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나는 우리가락 함께 즐겨요” – 풍물패 ‘다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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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8일 월요일.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진 시간. 백운역 근처 잔치마당 지하 연습실에서 경쾌한 풍물 소리가 새어나왔다.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뽐내는 그들은 올해로 14년째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직장인 동아리, 풍물패 다믈의 회원들이었다. 다믈이라는 이름은 원래 ‘ᄃᆞ믈’로, 우리의 옛것을 되돌려 찾자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직장을 가지고 있지만 퇴근 후에 취미 생활을 가지고 싶어 모인 사람들,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풍물을 가르쳐주기 위해 찾아온 선생님, 양로원에서 봉사 공연을 하고 싶어 찾아온 회원 등 직업도, 연령도, 찾아온 이유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다. 평일 저녁, 늦은 시간까지 모여 연습하는 다믈의 회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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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다믈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오승재 : 전문예인집단 잔치마당에서 운영하는 강습에서 시작되었다. 1기, 2기 등 신청을 받아서 수업을 했는데, 각 기수의 수업이 끝나고도 지속적으로 연습을 하고 활동을 하기를 바라는 회원들이 많았다. 잔치마당의 공간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회원들이 자체적으로 결성해서 운영하고 있다. 잔치마당 소속으로 일주일에 한 번 다믈의 강습을 맡고 있는데, 회원 분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해주고 계신다.

무명씨 : 지금 40대 중반인데, 어릴 때는 동네마다 풍물패들이 있었다. 아버님이 동네 풍물패의 상쇠로 활동하셔서 풍물을 자주 접했었다. 동네에 큰 행사가 있다고 하면 풍물패가 제일 먼저 가서 공연을 하고는 했다. 크면서 풍물을 접할 기회가 줄어들다가 우연한 기회로 풍물패 다믈을 알게 되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연습을 나오는데, 힘들다기보다는 오히려 이 시간을 기다리면서 근무를 하게 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화합을 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순간순간이 즐거웠다.

유순복 : 가천미추홀청소년봉사단 어머니회원으로 풍물패 활동을 했었다. 그때 강사로 오셨던 분이 잔치마당의 단장님이었고, 2000년도에 잔치마당 회원반 강습을 듣게 되었다. 2002년도에 다믈이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창단을 했다. 회원들 중에는 전문성을 갖추고 강사로 전향한 분들도 있었다.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데, 일상생활이 아무래도 갑갑한 느낌이 있다. 다믈에 와서 신나게 악기를 연주하며 회원들과 애틋한 정도 생겼다. 회원들이 모여 회칙을 만들기도 했다. 단순히 모여서 연습만 하고 공연만 하는 게 아니라 끈끈한 정을 이어가기 위해 함께 규칙을 만든 것이다.

임은화 : 풍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는 있었지만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할 지를 몰라 고민하던 중에, 길을 지나가다가 여기 간판이 보였다. 잔치마당의 초급반 수업부터 듣기 시작해서 10년 동안 차근차근 연습을 해왔다. 퇴근한 뒤 저녁도 못 먹고 연습에 참여한다. 체력적인 소모가 커서 연습이 끝난 뒤에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잊을 만큼 즐거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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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요즘에는 옛 것, 우리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다믈에는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풍물이 가진 매력, 그리고 특히 풍물패 다믈이 가진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유순복 : 회원들의 연령대는 30대에서 60대 후반까지 다양하다. 일주일에 두 번 모이는데, 하루는 회원들끼리 연습을 하고, 하루는 잔치마당의 오승재 선생님께서 강습을 해주신다. 동아리의 중심을 잡아주는 축이 있으니 우왕좌왕하지 않고 동아리가 운영되고 있다. 기능을 잘 잡아주니 기능도 금방 늘고, 옛것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수업을 해주시니 흥미롭고 유익하기도 하다.

오승재 : 풍물이라는 문화가 악기 연주만 하는 게 아니고 다 같이 어울려서 치는 것이라는 데에 큰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취미로 다른 악기나 무엇을 배운다고 할 때 보통 그게 1,2년을 넘기가 힘들다. 하지만 풍물을 하시는 분들은 1-2년 활동한 걸로는 아직 초보 수준이라고 하고 적어도 5년 이상은 활동해야 이제 좀 친다고 말한다. 그만큼 어려운 악기이기도 하고 혼자만의 기량으로는 어느 수준 이상 치기도 어려운 악기이다. 시간이 많이 필요한 악기다보니 조급해하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연습에 임하게 된다. 함께 모여 어울리면서, 얼굴을 마주보고 웃으며 연주할 수 있다는 게 오랜 기간 활동할 수 있는 큰 이유 중에 하나이다.

무명씨 : 풍물이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음악이다. 여러 가지 음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악기 하나하나가 가진 고유의 소리들이 모여 서로의 빈자리를 메워주면서 음악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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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다믈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유순복 : 2009년에 하얼빈에 갔던 게 기억난다. 같이 활동하던 회원 중에 한 명이 사업차 갔던 하얼빈의 한 조선족 학교에서 꾸준히 아이들에게 풍물 강습을 해주었다. 학교에서 초청을 해주어서 다믈 회원들이 함께 가서 공연도 하고 학생들의 공연도 보고 왔던 게 기억에 많이 남는다. 올해는 회원 중 한 분이 새로 집을 지어서 집들이를 겸해 길놀이 공연을 하고 왔다. 그 동네에는 풍물 공연을 하러 온 팀이 처음이라고 했다. 공연을 보던 동네 주민들이 신이 나서 함께 연주를 하기도 하고, 주머니에 봉투를 찔러주기도 했던 게 기억난다. 풍물이 낯선 사람들에게 우리의 옛 음악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게 뿌듯하기도 했다.

전문가 못지않게 긴 경력과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풍물패 다믈의 회원들. 그들에게 다믈 활동이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습이 아니라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고 활력을 얻어가는 시간이다. 스스로 먼저 즐기면 관객들도 덩달아 즐거워진다고 말하는 회원들의 소망은 풍물의 매력을 알고 즐기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풍물패 다믈은 12월 7일 수요일 백운역 근처 잔치마당 아트홀에서의 공연을 앞두고 있다.

글 / 시민기자 김진아




개인의 바람이 하나되어 만들어내는 무대, 빌리지앙 밴드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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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쿵. 계산동 연습실로 내려가는 발소리에 맞춰 드럼 소리가 들린다. 빌리지앙 밴드협회는 현재 블리지앙 다이어리, 블랙이글스, 미(美)뺀, 데이데이, 짱가 총 5개의 밴드가 이 공간에서 함께 하고 있다. 인터뷰가 있던 월요일은 빌리지앙 밴드협회의 초기 멤버들이 모인 빌리지앙 다이어리가 연습을 하는 날이기도 했다. 그들의 땀과 노력이 깃든 공간에서 빌리지앙의 7년을 되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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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협회의 시작
빌리지앙 밴드협회는 지역 공동체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희망을 만드는 사람들’에서 출발했다. 지역 구성원의 소모임을 만들던 와중에 음악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게 됐고, 그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빌리지앙이 결성된 것이다. 물론 그 외에 음악을 배우고자 하던 이들도 초기 멤버로 합류하여 함께 하고 있다. 지금처럼 5개의 밴드가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룰 만큼 큰 규모의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음악을 하고자 하는 그 마음 하나로 모여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첫 걸음부터 함께한 멤버들
음악이 좋아서 모인 그들이었지만 마냥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악기를 다룰 줄 알았던 멤버도 있었지만, 초창기 멤버의 다수가 초보자이다 보니 함께 학원에 다니면서 악기를 배웠다고 한다. 최근 빌리지앙의 회장이 된 조현행 씨는 베이스라는 악기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지만, 당시 학원 실장님의 지속적인 설득으로 지금까지 베이스기타를 담당하고 있다. 드럼 연주자인 황은주 씨는 전문 밴드가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연습을 하다 보니 긴 기간에 비해 엄청난 능숙함이나 급성장을 보이진 않지만, 첫걸음을 같이 뗀 출발선이 같았기에 지금까지 멤버 교체 없이 함께 잘해온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1개의 밴드에서 협회가 되기까지
빌리지앙 밴드협회는 처음에 ‘빌리지앙’이라는 단독 밴드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연습할 공간이 없어서 타악기 퍼포먼스 팀 ‘아작’의 공간에서 연습했다고 한다. 그러다 지금의 공간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 모여서 합주를 하고 그 외의 시간은 비어있는 것이 아까워 다른 많은 사람과 공간을 함께 나누자 싶어 다른 밴드가 들어오게 됐다. 다른 밴드들이 들어오면서 초기 밴드인 빌리지앙은 빌리지앙 1기로 개명했다가 1기를 다이어리라는 언어유희처럼 이름을 바꿔 지금 빌리지앙 다이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미(美)뺀, 데이데이, 블랙이글스, 짱가가 함께 하게 되면서 ‘빌리지앙 밴드 협회’라는 더 큰 동아리로 거듭났다.

1년에 한 번, 그들의 축제 ‘정기연주회’
빌리지앙 밴드협회는 1년에 한 번씩 정기연주회를 여는데, 이는 그동안의 노력의 결과를 보여주는 축제와 같은 것이다. 정기연주회는 빌리지앙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의미 있는 축제이다. 첫 번째는 개인과 밴드의 실력 발전을 위해 의미가 있다. 연습만 하다 보면 발전성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정기연주회라는 계기를 통해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지면서 개인과 밴드가 모두 한 해 동안 연습한 결과를 자신과 관객들에게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두 번째는 화합과 교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빌리지앙은 여러 밴드가 모인 만큼 다양하고 많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이 잘 어우러지고 교류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해낸 것이 정기연주회이다. 각 밴드에게도 정기연주회는 좋은 기회와 자극이 되며 서로 더 돈독하게 협회를 지켜나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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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연주회로 전달하는 나눔
빌리지앙의 연습실 한 켠에는 기타가 들어있는 상자들이 쌓여있다. 기타는 빌리지앙이 저소득층 청소년들을 위해서 기증하는 것으로 정기연주회의 수익금 중 일부로 마련하고 있다고 한다. 빌리지앙은 이런 기증 외에도 청소년들을 위한 음악 교육을 진행하기도 하며, 지금도 멤버 개인 각자가 곳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가족들의 변화와 응원
많은 아마추어 문화예술 동아리 멤버들이 그렇듯 조성철(전 회장) 씨는 초기에는 공연에 가족들을 초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이 먼저 친구들에게 아빠의 밴드 활동을 자랑할 정도로 가족들의 응원과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황은주 씨도 마찬가지. ‘처음에 조금 하다가 그만두겠지’ 시큰둥한 시선에도 꾸준히 밴드 활동을 해 왔다. 윤도현 콘서트도 흥미없어 하던 아이들은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헤 엄마의 밴드 활동도 좋아하게 됐다. 조현행 씨는 오히려 아내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케이스다. 음악을 하고 싶어 했지만 잘 알지 못했던 그에게 시인인 아내는 노래를 추천하기도 하고,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따끔한(?) 응원도 받으며 활동하고 있다.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아쉬운 점
곳곳에서 많은 축제와 행사가 열리지만, 지역의 문화예술동아리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는 많지 않다. 당장 눈에 보이고 보기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행사가 아닌 진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예술동아리와 호흡하며 지역의 문화예술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는 축제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다.

빌리지앙 밴드협회의 미래
빌리지앙 밴드협회를 기반으로 사회적 기업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바램이다. 그들 자신을 위한 결정인 동시에 지역 문화예술 활성화를 위한 발판이기도 하다. 지금은 모두 각자의 직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은퇴도 슬슬 생각하고 있는 그들이다. 은퇴했을 때쯤에는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음악을 가르쳐주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다. 지금도 청소년을 위해 알음알음 음악 교육을 하고 있지만, 은퇴한 후에는 더 적극적으로 본격적으로 음악과 인생을 연결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에게 빌리지앙은 하나의 동아리를 넘어서 어느새 삶의 일부분 그 자체가 되었기에 빌리지앙 안에서 큰 미래를 그리는 것은 낯설지 않은 계획이다.

☞ 빌리지앙 2016년 9월 7회자 정기연주회 영상 보러 가기

공연하며 엔딩을 막바지에 앞두고 있을 때 드럼 스틱을 날려 당황했던 순간, 공연 중 음향기기가 꺼져서 사회자용 마이크로 노래를 하며 무대를 채워야 했던 순간까지… 이 모든 시간을 함께하며 음악이라는 하나의 관심사로 모인 지 어느새 7년, 이제 그들은 1년에 한 번씩 축제를 열며 세상을 향해 더 큰 미래를 그리고 있다. 10년 그리고 20년 뒤에도 열정적으로 음악을 노래하며 인천을 뜨겁게 달굴 그들의 모습이 기대된다.

글 / 시민기자 오지현




하나의 마음, 하나의 소리- 인하대 동문 합창동아리 ‘인하모니(仁HArm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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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금요일 늦은 저녁, 인적 드문 캠퍼스 안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시끄러운 클럽 음악도, 신나는 밴드 음악이나 힙합도 아닌 서정적인 가사와 아름다운 선율의 가곡. 인하대 동문으로 구성된 합창동아리 ‘인하모니’의 단원들은 매주 금요일 저녁 8시 학교에 모여 목소리를 맞춰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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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빛날 : 2013년도 3월에 처음 모였어요. 학교에 교양 수업으로 ‘합창’, ‘교양 가창’, ‘예술가곡의 이해’ 이렇게 3개의 음악 수업이 있는데, 그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합창단을 만들게 되었어요. 현재는 4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활동하고 있어요. 매 학기 교양 음악수업들이 끝나면 열리는 발표회 때마다 공연을 하고, 교수님 댁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하우스 콘서트를 하기도 해요.

정현정 : 세 개의 음악 수업을 모두 듣고 나서도 노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더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일종의 갈증 같은 것이 있었죠. 함께 수업을 듣고 노래를 했던 사람들끼리 친분이 생기다 보니까 계속해서 함께 노래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졌어요. 마침 수업을 하셨던 조병욱 교수님께서도 합창단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해 주셨고, 그때 시작된 인하모니 활동이 4년째 지속되고 있어요.

단원들의 대부분은 학교를 떠난 졸업생이다. ‘취준생’부터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입사원도 있다. 한 주 동안 이리저리 치여야 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친구와 술 한 잔 기울이며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인 ‘불금(불타는 금요일)’을 포기하고, 인하모니 단원들이 금요일 저녁에 모여 연습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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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지 : 타 지역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대학원에서는 이렇게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하고, 친목을 다질 기회가 많지 않아서 아쉬움이 들었어요. 인하모니 연습이 아니면 학교 밖으로 나올 일이 거의 없기도 하구요. 인하모니를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매주 금요일 다시 인천으로, 학교로 찾아오고 있어요.

최유라 : 졸업하고 취업 준비 중입니다. 아무래도 같은 일상을 반복하게 되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많다보니 고민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게 되죠. 인하모니에 와서 함께 노래하는 시간 동안에는 일상의 생각이나 고민들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연습 때마다 교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들 덕분에 평소에 하던 고민들이 정리가 되고 마음이 편해질 때도 많아요. 힐링이 된다고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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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빛날 : 연습할 때나 무대에 올라섰을 때, 40명의 목소리가 화음으로 딱 맞아 떨어지는 때가 있어요. 인고의 시간을 거치다가(웃음) 가끔씩 한 번 맞는 짜릿함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연습한 보람도 느끼고 즐거워요.

단원 중 한 명은 대전에 있는 직장에 취업해 이사를 갔지만, 금요일마다 퇴근과 동시에 KTX를 타고 인천으로 온다. 결혼 후 육아에 전념하면서도 금요일 저녁만큼은 잠시 엄마로서의 일상을 벗어나 인하모니 연습에 참여하는 단원도 있다. 시간이 나면 참여하고, 바쁘면 안 가고 하는 식이 아니라 의욕적으로 연습과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하모니의 단원들은 이처럼 열정적으로 연습에 참여하는 이유를 지휘자인 조병욱 교수 덕분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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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현 : 처음에는 노래하는 게 좋아서 인하모니에 계속 나오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교수님이 안식년을 가시고 인하모니도 잠시 연습을 쉴 때, 다른 합창동아리를 찾아갔어요. 그 때 인하모니의 특별한 점을 알게 됐죠. 선생님이 음악을 가르쳐주시기도 하지만, 인생에 대해서 조언을 아낌없이 해주세요.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좋은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새길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게 굉장히 크게 다가오더라고요. 연습이 없는 주에는 허전할 때도 있어요.

최유라 : 교수님은 소리가 아니라 마음이 일치해야 하는 것이 노래라고 항상 말씀하세요. 기교나 소리를 낼 수는 있지만 생각과 마음이 일치해야만 나오는 것이 진정한 노래이고 음악이라고요. 돌이켜보면 삶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요. 무언가를 할 때,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와 마음이 일치하는지를 아보게 되거든요. 단순히 합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돌아보고, 삶 속에서 가치가 되는 말씀들을 많이 해주셔서 도움이 많이 돼요.

길범준 :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해왔고 진로도 음악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인문대학을 오게 됐어요. 대학에 와서도 혼자 노래를 만들고, 취미로 피아노를 치는 작업들을 하다가 합창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노래를 하면서 음정을 맞추고, 박자를 맞추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히려 음정이나 박자가 조금 틀릴지언정, 틀려도 다 같이 틀리고 맞아도 다 같이 맞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교수로서 학교 수업을 하고 성악가로서 연주회를 하면서도 인하모니를 비롯한 세 개의 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조병욱 교수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인하모니 단원들을 모으고, 연습을 진행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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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욱 : 수업만으로는 아쉬워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음악을 통해 아이들이 변화하는 모습들이 좋았어요. 아이들이 음악을 통해서 정서를 순화하고 정신을 도야할 수 있는 데에 기여하고 싶었어요. 내가 가진 재능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고 아이들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가진 소명이고 행복이라는 생각이에요.

서정훈 : 20년 후, 나이를 먹고도 인하모니 활동을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노래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건강하고 좋은 마음으로 앞으로도 쭉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바쁜 요즘. 하지만 합창에서 화음을 맞추기 위해서는 내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의 생각, 하나의 마음으로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인하모니의 건강한 노랫소리가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글 / 시민기자 김진아




도서관 이모들, 그림자극을 만나다.- 반딧불이도서관 ‘通通(통통) 그림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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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무거운 책을 들고 도서관을 오가면서 우리 집 바로 앞에 도서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부모님의 핀잔에 도서관이 멀기 때문에 책을 읽기 어렵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정말로 동네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도서관들이 생기고 있다. 바로 작은도서관이다. 작은도서관은 시립도서관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아파트 단지 내, 혹은 상가처럼 지역주민들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주민들의 사랑방이자 마을공동체의 생활문화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인천 남구 용현동 신창아파트 단지 내에도 작은도서관이 하나 있다. 바로 반딧불이 도서관. 이 도서관은 2006년에 개관했으며, 10여명의 지역주민이 자원봉사를 통해 운영하고 있다. 반딧불이 도서관에는 여타 작은도서관과는 다른 조금 특별한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통통그림자극’의 회원들이다. 동네에서 ‘도서관 이모’로 불리는 그들은 도서관을 지키며 동네의 아이들을 만났고, 아이들이 책과 쉽게 만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반딧불이도서관의 관장이기도 한 송은이 씨는 ‘통통그림자극’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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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이 : 저희 회원들은 모두 도서관의 자원활동가들입니자. 도서관에서 자원활동을 하면서 아이들이 책을 보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고민했어요. 다른 도서관 같은 경우에는 독후활동을 많이 하거든요. 평범하고 지루한 독후활동 대신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방법을 고민하다가 그림자극을 알게 되었어요. 도서관에 있는 전래동화 같은 것을 골라서 각색하고, 아이들에게 공연해 주었던 게 시작이었어요.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아이들 3~40명이 앉으면 가득 차는 그야말로 ‘작은’ 도서관에서 그림자극 공연을 열자 도서관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회원들은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보다 전문적으로 공연을 만들어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림자극의 ‘ㄱ’자도 모르던 그들은 남구 평생학습원의 학산콜 프로그램을 통해 그림자극을 배우기 시작했다. 연극 강사가 직접 도서관을 찾아 회원들을 도와주었다. 인천문화재단의 생활문화동아리 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하면서 그림자극은 점점 더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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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애 : 도서관 안에서만 그림자극을 하다가, 학산문화원이 새단장 후 다시 문을 열 때 저희가 초청 공연을 하게 됐어요. 직접 만든 작은 무대에서만 공연을 하다가, 큰 무대에서 마이크를 차고 진짜 조명을 가지고 공연을 하고 나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처음에는 도서관에 있는 탁자 두 개를 엎어놓고 현수막 천을 두르고 테이프를 감아 무대를 만들었어요. 핸드폰 불빛을 조명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집에 굴러다니던 캠핑 랜턴을 사용하기도 했죠. 종이 인형도 처음에는 얇은 종이에 그린 것을 코팅하고 나무젓가락을 붙여 만들었어요. 강사님을 통해 두꺼운 파일지와 스테인레스 철사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인형에 관절을 만들고, 움직임을 표현할 수도 있게 되었죠. 인천문화재단 지원금으로 무대와 조명을 마련하기도 했어요.

이훈희 : 공연을 계속 하다보니 욕심이 생겨요. 도서관이 작아 지금은 아이들만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데,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관람하고 싶어 하는 학부모들도 많거든요. 온 가족이 함께 공연을 볼 수 있는 넓은 공연장도 있었으면 좋겠고, 장비가 많아지다 보니 창고도 필요해졌어요. 더 많은 관객을 만나고, 더 좋은 공연을 만들 방법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어요.

아이들의 엄마로, 주부로, 도서관 자원활동가로, ‘통통그림자극’ 회원으로, 몸이 열 개라도 바쁘지만, 그들은 그림자극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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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 공연이 없을 때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모여 어떤 작품을 어떻게 각색할지 회의를 해요. 공연을 앞두고는 일주일에 서너 번, 주말에도 모이고 밤에도 모이고 계속 모여 준비를 하죠. 직접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오리고. 무대를 만드는 과정이 전부 수작업이기 때문에 힘들 때도 많아요. 공연을 준비하다 손을 다쳐서 한동안 병원에 다니기도 했어요. 힘들지만 완벽하게 공연을 준비하고 싶다는 욕심이 자꾸 생겨요. 가족들도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주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공연을 보는 아이들이 그림자극을 재미있어하고, 그림자극으로 인해 도서관을 친숙한 공간으로 느껴 자주 찾아오게 되는 점이 가장 뿌듯해요. 와서 만화책 한 권을 읽고 가더라도, 아이들이 책과 친해지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죠. 길가다 마주치는 아이들이 “어, 도서관 이모다.”, “그림자극 하는 이모다.”하고 알아봐 줄 때도 기분이 좋아요.

이훈희 : 사실은 우리 아이들이 책과 친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도서관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그림자극도 하게 되었어요. 저희 아이도 어리고 엄마가 이런 활동을 하니까 아이들이 도서관을 함께 자주 오게 되잖아요. 그런데 활동을 하다 보니 동네의 다른 아이들도 만나게 되고, 더 많은 아이들을 위해 활동을 계속 하고 있어요. 우리 아이들이 더 자라서 더 이상 그림자극을 보지 않는 나이가 되어도 다른 아이들을 위해 계속해서 이 활동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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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내 아이가 책과 친해졌으면 하는 개인적인 소망은 엄마를 도서관으로 이끌었고, 내 아이에 한정되어있던 바람들은 동네의 다른 아이들을 위한 것으로 넓어졌다. 깜깜한 무대에 밝은 조명이 켜지고, 알록달록 종이 인형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큰 아파트 단지 안의 작은 도서관은 삭막한 회색도시에 색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꿈은 더 넒은 공연장에서 더 많은 아이들과 지역 주민들을 만나는 것. 작은 반딧불이도서관이 마을 전체를 밝게 빛내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글 / 시민기자 김진아




동네 아이들의 아지트, 동네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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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좋은 일요일, 꾸물꾸물 문화학교 내부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작업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아이들을 위한 아지트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동네 언니들로 이제 막 새롭게 한 걸음 내딛기 시작한 신생 문화예술 동아리이다. 뭐든 함께 만들어나가려고 한다는 신생 동아리, 동네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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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언니들의 시작과 현재

동네언니들은 꾸물꾸물 문화학교를 이끄는 윤종필 교장 선생님의 고민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활동하다 보니 세대차를 겪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나연 씨를 비롯한 꾸물꾸물 문화학교의 청년층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 생겨난 것이 바로 ‘동네언니들’이다. 중학생 때부터 꾸물꾸물 문화학교에 나온 나연 씨를 비롯한 청년층의 주도로 조금 더 젊은 시선으로 청소년과 소통하며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에서 ‘동네언니들’이 탄생했다. 바쁘게 한 주를 보낸 사람들에게 일요일은 황금 같은 휴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일요일마다 모인다. 바로 청소년 친구들 때문이다. 중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학업으로 바쁜 일주일을 보내는 아이들이 주중에 시간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그렇게 치열하게 일주일을 보낸 아이들에게 잠시라도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아지트와 같은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일요일에 모이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인터뷰 당일에도 고등학생 친구들이 나와 동네언니들의 프로젝트를 돕고 있었다.

03가치(같이)테트리스, 동네언니들의 첫 프로젝트
가치프로젝트는 동네언니들 동아리가 꾸물꾸물 학교 내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로 2m의 철골 구조물의 큐브를 자유롭게 재창조하는 작업이다. 동네언니들은 ‘가치테트리스’라는 이름으로 직접 철골 구조물을 꾸미고 이를 채울 수 있는 대형의 테트리스 블록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같이 하며 함께하는 가치를 만들어내자는 이 프로젝트는 준비단계에만 2~3주가 소요되고 기한에 맞춰 3일 만에 제작해야 하는 굉장히 힘든 작업이었다, 그러나 합심해서 하다 보니 사이도 더욱 돈독해지고 제법 그럴싸한 결과물이 나오게 됐다. 이 기간에 꾸물꾸물 문화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커플의 결혼식도 있었다고 한다. 결혼식에 모두 함께 참석하고 다시 돌아와서 정신없이 작업했던 때를 이야기하며 동네언니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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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일상을 되돌아보다, 일상재발견
최근에 동네언니들은 일상재발견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는 기획 단계부터 자체적으로 시작한 첫 프로젝트로 사진을 찍으면서 가까운 일상의 가치를 되돌아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어려워하며 숙제처럼 의무로 사진을 찍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침대 밑의 물건들, 내 주변의 빨간 물건과 같이 사소한 일상을 담다 보니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게 되었고, 사진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동네언니들은 아이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고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자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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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을 넘어 인생을 나누다.
동네언니들은 꾸물꾸물 문화학교 내에서 문화예술교육 외에도 청소년과 다양한 소통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언니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진로를 정하고 대학에 진학한 청소년 친구도 있다고 한다. 이 친구는 현재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면서 동네언니들의 행사나 일정이 있을 때, 사진을 찍어주며 함께 하고 있다. 이외에도 성악을 전공한 동네언니들의 성지 씨 역시 서양화로 전공을 바꿔 가보지 않은 길의 기반을 다져나가고 있다. 동네언니들은 꾸물꾸물 문화학교에서 자신들이 배우고 영향받은 것처럼, 청소년에게도 다양한 문화예술교육 콘텐츠와 함께 자신이 겪은 경험을 나눠서 청소년들이 넓은 시야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한다.

동네언니들, 자신들의 변화
동네언니들 구성원의 대부분은 청소년 시기 꾸물꾸물 문화학교에서 문화예술 교육을 들었던 경험이 있다. 어른이 된 이들은 다시 모여 문화예술기획자로, 멘토로 성장했다. 나연 씨는 동네언니들 활동을 시작하면서 단순히 수업을 듣던 참여자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활동을 하게 되니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전과는 달리 실무부터 결정까지 책임져야하다보니 고민도 많고 의무감과 책임감이 든다는 것이다. 정후 씨는 개인 작업을 주로 하는데, 좀더 열린 시각을 갖게 됐고, 은진 씨는 음악교육이라는 전공을 살려 도움을 주고 있으면서 자신 역시 동네언니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일주일에 2~3번 회의를 위해 모이면서 생활의 중심이 동네언니들로 바뀐 것 같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동네언니들은 올해를 시작으로 발판을 다지고 있다. 운동회부터 성교육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할 예정이며, 이후에는 문화예술교육 역량 강화를 통해 더 다양한 문화예술교육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가능하다면 중장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다. 또한 수치만으로 책정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만들어가는 과정을 쌓아가며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들에게 동네언니들이란?
동네언니들은 그들에게 의미가 크다. 성지 씨에겐 입시 스트레스를 푸는 동시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사회생활이고, 은진 씨에게는 다른 분야의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넓힐 수 있는 기회라고 한다. 미술을 전공하는 정후 씨는 동네언니들을 작업의 일환처럼 느끼면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생활의 중심 같다고 했다. 나연 씨에게 동네언니들은 기획자로서 의무감과 책임감이 막중한 성장통과 같다. 이전까진 화려한 연꽃만 봐왔다면 동네언니들의 활동이야말로 그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 같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누군가가 나의 멘토가 되어주거나 새로운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상대가 되어준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동네언니들은 자신들도 겪은 학창시절의 고단함을 덜어주고 쉬어갈 수 있는 아지트를 만드는 한편, 청소년들에게 세상을 더 넓게 보며 문화예술을 조금 더 친숙하게 받아들일 기회를 주고자 자신의 시간을 기쁘게 활용하고 있었다. 동네언니들이 어느새 생활의 중심이 되어버렸다고 웃으며 말하는 그들이 앞으로 인천을 중심으로 더 많은 청소년과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큰 그림을 그려가며 함께 성장해나가기를 응원한다.

글 / 시민기자 오지현




글과 사진으로 일상을 그리는 글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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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기억을 남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를 쓸 때도 있고, 짧은 메모를 남기기도 한다. 자신들의 생활과 삶을 글로 엮어내며 글을 통한 재미를 찾아가고 있는 글게미 동아리를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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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게미의 시작

글게미는 <사진공간 배다리>에서 시작되었다. 배다리에서 각자 사진 강좌를 들으며 자유롭게 사진을 공부하다 <손바닥 사진책 만들기>라는 강좌를 통해 글쓰기를 접한 것이 글게미 의 시작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모였던 17명의 수강생 중 최종 결과물을 완성한 7명(류태숙 조경연 강종식 장덕윤 이연실 이미옥 신인화)의 수강생이 글을 좀 더 공부해보자는 욕심에 하나로 뭉쳤고, 그렇게 글쓰기 동아리 ‘글게미’가 만들어졌다.

‘글게미’는 서해안 사투리 ‘게미’에서 가져왔다.  게미는 음식의 감칠맛을 뜻하는데 글에 감칠맛을 더한다는 의미와 사진에 글을 더하여 감칠맛을 낸다는 중의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글을 쓰는 사람, 사진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글과 사진을 같이 하는 사람은 적다. 
글게미는 사진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글로, 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사진으로 그들만의 이야기를 표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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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와 새로운 도전, 카드소설
글게미 회원들은 주로 일상의 기억들을 모아 에세이를 쓴다. 매월 1번 모여 각자의 글에 대해 품평하고, 2달에 한 번씩 강좌를 이끌었던 이재은 선생님에게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듣는다. 올해의 글쓰기 키워드는 ‘탈 것’으로 이와 관련해 회원들이 각자 자유롭게 글을 쓰는 중이다. 글쓰기 외에도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또 있다. 바로 연희문학창작촌 <문학, 번지다> 프로젝트 선정작인 <돋보기 없이 읽는 카드소설>이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소설을 시각적으로 보는 것으로도 즐길 수 있도록 시도한 작업이다. 현재 이재은, 이유, 유현수, 황현진 선생님과 기존의 소설을 카드소설화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룬 카드소설을 쓰면서 지도를 받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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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게미 회원들이 쓰는 글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유롭게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글게미의 왕언니인 류태숙 씨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다. 노인이 되어가는 자신의 변화를 다루면서 ‘내가 이렇게 달라지는구나’를 체감하고 있다고 한다. 강종식 씨는 자신의 어렸을 적 향수를 일으키는 소소한 이야기를 쓰고, 장덕윤 씨는 살아가면서 일상적으로 겪을 수 있는 소소한 기억을 기록하는 글을 쓰고 있다. 그때의 감성이나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것들을 사진이나 글로 남긴다고 한다.

에세이를 쓰는 것도 어렵고 힘들었던 그들에게 소설쓰기는 훨씬 더 어렵고 생경한 숙제였다. 카드소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이전까진 글게미 회원들끼리 에세이를 쓰고 서로의 글을 돌려보는 품평회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뤄졌지만, 소설은 또 달랐다. 소설가의 지도 아래 첨삭과 품평을 받는 것조차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고 한다.

글게미로 활동하면서 생긴 변화들
가장 먼저 이야기한 것은 글을 보는 시선에 대한 변화이다. 강종식 씨는 글을 좀 더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어떤 대화를 하거나 글을 쓸 때, 단어나 문장에 좀 더 신경쓰고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동아리 활동 이전부터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던 장덕윤 씨는 의무적으로 글을 쓰다 보니 확실히 실력이 늘었다고 한다. 류태숙 씨도 처음에는 짧은 글을 주로 썼지만, 이제는 긴 문장의 글도 수월하게 쓸 수 있게 됐다. 스마트폰 바탕화면에 노트를 깔아놓고, 순간순간의 감정과 기억을 기록하는 등 글쓰기가 생활화된 것이다.
초창기에는 다른 회원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숙제처럼 글을 썼지만, 쓰다보니 각자의 글을 통해 살면서 겪는 어려움을 토로하고 격려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여유가 생겼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봄과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좀 더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셈이다.

사회에 말걸기
글게미 회원들의 공통점은 이전부터 글에 대한 관심이나 동경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가슴 속으로만 간직했던 것은 배울 수 있는 공간이나 기회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평소 글에 관심이 많던 장덕윤 씨는 예전에 인천에서 글쓰기 강좌를 찾아봤지만 없어서 서울까지 갔다고 한다. 지금도 단기 강좌가 있지만, 인천 내에서 글쓰기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장기적으로 글을 쓸 수 있도록 가르치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다고 이야기했다. 류태숙 씨도 작가들에게 작업 공간을 제공하면서 일반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작업 기회를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글쓰기에 대한 동경과 관심이 있던 만큼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한 작업과 시도가 이뤄지기를 적극적으로 바라는 모습이었다.

글게미의 모토는 ‘같이 가자’ 다. 누구 하나 뒤처지지 말고 함께 하는 것에 가치를 두며 지금처럼 변함없이 글게미로서 활동을 하는 것이 그들의 모토이자 목표이다. 2016년 글게미 동아리의 목표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회원들이 1년 동안 쓴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을 내는 것이며, 두 번째는 사진 전시회다.

속에만 담아오던 내면의 이야기를 꺼내어 글로 풀어내는 것은 사실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글게미 회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들과 글을 쓰고 나누는 것이 어려웠지만, 점차 각자의 내면을 바로 보며, 글과 사진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마음을 열게 된 그들의 시도가 아름다웠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마지막 성취이며,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탈출구인 글게미 안에서 그들의 감칠맛 나는 글쓰기가 계속되기를 응원한다.

글 / 시민기자 오지현




마을과 엄마들이 만났을 때- 동아리 ‘엄마 마음에 그려진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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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2일 금요일 낮 2시, 학산소극장 3층 북카페에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북아트 수업이 열렸다. “에고, 이게 뭐야?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외치는 두더지의 목소리 위로 꺄르르 웃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아이들에게 실감나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사람은 동화구연가도, 연극배우도 아닌 ‘엄마’, 바로 동아리 <엄마 마음에 그려진 마을> 회원들이었다. 회원들은 학산문화원의 북카페를 운영하며 지역사회의 엄마들, 아이들과 만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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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2014년이었다. 엄마들은 학산소극장에서 진행된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엄마 마음에 그려진 마을’에 참가했다. 8개월 동안 진행된 수업에서 엄마들은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연극을 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엄마들이 그린 그림과 만들어낸 연극에는 그들 스스로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수업이 진행되는 긴 시간동안 엄마들은 함께 웃고, 울고, 떠들었다.
“엄마들은 기본적으로 힘든 마음들을 안으로 감추잖아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힘들었던 것, 집안일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힘들었던 것들 등등 많죠. 수업을 하면서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는데, 행복해보였던 엄마들도 사실은 쌓여있던 게 참 많았던 거예요. 그림을 그리고 연극을 하다 보니까 그런 것들이 막 터져 나오더라고요. 함께 웃고 울면서 정이 많이 들었어요.(이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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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들으며, 엄마들은 감춰두었던 자신을 꺼내는 방법을 배웠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지내다보니 속에 있던 이야기들을 꺼내는 일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진행되는 수업 속에서 스스로의 생각, 감정들을 마주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서서히 익혔다.
“줄을 이용해서 진행했던 수업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마음 속 상처, 우울한 감정들을 줄을 이용해서 표현했어요. 줄을 하나씩 잡고 서로 엉키게 만들기도 하고, 당기고 풀기도 하면서 마음속에 엉켜있던 실타래를 잡아당기고 풀어내는 수업이었지요. 수업을 듣기 전에는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어요. 꼭 나서야만 하는 자리가 아니면 뒤에 숨어있고는 했죠. 앞에 나서는 것은 나를 보여주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수업을 들으면서 앞에 나서고 나를 보여주는 일을 꺼리지 않게 되었어요.(장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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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간의 수업이 끝났지만, 엄마들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엄마 마음에 그려진 마을> 회장 이혜숙 씨는 참가했던 엄마들에게 동아리 형태로 모임을 지속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엄마들은 다시 모여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엄마들이 8개월 동안 그린 그림과 썼던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 나왔다. 다시 모인 엄마들은 그냥 모여 떠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졌다.
“처음에는 딱히 무엇을 하겠다는 것보다는 대화를 나누고 친목을 다지는 목적으로 만났어요. 기왕이면 수업을 진행할 때처럼 무언가를 만들고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누군가가 동화책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어요. 작년에는 봄을 주제로 함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책으로 엮었어요. 그 뒤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주제로 시리즈를 만들어보자고 해서 지금은 여름에 대한 동화책을 만드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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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이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이 한몫 했다.
“저희끼리 모여서 만들다보니까, 따로 회비를 걷은 것도 아니어서 재료를 고르다가 ‘오늘은 내가 계산할게.’하는 식으로 활동을 지속하게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책을 한 권만 만들었던 터라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는데, 여럿이서 책을 한 권만 만드니까 나눠서 가질 수도 없고 아쉽더라고요. 도움을 조금 받으면 여러 권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고 알아보던 중에 인천문화재단의 생활문화동아리 지원사업을 알게 되었어요. 처음에 신청한 금액에 비해 적은 금액을 지원받아 계획했던 활동을 수정하게 되어서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함께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엄마들은 지역사회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활동들까지 생각하고 있다. 수업을 들으며 변화된 자신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다. 아이와 함께 삼겹살 김밥을 만들어 지역의 독거노인을 방문하기도 하는 등 각자 지역사회에서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산문화원이 리모델링하여 다시 문을 열 때 북카페의 운영을 맡기로 결심한다. 개관식이 있던 날, 엄마들이 직접 만든 동화책과 다양한 작품들로 전시가 열리기도 했다. 어린이날 즈음 진행된 전시에서 엄마들은 방문하는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직접 카드를 만들고 손편지를 쓸 수 있도록 한 후 전시기간 동안 나무에 손편지를 걸어두고 전시가 끝난 후 우편으로 부쳐주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손수 만든 카드를 받았다.
“북카페를 관리할 사람을 아르바이트로 뽑으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고용하면 시간만큼 돈을 주는 걸로 끝나버리잖아요. 찾아오는 아이들, 엄마들과 함께 소통하고 수업을 진행할 수도 있어서 저희가 관리를 맡게 되었어요. 서로 돌아가면서 정해진 시간에 나와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요. 한 달에 한 번 북아트 수업을 진행하려는 계획도 있구요. 오늘이 그 첫 시간이지요. 예산이 많다면 10회차 정도로 길게 아이들이 직접 동화책을 만들어보는 수업을 진행해보고 싶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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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한다. 엄마는 위대하다고. 하지만 엄마들은 육아와 가사에 치여 집 안에 갇혀 지내고는 한다. 마을은 집에만 갇혀있던 엄마를 불러냈고, 엄마의 마음에는 마을이 그려졌다. 엄마 마음에 그려진 마을은 씨앗이 되어 싹을 틔웠다. 엄마들은 함께 웃고 울고 떠들며 꽃을 피워냈고, 마을에는 엄마 마음에 피어난 꽃의 향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엄마들의 마음이 마을의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씨앗을 만들기를, 그 씨앗이 싹을 틔워 꽃피우고, 마을 전체가 향기로 가득해지기를 기대해본다.

글 / 시민기자 김진아




영화를 좋아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하품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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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마지막 수요일, 아침부터 학산생활문화센터 ‘마당’의 4층 소극장을 찾는 이들이 있다. 더운 날씨에도 이들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고, 직원들은 익숙하게 그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이날은 한 달에 한 번, ‘하품학교 영화감상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날이다. 이 달의 영화는 ‘매드맥스’. 중장년층 이상의 어르신들도 있고, 아이와 함께 온 젊은 어머니까지 관객층이 다양하다. 사실 무료로 영화를 상영하는 곳은 여기 말고도 많은데, 특별히 이 이른 시간에 이곳을 찾게 되는 이유가 궁금했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 하품학교의 민후남 교장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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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부터 2016년까지
하품학교는 학산문화원이 생기고 첫 번째로 만들어진 동아리다. 하품을 하면서 우리의 뇌와 신체가 새로운 활력을 갖게 되듯, 지루한 일상에 영화로 활력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품학교’라는 이름이 탄생했다고 한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하품 나오는 지루한 영화만 보는 게 아닐까’ 오해할 수도 있을텐데, 참 재미있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품학교를 시작으로 학산문화원에 뚜벅뚜벅 남구, 미술관 체험프로그램, 문학기행 등의 다양한 동아리가 만들어졌는데, 그때부터 13년 동안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아리가 바로 하품학교라고 한다. 처음에 하품학교는 매우 적은 인원으로 시작했는데, 민후남 교장이 4번째 회원이었다고 한다. 회원이 된 동기는 간단했다. ‘하품학교’를 알리는 현수막을 보고, ‘하품’이라는 단어가 궁금했다는 것. ‘왜 하품학교인가요?’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다른 회원들도 비슷한 호기심을 안고, 혹은 무료로 영화를 보는 것이 좋아서 하품학교를 찾아오곤 한다. 지금은 200~300여 명이 넘는 많은 사람이 하품학교와 함께 하고 있으니 14년 동안의 성장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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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새로운 시도
기자가 찾은 날, 오전 10시 영화감상 프로그램에 참여한 주민의 수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2016년 여름, 현재 하품학교는 더 많은 주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중이다. 학산문화생활센터 ‘마당’으로 이전하면서 저녁 7시에서 오전 10시로 시간을 바꿨기 때문이다. 노년층이나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 등 저녁 시간 참여가 어려운 분들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오전으로 영화감상 프로그램 시간대를 바꿔서 운영한 지 3개월째, 노년층 관객들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이날 만난 관람객은 “영화를 보는 것이 즐거워서 장소를 옮겼음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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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품학교가 영화를 즐기는 방법
하품학교는 언제나 누구나 쉽게 영화를 보고 싶을 때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시도한 프로그램이 바로 ‘하품학교 영화감상 프로그램’이다. 오전에만 시간이 나는 주민들을 위해 영화를 상영하고 영화가 끝나면 평론가가 영화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그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함께 가지는 것이다. 하품학교에서 오래 활동한 회원들은 보다 깊게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데, 그런 공간이 또 있다. 바로 평화시장에 위치한 하품학교 분교이다. 1년 정도 된 이곳에서 하품학교 회원들과 주민들이 함께 어울려 영화를 즐긴다고 한다. 이렇게 두 개의 센터를 운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천 곳곳에서 더 많은 주민이 가볍게 혹은 깊이 있게 원하는 대로 영화를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20대부터 80대까지 영화로 소통하다
하품학교의 회원 연령층은 매우 다양한데,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영화’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20대 대학생부터 영화가 유일한 취미였던 80대 노년층까지 영화를 보고 각자의 시각에 따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굉장히 흥미롭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관람했을 때, 나이에 따라 반응이 특히 도드라졌다고 한다. 같은 영화를 관람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누는 이 과정에서 젊은 회원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고, 중장년층 이상의 회원들은 젊은이들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한 토론으로 시작했지만 개인의 삶을 토로할 수 있는 시간으로 바뀌기도 한다.

하품학교의 한 해 마무리, 하품영화제
하품영화제는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하품학교의 축제로 2004년부터 시작, 올해 13회를 앞두고 있다. 초기에는 주제와 키워드를 선정하고 그에 맞는 기존 영화를 상영함으로써 더 많은 주민과 영화를 함께 본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 영화를 직접 만들어보자는 욕심과 열의가 커졌고, 회원들이 뜻을 모아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회원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만든 작품은 개막식에서 상영되며, 하품영화제의 시작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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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에서 감독으로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만드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비전문가인 하품학교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들은 매년 작품을 만들고, 영화제에 올리고 있다. 봄부터 주제와 키워드를 선정하고 시나리오 작업과 촬영을 한다. 진행 스탭, 연기하는 배우, 편집 작업까지 모두 회원들이 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3분 이내의 짧은 다큐멘터리 혹은 영화가 되어 하품영화제의 개막식을 빛내고 있다. 회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다루는 경우도 있다. 민후남 교장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두 편이 있다. 첫 번째는 몸이 아픈 아버지, 철부지 동생과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난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자기 자신이 큰딸로 연기하면서 마음은 아팠지만, 더욱 실감나게 연기를 할 수 있었다고. 두 번째는 딸이 시집 가기 전 둘이 떠난 여행을 영상으로 남겼던 다큐멘터리다. 나래이션 녹음을 하면서 눈물을 쏟던 그녀를 바라보던 회원들까지 감정에 이입해 함께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고… 이처럼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서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한편, 자신들의 작은 영화제를 알차게 만들어가고 있다.

편안하고 언제나 찾을 수 있는 곳, 하품학교
민후남 교장은 하품학교에 바라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저 자신처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언제나 편안하게 오래오래 영화를 볼 수 있는 또 주민들에게 더 많은 영화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은 게 다라고 한다. 그녀에게 하품학교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듯,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공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작은 바램이다.

하품학교는 처음에는 그냥 순수하게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이 모인 작은 동아리였다. 지금은 300여 명이 넘는 회원들과 함께 영화를 즐기고 제작까지 하는 모임으로 성장했다. 많은 사람이 쉽게 영화를 볼 수 있는 하품학교 영화감상 프로그램, 좀 더 진지하게 영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평화시장 분교, 1년의 결실을 공유하는 하품영화제까지 하품학교는 인천의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을 위해 영화를 중심에 놓고 고민과 도전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그 결과 어떤 사람은 한 달에 한 번 즐겁게 영화를 보는 여유를 갖게 됐고, 어떤 이는 새롭게 자신의 꿈을 발견하고 영화감독이 됐다. 2004년 작은 시도로 시작된 하품학교가 바꾸는 인천을 기대해본다.

글 / 시민기자 오지현




서흥초 기타동아리-너랑나랑 기타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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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요일 저녁,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텅 빈 초등학교. 조용하던 음악실에 환한 불이 켜졌다. 아름다운 통기타 선율이 흐르고,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더해진다. 인천 동구에 위치한 서흥초등학교에는 학부모와 지역주민이 함께하는 기타동아리가 있다. 앙증맞은 책상과 의자에 앉아, 귀여운 그림이 가득한 칠판을 배경으로 기타를 연주하는 그들을 만나보았다. 시작은 작년이었다. 서흥초등학교가 행복배움학교(인천형 혁신학교)로 지정되면서, 학부모 회장인 이정휘 씨는 학교를 아이들과 선생님만의 배움터가 아니라 학부모들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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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휘 : 학부모 동아리를 만들고 활성화하기 위해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어요. 직장 생활을 하시는 학부모님들도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을 찾다보니 기타를 배워보자는 결론이 나왔죠. 학부모 대상이라고 하면 제한적인 부분이 있어 마을공동체의 느낌으로, 지역주민들도 참여하고, 우리 학교를 졸업한 친구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어요.

아이들의 엄마로, 주부 또는 직장맘으로 자신만의 시간 없이 바쁘게 지내던 그들은 하나 둘씩 기타동아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동희: 학급의 학부모 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학부모회장 언니가 내미는 동의서를 받게 되었어요. 올해 3월에 신학기가 되고 뒤늦게 합류했어요. 원래는 악기를 다뤄본 적도 없는데 여기에 와서 처음 하게 된 거죠. 늦게 합류한 만큼 따라잡고 싶어서 다른 멤버들을 많이 괴롭혔어요. 옆에 언니들이 귀찮은 기색 없이 잘 가르쳐주고 도와주셔서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이애경 : 예전에 기타를 배웠었어요. 20대 때, 신포 지하상가 끝에 있는 악기점에서 악기를 사면 강습을 해주고는 했었죠. 그렇게 잠깐 기타를 배웠는데 시간이 지나니 기타를 배우거나 쳐 볼 기회가 아예 없는 거예요. 오래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학교에서 학부모 동아리를 만든다고 해서 참여하게 되었어요.

정영선 : 큰 아이가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기타를 하나 장만했는데, 아이가 금방 질려하면서 기타가 잠자고 있게 된 거예요. 마침 학교에서 기타를 가르쳐주고 함께 연습한다고 해서, 악기의 ‘악’자도 모르지만 용기를 내서 참여하게 되었어요.

차연정 :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웠는데, 원해서 다닌 게 아니라 엄마의 강요로 다니다보니 흥미가 없었어요. 음악을 즐겼다기보다는 억지로 다녔던 거죠. 그동안 기타를 배우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 돼서 못 배우다가 마침 저녁에 수업을 한다고 해서 찾게 되었어요. 노래를 듣고 부르고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편인데, 기타수업과 함께 음악을 즐기면서 힐링을 하고 있어요. 또, 아이도 기타를 배우고 있는데 ‘너만 해라.’ 강요하는 게 아니라 같이 배우는 입장이 되니 서로 마음도 이해할 수 있고 이야기 거리도 많아지고 해서 대화가 편해진 것 같아요.

한준희 : 초등학교를 다닐 때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기타반도 있었는데, 중학교에 올라간 이후에 기타가 멋있고 재밌어 보였어요. 마침 엄마가 학부모 기타동아리 활동을 시작하면서, 같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제안하셔서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녀들은 무언가를 배우고 자신들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게 일주일에 한 번, 이 시간뿐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시간을 내서 참여하게 된다고 말했다. 익숙하지 않은 악기를 다루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에게 화도 나지만, 연습 끝에 함께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낼 수 있는 데에 희열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모일 수 있는 이유는 단지 기타나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함께 모여 기타를 연습하는 시간은 친한 언니, 동생들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만든 데에는 기타반 강사 박수희 씨의 역할이 한 몫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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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희
: 저도 기타를 본격적으로 배운 지는 10년째에요. 지금 동아리 참여하는 분들의 나이에 시작을 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늦게 시작한 셈이죠. 그때도 강좌를 들으면서 시작했는데, 동아리의 형태로 함께 묶이니까 그 멤버들과 1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기타를 치게 되었어요.배다리에서 기타교실을 열었었는데, 서흥초의 김창진 선생님께서 그 소식을 듣고 학부모 기타동아리의 강사가 되어주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어요. 이전에 방과후학교 강사로 수업을 진행했던 경험이 있는데, 기대했던 것과는 차이가 많았어요. 수업을 듣는 아이들도 즐거워서 하기보다는 마지못해 오는 아이들이 많았고, 선생님들이 방과후 강사를 섭외하고 수업을 만드는 과정을 주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해 소홀히 하거나 강사를 배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학교는 달랐어요. 시스템도 훨씬 좋고 참여하시는 분들도 진짜 좋아서 오시는 분들이어서 저도 가르친다는 생각보다는 동아리의 일원으로 즐겁게 참여하고 있어요. 사실 소음을 발생시키는 동아리의 경우 공간을 마련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지원을 받기도 어렵고, 우리만의 공간을 가지려면 임대료도 드니까요. 공간 마련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학교가 지역주민들에게 공간을 나누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특히 초등학교는 정말 가까이들 있잖아요. 하지만 학교가 동네 주민들하고 너무 격리되어있고, 문을 딱 걸어잠그고 열어주지 않으니까 아쉬웠는데 학교에서 이 수업을 제안해주었고, 학교와 지역주민 간에 교류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흔쾌히 오게 되었어요.

서흥초 학부모가 아닌 지역주민 김혜례 씨도 활발하게 참여하는 동아리 멤버 중 한 명이다.

김혜례 : 친한 동생의 소개로 참여하게 되었어요. 제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손님으로 오던 동생이 미용실에 있는 기타를 보고 치냐고 묻기에 폼으로 갖다 놓은 거라고 대답을 했죠, 그랬더니 학교에서 기타 수업을 듣고 있는데, 함께 해보지 않겠냐고 묻더라고요. 고 1때 옆집 오빠가 기타를 치는 모습을 보고 그게 너무 멋있어서 아빠에게 기타를 사달라고 졸라 얻어낸 기타였어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 기타가 너무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제가 잘 치지 않아 동생이 가지고 있었는데, 다시 돌려달라고 부탁을 했죠. 수요일이 미용실 쉬는 날이라 매주 참여하고 있어요.

올해로 두 해 째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기타동아리는 무대에 서서 다른 사람들에게 연주를 들려주는 것도 계획 중이다.

이정휘 : 11월 즈음에 학교 학예회가 있어요. 아이들 동아리 발표회인데 학부모들도 함께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있어요. 작년에는 학부모 합창 공연을 했는데, 올해는 기타동아리 공연을 목표로 연습 중이에요. 또, 동구청에서 ‘나들이 강좌’라고 해서 수업을 열면 수강료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올해 저희 동아리가 선정됐거든요. 10월 즈음 선정된 동아리들의 발표회가 있는데, 그 무대에도 설 예정이에요.

정금선 : 저는 저질 체력이기도 하고, 아이가 세 명이라 아이들 학원시간에 맞춰 집에 데려다주고 바로 수업에 오려면 힘들기도 해요. 하지만 연습하면 할수록 욕심이 나요. 하이코드를 잡아보고 싶다는 욕심도 나고, 11월에 있는 학예회 때도 사람들에게 엄마들이 이렇게 기타도 친다는 것을 보여주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주를 해보고 싶어요.

엄마로, 아내로만 사는 삶에 지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취미로 시작했던 기타는 그녀들의 일상을 하나둘씩 바꾸기 시작했고, 더 멋진 엄마, 더 멋진 아내,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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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 우리 아이가 어버이날에 편지를 썼는데, 엄마를 ‘기타 잘 치는 사람’이라고 써왔더라고요. 평상시에 기타 연습을 하는 모습이 아이에게 좋게 보였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학교에 있는 기타로 연습을 했는데, 한번 수업을 듣고 일주일이 지난 후에 다시 오면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더라고요. 20년 전 창고에 넣어두었던 기타가 떠올라서 집에 연락했더니, 다행히도 아직 기타가 있어서 다시 가지고 온 날부터 이를 악물고 연습을 했어요. 그런 모습을 아이도 자랑스러워 해주니까 더 자신감이 붙더라구요.

장동희 :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는데, 그러다 보니 저희 아이도 저와 똑같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이가 2학년이 되고부터 학부모 모임에도 조금씩 참여를 하기로 결심했고, 동아리 활동도 시작하게 되었어요. 아이들이 1학년일 때부터 이어져 온 학부모 모임에 뒤늦게 합류하다 보니 겉도는 느낌이 많았는데, 동아리에서는 가족처럼, 언니, 동생처럼 챙겨주니까 재미있게 활동을 하고 있어요. 언니들도 그렇고 선생님도 그렇고 용기를 많이 주시니까 더 열심히 연습하고 활동하게 돼요.

이춘화 : 남편이 브라질에 있는데, 12월에 한국에 들어와요. 기타를 배우면서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남편이 전화로 “기타 잘 배우고 있냐”고 물어봐 줄 때면 더 열심히 해서 한국에 들어왔을 때 연주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같이 활동하는 분들이 잘 끌어주고 계셔서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함께 해야겠다 싶구요.

자신의 이름 대신 ‘진영 엄마’, ‘희진 엄마’로 불리기 일쑤인 엄마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 그들의 이름을 듣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곳 기타동아리에서는 모두가 서로를 서로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매 시간마다 출석부를 부르고, 새로운 사람이 올 때마다 자기소개를 하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는 사람들. 기타를 잡으며 엄마나 아내가 아닌 스스로를 다시 찾아가고 있는 그들의 행복한 웃음이 앞으로도 끊이지 않기를 바란다.

글 / 시민기자 김진아




함께하는 업사이클링으로 세상을 바꾸다 – 모두랑 업사이클링 공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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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사이클링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업사이클링(Up-cyling)은 upgrade + recycling의 합성어로 기존의 리사이클링보다 한층 더 발전된 보다 더 적극적인 환경보호 활동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폐소방호스로 가방을 만드는 것처럼 기존의 물건을 새롭게 재탄생시켜 다시 한 번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효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에 제 2의 삶을 다시 주는 것이죠. 인천, 특히 부평을 중심으로 가죽, 한지 등을 활용하여 업사이클링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모두랑 업사이클링 공작소〉를 이끄는 가죽공예가 홍정기 씨입니다. 업사이클링뿐만 아니라 지역 활성화를 위해 24시간 쉼없이 뛰고 있는 그를 삼산1동 주민센터에서 만나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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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홍정기 씨가 생각하는 업사이클링은 무엇인가요?
A. 간단하게 말하면, 업사이클링은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버려지는 제품을 자원으로써 다시 한 번 재활용하는 차원을 넘어서 실용성과 디자인을 더해서 그 자원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고 이끌어내는 작업입니다.

Q. 업사이클링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A.
가죽을 활용할 때는 정형화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가죽을 쓰는데, 제품의 본을 뜨고 남은 가죽은 대부분 처분해야 합니다. 상처도 있고 주름도 있고 농장에서 찍은 마크도 있어서 어떻게 보면 더는 상품으로 쓸 수 없는 가죽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처리 비용이 만만치 않아요. 상품을 많이 만드는 가죽 소파 공장은 1년 동안 6백만 원에서 최대 1천만 원까지 비용이 드는데, 비용 부담이 상당합니다. 가죽공장 입장에선 막대한 처리비용의 부담을 덜고, 우리는 가죽을 선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가죽은 한 번 더 사용하자 하는 취지였습니다. 회의감이 들어서 인조가죽을 만들어보기도 했고, 그나마 만들어지는 가죽을 최대한 활용해보자해서 업사이클링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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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공작소에서는 어떤 종류의 업사이클링을 하나요?
A. 가죽은 물론이고 다른 강사들과 함께 한지공예도 하고 비누, 초 같은 것도 만듭니다. 한지를 활용해서 가구를 만드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분들도 남은 한지가 아까워서 가지고 계시지만 실제로 활용하지 않고 결국 다 버리게 됩니다. 이런 한지들을 활용해서 손거울이나 명함 케이스 같은 소품을 만들기도 하고, 손거울을 만들 때 보통은 두꺼운 종이를 본으로 쓰는데 이것 또한 버려진 폐목을 재활용하는 겁니다. 비누는 호텔에서 사용하는 일회용 비누들을 다시 녹여서 재활용하고, 초도 비누처럼 사용하던 초를 다시 녹여서 재활용하는 데 음료수 캔이나 다 쓴 병에 넣어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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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런 강습이 자주 있나요?
A. 본업으로 가죽공예 강의를 한 건 10년 정도 되고 복지관이나 돌봄 교실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건 5년 정도 됩니다. 주민센터나 구청, 학교, 노인정 등에 가서 재능기부 차원에서 강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군대 내에서 진행하는 경우도 있고, 다양한 곳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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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업사이클링 강습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처음엔 혼자 직접 만든 업사이클링 작품을 작품 1개당 천원도 안 하는 가격으로 저렴하게 판매했고, 판매를 통해 얻은 수익은 기부했습니다. 업사이클링을 알리는 활동을 하면서 기부도 하자는 목적이었죠. 하지만 혼자서 업사이클링을 알리는 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체감해서 강습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Q. 작품 전시회도 할 텐데 기억에 남는 경험을 하신 적이 있나요?
A. 가죽공예가로서 개인 전시회는 꾸준히 열지만, 강습 전시회는 정기적으로 진행하지 않고 있어요. 전시회를 진행하려면, 수강생들이 전시회 비용을 함께 부담해야 해서 모든 수강생의 의견을 취합해야 하기 때문이죠. 정기적인 전시회는 열지 않고 결과 발표회처럼 진행하는 편입니다. 서울에 놀러왔다가 우연히 내 전시회를 찾은 제주도 청년이 있었는데, 가죽공예를 배우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실제로 그 청년은 제주도와 인천을 오가며 가죽공예를 배웠고, 제주도에서 가죽공예 일을 하게 됐어요. 전시를 보러 왔다가 학교에서 수업을 해달라고 부탁했던 선생님도 있었어요. 강남에 있는 학교라 거리도 멀고 청소년 수업은 진행해본 적이 없어서 망설였지만, 선생님의 부탁에 강습을 하게 됐죠. 그걸 계기로 청소년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고, 중학교 이상의 청소년들과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전시가 맺어준 신기한 인연들이죠. 
 
6Q. 업사이클링 강습을 진행하면서 보람을 많이 느끼시겠어요.
A. 처음에는 업사이클링을 알리기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데서 큰 보람을 느꼈는데 지금은 소소한 곳에서 뿌듯함을 느끼고 있어요. 예를 들면, 어렸을 때 업사이클링을 배웠던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 같은 거죠. 친구들에게 업사이클링을 소개하고 자신감있게 이야기하는 걸 보면 보람을 느껴요. 가족 간의 소통 부재를 업사이클링으로 극복하고 변화한 가족도 만났어요. 아이와 엄마가 각각 수업을 들었는데 서로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알게 된 후에 대화의 소재가 생겼다고 해요. 맞벌이 가정이라 어려운 부분이 많았는데 이 기회를 계기로 부모와 자녀 간에 대화도 많아지고 더 친밀해졌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작지만 소소하게 일어나는 변화들이 주는 힘 덕에 계속해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Q. 고민스러운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A. 재정적인 부담이 있죠. 인천문화재단에 지원을 신청하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구요. 인근학교와 주민센터 등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대부분 재능기부로 하고 있어요. 재료비를 받을 때도 있지만, 공작소에서 가져오는 재료로 수업을 하다보니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행히 올해에는 재단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업사이클링 이외에도 지역 활동으로 청년문화상점의 고문 이사부터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업사이클링, 지역 활동, 가죽공예까지 하루가 바쁩니다.
  
Q. 직접 만드신 업사이클링 작품은 얼마나 되나요? 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A.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만드는 것도 의미있지만, 한 가지를 진화시키는 형태를 좋아하다보니 작품 수는 20여개 정도로 많지는 않습니다. 본업이자 주된 활동이 가죽공예여서 그런지 소파 제작용 가죽을 활용해 만드는 작품에 가장 애착이 갑니다. 작품을 만들 때, 중요하게 여기는 포인트는 작품을 단순하게 만드는 겁니다. 멋도 시각적인 차원에서 중요하지만, 멋보다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여깁니다.

‘수적천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물방울이라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단단한 돌을 뚫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죽공예가 홍정기 씨의 작은 고민에서 시작한 업사이클링은 본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줬습니다. 어떤 이는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되었고 어떤 이는 가족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까요. 홍정기 씨 또한 가죽공예가이며 업사이클링 선생님인 동시에 인천과 부평의 발전을 위해 활동하는 지역 활동가이자 기획가라는 다양한 모습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입니다. 혼자 작품을 만들어 판매하며 작게 시작한 업사이클링이라는 작은 물방울은 한 방울에서 멈추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을 바꾸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나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물방울은 무엇일까?

인터뷰 진행 및 정리 / 시민기자 오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