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호흡하는 공연기획자 조화현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오늘과 호흡하는 공연기획자 조화현

류수연

조화현

공연기획자, i-신포니에타 단장
제2회·제3회 순천만국제교양악축제 예술감독과 제8기 인천문화재단 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경인방송 iFM 김성민의 시사토픽에서 <조화현의 문화톡톡>을 맡고 있다.

◆ 본 인터뷰는 2021년 3월 24일, 화상회의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밝혀 둔다.

류: 단장님, 안녕하세요? 항상 가까이에서 뵙다가 이렇게 화상회의로 뵈니까 또 다른 기분인 것 같아요.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화면 뒤로 보이는 집안이 너무 정겨워 보이네요. 지금은 어디신지, 또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조: 하하. 그렇게 보이나요? 저는 오늘 여수에 있고요. 보시다시피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요즘은 주로 꽃을 심고 꽃을 가꾸고 이렇게 지내고 있어요.

류: 지금은 여수에 계시는군요. 여수는 지금 봄꽃이 한창이겠어요? 전에 여수에 갔던 적이 있는데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특히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먹기만 하다 온 기억이 있어요.

조: 그러셨군요. 여기 음식은 정말 맛있죠. 채소 맛이 다른 건 아마도 흙이 좋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여기는 남쪽 지역이라 꽃들이 빨리 펴서 봄꽃이 아주 만개했어요. 인천은 어떤가요?

류: 여기도 벚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만개했다고 할 순 없어요. 다음 주면 인천에도 꽃이 만개하지 않을까 생각돼요.

조: 아. 제가 내일 인천에 가려고 하는데 꽃을 보고 올 수 있겠어요.

류: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해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이 많이 줄어들었던 해였지만, 그래도 단장님께서는 주목할 만한 여러 활동들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어떤 활동들이었는지 잠시 소개 좀 해주세요.

조: 작년에는 정말 힘든 해였어요. 공연도 다 취소되어서, 사실 평소의 절반도 못했던 한해였어요. 그래도 열심히 하려고 더 노력을 많이 했던 해이기도 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2004년부터 실내악단 i-신포니에타를 창단하고 <해설 있는 클래식>이라는 콘셉트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실내악공연을 추구해왔거든요. 그런 경험들이 작년과 올해 많이 현장에 적용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올해는 정말 공연을 거의 하지 못했어요. 가장 최근에는 지난 2월 27일에 여수난화예술창고에서 우리 i-신포니에타 단원들과 거의 자비로 <시골집 음악회>를 열었고, 3월 1일에는 삼일절 기념으로 옹진군청의 초청받아 덕적도에서 연주했어요. 사실 그 이후로는 아직 한 번도 공연을 하지 못했네요.

류: 3개월 동안 2번의 공연이라니……. 말씀만 들어도 공연계가 얼마나 위축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작년에 온라인 공연도 많이 추진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부분들이 공연 현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졌나요?

조: 사실 온라인 공연의 효과에 대해 저는 조금 아쉬움이 많았던 것 같아요. 작년에 사전 녹화로 공연도 해봤고, 또 실시간으로도 공연을 했었는데요. 일단 녹화보다는 실시간이 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녹화는, 제가 봐도 너무 재미가 없고 한계가 많았어요. 그나마 실시간이 그보다는 괜찮은데, 그럼에도 공연영상, 음향 등 퀄리티 문제는 정말 심각하게 다가왔어요.

류: 구체적으로 어떤 지점들이 그랬는지요?

조: 아무래도 온라인으로 실시간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현장공연보다 많은 것들이 더 필요하거든요. 특히 영상 촬영을 위한 스텝과 제반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부분들을 개인단체의 공연에서는 해결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다 보니 지자체나 관에서 주도하는 공연에 비해서는 녹화의 퀄리티가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류: 말 그대로 부익부 빈익빈이 되는 거군요?

조: 그렇죠. 그냥 공연을 촬영하면 관객에게 전달력이 너무 떨어지니까요. 현장에서 느끼는 공연의 느낌이 온라인으로 그냥 옮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 부분에 대한 지원이나 플랫폼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류: 단장님 말씀을 들으니까 슬프다는 생각이 드네요. 열심히 연주했는데 그만큼의 공감을 얻어내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조: 많은 연주자들이 막막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코로나로 인해 활동을 못하는 예술인들이 너무 많거든요. 사실 예술가들의 생계가 연주만으로 꾸려지진 않아요. 연주도 하고 개인 레슨이나 학교 강연도 많이 나가거든요. 그런데 현재는 공연도 없고, 레슨이나 강연 등도 다 막혀버렸으니까 정말 힘든 상황이죠. 그래서 실제로 실업 상태인 예술인들이 많아요. 온라인 공연을 쉽게 대안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여기에 따른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몰리고 있는 것도 문제고요. 기금 딴 것으로 공연하면 되지 않느냐고 쉽게 이야기하는데,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인프라와 스텝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연주하고 녹화해서 올리는 공연으로는 관객들에게 다가설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대면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공연들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공연은 소통이니까요. 특히 연주는 더더욱 그렇고요. 실제로 학교에서 하는 공연은 계속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단 10명이라도 꼭 듣고 싶어 하는 아이들과 만나서 소통하는 공연을 하고자 노력했지요. 그리고 그런 공연을 했을 때 아이들 역시 굉장히 행복해하고 만족해하더라고요. 특히나 코로나로 문화생활이 더욱 취약해진 아이들이 숨통이 트인다고 하더라고요.

류: 단장님 말씀을 들어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지역 공연을 살리기 위해서는 소규모 공연들이 더 활성화되어야 하고, 그런 것들이 온라인에서도 이어질 수 있으려면 그에 맞는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좀 더 많은 지원책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조: 네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좀 더 현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 대표적인 것이 작년에 진행했던 <발코니 콘서트>라고 봐요. 코로나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발코니 콘서트가 확산되었잖아요. 그래서 저희 i-신포니에타도 그런 공연을 했었거든요. 연수구청에서 요청을 받아서 진행했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류: 어떤 공연이었는지 자세히 좀 말씀 부탁드릴게요.

조: 작년 코로나19 이후 4월에 진행했던 건데 당시에 언론에도 많이 보도되어서 들어보셨을 거예요. 처음에 시작한 계기는 고남석 연수구청장님의 제안이 있었어요. 여러 공연이 취소되면서 급박하게 발코니 콘서트를 기획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i-신포니에타와 연수구립관악단의 협업으로 시작되었어요. 우리 i-신포니에타는 2020년 4월부터 한두 달 정도 진행했고, 구립악단은 좀 더 오랫동안 진행했던 것으로 압니다. 급박하게 진행되긴 했지만, 당연히 자신감은 있었어요. 그동안 정말 다양한 무대를 많이 경험했으니까요. 발코니 콘서트는 놀이터 같은 아파트단지의 중심을 공연장으로 상상하면서 레파토리를 짰어요. 공연장소가 아파트 가운데 위치해 있어서 발코니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이며, 장소가 넓으니까 무대를 배치하기도 좋고요. 혹시 내려오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펜스를 적절하게 쳐서 사회적 거리두기도 유지될 수 있도록 구성했고요. 총 공연 시간은 30분 정도로 구성했는데, 다들 아파트 발코니에서 감상하면서 반응이 참 좋았어요.

류: 제가 생각해도 주민들이 너무 좋아하셨을 것 같아요. 저도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 그런 공연이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조: 실제로도 그랬어요. 처음에서 신청한 몇몇 아파트 중심으로 하루에 2번씩 공연했었는데, 이게 소문이 퍼지면서 점점 더 요청이 많이 들어오게 되었지요. 코로나로 인해 모든 것이 침체되었던 시기라서 저희도 관객들도 서로 정말 에너지를 많이 받았어요.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아파트 많은 사람들이 누가 클래식을 듣겠냐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실제 아파트에서 공연을 해보니 호응이 너무 좋은 거예요. 클래식을 처음 듣는데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았고요. 공연 끝나면, 어르신들이 자기 집의 냉장고를 털어왔다며 비닐봉지에 과일 같은 것을 담아서 저희에게 주고 그러셨어요. 너무 감동이었죠.

류: 뭔가 가슴이 굉장히 뜨끈해지는 것 같아요.

조: 그렇죠. 공연할 때마다 저희도 뭉클했으니까요. 그런데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계속 진행하기는 어려웠어요. i-신포니에타는 개인악단이기 때문에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계속 무료공연을 진행하기는 어렵거든요. 단장의 입장에서는 단원들이 적절하게 연주비를 받는 것도 중요하니까 계속하기는 어려웠죠. 그 점이 아쉬웠어요.

류: 이제 날씨가 풀리고 있으니까, 올해도 그런 공연들이 분명 생겨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에는 i-신포니에타의 음악이 다시 인천의 아파트에서 울려 퍼질 수 있겠지요. 또 코로나 중에 기억에 남는 공연이나 활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조: 음. 또 기억에 남는 건 야외 북콘서트 같은 거였어요. 제가 정이연 작가, 이길보라 작가, 이지현 작가 등과 음악이 있는 북콘서트를 했었는데 정이연 작가와 북구도서관 야외공연으로 가을하늘 아래에서 정말 많은 분들과 특히 작가가 감동하는 콘서트를 했고요, 그중에서 특별한 기억에 남는 것은 서구문화재단에서 온라인으로 진행한 이길보라 작가와의 북콘서트였어요. 이길보라 작가는 우리가 ‘코다(CODA, Child of deaf adult)’라고 말하는 경우예요. 부모님께서 모두 청각장애인이신데 본인이 귀가 들리는 청인(聽人)인 경우 이렇게 부르더군요. 그래서 북콘서트 자체도 굉장히 특이하게 기획되었어요. 저와 이길보라 작가 사이에 두 분의 수화통역사를 모시고 수화로 통역하면서 진행되었거든요. 그리고 청각장애인 예술가들이 오셔서 수화 뮤지컬도 진행했고요.

류: 정말 특별한 기획이었네요. 얼마 전에 코다이신 분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굉장히 인상 깊게 보았던지라 어떤 느낌이었는지 궁금해요.

조: 저도 이런 기획은 처음이라 굉장히 특별한 느낌이었어요. 처음에는 온라인으로 북콘서트를 진행할 건데 음악과 함께 해달라고해서 그냥 평범한 공연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청각장애인 분들도 많이 볼 거라는 얘기를 듣게 되면서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일단은 자막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노래 가사나 음악에 대한 설명 등을 먼저 보내드렸어요.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 공연을 진행하면서는 생각이 더 많아졌어요.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분명 4명이 대화를 진행하는데 그중에서 저만 수화를 못 하니까 궁금했지만 멍하니 바라보게만 되더라고요, 청각장애인 분들은 평소에 이런 느낌이겠구나,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고요. 음악이라는 것이 귀로 듣는다고 생각했는데, 수화 뮤지컬을 보면서는 이것이 또 다른 음악이 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에 또 충격이었어요. 수화가 우리가 오직 손으로만 대화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손과 표정과 입 모양이 모두 어우러진 것이더라고요. 또 수화도 나라별로 달라서 그 자체로 각기 배워야 하는 언어라는 것도 놀라웠어요.

류: 기획 자체도 굉장히 좋고, 그래서 관객에게 다가가는 것도 많은 북콘서트였을 것 같아요. 북콘서트는 작가와 대담자가 나와서 대화를 하는 것이 전형적인 모습인데, 음악이 어우러짐으로 인해 그런 전형성이 파괴된 것도 인상적이네요. 이런 방식의 북콘서트는 어떻게 기획하고, 언제부터 시작하셨는지도 궁금해집니다.

조: 제가 처음 북콘서트를 생각하게 된 것은 사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어요. i-신포니에타 창단하고 10주년기념으로 콘서트하우스 현 공연장을 시작하면서 많은 현실에 부딪쳤거든요. 처음엔 매일 연주하고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이라는 문제 안에서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어요. 매일 연주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유료관객을 유치하는 것도 힘들고 연주자들은 무료로 공연을 하게 할 수도 없었지요. 좀 더 다른 특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작가를 모시고, 작가를 위한 연주를 하고, 그 작가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올 수 있는 그런 공연을 기획하게 되었죠. 동인천에 이런 공연장이 있다고 소개도하고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 바로 <조화현의 똑똑 톡톡 북&토크 콘서트>고요, 음악이 있는 공연이었어요. 2014년부터 시작한 북콘서트가 소문이 나면서 점점 도서관이나 기초문화재단 등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요.

류: 작가 자신을 위한 음악이라서 작가님들이 오시면 참 좋아하실 것 같아요.

조: 실제로 작가들이 굉장히 좋아하세요. 북콘서트라는 것이 작가에게는 자기 생각을 다 드러내는 것이라 긴장도 되고 힘들기도 한 부분이 있는데, 공연이 있으니까 또 다르게 느껴지시나 봐요. 제가 북콘서트 전에 미리 작품도 다 읽고 그 작가와 작품을 통해 연상될 수 있는 음악을 준비하거든요. 그러니까 작가 입장에서는 배려해준다는 느낌을 받으시는 것 같아요.

류: 저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관객만이 아닌 자기 자신도 위안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 같아요.

조: 이런 방식의 북콘서트가 얼마 후 꽤 알려져서 수원과 청송, 순천에서도 이런 북&토크콘서트를 기획해달라고 연락이 와서 여러 차례 진행하기도 했어요.

류: 책을 매개로 다른 예술 영역들이 만나는, 이런 기획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저도 언젠가 북콘서트 같은 것을 할 기회가 생긴다면 음악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 그럼 꼭 저를 불러주세요. (웃음) 이런 기획들은 제가 2006년 시작했던 <박물관으로 떠나는 음악여행>에서 김미혜 동시작가와 <동시 따먹기> 같은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어린이들이 직접 동시의 주인공이 되어 무대에서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지요.

류: 근황에 대해 듣다 보니 어느덧 많은 이야기들을 나눈 것 같아요. 이제 조금 진지한 문제로 넘어가 보면 어떨까요?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여러 활동들을 하셨지만,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느끼는 어려움과 문제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 인천의 예술인으로서 느끼는 문제점이나 보완책 같은 것을 말씀해 주시면 어떨까요?

조: 코로나 초반까지 저는 두렵거나 그렇진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이런 상황에는 좀 오랫동안 학습이 되어 있는 편이었거든요. 왜냐하면 예술인에게는 보릿고개가 있어요. 보통 기금사업이 11월에 끝나 정산하고 나면 1월까지는 수입이 거의 없어요. 1월부터 지원 서류를 준비하고, 지원사업에 선정된다 해도 4월쯤에나 지원이 시작돼요. 그래서 실제로 작년에 4월까지는 예전처럼 버텨내고 또 빨리 적응했던 면도 있었어요. 그 시기가 길어지면서 점점 힘들어졌지만요. 그럼에도 계속 조금 더 재미있게, 단원들이 덜 힘들게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를 계속 고민해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극복하려고 하는 만큼 현실적인 지원에 있어서 아쉬움이 드는 것들도 많아지더라고요.

류: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지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조: 문화예술이, 그리고 저는 음악인이니까 음악이 해줄 수 있는 역할은 참 많아요. 특히 이렇게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는 더 그렇고요. 그런데 연주자 역시 한 명의 생활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연주자의 삶이나 생계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요. 제일 힘들었을 때가 공연이 다 취소되는데, 단원들에게 무엇 하나 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기금은 받았는데, 시나 기관에서는 공연을 취소하라는 말만 내려오고, 작년에 실제로 받은 기금이 8, 9월에서야 겨우 집행할 수 있었어요. 공연이 취소되거나 마냥 미뤄졌으니까요. 그냥 모든 것이 정지된 거죠. 아무래도 행정이 느릴 수밖에 없으니 그사이에 연주자들의 생계는 무너져 버렸죠. 사실 예술가들에게는 자신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무대가 더 절실한데, 창작기금을 받는 것만으로 그 기회를 메울 수는 없지요, 그나마도 사각지대에서 받지 못하는 예술인들도 태반이고요. 이번 코로나 속에서, 예술인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정책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 절실하게 느꼈어요.

류: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이네요. 사실 행정이라는 것이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더 그런 것 같아요. 모니터링이나 서류 처리가 대표적인 문제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조: 네, 정말 그래요. 모니터링 같은 경우에도 한 번에 처리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어떤 공연이든 최소한 절반 정도는 보고 모니터링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여러 차례의 공연일 경우에도 단 한 번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아요. 현장과 과정보다는 서류 중심의 모니터링도 많고요. 현장에서 무대를 기획하는 사람으로서는 그런 부분에 아쉬움이 많죠. 예술단체의 평가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서류정산보다는 현장 평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류: 갑자기 <킹덤>을 쓴 김은희 작가의 인터뷰가 떠오르네요. 넷플릭스에서 작업하면서 가장 좋은 점이 뭐냐고 물었더니 “의견 안 주고 돈만 준다.”라고 하면서 웃었던 거였어요. 간섭이 전혀 없다는 거였죠.

조: 하하. 우리 예술인 지원에도 좀 필요한 내용인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이번에는 기금 사업에 거의 지원을 안 했는데, 거기에도 비슷한 이유가 있어요. 같은 공연을 해도 기금을 받을 때와 초청을 받을 때의 대우가 너무 다르거든요. 기금 받는 프로그램 안에서는 전문 연주자에 대한 대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서류도 너무 많고요. 컴퓨터에 입력을 하는데 같은 서류를 제출하는 등 반복적인 일이 많아요. 스마트화된 시대라면 거기에 맞추어 행정을 바꾸어야 하는데 아직 그게 안 되는 거죠. 문화를 전문적으로 아는 분들이 지속해서 행정담당을 해주셔야 하는데 자주 바뀌니까 고질적인 문제들이 고쳐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고요.

류: 불필요한 행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문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네요. 이제 조금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마지막으로 예술인의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조: 음, 저는 ‘지원도 초청처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초청하는 것처럼 지원하는 것이 곧 예술인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일인 것 같아요. 초청이든 지원이든 같은 문화 활동을 하는 거니까요. 거기에 차별을 두고 문화 활동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좀 고쳐져야 할 것 같아요. 그게 곧 문화적 퀄리티를 높이는 방법이 되는 거죠. 지원금도 인쇄물이나 홍보물 지원보다는 실질적으로 공연자에게 믿고 지원할 수 있는 그런 공연문화와 지원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공연을 하는 예술인들도 비정규직이 아닌 생활이 보장되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류: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꼭 많은 분들에게 이 말씀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엔 꼭 오프라인에서 정답게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조: 저 역시 말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꼭 오프라인에서 봬요.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나와 우리가 연결되는 문화예술강의의 즐거움: 최서연 씨 인터뷰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나와 우리가 연결되는 문화예술강의의 즐거움최서연 씨 인터뷰

홍봄

“무용을 가르칠 때 내가 빨간색이고, 엄마일 때는 파란색이라면 문화강의를 듣는 나는 비로소 내 색깔이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주체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자 인천에 있는 자원들과 연결되는 시간이라고 느낍니다.”

최서연 씨(40세)는 인천에서 나고 자라 지금도 인천에 살고 있다. 인천을 고향이라 생각하지 않으며 컸지만, 지금은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한 아이의 엄마이자 무용강사로 학생들과 만난다. 그리고 인천지역에서 열리는 각종 문화예술교육의 열혈 수강생이다.
지난 3월 말 연수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최 씨는 그동안 들었던 강의와 그곳에서 있었던 기억을 하나둘 끄집어내며 들뜬 표정을 했다. 지금은 다양한 강의를 듣는 것이 삶에 스며들었지만, 처음은 다른 시민들처럼 낯설고 궁금했다.

최 씨가 처음 문화예술 강의를 듣게 된 계기는 반려동물과의 이별이었다. 2017년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그는 인천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하늬바람에서 <반려동물과 문화예술> 강좌가 열린 것을 보고 지원했다. 누구나 조금의 관심만 가지면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 그는 이후부터 <즉흥연극 워크샵>과 <야근대신 바느질>, <창의적 삶 조직하기>, <i신포니에타와 함께하는 클래식 톡톡 ‘들어봄직, 알아봄직’>, <펜 하나로 꺼내는 일상여행> 등 모두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배우고 또 배웠다. 처음 강의를 들으러 다니던 시절에는 4~5살이었던 아이도 동반해서 다녔는데, 그때 받은 배려들이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최 씨는 “당시에 아이를 데려오는 사람이 혼자 밖에 없었어요. 강의는 듣고 싶은데 엄마라서 애는 봐야 하고 난감했죠. 그래도 배우고 싶은 욕심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다녔는데 혹시나 민폐가 될까 항상 걱정했어요. 한 번은 성인들이 집중해서 듣는 강의에 아이를 데려갔다가 안 데려갔더니 오히려 사회자분이 아이를 찾으시더라고요. 열린 강좌이기 때문에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나 와도 된다면서요. 그때 생각했어요. ‘아, 나를 배려해주시는구나. 여기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장이 열리나.’ 그게 큰 힘이 됐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있어 문화예술강의가 하나의 ‘환기’라고 설명했다. 자기 업무와 꼭 해야 되는 역할 외에 나를 돌아보고 환기하고 치유하는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친구와의 수다도 좋지만 너무 자주 하면 소진하는 기분이 든단다. 그때 관심분야의 강의를 들으면 꽉 채워지는 느낌이다.

또한 최 씨는 지역에서 이뤄지는 강의들이 인천이라는 터전으로 삶을 확장하는 매개가 된다고 말했다. 그에게 인천이라는 곳은 잠만 자는 곳이었고, 항상 서울에 가서 일하고 서울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세월 지나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내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예술 강의를 들으며 이런 생각은 더 짙어졌다.

최 씨는 “인천에서 여러 강의를 듣다보면 내가 사는 동네에 안정감이 느껴져요. 아는 가게가 생기고 아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곧 경계심이 풀린다는 것이죠. 인천에 대한 애정이 생기고 궁금하고, 또 찾아보게 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지역의 일원이 되는 경험을 하는 것 같아요. 이런 활동으로 느슨하지만, 네트워크가 생긴 게 가장 좋아요.”라고 소감을 말했다.
그렇기에 그는 더 많은 동네 거점을 활용한 강의들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부러 가야하는 공간보다 시민들이 종종 가는 카페나 식당, 주민센터 등 원래 사람들이 오는 장소에서 뭔가를 했으면 하는 생각도 있다.

최 씨는 “다들 문화를 향유하고 싶고 접하고도 싶은데 방법 잘 모르는 시민들이 많아요. 도서관이나 인천아트플랫폼 같은 곳 말고도 주민들이 자주 오는 장소, 사람들이 편안하게 드나들 수 있는 곳에서 강의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홍보도 중요하겠지요. 인천문화재단 홈페이지를 검색해서 강의 정보를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어린아이를 키워서인지 모르겠지만 전시든 뭐든 온 가족이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더 많아지고 알려졌으면 합니다. 너무 좋은 것을 저만 혜택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참 아쉬워요.”라고 제안했다.

그는 지역 문화강좌의 열혈 수강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무용 강사로 살아가고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용을 통해 스스로 자기를 돌아볼 수 있고 나에서 우리가 될 수 있는 법을 가르친다. 몸으로 움직이면서 배려를 배우고, 상상의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가르친다는 것이 최 씨의 교육 방침이다.

최 씨는 “모든 움직임은 무용이 될 수 있어요. 서로 다른 몸짓을 하면서 다양성을 읽고 이해할 수 있죠. 처음에 이 친구가 어떻게 표현해도 놀리거나 틀렸다고 하지 않도록 받아주는 연습을 한 달 동안 해요. 비난받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 생각이 들면 아이들도 눈치를 보지 않게 되죠. 수업 안에서 서로의 경계를 허물려고 그룹이 교체되는 활동을 계속해요.”라고 설명했다.

문화예술을 가르치고, 또 배우는 그는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연결되는 것’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단다. 개인이 고립되기 쉬운 사회에서 문화수업들을 통해 연결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서로 돌보고 챙길 수 있도록 소그룹 단위의 프로그램들이 많이 늘어났으면 한다.

최 씨는 “요즘 사람들은 꾸준히 내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아요. 문화예술이 일회성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원데이 강좌나 가볍게 참여할 수 있는 강의들이 있으면 좋겠어요. 프로그램을 개설하기 전에 타깃을 두고 조사나 연구를 해도 좋고요. 공간 접근성이 좋든, 내용이 친숙하든 다리가 될 만한 것이 있었으면 해요. 본질을 갖추면서도 사람들이 ‘괜찮네’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죠.”라고 말했다.

배우는 것이 정말이지 즐겁다는 그가 앞으로 꿈꾸는 삶은 지금의 배움을 토대로 더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동네를 만드는 것이다. 마을에서 어르신과 엄마들, 아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벌이고 싶고, 지금은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최 씨는 “제가 사는 중구에는 학령기 아이들 키우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문화 자원이 정말 많아요. 그런 자원을 활용해서 아이들을 안전하게 키울 수 있고, 어르신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문화예술로 가는 길이 아닌가 싶어요. 제 나이 50살이 되기 전에는 지역에 도움이 되면서 재미있는 동네를 만들 수 있도록 역할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어요. 그게 무엇이 됐든 연대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미래를 그리며 웃어 보였다.

인터뷰 진행/글: 홍봄(기호일보 사회부 기자)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문지혜(청년 사진작가)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청년 사진작가 문지혜

“아이들에게 사진을 설명할 때 조리개나 셔터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무도 듣지 않아요. 밝게 찍고 싶은지, 어둡게 찍고 싶은지. 아니면 어떤 느낌을 내고 싶은지. 이런 조언을 해주는 정도가 제 역할이죠. 주민자치나 역량강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시민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수업을 들은 후 전시를 하면 스스로 작가가 됩니다. 그렇게 보면 요즘은 누구나 예술가가 아닌가 싶어요.”

인천에서 사진을 찍는 문지혜(33) 씨는 본인을 ‘예술가’ 또는 ‘작가’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사진을 전공하고 또 가르치는 일과 작품 준비를 동시에 하고 있지만 예술가로 불리기에는 겸연쩍다. 그는 예술의 영역을 나누기 보다 일상생활 속에서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시민들과 가까이 서서 예술을 바라보는 문 씨의 생각은 구분이 없었고 유연했다.

문 씨는 ‘사진을 찍는 예술강사’로 스스로를 설명한다. 그가 규정한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것이 현재 주력하고 있는 작업이다. 문 씨는 ‘사진 찍는 예술강사가 기록하는 부평 이야기’를 테마로 매일 부평캠프마켓을 기록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집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보이는 캠프마켓을 무의식적으로 찍어오다가, 지난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사진을 남긴다.

문 씨는 “지역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만들고 싶었는데, 일반사람들은 관련 문서나 자료를 해석하고 공부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너무 상세하게 들어가면 시민들이 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저는 시민과 찍는 사람의 중간 입장에서 그 정도를 조율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매일 찍은 사진에 글을 곁들여 보는 이들에게 쉽게 다가갈 방법으로 기획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가 기록하는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2018년 인천문화재단에서 진행한 ‘한·중 사진가, 강화도를 만나다’였다. 1박 2일 동안 강화도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강의를 듣는 과정에서 감명을 받았다는 것. 특히 과거 누군가가 조사해 둔 자료를 통해 역사를 편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도 기록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좋은 역사든, 나쁜 역사든 사람들이 알고, 서로 이야기하면서 선택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지금 특별히 미군기지를 기록하는 이유는 아직 활용방안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활용방안을 찾아가는 논의와 그 이후에 시민들이 미군기지를 접하는 과정에서 문 씨의 사진이 하나의 기록으로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미군기지 근처에 쭉 살아오면서도 실제 어떤 문제가 있었고 그 가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주민들이 많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서다.

문 씨가 도시재생사업 대상지를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문 씨는 올해 부평구 주민 8명과 굴포천 일대를 기록하고 자료집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지난해에는 서구 가정집에서 도시재생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주민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느낀 점은 주민참여 사업들에 좀 더 목적부여가 됐으면 하는 것이다.

문 씨는 “도시재생이나 문화도시를 조성한다고 해서 주민참여 프로그램이 많이 진행되는데, 깊숙이 들어가면 내용이 다 똑같고 목적 부여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큰 틀만 바뀌고 내용은 똑같다고 할까요. 내년에 주민들과 좀 더 의미 있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 중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사진을 찍는 예술강사’라는 정체성처럼 문 씨에게 가르치는 일은 중요한 삶의 부분이다. 지난 2015년부터 예술강사로 일해온 그는 아이들이 사진을 찍기 전과 후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꼭 가진다. 처음에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을 때는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면, 이제는 휴대폰의 보급으로 사진 찍는 것만으로는 의미부여가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수업에서도 사진을 꼭 출력해 들여다보곤 한다.

문 씨는 “수업을 하면 한 번이라도 결과물을 출력하려 해요. 핸드폰으로 보면 그냥 넘겨버리는 사진도 뽑아서 보면 무엇을 찍었는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보게 되거든요. 이 사진을 찍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딜 찍었는지 소소하게 이야기를 하며 자기 사진을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렇듯 강사로 활동하며 사진을 찍어온 그에게는 예술과 교육을 구분 지어 평가받는 경험이 잦았다.

2018년 영종도에서 가족단위로 진행한 프로그램이 그러했다. 당시 영종도에는 학교가 적은데다 복지관 등 기반시설이 적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놀기 위해서는 인라인 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에 문 씨는 초등학생을 포함한 가족들을 모아 염전 등 주변을 다니며 캠프를 하듯이 사진을 찍은 기획을 해서 지원사업 신청을 했다. 하지만 이 기획은 심사 과정에서 ‘예술이 아닌 교육’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결국 문 씨는 사비를 들여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참여 가족들과 함께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그는 여전히 예술과 교육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문 씨는 “연륜이 있으신 분들은 본인의 작업을 이야기할 때 굉장히 어려운 단어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요즘 전시를 봤을 때는 그렇지만은 않아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강아지와 동반할 수 있는 전시회도 나오고, 설치미술들도 요즘 굉장히 많아졌죠. 물론 이게 예술이냐 아니냐 논란도 많아졌고요. 대림미술관에서 폴메카트니 전시를 했을 때도 전시관에 사진을 찍으러 온다는 것에 비판이 일었지만 모든 추세가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 예술이라는 것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어야지 맞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반문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모든 시민들이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역문화인력들이 지속해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재단사업 또한 양성과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후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판들이 계속 열릴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문 씨는 “너무 많은 양성과정이 있는데 거기서 끝나는 게 좀 아쉬웠어요. 물론 생업이 있고 자기 일을 해야 하니 이어질 수 없는 이유에도 공감이 가고요. 그래도 힘들게 배출해 낸 지역의 문화인력들이 다시 현실로 돌아가 의미가 없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한 과정을 끝난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투입해서 활용해볼 기회가 작게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바랐다.

홍봄(기호일보 기자)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김창수(문학평론가)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도시인문학자 김창수

김창수 : 문학평론가, 前 인천연구원 부원장

도시인문학자로서 오랜 시간 인천을 연구하였다. 인천학연구원의 상임연구원을 거쳐 인천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과 도시정보센터장, 부원장 등을 역임하며 인문학적 관점 위에서 인천이라는 도시를 연구해왔다. 지난 2019년 인천연구원에서 퇴임한 이후 ‘자유인’을 자처하며 강의와 집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본 인터뷰는 2단계 상황에서 진행되었지만, 날로 심각해지는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방역을 준수하기 위해 실시간 화상회의를 통해 진행되었음을 밝혀 둔다.

류: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코로나19가 너무 심해져서 화상회의를 통해 뵙게 되니까 아쉽지만, 또 화상회의는 이 나름대로 새로운 분위기가 있네요.

김: 요즘은 강의도 회의도 줌으로 하니 적응이 된 것 같아요.

류: 저도 아무래도 지난 1년을 거의 줌으로 수업을 하다보니까 이제는 줌으로 회의하고 사람 만나는 것이 어색하지 않더라고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아무래도 선생님께서 인천연구원에서 퇴임하신 후에 처음 뵈었는데 얼굴이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인천연구원에서 퇴임하신 지 꼭 1년인데 퇴임 이후의 근황을 좀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 예, 대부분을 집에서 보냅니다. 못 보던 책을 마음껏 읽고, 평소에 쓰고 싶었던 글도 좀 쓰고.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평생 잘 안 했던 것들을 마음껏 하고 있어요. 설거지와 방청소 같은 것도 잘하고요. 최근에 쓰레기가 갑자기 너무 많아져서, 아무래도 배달을 많이 시키다 보니까, 분리수거도 열심히 하고, 아주 가정적으로! 지내고 있어요.

류: 저와 생활이 비슷하시네요. 아무래도 코로나19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김: 작년 12월에 퇴임할 때만 해도 꿈에 부풀어서 인천 지인들과 모여서 출판기념회를 겸해서 약간의 포부를 밝혔던 바 있어요. 좀 자유로워지겠다. 자유인이 되겠다. 책으로부터의 자유, 자료로부터의 자유 이런 것을 말했는데. (웃음) 그리고 발로 걸으면서 살아보겠다,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때 계획은 전국의 주요 도시를 1주일씩 둘러보자, 뭐 이런 계획을 세웠었죠. 왜냐하면 우리가 해외여행을 많이 가는데 정작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 안의 도시를 안 가본 경우가 많거든요. 일하러 다니거나 기껏 저녁이나 먹거나, 아니면 그냥 돌아오고. 이런 식으로 살아왔더라고요. 내가 특별히 애국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터전에 대해서 무심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었죠. 코로나 때문에 실행을 못했지만, 그래도 몇 군데는 다녀왔어요. 강원도 영월, 경북 영양, 이런 곳을 다녀왔어요. 제가 어릴 적에 영양 근처에서 좀 산 적도 있었고, 영양은 조지훈 시인의 고향이고 소설가 이문열도 살고 그랬던 곳이거든요. 대구도 잠깐 다녀왔어요. 그때가 대구에 코로나가 확 휩쓸고 지나간 다음이었는데 대구 사람들이 상처도 많고 고생도 많이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사실은 코로나 때문에 용두사미가 된 계획이죠. 그 대신 다섯 편 정도의 글을 썼어요. 그동안 많은 글을 썼지만 다 청탁받아서 쓴 것들이라, 글을 다 쓰고도 늘 미진한 점이 남아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죠. 청탁받은 글도 제 생각이 담긴 제 글이지만 다른 사람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프레임을 벗어나기 어려워요. 거기다가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태반이고요. 그렇게 쓴 글은 애착이 가지 않죠.

류: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죠. (웃음)

김: 윤동주의 「자화상」이라는 시에 나오는 우물 같아요. 어쩐지 미워져서 돌아갔다 가엾어져서 또 돌아오고. 그렇게 청탁받아 쓰는 글쓰기가 완전히 자발적이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퇴직한 후에는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고, 시간적으로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조지훈 론을 비롯해서 내가 쓰고 싶은 글들을 몇 편 썼어요. 그것이 그나마 위기 속에서 찾은 작은 보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류: 위기 속의 보람이라는 말씀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어떤 글을 쓰셨는지, 혹은 앞으로 어떤 글을 더 쓰고 싶으신지요?

김: 최근 조병화 시인의 초기 시를 다시 읽고 있어요. 이건 사실 개인적인 부채 상환의 의미도 있어요. 조병화 시인은 경희대에서 인하대로 옮겨오시면서 국문과와 문과대를 창설한 주역으로 문과대 학장, 대학원장직을 맡으셨죠. 당시에 학생들 중에 시인 지망생은 많았지만, 평론을 하겠다는 사람은 저 하나밖에 없었던 희소가치 탓이었는지 자상하게 대해 주셨어요. 새 책이 출판되면 늘 연구실로 불러서 서명을 해서 주시고, 원고 정리를 도와 드리면 꼭 밥을 사주셨죠. 내동 입구에 있는 주점 ‘힐사이드’에서 맥주도 종종 사주셨고… 정년퇴임을 하시고 학교를 떠나실 때 담배 파이프 하나를 정표로 주시기도 했죠. 그런데 리얼리즘으로 작품을 보던 때라 센티멘털리즘이 강한 그의 시풍에 대해서는 내심 불만이었어요. 실은 선생님의 작품을 진지하게 읽어 본적도 없었고요. 작고하시고 난 뒤에야 『버리고 싶은 유산』, 『하루만의 위안』, 『인간고도』 등의 초기 시집을 다시 읽었어요. 그때서야 한국전쟁 무렵의 인천 풍경 속에 그의 인간적 외로움도 손에 잡힐 듯 다가오더군요. 조병화 시인의 초기 시를 다시 읽기가 올 연말 계획입니다. 글 한 편으로 베풀어 준 그 마음을 다 갚을 수야 없겠지만 말입니다.

류: 글이 굉장히 기대가 됩니다. 아무래도 은사님이셨으니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아요. 짧게 하나만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김: 하나만 이야기하면 조병화 시인이 원래 전공이 화학이었어요. 동경고등사범학교 물리화학과를 나오셨거든요. 순수화학자였죠. 처음에 인천 제물포고에 수학교사로 오시면서 인천과 인연이 되었던 거죠. 그런데 여러 교과를 다 가르치셨다고 해요. 거기에다 특기가 럭비였다고 해요. 그래서 제물포고에 럭비부를 창설 전국대회를 석권하기도 했다 합니다. 화학교사와 럭비선수는 조병화 시인의 ‘딴 얼굴’이죠. 부인은 또 인천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하셨죠. 성함이 김준이신데 김준 산부인과병원 2층이 인천 문인들의 회의실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류: 정말 인천이랑 인연이 깊으셨군요. 일종의 인천 예술인들 아지트였군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을 텐데, 여기서 다 여쭐 수 없어서 아쉽네요. 이 궁금증은 선생님의 글을 통해 해소해야겠습니다. 다시 선생님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와서 여쭙겠습니다. 인천연구원에 오래 계셨는데 연구원에 대해 소개 좀 해주시면 어떨까요?

김: 인천연구원은 인천광역시가 1995년에 설립한 정책연구기관이에요. 인천시의 행정, 도시계획, 산업경제, 교통, 물류, 문화관광, 교육, 평화도시전략 등의 연구를 하고 있는 곳이죠. 연구자들이 100여 명. 주제 현황에 따라 협력연구를 하기도 하고. 현안연구, 비전연구, 정책기초연구 그런 것들을 하는 곳이에요. 가령 현재의 보도에 계속 나오고 있는 쓰레기매립지 같은 것과 관련된 연구들. 이렇게 여러 분야와 협업으로 연구단 구성해서 연구해야 하는 과제들을 수행하는 곳이 인천연구원이죠. 인천의 Think Tank 역할을 하는 곳이죠. 거기서 나는 주로 문화정책을 담당했고, 도시인문학센터장으로 있기도 했고요.

류: 그렇다면 거기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아무래도 도시인문학센터와 관련된 일이었겠군요.

김: 인문도시연구총서를 만든 것이 가장 기억이 남아요. 이 기획은 도시의 변화를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들을 남기는 거였어요. 어부, 염부, 목공장인, 철공장인, 주물장인. 이런 분들의 구술을 기록하는 사업이었죠. 인천이 가지고 있는 도시인문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일이었죠.
이색적인 연구로는 아시안게임이 인천에 있었을 때, 성화 봉송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일을 담당하기도 했어요. 성화 봉송과 관련된 국제적인 루트를 짜면서 한국의 옛길을 활용한 성화 봉송 계획서를 쓰기도 했었죠.
또 5년 전에는 유네스코 책의 수도 사업과 관련해서 전체 마스터 플랜을 짜기도 했어요. 그것이 그대로 다 실행된 건 아니었지만, 밑그림을 그려봤다는 데 의미를 가진 작업이었죠.
퇴직 직전에 인천 평화도시 전략연구라는 좀 큰 규모의 사업을 마치고 나왔어요.
또 인천연구원에서 발간하는 『IDI 도시연구』를 거의 10년을 담당했는데, 2016년 9월 등재후보지가 되었고 2020년부터 등재지로 확정되었어요. 2019년 퇴직할 때 마무리까지 깨끗하게 하고 나와서 마음이 편했죠.

류: 등재지 작업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축하드립니다. 학술지 하나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는데요. 그 일을 10년 넘게 하셨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인천연구원 얘기를 하다 보니 제가 진짜 궁금했던 것이 있는데 여쭈어도 될까요?

김: 그럼요.

류: 인천연구원이 원래는 인천발전연구원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께서는 문학평론가였잖아요. 그래서 저는 처음에 선생님께서 인천발전연구원으로 가셨다고 들었을 때 굉장히 놀랐어요. 지금이야 인천연구원이니까 어색함이 전혀 없지만, 그때만 해도 ‘발전’이라는 말 자체가 문학연구자와는 좀 상관이 없어 보였거든요. 그래서 당시에 어떤 계기로 인천발전연구원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신 건지 궁금했어요.

김: 류 선생이 보기엔 내가 문학연구자나 문학평론가로서 먼저 다가왔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그 당시에도 스스로 도시인문학 연구자라고 자임해 왔어요. 이미 인천학연구원에서도 문학을 전공한 도시인문학자로 살았으니까요.
확실히 발전이라는 말이 어떻게 보면 외적 성장주의라는 느낌이 강해서 잘 안 맞는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처음 내가 인천발전연구원에 가려고 했을 때, 당시 인천은 외적성장주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대였고, 도시정책에 있어서도 패러다임 전환을 맞이하고 있었던 시기였어요. 물론 여전히 성장주의가 주류였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던 거죠. 그러한 지향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들어갈 수 있었고, 그래서 결국 인천발전연구원에서 ‘발전’을 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이렇게도 생각해 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도시의 외적 발전만이 아니라 주민의 삶, 상태, 환경 등 지속가능한 패러다임이 정책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 이런 것이 도시인문학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인천연구원에서 일을 했지요.

류: 확실히 발전이라는 말을 떼어냄으로써 인천연구원의 성격이 더 분명해진 느낌이 드네요.

김: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하지만, 그 깊이와 넓이를 위해서는 타 학문과의 협력연구가 필요잖아요. 그런 협력조건을 인천발전연구원이 잘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과적으로 인천발전연구원에서 연구하면서 여러 현안과 쟁점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사실 이게 내가 입사 때 인터뷰했던 얘기인데, 인터뷰에서도 소신을 펼쳐보라는 얘기를 들었고, 또 들어가자마자 도시인문학센터를 바로 만들어 주기도 했어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죠.

류: 정말 그렇군요. 사실 인천이라는 도시 자체가 가진 매력을 가장 열심히 발굴하고 축적하는 곳이 인천연구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러한 인천이라는 도시는 근대문학의 태동과도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인천이라는 도시와 문학, 양자 사이의 연계를 잡아오신 선생님께서 보시는 문학・문화적 공간으로서 인천이 가진 매력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김: 먼저 인천은 한국 근대의 실험실 같은 곳이죠. 한국 근대의 미니어처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고요. 이게 내가 인천의 도시라는 연구를 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천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가 겪은 근대, 한국만이 아닌 아시아의 근대가 녹아나 있어요. 이걸 보면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박사 이후 10년을 진짜 인천과 관련된 자료더미에 빠져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잉될 정도로 인천에 빠져 있었지요. 왜냐하면 거기로부터 오늘의 삶까지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전쟁과 도시화 속에서도 여전히 구도심에는 변화된 시간/역사/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고요. 그리고 여기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 그들의 문화, 다양성, 축적된 다문화 이런 것들이 켜켜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도요. 그러나 향토주의에 갇히자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근대를 이해하는 하나의 전형으로서 인식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건 문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인천이라는 곳은 과거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근대 시기에 여기에는 세계의 축도가 있었거든요. 청국조계, 일본조계, 각국조계까지. 세계의 미니어처, 여기가 곧 세계였던 거죠. 김소월이나 김동환의 시, 김기림의 <인천항 연작시> 같은 시가 곧 인천에서 느낀 세계를 담아낸 것입니다. 또 배인철 같은 시인은 아주 이른 시기에 소수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연대 의식을 담고 있는 시를 보여주고 있었고요. 이것들은 모두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과 함께 문학적으로 깊은 인식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평등의식, 소수자에 대한 생각 같은 것들이요. 이상의 「지주회시」 같은 것도, 강경애 『인간문제』, 이태준 「밤길」, 이규원 『해방공장』, 조세희나 방현석의 소설 등, 이 도시와 교호하면서 작가들의 의식이 깊어진 거죠. 많은 작가들이 인천을 작품화했고, 인천은 그 자체로 한국문학의 풍요로운 창조 현장이었던 거죠. 인천에 다녀간 외국이나 외지인들 그리고 작가들의 인천 방문기를 정리하면서 그들의 의식에서 ‘세계의 미니어처 혹은 근대의 실험실’로서의 인천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내년쯤 인천 문화사의 정수로서 인천문학의 변모를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려 합니다.

류: 인천이 다양한 매력과 저력을 가진 도시라는 것이 근대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확인되어왔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선생님의 작업들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될 것 같네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서 이 인터뷰는 인천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인천문화통신 3.0>에 실릴 글인데요. 인천문화재단과의 인연에 대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김: 인천문화재단은 인천의 여러 분야의 분들이 힘을 모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1999년에 저는 인천문화정책 연구소장이었는데 당시에 인하대 최원식 교수님이 주도하고 문화예술인들이 함께한 인천 문화를 열어가는 시민모임의 간사로서 함께 했어요. 그때 문화재단의 필요성을 외쳤지요. 그 노력이 인천문화재단 설립으로 이어진 성과를 낸 거지요. 제가 주역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인천문화재단 설립에 따른 조역으로 참여했다고 할 수 있지요.

류: 조역이라고 하셨지만 사실 모두가 주역이셨던 거죠.

김: 문화정책연구소 할 때 우현학술제를 여러 해 개최했는데, 이것이 문화재단 사업으로 이어기도 했죠. 2005년 우현 고유섭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 이후 재단에서 행사를 이어가는 것으로 공식화되었어요. 그게 제도화되고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깊은 인연이지요. 또 2006년에는 자유공원의 역사적 변천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기획했고, 나중에 『만국공원의 기억』 같은 책을 내기도 했어요. 인천문화재단 설립 초기에 봉사자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0년부터 4년 동안 문화재단 4기, 5기 이사로 있기도 했군요.

류: 인천문화재단의 설립 전부터 함께 해온 산 증인이시네요. (웃음) 마지막으로 인천의 문화정책을 오랫동안 현장에서 지켜보신 전문가이자 어른으로서 재단의 발전을 위해 조언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 연초부터 화두가 되었던 것이 이른바 문화재단 ‘혁신’이었는데, 그 결과는 기대 미흡이라는 것이 중론인 것 같고요. 그런 점에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된 혁신을 하려면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목적을 앞세우거나 이해에 집착하면서 혁신의 가닥을 잡을 수 없어요. 대표이사 추천제나 인사 문제를 중심에 놓고서는 혁신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대원칙을 검토하고 합의해나가면서 합의한 원칙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을 모색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인천문화재단은 지역문화진흥을 위해 전문성과 독립성을 기초로 운영되는 문화 지원기구입니다. 오히려 문화재단에 대한 다양한 의견은 필요하지만, 재단의 독립성이나 전문성을 후퇴시키는 우를 범한다면 혁신이라 하기 어렵죠. 인천시는 문화재단을 둘러싼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혁신의 진정한 동력도 결국 재단 내부로부터 문화계의 동의로 확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류: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시간 내주시고 귀한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나눈 대화만으로도 저에게도 많은 공부가 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류수연(문학평론가, 인하대 프런티어 학부대학 교수)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문계봉 시인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교육청에서 만난 시인

문계봉 : 시인

1995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하였다. 한국작가회의 인천지회장, 인천민예총 상임이사, 인천문화재단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인천광역시교육청 교육감 문화예술교육 정책특보로 일하고 있다.

본 인터뷰는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이루어졌음을 밝혀 둔다.

류: 선생님, 안녕하세요? 한동안 뵙지 못한 사이에 교육청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근황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문: 안녕하세요. 저는 시인이고요. 그동안은 인천민예총과 작가회의, 인천문화재단을 기반으로 인천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다양한 활동과 고민을 진행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9월부터 인천광역시교육청 교육감 문화예술교육 정책특보가 되어 늦깎이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웃음) 물론 작가회의 자문위원과 민예총 이사로서의 회원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고요.

류: 교육청과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연결하는 굉장히 멋진 일을 담당하게 되신 것 같군요. 문화예술특보는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하는 것인가요?

문: 사실 교육청에 오게 된 것은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동안 인천에서 해왔던 문화예술활동가로서의 경험과 이러저러한 매체를 통해 개진했던 문화예술 교육에 대한 고민을 공교육 현장과의 매칭을 통해 좀 더 구체화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4년 동안 인천문화재단 이사로 활동할 때도 느낀 것이지만, 재단에서도 정말 다양한 문화예술교육 사업을 진행하고 있잖아요? 여기 교육청에 오니까 이곳 역시도 문화예술교육 관련해서 사업이 참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더라고요. 사업 규모도 대단히 큽니다. 아직 특보로 활동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업무 파악을 하는 단계이긴 하지만, 양쪽 단위의 문화예술교육 사업이 어느 지점에선가 만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접점을 만드는 과정에서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 게 현재 저의 바람입니다.

류: 듣고 보니 꽤 흥미로운 일이 많겠구나 싶은데요. 현재까지의 느낌을 좀 더 말씀해주시겠어요?

문: 사실 공교육 과정에서 진행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은 일정한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중등교육 과정에서 ‘입시’라는 요소는 무시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과거 학교에서 진행되는 문화예술교육은 저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기예나 취미’ 위주의 교육이었다고 생각해요. 문화와 예술이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인문학적 교육은 부족했던 게 사실이지요. 하지만 최근에는 확실히 달라졌더군요. 전문가 풀도 넓어졌고, 내용 면에서도 다채롭고 충실하더군요. 저는 앞으로 지역의 검증된 예술가와 교육청 예술사업을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담당하게 될 거예요. 수십 년 동안 인천에서 활동하면서 관계를 맺어온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많고, 그분들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외람되지만 진짜와 가짜, 즉 옥석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어느 정도는 갖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지요.(웃음)

류: 교육과 지역을 연계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왕에 교육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묻고 싶은데요. 최근 언택트 시대의 교육에 대한 논의가 많은데요. 코로나19가 미래교육에 대한 지향과 속도를 앞당겼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문화예술교육에 있어서 분위기는 어떤가요?

문: 교육청에서도 현재 그 문제를 무척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학습 도구나 시스템 구축이 필요한 학생들을 전수조사하여 만에 하나라도 교육 소외가 일어나지 않도록 구체적 지원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미증유의 바이러스 사태가 너무 갑작스러워 언택트 시대를 겨냥한 교육의 큰 그림은 아직 완성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촘촘한 소프트웨어들이 만들어지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때에 문화예술 교육 영역도 어려움을 겪는 건 마찬가지겠지요. 그동안 자유학기제가 도입되면서 학생들이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는 이전보다는 확실히 많아졌어요. 물론 아직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아낼 것인가는 학교장의 마인드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교육청에서는 주로 큰 그림을 그리거나 행정적인 지원을 고민하고 있지요. 아무래도 제가 교육 전문가는 아니어서 미래 교육의 구체적인 모습을 언급하는 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기존에 이루어졌던 문화예술교육조차 원만하게 진행되기 어려운 조건인 건 사실입니다.

류: 그렇군요. 교육청이라고 하면 교육만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교육에 필요한 행정적인 기능이 더 많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교육청에서 일하게 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정시 출퇴근을 어떻게 적응하셨을지도 굉장히 궁금했어요. 사실 선생님께서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문인들이 정시 출퇴근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저는 학교 바깥의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사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동경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정시 출퇴근이라는 새로운 업무환경에 어떻게 적응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교육청으로 오시면서 일상에서 달라진 지점은 어떤 것일까요?

문: 아직은 초반이어서 그런지 아주 즐거워요. 정시 출퇴근이라고 하면 시간이 굉장히 팍팍할 거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오히려 여유가 생겼어요. 이전에는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어떤 면에서는 종일 일에 묶여 있었거든요. 늦은 밤이든 새벽이든 뭔가 해야할 일이 있으면 해야 했고요. 그런데 이제는 저 스스로 모든 일을 9시에서 6시 사이에 해치우려고 해요. (웃음)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그 시간 동안에는 무조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잖아요. 전에는 하루의 시작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8~9시부터는 책상 앞에 앉게 되니까 하루가 길어진 셈이죠. 또 업무시간 내에 집중해서 무엇인가를 하게 되니 오히려 저녁이 보장되는 삶이 가능해지더라고요. 일이 마무리가 덜 되었어도 내일 또 출근해서 열심히 하면 되니까, 퇴근 후에는 내 시간을 좀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현재로서는 그래서 만족하고 있어요.

류: 의외의 발견이네요. 교육청에서 인터뷰를 하니까 선생님의 학창 시절은 또 어떠셨을지 궁금해지네요. 아무래도 학교와 관련이 있는 곳이니까요. 저는 특별할 것 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선생님께서는 좀 재미있는 경험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선생님의 학창 시절은 어떠셨나요?

문: 학생은 사실 두 부류로 나뉘잖아요. 학교 안에서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생과 주로 학교 바깥에서 돌아다니는 학생.

류: 음.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웠다는 말씀이신 것 같군요.

문: 네, 고등학생 시절은 확실하게 후자였어요. (웃음) 물론 그때만 해도 일탈의 수준이 요즘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어른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을 거예요. 아무튼 학교보다는 학교 밖이 더 친숙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학교 밖에서 경험한 것들이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아요. 제 모교 주변의 풍광이 무척 아름다웠거든요. 여학교도 부채꼴 모양으로 포진해 있었고. (웃음) 하지만 책은 많이 읽었어요. 누나들의 영향도 있었지만, 당시 나온 베스트셀러는 물론 고전, 한국 단편 등 가리지 않고 읽어댔으니까요. 학교의 풍광과 학교 밖의 경험 그리고 책에서 만난 내용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내 문학의 자양이 되지 않았을까, 지금은 그렇게 일탈의 시대를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웃음)

류: 근황에 대해서 여러 말씀을 들었는데요. 이제 조금 더 인터뷰의 본래 목적을 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인께 인터뷰를 왔으면서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죠. 지난 2017년에 출판한 『너무 늦은 연서』는 무려 등단 22년 만에 낸 시집이기도 했죠. 시집에 대한 외적인 평가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도 첫 번째 시집이라는 의미가 크셨을 것 같아요. 이 시집에 대한 선생님을 생각을 듣고 싶어요.

문: 사실 스스로 만족스러운 시집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이 시인들의 첫 시집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데, 일반적으로 시인들이 보통은 5년 정도 주기로 새로운 시집을 내면서 자신의 시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되거든요. 그런데 저는 22년의 시 세계를 한 권에 넣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까 사실 현재의 정체성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했던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나를 빼놓을 수도 없었고요. 외부적으로는 호평을 받았고, 최원식 선생님께도 좋은 평가를 듣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장점도 있었지요. 아무래도 등단한 지가 22년이지만, 첫 시집을 비교적 최근에 낸 시인이니까 신인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제 나이면 중견 시인인 셈인데, 저는 아직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이 더 크거든요. 지금 이 나이에 가슴이 뛴다는 것은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또, 다른 중견 시인들을 반면교사 삼아서 스스로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요.
또 시를 쓰는 환경에도 변화가 있었어요. 생각해 보면 과거에는 쓰고 싶은 시보다는 써야만 하는 시를 썼던 적이 많았어요. 그때는 문학보다는 세상을 바꾸는 데에 더 집중하면서 살았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사회와 현실의 문제는 중요하지만, 이제는 저 자신과 글에 대해서 더 집중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 쓰고 있는 시와 만나는 시들도 과거와는 달라진 지점이 많더라고요. 그런 설렘으로 계속 시를 써나가야죠.

류: 그렇다면 최근 읽으신 시 중에 독자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 있으실까요? 저 역시도 궁금하고요.

문: 제가 평론가처럼 나오는 시집을 다 읽고 그 경향을 좇는 사람은 아니어서 전체적으로 2020년의 시가 어떻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고요. 그저 제가 읽은 시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은 과거에는 안 보이던 시들도 이제는 눈에 들어오고 읽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어요. 확실히 접하게 되는 시의 저변이 넓어진 건 분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읽었던 시집 중에는 이소호 시인의 『캣콜링』이 인상적이었어요. 장은영, 허수경, 임승유 시인도 좋았고요. 젊은 시인 중에서는 박준 시인의 시집을 몇 권 사봤어요. 그냥 그랬어요. 그리고 『혼자가 혼자에게』로 유명한 이병률 시인도 좋아합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와 『바다는 잘 있습니다』 같은 시집도 좋았고요. 소설도 많이 보는 편인데, 황정은, 김금희 작가의 최근작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류: 제가 아직 못 읽은 시집은 독서 목록에 담아두어야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최근 시의 경향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문: 지금은 완전히 독자 입장에서 이야기하게 될 것 같아요. 한동안 젊은 시인의 시들이 현실과는 좀 동떨어진 채 언어의 변형이나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서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거나 현실을 냉소하거나 암호 같은 시를 써왔다고 (지극히 주관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한 작품들도 분명 시의 외연을 확장해 주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또 그게 전부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옛날 형식으로 되돌아가자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확실히 역사와 실천이 다시 화두가 되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 코로나19도 그렇고, 지금 우리의 현실이 일정한 문제의식을 우리에게 강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류: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시대에 어떤 시를 추구하고 싶으신가요?

문: 특별히 이거다, 생각하고 있는 것은 없지만 저는 일단 50대의 삶이 겪고 느끼는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낼 생각입니다. 제 나이가 되면 사실 주변 친구들이 다 고아예요. 부모님이 다 떠나셨으니까요. 그렇게 고독한 내가 있는가 하면 여전히 가끔은 소년 같은 내가 있어요. 그러한 다양한 모습을 독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시에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겠죠. 또 삶에서도 지향점은 있어요. 바로 ‘꼰대 되지 않기’라고 할 수 있지요. 적어도 ‘라떼주의자’는 되지 말자. 이런 다짐을 해봅니다.

류: 정신없이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덧 인터뷰가 끝날 시간이 다가왔네요. 시의 세계에서 이제 문화예술이라는 현실의 문제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지난 4년간 인천문화재단의 이사로 재직하셨는데, 재단과의 인연은 그보다 더 오래되셨죠? 그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면 어떨까요?

문: 사실 저는 야전에서 문화예술 운동을 했던 사람이지요. 관에서 문화예술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 재단이라는 것으로 가시화된 것이고요. 그렇다 보니 재단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여러 모로 지켜보고 견제하기도 하고 또 자연스럽게 협업도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재단이 하는 일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은 아무래도 재단 이사로 들어가면서부터였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재단이었잖아요. (웃음) 그래서 일단 ‘복마전’으로 들어가서 싸우든 개선하든 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이사 공모에 응했던 것이고요. 처음 2년은 인천 문화 현장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배우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이 지나니까 비로소 인천문화 판에 대한 그림이 좀 그려지더군요. 그때부터 이사의 역할을 좀 더 구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류: 그렇다면 이사로 재직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슈는 아무래도 혁신위에 대한 것이었겠군요?

문: 그렇지요. 사실 올해가 이제 진짜 혁신위 원년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사실 모든 혁신이라는 것이 단 한 번으로 완벽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혁신이라는 것은 또 다른 혁신으로 극복되어야 하고요. 우리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 혁신이 재단을 위해 최선이었나 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야 검증이 되겠지요. 그렇지만 혁신안에서 마련했던 기본적인 생각이나 의도 이런 것에 대해서는 계속 긍정하는 마음으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문제가 발생할 수 있겠죠. 현장에 적용되어 시스템으로 안착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요. 하지만 맨 처음 함께 생각했던 고민과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야겠죠. 혁신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닐 테니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변화해 가는 인천문화재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류: 혁신위 원년을 맞이한 재단에 대한 기대와 당부는, 앞으로도 날카로운 비판과 든든한 지지로 재단을 함께 지켜봐 주시겠다는 말씀으로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류수연 문학평론가, 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황미혜 시민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 문화전도사 황미혜씨

대개 인천을 문화 불모지로 평가하는 이들은 제대로 된 국립 문화시설이 없다거나 국보나 보물, 유적지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곤 한다. 그런데 조금만 살펴보면 인천에는 섬 전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인 강화도가 있고, 개항장 근대거리도 있다. 백령도·대청도의 기암괴석은 10억 년 세월의 힘이 만들어 놓은 천연의 문화재다. 우리 주변 곳곳이 그야말로 ‘문화투성이’였던 셈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답사여행의 격언처럼 인천의 역사문화를 알려고 노력하고, 아는 만큼 찾아다니며 인천을 소개하는 문화 전도사 역시 우리 주변에 있다. 평범한 가정주부이자 문해교실 강사이기도 한 인천시민 황미혜(55)씨의 이야기다.

황미혜씨는 인천문화통신 3.0 인터뷰에서 “자유공원을 한번 가더라도 그 장소에 담긴 역사를 알고 가면 남다른 의미를 느낄 수 있어요”라며 “문화를 즐길 줄 아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1965년 인천에서 태어난 황미혜씨는 결혼과 출산 이후 마흔이 되기까지 그저 누군가의 엄마이자 아내,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살았다. 소위 말하는 ‘문화생활’이라곤 백화점에 가거나 친구들을 만나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게 전부였다.

이런 황씨가 15년 전 무언가 해보자며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은 인천시립박물관이었다. 아이가 점점 자라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서 평소 관심이 있던 박물관 해설사에 도전하기로 하고, 옥련동에 있는 인천시립박물관의 해설사 양성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박물관의 유물을 관람객에게 설명하고, 인천의 역사 이야기를 전하는 일이었다. 지금은 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진 않지만, 박물관 몇 층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눈감고도 알아맞힐 정도로 박물관의 삶의 일부였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할 때는 그렇게 싫었는데 나이가 먹고 나니까 문득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공부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화에 관심이 많아 박물관 해설을 봉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스스로 부족함을 느껴 책도 더 찾아보고, 공부하다 보니 한발 깊숙이 들어가게 됐어요.”

박물관에서 해설사를 하면서 인천의 숨은 이야기들을 많이 알게 됐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쳤던 장소들에 역사가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인천의 매력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족 또는 친구들과 인천의 숨은 명소와 유적지, 문화시설들을 다니며 책으로 배운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보통 인천의 매력이 뭐냐고 물어보면 인천국제공항을 떠올리고, 서울에 있는 친구들은 그냥 어디든 바다가 다 보이는 줄 알 정도로 인천을 몰라요. 절대로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인터넷에 소개된 송도국제도시나 영종도의 ‘핫플레이스’만 각인되는 게 싫었어요.”

황씨는 주말이나 시간이 날 때면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어디론가 떠났다. 사라져 가는 인천의 염전을 찾아다녔고, 각 군·구마다 있는 오래된 나무를 찾았다. 혼자 갈 때도 있지만, 가능하면 딸이나 친구, 지인들을 꼭 함께 데려갔다. 사전에 파악해둔 이야깃거리를 퀴즈로 만들어 이벤트를 하면 재미도 있고, 교훈도 얻는 일석이조의 여행 프로그램을 직접 짰다.

“하나를 알게 되니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가보고 싶은 장소가 생기더라고요. 예전엔 누군가를 따라만 다녔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을 이끌고 새로운 놀이터를 발견하는 것처럼 신나게 다녔어요. 원인재의 인주 이씨 이야기, 경서동의 녹청자 이야기, 학익동의 학산서원, 부평의 미군기지 이야기, 인천항의 갑문 이야기를 쫓다 보면 인천 전체가 놀이터가 됐어요.”

황씨는 뭐니 뭐니 해도 인천의 자랑은 강화도라고 했다. 특히,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강화도 섬 둘레에 조성된 해양관방유적은 인천시민이라면 꼭 알아야 하는 유적지라고 소개했다. 고려 강도시기의 몽골의 침략에 맞섰던 유적부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방어 유적까지 둘러보면 우리나라 역사를 통째로 만나는 듯 했다.

황씨가 추천하는 인천의 숨은 명소는 조계지 계단이다. 개항기 각국 외국인들은 인천항 근처에 구역을 나눠 거주했는데 이를 조계지라고 했다. 인천의 개항장 거리는 조계지 계단을 기준으로 중국과 일본 거주지로 나뉘었다. 지금의 차이나타운과 일본풍 건물이 즐비한 중구청 일대는 바로 조계지 계단을 중심으로 무 자르듯 구분된다.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조계지 계단 꼭대기에서 감상하는 낙조가 일품이란다. 이밖에 백령도, 이작도, 영흥도 등 인천 섬의 자연 풍광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라고 했다.

황씨는 평일에는 성인문해교실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 어렵던 시절 한글도 제때 배우지 못했던 어르신들에게 뒤늦게 만학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글을 가르치는 보람된 일이다. 한국문해교육협회 소속으로 노인복지관이나 평생학습관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문해교실을 찾아 오는 70~80대 어르신들은 어렸을 때 육성회비나 등록금 문제로 학교를 못간 분들도 있고, 경제적 문제 때문에 진학을 포기한 경우가 많았어요. 자녀들의 소개로 처음에 글만 배우러 찾아왔다가 나중에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따신 분들도 있습니다.”

황씨는 문해교실이 글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치유까지 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 배움의 한을 달래기 위한 공부 그 자체가 상처치유의 기능을 한다는 얘기다.

“요즘에는 아파트 이름도 영어가 많이 들어가서 주소를 알아도 찾아가기 힘들잖아요. 예를 들어 I-PARK라는 아파트를 찾아가려면 알파벳을 알아야 하는데 어르신들은 이런 생활 곳곳에서 못 배운 설움을 많이 느끼셨더라고요. 그래서 받아쓰기만 하고 맞춤법 배우는 게 다가 아니라 글을 배움으로써 삶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글을 배우는 어르신들의 교과서는 때론 광고지가 되기도 하고, 트로트 노래 가사가 되기도 한다. 신문과 잡지를 보면서 시사와 상식, 역사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손주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보내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한 수업 중 하나다.

“아이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싶은데 맞춤법이 틀릴까 걱정하는 어르신들에게 오히려 요즘 애들이 더 맞춤법, 띄어쓰기를 안 지킨다며 부담 갖지 말라고 격려해주기도 해요. 운전학원에 가서 면허증도 따고, 학력 인정 중고등학교에 진학해 꿈을 키워나가시는 것을 보면서 내가 오히려 힘이 되기도 합니다.”

생활형 문화인으로서 황씨는 인천문화재단을 비롯한 문화기관이 인천시민들에게 더 많은 문화 정보를 홍보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또 지역별로 차이가 큰 문화 프로그램 정보력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냈다.

“문화재단이나 아트플랫폼, 근대문학관의 경우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있기는 한데 꼭 해당 시설 홈페이지에 들어가야지만 확인을 할 수 있어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문화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는 창구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지역별로도 차이가 많이 나는데 연수구 같은 경우는 박물관 등이 있어 길거리 현수막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데 구도심인 동구에 가보면 그런 문화 프로그램 홍보 배너는 찾기 어려웠어요. 모든 인천시민에게 문화 혜택이 골고루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황씨는 문화는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즐기는 것도 좋지만, 서로 알려주고 관심이 있는 것을 공유하다 보면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고 했다.

황씨는 “활동영역을 일부러 넓히기 보다는 그냥 여건이 되는대로 즐겁게 찾아다니고, 보고, 만나면서 사는 게 즐거운 것 같아요. 지금에 와서는 어디 좋은 대학, 무슨 과를 졸업해서 뭘 하면서 사는 지가 중요하기 보다는 문화 생활을 잘 즐길 줄 알며 사는 것도 하나의 복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김민재(경인일보 기자)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김경아 명창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첫 연재이므로 부족한 부분도 있겠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형식을 다듬어갈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에 날아온 보물, 김경아 명창 인터뷰
– 인천에도 국악을 위한 언플러그드 공연장이 있는 날을 꿈꾸며“

“국제도시이자 허브도시인 인천에 일 년 내내 국악을 들을 수 있는 국악전용극장이 있으면 좋겠어요. 일본에는 가부키 전용극장이 있고, 중국에 가면 경극만 365일 하는 극장이 있는 것처럼요.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인천에 국악전용극장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인천이 판소리의 불모지와 다름없던 시절이 있었다. 판소리를 하는 사람을 찾아 보기 어려웠고, 듣는 사람도 있을까 싶을 때였다. 대학교 4학년이었던 김경아 명창이 소리 선생님으로 초빙돼 처음 인천에 발을 내딛었을 그 때가 꼭 그랬다. 하지만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지금 인천은 전국의 소리꾼들이 꼭 서고 싶은 무대로 자리매김 했다. 매년 추석명절 즈음이면 명창과 귀명창(판소리를 제대로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만남의 광장이 펼쳐진다. 스승에서 제자로, 또 그 제자에서 제자에게로 이어져 온 민족예술의 정수인 판소리가 ‘들어줄 줄 아는’ 시민들을 만나 빛을 발한다. 전국의 명창들이 꼭 서고 싶은 무대로 자리매김 한 인천에서 우리 소리의 저변을 보다 확대할 방법은 무엇일까.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이자 인천을 대표하는 소리꾼 김경아 명창에게 들어봤다.

추석을 앞두고 미추홀구에 위치한 ㈔우리소리 사무실에서 만난 김 명창은 ‘제 5회 청어람 한가위, 판소리 다섯 바탕’ 공연 준비에 한창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여러 제약이 많은 상황에서도 6년 째 지켜온 명창과 귀명창의 만남을 이어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김 명창은 판소리를 즐기는 시민들의 실력이 상당하다고 추켜세웠다.

김 명창은 “청어람이 5회째인데 전국에 인간문화재 선생님들 다 와서 깜짝 놀라요. 틀리면 망신당한다고 전국에 입 소문 나서 공연 한달 전부터 연습할 정도입니다. 소리꾼들은 귀명창이 있고, 추임새가 나오고, 진짜 소리를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 있는 이런 무대가 필요해요. 또 관객은 TV에 나오는 사람 말고도 숨어있는 명창들을 만날 수 있는 무대를 원하고요. ‘명창과 귀명창의 만남’이라는 원래 꿈꿨던 공연장 분위기가 됐어요.”라고 말했다.

그가 관객을 몇 번이고 강조하는 까닭은 판소리가 함께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정숙한 분위기 속에 공연이 끝나면 일제히 박수를 치는 서양음악과 달리, 판소리는 관중이 흥을 내고 힘을 주며 무대를 같이 만들어 나간다. 김 명창은 이런 점을 판소리의 가장 큰 매력으로 꼽았다.

김 명창은 “옛날에는 ‘1고수, 2명창’이라 했는데, 이제는 ‘1청중, 2고수, 3명창’이라 할 만큼 청중이 없는 판소리는 있을 수 없어요. 그만큼 관객의 추임새와 몰입도가 중요하고, 관객이 그 판을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계 어디에도 관객이 이렇게 직접 음악에 뛰어들어서 더 잘하게 만들고, 흥하게 하는 이런 형식이 없어요. 관객의 추임새가 오롯이 무대에 전달되고 그것이 다시 작품이 되어 나오는 것이 굉장히 큰 매력이죠.”라고 자부했다.

최근에는 취미생활이나 자기계발을 원하는 시민들이 늘어나면서 판소리에 관심을 갖고 배우고자 하는 수요도 늘고 있다.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한 개인레슨은 물론, 아마추어들이 참여하는 단체강습에도 항상 대기자가 있을 정도다. 20여 명의 단체강습 수강생들은 춘향전 한 바탕을 다 뗀다는 같은 목적으로 4∼5년 째 꾸준히 달려오고 있다. 판소리의 저변 확대는 이러한 아마추어들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다섯 바탕 중에 가장 길고 어려운 바탕인 춘향전을 한바탕 다 뗀다는 것은 전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굉장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아마추어들은 짧게는 4년이 걸리는 분도 있고, 7년이 걸리기도 하는데 이렇게 도전한다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어요. 우리 음악을 계속 들어보라고 하는데 일단 한번 배우면 더 많이 들려요. 조금 듣기만 하는 것보다는 또 배워봐야 정말 귀명창이 될 수가 있어요.”라고 강조했다.

이렇듯 소리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높아지고 있지만 공연 인프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아쉬움이 있다. 상호작용이 무엇보다 중요한 판소리에 있어 공연 환경도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극장 규모가 너무 커서는 안 되고, 울림이 많아서도 안 된다. 이 같은 특성을 살릴 수 있는 공연장이 사실상 인천에는 전무하다. 또 명절 연휴에는 공공에서 운영하는 극장을 빌리는 일 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6년 째 이어오는 청어람 공연만 하더라도 매년 극장 대관이 가장 큰 어려움이다.

김 명창은 “인천에 소극장이 너무 없다 보니 극장 대관이 너무 어려워요. 서양음악이 많은 관중들을 놓고 극장에서 울리게 듣는 것이라면, 우리 음악은 마당이나 사랑방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꽂히는 발성이라 오히려 울리면 전달이 안 되거든요. 마이크를 쓰지 않고 공연할 수 있는 300석 규모의 언플러그드 극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언플러그드 극장에서는 공연하는데 기계를 안써도 되니 돈이 안들고, 관객들도 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있어 좋지요.”라고 설명했다.

김 명창을 전통을 이어나갈 수 있는 지원과 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인천문화재단에서 이뤄지는 지원 사업 역시 지역특성에 맞게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는 “사업을 심사할 때 공정성을 위해 외부에서 오다 보니 오히려 인천에 대한 특수성이 고려되지 않아요. 서울에서는 흔하지만 인천에서는 아닐 수 있고, 인천 지역만의 필요한 부분들이 있는데 반영이 잘 안될 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업을 뽑을 때 참신한 것을 따지는데, 전통에서 참신함이란 전통을 계속 이어나가고, 소리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이 느끼기에 어제와 오늘이 다른 것이죠. 그것이 바로 전통의 매력이고 본질인데 그런 부분 자꾸 무시되는 점이 속상해요 지속적으로 후원해 줄 수 있는 분야들을 선정해서 지원 사업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라고 토로했다.

또 교육에 대해서는 학생들이 직접 국악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이 생기기를 기대했다.

김 명창은 “지금 학교 음악 교육에서 국악프로테이지가 높아졌는데 아무래도 수업에서는 전달이 잘 안 돼요. 그럴 때는 열 번 설명하는 것 보다 가슴에 꽂히게 한번 들려주는 게 좋죠.. 각 학교에 한번 씩만 들려줘도 그 여파 클 것 같아요. 인천에 예고가 있는데 국악이 없는 점도 아쉬워요. 청소년들이 교육적으로 국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 넓혔으면 좋겠어요.”라고 목소리를 냈다.

김 명창은 2016년 제24회 임방울국악제에서 판소리 명창부 대통령상을 수상했지만 “항상 부족하다”고 말한다. 매년 여름 한 달씩 홀로 산 속에 들어가 공부를 하는 것도 그 이유다. 지난해에는 평생의 꿈이었던 100일 공부도 이뤄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밥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소리만 하는 일상을 100일 내내 보냈다.

김 명창은 “남들보다 모자라니까 하는 것이죠. 대통령상을 받았을 때는 그게 최고인줄 알았는데, 그 때 한 것을 보니 어찌 그 소리로 큰상을 받았는지 모르겠어요. 산을 하나 넘으면 또 다른 산이 있네요. 여수에서 한 달에 한번 배우러 오시는 분이 있는데 그런 분들이 저 멀리서 오시는 걸 보면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지역의 원로 분들께 ‘인천에 날아온 보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그렇고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공부하면서 부족한 점을 찾고, 채워가는 기쁨을 느끼며 지내고 싶습니다.”라고 바람을 이야기했다.

홍봄 기호일보 기자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육상효 감독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첫 연재이므로 부족한 부분도 있겠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형식을 다듬어갈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영화, 그리고 인천
– 육상효 감독과의 인터뷰

육상효

영화감독, 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문화경영학과 교수.
1994년 단편영화 <슬픈 열대>로 영화를 시작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의 각본을 썼으며, 각본/각색/감독을 맡은 <방가? 방가!>를 통해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2019년 각본/감독을 맡은 <나의 특별한 형제>로 2019년 제3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 2020년 10월 20일, 인하대학교에서 최근 영화촬영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육상효 감독을 만났다. 본 인터뷰는 방역지침을 준수하며 이루어졌음을 밝혀 둔다.

류: 안녕하세요. 코로나19 때문에 학교에 나오지 못하니 자주 뵙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인터뷰를 승낙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먼저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해주시면 어떨지요.

육: 인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간간이 영화를 만드는 육상효입니다. 최근에 영화 한 편을 마무리해서 지금은 감독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류: 촬영하시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제 다 마무리가 되셨군요. 어떤 영화인가요?

육: <휴가>라는 작품이에요. 바로 얼마 전에 완성되었어요.

류: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개봉은 언제인가요?

육: 아직 개봉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어요. 코로나 때문에 개봉예정작들이 많이 몰려 있는 상황이라 그렇게 빨리 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지금 한 100여 편이 대기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다음 주에 모니터 시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류: 모니터 시사는 어떤 것인가요? 일반적인 시사회는 아닌 것 같군요.

육: 모니터 시사는 일반관객을 대상으로 한 블라인드 시사회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약간 강의평가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영화가 메인 타깃으로 삼은 관객을 임의로 뽑아서 시사회를 갖는 방식이죠. 모니터 시사회를 담당하는 전문 회사가 있어서 거기서 연령대나 지역 등을 고려해서 100명 정도의 인원을 모집합니다. 가령 20대를 타깃으로 하는 영화라면 20대가 더 많게, 이런 식으로 구성돼요. 이 시사회에 오시는 분들은 영화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어요. 관계자도 아니도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영화가 좋아서 오시는 분들이죠.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와서 영화를 관람하고 세세하게 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입니다.

류: 들어보니 정말 강의평가와 비슷한 면이 있네요. 익명이고 점수도 부여하고.

육: 이분들의 평가가 개봉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모니터는 5점 만점인데 여기서 4점 이상이 되면 아무래도 관객의 호감도가 높은 거니까 개봉일정을 잡는데 유리하죠. 3점대면 조금 심란해지는 거고요. 예전에는 4점이 넘으면 200만은 보장이라고 말도 있었어요. 강의평가도 4점대가 넘으면 평가가 좋은 거잖아요. 딱 그런 느낌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저는 모니터 시사회에는 가지 않아요. 아무래도 스스로 굉장히 압박을 느낄 만한 자리니까 스텝들이 주로 가지요.

류: 모쪼록 좋은 결과가 있기를 함께 응원합니다. 말씀을 듣고 나니 저까지 긴장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영화계의 상황도 많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저만 해도 최근에는 극장을 가본 일이 별로 없어서요.

육: 사실 극장은 코로나에 있어서는 그리 위험한 장소가 아니에요. 방역도 잘 되고 있고, 거리두기도 철저하게 지켜지고. 그런데도 사람들이 극장에 많이 오지 않지요. 극장에서 감염된 사례는 전무한데도 말이죠. 요즘에는 넷플릭스에 관객이 다 몰리고 있어요. 아무래도 감독이나 스텝 입장에서는 극장 개봉이 안 되고 넷플릭스로 가게 되면 일종의 월급쟁이가 된 느낌이죠. 극장에 걸리면 관객의 수에 따라 흥행수입도 달라지지만, 넷플릭스에서는 아무래도 제작비를 기준으로 계약이 되거든요.

류: 시작부터 영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너무 흥미진진하네요. 그러다 보니 제가 본론도 말씀을 못 드린 것 같아요. 이렇게 인터뷰에 모시게 된 이유는 인천문화재단에서 내는 <인천문화통신>의 기획인터뷰 때문인데요. 인천문화재단과의 인연에 대해서 잠깐 얘기해주시겠어요?

육: 인천문화재단과의 인연은 인하대로 오면서 시작되었죠. 재단이사직을 맡게 되었는데, 당시엔 인천영상위원회가 인천문화재단 내에 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영화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이 재단이사로 필요했던 거죠. 제가 재단이사를 하면서 인천영상위원회 위원장도 4년 정도 맡았어요. 그때부터 재단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위원회는 재단에서 독립해서 별도의 기관으로 있어요. 제가 위원장이었을 때도 관련 논의가 많이 나왔었는데 후에 따로 나와서 현재는 독립된 기관으로 규모도 커졌지요.

류: 인천영상위원회에 계시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업이나 이슈가 있으셨나요?

육: 하도 오래 전이라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지금까지 기억나는 건 <팸 투어>인 것 같아요. 이건 요즘도 지역마다 많이 하는 건데, 외부에서 작가나 감독을 초대해서 인천의 여기저기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죠. 저도 그때 같이 참여했는데 인천의 구도심이나 항구, 관문 이런 곳들을 소개해주는 것이었어요. 이렇게 공간을 보여주면 사람들 기억에 남고, 아무래도 나중에 영화를 찍을 때 그 공간을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저 역시도 영화를 찍을 때 인천에 있는 공간을 많이 활용하는 편이거든요. 인하대에서도 많이 찍었고요.

류: 공간에 대한 인상을 전달해주는 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겠군요. 말씀이 나온 김에 연결해서 질문 드리겠습니다. 영화적 공간으로서 인천이 가진 장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혹은 인천에 바라는 지점이 있다면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육: 인천은 구도심과 신도심이 모두 있는 공간이에요. 제가 영화를 찍을 때 80-90년대 분위기를 나타내고 싶을 때 인천의 구도심을 많이 활용하거든요. 또 외국에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해외 분위기를 내고 싶을 때는 송도에 있는 공간을 활용했고요. 이 거리가 멀지 않으니까 인천이라는 지역 안에서 촬영이 용이하죠.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세트장 같은 거예요. 부산만 해도 세트장이 꽤 있거든요. 세트가 있으면 아무래도 그곳을 중심으로 영화를 찍게 되니까 산업적인 면에서는 좋지요. 요즘은 파주 같은 곳에도 세트가 많이 생기는 추세고요. 인천은 서울에서 근거리니까 아무래도 더 유리할 수 있는 지점이 많을 것 같아요. 구도심과 신도심이 공존한다는 점도 영화의 로케이션으로 좋다고 할 수 있고요.

류: 인천시와 인천영상위원회에서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을 해주실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인천이라는 공간이 가진 장점이 영화를 통해 많이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영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이 있는데요. 감독님께서 지금까지 찍은 영화 중 스스로 가장 만족했던 작품이 있다면 어떤 작품일지 궁금합니다.

육: 음, 하나를 꼽자면 저에게는 <나의 특별한 형제>인 것 같아요. 이 영화가 제가 작업한 다섯 번째 영화인데요. 아무래도 저도 나이가 있는 감독이다 보니까 이 영화를 찍으면서 스스로 많이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배우부터 스텝까지 팀 전체가 다 만족스러웠어요.
이것만이 아니라 외적인 환경도 굉장히 좋았어요. 왜냐하면 <표준노동계약제>의 확립이 된 상태에서 찍은 영화였거든요. 그 전까지는 사실 영화 작업이라는 것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표준노동계약 이후에는 딱 12시간만 작업하게 되었거든요. 그 시간에 정리 시간도 포함되니까 실제 촬영은 11시간 정도죠. 만약 시간이 더 필요할 경우엔 노동자대표와 협의가 되어야 해요. 당연히 스텝들의 임금도 상승되었고요.
물론 아직 많이 부족하죠. 하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졌죠. 앞으로도 더 좋아질 거라고 예상되고요. 무엇보다 영화촬영을 하면서도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좋았어요. 촬영기간에도 가족들과의 일상도 가능해졌고, 촬영 끝나고 저녁식사하면서 이야기할 여유도 생겼고요. 그래서인지 <나의 특별한 형제>를 찍을 때, 정말 이것이 ‘즐거움’이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류: 영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즐거운 것 같습니다. 이제 조금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마지막으로 인천문화재단에 대한 생각이나 바라는 지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육: 인천문화재단이 15년이 되었는데, 냉정하게 말씀드리자면 내부적인 가치에 비해 외부적인 확장성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여전히 인천의 문화를 이끌어간다고 하기엔 대중적인 가치를 확실하게 이끌어내진 못한 것 같아요. 물론 내부에서 여러 사업을 열심히 하신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독이나 교수가 아닌 일반 시민으로서 느끼기엔 다른 광역재단에 비해서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여기엔 여러 가지 한계들이 있겠죠. 인천시와의 관계라든지 시민들의 관심 부족. 이런 것들이요. 앞으로 인천문화재단이 극복해야 할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류: 아무래도 재단의 색깔이 분명해져야 한다는 말씀이신 같습니다.

육: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인천문화재단이 어떤 사업을 하느냐, 할 때 확실하게 떠올려지는 것들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홍보 문제일 수도 있고 예산 문제일 수도 있지만, 확실하게 일반 시민에 어필되는 사업이 많지 않다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어요. 많은 사업을 꾸리는 것도 좋지만 인천과 인천문화재단이라는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좀 더 대중적인 사업들이 꾸려지고, 그 안에서 인천문화재단의 이름이 확실하게 드러날 수 있는 방향으로 지속될 필요도 있는 것 같습니다.

류: 앞으로 재단 안에서 많이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대중적 인지도와 정체성 확보에 좀 더 공격적으로 나아가 주길 당부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류수연 문학평론가, 인하대 프론티어학부대학 교수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무용가, 그 이상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 무용가 박혜경(인천문화재단 이사)을 만나다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첫 연재이므로 부족한 부분도 있겠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형식을 다듬어갈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무용가, 그 이상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 무용가 박혜경(인천문화재단 이사)을 만나다

류수연

◆ 2020년 9월 14일, 인천 중구 신포동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방역지침을 준수하며 박혜경 이사를 만났다. 박혜경 이사는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한 지난 4년은 “무용가, 그 이상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류 : 안녕하세요? 항상 회의 장소에서 뵙다가 이렇게 다른 곳에서 뵈니까 새로운 기분입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략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박 : 저를 소개하자면, 과거에는 ‘무용하는 사람’이라는 말로 충분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는 이에 더해 ‘후배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언제나 고민하는 선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요즘 들어 계속 고민하는 문제인데, 앞으로 제가 계속 풀어나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해요. 인천문화재단을 통해 컨템퍼러리 외의 다른 분야를 접하면서 점점 이런 고민들이 커진 것 같습니다.

류 : 인천, 그리고 인천문화재단과의 인연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세요.

박 : 사실 저는 해남 출신이고 고등학교는 광주에서, 대학은 서울에서 나왔어요. 그런데 가장 오래 산 곳은 이곳 인천이죠. 그러니까 인천은 저에게는 사실상의 고향이지요. 제가 인천에 온 계기는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학생 때 인천 시민의 날 공연에 참여했던 것이 인천과의 인연의 시작이었어요.

류 : 인천과의 인연이 정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군요. 이사님께는 인천이 제2의 고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박 : 처음 인천에 온 것은 1987년인데 그때는 무용학원 강사였어요. 1989년부터 인천현대무용단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고요. 제가 2005년에 인천무용협회 회장이 되었는데, 그때가 바로 인천문화재단이 출범을 한 때였어요. 그러면서 인천문화재단과의 인연도 시작되었죠. 아무래도 무용협회 회장이니까 재단과 함께 논의할 것들은 많았지만, 당시까지는 그래도 개인 활동가였으니까 재단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2017년부터 재단이사가 되면서 더 구체적인 인연이 생겨났어요.

류 : 그렇다면 사실상 재단의 15년 역사는 안팎에서 보신 셈이군요. 그렇다면 인천문화재단 이사로 계시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업이나 이슈는 무엇이었나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요?

박 : 재단이사가 사업을 직접 운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아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사로 있으면서 인천문화재단이 진행한 여러 사업들의 면면을 본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일단 저는 무용인이니까 무용 중심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전문 예술가들에게 대한 지원부분에 좀 더 관심이 많았고요.
제가 가장 좋았다고 생각했던 사업들도 이런 영역에 관련이 있어요. 먼저 재단 사업 중에서 예술인 지원을 청년, 중년, 장년으로 구분해서 하는 것이 있어요. 생애 시기별 예술가를 지원하는 것이죠. 저는 이런 부분이 좋았습니다. 또 전에 전문 예술인에게 해외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업들도 굉장히 좋았어요.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해주니까요. 최근에 진행하고 있는 예술인 복지 관련 사업들도 굉장히 의미 있고 중요한 사업이고, 인천문화재단의 정체성과 관련된 사업이지요. 이 외에도 ‘트라이 보울’이나 ‘아트플랫폼’의 발전 가능성도 계속 지켜보아야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류 : 정체성 문제가 나와서 연결해서 질문을 드립니다. 정체성이라는 결국 재단의 가치나 지향점과 연결되어야 하는 지점일 텐데요. 문화예술계의 종사자로서 생각하는 인천문화재단의 가치는 무엇인지, 혹은 인천문화재단의 지향은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박 : 제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재단의 정체성 문제입니다. 인천 내에 문화재단이 인천문화재단 하나밖에 없었던 15년 전과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고 봅니다. 현재 인천에는 부평, 연수, 서구에 구 단위의 지역문화재단이 있어요. 며칠 전에 기사를 보셨겠지만, 중구문화재단의 설립도 발표된 상태이고요. 즉 인천 내에 1개의 광역문화재단과 4개의 지역문화재단이 생긴 거지요. 다른 구에서도 문화재단이 곧 생기리라 추정해볼 수 있고요.
그렇다면 인천문화재단의 성격 역시 이러한 흐름에 따라 바뀔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역문화재단과 구분된, 광역문화재단으로서 인천문화재단의 정체성이 강화되어야 생각이 그것이에요. 사실 얼마 전에 <인천문화통신 3.0>에 관련된 글을 기고하기도 했어요.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어요.
저는 무엇보다 일단 생활문화와 예술이 좀 구분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둘 다 중요하지만 인천문화재단이 그것을 다 이끌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지역문화재단이 생활문화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광역문화재단으로서 인천문화재단은 예술가 지원과 같이 전문 예술인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그 정체성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이야말로 이런 문제를 인천시도, 인천문화재단도 고민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해요.

류 : 저 역시 충분히 숙고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단의 지원 문제와 관련해서는 최근에는 코로나19 문제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현 단계(코로나19) 상황에서 인천문화재단에 바라는 것이나 제안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박 : 전반적으로 사업들이 잘 시행되고 있다고 봅니다. 아쉬운 것은 언택트가 현실이라고 해서 공연 등에 대한 지원이 정지나 취소되는 부분들이에요. 사실 이 부분은 재단의 문제라기보다는 예산의 사용과 관련된 문제일 텐데요. 사실 공연 같은 경우에는 대관에 맞추어진 지원이 많거든요. 이런 부분들을 영상 등에 사용할 수 있게 만들면 오히려 다른 방식의 언택트 공연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금 이 공간(박 이사의 사무실)만 해도, 사실 이런 공간을 활용해서도 다양한 작업이 가능하거든요. 영상을 기준으로 한다면 대관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레퍼토리가 탄생할 수 있는 거죠. 기존에서 함께 하기 어려웠던 다른 예술 분야와의 협업도 이루어질 수 있고요. 재단 이런 부분에서 보다 유연하게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좀 더 모색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예술가들도 기존에 할 수 없었던 방식의 공연에 대해서 아이디어를 내야 할 거고요. 저는 이 상황이 오히려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류 : 인천문화재단의 이사직을 마친 소회를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박 : 인천문화재단에서는 참 다사다난했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이사회도 열심히 참석했고 혁신위원회도 참여했지만, 그럼에도 이사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고 많은 일을 하지 못해서 여러 가지로 미안하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스스로는 열심히 참여하려고 노력했어요. 제 연습실이 재단에서 가까웠던 점도 좋았고요.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한 지난 4년은 저 스스로를 많이 성장시킨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특히 저와는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의 의견을 경청할 수 있었던 것이 정말 좋은 자양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에는 무용, 그 안에서도 컨템퍼러리. 이런 것만 보았는데, 이제는 컨템퍼러리를 넘어 무용 전반을 보게 되고, 또 다른 예술 분야와의 협업도 함께 고민하게 된 것 같아요. 이러한 경험들이 앞으로 무용계에서 좋은 선배로 나아가겠다는 제 다짐을 갖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류 : 마지막으로 재단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박 : 앞에서도 했던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어요. 인천문화재단이 광역문화재단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갖는 것이 그것입니다. 인천문화재단만의 색깔, 역할. 이런 것에 집중해주실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사실 재단이 일이 굉장히 많고, 그 내부의 직원들이 정말 일당백으로 일을 하고 있거든요. 인천문화재단의 정체성이 뚜렷해지고 ‘집중’되면 이런 부분들도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더 전문성을 갖게 되리라 생각해요.

류 :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혜경 이사는 인천문화재단의 창립 초기부터 자문이자 조력자로서 협업했고 4년간 인천문화재단의 이사로 있으면서 재단의 현황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한 박 이사와의 인터뷰에는 재단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진심어린 조언들이 드러났다. 그 진심이 인천의 예술인들을 위한 구체적인 지원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란다.

박혜경(朴慧京, Park Hye Kyung) : 무용가/ Korea Action Dance Company 단장.
서울예술대학 무용과 졸업. 한국체육대학교 체육학 석사. 동덕여자대학교 무용학 박사, 시립인천전문대학 무용과 강사, 인천무용협회 회장, 인천안무가협회 회장, 인하대예술교육원 강사 역임. 인천예총 예술상, 인천시 공연예술부문 문화상 수상.

1)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동네 책방을 열고 가꿔가는 소소한 이야기 – 동네책방 ‘산책’ 대표 홍지연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앞으로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첫 연재이므로 부족한 부분도 있겠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형식을 다듬어갈 예정이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동네 책방을 열고 가꿔가는 소소한 이야기
– 동네책방 ‘산책’ 대표 홍지연

김민재

서점은 국어사전에서 책을 갖추어 놓고 팔거나 사는 가게로 정의된다. 서점과 비슷한 말로는 서관, 서림, 책방 등이 있다. 클릭 한 번으로 집 앞까지 책이 배송되는 요즘, 서점은 사전 의미 그대로 ‘사고-파는’ 역할에만 충실해져 가고 있다.

인천 계양구 계산동 경인교대 인근 주택가에 자리한 서점 ‘책방 산책’은 책도 있지만, 문화가 있고, 사람이 있고, 휴식이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찾아가 책과 사람을 만나는 동네 문화 놀이터다. 새벽 1시까지 동네 주민들이 모여서 책을 읽고, 혼자 읽기 버거운 고전을 함께 읽거나 작가와의 만남 행사를 열어 문화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공간이다.

인천 토박이 홍지연(46) 대표가 단독주택 1층을 개조해 만든 책방 산책은 2016년 11월 문을 연 동네 책방이다. 동네 책방은 대규모 프랜차이즈 서점이나 참고서 판매 중심의 중소형 서점과 구분되는 개념이다. 지역 사회를 근간으로 책 문화를 만들어가는 작은 서점을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작은 서점이란 규모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작게, 낮게, 천천히 가려는 삶의 가치를 담은 개념”이라고 홍 대표는 설명했다.

헌책방 거리가 있는 동구 배다리에서 자란 홍지연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누가 꿈을 물으면 “마흔이 되면 헌책방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유년시절부터 책과 가까이 지냈던 덕에 대학생 때는 책방에서 아르바이트도 했고, 직장에 다닐 때도 책을 끼고 살았다고 한다. 결혼과 출산, 육아, 퇴직으로 이어지는 흔한 ‘경단녀(경력단절여성의 줄임말)’의 삶을 살아가던 홍 대표는 진짜 마흔이 넘어서자 꿈을 이루기 위해 움직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까맣게 꿈을 잊고 있었는데 계산동으로 이사와 공동 육아를 하고, 어린이·청소년 관련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독서 모임을 하면서 꿈이 되살아 나기 시작했어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책방을 운영하기 위해 여기 저기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어요.”

홍 대표가 책방을 열기 위해 공공기관의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했고, 가족여행 삼아 부산의 보수동 헌책방 거리 등 다른 지역의 서점을 다니면서 준비했다. 그런데 정작 다른 동네 책방 주인들이 이런 홍 대표를 말렸다. ‘꿈과 현실은 다르다고.’

홍 대표는 청소년 전문 서점을 열고 싶었다. 어린이·청소년 책이 주류를 이뤘으나 학부모들을 위한 책도 들여 놓고 하다 보니 소설과 비문학 등도 서가를 채우기 시작했고,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문을 열고 1년 반 동안은 너무 힘들었죠. 문을 닫으려고 했을 정도니까요. 사람들이 이렇게 책을 안 읽는지 몰랐어요. 책방 산책이라는 이름도 원래는 서가를 거닐면서 조용히 산책하는 모습을 상상해 지은 이름인데 어린이들이 오면서 북적북적 해지고, 이게 책방인지 놀이터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였어요.”

홍 대표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생각을 바꿨다. 책방에 손님이 맞추는 게 아니라 책방이 손님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동네 책방의 취지와도 맞는 것이었다. 과연 이 동네에서 책방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기로 했다. 온라인 주문에 익숙해 오랫동안 서점을 떠났던 사람들에게 왜 서점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것이 먼저였다.

“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서점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는데 현실을 보니까 요즘 아이들은 택배 아저씨들이 책을 만들어서 오는 줄 알더라고요. 도서관에도 책은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역할을 해야 좋을지 몰라 1년 6개월 동안은 상당히 많이 고전했어요.”

때마침 비슷한 방식으로 서점을 운영하는 책방 지기들이 모여 만든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가 구성됐다. 홍 대표도 여기에 참여해 이런 저런 사정을 공유하고,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인천지역에서도 별도의 모임을 만들어 동네 책장이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홍 대표는 책을 매개로 하는 다양한 모임을 열었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동네에 거주하는 역사 선생님을 초청해 연 강의다. 국정 교과서 이슈를 시작으로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나눴고, 학생과 학부모 반응이 나름 괜찮았다. 다음은 고전에 대한 열망은 있으나 혼자서는 도저히 완독하기 어려운 주민들을 위해 고전 낭독클럽을 열었다. 출판사와 협업해 ‘열하일기’를 10주 가량 낭독했는데 20여 명이나 참여했다.

“열하일기를 낭독하는 날 하필 천정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던 적이 있었는데 한 명이라도 오면 행사를 열자는 생각이었지만, 참석자들이 옷이 흠뻑 젖은 채로 와서 앉지도 못하고 서서 읽었던 기억이 나요. 우리 동네는 맞벌이 부부가 많아서 주로 야간까지 문을 열고, 주말에도 행사를 했어요.”

책방 산책의 최대 히트작은 ‘심야 책방’ 프로그램이다. 여름 밤 무더위에 잠도 오지 않고, 집집 마다 에어컨을 틀어놓을 필요 없이 서점에서 책을 읽을 자리를 만들어주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집에서 책을 가져와도 되고, 서점에서 책을 사서 읽어도 되는 방식이다. 원래 밤 11시까지 열려고 했는데 참가자들이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 아이들만 먼저 집으로 들여보내고, 새벽 1시까지 운영시간을 연장하기도 했다.

“사실 작가와의 만남도 좋지만, 스스로 책을 읽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하잖아요. 아이들이 엄마랑 아빠랑 같이 책을 읽는 재미도 느끼고, 서로 이 책을 왜 선정했는지와 읽고 나서 느낀 소감 등을 나누는 소통의 자리가 되기도 했어요.”

책방 산책은 올해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지만, 예기치 않은 코로나19 사태로 운영에 차질을 빚었다. 온라인 프로그램 등 다양한 대안을 마련 중이지만, 어려움이 예상된다. 동네 문화공간으로 자리했지만, 서점 본연의 기능인 책 판매가 없이는 운영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재고 도서 등의 가격을 대폭 낮출 수 있는 도서정가제 개정을 추진하고 있어 동네 책방의 경쟁력 악화가 우려되고 있다. 현행 도서정가제는 현금 할인 10%와 마일리지 적립 5%까지만 허용하고 있는데 할인율이 높아지면 온라인·대형 서점과의 할인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워진다.

“책이 덤핑과 할인으로 각인돼버리고, ‘적정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게 되면 우리 같은 동네 책방은 고사할지도 몰라요. 이미 온라인 서점의 무료배송이 사실상 할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후퇴하게 되는 셈이에요. 책은 옷과 신발 보다 종류가 많아요. 박리다매로 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 서점 뿐 아니라 출판업계도 타격이 클 거에요.”

홍지연씨의 목표는 책방산책 2호점을 내는 것이다. 지금은 주택가에 있지만, 인근의 경인교대 학생들을 위한 작은 서점을 내고 싶다고 한다. 코로나19로 비어 있는 캠퍼스에 다시 새내기들이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지금 책방은 주민들의 놀이터로 남겨두고, 교대 앞으로 가서 청년들과 소통하고 싶어요. 아주 작은 공간이라도 청년들이 책을 읽고 꿈을 키우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는 동네 책방 운영을 꿈꾸는 이들에게도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기존의 독자를 나눠 갖는 게 아니라 독자를 확장해 나간다는 마음가짐으로 운영한다면 동네 책방의 역할도 크다고 생각해요. 저도 경험 했듯이 동네 책방을 운영한다고 하면 주변에서 만류가 심할 테지만, 꼭 혼자가 아니어도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과 협업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오프라인 서점에는 온라인 서점이 AI로 취향을 분석해서 책을 추천하는 것과 달리 책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들춰보는 것부터가 시작이니까요.”

책방 산책은 인천 계양구 계산동 향교로 5번길 23에 있다. 인천지하철 1호선 경인교대입구역 5번 출구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린다. 동네책방이 궁금하신 분들의 방문을 권한다.

1) <경인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