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 ‘인천’의 시간과 공간 담는 ‘이야기꾼’: OBS경인TV 박철현 프로듀서(PD)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 ‘인천’의 시간과 공간 담는 ‘이야기꾼’OBS경인TV 박철현 프로듀서(PD)

박현주(경인일보 기자)

‘해양 도시, 한반도 화약고, 실향민의 터전, 자동차 산업의 요람, 노동 운동 산실…’ 인천을 지칭하는 말은 무수히 많다. 이 도시의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제작하는 OBS경인TV 박철현 프로듀서(PD)는 인천을 아울러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했다. 인천과는 그렇게 가깝지도, 그다지 멀지도 않은 충북 제천 출신인 박 PD는 2004년 OBS의 전신인 iTV에서 일하면서 인천에 정착했다.

인천과는 야구라는 접점이 있었다. 그가 응원했던 전북 연고 프로야구 쌍방울 레이더스는 지난 2000년 해체됐는데, SK와이번스가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단을 인수한 뒤 팀 연고지를 인천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직장을 위해 온 인천에서 ‘내 팀’을 조우하니 이보다 반가울 수 없었다. 프로 야구 정규 시즌에는 없는 시간을 쪼개서 야구장을 찾았다. 인천을 ‘야구 도시’로 접한 박 PD는 인천의 일상에 대한 궁금증도 빼놓지 않았다.

박 PD는 자신을 연출자, 편집자라고 하지 않는다. 인천이라는 도시 속에 축적된 시간과 공간을 샅샅이 톺고 살피는 ‘이야기꾼’이 더 어울린다고 한다.

인천 섬 곳곳에 사는 주민의 삶과 이야기박 PD는 2014년 겨울, 다큐멘터리 촬영차 울도를 방문하면서 인천의 섬 이야기를 다루기로 다짐했다. 당시 울도에는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도민 중 젊은 축에 드는 건 60대였고, 머리 희끗희끗한 노인이 대부분이었다. 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정착하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은 없는 섬이었다. 그물이 터질 정도로 새우와 조기가 잡혔던 이곳은 한때 서해 어업의 전진기지였다. 과거의 영광은 남겨진 폐가들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울도는 하루로 보면 해지기 직전이고, 사람의 인생으로 치면 말년이 다 된 섬이었어요. 인간이 태어나 청년이 되고 장년에 안정적인 삶을 살다가 노인이 돼 남은 삶을 정리하는 모습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순리가 아니더라고요. 섬 역시 인간의 생애와 같은 수순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섬들을 찾아 어민의 고달팠던 삶 얘기를 듣고,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섬 곳곳을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박 PD는 지난 2018년 인천 지역 섬 중에 육지와 연결돼 있지 않아 오랜 시간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을 위주로 로드다큐 <그리우니 섬이다>를 기획했다. 북한 장산곶 휴전선 바로 아래에 있는 백령도부터, 황금빛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굴업도, 섬소사나무 군락지인 백아도 등 10여 개 섬의 모습을 담았다.

로드 다큐 <그리우니 섬이다>, OBS경인TV, 13부작, 2018 (출처: OBS경인TV 홈페이지)

이 다큐멘터리 속에 화자로 등장하는 이들은 유명인이나 전문 리포터가 아닌 다섯 명의 사진작가다. 작가들은 수년간 여러 차례 탐사 작업을 통해 인천 지역 섬을 들여다본 섬 전문가다. 첫 회 ‘큰 물섬, 덕적도’ 편은 덕적도가 고향인 서은미 작가가 등장하고, ‘백령도 5년 만의 재회’에 나온 노기훈 작가는 『백령일지-백령도에서의 12일간의 기록』(호밀밭, 2018)이라는 여행기를 펴내기도 했다. ‘그리우니 섬이다’에는 작가들이 섬을 거닐며 촬영한 사진도 나온다. 움직이는 영상 속에 정지된 순간을 함께 담았다는 게 또 하나의 볼거리다.

1986년 5월 3일 시민회관에 모인 시민들… 5·3민주항쟁 다룬 ‘그 날’박PD는 인천 5·3 민주항쟁이 그 이듬해 있었던 6·10 민주항쟁을 이끈 기폭제였다는 것을 2017년 다큐멘터리 ‘6월 민주항쟁 30주년 특별기획 <그 날>’로 조명하기도 했다. 5·3 민주항쟁은 1986년 5월 3일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인천·경기결성대회가 열릴 예정이던 인천 남구 주안동 시민회관에서 대학생·노동자 등이 펼친 반독재 투쟁이다. 그러나, 5·3민주항쟁은 민주화운동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이를 주제로 다룬 방송도 없었다고 한다.

6월 민주항쟁 30주년 특별기획 <그 날>, OBS경인TV, 2017 (출처: OBS경인TV 홈페이지)

“부마민주항쟁의 경우, 부산과 마산 지역 정신을 대표하는 항쟁으로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5·3 민주항쟁은 인천에서조차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가는 게 안타까웠어요. 5·3민주항쟁은 지역에서 활발하게 이뤄진 노동·여성·빈민 운동 등이 응축된 민주화 투쟁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벌써 30년이 지났지만, 더 늦기 전에 그날을 통해 지역의 시민 정신을 알리고, 시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정신적 유산으로 남기고자 했습니다.”

<그 날>의 제작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박 PD는 당시 회사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지 못하자 직접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제작 취지에 동의한 부평구와 남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천민주화운동센터 등 기초자치단체·시민단체의 지원 덕분에 ‘그 날’을 제작할 수 있었다.

치열했던 인천의 현대사, 시민의 삶이 곧 도시의 역사인천이 품은 인물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죽산 조봉암(1890~1959) 선생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다. 강화 출신인 조봉암 선생은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을 하고, 광복 후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958년 일명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이 집행됐다. 이후 유족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인 대법원이 52년 만에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헌정사상 첫 사법 살인으로 기록됐다.

“조봉암 선생의 삶을 통해 지나간 역사를 통찰하고자 다큐멘터리를 기획했습니다. 과거를 통해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인천의 오래된 도심인 동구 화수동 무네미 마을 곳곳을 살펴보는 공간다큐 <만남>을 제작했다. 바닷물이 넘어 들어온다고 해서 무네미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공간다큐 만남은 무네미 마을 속에 위치한 작은 책방부터 인천도시산업선교회까지 여러 공간을 들여다보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특히, 노동·민주화 운동의 산실로 평가받는 도시산업선교회는 최근 주택재개발 사업으로 철거 논란이 일었던 곳이다.

이처럼 앞으로도 인천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야기를 찾고 이 도시의 가치를 알리겠다는 게 박 PD의 목표다.

“인천을 무대로 한 시민들의 삶을 담고 싶습니다. 바다를 중심으로 한 부두 노동자, 실향민, 산업화 과정에 있었던 공장 노동자들까지요. 많은 이가 치열하게 보낸 하루하루가 쌓여 이 도시의 역사로 축적됐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이 일궈낸 인천의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인터뷰 진행/글 박현주(朴賢珠, Park Hyeonju)

경인일보 사회팀 기자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김지영, 최수련, 편대식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소개
인천아트플랫폼은 국내외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을 공모로 선발하여, 창작 공간을 지원하고 입주 예술가의 연구와 창작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한 비평 및 연구 프로그램, 창·제작 프로젝트 발표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2021년 인천아트플랫폼 12기 입주 예술가를 소개합니다.

■ 김지영 KEEM Jiyoung

김지영은 삶의 부조리한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뜻밖의 사고처럼 벌어지는 사회의 사건 배면(背面)에 위치한 구조적 문제와 그 사건이 돌출된 양상을 통해, 개인과 사회적 사건이 맺는 관계에 몰두하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에는 세월호가 드러낸 세계의 균열에 천착해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의 입주 기간 동안에는 작품 제작을 위한 연구과정을 세분화하여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 구조를 면밀히 들여다볼 예정이다. 더불어 초가 심지를 태우며 발하는 빛의 다양한 열감을 포착하여 담아낸 <붉은 시간> 연작을 보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그리기 방식을 확장하여 진행하고자 한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부조리한 구조에 대해 고민한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익숙해서 감각하지 못하거나, 감각하지 못하도록 가린 시스템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무뎌진 삶의 기울기를 드러내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내 작업이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당겨오거나, 우리가 더 이상 의식하고 있지 않은 대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하길 바란다. 우리에게 희미한 것 혹은 무뎌진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두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지만 깊숙이 침잠한 것을 두드리는 작업을 하고 있기에, 매체와 그 형식을 구성하는 일에 더욱 고심하게 된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단어도 각각 쓰이는 때와 불러내는 인상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는 것처럼, 미술에서의 매체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설치, 회화, 책, 사운드, 영상 등 각각의 매체가 고유의 속도를 지니고 있고 저마다 압축 가능한 범주와 정도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와 더불어 결과적으로 작업이 의미를 전달할 속도와 방향 등을 염두에 두고, 이에 적합한 매체와 형식을 고민하여 작업을 만들고 있다.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사회적 사건을 마주하는 태도를 선명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2018년 산수문화에서 열었던 두 번째 개인전 《닫힌 창 너머의 바람》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전시는 반복되는 사회적 재난을 막연한 반복으로서가 아니라 ‘무엇이’, ‘어떻게’ 반복되어온 것인지 구체적으로 목도하고자 진행한 <파랑 연작>(2016~2018), <닫힌 창 너머의 바람>(2017~2018),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이 켜켜이 쌓여 구축되는 역사를 은유하는 <기억의 자세>(2016/2018)로 구성되어 있다. <파랑 연작>과 <닫힌 창 너머의 바람>은 1950년부터 2015년까지 한국 근현대사에 있었던 사건들 중 와우아파트,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유사한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32개의 사건을 바탕으로 삼는다. 구조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방식의 그리기[<파랑 연작>]와 쓰기[<닫힌 창 너머의 바람>]를 통해 사회적 사건의 반복성과 현재성을 드러내고, 그 유사성 속에 세월호 사건을 넣지 않음으로써 더 강력하게 세월호 사건을 호명하고자 했다. <기억의 자세>는 뜨개실이 전시 기간 동안 천천히 한 코씩 풀려나가는 설치 작업이다. 움직임을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느린 속도로 천천히 풀리던 실이 어느새 실타래가 되는 모습을 통해 묵묵히 흐르는 시간을 가시화하고자 했다.
사회적 사건은 평범한 여느 날을 비극적인 날로 뒤바꾸고, 개인을 재난의 희생자로 만든다. 이는 개인과 사회적 사건이 연결되어 있음을, 개개인의 삶이 역사의 흐름을 이룬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개개인이 동시대의 사건 혹은 사안에 대해 어떻게 사유하는지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는 차가운 머리로 그 구조를 인식하되, 뜨거운 공감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중 하나의 지점 혹은 두 지점의 중간이 아니라, 두 지점이 함께 작동해야 비로소 세계의 재난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닫힌 창 너머의 바람》은 이와 같은 사회적 사건을 마주한다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의 토대를 담아낸 전시였다.
나는 작업을 준비하면서 역사의 곡절마다 사회가 당면한 사회적 사건을 어떻게 휘발시켜왔는지 그 반복되는 실책을 목도할 수 있었다. 이 반복성이 동시대 재난의 참혹함 속에서도 그것의 현재성을 들여다보아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그 터전을 이루는 고통에 무감각해질 때야말로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사회의 모든 투쟁은 삶을 터전으로 하며, 모든 삶은 죽음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모든 죽음은 저마다 고유하다. 나는 그 각각의 죽음이 얼마나 고유한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잊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고 싶다. 더불어 감히 내 작업이 작금의 사회를 마주한 하나의 미술로서의 기록이 되길 바란다.

작가정보: keemjiyoung.com

■ 최수련 CHOE Sooryeon

최수련은 동양화를 전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대에 재현되는 동양풍 이미지의 양상과 그것이 소비되는 방식을 지켜보며 그림을 그린다. 작가는 근대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낡고 이상한 것으로 치부되는 ‘동양적’인 것들을 반쯤은 의심하면서도 좋아하고, 그것의 효용을 다시금 상상해본다. 동북아시아가 공유하는 전통적인 클리셰 이미지를 바탕으로 비애, 여성, 현실과의 괴리, 내면의 오리엔탈리즘, 의심, 무지와 부조리 등을 그려내고자 한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선녀>(2017~)나 <태평녀>(2019~) 연작과 같은 전통 동양풍의 여성 이미지를 주로 그려왔다. <태평녀> 연작에서는 <선녀>처럼 출처가 비교적 명확한 현실의 인물들이 아니라 주로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여성 인물들을 그렸는데, 이는 선녀를 포함한 동양풍의 예쁜 여자 이미지의 소비 방식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클리셰를 그리고 싶은 나의 모순적인 욕망을 직시하면서 시작되었다. 내 작업의 기저를 이루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비애감을 본격적으로 다뤄보고자 했다.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2020년 산수문화에서 진행했던 개인전 《무중필사 霧中筆寫》에서 선보인 작업들은 익숙한 작업 방식에서 탈피하여 손에 익지 않은 방식으로 그리려고 노력했던 결과물이 주를 이룬다. 재료도 바꾸고, 여러 이미지 레이어들을 겹치는 방식을 시도해봤다. 가볍게 쓰고, 긋고, 다듬고, 칠하면서 회화의 조형적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기에 개인적으로 중요한 전시였다. 기존 유채 작업에서도 사진의 참조 비중이 점점 더 줄면서, 특정한 국가나 민족의 이미지라기보다는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서 공유하는 애매모호한 이미지를 단순한 필치로 그려내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태평녀, 리넨에 유채, 145×112cm, 2020

‘한자보다 한글이 더 익숙한 세대’를 위한 필사 작업은 내가 한자를 모른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는데, 그 모름의 상태가 너무 불편해서 조금씩 공부를 하고 있다. 배워가면서 작업이 어떻게 변화할지 나도 궁금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최근의 주요 관심사는 감각적으로도, 의미적으로도 ‘가볍고 재밌게 그리기’다. 대형 캔버스도 ‘이건 그냥 습자지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며 그리는 것이다. 드물지만 내 그림을 보고 깔깔 웃는 사람도 있는데, 그럴 때 작품이 성공했다고 느낀다. 그런 측면을 더 부각시키고 싶다.
최근 몇 년간 작업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금년은 그 변화를 더 연구하고 심화하는 해가 될 것 같다. 작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진행했던 《태평선전》 전시에서 한자가 포함된 광고물 형식의 작품 제작을 시도해보면서, 인쇄체의 글씨를 따라 쓰고 다듬는 과정이 ‘쓰기’가 아니라 ‘그리기’에 가깝고, 그림을 처음 그리는 느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가볍고 재밌게 그릴 수 있었기에 기존 작품 안에 이러한 작업 방식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방식을 연구하는 작업을 진행하려 한다. 또한 1년간 눈여겨본 동인천에 위치한 문 닫힌 무속용품 상점에 대한 리서치도 조금씩 시작해보려고 한다.

■ 편대식 PYOUN Daesik

편대식은 이미지와 시간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작업을 해왔으며 현재는 이미지를 소멸시키고 ‘나’라는 매개를 통해서 시간을 물질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작가는 연필로 작업의 표면을 칠하는 지난한 반복적 행위를 통해 시간을 기록한다.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개항기 근대 건축물이 보전되어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지역적 특성을 활용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개항으로 인한 문화의 뒤섞임을 표출하는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다. 연필로 칠한 표면은 마주한 시공간을 비추는데, 시간과 문화가 뒤섞여 공존하는 공간에 작품이 개입되면서 발생하는 순간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연필로 화면을 검게 칠하는 지난한 과정의 작업을 해왔다. 내 작업은 장지를 여러 겹 덧붙여 두꺼운 종이를 만들고, 그 위에 일정한 비율로 작아지는 기하학적 도형의 선을 눌러 자국을 낸 후, 표면을 연필로 칠하는 과정을 거친다. 나는 작품의 표면을 통해 보이는 시각적 이미지와 그 작업 과정에 내재된 시간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양면성에 대한 이야기보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만 가볍게 소비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에는 표면에서 보이는 이미지를 없애고, 작업의 물성을 더욱 강조하며 시간을 물질화함으로써 작업에 내재된 시간성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의 작업 과정을 간략히 말하자면, 먼저 작품의 지지대인 패널을 만들고, 그 위에 퍼티를 두텁게 바르고 갈아내서 표면을 고르게 만든다. 그 위에 아크릴 도료를 올리고 다시 갈아내어 더 고르고 매끈한 표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시작 지점부터 끝 지점까지 한 방향의 선들을 그려 표면을 칠한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한 번 칠하고 지나간 자리는 다시 되돌아가지 않는다.

Moments, 한지에 연필, 285×5400cm, 2017 Moments 전시 전경, 한지에 연필, 285×5400cm, 2017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2017년 (재)한원미술관에서 선보인 개인전 《순간의 연속; A Series of Moments》에서 전시했던 작품 중 일 년 동안 작업했던 <Moments>(2017)를 꼽겠다.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화면을 연필로 채운 작업으로, 작업의 크기 때문에 제작 과정 중에는 작품 전체를 본 적이 없었고, 전시장에 설치한 후에야 처음으로 전체를 확인했었다. 드라마틱한 이미지나 서사는 없지만, 일 년의 시간을 한 공간에서 바라봤던 전시 작업이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내게 있어 작업은 시간을 소비하고 얻어진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얻어진 결과를 두고 과정을 되짚어가는 과정으로 관객들과 마주하게 된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관객이 인식하고 감상했으면 하는데 대개는 이러한 과정은 직관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최근 작업을 대하는 관객들은 작업을 보고 "전시 없나요?", “금속판을 가져다 뒀나요?” 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대화가 시작되면 내부로 들어가는 느낌을 종종 경험한다. 대화를 통해서 나 또한 변하는 지점들이 발생하고, 관객도 영향을 받고 돌아간다. 이러한 과정이 흥미롭고 이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앞으로의 작업은 아직 구체적인 목표나 계획이 없지만, 진행해오던 작업의 흐름을 이어가며 나에게 주어지는 상황들을 작업에 녹여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지속하는 것이다. 작업을 지속하고 시간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지하며 다양한 방향으로 작업을 전개해나가고 싶다.

* 작가가 제공한 사진과 인터뷰 글을 바탕으로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소설가 이재은

이름: 이재은(李在恩, Lee Jae Eun)

분야: 문학(소설)

인천과의 관계: 인천거주

작가정보: 마음만만연구소(theredstory.tistory.com)
1인 문화예술공간. 소설창작워크숍, 단편소설 깊이읽기, 문학필사 30일 온라인 강좌 등을 진행한다.

수 상
2015 중앙신인문학상
2019 심훈문학상
단행본
소설집 『비 인터뷰』(아시아, 2019)
짧은소설집 『1인가구 특별동거법』(걷는사람, 2021년 10월 출간 예정)
기 획
2017~2021 십분발휘 짧은소설 공모전(마음만만연구소, 나비날다책방)
2021~2022 초보 독서가를 위한 짧은소설 안내서(마음만만연구소)

1.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품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이재은, 『비 인터뷰』(아시아, 2019)

등단작 「비 인터뷰」로 하겠습니다. ‘대표격’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 작품을 통해 작가로 인정받았으니까요. 그런 걸 떠나 ‘다른 사람에게 귀 기울인’ 최선의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저만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저를 아끼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고, 살고 싶었던 바람을 글로 풀어내려고 했거든요. 내가 미치겠으니까 타인에게 마음을 쓰거나 돌볼 여력이 없는 거예요. 세계가 좁았다고 해야 하나, 좁은 지붕 아래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기회에 인터뷰 명목으로 지붕 너머 사람들, 마을 밖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식에 변화가 생겼어요. 인터뷰는 대화잖아요. 마주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는 거예요. 생각과 의견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눈빛도 스치고 감정도 느끼면서 ‘인터뷰어인 나’와 ‘소설가 지망생인 나’가 함께 꿈틀거렸던 것 같아요. 글쓰기에 변화가 생겼고, 쓰는(말하는) 존재와 읽는(듣는) 존재를 동시에 배려하게 되었습니다.

2.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청탁이나 마감이 ‘작업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칩니다.
얼마 전에 책방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쓸 기회가 있었어요. 책방 이름과 주인장 닉네임을 빌려도 되느냐고 묻고, 그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어요. 그 책방에는 주인보다 더 주인 같은 고양이가 있는데 소위 ‘사랑 덩어리’거든요. 고양이를 보러 책방에 들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죠.
제가 쓴 소설에서 저로 추측되는 작가 J는 그 고양이와 사이가 좋지 않아요. ‘고양이 목숨은 아홉 개’라는 미신을 적용, 몇 번이나 냥이에게 해를 가하죠. 그렇게 된 이상 아무리 픽션을 썼다고 해도 걱정이 되더라고요. 주인장이 싫어하면 어쩌지? 왜 맘대로 냥이를 죽이냐고 하면 어쩌지? 떨리는 마음으로 소설을 보냈는데 이틀 동안 답장이 없는 거예요. 큰일 났군, 단단히 화났나 보다, 새로 써야 할까? 흠…….
이틀 만에 통화가 됐는데 개인적인 일 때문에 바빴다고 하더라고요. 소설은 아직 보지도 못했고요. 소설은 소설이지, 다행히 잘 이해해주셔서 무사히 작품집에 실었습니다.

3.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예술가보다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자신을 ‘소설 쓰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편한데 언젠가는 당당히 “소설가 이재은입니다.” 밝히고도 싶고 “작가 이재은입니다.”라고 소개하고도 싶어요. 저의 꿈은 소설가(家)가 되는 것이고, 그다음에 작가(家)가 되는 거예요. 두세 권의 책을 내고 사라진 사람이 아닌 소설로, 에세이로, 여행기로 글집을 짓는 사람[作家]이 되고 싶어요.

4. 앞으로의 작품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10월에 두 번째 소설집이 나옵니다. 이번엔 짧은 소설이에요.
제목이 『1인가구 특별동거법』인데 제가 1인 가구로 살고 있기도 하고, 특별동거는 음… 외로우니까…(웃음) ‘혼자 사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앞으로도 ‘#홀로 #여성 #비혼 #외로움 #늙음’과 ‘죽음’에 관한 사유를 붙잡고 있을 거예요. 로맨스나 기적, 기이한 화해보다는 고통과 억압에 관한 파토스를 세심하게 다루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5. 예술적 영감을 주는 인천의 장소 또는 공간은?

소래습지생태공원

결국엔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장소에 갔을 때 내가 어떤 마음이었냐에 따라 ‘영감’의 형상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어떤 마음일 때 어떤 장소에 갔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네, ‘달걀과 닭’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 장소’ 또는 ‘그 공간’이 아무리 훌륭하고 멋지고 슬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없는 거예요. 마음은 의식이나 주제, 생각이나 감각으로 바꿔도 됩니다. 우연과 운명의 조화로 무언가 만났을 때 찌르르 울림이 오죠. ‘그곳’을 대상화하기보다 ‘여기 있는 존재’를 더 아끼고 그들에게 마음 쓰려고 하는 편이에요.
그럼에도 저에게는 소래습지생태공원이 꽤 이상적인 장소입니다. 「설탕밭」(『1인가구 특별동거법』)은 그곳을 배경으로 쓴 짧은 소설인데 거기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별이 있어 그랬다.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어. 몇억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빛나는 별이, 밝다고 할 수 없는 그 작은 빛이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았다. 별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어.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걸 좋아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인간에겐 별빛 하나만으로 족해. 나를 비춰주는 빛 하나만 있으면 된다. 가령 반딧불이 같은 거 말이다. 그것만 있으면 돼. 저기 저 빌딩 좀 봐라. 저 안으로 들어가려고 너도나도 아등바등하지만 여기서 보면 한 점일 뿐이잖니. 빛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그 안에 있으면 빛의 소중함을 잊기 마련이다.”

폐염전과 갯벌, 작은 호수와 호수 위의 데크, 거기 붙어있는 계절별 서식 조류 안내판, 먼지 나는 흙길 같은 게 좋아요. 칠면초와 억새풀의 색감도, 그 너머 아파트 단지에서 빛나는 불빛도 따듯하고요. 힘들 때 ‘괜찮아. 나는 수많은 돌멩이 중 하나일 뿐이야.’ 읊조리면 조금 위로가 돼요.




문화예술과 지역인재 육성의 토대를 마련하다: 인천대학교 김용민 교수와의 만남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문화예술과 지역인재 육성의 토대를 마련하다인천대학교 김용민 교수와의 만남

류수연(인하대학교 교수)

김용민 교수는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프로방스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 인천대학교에 부임하면서 인천과 연고를 맺은 뒤 지금까지 인천시민으로 살고 있다. 학내에서 인문대학 학장, 문화대학원 원장, 교수회 회장, 평의원회 의장, 법인 이사 등을 역임했다.

코로나19의 발생 이후 일 년 반이 넘게 비대면 수업이 이어지고 있는 모든 대학은 캠퍼스의 공동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코로나19라는 현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대학의 역할을 되짚어 보게 만들기도 한다. 문화예술 영역의 인재를 육성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설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김용민 교수를 통해 그 관계성을 되짚어보았다.

“지역문화 인재 양성과 문화 자립의 필요성”

불문학자인 김용민 교수가 인천의 문화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략 16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2008년 무렵 인천대 인문대학은 교육부 특성화 사업에 선정되었는데 이 사업의 한 꼭지가 바로 <문화매개자 양성사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인천대에는 문화예술가를 교육할 전문적인 커리큘럼이나 학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이에 김용민 교수는 지역문화계에 손을 내밀게 되었다.
김용민 교수는 대학의 특성화 사업이라는 현실적인 과제를 통해 지역문화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 지역문화계를 잇는 교량이자 인재육성과 지원을 목표로 설립된 인천문화재단이 막 초기 목표를 수행하던 때였다는 것도 큰 행운이었다. 말 그대로 대학과 지역의 니즈가 적실하게 만나게 된 것이다. 인천은 서울, 부산과 함께 대한민국의 3대 도시이지만 그 문화적 토양은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지역인재를 기를 육성시스템이나 그들이 자생할 수 있는 토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김용민 교수는 문화전공자는 아니었지만, 지역의 문화적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 가지는 중요성을 이때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대학이 있어야 함은 부정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당시 인천대는 지역문화계와의 연계성이 적었어요. 이건 아마 인하대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 연계성을 높이고 인재가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지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문화대학원의 필요성이 도출된 거죠.”

문화대학원의 필요성을 인식했지만, 그것이 현실화되기까지는 그리 쉽지 않았다고 한다. 지역문화인력 양성의 중요성에 대한 지역의 공감대가 충분하지 않았고, 특히 당사자인 대학 내의 인식이 매우 부족한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원 설립에 핵심인 정원 확보는 대단히 민감한 사항이었기 때문에 대학 구성원의 동의와 집행부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여러 난항을 겪으며 구성원을 설득했고 제반 조건을 준비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2012년 11월 인천대학교의 문화대학원이 설립인가를 받는 결실을 얻게 된다. 비록 정원 7명에 불과한 소박한 출발이었지만, 지역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인재들이 모일 거점이 마련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소소하지 않았다.

“인천에 뿌리를 두고 더 멀리 뻗어 나가야”

김용민 교수는 문화대학원 설립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문화전공자도 아닌 더구나 서양문학 전공자인 그가 지역예술을 고민하고 그 청사진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겸양은 오히려 인천대 문화대학원 설립을 추진했던 그의 의지와 지역문화에 대한 애정이라는 진정성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김용민 교수뿐만 아니라 지역의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든든한 지지가 인천대 문화대학원의 10년 역사를 일구어낸 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속처럼 인천대 문화대학원(2013년)은 인하대 문화경영대학원(2006년)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문화예술 인재를 양성하는 양대 거점으로 성장해왔다. 고질적인 인재난에 시달렸던 지역문화계에 수혈하는 기능적 역할에도 충실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제 인천이라는 도시의 규모에 걸맞은 문화적 인프라를 위해 도약할 때”

김용민 교수는 인천문화재단의 제5기 이사이기도 했기에 재단의 비전에 대한 의견 역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인천은 근대의 관문이었다. 개항도시라는 의미는 열려 있는 도시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인천의 현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여전히 공항과 항만을 가진 인천은 밖으로 열려 있는 도시이다. 따라서 김용민 교수는 인천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열린 공간을 지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가령 신포동을 보면, 그곳이야말로 다양한 문화가 역사라는 시간과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한 도시와 그 도시의 장소가 문화적 거점이 되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와야 한다. 서울을 모방하거나 복제하는  것으로는 이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서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그러한 동력이 모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금 인천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상상력이다.

“인천문화재단은 굵직한 정책과 비전으로 명실상부한 지역의 문화적 허브가 되어야”

김용민 교수가 던진 화두는 어쩌면 분명하다. 그가 인천문화재단의 활동을 애정을 갖고 성원한 지가 벌써 10여 년이 넘었다. 그런 그는 이제 재단이 그 본연의 가치에 보다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바로 광역문화재단으로서 비전과 인천이라는 도시 전체를 이끌 아젠다를 도출하는 일이다. 김용민 교수의 요청과 바람이 인천문화재단의 행보 속에서 실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청년기획자 윤재훈, 주민과 예술에 물들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청년기획자 윤재훈, 주민과 예술에 물들다

홍봄(기호일보 사회부 기자)

“예술의 힘은 봄비 같아요. 새롭게 물들게 해주고 또 올라오게 해주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지역주민들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볼 때면 봄비가 내리는 것 같아 가슴이 울립니다.”

인천시 서구에서 만난 윤재훈(31) 씨는 자신을 ‘기획자’라고 소개했다. 왜 ‘문화기획자’가 아닌 ‘기획자’인가 하는 물음에 그는 “장르를 떠나 뭐든 기획하기를 좋아해서”라고 답했다. 직접 댄스공연을 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다원예술 분야의 공연을 주로 기획하고 있다. 같이 춤추는 사람들이 좀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찾은 길이다.

그는 인천에서 오래 거주한 인천 청년이다. 하지만 초기 활동은 서울과 세종시, 경기도 쪽에서 시작했다. 활동을 시작할 당시 인천지역에 기회가 많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의 힘이 강하고 그들만을 위한 지원 사업이 많기 때문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랬기에 인천서구문화재단이 생겼다는 소식이 그 누구보다 반가워하며 지역으로 돌아왔다.

윤 씨는 “지역에 여러 가지를 건의했지만 잘 반영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외부에서 오히려 활동을 많이 했다.”며 “서구에 재단이 생기면 문화라는 장르로 활동할 기회가 많아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돌아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지역에서 처음 한 일은 주민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이었다. 2019년 인천서구문화재단의 청년기획자 사업으로 지역주민들과 댄스 장르를 향유했다. 주민들과 예술활동을 하면서 그는 ‘예술이 예술인만의 전유물이 아니구나.’하고 느꼈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술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2년 차 프로젝트까지 이어졌다. 1년 차 때 함께 했던 서구 주민들과 서구 문화자원을 알릴 수 있는 홍보영상을 제작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청라호수공원을 알리는 콘텐츠다. 청라호수공원 곳곳을 비추는 영상에 지역 주민들의 댄스 동호회인 ‘섹시코맨도’가 어우러졌다.

직접 기획한 공연도 꾸준히 무대에 오르는 중이다. 지금은 국악과 랩, 비보잉, 미디어아트 등을 결합한 다원예술 <미스테리우스> 공연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무대에 오르는 공연팀 ‘구니스컴퍼니’는 연예사병 해군 비보이 1기 출신 멤버들이다. 군을 전역한 뒤 한국의 미와 멋을 가장 잘 나타내는 전통장르에 자신들의 장점인 비보잉을 접목한 창작 작품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공연은 2019년 인천에서 거리공연으로 시연된 이후 독창성과 연출력을 인정받아 <2020 안산국제거리극축제>와 <고양호수예술축제>, <부산금정거리예술축제> 등 다양한 거리예술 사업에 선정됐다. 올해는 문화공감 공모사업으로 선정돼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오는 12월 서구문화회관에서도 공연을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예전만큼 관객들을 자주 볼 수 없는 것은 그에게도 서운한 일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예술가들도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느꼈다. 지난해부터 어떻게든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왔던 예술가들은 해가 바뀌어도 앞으로 나아간다. 반면 변화 없이 지원만 기다리는 예술인들은 그 자리에 멈춰 있는 모습을 본다.

윤 씨는 “저도 2020년에는 공연을 못하니 큰일 났다는 생각부터 했어요. 관객이 없이 공연할 맛이 안 나는 건 당연하지만 계속 그것만 따지고 있을 수는 없겠더라고요. 다르게 생각하면 오히려 활동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기회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비대면으로 공연을 하니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기도 하고요. 시국에 맞춰서 예술가들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온라인 문화콘텐츠들이 많이 생산되는 요즘 그는 ‘홍보’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온라인 스트리밍을 하는 자체에 그치지 말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알리고 불러모으는 것이 필요하다. 또 카메라 송출을 담당하는 팀의 전문성도 강조했다. 송출하는 업체가 행사를 잘 이해하고 아는 이야기를 해야만 적절한 앵글을 비춰주고 자막도 넣고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가들을 불러오고 공연을 기획했는데 보는 사람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며 “기관에서 하는 행사들도 송출만 해놓고 ‘우리 했어’하는 식으로 진행해서는 안 되고 마케팅에 전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 씨는 기획자로 활동해 오며 우리나라에 문화예술인 지원 사업이 참 많다는 것을 느꼈다. 몇 년 전부터는 지역 내에서 청년예술인들에 대한 지원도 다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기획에 대한 예술계의 인식이 여전히 박하다는 점이다. 청년기획자 프로젝트를 이어온 서구의 경우도 1년 차 때 지원되던 기획자 인건비가 2년 차였던 지난해에는 사라졌다가 올해 다시 생겼다. 윤 씨는 기획자는 예술인이 아니라는 편견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5개월 프로젝트비가 150만 원밖에 안 되는데 공연을 올려야 하는 기획자로서는 결국 자신의 인건비까지 써버려야 하는 상황이 된다.”며 “1년, 2년 차 때 했던 청년 기획자들도 사업이 너무 힘드니까 안 들어오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청년기획자라는 프로젝트는 지역의 청년기획자를 많이 발굴해서 발전시키려고 하는 건데 이런 방식이 과연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든다.”고 덧붙였다.

윤 씨는 예술가들이 지속가능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재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가들이 프로젝트가 아닌 다른 일에 집중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또 적은 비용으로 많은 단체를 지원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신진단체는 이 돈으로 사업을 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기존 활동이 많은 단체들은 또 다른 재원을 마련할 여건이 되니까 사업을 할 수 있지만, 그렇다 보니 새로운 공연을 만들지 못하고 했던 공연을 또 하게 된다. 결국엔 지역의 문화발전이 안되고 예술단체는 성장 없이 돈 벌어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기획자로 살아온 지난 4년 동안 하나씩 배우며 공부해 왔다는 그는 앞으로 더 많은 지역 주민, 예술인들이 설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어나가고 싶다. 함께 만든 프로젝트, 같이 땀 흘린 무대가 박수를 받을 때만큼 행복한 순간이 없기 때문이다. 윤 씨는 “주민과 예술가들이 즐거워하고 관객들이 박수를 쳐주실 때면 모든 고생들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라며 “기획자로서 더 많은 주민들이 예술을 접할 수 있는 참여 여건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글 홍봄(洪봄, HongBom)

기호일보 사회부 기자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이은새, 이희준, 정금형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소개
인천아트플랫폼은 국내외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을 공모로 선발하여, 창작 공간을 지원하고 입주 예술가의 연구와 창작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한 비평 및 연구 프로그램, 창·제작 프로젝트 발표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2021년 인천아트플랫폼 12기 입주 예술가를 소개합니다.

■ 이은새 LEE Eunsae

이은새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불만과 그것에 반응하는 저항의 시도 또는 상상들을 수집하고, 이를 이미지로 기록한다. 최근에는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면서, 쉽게 대상화되는 다양한 인물에 관심을 두고, 규정되거나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이미지의 피사체를 그려나가고 있다. 작가는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기간 동안 단순한 표현과 반복되는 형식 그리고 변주된 장면들을 통해 만들어낸 리듬의 형식을 이번에는 인물화에 대입해보고자 한다. 반복되는 형태의 인물과 미세하게 변주된 인물들이 함께 뒤섞인 장면을 연출하면서, 더욱 심화된 내용적 접근과 기술적 연구를 이어갈 예정이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회화와 드로잉 작품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 다양한 환경과 층위에서 마주하는 경직되고 고정된 상태를 잠깐이나마 흔들어 볼 수 있는 단서들을 수집하고, 이를 회화로 기록한다. 최근에는 규정되거나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대상들을 화면에 기록하고 있으며, 인물이 중심이 되는 연작을 시도하고 있다.
나는 캔버스 작업 전 단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편이다. 먼저 생각을 드로잉으로 기록하고, 그 드로잉이 생각을 잘 정리하여 담아낼 수 있을 때까지 같은 이미지를 반복해서 그린다. 그 이후에 반복되는 형태들 사이에서 의도를 잘 담아낸 표현을 선택하여 캔버스 위에 옮긴다.

<As usual at bar>, 캔버스에 오일과 아크릴릭, 90.9×72.7cm, 2020 <As usual on the bed>, 캔버스에 오일과 아크릴릭, 90.9×72.7cm, 2020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내가 생각하는 대표 작업은 2018년에 발표한 <밤의 괴물들> 연작이다. 술에 취한 여성을 주제로 삼았던 작업이었다. 술 취한 여성을 생각할 때 쉽게 떠오르는 타자화되고 대상화되던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로 내가 마주친 인물들을 기억에서 끌어와 캔버스 위에 재현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밤의 해변을 기분 좋게 산책하는 여자부터, 억지로 마신 술을 토하고 그 토사물을 상대방에게 권하는 사람, 지구대에 앉아있는 친구들, 산발을 한 채 거칠게 이를 드러내고 있는 사람까지 다양한 상황 속의 인물들을 그렸다. 이들은 만취했어도 자유로운, 새벽 어귀에서 구토하고 쓰러지더라도 약자가 되어 범죄의 대상으로 존재하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인물들이다. 위협을 가하기 쉬운 밤이라는 시공간에서 인물들은 무방비한 상태가 아니라 공격적으로 쏘아보고 행동하는 밤의 괴물로서, 오히려 상대를 향해 끔찍한 반격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로 표현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고민이 많았지만, 당시의 생각을 타인에게 설득하거나 공감을 얻어내고 이미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배운 것도 많았다.
내게 작업은 내가 이해하는 혹은 기대하는 세계를 시각적으로 풀어보는 과정이다.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고민을 기억하기 위해 작업을 하고 있지만, 작업의 결과를 타인과 공유하는 과정 역시 새로운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 회화 위주의 평면 작업을 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다른 매체를 다루는 상상도 해보곤 한다. 내가 다루고 있는 회화의 특징들이 물리적 공간 안에서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작가정보: www.leeeunsae.com

■ 이희준 LEE Heejoon

이희준은 서울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의 도시를 여행하며 수집한 장면을 바탕으로 회화작업을 진행했다. 최근에는 작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도시가 생산해내는 다양한 문화, 경계, 자본 등의 요소를 개인이 어떤 방식으로 소비하고 어떤 영향을 받는지 탐구 중이다. 올해 레지던시에 머물며 진행할 《Image Architect》 전시에서는 2016년부터 이어온 도시와 건축에 대한 관심을 포토콜라주 기법과 추상회화로 표현한 시리즈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작가는 도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건축적 환경에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고 개입할 수 있을지 실험하며 작업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와 각각의 구성단위 그리고 도시의 환경이 우리의 미적 선택과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는가’에 관한 고민을 바탕으로, 도시에서 포착한 풍경을 추상화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작업은 도시를 걷는 것으로 시작된다. 거리를 직접 걸으며 마주하는 도시의 풍경을 수집하고 그 안에서 어떤 조형적 형태를 찾는다.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진행한 <A Shape of Taste> 회화 연작은 변화하는 건축의 표면과 감각에 집중해 동시대의 기호 혹은 한 지역의 취향 및 감각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거리에서 만나는 취향과 감각이라는 비물질적인 대상을 사진으로 채집한 후, 드로잉과 추상화 과정을 통해 하나의 회화적 기호로 담아냈다. 거리에서 발현되는 도시의 여러 감각들을 네모난 캔버스 프레임에 담아냄으로써, 대중적이면서도 개별적인 ‘누군가’의 취향과 감각에 접근하려는 시도였다.

《The Tourist》 전시 전경, 레스빠스71, 서울, 2020
<Barcelona Pavilion no.1>, 캔버스에 아크릴릭, 사진 콜라주, 160x160cm, 2020 <Barcelona Pavilion no.2>, 캔버스에 아크릴릭, 사진 콜라주, 160x160cm, 2020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가장 최근에 있었던 개인전 《The Tourist》(레스빠스71, 서울, 2020)를 꼽을 수 있겠다. 본 전시에서는 여행을 어떤 방식으로 저장하고 추억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행의 과정에서 습관적으로 찍게 되는 핸드폰 사진은 눈으로 대상을 즐기는 여행의 즐거움을 데이터 메모리 칩 속에 작은 파일로 대체하게 만든다. <The Tourist>(2020) 연작을 통해 핸드폰 속 작은 데이터로 존재하는 여러 여행의 기억을 회화적 세계로 불러오면서 경험, 기억, 감정, 촉감과 같은 것들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소비하고 기억하는지 생각해봤다.
나는 ‘몇 년 뒤에는 이런 것을 해야지, 이렇게 살아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하며 더 나아가기 위해 꾸준히 매일매일 노력할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작업을 만들고 싶다. 작업을 매개로 사람들과 대화하며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작가정보: www.heejoonlee.com

■ 정금형 JEONG Geumhyung

정금형은 무용가, 퍼포머, 안무가, 작가로서의 독특하고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왔다. 올해 작가는 신작 <장난감 프로토타입(가제)>을 제작할 계획이다. 8월 중 처음 공개될 이 작업은 2019년 쿤스트 할레 바젤 개인전에서 선보인 첫 번째 로보틱 조각 작품 <홈메이드 알씨 토이>에서 비롯된 로봇 우화 시리즈 중의 하나이다. 매 단계 진화하는 작가의 ‘장난감’, 즉 그의 로봇은 비전문가인 작가가 스스로 공부하며 습득한 지식을 기반으로 직접 제작하는 DIY 로봇이다. 작가의 ‘장난감’ 설계 계획은 끊임없는 문제에 봉착하지만, 또 의외로 그럴듯하게 해결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완성된 로봇들은 서투른 동작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며, 의도하지 않은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주로 사물과 몸의 관계에 대한 작업을 해왔다. 인형극에서 배우가 인형과 관계 맺는 방식, 배우가 자신의 몸을 움직이면서 인형을 조종하고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행위에 흥미를 느끼면서 작업이 시작되었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면서 몸의 움직임과 무용에 관심이 생겼고, 졸업 후 무용과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사물과 함께 움직이는 안무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작품의 제작과정은 적절한 사물들을 수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수집한 사물들을 이렇게 저렇게 조합하여 인형 캐릭터가 갖춰지면, 그 캐릭터와 함께 움직여보는 과정을 거친다. 작업은 주로 솔로 퍼포먼스 형식을 취해왔으며, 최근에는 퍼포먼스 외에 영상과 설치의 형태로도 선보이고 있다.

《7가지 방법》 설치 전경, 테이트 모던, 런던, 영국, 2009 《홈메이드 알씨 토이》 설치 전경, 쿤스트할레 바젤, 바젤, 스위스 2019
《개인소장품》 전시 전경, 아뜰리에 에르메스, 서울, 2016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지금까지 해온 작업들을 통틀어 보았을 때, 몇 갈래로 나누어진다. 그 갈래들의 문을 열어준 시작점으로써의 작업들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7가지 방법>(LIG 아트홀, 서울, 2009), <개인소장품>(아뜰리에 에르메스, 서울, 2016), <홈메이드 알씨 토이>(쿤스트 할레 바젤, 바젤, 스위스, 2019) 이렇게 세 개의 작업을 꼽을 수 있겠다. <7가지 방법>에서는 사물을 다루는 몸의 테크닉과 퍼포먼스의 형식을 갖추었고, <개인소장품>에서는 사물을 늘어놓는 나름의 방식을 취하게 되면서 퍼포먼스 외에 설치와 전시의 형태로 작품을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홈메이드 알씨 토이>에서는 기계 장치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 작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수행할 일거리가 생겼다.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기간에는 앞서 언급한 <홈메이드 알씨 토이>의 시리즈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현재 기계 부품들을 수집하여 이리저리 붙여보면서 움직이는 장치를 만들어보려고 끙끙거리고 있다. 이 시리즈 작업은 앞으로 꽤 오랜 시간 동안 반복하며 계속해서 발전시켜나가게 될 것 같다.

* 작가에게 제공 받은 사진과 인터뷰 글을 바탕으로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최병진, 국가무형문화재 남사당놀이 이수자

이름: 최병진(崔炳珍, Naldo Choi)

출생: 전북 장수

분야: 전통연희

인천과의 관계: 인천거주

작가정보: amhaeng@naver.com
               http://arirangs.com/news/view.php?no=2082

<작가의 대표이력>
창작집단 지예 대표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이수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희과 전문사
연수구립전통예술단 단원
모던 창작 연희 꿈꾸는산대 단원
(사)인천남사당놀이보존회 공연팀장
(사)남사당놀이 인천지회 교육팀장
개인전
2019 <남사당 박첨지: 전주유람기>, 국립무형유산원, 전주
2019 <출람지예>, 성균소극장, 서울
단체전
2021 <남사당 흥부전: 제비노정기>, 노원문화예술회관, 서울
2021 <장단더하기 리듬>, 서울, 경기 일대
2020 <K-무형유산페스티벌>, 국립무형유산원, 전주
2020 <안개가 걷희면>, 뗴아뜨르 다락, 인천
2020 <인천전통문화예술대축제: 생생지락>, 서운야외공연장, 인천
2020 <살판난다>, 국악전용소극장 잔치마당, 인천
2020 <덧뵈기 세상>, 국악전용소극장 잔치마당, 인천
2019 <넌버벌 퍼포먼스: 불로초>, 중구문화회관, 인천
2018 <남사당 박첨지: 인천유람기>, 인천자유공원 야외공연장, 인천
프로젝트
2020 <광대생각>, 대한민국예술인센터, 서울
2019 <땅재주>, 대한민국예술인센터, 서울

1.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 작품은 무엇이고, 그 이유는?

대표작이라고 하면 두 작품을 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남사당 박첨지: 전주유람기>라는 첫 개인 발표작이고 두 번째는 <남사당 흥부전: 제비노정기>라는 창작 작품이다. 첫 번째 작품은 남사당놀이를 수학하고 정확히 10년이 되던 해이자 생애 첫 개인 발표 공연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남사당놀이 전반에 걸친 내용을 심도 있게 학습하고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전통연희에 대한 깊고 풍부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작품이 전통공연이라고 하면 두 번째 공연은 창작 작품이다. 남사당놀이를 바탕으로 한 창작 연희극으로 전래동화 『흥부와 놀부』를 바탕으로 남사당놀이 6종목을 소개해 줄 수 있는 관객과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 상황으로 관객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은 할 수 없었고 극적인 요소와 대사가 많아 초등학생 관객들이 잘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을 했지만 영화를 한 편 보는 것처럼 작품에 몰입하여 관람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뿌듯했다. 남사당놀이 6종목을 하나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이 기획의도였는데 이런 생각이 이번 작품 <남사당 흥부전: 제비노정기>에 잘 표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남사당 박첨지: 전주유람기>, 국립무형유산원, 2019
<남사당 흥부전: 제비노정기>, 노원문화예술회관, 2021

2. 작업의 영감, 계기, 에피소드에 관하여

<남사당 흥부전: 제비노정기>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는 <교과서 예술여행>이라는 사업에 참여하게 되면서였다.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서양음악과 전통음악 중 한 장르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으로 교실에서 먼저 학습하고 공연장에서는 공연을 관람하는 사업으로, 남사당놀이 6종목을 어떻게 하면 한 작품에 보여 줄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딱 맞는 프로그램이었다. 이제까지 활동했던 역량을 모두 발휘하자라는 생각으로 영화감독, 연출가, 작가, 배우, 무용인, 소리꾼, 마샬아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을 하고 의견을 나누고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작품을 만들었다. 집에 도착하면 항상 12시가 넘었지만, 힘이 드는 줄 모르고 작업에 열정을 다하게 되었다. 초연 작품이다 보니 소품제작부터 의상까지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많았고, 예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남사당 흥부전: 제비노정기>는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이다.

3.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참 그 연희꾼이 있으면 놀이판 분위기가 바뀌고 관객들과 참 잘 놀았지.”라고 기억될 수 있는 예술가로 남고 싶다. 재담(才談)이라고 하면 관객과 주고받거나 연희자들과 대사를 주고받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마당놀이 형식의 남사당놀이는 특히 재담이 많이 발달해 있다. 재담은 공연장소와 관람객들에 따라 상황에 맞는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재치와 즉흥적인 연기가 필요하다. 남사당놀이의 기(氣), 즉 예능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져야 하지만 재담만큼은 개인의 역량 차이가 큰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재담이 기가 막힌 연희자!’로 기억되고 싶다.

4. 앞으로의 작품 방향과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앞으로의 활동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사당놀이를 바탕으로 한 2차, 3차 창작작품을 기획·제작하여 관객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남사당놀이가 6종목이기 때문에 매년 한 종목을 선정해서 창작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올해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전통인형극의 맥을 이어온 남사당놀이 덜미(인형극)를 가지고 부조리한 사회와 인간상을 비판하고 풍자를 통해서 유쾌하게 관객들의 가슴을 뻥 뚫어줄 수 있는 덜미(인형극) 작품을 제작할 예정이다.

5. 예술적 영감을 주는 인천의 장소 또는 공간은?

인천의 섬과 바다

인천의 섬과 바다는 작품을 바라보는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한다. 인천의 섬과 바다를 보면 파시를 따라 놀이판을 펼쳤을 유랑집단 남사당패 선대 예인들의 발자취가 생각이 난다. 그들은 ‘어떤 공연을 선보이고 어떻게 소통했을까?’, ‘이곳 섬에 오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배를 타고 건너왔을까?’, ‘만족할 만한 무대를 선보이고 다시 육지로 나왔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섬에 들어가는 배 위에서 바다를 보며 골똘히 하곤 한다.

글/사진: 최병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극단 십년후, 다시 사람을 경작하는 최원영 교수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사랑하며 살겠습니다극단 십년후, 다시 사람을 경작하는 최원영 교수

류수연(인하대학교 교수)

최원영 / 행정학 박사

(현)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겸임교수
(현) 기호일보 칼럼 「최원영의 행복이야기」 집필
(현) 인문학 모임 다카스(DACASDiscover Accept Concern Achieve Spread) 클럽 이끔
(전) 인천문화재단 초대이사
(전) 극단 십년후 창단 및 대표

최: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최원영입니다. 모두 안녕하신가요? 어떤 질문부터 시작할까요?

류: 선생님께 대한 질문의 시작은 아무래도 극단 십년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비록 극단을 떠나셨지만, 지역극단의 의미를 만들어낸 리더십이라는 명성은 여전하시니까요. 창단에 관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최: 내가 원래는 초등학교 선생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미국에 유학 가기 전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이 친구와는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인데, 서로 아주 친했어요. 이 친구가 지금은 밀양연극촌 3대 촌장으로 있어요. 원래는 지방에 있는 대학의 교수였는데, 지금 우리 나이로 66세니까 대학을 퇴직할 때가 됐잖아요. 어쨌든 교수로 있으면서 촌장이 된 거죠. 그 친구 얘기예요. 당시 내가 미국으로 떠나겠다, 하니까 이 친구가 본인도 유학을 떠나겠다, 이런 거죠.

류: 그럼, 같이 유학을 결심하신 건가요?

최: 그렇진 않아요. 저는 미국에 가서 정치학을 하겠다고 했고, 그 친구는 중앙대 연극과 연출 전공을 했는데 일본에 갔다가 인도로 가서 학위를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떠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때는 어렸으니까 십 년 있으면 대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포 한 잔 나누면서 헤어지기 전에 십 년 후에 자기 자리에서 최고가 되어 만나자. 그래서 우리가 공동으로 뭔가 할 수 있는 공간을 하나 만들자. 평생 무료로. 돈은 다른 일에서 벌고.

류: 멋진 포부셨군요.

최: 그래서 1984년에 떠나서 1994년에 돌아와서 만났어요. 그때 저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이고,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실험이 필요했어요. 논문이 아니라 동아리를 만들어서 실제로 그곳에 진실한 사랑이 들어갔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이걸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제가 귀국한 지 몇 개월 후에 친구도 나왔는데 그 친구에게도 연출을 할 수 있는 극단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십 년 전의 약속을 이름으로 해서 ‘십년후’가 창단이 된 거죠. 처음에 3년을 같이 하다가 그 친구는 경산에 있는 대경대학교에서 마침 교수를 뽑는다고 해서 거기로 갔고, 그게 장진호 교수예요. 장 교수가 가면서 소개해준 사람이 지금 십년후의 송용일 대표예요. 장 교수가 떠난 후에 이분이 그 이후 20여 년 동안 연출을 했죠. 이분이 당시 경기대학교 연극과에 겸임교수로 있었는데 무대제작이 전공이세요. 그렇게 같이 꾸려왔죠.
우리가 사랑으로 극단을 운영하려고 했던 노력이 있어요. 하나는 우리가 처음에 고등학교 막 마친 일곱 명을 데리고 시작했어요. 그게 1994년이에요. 1~2년 지나서 어느 날 그중에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에 다니던 단원이 연습하는데 다리가 퉁퉁 부어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인가 알아봤더니 그 친구가 학비가 모자라서 밤새 종일 서서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극단에서 연습한 거죠. 그런데 당시 우리 장 교수가 몸 연극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훈련을 시키니까 지치잖아요. 또 일까지 그렇게 하니까 더 힘들었던 거죠.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얼마가 돈이 더 필요하니? 그랬더니 80만 원이래요.

류: 당시 80만 원이면 굉장히 큰돈이죠. 제가 95학번인데 당시 학비가 160~180만 원 정도였던 것 같아요. 돈 가치는 훨씬 컸고요.

최: 네, 그래서 80만 원을 구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선배님을 찾아갔고 80만 원을 거의 강탈을 했죠. 하하. 그런데 그걸 극단에서 줄 수가 없잖아요. 다들 어려우니까. 그래서 밖으로 불렀어요. 그리고 그 돈을 주면서 당장 아르바이트 그만두라고 했죠.

판타지 뮤지컬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2002.12.4.~12.8. ⓒ극단 십년후

또 한 가지는 그게 뮤지컬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을 할 때였어요. 그게 대작이었죠. 그때 잘 돼서 순회공연도 하고 그랬는데 공연 횟수로 보면 한 300회 정도 했어요. 큰 성공을 한 거예요. KBS에 가서도 하고. 그런데 뮤지컬이 돈이 많이 들어요.
기억에 남는 날이 있는데, 내 기억에 그날이 12월 8일이었던 것 같아요. 인하대에서 수업을 마치고 공연이 있는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을 갔어요. 대공연장은 1500석이었죠. 그날은 마지막 공연이었는데 고약하게도 눈비가 섞여 내렸어요. 그런데 2층 매표소에서부터 사람들이 두 줄로 쭉 서서 주차장이 있는 데까지 늘어선 거예요. 직원이셨던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유명 가수가 오는 것 아니고서는 이렇게 줄이 늘어선 적은 없었다는 거예요. 그때 작곡을 해주신 분이 최종혁 선생님이셨어요. 그날, 이 어른과 제가 손을 잡고 울었어요. 너무 기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해서요.

류: 정말 기쁘셨을 것 같아요. 지금도 흔치 않은 일일 텐데요.

최: 그런데도 그때 저는 6~7천만 원 정도 빚을 졌어요. 그날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분장실에 갔는데 분위기가 이상한 거예요. 원래 우리 애들이 밝아요. 근데 그날은 말이 없이 무척 무거웠어요. 당시 창단 때부터 같이 있었던 이경미라는 단원이 주인공인 삼신할머니를 했었는데, 이 친구도 얼굴이 어두운 거예요. 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도 말을 안 해요. 그래서 연출 선생님과 기획실 직원들을 따로 불러서 물어보았어요. 그런데 서울에서 온 기획사가 그 전날인가 이 작품을 찍어 갔대요. 그러면서 이건 전국적으로 공연해도 성공할 것 같다면서 같이 하자고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서 2억을 주겠다고 했어요. 대신에 순회공연을 하면서 2억이 될 때까지는 자기들이 다 갖고, 그 이후부터는 반반씩 나눈다는 조건이었어요. 이게 첫 번째 조건이고. 이 제안은 저희에게는 무척 좋은 조건이잖아요?

류: 그렇죠. 괜찮은 조건인 거죠.

최: 우리는 그런 기획력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두 번째 조건이 뭐냐 하면 그 삼신할머니 역을 탤런트를 쓰자는 거예요.

류: 아…. 그게 문제였네요.

최: 극단의 살림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게 나쁜 게 아니죠. 살림이 뭐가 있어야 애들도 챙겨줄 수 있으니까. 기회인 것 같다는 의견도 많이 나왔어요. 연출자도 마찬가지이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순식간에 빚은 청산이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선생이라 생각이 좀 달랐어요.

류: 그러셨을 거 같아요.

최: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내 아이를 키워서 저기 더 큰 세상에 우뚝 세우고 싶은데, 이런 기회에 내 아이는 객석에서 보고 있고 다른 탤런트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면 내 아이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나는 우리가 처음 이 극단을 만들 때 사랑으로 키우고자 했는데, 이건 거기서 벗어나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내가 말했어요. 기획사에 전화해라. 20억을 줘도 이 아이를 삼신할머니로 쓰지 않으면 못한다. 그렇게 얘기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안 되었어요.

<사슴아 사슴아: 목종비곡(穆宗悲曲)>,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2001.12.1.~2. ⓒ극단 십년후

그런데요. 그게 그렇게 끝나지 않더라고요.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서 2006년 <사슴아 사슴아: 목종비곡(穆宗悲曲)>가 전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어요. 바로 그 아이가 연기상도 받았고요. 물론 연출상도 받았고. 그런데 그걸로 끝나지 않고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도 전국에서 2~3천만 원씩 공연비를 받으며 6~7년을 더 공연했어요. 그래서 사람도 살리고 작품도 살렸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극단의 저변이 넓어졌어요. 단원들도 극단에 대한 믿음이 생겼겠죠. 그리고 리더 그룹이 우리도 눈앞의 금덩어리보다 제일 소중한 자산인 사람을 안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치를 공유하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해요.

류: 그렇다면 역시 선생님께 극단 십년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겠군요?

최: 아무래도 그렇죠.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 성공을 하고 나니까 좀 욕심이 나더라고요. 돈은 많이 들어도 역사를 뮤지컬로 만들어보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제가 생각했던 작품은 먼저 ‘Universal’, 작품에 좀 철학이 담겼으면 좋겠다. 또 하나는 ‘Easy’, 작품이 좀 쉬웠으면 좋겠다. 다음으로는 ‘Exciting’,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걸 강조 했었어요. 이걸 가지고 우리 역사를 풀어보자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 극본은 대체로 고동희 선생이 썼어요.
이렇게 처음 만들어진 공연이 단군신화를 다룬 <박달나무정원>이였어요. 다음으로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 즉 대중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 울타리 밖으로 사랑을 전파하려고 한 인물이 누굴까 하고 찾으니까 바로 광개토대왕이 있었어요. 그래서 광개토대왕의 어린 시절을 다룬 <꽃님>을 뮤지컬로 만들었어요. 이후 이런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사랑, 집단의 사랑, 그리고 그것이 충만하게 넘쳤을 때 외부로의 확장, 이런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를 찾다 보니까 소서노라는 어머니가 있었어요. 그래서 소서노를 주인공으로 한 <도칸, 소서노>가 나왔죠. 이렇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한 번 정리해봤어요. 이렇게 역사의 위대한 순간마다, 혹은 인생의 굴곡마다 그 시대의 영웅들 속에 감춰져 있었던 모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 나라를 지탱한 힘이었구나.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어요.

극단 십년후 슬로건 ⓒ극단 십년후

우리 극단의 슬로건이 창단 때부터 ‘사랑하며 살겠습니다’예요. 원래의 극단 로고는 서로 기대어 있는 두 잎사귀가 있고, 그것을 태양이 비추고 있어요. 그런데 이 태양이 좀 구부러져 있어요. 무슨 의미냐면, 내가 크려면 누군가가 받쳐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나만 돋보이고 밑에 있는 잎은 영원히 사다리가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 구부러진 태양이 제일 밑에서 받쳐 주는 잎을 빛을 줘서 키워요. 이것이 끊임없이 순환되면서 크는 거죠.
그래서 저는 극단 단원들이 더 큰 곳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또 새로운 사람들이 오고. 처음에는 우리 극단의 연출가도 이걸 이해 못 했어요. 안무 선생님, 화술 선생님까지 붙여서 열심히 가르치고, 음향이나 조명도 가르치고 했는데 연기가 될 만하면 나가고 하니까. 이분은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얼마나 안타까웠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해하고 계셔요.
저는 그랬어요. 키워서 내보내야 한다. 지금은 손해 볼지 몰라도 나중엔 그렇지 않다. A라는 사람이 서울에 가서 스타가 되면 결국 자기를 키워준 곳을 돌아보게 된다는 거죠. 이 사람이 여기 올 때는 그냥 오는 게 아니죠. 관객들과 스탭들을 달고 오지 않겠어요. 전문가들을 달고 오고. 그러니까 끊임없이 여기서 내보낼 수 있어야 더 큰 눈덩이가 만들어지는 거죠. 각각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욕망이 구현될 수 있도록 희망으로 바꾸어줘야 한다는 것, 이것이 극단의 가치인 ‘사랑으로 살겠습니다’의 요체인 셈이에요.

류: 정말 좋은 뜻을 가지고, 그것을 계속 실천해 오신 것 같아서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또 궁금한 게 미국에서 원래 정치학을 공부하셨다고 했는데 귀국 후에는 의외로 연극 활동을 하셨으니까 내부에서 부딪치시거나 힘드셨던 적은 없었는지요?

최: 많았지요.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 승승장구를 하니까 한번은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거기가 공간이 좀 작아요. 여름방학 한 달 동안 인원수를 줄여서 2천만 원 정도 받고 공연을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7명 나오는 작품으로 축소해서 공연을 했어요. 이때 맡았던 중견 배우가 자기 나름으로는 여기서 공연을 하면 아르바이트비 정도는 아이들에게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셨던 거 같아요. 그때가 우리가 빚을 좀 청산을 했을 때예요. 다 끝나고 나서 기획실장이 정산보고서를 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그 공연을 대표했던 중견 배우가 속이 상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줄 돈이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적었던 거예요. 당연히 속상했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분을 만나 말했어요.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을 처음 준비했을 때, 녹음해주신 원로배우나 수많은 스텝이 거의 무료로 해주셨어요. 작곡해주신 최종혁 선생님 같은 분은 보통 뮤지컬 작곡하면 받는 금액의 5분의 1 정도만 받고 기꺼이 해주셨어요. 이렇게 헌신하신 분들이 계셨기에 이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중견 배우는 용산에서 한 달 동안 번 수입만을 나누는 것으로 여겼으니까, 적다고 생각한 거죠.

류: 두 분 다 사실은 좋은 뜻이셨네요. 그 배우님께서는 고생한 단원들을 더 챙겨주고 싶으셨던 거고, 선생님께서는 이전에 고생하셨던 분들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셨던 거군요.

최: 맞아요. 그런 거죠. 우리한테 작품을 하고 나서 돈을 나누는 전통이 있어요. 뭐냐면 돈을 봉투에 넣고 이름을 써서 광주리에 넣어요. 그리고 제가 돈을 다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제일 수고한 단원이나 나이가 가장 많은 단원이 그중 하나를 뽑아서 그 사람을 주면서 포옹을 하고, 뽑힌 사람이 다음 봉투를 뽑아서 그 사람에게 주고 포옹하고, 이런 식으로 해요.
사실 저는 20년 가까이 극단을 이끌면서 저는 월급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게 시작할 때 약속이었으니까. 저는 밖에서 벌어 먹고살고, 때로 모자라면 채워 넣는 역할을 하겠다고 결심했으니까 그렇게 했던 거죠. 아까 말했던 대통령상을 받았을 때 상금이 2천만 원이 나왔어요. 그래서 배우들에게 이 돈을 어떻게 썼으면 좋겠냐고 의논해보라고 하고 나는 자리를 피해줬어요. 그랬더니 배우들이 극단이 어려우니까 극단에 놔둡시다. 이러는 거예요. 얼마나 고마워요? 모두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달랐어요. 저는 살림살이하는 고 실장을 불러서 배우들, 스탭들에게 전처럼 광주리 행사를 했어요. 그랬더니 도립극단이나 다른 곳에서 돈을 버는 중견 배우들 몇 분은 나눠드린 수고비를 다시 극단에서 쓰라며 돌려주셨어요. 참 고마운 일이죠. 그분들도 돈이 필요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이란 생각이 들어요.

류: 정말 하나의 공동체였고, 그렇게 실천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극단 십년후를 벗어난 선생님의 삶에 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십년후 대표를 그만두시고 밖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요. 근황을 이야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최: 이렇게 사는 것이 원래 제 꿈이기도 했어요. 처음엔 극단 안에서 단원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열었어요. 사실 당시 단원들은 인문학이 뭔지 모르고 저도 공부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영어회화를 함께 공부하자고 했어요. 훗날 단원들이 외국에서 공연해야 할 때도 있을 테니까요. 그 공부를 하면서 중간중간에 인문학을 끼워 넣었던 겁니다.
처음엔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그걸로는 뭔가가 부족한 것 같아서 동양철학을 함께 공부했어요. 그리고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심리학을 공부하게 됐지요. 사실 저는 미국에서는 10년 동안 학부 과정만 했어요. 저는 10년이면 박사까지 다 끝날 줄 알고 한국에서 대학 다닌 것을 기재하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한 것만으로 대학을 들어갔어요.
그런데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대학을 다니니까 진도가 안 나간 거예요. 나중에 한국에 들어와서 인하대에서 석박사 10년을 또 한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아이들에게 가르칠 인문학 공부를 한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문학을 접하다 보니까 그동안 가졌던 제 생각 또한 달라졌어요. 예컨대 누군가를 이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들이 저절로 아름답게 크도록 여건을 형성해주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그린 설계도대로 집을 지어서 사람들을 그곳에 살게 하면 그 사람들은 기호가 달라서 불행할 수도 있잖아요. 미국을 가기 전에는 그런 설계도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인문학을 접한 후에는 그게 얼마나 교만한 일인지 그때 알게 된 거죠. 만약 제가 빈 텃밭을 마련해서 제 계획대로 심어서 계획대로 결실을 본다면 그 성취감을 저만이 느끼겠지만, 만약 제가 이 텃밭만을 마련해주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그 텃밭을 가꾸게 해주는 리더라면 훗날 텃밭에 꾸려질 아름다운 동산은 제 상상을 초월한 모습이지 않겠어요? 얼마나 감동이겠어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면 구성원이나 저 모두 감동일 겁니다. 모두가 텃밭의 주인이 되는 셈이지요.

류: 요즘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이미 20년 전에 시작하셨군요. 당시엔 오히려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이 더 지배적이던 시절인데요. 확실히 앞서 나가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너무 과찬이시고요. 하하. 제가 미국에 갈 때 들고 간 책이 『정경숙(政經塾)』이라는 일본 책이었어요. 파나소닉의 창업주인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쓴 책이에요. 결국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의미로 정치경제 아카데미를 설립한 거죠. 저도 꿈이 이런 아카데미를 하고 싶었어요. 극단 십년후가 그 첫 번째 실험이었던 거죠. 40대 후반엔 성경과 불경을 공부했어요. 거기서 결국 용어는 달라도 가르침의 끝은 똑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바로 ‘사랑’이었던 거예요. 그것도 ‘진실한’ 사랑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가 극단의 울타리를 넘어서 그 사랑을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카스(DACAS)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여기서 ‘D(discover)’는 ‘발견하라’라는 의미인데, 뭘 발견하느냐 하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행복할 수 있는 이치를 발견하자는 거죠. 그런데 그 이치를 찾아서 배워도 아직은 내 것이 아니잖아요. 두 번째 ‘A(accept)’는 그걸 내 걸로 만들라는 거죠. 세 번째 ‘C(concern)’는 관심을 두는 거죠. 이건 사랑으로 교류하고 나누라는 의미에요. 그렇게 나누다 보면 ‘A(achieve)’로 함께 성취하겠지요. 다섯 번째는 이렇게 성취한 것을 우리끼리 갖지 말고 울타리 밖으로 나누어라. 즉 ‘S(spread)’, 확산시키라는 거죠.
이 과정을 6개월에서 1년을 인천에 있는 리더 그룹들과 함께했어요. 이런 취지로 11년 전에 30~40명 정도로 시작을 했지요. 이것 역시도 무료예요. 처음에는 무료라는 것 때문에 걱정을 샀어요. 주변에서는 제가 정치를 하려고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리고, 또 가까운 지인들은 무료이면 사람들이 더 안 온다고 걱정도 해주셨어요. 더구나 이걸 제가 혼자 강의를 했어요. 혼자서 한 이유는 내가 잘 알아서가 아니에요. 교육의 일관성 때문이었어요. 여러 강연자가 오면 각각의 좋은 강의여도 모든 강의 일정이 끝나면 찐하게 남지를 않아요. 그래서 제가 혼자서 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1500명 정도가 이 공부를 했어요.

류: 제가 인터뷰 준비를 위해 자료조사를 하다 보니까 정말 많은 분들이 선생님의 강연에 대해 블로그 같은 곳에 후기를 올리셨더라고요. 정말 재미있고 유익했다고.

최: 제가 인터넷을 안 해서 못 봤네요. 감사한 분들이네요.

류: 그래서 선생님의 강의비결을 여쭙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대중강연의 비결은 역시 다카스로부터 온 것일까요?

최: 아무래도 그렇겠죠. 다카스에서의 경험이 결국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만들었을 거예요. 지금 기호일보에 매주 쓰는 칼럼도 그렇고요. 매주 금요일마다 칼럼을 쓰는데 벌써 5년이 되었죠. 매주 칼럼을 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근 30년을 새벽에 연구실에 가서 독서를 해요. 미국에서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공부했기 때문에 잠을 3시간밖에 못 잤어요. 11시 반에 집에 들어와서 12시부터 3시까지 공부하고, 잠시 잤다가 다시 6시면 일을 나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몸에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도 3시간 이상은 못 자는 것 같아요. 몸이 그 리듬에 맞춰진 거지요.
책을 사면 저는 어떻게 읽느냐면, 컴퓨터에 워딩을 하면서 읽어요. 그렇게 하면 300여 페이지 책이 약 80페이지 정도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다른 새 책을 읽다가 지치면 워딩해 놓은 요약본을 다시 봅니다. 그때 어느 부분은 ‘사랑’에 대한 자료 파일에 넣고, 또 다른 부분은 ‘친절’이라는 파일에 넣고, 이런 식으로 작은 파일들이 주제별로 수십 개가 있답니다. 그 파일들 안에는 수백, 수천 권의 책 내용이 주제별로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칼럼이나 강의에 필요한 자료들이 30년 동안 쌓여 있는 셈이에요. 그래서 남들보다는 수월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거죠. 인문학 콘서트는 기호일보 사장님으로부터 제안을 받고 5~6년 전부터 1년에 한 번씩 열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경비는 기호일보사에서 책임지고 저는 강의만 했습니다. 저로서는 참 고마운 신문사에요. 제가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언론사가 시민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건네는 일도 중요하다면서 저에게 용기를 주셨거든요.

류: 코로나 이후로 인문학 콘서트는 어떻게 진행하고 계신가요?

최: 코로나 때문에 강연이 진행될 수 없으니까 유튜브로 녹화해서 진행하고 있어요. <최원영의 책갈피>라는 제목으로 올리고 있어요. 많은 분이 시청하고 계시진 않지만 몇 분이라도 이 방송을 통해 위로를 받으시고 희망의 문을 여는 열쇠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최원영의 책갈피] 1화 <정답 없는 길 그래도 그 길을 가보고 싶다>, 2021. 5. 26.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YwIZ6UEtefs)

류: 인터뷰 후에 저도 꼭 구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정리하는 느낌의 질문을 드리는데요. 선생님께 십년후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요? 또 극단 바깥에서 지금의 십년후에 어떤 말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최: 지금 참 힘들 거예요. 힘들 수밖에 없어요. 환경이 아무래도 열악하니까. 그래도 이 힘든 과정에서 우리 단원들이 조금 더 버텨냈으면 좋겠어요. 예상한 대로 되지 않을 때 그다음은 두 가지 길밖에 없잖아요. 포기하든지 버티든지. 포기하면 다른 데 가서 또다시 시작해야 해요. 그럴 수 없을 만큼 연극을 하고 싶다면 답은 버티는 것밖에 없습니다. 결국 버티는 사람이 이겨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도 잘 버텨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고루한 생각일 수 있지만, 결국 어느 정도는 배고파야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이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죠. 지금까지 십년후 식구들 모두 너무나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요.
십년후는 저에게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에요. 사실 처음 시작할 때는 ‘내가 너희를 키울 거야.’ 이렇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단원들로부터 위로받고 격려받고 있더라고요. 지금 다카스라는 아카데미를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준 곳 역시 십년후에서의 경험이에요. 그러니 어머니의 자궁 같은 존재이지요.

류: 요즘 코로나 때문에 다들 힘들지만, 특히 공연계가 타격이 가장 큰 걸로 알고 있어요. 극단 십년후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요?

최: 그래도 온라인으로 공연을 몇 차례 하면서 잘 해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도 1년에 2~3편씩은 꼬박꼬박하고 있어요. 지금은 대한민국연극제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거고요. 2년 전에는 김구에 관한 뮤지컬을 만들어서 공연했고요.
십년후의 힘은 같이 밥 먹는 공동체 생활이 아닐까 싶어요. 밥숟가락에서 정이 생기잖아요. 우리는 모두 가족이 된 것 같아요. 지금 중구에 극단 사무실이 있는데, 그 건물 지하실이 수년째 비어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송용일 대표가 원래 무대 제작자예요. ‘서울무대’라고 아주 큰 무대 제작사를 운영했어요. 예컨대 <투란도트> 무대 지붕을 제작했고 유명한 영화 세트도 만들었고요. 이렇게 무대 제작에는 일가견이 있는 분이죠. 이분의 지론은 장기적으로 공연할 수 있는 소극장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극단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주인어른하고 이야기가 잘 돼서 그 지하실에 소극장을 지금 꾸미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좋은 작품을 오래 공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 저는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류: 선생님께서는 공동체 활동도 하셨고, 지금은 독자적으로 자신의 것을 꾸리고 계시잖아요. 어느 쪽이 선생님께 더 맞는 것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최: 저는 원래의 꿈이 지금 하는 이것이었죠.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것. 이렇게 전하는 것을 위한 저 나름의 실험이 극단 십년후였기 때문에 이것이 다 연장선에 있다고 봐요. 인문학 콘서트가 올해 가능하다면 하려고 3월부터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 다카스 회원들과 함께 그 안에서 <봉숭아학당> 같은 연극도 준비를 해왔어요. 이렇게 극단과 지금 제가 하는 일이 다 연관이 되는 거죠. 그래서 어느 것이 더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다 연관이 되어 하나로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이 돼요. 만약 극단 십년후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제가 강의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했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까지 이 모든 경험이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류: 삶에서 수많은 선택이 항상 맞아떨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돌이켜 보면 그것들이 연결되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그런 선생님의 실행이 축적되고 그것이 강연에 녹아든 것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료의 축적도 있지만, 그 실행에서 오는 힘이 지금의 선생님을 만든 진짜 힘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최: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변곡점이 있잖아요. 변곡점마다 선택의 길이 두 개가 나오죠. 이 선택의 길에서 딜레마에 빠지는 이유가, 이걸 얻으면 저걸 잃고 저걸 얻으면 이걸 잃기 때문이에요. 이때 무엇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하느냐. 그건 바로 ‘가치’인 거죠. 사랑이라는 가치를 기준에 두고 바라보면 포기해야 하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그 기준만 가지고 있으면 사실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게 하나하나 쌓일 때마다 주위에서는 그 사람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게 결국 사회적 신뢰라는 것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겠지요.
우리 극단에서 작곡해주신 최종혁 어르신과의 관계가 그래요. 처음엔 무릎 꿇고 겨우 도움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이렇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더라고요. “나 이제 이 집단에서 내쫓지 말어.” 이렇게 식구가 된 거죠. 우리나라에서 유명하신 분장사분은 얼마 드리지도 못하는데 그 비용을 또다시 극단에 후원금으로 보내주시곤 했어요. 이렇게 우군이 되어준 스탭이 계셔서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거죠.
그래서 변곡점마다 손해를 보더라도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지속해서 행동해나갈 때, 사회적 신뢰가 생기고, 이 신뢰가 결국 사회 전체의 진화를 이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손해 볼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요.

류: 지금 말씀에 백 프로 공감합니다. 손해를 너무 이해타산적으로만 생각하면, 자신도 성장하지 못하고 남도 깎아 먹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함께 하기 위해 때로 손해를 감수할 때, 오히려 같이 성장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최: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게 문제죠. 사실 그게 힘이 있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더 심해요. 그래서 이 나라가 이렇게 갈등구조에서 벗어나기 힘든 거죠.

류: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과 같이 크려고 해야 같이 성장하는데, 옆을 밟으면서 크려고 하면 결국 나중에는 둘 다 무너진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최: 그렇죠. 결국 자신도 덫에 걸린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류: 선생님 말씀에 정말 깊이 공감합니다. 오늘 인터뷰에서 ‘사랑하며 살겠습니다’라는 가치를 지켜온 선생님의 실행과 삶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 ‘인천’이라는 도시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한 지역의 가능성을 성장시키는 힘 역시 사람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인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최: 제가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라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조금 꺼려요. 강의할 때나 말을 꼭 해야 할 때가 아니면 입을 다물고 살아요. 그런데도 이렇게 저를 인터뷰해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분이 사랑을 나누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누리시기를 진실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친 일상 벗어나 문화 예술 활동가 역할 ‘톡톡’: 조연희 씨 인터뷰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지친 일상 벗어나 문화 예술 활동가 역할 ‘톡톡’조연희 씨 인터뷰

박현주(경인일보 사회팀 기자)

조연희 ‘생활문화센터 운영 활성화 프로그램 지원사업 <공감이 공감했다>’ 참여 작가

■ 육아로 지친 일상 속, 문화 활동 통해 자신감 되찾아조연희 씨(35)는 여가에 그쳤던 문화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지난 2018년, 부평구문화재단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 기자단에 지원했다. 그는 지역 문화 예술 활동을 주관하는 부평구문화재단 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관람한 공연·전시 등 문화 활동을 시민에게 온라인으로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이전에는 한 공연을 단순히 관람하고 평가하는 관객 입장이었다면, 기자단 활동을 한 이후엔 작품 기획과 제작, 연출 등 작품 전반에 걸쳐 관심을 두게 되더라고요. ‘이 작품은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자 했을까?’, ‘배우와 관객은 작품을 통해 얼마나 소통했을까?’ 등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육아와 씨름하던 조 씨는 지역 문화 예술 활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삶의 활력을 찾았다고 한다. 은행원이었던 조 씨는 결혼하고 두 살 터울의 자녀를 키우느라 일을 관둬야 했다. 육아로 장시간 일을 하지 않다 보니 경력이 단절된 여성을 뜻하는 ‘경단녀’가 남 얘기가 아니었다. 조 씨는 ‘사회에 나가 내가 평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고 한다.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인천 곳곳에서 하는 길거리 공연과 한국무용, 사진전, 뮤지컬을 찾아다니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더라고요. 기자단 활동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되찾았어요.”

조 씨는 부평구문화재단 SNS 기자단 외에도 인천시·남동구 SNS 기자단과 인천환경공단 인천환경미디어서포터즈 활동을 하고 있다. 지역사회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에 나섰던 그는 지난해 부평구 문화도시 지정을 추진하는 민·관 기구에서 시민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달부터는 부평구문화재단이 생활문화 활성화를 위해 마련한 사업 <공감이 공감했다>에 참여하고 있다.

■ 지역 이야기를 담아낸 연극부터 코로나19 시대 비대면 공연까지, 눈에 띄는 작품들 ‘속속’인천에서 나고 자란 조 씨는 문화 활동을 통해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지역의 이야기를 알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지난 2018년 부평아트센터에서 열렸던 <터무늬 있는 연극×인천_부평 편>을 부평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작품으로 손꼽았다. 연극은 비옥한 토지를 가져 물자와 사람이 많았던 부평이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인을 징용해 무기 제조 공장 ‘조병창’으로, 해방 직후엔 미군의 군수 보급 기지인 군수지원사령부로 재편된 과정을 그려냈다.

“땅에도 고유 무늬가 있다는 의미의 ‘터무늬 있는 연극’은 평소처럼 공연장에 앉아서 보는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관객이 배우를 따라 부평 곳곳을 이동하면서 관람하는 색다른 형식으로 진행되니 각 공간이 지닌 상징성과 역사적 의미가 더욱 크게 느껴졌어요.”

조 씨는 이 연극을 통해 일제강점기 징용 노동자 숙소로 쓰인 미쓰비시(삼릉·三菱) 줄사택과 영단주택, 미군이 주둔하면서 클럽의 음악이 발달한 신촌 일대를 누볐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미쓰비시 줄사택이었어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줄사택이 훼손된 것을 보고 ‘왜 이곳을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크더라고요. 각 공간에 서려 있는 역사적 배경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뜻깊은 기회였습니다.”

조 씨는 지난해 9월 부평아트센터 개관 10주년을 맞아 진행된 연극 <극장을 팝니다>도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이 연극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극장이 매물로 나왔다는 가정 아래 관객이 극장 예비 매입자로 방문한다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연극 한 회당 5명만 입장할 수 있도록 한 <극장을 팝니다>는 개인 유선 이어폰을 꽂은 관객이 진행자 이야기를 듣고 극장 구석구석을 살피는 것으로 전개된다. 관객 1명이 지정된 동선으로만 다니도록 기획된 코로나19 시대 맞춤형 비대면 공연이다.

“불 꺼진 대강당에 나 홀로 입장해서 둘러볼 기회가 언제 오겠어요. 무대 뒤편 숨겨진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연장이 문을 닫았잖아요. 이런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연극을 구상했다는 점에서 기발하고, 색다른 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 지난달부터 마을 환경 개선 사업 참여 “지역 사회를 위한 문화예술 활동 참여 지속할 것”조 씨는 지난 6월부터 부평 주민과 지역 예술가가 협력해 마을 문화 예술 환경을 개선하는 부평구문화재단 사업 <공감이 공감했다>에 작가로 참여하고 있다. 오는 10월까지 진행되는 이 사업에는 회화와 팝아트·사진·공예·도자 등 다양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부평 지역 마을 4곳이 지닌 고유의 특성을 되살리기 위해 투입된다. 예술가는 주민과 함께 마을을 ‘어떤 방향으로 조성할지’ 논의하고, 벽화 제작이나 공예품 전시 등 각 마을에 어울리는 문화 예술 활동을 지원한다. 조 씨는 새롭게 단장하는 마을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글로 남기는 기록 작업을 맡는다. 그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데다, 수년간 시민 기자 활동을 통해 글을 썼던 이력이 있어서 적임자로 꼽혔다.

2021 생활문화센터 운영 활성화 프로그램 지원사업 <공감이 공감했다> 포스터 ⓒ부평구문화재단

“이번 사업은 주민과 예술가가 수차례에 걸쳐 기획 회의를 한 뒤 진행됩니다.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다들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저는 4개월간 마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과정을 사진과 글로 생생하게 담겠습니다.”

조 씨는 앞으로도 지역 사회에서 하는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해 도움이 될 방안을 찾겠다고 했다.

“문화생활이 단순히 부차적인 활동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주민 간 서로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로 활용됐으면 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지역 사회 문화예술 활동에 관심 가지고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진행/글 박현주(朴賢珠, Park Hyeonju)

경인일보 사회팀 기자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소개: 박경진, 박관택, 박성준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예술가 소개
인천아트플랫폼은 국내외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을 공모로 선발하여, 창작 공간을 지원하고 입주 예술가의 연구와 창작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한 비평 및 연구 프로그램, 창·제작 프로젝트 발표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천문화통신 3.0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2021년 인천아트플랫폼 12기 입주 예술가를 소개합니다.

■ 박경진 PARK Kyungjin

박경진은 그리기라는 행위가 연결된, 생업과 작업 사이에 놓여 있는 작가의 실존(생존)에 대한 시선으로 시작하여 생업의 현장인 세트장의 풍경을 형상과 배경, 노동과 유희, 일과 작품 사이로 접근하여 회화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평면회화에서 확장되어 입체적인 비정형의 공간을 만들고, 각종 물질과 오브제를 이용하여 회화성이 짙은 공간회화실험을 하고 있다. 이 실험을 통해 세트장의 현장 모습을 전유하며, 회화에 대한 연구와 함께 “감각의 상상력”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생업으로서의 그리기라는 행위와 작업 사이에 놓여있는 작가의 실존(생존)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작업 초기에는 작업실과 뮤직비디오 세트장이라는 두 공간에서 변화하는 나의 역할에 주목했다. 분명히 다른 두 공간 사이에서, 그 다름에 맞추어 변화하며 갈등하는 나에 대한 여러 질문들을 던졌다.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개인의 질문은 세트장이 띠는 성질의 발견으로 확장되었고, 두 공간에서의 작업을 구분 짓기보다는 발견한 성질들을 회화 작업에 반영하여 충돌과 접목을 통해 교집합을 찾아왔다.
생존을 갈망하는 나에게 세트장은 생업과 작업 그리고 그림 그리기라는 행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게 만드는 곳이다. 세트장이 진짜처럼 보이기 위한 충실한 재현이라면, 회화 작업에서는 대상의 재현적 묘사를 지양하고, 회화의 조형 실험 및 확장성에 더 집중하여 이미지에 대한 감각과 경험에서 비롯한 정서들을 캔버스 위에 그려오고 있다. 최근에는 세트장에서 얻은 미적 경험을 토대로, ‘감각의 상상력’을 키워나가고자 지속적인 회화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2016년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 전시에서 선보였던 <현장> 작업이 기억에 남는다. 세트장 작업의 초기 모델이자 기존의 작업방식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던 작업이었다. 기존 회화작업들은 평면성을 강조하고자 물감에 보조제를 많이 사용하여 매끄럽고 젖어있는 붓질이 잦았고, 공간의 깊이감을 의도적으로 배제했었다. <현장> 작업을 진행하면서, 세트장이라는 거대한 공간의 풍경을 집중적으로 관찰했고, 깊이감을 전달하기 위해 고전 회화의 방식들을 차용하기 시작했다. 깊이감과 현장감을 전달하려 노력했지만 돌이켜보면 초기작답게 신나게 실패한 작업이었다. 세트장이라는 공간은 돈을 벌기 위한 공간에서 작업의 소스를 찾는 공간으로 변화했고, 그 변화는 회화 작업에서 자유를 찾아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현장> 작업 진행 과정, 캔버스에 유채, 388x650cm, 2017 <현장> 설치 전경, 캔버스에 유채, 388x650cm, 2017

나는 다양한 회화실험을 통해 ‘감각의 상상력’을 키워나가고자 한다. 《현장》(인사미술공간, 서울, 2016), 《색, 뒤》(갤러리 조선, 서울, 2019), 《색, 공간》(인디프레스 갤러리, 서울, 2020)이라는 제목의 개인전들을 선보여 왔다. 앞으로 《색, 빛》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통해 ‘색’과 ‘빛’에 대한 연구들로 이루어진 작품들을 만들어갈 계획이다.

작가정보: instgram.com/art_pkj

■ 박관택 PARK Kwantaeck

박관택은 동시대를 살아가며 발견한 여러 현상들을 관객의 신체 경험으로 치환하는 작업에 집중한다. 비가시적이지만 포착 가능한 인과성을 지닌 사회 현상들과 이를 둘러싼 정돈되지 않은 심리와 태도에 관심이 있다. 오감의 일부를 통제하거나, 확장을 유도하는 조형 언어를 활용하여 특정 이슈에 대해 무관심한 이에게도 유효할 수 있는 경험적 구조를 생성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동시대를 살아가며 발견한 여러 현상들을 시각예술의 범주로 치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술의 영역 안에서 해석(읽기)과 같은 언어적인 영역과 감각(느끼기)과 같은 비언어적인 영역의 경계를 허무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동시대에 당면하고 있는 여러 사회적 파편들을 재현하거나 언급하는 수준을 넘어, 시각예술 안에서만 구현될 수 있는 관객의 경험적 구조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개인전 《여백 Spinoff from the facts》(인사미술공간, 서울, 2019)에서는 UV 손전등에 의해서만 볼 수 있는 투명 잉크를 활용한 공간 드로잉을 진행하여, 관객의 동선과 움직임에 따라 흩어진 시각 정보가 드러나도록 했다. 같은 해 이어진 개인전 《버퍼링》(소마미술관, 서울, 2019)에서는 이미지 지지체 중 하나인 종이의 물성을 변화 시켜, 그 위에 그려진 드로잉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아날로그 방식의 무빙이미지를 만들어 선보였다.

<어제모레>, 퍼포먼스, 축광종이, 노광기, 집게, 줄, OHP 필름, 2020 <어제모레> 전시전경, 경기도미술관, 안산, 2020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가장 최근에 있었던 개인전 《어제모레》(경기도미술관, 안산, 2020)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제모레》는 2020년 전후를 미래로 보았던 1980~90년대 SF 영화를 소재로 구성한 라이브 이미지프린팅 퍼포먼스이다. 어두운 공간에서 한시적으로 빛을 발하다 사라지는 특징을 가진 축광(蓄光) 종이를 사용하여, 1인의 퍼포머가 이미지를 담아내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관람객들은 자유롭게 출입하며 활보할 수 있는 형식의 전시였다. 유년 시절, 처음으로 미래에 대한 관념을 갖게 했던 과거의 미래공상과학 영화들이 상상하던 미래의 시간은 이미 현재, 혹은 가까운 과거가 되었다. 이러한 충돌하는 시간성과 그로 인해 편안한 추억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기묘한 노스탤지어(nostalgia)가 나를 이 작업으로 이끌었다.
나는 작업에 대한 장기적 계획을 미리 세우기보다는 그때의 상황에 집중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최근에는 시각예술의 근간이자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양적 과잉을 겪고 있는 이미지의 여러 층위에 대해 연구 중이다. 나는 이미지의 물성, 행간, 함의, 상황, 시간, 심리 등 다차원적이고 다각도의 접근을 통해 전시라는 물리적 환경에서 이미지가 관람자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감각되는지 실험하고 있다. 작년 《어제모레》 전시 준비 과정에서 겪은 팬데믹으로 인한 변칙적인 경험을 통해 시각 예술이 지닌 물질적 가능성과 관객의 체험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을 고민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즘의 고민과 관심사를 기반으로 디지털, 언택트 시대에 변화하는 전시 형태와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유효한 물질적 경험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시공간의 층위를 연구하고 실험해볼 생각이다.

작가정보: www.kwantaeck.com/

■ 박성준 PARK Seong Jun

박성준은 영화/영상, 인터랙티브 설치, 미디어 퍼포먼스 등의 작업을 통해 인간의 관념과 실재 사이의 부조리를 탐구해왔다. 영상언어를 해체하거나 조합해 제시하는, 실재와 다른 혼돈과 괴리의 공간은 마치 세트장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재현되고, 공간에 덧붙여진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과 불안의 갈등을 드러낸다.

Q. 전반적인 작품 설명 및 제작과정에 관해 설명해 달라.

A. 나는 영화/영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인터랙티브 설치, 미디어 퍼포먼스 등의 각기 다른 매체들을 이용하면서 인간의 욕망과 불안에 대한 갈등을 영화적 내러티브로 삼아 실제의 물리적 공간에 드러내는 작업을 선보여왔다. ‘욕망과 불안의 갈등’이라는 작업의 테마는 내가 오래전부터 느껴온 인간의 모순과 부조리들이 작업에 끼어들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결과물이다.
나의 작업은 영화와 같이 프리 프로덕션, 프로덕션, 포스트 프로덕션의 제작과정을 따른다. 다만 내게 프로덕션은 내가 직접 관람자처럼 작품과 공간 사이를 배회하며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며, 포스트 프로덕션은 관람자와 작품이 상호작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대부분의 작업을 하나의 영화로 상정하며, 작품을 통해 관람자들이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한 것과 같은 인상을 받기를 바란다.

<MONTAGE II>, 인터랙티브 설치, 키네틱 센서, 스피커, 가변크기, 2016 <MONTAGE III>, 인터랙티브 설치, 키네틱 센서, 무선 헤드폰, 가변크기, 2017

Q.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 또는 전시와 앞으로의 작업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A. 나의 대표작으로는 <MONTAGE> 시리즈를 꼽을 수 있겠다. 이 작업은 우리 사회에서 광기와 공포 그리고 정신 분열로 대변되는 미디어와 자본주의 시스템에 관한 담론을 다룬다. 자본주의에 의해 물화된 인간들, 미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미친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나는 영상으로 대표되는 가상과 실재의 혼재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우리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내 작업의 상당수는 마치 영화 같지만 실재하는 사건과 철학적 갈등을 모티브로 삼는데, 예를 들어 내가 뉴스에서 불편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순간이 작업의 시작점이 되곤 한다.
향후 몇 년간은 최근까지 해오던 작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변화가 있다면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많은 관람자들이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

작가정보: parkjun.net/

* 작가에게 제공 받은 인터뷰 글을 바탕으로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