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 너머의 가능성까지: 권칠인 감독을 만나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영화, 그 너머의 가능성까지권칠인 감독을 만나다

류수연(인하대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세기말 아날로그 시대의 감수성을 듬뿍 담아낸 영화 <접속>의 명대사가 흐르는 공간, 종로3가 옛 피카디리 극장 옆에 위치한 카페에서 권칠인 감독을 만났다. 20~30대 여성심리를 가장 감각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평가받는 영화 <싱글즈> 감독이자 인천영상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한 권 감독과의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영화로 시작되었다.

‘파시’, 그리고 할리우드 키드

성어기에 어항에서 열리는 생선시장을 파시(波市)라 한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이 파시는 인천이라는 도시 전체를 좌우하는 가장 큰 행사였다. 권 감독은 자신이 어린 시절 할리우드 키드로 살 수 있었던 간접적인 이유로 파시를 꼽았다. 당시 인천은 전국에서 극장이 가장 많기로 손꼽히던 도시였다. 파시만 되면 돈과 사람이 몰리니, 문화소비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연평도의 조기파시는 특히나 유명했다고 한다.

애관, 미림, 오성, 문화, 인천, 현대, 동방, 금성, 아폴로, 자유……. 앉은자리에서 술술 나오는 극장명만 해도 십 수 가지니, 그 시절 인천에 얼마나 많은 극장이 있었는지 쉽게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시절 권 감독에게 극장은 놀이터이고 휴식처였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통로였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인천의 할리우드 키드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곧장 영화인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은 건축공학과로 진학했어야 하니 말이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직업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을 터이니, 영화로 전공을 삼는다는 것은 요원하였으리라. 그러나 영화에 대한 그의 갈증은 대학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대학 졸업 후 영화아카데미를 들어가면서 영화인으로 사는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권 감독은 영화인으로서의 시작을 이렇게 소회한다. 그가 영화를 하면서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한 가지. “앞으로 나는 분명히 가난하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생각을 이끌었다. 그는 “적어도 정직할 수는 있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보통의 삶과 감정을 담겠다는 것을 하나의 좌우명처럼 마음에 남겼다고 말한다.

영화산업을 위한 인큐베이터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권칠인 감독이지만, 한 사람의 영화인으로 인천과 보다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영상위원회(이하 영상위)의 위원장이자 인천문화재단의 이사로 위촉된 것이다. 그가 처음 부임했을 때만 해도 인천문화재단(이하 재단)의 산하기관이었던 영상위는 2013년 독립법인으로 분리된다. 같은 해에 인천독립영화협회도 설립되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뜻깊은 사건이다. 한 기관이 산하기관을 떼어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단지 예산과 조직을 분리하는 일이 아니라 자칫 그 기관의 위상과 영향력까지 축소시킬 위험을 내재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예술이자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서 영화가 가진 성격을 이해하고 수용해준 재단의 용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한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이러한 상생의 결단을 내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결단으로부터 비로소 인천의 영화산업을 위한 인큐베이터가 마련되었음에, 권 감독은 재단에 다시금 감사를 표하였다.

디아스포라영화제 (사진: 인천영상위원회)

그렇다면 어엿한 독립법인이 된 영상위의 위원장으로서 그가 진행했던 사업 가운데 가장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권 감독은 망설임 없이 <디아스포라영화제>를 꼽았다. 그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가진 정체성의 정수를 ‘합수(合水)’라고 강조한다. 말 그대로 ‘물이 합쳐지는 곳,’ 그 뱃길을 타고 여러 지역의 문화가 모여드는 곳. 그곳이 바로 인천이다.

그 시작은 재단과 함께 진행했던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다양성 사업인 <무지개다리 지원사업>이었다. 여기서 촉발된 인식이 자연스럽게 ‘디아스포라’라는 화두를 이끌었고, 그로부터 <디아스포라영화제>가 탄생되었다. 권 감독이 떠난 뒤에도 <디아스포라영화제>가 인천을 대표하는 축제로서 제 몫을 잘 수행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고향인 인천을 위해 좋은 선물을 남겼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영화’가 아닌, 새로운 용어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았다. 영화인으로서, 그리고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 그는 오늘의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영화감독으로서 그는 항상 보통 사람들이 그려내는 이야기에 관심을 두었고, 그것을 가장 잘 그려낼 수 있는 장르가 멜로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그의 대표작인 <싱글즈>(2003), <뜨거운 것이 좋아>(2008), <관능의 법칙>(2014) 등은 모두 그러했고, 그의 이러한 관점은 여성들의 욕망을 그려낸 작품들에서 좀 더 탁월하게 드러났다.

싱글즈(2003) 뜨거운 것이 좋아(2008) 관능의 법칙(2014)

하지만 놀랍게도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면서 그는 ‘영화’라는 세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무엇보다 이제 ‘영화’라는 말을 버려야 할 때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시대가 이미 새로운 매체와 형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비법(영화와 비디오에 관한 법률)’을 떠올리면 분명해진다. 이미 비디오는 사라졌고, 극장도 변화했다. 다양한 플랫폼이 출현했고 거기에 맞춰 영상의 형식도 달라졌다. 우리가 사용해 왔던 ‘영화’라는 말로는 충분히 담아낼 수 없는 ‘새로움’이 이미 영화의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영화’라는 말에 갇혀 있다. 그러므로 그 틀을 깰 수 있는 새로운 호명이 필요하다.

“가장 오래된 극장에서 가장 최신의 콘텐츠를”

이 변화 속에서 인천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일까? 권 감독은 현재 인천시가 진행하고 있는 ‘애관극장 공공 매입 여부’와 관련해서 말을 이어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극장이라는 의미를 가진 애관극장의 역사성과 상징성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문제는 그 활용이다. 권 감독은 공공자산으로서 극장을 매입해서 그저 박물관이나 전시관으로 활용하는 데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그는 오히려 이 극장을 다시금 살아있는 공간으로써 활용해주길 당부한다.

애관극장

가령 애관극장이 가진 대형 스크린을 새로운 콘텐츠를 위한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플랫폼으로 떠오른 유튜브, 그 안에서 수많은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는 크리에이터를 위한 상영관으로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극장의 스크린이라는 매체가 새로운 세대를 위한 최첨단의 콘텐츠를 위해 열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관료적 마인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문화정책은 지나치게 관료적이었다. 한류가 뜬 이후에는 내내 그 과실에만 탐닉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산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디에 가치를 둘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이제라도 ‘국·영·수 세력’이 만들어낸 이 관료제와 열심히 싸워야 한다. 성과와 업적으로 줄 세우기 하는 관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피력해야 한다.

권 감독은 인천이 이러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에 앞장설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음을 환기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문화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폭넓게 수용하려는 태도가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인천시의 선택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인천의 문화인과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욱 긴요한 때가 아닐 수 없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 ‘인천’의 시간과 공간 담는 ‘이야기꾼’: OBS경인TV 박철현 프로듀서(PD)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 ‘인천’의 시간과 공간 담는 ‘이야기꾼’OBS경인TV 박철현 프로듀서(PD)

박현주(경인일보 기자)

‘해양 도시, 한반도 화약고, 실향민의 터전, 자동차 산업의 요람, 노동 운동 산실…’ 인천을 지칭하는 말은 무수히 많다. 이 도시의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제작하는 OBS경인TV 박철현 프로듀서(PD)는 인천을 아울러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했다. 인천과는 그렇게 가깝지도, 그다지 멀지도 않은 충북 제천 출신인 박 PD는 2004년 OBS의 전신인 iTV에서 일하면서 인천에 정착했다.

인천과는 야구라는 접점이 있었다. 그가 응원했던 전북 연고 프로야구 쌍방울 레이더스는 지난 2000년 해체됐는데, SK와이번스가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단을 인수한 뒤 팀 연고지를 인천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직장을 위해 온 인천에서 ‘내 팀’을 조우하니 이보다 반가울 수 없었다. 프로 야구 정규 시즌에는 없는 시간을 쪼개서 야구장을 찾았다. 인천을 ‘야구 도시’로 접한 박 PD는 인천의 일상에 대한 궁금증도 빼놓지 않았다.

박 PD는 자신을 연출자, 편집자라고 하지 않는다. 인천이라는 도시 속에 축적된 시간과 공간을 샅샅이 톺고 살피는 ‘이야기꾼’이 더 어울린다고 한다.

인천 섬 곳곳에 사는 주민의 삶과 이야기박 PD는 2014년 겨울, 다큐멘터리 촬영차 울도를 방문하면서 인천의 섬 이야기를 다루기로 다짐했다. 당시 울도에는 2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도민 중 젊은 축에 드는 건 60대였고, 머리 희끗희끗한 노인이 대부분이었다. 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정착하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은 없는 섬이었다. 그물이 터질 정도로 새우와 조기가 잡혔던 이곳은 한때 서해 어업의 전진기지였다. 과거의 영광은 남겨진 폐가들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울도는 하루로 보면 해지기 직전이고, 사람의 인생으로 치면 말년이 다 된 섬이었어요. 인간이 태어나 청년이 되고 장년에 안정적인 삶을 살다가 노인이 돼 남은 삶을 정리하는 모습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순리가 아니더라고요. 섬 역시 인간의 생애와 같은 수순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섬들을 찾아 어민의 고달팠던 삶 얘기를 듣고,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섬 곳곳을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박 PD는 지난 2018년 인천 지역 섬 중에 육지와 연결돼 있지 않아 오랜 시간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을 위주로 로드다큐 <그리우니 섬이다>를 기획했다. 북한 장산곶 휴전선 바로 아래에 있는 백령도부터, 황금빛 모래사장으로 유명한 굴업도, 섬소사나무 군락지인 백아도 등 10여 개 섬의 모습을 담았다.

로드 다큐 <그리우니 섬이다>, OBS경인TV, 13부작, 2018 (출처: OBS경인TV 홈페이지)

이 다큐멘터리 속에 화자로 등장하는 이들은 유명인이나 전문 리포터가 아닌 다섯 명의 사진작가다. 작가들은 수년간 여러 차례 탐사 작업을 통해 인천 지역 섬을 들여다본 섬 전문가다. 첫 회 ‘큰 물섬, 덕적도’ 편은 덕적도가 고향인 서은미 작가가 등장하고, ‘백령도 5년 만의 재회’에 나온 노기훈 작가는 『백령일지-백령도에서의 12일간의 기록』(호밀밭, 2018)이라는 여행기를 펴내기도 했다. ‘그리우니 섬이다’에는 작가들이 섬을 거닐며 촬영한 사진도 나온다. 움직이는 영상 속에 정지된 순간을 함께 담았다는 게 또 하나의 볼거리다.

1986년 5월 3일 시민회관에 모인 시민들… 5·3민주항쟁 다룬 ‘그 날’박PD는 인천 5·3 민주항쟁이 그 이듬해 있었던 6·10 민주항쟁을 이끈 기폭제였다는 것을 2017년 다큐멘터리 ‘6월 민주항쟁 30주년 특별기획 <그 날>’로 조명하기도 했다. 5·3 민주항쟁은 1986년 5월 3일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인천·경기결성대회가 열릴 예정이던 인천 남구 주안동 시민회관에서 대학생·노동자 등이 펼친 반독재 투쟁이다. 그러나, 5·3민주항쟁은 민주화운동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이를 주제로 다룬 방송도 없었다고 한다.

6월 민주항쟁 30주년 특별기획 <그 날>, OBS경인TV, 2017 (출처: OBS경인TV 홈페이지)

“부마민주항쟁의 경우, 부산과 마산 지역 정신을 대표하는 항쟁으로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5·3 민주항쟁은 인천에서조차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가는 게 안타까웠어요. 5·3민주항쟁은 지역에서 활발하게 이뤄진 노동·여성·빈민 운동 등이 응축된 민주화 투쟁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벌써 30년이 지났지만, 더 늦기 전에 그날을 통해 지역의 시민 정신을 알리고, 시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정신적 유산으로 남기고자 했습니다.”

<그 날>의 제작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박 PD는 당시 회사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지 못하자 직접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제작 취지에 동의한 부평구와 남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천민주화운동센터 등 기초자치단체·시민단체의 지원 덕분에 ‘그 날’을 제작할 수 있었다.

치열했던 인천의 현대사, 시민의 삶이 곧 도시의 역사인천이 품은 인물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죽산 조봉암(1890~1959) 선생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다. 강화 출신인 조봉암 선생은 일제 강점기 항일 운동을 하고, 광복 후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958년 일명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이 집행됐다. 이후 유족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인 대법원이 52년 만에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헌정사상 첫 사법 살인으로 기록됐다.

“조봉암 선생의 삶을 통해 지나간 역사를 통찰하고자 다큐멘터리를 기획했습니다. 과거를 통해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인천의 오래된 도심인 동구 화수동 무네미 마을 곳곳을 살펴보는 공간다큐 <만남>을 제작했다. 바닷물이 넘어 들어온다고 해서 무네미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공간다큐 만남은 무네미 마을 속에 위치한 작은 책방부터 인천도시산업선교회까지 여러 공간을 들여다보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특히, 노동·민주화 운동의 산실로 평가받는 도시산업선교회는 최근 주택재개발 사업으로 철거 논란이 일었던 곳이다.

이처럼 앞으로도 인천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야기를 찾고 이 도시의 가치를 알리겠다는 게 박 PD의 목표다.

“인천을 무대로 한 시민들의 삶을 담고 싶습니다. 바다를 중심으로 한 부두 노동자, 실향민, 산업화 과정에 있었던 공장 노동자들까지요. 많은 이가 치열하게 보낸 하루하루가 쌓여 이 도시의 역사로 축적됐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이 일궈낸 인천의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인터뷰 진행/글 박현주(朴賢珠, Park Hyeonju)

경인일보 사회팀 기자




문화예술과 지역인재 육성의 토대를 마련하다: 인천대학교 김용민 교수와의 만남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문화예술과 지역인재 육성의 토대를 마련하다인천대학교 김용민 교수와의 만남

류수연(인하대학교 교수)

김용민 교수는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프로방스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 인천대학교에 부임하면서 인천과 연고를 맺은 뒤 지금까지 인천시민으로 살고 있다. 학내에서 인문대학 학장, 문화대학원 원장, 교수회 회장, 평의원회 의장, 법인 이사 등을 역임했다.

코로나19의 발생 이후 일 년 반이 넘게 비대면 수업이 이어지고 있는 모든 대학은 캠퍼스의 공동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코로나19라는 현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대학의 역할을 되짚어 보게 만들기도 한다. 문화예술 영역의 인재를 육성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설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김용민 교수를 통해 그 관계성을 되짚어보았다.

“지역문화 인재 양성과 문화 자립의 필요성”

불문학자인 김용민 교수가 인천의 문화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략 16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2008년 무렵 인천대 인문대학은 교육부 특성화 사업에 선정되었는데 이 사업의 한 꼭지가 바로 <문화매개자 양성사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인천대에는 문화예술가를 교육할 전문적인 커리큘럼이나 학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이에 김용민 교수는 지역문화계에 손을 내밀게 되었다.
김용민 교수는 대학의 특성화 사업이라는 현실적인 과제를 통해 지역문화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 지역문화계를 잇는 교량이자 인재육성과 지원을 목표로 설립된 인천문화재단이 막 초기 목표를 수행하던 때였다는 것도 큰 행운이었다. 말 그대로 대학과 지역의 니즈가 적실하게 만나게 된 것이다. 인천은 서울, 부산과 함께 대한민국의 3대 도시이지만 그 문화적 토양은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지역인재를 기를 육성시스템이나 그들이 자생할 수 있는 토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김용민 교수는 문화전공자는 아니었지만, 지역의 문화적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 가지는 중요성을 이때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대학이 있어야 함은 부정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당시 인천대는 지역문화계와의 연계성이 적었어요. 이건 아마 인하대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 연계성을 높이고 인재가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지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문화대학원의 필요성이 도출된 거죠.”

문화대학원의 필요성을 인식했지만, 그것이 현실화되기까지는 그리 쉽지 않았다고 한다. 지역문화인력 양성의 중요성에 대한 지역의 공감대가 충분하지 않았고, 특히 당사자인 대학 내의 인식이 매우 부족한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원 설립에 핵심인 정원 확보는 대단히 민감한 사항이었기 때문에 대학 구성원의 동의와 집행부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여러 난항을 겪으며 구성원을 설득했고 제반 조건을 준비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2012년 11월 인천대학교의 문화대학원이 설립인가를 받는 결실을 얻게 된다. 비록 정원 7명에 불과한 소박한 출발이었지만, 지역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인재들이 모일 거점이 마련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소소하지 않았다.

“인천에 뿌리를 두고 더 멀리 뻗어 나가야”

김용민 교수는 문화대학원 설립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문화전공자도 아닌 더구나 서양문학 전공자인 그가 지역예술을 고민하고 그 청사진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겸양은 오히려 인천대 문화대학원 설립을 추진했던 그의 의지와 지역문화에 대한 애정이라는 진정성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김용민 교수뿐만 아니라 지역의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든든한 지지가 인천대 문화대학원의 10년 역사를 일구어낸 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약속처럼 인천대 문화대학원(2013년)은 인하대 문화경영대학원(2006년)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문화예술 인재를 양성하는 양대 거점으로 성장해왔다. 고질적인 인재난에 시달렸던 지역문화계에 수혈하는 기능적 역할에도 충실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제 인천이라는 도시의 규모에 걸맞은 문화적 인프라를 위해 도약할 때”

김용민 교수는 인천문화재단의 제5기 이사이기도 했기에 재단의 비전에 대한 의견 역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인천은 근대의 관문이었다. 개항도시라는 의미는 열려 있는 도시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인천의 현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여전히 공항과 항만을 가진 인천은 밖으로 열려 있는 도시이다. 따라서 김용민 교수는 인천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열린 공간을 지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가령 신포동을 보면, 그곳이야말로 다양한 문화가 역사라는 시간과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한 도시와 그 도시의 장소가 문화적 거점이 되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와야 한다. 서울을 모방하거나 복제하는  것으로는 이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서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그러한 동력이 모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금 인천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상상력이다.

“인천문화재단은 굵직한 정책과 비전으로 명실상부한 지역의 문화적 허브가 되어야”

김용민 교수가 던진 화두는 어쩌면 분명하다. 그가 인천문화재단의 활동을 애정을 갖고 성원한 지가 벌써 10여 년이 넘었다. 그런 그는 이제 재단이 그 본연의 가치에 보다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바로 광역문화재단으로서 비전과 인천이라는 도시 전체를 이끌 아젠다를 도출하는 일이다. 김용민 교수의 요청과 바람이 인천문화재단의 행보 속에서 실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청년기획자 윤재훈, 주민과 예술에 물들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청년기획자 윤재훈, 주민과 예술에 물들다

홍봄(기호일보 사회부 기자)

“예술의 힘은 봄비 같아요. 새롭게 물들게 해주고 또 올라오게 해주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지역주민들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볼 때면 봄비가 내리는 것 같아 가슴이 울립니다.”

인천시 서구에서 만난 윤재훈(31) 씨는 자신을 ‘기획자’라고 소개했다. 왜 ‘문화기획자’가 아닌 ‘기획자’인가 하는 물음에 그는 “장르를 떠나 뭐든 기획하기를 좋아해서”라고 답했다. 직접 댄스공연을 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다원예술 분야의 공연을 주로 기획하고 있다. 같이 춤추는 사람들이 좀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찾은 길이다.

그는 인천에서 오래 거주한 인천 청년이다. 하지만 초기 활동은 서울과 세종시, 경기도 쪽에서 시작했다. 활동을 시작할 당시 인천지역에 기회가 많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의 힘이 강하고 그들만을 위한 지원 사업이 많기 때문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랬기에 인천서구문화재단이 생겼다는 소식이 그 누구보다 반가워하며 지역으로 돌아왔다.

윤 씨는 “지역에 여러 가지를 건의했지만 잘 반영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외부에서 오히려 활동을 많이 했다.”며 “서구에 재단이 생기면 문화라는 장르로 활동할 기회가 많아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돌아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지역에서 처음 한 일은 주민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이었다. 2019년 인천서구문화재단의 청년기획자 사업으로 지역주민들과 댄스 장르를 향유했다. 주민들과 예술활동을 하면서 그는 ‘예술이 예술인만의 전유물이 아니구나.’하고 느꼈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술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2년 차 프로젝트까지 이어졌다. 1년 차 때 함께 했던 서구 주민들과 서구 문화자원을 알릴 수 있는 홍보영상을 제작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청라호수공원을 알리는 콘텐츠다. 청라호수공원 곳곳을 비추는 영상에 지역 주민들의 댄스 동호회인 ‘섹시코맨도’가 어우러졌다.

직접 기획한 공연도 꾸준히 무대에 오르는 중이다. 지금은 국악과 랩, 비보잉, 미디어아트 등을 결합한 다원예술 <미스테리우스> 공연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무대에 오르는 공연팀 ‘구니스컴퍼니’는 연예사병 해군 비보이 1기 출신 멤버들이다. 군을 전역한 뒤 한국의 미와 멋을 가장 잘 나타내는 전통장르에 자신들의 장점인 비보잉을 접목한 창작 작품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공연은 2019년 인천에서 거리공연으로 시연된 이후 독창성과 연출력을 인정받아 <2020 안산국제거리극축제>와 <고양호수예술축제>, <부산금정거리예술축제> 등 다양한 거리예술 사업에 선정됐다. 올해는 문화공감 공모사업으로 선정돼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오는 12월 서구문화회관에서도 공연을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예전만큼 관객들을 자주 볼 수 없는 것은 그에게도 서운한 일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예술가들도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느꼈다. 지난해부터 어떻게든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왔던 예술가들은 해가 바뀌어도 앞으로 나아간다. 반면 변화 없이 지원만 기다리는 예술인들은 그 자리에 멈춰 있는 모습을 본다.

윤 씨는 “저도 2020년에는 공연을 못하니 큰일 났다는 생각부터 했어요. 관객이 없이 공연할 맛이 안 나는 건 당연하지만 계속 그것만 따지고 있을 수는 없겠더라고요. 다르게 생각하면 오히려 활동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기회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비대면으로 공연을 하니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기도 하고요. 시국에 맞춰서 예술가들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온라인 문화콘텐츠들이 많이 생산되는 요즘 그는 ‘홍보’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온라인 스트리밍을 하는 자체에 그치지 말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알리고 불러모으는 것이 필요하다. 또 카메라 송출을 담당하는 팀의 전문성도 강조했다. 송출하는 업체가 행사를 잘 이해하고 아는 이야기를 해야만 적절한 앵글을 비춰주고 자막도 넣고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가들을 불러오고 공연을 기획했는데 보는 사람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며 “기관에서 하는 행사들도 송출만 해놓고 ‘우리 했어’하는 식으로 진행해서는 안 되고 마케팅에 전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 씨는 기획자로 활동해 오며 우리나라에 문화예술인 지원 사업이 참 많다는 것을 느꼈다. 몇 년 전부터는 지역 내에서 청년예술인들에 대한 지원도 다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기획에 대한 예술계의 인식이 여전히 박하다는 점이다. 청년기획자 프로젝트를 이어온 서구의 경우도 1년 차 때 지원되던 기획자 인건비가 2년 차였던 지난해에는 사라졌다가 올해 다시 생겼다. 윤 씨는 기획자는 예술인이 아니라는 편견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5개월 프로젝트비가 150만 원밖에 안 되는데 공연을 올려야 하는 기획자로서는 결국 자신의 인건비까지 써버려야 하는 상황이 된다.”며 “1년, 2년 차 때 했던 청년 기획자들도 사업이 너무 힘드니까 안 들어오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청년기획자라는 프로젝트는 지역의 청년기획자를 많이 발굴해서 발전시키려고 하는 건데 이런 방식이 과연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든다.”고 덧붙였다.

윤 씨는 예술가들이 지속가능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재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가들이 프로젝트가 아닌 다른 일에 집중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또 적은 비용으로 많은 단체를 지원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신진단체는 이 돈으로 사업을 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기존 활동이 많은 단체들은 또 다른 재원을 마련할 여건이 되니까 사업을 할 수 있지만, 그렇다 보니 새로운 공연을 만들지 못하고 했던 공연을 또 하게 된다. 결국엔 지역의 문화발전이 안되고 예술단체는 성장 없이 돈 벌어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기획자로 살아온 지난 4년 동안 하나씩 배우며 공부해 왔다는 그는 앞으로 더 많은 지역 주민, 예술인들이 설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어나가고 싶다. 함께 만든 프로젝트, 같이 땀 흘린 무대가 박수를 받을 때만큼 행복한 순간이 없기 때문이다. 윤 씨는 “주민과 예술가들이 즐거워하고 관객들이 박수를 쳐주실 때면 모든 고생들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라며 “기획자로서 더 많은 주민들이 예술을 접할 수 있는 참여 여건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글 홍봄(洪봄, HongBom)

기호일보 사회부 기자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극단 십년후, 다시 사람을 경작하는 최원영 교수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사랑하며 살겠습니다극단 십년후, 다시 사람을 경작하는 최원영 교수

류수연(인하대학교 교수)

최원영 / 행정학 박사

(현)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겸임교수
(현) 기호일보 칼럼 「최원영의 행복이야기」 집필
(현) 인문학 모임 다카스(DACASDiscover Accept Concern Achieve Spread) 클럽 이끔
(전) 인천문화재단 초대이사
(전) 극단 십년후 창단 및 대표

최: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최원영입니다. 모두 안녕하신가요? 어떤 질문부터 시작할까요?

류: 선생님께 대한 질문의 시작은 아무래도 극단 십년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비록 극단을 떠나셨지만, 지역극단의 의미를 만들어낸 리더십이라는 명성은 여전하시니까요. 창단에 관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최: 내가 원래는 초등학교 선생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미국에 유학 가기 전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이 친구와는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인데, 서로 아주 친했어요. 이 친구가 지금은 밀양연극촌 3대 촌장으로 있어요. 원래는 지방에 있는 대학의 교수였는데, 지금 우리 나이로 66세니까 대학을 퇴직할 때가 됐잖아요. 어쨌든 교수로 있으면서 촌장이 된 거죠. 그 친구 얘기예요. 당시 내가 미국으로 떠나겠다, 하니까 이 친구가 본인도 유학을 떠나겠다, 이런 거죠.

류: 그럼, 같이 유학을 결심하신 건가요?

최: 그렇진 않아요. 저는 미국에 가서 정치학을 하겠다고 했고, 그 친구는 중앙대 연극과 연출 전공을 했는데 일본에 갔다가 인도로 가서 학위를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떠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때는 어렸으니까 십 년 있으면 대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포 한 잔 나누면서 헤어지기 전에 십 년 후에 자기 자리에서 최고가 되어 만나자. 그래서 우리가 공동으로 뭔가 할 수 있는 공간을 하나 만들자. 평생 무료로. 돈은 다른 일에서 벌고.

류: 멋진 포부셨군요.

최: 그래서 1984년에 떠나서 1994년에 돌아와서 만났어요. 그때 저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이고,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실험이 필요했어요. 논문이 아니라 동아리를 만들어서 실제로 그곳에 진실한 사랑이 들어갔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이걸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제가 귀국한 지 몇 개월 후에 친구도 나왔는데 그 친구에게도 연출을 할 수 있는 극단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십 년 전의 약속을 이름으로 해서 ‘십년후’가 창단이 된 거죠. 처음에 3년을 같이 하다가 그 친구는 경산에 있는 대경대학교에서 마침 교수를 뽑는다고 해서 거기로 갔고, 그게 장진호 교수예요. 장 교수가 가면서 소개해준 사람이 지금 십년후의 송용일 대표예요. 장 교수가 떠난 후에 이분이 그 이후 20여 년 동안 연출을 했죠. 이분이 당시 경기대학교 연극과에 겸임교수로 있었는데 무대제작이 전공이세요. 그렇게 같이 꾸려왔죠.
우리가 사랑으로 극단을 운영하려고 했던 노력이 있어요. 하나는 우리가 처음에 고등학교 막 마친 일곱 명을 데리고 시작했어요. 그게 1994년이에요. 1~2년 지나서 어느 날 그중에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에 다니던 단원이 연습하는데 다리가 퉁퉁 부어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인가 알아봤더니 그 친구가 학비가 모자라서 밤새 종일 서서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극단에서 연습한 거죠. 그런데 당시 우리 장 교수가 몸 연극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훈련을 시키니까 지치잖아요. 또 일까지 그렇게 하니까 더 힘들었던 거죠.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얼마가 돈이 더 필요하니? 그랬더니 80만 원이래요.

류: 당시 80만 원이면 굉장히 큰돈이죠. 제가 95학번인데 당시 학비가 160~180만 원 정도였던 것 같아요. 돈 가치는 훨씬 컸고요.

최: 네, 그래서 80만 원을 구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선배님을 찾아갔고 80만 원을 거의 강탈을 했죠. 하하. 그런데 그걸 극단에서 줄 수가 없잖아요. 다들 어려우니까. 그래서 밖으로 불렀어요. 그리고 그 돈을 주면서 당장 아르바이트 그만두라고 했죠.

판타지 뮤지컬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2002.12.4.~12.8. ⓒ극단 십년후

또 한 가지는 그게 뮤지컬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을 할 때였어요. 그게 대작이었죠. 그때 잘 돼서 순회공연도 하고 그랬는데 공연 횟수로 보면 한 300회 정도 했어요. 큰 성공을 한 거예요. KBS에 가서도 하고. 그런데 뮤지컬이 돈이 많이 들어요.
기억에 남는 날이 있는데, 내 기억에 그날이 12월 8일이었던 것 같아요. 인하대에서 수업을 마치고 공연이 있는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을 갔어요. 대공연장은 1500석이었죠. 그날은 마지막 공연이었는데 고약하게도 눈비가 섞여 내렸어요. 그런데 2층 매표소에서부터 사람들이 두 줄로 쭉 서서 주차장이 있는 데까지 늘어선 거예요. 직원이셨던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유명 가수가 오는 것 아니고서는 이렇게 줄이 늘어선 적은 없었다는 거예요. 그때 작곡을 해주신 분이 최종혁 선생님이셨어요. 그날, 이 어른과 제가 손을 잡고 울었어요. 너무 기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해서요.

류: 정말 기쁘셨을 것 같아요. 지금도 흔치 않은 일일 텐데요.

최: 그런데도 그때 저는 6~7천만 원 정도 빚을 졌어요. 그날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분장실에 갔는데 분위기가 이상한 거예요. 원래 우리 애들이 밝아요. 근데 그날은 말이 없이 무척 무거웠어요. 당시 창단 때부터 같이 있었던 이경미라는 단원이 주인공인 삼신할머니를 했었는데, 이 친구도 얼굴이 어두운 거예요. 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도 말을 안 해요. 그래서 연출 선생님과 기획실 직원들을 따로 불러서 물어보았어요. 그런데 서울에서 온 기획사가 그 전날인가 이 작품을 찍어 갔대요. 그러면서 이건 전국적으로 공연해도 성공할 것 같다면서 같이 하자고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서 2억을 주겠다고 했어요. 대신에 순회공연을 하면서 2억이 될 때까지는 자기들이 다 갖고, 그 이후부터는 반반씩 나눈다는 조건이었어요. 이게 첫 번째 조건이고. 이 제안은 저희에게는 무척 좋은 조건이잖아요?

류: 그렇죠. 괜찮은 조건인 거죠.

최: 우리는 그런 기획력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두 번째 조건이 뭐냐 하면 그 삼신할머니 역을 탤런트를 쓰자는 거예요.

류: 아…. 그게 문제였네요.

최: 극단의 살림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게 나쁜 게 아니죠. 살림이 뭐가 있어야 애들도 챙겨줄 수 있으니까. 기회인 것 같다는 의견도 많이 나왔어요. 연출자도 마찬가지이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순식간에 빚은 청산이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선생이라 생각이 좀 달랐어요.

류: 그러셨을 거 같아요.

최: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내 아이를 키워서 저기 더 큰 세상에 우뚝 세우고 싶은데, 이런 기회에 내 아이는 객석에서 보고 있고 다른 탤런트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면 내 아이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나는 우리가 처음 이 극단을 만들 때 사랑으로 키우고자 했는데, 이건 거기서 벗어나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내가 말했어요. 기획사에 전화해라. 20억을 줘도 이 아이를 삼신할머니로 쓰지 않으면 못한다. 그렇게 얘기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안 되었어요.

<사슴아 사슴아: 목종비곡(穆宗悲曲)>,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 2001.12.1.~2. ⓒ극단 십년후

그런데요. 그게 그렇게 끝나지 않더라고요.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서 2006년 <사슴아 사슴아: 목종비곡(穆宗悲曲)>가 전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어요. 바로 그 아이가 연기상도 받았고요. 물론 연출상도 받았고. 그런데 그걸로 끝나지 않고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도 전국에서 2~3천만 원씩 공연비를 받으며 6~7년을 더 공연했어요. 그래서 사람도 살리고 작품도 살렸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극단의 저변이 넓어졌어요. 단원들도 극단에 대한 믿음이 생겼겠죠. 그리고 리더 그룹이 우리도 눈앞의 금덩어리보다 제일 소중한 자산인 사람을 안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치를 공유하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해요.

류: 그렇다면 역시 선생님께 극단 십년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겠군요?

최: 아무래도 그렇죠.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 성공을 하고 나니까 좀 욕심이 나더라고요. 돈은 많이 들어도 역사를 뮤지컬로 만들어보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제가 생각했던 작품은 먼저 ‘Universal’, 작품에 좀 철학이 담겼으면 좋겠다. 또 하나는 ‘Easy’, 작품이 좀 쉬웠으면 좋겠다. 다음으로는 ‘Exciting’,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걸 강조 했었어요. 이걸 가지고 우리 역사를 풀어보자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 극본은 대체로 고동희 선생이 썼어요.
이렇게 처음 만들어진 공연이 단군신화를 다룬 <박달나무정원>이였어요. 다음으로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 즉 대중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 울타리 밖으로 사랑을 전파하려고 한 인물이 누굴까 하고 찾으니까 바로 광개토대왕이 있었어요. 그래서 광개토대왕의 어린 시절을 다룬 <꽃님>을 뮤지컬로 만들었어요. 이후 이런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사랑, 집단의 사랑, 그리고 그것이 충만하게 넘쳤을 때 외부로의 확장, 이런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를 찾다 보니까 소서노라는 어머니가 있었어요. 그래서 소서노를 주인공으로 한 <도칸, 소서노>가 나왔죠. 이렇게 우리나라의 역사를 한 번 정리해봤어요. 이렇게 역사의 위대한 순간마다, 혹은 인생의 굴곡마다 그 시대의 영웅들 속에 감춰져 있었던 모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 나라를 지탱한 힘이었구나.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어요.

극단 십년후 슬로건 ⓒ극단 십년후

우리 극단의 슬로건이 창단 때부터 ‘사랑하며 살겠습니다’예요. 원래의 극단 로고는 서로 기대어 있는 두 잎사귀가 있고, 그것을 태양이 비추고 있어요. 그런데 이 태양이 좀 구부러져 있어요. 무슨 의미냐면, 내가 크려면 누군가가 받쳐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나만 돋보이고 밑에 있는 잎은 영원히 사다리가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 구부러진 태양이 제일 밑에서 받쳐 주는 잎을 빛을 줘서 키워요. 이것이 끊임없이 순환되면서 크는 거죠.
그래서 저는 극단 단원들이 더 큰 곳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또 새로운 사람들이 오고. 처음에는 우리 극단의 연출가도 이걸 이해 못 했어요. 안무 선생님, 화술 선생님까지 붙여서 열심히 가르치고, 음향이나 조명도 가르치고 했는데 연기가 될 만하면 나가고 하니까. 이분은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얼마나 안타까웠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해하고 계셔요.
저는 그랬어요. 키워서 내보내야 한다. 지금은 손해 볼지 몰라도 나중엔 그렇지 않다. A라는 사람이 서울에 가서 스타가 되면 결국 자기를 키워준 곳을 돌아보게 된다는 거죠. 이 사람이 여기 올 때는 그냥 오는 게 아니죠. 관객들과 스탭들을 달고 오지 않겠어요. 전문가들을 달고 오고. 그러니까 끊임없이 여기서 내보낼 수 있어야 더 큰 눈덩이가 만들어지는 거죠. 각각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욕망이 구현될 수 있도록 희망으로 바꾸어줘야 한다는 것, 이것이 극단의 가치인 ‘사랑으로 살겠습니다’의 요체인 셈이에요.

류: 정말 좋은 뜻을 가지고, 그것을 계속 실천해 오신 것 같아서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또 궁금한 게 미국에서 원래 정치학을 공부하셨다고 했는데 귀국 후에는 의외로 연극 활동을 하셨으니까 내부에서 부딪치시거나 힘드셨던 적은 없었는지요?

최: 많았지요.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이 승승장구를 하니까 한번은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거기가 공간이 좀 작아요. 여름방학 한 달 동안 인원수를 줄여서 2천만 원 정도 받고 공연을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7명 나오는 작품으로 축소해서 공연을 했어요. 이때 맡았던 중견 배우가 자기 나름으로는 여기서 공연을 하면 아르바이트비 정도는 아이들에게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셨던 거 같아요. 그때가 우리가 빚을 좀 청산을 했을 때예요. 다 끝나고 나서 기획실장이 정산보고서를 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그 공연을 대표했던 중견 배우가 속이 상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줄 돈이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적었던 거예요. 당연히 속상했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분을 만나 말했어요. <삼신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을 처음 준비했을 때, 녹음해주신 원로배우나 수많은 스텝이 거의 무료로 해주셨어요. 작곡해주신 최종혁 선생님 같은 분은 보통 뮤지컬 작곡하면 받는 금액의 5분의 1 정도만 받고 기꺼이 해주셨어요. 이렇게 헌신하신 분들이 계셨기에 이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중견 배우는 용산에서 한 달 동안 번 수입만을 나누는 것으로 여겼으니까, 적다고 생각한 거죠.

류: 두 분 다 사실은 좋은 뜻이셨네요. 그 배우님께서는 고생한 단원들을 더 챙겨주고 싶으셨던 거고, 선생님께서는 이전에 고생하셨던 분들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셨던 거군요.

최: 맞아요. 그런 거죠. 우리한테 작품을 하고 나서 돈을 나누는 전통이 있어요. 뭐냐면 돈을 봉투에 넣고 이름을 써서 광주리에 넣어요. 그리고 제가 돈을 다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제일 수고한 단원이나 나이가 가장 많은 단원이 그중 하나를 뽑아서 그 사람을 주면서 포옹을 하고, 뽑힌 사람이 다음 봉투를 뽑아서 그 사람에게 주고 포옹하고, 이런 식으로 해요.
사실 저는 20년 가까이 극단을 이끌면서 저는 월급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게 시작할 때 약속이었으니까. 저는 밖에서 벌어 먹고살고, 때로 모자라면 채워 넣는 역할을 하겠다고 결심했으니까 그렇게 했던 거죠. 아까 말했던 대통령상을 받았을 때 상금이 2천만 원이 나왔어요. 그래서 배우들에게 이 돈을 어떻게 썼으면 좋겠냐고 의논해보라고 하고 나는 자리를 피해줬어요. 그랬더니 배우들이 극단이 어려우니까 극단에 놔둡시다. 이러는 거예요. 얼마나 고마워요? 모두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달랐어요. 저는 살림살이하는 고 실장을 불러서 배우들, 스탭들에게 전처럼 광주리 행사를 했어요. 그랬더니 도립극단이나 다른 곳에서 돈을 버는 중견 배우들 몇 분은 나눠드린 수고비를 다시 극단에서 쓰라며 돌려주셨어요. 참 고마운 일이죠. 그분들도 돈이 필요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이란 생각이 들어요.

류: 정말 하나의 공동체였고, 그렇게 실천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극단 십년후를 벗어난 선생님의 삶에 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십년후 대표를 그만두시고 밖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요. 근황을 이야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최: 이렇게 사는 것이 원래 제 꿈이기도 했어요. 처음엔 극단 안에서 단원들에게 인문학 강의를 열었어요. 사실 당시 단원들은 인문학이 뭔지 모르고 저도 공부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영어회화를 함께 공부하자고 했어요. 훗날 단원들이 외국에서 공연해야 할 때도 있을 테니까요. 그 공부를 하면서 중간중간에 인문학을 끼워 넣었던 겁니다.
처음엔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그걸로는 뭔가가 부족한 것 같아서 동양철학을 함께 공부했어요. 그리고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심리학을 공부하게 됐지요. 사실 저는 미국에서는 10년 동안 학부 과정만 했어요. 저는 10년이면 박사까지 다 끝날 줄 알고 한국에서 대학 다닌 것을 기재하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한 것만으로 대학을 들어갔어요.
그런데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대학을 다니니까 진도가 안 나간 거예요. 나중에 한국에 들어와서 인하대에서 석박사 10년을 또 한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아이들에게 가르칠 인문학 공부를 한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문학을 접하다 보니까 그동안 가졌던 제 생각 또한 달라졌어요. 예컨대 누군가를 이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들이 저절로 아름답게 크도록 여건을 형성해주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그린 설계도대로 집을 지어서 사람들을 그곳에 살게 하면 그 사람들은 기호가 달라서 불행할 수도 있잖아요. 미국을 가기 전에는 그런 설계도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인문학을 접한 후에는 그게 얼마나 교만한 일인지 그때 알게 된 거죠. 만약 제가 빈 텃밭을 마련해서 제 계획대로 심어서 계획대로 결실을 본다면 그 성취감을 저만이 느끼겠지만, 만약 제가 이 텃밭만을 마련해주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그 텃밭을 가꾸게 해주는 리더라면 훗날 텃밭에 꾸려질 아름다운 동산은 제 상상을 초월한 모습이지 않겠어요? 얼마나 감동이겠어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면 구성원이나 저 모두 감동일 겁니다. 모두가 텃밭의 주인이 되는 셈이지요.

류: 요즘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이미 20년 전에 시작하셨군요. 당시엔 오히려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이 더 지배적이던 시절인데요. 확실히 앞서 나가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너무 과찬이시고요. 하하. 제가 미국에 갈 때 들고 간 책이 『정경숙(政經塾)』이라는 일본 책이었어요. 파나소닉의 창업주인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쓴 책이에요. 결국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의미로 정치경제 아카데미를 설립한 거죠. 저도 꿈이 이런 아카데미를 하고 싶었어요. 극단 십년후가 그 첫 번째 실험이었던 거죠. 40대 후반엔 성경과 불경을 공부했어요. 거기서 결국 용어는 달라도 가르침의 끝은 똑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바로 ‘사랑’이었던 거예요. 그것도 ‘진실한’ 사랑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가 극단의 울타리를 넘어서 그 사랑을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카스(DACAS)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여기서 ‘D(discover)’는 ‘발견하라’라는 의미인데, 뭘 발견하느냐 하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행복할 수 있는 이치를 발견하자는 거죠. 그런데 그 이치를 찾아서 배워도 아직은 내 것이 아니잖아요. 두 번째 ‘A(accept)’는 그걸 내 걸로 만들라는 거죠. 세 번째 ‘C(concern)’는 관심을 두는 거죠. 이건 사랑으로 교류하고 나누라는 의미에요. 그렇게 나누다 보면 ‘A(achieve)’로 함께 성취하겠지요. 다섯 번째는 이렇게 성취한 것을 우리끼리 갖지 말고 울타리 밖으로 나누어라. 즉 ‘S(spread)’, 확산시키라는 거죠.
이 과정을 6개월에서 1년을 인천에 있는 리더 그룹들과 함께했어요. 이런 취지로 11년 전에 30~40명 정도로 시작을 했지요. 이것 역시도 무료예요. 처음에는 무료라는 것 때문에 걱정을 샀어요. 주변에서는 제가 정치를 하려고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리고, 또 가까운 지인들은 무료이면 사람들이 더 안 온다고 걱정도 해주셨어요. 더구나 이걸 제가 혼자 강의를 했어요. 혼자서 한 이유는 내가 잘 알아서가 아니에요. 교육의 일관성 때문이었어요. 여러 강연자가 오면 각각의 좋은 강의여도 모든 강의 일정이 끝나면 찐하게 남지를 않아요. 그래서 제가 혼자서 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1500명 정도가 이 공부를 했어요.

류: 제가 인터뷰 준비를 위해 자료조사를 하다 보니까 정말 많은 분들이 선생님의 강연에 대해 블로그 같은 곳에 후기를 올리셨더라고요. 정말 재미있고 유익했다고.

최: 제가 인터넷을 안 해서 못 봤네요. 감사한 분들이네요.

류: 그래서 선생님의 강의비결을 여쭙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대중강연의 비결은 역시 다카스로부터 온 것일까요?

최: 아무래도 그렇겠죠. 다카스에서의 경험이 결국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만들었을 거예요. 지금 기호일보에 매주 쓰는 칼럼도 그렇고요. 매주 금요일마다 칼럼을 쓰는데 벌써 5년이 되었죠. 매주 칼럼을 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근 30년을 새벽에 연구실에 가서 독서를 해요. 미국에서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공부했기 때문에 잠을 3시간밖에 못 잤어요. 11시 반에 집에 들어와서 12시부터 3시까지 공부하고, 잠시 잤다가 다시 6시면 일을 나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몸에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도 3시간 이상은 못 자는 것 같아요. 몸이 그 리듬에 맞춰진 거지요.
책을 사면 저는 어떻게 읽느냐면, 컴퓨터에 워딩을 하면서 읽어요. 그렇게 하면 300여 페이지 책이 약 80페이지 정도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다른 새 책을 읽다가 지치면 워딩해 놓은 요약본을 다시 봅니다. 그때 어느 부분은 ‘사랑’에 대한 자료 파일에 넣고, 또 다른 부분은 ‘친절’이라는 파일에 넣고, 이런 식으로 작은 파일들이 주제별로 수십 개가 있답니다. 그 파일들 안에는 수백, 수천 권의 책 내용이 주제별로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칼럼이나 강의에 필요한 자료들이 30년 동안 쌓여 있는 셈이에요. 그래서 남들보다는 수월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거죠. 인문학 콘서트는 기호일보 사장님으로부터 제안을 받고 5~6년 전부터 1년에 한 번씩 열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경비는 기호일보사에서 책임지고 저는 강의만 했습니다. 저로서는 참 고마운 신문사에요. 제가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언론사가 시민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건네는 일도 중요하다면서 저에게 용기를 주셨거든요.

류: 코로나 이후로 인문학 콘서트는 어떻게 진행하고 계신가요?

최: 코로나 때문에 강연이 진행될 수 없으니까 유튜브로 녹화해서 진행하고 있어요. <최원영의 책갈피>라는 제목으로 올리고 있어요. 많은 분이 시청하고 계시진 않지만 몇 분이라도 이 방송을 통해 위로를 받으시고 희망의 문을 여는 열쇠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최원영의 책갈피] 1화 <정답 없는 길 그래도 그 길을 가보고 싶다>, 2021. 5. 26.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YwIZ6UEtefs)

류: 인터뷰 후에 저도 꼭 구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정리하는 느낌의 질문을 드리는데요. 선생님께 십년후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요? 또 극단 바깥에서 지금의 십년후에 어떤 말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최: 지금 참 힘들 거예요. 힘들 수밖에 없어요. 환경이 아무래도 열악하니까. 그래도 이 힘든 과정에서 우리 단원들이 조금 더 버텨냈으면 좋겠어요. 예상한 대로 되지 않을 때 그다음은 두 가지 길밖에 없잖아요. 포기하든지 버티든지. 포기하면 다른 데 가서 또다시 시작해야 해요. 그럴 수 없을 만큼 연극을 하고 싶다면 답은 버티는 것밖에 없습니다. 결국 버티는 사람이 이겨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도 잘 버텨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고루한 생각일 수 있지만, 결국 어느 정도는 배고파야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이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거죠. 지금까지 십년후 식구들 모두 너무나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요.
십년후는 저에게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에요. 사실 처음 시작할 때는 ‘내가 너희를 키울 거야.’ 이렇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단원들로부터 위로받고 격려받고 있더라고요. 지금 다카스라는 아카데미를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준 곳 역시 십년후에서의 경험이에요. 그러니 어머니의 자궁 같은 존재이지요.

류: 요즘 코로나 때문에 다들 힘들지만, 특히 공연계가 타격이 가장 큰 걸로 알고 있어요. 극단 십년후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요?

최: 그래도 온라인으로 공연을 몇 차례 하면서 잘 해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도 1년에 2~3편씩은 꼬박꼬박하고 있어요. 지금은 대한민국연극제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거고요. 2년 전에는 김구에 관한 뮤지컬을 만들어서 공연했고요.
십년후의 힘은 같이 밥 먹는 공동체 생활이 아닐까 싶어요. 밥숟가락에서 정이 생기잖아요. 우리는 모두 가족이 된 것 같아요. 지금 중구에 극단 사무실이 있는데, 그 건물 지하실이 수년째 비어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송용일 대표가 원래 무대 제작자예요. ‘서울무대’라고 아주 큰 무대 제작사를 운영했어요. 예컨대 <투란도트> 무대 지붕을 제작했고 유명한 영화 세트도 만들었고요. 이렇게 무대 제작에는 일가견이 있는 분이죠. 이분의 지론은 장기적으로 공연할 수 있는 소극장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극단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주인어른하고 이야기가 잘 돼서 그 지하실에 소극장을 지금 꾸미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좋은 작품을 오래 공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 저는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류: 선생님께서는 공동체 활동도 하셨고, 지금은 독자적으로 자신의 것을 꾸리고 계시잖아요. 어느 쪽이 선생님께 더 맞는 것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최: 저는 원래의 꿈이 지금 하는 이것이었죠.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것. 이렇게 전하는 것을 위한 저 나름의 실험이 극단 십년후였기 때문에 이것이 다 연장선에 있다고 봐요. 인문학 콘서트가 올해 가능하다면 하려고 3월부터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 다카스 회원들과 함께 그 안에서 <봉숭아학당> 같은 연극도 준비를 해왔어요. 이렇게 극단과 지금 제가 하는 일이 다 연관이 되는 거죠. 그래서 어느 것이 더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다 연관이 되어 하나로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이 돼요. 만약 극단 십년후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제가 강의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했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까지 이 모든 경험이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류: 삶에서 수많은 선택이 항상 맞아떨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돌이켜 보면 그것들이 연결되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그런 선생님의 실행이 축적되고 그것이 강연에 녹아든 것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료의 축적도 있지만, 그 실행에서 오는 힘이 지금의 선생님을 만든 진짜 힘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최: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변곡점이 있잖아요. 변곡점마다 선택의 길이 두 개가 나오죠. 이 선택의 길에서 딜레마에 빠지는 이유가, 이걸 얻으면 저걸 잃고 저걸 얻으면 이걸 잃기 때문이에요. 이때 무엇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하느냐. 그건 바로 ‘가치’인 거죠. 사랑이라는 가치를 기준에 두고 바라보면 포기해야 하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그 기준만 가지고 있으면 사실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게 하나하나 쌓일 때마다 주위에서는 그 사람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게 결국 사회적 신뢰라는 것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겠지요.
우리 극단에서 작곡해주신 최종혁 어르신과의 관계가 그래요. 처음엔 무릎 꿇고 겨우 도움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이렇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더라고요. “나 이제 이 집단에서 내쫓지 말어.” 이렇게 식구가 된 거죠. 우리나라에서 유명하신 분장사분은 얼마 드리지도 못하는데 그 비용을 또다시 극단에 후원금으로 보내주시곤 했어요. 이렇게 우군이 되어준 스탭이 계셔서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거죠.
그래서 변곡점마다 손해를 보더라도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지속해서 행동해나갈 때, 사회적 신뢰가 생기고, 이 신뢰가 결국 사회 전체의 진화를 이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손해 볼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요.

류: 지금 말씀에 백 프로 공감합니다. 손해를 너무 이해타산적으로만 생각하면, 자신도 성장하지 못하고 남도 깎아 먹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함께 하기 위해 때로 손해를 감수할 때, 오히려 같이 성장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최: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게 문제죠. 사실 그게 힘이 있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더 심해요. 그래서 이 나라가 이렇게 갈등구조에서 벗어나기 힘든 거죠.

류: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과 같이 크려고 해야 같이 성장하는데, 옆을 밟으면서 크려고 하면 결국 나중에는 둘 다 무너진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최: 그렇죠. 결국 자신도 덫에 걸린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류: 선생님 말씀에 정말 깊이 공감합니다. 오늘 인터뷰에서 ‘사랑하며 살겠습니다’라는 가치를 지켜온 선생님의 실행과 삶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 ‘인천’이라는 도시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한 지역의 가능성을 성장시키는 힘 역시 사람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인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최: 제가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라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조금 꺼려요. 강의할 때나 말을 꼭 해야 할 때가 아니면 입을 다물고 살아요. 그런데도 이렇게 저를 인터뷰해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분이 사랑을 나누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누리시기를 진실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친 일상 벗어나 문화 예술 활동가 역할 ‘톡톡’: 조연희 씨 인터뷰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지친 일상 벗어나 문화 예술 활동가 역할 ‘톡톡’조연희 씨 인터뷰

박현주(경인일보 사회팀 기자)

조연희 ‘생활문화센터 운영 활성화 프로그램 지원사업 <공감이 공감했다>’ 참여 작가

■ 육아로 지친 일상 속, 문화 활동 통해 자신감 되찾아조연희 씨(35)는 여가에 그쳤던 문화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지난 2018년, 부평구문화재단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 기자단에 지원했다. 그는 지역 문화 예술 활동을 주관하는 부평구문화재단 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관람한 공연·전시 등 문화 활동을 시민에게 온라인으로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이전에는 한 공연을 단순히 관람하고 평가하는 관객 입장이었다면, 기자단 활동을 한 이후엔 작품 기획과 제작, 연출 등 작품 전반에 걸쳐 관심을 두게 되더라고요. ‘이 작품은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자 했을까?’, ‘배우와 관객은 작품을 통해 얼마나 소통했을까?’ 등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육아와 씨름하던 조 씨는 지역 문화 예술 활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삶의 활력을 찾았다고 한다. 은행원이었던 조 씨는 결혼하고 두 살 터울의 자녀를 키우느라 일을 관둬야 했다. 육아로 장시간 일을 하지 않다 보니 경력이 단절된 여성을 뜻하는 ‘경단녀’가 남 얘기가 아니었다. 조 씨는 ‘사회에 나가 내가 평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고 한다.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인천 곳곳에서 하는 길거리 공연과 한국무용, 사진전, 뮤지컬을 찾아다니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더라고요. 기자단 활동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되찾았어요.”

조 씨는 부평구문화재단 SNS 기자단 외에도 인천시·남동구 SNS 기자단과 인천환경공단 인천환경미디어서포터즈 활동을 하고 있다. 지역사회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에 나섰던 그는 지난해 부평구 문화도시 지정을 추진하는 민·관 기구에서 시민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달부터는 부평구문화재단이 생활문화 활성화를 위해 마련한 사업 <공감이 공감했다>에 참여하고 있다.

■ 지역 이야기를 담아낸 연극부터 코로나19 시대 비대면 공연까지, 눈에 띄는 작품들 ‘속속’인천에서 나고 자란 조 씨는 문화 활동을 통해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지역의 이야기를 알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지난 2018년 부평아트센터에서 열렸던 <터무늬 있는 연극×인천_부평 편>을 부평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작품으로 손꼽았다. 연극은 비옥한 토지를 가져 물자와 사람이 많았던 부평이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인을 징용해 무기 제조 공장 ‘조병창’으로, 해방 직후엔 미군의 군수 보급 기지인 군수지원사령부로 재편된 과정을 그려냈다.

“땅에도 고유 무늬가 있다는 의미의 ‘터무늬 있는 연극’은 평소처럼 공연장에 앉아서 보는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관객이 배우를 따라 부평 곳곳을 이동하면서 관람하는 색다른 형식으로 진행되니 각 공간이 지닌 상징성과 역사적 의미가 더욱 크게 느껴졌어요.”

조 씨는 이 연극을 통해 일제강점기 징용 노동자 숙소로 쓰인 미쓰비시(삼릉·三菱) 줄사택과 영단주택, 미군이 주둔하면서 클럽의 음악이 발달한 신촌 일대를 누볐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미쓰비시 줄사택이었어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줄사택이 훼손된 것을 보고 ‘왜 이곳을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크더라고요. 각 공간에 서려 있는 역사적 배경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뜻깊은 기회였습니다.”

조 씨는 지난해 9월 부평아트센터 개관 10주년을 맞아 진행된 연극 <극장을 팝니다>도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이 연극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극장이 매물로 나왔다는 가정 아래 관객이 극장 예비 매입자로 방문한다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연극 한 회당 5명만 입장할 수 있도록 한 <극장을 팝니다>는 개인 유선 이어폰을 꽂은 관객이 진행자 이야기를 듣고 극장 구석구석을 살피는 것으로 전개된다. 관객 1명이 지정된 동선으로만 다니도록 기획된 코로나19 시대 맞춤형 비대면 공연이다.

“불 꺼진 대강당에 나 홀로 입장해서 둘러볼 기회가 언제 오겠어요. 무대 뒤편 숨겨진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연장이 문을 닫았잖아요. 이런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연극을 구상했다는 점에서 기발하고, 색다른 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 지난달부터 마을 환경 개선 사업 참여 “지역 사회를 위한 문화예술 활동 참여 지속할 것”조 씨는 지난 6월부터 부평 주민과 지역 예술가가 협력해 마을 문화 예술 환경을 개선하는 부평구문화재단 사업 <공감이 공감했다>에 작가로 참여하고 있다. 오는 10월까지 진행되는 이 사업에는 회화와 팝아트·사진·공예·도자 등 다양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부평 지역 마을 4곳이 지닌 고유의 특성을 되살리기 위해 투입된다. 예술가는 주민과 함께 마을을 ‘어떤 방향으로 조성할지’ 논의하고, 벽화 제작이나 공예품 전시 등 각 마을에 어울리는 문화 예술 활동을 지원한다. 조 씨는 새롭게 단장하는 마을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글로 남기는 기록 작업을 맡는다. 그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데다, 수년간 시민 기자 활동을 통해 글을 썼던 이력이 있어서 적임자로 꼽혔다.

2021 생활문화센터 운영 활성화 프로그램 지원사업 <공감이 공감했다> 포스터 ⓒ부평구문화재단

“이번 사업은 주민과 예술가가 수차례에 걸쳐 기획 회의를 한 뒤 진행됩니다.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다들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저는 4개월간 마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과정을 사진과 글로 생생하게 담겠습니다.”

조 씨는 앞으로도 지역 사회에서 하는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해 도움이 될 방안을 찾겠다고 했다.

“문화생활이 단순히 부차적인 활동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주민 간 서로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로 활용됐으면 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지역 사회 문화예술 활동에 관심 가지고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진행/글 박현주(朴賢珠, Park Hyeonju)

경인일보 사회팀 기자




건축의 가능성을 엮는 스토리텔러: 『와이드AR』 발행인 전진삼 건축평론가와의 만남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건축의 가능성을 엮는 스토리텔러『와이드AR』 발행인 전진삼 건축평론가와의 만남

류수연(인하대학교 교수)

인천생. 종합예술지 월간 『공간(SPACE)』 편집장 역임. 건축잡지 월간 『건축인 포아(POAR)』를 창간하여 편집인 겸 초대 주간을 역임했다. 이후 건축잡지 격월간 『와이드AR』을 창간하여 현재 발행인이다. 한동안 계간 『황해문화』 문화비평/건축 코너의 고정 필자로 활약했다. 배재대학교와 광운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겸임교수로 재직한 바 있으며, (재)인천문화재단 6기 이사로 활동했다. 건축비평서로 『건축의 발견』, 『건축의 불꽃』, 『조리개 속의 도시, 인천』, 『건축의 마사지』 등을 냈고, 20여 권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2006년 10월 이래 건축세미나 〈땅과 집과 사람의 향기〉(약칭, 땅집사향)를 매월 1회 개최해오고 있다. 현재 간향 미디어랩 대표이다.

류: 안녕하세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전: 처음 뵙겠습니다. 문학을 전공하셨다고 하셨죠?

류: 네, 그렇습니다. 평론을 쓰고 있습니다.

전: 저는 시로 『시문학』으로 등단했어요. 1980년이니까 오래되었죠. 대학교 2학년 때 등단했고요. 시집도 2권 냈는데 지금은 다 매절되고 품절 되어서 없을 거예요.

류: 제가 미처 그 정보는 알지 못했네요. 시집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요. 다음 기회에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부터 여러 가지가 궁금해지는군요. 어떤 계기로 시를 쓰게 되셨나요?

전: 아마 지금도 있을 텐데, <만해백일장>이라고 있어요. 아마 2회 때였을 거예요. 그때 제가 시로 만해상을 탔어요. 저는 대학 일반부에 냈는데, 당시 심사위원장이 미당 서정주 선생이셨는데 제 것에 동그라미를 치고 나가셨대요. 그래서 장원이 되었고, 이걸 문덕수 시인이 다시 『시문학』에 추천하셔서 등단이 된 거죠. 『건축평론』으로는 1988년에 등단했는데, 그 당시에 『꾸밈』지라고 있었어요. 격월간이었는데, 그 잡지를 통해서 꾸밈건축평론상을 타면서 평단에 들어오게 되었죠. 여기까지는 우리가 좀 비슷한 거네요.

류: 네, 그런 것 같아요. 원래 전공이 건축이신데 글을 쓰는데 관심을 갖게 되신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전: 자연스럽게 얘기가 되겠네요. 대학은 중앙대학교 건축과에 입학했고요. 아니 그 전으로 돌아가야겠네요. 제가 선인고등학교 출신이에요. 당시에 제가 문예부에 들어가서 문예부장을 했어요. 제가 2학년 때 여러 학교 선배들이 모여서 인천의 학생문학회를 조직했어요. 그분들이 그걸 만들고, 제가 인천학생문학회의 2대 회장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저한테 건축이라는 것이 다가오기 전에 이미 글쓰기라는 것이 배어 있는 상태였어요. 그러고 나서 대학에 들어갔는데 중앙대에 문학동인반이라는 서클이 있어요. 거기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여러 학과의 문학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 거죠. 그러다가 1980년대라는 암울한 시기에 등단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문학에 먼저 빠지게 된 거죠. 졸업하면서 당시 김수근 선생님이 끌고 가시던 공간그룹에 입사를 하게 되었죠. 그때부터 건축공부를 제대로 했다고 보는 것이 맞아요.
김수근 선생님은 88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을 설계하신 분이고, 지금은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가 된 ‘공간’ 사옥의 설계자이자 소유자였죠. 또 오래전(1966년)에 『공간(SPACE)』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셨어요. 선생님께서는 이 잡지의 성격을 종합예술잡지로 만드셨죠. 당시에 병신춤의 공옥진 선생님도 발굴하셨고, 현대미술의 총아라고 하는 백남준 선생님의 비디오아트도 그 ‘공간’ 사옥에서 처음 시연을 했어요. 김덕수의 사물놀이패도 ‘공간’ 사옥에서 시작했어요.
저도 이런 분위기에서 건축설계를 하다가 2년차에서 3년차를 바라보던 시기, 1986년에 김수근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어요. 55세이셨으니 너무 일찍 돌아가신 거죠. 원래 올림픽이 개최되면 주경기장 설계자로 함께 띄우는 분위기가 있는데 김수근 선생님이 돌아가시면서 그것도 사라지게 되었죠. 올림픽 주경기장의 설계자가 돌아가신 상태에서 88올림픽을 맞이했으니까요. 그 시기에 『공간(SPACE)』도 어려움이 생겼죠. 그러면서 편집장 자리가 공석이 되는 상황이 되었고, 제가 그 자리로 이동을 하게 돼요.
당시는 건축가들이 대외적으로 포지셔닝이, 사회적 지위가 굉장히 취약했던 때였어요. 그런데 공간의 사람들은 굉장히 자존심이 강했어요. 제가 공간에 처음 입사했을 때 받은 명함에 나의 포지션이 아키텍트(Architect)라고 적혀 있었어요. 사회 막 나온 초짜인데 나에게 처음 준 포지션이 그런 거였죠. 그런데 제가 막상 현장에 가보니까 푸대접을 받는 거예요. 전문 직능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인정해주지 않는 거죠. 당시에 ‘현상설계’로 성당을 설계하는 공모가 있었는데, 거기서 건축가를 대하는 태도가 저로서는 못마땅했어요. 그때 제가 생각한 게 있어요. 내가 건축가로서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건축가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도 소중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물론 이런 생각이 그때 갑자기 떠오른 것은 아니에요. 제가 김수근 선생님 돌아가신 그해 9월에 ‘간향’이라는 건축예술비평운동그룹을 만들었어요.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연구소의 이름이기도 하죠. 그 모임을 하면서 건축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했고 그런 것들이 쌓이면서 평단에 들어섰는데, 마침 공석이던 『공간(SPACE)』의 편집장 자리로 넘어가게 된 거죠. 거기서 사회적 목소리를 많이 내는 건축가들, 특히 신진 건축가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찾아내는 데 주목하게 된 거죠. 이게 제가 건축계 안에서 지금의 역할을 담당하는 프레임을 짜게 된 계기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류: 어떻게 보면 운명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다음 발걸음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오신 것 같아요.

전: 사실 『공간(SPACE)』은 종합예술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 이전에는 주로 미술평론가나 시인, 조형예술, 문학 전공자들이 편집장을 했어요. 김수근, 장세양으로 이어진 발행인은 건축가였지만, 이들에게 힘이 돼준 동지들은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의 원로들이셨어요. 그분들의 영향력이 김수근 선생님 사후에도 이어진 거죠. 지금은 소유가 다 다른 곳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신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어지는 거죠. 제가 『공간(SPACE)』지의 편집장을 할 때에 우리 문화계의 원로들과의 모임자리에서 말석에 앉은 적이 많았어요. 저로서는 매 순간이 엄청난 자양분을 얻던 시기였던 거죠. 지난번에 전화하셨을 때 내게 건축사라고 하셨죠?

류: 네, 제가 뭐라고 호칭을 해야 할지 몰라서요. 처음에 그렇게 알았는데 찾아보니까 건축평론이셨더군요.

전: 엄밀히 말하면 건축사는 라이선스, 건축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죠. 국가가 인정한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건축사, 그 자격증이 없더라도 건축에 대한 자의식이 강하고 그 열망이 강하고 창의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건축가라는 이름을 써요. 나는 건축사가 아니고, 그 쓰는 건축가 정도로 말할 수 있겠네요.

류: 건축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인문학적 분들이 상당히 많으신 것 같아요. 실제로 그런가요?

전: 건축한 사람이 뒤늦게 인문학적 공부를 통해 작업의 완성도를 높인다기보다 원래 문학적 베이스가 있는 사람이 건축을 함께 할 때 시너지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아는 함성호 시인도 그렇고, 이상 김해경 시인도 그렇고. 문학적 배경 기반으로 해서 건축을 풀어낸 사람들이라.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이렇게 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사실 건축학과가 5년제가 된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었어요. 교수들 가운데 유학파가 많은데 그들이 유학을 가보니까 건축이 단지 엔지니어링이 아니거든요. 선진화된 교육을 받고 한국에 들어와서 교단에 서서 변화의 중심에서 많은 활약들을 했어요. 그런데 막상 5년제가 되고 나니까 인문학적 커리큘럼이 아니라 설계 중심의 학과 커리큘럼이 짜졌어요. 건축술적인 것들에만 너무 집중하게 된 거죠. 왜냐하면 이게 자연스럽게 5년제가 된 것이 아니라 교육인증프로그램과 연계된 거예요. 그 가장 큰 단점은 인증프로그램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버려져요. 획일화되어버린 거죠. 그럼에도 교단에 선 사람들이 건축 안에 인문적 베이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있으니까 과거보다는 많이 나아졌죠. 인문학적인 베이스를 가진 사람들이 건축을 하면 더 좋다고 생각해요.

류: 근대문학 전공자들도 건축에 관심이 많아요. 텍스트 중심이긴 하지만 근대문학에 드러난 공간성, 장소성 등이 중요한 연구대상이니까요.

전: 근대 공간 이야기를 하니까 김정동 교수님이 생각나네요. 그분이 한국문학 속의 근대공간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현역 교수진 가운데서는 서울시립대학교 박철수 교수가 『소설 속 공간산책』 같은 책을 썼어요. 이쪽에 관심이 있으시면 이런 분들의 책을 참조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2008년부터 심원문화사업회라는 후원단체에 관련이 되어 있는데, 거기서 심원건축학술상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건축학자들의 인문학적 토양을 배양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출발한 저술후원사업이에요. 가장 최근 수상작인 『근대 부엌의 탄생과 이면』 같은 글은 주목할 만해요. 이런 것들은 공간에 어떻게 생활이 개입되는지, 건축이 도시공간에 어떤 상상력을 줄 수 있는지 관계된 것이죠. 이런 관점을 가진 글들을 뽑아서 시상을 해왔는데 그게 벌써 13년이 되었어요. 이건 꼭 건축전공자만 응모하는 것이 아니에요. 누구나 대상이 될 수 있어요. 류 교수님 후배들에게도 홍보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류: 네, 적극 홍보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근대 연구자들은 관심이 많은 분야니까요. 좋은 정보인 것 같아요. 문학 안에서 장소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장소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사유가 바뀔 수 있으니까요. 그런 점 때문에 문학연구자들이 자연스럽게 이 부분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아요.
이제 화제를 조금 바꿔서 인천의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대표님은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활동하고 계신데, 인천의 건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전: 인천은 현대건축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불모지라고 할 수 있어요. 인천은 도시재생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100년 전의 장소성과 건축물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요. 그래서 중구, 개항장 이런 곳에 모든 관심이 몰려 있어요. 저는 인천 출신이니까 인천에 대한 생각을 안 가질 수 없고, 더욱이 저는 인천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공부는 서울에서 했지만, 인천을 떠나진 않았어요. 제가 직장 다닐 때도 아무리 멀어도 인천에서 계속 출퇴근을 했으니까요.
앞서 제가 말씀드린 ‘공간’이 한때 김수근 선생님 돌아가실 즈음에 어려워져서 경기도 파주로 이사한 적이 있어요. 그때 출퇴근 시간이 하루 5시간이었어요. 그때도 인천에서 출퇴근했어요. 당시만 해도 그 지역은 통행금지가 있었어요. 그때가 1987년 즈음이었는데 파주가 군사접경지여서 통행금지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10시가 넘으면 대중교통편이 다 끊겨서 집에 갈 생각도 못하고 야근을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당시는 제가 인천을 깊게 들여다본다는 것이 어려웠죠. 주말에나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때 제가 만난 분이 바로 홍정선 교수님의 친구인 이영유 시인이었어요. 이분이 당시 일요신문사 기자셨어요. 그분과 만나면서 인천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죠.
제가 인천에 대해 처음 글을 쓴 건 1994년에 『황해문화』를 통해서였죠. 그 이후로 『황해문화』랑 관계를 맺고 한 12~13년 정도 문화비평/건축 코너의 고정필자를 하게 되었죠. 그걸 계기로 인천의 건축과 도시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쓰게 되었어요. 그 이후에 제가 『공간(SPACE)』지를 나와서 1996년에 『건축인 포아』라는 잡지를 창간하게 돼요. 이때 아까 말씀드린 이영유 선배가 많이 도와줬어요. 같이 술도 마시고 동행하면서 이야기들이 많이 심화하기도 했죠. 『황해문화』에 글을 쓰면서 인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소화하고 표현하고 싶었고, 인천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인천은 현대건축만큼은 홀대하는 도시라고 할 수 있어요. 현재 인천에 내로라할 만한 현대건축이 있느냐, 그나마 송도가 생기면서 조금 있지만 그것도 순수하게 한국의 건축가들이 에너지를 쏟아서 창의적으로 만들어낸 건축이라기보다는 뭔가 서구의 건축에 많이 기댄 것이 대부분이죠. 제가 그나마 좋아하는 곳은 송도 트리플 스트리트예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송도의 개발이 거의 멈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멈춘 동네가 바로 송도 트리플 스트리트예요. 현재의 트리플 스트리트가 당시엔 사이언스 스트리트로 소개되었죠. 한동안은 기초 골조공사만 놓고 그냥 황무지였죠. 그 프로젝트를 이어받은 사람이 매스스터디스 건축사사무소의 조민석이라고 하는 건축가였어요. 이 사람이 현재 한국의 50대 건축가 중에서 가장 걸출한 분이죠. 7년 전인가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관으로 황금사자상을 타게 만든 주역이에요. 그분 말로는 이게 설거지 프로젝트라고 해요. 남이 벌려 놓은 거 말끔하게 청소해주는. 저는 이건 상업건물이지만 의미가 있다고 봐요.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찾아와서 즐길 게 있고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인천은 그런 장소가 거의 전무했어요. 반강제적으로 중구에 가면 있어, 개항장 가면 있어 이렇게 말하는데요. 100년 전 건물, 그나마 남아 있는 건물에 조그마한 카페들, 이런 데 가서 모든 것을 소화하라고 하면 누가 가서 소화할 수 있겠어요?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자산이긴 하지만 그 자산만큼 우리의 현대도 바라봐야 하는데, 인천은 현대건축의 자산이 매우 취약해요. 그런데 그 취약한 부분을 그나마 개선하고 있는 것은 서울의 건축가들 몇 사람이나 해외 건축가들이에요. 그럼, 문제가 뭘까요? 인천의 현대성을 표상할 수 있는 건축물이 없다는 것은 인천 건축계에 인재들이 없다는 거와 통하죠. 인천의 건축을 짊어지고 갈 창의적인 인재들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사실 인천에 건축과를 가진 대학이 몇 안 돼요. 종합대학도 적으니까요. 그러니까 창조적인 인물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안 되어 있어요. 게다가 여기서 배출된 친구들이 어딜 가서 경쟁을 하느냐 하면, 서울이나 외국으로 나가버려요. 인천에는 그나마도 없는 인물난에 여기서 발굴된 친구들이 이곳을 시장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서 경쟁을 하다 보니까 씨가 말라버리게 되는 거죠. 몇몇 뜻있는 건축인들이 그나마 인천을 자신이 경쟁할 수 있는 필드로 삼고 내려오는 거고, 그것이 극히 제한적이죠. 인천은 지금 같은 패턴으로 가면 앞으로도 10~20년 뒤에도 여전히 인물난에 허덕이면서 어떤 창의적 공간이 만들어지지도 않고 현대건축을 표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서울이나 부산, 혹은 제주에 뺏길 거예요. 현재는 그래요. 현대건축의 경쟁력으로 보았을 때 인천은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못한다고 봐요.
그래서 제가 인천에서 해왔던 것 중 하나가 1998년 5월에 개최한 <건축백일장>이에요. 저도 문학 베이스가 있다 보니까 백일장이라는 말을 좀 쉽게 사용했던 것 같아요. 앞서 얘기했던 이영유 선배도 시 쓰고 연극 연출하던 분이다 보니까 내가 이런 것을 하자고 하니까 좋다 해서 시작하게 되었죠. 그때 당시 제가 『건축인 포아』를 창간하고 편집인 겸 초대 주간을 하던 때라 건축모형 집짓기 대회를 건축백일장의 형식으로 만들게 된 거예요. 지역기업의 후원을 받아서 5년 정도 진행했어요. 그런데 IMF 지나면서 『건축인 포아』의 상황이 안 좋아서 2000년에 잡지 발행권을 넘겨야 하는 입장이 되었어요. 그래서 기존에 <건축백일장>을 지원했던 인천건축사회가 주관처가 되어 연례행사를 이어받았어요. 그렇게 해서 5년 정도 하다가 이걸 다시 인천남구청(지금의 미추홀구)에 일임을 해요. 거기서 한 10년 정도를 하다가 지난해인가 그걸 다시 인천건축사회에 다시 넘겼어요. 지나와서 보니 1998년부터 지금까지 중간에 한두 회 정도를 빼고는 지속적으로 해왔어요. 그 행사가 어떻게 지속이 가능했냐면, 인천시와 인천건축사회가 공동주최하는 <인천건축문화제> 때문이에요.
1999년도에 건축문화의 해라는 것이 지정되거든요. 그래서 전국에서 건축문화라는 것을 띄워야 하는 미션이 생긴 거죠. 그때 인천에도 건축문화제가 만들어지죠. 출발은 <인천시민건축전>이었어요. 그게 그 이후에 <인천건축문화제>라는 이름으로 쭉 내려온 거죠. 그 안에서 시민과 함께 하는 건축프로그램으로 건축백일장이 자리를 잡게 된 거였죠. 건축백일장은 이후에 부산, 대구 등 전국의 여러 지자체에서 유사한 건축모형 만들기 대회내지는 살고 싶은 집 만들기 대회 등의 원형이 돼요. 제가 이렇게 건축문화제와 알게 모르게 연관이 되어 있다 보니 98년도 이후부터 직접적으로나 우회적으로나 인천 건축문화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역할을 해오게 된 거였죠. 그거에 대한 배경도 결국에 큰 것은, 인천 안에 인천의 시민들과 후학들에게 건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때 당시에 처음 참여했던 친구들이 이제는 30대 중반, 그 당시 초등학생들이 어엿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 거죠.
건축 분야에서 창조적인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프로그램이 필요한데, 이벤트성 행사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다른 문화예술 영역에는 게릴라가 많아요. 실제로 건축에서도 게릴라 정신으로 자기만의 창의력으로 활동하는 친구들이 많아져야 해요. 그게 많아지다 보면 현대건축도 그만큼 더 터를 견고하게 다질 수 있는 거죠. 그것이 시민들에게 전달되면 시민들도 더 나은 건축 환경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있고 그것을 향유하고 즐기면서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한 품격을 높게 설정할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현재까지는 그게 안 되는 거죠. 이후에는 그런 것들이 좀 가능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류: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목표를 위해 현재의 인천이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행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전: 제가 재작년부터 의도적으로 만든 프로그램이 있어요. <인천 아키텍트 5>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이건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들만 대상으로 매년 5명 이하에서 건축가를 발굴해서 상을 주는 거예요. 우리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은 어떤 훈장을 달아주고, 어떤 트로피를 건네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죠. 때로 옷이 그 사람을 바꾸게 하듯이. 그래서 제가 지금 인천에서 하는 일이 인천에서 건축 활동을 하는 이들한테 그린재킷 비슷한 옷을 입혀주는 역할을 하고자 해요. 타 분야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현재 인천에서는 이런 것도 필요하다고 봐요. 우리가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데 밖에서 누가 인정을 하겠어요. 최소한, 이 정도까지 오면 우리는 박수치고 서로 응원하자. 이런 분위기를 만들자. 이렇게 응원하는 발굴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인천을 좀 소란스럽게 만들어 보자. 그래서 언젠가는 이런 프로그램들이 더 자생적으로 늘어나길 바라는 거죠. 이건 관이 주도하는 포장된 프로그램으로는 안 되는 거죠. 그런 거 말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프로그램을 엮어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죠. 이 부분들이 앞으로 인천의 현대건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까? 계속해서 100년 전의 시간성만 바라보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지금 보세요. 부산 대단합니다. 제주, 더 대단하고요. 광주, 대구에도 이름 대면 알 만한 현대건축물들이 많이 서 있어요. 인천은 그나마 송도에 몇 개 있을 뿐이죠.

류: 그러고 보면 인천을 대표할 만한 현대건축이 명확하지 않은 것을 사실인 것 같아요.

전: 다들 50년 전, 100년 전에만 몰두하니까. 거기에 추억이 있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추억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거거든요. 그러니까 계속 어떤 스토리들을 만들어줘야 해요.

류: 그렇다면 대표님께서 지금 인천에 제안하고 싶은 스토리텔링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전: 그래서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최근에 시장이 쓰던 관사 옆에 도시공사가 매입을 하여 공공자산으로 만들어서 인천시민에게 오픈한 송학동 이씨주택이 있어요. 그 건물이 김수근 선생님이 작업하신 주택 가운데 하나예요. 그게 공공에 열어놓은 건축자산의 성격으로 오픈된 건데요. 안양에 가면 김중업 건축박물관이라는 것이 있어요. 프랑스 대사관을 설계한 분이죠. 한국현대건축의 태동을 연 분으로 두 사람을 이야기하는데 바로 김중업 선생님과 김수근 선생님이에요. 김수근 선생님이 1986년에 돌아가셨는데 아직 선생님 이름으로 박물관이 없어요. 선생님이 애지중지하고 창업하고 만들어낸 건물은 지금 아라리오 스페이스로 팔렸고. 그래서 나는 인천 도시공사가 그런 건물은 과감하게 김수근 박물관을 유치하는 보다 구체적이고 큰 그림의 에너지를 내줬으면 좋겠어요. 만약에 도시공사가 이걸 이렇게 전향적으로 생각해 준다고 하면 돌아가신 김수근 선생님은 물론이고 그분의 제자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지금 김수근 문화재단이 서울에 있는데 장소가 없어요. 최근 송학동 이씨주택의 설계에 얽힌 김수근의 건축이야기를 증언해준 김원석 선생님이 계신데 이분이 안타깝게도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이분은 김수근 선생님의 오른팔로서 설계본부장을 맡았고, 이 주택의 설계 실무를 담당했던 분이셨어요. 김수근 사후 2대 공간그룹 회장이기도 하셨고요. 어쨌든 그분의 고증에 의해 그 건물이 콘텐츠를 강화했어요. 그 건물의 의미와 김수근에게 있어서 어떤 건물이고, 속성은 무엇인지 등등. 그 도면에 대해 설명을 세세하게 해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사실 제가 이 인터뷰에 응한 이유도 이 때문이에요. 한국현대건축의 태두로 불리는 김수근 선생님의 박물관을 인천이 그 건물을 통해서라도 유치해줬으면 좋겠다. 이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류: 찾아보니 이 건물이 1977년에 설계하고 준공된 건물이네요. ‘이음1977’이라는 이름으로 건축자산 보전형 리모델링에 착수한다고 되어 있네요. 대표님 말씀대로 문화적 자산이 그 가치를 제대로 주목받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음1977’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이야기는 김수근 선생님 자체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인천시와 도시공사가 그 스토리텔링을 놓치지 않고 좀 더 귀를 기울여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 기점이 되어서 근대만이 아니라 인천의 현대건축까지 관심이 넓혀지는 한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긴 시간 동안 다양한 관점에서 건축과 인천의 관계를 풀어주신 점 정말 감사드립니다.

전: 감사합니다.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제2의 인생, 신중년이라는 옷을 입다: 송연숙 씨 인터뷰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제2의 인생, 신중년이라는 옷을 입다송연숙 씨 인터뷰

홍봄(기호일보 사회부 기자)

신중년(新中年). 사전적 의미로는 ‘자기 자신을 가꾸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며 젊게 생활하는 중년을 이르는 말’이다.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지역주민들과 어울리며 제2의 즐거움을 찾고 있다는 송연숙(55·송도2동) 씨에게도 이 말이 참 잘 어울린다. 만나는 순간 긍정적인 에너지와 활기가 전해졌던 신중년 송 씨와의 만남을 기록한다.

인천 연수구 커낼워크 내 송도문화살롱에서 만난 송 씨는 ‘이 멤버! 리멤버!’를 외치며 지난해를 함께 보낸 팀원들 자랑으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가 참여한 <신중년 인생 2막 변주곡 Song Do!> 프로그램은 연수문화재단의 2020 지역문화 생태계 구축 통합운영 사업의 일환이다. 이 사업은 신중년의 삶에 관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함으로써 중년 세대의 ‘멋지게 나이 듦’의 의미를 환기하고, 궁극적으로 지역 내 문화자치 동력의 구성요소를 마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신중년의 삶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일상의 소재인 ‘의상’과 ‘주거’라는 주제로 운영됐다. 송 씨는 6명의 팀원과 함께 의상분야인 ‘나는 송도스타일!’로 활동했다.
송 씨는 “처음에는 예쁜 옷을 입고 인증샷을 찍고 싶다는 생각에 참여하게 됐어요. 60대에서 40대까지 6명의 주민이 모였는데 너무 마음이 잘 맞았던 거죠. 여러 의상들을 입어보면서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금세 친숙하게 어울릴 수 있었어요. 서로 마음에 드는 옷을 바꿔 입기도 하고 선뜻 내어주기도 하면서요. 의상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으니 말도 더 잘 통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음이 잘 맞는 팀원들과 나의 옷장이야기와 우리 동네 테일러가 알려주는 스타일링 팁, 화보촬영 및 룩북제작을 하는 과정은 코로나19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송 씨에게 큰 해방구가 됐다. 유일하게 마음을 놓고 이웃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송 씨는 “코로나 때문에 불안해서 어딜 나갈 엄두도 못 냈는데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이웃과 장소가 생긴 것”이라며 “의상에 대해 배우고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의 차이를 확인하는 과정들이 인생에서 큰 활력이 됐다.”고 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은 부직포로 각자의 드레스를 만들어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도구나 실력이 훌륭하진 않았지만 각자 최선을 다해 세상에 한 벌 뿐인 나만의 옷을 만들어냈다. 아쉬운 점이라면 직접 만든 드레스를 입고 의상쇼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멤버들은 올해 제2의 신중년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이번에는 내 지역 송도를 알리는 동영상 찍기에 도전하려 한다. 일정에 한계가 있지만, 송도의 사계절을 담는 게 멤버들의 목표다.

신중년 프로그램 외에도 인생나눔교실 <삼삼오오 복작복작 단지>의 퍼실레이터로 참여한 경험 또한 송 씨에게 의미 있는 일이었다. 삼삼오오 프로그램은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다양한 구성원들이 하나의 소모임을 결정하고, 그 학습공동체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그는 지난해 ‘엑사모’와 ‘볼링블링’, ‘최고박당’ 소모임에 퍼실레이터로 함께했다.
송 씨는 “송도는 100%가 아파트다 보니 이웃과 소통하기 쉽지 않아요. 인생나눔교실 프로그램은 다른 아파트 사람들끼리 모여서 우리 마을의 이야기해보자는 취지로 참여하게 됐죠. 하지만 20팀 이상 모으려 했던 계획과 달리 코로나19로 모임에 제약이 컸어요. 그래서 우회했던 게 ‘같은 취미 가진 사람들끼리 소규모로 모여보자’였어요.”라고 설명했다.
이웃들과 삼삼오오 소통하며 그는 송도문화살롱이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보다 활성화됐으면 하는 기대가 생겼다. 공간 특성상 갤러리를 운영하기 좋은 이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일 년 내내 주민들로 북적이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
송 씨는 “송도문화살롱이 더 많이 활용되고, 내년과 내후년에도 계속 이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구와 경제청, 상인분들이 합심하면 공간이 더욱 좋게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삼삼오오나 신중년 등 주민참여 프로그램을 할 때 최소 1회씩은 이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으면 지나던 사람들도 궁금해서 들어와 보지 않을까요?”라고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송 씨는 지난 1년간 신중년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얻은 귀한 경험들을 “행복했다.”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는 “그동안 누구 엄마, 누구 와이프, 주부로 살았는데 지난 한 해는 송연숙으로 살았습니다. 신중년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이게 송연숙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굉장히 행복했어요. 나이가 들었다고 집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오시고 활기차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집에만 있다가 공원이라도 나와서 움직이면 참 좋거든요. 많은 신중년분들이 밖으로 나오셔서 함께 경험하고 동참하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 행복했던 경험을 많은 주민들이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지역에 보다 많은 문화프로그램들이 꽃피기를 희망했다.
송 씨는 “신중년이나 삼삼오오 같은 문화예술 프로그램들이 지역에 잘 정착돼서 많은 분들이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평생학습관보다는 조금 느슨한 느낌으로 신중년을 비롯한 주민들이 오가다가 편하게 들를 수 있는 문화거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라고 강조했다.

인터뷰/글 홍봄(洪봄, HongBom)

기호일보 사회부 기자




백령을 화폭에 담다: 해반문화사랑회 최정숙 이사장과의 만남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1>

백령을 화폭에 담다해반문화사랑회 최정숙 이사장과의 만남

류수연(인하대학교 교수)

최정숙(崔正淑)
1954년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동대학원 서양화과 수료. 현재 사단법인 해반문화사랑회 이사장. 1993년 해반갤러리를 기반으로 한 해반문화사랑회를 창립하였다. 해반문화사랑회는 1997년 인천 문화예술단체 최초로 사단법인이 되었다. 2000년 <열려있는 땅, 인천> 전을 통해 개항 도시 인천의 정체성을 탐구한 작품을 창작하였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에 전념하여 15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개최하였다.

* 본 인터뷰는 방역지침을 준수하며 이루어졌음을 밝혀 둔다.

류: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문학평론과 문화평론을 쓰는 류수연이라고 합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인터뷰를 위해 간단하게 이사장님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최: 소개라고 할 것이 있나요. 저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고, 또 지역문화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렇게 문화 영역에서 함께 하는 여성 동지와 만나니, 처음 뵙는 데도 굉장히 친숙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래도 우리 여성들끼리는 좀 더 통하는 것이 많잖아요.

류: 네, 그렇지요. 저도 처음 뵙는 데도 원래 알던 분처럼 친숙한 느낌이 드네요. 아무래도 전화 통화 하면서 일차적으로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하하.

최: 여성으로서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공감대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제 삶이 그러했어요. 현실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괴리. 그런 것들이 참 많았지요. 그걸 여성들 사이에서는 투쟁의 역사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에는 결혼하고 홍대 대학원 다니다 두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간 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거든요.

류: 그러셨군요. 그러면 지역문화운동을 시작하시게 된 시점도 그 즈음인 건가요?

최: 처음 지역문화운동을 시작한 건 부부가 함께였어요. 처음부터 이렇게 큰 모임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처음엔 시민 갤러리 개념으로 시작했죠. 1991년 현재 해반문화의 근간이 된 해반갤러리를 시작한 거예요. 처음에는 시민애호가 모임으로 시작한 개념이었어요. 그것이 현재의 해반문화사랑회가 된 거죠. 우리 해반문화사랑회는 인천에서 자생한 첫 사단법인화 한 단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죠.

류: 인천을 기반으로 시민사회에서 문화단체를 뿌리내리게 했다는 자부심도 크셨을 것 같아요.

최: 아무래도 그렇죠.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개인 작업은 뒤늦어진 면이 있어요. 2003년에 시민단체 성격의 갤러리 활동을 정리하고 2004년부터 개인 작업을 시작했거든요. 처음에는 두려웠죠.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대학에 다니면서 한국 컨템포러리의 대부님들께 많이 배웠거든요. 그때 각인되었던 것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었어요. 그 고민이 사실 7년 이상 지속되었죠. 그래서 처음부터 바로 그림을 착수한 것이 아니에요. 처음엔 사진 작업으로 시작했어요. 그때 앱손 프린터가 처음 나왔거든요. 어디 배울 곳은 없으니까 혼자서 붙들고 고생하면서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도출했었죠. 처음 시작은 흑백톤으로 사진을 뽑아서 그것을 가지고 시작했죠.

류: 어떤 계기로 다시 개인 작업을 시작하기로 생각하게 되신 건지도 궁금해지는데요.

최: 갈증 같은 것이었죠. 제가 91년도에 건강이 좀 안 좋았어요. 자궁을 적출했거든요. 거기서 오는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또 보다 의욕적으로 살고 싶어서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죠. 처음 해반갤러리 시작할 때에는 인천이 상당히 문화적으로는 불모지에 가까웠어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이 컸죠. 그래서 처음에는 전시를 기획하는 일에 착수했죠. 인천을 중심으로 서울과도 연계하면서 작품 전시를 열고, 그런 일들을 주로 했어요.

류: 기획과 함께 큐레이팅도 직접 다 하신 거네요?

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죠. 이런 일들을 하다 보니까 내 안에 갈증과 함께 남모르는 대가들도 생기더라고요. 자기 이상을 추구하는 욕망의 대가가 생각보다 컸어요. 특히 경제적인 출혈이 굉장히 컸어요. 전시라는 게 한 번 열 때마다 많은 돈이 들어요. 사람들이 보기엔 우리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이런 일을 추진한다고 여겼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거든요. 물론 이런 것들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경제적 가치보다 이상이 더 컸고, 그것을 위해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하지만 그런 일들을 13년 정도 하다 보니까 거기에서 오는 피로가 크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다시 작품 활동에 매진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류: 아까 부부가 함께 시민문화운동을 시작했다고 하셨는데요. 그럼 일을 나누게 되신 건가요?

최: 그렇죠. 해반문화사랑회가 1997년 사단법인화되면서 저는 주로 해반갤러리 기획전시를 하고, 남편은 주변의 추대로 초대이사장을 맡게 되었죠. 저는 제 활동으로 들어가면서 생각했어요. 문화를 하고 싶은 사람들의 장을 만들었다는 그 뿌듯함이 그것이었죠. 인천의 오피니언 그룹과 함께 여러 활동들을 진행하고 갤러리를 열린 공간으로 만드는 과정들이 굉장히 매력적인 거였죠.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한계에 직면하기도 했어요.

류: 어떤 것이었을까요?

최: 93년 무렵에 당시 인천의 부촌이었던 부평에 갤러리를 열었거든요. 아무래도 그쪽이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가 있으니 갤러리 활동에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결과는 엄청난 적자였어요. 하하. 그래서 다시 동구 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죠. 그러면서 다시 시작한 것이 해반문화포럼이었어요. 인천의 문화를 개척하는 의미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뜻을 같이하는 20여 분 정도와 함께 시작했어요. 이렇게 인천에서의 소문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문화에 대한 대안들이 계속 포럼을 통해 나오니까 지역사회의 관심도 높아졌죠. 사실 이 포럼이 인천의 문화콘텐츠를 만드는 데 상당한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해반문화가 2020년 인천의 비전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고요.

류: 굉장히 의미 있는 활동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에 어떤 것이 있으신지요?

최: 근대개항이라는 키워드를 끌어낸 것이 그래요. 2000년에 우리가 인천의 정체성과 정주성, 이런 문제들을 포럼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거든요. 그러면서 떠오른 것은 바로 근대개항이라는 문제였어요. 인천에 무엇이 있는가를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인천이라는 도시가 가진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가 다름 아닌 개항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개항으로부터 진짜 인천의 역사가 시작된 거죠. 이런 생각들이 결국 인천을 상징하는 하나의 포문을 연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인천에 산재했던 문화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마련된 거죠. 또 시민들에 의해서 인천문화가 이끌어질 수 있다는 어떤 토대로 마련되었고요. 저는 그래서 2000년에 열었던 <열려 있는 땅, 인천> 전시가 굉장히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인천은 무엇이냐는 하나의 상을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류: 2000년이면 제가 막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인데, 저도 그 무렵부터 개항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인천을 사유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 부분에 이사장님의 역할이 크셨던 거군요.

최: 2004년부터 개인 작품 활동하면서 해반 일과 소원했다가 제가 해반이사장을 맡으면서 돌아온 것은 2011년이었어요. 2005년에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재청이 만들어지면서 유홍준 교수님의 답사기 열풍으로 지역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클 때였어요. 문화재청 문화유산방문교육 공모사업에 해반문화가 지원했거든요. 이전부터 개항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시한 단체여서 주목을 받았기도 하였고 언론도 많이 탔고요. 그때 우리가 주목한 것이 어떻게 하면 사라져 가는 개항의 유산을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시민 문화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죠.

류: 그 과정에서 가장 자부심을 느끼신 결과는 무엇일까요?

최: 바로 인천아트플랫폼이죠. 개발 논리에 사라질 뻔했던 인천아트플랫폼을 문화적 콘텐츠 그대로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어요. 인천아트플랫폼에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만드는 운동을 전개했거든요. 미술관 운동도 했고요. 인천문화재단이 등장하기 전에 실질적으로 그 물꼬를 텄다는 데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또 당시 시작되었던 문화유산운동에 있어서도 원년 멤버로 이끌었다는 자부심도 있고요. 사실 인천이 당시 수도권에서는 처음으로 이러한 운동을 시작했거든요. 실제로 이런 사회적 봉사의 공로를 인정받아서 2012년 문화재청상, 2013년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대통령표창을 받기도 했고요. 그 계기가 된 문화유산교육은 지금까지도 잘 진행하고 있어요. 문화지킴이 교육도 지속되고 있고요.

류: 네, 저도 기사로 수상 내용을 접했습니다. 오랜 시간의 활동에 대한 인정과 함께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서도 큰 응원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 각도를 돌려서 화가로서 이사장님의 개인 작품 활동에 대해서도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는데요. 이사장님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백령도인데요. 백령도를 본격적으로 작품의 주제로 담게 되신 계기는 무엇일까요?

최: 사실 백령도는 우리 아버지의 고향이에요. 가끔 제가 백령도가 고향인 줄 아시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어린 시절을 백령도에서 보내기도 했지만, 사실 거기서 태어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린 시절에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으니, 저에게는 추억이 많은 곳이죠. 주로 할머니 댁에서 방학을 보냈거든요. 하지만 제가 백령도를 본격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한 데는 다른 계기도 있었어요.

류: 어떤 일이었나요?

최: 2011년이 한 기점이었죠. 그 무렵에 우리 아들이 공중보건의로 군대를 가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당시 연평도 아니면 백령도로 발령을 받을 예정이었는데, 백령도로 발령이 났어요. 그때 뭔가 운명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고향이고, 내 어린 시절이 있는 곳에 이제 다시 아들이 갔으니까요. 같은 해에 일어난 연평도 포격사건을 피해간 것도 그런 운명적 느낌을 더 강하게 만들었던 것 같고요. 그때부터 백령도를 주제로 작품을 시작했고, 《분쟁의 바다 화해의 바다》라는 주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사실 여기에 그린 작품들이 제가 본격적으로 유화를 다시 시작한 것이었어요. 그중에서도 <아버지의 바다>라는 작품이 있는데 제가 사진에서 유화 작업으로 전환되는 기점이 된 작품이죠. 사실 이 작품은 같은 주제와 제목으로 사진과 유화 작품이 둘 다 있어요. 특히 유화로 그린 <아버지의 바다>는 대학원 졸업 후에 다시 그림을 시작하면서 처음 그린 유화였다는 점에서 저에게 의미가 커요.

최정숙, <아버지의 바다>(유화, 130×97, 2011) ⓒ최정숙

류: 정말 뭔가 운명적인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 같네요. 이사장님, 백령도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궁금해집니다.

최: 내 첫 기억은 5살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밤에 할머니 댁 마당에 누워 있는데 정말이지 밤하늘에 별이 한가득 쏟아질 것처럼 차 있었거든요. 그런 기억들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한 거죠. 사실 백령도는 분쟁의 아이콘이고 분단의 아픔이 드리워진 곳이고, 나에게 있어서 한 집안의 역사이기도 해요. 아버지는 백령도 분이고 우리 어머니는 황해도 분이시거든요. 아버지 집안이 백령도의 부농 집안이셨고요. 광복 후에 최초로 면장을 하셨어요. 섬을 둘러싼 여러 이미지들이 있죠. 섬은 허락해야 들어간다는 말 들어보셨죠. 백령도가 그래요. 봄이면 해무가 엄청나서 진짜 섬이 허락한 날에나 가볼 수 있는 곳이죠. 내게 백령도는 참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아버지의 고난한 삶과 화해, 그리고 내 인생에 있어서는 하나의 징검다리 같은 의미였어요. 육지와 섬을 이어가는 것이 내 삶의 원초적 기억이니까요. 결국 백령도를 주제로 담아내면서 본격적으로 드로잉을 시작했어요. 그곳에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을 스케치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백령도 드로잉 전시를 하기 시작했죠.

류: 이사장님의 드로잉이 그대로 살아 있는,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사라지고 있는 백령도의 시간을 담아내고 있는 거군요.

최: 사실 우리 부모님은 인천 인물사에서도 다루어지고는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면장을 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셨던 것이 간척사업이었어요. 섬이니까 농지가 절실했던 거죠. 그래서 1971년에는 백령도에 아버지 공적비가 만들어지기도 했어요. 정말 열정적인 분이셨죠. 너무 많이 고생하셔서 그렇게 일찍 가신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어머니 집안은 천주교를 빨리 받아들인 집안이었고, 어머니도 독실한 신자였어요. 부모님 결혼하실 때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머니가 처음에는 소개받는 남자가 백령도 사람이라고 해서 사실 관심이 없었대요. 섬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거니까 무슨 관심이 있겠어요. 그런데 만나 보니 아버지가 섬사람 같지 않았던 거죠. 아버지가 잘생기셨어요. 첫눈에 반하신 거죠. 하지만 어머니 역시 양보할 수 없었던 게 천주교였나 봐요. 아버지한테 혼배를 해야 결혼을 하겠다고 말씀하셨대요. 당시로서는 굉장한 선택이죠. 그런데 아버지가 그걸 하신 거예요. 하하. 그렇게 결혼을 하셨고, 어머니는 백령도의 첫 천주교 신자가 되신 거죠. 하지만 어머니의 삶이 참으로 아픈 삶이에요. 분단 이후에는 어머니 고향은 보이지만 갈 수 없는 땅이 되었으니까요. 더구나 우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으니, 더욱 고난한 삶을 보내셨죠.

류: 이사장님 어머님의 삶이 참으로 안타깝네요. 바다 건너 고향을 바라보면서 가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떠셨을지 저는 감히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도록과 작품을 보면서 이사장님 이야기를 들으니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긴 시간 동안 진솔한 이야기를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이나 인천문화재단이나 인천의 문화예술인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최: 저는 화가니까 일단 열심히 작품을 그려야죠. 그만큼 열심히 전시도 하고 싶고요. 코로나 때문에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지만, 코로나 이후를 준비하는 시간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지금까지처럼 해반을 잘 이끌고. 사실 제가 이끄는 것도 아니에요. 워낙 뛰어나신 분들이 계셔서 진짜 알아서 척척 해주세요. 저는 그 안에서 해반이 그 중심을 잃지 않도록 균형만 잡으면 되는 사람이죠. 그렇게 해오던 대로 계속 열심히 해나가는 것이 저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류: 마지막까지 이사장님의 한결같고 든든한 문화에 대한 애정이 잘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최: 저도 오늘 아주 즐거웠어요. 감사해요.

인터뷰 진행/글: 류수연
문학/문화평론가.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 현재 인천문화재단 이사이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멈춘 일상을 회복하게 만드는 문화의 힘: 윤미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 위원

인천문화통신3.0은 2020년 9월부터 지역 문화예술계 · 시민과 인천문화재단과의 소통을 위해 <유쾌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기획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였다. 매달 2개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시민과 예술인들을 만나고 있다.

<기획 인터뷰-유쾌한 소통 2>

멈춘 일상을 회복하게 만드는 문화의 힘윤미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 위원

박현주(경인일보 기자)

윤미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 위원(사진: 박현주)

“봄꽃이 피고, 단풍이 질 때마다 공원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리면 좋겠어요. 산책 나온 이들이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다 오랜만에 만난 이웃들과 안부를 주고받고요.”
수십 년 전만 해도 이웃들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안에서 끈끈한 정을 나눴지만, 지금은 옆집에 사는 이가 누군지도 모른다.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관계 속에서도, 이웃 간 뭉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27년째 인천 서구 석남동에 살고 있는 윤미(60) 씨는 그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주민이다.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 위원으로 활동하는 윤미 씨는 오는 6월부터 2차례에 걸쳐 주민들이 참여하는 행사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서구는 올해 문화체육관광부의 제3차 법정 문화도시 예비 문화도시로 지정되면서 지역 고유의 문화를 알리고자 주민이 주축이 된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를 구성했다. 윤미 씨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다른 위원들도 그 취지에 공감하면서 주민과 함께하는 행사로 진행하게 됐다.
“그동안 우리가 당연시 여겼던 일상이 멈췄잖아요. 이웃 간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한번 공동체의 가치를 되새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바라는 문화도시는 거창한 게 아녜요. ‘내’가 집에 머무는 것보다 동네 밖으로 나왔을 때 더 즐겁다고 느끼면 그게 바로 문화도시 아닐까요.”
주민들의 적극적인 활동 소식을 접한 지역 소재 기업인 SK석유화학에서도 지원하는 데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인천서구문화재단은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에 따른 행정적 절차를 모색하는 등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민·관·산이 함께 지역 사회를 위해 힘을 모은 사례로 인정받아 지난 4월엔 행정안전부가 지원하는 사업에 선정되는 성과를 거뒀다.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는 다음 달 석남녹지도시숲에서 진행하는 ‘어울림 마당’과 오는 9월 석남동 전통 시장인 강남시장에서 여는 ‘시장 데이’ 등 총 2개의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어울림 마당’은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체험·공연·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사는 환경에 대한 고민도 함께하자는 게 행사의 주된 취지다.
“문화란 크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 전반을 의미합니다. 재활용품으로 화분을 만들거나, 헌 칫솔을 가지고 오면 대나무로 만든 친환경 머그컵을 증정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어요. 우리가 가진 자원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자는 의미죠.”
주민들이 각자 자신이 가진 재주와 능력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작은 기타처럼 생긴 악기 ‘우쿨렐레’를 잘 다루는 주민은 이날 소공연을 열기로 했다. 글씨나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인 캘리그래피에 소질 있는 또 다른 주민은 현장에서 이를 시현하기로 했다. ‘시장 데이’엔 주민들이 전통 시장을 방문하고 시장을 관광자원과 연계하는 방안을 찾기로 했다. 추석이 있는 달이니 시장에서 한가위 음식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구입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전통 시장은 역사가 깊으니 지역 특색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전통 시장이 낯설 수 있는 어린이와 청년들도 재밌게 참여할 수 있도록 세대마다 관심 가질 수 있는 요소들을 파악하고 있어요.”
윤미 씨는 오랜 기간 지역 사회 일원으로서 주변 사람들을 돕는 등 나눔 활동을 해왔다. 주변에선 “그렇게 일하면 돈이 나오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윤미 씨는 “아니. 그냥 우리 동네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해서”라고 대답한다. 주로 가까운 이웃들과 소모임을 꾸려왔던 그는 2015년 ‘내 지역 일을 조금 더 넓게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에 주민자치위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동네 곳곳에 관심을 가지니 이곳저곳 윤미 씨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

2018년엔 다문화 가구 아이들이 좀 더 우리 사회에 ‘마음 붙이고’ 지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너나들이’라는 마을 공동체를 만들었다. 서로 ‘너’, ‘나’ 하고 부르며 속마음을 털어놓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됐으면 해서 붙인 이름이다.
“주민자치위원으로 있을 때 동 행정자치센터 바둑교실을 다니던 다문화 아이가 눈에 띄더라고요. 애가 수업 시작하기 2시간 전부터 와선 주변을 돌아다녔어요. 하루는 아이를 붙잡고 물어보니 부모님이 일을 해서 학교 마치고 갈 데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너나들이’에선 다문화 가구 아이와 그의 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놓인 다문화 가구 부모들은 대부분 맞벌이로 생계를 이어간다. 이 시간이라도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유대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는 게 윤미 씨의 설명이다.
‘너나들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활동은 우리나라 명절에 하는 ‘전통음식 만들기’다. 다 함께 모여 산적을 만들고, 동그랑땡을 빚고, 육전을 부쳤다. 아이들 입맛에 ‘딱’ 맞을 법한 음식들이니 다들 연신 ‘맛있다’고 엄지를 추켜세웠다고 한다. 고국을 떠나온 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컸을 날, ‘너나들이’는 즐거운 추억을 선사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이전처럼 한 달에 2번씩 모임을 갖진 못해도, 항상 연락하며 서로에 대한 안부를 주고받고 있다.
“지난 설엔 떡국 재료를 준비해서 갖다 줬는데 아이들이 못 본 사이 한 뼘씩 더 컸더라고요. 집에서 가족들끼리 재밌게 보내라고 윷놀이 판도 전해줬어요. 우리 문화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됐으면 해서요.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따뜻한 기억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윤미 씨가 수년간 ‘너나들이’를 통한 문화 전도사 역할을 지속하면서 그동안 먼저 다가가길 머뭇거렸던 이들 역시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얼마 전엔 서구문화도시상생협의체에서 하는 ‘어울림 마당’ 행사에 오라고 여러 다문화 가족에게 전화했더니 ‘언니가 오라면 당연히 가야죠. 친구들도 데려갈게요.’라고 말하더라고요. 앞으로도 이들에게 든든한 동네 언니로서 제 역할을 다하려고요. 나는 이미 이웃들에게 받은 게 많아요. 이제 그때 받은 걸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어요.”

부산댁이었던 윤미 씨가 남편을 따라 인천에 왔을 때, 낯선 곳의 이웃들은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든든한 존재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으면 다들 한 집에 모여 담소를 나눴다. 온 동네 주민이 모여 국수를 삶아 먹었다. 누군가 급한 일이 있을 땐 너 나 할 것 없이 돕겠다고 나섰다. 다들 이웃들이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도록 집집마다 대문을 열어 놨다.
“지금도 과거 이웃 간 정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함께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요. 우리 지역만이 갖고 있는 색깔을 찾아 주민들을 이어줄 수 있는 ‘만남의 장’이 필요합니다. 저는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세포’이고, 이 세포가 모여서 사회를 지탱하는 ‘몸’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웃이 함께 할 수 있는 그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건 문화가 아닐까요.”

인터뷰 진행/글 박현주(경인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