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유계영

이름: 유계영 (庾桂瑛, Yu Gyeyoung)

출생: 1985. 8. 15.

분야: 문학(시)

인천과의 관계: 인천 출생

작가정보: ygy815@hanmail.net
               인스타그램 @ygy815

<작가의 대표이력>
2010 월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2015 시집 『온갖 것들의 낮』, 민음사
2018 시집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현대문학
2019 《The body is used for life, and the life is engraved on the body》, 코스모40, 인천
2019 시집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문학동네
2021 시집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 아침달

1.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품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유계영,『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문학동네, 2019 (사진: 유계영)

가장 최근에 쓴 시가 대표 시 아닐까. 새로 한 편 쓸 때마다 나는 다른 상태가 된다. 내가 나 아닌 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 나와는 다른 내가 된다고, 이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대표 작품을 스스로 갱신하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작가일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나의 시 세계를 갱신하는 일에 늘 성공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마음이 그러하다는 것. 계속 나아가고 변화하고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오늘 쓴 시가 나의 대표작이라고 생각해야만 안심할 수 있다. <인천문화통신 3.0>에 이 질문에 관련한 사진을 필수적으로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 좀 난감하다. 문학 작품은 사진으로 찍었을 때 모양새가 좋은 장르가 아니다. (SNS에 올리려고 책 표지만 찍고 빈손으로 서점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모르지 않지만) 휘갈겨 쓴 노트나 꼬질꼬질한 A4 용지를 사진 찍어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가장 최근에 펴낸 시집 표지 사진을 보내는 이유가 이러하다.

2. 작품 관련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나는 서커스단의 곡예사가 저글링 하듯이 언어를 던지고 받고 문장을 띄웠다 밀쳤다 하면서 쓴다. 서정적인 메시지나 시적 정황, 소재 같은 것에 기대지 않고, 인간의 의미를 최대한 의심하면서, 언어가 스스로 움직이도록 쓴다. 때때로 불현듯 떠오른 문장으로부터 (튀어나온 못에 코가 걸린 스웨터처럼) 다른 문장들이 줄줄 쏟아질 때도 있다. (정말 아주 가끔이다.)
프랑스 시인 외젠 기유빅(Eugene Guillevic)의 시집을 읽다가 완전히 사로잡힌 적이 있다.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질문의 방에 나를 밀어 넣은 이 짧은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만약 언젠가/ 돌 하나가 너에게 미소 짓는 것을 본다면,/그것을 알리러 가겠니?“
나는 이 질문이 너무나 좋았다. 이 질문에 다 있었다. 사물과 나 사이 비밀이 발생하는 순간이 있었고, 그것을 알렸을 때(표현했을 때) 받게 될 세간의 천치 취급이 있었다. 또 문학적 언어가 발화되는 순간의 팽팽한 결심이 있었다. 이 질문은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너는 어떤 시를 쓸 거지?
지하철을 타고 일하러 가다가 문득 3년 전에 읽은 기유빅의 질문에 대답하고 싶었다.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 자리에서 20분 만에 대답의 시를 썼다. 나는 이것으로 질문의 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아니다, 이제 그 질문의 방이 나의 집과 다름없다.

3. 어떤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나에 대한 평가야말로 내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욕심을 내보자면 웃기다는 말을 듣고 싶다. 질문이 이게 아닌 건 아는데,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사적인 친분 관계에서도, 심지어 시에서도, 웃기고 싶다. (울리거나 때리는 시가 있는데,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웃기는 것도 재능 없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겸연쩍기 때문에 우회하고 있음을 인정하며 이실직고 하자면, 나는 예술의 본질이 재미와 환기라고 생각한다. 그걸 잘 하고 싶다.

4. 앞으로의 작품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올해에는 첫 산문집이 나온다. 어쩌다 산문 청탁이 들어오면, 도대체 왜 시인에게 산문을 쓰라는 거냐며 나는 쉴새없이 투덜거리는 사람이다. 마감이 지나도록 쓰기 싫어 이를 박박 가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알아주는 미문가이고 싶어 한다. 누구보다 감각적으로 풍부하며, 개성적 사유가 빛나는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싶어 한다. 미문의 욕구는 산문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으므로, 어쩌면 내가 이토록 산문 쓰기 싫다고 몸부림치는 이유는, 너무나 잘 하고 싶기 때문이다. 등단 이후 십여 년간 난리법석 떨어가며 써 온 산문들이 책으로 묶인다. 산문의 세계에서 쭈뼛거리다가 울적하게 돌아와, 시를 써야지. 계속되는 왕복 운동이 될 것이다.

5. 예술적 영감을 주는 인천의 장소 또는 공간은?

인천대공원 (사진: 유계영)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30년간 단 한 번의 이사도 없이 살았다. 딱 한 번 행해진 이사 또한 살던 곳으로부터 5분 떨어진 곳으로 간 게 전부다. 사정이 이렇다는 것은 내가 인천에 대해 잘 모른다는 뜻이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파도 소리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천은 나에게 예술적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개별화된 장소가 아니라, 집 앞 슈퍼마켓, 그 옆 청과상, BYC 사거리, 반장네 203동, 부반장네 308동, 상습 정체구간 장수IC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15분쯤 가면 인천대공원이 있다는 사실은 큰 기쁨이었다. 이사를 가지 않고 같은 동네에서 거의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초중고교 시절의 봄 소풍과 가을 소풍은 십중팔구 인천대공원이었음에도, 나는 그곳을 좋아했다. 그곳의 숲을 좋아했다. 다 크고 나서도 가끔 마감을 하다 시가 안 풀리면 새벽 두세 시쯤 슬그머니 찾아가는 곳이었다. (지금은 아마 야간 출입이 통제될 것이다.) 끝의 끝까지 펼쳐진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가끔 야생동물 울음소리가 자연과의 동질감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다 이따금 사람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자연에 속하고 사람에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대공원에서 나는 황홀하고 자유롭고 겁에 질렸다. 감각을 상기하려 애쓸 필요가 없었다. 어둠과 빛과 소리와 온도가 마구 달려들고 온통 쏟아지고 흠뻑 끼얹히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지금 인천에 살지 않는다. 그토록 과묵하고 새카만 숲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커다란 공원이 주변에 없다는 사실만큼은 많이 서운하다. 이제 무엇이 나에게 말해줄 것인가. 너는 이렇게 작다고. 나무가 더 크다고. 호수가 더 넓다고.




국악아티스트 김시원

이름: 김시원(金시원, Kim Siwon)

출생: 전라남도 해남군

분야: 공연(국악타악, 노래)

인천과의 관계: 공연진행

작가정보: https://www.youtube.com/user/percussionGroupTAGO

<작가 대표이력>
2005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타악연희과 졸업
2010 국악그룹 타고 결성
개인이력
2017 <한국전통 무용 연습을 위한 기본장단: 꾼 part.1> 발매
2017 <한국전통 무용 연습을 위한 기본장단: 꾼 part.2> 발매
2018 <한국전통 무용 연습을 위한 기본장단: 꾼 part.3> 발매
2018 <한국전통 무용 연습을 위한 기본장단: 꾼 part.4> 발매
2018 트로트 음원발매 <깍지콩>
2020 트로트 음원발배 <내 맘대로 뿡이야>
2021 MBN <보이스킹> 출연
단체이력
2016 금나래 아트홀-상주 예술 단체 프로젝트 콘서트 <타고-코리안드럼>
2016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참가
2016 Mnet <판 스틸러> 방송 출연
2017 평창 문화 올림픽 인증 프로젝트
2017 호주, 뉴질랜드 <WOMADelaide Festival> 초청 공연
2017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어셈블리 발롬홀 (24회 공연)
2018 라트비아 독립 100주년 뮤직 페스티벌 참가
2018 남아프리카 공화국 초청 공연
2019 아르헨티나-우루과이 <한국 축제>
2019 한-튀니지 관계 50주년 기념 초청 콘서트
2020 네덜란드 22개 도시 투어 <타고-코리안드럼 Ⅱ>
2020 광주 아시아 문화 센터 <타고-브런치 콘서트>
2021 타고 10주년 콘서트 <태양의 북소리>

1.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공연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코리안드럼-타고> 공연 모습 ⓒ타고

2016년, 2017년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코리안드럼-타고> 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2010년에 사물놀이 창시자이신 최종실 선생님께서 ‘두드릴 타(打), 밝을 고(髛)’라는 뜻으로 ‘타고’라는 팀명을 만들어 주셨다. 그 이후 다양한 공연 레파토리를 만들어 오면서 타고만의 색깔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과정들을 겪어가면서 우리만의 콘텐츠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때 만든 공연이 북을 주제로 한 <코리안드럼-타고> 이다.
2016년 우리의 작품으로 인생을 건 도전을 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공연이라 할 수 있는 ‘난타’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시발점인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타고도 도전했다. 이곳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서 전 세계의 공연자들과 기획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낮에는 홍보를, 밤에는 공연을 하며 홍보전쟁에 뛰어들었다. 우리의 진심과 간절함이 통해서인지 첫 공연부터 매진이 되기 시작해서 24회 공연 내내 매진을 이어 갔다. 최고 공연에만 주어지는 평점 별 다섯 개를 받았다. 이후 2017년, 한 번 더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도전했고 기적처럼 24회 전석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렇게 타고는 북을 주제로 공연을 하는 팀으로 자리매김했고, 매년 10개국 투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 공연 관련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율고를 연주하는 모습 ⓒ타고

북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다 보니 선율이 없는 타악기의 한계에 부딪히곤 했다. 선율이 있는 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끝에 지금의 ‘율고’라는 악기가 탄생했다. ‘북은 항상 둥글다’라는 편견을 깨고자 네모난 악기를 제작했다. 오른쪽은 장구, 왼쪽은 북, 위에는 현악기와 건반악기를 얹었다. 하나의 악기를 4명이 동시에 연주하며, 여기에 콩트와 연기를 접목했다. ‘율고’는 타고의 정체성이 되었고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3.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국악의 길로 들어선 지도 24년이 지났다. 그동안 수많은 연습과 땀을 흘리며 작품을 만들어서 지금의 타고와 김시원이 있는 것 같다. 전공은 타악이지만, 내가 만든 음악을 직접 연주하고 노래 부를 수 있는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고 싶다. 공연은 혼자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가 공감되고, 다시 찾게 되면서 그 가치가 올라가고 생명력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모습에 안주하지 않고 늘 도전하는 예술가로 남고 싶다.

4. 앞으로의 활동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코로나로 인해 많은 예술가들이 진로를 바꾸는 것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비 온 뒤, 땅이 더 단단해지는 것처럼 지금의 순간을 잘 버텼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공연할 수 있는 무대가 많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다. 하반기에는 코로나 상황이 좀 나아져 해외 투어가 다시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5. 예술적 영감을 주는 인천의 장소 또는 공간은?

파라다이스시티 클럽 크로마 전경 ⓒ파라다이스시티

파라다이스시티 클럽 크로마에서 공연했을 때가 생각난다. VIP 초청으로 1시간 동안 한국적인 공연을 선보였다. 클럽 크로마의 웅장한 사운드와 화려한 조명은 타고의 공연을 새롭게 재탄생 시켰다. 전통과 현대가 만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공항과 현대적인 건축물, 근대 문화유산 등 인천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문화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어떤 도시보다 매력적인 문화도시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건축의 가능성을 엮는 스토리텔러: 『와이드AR』 발행인 전진삼 건축평론가와의 만남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건축의 가능성을 엮는 스토리텔러『와이드AR』 발행인 전진삼 건축평론가와의 만남

류수연(인하대학교 교수)

인천생. 종합예술지 월간 『공간(SPACE)』 편집장 역임. 건축잡지 월간 『건축인 포아(POAR)』를 창간하여 편집인 겸 초대 주간을 역임했다. 이후 건축잡지 격월간 『와이드AR』을 창간하여 현재 발행인이다. 한동안 계간 『황해문화』 문화비평/건축 코너의 고정 필자로 활약했다. 배재대학교와 광운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겸임교수로 재직한 바 있으며, (재)인천문화재단 6기 이사로 활동했다. 건축비평서로 『건축의 발견』, 『건축의 불꽃』, 『조리개 속의 도시, 인천』, 『건축의 마사지』 등을 냈고, 20여 권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2006년 10월 이래 건축세미나 〈땅과 집과 사람의 향기〉(약칭, 땅집사향)를 매월 1회 개최해오고 있다. 현재 간향 미디어랩 대표이다.

류: 안녕하세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전: 처음 뵙겠습니다. 문학을 전공하셨다고 하셨죠?

류: 네, 그렇습니다. 평론을 쓰고 있습니다.

전: 저는 시로 『시문학』으로 등단했어요. 1980년이니까 오래되었죠. 대학교 2학년 때 등단했고요. 시집도 2권 냈는데 지금은 다 매절되고 품절 되어서 없을 거예요.

류: 제가 미처 그 정보는 알지 못했네요. 시집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요. 다음 기회에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부터 여러 가지가 궁금해지는군요. 어떤 계기로 시를 쓰게 되셨나요?

전: 아마 지금도 있을 텐데, <만해백일장>이라고 있어요. 아마 2회 때였을 거예요. 그때 제가 시로 만해상을 탔어요. 저는 대학 일반부에 냈는데, 당시 심사위원장이 미당 서정주 선생이셨는데 제 것에 동그라미를 치고 나가셨대요. 그래서 장원이 되었고, 이걸 문덕수 시인이 다시 『시문학』에 추천하셔서 등단이 된 거죠. 『건축평론』으로는 1988년에 등단했는데, 그 당시에 『꾸밈』지라고 있었어요. 격월간이었는데, 그 잡지를 통해서 꾸밈건축평론상을 타면서 평단에 들어오게 되었죠. 여기까지는 우리가 좀 비슷한 거네요.

류: 네, 그런 것 같아요. 원래 전공이 건축이신데 글을 쓰는데 관심을 갖게 되신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전: 자연스럽게 얘기가 되겠네요. 대학은 중앙대학교 건축과에 입학했고요. 아니 그 전으로 돌아가야겠네요. 제가 선인고등학교 출신이에요. 당시에 제가 문예부에 들어가서 문예부장을 했어요. 제가 2학년 때 여러 학교 선배들이 모여서 인천의 학생문학회를 조직했어요. 그분들이 그걸 만들고, 제가 인천학생문학회의 2대 회장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저한테 건축이라는 것이 다가오기 전에 이미 글쓰기라는 것이 배어 있는 상태였어요. 그러고 나서 대학에 들어갔는데 중앙대에 문학동인반이라는 서클이 있어요. 거기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여러 학과의 문학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 거죠. 그러다가 1980년대라는 암울한 시기에 등단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문학에 먼저 빠지게 된 거죠. 졸업하면서 당시 김수근 선생님이 끌고 가시던 공간그룹에 입사를 하게 되었죠. 그때부터 건축공부를 제대로 했다고 보는 것이 맞아요.
김수근 선생님은 88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을 설계하신 분이고, 지금은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가 된 ‘공간’ 사옥의 설계자이자 소유자였죠. 또 오래전(1966년)에 『공간(SPACE)』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셨어요. 선생님께서는 이 잡지의 성격을 종합예술잡지로 만드셨죠. 당시에 병신춤의 공옥진 선생님도 발굴하셨고, 현대미술의 총아라고 하는 백남준 선생님의 비디오아트도 그 ‘공간’ 사옥에서 처음 시연을 했어요. 김덕수의 사물놀이패도 ‘공간’ 사옥에서 시작했어요.
저도 이런 분위기에서 건축설계를 하다가 2년차에서 3년차를 바라보던 시기, 1986년에 김수근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어요. 55세이셨으니 너무 일찍 돌아가신 거죠. 원래 올림픽이 개최되면 주경기장 설계자로 함께 띄우는 분위기가 있는데 김수근 선생님이 돌아가시면서 그것도 사라지게 되었죠. 올림픽 주경기장의 설계자가 돌아가신 상태에서 88올림픽을 맞이했으니까요. 그 시기에 『공간(SPACE)』도 어려움이 생겼죠. 그러면서 편집장 자리가 공석이 되는 상황이 되었고, 제가 그 자리로 이동을 하게 돼요.
당시는 건축가들이 대외적으로 포지셔닝이, 사회적 지위가 굉장히 취약했던 때였어요. 그런데 공간의 사람들은 굉장히 자존심이 강했어요. 제가 공간에 처음 입사했을 때 받은 명함에 나의 포지션이 아키텍트(Architect)라고 적혀 있었어요. 사회 막 나온 초짜인데 나에게 처음 준 포지션이 그런 거였죠. 그런데 제가 막상 현장에 가보니까 푸대접을 받는 거예요. 전문 직능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인정해주지 않는 거죠. 당시에 ‘현상설계’로 성당을 설계하는 공모가 있었는데, 거기서 건축가를 대하는 태도가 저로서는 못마땅했어요. 그때 제가 생각한 게 있어요. 내가 건축가로서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건축가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도 소중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물론 이런 생각이 그때 갑자기 떠오른 것은 아니에요. 제가 김수근 선생님 돌아가신 그해 9월에 ‘간향’이라는 건축예술비평운동그룹을 만들었어요.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연구소의 이름이기도 하죠. 그 모임을 하면서 건축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했고 그런 것들이 쌓이면서 평단에 들어섰는데, 마침 공석이던 『공간(SPACE)』의 편집장 자리로 넘어가게 된 거죠. 거기서 사회적 목소리를 많이 내는 건축가들, 특히 신진 건축가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찾아내는 데 주목하게 된 거죠. 이게 제가 건축계 안에서 지금의 역할을 담당하는 프레임을 짜게 된 계기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류: 어떻게 보면 운명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다음 발걸음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오신 것 같아요.

전: 사실 『공간(SPACE)』은 종합예술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 이전에는 주로 미술평론가나 시인, 조형예술, 문학 전공자들이 편집장을 했어요. 김수근, 장세양으로 이어진 발행인은 건축가였지만, 이들에게 힘이 돼준 동지들은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의 원로들이셨어요. 그분들의 영향력이 김수근 선생님 사후에도 이어진 거죠. 지금은 소유가 다 다른 곳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신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어지는 거죠. 제가 『공간(SPACE)』지의 편집장을 할 때에 우리 문화계의 원로들과의 모임자리에서 말석에 앉은 적이 많았어요. 저로서는 매 순간이 엄청난 자양분을 얻던 시기였던 거죠. 지난번에 전화하셨을 때 내게 건축사라고 하셨죠?

류: 네, 제가 뭐라고 호칭을 해야 할지 몰라서요. 처음에 그렇게 알았는데 찾아보니까 건축평론이셨더군요.

전: 엄밀히 말하면 건축사는 라이선스, 건축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죠. 국가가 인정한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건축사, 그 자격증이 없더라도 건축에 대한 자의식이 강하고 그 열망이 강하고 창의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건축가라는 이름을 써요. 나는 건축사가 아니고, 그 쓰는 건축가 정도로 말할 수 있겠네요.

류: 건축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인문학적 분들이 상당히 많으신 것 같아요. 실제로 그런가요?

전: 건축한 사람이 뒤늦게 인문학적 공부를 통해 작업의 완성도를 높인다기보다 원래 문학적 베이스가 있는 사람이 건축을 함께 할 때 시너지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아는 함성호 시인도 그렇고, 이상 김해경 시인도 그렇고. 문학적 배경 기반으로 해서 건축을 풀어낸 사람들이라.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이렇게 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사실 건축학과가 5년제가 된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었어요. 교수들 가운데 유학파가 많은데 그들이 유학을 가보니까 건축이 단지 엔지니어링이 아니거든요. 선진화된 교육을 받고 한국에 들어와서 교단에 서서 변화의 중심에서 많은 활약들을 했어요. 그런데 막상 5년제가 되고 나니까 인문학적 커리큘럼이 아니라 설계 중심의 학과 커리큘럼이 짜졌어요. 건축술적인 것들에만 너무 집중하게 된 거죠. 왜냐하면 이게 자연스럽게 5년제가 된 것이 아니라 교육인증프로그램과 연계된 거예요. 그 가장 큰 단점은 인증프로그램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버려져요. 획일화되어버린 거죠. 그럼에도 교단에 선 사람들이 건축 안에 인문적 베이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있으니까 과거보다는 많이 나아졌죠. 인문학적인 베이스를 가진 사람들이 건축을 하면 더 좋다고 생각해요.

류: 근대문학 전공자들도 건축에 관심이 많아요. 텍스트 중심이긴 하지만 근대문학에 드러난 공간성, 장소성 등이 중요한 연구대상이니까요.

전: 근대 공간 이야기를 하니까 김정동 교수님이 생각나네요. 그분이 한국문학 속의 근대공간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현역 교수진 가운데서는 서울시립대학교 박철수 교수가 『소설 속 공간산책』 같은 책을 썼어요. 이쪽에 관심이 있으시면 이런 분들의 책을 참조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2008년부터 심원문화사업회라는 후원단체에 관련이 되어 있는데, 거기서 심원건축학술상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건축학자들의 인문학적 토양을 배양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출발한 저술후원사업이에요. 가장 최근 수상작인 『근대 부엌의 탄생과 이면』 같은 글은 주목할 만해요. 이런 것들은 공간에 어떻게 생활이 개입되는지, 건축이 도시공간에 어떤 상상력을 줄 수 있는지 관계된 것이죠. 이런 관점을 가진 글들을 뽑아서 시상을 해왔는데 그게 벌써 13년이 되었어요. 이건 꼭 건축전공자만 응모하는 것이 아니에요. 누구나 대상이 될 수 있어요. 류 교수님 후배들에게도 홍보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류: 네, 적극 홍보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근대 연구자들은 관심이 많은 분야니까요. 좋은 정보인 것 같아요. 문학 안에서 장소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장소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사유가 바뀔 수 있으니까요. 그런 점 때문에 문학연구자들이 자연스럽게 이 부분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아요.
이제 화제를 조금 바꿔서 인천의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대표님은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활동하고 계신데, 인천의 건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전: 인천은 현대건축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불모지라고 할 수 있어요. 인천은 도시재생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100년 전의 장소성과 건축물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요. 그래서 중구, 개항장 이런 곳에 모든 관심이 몰려 있어요. 저는 인천 출신이니까 인천에 대한 생각을 안 가질 수 없고, 더욱이 저는 인천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공부는 서울에서 했지만, 인천을 떠나진 않았어요. 제가 직장 다닐 때도 아무리 멀어도 인천에서 계속 출퇴근을 했으니까요.
앞서 제가 말씀드린 ‘공간’이 한때 김수근 선생님 돌아가실 즈음에 어려워져서 경기도 파주로 이사한 적이 있어요. 그때 출퇴근 시간이 하루 5시간이었어요. 그때도 인천에서 출퇴근했어요. 당시만 해도 그 지역은 통행금지가 있었어요. 그때가 1987년 즈음이었는데 파주가 군사접경지여서 통행금지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10시가 넘으면 대중교통편이 다 끊겨서 집에 갈 생각도 못하고 야근을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당시는 제가 인천을 깊게 들여다본다는 것이 어려웠죠. 주말에나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때 제가 만난 분이 바로 홍정선 교수님의 친구인 이영유 시인이었어요. 이분이 당시 일요신문사 기자셨어요. 그분과 만나면서 인천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죠.
제가 인천에 대해 처음 글을 쓴 건 1994년에 『황해문화』를 통해서였죠. 그 이후로 『황해문화』랑 관계를 맺고 한 12~13년 정도 문화비평/건축 코너의 고정필자를 하게 되었죠. 그걸 계기로 인천의 건축과 도시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쓰게 되었어요. 그 이후에 제가 『공간(SPACE)』지를 나와서 1996년에 『건축인 포아』라는 잡지를 창간하게 돼요. 이때 아까 말씀드린 이영유 선배가 많이 도와줬어요. 같이 술도 마시고 동행하면서 이야기들이 많이 심화하기도 했죠. 『황해문화』에 글을 쓰면서 인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소화하고 표현하고 싶었고, 인천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인천은 현대건축만큼은 홀대하는 도시라고 할 수 있어요. 현재 인천에 내로라할 만한 현대건축이 있느냐, 그나마 송도가 생기면서 조금 있지만 그것도 순수하게 한국의 건축가들이 에너지를 쏟아서 창의적으로 만들어낸 건축이라기보다는 뭔가 서구의 건축에 많이 기댄 것이 대부분이죠. 제가 그나마 좋아하는 곳은 송도 트리플 스트리트예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송도의 개발이 거의 멈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멈춘 동네가 바로 송도 트리플 스트리트예요. 현재의 트리플 스트리트가 당시엔 사이언스 스트리트로 소개되었죠. 한동안은 기초 골조공사만 놓고 그냥 황무지였죠. 그 프로젝트를 이어받은 사람이 매스스터디스 건축사사무소의 조민석이라고 하는 건축가였어요. 이 사람이 현재 한국의 50대 건축가 중에서 가장 걸출한 분이죠. 7년 전인가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관으로 황금사자상을 타게 만든 주역이에요. 그분 말로는 이게 설거지 프로젝트라고 해요. 남이 벌려 놓은 거 말끔하게 청소해주는. 저는 이건 상업건물이지만 의미가 있다고 봐요.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찾아와서 즐길 게 있고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인천은 그런 장소가 거의 전무했어요. 반강제적으로 중구에 가면 있어, 개항장 가면 있어 이렇게 말하는데요. 100년 전 건물, 그나마 남아 있는 건물에 조그마한 카페들, 이런 데 가서 모든 것을 소화하라고 하면 누가 가서 소화할 수 있겠어요?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자산이긴 하지만 그 자산만큼 우리의 현대도 바라봐야 하는데, 인천은 현대건축의 자산이 매우 취약해요. 그런데 그 취약한 부분을 그나마 개선하고 있는 것은 서울의 건축가들 몇 사람이나 해외 건축가들이에요. 그럼, 문제가 뭘까요? 인천의 현대성을 표상할 수 있는 건축물이 없다는 것은 인천 건축계에 인재들이 없다는 거와 통하죠. 인천의 건축을 짊어지고 갈 창의적인 인재들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사실 인천에 건축과를 가진 대학이 몇 안 돼요. 종합대학도 적으니까요. 그러니까 창조적인 인물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안 되어 있어요. 게다가 여기서 배출된 친구들이 어딜 가서 경쟁을 하느냐 하면, 서울이나 외국으로 나가버려요. 인천에는 그나마도 없는 인물난에 여기서 발굴된 친구들이 이곳을 시장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서 경쟁을 하다 보니까 씨가 말라버리게 되는 거죠. 몇몇 뜻있는 건축인들이 그나마 인천을 자신이 경쟁할 수 있는 필드로 삼고 내려오는 거고, 그것이 극히 제한적이죠. 인천은 지금 같은 패턴으로 가면 앞으로도 10~20년 뒤에도 여전히 인물난에 허덕이면서 어떤 창의적 공간이 만들어지지도 않고 현대건축을 표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서울이나 부산, 혹은 제주에 뺏길 거예요. 현재는 그래요. 현대건축의 경쟁력으로 보았을 때 인천은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못한다고 봐요.
그래서 제가 인천에서 해왔던 것 중 하나가 1998년 5월에 개최한 <건축백일장>이에요. 저도 문학 베이스가 있다 보니까 백일장이라는 말을 좀 쉽게 사용했던 것 같아요. 앞서 얘기했던 이영유 선배도 시 쓰고 연극 연출하던 분이다 보니까 내가 이런 것을 하자고 하니까 좋다 해서 시작하게 되었죠. 그때 당시 제가 『건축인 포아』를 창간하고 편집인 겸 초대 주간을 하던 때라 건축모형 집짓기 대회를 건축백일장의 형식으로 만들게 된 거예요. 지역기업의 후원을 받아서 5년 정도 진행했어요. 그런데 IMF 지나면서 『건축인 포아』의 상황이 안 좋아서 2000년에 잡지 발행권을 넘겨야 하는 입장이 되었어요. 그래서 기존에 <건축백일장>을 지원했던 인천건축사회가 주관처가 되어 연례행사를 이어받았어요. 그렇게 해서 5년 정도 하다가 이걸 다시 인천남구청(지금의 미추홀구)에 일임을 해요. 거기서 한 10년 정도를 하다가 지난해인가 그걸 다시 인천건축사회에 다시 넘겼어요. 지나와서 보니 1998년부터 지금까지 중간에 한두 회 정도를 빼고는 지속적으로 해왔어요. 그 행사가 어떻게 지속이 가능했냐면, 인천시와 인천건축사회가 공동주최하는 <인천건축문화제> 때문이에요.
1999년도에 건축문화의 해라는 것이 지정되거든요. 그래서 전국에서 건축문화라는 것을 띄워야 하는 미션이 생긴 거죠. 그때 인천에도 건축문화제가 만들어지죠. 출발은 <인천시민건축전>이었어요. 그게 그 이후에 <인천건축문화제>라는 이름으로 쭉 내려온 거죠. 그 안에서 시민과 함께 하는 건축프로그램으로 건축백일장이 자리를 잡게 된 거였죠. 건축백일장은 이후에 부산, 대구 등 전국의 여러 지자체에서 유사한 건축모형 만들기 대회내지는 살고 싶은 집 만들기 대회 등의 원형이 돼요. 제가 이렇게 건축문화제와 알게 모르게 연관이 되어 있다 보니 98년도 이후부터 직접적으로나 우회적으로나 인천 건축문화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역할을 해오게 된 거였죠. 그거에 대한 배경도 결국에 큰 것은, 인천 안에 인천의 시민들과 후학들에게 건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때 당시에 처음 참여했던 친구들이 이제는 30대 중반, 그 당시 초등학생들이 어엿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 거죠.
건축 분야에서 창조적인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프로그램이 필요한데, 이벤트성 행사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다른 문화예술 영역에는 게릴라가 많아요. 실제로 건축에서도 게릴라 정신으로 자기만의 창의력으로 활동하는 친구들이 많아져야 해요. 그게 많아지다 보면 현대건축도 그만큼 더 터를 견고하게 다질 수 있는 거죠. 그것이 시민들에게 전달되면 시민들도 더 나은 건축 환경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있고 그것을 향유하고 즐기면서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한 품격을 높게 설정할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현재까지는 그게 안 되는 거죠. 이후에는 그런 것들이 좀 가능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류: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목표를 위해 현재의 인천이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행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전: 제가 재작년부터 의도적으로 만든 프로그램이 있어요. <인천 아키텍트 5>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이건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들만 대상으로 매년 5명 이하에서 건축가를 발굴해서 상을 주는 거예요. 우리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은 어떤 훈장을 달아주고, 어떤 트로피를 건네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죠. 때로 옷이 그 사람을 바꾸게 하듯이. 그래서 제가 지금 인천에서 하는 일이 인천에서 건축 활동을 하는 이들한테 그린재킷 비슷한 옷을 입혀주는 역할을 하고자 해요. 타 분야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현재 인천에서는 이런 것도 필요하다고 봐요. 우리가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데 밖에서 누가 인정을 하겠어요. 최소한, 이 정도까지 오면 우리는 박수치고 서로 응원하자. 이런 분위기를 만들자. 이렇게 응원하는 발굴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인천을 좀 소란스럽게 만들어 보자. 그래서 언젠가는 이런 프로그램들이 더 자생적으로 늘어나길 바라는 거죠. 이건 관이 주도하는 포장된 프로그램으로는 안 되는 거죠. 그런 거 말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프로그램을 엮어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죠. 이 부분들이 앞으로 인천의 현대건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까? 계속해서 100년 전의 시간성만 바라보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지금 보세요. 부산 대단합니다. 제주, 더 대단하고요. 광주, 대구에도 이름 대면 알 만한 현대건축물들이 많이 서 있어요. 인천은 그나마 송도에 몇 개 있을 뿐이죠.

류: 그러고 보면 인천을 대표할 만한 현대건축이 명확하지 않은 것을 사실인 것 같아요.

전: 다들 50년 전, 100년 전에만 몰두하니까. 거기에 추억이 있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추억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거거든요. 그러니까 계속 어떤 스토리들을 만들어줘야 해요.

류: 그렇다면 대표님께서 지금 인천에 제안하고 싶은 스토리텔링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전: 그래서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최근에 시장이 쓰던 관사 옆에 도시공사가 매입을 하여 공공자산으로 만들어서 인천시민에게 오픈한 송학동 이씨주택이 있어요. 그 건물이 김수근 선생님이 작업하신 주택 가운데 하나예요. 그게 공공에 열어놓은 건축자산의 성격으로 오픈된 건데요. 안양에 가면 김중업 건축박물관이라는 것이 있어요. 프랑스 대사관을 설계한 분이죠. 한국현대건축의 태동을 연 분으로 두 사람을 이야기하는데 바로 김중업 선생님과 김수근 선생님이에요. 김수근 선생님이 1986년에 돌아가셨는데 아직 선생님 이름으로 박물관이 없어요. 선생님이 애지중지하고 창업하고 만들어낸 건물은 지금 아라리오 스페이스로 팔렸고. 그래서 나는 인천 도시공사가 그런 건물은 과감하게 김수근 박물관을 유치하는 보다 구체적이고 큰 그림의 에너지를 내줬으면 좋겠어요. 만약에 도시공사가 이걸 이렇게 전향적으로 생각해 준다고 하면 돌아가신 김수근 선생님은 물론이고 그분의 제자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지금 김수근 문화재단이 서울에 있는데 장소가 없어요. 최근 송학동 이씨주택의 설계에 얽힌 김수근의 건축이야기를 증언해준 김원석 선생님이 계신데 이분이 안타깝게도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이분은 김수근 선생님의 오른팔로서 설계본부장을 맡았고, 이 주택의 설계 실무를 담당했던 분이셨어요. 김수근 사후 2대 공간그룹 회장이기도 하셨고요. 어쨌든 그분의 고증에 의해 그 건물이 콘텐츠를 강화했어요. 그 건물의 의미와 김수근에게 있어서 어떤 건물이고, 속성은 무엇인지 등등. 그 도면에 대해 설명을 세세하게 해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사실 제가 이 인터뷰에 응한 이유도 이 때문이에요. 한국현대건축의 태두로 불리는 김수근 선생님의 박물관을 인천이 그 건물을 통해서라도 유치해줬으면 좋겠다. 이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류: 찾아보니 이 건물이 1977년에 설계하고 준공된 건물이네요. ‘이음1977’이라는 이름으로 건축자산 보전형 리모델링에 착수한다고 되어 있네요. 대표님 말씀대로 문화적 자산이 그 가치를 제대로 주목받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음1977’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이야기는 김수근 선생님 자체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인천시와 도시공사가 그 스토리텔링을 놓치지 않고 좀 더 귀를 기울여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 기점이 되어서 근대만이 아니라 인천의 현대건축까지 관심이 넓혀지는 한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긴 시간 동안 다양한 관점에서 건축과 인천의 관계를 풀어주신 점 정말 감사드립니다.

전: 감사합니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제2의 인생, 신중년이라는 옷을 입다: 송연숙 씨 인터뷰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제2의 인생, 신중년이라는 옷을 입다송연숙 씨 인터뷰

홍봄(기호일보 사회부 기자)

신중년(新中年). 사전적 의미로는 ‘자기 자신을 가꾸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며 젊게 생활하는 중년을 이르는 말’이다.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지역주민들과 어울리며 제2의 즐거움을 찾고 있다는 송연숙(55·송도2동) 씨에게도 이 말이 참 잘 어울린다. 만나는 순간 긍정적인 에너지와 활기가 전해졌던 신중년 송 씨와의 만남을 기록한다.

인천 연수구 커낼워크 내 송도문화살롱에서 만난 송 씨는 ‘이 멤버! 리멤버!’를 외치며 지난해를 함께 보낸 팀원들 자랑으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가 참여한 <신중년 인생 2막 변주곡 Song Do!> 프로그램은 연수문화재단의 2020 지역문화 생태계 구축 통합운영 사업의 일환이다. 이 사업은 신중년의 삶에 관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함으로써 중년 세대의 ‘멋지게 나이 듦’의 의미를 환기하고, 궁극적으로 지역 내 문화자치 동력의 구성요소를 마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신중년의 삶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일상의 소재인 ‘의상’과 ‘주거’라는 주제로 운영됐다. 송 씨는 6명의 팀원과 함께 의상분야인 ‘나는 송도스타일!’로 활동했다.
송 씨는 “처음에는 예쁜 옷을 입고 인증샷을 찍고 싶다는 생각에 참여하게 됐어요. 60대에서 40대까지 6명의 주민이 모였는데 너무 마음이 잘 맞았던 거죠. 여러 의상들을 입어보면서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금세 친숙하게 어울릴 수 있었어요. 서로 마음에 드는 옷을 바꿔 입기도 하고 선뜻 내어주기도 하면서요. 의상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으니 말도 더 잘 통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음이 잘 맞는 팀원들과 나의 옷장이야기와 우리 동네 테일러가 알려주는 스타일링 팁, 화보촬영 및 룩북제작을 하는 과정은 코로나19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송 씨에게 큰 해방구가 됐다. 유일하게 마음을 놓고 이웃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송 씨는 “코로나 때문에 불안해서 어딜 나갈 엄두도 못 냈는데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이웃과 장소가 생긴 것”이라며 “의상에 대해 배우고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의 차이를 확인하는 과정들이 인생에서 큰 활력이 됐다.”고 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은 부직포로 각자의 드레스를 만들어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도구나 실력이 훌륭하진 않았지만 각자 최선을 다해 세상에 한 벌 뿐인 나만의 옷을 만들어냈다. 아쉬운 점이라면 직접 만든 드레스를 입고 의상쇼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멤버들은 올해 제2의 신중년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이번에는 내 지역 송도를 알리는 동영상 찍기에 도전하려 한다. 일정에 한계가 있지만, 송도의 사계절을 담는 게 멤버들의 목표다.

신중년 프로그램 외에도 인생나눔교실 <삼삼오오 복작복작 단지>의 퍼실레이터로 참여한 경험 또한 송 씨에게 의미 있는 일이었다. 삼삼오오 프로그램은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다양한 구성원들이 하나의 소모임을 결정하고, 그 학습공동체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그는 지난해 ‘엑사모’와 ‘볼링블링’, ‘최고박당’ 소모임에 퍼실레이터로 함께했다.
송 씨는 “송도는 100%가 아파트다 보니 이웃과 소통하기 쉽지 않아요. 인생나눔교실 프로그램은 다른 아파트 사람들끼리 모여서 우리 마을의 이야기해보자는 취지로 참여하게 됐죠. 하지만 20팀 이상 모으려 했던 계획과 달리 코로나19로 모임에 제약이 컸어요. 그래서 우회했던 게 ‘같은 취미 가진 사람들끼리 소규모로 모여보자’였어요.”라고 설명했다.
이웃들과 삼삼오오 소통하며 그는 송도문화살롱이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보다 활성화됐으면 하는 기대가 생겼다. 공간 특성상 갤러리를 운영하기 좋은 이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일 년 내내 주민들로 북적이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
송 씨는 “송도문화살롱이 더 많이 활용되고, 내년과 내후년에도 계속 이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구와 경제청, 상인분들이 합심하면 공간이 더욱 좋게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삼삼오오나 신중년 등 주민참여 프로그램을 할 때 최소 1회씩은 이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으면 지나던 사람들도 궁금해서 들어와 보지 않을까요?”라고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송 씨는 지난 1년간 신중년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얻은 귀한 경험들을 “행복했다.”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는 “그동안 누구 엄마, 누구 와이프, 주부로 살았는데 지난 한 해는 송연숙으로 살았습니다. 신중년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이게 송연숙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굉장히 행복했어요. 나이가 들었다고 집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오시고 활기차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집에만 있다가 공원이라도 나와서 움직이면 참 좋거든요. 많은 신중년분들이 밖으로 나오셔서 함께 경험하고 동참하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 행복했던 경험을 많은 주민들이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지역에 보다 많은 문화프로그램들이 꽃피기를 희망했다.
송 씨는 “신중년이나 삼삼오오 같은 문화예술 프로그램들이 지역에 잘 정착돼서 많은 분들이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평생학습관보다는 조금 느슨한 느낌으로 신중년을 비롯한 주민들이 오가다가 편하게 들를 수 있는 문화거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라고 강조했다.

인터뷰/글 홍봄(洪봄, HongBom)

기호일보 사회부 기자




공지선

이름: 공지선(孔知善, Gong jiseon)

출생: 1989년 인천

분야: 시각예술(회화, 설치)

인천과의 관계: 인천출생, 인천거주

작가정보: https://www.instagram.com/gongjiseon_/
                gongjiseon@outlook.com

개인전
2020~2021 도시를 보는 작가 기획전 《공지선 개인전: 사랑이 넘치는 도시》, 인천도시역사관, 인천
2020 《반짝반짝반짝반짝반짝 ; made of breath》, 옹노, 인천
2020 《Yawn; 배부른소리》, CICA미술관, 경기
2019 《The body is used for life, and the life is engraved on the body》, 코스모40, 인천
2018 《YOUYOUYOUYOUYOU!!!》, 플레이스막, 인천
단체전
2020 《인천 미술 청년 작가전: 그 빛을 퍼트리다》, 송도컨벤시아, 인천
2020 《젊은 미술의 현재와 미래》, 우현문갤러리, 인천
2019 《Layers of meanig》, 혜화아트센터, 서울
2019 《Gallery Nout 선정작가 특별전》, 갤러리 Nout, 서울
2018 《상대적 모양》, 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18 《부스》, 북서울꿈의숲 아트센터, 서울
2017 《Re-born》, 한전아트센터, 서울
2017 《肉時RULE》, 갤러리 그랑쥬, 서울
프로젝트
2021 공공미술프로젝트 우리동네미술 《사람in 스튜디오》, 인천남동구 청년 미디어타워, 인천
2020 이머시브 시어터 연극 《Gulliver’s Travels》, 무대미술/의상감독, 미림극장, 인천
2020 다큐멘터리 <사랑이 넘치는 도시> 연출, 감독

# Q&A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업(또는 전시)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A. <몸은 생에 쓰이고, 우리는 몸에 삶을 쓴다>(unit 2[01-40], 2019)는 사람의 신체에 새겨진 흔적들을 이미지로 채집하여 그 속에 기록된 이야기를 나열한 스티커 작품이다. 벽면에 빼곡히 걸려있는 원형의 이미지들은 멀리서 보기에 언뜻 행성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서 보면 그때야 비로소 이것이 누군가의 껍데기, 즉 피부에 새겨진 흉터란 걸 알 수 있다. 관객들은 마음에 드는 익명의 이미지를 골라 구매할 수 있으며 그 후 상단에 새겨진 QR코드를 통해 그 흔적에 새겨진 이야기를 소유할 수 있다.
개인은 존재의 가치를 잃은 채 필요에 의해 사용되고 필요에 의해 처분되는 소모품적인 삶을 살아간다. 세상의 부품이 된 이들은 자신들의 삶에서도 배제된 채 상실의 연속만 경험할 뿐이다. 그렇게 ‘생(生)’에서 ‘사(死)’로 진행되는 삶의 연속에서 우리는 육신(肉身)을 소비하고 수많은 흔적을 신체에 새긴다. 인생은 오롯이 개인의 몸에 기록되며 개인만이 그 기록을 읽을 수 있다. 타인은 개인의 삶이 아닌, 단순히 표면적으로 표기된 흔적만을 시각적 이미지로 포착할 뿐이다. 나 역시 그들의 자서(自敍)와는 분리된 하나의 타인으로, 표면의 이미지 너머 ‘명(命)’에 새겨진 개인의 이야기를 채집하고자 하였다.

<몸은 생에 쓰이고, 우리는 몸에 삶을 쓴다> unit 2[01-40] ⓒ공지선
강접 유포지에 원형 디지털 프린트, PVC 비닐, 트레싱지,
웹사이트; QR코드로 접속 가능한 40페이지의 웹_가변설치, 2019

Q.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A. 나는 전형적인 메디푸어(medi-poor) 가정에서 성장하고 살아왔다. 생존을 위해 자아가 배제된 노동을 지속하였으며, 필요한 노동력과 시간을 제공하고 생존을 위한 도구를 구매하였다. 그러고 또다시 도구가 되어 현장에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거대한 사회에서 사물화가 된 우리 인간은, 존엄성이 배제된 채 사용물이 되어 주관적 삶에 객관성을 부여한다. 현대인 대부분은 ‘생(生)’이 아닌 ‘명(命)’의 지속으로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사회의 도구로 사용되고 소멸하는 개인의 삶과 그 삶을 지속하기 위한 요소들에 대해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순간 마주하는 모순점과 소모로 집중되는 소비의 모습을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반영해 작품화하고자 하였다. 전시에 오면 관객들은 먼발치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단순한 관객의 역할을 넘어서 함께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직접적 개입자가 된다. 이것들이 내게는 영감이 되고 작업을 지속하는 원동력이다.

<남겨진 문제들 2 Remained problems 2>, 폐양초와 나일론 실, 가변설치, 2019 ⓒ공지선
삶의 지속적인 허망함을 폐양초로 표현한 작품으로, 관객들이 공간을 방문하여 양초로 만든 구슬을 직접 꿰어볼 수 있게 연출하였다.
<Choice_Mixed media>, 가변설치, 2019 ⓒ공지선
관객이 소지한 물품을 내려놓고 무작위로 코인을 뽑아 무작위로 기계를 선택, 무작위로 작품을 뽑아볼 수 있게 연출한 작품
<두근두근_영수증>, 열 인쇄한 용지(감열지)에 에탄올, 가변설치, 2020 ⓒ공지선
영수증 용지에 에탄올을 뿌려 도시의 왜곡된 하트의 이미지를 직접 정화하는 작품

Q.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A. 채집하고픈 이야기는 여전히 곳곳에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여전히 많다. 마주하는 상실의 순간에 침묵하지 않고 쉴 새 없이 목소리를 내고 싶다. 현상을 묵인하지 않으며, 조용해지지 않는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다.

Q. 앞으로의 작업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내 작품에서 개인의 삶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록되며 그 기록의 과정에는 개인의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타인인 ‘나’의 사유가 개입된다. 현시대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일차적 시각 이미지인 육신(肉身)에서 비롯된 사유는 물성에서 멀어져 이야기에 가까워질수록 육(肉)과는 상관없는 물건(物件)으로 변형된다. 이렇게 작업으로 재구성된 그들의 개인적 삶은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보이고 상기된다. 그 속에서 이들은 더욱더 도구화되고 과장된 채 타인에게 보이고 스스로를 판매하며 누군가의 소유가 되는 아이러니를 반복한다. 앞으로 나는 작품을 통해 사회가 분류하는 통계에 묶여 이용되고 소멸하는 생(生)들의 조소 받는 저항에 대하여, 언급 없는 영향에 대하여, 순응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상황에 놓은 개인의 감정을 표정을 통해 마주해 보고자 한다.

Q. 예술적 영감을 주는 인천의 장소 또는 공간은?

송도에 위치한 아트센터인천을 등지고 바라본 모습, 2020 ⓒ공지선

A. 인천은 소란과 고요가 공존하는 도시이다. 내 영감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살을 맞대고 사는 복잡한 생의 현장이지만 그곳에서 한발자국만 벗어나면 너른 물이 넘실거리는 고요가 있다. 해 질 무렵 아트센터 인천을 등지고 그 물결을 바라보고 있자면 뜨거운 붉은 것이 아래로 점차 스러지는 걸 볼 수 있다. 미간에 주름을 지고서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그 풍경은 눈이 부셔 나를 그대로 태우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이곳에서 멀어지는 낮의 시간을 지켜보며 쉴 새 없이 노트를 작성한다.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은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등 뒤엔 긴 그림자를 만드는 마천루들이 즐비하다.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배헤윰

배헤윰은 물질로서의 회화를 바라보면서 그가 그린 그림이 관람자가 알고 있는 대상으로 곧장 연결되는 객관적 거리를 조절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던 이전의 작업 방식에서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추상회화의 불가해한 요소들이 만들어 내는 부분들을 활용한 암호적인 말하기를 실험 중에 있다. 우리 앞에 진행되고 있는 어떤 현상을 이성적으로 정보화하지 않고서 인지하는, 원초적 시지각을 추상 회화를 통해 복원하는 데 관심이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최근 두산 갤러리(서울, 2019), 하이트 컬렉션(서울, 2018), 학고재(서울, 2018),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서울, 2016) 등에서 단체전에 참여하였고, 개인전 《Fyka Foretold…(예지하는 파이카)》(서울시립미술관 SeMA창고, 서울, 2021), 《꼬리를 삼키는 뱀》(OCI미술관, 서울, 2018), 《Circle to Oval》(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서울, 2017) 등에서 작업을 선보였다.

<건설은 되지 않은 건축>, 캔버스에 아크릴, 130.3×112.2cm, 2019

# Q&A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회화를 이해하는 동시대의 시지각적 방법론을 눈여겨보고 있다. 이러한 관심의 바탕에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훈련된 보편적인 관점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회화의 여러 양식에 관한 시지각적 관점 사이의 격차에 대한 흥미가 있다. 이전부터 영상에 담긴 시지각적 대상과 그것이 반영된 회화, 그리고 화가로서의 나의 포지션을 짚어보는 실험을 이어왔고, 최근 수년 동안은 해석적 접근이 어려운 추상 회화의 표현적인 특성을 더욱 드러내고 그것을 읽어내는 가독력을 실험해보고 있다.

《Form/Less》, Whistle, 서울, 2019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업(또는 전시)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A. 대표작이라기보다는 현재 작업 방향과의 연관성을 기준으로 삼아 말하자면, 2019년 이태원 경리단길에 위치한 Whistle(휘슬)에서 진행된 2인전 《Form/Less》에서 전시한 그림들을 꼽을 수 있겠다. 해당 작품들을 창작할 당시, 앞서 언급한 여러 관심들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실험의 조건들을 보다 상세하게 정립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대상을 특정하고 관찰하는 것보다는 나를 정보 문맹으로 상정하고 시작하는 태도를 창작의 시작점으로 삼는 것과 그림을 보는 체계나 생각의 구조를 건축 설계안을 그려내듯 평면에 옮기려는 접근 방식의 정립으로 말할 수 있겠다.

좌) <랜딩>, 캔버스에 아크릴, 145.5×112.2cm, 2018/ 우) <칸 이동 중>, 캔버스에 아크릴, 130.3×130.3cm, 2018

Q.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A. 내게 영감이랄 것은 딱히 없지만, 잃지 않고자 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나는 모르는 것을 그대로 두고 바라보려고 한다. 모르는 것을 이해가 쉬운 것 혹은 사용 가능한 것으로 변환시키지 않고, 아직 시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대상을 향해 다가갈 수 있는 동력을 발생시키는 편이다.

<꼬리를 삼키는 뱀>, 종이, 액자에 아크릴, 67×57.1cm, 2018

Q. 예술,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에 대하여

A. 내게 창작은 다른 삶을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하도록 돕는 지적 활동과 같다. 나는 스스로를 나의 그림을 보는 최초의 관객이라고 생각하고, 작업의 면면을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지양하는 편이다. 일상적인 언어로 나누는 대화에서도 오해가 생기기 때문에, 창작이라는 비일상적인 방식의 소통과 대화에서 생겨나는 오해의 가능성 역시 흥미롭게 생각하는 편이다.

좌) <아쿠마>, 캔버스에 아크릴, 145.5×130.3cm, 2018/ 우) <스키양>, 캔버스에 아크릴 과슈, 60x50cm, 2019

Q. 앞으로의 작업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나는 작업 방향을 정해놓고 창작을 시작하는 편은 아니라 상세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작품에 관하여 생성되는 예상치 못한 방향을 기대하고 반가워하는 편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태도를 유지할 것 같다. 회화에 대한 흥미로운 생각과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며 정진하고자 한다.

<뼈대만 남은 대화>, 캔버스에 아크릴 과슈, 목재, 고무, 60.3x52cm, 2019

Q. 작품 창작의 주요 도구, 재료는?

A.

* 작가에게 제공 받은 인터뷰 글을 바탕으로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백령을 화폭에 담다: 해반문화사랑회 최정숙 이사장과의 만남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백령을 화폭에 담다해반문화사랑회 최정숙 이사장과의 만남

류수연(인하대학교 교수)

최정숙(崔正淑)
1954년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동대학원 서양화과 수료. 현재 사단법인 해반문화사랑회 이사장. 1993년 해반갤러리를 기반으로 한 해반문화사랑회를 창립하였다. 해반문화사랑회는 1997년 인천 문화예술단체 최초로 사단법인이 되었다. 2000년 <열려있는 땅, 인천> 전을 통해 개항 도시 인천의 정체성을 탐구한 작품을 창작하였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에 전념하여 15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개최하였다.

* 본 인터뷰는 방역지침을 준수하며 이루어졌음을 밝혀 둔다.

류: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문학평론과 문화평론을 쓰는 류수연이라고 합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인터뷰를 위해 간단하게 이사장님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최: 소개라고 할 것이 있나요. 저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고, 또 지역문화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렇게 문화 영역에서 함께 하는 여성 동지와 만나니, 처음 뵙는 데도 굉장히 친숙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래도 우리 여성들끼리는 좀 더 통하는 것이 많잖아요.

류: 네, 그렇지요. 저도 처음 뵙는 데도 원래 알던 분처럼 친숙한 느낌이 드네요. 아무래도 전화 통화 하면서 일차적으로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하하.

최: 여성으로서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공감대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제 삶이 그러했어요. 현실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괴리. 그런 것들이 참 많았지요. 그걸 여성들 사이에서는 투쟁의 역사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에는 결혼하고 홍대 대학원 다니다 두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간 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거든요.

류: 그러셨군요. 그러면 지역문화운동을 시작하시게 된 시점도 그 즈음인 건가요?

최: 처음 지역문화운동을 시작한 건 부부가 함께였어요. 처음부터 이렇게 큰 모임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처음엔 시민 갤러리 개념으로 시작했죠. 1991년 현재 해반문화의 근간이 된 해반갤러리를 시작한 거예요. 처음에는 시민애호가 모임으로 시작한 개념이었어요. 그것이 현재의 해반문화사랑회가 된 거죠. 우리 해반문화사랑회는 인천에서 자생한 첫 사단법인화 한 단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죠.

류: 인천을 기반으로 시민사회에서 문화단체를 뿌리내리게 했다는 자부심도 크셨을 것 같아요.

최: 아무래도 그렇죠.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개인 작업은 뒤늦어진 면이 있어요. 2003년에 시민단체 성격의 갤러리 활동을 정리하고 2004년부터 개인 작업을 시작했거든요. 처음에는 두려웠죠.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대학에 다니면서 한국 컨템포러리의 대부님들께 많이 배웠거든요. 그때 각인되었던 것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었어요. 그 고민이 사실 7년 이상 지속되었죠. 그래서 처음부터 바로 그림을 착수한 것이 아니에요. 처음엔 사진 작업으로 시작했어요. 그때 앱손 프린터가 처음 나왔거든요. 어디 배울 곳은 없으니까 혼자서 붙들고 고생하면서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도출했었죠. 처음 시작은 흑백톤으로 사진을 뽑아서 그것을 가지고 시작했죠.

류: 어떤 계기로 다시 개인 작업을 시작하기로 생각하게 되신 건지도 궁금해지는데요.

최: 갈증 같은 것이었죠. 제가 91년도에 건강이 좀 안 좋았어요. 자궁을 적출했거든요. 거기서 오는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또 보다 의욕적으로 살고 싶어서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죠. 처음 해반갤러리 시작할 때에는 인천이 상당히 문화적으로는 불모지에 가까웠어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이 컸죠. 그래서 처음에는 전시를 기획하는 일에 착수했죠. 인천을 중심으로 서울과도 연계하면서 작품 전시를 열고, 그런 일들을 주로 했어요.

류: 기획과 함께 큐레이팅도 직접 다 하신 거네요?

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죠. 이런 일들을 하다 보니까 내 안에 갈증과 함께 남모르는 대가들도 생기더라고요. 자기 이상을 추구하는 욕망의 대가가 생각보다 컸어요. 특히 경제적인 출혈이 굉장히 컸어요. 전시라는 게 한 번 열 때마다 많은 돈이 들어요. 사람들이 보기엔 우리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이런 일을 추진한다고 여겼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거든요. 물론 이런 것들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경제적 가치보다 이상이 더 컸고, 그것을 위해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하지만 그런 일들을 13년 정도 하다 보니까 거기에서 오는 피로가 크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다시 작품 활동에 매진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류: 아까 부부가 함께 시민문화운동을 시작했다고 하셨는데요. 그럼 일을 나누게 되신 건가요?

최: 그렇죠. 해반문화사랑회가 1997년 사단법인화되면서 저는 주로 해반갤러리 기획전시를 하고, 남편은 주변의 추대로 초대이사장을 맡게 되었죠. 저는 제 활동으로 들어가면서 생각했어요. 문화를 하고 싶은 사람들의 장을 만들었다는 그 뿌듯함이 그것이었죠. 인천의 오피니언 그룹과 함께 여러 활동들을 진행하고 갤러리를 열린 공간으로 만드는 과정들이 굉장히 매력적인 거였죠.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한계에 직면하기도 했어요.

류: 어떤 것이었을까요?

최: 93년 무렵에 당시 인천의 부촌이었던 부평에 갤러리를 열었거든요. 아무래도 그쪽이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가 있으니 갤러리 활동에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결과는 엄청난 적자였어요. 하하. 그래서 다시 동구 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죠. 그러면서 다시 시작한 것이 해반문화포럼이었어요. 인천의 문화를 개척하는 의미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뜻을 같이하는 20여 분 정도와 함께 시작했어요. 이렇게 인천에서의 소문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문화에 대한 대안들이 계속 포럼을 통해 나오니까 지역사회의 관심도 높아졌죠. 사실 이 포럼이 인천의 문화콘텐츠를 만드는 데 상당한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해반문화가 2020년 인천의 비전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고요.

류: 굉장히 의미 있는 활동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에 어떤 것이 있으신지요?

최: 근대개항이라는 키워드를 끌어낸 것이 그래요. 2000년에 우리가 인천의 정체성과 정주성, 이런 문제들을 포럼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거든요. 그러면서 떠오른 것은 바로 근대개항이라는 문제였어요. 인천에 무엇이 있는가를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인천이라는 도시가 가진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가 다름 아닌 개항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개항으로부터 진짜 인천의 역사가 시작된 거죠. 이런 생각들이 결국 인천을 상징하는 하나의 포문을 연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인천에 산재했던 문화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마련된 거죠. 또 시민들에 의해서 인천문화가 이끌어질 수 있다는 어떤 토대로 마련되었고요. 저는 그래서 2000년에 열었던 <열려 있는 땅, 인천> 전시가 굉장히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인천은 무엇이냐는 하나의 상을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류: 2000년이면 제가 막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인데, 저도 그 무렵부터 개항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인천을 사유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 부분에 이사장님의 역할이 크셨던 거군요.

최: 2004년부터 개인 작품 활동하면서 해반 일과 소원했다가 제가 해반이사장을 맡으면서 돌아온 것은 2011년이었어요. 2005년에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재청이 만들어지면서 유홍준 교수님의 답사기 열풍으로 지역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클 때였어요. 문화재청 문화유산방문교육 공모사업에 해반문화가 지원했거든요. 이전부터 개항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시한 단체여서 주목을 받았기도 하였고 언론도 많이 탔고요. 그때 우리가 주목한 것이 어떻게 하면 사라져 가는 개항의 유산을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시민 문화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죠.

류: 그 과정에서 가장 자부심을 느끼신 결과는 무엇일까요?

최: 바로 인천아트플랫폼이죠. 개발 논리에 사라질 뻔했던 인천아트플랫폼을 문화적 콘텐츠 그대로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어요. 인천아트플랫폼에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만드는 운동을 전개했거든요. 미술관 운동도 했고요. 인천문화재단이 등장하기 전에 실질적으로 그 물꼬를 텄다는 데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또 당시 시작되었던 문화유산운동에 있어서도 원년 멤버로 이끌었다는 자부심도 있고요. 사실 인천이 당시 수도권에서는 처음으로 이러한 운동을 시작했거든요. 실제로 이런 사회적 봉사의 공로를 인정받아서 2012년 문화재청상, 2013년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대통령표창을 받기도 했고요. 그 계기가 된 문화유산교육은 지금까지도 잘 진행하고 있어요. 문화지킴이 교육도 지속되고 있고요.

류: 네, 저도 기사로 수상 내용을 접했습니다. 오랜 시간의 활동에 대한 인정과 함께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서도 큰 응원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 각도를 돌려서 화가로서 이사장님의 개인 작품 활동에 대해서도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는데요. 이사장님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백령도인데요. 백령도를 본격적으로 작품의 주제로 담게 되신 계기는 무엇일까요?

최: 사실 백령도는 우리 아버지의 고향이에요. 가끔 제가 백령도가 고향인 줄 아시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어린 시절을 백령도에서 보내기도 했지만, 사실 거기서 태어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린 시절에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으니, 저에게는 추억이 많은 곳이죠. 주로 할머니 댁에서 방학을 보냈거든요. 하지만 제가 백령도를 본격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한 데는 다른 계기도 있었어요.

류: 어떤 일이었나요?

최: 2011년이 한 기점이었죠. 그 무렵에 우리 아들이 공중보건의로 군대를 가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당시 연평도 아니면 백령도로 발령을 받을 예정이었는데, 백령도로 발령이 났어요. 그때 뭔가 운명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고향이고, 내 어린 시절이 있는 곳에 이제 다시 아들이 갔으니까요. 같은 해에 일어난 연평도 포격사건을 피해간 것도 그런 운명적 느낌을 더 강하게 만들었던 것 같고요. 그때부터 백령도를 주제로 작품을 시작했고, 《분쟁의 바다 화해의 바다》라는 주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사실 여기에 그린 작품들이 제가 본격적으로 유화를 다시 시작한 것이었어요. 그중에서도 <아버지의 바다>라는 작품이 있는데 제가 사진에서 유화 작업으로 전환되는 기점이 된 작품이죠. 사실 이 작품은 같은 주제와 제목으로 사진과 유화 작품이 둘 다 있어요. 특히 유화로 그린 <아버지의 바다>는 대학원 졸업 후에 다시 그림을 시작하면서 처음 그린 유화였다는 점에서 저에게 의미가 커요.

최정숙, <아버지의 바다>(유화, 130×97, 2011) ⓒ최정숙

류: 정말 뭔가 운명적인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 같네요. 이사장님, 백령도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궁금해집니다.

최: 내 첫 기억은 5살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밤에 할머니 댁 마당에 누워 있는데 정말이지 밤하늘에 별이 한가득 쏟아질 것처럼 차 있었거든요. 그런 기억들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한 거죠. 사실 백령도는 분쟁의 아이콘이고 분단의 아픔이 드리워진 곳이고, 나에게 있어서 한 집안의 역사이기도 해요. 아버지는 백령도 분이고 우리 어머니는 황해도 분이시거든요. 아버지 집안이 백령도의 부농 집안이셨고요. 광복 후에 최초로 면장을 하셨어요. 섬을 둘러싼 여러 이미지들이 있죠. 섬은 허락해야 들어간다는 말 들어보셨죠. 백령도가 그래요. 봄이면 해무가 엄청나서 진짜 섬이 허락한 날에나 가볼 수 있는 곳이죠. 내게 백령도는 참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아버지의 고난한 삶과 화해, 그리고 내 인생에 있어서는 하나의 징검다리 같은 의미였어요. 육지와 섬을 이어가는 것이 내 삶의 원초적 기억이니까요. 결국 백령도를 주제로 담아내면서 본격적으로 드로잉을 시작했어요. 그곳에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을 스케치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백령도 드로잉 전시를 하기 시작했죠.

류: 이사장님의 드로잉이 그대로 살아 있는,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사라지고 있는 백령도의 시간을 담아내고 있는 거군요.

최: 사실 우리 부모님은 인천 인물사에서도 다루어지고는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면장을 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셨던 것이 간척사업이었어요. 섬이니까 농지가 절실했던 거죠. 그래서 1971년에는 백령도에 아버지 공적비가 만들어지기도 했어요. 정말 열정적인 분이셨죠. 너무 많이 고생하셔서 그렇게 일찍 가신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어머니 집안은 천주교를 빨리 받아들인 집안이었고, 어머니도 독실한 신자였어요. 부모님 결혼하실 때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머니가 처음에는 소개받는 남자가 백령도 사람이라고 해서 사실 관심이 없었대요. 섬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거니까 무슨 관심이 있겠어요. 그런데 만나 보니 아버지가 섬사람 같지 않았던 거죠. 아버지가 잘생기셨어요. 첫눈에 반하신 거죠. 하지만 어머니 역시 양보할 수 없었던 게 천주교였나 봐요. 아버지한테 혼배를 해야 결혼을 하겠다고 말씀하셨대요. 당시로서는 굉장한 선택이죠. 그런데 아버지가 그걸 하신 거예요. 하하. 그렇게 결혼을 하셨고, 어머니는 백령도의 첫 천주교 신자가 되신 거죠. 하지만 어머니의 삶이 참으로 아픈 삶이에요. 분단 이후에는 어머니 고향은 보이지만 갈 수 없는 땅이 되었으니까요. 더구나 우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으니, 더욱 고난한 삶을 보내셨죠.

류: 이사장님 어머님의 삶이 참으로 안타깝네요. 바다 건너 고향을 바라보면서 가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떠셨을지 저는 감히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도록과 작품을 보면서 이사장님 이야기를 들으니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긴 시간 동안 진솔한 이야기를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이나 인천문화재단이나 인천의 문화예술인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최: 저는 화가니까 일단 열심히 작품을 그려야죠. 그만큼 열심히 전시도 하고 싶고요. 코로나 때문에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지만, 코로나 이후를 준비하는 시간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지금까지처럼 해반을 잘 이끌고. 사실 제가 이끄는 것도 아니에요. 워낙 뛰어나신 분들이 계셔서 진짜 알아서 척척 해주세요. 저는 그 안에서 해반이 그 중심을 잃지 않도록 균형만 잡으면 되는 사람이죠. 그렇게 해오던 대로 계속 열심히 해나가는 것이 저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류: 마지막까지 이사장님의 한결같고 든든한 문화에 대한 애정이 잘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최: 저도 오늘 아주 즐거웠어요. 감사해요.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멈춘 일상을 회복하게 만드는 문화의 힘: 윤미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 위원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멈춘 일상을 회복하게 만드는 문화의 힘윤미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 위원

박현주(경인일보 기자)

윤미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 위원(사진: 박현주)

“봄꽃이 피고, 단풍이 질 때마다 공원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리면 좋겠어요. 산책 나온 이들이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다 오랜만에 만난 이웃들과 안부를 주고받고요.”
수십 년 전만 해도 이웃들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안에서 끈끈한 정을 나눴지만, 지금은 옆집에 사는 이가 누군지도 모른다.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관계 속에서도, 이웃 간 뭉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27년째 인천 서구 석남동에 살고 있는 윤미(60) 씨는 그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주민이다.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 위원으로 활동하는 윤미 씨는 오는 6월부터 2차례에 걸쳐 주민들이 참여하는 행사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서구는 올해 문화체육관광부의 제3차 법정 문화도시 예비 문화도시로 지정되면서 지역 고유의 문화를 알리고자 주민이 주축이 된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를 구성했다. 윤미 씨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다른 위원들도 그 취지에 공감하면서 주민과 함께하는 행사로 진행하게 됐다.
“그동안 우리가 당연시 여겼던 일상이 멈췄잖아요. 이웃 간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한번 공동체의 가치를 되새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바라는 문화도시는 거창한 게 아녜요. ‘내’가 집에 머무는 것보다 동네 밖으로 나왔을 때 더 즐겁다고 느끼면 그게 바로 문화도시 아닐까요.”
주민들의 적극적인 활동 소식을 접한 지역 소재 기업인 SK석유화학에서도 지원하는 데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인천서구문화재단은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에 따른 행정적 절차를 모색하는 등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민·관·산이 함께 지역 사회를 위해 힘을 모은 사례로 인정받아 지난 4월엔 행정안전부가 지원하는 사업에 선정되는 성과를 거뒀다.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는 다음 달 석남녹지도시숲에서 진행하는 ‘어울림 마당’과 오는 9월 석남동 전통 시장인 강남시장에서 여는 ‘시장 데이’ 등 총 2개의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어울림 마당’은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체험·공연·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사는 환경에 대한 고민도 함께하자는 게 행사의 주된 취지다.
“문화란 크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 전반을 의미합니다. 재활용품으로 화분을 만들거나, 헌 칫솔을 가지고 오면 대나무로 만든 친환경 머그컵을 증정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어요. 우리가 가진 자원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자는 의미죠.”
주민들이 각자 자신이 가진 재주와 능력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작은 기타처럼 생긴 악기 ‘우쿨렐레’를 잘 다루는 주민은 이날 소공연을 열기로 했다. 글씨나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인 캘리그래피에 소질 있는 또 다른 주민은 현장에서 이를 시현하기로 했다. ‘시장 데이’엔 주민들이 전통 시장을 방문하고 시장을 관광자원과 연계하는 방안을 찾기로 했다. 추석이 있는 달이니 시장에서 한가위 음식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구입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전통 시장은 역사가 깊으니 지역 특색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전통 시장이 낯설 수 있는 어린이와 청년들도 재밌게 참여할 수 있도록 세대마다 관심 가질 수 있는 요소들을 파악하고 있어요.”
윤미 씨는 오랜 기간 지역 사회 일원으로서 주변 사람들을 돕는 등 나눔 활동을 해왔다. 주변에선 “그렇게 일하면 돈이 나오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윤미 씨는 “아니. 그냥 우리 동네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해서”라고 대답한다. 주로 가까운 이웃들과 소모임을 꾸려왔던 그는 2015년 ‘내 지역 일을 조금 더 넓게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에 주민자치위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동네 곳곳에 관심을 가지니 이곳저곳 윤미 씨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

2018년엔 다문화 가구 아이들이 좀 더 우리 사회에 ‘마음 붙이고’ 지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너나들이’라는 마을 공동체를 만들었다. 서로 ‘너’, ‘나’ 하고 부르며 속마음을 털어놓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됐으면 해서 붙인 이름이다.
“주민자치위원으로 있을 때 동 행정자치센터 바둑교실을 다니던 다문화 아이가 눈에 띄더라고요. 애가 수업 시작하기 2시간 전부터 와선 주변을 돌아다녔어요. 하루는 아이를 붙잡고 물어보니 부모님이 일을 해서 학교 마치고 갈 데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너나들이’에선 다문화 가구 아이와 그의 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놓인 다문화 가구 부모들은 대부분 맞벌이로 생계를 이어간다. 이 시간이라도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유대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는 게 윤미 씨의 설명이다.
‘너나들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활동은 우리나라 명절에 하는 ‘전통음식 만들기’다. 다 함께 모여 산적을 만들고, 동그랑땡을 빚고, 육전을 부쳤다. 아이들 입맛에 ‘딱’ 맞을 법한 음식들이니 다들 연신 ‘맛있다’고 엄지를 추켜세웠다고 한다. 고국을 떠나온 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컸을 날, ‘너나들이’는 즐거운 추억을 선사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이전처럼 한 달에 2번씩 모임을 갖진 못해도, 항상 연락하며 서로에 대한 안부를 주고받고 있다.
“지난 설엔 떡국 재료를 준비해서 갖다 줬는데 아이들이 못 본 사이 한 뼘씩 더 컸더라고요. 집에서 가족들끼리 재밌게 보내라고 윷놀이 판도 전해줬어요. 우리 문화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됐으면 해서요.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따뜻한 기억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윤미 씨가 수년간 ‘너나들이’를 통한 문화 전도사 역할을 지속하면서 그동안 먼저 다가가길 머뭇거렸던 이들 역시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얼마 전엔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에서 하는 ‘어울림 마당’ 행사에 오라고 여러 다문화 가족에게 전화했더니 ‘언니가 오라면 당연히 가야죠. 친구들도 데려갈게요.’라고 말하더라고요. 앞으로도 이들에게 든든한 동네 언니로서 제 역할을 다하려고요. 나는 이미 이웃들에게 받은 게 많아요. 이제 그때 받은 걸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어요.”

부산댁이었던 윤미 씨가 남편을 따라 인천에 왔을 때, 낯선 곳의 이웃들은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든든한 존재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으면 다들 한 집에 모여 담소를 나눴다. 온 동네 주민이 모여 국수를 삶아 먹었다. 누군가 급한 일이 있을 땐 너 나 할 것 없이 돕겠다고 나섰다. 다들 이웃들이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도록 집집마다 대문을 열어 놨다.
“지금도 과거 이웃 간 정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함께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요. 우리 지역만이 갖고 있는 색깔을 찾아 주민들을 이어줄 수 있는 ‘만남의 장’이 필요합니다. 저는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세포’이고, 이 세포가 모여서 사회를 지탱하는 ‘몸’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웃이 함께 할 수 있는 그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건 문화가 아닐까요.”

인터뷰 진행/글 박현주(경인일보 기자)




르네신, Rene shin

이름: 르네신, Rene shin (본명: 신은혜)
출생: 한국
분야: 미디어아트
인천과의 관계: 인천거주
작가정보: reneshin.com

개인전
2019 <밀레니얼 핑크>, The research house for asians art, 시카고
2019 <밀레니얼 핑크>, 아트스페이스 이색, 서울
단체전
2020 <abstract>, Arc Gallery, 시카고
2019 <Florence Biennale>, Fortezza da basso, 피렌체
2019 <Moving Image 00:05>, Heaven Gallery, 시카고
2019 <Hip A Seoul>, 시카 뮤지엄, 서울
2018 <Berlin presentations>, 베를린
2018 <Nobody comes, nobody goes>, 시카고
프로젝트
2019 <Hip-A 서울 다큐멘터리>, 서울
2019 <Woman rights in South Korea >, 웨이보 웹사이트, 중국
2018 <베를린 레지던시>, 베를린

# Q&A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업(또는 전시)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A. <자신을 편안하게 하세요 Make yourself comfortable>(2018)는 베를린에 거주하는 예술인들의 인터뷰를 통해 편안함의 정의를 찾는 비디오 작품이다. 이 작품은 나를 비디오아티스트로 알리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미국 시카고에서 이탈리아 피렌체까지 작품과 동행하며 나를 작가로서 소개했다. 당시, 비디오아트의 재료와 소재에 대한 고민이 많았기 때문에 작품이 가져온 전시경험들은 혼란이 많았던 프로세스를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레지던시를 위해 처음 방문한 도시 베를린에서 느낀 편안한 감정에 이끌려 작품을 자연스럽게 엮어내었다. 다양한 작가들의 영감의 장소에서 그들과 소통하며 리서치한 ‘편안’을 나만의 흐름대로 영상을 오가닉한 패턴으로 자르고 붙여 만든 그 과정이 달고 짰다.

<자신을 편안하게 하세요: 발췌한 이미지 Excerpt Image of Make yourself comfortable>, 영상, 4분 15초, 2018 ⓒRene shin

Q.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A. 개인전 <밀레니얼 핑크 Millennial Pink>(The research house for asians art, 시카고, 2019)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 한국에서 많이 발생하는 몰래카메라 촬영 행위를 메타포로 삼아 행위예술, 사진, 영상, 설치 미술 등 다양한 포맷으로 주제에 접근했다. 한국사회에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주제를 작품으로 유머로 승화시키고 싶었다. 당시, 주 활동무대가 미국이었기 때문에 외국인이 잘 소화시킬 수 있는 요소들로 재밌게 풀고 싶었다. <밀레니얼 핑크>는 시카고에서 시작해 서울에서 끝낸 전시이다. 미국인에겐 새로운 사회문제, 한국인에겐 보기 껄끄러운 주제였다. 문화와 환경의 차이로 나라마다 관객의 리액션이 달랐다. 이러한 점이 이 전시를 더 흥미롭게 만들었다.

<밀레니얼 핑크 Millennial Pink> 전시 포스터 ⓒRene shin
<밀레니얼 핑크 Millennial Pink> 전시장 전경 ⓒRene shin
<무제 Untitled>, 설치미술, 영상, 8분48초, 2019 ⓒRene shin
<밀레니얼 핑크 #1>, 사진, 2019 ⓒRene shin

Q.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A. 각자 가지고 있는 인생의 아픔들을 승화시키는 방법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나에게는 예술이다. 작가로서 생기는 욕심이라면 관객이 내 작품을 보고 웃는 것이다. 내 유머를 작품에 녹여 설득시키고 싶다. 재치 있는 예술가가 꿈이다.

Q. 앞으로의 작업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갤러리가 아닌 개방된 장소에서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 미디어아트를 설치하기 위한 최소한의 어둠이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지 시도해보고 싶다. 인천문화통신3.0을 계기로 송도달빛공원에서 미디어아트 전시를 해도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 기술을 활용하는 미디어아트 재료 중 3D로 작품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다른 창작의 유쾌함을 주는 3D가 지금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재료이다.

Q. 예술적 영감을 주는 인천의 장소 또는 공간은?

A. 밤에 송도달빛공원 물가를 지나다 보면 낮과는 다른 분위기이다. 물과 빛, 형태가 계속 바뀌는 물질의 변화가 재미있다.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며 영감의 갈증을 해소하려는 예술의 굴레와 오버랩(overlap) 하는 요소가 이 장소를 계속해서 찾아가게 만든다.

송도달빛공원 야경 ⓒRene shin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최리나

최리나는 한국과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사운드 설치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런던의 영국왕립예술대학에서 조각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경기대학교에서 환경조각 학사학위를 받았다. 최리나의 작업은 한 사회 안에서 각기 다른 개인이 자신만의 개성과 정체성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출발한다. 작가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적 강요나 헤게모니(hegemony)에 대한 거부감이 각자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드러내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주로 인터뷰나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그 목소리를 변형하여 스피커 위에 진동으로 남긴다. 청각적 요소를 제거한 목소리는 역동적인 진동으로 시각화되어 개개인의 사적이면서 소소한 이야기들을 전한다.

《Emergent Vision》, Safehouse, 런던, 영국, 2020
불협화음 오케스트라, 우퍼 스피커, 변형된 목소리, 물, 페트리 접시, 가변설치, 2020

# Q&A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소리를 사용하는 작가다. 주변 사람들,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과 나눈 대화 또는 작은 독백을 부탁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녹음한다. 녹음된 소리는 옥타브만 남도록 변형되고, 우퍼 스피커를 통해 진동으로 변환된다. 청각적 요소를 제거하여 역동적인 진동으로 시각화된 목소리를 통해 개개인의 사적인 소소한 이야기를 전한다. 나의 실험은 한 사회 안에서 각기 다른 개인이 자신만의 개성과 정체성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관한 궁금증으로부터 출발했다. 나는 우리가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사회적 강요나 헤게모니가 각자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드러내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개성은 특별함이 아닌 다름이라는 생각을 기반으로,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주목하지 않는, 하지만 미시적으로는 아주 중요한 개개인의 사소한 이야기들에 주목하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2년 전부터 나는 사운드라는 매체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영국에서 유학을 시작할 당시, 그동안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운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스피커나 사운드에 관한 지식이 없었던 나는 교내 테크니션을 찾아가기도 하고, 인터넷 동영상들을 참고하며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무지의 상태에서 지식을 쌓아간다는 것은 몹시 즐거운 일이었다. 여전히 소리와 음향기계에 대해 배우고 있다.

화상통화를 통한 인터뷰
‘What is your most recent personal event?’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업(또는 전시)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A. 졸업 전시를 위해 만들었던 <불협화음 오케스트라(The Cacophonic Orchestra)>를 대표작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 작업은 디지털 버전과 실제 설치 버전이 있다. 2020년 졸업 전시를 몇 달 앞두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졌다. 원래는 오케스트라 병렬 구조로 스피커를 설치할 계획이었는데, 모든 수업과 전시 또한 온라인으로 변경되었다. 3월부터 기약 없이 시작된 런던의 봉쇄상황에서, 모든 것을 실제 설치가 아니라 디지털 형식으로 바꿔야 했다. 디지털 버전에서 각기 다른 음악 악기들을 표현하는 15개의 스피커들은 각자 따로 영상으로 촬영되었고, 한 화면 안에서 오케스트라의 구조로 배치되었다. 직접 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진행해야했던 작품인데, 실제로 만나는 것이 어려워져 영상통화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목소리를 녹음했다. “최근에 있었던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나 큰 걱정거리에 대해 말해줘.”라고 질문했고, 사실 모두가 집에 머물러야 하는 똑같은 상황이라 비슷한 답변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악몽, 짝사랑, 애인이나 친구 고민 등 15명 모두 다른 대답을 했다. 이것이 바로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 같은 상황, 사회 환경 속에서 모두가 똑같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가 다른 인생을 산다는 것. 그리고 개성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하게, 우리의 일상에 녹아있다는 것 말이다.
녹음된 인터뷰를 옥타브만 남게 변형했고, 스피커 위에서 진동만 남게 만들었다. 작은 접시에 담긴 물을 통해 진동을 볼 수 있는데, 물 위에 생성되는 패턴도 목소리의 크기, 억양, 박자 또는 음색에 따라 모두 다르게 나타난 점이 흥미로웠다. 설치된 스피커 오케스트라는 멀리서 보면 똑같아 보이지만, 하나씩 들여다보면 각자 다른 이야기와 소리를 갖고 있다. 목소리를 악보로 제작하기도 했는데, 악보의 생김새, 음표의 구성도 모두 다르고 독특했다. 봉쇄가 풀린 이후, 실제 전시장에 15개의 스피커와 악보를 전시할 수 있었다. 전시 장소가 오래된 빅토리아 형식의 버려진 집이었는데, 진동 때문에 건물이 흔들렸다. 같은 제작방식과 배경을 가진 작업이지만, 각기 다른 형식을 통해 선보인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변화한 상황에서 새로운 도전을 통해 만든 작업이었기에 의미가 있었던, 그 과정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보다 뚜렷하게 찾을 수 있었던 작업이었다.

인터뷰한 목소리로 만들어진 악보

Q.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A. 정체성과 개성에 대한 관심과 탐구는 한국 사회의 단체주의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유행은 급속도로 퍼지고,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가 따라간다. 예를 들어 계절에 따라 유행하는 옷을 모두가 입고, 유행이 지나가면 그 옷은 입기가 민망해진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하면 나도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 심리랄까. 도저히 자기만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어려운 사회처럼 보였다. 정체성을 표현하면 단체 속에서 이상한 사람이 되거나 틀린 사람이 되는 경우들을 보면서 나만의 개성과 정체성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직 어떤 답을 내린 것은 아니고, 똑같음 속에서 사소하지만 다양한 이야기를 찾고 있다.
영국에서 사물 기호증(Object Sexuality), 쉽게 말해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예를 들어 파리의 에펠탑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자신의 성을 에펠로 바꾼 여성이 있었고, 현대에 와서는 AI 로봇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린 시절의 애착 대상과 성인이 된 이후 물건에 대한 애착에 관하여 연구했다. 이것이 페티쉬(Fetish)인지 점점 더 개인주의로 변해가는 현대사회의 모습인지 궁금했다. 사물 기호증이라는 주제로 글은 썼지만, 아직 작업을 해보진 못했다. 리스본에 있는 레지던시에 머물 때 모자에 애착을 가진 소녀의 이야기를 지어내 비디오를 만든 적이 있는데, 더 나아가 사물에 대한 어른들의 사랑도 꼭 한번 다뤄보고 싶다.

《Emergent Vision》, Safehouse, 런던, 영국, 2020
불협화음 오케스트라, 우퍼 스피커, 변형된 목소리, 물, 페트리 접시, 가변설치, 2020

Q. 예술,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에 대하여

A. 관객과의 소통은 나의 작업에 아주 중요한 요소다. 관객들이 완성된 미술작품을 관람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 그리고 거시적으로 봤을 때는 아주 사소한 점에 불과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나의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mergent Vision》, Safehouse, 런던, 영국, 2020
불협화음 오케스트라, 우퍼 스피커, 변형된 목소리, 물, 페트리 접시, 가변설치, 2020

Q. 앞으로의 작업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인천아트플랫폼에서 <노이즈 실험실>(2021)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인천 시민들과 워크숍을 통해 주변의 소리를 탐구하고 만들어내어 녹음할 예정이다. 녹음된 소리들은 영상 작업의 배경음이나 효과음으로 쓰인다. 일반 관객들이 사운드라는 매체를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와 더불어 인천 지역에서 여러 형태로 전해지고 있는 ‘아기장수 설화’로 영상 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영웅의 출현을 기다렸지만 막상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존재의 등장에 겁을 먹거나 특이하다는 이유로 몰살시킨다. 아기장수 이야기를 현대의 시선으로 바라봤을 때 우리는 ‘다름’을 무서워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튀어 보이는 것을 꺼리고 우리와 달라 보이는 사람을 반가워하지 않거나 더 심하게는 차별한다. ‘다름’은 인종일 수도, 성정체성일 수도, 취향일 수도 있다.
나는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 머물며 스스로를 새로운 환경에 노출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 현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로서 사회와 사회적 이슈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 모두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고, 모두가 직접 참여하여 즐길 수 있는 작업을 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혼자 작업하기보다는 다른 예술가, 기술자들과 협업하고 시민들과 다양한 워크숍을 진행해보고 싶다.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계속 발전하고 변화하는 작가가 되는 것을 꿈꾸고 있다.

《Emergent Vision》, Safehouse, 런던, 영국, 2020
불협화음 오케스트라, 우퍼 스피커, 변형된 목소리, 물, 페트리 접시, 가변설치, 2020

Q. 작품 창작의 주요 도구, 재료는?

A.

작가정보 : www.linaaa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