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추억이 된 나의 동네여! <이진우의 열우물 연작-안녕?!>

[출처] 우리미술관 홈페이지

인천 만석동 달동네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괭이부리말 아이들’로 익히 알려진 만석동의 한 골목 안쪽에는 작은 규모의 ‘우리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있다. 이곳 우리미술관에서는 5월 22일부터 6월 18일까지 <이진우의 열우물연작-안녕?!>이 전시되고 있다. 사라진 동네 열우물마을에 대한 아쉬움과 애정이 물씬 묻어져 마음이 따뜻해지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옛날 우리 동네 열우물마을, 안녕!’
이번 전시는 1995년부터 부평 십정동에 위치한 열우물마을에서 기거하고 미술 작업을 진행하던 서양화가이자 동네 화가인 이진우 작가의 열우물마을을 기리는 다양한 미술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진우 작가는 변두리에 위치하고 덜 개발되어 위험한 마을이라고 알려진 열우물마을을 공공미술 프로젝트와 벽화 작업을 통해 인식을 변화시키고, 마을 자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2017년 이후 열우물마을은 재개발 작업이 진행되면서 현재는 예전의 모습들은 모두 잃은 채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 중이다. 작가는 수채화, 펜화 등의 기법을 사용하여 2000년대 초반부터 2018년까지 그려온 열우물마을의 모습들을 선보인다. 비좁고 낮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들, 그 사이사이에서 엿볼 수 있는 주민들의 소박한 생활 풍경 등을 작가의 애정 어린 눈으로 따뜻하게 담아냈으며, 개발 바람이 불면서 점차 마을이 해체되고 주민들이 갈등을 겪는 모습도 작품으로 보여준다. 작품 관람을 마치고 나면 마을의 소박한 풍경부터 개발의 과정,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마을의 모습까지 작가가 이곳에서 함께하면서 보고 겪었던 일련의 과정을 통해 열우물마을에 가보지 않은 사람조차도 마을의 추억에 함께 젖어 들게 된다.

‘만석동 주민들의 문화사랑방, 우리미술관’
<우리미술관>은 이번 작품의 전시장소로 제격인 듯싶다. 우리미술관이 위치한 동구 만석동은 십정동의 열우물마을 처럼 빈집이 많고 개발이 덜 되어 다소 낙후된 곳으로 문화 인프라가 많이 부족하다. 이러한 지역에 빈집 두 곳을 헐어 만석동 주민들이 예술 활동에 참여하고, 다양한 작가들이 함께 작업하는 공간을 만든 것이 바로 우리미술관이다. 인천시의 유일한 시립미술관으로써 등록된 미술관은 아니지만, 인천의 지역성과 예술성을 가진 작은 미술관은 만석동의 사랑방 역할을 돈독히 하고 있다. 비슷한 마을 상황을 견주어 보았을 때, 열우물마을을 추억하는 장소로써 더 없이 적격이라 생각된다.

‘이제는 사라졌지만, 오랫동안 기억될 행복한 마을’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지역개발의 홍수 속에 열우물마을과 같이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사라질 많은 마을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미래를 향하는 희망과 이제는 모든 것이 한때로 기억될 수많은 아쉬움 속에 이 모든 복잡한 감정들을 감당해야 함은 필연적인 일일 터. 그런데도 사라진 옛 모습을 이렇게 아름답고 정겹게 그리워하는, 그리고 이를 함께 기억하는 누군가를 가진 열우물마을은 참으로 행복한 마을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진우의 열우물연작-안녕?>展을 통해 불현듯 내가 나고 자랐던 옛 동네를 떠올리며 이런저런 추억들을 꺼내 보게 되었다. 열우물마을의 추억을 통해 나만의 추억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글 · 사진 / 김지인(시민기자단)




오늘만은 내가 거리의 예술인

인천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 아트플랫폼에서 지난 주말 <IAP 스트릿 아트 페스티벌>이 개최하였다. 늦봄과 초여름 그 사이를 맞이하는 계절과 함께 야외공연이 열려 기분까지 덩달아 고조된다. 이번 행사를 들뜬 마음으로 들러보았다.

축제 장소로 진입하자마자 버블쇼, 인형극 등 다양한 예술 퍼포먼스가 아트플랫폼의 거리를 꽉 채웠다. 선선한 바람과 적당한 햇빛은 배경이 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그 자체로 거리의 아트였다. 인천에서 문화를 충분히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뿌듯함을 느꼈다.

한 공연당 30분 내외로 총 8개의 공연이 2번씩 진행되기 때문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방문했다면 모든 공연을 차례대로 볼 수 있다. 이쪽 거리에서 저쪽 거리로 옮겨 다니면서 공연을 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움직이는 관객의 모습은 하나의 거리 퍼포먼스처럼 보였다. 그만큼 정형화된 무대가 아닌 앞과 뒤로 나눌 수 없는 마당놀이 같은 분위기의 거리극이 관객과 호흡하는 공연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

내 마음 가는 대로 바닥에 예술혼을 불태우는 아이들의 분필아트를 보고 있자니, 집에서 늘 ‘여기도 안돼! 저기도 안돼!’, “안돼.” 만을 말하던 어른들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했다. 안될 것이 전혀 없는 이곳 거리에서 바닥에 마음대로 그려대는 그림은 마치 피카소와 같았다.

다양한 공연과 함께 상설체험으로 진행되는 분필아트, 전동카트체험, 막대인형만들기 등 페스티벌에 진입하는 순간 몸이 반응하고 눈이 돌아간다. 지겨울 틈 없는 공간 속에서 그 순간만큼은 거리의 예술인이 될 수 있었다.

<IAP 스트릿 아트페스티벌>은 6.8~9일까지 단 2일간의 축제로 마무리가 되었다. 아쉬울 만큼 훌륭한 거리극과 다양한 체험이 가득했던 페스티벌을 자주 또 다양한 곳에서 개최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다음을 손꼽아 기다리게 만든다.

글 · 사진 / 임중빈 (시민기자단)




《No Matter, Paste》

<No Matter, Paste>는 어렵고 난해하다고 여겨지는 추상미술을 ‘틀과 반죽’이라는 개념으로 재해석한 기획 전시이다. 이 전시는 지난해 9월 서울 문래동에 있는 공간 사일삼에서 처음 선보인 후, 올해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에서 주관하는 2019년 ‘미술창작 전시공간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 올해는 5월 25일부터 7월 14일까지 인천 트라이보울 3층에서 진행되며, 추상미술 작가인 문이삭, 심혜린, 이승찬 작가가 참여하였다.

추상미술이란 20세기 후반의 미술을 일컫는 현대미술 중 한 장르로, 작품들이 어떠한 대상의 형상이 아니라, 점, 선, 면, 색깔과 같은 요소로만 표현된다. 때문에,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내용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작품을 보면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특징으로 볼 때 추상미술은 그야말로 ‘추상적(抽象的, 어떤 사물이 직접 경험하거나 지각할 수 있는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갖추고 있지 않은. 또는 그런 것)’인 미술이다.
때문에 많은 관람객이 추상미술을 즐기기 위해서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의미나 작품에 쓰인 표현 기법 등의 설명을 듣는 시간이 필요하다. 전시는 금, 토, 일요일 오후 2시와 3시에 열리는 도슨트 프로그램을 통해 이러한 시간을 풍부하게 마련하였다. 나는 현대미술에 한 발짝 가까워지고 싶어 도슨트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트라이보울 3층에 도착하여 전시장을 눈으로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전시는 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내가 바로 알아차릴 만큼 특이한 점이 두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공간의 특이점이다.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미술관의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대부분 흰색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작품을 걸어놓는 사각형 공간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의 공간은 전형적인 미술관의 모습에서 벗어나 트라이보울의 공간 특성에 맞게 변화를 주었다.
두 번째 특이한 점은 추상미술 작품 제작 과정을 ‘틀에 맞게 반죽을 하여 빵이 빚어지는 과정’에 비유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빵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도슨트 프로그램 시간이 되자 2층 안내데스크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프로그램 진행자는 윤태웅 작가가 맡았다. 윤 작가는 이 전시가 ‘작가들이 현대미술의 발전으로 변형된 정보와 이미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창작하고 있는지’, ‘기술과 미술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전시장 환경 조건에 따라 작가들의 작품이 어떻게 변형되는지’ 등을 보여주는 전시라고 설명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도슨트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관람객들을 3층 전시장으로 안내하였다.

이승찬 작가

작가는 프린터기로 출력된 그림들이 작가가 손으로 그리는 그림보다 훨씬 매끄럽고 다양한 색채로 표현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승찬 작가는 발전된 기술에서 나오는 이미지와 사람의 손으로 나오는 이미지의 차이를 위해서 작가가 어떻게 이미지를 다루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창작 활동을 하였다.
이 작가의 창작 과정은 매우 특이하다. 웹사이트에서 본인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눈을 수집한 후 2D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대형 출판용 프린터기로 출력한다. 이후 출력본에 물감을 덧바르며 캐릭터 눈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함으로써, 캐릭터의 눈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변화되어 예측 불가한 이미지를 작품에 녹여낸다.
이승찬 작가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벽에 걸었던 기존의 작품 형태와 달리, 공간 특성에 맞게 비교적 형태의 변형이 자유로운 천 소재에 자신의 그림을 표현하였다.

문이삭 작가

문 작가는 3D 프린터기, 아크릴판 커팅 기계 등의 프로세스를 모방하여 창작하였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조각의 형태를 미리 설계한 후 자신을 기계라고 생각하고 머릿속에 설계 데이터를 입력한다. 이후 도면 없이 머릿속의 데이터만으로 조각 작품을 만든다. 문 작가의 작품은 기계가 만든 조각 작품보다 어설픈, 치수가 어긋나고 형태가 고르지 못한 것이 특징이다.
문 작가 또한 이승찬 작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작품을 전시장 환경에 맞춰 변형하였다. 기존의 3D 작품을 의자 표면 안으로 집어넣는 방식으로 설치하여, 위에서 보면 마치 의자 표면과 같이 평면의 형태로 보인다. 또한, 기존에 전시했던 작품과 이번 전시장에 맞춰 새롭게 만든 작품을 실로 연결해놓았는데, 이는 두 개의 작품이 ‘하나(하나의 형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심혜린 작가

심 작가는 어떤 정보를 받아들일 때 자신의 의식이 과잉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는 같은 시간에 움직이지 않는 신체와 대비된다. 작가는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느라 힘든 자신의 의식을 내려놓는 대신 가만히 있던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도형들을 몸이 움직이는 대로 하나하나씩 캔버스에 표현하였다.
위 사진의 작품은 화려하고 강렬한 색이 많이 쓰였는데, 이는 작가가 복잡하고 정신없는 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심 작가 또한 다른 두 작가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작품을 트라이보울 공간의 특성을 반영하여 변형시켰다. 기존에는 벽에 걸 수 있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해당 공간에는 평평한 벽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캔버스의 모양에 변화를 주었다.

세 명의 작가는 이 전시에서 기술의 틀에 반죽한 작품과 공간(전시장)의 틀에 반죽한 작품을 선보였다. 나는 이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각자 자신만의 시각으로 작품을 해석함으로써 자신만의 틀에 작품을 반죽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미술은 작품의 내용이나 결과보다 제작 과정을 중요시한다고 한다. <No Matter, Paste> 역시 이러한 현대미술의 양상을 잘 보여주는 전시이다.
6월 16일 오후 2시에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전시 기획자의 의도를 담은 조각 워크숍 <틀, 반죽, 틀, 반죽>을 진행한다. 이 워크숍은 문이삭 작가와 함께 러시아 전통인형 ‘마트료시카’를 만들어보는 체험 워크숍으로, 예술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현대미술의 제작 과정에 참여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글 · 사진 / 김다솔 (시민기자단)




인천과 요코하마, 두 항구도시의 특별한 영화관을 만나다

한국의 인천과 일본의 요코하마, 두 도시는 공통점이 많은 지역이다. 지리적으로 두 국가의 수도와 인접하였으며 역사적으로 근대 개항이 가장 먼저 일어난 항구도시로 근대건축물과 철도 등 근대유산이 많이 남아있다.
그뿐만 아니라 대표적 관광지로 차이나타운과 야구가 유명하다. 이처럼 데칼코마니 같은 모습을 가진 두 곳에 모두 특별한 영화관이 있는데, 바로 인천의 예술극장 ‘미림’과 요코하마의 ‘잭앤베티’이다. 두 영화관이 폭넓게 교류하는 설레는 현장을 이번 글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관련 포스터

6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간 진행된 ‘잭앤베티&미림 동시상영’ 전 행사는 두 극장에서 선정된 작품과 배리어프리영화 그리고 초청감독 오키타 슈이치의 영화가 미림극장 1층에서 상영되었고 2층 행사장에서는 3가지 주제를 가진 문화예술포럼이 진행되었다. 3층 전시관에서는 특별전시 <동시상영>이 6월 말까지 진행된다.

추억극장 미림 전경

단순히 영화관의 기능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의 문화예술공간으로써 역할을 고민하고 발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포럼이 특히나 기대되었다. 3일 차 주제인 ‘지역(시민) 문화예술공간으로써의 예술영화관 활용과 예술가(단체)의 역할’ 포럼에는 인천에 문화 관련 패널과 요코하마의 예술단체 관계자가 참여하여 다양한 생각을 교류하였다.

포럼3 현장

문화다양성 사업을 경험한 잭엔베티의 측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어떻게 다문화가족을 영화관에 유입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지역 예술영화관을 활용하는데 지역 문화단체나 예술가가 해야 할 방향성에 대한 논의 등 의미 있고 깊이 있는 대화가 이어져갔다.

포럼3 토론

열띤 토론이 이어진 2층에서 내려오면 방금 소개한 영화들이 시간별로 1층에 상영되었다. 내려가는 길에는 요코하마 잭앤베티 시네마에서 직접 한국 관객에게 소개하려고 제작해온 상영작 안내가 붙어 있었다.

상영작 안내

서투른 한국말로 번역되었지만, 정성스럽게 적혀진 영화 소개에는 이 영화를 왜 한국 관객들에게 소개하고 싶은지 그리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하고 있었다. 이 내용을 보자 더욱더 교류 행사가 의미 있게 느껴졌다.
물리적으로 가깝지만, 정서적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두 나라가 서로의 문화를 담은 영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고 친근감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문화의 선한 영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영관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특별전시 <동시상영전>을 3층에서 만날 수 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밀려 폐관했었던 역사와 예술영화관으로 재탄생했던 미림극장의 역사를 담은 물건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특별전시

오래된 서류와 필름보관용, 영화 티켓, 안내판 등 영화관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물건에서는 어린 시절, 이 영화관에 관련된 추억이 있는 사람들에게 향수와 반가움을 가득 안겨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별전시

전체 행사를 보며 지역의 문화예술공간을 재조명하고 다른 나라의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공간과의 교류를 통해 그 가치를 증대할 수 있는 행사가 인천 곳곳에서 더욱더 많이 개최되기를 소망한다.
1957년 천막 극장으로 시작해 2013년 세대가 소통하는 문화예술공간을 목표로 재개관한 미림극장이 앞으로 더 다양한 계층과 소통하며 대표 문화공간으로 더욱 활발한 역할을 해나가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글 · 사진 / 이정민 (시민기자단)




고등학생의 낙서, 징역 4개월 집행유예 4년

1940년 10월 28일 월요일 오후, 인천공설운동장(현재의 도원동 숭의아레나) 야구장 매표소 창구 뒤쪽에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 ‘선지일체(鮮支一体)’라는 낙서가 발견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 탄압으로 조직적인 활동이 어려워진 시점에서 돌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낙서가 나타났으니 일제 당국으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지일체’란 조선과 일본이 하나라는 일제의 기만적 선전 문구인 ‘내선일체(內鮮一体)’를 당시 중국을 가리키는 지나(支那)로 바꾸어 조선과 중국이 하나라는 의미였으니, 발견 직후 인천 경찰은 배후에 중국과 연계된 세력이 있는 걸로 판단했음직도 하다.
‘범인’ 수색에 골몰하던 때 단서는 의외로 쉽게 발견되었다. 매표소 전면 외벽에 앞의 조선독립만세와 같은 필체로 ‘대동상업 입장료(大東商業入場料)’라 쓴 또 다른 낙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대동상업학교(대동세무고등학교의 전신, 서울 종로구 계동 소재)와 관련된 사람이 썼다고 판단한 경찰은 현재의 중구 신흥동에 살며 대동상업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18세의 현명림(玄明臨)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체포해 심문했다.
처음에는 낙서한 사실을 부인했으나, 인천상업학교, 인천고등여학교, 인천중학교 습자 담당 교사들의 필적 감정 결과 동일 필체라는 게 밝혀져 나중에는 인정했다고 한다. 현명림은 황해도 옹진군 출신으로 8살 때 인천공립창영소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입학, 같은 학교를 졸업한 후 15세 때 대동상업학교 1학년으로 입학하여 기차로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하던 학생이었다.
일제 경찰의 보고문서에 따르면, 대동상업학교에 입학한 뒤에 포스터에 흥미를 가져 책이나 공책에 연필로 포스터 연습을 위한 낙서를 많이 했다고 한다. 낙서가 발견된 건 10월 28일이었지만 낙서한 날은 2주 이상 앞선 10월 12일 토요일 오후였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는데, 하교하여 3시 30분경 집에 왔다가 혼자 산책하러 나가 공설운동장까지 간 것이다. 야구장 입구에 도착해서 보니 알파벳으로 뭔가 낙서한 게 있어 그걸 보고 낙서 생각이 들어 먼저 매표소 앞쪽에 ‘대동상업 입장료’라 쓴 뒤, 안으로 들어가 ‘조선독립만세’와 ‘선지일체’라 썼는데, 조선이란 말을 우선 쓰고 났더니 다음 떠오르는 단어가 독립만세여서 그렇게 썼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해 11월 19일 인천경찰서장이 경기도 경찰부장 등에게 보고한 문서와 이 문서를 받아 경기도 경찰부장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게 11월 22일 보고한 문서에는 현명림이 단순히 평소의 버릇대로 낙서한 것으로 평소 온순한 성격에 학업 성적도 늘 상위권일 뿐만 아니라, 사상적 배후 관계도 ‘전연’ 없으며, 그동안 사상 방면의 서적을 읽은 일도 ‘전연’ 없다는 식으로 현명림의 행위가 우발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어 반성의 의사가 분명하여 정상을 참작해야 한다고 기록하며 결국 기소유예가 적당하다는 의견을 붙여 보고했다. 실제 현명림의 행위가 우발적이었는지, 임대업을 하는 현명림의 부친 등 가족들이 구명에 힘써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인천 경찰의 이런 의견은 경성지방법원 검사에 의해 묵살되고 기소되어 1941년 1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고, 판결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 집행유예 4년이었다.
1940년 가을 시점을 생각해 보면 일본 제국주의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전선을 확대하며 조선 등 식민지에서 강압적 통치를 일삼던 때였다. 당시 고등학생을 나이만으로 현재의 고등학생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경찰조차 사상 문제가 없고, 포스터 제작에 취미를 가진 온순한 학생의 우발적 행위라 판단한 사건이 징역 4개월, 집행유예 4년의 판결을 받았다는 건 일제 당국의 위기감이 그만큼 컸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편 그렇게 온순한 학생조차도 ‘조선’이란 단어 다음에 자연스럽게 ‘독립만세’를 제일 먼저 떠올릴 정도로 조선 사람들의 독립 염원이 충만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사건 이후 현명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현재까지는 알 수 없다. 학교는 다시 다닐 수 있었을까? 4년이라는 긴 집행유예 기간에 자책하며 지냈을까? 의문이 든다. 아주 평범한 한 사람의 삶이 식민지라는 시기를 만나 어떻게 어그러지는지 보여주는 사례이자 식민지 인천의 한 청소년을 기억하게 하는 사례이다.

인천공설운동장 1947년 항공영상(인천광역시 지도포털 편집)

글 / 김락기(인천역사문화센터)




인천역사서포터즈! 강화의 역사유산을 만나다

올 한해 인천역사와 문화유산을 비롯하여 인천역사문화센터 사업을 시민에게 소개하는 <인천역사서포터즈>가 지난 5월 18일에 강화도로 전체답사를 떠났다. 인천역에서 출발하여 강화에서 처음 도착한 곳은 바로 연미정이다.

연미정 입구

오늘 깊이 있는 답사를 위해 인천문화재단 정민섭 연구원이 문화유산에 대한 해설이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월곶돈대의 맨 꼭대기에 위치하고 모양이 마치 제비 꼬리와 같다고 하여 연미정(燕尾亭)이라 불린다.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다양한 역사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연미정 해설

널리 알려진 이야기뿐만 아니라, 서포터즈가 알지 못할법한 이곳의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강화에서 가장 먼저 이방인과 마주한 지역으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오페르트’ 인물과 얽혀있다. 독일 상인이었던 오페르트는 중국 상해에서 상업하다가 조선에 관심을 가지고 통상 수교를 목적으로 조선 해안가에 접근했는데,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이 연미정 부근이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억하며 다음 목적지인 성공회강화성당에 이동하였다.

성공회강화성당

성당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달리 친숙한 한옥의 모습으로 맞이한 성공회성당은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불교사찰 형태의 모습을 띤 성당의 외관에는 보리수나무가 있고 향교 등 유교 문화재에서 흔히 보는 은행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당시 낯선 서양의 종교가 문화적 이질감을 줄이기 위해 우리나라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과 정성이 느껴졌다.

삼도직물 터

점심을 먹기 직전 공터에 번듯하게 서 있는 굴뚝을 지나칠 수 없었다. 바로 옛 직물공장이었던 삼도직물 터의 흔적을 만났기 때문이다. 1970년대 근대 강화는 자그마치 60여 개의 공장이 모여 있을 정도로 직물 산업이 융성하였었다. 지금도 그 흔적을 기록한 소창체험관이 자리하고 그 업을 이어 가는 곳을 발견할 수 있다.

가릉과 강화능내리석실분 가는 길

그리고 버스를 타고 강화지역의 남쪽으로 이동하면 고려왕조의 흔적을 알 수 있는 가릉과 능내리석실분이다.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푸르른 숲을 조금 올라가면 그곳을 만나게 된다.

강화능내리석실분

이곳은 강화에서도 비교적 많이 알려지지 못했지만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유산이다. 고려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고려시대 묘제의 전형을 보여준다. 발굴조사를 통해 밝힌 구조와 축조 방법을 통해 향후 고려시대 묘제에 대한 복원·정비에 많은 기초자료가 되는 중요성을 가진다고 하였다.

분오리돈대

마지막으로 강화의 시원한 해변이 보이는 곳으로 향하였는데, 동막해변 부근에 위치한 분오리돈대이다. 인천역사문화센터에서는 강화의 해양관방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자 많은 연구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정민섭 연구원의 해설을 통해 들은 분오리돈대의 가치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분오리돈대

돈대 위에 올라가 자연경치를 바라보니 사방이 널찍하고 옆에 해변은 썰물 때 갯벌로 되어 적이 상륙하기 어려운 전략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 문화유산 중에는 자연 그대로 어우러져 그 가치와 의미를 더하는 것들이 많은데 이곳 또한 그 점이 단연 돋보였다. 이렇게 인천역사서포터즈 답사에 함께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강화의 문화유산에 대해 많이 알고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런 소중한 이야기를 더 많은 시민이 알 수 있도록 서포터즈가 노력할 거라 확신하며 역사 도시로서 인천의 문화적 가치의 저력을 느끼게 되었다.
앞으로 제2기 인천역사 서포터즈의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며 우리고장의 문화유산에 더 많은 시민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마친다.

돈대에서 바라본 전경

글 · 사진 / 이정민(시민기자단)




방법으로서의 디아스포라

20세기 후반, 현대미술전시 패러다임은 급진적 전환의 시기를 맞이한다. 미술시장을 점령한 유명작가와 유파주의 일색의 전시 문화가 변화를 겪게 된 원인은 아무래도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비에트 연방 해체에 따른 냉전주의 종식과 맞물려 있다. 이와 더불어 탈식민주의 연구가 가속화되면서 착종된 식민지 문화에 의하여 나타난 혼종성과 다양성의 현상을 국가와 개인, 거시사와 미시사의 관계를 탐색하는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근대 식민주의의 바탕인 서구중심주의를 해체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을 존재론적 관점보다 사회문화역사적인 관점으로 형성된 실존으로서의 해석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즉 포스트모던 세계로의 이행은 개인이란 존재가 구성되는 조건과 환경이 혈연과 지연에 제한되지 않고 개인, 국가, 민족, 역사, 세계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적 자각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전시는 서구를 중심으로 한 국제 모더니즘 미학을 따르고 있었다. 서구는 미술을 통해서도 동양을 타자의 세계로 남겨두고 미술이 서양의 전유물이라는 또 다른 관념을 끊임없이 생산-재생산하였다. 여전히 미술사와 미학, 그리고 예술가 모두 주로 서구남성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탈식민주의 연구의 등장은 인문학계뿐만 아니라 미술 지형도에도 지각 변동을 예약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전시는 국가, 지역, 매체와 장르, 작가의 유명세에 따라 공간을 분할하거나 서열에 따른 배치가 수두룩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시기획의 이면에는 여전히 서양 백인 남성작가라는 기표는 기념비적 삶과 사상을 드러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탈식민주의 연구는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문화연구로, 이어서 문화예술현장으로 확장되었다. 드디어 전시라는 영역이 오랜 관습을 재현하는 정치학이 아니라 당대를 비평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말할 수 없었던 타자들에게 말을 할 권리를 제공하는 담론의 장으로 펼쳐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전시가 시대성을 담는다는 의미는 완성된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구축되고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미학적 정치성의 발견’을 예견한다. 물론 이러한 변화를 다룬 당대 전시들이 처음부터 문화적 차이를 정당하게 제시한 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대지의 마법사”(1989, 퐁피두센터)란 전시는 아프리카 작가들을 백인 작가들과 동등하게 초청하여 문화적 다양성과 작가로서의 등가를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 서구미술을 진보적인 것으로, 아프리카 미술을 민속적인 것의 영역에 가뒀다는 평가를 받는다. 탈식민주의 개념을 대상화했다는 비판은 이후 많은 국제적 규모의 적지 않은 전시에서도 목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지의 마법사들이 열린 지 30년이 지난 현재, 전 지구화 시대의 시각예술 전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태도를 내재한 사회운동의 성격이 탑재된 문화적 산물로 성장하였다. 지난해 광주와 부산의 비엔날레가 주목한 것도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분할된 국경과 국가주의가 세계화와 디지털 기반 (영상)문화에 의하여 어떻게 재편되고 번역되는지를 다뤘다는 점만 보아도 19세기 말 제국주의 식민정책 이후의 점점 더 가속화된 식별 불가능하게 변하는 세계 지형도는 전보다도 더 섬세하게 탐구되어야 할 주제임에 분명하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제7회 디아스포라 영화제와 발맞춰 열린 인천아트플랫폼의 기획전 <태양을 넘어서>(2019)는 한국근현대사에서 인천이라는 장소가 가진 정치지리학적 의미를 박물관학의 차원이 아닌 한국의 동시대 미술가들이 경험하고 바라보는 이산(離散)이라는 주제를 처음으로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반가웠다.

전시는 총 2부로 구성되었다. 1부는 러시아 레핀미술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한 고려인 변월룡의 회화와 서한으로 채워졌고 2부는 디아스포라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색하고 번역한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으로 이뤄졌다. 우선 1부 “고국으로의 귀환”은 1916년 연해주에서 태어난 변월룡(1916~1990)이 1954~55년에 평양미술학교로 파견을 나가 된 덕택에 경험한 2년간 모국에서의 삶과 그리움을 주목하고 있다. 평양에서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변월룡은 다시 평양에 가기 위해 애를 썼지만, 이데올로그의 경계에서 모진 그리움만으로는 국가체제를 초극할 수 없는 한계를 처절하게 경험한다. 당시의 그리움은 이후 기억 속의 평양을 다시 화폭으로 소환되어 이중의 디아스포라로 체현된다. 게다가 남북분단의 현실은 어느 국가도 선택할 수 없는 삼중의 디아스포라가 되어 그의 절망감을 배가시킨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인물화와 달리 그리움과 체념을 담아 기억의 풍경을 그린 “평양재건”(1953)과 같은 작품에는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인상주의적 붓질로 조국에 대한 긍정적 기대를 담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의 지인들과 교류한 편지에는 돌아가고 싶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달리 되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안타까운 입장과 고국에 대한 애정이 잘 담겨 있다. 2부 “부유하는 태양”에서는 김기라, 임흥순, 이수영, 가나자와 수미 등 국내외 작가 8명이 참여했다. 개인적으로는 단연 가나자와 수미의 작업이 돋보였다. 그는 “Number-가족”(2012년)에서 폐지된 외국인 등록법 이전에 부여받았던 자신의 외국인등록번호 “B176404263”을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번호를 외국인 증명서류 위에 계속해서 적어 내려간다. 마치 폴란드계 프랑스 작가 로만 오팔카의 숫자 회화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오팔카 역시 디아스포라의 삶을 작업의 배면으로 삼고 있으나 여기에서의 숫자는 매우 실존주의적 의미를 품고 있다. 이에 비하여 가나자와는 제도가 개인을 식별하는 법질서 내부의 존재방식을 질문한다. 이수영은 이주민의 고향과 같은 서울 가리봉동에서 조선족이 운영하는 양꼬치 식당에서의 맛을 찾아 국경을 넘는다. 작가는 디아스포라의 원 의미를 새롭게 재배치한다. 그것은 이방인의 삶의 궤적을 좇는 행위이자 또 다른 관점에서는 자신이 처음 만난 감각적 세계의 원천을 찾아 떠나는 시원으로의 여정으로도 볼 수 있다. 온갖 임시방편의 장치들을 몸에 장착하고 떠난 그의 여행은 고행과 여행, 고통과 유희가 공존한다.

디아스포라는 근대가 열리면서 제국주의에 의한 세계 나누기,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과열 현상으로 자신의 땅에서 다른 곳으로 쫓겨나야만 한 이산의 상태를 일컫는다. 산파, 산종, 이산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디아스포라(diaspora)는 원래 팔레스타인을 떠나 유목인으로 사는 유대인 공동체를 의미했으나, 현재는 근대 이후 모국이 아닌 타 문화권에 거주하는 모든 이산자와 이산 문화를 아우르는 용어로 사용된다. 특히 인천은 개항지이자 하와이와 멕시코 노동이민이 시작된 장소이기에 디아스포라와는 어쩔 수 없이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디아스포라”를 이슈로 하는 주제전으로써 <태양을 넘어서>는 이미 시작 전부터 한계를 가지고 제작된 전시다. 아무래도 인천아트플랫폼의 정체성이 작가들의 창작공간이기에 규모가 있는 주제전시를 자체 제작하기엔 시스템의 공백이 없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같은 열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가 갖는 의미는 여러 관점으로 유의미하다. 첫째, 인천시립미술관 설립이 예정된 상황에서 인천의 정체성과 연계하여 지역미술거점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점, 둘째, 인천아트플랫폼의 지정학적 장점을 활용하여 디아스포라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프로그래밍과 활동의 잠재성을 탐구할 수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한국의 창작스튜디오 대부분이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인천아트플랫폼이 새로운 운영방식을 실험할 수 있다는 기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레지던시의 연구 기능, 교육을 비롯한 프로그램의 전문성을 높일 수 있으며, 무엇보다 전문가, 비전문가 모두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전시 기반을 다질 수 있다는 바람을 갖게 해준다.

 
변월룡, <아내와 아들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0×74.5㎝, 1951
  변월룡, <소나무가 있는 풍경>,
캔버스에 유채, 59.5×97㎝, 1954

김기라, <이념의 무게_북쪽으로 보내는 서한들_수취인 불명_황해>,
단채널 비디오, 10분, 2013

김수미, <Number-가족>,
외국인 등록 원표 기재 사항 증명서, 외국인 등록 번호, 노트, 편지, 가변설치, 2019

민성홍, <연속된 울타리: 벽지>,
볼펜, 벽지에 목탄가루, 수집된 오브제, 세라믹, 나무구슬에 채색, 가변설치, 2018


정현(Hyun Jung): 미술비평가, 독립전시기획자로 활동한다. 비평활동을 하나의 배움의 과정으로 여기면서 글쓰기를 실천하고자 한다. 미술비평, 시각문화, 전시기획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미술은 무엇을 욕망하는가?”란 질문으로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파악하려 애쓴다. “이상뒤샹”(2013), “그다음 몸”(2016) 등의 전시를 기획했고 “큐레토리얼 비평 실천”(현실문화 2014), Art Cities of the Future: 21st century Avant-Gardes, (Phaidon, 2013) 등의 공저가 있다. 현재 인하대학교 조형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민기자단의 눈으로 본 디아스포라 영화제

제7회 디아스포라 영화제-사이를 잇는
2019. 05.14(금)-05.28(화)
@인천광역시 중구 인천아트플랫폼 일대

주최 : 인천광역시
주관 : 인천광역시영상위원회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천광역시 중구, 인천문화재단, 인천아트플랫폼, 한중문화관, 한국영상자료원
협찬 : 프룻오브더룸, 화이트진로, 케이슨24, (주)일화
협력 : 유엔난민기구, 인천대학교, 경인일보, 알라딘

영상 김유라, 장유하 시민기자단




제 7회 디아스포라 영화제 스케치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

디아스포라 영화제 속 아카데미: 난민인권운동의 작은이정표

<아카데미장소 입구>

제7회 디아스포라영화제가 지난 24일부터 28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진행됐다.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디아스포라’를 내세운 영화제는 정치적, 문화적 소수를 아우르며 다름의 가치를 성찰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올해 벌써 7회를 맞이했지만, 작년에 처음으로 영화제를 알게 되었고, 올해 처음 영화제에 방문했다. 사실 나는 영화 보는 것보다도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들어 보고 싶었다.
과거의 나는 ‘국제앰네스티’라는 인권단체에서 펀드레이저 활동을 했었다. 당시에는 인권선언문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활동을 지지해달라 시민들에게 호소했지만, 막상 작년 제주도 예멘 난민수용에 대해 사람들의 찬/반이 양분화되었을 때,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고민되기도 했다. 늘 난민은 보호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우리나라 안에서 많은 난민이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난민 인권운동’이라는 단어가 더욱 눈에 들어왔다. ‘난민’도 ‘인권’도 성인들조차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단어인데 청소년교육프로그램이라니 의외였다.

<토크쇼 장소>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김세진 공익변호사가 마이크를 잡고,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란 소년 김민혁군과 그를 도왔던 친구들 박지민군, 최현준군에게 질문하면 그들이 답변하는 토크쇼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김민혁군은 지난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왔던 글의 주인공으로 민혁군의 중학교 친구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자신의 학급 친구를 공정한 심사를 통해 난민으로 인정해달라는 글을 올리면서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당시 청원문에 따르면 민혁군이 천주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으며, 한국의 난민법에 따라 정당한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음에도 난민 신청은 기각되었다고 했다. 이후 다른 친구들 또한 난민에 대한 공부를 하며, 난민 문제를 계속 알렸고, 돌아가면서 릴레이 시위 등 다양한 방법으로 민혁군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수개월이 지나고 결국 법무부는 민혁군의 난민 지위를 인정했고 민혁군은 현재 최초의 난민 패션모델로 살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이 ‘난민’이라고 하면 전쟁을 피해 이동하는 ‘피난민’을 생각하는데, 그 외에도 난민에는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서 자국을 벗어나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포괄되어 있다. 이란의 경우, 태어남과 동시에 무슬림이라는 종교를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갖게 되는데 이란 형법상 개종하는 자를 배교자로 지칭하며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민혁군은 한국에 살면서 천주교로 개종했고, 이로 인해 본국에 돌아가면 생명을 잃을 수 있으므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처지라고 인정을 받아 난민의 지위를 얻은 것이다.
김세진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난민 인정률이 약 30%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은 1994년~2017년까지 난민 인정자가 약 800명 정도 되는데, 신청자 수를 고려하면 1.5%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그만큼 난민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나라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럼 왜 그렇게 난민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것일까? 민혁군에 이야기에 따르면, 난민신청제도 자체가 복잡하고 까다롭다고 한다. 예를 들어, 서류를 준비하려고 해도 요청하는 서류들이 본국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서류 확인이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유를 인정받기도 쉽지 않다. 민혁군은 개종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유였는데, 처음 인터뷰를 준비할 때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해서 정말 준비 없이 갔다가, 천주교의 교리에 대한 부분이나 십계명, 외우고 있는 성경 구절 등 갑작스러운 질문에 답변하지 못해서 반려되었다는 것이다. 종교인이 아닌 이상 일반 성인도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을 중학생인 민혁군이 대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신청이 반려됐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신청문제뿐만 아니었다. 현재 민혁군은 난민의 지위를 어렵게 인정받았지만, 청소년증이 발급되지 않고, 은행거래는 물론이고 핸드폰조차 본인 명의로 사용할 수 없다. 또한, 민혁군은 아직 미성년자라서 보호자가 필요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직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추방의 위험을 느끼며 하루하루 불안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민혁군의 사례는 널리 알려져서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난민이 제대로 된 도움조차 받지 못한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며 관심을 호소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체적인 여론은 난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강하고, 난민수용에 대한 반대가 대다수를 이룬다. 김세진 변호사가 학생들에게 무엇이 가장 힘들었냐고 물었을 때도 반대하는 악플이 달리거나 없었던 이야기를 지어내서 마치 사실인 양 뿌려지는 가짜뉴스들로 인해 편견과 싸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함께 노력했던 것은 내 곁에 있는 나의 ‘친구’의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이야기했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었는데, 한 소년이 이렇게 말했다.

“대세가 옳은 것은 아니에요. 대세를 꼭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정말 그것이 옳은 일인가? 정의로운 일인가? 생각하면 좋겠어요.”

지금도 저 문장은 나의 마음속을 맴돈다. 정말 맞는 말이다.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것이 꼭 옳은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조금 더 객관적인 위치에서 문제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난민문제도 그렇다. 대다수 사람이 말하는 것,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에 휩쓸려 그 의견에 옹호할 것이 아니라, 한 발자국 뒤에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보통 영화제라고 하면 영화만 보러 가는 줄 알았는데, 아카데미나 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어서 좋았다. 또한 프로그램별 주제가 있고, 사람들에게 조금 더 쉽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수 있어서 아카데미 참여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널리 알려지면 지금보다 더욱 의미 있는 영화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 같다.

글 · 사진 / 시민기자단 김지연




제 7회 디아스포라 영화제 스케치 ‘디아스포라의 눈’

디아스포라 영화제 그리고 ‘겟아웃’으로 본 블랙 디아스포라

다양한 디아스포라 영화제의 프로그램 중, 나에게 아직은 다소 낯설고 어려운 ’디아스포라‘ 개념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해 줄 프로그램 <디아스포라의 눈>에 참여하게 되었다. <디아스포라의 눈>은 한국 현대미술의 작가와 프로그램 참여자가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영화를 보고 이주민이나 소수자가 보고 있는 세계와 삶,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다.

5월 26일 일요일에 한중문학관 4층에서 진행된 <디아스포라의 눈>에서는 영화 ’겟아웃‘을 보고 이 영화에서 다뤄진 디아스포라에 대해 토크쇼 진행자와 행사 참석자가 이야기를 나눴다.’겟아웃‘은 흑인 디아스포라(중세부터 시작된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신항로 개척 이후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 노예로 팔려나간 흑인 또는 그들의 삶)를 다룬 영화이며, 객원 프로그래머로 김아영 현대미술 작가가 자리하였다. 김아영 작가는 상영 후 토크 시간에 흑인 디아스포라, 포스트휴먼, 아프로퓨처리즘에 대한 논제와 사례를 중심으로 담론을 진행하였다.

# 목화솜
영화의 주인공인 흑인 크리스가 백인의 집에 있는 목화솜으로 자신의 귀를 막은 덕분에 최면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크리스에게 도움이 된 물품으로 ’목화솜‘을 사용한 데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다. 과거 백인이 흑인을 노예로 삼던 시절, 백인들은 다량의 목화솜을 채취하기 위해 흑인들의 노동을 착취했다고 한다. 이후 주인공이 이 목화솜을 백인 제레미에게 던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김아영 작가는 이 장면이 ’흑인이 백인에게 목화솜을 던짐으로써 모멸감을 주는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 포스트휴먼
포스트휴먼은 ’인간과 기술의 융합으로 나타나는 미래의 인간상’을 뜻하는 단어이다. 김아영 작가는 포스트휴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느 흑인 학자의 글을 언급하였다.
‘포스트휴먼을 다룬 담론에서 단 한 번도 인종의 문제가 고려된 적이 없다. 모든 과학 기술의 발전은 큰 자본과 권력 주체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또한, 새로운 기술을 확산하는 데에 많은 시간과 좋은 환경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 항상 백인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포스트휴먼 또한 백인에 의해 규범화된 인간으로 개조되는 것을 지향점으로 다뤄진다. 흑인은 규범화된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배제되고 도태될 수밖에 없다.

#아프로퓨처리즘
‘아프로퓨처리즘’은 미국에 있는 흑인들이 아프리카 문화를 선진 기술과 융합하여 탐구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문화이다. 즉, 억압과 차별의 대상이었던 흑인이 그 끔찍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상상과 사변의 결과물이다.
아프로퓨처리즘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은 주로 흑인을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로 설정한다. 또한, 그들이 주로 활동하는 장소로는 억압과 폭력이 존재하는 현실의 공간이 아닌 제3의 가상 공간을 설정한다. 아프로퓨처리즘을 구현한 대표 예술작품으로 마블 영화 ‘블랙펜서’가 있다. 블랙펜서는 아프리카의 실존 부족의 전통을 기반으로 아프로퓨처리즘을 멋지게 구현하였으며, 올해 초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총 3개의 상을 받았다.

흑인들은 차별받는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영화, 소설 등 대중문화를 활용하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가 진화한 모습을 띤 포스트휴먼은 흑인의 형상이 배제되고 있다. 이는 지금도 세상에 인종차별적인 시선이 만연해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김아영 작가가 본인이 바라본 흑인의 삶과 이야기를 대변해준 덕분에, 영화를 보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흑인 디아스포라’에 대해 시원하게 풀어낼 수 있었다. 나에게 <디아스포라의 눈>은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차가운 시선에 대한 문제를 사유해보는 자리였다.

글 · 사진 / 시민기자단 김다솔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본 다큐멘터리 ‘와일드니스’

디아스포라 영화제는 인천광역시에서 주최하는 행사인 만큼 누구나 부담 없이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지난 5월 25일 토요일, 이날 진행하는 프로그램 중에서 다큐멘터리 ‘와일드니스’ 상영 행사에 참석했다.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모든 영화는 무료이기 때문에 티켓 부스에 가서 표를 받을 수 있다. 표를 받고 난 뒤, 설레는 마음으로 상영관으로 향했다. 상영 시간이 다가오자, 불이 꺼지면서 흰 스크린에 영상이 나오기 시작한다.

‘와일드니스’는 라틴계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 다큐멘터리이다. 사회는 그들을 혐오하고, 그들은 사회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실버 플래터 클럽바 안에서만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곳은 그들이 지켜내야 하는 장소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각자 공동체를 위해 노력하고 스스로 정체성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 마지막 부분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같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마치 그들과 내가 실제로 마주하듯 말이다. 아무 대사가 없는 장면에서 표정만으로도 그들이 집단에 대한 소속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객이 인상 깊게 느낄만한 요소가 많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 상영이 끝나고, 현대미술 정은영 작가와의 토크쇼가 시작되었다. 작가는 관객에게 작품 해석과 그녀의 견해를 들려주었다. 토크쇼 맨 마지막에는 관객이 작가에게 질문할 수 있는 시간도 주어진다. 작품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에 대한 궁금증까지 풀 수 있는 만족스러운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현대미술 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인종’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인간이 예술의 중심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다큐멘터리 ‘와일드 니스’를 제작한 우창 감독은 자신이 밀접하게 경험한 퀴어 공동체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것은 기존 미술이 가지고 있었던 장르성을 벗어난 충격적인 시도가 된 것이다
.
끝으로 정은영 아티스트는 디아스포라와 다큐멘터리 ‘와일드니스’의 연관성에 대해 설명했다. 라틴계 트랜스젠더들이 자신의 고향 집단에서 배제된 순간부터 새로운 디아스포라 영역에 속한 것처럼 우리가 사회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은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며,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어서 항상 논제 거리를 복합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당부하였다. 다수의 관객이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큐멘터리를 관람하고 보고 느낀 것을 함께 공유해보는 시간이었다.

토크쇼가 끝나고 디아스포라, 즉 민족 단위에서 결여된 공동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이어서 내가 속한 집단 속에서 확고한 마음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디아스포라 영화제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주제를 시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방문객에게 의미 있는 축제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글 · 사진 / 시민기자단 김다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