진을 찍기 전과 후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꼭 가진다. 처음에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을 때는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면, 이제는 휴대폰의 보급으로 사진 찍는 것만으로는 의미부여가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수업에서도 사진을 꼭 출력해 들여다보곤 한다.

문 씨는 “수업을 하면 한 번이라도 결과물을 출력하려 해요. 핸드폰으로 보면 그냥 넘겨버리는 사진도 뽑아서 보면 무엇을 찍었는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보게 되거든요. 이 사진을 찍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딜 찍었는지 소소하게 이야기를 하며 자기 사진을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렇듯 강사로 활동하며 사진을 찍어온 그에게는 예술과 교육을 구분 지어 평가받는 경험이 잦았다.

2018년 영종도에서 가족단위로 진행한 프로그램이 그러했다. 당시 영종도에는 학교가 적은데다 복지관 등 기반시설이 적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놀기 위해서는 인라인 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에 문 씨는 초등학생을 포함한 가족들을 모아 염전 등 주변을 다니며 캠프를 하듯이 사진을 찍은 기획을 해서 지원사업 신청을 했다. 하지만 이 기획은 심사 과정에서 ‘예술이 아닌 교육’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결국 문 씨는 사비를 들여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참여 가족들과 함께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그는 여전히 예술과 교육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문 씨는 “연륜이 있으신 분들은 본인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 굉장히 어려운 단어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요즘 전시를 봤을 때는 그렇지만은 않아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강아지와 동반할 수 있는 전시회도 나오고, 설치미술들도 요즘 굉장히 많아졌죠. 물론 이게 예술이냐 아니냐 논란도 많아졌고요. 대림미술관에서 폴메카트니 전시를 했을 때도 전시관에 사진을 찍으러 온다는 것에 비판이 일었지만 모든 추세가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 예술이라는 것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어야지 맞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반문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모든 시민들이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역문화인력들이 지속해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재단사업 또한 양성과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후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판들이 계속 열릴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문 씨는 “너무 많은 양성과정이 있는데 거기서 끝나는 게 좀 아쉬웠어요. 물론 생업이 있고 자기 일을 해야 하니 이어질 수 없는 이유에도 공감이 가고요. 그래도 힘들게 배출해 낸 지역의 문화인력들이 다시 현실로 돌아가 의미가 없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한 과정을 끝난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투입해서 활용해볼 기회가 작게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바랐다.

홍봄(기호일보 기자)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김창수(문학평론가)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도시인문학자 김창수

김창수 : 문학평론가, 前 인천연구원 부원장

도시인문학자로서 오랜 시간 인천을 연구하였다. 인천학연구원의 상임연구원을 거쳐 인천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과 도시정보센터장, 부원장 등을 역임하며 인문학적 관점 위에서 인천이라는 도시를 연구해왔다. 지난 2019년 인천연구원에서 퇴임한 이후 ‘자유인’을 자처하며 강의와 집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본 인터뷰는 2단계 상황에서 진행되었지만, 날로 심각해지는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방역을 준수하기 위해 실시간 화상회의를 통해 진행되었음을 밝혀 둔다.

류: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코로나19가 너무 심해져서 화상회의를 통해 뵙게 되니까 아쉽지만, 또 화상회의는 이 나름대로 새로운 분위기가 있네요.

김: 요즘은 강의도 회의도 줌으로 하니 적응이 된 것 같아요.

류: 저도 아무래도 지난 1년을 거의 줌으로 수업을 하다보니까 이제는 줌으로 회의하고 사람 만나는 것이 어색하지 않더라고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아무래도 선생님께서 인천연구원에서 퇴임하신 후에 처음 뵈었는데 얼굴이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인천연구원에서 퇴임하신 지 꼭 1년인데 퇴임 이후의 근황을 좀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 예, 대부분을 집에서 보냅니다. 못 보던 책을 마음껏 읽고, 평소에 쓰고 싶었던 글도 좀 쓰고.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평생 잘 안 했던 것들을 마음껏 하고 있어요. 설거지와 방청소 같은 것도 잘하고요. 최근에 쓰레기가 갑자기 너무 많아져서, 아무래도 배달을 많이 시키다 보니까, 분리수거도 열심히 하고, 아주 가정적으로! 지내고 있어요.

류: 저와 생활이 비슷하시네요. 아무래도 코로나19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김: 작년 12월에 퇴임할 때만 해도 꿈에 부풀어서 인천 지인들과 모여서 출판기념회를 겸해서 약간의 포부를 밝혔던 바 있어요. 좀 자유로워지겠다. 자유인이 되겠다. 책으로부터의 자유, 자료로부터의 자유 이런 것을 말했는데. (웃음) 그리고 발로 걸으면서 살아보겠다,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때 계획은 전국의 주요 도시를 1주일씩 둘러보자, 뭐 이런 계획을 세웠었죠. 왜냐하면 우리가 해외여행을 많이 가는데 정작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 안의 도시를 안 가본 경우가 많거든요. 일하러 다니거나 기껏 저녁이나 먹거나, 아니면 그냥 돌아오고. 이런 식으로 살아왔더라고요. 내가 특별히 애국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터전에 대해서 무심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었죠. 코로나 때문에 실행을 못했지만, 그래도 몇 군데는 다녀왔어요. 강원도 영월, 경북 영양, 이런 곳을 다녀왔어요. 제가 어릴 적에 영양 근처에서 좀 산 적도 있었고, 영양은 조지훈 시인의 고향이고 소설가 이문열도 살고 그랬던 곳이거든요. 대구도 잠깐 다녀왔어요. 그때가 대구에 코로나가 확 휩쓸고 지나간 다음이었는데 대구 사람들이 상처도 많고 고생도 많이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사실은 코로나 때문에 용두사미가 된 계획이죠. 그 대신 다섯 편 정도의 글을 썼어요. 그동안 많은 글을 썼지만 다 청탁받아서 쓴 것들이라, 글을 다 쓰고도 늘 미진한 점이 남아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죠. 청탁받은 글도 제 생각이 담긴 제 글이지만 다른 사람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프레임을 벗어나기 어려워요. 거기다가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태반이고요. 그렇게 쓴 글은 애착이 가지 않죠.

류: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죠. (웃음)

김: 윤동주의 「자화상」이라는 시에 나오는 우물 같아요. 어쩐지 미워져서 돌아갔다 가엾어져서 또 돌아오고. 그렇게 청탁받아 쓰는 글쓰기가 완전히 자발적이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퇴직한 후에는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고, 시간적으로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조지훈 론을 비롯해서 내가 쓰고 싶은 글들을 몇 편 썼어요. 그것이 그나마 위기 속에서 찾은 작은 보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류: 위기 속의 보람이라는 말씀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어떤 글을 쓰셨는지, 혹은 앞으로 어떤 글을 더 쓰고 싶으신지요?

김: 최근 조병화 시인의 초기 시를 다시 읽고 있어요. 이건 사실 개인적인 부채 상환의 의미도 있어요. 조병화 시인은 경희대에서 인하대로 옮겨오시면서 국문과와 문과대를 창설한 주역으로 문과대 학장, 대학원장직을 맡으셨죠. 당시에 학생들 중에 시인 지망생은 많았지만, 평론을 하겠다는 사람은 저 하나밖에 없었던 희소가치 탓이었는지 자상하게 대해 주셨어요. 새 책이 출판되면 늘 연구실로 불러서 서명을 해서 주시고, 원고 정리를 도와 드리면 꼭 밥을 사주셨죠. 내동 입구에 있는 주점 ‘힐사이드’에서 맥주도 종종 사주셨고… 정년퇴임을 하시고 학교를 떠나실 때 담배 파이프 하나를 정표로 주시기도 했죠. 그런데 리얼리즘으로 작품을 보던 때라 센티멘털리즘이 강한 그의 시풍에 대해서는 내심 불만이었어요. 실은 선생님의 작품을 진지하게 읽어 본적도 없었고요. 작고하시고 난 뒤에야 『버리고 싶은 유산』, 『하루만의 위안』, 『인간고도』 등의 초기 시집을 다시 읽었어요. 그때서야 한국전쟁 무렵의 인천 풍경 속에 그의 인간적 외로움도 손에 잡힐 듯 다가오더군요. 조병화 시인의 초기 시를 다시 읽기가 올 연말 계획입니다. 글 한 편으로 베풀어 준 그 마음을 다 갚을 수야 없겠지만 말입니다.

류: 글이 굉장히 기대가 됩니다. 아무래도 은사님이셨으니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아요. 짧게 하나만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김: 하나만 이야기하면 조병화 시인이 원래 전공이 화학이었어요. 동경고등사범학교 물리화학과를 나오셨거든요. 순수화학자였죠. 처음에 인천 제물포고에 수학교사로 오시면서 인천과 인연이 되었던 거죠. 그런데 여러 교과를 다 가르치셨다고 해요. 거기에다 특기가 럭비였다고 해요. 그래서 제물포고에 럭비부를 창설 전국대회를 석권하기도 했다 합니다. 화학교사와 럭비선수는 조병화 시인의 ‘딴 얼굴’이죠. 부인은 또 인천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하셨죠. 성함이 김준이신데 김준 산부인과병원 2층이 인천 문인들의 회의실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류: 정말 인천이랑 인연이 깊으셨군요. 일종의 인천 예술인들 아지트였군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을 텐데, 여기서 다 여쭐 수 없어서 아쉽네요. 이 궁금증은 선생님의 글을 통해 해소해야겠습니다. 다시 선생님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와서 여쭙겠습니다. 인천연구원에 오래 계셨는데 연구원에 대해 소개 좀 해주시면 어떨까요?

김: 인천연구원은 인천광역시가 1995년에 설립한 정책연구기관이에요. 인천시의 행정, 도시계획, 산업경제, 교통, 물류, 문화관광, 교육, 평화도시전략 등의 연구를 하고 있는 곳이죠. 연구자들이 100여 명. 주제 현황에 따라 협력연구를 하기도 하고. 현안연구, 비전연구, 정책기초연구 그런 것들을 하는 곳이에요. 가령 현재의 보도에 계속 나오고 있는 쓰레기매립지 같은 것과 관련된 연구들. 이렇게 여러 분야와 협업으로 연구단 구성해서 연구해야 하는 과제들을 수행하는 곳이 인천연구원이죠. 인천의 Think Tank 역할을 하는 곳이죠. 거기서 나는 주로 문화정책을 담당했고, 도시인문학센터장으로 있기도 했고요.

류: 그렇다면 거기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아무래도 도시인문학센터와 관련된 일이었겠군요.

김: 인문도시연구총서를 만든 것이 가장 기억이 남아요. 이 기획은 도시의 변화를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들을 남기는 거였어요. 어부, 염부, 목공장인, 철공장인, 주물장인. 이런 분들의 구술을 기록하는 사업이었죠. 인천이 가지고 있는 도시인문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일이었죠.
이색적인 연구로는 아시안게임이 인천에 있었을 때, 성화 봉송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일을 담당하기도 했어요. 성화 봉송과 관련된 국제적인 루트를 짜면서 한국의 옛길을 활용한 성화 봉송 계획서를 쓰기도 했었죠.
또 5년 전에는 유네스코 책의 수도 사업과 관련해서 전체 마스터 플랜을 짜기도 했어요. 그것이 그대로 다 실행된 건 아니었지만, 밑그림을 그려봤다는 데 의미를 가진 작업이었죠.
퇴직 직전에 인천 평화도시 전략연구라는 좀 큰 규모의 사업을 마치고 나왔어요.
또 인천연구원에서 발간하는 『IDI 도시연구』를 거의 10년을 담당했는데, 2016년 9월 등재후보지가 되었고 2020년부터 등재지로 확정되었어요. 2019년 퇴직할 때 마무리까지 깨끗하게 하고 나와서 마음이 편했죠.

류: 등재지 작업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축하드립니다. 학술지 하나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는데요. 그 일을 10년 넘게 하셨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인천연구원 얘기를 하다 보니 제가 진짜 궁금했던 것이 있는데 여쭈어도 될까요?

김: 그럼요.

류: 인천연구원이 원래는 인천발전연구원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께서는 문학평론가였잖아요. 그래서 저는 처음에 선생님께서 인천발전연구원으로 가셨다고 들었을 때 굉장히 놀랐어요. 지금이야 인천연구원이니까 어색함이 전혀 없지만, 그때만 해도 ‘발전’이라는 말 자체가 문학연구자와는 좀 상관이 없어 보였거든요. 그래서 당시에 어떤 계기로 인천발전연구원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신 건지 궁금했어요.

김: 류 선생이 보기엔 내가 문학연구자나 문학평론가로서 먼저 다가왔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그 당시에도 스스로 도시인문학 연구자라고 자임해 왔어요. 이미 인천학연구원에서도 문학을 전공한 도시인문학자로 살았으니까요.
확실히 발전이라는 말이 어떻게 보면 외적 성장주의라는 느낌이 강해서 잘 안 맞는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처음 내가 인천발전연구원에 가려고 했을 때, 당시 인천은 외적성장주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대였고, 도시정책에 있어서도 패러다임 전환을 맞이하고 있었던 시기였어요. 물론 여전히 성장주의가 주류였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던 거죠. 그러한 지향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들어갈 수 있었고, 그래서 결국 인천발전연구원에서 ‘발전’을 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이렇게도 생각해 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도시의 외적 발전만이 아니라 주민의 삶, 상태, 환경 등 지속가능한 패러다임이 정책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 이런 것이 도시인문학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인천연구원에서 일을 했지요.

류: 확실히 발전이라는 말을 떼어냄으로써 인천연구원의 성격이 더 분명해진 느낌이 드네요.

김: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하지만, 그 깊이와 넓이를 위해서는 타 학문과의 협력연구가 필요잖아요. 그런 협력조건을 인천발전연구원이 잘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과적으로 인천발전연구원에서 연구하면서 여러 현안과 쟁점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사실 이게 내가 입사 때 인터뷰했던 얘기인데, 인터뷰에서도 소신을 펼쳐보라는 얘기를 들었고, 또 들어가자마자 도시인문학센터를 바로 만들어 주기도 했어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죠.

류: 정말 그렇군요. 사실 인천이라는 도시 자체가 가진 매력을 가장 열심히 발굴하고 축적하는 곳이 인천연구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러한 인천이라는 도시는 근대문학의 태동과도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인천이라는 도시와 문학, 양자 사이의 연계를 잡아오신 선생님께서 보시는 문학・문화적 공간으로서 인천이 가진 매력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김: 먼저 인천은 한국 근대의 실험실 같은 곳이죠. 한국 근대의 미니어처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고요. 이게 내가 인천의 도시라는 연구를 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천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가 겪은 근대, 한국만이 아닌 아시아의 근대가 녹아나 있어요. 이걸 보면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박사 이후 10년을 진짜 인천과 관련된 자료더미에 빠져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잉될 정도로 인천에 빠져 있었지요. 왜냐하면 거기로부터 오늘의 삶까지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전쟁과 도시화 속에서도 여전히 구도심에는 변화된 시간/역사/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고요. 그리고 여기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 그들의 문화, 다양성, 축적된 다문화 이런 것들이 켜켜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도요. 그러나 향토주의에 갇히자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근대를 이해하는 하나의 전형으로서 인식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건 문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인천이라는 곳은 과거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근대 시기에 여기에는 세계의 축도가 있었거든요. 청국조계, 일본조계, 각국조계까지. 세계의 미니어처, 여기가 곧 세계였던 거죠. 김소월이나 김동환의 시, 김기림의 <인천항 연작시> 같은 시가 곧 인천에서 느낀 세계를 담아낸 것입니다. 또 배인철 같은 시인은 아주 이른 시기에 소수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연대 의식을 담고 있는 시를 보여주고 있었고요. 이것들은 모두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과 함께 문학적으로 깊은 인식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평등의식, 소수자에 대한 생각 같은 것들이요. 이상의 「지주회시」 같은 것도, 강경애 『인간문제』, 이태준 「밤길」, 이규원 『해방공장』, 조세희나 방현석의 소설 등, 이 도시와 교호하면서 작가들의 의식이 깊어진 거죠. 많은 작가들이 인천을 작품화했고, 인천은 그 자체로 한국문학의 풍요로운 창조 현장이었던 거죠. 인천에 다녀간 외국이나 외지인들 그리고 작가들의 인천 방문기를 정리하면서 그들의 의식에서 ‘세계의 미니어처 혹은 근대의 실험실’로서의 인천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내년쯤 인천 문화사의 정수로서 인천문학의 변모를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려 합니다.

류: 인천이 다양한 매력과 저력을 가진 도시라는 것이 근대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확인되어왔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선생님의 작업들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될 것 같네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서 이 인터뷰는 인천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인천문화통신 3.0>에 실릴 글인데요. 인천문화재단과의 인연에 대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김: 인천문화재단은 인천의 여러 분야의 분들이 힘을 모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1999년에 저는 인천문화정책 연구소장이었는데 당시에 인하대 최원식 교수님이 주도하고 문화예술인들이 함께한 인천 문화를 열어가는 시민모임의 간사로서 함께 했어요. 그때 문화재단의 필요성을 외쳤지요. 그 노력이 인천문화재단 설립으로 이어진 성과를 낸 거지요. 제가 주역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인천문화재단 설립에 따른 조역으로 참여했다고 할 수 있지요.

류: 조역이라고 하셨지만 사실 모두가 주역이셨던 거죠.

김: 문화정책연구소 할 때 우현학술제를 여러 해 개최했는데, 이것이 문화재단 사업으로 이어기도 했죠. 2005년 우현 고유섭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 이후 재단에서 행사를 이어가는 것으로 공식화되었어요. 그게 제도화되고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깊은 인연이지요. 또 2006년에는 자유공원의 역사적 변천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기획했고, 나중에 『만국공원의 기억』 같은 책을 내기도 했어요. 인천문화재단 설립 초기에 봉사자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0년부터 4년 동안 문화재단 4기, 5기 이사로 있기도 했군요.

류: 인천문화재단의 설립 전부터 함께 해온 산 증인이시네요. (웃음) 마지막으로 인천의 문화정책을 오랫동안 현장에서 지켜보신 전문가이자 어른으로서 재단의 발전을 위해 조언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 연초부터 화두가 되었던 것이 이른바 문화재단 ‘혁신’이었는데, 그 결과는 기대 미흡이라는 것이 중론인 것 같고요. 그런 점에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된 혁신을 하려면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목적을 앞세우거나 이해에 집착하면서 혁신의 가닥을 잡을 수 없어요. 대표이사 추천제나 인사 문제를 중심에 놓고서는 혁신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대원칙을 검토하고 합의해나가면서 합의한 원칙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을 모색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인천문화재단은 지역문화진흥을 위해 전문성과 독립성을 기초로 운영되는 문화 지원기구입니다. 오히려 문화재단에 대한 다양한 의견은 필요하지만, 재단의 독립성이나 전문성을 후퇴시키는 우를 범한다면 혁신이라 하기 어렵죠. 인천시는 문화재단을 둘러싼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혁신의 진정한 동력도 결국 재단 내부로부터 문화계의 동의로 확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류: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시간 내주시고 귀한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나눈 대화만으로도 저에게도 많은 공부가 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류수연(문학평론가, 인하대 프런티어 학부대학 교수)




갈유라 KAL Yu-ra

갈유라는 동국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비디오아트 전문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작가의 연작 시리즈인 오토스포라(Auto-spora)는 물질세계와 비-물질세계를 넘나드는 유기체로 사물의 속성과 위치의 변화를 스스로 일으켜 사물의 속성을 변용시킨다. 이는 지역과 공동체를 넘어 모든 것을 흐트러트릴 구조로써 사물에 대한 단편적 인식과 경계상에 존재한다.
개인전으로는 《보너스 룸》(갤러리175, 서울, 2019), 《오토스포라1: 야곱의 사다리》(온그라운드2, 서울, 2018) 등이 있으며, 2018 한․영 문화예술교류 파견지원, 영국 발틱현대미술관 선정작가, 2018 아트 스페이스 풀 신진작가지원 프로그램 POOLAP 등에 참여한 바 있다.

이내 눈앞까지 가득차고, 혼합 재료, 가변크기, 2019

# Q&A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Digital Racing>는 시간과 공간, 사람을 특정하지 않기 위해 무작정 달리며 묻는 나의 프로젝트이다. 내가 여기에서 출발하여 도달한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아와 주체의 이산, ‘오토스포라(Auto-spora)’의 상태였다. 2018년 작업 <오토스포라1 : 야곱의 사다리>는 구체적 사물인 ’말차‘에 주목하여, 인도-일본-홍콩-한국 총 네 국가를 넘나들며 종을 뛰어넘는 만남, 사물과 비-사물, 신과 인간을 통해 각각의 위치와 서로의 얽힘을 그려내었다. 그리고 2021년의 ’오토스포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하고 있으나 지어진 이름에 머무르고 있는 사물에 초점을 맞추어 현재 진행 중이다.
오토스포라의 변형은 빈번하며 속도도 매우 빠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장기간 사물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기록의 과정에서 사물의 변형 과정은 전면 수정되기도, 시기를 미뤄 더 지켜보기도 한다. 이 과정이 쌓여 믿음의 유용성을 허물고, 이를 통해 오토스포라는 장소/사물/인식/상태의 이동을 겪으며 특정한 공간에 갇히지 않게 된다. 장소를 통해 사건의 방향을 변화할 때, 사물이 뒤트는 속도를 이기지 못해 떨어져 나가는 찰나가 있다. 예를 들어, 해외여행의 증표였던 희귀 기념품이 점자 국가별 쇼핑 리스트로 변용되고, 사물-장소 이동 시간의 단축에 따라 드럭 스토어(Drug Store)에 놓이고, 팬데믹(COVID-19) 이후 가상 출국 비행과 무정박 크루즈 여행이 생겨남에 따라 기념품이 해외/여행/사물로 이탈되듯 말이다. 이러한 시간-이동 사이에서 오토스포라가 생동하게 되면, 나는 이것들을 정리하여 비디오로 만든다.

Digital Racing, 단채널 비디오, 16mm, 53분 30초, 2017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업(또는 전시)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A. ‘불량선인X갈유라’로 발표된 전시 《아마도 애뉴얼날레_목하진행중》(아마도예술공간, 서울, 2019)를 꼽을 수 있겠다. 기획자 콜렉티브로 활동하는 불량선인과 처음 만나 전시의 주제를 정하는 과정에서 기획자-작가 간의 정확한 역할 분배방식에 대해 고민했다. 시차를 둔 글의 교환, 피할 수 없을 때까지 이어지는 질문을 통해 각자의 사유를 촉발하였고, 이 결과는 전시장 내에서 미디어-장치와 이미지를 바라보는 권력적 시선, 전시 글에 의해 숨겨진 시간의 감각을 드러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시에서 선보였던 <이내 눈앞까지 가득차고>는 전시장의 선형적인 공간 구조를 왕복으로 오가며, 어두운 통로의 마지막에 전시 글이 놓은 작업이다. 애초에 본 전시에서 글은 공간 내부에서 읽혀야 했고, 일부는 공간 없이 작동할 수 없도록 작성되었다. 전시 종료와 함께 의미가 상실되는 이 글은, 역으로 글과 함께 있어야 기능하게 되는 전시를 의심하게 만들도록 작동되었다. 사유의 결과물에 대한 소유권을 구별하지 않는 방식의 협업으로 공간과 전시 글이 제시된 것이다. 나는 대화가 서로의 소유권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오고 갔을 때, 만남은 일기일회(一期一會)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관람객에게도 언제든 가능한 위치 전복의 가능성과 벌어진 간격이 좁아질 때의 미묘한 기류를 발견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오토스포라1 : 야곱의 사다리, 단채널 비디오, 12분, 2018

Q.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A. 나의 작업에 영향을 받은 책으로는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의 『정신과 자연』, 더글라스 호프스태터(Douglas Hofstadter)의 『괴델, 에셔, 바흐』로, 물질세계와 비-물질세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들게 해주는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존 아콤프라(John Akomfrah)와 안톤 비도클(Anton Vidokle)의 시네마-이미지가 선사하는 스펙터클(Spectacle)과 기시감, 존 아콤프라(John Akomfrah)의 <나인 뮤즈(Nine Muse)(2010)>에서 배경음으로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가 흐르며 등장하는 설경, 안톤 비도클(Anton Vidokle)의 <모두에게 영생과 부활을!(2017)>의 마지막 부분 중 소년이 팔을 저으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 <시티즌스 오브 더 코스모스(2020)>에서 영생을 갖게 된 좀비 인간이 활보하는 거리를 롱-테이크((Long-Take) 카메라 워킹으로 잡은 장면 등은 내게 스크린에서 사물을 구출해낼 화면구성 요소로 느껴진다.
실현되지 못한 작품 중에는 수년 전 참전병사의 가이드를 받아가며 베트남 전적지 촬영을 진행했는데, 불과 몇 년 만에 참전용사들의 자녀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추억관광 사업지로 변모한 것을 목격한 경험이 있다. 경험하지 않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유적지에 거주하는 현지인을 매수하는 것과 같은 개인의 도덕성에 대한 변화가 ‘오토스포라’화 되고 있는지는 시간을 통해 지켜봐야 할 일이다.

전시 (제1회 꼬리에 꼬리를 물고: What if?), 중간지점, 2020

Q. 예술,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에 대하여

A. 현재는 이미지에 말이 붙는 시대이다. 미디어에서 자막은 단순히 번역된 언어의 정보전달, 서사를 윤택하게 만드는 요소가 아니다. ‘설명자막’, ‘대사자막’ 기능은 미디어의 작동에 있어서 일종의 가이드로 기능하며, 음소거를 해두어도 불편함 없이 시청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텍스트가 이미지에 기생하다가 이내 압도하여 이미지를 잡아먹은 상황에서, 나는 이미지의 복권을 위한 시도로써 이미지와 텍스트가 완벽히 분리되는 과정을 거쳐, 병치(竝置)하는 상태로 나아가길 바란다.

지상의 양식(The Fruits of the Earth_collected object)_혼합 재료, 가변 설치, 2015

과거에는 책 생산이 산림 파괴와 오존 파괴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면, 현대에는 지우지 않은 이메일 데이터(Data)가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는 데이터(Data)로 작동하며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있다. 현대는 비연계적 상태의 연관성, 즉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들이 연쇄적으로 생태를 조절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단일한 상태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는 곧 없는 색상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색상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가장 비슷한 색상의 경계를 통해 서로 다른 언어로 가까워지듯, 관람객 또한 전시 공간이라는 새로운 장소로의 이동을 선택했다면, 전시장의 통로를 이동하는 구간에서 빛의 밝기와 같은 작은 차이점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얻었으면 한다.

Q. 앞으로의 작업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새로운 스크린과 패널들, 다양한 핸드폰 스케일이 등장하길 기대하고 있다. 그에 따라 ‘오토스포라’ 작업에도 가속이 붙을 것이고, 변화도 더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프로덕션이라 부를 수 있는 좋은 팀들도 만나고 싶다. 이론서는 역자의 번역에 따라 새롭게 탄생하고, 시대에 따라 문체, 삽화까지 달라진다. 하지만 결국 하나의 사상으로 도달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처럼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 작가이면서 결국은 하나의 이야기를 지속해서 전달하는 작가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Q. 작품 창작의 주요 도구, 재료는?

A.

작가정보 : www.kalyura.blogspot.com




구자명 KOO Jamyoung

구자명은 추계예술대학교 서양화과에서 평면회화를 전공하고,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과 대학원 과정에서 입체조형을 연구했다. 작가는 변화되는 기술(소프트웨어) 경험이 시각예술 창작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해당 질문으로부터 순수미술의 탐구 대상인 입체조형의 형태를 문제 삼아, 디자인 방법론을 참조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 방법 개발》(윌링앤딜링, 서울, 2020), 《PPB (Phoenix Phenotype Breeding)》(가변크기, 서울, 2018)에서 두 번의 개인전을 발표했다.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인천 지역에 산재하는 다양한 근대 건축물을 분석해 건축의 형태를 소프트웨어로 압축하는 방법을 연구할 예정이다.

PPB,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8

# Q&A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공간의 윤곽을 관찰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파악할 수 있는 경계면에 놓인 형태의 범주를 다양하게 식별하기 위한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최근에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경계는 무엇을 기준 삼아 구분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천착하여 비교 대상 간의 체계(system)를 바꿔 적용하면서 문제를 풀어가고 있다.

웹사이트 구조의 편집 방법 개발, 혼합 매체, 가변크기, 2020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업(또는 전시)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A. 가변크기에서 열렸던 나의 전시 《PPB》(2018)는 브랜드를 기획, 제작하는 디자이너의 역할을 구심점으로 삼아 PPB(Phoenix Phenotype Breeding)를 디자인하는 작업을 선보인 전시였다. 일반적으로 디자인의 과정은 소프트웨어(PPB) 범주에서 작동하게 되는데, 이 과정을 하드웨어(전시장)로 가져온다면 어떻게 될지 가정해보고, 이와 반대로 하드웨어의 문제를 소프트웨어로 가져갔을 때 어떤 상태가 되는지 실험해 본 작업이다. 진행방법을 간단히 말하자면, 디자인 프로그램의 환경(Artboard)을 전시장의 창으로 전사(Transcription)했고, 편집한 레이아웃이 내부에 압출되는 방법, 그 자체가 공간 분할과 인테리어를 이룬다. 이 과정은 3차원 컴퓨터 그래픽스(3D Computer Graphics)의 조형 규칙에 따라 평면으로부터 입체를 끌어내는 사고를 동반한다.
*PPB : Phoenix Phenotype Breeding’의 약어. 인간-컴퓨터 바이러스의 디버그(프로그램의 오류를 발견하고 원인을 밝혀내는 작업)를 통해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상품화하는 가상의 상호.

PPB, 3분 5초, HD 비디오, 2018

Q.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A. 매체에 상관없이 기술이 삶에 침투하여 변화하는 세계를 상상하게 만드는 콘텐츠를 흥미롭게 보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이과로 진학했기 때문인지 컴퓨터공학, 물리학, 생의학 관련 정보들을 자주 검색하고 시청하게 된다. 최근에는 자율 주행과 비-메모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결국 소프트웨어 객체와 대면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보인다. 미래에서 프로그램과 경쟁하지 않고, 공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를 이해해보려는 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종 소프트웨어 학습을 위한 여러 종류의 참고 서적을 비교해보다가 각 저자의 서로 다른 관점과 문제 해결 방식에서 영감을 받을 때가 있다.

7개 광고(7ads), 단채널 무빙 이미지, 10분, 2018

Q. 예술,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에 대하여

A. 나는 서양화를 전공하고 조형예술을 공부했다. 작업의 소재가 되는 소프트웨어도 단순히 생각해보면 평면에서 건설되는 세계와 조건을 공유한다. 평면에 투사해 설계되는 구조와 사건의 변수가 입체에 와서 어떻게 조우할 수 있는지, 차이가 어떠한 문제를 발생시키는지 관찰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자기공명 영상법(Magnetic Resonance Imaging/MRI)의 원리를 통해 얻는 3차원의 화상과 전사한 생체와의 관계를 분석해보려는 태도로 비유해볼 수 있겠다.

Panel 6, Mac OS /윈도우 바탕화면, exe파일, 멀티탭, 케이블(DP, DVI, HDMI, RGB), LCD 패널, 컴퓨터, 프로파일_가변크기_2018

Q. 앞으로의 작업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나의 작업은 단순한 코딩과 3차원 컴퓨터 그래픽스와 같은 디자인 방법에 영향을 받아왔다. 로봇공학(Robotics), 인공지능(AI), 딥러닝(Deep learning), 자율주행(Self-driving car)과 같은 기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성장하는 세대가 서로 무관해 보이는 매체들을 다룰 때, 지각하고 창작하는 방식이 지금과는 다를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상상을 통해 드러나는 문제에 관하여 질문하고 탐구하는 것이 내가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소프트웨어와 인간의 공존이 필연적이라 보는데, 연극적인 작업보다는 둘 간의 차이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해동에 필요한 참고서를 제작하는 데 시간을 들이고 싶다.

7개 광고(7ads), 단채널 무빙 이미지, 10분, 2018

Q. 작품 창작의 주요 도구, 재료는?

A.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문계봉 시인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교육청에서 만난 시인

문계봉 : 시인

1995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하였다. 한국작가회의 인천지회장, 인천민예총 상임이사, 인천문화재단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인천광역시교육청 교육감 문화예술교육 정책특보로 일하고 있다.

본 인터뷰는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이루어졌음을 밝혀 둔다.

류: 선생님, 안녕하세요? 한동안 뵙지 못한 사이에 교육청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근황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문: 안녕하세요. 저는 시인이고요. 그동안은 인천민예총과 작가회의, 인천문화재단을 기반으로 인천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다양한 활동과 고민을 진행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9월부터 인천광역시교육청 교육감 문화예술교육 정책특보가 되어 늦깎이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웃음) 물론 작가회의 자문위원과 민예총 이사로서의 회원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고요.

류: 교육청과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연결하는 굉장히 멋진 일을 담당하게 되신 것 같군요. 문화예술특보는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하는 것인가요?

문: 사실 교육청에 오게 된 것은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동안 인천에서 해왔던 문화예술활동가로서의 경험과 이러저러한 매체를 통해 개진했던 문화예술 교육에 대한 고민을 공교육 현장과의 매칭을 통해 좀 더 구체화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4년 동안 인천문화재단 이사로 활동할 때도 느낀 것이지만, 재단에서도 정말 다양한 문화예술교육 사업을 진행하고 있잖아요? 여기 교육청에 오니까 이곳 역시도 문화예술교육 관련해서 사업이 참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더라고요. 사업 규모도 대단히 큽니다. 아직 특보로 활동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업무 파악을 하는 단계이긴 하지만, 양쪽 단위의 문화예술교육 사업이 어느 지점에선가 만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접점을 만드는 과정에서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 게 현재 저의 바람입니다.

류: 듣고 보니 꽤 흥미로운 일이 많겠구나 싶은데요. 현재까지의 느낌을 좀 더 말씀해주시겠어요?

문: 사실 공교육 과정에서 진행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은 일정한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중등교육 과정에서 ‘입시’라는 요소는 무시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과거 학교에서 진행되는 문화예술교육은 저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기예나 취미’ 위주의 교육이었다고 생각해요. 문화와 예술이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인문학적 교육은 부족했던 게 사실이지요. 하지만 최근에는 확실히 달라졌더군요. 전문가 풀도 넓어졌고, 내용 면에서도 다채롭고 충실하더군요. 저는 앞으로 지역의 검증된 예술가와 교육청 예술사업을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담당하게 될 거예요. 수십 년 동안 인천에서 활동하면서 관계를 맺어온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많고, 그분들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외람되지만 진짜와 가짜, 즉 옥석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어느 정도는 갖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지요.(웃음)

류: 교육과 지역을 연계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왕에 교육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묻고 싶은데요. 최근 언택트 시대의 교육에 대한 논의가 많은데요. 코로나19가 미래교육에 대한 지향과 속도를 앞당겼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문화예술교육에 있어서 분위기는 어떤가요?

문: 교육청에서도 현재 그 문제를 무척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학습 도구나 시스템 구축이 필요한 학생들을 전수조사하여 만에 하나라도 교육 소외가 일어나지 않도록 구체적 지원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미증유의 바이러스 사태가 너무 갑작스러워 언택트 시대를 겨냥한 교육의 큰 그림은 아직 완성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촘촘한 소프트웨어들이 만들어지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때에 문화예술 교육 영역도 어려움을 겪는 건 마찬가지겠지요. 그동안 자유학기제가 도입되면서 학생들이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는 이전보다는 확실히 많아졌어요. 물론 아직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아낼 것인가는 학교장의 마인드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교육청에서는 주로 큰 그림을 그리거나 행정적인 지원을 고민하고 있지요. 아무래도 제가 교육 전문가는 아니어서 미래 교육의 구체적인 모습을 언급하는 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기존에 이루어졌던 문화예술교육조차 원만하게 진행되기 어려운 조건인 건 사실입니다.

류: 그렇군요. 교육청이라고 하면 교육만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교육에 필요한 행정적인 기능이 더 많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교육청에서 일하게 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정시 출퇴근을 어떻게 적응하셨을지도 굉장히 궁금했어요. 사실 선생님께서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문인들이 정시 출퇴근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저는 학교 바깥의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사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동경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정시 출퇴근이라는 새로운 업무환경에 어떻게 적응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교육청으로 오시면서 일상에서 달라진 지점은 어떤 것일까요?

문: 아직은 초반이어서 그런지 아주 즐거워요. 정시 출퇴근이라고 하면 시간이 굉장히 팍팍할 거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오히려 여유가 생겼어요. 이전에는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어떤 면에서는 종일 일에 묶여 있었거든요. 늦은 밤이든 새벽이든 뭔가 해야할 일이 있으면 해야 했고요. 그런데 이제는 저 스스로 모든 일을 9시에서 6시 사이에 해치우려고 해요. (웃음)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그 시간 동안에는 무조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잖아요. 전에는 하루의 시작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8~9시부터는 책상 앞에 앉게 되니까 하루가 길어진 셈이죠. 또 업무시간 내에 집중해서 무엇인가를 하게 되니 오히려 저녁이 보장되는 삶이 가능해지더라고요. 일이 마무리가 덜 되었어도 내일 또 출근해서 열심히 하면 되니까, 퇴근 후에는 내 시간을 좀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현재로서는 그래서 만족하고 있어요.

류: 의외의 발견이네요. 교육청에서 인터뷰를 하니까 선생님의 학창 시절은 또 어떠셨을지 궁금해지네요. 아무래도 학교와 관련이 있는 곳이니까요. 저는 특별할 것 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선생님께서는 좀 재미있는 경험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선생님의 학창 시절은 어떠셨나요?

문: 학생은 사실 두 부류로 나뉘잖아요. 학교 안에서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생과 주로 학교 바깥에서 돌아다니는 학생.

류: 음.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웠다는 말씀이신 것 같군요.

문: 네, 고등학생 시절은 확실하게 후자였어요. (웃음) 물론 그때만 해도 일탈의 수준이 요즘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어른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을 거예요. 아무튼 학교보다는 학교 밖이 더 친숙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학교 밖에서 경험한 것들이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아요. 제 모교 주변의 풍광이 무척 아름다웠거든요. 여학교도 부채꼴 모양으로 포진해 있었고. (웃음) 하지만 책은 많이 읽었어요. 누나들의 영향도 있었지만, 당시 나온 베스트셀러는 물론 고전, 한국 단편 등 가리지 않고 읽어댔으니까요. 학교의 풍광과 학교 밖의 경험 그리고 책에서 만난 내용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내 문학의 자양이 되지 않았을까, 지금은 그렇게 일탈의 시대를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웃음)

류: 근황에 대해서 여러 말씀을 들었는데요. 이제 조금 더 인터뷰의 본래 목적을 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인께 인터뷰를 왔으면서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죠. 지난 2017년에 출판한 『너무 늦은 연서』는 무려 등단 22년 만에 낸 시집이기도 했죠. 시집에 대한 외적인 평가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도 첫 번째 시집이라는 의미가 크셨을 것 같아요. 이 시집에 대한 선생님을 생각을 듣고 싶어요.

문: 사실 스스로 만족스러운 시집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이 시인들의 첫 시집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데, 일반적으로 시인들이 보통은 5년 정도 주기로 새로운 시집을 내면서 자신의 시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되거든요. 그런데 저는 22년의 시 세계를 한 권에 넣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까 사실 현재의 정체성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했던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나를 빼놓을 수도 없었고요. 외부적으로는 호평을 받았고, 최원식 선생님께도 좋은 평가를 듣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장점도 있었지요. 아무래도 등단한 지가 22년이지만, 첫 시집을 비교적 최근에 낸 시인이니까 신인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제 나이면 중견 시인인 셈인데, 저는 아직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이 더 크거든요. 지금 이 나이에 가슴이 뛴다는 것은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또, 다른 중견 시인들을 반면교사 삼아서 스스로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요.
또 시를 쓰는 환경에도 변화가 있었어요. 생각해 보면 과거에는 쓰고 싶은 시보다는 써야만 하는 시를 썼던 적이 많았어요. 그때는 문학보다는 세상을 바꾸는 데에 더 집중하면서 살았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사회와 현실의 문제는 중요하지만, 이제는 저 자신과 글에 대해서 더 집중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 쓰고 있는 시와 만나는 시들도 과거와는 달라진 지점이 많더라고요. 그런 설렘으로 계속 시를 써나가야죠.

류: 그렇다면 최근 읽으신 시 중에 독자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 있으실까요? 저 역시도 궁금하고요.

문: 제가 평론가처럼 나오는 시집을 다 읽고 그 경향을 좇는 사람은 아니어서 전체적으로 2020년의 시가 어떻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고요. 그저 제가 읽은 시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은 과거에는 안 보이던 시들도 이제는 눈에 들어오고 읽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어요. 확실히 접하게 되는 시의 저변이 넓어진 건 분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읽었던 시집 중에는 이소호 시인의 『캣콜링』이 인상적이었어요. 장은영, 허수경, 임승유 시인도 좋았고요. 젊은 시인 중에서는 박준 시인의 시집을 몇 권 사봤어요. 그냥 그랬어요. 그리고 『혼자가 혼자에게』로 유명한 이병률 시인도 좋아합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와 『바다는 잘 있습니다』 같은 시집도 좋았고요. 소설도 많이 보는 편인데, 황정은, 김금희 작가의 최근작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류: 제가 아직 못 읽은 시집은 독서 목록에 담아두어야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최근 시의 경향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문: 지금은 완전히 독자 입장에서 이야기하게 될 것 같아요. 한동안 젊은 시인의 시들이 현실과는 좀 동떨어진 채 언어의 변형이나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서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거나 현실을 냉소하거나 암호 같은 시를 써왔다고 (지극히 주관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한 작품들도 분명 시의 외연을 확장해 주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또 그게 전부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옛날 형식으로 되돌아가자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확실히 역사와 실천이 다시 화두가 되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 코로나19도 그렇고, 지금 우리의 현실이 일정한 문제의식을 우리에게 강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류: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시대에 어떤 시를 추구하고 싶으신가요?

문: 특별히 이거다, 생각하고 있는 것은 없지만 저는 일단 50대의 삶이 겪고 느끼는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낼 생각입니다. 제 나이가 되면 사실 주변 친구들이 다 고아예요. 부모님이 다 떠나셨으니까요. 그렇게 고독한 내가 있는가 하면 여전히 가끔은 소년 같은 내가 있어요. 그러한 다양한 모습을 독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시에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겠죠. 또 삶에서도 지향점은 있어요. 바로 ‘꼰대 되지 않기’라고 할 수 있지요. 적어도 ‘라떼주의자’는 되지 말자. 이런 다짐을 해봅니다.

류: 정신없이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덧 인터뷰가 끝날 시간이 다가왔네요. 시의 세계에서 이제 문화예술이라는 현실의 문제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지난 4년간 인천문화재단의 이사로 재직하셨는데, 재단과의 인연은 그보다 더 오래되셨죠? 그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면 어떨까요?

문: 사실 저는 야전에서 문화예술 운동을 했던 사람이지요. 관에서 문화예술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 재단이라는 것으로 가시화된 것이고요. 그렇다 보니 재단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여러 모로 지켜보고 견제하기도 하고 또 자연스럽게 협업도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재단이 하는 일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은 아무래도 재단 이사로 들어가면서부터였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재단이었잖아요. (웃음) 그래서 일단 ‘복마전’으로 들어가서 싸우든 개선하든 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이사 공모에 응했던 것이고요. 처음 2년은 인천 문화 현장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배우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이 지나니까 비로소 인천문화 판에 대한 그림이 좀 그려지더군요. 그때부터 이사의 역할을 좀 더 구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류: 그렇다면 이사로 재직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슈는 아무래도 혁신위에 대한 것이었겠군요?

문: 그렇지요. 사실 올해가 이제 진짜 혁신위 원년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사실 모든 혁신이라는 것이 단 한 번으로 완벽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혁신이라는 것은 또 다른 혁신으로 극복되어야 하고요. 우리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 혁신이 재단을 위해 최선이었나 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야 검증이 되겠지요. 그렇지만 혁신안에서 마련했던 기본적인 생각이나 의도 이런 것에 대해서는 계속 긍정하는 마음으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문제가 발생할 수 있겠죠. 현장에 적용되어 시스템으로 안착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요. 하지만 맨 처음 함께 생각했던 고민과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야겠죠. 혁신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닐 테니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변화해 가는 인천문화재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류: 혁신위 원년을 맞이한 재단에 대한 기대와 당부는, 앞으로도 날카로운 비판과 든든한 지지로 재단을 함께 지켜봐 주시겠다는 말씀으로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류수연 문학평론가, 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황미혜 시민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 문화전도사 황미혜씨

대개 인천을 문화 불모지로 평가하는 이들은 제대로 된 국립 문화시설이 없다거나 국보나 보물, 유적지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곤 한다. 그런데 조금만 살펴보면 인천에는 섬 전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인 강화도가 있고, 개항장 근대거리도 있다. 백령도·대청도의 기암괴석은 10억 년 세월의 힘이 만들어 놓은 천연의 문화재다. 우리 주변 곳곳이 그야말로 ‘문화투성이’였던 셈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답사여행의 격언처럼 인천의 역사문화를 알려고 노력하고, 아는 만큼 찾아다니며 인천을 소개하는 문화 전도사 역시 우리 주변에 있다. 평범한 가정주부이자 문해교실 강사이기도 한 인천시민 황미혜(55)씨의 이야기다.

황미혜씨는 인천문화통신 3.0 인터뷰에서 “자유공원을 한번 가더라도 그 장소에 담긴 역사를 알고 가면 남다른 의미를 느낄 수 있어요”라며 “문화를 즐길 줄 아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1965년 인천에서 태어난 황미혜씨는 결혼과 출산 이후 마흔이 되기까지 그저 누군가의 엄마이자 아내,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살았다. 소위 말하는 ‘문화생활’이라곤 백화점에 가거나 친구들을 만나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게 전부였다.

이런 황씨가 15년 전 무언가 해보자며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은 인천시립박물관이었다. 아이가 점점 자라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평소 관심이 있던 박물관 해설사에 도전하기로 하고, 옥련동에 있는 인천시립박물관의 해설사 양성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박물관의 유물을 관람객에게 설명하고, 인천의 역사 이야기를 전하는 일이었다. 지금은 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진 않지만, 박물관 몇 층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눈감고도 알아맞힐 정도로 박물관의 삶의 일부였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할 때는 그렇게 싫었는데 나이가 먹고 나니까 문득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공부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화에 관심이 많아 박물관 해설을 봉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스스로 부족함을 느껴 책도 더 찾아보고, 공부하다 보니 한발 깊숙이 들어가게 됐어요.”

박물관에서 해설사를 하면서 인천의 숨은 이야기들을 많이 알게 됐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쳤던 장소들에 역사가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인천의 매력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족 또는 친구들과 인천의 숨은 명소와 유적지, 문화시설들을 다니며 책으로 배운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보통 인천의 매력이 뭐냐고 물어보면 인천국제공항을 떠올리고, 서울에 있는 친구들은 그냥 어디든 바다가 다 보이는 줄 알 정도로 인천을 몰라요. 절대로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인터넷에 소개된 송도국제도시나 영종도의 ‘핫플레이스’만 각인되는 게 싫었어요.”

황씨는 주말이나 시간이 날 때면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어디론가 떠났다. 사라져 가는 인천의 염전을 찾아다녔고, 각 군·구마다 있는 오래된 나무를 찾았다. 혼자 갈 때도 있지만, 가능하면 딸이나 친구, 지인들을 꼭 함께 데려갔다. 사전에 파악해둔 이야깃거리를 퀴즈로 만들어 이벤트를 하면 재미도 있고, 교훈도 얻는 일석이조의 여행 프로그램을 직접 짰다.

“하나를 알게 되니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가보고 싶은 장소가 생기더라고요. 예전엔 누군가를 따라만 다녔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을 이끌고 새로운 놀이터를 발견하는 것처럼 신나게 다녔어요. 원인재의 인주 이씨 이야기, 경서동의 녹청자 이야기, 학익동의 학산서원, 부평의 미군기지 이야기, 인천항의 갑문 이야기를 쫓다 보면 인천 전체가 놀이터가 됐어요.”

황씨는 뭐니 뭐니 해도 인천의 자랑은 강화도라고 했다. 특히,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강화도 섬 둘레에 조성된 해양관방유적은 인천시민이라면 꼭 알아야 하는 유적지라고 소개했다. 고려 강도시기의 몽골의 침략에 맞섰던 유적부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방어 유적까지 둘러보면 우리나라 역사를 통째로 만나는 듯 했다.

황씨가 추천하는 인천의 숨은 명소는 조계지 계단이다. 개항기 각국 외국인들은 인천항 근처에 구역을 나눠 거주했는데 이를 조계지라고 했다. 인천의 개항장 거리는 조계지 계단을 기준으로 중국과 일본 거주지로 나뉘었다. 지금의 차이나타운과 일본풍 건물이 즐비한 중구청 일대는 바로 조계지 계단을 중심으로 무 자르듯 구분된다.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조계지 계단 꼭대기에서 감상하는 낙조가 일품이란다. 이밖에 백령도, 이작도, 영흥도 등 인천 섬의 자연 풍광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라고 했다.

황씨는 평일에는 성인문해교실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 어렵던 시절 한글도 제때 배우지 못했던 어르신들에게 뒤늦게 만학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글을 가르치는 보람된 일이다. 한국문해교육협회 소속으로 노인복지관이나 평생학습관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문해교실을 찾아 오는 70~80대 어르신들은 어렸을 때 육성회비나 등록금 문제로 학교를 못간 분들도 있고, 경제적 문제 때문에 진학을 포기한 경우가 많았어요. 자녀들의 소개로 처음에 글만 배우러 찾아왔다가 나중에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따신 분들도 있습니다.”

황씨는 문해교실이 글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치유까지 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 배움의 한을 달래기 위한 공부 그 자체가 상처치유의 기능을 한다는 얘기다.

“요즘에는 아파트 이름도 영어가 많이 들어가서 주소를 알아도 찾아가기 힘들잖아요. 예를 들어 I-PARK라는 아파트를 찾아가려면 알파벳을 알아야 하는데 어르신들은 이런 생활 곳곳에서 못 배운 설움을 많이 느끼셨더라고요. 그래서 받아쓰기만 하고 맞춤법 배우는 게 다가 아니라 글을 배움으로써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글을 배우는 어르신들의 교과서는 때론 광고지가 되기도 하고, 트로트 노래 가사가 되기도 한다. 신문과 잡지를 보면서 시사와 상식, 역사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손주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보내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한 수업 중 하나다.

“아이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싶은데 맞춤법이 틀릴까 걱정하는 어르신들에게 오히려 요즘 애들이 더 맞춤법, 띄어쓰기를 안 지킨다며 부담 갖지 말라고 격려해주기도 해요. 운전학원에 가서 면허증도 따고, 학력 인정 중고등학교에 진학해 꿈을 키워나가시는 것을 보면서 내가 오히려 힘이 되기도 합니다.”

생활형 문화인으로서 황씨는 인천문화재단을 비롯한 문화기관이 인천시민들에게 더 많은 문화 정보를 홍보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또 지역별로 차이가 큰 문화 프로그램 정보력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냈다.

“문화재단이나 아트플랫폼, 근대문학관의 경우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있기는 한데 꼭 해당 시설 홈페이지에 들어가야지만 확인을 할 수 있어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문화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는 창구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지역별로도 차이가 많이 나는데 연수구 같은 경우는 박물관 등이 있어 길거리 현수막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데 구도심인 동구에 가보면 그런 문화 프로그램 홍보 배너는 찾기 어려웠어요. 모든 인천시민에게 문화 혜택이 골고루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황씨는 문화는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즐기는 것도 좋지만, 서로 알려주고 관심이 있는 것을 공유하다 보면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고 했다.

황씨는 “활동영역을 일부러 넓히기 보다는 그냥 여건이 되는대로 즐겁게 찾아다니고, 보고, 만나면서 사는 게 즐거운 것 같아요. 지금에 와서는 어디 좋은 대학, 무슨 과를 졸업해서 뭘 하면서 사는 지가 중요하기 보다는 문화 생활을 잘 즐길 줄 알며 사는 것도 하나의 복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김민재(경인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