꿋꿋하게 오늘을 밀고 나가는 힘: 김윤식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와의 만남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꿋꿋하게 오늘을 밀고 나가는 힘김윤식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와의 만남

류수연(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김윤식

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제물포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했다. 1987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고래를 기다리며』 외 4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인천문인협회 인천시지회장과 인천문화재단 3기 이사, 그리고 인천문화재단 제4대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신포동 패션거리 알아요? 거기서 봅시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지명이었다. 한때 인천의 명동이라 불리던 신포동이 지역의 패션 메카였다는 사실은 조금이라도 인천과 연고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필자라고 다를까?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신포동 패션거리를 누볐던 추억 하나쯤은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최근 수년 동안은 들어보지 못했던 명칭이라, 새삼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때 익숙했지만 어느덧 낯설어진, 그래서 오히려 새로운 신포동 패션거리에서 시인을 만났다.

현재의 신포동

기억 속에 추억을 다시 꺼내며
김윤식 시인은 최근의 근황을 ‘다시 읽기’라고 말한다. 코로나19 때문에 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예전에 한 번 들춰보고 말았거나 묵혀두었던 책들을 다시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시 읽기’를 통해 책에 깃든 자신의 옛 시간과 그 당시의 느낌과 마주하는 일이 매일의 감각을 다르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다른 일이 하나 생겼다고 한다. 바로 ‘정리하기’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컴퓨터 바이러스로 인한 사고 때문이었다. 어느 날 컴퓨터가 먹통이 되면서 그 안에 저장된 대부분의 파일이 지워지는 ‘대참사’를 겪은 것이다. 250여 편의 인천 관련 글들, 책으로 묶고자 준비하던 930여 매의 원고. 백업조차 없는 글들이 마치 애초부터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로 인해 그는 한동안 깊은 정신적 공황을 겪기까지 했다고 한다. 모든 ‘글쟁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고통에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삭제된 파일 중 여기저기 메일로 전송했던 일부 원고를 찾아내면서 당시의 기억을 다시 환기하는 작업으로 변주되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찾아낸 파일들을 정리하며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했던 과거의 기록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일상은 다시 읽기에서 정리하기로, 그리고 다시 읽기를 넘나들게 되어버린 것이다.

추억이 그대로 오늘이 된 곳
시인에게 인천의 의미를 묻자, 그는 어려운 질문이라고 답했다. 인천을 거의 떠나지 않았던(군대 3년, 그리고 서울에서 1년, 부천에서 1년을 살았다.) 인천 토박이인 그에게, 인천은 그저 매일의 일상을 함께하는 공기와 같은 곳이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고 나들이를 하면 발길마저 가벼운 것처럼, 인천은 그의 삶에 그대로 녹아 있는 자연스러움 그 자체이다. 그러니 이렇게 어쩌다 한번 그런 질문이 던져질 때면, 오히려 그제야 그것이 실감으로 다가온다고. 그러니 한 마디로 쉽게 답할 수 없다는 것을. 참으로 우문현답이었다.

그럼에도 한번 터져 나온 이야기보따리는 멈추질 않았다. 아직 인천이, 아니 동인천이, 제물포가, 아니 그보다는 신포동이, 바닷가 소도시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 때부터 그의 시간은 오직 이곳에 푹 젖어 있었으니 말이다. 제물포역 앞에 쭉 늘어져 있던 배밭에서부터 인천의 곳곳에 있던 수많은 극장들. 그곳에서 보았던 영화, 그리고 때로는 빨간딱지의 외설물들까지. 인천은 그의 추억이 잠든 곳이고, 새로운 만들어지는 곳이며, 그래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필자가 제3의 시선으로 김윤식 시인에게 있어서 인천의 의미는 이쯤 되지 않을까 가늠해 본다. 그것은 아마도 ‘추억이 그대로 오늘이 된 곳,’ 그렇게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인천, 그리고 신포동과 함께할 테니 말이다.

덜컥 수상한 교내 백일장, 운명 같은 문예반 생활
기왕에 추억의 보따리가 열린 김에 문인의 삶을 선택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물었다. 때는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저 책 읽기를 좋아하던 그가 덜컥 교내 백일장에서 수상을 한 것이다. 「파랑새」라는 당선작이 문예반 선생님의 눈에 띄면서 문예반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것이 계속 글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잡지 학원에 몇 번인가 글이 뽑히기도 하였다. 그 덕에 전국에서 오는 여학생들의 팬레터를 받기도 했다며 소년처럼 웃음을 지었다.

시가 계기가 되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시로 등단했지만, 산문에 대한 욕심은 꾸준히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인천과 관련된 산문을 쓰는 것은 그의 20여 년 작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특이하게도 머릿속에 인천이라는 도시의 기억이 사진처럼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 단지 몇 개 건물이 어디에 있었다가 아니라, 골목과 골목을 따라 즐비한 식당들,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풍경, 거기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 기억을 사진으로 인화할 수는 없지만, 글로 써낼 수는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다만 시인은 그것을 그림이나 사진처럼 생생히 표현할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 그가 최근에 출판한 『인천의 향토음식』은 그러한 기억의 결과물이다.

김윤식, 『인천의 향토음식』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21)

자신만의 고유색을 가진 도시가 되길
그가 꿈꾸는 인천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인천문화재단의 대표이사를 역임한 그였기에 현재의 인천에 어떤 예술적 감각을 입힐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그는 한 마디로 작은 아이디어들이 구체적으로 실천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커다랗고 멋들어진 건물을 세우는 것 이상으로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어지는, 사람의 삶과 일상이 살아있는 도시, 그리고 그 도시의 일상이 색을 입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러면서 맹인 점자, 훈맹정음을 펴낸 송암 박두성 선생의 예를 들었다. 선생의 집을 찾아오는 맹인들은 눈이 보이지 않아도 그 집을 찾기가 아주 쉬웠다고 한다. 길에서 누구라도 붙잡고 “여기 태극무늬가 크게 그려진 대문 있는 집이 어디요?”라고 물으면 누구나 알려주는 집. 그 집이 바로 선생의 댁이었다고 한다. 김윤식 시인은 행복복지센터나 여러 관공서에도 이러한 특징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어야 할 곳들이 타지사람이 쉽게 찾을 수 없으면 되겠냐는 그의 말이 비근한 예이지만 묵직하다.

예술가로서 선택한 길을 꿋꿋하게 짊어질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코로나 시대를 관통해 이제 ‘위드 코로나 시대’로 접어든 지금, 후배 문화예술인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시인은 어렵게 견뎌온 모든 예술인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하며, 또한 다시금 견뎌야 하는 시절임을 기억하자는 당부를 함께 건네었다. 힘든 시기였지만 결국 우리를 지탱한 것은 예술가로서의 자존감이었음을 기억하자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그것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결국 자기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던 후배들에 대한 고마움과 안타까움이 복합된 것이리라.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다짐을 한 마디 더한다. 예술인으로서 살기로 한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선택이었음을, 그 길이 결코 빛나고 행복한 길이 아니 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선택한 것임을, 그러므로 그 선택에 혼을 바침으로써 ‘위대한’ 예술인이 될 것임을.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천의 즐거움을 큐레이션합니다: 이종범 『스펙타클』 발행인 겸 편집장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인천의 즐거움을 큐레이션합니다이종범 『스펙타클』 발행인 겸 편집장

박현주(경인일보 사회팀 기자)

인천 청년들이 취재한 인천 이야기, 지역 잡지 『스펙타클』

“인천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알려주고 싶었던
공간과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지난달 창간호를 낸 잡지 『스펙타클(Spectacle)』 발행인 겸 편집장인 이종범(29) 씨는 이같이 말했다. 표지에 적힌 말 그대로 인천에 사는 ‘인처너(Incheoner)를 위한 잡지’다. 이 씨는 편집자 주에 “인천에 깊숙이, 혹은 느슨하게 한 발 걸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지면을 구성했다.”고 밝혔다.

인천하면 흔히 떠오르는 일관된 상상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 목차를 이룬다. ‘차이나타운 어느 집 자장면이 원조인지’, ‘월미도 테마파크에서 무슨 놀이기구를 타야 재밌을지’ 이런 진부한 소재를 다루는 책자가 아니다. 인천이 꽤 익숙한 이들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기로 채워졌다. 이 씨는 이번 호 주제인 ‘코로나 시대의 로컬’에 대해 “팬데믹 상황이 불러온 단절 속에서도 우리의 도시를 즐겁게 바라보는 방법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스펙타클』에는 인천의 사람, 가게, 풍경,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여권 없이 떠날 수 있는 인천의 세계 여행지를 소개한 내용도 그중 하나다. 중앙아시아부터 오세아니아·아메리카·유럽·동남아·동북아 등 각 대륙의 음식을 파는 곳이 상세하게 정리돼있다. 인천 곳곳에 있는 외국 음식점에서 이국적인 맛을 즐기고 여행하는 기분도 낼 수 있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부평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미얀마 유학생 술라와의 인터뷰에서는 인천이란 도시가 가진 다양성을 엿볼 수 있다. 서울에서도 찾기 힘든 미얀마 음식점이 부평에 가면 여럿 있다는 그의 얘기처럼, 부평은 유학생, 노동자, 활동가 등 재한 미얀마인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가 활성화한 곳이다. 야채 곱창과 가수 ‘SS501’을 좋아하는 술라의 일상은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2월 발생한 군부 쿠데타 이후 현지에 있는 가족과 연락이 끊기고, 주변 사람이 군부에 의해 끌려갔다는 짧은 인터뷰에서 미얀마가 처한 비극은 더 크게 와닿는다.

집에서 마시는 ‘홈술’이 지겨운 이들을 달랠 지역 ‘혼술 플레이스’도 빼놓을 수 없는 읽을거리다. 집에서 가볍게 마시는 캔 맥주 대신, 도수 높은 위스키가 끌릴 때 방문하기 좋은 곳들이 포함됐다. 인하대 인근의 가게 2층에는 서가에 가지런히 놓인 책 사이로, 다양한 종류의 위스키가 놓여 있는 ‘심야 책 바(Bar)’가 있다. 입구에 “취기가 아닌 공간과 술을 즐겨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눈길을 끄는 곳. 홀로 술을 즐기는 이에게 이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

평리단길 일대 양복점 외관을 한 가게는 와인과 막걸리, 소주 등 다양한 주종을 판매한다. 젓갈 파스타, 봉골레 떡볶이, 스위스식 감자전 등 ‘무(無)국적’ 안주가 주종을 가리지 않고 입안 가득 달곰한 맛을 돋운다.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술집은 직접 구운 쿠키와 맥주·위스키를 주로 내놓는데, 오후 2시부터 문을 여니 홀로 낮술 즐기기 딱이다. 잡지를 한 장씩 넘기다 보면, ‘내가 아는 인천에 이런 곳이 있나’하는 생각에 빠진다.

비슷한 취향을 가진 동료들과 인천을 탐방하는 ‘스펙타클 유니버시티’

“우리, 학교 문집 만들 듯 소소하게 할까요?
아니면 기왕 하는 거 좀 의미 있게 한번 해볼까요?”

이 씨가 잡지 『스펙타클』을 만들게 된 계기는 특별하거나, 거창하지 않다. 그가 지난 3월 결성한 지역 청년 모임 ‘스펙타클 유니버시티’ 1기 팀원들이 “우리 활동을 바탕으로 책 한 권 내보자.”고 제안했던 게 시작이었다. 제작비는 책이 발행되길 바랐던 시민들의 후원으로 충당했다. 인천에서 일하는 청년 10여 명은 3~4명이서 팀을 이뤄 동네를 탐방하고, 인천을 주제로 한 콘텐츠를 기획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여러 분야의 창작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인천 스펙타클과 강화유니버스가 함께 진행하는 ‘스펙타클 유니버시티’ 썸머세션의 3일차
(출처: 인천스펙타클 인스타그램)

“코로나 이후 사람들이 만나서 교류하는 활동이 많이 제한됐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은 연결되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내가 사는 곳에서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는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스펙타클 유니버시티를 만든 이유입니다.”

스펙타클 유니버시티의 팀원은 학생이고, 교육자이자 연구자다. 다 같이 콘텐츠를 발굴·기획하면서 어떤 주제든 자유롭게 제안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폭넓은 범위에서 활동이 이뤄진다. 어떤 날에는 공방에서 나뭇조각을 깎아 숟가락을 만들고, 또 다른 날에는 40년 가까이 운영된 LP 재즈 바에서 공연을 듣는다. MZ세대(1980~2000년대 출생)의 새로운 취미인 등산을 체험하기 위해 계양산을 갔다가 초입길에 있는 맛난 커피집을 들르기도 했다. 이렇게 지난 6개월 활동을 마무리한 1기 팀원들의 발자취는 『스펙타클』 창간호에 담겼다. 지난달에는 40명의 팀원이 새로 꾸려진 스펙타클 유니버시티 2기에 합류했다. 이들의 활동은 내년에 발간될 『스펙타클』 2호에 반영된다. 이 씨는 지속해서 지역 모임을 운영할 계획이다.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생활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게 뭔지 고민했습니다. 취향에 맞는 공간과 하고 싶은 일이 있어야겠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료’라고 생각합니다. 스펙타클 유니버시티가 인천에서 좋은 동료를 만날 수 있는 모임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종범 기획자는?

이 씨는 2017년 『서울보다 멀고 제주보다 가까운 인천의 카페들』을 출간했다. 개항기 일본식 목조 건물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카페와 송도국제도시 마천루 사이에 자리 잡은 커피집까지 총 30곳을 방문하고 책으로 집필했다. 그는 동네 특색과 정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카페라고 얘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의 가장 작은 단위의 문화 공간이 카페라는 게 이 씨의 설명이다.

『서울보다 멀고 제주보다 가까운 인천의 카페들』, 2017 『인천의 창작자들』, 2019
(출처: 인천스펙타클 인스타그램)

“서울로 대학교와 회사를 다니다 보니 길거리에서 허비하는 시간만 3~4시간이더라고요. 그런데 주말에도 서울에 가서 문화생활을 할 때가 많잖아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천에서도 퇴근 후와 주말의 삶을 보낼 만한 근사한 곳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지역 카페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어요.”

2019년에는 인천을 무대로 활동하는 『인천의 창작자들』을 발행했다. 음악·미술·디자인·공예 등 인천에서 활동하는 청년의 삶과 활동을 담았다. 이 씨는 지난 5년간(2017~2021년) 지역 사회 문화 기획이나, 창작 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예술반점 길림성, 인천 서구 크리스마스마켓, 인천크리에이티브 마켓 서멀장, 인천시 문화가 있는 인천애뜰 콘텐츠 등을 기획했다. 앞으로도 도시 인천에서 그동안 드러나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를 찾는 게 이 씨의 목표다.

“언제 타도 북적이는 용산행 지하철에 가까스로 몸을 구겨 넣으면, 맞은편에 텅 빈 동인천행 승강장이 눈에 들어와요. 인천이란 도시가 서울과 인근 지역을 향하기 위해 거쳐가는 곳이 아닌, 충분히 내 시간을 보낼 만한 곳이라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인터뷰 진행/글 박현주(朴賢珠, Park Hyeonju)

경인일보 사회팀 기자




사람 사는 세상의 문화, 서로 존중하는 문화로 나아가는 출발점: 인천중구문화재단 대표이사 나채훈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의 문화, 서로 존중하는 문화로 나아가는 출발점인천중구문화재단 대표이사 나채훈

나채훈(羅彩勳)

1947년 인천시 중구에서 태어나 약 40년간 거주했다. 이후 20년 이상 중구에 집필실과 사업장을 두고 중구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다. 1974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문학사), 이후 『주부생활』, 『여원』, 『리빙뉴스』의 편집국장을 지냈다. 더불어 그는 중국 고전서 연구에 바탕을 두고 리더십 연구에 힘써왔다. 주요 저서로 『정관정요』, 『삼국지신문』, 『카리스마 리더 조조』, 『유비의 리더십』, 『위대한 CEO 제자백가의 경영 정신』, 『중국인의 발상법』, 『1패에 기죽지 말고 2승을 노려라』, 『조조와 유비의 난세의 리더십』, 『누구도 나를 버릴 수 없다』 등 다수가 있다.

2021년 9월 24일 오후, 인천중구문화재단 나채훈 대표이사와의 인터뷰를 가졌다. 인천문화재단 손동혁 정책협력실장의 진행 아래 초대 대표이사에 대한 소개를 비롯하여 앞으로 인천중구문화재단이 구상하고 있는 역할과 사업방향, 그리고 인천의 여러 문화재단과의 협력방안에 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손동혁: 인천중구문화재단 초대 대표이사라는 중책을 맡으셨습니다. 먼저 나채훈 대표이사님에 대한 소개로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나채훈: 고향이 인천이라 옛날부터 오래 봐왔죠. 자유공원 일대의 개항기 때 만들어졌던 건물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외부에서는 중구에 문화유산이 많다고 하지만 제가 볼 때는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자란 곳이다 보니 상당히 관심이 많죠. 대학에서 쓴 논문도 인천 중구 조계 제도에 대해서 다뤘어요. 그 이후에는 방송국에 잠깐 있다가 『주부생활』이라는 여성잡지사에 들어갔어요. 제 실력이 있어서라기보다 제 윗사람들이 일찍 관둬서 데스크 생활만 18년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간신문도 만들어보고 했고요. 연극계에 몸담기도 했습니다. 희곡도 써보고 연극연출도 해봤고요. 『정관정요』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게 워낙 잘 팔려서 이참에 인천 가서 책 50권만 쓰면 평생 먹고살겠다 싶어서 인천에 내려왔어요.
막상 내려오니 소설만 쓰는 것도 참 그렇죠. 마침 인천 지역의 후배들이 문화단체 일을 주선해줘서 잠깐 일을 하는데, 제가 어릴 때 보고 자란 곳 도처에 틀린 안내판이 붙어있고 설명도 미흡하더군요. 제가 논문을 조계지에 대해서 쓰기도 해서 중구 지역의 개항사에 대한 강의를 하기 시작했어요. 역사지리를 전공한 입장에서 볼 때, 틀린 것들이 많았습니다. 고치고 강의도 하다 보니까 중구지역에서 인문교육을 11년 정도 하고 있었더라고요. 책도 마흔아홉 권 정도 썼고요. 대부분은 중국 역사에 대한 책들이고, 인천의 역사를 다룬 책은 『인천 개항사』가 있어요. 주로 삼국지 리더십 주제로는 강의를 했고요. 작년부터 다른 구에서 문화도시를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고향인 중구에 문화재단이 설립된다는 소식에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고향에서 펼쳐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대표이사직에 지원하게 됐습니다.

손동혁: 그동안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다채로운 문화 활동과 개항장 관련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중에 어떤 활동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에서 인천광역시 중구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나채훈: 아직 인천 중구하면 생각나는 대표 사업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천의 개항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중구만의 대표사업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예술인들이 중구에서 다양한 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적 토대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살만한 도시를 만들어야 합니다. 현재 사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요.

손동혁: 지난 8월 27일에 ‘(재)인천중구문화재단 발기인대회 및 창립총회’가 개최됐습니다. 이제 문화재단 출범을 위한 행정적인 준비를 거쳐 사업의 방향을 구체화하고 직원을 충원하는 등 실질적인 준비를 해야 할 때로 보입니다. 초대 대표이사로서 인천중구문화재단 사업의 초기 방향에 관한 구상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채훈: 2021년 기준으로 전국에 117개의 기초자치단체 문화재단이 운영되고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보통 5년이나 10년이 넘으면 조직이 처음 의도한 것과 다르게 경직화되는 현상도 있고, 문화예술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답게 창의성이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몰되어 가는 경우가 많은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초기에는 조직의 안정화에 힘쓰려고 합니다. 인천중구문화재단은 4개 팀으로 출발을 하는데요, 원래는 8개 팀 정도가 필요한 조직인데 예산 문제로 상당히 슬림화한 거죠. 적은 인원에 업무가 가중될 수 있지만, 오히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많이 듣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직원들이 조직이라는 틀 속에 자신을 가두려고 하지 말고 부족한 부분을 외부와의 소통으로 채워 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문성 하나를 꾸준히 키워나가는 것, 이것이 조직의 안정화로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두 번째, 중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개항문화의 재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1883년에 개항 이후 오늘날까지 얼마나 많은 성장과 발전이 있었습니까? 산업화도 이루었고 민주화도 이루었으니 문화화될 필요가 있어요. 개항을 통해 전달된 근대문화, 또 오늘날 인천의 출발점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문화라고 하는 것을 생산성이나 소비성보다 사람 사는 세상의 문화, 서로 존중하는 문화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많은 사람의 참여와 소통을 통해 뜻을 크게 갖고 우리 문화재단의 출발에 의미를 두고 함께 노력해야지요.

손동혁: 인천광역시 중구는 다양한 역사·문화자원을 갖고 있고, 한편으로는 인천항과 인천공항 등 세계로 열린 두 개의 문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천의 해양성과 국제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향후 이러한 상징성을 구체화하기 위한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대표이사님의 혜안을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나채훈: 문화적인 부분에서만 말씀드리자면 저는 국제성은 가장 중구다운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들에게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인드를 형성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인종적·종교적 편견에서 벗어나야 하죠. 개항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들은 부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긍정적으로 승화시켜야죠. 평생교육의 장을 만들어서 인문학 강좌, 생활문화동아리 활동 지원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뿐만 아니라 시야를 넓히기 위한 추가적인 활동도 만들어야 할 거 같습니다. 또한, 해양자원은 선조들이 남겨준 유산인데 오락적인 요소의 이벤트로만 사용할 게 아니라 각종 교육과 경험을 하게 해줘야 할 것, 자연유산이 소중하고 후대에 물려줘야 한다는 시각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문화예술이라는 것이 해안가에서 많이들 발생했죠. 생산적인 면도 포함해서 괜찮은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는 제2의 종합문화예술회관 같은 것도 구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지금 내항 재개발의 문제가 있는데요, 그 공간을 좀 더 인문학적 시각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개항문화축제를 내항에서 제대로 했으면 해요. ‘제대로’의 핵심은 우리 주민들이 최소한 과반 이상 참여할 수 있는 그런 참여행사지요. 중구문화재단이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손동혁: 지난 2월 2020년 「해양교육 및 해양문화의 활성화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졌는데요, 지금 말씀하시는 해양과 교육, 문화 이런 부분들이 잘 포함된 법률이어서 살펴보다 보니 제도혁신이 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지금 중구를 보면 영종 지역에 더 많은 분들이 살고 계신 데 상대적으로 그곳이 연령층도 더 낮고요. 하지만 역사문화자원이나 시민들의 문화 환경이 부족해 보입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고민이 많으실 것 같아요. 여기에 대해 어떤 구상을 하고 계시나요?

나채훈: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영종 지역의 특성은 새로 유입된 젊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죠. 급속도로 한 도시의 인구가 팽창하게 되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폐기물 대책 하나만 해도 따라가기가 어렵죠. 이러한 일은 행정이 예측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요. 영종 지역에서 증가하는 젊은 가정에 대해 두 가지 정도를 얘기하고 싶어요. 중구문화재단은 문화기금을 조성하면서 후원금을 받았을 때 문화예술 인재육성기금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또한, 평생교육에 문화예술교육을 접목한 강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다양한 강좌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소수의 인원도 의미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요. 그리고 지역주민들이 모여서 다양한 것들에 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문화 사랑방을 형성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되었으면 해요. 그리고 중구민에게 다양한 인문교육도 필요하겠지만, 좀 더 ‘관계인구’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주지는 다르더라도 일자리가 중구에 있는 사람들, 그 관계인구를 우리가 ‘관계주민’으로 인식해야 해요. 오히려 온종일 다른 지역에서 일하다가 오는 사람보다 훨씬 중요한 주민일 수 있거든요. 이런 분들하고도 네트워크를 만들어 공방 체험과 같이, 역사와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자세한 부분은 앞으로 중구문화재단 임직원들과 토의를 거쳐 구상을 다듬어보려고 해요.

손동혁: 인천에는 인천문화재단, 부평구문화재단, 인천서구문화재단, 연수문화재단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2년 초 출범을 목표로 남동구문화재단도 설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문화재단 간의 역할 분담과 협력방안에 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채훈: 아무래도 인천문화재단을 중심으로 각각의 기초재단들이 협심해야 할 텐데 대표이사의 임기가 잘 맞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가 있겠지요. 지방자치의 문제이기도 한데 임기제의 장점이나 정년제의 장점을 제대로 못 살리고 자꾸 단점만 노출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렇게 되면 좋은 계획을 세워도 진행되기가 쉽지 않죠. 하나의 뼈대를 세우고 거기에 계속해서 살을 더해 가면 좋은데 이어지지 못하면 용두사미가 될 위험이 커요. 그래서 저는 일차적으로 인천 지역문화재단의 직원들이 모인 하나의 단체를 만들어주고 싶어요. 임기제인 대표들은 뒤로 빠져서 앞으로 오랜 시간 일할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구상을 갖고 인천의 문화를 만들어가게 하는 거죠. 문화재단들이 연계 협력할 수 있도록 재단의 대표들은 지원을 하고요.

손동혁: 여러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더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나채훈: 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문화예술을 이해하는 데에 아직도 우리 사회는 문화의 양적 팽창과 질적 향상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아요. 복지문제도 그렇고요. 어떻게 보면 문화복지가 누군가에게는 생명수이기도 한데 별것 아닌 돈 낭비라는 인식이 있죠. 공항이나 단지 조성 등에 들어가는 돈은 상대적으로 어마어마하지만 그러한 돈을 투자하고도 제대로 성공한 일이 없었어요. 인천에서도 그렇게 터무니없이 사용된 재정 지출도 많고요. 그런데 문화예술에 쓰는 돈은 꼭 낭비하는 것처럼 말하며, 예술이나 문화가 만들어낸 콘텐츠를 생산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는 일까지 가볍게 여기는 건 문제가 많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우선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것부터 제대로 해주고 그랬으면 합니다. 앞으로 중구문화재단이 앞장서서 뭔가를 좀 할 수 있을 때 많이 격려해 주셨으면 하고요, 도와주시면 고맙겠어요.

인터뷰: 손동혁(인천문화재단 정책협력실장)
정 리: 박준혜




프로젝트그룹 노니〔noni〕, 경계를 넘어 소통의 장을 펼치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프로젝트그룹 노니〔noni〕, 경계를 넘어 소통의 장을 펼치다

홍봄(기호일보 사회부 기자)

노니〔noni〕, ‘노닐다’, ‘놀다’, ‘play’의 의미로 소소하게 노는 것에서 시작하여 일상을 다채롭게 채웁니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 이 모여 말랑하고 유연한 상상을 펼치고 새로운 예술적 실험을 추구하는 문화 예술 크리에이터입니다. 사회적으로 정해진 틀에 한정 짓지 않고 끊임없이 경계를 벗어나며 A와 Z를 연결해 주는 ‘중간자’로서 소통의 장을 만듭니다.

〔noni〕는 동갑내기 디자이너인 정한결(26)씨와 이승나(26)씨가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이다. 한결 씨는 시각 예술 디자이너이자 사용자 경험(UX)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고, 승나 씨는 공간 예술 디자이너이자 공간 설계 디자이너다. 동시에 프로젝트 기획자이기도 한 두 사람은 20대 초 인연을 맺은 이후 줄곧 자연스럽게 공동 작업 이야기를 해 왔다. 함께 작업을 하면 재미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올해 연수문화재단의 청년예술지원을 계기로 실현됐다.

프로젝트 그룹을 결정하기로 한 두 작가는 활동의 중심점이 될 브랜딩에 가장 공을 쏟았다. 그렇게 탄생한 이름이자 중심점이 〔noni〕이다. ‘Non of I’ 약자로 ‘내가 없다’, ‘내가 아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우리말로 ‘노니’라는 발음을 가진다. 이는 하나의 정체성에 묶이지 않고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질 수 있음을 말한다. 또한, 수많은 n명의 사람들 또는 우리 크루의 시작인 n과 n의 콜라보를 뜻한다. 한결 씨는 “요즘 ‘본캐’, ‘부캐’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예술활동과 일을 병행하지만 두 가지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 원동력이 됐으면 했어요. 그럴 때 더 창의적인 사고가 나올 수 있고 일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거죠.”라고 〔noni〕를 설명했다.

《P.P.L Project》 개요

〔noni〕의 첫 프로젝트인 《P.P.L Project》 역시 개인들의 경험에서 시작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 콘텐츠를 만드는 방식이다. 승나 씨는 “프로젝트를 고민하면서 불안정한 시기에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되돌아보면서 다가가기로 했어요. 우리는 늘 불완전하고 애매모호하며 잡다한 고민, 걱정, 불안과 함께 위태로운 경계에 있잖아요. 불완전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경계를 벗어날 수 있고,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P.P.L Project》는 소소하게 노는 것에서 시작하여 지루한 일상을 다채롭게 채우고(PLAY), 일치하는 생각과 답을 공유하는 것이 아닌, 나와 다른 관계의 엇갈림과 접속에서 소통하며 생각의 환기를 유도한다(PEOPLE). 마지막으로 사람을 레이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다양한 층이 얽혀 있는 유기적인 공간을 만든다. 위계가 없는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지향한다(LAYERS).

프로젝트는 크게 두 가지 전시로 구성된다. 첫 번째 전시인 <잡동산이_아! 그것을 버리지 마시오>는 10명의 참가자에게 일주일 치 미션지를 택배로 보내는 방식으로 자신의 공간에서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게끔 했다. 취업준비생이나 이직을 고민하는 등 불완전한 경계에 있는 청년들이 사진을 찍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미션을 수행하며 잡동사니에 대해 자유롭게 기록했다. 한결 씨는 “잡동사니는 잡다한 것이 한데 뒤섞인 것, 또는 그런 물건을 말해요. 이번 프로젝트는 각자의 잡동사니 사물에서 출발하여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가 아닌, 개인의 ‘비공식적인 이야기’를 담아 가치를 찾아가는 작업이라 할 수 있어요.”라고 덧붙였다.

두 번째 전시인 <Blur-Blah>는 익명의 대상들에게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과 ‘나의 사랑은 어떤 모양일까요?’, ‘나의 사랑은 어떤 색깔일까요?’라는 질문에 80~90여 명이 답한 결과는 놀라울 만큼 서로 달랐다. 승나 씨는 “사랑은 가장 개인적이고 사적인 일입니다. 사랑의 정의할 수 없는 특성은 불완전한 우리와 닮아 있어요. 비가시적이고 추상적인 사랑의 정의, 모양, 색깔에 대하여 질문하고 완전한 답을 찾으려 애쓰지만, 역설적이게도 결국 정해진 정의도, 모양도, 색깔도 없음을 알게 되죠.”라고 설명했다.

이 전시를 어떻게 온라인상에서 구현시켜낼지가 현재 〔noni〕의 주된 고민이다. 참여자들이 단순히 전시를 보는 것이 아닌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고 쌓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전시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N월 27일에 온라인 전시를 오픈할 계획이다. 두 사람은 이번 전시가 비대면 시대에 쉽고 재밌게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길 바란다.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또 주제를 기획해 단기성, 중장기성, 장기성 프로젝트를 진행할 생각이다. 요리사나 음악가 등 타장르 작가들과 협업해 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수많은 n명의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그룹명처럼 더 재미있는 주제를 찾아 다양한 사람들과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 이렇게 타 장르 작가와 교류를 구상할 수 있었던 것은 연수문화재단의 도움도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지역 작가들이 참여하는 워크숍이 열려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결 씨는 “작가들이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데 재단에서 워크숍을 열어 지역 문화 활성화에 대한 작가들의 의견을 꾸준히 듣고 있어요. 경험이 많지 않은 청년 작가에게 재단은 믿을 수 있는 안식처이자 앞으로 예술 활동 기반을 마련하는 ‘시작점’이 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두 작가에게 예술의 의미를 물어보자 한결 씨는 ‘일상이자 삶의 일부’라고 정의했다. 그는 “예술이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됐을 때 오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을지 진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지금도 전업 작가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제 삶과 별개라고 할 수 없고 개인 작업도 계속하고 있죠. 그렇게 보면 보고 느끼는 모든 일상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표현했다. 이어 승나 씨는 ‘누구나 할 수 있고 항상 새로움을 주는 것’이라고 답했다. 승나 씨는 “예술이 어렵고 고지식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을 ‘이렇게도 바라볼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면 그게 예술이 될 수 있죠.”라고 강조했다.

두 작가는 인천지역에서 문화예술이 보다 꽃피기 위한 제언도 덧붙였다. MZ세대인 두 사람은 젊은 세대가 ‘감각적이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문화생활이 활발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지역 대학생들을 유입시키기 위한 영상 플랫폼이나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면 한다. 인천의 문화에 대해 풀어내는 과정에서 새롭고 파격적인 방식을 도입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두 작가는 “부모님과 친구같이 지내는 MZ세대는 자신이 감각적이다 생각하면 가족들도 경험할 수 있도록 함께하는 특성이 있어요. 그래서 젊은 층을 대상으로 홍보방식을 고민하고 전문 인력을 활용해 유입시키려는 노력을 하면 파급력이 클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비어 있는 임대공간을 이동하며 팝업 전시를 여는 등 어느 도시에서도 하지 않는 기획들을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인터뷰 진행/글 홍봄(기호일보 사회부 기자)




영화, 그 너머의 가능성까지: 권칠인 감독을 만나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영화, 그 너머의 가능성까지권칠인 감독을 만나다

류수연(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세기말 아날로그 시대의 감수성을 듬뿍 담아낸 영화 <접속>의 명대사가 흐르는 공간, 종로3가 옛 피카디리 극장 옆에 위치한 카페에서 권칠인 감독을 만났다. 20~30대 여성심리를 가장 감각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평가받는 영화 <싱글즈> 감독이자 인천영상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한 권 감독과의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영화로 시작되었다.

‘파시’, 그리고 할리우드 키드

성어기에 어항에서 열리는 생선시장을 파시(波市)라 한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이 파시는 인천이라는 도시 전체를 좌우하는 가장 큰 행사였다. 권 감독은 자신이 어린 시절 할리우드 키드로 살 수 있었던 간접적인 이유로 파시를 꼽았다. 당시 인천은 전국에서 극장이 가장 많기로 손꼽히던 도시였다. 파시만 되면 돈과 사람이 몰리니, 문화소비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연평도의 조기파시는 특히나 유명했다고 한다.

애관, 미림, 오성, 문화, 인천, 현대, 동방, 금성, 아폴로, 자유……. 앉은자리에서 술술 나오는 극장명만 해도 십 수 가지니, 그 시절 인천에 얼마나 많은 극장이 있었는지 쉽게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시절 권 감독에게 극장은 놀이터이고 휴식처였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통로였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인천의 할리우드 키드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곧장 영화인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은 건축공학과로 진학했어야 하니 말이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직업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을 터이니, 영화로 전공을 삼는다는 것은 요원하였으리라. 그러나 영화에 대한 그의 갈증은 대학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대학 졸업 후 영화아카데미를 들어가면서 영화인으로 사는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권 감독은 영화인으로서의 시작을 이렇게 소회한다. 그가 영화를 하면서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한 가지. “앞으로 나는 분명히 가난하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생각을 이끌었다. 그는 “적어도 정직할 수는 있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보통의 삶과 감정을 담겠다는 것을 하나의 좌우명처럼 마음에 남겼다고 말한다.

영화산업을 위한 인큐베이터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권칠인 감독이지만, 한 사람의 영화인으로 인천과 보다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영상위원회(이하 영상위)의 위원장이자 인천문화재단의 이사로 위촉된 것이다. 그가 처음 부임했을 때만 해도 인천문화재단(이하 재단)의 산하기관이었던 영상위는 2013년 독립법인으로 분리된다. 같은 해에 인천독립영화협회도 설립되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뜻깊은 사건이다. 한 기관이 산하기관을 떼어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단지 예산과 조직을 분리하는 일이 아니라 자칫 그 기관의 위상과 영향력까지 축소시킬 위험을 내재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예술이자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서 영화가 가진 성격을 이해하고 수용해준 재단의 용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한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이러한 상생의 결단을 내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결단으로부터 비로소 인천의 영화산업을 위한 인큐베이터가 마련되었음에, 권 감독은 재단에 다시금 감사를 표하였다.

디아스포라영화제 (사진: 인천영상위원회)

그렇다면 어엿한 독립법인이 된 영상위의 위원장으로서 그가 진행했던 사업 가운데 가장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권 감독은 망설임 없이 <디아스포라영화제>를 꼽았다. 그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가진 정체성의 정수를 ‘합수(合水)’라고 강조한다. 말 그대로 ‘물이 합쳐지는 곳,’ 그 뱃길을 타고 여러 지역의 문화가 모여드는 곳. 그곳이 바로 인천이다.

그 시작은 재단과 함께 진행했던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다양성 사업인 <무지개다리 지원사업>이었다. 여기서 촉발된 인식이 자연스럽게 ‘디아스포라’라는 화두를 이끌었고, 그로부터 <디아스포라영화제>가 탄생되었다. 권 감독이 떠난 뒤에도 <디아스포라영화제>가 인천을 대표하는 축제로서 제 몫을 잘 수행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고향인 인천을 위해 좋은 선물을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영화’가 아닌, 새로운 용어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았다. 영화인으로서, 그리고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 그는 오늘의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영화감독으로서 그는 항상 보통 사람들이 그려내는 이야기에 관심을 두었고, 그것을 가장 잘 그려낼 수 있는 장르가 멜로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그의 대표작인 <싱글즈>(2003), <뜨거운 것이 좋아>(2008), <관능의 법칙>(2014) 등은 모두 그러했고, 그의 이러한 관점은 여성들의 욕망을 그려낸 작품들에서 좀 더 탁월하게 드러났다.

싱글즈(2003) 뜨거운 것이 좋아(2008) 관능의 법칙(2014)

하지만 놀랍게도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면서 그는 ‘영화’라는 세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무엇보다 이제 ‘영화’라는 말을 버려야 할 때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시대가 이미 새로운 매체와 형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비법(영화와 비디오에 관한 법률)’을 떠올리면 분명해진다. 이미 비디오는 사라졌고, 극장도 변화했다. 다양한 플랫폼이 출현했고 거기에 맞춰 영상의 형식도 달라졌다. 우리가 사용해 왔던 ‘영화’라는 말로는 충분히 담아낼 수 없는 ‘새로움’이 이미 영화의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영화’라는 말에 갇혀 있다. 그러므로 그 틀을 깰 수 있는 새로운 호명이 필요하다.

“가장 오래된 극장에서 가장 최신의 콘텐츠를”

이 변화 속에서 인천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일까? 권 감독은 현재 인천시가 진행하고 있는 ‘애관극장 공공 매입 여부’와 관련해서 말을 이어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극장이라는 의미를 가진 애관극장의 역사성과 상징성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문제는 그 활용이다. 권 감독은 공공자산으로서 극장을 매입해서 그저 박물관이나 전시관으로 활용하는 데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그는 오히려 이 극장을 다시금 살아있는 공간으로써 활용해주길 당부한다.

애관극장

가령 애관극장이 가진 대형 스크린을 새로운 콘텐츠를 위한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플랫폼으로 떠오른 유튜브, 그 안에서 수많은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는 크리에이터를 위한 상영관으로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극장의 스크린이라는 매체가 새로운 세대를 위한 최첨단의 콘텐츠를 위해 열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관료적 마인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문화정책은 지나치게 관료적이었다. 한류가 뜬 이후에는 내내 그 과실에만 탐닉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산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디에 가치를 둘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이제라도 ‘국·영·수 세력’이 만들어낸 이 관료제와 열심히 싸워야 한다. 성과와 업적으로 줄 세우기 하는 관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피력해야 한다.

권 감독은 인천이 이러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에 앞장설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음을 환기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문화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폭넓게 수용하려는 태도가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인천시의 선택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인천의 문화인과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욱 긴요한 때가 아닐 수 없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 ‘인천’의 시간과 공간 담는 ‘이야기꾼’: OBS경인TV 박철현 프로듀서(PD)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 ‘인천’의 시간과 공간 담는 ‘이야기꾼’OBS경인TV 박철현 프로듀서(PD)

박현주(경인일보 기자)

‘해양 도시, 한반도 화약고, 실향민의 터전, 자동차 산업의 요람, 노동 운동 산실…’ 인천을 지칭하는 말은 무수히 많다. 이 도시의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제작하는 OBS경인TV 박철현 프로듀서(PD)는 인천을 아울러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했다. 인천과는 그렇게 가깝지도, 그다지 멀지도 않은 충북 제천 출신인 박 PD는 2004년 OBS의 전신인 iTV에서 일하면서 인천에 정착했다.

인천과는 야구라는 접점이 있었다. 그가 응원했던 전북 연고 프로야구 쌍방울 레이더스는 지난 2000년 해체됐는데, SK와이번스가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단을 인수한 뒤 팀 연고지를 인천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직장을 위해 온 인천에서 ‘내 팀’을 조우하니 이보다 반가울 수 없었다. 프로 야구 정규 시즌에는 없는 시간을 쪼개서 야구장을 찾았다. 인천을 ‘야구 도시’로 접한 박 PD는 인천의 일상에 대한 궁금증도 빼놓지 않았다.

박 PD는 자신을 연출자, 편집자라고 하지 않는다. 인천이라는 도시 속에 축적된 시간과 공간을 샅샅이 톺고 살피는 ‘이야기꾼’이 더 어울린다고 한다.

인천 섬 곳곳에 사는 주민의 삶과 이야기박 PD는 2014년 겨울, 다큐멘터리 촬영차 울도를 방문하면서 인천의 섬 이야기를 다루기로 다짐했다. 당시 울도에는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도민 중 젊은 축에 드는 건 60대였고, 머리 희끗희끗한 노인이 대부분이었다. 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정착하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은 없는 섬이었다. 그물이 터질 정도로 새우와 조기가 잡혔던 이곳은 한때 서해 어업의 전진기지였다. 과거의 영광은 남겨진 폐가들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울도는 하루로 보면 해지기 직전이고, 사람의 인생으로 치면 말년이 다 된 섬이었어요. 인간이 태어나 청년이 되고 장년에 안정적인 삶을 살다가 노인이 돼 남은 삶을 정리하는 모습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순리가 아니더라고요. 섬 역시 인간의 생애와 같은 수순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섬들을 찾아 어민의 고달팠던 삶 얘기를 듣고,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섬 곳곳을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박 PD는 지난 2018년 인천 지역 섬 중에 육지와 연결돼 있지 않아 오랜 시간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을 위주로 로드다큐 <그리우니 섬이다>를 기획했다. 북한 장산곶 휴전선 바로 아래에 있는 백령도부터, 황금빛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굴업도, 섬소사나무 군락지인 백아도 등 10여 개 섬의 모습을 담았다.

로드 다큐 <그리우니 섬이다>, OBS경인TV, 13부작, 2018 (출처: OBS경인TV 홈페이지)

이 다큐멘터리 속에 화자로 등장하는 이들은 유명인이나 전문 리포터가 아닌 다섯 명의 사진작가다. 작가들은 수년간 여러 차례 탐사 작업을 통해 인천 지역 섬을 들여다본 섬 전문가다. 첫 회 ‘큰 물섬, 덕적도’ 편은 덕적도가 고향인 서은미 작가가 등장하고, ‘백령도 5년 만의 재회’에 나온 노기훈 작가는 『백령일지-백령도에서의 12일간의 기록』(호밀밭, 2018)이라는 여행기를 펴내기도 했다. ‘그리우니 섬이다’에는 작가들이 섬을 거닐며 촬영한 사진도 나온다. 움직이는 영상 속에 정지된 순간을 함께 담았다는 게 또 하나의 볼거리다.

1986년 5월 3일 시민회관에 모인 시민들… 5·3민주항쟁 다룬 ‘그 날’박PD는 인천 5·3 민주항쟁이 그 이듬해 있었던 6·10 민주항쟁을 이끈 기폭제였다는 것을 2017년 다큐멘터리 ‘6월 민주항쟁 30주년 특별기획 <그 날>’로 조명하기도 했다. 5·3 민주항쟁은 1986년 5월 3일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인천·경기결성대회가 열릴 예정이던 인천 남구 주안동 시민회관에서 대학생·노동자 등이 펼친 반독재 투쟁이다. 그러나, 5·3민주항쟁은 민주화운동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이를 주제로 다룬 방송도 없었다고 한다.

6월 민주항쟁 30주년 특별기획 <그 날>, OBS경인TV, 2017 (출처: OBS경인TV 홈페이지)

“부마민주항쟁의 경우, 부산과 마산 지역 정신을 대표하는 항쟁으로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5·3 민주항쟁은 인천에서조차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가는 게 안타까웠어요. 5·3민주항쟁은 지역에서 활발하게 이뤄진 노동·여성·빈민 운동 등이 응축된 민주화 투쟁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벌써 30년이 지났지만, 더 늦기 전에 그날을 통해 지역의 시민 정신을 알리고, 시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정신적 유산으로 남기고자 했습니다.”

<그 날>의 제작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박 PD는 당시 회사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지 못하자 직접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제작 취지에 동의한 부평구와 남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천민주화운동센터 등 기초자치단체·시민단체의 지원 덕분에 ‘그 날’을 제작할 수 있었다.

치열했던 인천의 현대사, 시민의 삶이 곧 도시의 역사인천이 품은 인물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죽산 조봉암(1890~1959) 선생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다. 강화 출신인 조봉암 선생은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을 하고, 광복 후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958년 일명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이 집행됐다. 이후 유족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인 대법원이 52년 만에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헌정사상 첫 사법 살인으로 기록됐다.

“조봉암 선생의 삶을 통해 지나간 역사를 통찰하고자 다큐멘터리를 기획했습니다. 과거를 통해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인천의 오래된 도심인 동구 화수동 무네미 마을 곳곳을 살펴보는 공간다큐 <만남>을 제작했다. 바닷물이 넘어 들어온다고 해서 무네미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공간다큐 만남은 무네미 마을 속에 위치한 작은 책방부터 인천도시산업선교회까지 여러 공간을 들여다보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특히, 노동·민주화 운동의 산실로 평가받는 도시산업선교회는 최근 주택재개발 사업으로 철거 논란이 일었던 곳이다.

이처럼 앞으로도 인천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야기를 찾고 이 도시의 가치를 알리겠다는 게 박 PD의 목표다.

“인천을 무대로 한 시민들의 삶을 담고 싶습니다. 바다를 중심으로 한 부두 노동자, 실향민, 산업화 과정에 있었던 공장 노동자들까지요. 많은 이가 치열하게 보낸 하루하루가 쌓여 이 도시의 역사로 축적됐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이 일궈낸 인천의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인터뷰 진행/글 박현주(朴賢珠, Park Hyeonju)

경인일보 사회팀 기자




문화예술과 지역인재 육성의 토대를 마련하다: 인천대학교 김용민 교수와의 만남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문화예술과 지역인재 육성의 토대를 마련하다인천대학교 김용민 교수와의 만남

류수연(인하대학교 교수)

김용민 교수는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프로방스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 인천대학교에 부임하면서 인천과 연고를 맺은 뒤 지금까지 인천시민으로 살고 있다. 학내에서 인문대학 학장, 문화대학원 원장, 교수회 회장, 평의원회 의장, 법인 이사 등을 역임했다.

코로나19의 발생 이후 일 년 반이 넘게 비대면 수업이 이어지고 있는 모든 대학은 캠퍼스의 공동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코로나19라는 현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대학의 역할을 되짚어 보게 만들기도 한다. 문화예술 영역의 인재를 육성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설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김용민 교수를 통해 그 관계성을 되짚어보았다.

“지역문화 인재 양성과 문화 자립의 필요성”

불문학자인 김용민 교수가 인천의 문화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략 16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2008년 무렵 인천대 인문대학은 교육부 특성화 사업에 선정되었는데 이 사업의 한 꼭지가 바로 <문화매개자 양성사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인천대에는 문화예술가를 교육할 전문적인 커리큘럼이나 학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이에 김용민 교수는 지역문화계에 손을 내밀게 되었다.
김용민 교수는 대학의 특성화 사업이라는 현실적인 과제를 통해 지역문화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 지역문화계를 잇는 교량이자 인재육성과 지원을 목표로 설립된 인천문화재단이 막 초기 목표를 수행하던 때였다는 것도 큰 행운이었다. 말 그대로 대학과 지역의 니즈가 적실하게 만나게 된 것이다. 인천은 서울, 부산과 함께 대한민국의 3대 도시이지만 그 문화적 토양은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지역인재를 기를 육성시스템이나 그들이 자생할 수 있는 토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김용민 교수는 문화전공자는 아니었지만, 지역의 문화적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 가지는 중요성을 이때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대학이 있어야 함은 부정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당시 인천대는 지역문화계와의 연계성이 적었어요. 이건 아마 인하대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 연계성을 높이고 인재가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지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문화대학원의 필요성이 도출된 거죠.”

문화대학원의 필요성을 인식했지만, 그것이 현실화되기까지는 그리 쉽지 않았다고 한다. 지역문화인력 양성의 중요성에 대한 지역의 공감대가 충분하지 않았고, 특히 당사자인 대학 내의 인식이 매우 부족한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원 설립에 핵심인 정원 확보는 대단히 민감한 사항이었기 때문에 대학 구성원의 동의와 집행부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여러 난항을 겪으며 구성원을 설득했고 제반 조건을 준비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2012년 11월 인천대학교의 문화대학원이 설립인가를 받는 결실을 얻게 된다. 비록 정원 7명에 불과한 소박한 출발이었지만, 지역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인재들이 모일 거점이 마련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소소하지 않았다.

“인천에 뿌리를 두고 더 멀리 뻗어 나가야”

김용민 교수는 문화대학원 설립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문화전공자도 아닌 더구나 서양문학 전공자인 그가 지역예술을 고민하고 그 청사진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겸양은 오히려 인천대 문화대학원 설립을 추진했던 그의 의지와 지역문화에 대한 애정이라는 진정성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김용민 교수뿐만 아니라 지역의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든든한 지지가 인천대 문화대학원의 10년 역사를 일구어낸 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속처럼 인천대 문화대학원(2013년)은 인하대 문화경영대학원(2006년)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문화예술 인재를 양성하는 양대 거점으로 성장해왔다. 고질적인 인재난에 시달렸던 지역문화계에 수혈하는 기능적 역할에도 충실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제 인천이라는 도시의 규모에 걸맞은 문화적 인프라를 위해 도약할 때”

김용민 교수는 인천문화재단의 제5기 이사이기도 했기에 재단의 비전에 대한 의견 역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인천은 근대의 관문이었다. 개항도시라는 의미는 열려 있는 도시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인천의 현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여전히 공항과 항만을 가진 인천은 밖으로 열려 있는 도시이다. 따라서 김용민 교수는 인천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열린 공간을 지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가령 신포동을 보면, 그곳이야말로 다양한 문화가 역사라는 시간과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한 도시와 그 도시의 장소가 문화적 거점이 되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와야 한다. 서울을 모방하거나 복제하는  것으로는 이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서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그러한 동력이 모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금 인천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상상력이다.

“인천문화재단은 굵직한 정책과 비전으로 명실상부한 지역의 문화적 허브가 되어야”

김용민 교수가 던진 화두는 어쩌면 분명하다. 그가 인천문화재단의 활동을 애정을 갖고 성원한 지가 벌써 10여 년이 넘었다. 그런 그는 이제 재단이 그 본연의 가치에 보다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바로 광역문화재단으로서 비전과 인천이라는 도시 전체를 이끌 아젠다를 도출하는 일이다. 김용민 교수의 요청과 바람이 인천문화재단의 행보 속에서 실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청년기획자 윤재훈, 주민과 예술에 물들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청년기획자 윤재훈, 주민과 예술에 물들다

홍봄(기호일보 사회부 기자)

“예술의 힘은 봄비 같아요. 새롭게 물들게 해주고 또 올라오게 해주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지역주민들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볼 때면 봄비가 내리는 것 같아 가슴이 울립니다.”

인천시 서구에서 만난 윤재훈(31) 씨는 자신을 ‘기획자’라고 소개했다. 왜 ‘문화기획자’가 아닌 ‘기획자’인가 하는 물음에 그는 “장르를 떠나 뭐든 기획하기를 좋아해서”라고 답했다. 직접 댄스공연을 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다원예술 분야의 공연을 주로 기획하고 있다. 같이 춤추는 사람들이 좀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찾은 길이다.

그는 인천에서 오래 거주한 인천 청년이다. 하지만 초기 활동은 서울과 세종시, 경기도 쪽에서 시작했다. 활동을 시작할 당시 인천지역에 기회가 많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의 힘이 강하고 그들만을 위한 지원 사업이 많기 때문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랬기에 인천서구문화재단이 생겼다는 소식이 그 누구보다 반가워하며 지역으로 돌아왔다.

윤 씨는 “지역에 여러 가지를 건의했지만 잘 반영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외부에서 오히려 활동을 많이 했다.”며 “서구에 재단이 생기면 문화라는 장르로 활동할 기회가 많아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돌아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지역에서 처음 한 일은 주민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이었다. 2019년 인천서구문화재단의 청년기획자 사업으로 지역주민들과 댄스 장르를 향유했다. 주민들과 예술활동을 하면서 그는 ‘예술이 예술인만의 전유물이 아니구나.’하고 느꼈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술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2년 차 프로젝트까지 이어졌다. 1년 차 때 함께 했던 서구 주민들과 서구 문화자원을 알릴 수 있는 홍보영상을 제작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청라호수공원을 알리는 콘텐츠다. 청라호수공원 곳곳을 비추는 영상에 지역 주민들의 댄스 동호회인 ‘섹시코맨도’가 어우러졌다.

직접 기획한 공연도 꾸준히 무대에 오르는 중이다. 지금은 국악과 랩, 비보잉, 미디어아트 등을 결합한 다원예술 <미스테리우스> 공연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무대에 오르는 공연팀 ‘구니스컴퍼니’는 연예사병 해군 비보이 1기 출신 멤버들이다. 군을 전역한 뒤 한국의 미와 멋을 가장 잘 나타내는 전통장르에 자신들의 장점인 비보잉을 접목한 창작 작품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공연은 2019년 인천에서 거리공연으로 시연된 이후 독창성과 연출력을 인정받아 <2020 안산국제거리극축제>와 <고양호수예술축제>, <부산금정거리예술축제> 등 다양한 거리예술 사업에 선정됐다. 올해는 문화공감 공모사업으로 선정돼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오는 12월 서구문화회관에서도 공연을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예전만큼 관객들을 자주 볼 수 없는 것은 그에게도 서운한 일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예술가들도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느꼈다. 지난해부터 어떻게든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왔던 예술가들은 해가 바뀌어도 앞으로 나아간다. 반면 변화 없이 지원만 기다리는 예술인들은 그 자리에 멈춰 있는 모습을 본다.

윤 씨는 “저도 2020년에는 공연을 못하니 큰일 났다는 생각부터 했어요. 관객이 없이 공연할 맛이 안 나는 건 당연하지만 계속 그것만 따지고 있을 수는 없겠더라고요. 다르게 생각하면 오히려 활동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기회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비대면으로 공연을 하니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기도 하고요. 시국에 맞춰서 예술가들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온라인 문화콘텐츠들이 많이 생산되는 요즘 그는 ‘홍보’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온라인 스트리밍을 하는 자체에 그치지 말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알리고 불러모으는 것이 필요하다. 또 카메라 송출을 담당하는 팀의 전문성도 강조했다. 송출하는 업체가 행사를 잘 이해하고 아는 이야기를 해야만 적절한 앵글을 비춰주고 자막도 넣고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가들을 불러오고 공연을 기획했는데 보는 사람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며 “기관에서 하는 행사들도 송출만 해놓고 ‘우리 했어’하는 식으로 진행해서는 안 되고 마케팅에 전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 씨는 기획자로 활동해 오며 우리나라에 문화예술인 지원 사업이 참 많다는 것을 느꼈다. 몇 년 전부터는 지역 내에서 청년예술인들에 대한 지원도 다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기획에 대한 예술계의 인식이 여전히 박하다는 점이다. 청년기획자 프로젝트를 이어온 서구의 경우도 1년 차 때 지원되던 기획자 인건비가 2년 차였던 지난해에는 사라졌다가 올해 다시 생겼다. 윤 씨는 기획자는 예술인이 아니라는 편견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5개월 프로젝트비가 150만 원밖에 안 되는데 공연을 올려야 하는 기획자로서는 결국 자신의 인건비까지 써버려야 하는 상황이 된다.”며 “1년, 2년 차 때 했던 청년 기획자들도 사업이 너무 힘드니까 안 들어오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청년기획자라는 프로젝트는 지역의 청년기획자를 많이 발굴해서 발전시키려고 하는 건데 이런 방식이 과연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든다.”고 덧붙였다.

윤 씨는 예술가들이 지속가능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재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가들이 프로젝트가 아닌 다른 일에 집중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또 적은 비용으로 많은 단체를 지원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신진단체는 이 돈으로 사업을 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기존 활동이 많은 단체들은 또 다른 재원을 마련할 여건이 되니까 사업을 할 수 있지만, 그렇다 보니 새로운 공연을 만들지 못하고 했던 공연을 또 하게 된다. 결국엔 지역의 문화발전이 안되고 예술단체는 성장 없이 돈 벌어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기획자로 살아온 지난 4년 동안 하나씩 배우며 공부해 왔다는 그는 앞으로 더 많은 지역 주민, 예술인들이 설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어나가고 싶다. 함께 만든 프로젝트, 같이 땀 흘린 무대가 박수를 받을 때만큼 행복한 순간이 없기 때문이다. 윤 씨는 “주민과 예술가들이 즐거워하고 관객들이 박수를 쳐주실 때면 모든 고생들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라며 “기획자로서 더 많은 주민들이 예술을 접할 수 있는 참여 여건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글 홍봄(洪봄, HongBom)

기호일보 사회부 기자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극단 십년후, 다시 사람을 경작하는 최원영 교수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사랑하며 살겠습니다극단 십년후, 다시 사람을 경작하는 최원영 교수

류수연(인하대학교 교수)

최원영 / 행정학 박사

(현)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겸임교수
(현) 기호일보 칼럼 「최원영의 행복이야기」 집필
(현) 인문학 모임 다카스(DACASDiscover Accept Concern Achieve Spread) 클럽 이끔
(전) 인천문화재단 초대이사
(전) 극단 십년후 창단 및 대표

최: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최원영입니다. 모두 안녕하신가요? 어떤 질문부터 시작할까요?

류: 선생님께 대한 질문의 시작은 아무래도 극단 십년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비록 극단을 떠나셨지만, 지역극단의 의미를 만들어낸 리더십이라는 명성은 여전하시니까요. 창단에 관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최: 내가 원래는 초등학교 선생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미국에 유학 가기 전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이 친구와는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인데, 서로 아주 친했어요. 이 친구가 지금은 밀양연극촌 3대 촌장으로 있어요. 원래는 지방에 있는 대학의 교수였는데, 지금 우리 나이로 66세니까 대학을 퇴직할 때가 됐잖아요. 어쨌든 교수로 있으면서 촌장이 된 거죠. 그 친구 얘기예요. 당시 내가 미국으로 떠나겠다, 하니까 이 친구가 본인도 유학을 떠나겠다, 이런 거죠.

류: 그럼, 같이 유학을 결심하신 건가요?

최: 그렇진 않아요. 저는 미국에 가서 정치학을 하겠다고 했고, 그 친구는 중앙대 연극과 연출 전공을 했는데 일본에 갔다가 인도로 가서 학위를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떠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때는 어렸으니까 십 년 있으면 대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포 한 잔 나누면서 헤어지기 전에 십 년 후에 자기 자리에서 최고가 되어 만나자. 그래서 우리가 공동으로 뭔가 할 수 있는 공간을 하나 만들자. 평생 무료로. 돈은 다른 일에서 벌고.

류: 멋진 포부셨군요.

최: 그래서 1984년에 떠나서 1994년에 돌아와서 만났어요. 그때 저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이고,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실험이 필요했어요. 논문이 아니라 동아리를 만들어서 실제로 그곳에 진실한 사랑이 들어갔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이걸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제가 귀국한 지 몇 개월 후에 친구도 나왔는데 그 친구에게도 연출을 할 수 있는 극단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십 년 전의 약속을 이름으로 해서 ‘십년후’가 창단이 된 거죠. 처음에 3년을 같이 하다가 그 친구는 경산에 있는 대경대학교에서 마침 교수를 뽑는다고 해서 거기로 갔고, 그게 장진호 교수예요. 장 교수가 가면서 소개해준 사람이 지금 십년후의 송용일 대표예요. 장 교수가 떠난 후에 이분이 그 이후 20여 년 동안 연출을 했죠. 이분이 당시 경기대학교 연극과에 겸임교수로 있었는데 무대제작이 전공이세요. 그렇게 같이 꾸려왔죠.
우리가 사랑으로 극단을 운영하려고 했던 노력이 있어요. 하나는 우리가 처음에 고등학교 막 마친 일곱 명을 데리고 시작했어요. 그게 1994년이에요. 1~2년 지나서 어느 날 그중에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에 다니던 단원이 연습하는데 다리가 퉁퉁 부어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인가 알아봤더니 그 친구가 학비가 모자라서 밤새 종일 서서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극단에서 연습한 거죠. 그런데 당시 우리 장 교수가 몸 연극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훈련을 시키니까 지치잖아요. 또 일까지 그렇게 하니까 더 힘들었던 거죠.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얼마가 돈이 더 필요하니? 그랬더니 80만 원이래요.

류: 당시 80만 원이면 굉장히 큰돈이죠. 제가 95학번인데 당시 학비가 160~180만 원 정도였던 것 같아요. 돈 가치는 훨씬 컸고요.

최: 네, 그래서 80만 원을 구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선배님을 찾아갔고 80만 원을 거의 강탈을 했죠. 하하. 그런데 그걸 극단에서 줄 수가 없잖아요. 다들 어려우니까. 그래서 밖으로 불렀어요. 그리고 그 돈을 주면서 당장 아르바이트 그만두라고 했죠.

판타지 뮤지컬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2002.12.4.~12.8. ⓒ극단 십년후

또 한 가지는 그게 뮤지컬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을 할 때였어요. 그게 대작이었죠. 그때 잘 돼서 순회공연도 하고 그랬는데 공연 횟수로 보면 한 300회 정도 했어요. 큰 성공을 한 거예요. KBS에 가서도 하고. 그런데 뮤지컬이 돈이 많이 들어요.
기억에 남는 날이 있는데, 내 기억에 그날이 12월 8일이었던 것 같아요. 인하대에서 수업을 마치고 공연이 있는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을 갔어요. 대공연장은 1500석이었죠. 그날은 마지막 공연이었는데 고약하게도 눈비가 섞여 내렸어요. 그런데 2층 매표소에서부터 사람들이 두 줄로 쭉 서서 주차장이 있는 데까지 늘어선 거예요. 직원이셨던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유명 가수가 오는 것 아니고서는 이렇게 줄이 늘어선 적은 없었다는 거예요. 그때 작곡을 해주신 분이 최종혁 선생님이셨어요. 그날, 이 어른과 제가 손을 잡고 울었어요. 너무 기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해서요.

류: 정말 기쁘셨을 것 같아요. 지금도 흔치 않은 일일 텐데요.

최: 그런데도 그때 저는 6~7천만 원 정도 빚을 졌어요. 그날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분장실에 갔는데 분위기가 이상한 거예요. 원래 우리 애들이 밝아요. 근데 그날은 말이 없이 무척 무거웠어요. 당시 창단 때부터 같이 있었던 이경미라는 단원이 주인공인 삼신할머니를 했었는데, 이 친구도 얼굴이 어두운 거예요. 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도 말을 안 해요. 그래서 연출 선생님과 기획실 직원들을 따로 불러서 물어보았어요. 그런데 서울에서 온 기획사가 그 전날인가 이 작품을 찍어 갔대요. 그러면서 이건 전국적으로 공연해도 성공할 것 같다면서 같이 하자고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서 2억을 주겠다고 했어요. 대신에 순회공연을 하면서 2억이 될 때까지는 자기들이 다 갖고, 그 이후부터는 반반씩 나눈다는 조건이었어요. 이게 첫 번째 조건이고. 이 제안은 저희에게는 무척 좋은 조건이잖아요?

류: 그렇죠. 괜찮은 조건인 거죠.

최: 우리는 그런 기획력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두 번째 조건이 뭐냐 하면 그 삼신할머니 역을 탤런트를 쓰자는 거예요.

류: 아…. 그게 문제였네요.

최: 극단의 살림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게 나쁜 게 아니죠. 살림이 뭐가 있어야 애들도 챙겨줄 수 있으니까. 기회인 것 같다는 의견도 많이 나왔어요. 연출자도 마찬가지이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순식간에 빚은 청산이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선생이라 생각이 좀 달랐어요.

류: 그러셨을 거 같아요.

최: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내 아이를 키워서 저기 더 큰 세상에 우뚝 세우고 싶은데, 이런 기회에 내 아이는 객석에서 보고 있고 다른 탤런트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면 내 아이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나는 우리가 처음 이 극단을 만들 때 사랑으로 키우고자 했는데, 이건 거기서 벗어나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내가 말했어요. 기획사에 전화해라. 20억을 줘도 이 아이를 삼신할머니로 쓰지 않으면 못한다. 그렇게 얘기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안 되었어요.

<사슴아 사슴아: 목종비곡(穆宗悲曲)>,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2001.12.1.~2. ⓒ극단 십년후

그런데요. 그게 그렇게 끝나지 않더라고요.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서 2006년 <사슴아 사슴아: 목종비곡(穆宗悲曲)>가 전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어요. 바로 그 아이가 연기상도 받았고요. 물론 연출상도 받았고. 그런데 그걸로 끝나지 않고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도 전국에서 2~3천만 원씩 공연비를 받으며 6~7년을 더 공연했어요. 그래서 사람도 살리고 작품도 살렸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극단의 저변이 넓어졌어요. 단원들도 극단에 대한 믿음이 생겼겠죠. 그리고 리더 그룹이 우리도 눈앞의 금덩어리보다 제일 소중한 자산인 사람을 안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치를 공유하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해요.

류: 그렇다면 역시 선생님께 극단 십년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겠군요?

최: 아무래도 그렇죠.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 성공을 하고 나니까 좀 욕심이 나더라고요. 돈은 많이 들어도 역사를 뮤지컬로 만들어보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제가 생각했던 작품은 먼저 ‘Universal’, 작품에 좀 철학이 담겼으면 좋겠다. 또 하나는 ‘Easy’, 작품이 좀 쉬웠으면 좋겠다. 다음으로는 ‘Exciting’,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걸 강조 했었어요. 이걸 가지고 우리 역사를 풀어보자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 극본은 대체로 고동희 선생이 썼어요.
이렇게 처음 만들어진 공연이 단군신화를 다룬 <박달나무정원>이였어요. 다음으로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 즉 대중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 울타리 밖으로 사랑을 전파하려고 한 인물이 누굴까 하고 찾으니까 바로 광개토대왕이 있었어요. 그래서 광개토대왕의 어린 시절을 다룬 <꽃님>을 뮤지컬로 만들었어요. 이후 이런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사랑, 집단의 사랑, 그리고 그것이 충만하게 넘쳤을 때 외부로의 확장, 이런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를 찾다 보니까 소서노라는 어머니가 있었어요. 그래서 소서노를 주인공으로 한 <도칸, 소서노>가 나왔죠. 이렇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한 번 정리해봤어요. 이렇게 역사의 위대한 순간마다, 혹은 인생의 굴곡마다 그 시대의 영웅들 속에 감춰져 있었던 모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 나라를 지탱한 힘이었구나.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어요.

극단 십년후 슬로건 ⓒ극단 십년후

우리 극단의 슬로건이 창단 때부터 ‘사랑하며 살겠습니다’예요. 원래의 극단 로고는 서로 기대어 있는 두 잎사귀가 있고, 그것을 태양이 비추고 있어요. 그런데 이 태양이 좀 구부러져 있어요. 무슨 의미냐면, 내가 크려면 누군가가 받쳐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나만 돋보이고 밑에 있는 잎은 영원히 사다리가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 구부러진 태양이 제일 밑에서 받쳐 주는 잎을 빛을 줘서 키워요. 이것이 끊임없이 순환되면서 크는 거죠.
그래서 저는 극단 단원들이 더 큰 곳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또 새로운 사람들이 오고. 처음에는 우리 극단의 연출가도 이걸 이해 못 했어요. 안무 선생님, 화술 선생님까지 붙여서 열심히 가르치고, 음향이나 조명도 가르치고 했는데 연기가 될 만하면 나가고 하니까. 이분은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얼마나 안타까웠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해하고 계셔요.
저는 그랬어요. 키워서 내보내야 한다. 지금은 손해 볼지 몰라도 나중엔 그렇지 않다. A라는 사람이 서울에 가서 스타가 되면 결국 자기를 키워준 곳을 돌아보게 된다는 거죠. 이 사람이 여기 올 때는 그냥 오는 게 아니죠. 관객들과 스탭들을 달고 오지 않겠어요. 전문가들을 달고 오고. 그러니까 끊임없이 여기서 내보낼 수 있어야 더 큰 눈덩이가 만들어지는 거죠. 각각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욕망이 구현될 수 있도록 희망으로 바꾸어줘야 한다는 것, 이것이 극단의 가치인 ‘사랑으로 살겠습니다’의 요체인 셈이에요.

류: 정말 좋은 뜻을 가지고, 그것을 계속 실천해 오신 것 같아서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또 궁금한 게 미국에서 원래 정치학을 공부하셨다고 했는데 귀국 후에는 의외로 연극 활동을 하셨으니까 내부에서 부딪치시거나 힘드셨던 적은 없었는지요?

최: 많았지요.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 승승장구를 하니까 한번은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거기가 공간이 좀 작아요. 여름방학 한 달 동안 인원수를 줄여서 2천만 원 정도 받고 공연을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7명 나오는 작품으로 축소해서 공연을 했어요. 이때 맡았던 중견 배우가 자기 나름으로는 여기서 공연을 하면 아르바이트비 정도는 아이들에게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셨던 거 같아요. 그때가 우리가 빚을 좀 청산을 했을 때예요. 다 끝나고 나서 기획실장이 정산보고서를 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그 공연을 대표했던 중견 배우가 속이 상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줄 돈이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적었던 거예요. 당연히 속상했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분을 만나 말했어요.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을 처음 준비했을 때, 녹음해주신 원로배우나 수많은 스텝이 거의 무료로 해주셨어요. 작곡해주신 최종혁 선생님 같은 분은 보통 뮤지컬 작곡하면 받는 금액의 5분의 1 정도만 받고 기꺼이 해주셨어요. 이렇게 헌신하신 분들이 계셨기에 이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중견 배우는 용산에서 한 달 동안 번 수입만을 나누는 것으로 여겼으니까, 적다고 생각한 거죠.

류: 두 분 다 사실은 좋은 뜻이셨네요. 그 배우님께서는 고생한 단원들을 더 챙겨주고 싶으셨던 거고, 선생님께서는 이전에 고생하셨던 분들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셨던 거군요.

최: 맞아요. 그런 거죠. 우리한테 작품을 하고 나서 돈을 나누는 전통이 있어요. 뭐냐면 돈을 봉투에 넣고 이름을 써서 광주리에 넣어요. 그리고 제가 돈을 다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제일 수고한 단원이나 나이가 가장 많은 단원이 그중 하나를 뽑아서 그 사람을 주면서 포옹을 하고, 뽑힌 사람이 다음 봉투를 뽑아서 그 사람에게 주고 포옹하고, 이런 식으로 해요.
사실 저는 20년 가까이 극단을 이끌면서 저는 월급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게 시작할 때 약속이었으니까. 저는 밖에서 벌어 먹고살고, 때로 모자라면 채워 넣는 역할을 하겠다고 결심했으니까 그렇게 했던 거죠. 아까 말했던 대통령상을 받았을 때 상금이 2천만 원이 나왔어요. 그래서 배우들에게 이 돈을 어떻게 썼으면 좋겠냐고 의논해보라고 하고 나는 자리를 피해줬어요. 그랬더니 배우들이 극단이 어려우니까 극단에 놔둡시다. 이러는 거예요. 얼마나 고마워요? 모두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달랐어요. 저는 살림살이하는 고 실장을 불러서 배우들, 스탭들에게 전처럼 광주리 행사를 했어요. 그랬더니 도립극단이나 다른 곳에서 돈을 버는 중견 배우들 몇 분은 나눠드린 수고비를 다시 극단에서 쓰라며 돌려주셨어요. 참 고마운 일이죠. 그분들도 돈이 필요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이란 생각이 들어요.

류: 정말 하나의 공동체였고, 그렇게 실천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극단 십년후를 벗어난 선생님의 삶에 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십년후 대표를 그만두시고 밖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요. 근황을 이야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최: 이렇게 사는 것이 원래 제 꿈이기도 했어요. 처음엔 극단 안에서 단원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열었어요. 사실 당시 단원들은 인문학이 뭔지 모르고 저도 공부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영어회화를 함께 공부하자고 했어요. 훗날 단원들이 외국에서 공연해야 할 때도 있을 테니까요. 그 공부를 하면서 중간중간에 인문학을 끼워 넣었던 겁니다.
처음엔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그걸로는 뭔가가 부족한 것 같아서 동양철학을 함께 공부했어요. 그리고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심리학을 공부하게 됐지요. 사실 저는 미국에서는 10년 동안 학부 과정만 했어요. 저는 10년이면 박사까지 다 끝날 줄 알고 한국에서 대학 다닌 것을 기재하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한 것만으로 대학을 들어갔어요.
그런데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대학을 다니니까 진도가 안 나간 거예요. 나중에 한국에 들어와서 인하대에서 석박사 10년을 또 한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아이들에게 가르칠 인문학 공부를 한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문학을 접하다 보니까 그동안 가졌던 제 생각 또한 달라졌어요. 예컨대 누군가를 이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들이 저절로 아름답게 크도록 여건을 형성해주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그린 설계도대로 집을 지어서 사람들을 그곳에 살게 하면 그 사람들은 기호가 달라서 불행할 수도 있잖아요. 미국을 가기 전에는 그런 설계도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인문학을 접한 후에는 그게 얼마나 교만한 일인지 그때 알게 된 거죠. 만약 제가 빈 텃밭을 마련해서 제 계획대로 심어서 계획대로 결실을 본다면 그 성취감을 저만이 느끼겠지만, 만약 제가 이 텃밭만을 마련해주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그 텃밭을 가꾸게 해주는 리더라면 훗날 텃밭에 꾸려질 아름다운 동산은 제 상상을 초월한 모습이지 않겠어요? 얼마나 감동이겠어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면 구성원이나 저 모두 감동일 겁니다. 모두가 텃밭의 주인이 되는 셈이지요.

류: 요즘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이미 20년 전에 시작하셨군요. 당시엔 오히려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이 더 지배적이던 시절인데요. 확실히 앞서 나가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너무 과찬이시고요. 하하. 제가 미국에 갈 때 들고 간 책이 『정경숙(政經塾)』이라는 일본 책이었어요. 파나소닉의 창업주인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쓴 책이에요. 결국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의미로 정치경제 아카데미를 설립한 거죠. 저도 꿈이 이런 아카데미를 하고 싶었어요. 극단 십년후가 그 첫 번째 실험이었던 거죠. 40대 후반엔 성경과 불경을 공부했어요. 거기서 결국 용어는 달라도 가르침의 끝은 똑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바로 ‘사랑’이었던 거예요. 그것도 ‘진실한’ 사랑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가 극단의 울타리를 넘어서 그 사랑을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카스(DACAS)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여기서 ‘D(discover)’는 ‘발견하라’라는 의미인데, 뭘 발견하느냐 하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행복할 수 있는 이치를 발견하자는 거죠. 그런데 그 이치를 찾아서 배워도 아직은 내 것이 아니잖아요. 두 번째 ‘A(accept)’는 그걸 내 걸로 만들라는 거죠. 세 번째 ‘C(concern)’는 관심을 두는 거죠. 이건 사랑으로 교류하고 나누라는 의미에요. 그렇게 나누다 보면 ‘A(achieve)’로 함께 성취하겠지요. 다섯 번째는 이렇게 성취한 것을 우리끼리 갖지 말고 울타리 밖으로 나누어라. 즉 ‘S(spread)’, 확산시키라는 거죠.
이 과정을 6개월에서 1년을 인천에 있는 리더 그룹들과 함께했어요. 이런 취지로 11년 전에 30~40명 정도로 시작을 했지요. 이것 역시도 무료예요. 처음에는 무료라는 것 때문에 걱정을 샀어요. 주변에서는 제가 정치를 하려고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리고, 또 가까운 지인들은 무료이면 사람들이 더 안 온다고 걱정도 해주셨어요. 더구나 이걸 제가 혼자 강의를 했어요. 혼자서 한 이유는 내가 잘 알아서가 아니에요. 교육의 일관성 때문이었어요. 여러 강연자가 오면 각각의 좋은 강의여도 모든 강의 일정이 끝나면 찐하게 남지를 않아요. 그래서 제가 혼자서 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1500명 정도가 이 공부를 했어요.

류: 제가 인터뷰 준비를 위해 자료조사를 하다 보니까 정말 많은 분들이 선생님의 강연에 대해 블로그 같은 곳에 후기를 올리셨더라고요. 정말 재미있고 유익했다고.

최: 제가 인터넷을 안 해서 못 봤네요. 감사한 분들이네요.

류: 그래서 선생님의 강의비결을 여쭙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대중강연의 비결은 역시 다카스로부터 온 것일까요?

최: 아무래도 그렇겠죠. 다카스에서의 경험이 결국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만들었을 거예요. 지금 기호일보에 매주 쓰는 칼럼도 그렇고요. 매주 금요일마다 칼럼을 쓰는데 벌써 5년이 되었죠. 매주 칼럼을 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근 30년을 새벽에 연구실에 가서 독서를 해요. 미국에서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공부했기 때문에 잠을 3시간밖에 못 잤어요. 11시 반에 집에 들어와서 12시부터 3시까지 공부하고, 잠시 잤다가 다시 6시면 일을 나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몸에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도 3시간 이상은 못 자는 것 같아요. 몸이 그 리듬에 맞춰진 거지요.
책을 사면 저는 어떻게 읽느냐면, 컴퓨터에 워딩을 하면서 읽어요. 그렇게 하면 300여 페이지 책이 약 80페이지 정도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다른 새 책을 읽다가 지치면 워딩해 놓은 요약본을 다시 봅니다. 그때 어느 부분은 ‘사랑’에 대한 자료 파일에 넣고, 또 다른 부분은 ‘친절’이라는 파일에 넣고, 이런 식으로 작은 파일들이 주제별로 수십 개가 있답니다. 그 파일들 안에는 수백, 수천 권의 책 내용이 주제별로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칼럼이나 강의에 필요한 자료들이 30년 동안 쌓여 있는 셈이에요. 그래서 남들보다는 수월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거죠. 인문학 콘서트는 기호일보 사장님으로부터 제안을 받고 5~6년 전부터 1년에 한 번씩 열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경비는 기호일보사에서 책임지고 저는 강의만 했습니다. 저로서는 참 고마운 신문사에요. 제가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언론사가 시민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건네는 일도 중요하다면서 저에게 용기를 주셨거든요.

류: 코로나 이후로 인문학 콘서트는 어떻게 진행하고 계신가요?

최: 코로나 때문에 강연이 진행될 수 없으니까 유튜브로 녹화해서 진행하고 있어요. <최원영의 책갈피>라는 제목으로 올리고 있어요. 많은 분이 시청하고 계시진 않지만 몇 분이라도 이 방송을 통해 위로를 받으시고 희망의 문을 여는 열쇠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최원영의 책갈피] 1화 <정답 없는 길 그래도 그 길을 가보고 싶다>, 2021. 5. 26.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YwIZ6UEtefs)

류: 인터뷰 후에 저도 꼭 구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정리하는 느낌의 질문을 드리는데요. 선생님께 십년후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요? 또 극단 바깥에서 지금의 십년후에 어떤 말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최: 지금 참 힘들 거예요. 힘들 수밖에 없어요. 환경이 아무래도 열악하니까. 그래도 이 힘든 과정에서 우리 단원들이 조금 더 버텨냈으면 좋겠어요. 예상한 대로 되지 않을 때 그다음은 두 가지 길밖에 없잖아요. 포기하든지 버티든지. 포기하면 다른 데 가서 또다시 시작해야 해요. 그럴 수 없을 만큼 연극을 하고 싶다면 답은 버티는 것밖에 없습니다. 결국 버티는 사람이 이겨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도 잘 버텨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고루한 생각일 수 있지만, 결국 어느 정도는 배고파야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이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죠. 지금까지 십년후 식구들 모두 너무나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요.
십년후는 저에게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에요. 사실 처음 시작할 때는 ‘내가 너희를 키울 거야.’ 이렇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단원들로부터 위로받고 격려받고 있더라고요. 지금 다카스라는 아카데미를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준 곳 역시 십년후에서의 경험이에요. 그러니 어머니의 자궁 같은 존재이지요.

류: 요즘 코로나 때문에 다들 힘들지만, 특히 공연계가 타격이 가장 큰 걸로 알고 있어요. 극단 십년후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요?

최: 그래도 온라인으로 공연을 몇 차례 하면서 잘 해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도 1년에 2~3편씩은 꼬박꼬박하고 있어요. 지금은 대한민국연극제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거고요. 2년 전에는 김구에 관한 뮤지컬을 만들어서 공연했고요.
십년후의 힘은 같이 밥 먹는 공동체 생활이 아닐까 싶어요. 밥숟가락에서 정이 생기잖아요. 우리는 모두 가족이 된 것 같아요. 지금 중구에 극단 사무실이 있는데, 그 건물 지하실이 수년째 비어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송용일 대표가 원래 무대 제작자예요. ‘서울무대’라고 아주 큰 무대 제작사를 운영했어요. 예컨대 <투란도트> 무대 지붕을 제작했고 유명한 영화 세트도 만들었고요. 이렇게 무대 제작에는 일가견이 있는 분이죠. 이분의 지론은 장기적으로 공연할 수 있는 소극장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극단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주인어른하고 이야기가 잘 돼서 그 지하실에 소극장을 지금 꾸미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좋은 작품을 오래 공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 저는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류: 선생님께서는 공동체 활동도 하셨고, 지금은 독자적으로 자신의 것을 꾸리고 계시잖아요. 어느 쪽이 선생님께 더 맞는 것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최: 저는 원래의 꿈이 지금 하는 이것이었죠.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것. 이렇게 전하는 것을 위한 저 나름의 실험이 극단 십년후였기 때문에 이것이 다 연장선에 있다고 봐요. 인문학 콘서트가 올해 가능하다면 하려고 3월부터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 다카스 회원들과 함께 그 안에서 <봉숭아학당> 같은 연극도 준비를 해왔어요. 이렇게 극단과 지금 제가 하는 일이 다 연관이 되는 거죠. 그래서 어느 것이 더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다 연관이 되어 하나로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이 돼요. 만약 극단 십년후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제가 강의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했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까지 이 모든 경험이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류: 삶에서 수많은 선택이 항상 맞아떨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돌이켜 보면 그것들이 연결되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그런 선생님의 실행이 축적되고 그것이 강연에 녹아든 것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료의 축적도 있지만, 그 실행에서 오는 힘이 지금의 선생님을 만든 진짜 힘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최: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변곡점이 있잖아요. 변곡점마다 선택의 길이 두 개가 나오죠. 이 선택의 길에서 딜레마에 빠지는 이유가, 이걸 얻으면 저걸 잃고 저걸 얻으면 이걸 잃기 때문이에요. 이때 무엇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하느냐. 그건 바로 ‘가치’인 거죠. 사랑이라는 가치를 기준에 두고 바라보면 포기해야 하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그 기준만 가지고 있으면 사실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게 하나하나 쌓일 때마다 주위에서는 그 사람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게 결국 사회적 신뢰라는 것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겠지요.
우리 극단에서 작곡해주신 최종혁 어르신과의 관계가 그래요. 처음엔 무릎 꿇고 겨우 도움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이렇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더라고요. “나 이제 이 집단에서 내쫓지 말어.” 이렇게 식구가 된 거죠. 우리나라에서 유명하신 분장사분은 얼마 드리지도 못하는데 그 비용을 또다시 극단에 후원금으로 보내주시곤 했어요. 이렇게 우군이 되어준 스탭이 계셔서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거죠.
그래서 변곡점마다 손해를 보더라도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지속해서 행동해나갈 때, 사회적 신뢰가 생기고, 이 신뢰가 결국 사회 전체의 진화를 이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손해 볼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요.

류: 지금 말씀에 백 프로 공감합니다. 손해를 너무 이해타산적으로만 생각하면, 자신도 성장하지 못하고 남도 깎아 먹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함께 하기 위해 때로 손해를 감수할 때, 오히려 같이 성장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최: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게 문제죠. 사실 그게 힘이 있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더 심해요. 그래서 이 나라가 이렇게 갈등구조에서 벗어나기 힘든 거죠.

류: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과 같이 크려고 해야 같이 성장하는데, 옆을 밟으면서 크려고 하면 결국 나중에는 둘 다 무너진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최: 그렇죠. 결국 자신도 덫에 걸린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류: 선생님 말씀에 정말 깊이 공감합니다. 오늘 인터뷰에서 ‘사랑하며 살겠습니다’라는 가치를 지켜온 선생님의 실행과 삶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 ‘인천’이라는 도시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한 지역의 가능성을 성장시키는 힘 역시 사람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인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최: 제가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라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조금 꺼려요. 강의할 때나 말을 꼭 해야 할 때가 아니면 입을 다물고 살아요. 그런데도 이렇게 저를 인터뷰해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분이 사랑을 나누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누리시기를 진실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친 일상 벗어나 문화 예술 활동가 역할 ‘톡톡’: 조연희 씨 인터뷰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지친 일상 벗어나 문화 예술 활동가 역할 ‘톡톡’조연희 씨 인터뷰

박현주(경인일보 사회팀 기자)

조연희 ‘생활문화센터 운영 활성화 프로그램 지원사업 <공감이 공감했다>’ 참여 작가

■ 육아로 지친 일상 속, 문화 활동 통해 자신감 되찾아조연희 씨(35)는 여가에 그쳤던 문화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지난 2018년, 부평구문화재단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 기자단에 지원했다. 그는 지역 문화 예술 활동을 주관하는 부평구문화재단 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관람한 공연·전시 등 문화 활동을 시민에게 온라인으로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이전에는 한 공연을 단순히 관람하고 평가하는 관객 입장이었다면, 기자단 활동을 한 이후엔 작품 기획과 제작, 연출 등 작품 전반에 걸쳐 관심을 두게 되더라고요. ‘이 작품은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자 했을까?’, ‘배우와 관객은 작품을 통해 얼마나 소통했을까?’ 등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육아와 씨름하던 조 씨는 지역 문화 예술 활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삶의 활력을 찾았다고 한다. 은행원이었던 조 씨는 결혼하고 두 살 터울의 자녀를 키우느라 일을 관둬야 했다. 육아로 장시간 일을 하지 않다 보니 경력이 단절된 여성을 뜻하는 ‘경단녀’가 남 얘기가 아니었다. 조 씨는 ‘사회에 나가 내가 평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고 한다.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인천 곳곳에서 하는 길거리 공연과 한국무용, 사진전, 뮤지컬을 찾아다니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더라고요. 기자단 활동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되찾았어요.”

조 씨는 부평구문화재단 SNS 기자단 외에도 인천시·남동구 SNS 기자단과 인천환경공단 인천환경미디어서포터즈 활동을 하고 있다. 지역사회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에 나섰던 그는 지난해 부평구 문화도시 지정을 추진하는 민·관 기구에서 시민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달부터는 부평구문화재단이 생활문화 활성화를 위해 마련한 사업 <공감이 공감했다>에 참여하고 있다.

■ 지역 이야기를 담아낸 연극부터 코로나19 시대 비대면 공연까지, 눈에 띄는 작품들 ‘속속’인천에서 나고 자란 조 씨는 문화 활동을 통해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지역의 이야기를 알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지난 2018년 부평아트센터에서 열렸던 <터무늬 있는 연극×인천_부평 편>을 부평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작품으로 손꼽았다. 연극은 비옥한 토지를 가져 물자와 사람이 많았던 부평이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인을 징용해 무기 제조 공장 ‘조병창’으로, 해방 직후엔 미군의 군수 보급 기지인 군수지원사령부로 재편된 과정을 그려냈다.

“땅에도 고유 무늬가 있다는 의미의 ‘터무늬 있는 연극’은 평소처럼 공연장에 앉아서 보는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관객이 배우를 따라 부평 곳곳을 이동하면서 관람하는 색다른 형식으로 진행되니 각 공간이 지닌 상징성과 역사적 의미가 더욱 크게 느껴졌어요.”

조 씨는 이 연극을 통해 일제강점기 징용 노동자 숙소로 쓰인 미쓰비시(삼릉·三菱) 줄사택과 영단주택, 미군이 주둔하면서 클럽의 음악이 발달한 신촌 일대를 누볐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미쓰비시 줄사택이었어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줄사택이 훼손된 것을 보고 ‘왜 이곳을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크더라고요. 각 공간에 서려 있는 역사적 배경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뜻깊은 기회였습니다.”

조 씨는 지난해 9월 부평아트센터 개관 10주년을 맞아 진행된 연극 <극장을 팝니다>도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이 연극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극장이 매물로 나왔다는 가정 아래 관객이 극장 예비 매입자로 방문한다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연극 한 회당 5명만 입장할 수 있도록 한 <극장을 팝니다>는 개인 유선 이어폰을 꽂은 관객이 진행자 이야기를 듣고 극장 구석구석을 살피는 것으로 전개된다. 관객 1명이 지정된 동선으로만 다니도록 기획된 코로나19 시대 맞춤형 비대면 공연이다.

“불 꺼진 대강당에 나 홀로 입장해서 둘러볼 기회가 언제 오겠어요. 무대 뒤편 숨겨진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연장이 문을 닫았잖아요. 이런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연극을 구상했다는 점에서 기발하고, 색다른 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 지난달부터 마을 환경 개선 사업 참여 “지역 사회를 위한 문화예술 활동 참여 지속할 것”조 씨는 지난 6월부터 부평 주민과 지역 예술가가 협력해 마을 문화 예술 환경을 개선하는 부평구문화재단 사업 <공감이 공감했다>에 작가로 참여하고 있다. 오는 10월까지 진행되는 이 사업에는 회화와 팝아트·사진·공예·도자 등 다양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부평 지역 마을 4곳이 지닌 고유의 특성을 되살리기 위해 투입된다. 예술가는 주민과 함께 마을을 ‘어떤 방향으로 조성할지’ 논의하고, 벽화 제작이나 공예품 전시 등 각 마을에 어울리는 문화 예술 활동을 지원한다. 조 씨는 새롭게 단장하는 마을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글로 남기는 기록 작업을 맡는다. 그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데다, 수년간 시민 기자 활동을 통해 글을 썼던 이력이 있어서 적임자로 꼽혔다.

2021 생활문화센터 운영 활성화 프로그램 지원사업 <공감이 공감했다> 포스터 ⓒ부평구문화재단

“이번 사업은 주민과 예술가가 수차례에 걸쳐 기획 회의를 한 뒤 진행됩니다.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다들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저는 4개월간 마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과정을 사진과 글로 생생하게 담겠습니다.”

조 씨는 앞으로도 지역 사회에서 하는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해 도움이 될 방안을 찾겠다고 했다.

“문화생활이 단순히 부차적인 활동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주민 간 서로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로 활용됐으면 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지역 사회 문화예술 활동에 관심 가지고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진행/글 박현주(朴賢珠, Park Hyeonju)

경인일보 사회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