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알고 싶은 인천 이야기를 만나는 시간 – 문화의 길 총서 북 콘서트 ‘옛 경인가도와 개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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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 보슬비가 내리는 인천생활문화센터 칠통마당에 인천의 이야기 조각들로 꾸며진 보자기 두 개가 펼쳐졌다. 겨울비 때문에 한산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콘서트장은 인천의 숨은 이야기를 들으러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문화의 길’의 시즌 2『시간을 담은 길』,『시대의 길목 개항장』북 콘서트는 어쿠스틱 통기타 동아리 ‘레노바레’의 공연으로 시작했다. 공연은 인천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있는 5곡의 노래로 구성됐는데 ‘연안부두’, ‘사랑밖에 난 몰라’, ‘하얀나비’ ‘사랑은 은하수다방에서’(인천 연인들의 명소였던 ‘삼화다방’의 이름을 넣은 ‘사랑은 삼화다방에서’로 개사), ‘고래사냥’까지 선곡도 실력도 심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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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이후 두 책의 저자가 서로의 책에 대한 질의응답을 나누면서 북콘서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배성수의 ‘시간을 담은 길’에 등장하는 옛 경인가도는 중구, 남구, 남동구(부평구)를 거쳐 부천시와 연결되어 근대문화의 동맥 역할을 한 인천의 역사가 담긴 곳이다. 저자(배성수)는 책에 수록된 지도와 사진들에 대한 애정으로 자신의 책을 소개하면서 영화가 상영 중이지만 객석에 관객들이 없는 극장 사진과 공동묘지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라고 소개했다. 산 자의 공간인 아파트와 죽은 자의 공간인 무덤을 분리한 공동묘지 사진이 필자 자신에게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유동현 저자는 자신을 ‘팝페라 가수’라고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중화된 팝페라가수처럼 책을 통해 대중들에게 편안하고 재미있게 다가가려고 노력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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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콘서트에서 있었던 질의응답을 일부 소개한다.

Q. 유동현 저자 책 서문에 쓸모없는 천 쪼가리 모아 예쁜 보자기로 만들고 싶다라는 구절이 감명 깊었다. 나는 인천에 태어나고 자라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이런 천(자료)을 모으는데 특별한 비법이 있는지 궁금하다.
A.
인천이 살만한 도시이고 충분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도시라는 것을 전하고 싶어서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다. 평상시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눈여겨보고 모아놓았다가 기억을 꺼내서 연결한 것이다. 그만큼 인천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도시이다. 여기 계신 분들도 인천의 이야기 조각들로 저보다 더 큰 이불보나 보자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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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배성수 저자는 길을 특별히 주제로 선정하게 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
A.
‘타박타박 인천’에서 활동할 때 길에 대한 재미를 느꼈다. 길이라는 곳은 공간을 나누고 그 공간은 다시 사람들로 채워지고, 그 사람들이 채워진 곳에는 길이 존재한다. 또한 한번 생겨난 길을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길에 대한 생각 때문에 길을 주제로 선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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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경인가로의 여러 길 중에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개인적으로 치유를 받았던 길이 있는가?
A.
신포동에서 싸리재를 넘어가는 길이 나에겐 힐링 코스면서 안타까운 길이다. 인천에 처음 왔을 때 본 신포동은 인상깊었던 곳이었는데 세월이 지나 옛날에 봤던 모습과 너무 달라서 인상에 남는다. 인천에서 살아오신 분들은 각자 경험에 따라 힐링의 길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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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유동현 저자는 인천에서 살아서 그런지 글 곳곳에 개인적인 경험들이 잘 녹아있다. 그 경험들은 어디서 온 것인가?
A.
사실 저는 인천의 모든 구에서 살아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어난 곳은 동구이고 중학교는 남구, 고등학교 때는 중구에 있었다. 결혼하고 5년 동안은 북구, 지금은 연수구에 살면서 직장은 남동구에서 다니고 있다. 이러한 운명적인 경험들이 있어 인천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 잘 녹아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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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유동현 저자의 책에
사진 신부의 사진이 실렸는데 이 사진을 고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A.이 사진은 애틋하기도 하고 자신만만해 보이기도 한다. 즉 모든 걸 품고 있는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저 사진을 표지로 하려 했는데 세로 사진이어서 탈락했다. 그래서 개항장 이야기를 할 때 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에 사진 한 장 달랑 교환하고,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한 신랑을 찾아서 가는 사진 신부의 모습만 봐도 개항장의 이야기는 다 끝난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사진을 고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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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저자의 입장에서 책을 읽는 독자들이 좀더 관심있게 봐주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는가
?
A.
(유동현) : 김정곤의 삶의 이야기를 다룬 부분을 주의 깊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그는 인천 바다가 만든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항기 인천 제물포의 하역 상인으로 그가 가졌던 기발한 아이디어와 제물포해전의 러시아 함대를 사람을 동원해서 끌어내는 장면들은 지금 봐도 인상적이다. 김정곤이야말로 우리나라 역사를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인물인 것 같다.

A.(배성수) : 저는 독자분들이 책을 모든 부분을 다 보셨으면 좋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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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의 사인회를 끝으로 이날의 북 콘서트는 마무리됐다. 콘서트를 보는 내내 저자들의 인천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느껴졌다. 흩어져있던 인천의 작은 이야기 조각들이 저자의 애정과 관심으로 이어져 예쁜 보자기로 탄생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았다. 3월 15일(수) 배다리 아벨서점 시 다락방에 가면 문화의 길 총서 북 콘서트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 인천의 길과 개항장에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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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주 / 인천문화통신 3.0 시민기자

 

 




인천아트플랫폼 7기 입주작가 결과보고전

촬영, 편집, 구성 : 시민기자 김유라




올게이츠 All Gates 2016 인천 청년예술제展 – 2016.12.10~12.18, 인천 신포동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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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속에 깊어질 인천의 문화가치를 꿈꾸며-인천 문화가치재창조 컨퍼런스 『섬, 영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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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이라는 숫자가 이제는 좀 익숙해질 것 같은데, 어느덧 한 해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2017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하는 시기가 왔다. 연말이 되면 올해도 어김없이 빠르게 지나간 시간이 야속하면서도 지나간 한 해를 반추해보며 반성과 함께 앞으로를 계획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게 된다.

어느덧 인구 ‘300만’을 돌파한 인천시도 올해를 돌아보며 인천시의 미래를 모색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지난 11월의 마지막 날,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진행된 인천문화가치재창조 컨퍼런스에선 <섬, 영화, 음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김윤식 대표이사의 개회사로 시작된 컨퍼런스는 인천의 문화 정체성을 나타내는 섬, 영화, 음악 3개의 섹션으로 나눠 발제와 토론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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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섹션에서 노형래 글로벌에코투어연구소 소장은 ‘해양도시 인천의 재발견’을 주제로 발제를 시작했다. 노 소장은 인천의 섬 현황과 인천이 해양에코투어리즘에 주목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해양 도시로 인천의 정체성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토론자로 나온 강제윤 사단법인 섬 연구소 소장은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는 백령도 갯벌 탐방사진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대신 있는 것부터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며 인천 섬 프로젝트의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온 유재형 사진가는 ‘문갑도를 중심으로 한 역사와 유산의 미래지향적 접근방안’을 가지고 문갑도의 역사와 지리적 한계로 인한 열악한 교통수단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유 사진가는 인천이 섬 고유의 DNA를 찾아 마을 축제를 개최하거나 지속가능한 MOU를 맺는 등 실질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컨퍼런스에 참여하기 위해 이틀에 걸쳐 인천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섬 주민이 겪는 고충을 잘 이야기해준 이충환 문갑도 이장의 발언 역시 앞선 발제에 힘을 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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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개봉했던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영향으로 ‘인천’ 하면 ‘영화’를 떠올리는 이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영화의 시발점 인천, 영상문화의 부흥을 위한 제안’이라는 주제로 인천영상위원회 사무국장이 ‘영화와 인천 그리고 인천의 영상산업 활성화 전략’을 발표했다. 현재 인천의 현황과 과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있는 명쾌한 발표였다. 첫 번째 토론자로 나선 이란희 영화감독은 서울에서 살다가 최근 인천으로 이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인천에서 영화하며 살기’란 무엇인지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어 백승화 영화감독은 인천 토박이의 관점을 가지고 ‘인천의 이야기란 무엇일까’에 대해 이야기했고, 영화 ‘아가씨’의 윤석찬 프로듀서가 여러 도시들과 인천의 비교를 통해 인천의 영상문화 부흥방향을 제언했다.

인천이 가진 독특한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살리면 ‘음악도시’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도 있지 않을까? 마지막 섹션에서 발제자로 나온 나도원 음악평론가는 인천은 ‘이미 한때’ 음악도시였다며, 인천의 공간과 역사 속에 숨은 음악 도시로서의 가능성을 일목요연하게 짚어가며 설명했다. 세 명의 토론자들 역시 시민참여 문화예술 프로그램의 증가와 부평의 음악도시로서의 가능성, 마지막으로 인천이 음악도시로 발전하기 위한 시스템이 절실하다며 걱정과 애정 이 듬뿍 담긴 조언과 제언을 아끼지 않았다.

인천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사람으로서 인천이라는 낯선 공간의 문화가치를 논하는 자리가 마냥 재미있고 편하지만은 않았다. 올해 인천아트플랫폼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인천을 알아가는 중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날 컨퍼런스에서 논한 세 개의 주제들이 어찌 보면 인천의 정체성을 확실히 대표할만한 문화 가치가 아직은 정립이 안 되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조금만 다른 시선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문화적 정체성 하나조차도 제대로 갖고 있지 않은 여타의 도시들에 비한다면 인천은 오늘 다룬 주제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걸로 비쳐져 타지 사람으로서 인천이 부러워지기도 했다. 또한 남의 것이 더 좋아 보이고 이를 자신과 비교하면서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은데, 인천은 그 방점을 다른 곳이 아닌 스스로에게 찍고 가치를 논의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섬과 영화, 음악이라는 세 개의 주제를 가지고 인천의 정체성이라는 거시적인 담론을 논한다는 게 매우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인천을 위해 애정 어린, 때로는 분노하면서까지 발언하는 참가자들을 보면서 이러한 논의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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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이문재 시인의 <농담>이라는 시에는 나오는 구절이다.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을 인천의 가치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인천은 뼈아픈 노력을 계속해나가야 하고, 그에 따라서 인천 문화가치의 농담(濃淡)이 결정될 것이다. 문화도시 인천의 모습은 어떠할지, 앞으로를 주목해본다.

글 / 김수현(아산 프론티어 유스 프로그램 인턴)
사진 / 민경찬(인천문화통신 3.0 시민기자)




영화와 음악이 흐르는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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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꾸지 말고 모여라!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청소년 작업장 예술가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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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일 토요일, 송도에 위치한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 입구에서부터 직접 손으로 삐뚤빼뚤 만든 포스터들이 관객들을 반겼다. 8개월 동안 준비한 영화가 처음 사람들 앞에 공개되는 날인만큼 청소년 작업자들의 얼굴에는 들뜬 마음과 함께 긴장이 서려 있었다. 불이 꺼지고 익숙한 얼굴들이 스크린에 비치자 청소년 작업자들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청소년 작업자들은 배우와 감독을 꿈꾸는 중․고등학생 34명으로 올해 3월 처음 모였다. 1박 2일 캠프를 시작으로 친해진 청소년 작업자들은 ‘피리부는 사나이’ 이야기를 가지고 연극을 만들었다. 4월에는 인천역과 차이나타운 일대를 돌아다니며 ‘인천의 청소년들은 학교 밖에서 무엇을 하며 노는가’를 주제로 직접 대본을 쓰고 연극을 만들었다. 그리고 8월, 연극 대본을 각색하고, 배우, 연출, 촬영, 음향 등 역할을 나누어 영화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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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작업장 예술가 되기’ 프로그램이 다른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과 다른 점은 실제 영화 현장에서 작업하는 감독들, 인천독립영화협회의 회원들이 프로그램의 기획자, 강사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프로그램을 기획한 이란희, 신운섭 감독은 연극, 영화 진로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비싼 학원비를 들여가며 입시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학생들이 부담 없이 연극, 영화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역에 있는 아이들이 지역에 있는 예술가들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자신이 생각하는 진로분야에서 실제로 일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경험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존 학교 교육에서는 예술을 하게 되면 ‘모 아니면 도’가 된다고 가르쳤어요. 완전히 성공하지 않으면 완전히 실패하는 것으로 양 극단만 상상하게 만든 것이죠.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현실적인 꿈을 꿀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해요. 누구나 잘 나가는 영화감독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감독이 되지 못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지역에서 근근이 먹고 살면서도 자기 작업을 계속해나가는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요.”(이란희)

“예술을 전공한 학생들이 현실적인 이유로 꿈을 포기하고 예술 강사로 진로를 선택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꼈어요. 10년간 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 뒤에 예술 강사가 되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을 만나는 데 있어 창작 현장에서 쌓은 경험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예술가가 되어 작업하기를 꿈꾸는 학생들이기 때문에 실제 현장에서 작업하는 감독들이 강사로 투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신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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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작업자들이 만든 영화는 작업자들이 일상 속에서 겪은 솔직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조별 모임에 늦는 친구를 두고 다투는 이야기 ‘인천역 기다림’, 학업과 진로, 연애 등 선택에 관한 고민을 담은 ‘동전’, 학교 폭력을 경쾌한 미스터리물로 풀어낸 ‘내가 보여?’ 등 다채로운 주제를 담은 8편의 단편 영화는 또래 청소년들에게는 공감을, 어른들에게는 학창시절의 풋풋한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시나리오 작가가 꿈이었는데 영화 관련한 활동은 학교에서 하기 어려웠는데 청소년 작업장을 통해 영화를 직접 만들어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글을 쓰면서 생각만 하던 것을 직접 연출을 하니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하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양우민, 대건고, ‘바람차이’연출)

“토요일마다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행복한 표정으로 집을 나서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집에 늦게 들어와서 피곤한 기색을 보여도 뭔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직접 겪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요. 저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교실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워온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직접 연출하고 주연을 맡은 영화처럼, 앞으로 아이들의 인생도 멋지게 연출하고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한만수, 한세하·선하 학생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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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어린 학생들에게, 젊은 청년들에게 야망을 가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른들이 말하는 야망이란 돈과 명예 등 성공만을 가치에 둔 야망이다. 어른들이 예술가를 꿈꾸는 청소년들을 두고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며 말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청소년 작업자들은 영화인으로서 허공에 둥둥 뜬 미래를 상상하기보다 땅에 발 디딘 현실 가능한 미래를 경험함으로써 돈과 명예가 아닌 또 다른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의 열정이 꿈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되기를 응원한다.

글 / 시민기자 김진아, 사진/ 시민기자 민경찬




제 3회 인천다큐멘터리포트(2016.11.3~11.5) 인천아트플랫폼 외 인천영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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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숨결로 만드는 우리학교-주안초등학교 이전 공사장 가림막 공공미술 프로젝트(11.1)

0111월의 첫날 아침, 갑자기 불어 닥친 추위에 호호 손을 불다가 겨울이 왔음을 실감했다. 하얀 입김이 눈앞에 선명했기 때문이다. 같은 날, 주안초등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모여 캔버스 위에 입김을 불었다. 얼어붙은 손을 녹이던 입김은 캔버스 위에서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 재학생 720명이 참여한 공공미술 작품 ‘나비’가 완성된 것이다. 1934년에 개교하여 올해 82년이 된 주안초등학교는 도시개발 사업으로 인해 인천기계공고 옆으로 이전 중이다. 원래 주안초가 위치했던 곳에는 새로 의료복합단지가 자리하게 된다. 정들었던 학교와 작별하고 낯선 곳에 새로 적응해야 할 아이들을 우려한 시행사 (주)SMC가 아이들과 함께하는 작업을 제안했고, 채은영 큐레이터와 최선 작가의 기획으로 공공미술 프로젝트 ‘나비’가 진행되었다.

“8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가 이전하는데 보통의 도시재개발과 같이 공사를 하고 이사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보통의 공사장 가림막은 기능적이고 천편일률적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기획했어요. 인천아트플랫폼에 함께 입주해 있는 최선 작가가 사람의 숨을 활용해서 작업했던 것이 새로 들어오는 의료복합단지와도 의미가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특별한 기교 없이 물감을 부는 단순한 작업이기에 전교생이 모두 참여할 수 있기도 했지요.” (채은영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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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작가가 ‘나비’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2011년, 일본이었다. 당시 동일본 대지진으로 고통을 겪은 사람들과 함께,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그림을 통해 아픔을 승화했다. 캔버스 위에 물감을 떨어뜨리고, 한 사람이 물감을 불면 다른 사람이 이어서 물감을 부는 형식이었다. 사람들의 숨결은 이어져 역사를 만들었다. 2014년 안산의 한 시장에서도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당시 안산은 세월호 비극으로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외국인 노동자 또한 많은 도시였다. 남녀노소, 국적, 출신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함께 그림을 통해 생명을 표현했다. 지나가다 그림을 본 한 행인이 입김으로 번진 물감의 모습이 흡사 나비 같다고 말한 것이 프로젝트의 이름이 되었다.

이번 주안초등학교의 ‘나비’ 프로젝트는 새로 들어오는 의료복합단지가 사람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준다는 의미와, 82년 역사를 가진 학교의 새로운 터전에 학교의 주인인 학생들이 함께 숨을 불어넣는다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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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마다 그림을 그리는 능력의 편차가 크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다가 그게 ‘숨’이라는 것을 떠올렸어요. 숨 쉬는 것을 이용하면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더군다나 숨결은 성별, 국적, 나이 등 그 어떤 것도 상관없이 모두가 똑같잖아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숨결이 한데 섞여 어우러지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최선 작가)

‘나비’ 프로젝트에 주안초등학교의 전교생 720명 모두가 참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인천아트플랫폼에 최선 작가와 함께 입주해있는 작가들의 도움이 큰 몫을 했다. 김푸르나, 손승범, 윤대희, 조원득, 최현석 작가가 직접 교실을 방문하여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도왔다. 참여 학생들의 연령대가 낮아 자칫 진행이 어려울 수도 있었지만, 주안초등학교 교사들의 협조 덕분에 프로젝트가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인천아트플랫폼의 김푸르나 작가와 주안초의 이혜경 교사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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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린다고 하니, 아이들이 전부 필통을 꺼내 연필을 들고 있었어요. 손으로 그리는 그림만이 그림이라고 배워왔던 것 같아요. 손이 아닌 입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재미있어했어요. 친구들과 함께 만드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각자 자기가 만든 모양에 대해 설명을 주고받기도 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김푸르나 작가)

“창의적 체험활동 프로그램이 있기는 했지만 직접 작가들이 학교에 찾아와서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은 처음이었어요. 평소에 미술 수업을 할 때에 비해 더 좋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고 아이들이 직접 작가들을 만나는 기회가 생겨 좋았어요. 저학년은 활동 중심의 수업이 많은데, 고학년으로 갈수록 활동할 기회가 줄어들어요. 아이들이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 좋았습니다.” (주안초 이혜경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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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숨결이 만든 공공미술 작품은 주안초등학교 신축부지의 공사장 가림막으로 이용될 예정이다. 삭막한 도시의 공사장이 아이들의 숨결과 온기로 채워지는 것이다. 비록 학교는 80여 년 지켜온 자리를 떠나지만, 활기를 잃은 구도심은 도시재생 사업과 예술작품으로 인해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다.

글 / 시민기자 김진아




인천에 울려퍼진 아시아 6개국의 하모니-2016 인천아시안유스콰이어 2016.10.28~29, 신도 및 송도 트라이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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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에어플레인 피플’입니다.-<또 다른 이민, 해외입양>전, 한국이민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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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피플’(boat people)이라는 표현이 있다. 말 그대로, 보트를 탄 사람들. 1974년 발발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배를 타고 피란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베트남 난민들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표현이다. 난민 하면 떠올리게 되는 가장 고전적인 표상이지만 불행히도 보트 피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를테면 북아프리카 보트 피플에게 꿈의 섬으로 여겨지지만 결국엔 죽음의 섬이 될 운명인 이탈리아 최남단에 위치한 섬 ‘람페두사’ 그리고 시리아 내전을 피해 탈출하던 중 터키 해변에서 비극적으로 숨진 채 발견된 세 살 남자아이 ‘아일란 쿠르디’ 등은 결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에어플레인 피플’(airplane people)이라는 표현도 가능하지 않을까. 비행기를 탄 사람들. 이는 물론 정식 시민권을 얻지 못한 단어이긴 하지만 ‘해외 입양아’를 염두에 두고 느슨한 상상력을 발휘해 적용해본 비유다. 과연, 그들은 하나같이 비행기를 타고 타국의 가정에 양자 혹은 양녀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가. 배를 타고 입양 가정으로 넘어간다는 이야기는 과문해서인지 들어본 기억이 없다. 해외입양인 그리고 에어플레인 피플. 오는 11월 27일까지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또 다른 이민, 해외입양’ 특별전을 둘러보던 중 문득 머리를 스쳐간 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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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를 통해 새로 알게 된 놀라운 통계가 하나 있다. 1948년에서 2004년에 이르기까지 총 50만여 명의 전 세계 입양인들 중 무려 1/3에 해당하는 수치가 바로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토록 많은 수의 해외입양인을 배출한 한국의 시대사적 맥락이 존재할 것이다. 그 기원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부터 비롯된다. 전쟁으로 인해 한국에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양산되었고, 종전 이후 오갈 데 없는 고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해외입양이 시작된다. 그리고 1960년대에서 80년대 중반까지 이르는 시기, 국가 주도의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빈곤 가정과 미혼모들로부터 태어난 아이들이 새로운 해외입양 ‘수출’ 자원으로 대두되기에 이른다. 여기에 제동이 걸린 결정적 계기가 1988년 한국의 서울올림픽 개최 즈음이다. 다수의 서구 언론들이 한국의 해외입양아 문제를 두고 ‘아기 판매’(Babies for Sale)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써가며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의 ‘아기 수출 산업’은 정점을 찍고, 2007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처음으로 국내입양아 수(1,388명)가 해외입양아 수(1,264명)를 상회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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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그리고 유럽 대륙의 여러 가정에서 한국인 입양아를 받아들이게 된 배경, 그 맨 앞줄에는 저개발 빈곤 국가의 불우한 아이들을 보듬겠다는 종교적・사회적 이타주의 심성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전시의 한 공간을 채우고 있는 ‘낯선 땅 낯선 가족과 입양인’ 섹션에서는 이처럼 어린 나이에 낯선 해외 가정에 새 둥지를 튼 한국인 입양아들 그리고 그 가족의 평온한 일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 해외입양아 현실을 둘러싼 차가운 진실 역시 존재한다. 1983년생 한국에서 태어난 김 스티븐(Kim Steven)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그는 흑인 혼혈이었다. 또한 그는 어릴 때 뇌성마비를 앓아 양쪽 눈의 시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급기야 하반신마저도 쓰지 못하게 되는데, 소위 ‘장애인’ 신분으로는 미국 비자가 발급되지 않아 입양 절차를 밟는 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밖에 마음이 쓰이는 지점은 하나 더 있다. 해당 전시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한국인과 같은 동양 출신 아이들을 자신의 가정에 입양아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서구인의 심리 저 은밀한 귀퉁이에 혹시 동양을 신비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는 없었을지 여부도 가만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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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마지막 ‘입양인의 귀환’ 섹션은 가장 흥미로운데, 관람객으로 하여금 ‘귀환’(歸還)이라는 단어의 간단치 않은 의미에 대해 일깨워준다. ‘귀환’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다른 곳으로 떠나 있던 사람이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거나 돌아감.”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다. 1968년 한국의 부산에서 태어나 그 이듬해 벨기에로 입양된 아이. 성인이 된 그는 이제 제 2의 고향이라 할 벨기에 또한 벗어나 세계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예술가 및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이름은 “미희 나탈리 르무안느”(Mihee Nathalie Lemoine). 두 살 때 벨기에로 입양된 그에게 양부모가 입양서류에 적혀 있던 ‘조미희’라는 이름에서 ‘미희’를 가져와 ‘나탈리’라는 서양식 여자아이의 이름을 덧붙인 뒤, 자신의 성 ‘르무안느’를 더해 마무리한 이름이다. 그런데 후일 친모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본명이 ‘김별’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최종적으로 그의 이름은 세 개가 된다. 조미희, 미희 나탈리 르무안느 그리고 김별.

조미희=미희 나탈리 르무안느=김별의 입장에서 ‘귀환’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목적지는 조미희인가, 미희 나탈리 르무안느인가, 아니면 김별인가. 그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그에게는 ‘집’(home)이라는 관념 역시 좀 독특한 것이다. 어느 나라이건 “집을 빌릴 수 있는, 사방의 벽으로 둘러싸여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이면 자신에게는 ‘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아무래도 그에게 전통적인 용법의 ‘귀환’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조미희=미희 나탈리 르무안느=김별에게 ‘귀환’이란 조미희, 미희 나탈리 르무안느, 김별 어느 하나도 아닌, 그러나 그 전부를 더한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에어플레인 피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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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 가지 언급해두고 싶은 지점이 있다. 이번 전시는 한인 해외입양아들 중 ‘이중의 소수자’라 할 흑인 혼혈아의 존재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하고 있다. 가령 미국인 김 원선시오 신부가 운영한 ‘성 원선시오의 집’의 존재가 그렇다. 그는 인천 부평에 위치한 미군기지 ‘애스컴 시티’ 외에도 의정부, 동두천, 군산, 송탄 등의 기지촌들을 돌면서 (모두가 생모는 아니었을) 혼혈아 어머니들을 만나 한국 내 혼혈아 문제 해결에 헌신한 인물이다. 김 원선시오 신부의 존재는 우리가 한인 해외입양아에게 품고 있는 일반적인 표상이 얼마나 좁은 것이었는지 찬찬히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글 / 이종찬(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사진 / 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