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류: 안녕하세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전: 처음 뵙겠습니다. 문학을 전공하셨다고 하셨죠?
류: 네, 그렇습니다. 평론을 쓰고 있습니다.
전: 저는 시로 『시문학』으로 등단했어요. 1980년이니까 오래되었죠. 대학교 2학년 때 등단했고요. 시집도 2권 냈는데 지금은 다 매절되고 품절 되어서 없을 거예요.
류: 제가 미처 그 정보는 알지 못했네요. 시집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요. 다음 기회에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부터 여러 가지가 궁금해지는군요. 어떤 계기로 시를 쓰게 되셨나요?
전: 아마 지금도 있을 텐데, <만해백일장>이라고 있어요. 아마 2회 때였을 거예요. 그때 제가 시로 만해상을 탔어요. 저는 대학 일반부에 냈는데, 당시 심사위원장이 미당 서정주 선생이셨는데 제 것에 동그라미를 치고 나가셨대요. 그래서 장원이 되었고, 이걸 문덕수 시인이 다시 『시문학』에 추천하셔서 등단이 된 거죠. 『건축평론』으로는 1988년에 등단했는데, 그 당시에 『꾸밈』지라고 있었어요. 격월간이었는데, 그 잡지를 통해서 꾸밈건축평론상을 타면서 평단에 들어오게 되었죠. 여기까지는 우리가 좀 비슷한 거네요.
류: 네, 그런 것 같아요. 원래 전공이 건축이신데 글을 쓰는데 관심을 갖게 되신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전: 자연스럽게 얘기가 되겠네요. 대학은 중앙대학교 건축과에 입학했고요. 아니 그 전으로 돌아가야겠네요. 제가 선인고등학교 출신이에요. 당시에 제가 문예부에 들어가서 문예부장을 했어요. 제가 2학년 때 여러 학교 선배들이 모여서 인천의 학생문학회를 조직했어요. 그분들이 그걸 만들고, 제가 인천학생문학회의 2대 회장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저한테 건축이라는 것이 다가오기 전에 이미 글쓰기라는 것이 배어 있는 상태였어요. 그러고 나서 대학에 들어갔는데 중앙대에 문학동인반이라는 서클이 있어요. 거기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여러 학과의 문학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 거죠. 그러다가 1980년대라는 암울한 시기에 등단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문학에 먼저 빠지게 된 거죠. 졸업하면서 당시 김수근 선생님이 끌고 가시던 공간그룹에 입사를 하게 되었죠. 그때부터 건축공부를 제대로 했다고 보는 것이 맞아요.
김수근 선생님은 88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을 설계하신 분이고, 지금은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가 된 ‘공간’ 사옥의 설계자이자 소유자였죠. 또 오래전(1966년)에 『공간(SPACE)』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셨어요. 선생님께서는 이 잡지의 성격을 종합예술잡지로 만드셨죠. 당시에 병신춤의 공옥진 선생님도 발굴하셨고, 현대미술의 총아라고 하는 백남준 선생님의 비디오아트도 그 ‘공간’ 사옥에서 처음 시연을 했어요. 김덕수의 사물놀이패도 ‘공간’ 사옥에서 시작했어요.
저도 이런 분위기에서 건축설계를 하다가 2년차에서 3년차를 바라보던 시기, 1986년에 김수근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어요. 55세이셨으니 너무 일찍 돌아가신 거죠. 원래 올림픽이 개최되면 주경기장 설계자로 함께 띄우는 분위기가 있는데 김수근 선생님이 돌아가시면서 그것도 사라지게 되었죠. 올림픽 주경기장의 설계자가 돌아가신 상태에서 88올림픽을 맞이했으니까요. 그 시기에 『공간(SPACE)』도 어려움이 생겼죠. 그러면서 편집장 자리가 공석이 되는 상황이 되었고, 제가 그 자리로 이동을 하게 돼요.
당시는 건축가들이 대외적으로 포지셔닝이, 사회적 지위가 굉장히 취약했던 때였어요. 그런데 공간의 사람들은 굉장히 자존심이 강했어요. 제가 공간에 처음 입사했을 때 받은 명함에 나의 포지션이 아키텍트(Architect)라고 적혀 있었어요. 사회 막 나온 초짜인데 나에게 처음 준 포지션이 그런 거였죠. 그런데 제가 막상 현장에 가보니까 푸대접을 받는 거예요. 전문 직능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인정해주지 않는 거죠. 당시에 ‘현상설계’로 성당을 설계하는 공모가 있었는데, 거기서 건축가를 대하는 태도가 저로서는 못마땅했어요. 그때 제가 생각한 게 있어요. 내가 건축가로서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건축가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도 소중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물론 이런 생각이 그때 갑자기 떠오른 것은 아니에요. 제가 김수근 선생님 돌아가신 그해 9월에 ‘간향’이라는 건축예술비평운동그룹을 만들었어요.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연구소의 이름이기도 하죠. 그 모임을 하면서 건축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했고 그런 것들이 쌓이면서 평단에 들어섰는데, 마침 공석이던 『공간(SPACE)』의 편집장 자리로 넘어가게 된 거죠. 거기서 사회적 목소리를 많이 내는 건축가들, 특히 신진 건축가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찾아내는 데 주목하게 된 거죠. 이게 제가 건축계 안에서 지금의 역할을 담당하는 프레임을 짜게 된 계기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류: 어떻게 보면 운명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다음 발걸음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오신 것 같아요.
전: 사실 『공간(SPACE)』은 종합예술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 이전에는 주로 미술평론가나 시인, 조형예술, 문학 전공자들이 편집장을 했어요. 김수근, 장세양으로 이어진 발행인은 건축가였지만, 이들에게 힘이 돼준 동지들은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의 원로들이셨어요. 그분들의 영향력이 김수근 선생님 사후에도 이어진 거죠. 지금은 소유가 다 다른 곳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신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어지는 거죠. 제가 『공간(SPACE)』지의 편집장을 할 때에 우리 문화계의 원로들과의 모임자리에서 말석에 앉은 적이 많았어요. 저로서는 매 순간이 엄청난 자양분을 얻던 시기였던 거죠. 지난번에 전화하셨을 때 내게 건축사라고 하셨죠?
류: 네, 제가 뭐라고 호칭을 해야 할지 몰라서요. 처음에 그렇게 알았는데 찾아보니까 건축평론이셨더군요.
전: 엄밀히 말하면 건축사는 라이선스, 건축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죠. 국가가 인정한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건축사, 그 자격증이 없더라도 건축에 대한 자의식이 강하고 그 열망이 강하고 창의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건축가라는 이름을 써요. 나는 건축사가 아니고, 그 쓰는 건축가 정도로 말할 수 있겠네요.
류: 건축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인문학적 분들이 상당히 많으신 것 같아요. 실제로 그런가요?
전: 건축한 사람이 뒤늦게 인문학적 공부를 통해 작업의 완성도를 높인다기보다 원래 문학적 베이스가 있는 사람이 건축을 함께 할 때 시너지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아는 함성호 시인도 그렇고, 이상 김해경 시인도 그렇고. 문학적 배경 기반으로 해서 건축을 풀어낸 사람들이라.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이렇게 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사실 건축학과가 5년제가 된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었어요. 교수들 가운데 유학파가 많은데 그들이 유학을 가보니까 건축이 단지 엔지니어링이 아니거든요. 선진화된 교육을 받고 한국에 들어와서 교단에 서서 변화의 중심에서 많은 활약들을 했어요. 그런데 막상 5년제가 되고 나니까 인문학적 커리큘럼이 아니라 설계 중심의 학과 커리큘럼이 짜졌어요. 건축술적인 것들에만 너무 집중하게 된 거죠. 왜냐하면 이게 자연스럽게 5년제가 된 것이 아니라 교육인증프로그램과 연계된 거예요. 그 가장 큰 단점은 인증프로그램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버려져요. 획일화되어버린 거죠. 그럼에도 교단에 선 사람들이 건축 안에 인문적 베이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있으니까 과거보다는 많이 나아졌죠. 인문학적인 베이스를 가진 사람들이 건축을 하면 더 좋다고 생각해요.
류: 근대문학 전공자들도 건축에 관심이 많아요. 텍스트 중심이긴 하지만 근대문학에 드러난 공간성, 장소성 등이 중요한 연구대상이니까요.
전: 근대 공간 이야기를 하니까 김정동 교수님이 생각나네요. 그분이 한국문학 속의 근대공간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현역 교수진 가운데서는 서울시립대학교 박철수 교수가 『소설 속 공간산책』 같은 책을 썼어요. 이쪽에 관심이 있으시면 이런 분들의 책을 참조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2008년부터 심원문화사업회라는 후원단체에 관련이 되어 있는데, 거기서 심원건축학술상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건축학자들의 인문학적 토양을 배양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출발한 저술후원사업이에요. 가장 최근 수상작인 『근대 부엌의 탄생과 이면』 같은 글은 주목할 만해요. 이런 것들은 공간에 어떻게 생활이 개입되는지, 건축이 도시공간에 어떤 상상력을 줄 수 있는지 관계된 것이죠. 이런 관점을 가진 글들을 뽑아서 시상을 해왔는데 그게 벌써 13년이 되었어요. 이건 꼭 건축전공자만 응모하는 것이 아니에요. 누구나 대상이 될 수 있어요. 류 교수님 후배들에게도 홍보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류: 네, 적극 홍보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근대 연구자들은 관심이 많은 분야니까요. 좋은 정보인 것 같아요. 문학 안에서 장소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장소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사유가 바뀔 수 있으니까요. 그런 점 때문에 문학연구자들이 자연스럽게 이 부분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아요.
이제 화제를 조금 바꿔서 인천의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대표님은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활동하고 계신데, 인천의 건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전: 인천은 현대건축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불모지라고 할 수 있어요. 인천은 도시재생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100년 전의 장소성과 건축물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요. 그래서 중구, 개항장 이런 곳에 모든 관심이 몰려 있어요. 저는 인천 출신이니까 인천에 대한 생각을 안 가질 수 없고, 더욱이 저는 인천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공부는 서울에서 했지만, 인천을 떠나진 않았어요. 제가 직장 다닐 때도 아무리 멀어도 인천에서 계속 출퇴근을 했으니까요.
앞서 제가 말씀드린 ‘공간’이 한때 김수근 선생님 돌아가실 즈음에 어려워져서 경기도 파주로 이사한 적이 있어요. 그때 출퇴근 시간이 하루 5시간이었어요. 그때도 인천에서 출퇴근했어요. 당시만 해도 그 지역은 통행금지가 있었어요. 그때가 1987년 즈음이었는데 파주가 군사접경지여서 통행금지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10시가 넘으면 대중교통편이 다 끊겨서 집에 갈 생각도 못하고 야근을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당시는 제가 인천을 깊게 들여다본다는 것이 어려웠죠. 주말에나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때 제가 만난 분이 바로 홍정선 교수님의 친구인 이영유 시인이었어요. 이분이 당시 일요신문사 기자셨어요. 그분과 만나면서 인천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죠.
제가 인천에 대해 처음 글을 쓴 건 1994년에 『황해문화』를 통해서였죠. 그 이후로 『황해문화』랑 관계를 맺고 한 12~13년 정도 문화비평/건축 코너의 고정필자를 하게 되었죠. 그걸 계기로 인천의 건축과 도시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쓰게 되었어요. 그 이후에 제가 『공간(SPACE)』지를 나와서 1996년에 『건축인 포아』라는 잡지를 창간하게 돼요. 이때 아까 말씀드린 이영유 선배가 많이 도와줬어요. 같이 술도 마시고 동행하면서 이야기들이 많이 심화하기도 했죠. 『황해문화』에 글을 쓰면서 인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소화하고 표현하고 싶었고, 인천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인천은 현대건축만큼은 홀대하는 도시라고 할 수 있어요. 현재 인천에 내로라할 만한 현대건축이 있느냐, 그나마 송도가 생기면서 조금 있지만 그것도 순수하게 한국의 건축가들이 에너지를 쏟아서 창의적으로 만들어낸 건축이라기보다는 뭔가 서구의 건축에 많이 기댄 것이 대부분이죠. 제가 그나마 좋아하는 곳은 송도 트리플 스트리트예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송도의 개발이 거의 멈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멈춘 동네가 바로 송도 트리플 스트리트예요. 현재의 트리플 스트리트가 당시엔 사이언스 스트리트로 소개되었죠. 한동안은 기초 골조공사만 놓고 그냥 황무지였죠. 그 프로젝트를 이어받은 사람이 매스스터디스 건축사사무소의 조민석이라고 하는 건축가였어요. 이 사람이 현재 한국의 50대 건축가 중에서 가장 걸출한 분이죠. 7년 전인가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관으로 황금사자상을 타게 만든 주역이에요. 그분 말로는 이게 설거지 프로젝트라고 해요. 남이 벌려 놓은 거 말끔하게 청소해주는. 저는 이건 상업건물이지만 의미가 있다고 봐요.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찾아와서 즐길 게 있고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인천은 그런 장소가 거의 전무했어요. 반강제적으로 중구에 가면 있어, 개항장 가면 있어 이렇게 말하는데요. 100년 전 건물, 그나마 남아 있는 건물에 조그마한 카페들, 이런 데 가서 모든 것을 소화하라고 하면 누가 가서 소화할 수 있겠어요?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자산이긴 하지만 그 자산만큼 우리의 현대도 바라봐야 하는데, 인천은 현대건축의 자산이 매우 취약해요. 그런데 그 취약한 부분을 그나마 개선하고 있는 것은 서울의 건축가들 몇 사람이나 해외 건축가들이에요. 그럼, 문제가 뭘까요? 인천의 현대성을 표상할 수 있는 건축물이 없다는 것은 인천 건축계에 인재들이 없다는 거와 통하죠. 인천의 건축을 짊어지고 갈 창의적인 인재들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사실 인천에 건축과를 가진 대학이 몇 안 돼요. 종합대학도 적으니까요. 그러니까 창조적인 인물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안 되어 있어요. 게다가 여기서 배출된 친구들이 어딜 가서 경쟁을 하느냐 하면, 서울이나 외국으로 나가버려요. 인천에는 그나마도 없는 인물난에 여기서 발굴된 친구들이 이곳을 시장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서 경쟁을 하다 보니까 씨가 말라버리게 되는 거죠. 몇몇 뜻있는 건축인들이 그나마 인천을 자신이 경쟁할 수 있는 필드로 삼고 내려오는 거고, 그것이 극히 제한적이죠. 인천은 지금 같은 패턴으로 가면 앞으로도 10~20년 뒤에도 여전히 인물난에 허덕이면서 어떤 창의적 공간이 만들어지지도 않고 현대건축을 표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서울이나 부산, 혹은 제주에 뺏길 거예요. 현재는 그래요. 현대건축의 경쟁력으로 보았을 때 인천은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못한다고 봐요.
그래서 제가 인천에서 해왔던 것 중 하나가 1998년 5월에 개최한 <건축백일장>이에요. 저도 문학 베이스가 있다 보니까 백일장이라는 말을 좀 쉽게 사용했던 것 같아요. 앞서 얘기했던 이영유 선배도 시 쓰고 연극 연출하던 분이다 보니까 내가 이런 것을 하자고 하니까 좋다 해서 시작하게 되었죠. 그때 당시 제가 『건축인 포아』를 창간하고 편집인 겸 초대 주간을 하던 때라 건축모형 집짓기 대회를 건축백일장의 형식으로 만들게 된 거예요. 지역기업의 후원을 받아서 5년 정도 진행했어요. 그런데 IMF 지나면서 『건축인 포아』의 상황이 안 좋아서 2000년에 잡지 발행권을 넘겨야 하는 입장이 되었어요. 그래서 기존에 <건축백일장>을 지원했던 인천건축사회가 주관처가 되어 연례행사를 이어받았어요. 그렇게 해서 5년 정도 하다가 이걸 다시 인천남구청(지금의 미추홀구)에 일임을 해요. 거기서 한 10년 정도를 하다가 지난해인가 그걸 다시 인천건축사회에 다시 넘겼어요. 지나와서 보니 1998년부터 지금까지 중간에 한두 회 정도를 빼고는 지속적으로 해왔어요. 그 행사가 어떻게 지속이 가능했냐면, 인천시와 인천건축사회가 공동주최하는 <인천건축문화제> 때문이에요.
1999년도에 건축문화의 해라는 것이 지정되거든요. 그래서 전국에서 건축문화라는 것을 띄워야 하는 미션이 생긴 거죠. 그때 인천에도 건축문화제가 만들어지죠. 출발은 <인천시민건축전>이었어요. 그게 그 이후에 <인천건축문화제>라는 이름으로 쭉 내려온 거죠. 그 안에서 시민과 함께 하는 건축프로그램으로 건축백일장이 자리를 잡게 된 거였죠. 건축백일장은 이후에 부산, 대구 등 전국의 여러 지자체에서 유사한 건축모형 만들기 대회내지는 살고 싶은 집 만들기 대회 등의 원형이 돼요. 제가 이렇게 건축문화제와 알게 모르게 연관이 되어 있다 보니 98년도 이후부터 직접적으로나 우회적으로나 인천 건축문화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역할을 해오게 된 거였죠. 그거에 대한 배경도 결국에 큰 것은, 인천 안에 인천의 시민들과 후학들에게 건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때 당시에 처음 참여했던 친구들이 이제는 30대 중반, 그 당시 초등학생들이 어엿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 거죠.
건축 분야에서 창조적인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프로그램이 필요한데, 이벤트성 행사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다른 문화예술 영역에는 게릴라가 많아요. 실제로 건축에서도 게릴라 정신으로 자기만의 창의력으로 활동하는 친구들이 많아져야 해요. 그게 많아지다 보면 현대건축도 그만큼 더 터를 견고하게 다질 수 있는 거죠. 그것이 시민들에게 전달되면 시민들도 더 나은 건축 환경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있고 그것을 향유하고 즐기면서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한 품격을 높게 설정할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현재까지는 그게 안 되는 거죠. 이후에는 그런 것들이 좀 가능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류: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목표를 위해 현재의 인천이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행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전: 제가 재작년부터 의도적으로 만든 프로그램이 있어요. <인천 아키텍트 5>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이건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들만 대상으로 매년 5명 이하에서 건축가를 발굴해서 상을 주는 거예요. 우리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은 어떤 훈장을 달아주고, 어떤 트로피를 건네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죠. 때로 옷이 그 사람을 바꾸게 하듯이. 그래서 제가 지금 인천에서 하는 일이 인천에서 건축 활동을 하는 이들한테 그린재킷 비슷한 옷을 입혀주는 역할을 하고자 해요. 타 분야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현재 인천에서는 이런 것도 필요하다고 봐요. 우리가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데 밖에서 누가 인정을 하겠어요. 최소한, 이 정도까지 오면 우리는 박수치고 서로 응원하자. 이런 분위기를 만들자. 이렇게 응원하는 발굴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인천을 좀 소란스럽게 만들어 보자. 그래서 언젠가는 이런 프로그램들이 더 자생적으로 늘어나길 바라는 거죠. 이건 관이 주도하는 포장된 프로그램으로는 안 되는 거죠. 그런 거 말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프로그램을 엮어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죠. 이 부분들이 앞으로 인천의 현대건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까? 계속해서 100년 전의 시간성만 바라보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지금 보세요. 부산 대단합니다. 제주, 더 대단하고요. 광주, 대구에도 이름 대면 알 만한 현대건축물들이 많이 서 있어요. 인천은 그나마 송도에 몇 개 있을 뿐이죠.
류: 그러고 보면 인천을 대표할 만한 현대건축이 명확하지 않은 것을 사실인 것 같아요.
전: 다들 50년 전, 100년 전에만 몰두하니까. 거기에 추억이 있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추억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거거든요. 그러니까 계속 어떤 스토리들을 만들어줘야 해요.
류: 그렇다면 대표님께서 지금 인천에 제안하고 싶은 스토리텔링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전: 그래서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최근에 시장이 쓰던 관사 옆에 도시공사가 매입을 하여 공공자산으로 만들어서 인천시민에게 오픈한 송학동 이씨주택이 있어요. 그 건물이 김수근 선생님이 작업하신 주택 가운데 하나예요. 그게 공공에 열어놓은 건축자산의 성격으로 오픈된 건데요. 안양에 가면 김중업 건축박물관이라는 것이 있어요. 프랑스 대사관을 설계한 분이죠. 한국현대건축의 태동을 연 분으로 두 사람을 이야기하는데 바로 김중업 선생님과 김수근 선생님이에요. 김수근 선생님이 1986년에 돌아가셨는데 아직 선생님 이름으로 박물관이 없어요. 선생님이 애지중지하고 창업하고 만들어낸 건물은 지금 아라리오 스페이스로 팔렸고. 그래서 나는 인천 도시공사가 그런 건물은 과감하게 김수근 박물관을 유치하는 보다 구체적이고 큰 그림의 에너지를 내줬으면 좋겠어요. 만약에 도시공사가 이걸 이렇게 전향적으로 생각해 준다고 하면 돌아가신 김수근 선생님은 물론이고 그분의 제자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지금 김수근 문화재단이 서울에 있는데 장소가 없어요. 최근 송학동 이씨주택의 설계에 얽힌 김수근의 건축이야기를 증언해준 김원석 선생님이 계신데 이분이 안타깝게도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이분은 김수근 선생님의 오른팔로서 설계본부장을 맡았고, 이 주택의 설계 실무를 담당했던 분이셨어요. 김수근 사후 2대 공간그룹 회장이기도 하셨고요. 어쨌든 그분의 고증에 의해 그 건물이 콘텐츠를 강화했어요. 그 건물의 의미와 김수근에게 있어서 어떤 건물이고, 속성은 무엇인지 등등. 그 도면에 대해 설명을 세세하게 해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사실 제가 이 인터뷰에 응한 이유도 이 때문이에요. 한국현대건축의 태두로 불리는 김수근 선생님의 박물관을 인천이 그 건물을 통해서라도 유치해줬으면 좋겠다. 이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류: 찾아보니 이 건물이 1977년에 설계하고 준공된 건물이네요. ‘이음1977’이라는 이름으로 건축자산 보전형 리모델링에 착수한다고 되어 있네요. 대표님 말씀대로 문화적 자산이 그 가치를 제대로 주목받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음1977’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이야기는 김수근 선생님 자체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인천시와 도시공사가 그 스토리텔링을 놓치지 않고 좀 더 귀를 기울여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 기점이 되어서 근대만이 아니라 인천의 현대건축까지 관심이 넓혀지는 한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긴 시간 동안 다양한 관점에서 건축과 인천의 관계를 풀어주신 점 정말 감사드립니다.
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