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공원에서의 단상(斷想)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유공원을 걷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저의 일터인 인천문화재단은 응봉산 자락 자유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동장군이 물러가고 봄이 찾아온 요즈음, 저는 점심 식사 후 운동 겸해서 종종 자유공원에 오를 때가 있습니다. 아직은 다소 쌀쌀한 바람도 불고, 미세먼지의 심술궂은 방해도 있지만 그래도 봄날 자유공원의 풍경은 한가롭고 편안합니다.

공원 여기저기 모여서 담소와 장기로 시간을 보내시는 어르신들, 점심시간 잠시 짬을 내어 아메리카노 한 잔의 여유를 갖는 주변 직장인들, 손 꼭 잡고 데이트를 즐기는 다정한 연인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외국인 관광객들까지….자유공원을 찾으면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그런 일상의 모습에서 저는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데 요새 찾은 자유공원은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자유공원이 가진 역사적 배경과 관계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다시피 올해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3.1운동으로 우리 민족이 독립을 당장 성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3.1운동이라는 전민족적 항거를 통해 독립의 의지를 더욱 결집할 수 있었고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국내외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습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대한국민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한 임시정부 중 한성정부가 있습니다. 한성정부가 중요한 것은 당시 한반도 내에 수립된 유일한 임시정부였다는 것입니다. 1919년 4월 23일 수립된 한성정부는 그해 9월 수립되는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구심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성정부는 인천 특히, 자유공원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 대회가 개최된 곳이 만국공원, 바로 지금의 자유공원이기 때문입니다. 13도 대표자들은 1919년 4월 2일 만국공원에 모여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후 4월 23일 서울 국민대회에서 한성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죠.

우리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모체가 되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성정부 계승을 통해 통합 임시정부가 되었고, 한성정부가 태동한 곳이 바로 만국공원 즉, 오늘날의 자유공원인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현장인 자유공원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올해에는 평소보다 더 의미 깊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자유공원은 100년 전 민족적 에너지의 결집이 이루어진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우국지사들은 민족의 앞날을 고민했고, 임시정부의 수립을 통해 3.1운동의 기운을 이어가려고 했습니다. 자유공원은 독립을 위한 민족의 통합을 상징하는 공간인 것입니다. 인천시민들에게도 자유공원의 역사적 의미를 알릴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자유공원이 과연 통합의 공간일까요?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자유공원은 통합의 공간보다는 갈등과 분열의 공간으로 더 기억되고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로 갈린 우리 사회 갈등의 표본이었습니다.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에 얽힌 문제 때문입니다.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하자는 쪽과 동상을 지키자는 쪽의 대립은 자유공원에서 실제 충돌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지난해에는 동상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각자 나름의 이유는 있겠죠. 우리 근현대사의 갈등과 아픔, 특히 6.25라는 커다란 비극이 얽힌 복잡한 문제입니다. 간단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100년 전 통합의 공간이었던 곳이 오늘날에는 분열의 공간이 되었다는 것은 저의 마음 한편을 아프게 합니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올해, 자유공원이 분열과 갈등을 넘어 통합과 평화의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도 저는 점심시간 자유공원을 걷습니다. 여기저기 일상의 모습들은 여전합니다. 멀리 보이는 월미도의 풍경도 아름답습니다. 맥아더 장군 동상 앞을 지납니다. 동상은 말없이 서 있습니다. 제목은 ‘단상(斷想)’이라고 했는데 생각이 길고 복잡해졌네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글 · 사진/ 안홍민(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우리 모두의 꿈틀거림을 위해

작가 오연호의 <새로운 100년,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출처] 인천문화재단 홈페이지

봄기운이 서서히 찾아드는 3월 14일 저녁, 인천시민문화대학 하늬바람 봄 특강으로 작가이자 오마이뉴스 대표 그리고 꿈틀리 인생학교의 교사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 오연호의 <새로운 100년,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가 진행되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앞으로 다가올 우리의 새로운 100년이 보다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바라며 본 강연을 기획하였다는 작가. ‘나를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할 때 행복사회가 온다.’는 삶의 철학이 담긴 강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김지인

‘왜 하필 덴마크인가?’
오연호 작가는 덴마크 사회에 푹 빠져, 수 없이 덴마크를 방문하고 그들 사회에서 우리가 배울 점을 찾고 돌아왔다. 유엔 세계행복보고서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뽑힌 나라가 바로 덴마크라고 한다. 덴마크를 비롯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은 행복지수 세계 1위를 앞다투어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북유럽 국가들은 왜 행복한가? 그 비결은 바로 ‘내가 행복하려면 내 주변도 행복해야 한다.’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삶의 철학이다.
행복국가 덴마크에는 2가지 징표가 있다고 한다. 학생들은 어릴 때의 밝은 표정이 고삼 때까지도 이어지고, 어른들은 일하는 주중에도 쉬는 주말에도 항상 행복한 것이 바로 그것.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오연호 작가는 덴마크의 행복 키워드를 ‘자유/안정/평등/신뢰/이웃/환경​’이라고 요약 정리하여 제시하였다. 이 평범하고 당연한 키워드들이 사회에 진정으로 정착되어 행복한 국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 김지인

‘스스로 선택하니 즐겁다!’
덴마크의 숲 유치원에는 유치원에서 생활하는 시간 동안 어떤 프로그램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영수 위주의 선행은 금지되며, 아이들 스스로 놀이를 만들고 함께 부딪히면서 그 속에서 자유롭게 성장해 나간다. 만들어지고 주어진 것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자율적으로 성장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이미 우리나라 옛 시골 공동체에서 익히 보던 모습이다(심지어 그때는 선생님조차도 없었다). 지금의 우리 아이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주 가치 있던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 아닐까?
스스로 선택하니 즐겁다는 말, 참으로 당연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당연한 일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해야 하는 의무들이 넘쳐나고, 스스로 즐겁게 선택하는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들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잠시도 돌아볼 여유 없이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다. 작가가 전한 ‘오늘도 내 삶이 아닌 엄마의 삶을 산다.’는 어느 초등학생의 말, ‘덴마크의 학생들은 야생마 같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은 오로지 앞만 보며 달리는 경주마 같다.’는 한 고등학생의 이야기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한 어른으로서 마음이 많이 아프고, 우리 사회의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1등급이 아니면 항상 주눅 들어야 하는 학생들, 심지어는 다행스럽게 1등급에 들어 소위 최고라 하는 명문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조차 상당수가 여전히 자신의 삶에 자신이 없고 우울함을 호소한다고 하니 확실히 오늘날 우리 사회는 크게 병들어 있으며 결코 행복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행복할 권리를 평등하게 가질 수 있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우리가 소위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소수가 아닌, 다양한 모습으로 저마다의 위치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행복할 권리를 가진 것이다. 소수 10%만이 행복하고 그들만이 이끌어가는 사회는 결국 공멸할 수밖에 없다며 작가는 경고한다. 이 시점에서 작가는 행복사회 3대 복지를 강조한다.

1. 쉬었다 가도 괜찮아
2. 다른 길로 가도 괜찮아
3. 지금 이미 잘 하지 않아도 괜찮아​

덴마크의 250곳 이상에서 시행 중인 놀라운 제도 중 한 가지인 ‘애프터스콜레(Efterskole)’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 1~2년 동안 자신의 적성 및 흥미를 찾아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한다(작가가 함께하는 꿈틀리 인생학교에서는 이를 이미 시행하고 있는 중). 더 멀리 제대로 가기 위해 잠시 쉬어도 괜찮고, 남들과 조금 다른 새로운 길로 가도 괜찮다. 잘 하지 않고 부족하더라도 모두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사회. 각기 다른 누구나 당당하고 즐거울 수 있는 사회.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사회일 것이다.

물론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에도 극심한 인종차별 등 사회의 문제점이 없지는 않다. 다소 문제점은 있을지라도 작가가 오늘 우리에게 소개한 북유럽 국가들의 인생철학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결핍된 것들로, 우리가 꼭 다시 기억하고 우리 사회를 위해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모두 이미 알고 있는 것들. 그러나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며, 어떻게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냐며 우리가 어느 순간 단념해버린 것들. 작가는 오늘 강연을 통해 우리에게 그것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자 하였을 것이다.
한때 실패가 영원한 실패로 남지 않도록, 잘하지 못해도 서로 끌어주고 도와줄 수 있는 따뜻하고 안정감 있는 사회를 위해 우리 스스로가 먼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나 혼자만 행복한 사회가 아닌 내 주변도 함께 행복한 사회, 모두가 건강하고 함께 갈 수 있는 사회를 위해 오늘 이 순간 나부터 작은 꿈틀댐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글 · 사진 시민기자단 김지인




지역문화전문인력 심화과정 <극한 인천X짠! 내 기획> 사업설명회

지난 3월 22일 금요일에 한국근대문학관 3층 교육연구실에서 지역문화전문인력 심화과정 <극한 인천X짠!내 기획> 사업설명회가 개최되었다. 지역문화전문인력 과정은 인천문화재단 정책연구팀이 주최하여 2017년에 처음 선보였으며 1, 2기 총 36명의 교육생이 기초과정을 수료하였다.

1, 2기 기초과정에서는 지역과 문화예술에 대한 기본 이론교육을 시작으로 지역 문화인력과 유관 단체 사이에 네트워크를 위해 지역에 활동하는 기획자와의 만남과 지역 내 문화공간 탐방 등의 과정을 진행하였다.
올해는 심화과정을 맞이하여 현장 중심의 심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기초과정보다 한 단계 향상된 교육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번 과정은 교육생들이 약 5개월 동안 여러 교육 및 실습을 거쳐 지역 문화를 이해하고 전문인력으로서 역량을 향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심화과정에서는 기초과정과 달리 진행 멘토가 교육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교육생과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진행 멘토는 ‘문화용역’의 주성진 대표와 ‘몬스터레코드’의 이강민 대표가 맡게 되었다.

1기에서는 공연, 전시, 생활문화, 문화예술교육 장르로 나누어 장르 기반의 문화 기획 교육을 진행하였다. 교육과정으로 이론교육, 기획 실습, 실무교육, 선진사례 탐방, 분과별 프로젝트 진행 및 발표 등이 있었다. 2기에서는 1기 교육에 대한 피드백을 반영하여 교육과정을 보완하였다. 1기의 교육 기간이 짧았다는 의견을 반영하여 교육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렸다. 또한, 장르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모든 분야를 총괄하여 기획을 선보이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론과 인천 현장연계 교육, 기획과정 교육, 선배 멘토와 프로젝트 진행, 해외사례 탐방 등의 과정을 진행하였다.
올해 진행되는 심화과정에서는 1, 2기 교육생을 포함하여 문화 기획에 경험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진행한다. 기존 강의 형식의 수업에서 벗어나서 함께 지역 문제를 고민하고 기획을 만들어 실행하는 토론중심의 학습 과정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2기와 마찬가지로 이론과 현장 연계, 해외 탐방 등의 과정이 있지만, 2기보다는 실습과 토론 위주의 수업 비율이 높아질 것이다.

또한, 이번 심화과정은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지원양식에서도 1, 2기와 다른 뚜렷한 차이를 볼 수 있다. 기존에 기재해야 했던 경력과 경험, 자격 등의 형식적인 지원 항목을 없애고 지원자의 기본 인적사항 외에 지원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자유롭게 적는 양식으로 바뀌었다. 틀에 맞춰 짜인 듯한 기획이 아니라, 기획자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펼치는 기획을 돕고자 하는 취지가 담겨있다.

올해는 4월 13일과 14일에 진행하는 오리엔테이션을 시작으로 멘토와 교육생이 함께 지역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이후에는 약 5개의 팀을 구성하여 파일럿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이 중 1~3개를 추려 최종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또한, 개별 혹은 팀별로 작은 프로젝트가 필요한 경우 심사 후 별도로 지원할 예정이다.


지역문화전문인력 심화과정은 3월 15일부터 3월 27일 18시까지 접수된 서류를 심사한 후, 4월 3일에 그룹 면접을 거쳐 4월 5일 최종 합격자를 발표한다. 심사 기준으로는 지원자의 역량 및 잠재력, 문화 기획 수행역량, 지역에 대한 이해 등이 있다. 이 외에 자세한 사항은 인천문화재단 홈페이지(자세한 내용 보러가기 ▶) 공지사항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글 김다솔(시민기자단)
사진 정책연구팀




배다리 헌책방 거리 속 갤러리 <살롱 드 배다리>

배다리 헌책방 거리의 길을 밟다 보니 갤러리 <살롱 드 배다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위치다. 갤러리는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던 주변의 책방들과 어우러져 외부에서부터 정겨운 분위기가 뿜어져 나온다. 게다가 그곳에는 공간이 지닌 특성을 살린 문화예술 프로그램의 향기가 짙게 난다.
아트 미니 슈퍼 기획단과 사진공간 배다리, Contents Factory가 주최하는 <살롱 드 배다리>는 1전시관과 2전시관 두 곳으로 이루었다. 1전시관은 사진 공간 배다리 갤러리로, 2전시관은 ’구집현전‘서점인 헌책방 공간을 빌린 갤러리로 꾸며졌다. 두 전시관 모두 참여 작가들의 회화, 사진, 조각, 설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다양한 장르를 감상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아트 미니 슈퍼로 진행되는 중저가 플리마켓을 통해 전시물을 소장할 수 있어서 색다른 경험이라 할 수 있겠다.


1전시관에 들어가 갤러리 모퉁이를 도니 기획자와 작가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살롱 드 배다리>의 참여 작가이자 갤러리 기획을 한 이호진 기획자를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호진 기획자로부터 갤러리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갤러리의 외부를 보고 나서 공간에 대한 관심이 더욱이 있던 찰나에 궁금증이 이내 풀렸고 갤러리의 주제와 취지마저 들을 수 있었다. “<살롱 드 배다리>는 역사와 의미가 담긴 지역 문화공간에서 진행되는 갤러리라서 다양성을 가진 의미 있는 전시입니다. 헌책방이라는 공간이 가진 매력과 아트마켓이 합쳐져 <살롱 드 배다리>라는 갤러리의 이름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관람자는 의미있는 공간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전시물을 소장할 수 있다면 작가는 다양한 활동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갤러리입니다. 이것이 살롱 드 배다리의 취지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장소와 취지 모두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갤러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전시관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갤러리의 조명이 흥을 돋우며 반기는 알록달록한 작품이었다. 평소에 흔히 볼 수 있는 설탕을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익숙함이 특별함으로 거듭난 작품이다. 설탕 설치작품을 제작한 권보미 참여 작가가 직접 작품을 설명하고, 눈으로만 감상하던 작품을 실제로 먹을 수 있어 더욱더 흥미로웠다. 또한, 작품 속에 있는 설탕 조각을 아트마켓에서도 판매하고 있었다. 아트 마켓에서 가장 부담 없이 소장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1전시관의 벽은 대부분 사진 작품으로 채워졌다. 벽을 따라 늘어진 사진 작품들이 상상력을 생생하게 자극하였다. 사진의 색감 기법과 배경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잠시 사진 속 상황으로 인도하는 것 같다. 갤러리에 방문한 관람객들도 사진 속 순간의 감정을 함께 공유해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일상에서 한 번쯤 접하는 순간이라서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거라고 짐작해본다.
‘코디3’이라는 예명을 사용한 작가의 작품은 참신하고 재밌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역동적인 모습을 표현한 흑백 회화 작품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하다. 제목과 함께 한층 어우러진 기법들이 신선했다.
한 공간에 서로 다른 장르들이 모여 있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평소에 전시회를 손쉽게 접하지만, 이번처럼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한눈에 볼 기회는 흔하지 않은 것 같다.

1전시관에서 나와 몇 걸음 이동해 2전시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1전시관 보다는 소규모인 2전시관은 철사를 용접해 만든 조각 전시부터 다양한 회화 작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2전시관에서는 ‘구 집현전’서점 공간의 벽을 그대로 남긴 채 대체로 화려한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호진 기획자는 “벽이 주는 오래된 느낌과 회화가 주는 다채로운 느낌이 만나 새로운 인상을 받는다며, 정형화된 갤러리 공간보다 지역사회에서 전시를 열 때 작품의 친근감이 조성됩니다.”라고 말을 덧붙였다.
전시 환경에 따른 작품들의 구성이 효과적인 듯하였다. 집현전 서점의 벽 공간을 빌린 다채로운 작품들이 다른 장소에 설치되기만 해도 마치 새 작품을 볼 것 같았다.

기존에 우리가 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에서 아트페어와 플리마켓을 흔히 볼 수 있으나, 인천 <살롱 드 배다리>만이 가진 특성은 그들과 분명히 차별화된다. 지역 소규모 마켓으로 쉽고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람객 누구나 작가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이러한 점이 <살롱 드 배다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이유이다.

실제로 이호진 기획자와 계속해서 이어진 대화를 통해 <살롱 드 배다리>에 대한 주민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러한 전시가 자주 있기를 바라는 주민들의 반응을 살펴보았을 때 <살롱 드 배다리>의 궁극적인 취지가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장르의 작품을 친근하게 감상할 기회가 흔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이호진 기획자는 주민들이 작품을 공감하고 그 가치를 이해하며 소장할 수 있는 컬렉터가 되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밝혔다.

동네 배다리 헌책방 거리에 위치한 <살롱 드 배다리>는 문화예술을 접하고자 하는 주민들에게는 더욱더 좋은 위치이다. 문화예술의 역사를 보존하고 있는 배다리 헌책방 거리를 거닐다 잠시 갤러리에서 쉬어 가는 것은 어떨까? 접근성이 좋고 소박한 <살롱 드 배다리>전시관은 앞으로도 주민들의 발걸음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살롱 드 배다리의 작품들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2월 23일부터 열린 살롱 드 배다리는 3월 23일까지 한 달간 계속 진행될 예정이다.

글 · 사진 시민기자단 김다혜




제 10회 인천개항박물관 기획전 <인천 중구 개항장에서의 만세함성>

전시 기간: 2019. 3. 1~5. 31 (월요일 휴관)
관람 시간 : 09:00 – 18:00
@ 인천개항박물관 기획전시실

영상 시민기자단 김유라




남북학술교류의 현황과 전망 학술 세미나 현장 스케치

지난 2019년 1월 17일 중국 연변대학교 정경일 역사학부 교수가 인천문화재단에 방문해 “남북학술교류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작은 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남북학술교류를 말하는데 왜 느닷없이 연변대학교인지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연변대학교는 중국내에서 북한과 가장 활발하게 교류하는 대학 중 하나이다. 남북화해시대를 맞아 인천문화재단, 경기문화재단, 연변대학교 조선반도연구원은 상호 협약을 맺고 작년부터 임진·예성 포럼을 창설하고 향후 북한과 교류를 준비하고 있다. 정경일 교수는 재단 방문과 더불어 이번 학술 세미나를 통해 연변대학교의 북한 유적 연구 성과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경일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연변대학교는 2008년부터 2018년까지 북한경내 유적을 11차례 조사했다. 거의 매년 북한 유적을 조사했다고 볼 수 있는 수치다. 주로 낙랑무덤, 발해유적, 고구려성곽, 고구려무덤, 고려 문화유산과 광개토왕릉비 탁본 촬영 등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지리적으로 북한 지역에 분포했던 국가들의 유적이 대부분이다. 쉽게 갈 수 없는 북한의 역사유적이기 때문에 지난 발표는 큰 의미를 가진다.
특히 이번 발표에서는 국내에서 공개된 적 없는 황해북도 봉산군 천덕리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소용돌이 문양이 발견된 것을 소개하기도 했다. 정경일 교수의 발표는 아직 보고서로 공식 발표되지 않은 사진들도 다수 포함하고 있었다. 요새 뜨거운 감자인 남북 관계를 의식해서인지 방송국, 신문 촬영기자들도 많이 참석했으며 실제로 당일 KBS 9시 뉴스에 이번 학술 세미나를 비중 있게 다뤘다.

또한 연변대학교 역사학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 촬영도 했다. 개성역사유적지구는 강화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유적과 연계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이 많다. 이는 강화에 남아 있는 고려 왕릉을 개성에 있는 고려 왕릉과 함께 연계유적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연변대학교는 북한의 문화유적을 드나들며 조사할 수 있는데, 남한에 있는 우리는 북한에 밀집된 고구려, 발해, 고려의 유적을 직접 가볼 수가 없다. 고구려, 발해, 고려 등의 연구자라면 북한에 분포한 실제 유적지를 꼭 한 번씩 가볼 것을 꿈꿔볼 것이다.
이전보다 남북 관계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자유롭게 가볼 수 없는 곳이 바로 북한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한 개성 만월대 발굴이 공식적으로는 거의 유일한 조사인데, 이것도 정권의 성격에 따라 부침이 심했다. 언제쯤 안정적인 상황에서 남북 공동 발굴이든 합동 조사든 이루어질 수 있을까.
연변대학교는 자유롭게 북한을 방문하여 유적 조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연변대학교와의 교류는 큰 의미를 지닌다. 앞으로 남북 관계가 좀 더 완화되어 남쪽에서도 직접 북한을 자유롭게 왕래하여 북한의 문화유산을 조사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글·사진 홍인희(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여성독립운동가 김란사의 삶을 그려내다, 음악극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올해 인천에서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였다. 그중 음악극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은 12년 만에 선보이는 인천시립예술단(교향악단, 합창단, 무용단, 극단)의 3번째 창작 합동공연으로 1여 년간의 긴 제작 기간을 거친 끝에 완성되었다. 특히 하나의 창작극을 4개의 예술단이 함께 무대를 준비하는 것은 드문 일이기에 어떤 공연이 될지 더욱이 기대가 컸다. 덕분에 3월 1일부터 3일까지 준비한 세 차례의 공연은 모두 매진을 이뤘다.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의 작품 배경은 1900년대로, 우리에게 익숙한 유관순의 이화학당 스승이자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헌신했던 여성독립운동가 김란사가 주인공이 되어 작품을 이끌었다. 당시에는 남녀노소 관계없이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고, 그중 여성들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속에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압받고 차별받았던 현실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여성독립 운동가는 밖으로 외세에 끊임없이 맞서고, 안으로는 인권 증진과 여성 해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러한 사실들이 기록에서 빠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 중 여성은 2.3%인 357명뿐이다. 이 공연에서 조명했던 김란사는 고종의 밀사로 국제회의에 파견될 만큼 뛰어난 독립지사이자 조선 여성을 위해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유관순을 비롯한 많은 학생에게 독립정신을 불어넣은 교육가로 활동하였으나 뚜렷한 그녀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70여 년이 흐른 뒤에야 독립운동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이번 공연은 독립운동가로서 그녀의 삶을 보여주었는데, 서사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보다는 사건별로 축약하여 장면별로 상황을 잘 표현했다. 극 중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은 두꺼비로 표현했다면, 일제의 손에 넣고자 했지만 결국 손에 넣을 수 없었던 조선은 거대한 고래로 상징하여 시각적인 이해를 도왔다. 실제로 그녀가 외쳤던 “어두운 세상을 향해 등불을 들어라”라는 말에서는 등불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장면을 구성하기도 했다. 또한, 김란사가 판서하는 장면에서는 무대 배경에 강조하고 싶은 단어를 영상으로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몰입도 있는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김란사를 돕기 위해 스승의 모습으로 분장한 제자들의 모습이다. 함께 무대를 뛰어다니다가 마지막에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장면이 무엇보다 인상 깊었다. 만세를 부르고 나서 조명이 꺼졌을 때, 극이 끝나지 않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주인공은 김란사였으나, 그녀를 돕기 위해 애쓰는 많은 여학생들과 기생독립단, 여성 의병단 등의 모습을 통해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절실한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총 1시간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독립운동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바탕으로, 자칫 어렵거나 지루하게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와 합창을 통해 관객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에 더해 장면마다 바뀌는 무대 배경과 화려한 안무는 시선을 뗄 수 없게 한다. 또한, 주인공인 김란사의 역할을 한 명의 배우가 맡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각기 다른 배우가 연기하면서 더욱 현실적이고 입체적으로 인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8세 이상 관람가로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쉬웠다. 배우들이 뛰어난 연기로 인해 재밌게 공연을 관람했으나 한편으로는 그 저변에 깔린 역사적 사실들이 마음에 묵직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을 보면서 100년 전, 이 땅 위에 살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거리에서 태극기를 들고 목숨 걸고 만세를 외쳤을 수많은 사람의 용기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고, 뭉클했다. 그 시대에 독립을 목 놓아 외치던 사람들이 그리던 우리나라의 100년 후 모습은 지금과 같았을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을까?

글 시민기자단 김지연
사진 인천문화예술회관 제공




주름의 깊이 만큼 그곳을 마주하다

3월이 시작되자마자 봄이 온 듯 기온이 올랐다. 따뜻한 봄기운을 맞으며 방문한 곳은 우리미술관 전시관이었다. 마을의 작은 미술관. 지도를 찍고 찾아갔지만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마치 집을 찾아가듯 좁은 골목으로 한 걸음 다가가서야 보이는 작은 동네 미술관이었다.

이곳에서 류성환 작가의 <부두-도시인물>을 주제로 2019년 첫 기획전시를 하고 있었다. 만석동 주민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마련한 이번 전시회는 초상화와 풍경화 등 총 22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인천은 익숙하면서도 만석동은 낯설다. 전시를 둘러보고 나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될 것이다, 주변에 있는 그래서 자세히 보지 않는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 동네의 풍경을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이 있었던가.

이번 전시의 류성환 작가는 인천 동구에서 무료 초상화를 그리는 일로 이곳 만석동과의 인연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만석동 골목길 이곳저곳을 다니며 주민들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자 했던 그의 마음이 그림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듯했다,

할머니의 굽은 어깨와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지는 할아버지의 깊이 파인 주름이 마음에 콕 박혔다. 아마도 초상화의 모델은 처음일 그분들의 수줍은 모습까지 그대로 전해져왔다. 그런가 하면 전시관 가장 안쪽 가장 큰 공간을 할애하여 걸려있는 부두를 찾은 사람들의 모습은 다른 그림과 달랐다. 작가가 전시장에서 캔버스를 걸어두고 챠콜로 작업해서인지 그 생생함이 진하게 전해졌다.

이번 전시는 3월 29일까지 진행한다고 한다. 글과 펜은 필요 없다. 인물의 얼굴에서 눈빛에서 고스란히 느껴지는 지역의 역사와 삶을 마음으로 이해하면 충분하다. 퇴근하다, 집에 오는 길에, 버스정류장 가는 길에 들어가 숨 한 번 고르고 갈만한 우리 동네 사랑방, 그야말로 작고 알찬 동네 전시관이었다.

글 · 사진  임중빈(문화통신3.0 시민기자단)

<부두-도시인물> 류성환 전
전시 기간 : 2019.02.22.-3.29.
관람시간 : 화, 수, 금, 토, 일 10:00~18:00 / 목 14:00~18:00
장소 : 우리미술관
주최 · 주관 : 인천문화재단, 우리미술관




독립의 횃불, 인천에서 타오르다

3·1운동 100주년 인천 만세운동 재현행사

올해는 3·1운동이 100주년 되는 의미 있는 해이다. 인천시도 3월 곳곳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가 벌어졌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3·1운동에 있어서 인천지역은 빼놓을 수 없다. 100년 전 서울에서 시작된 항일독립운동이 인천을 비롯한 전국으로 퍼졌듯이 올해 그 뜻과 의미를 기리기 위해 서울에서 시작된 3·1 만세운동 재현 전국 릴레이<독립의 횃불>은 3월 2일 인천으로 이어졌다.

독립의 횃불 카드뉴스 – 인천
출처 : 국가보훈처 공식포스트

조선시대 소시장으로 유명했던 황어장터는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인천지역의 대표 시장이었다. 장날이었던 기미년 3월 24일 오후 2시경 이곳 황어장터에서는 심혁성 애국지사를 비롯한 600여 명이 일제에 항거하며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친일기관을 응징하고 일본 경찰과 대치하는 투쟁을 이어갔는데 이는 강서지방에서 벌어진 가장 대대적인 만세운동이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 기념탑
© 이정민

독립의 횃불
© 이정민

100년이 지난 이곳 오후 2시에는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이 담긴 횃불이 도착한다. 독립의 횃불이 행사장으로 오는 동안 계양구 청소년들이 직접 기획한 3·1 만세운동 <기억>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퍼포먼스를 보며 어린나이임에도 만세운동에 참여했었을 조상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하였다.

3·1 만세운동 <기억> 퍼포먼스
© 이정민

이날 행사에는 무엇보다 심혁성 애국지사의 직계손이 참여하여 그 의미를 더했고 인천시민 300여 명과 계양구청장, 계양문화원장 그리고 인천보훈지청장 등이 참석하여 행사의 뜻을 기렸다.

독립의 횃불 인수
© 이정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의 횃불은 행사장에 참여한 모든 시민과 함께 행진하였다. 흰색 복장을 한 사람부터 그 뒤를 잇는 평상복 차림의 일반 시민까지. 긴 행렬 속에서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모습은 정말 뭉클한 광경이었다.

인천 만세행진
© 이정민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인천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역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며 인천지역에 있는 보훈시설에 방문하기를 추천하며 글을 마친다.

※ 인천지역의 독립운동 관련 현충시설
– 3.1독립만세운동인천지역발상지기념비 (현 창영초등학교)
– 3·1독립만세기념비
– 강화3.1독립운동기념비 (용흥궁 공원 내)
– 기미 3.1독립만세 기념비 (덕적초등학교 옆)
–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장기동)

글 · 사진 이정민(문화통신 3.0 시민기자단)

 




궁궐 조정에 깔린 석모도 박석 이야기

경복궁 근정전 마당에 깔린 박석

조선시대 궁궐 정전이나 어도(御道)에는 두께가 얇고 넓적한 박석(礡石)이 깔려있다. 박석은 건물 외부 바닥을 포장하는 부재로, 경복궁 근정전의 마당인 조정(朝廷)에 깔린 박석은 거칠게 다듬어져 햇빛으로 인한 눈부심을 줄여주었다. 또한 표면이 거칠어 미끄러운 가죽신을 신은 대신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었으며, 비가 오면 자연스럽게 배수가 되도록 하였다. 박석의 자연스러운 형태와 여러 기능들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했던 조선의 건축에 어울리는 훌륭한 부재였다.

조선시대 궁궐 공사 때 사용된 석재는 돌의 중량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채석하려 했다. 1667년 종묘 영녕전 수리 때는 서울 외곽의 조계산에서 채석하였고. 18세기 궁궐 공사 때는 창의문 밖이나 남산 아래 인근에서 채석했다고 한다. 또는 민간에서 석재를 구입하거나 민간의 가옥 철거 시 나온 석재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민간의 석재는 대부분 작고 열악해서 궁궐 등에 사용하기는 부적합했다고 한다. 궁궐 공사 때 사용한 다양한 용도의 석재들은 서울 가까운 곳에서 얻었지만, 바닥에 깔리는 박석은 인천의 강화 석모도와 해주에서 채석한 것만 사용하였는데, 특히 강화 석모도 박석을 사용하였다.

1647년(인조 25) 창덕궁 공사 때 사용된 박석은 모두 강화도에서 채석되었고, 1906년 경운궁 중건을 비롯해 20세기 초 대한제국 시절에 진행된 공사에도 석모도에서 채석한 박석을 사용하였다.

강희언, <돌깨기>,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채석작업은 먼저 암석을 덮은 표토를 괭이와 삽, 가래 등으로 걷어낸 뒤, 돌을 떠낼 위치를 먹줄로 선을 그어 표시했다. 그리고 정(釘)으로 구멍을 뚫고, 정보다 굵은 비김쇠[쐐기]를 그 구멍에 끼워 쇠로 만든 큰 망치로 내려쳐 돌을 떠낸다. 돌을 떠내는 과정은 18세기에 제작된 강희언(姜熙彦, 1738-1784)의 〈돌깨기〉를 통해 확인된다. 그림을 통해 보면 두 명의 석공이 한 조가 되어 작업을 진행한다. 좌측의 석공이 돌을 떠낼 위치에 정을 세워 위치를 잡고, 파편이 튈까 봐 얼굴을 돌리고 있다. 맞은편 젊은 석공이 쇠망치로 내려치는 모습이다.

채석된 석재는 석공으로 하여금 떠낸 곳에서 다듬어 무게를 줄여 실어 나르도록 했다. 일정한 형태의 크기로 다듬는 초련, 정교한 형태의 부재로 다듬어 모양을 내는 재련을 거쳤다.

석모도에서 채취된 석재들은 어떻게 도성까지 갈 수 있었을까.

강화도의 서쪽에 위치한 석모도에서, 수운을 통해 한강 유역을 비롯해 한반도 중앙부까지도 접근할 수 있었다. 석재는 용산강(龍山江, 용산)에 하역하여, 수레에 싣고 남대문을 통과하여 도성의 공사장에 이르렀다.
겨울에는 얼음 위에서 썰매로 운송하였고, 육지에서는 마차를 사용하거나 소가 끄는 달구지를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중량이 많이 나가는 석재는 높은 마차에 싣기가 어려워 바퀴가 낮은 수레를 이용했다. 육로 운송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도로의 상태 점검이었다. 운송이 이루어지기 전 도로를 점검하고 요철이 있는 부분을 보수한 후 운송이 시작되었다. 궁궐의 출입문과 요철이 있는 길은 문턱 부분에 흙이나 모래를 부어 길을 평탄하게 한 뒤 이동하였다. 이동된 석재들을 해당 장소에 배치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다듬어 공사를 완성하였다.

박석은 궁궐 정전처럼 위상이 높은 건축공간에 한정한 부재였다. 심지어 경회루에 박석을 까는 것조차 꺼렸다고 하니 박석이 깔린 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밖에도 석모도 박석은 궁궐뿐 아니라 강화 돈대축조에도 사용이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까지 구들장에 사용되었으며, 오늘날 문화재수리에 사용되는 박석도 석모도에서 채석됐다. 2008년 광화문 복원공사, 2009년 숭례문 복구공사가 바로 대표적인 경우이다. 석모도 채석장 위치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의 해명산이다. 한 번쯤 방문하여 채석하던 옛 모습을 그려보면 어떨까.

해명산 표지석

글·사진 이정화(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