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는 불쌍하다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지난 6월 16일과 17일,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는 ‘스테이지 149’의 일환으로 극단 골목길의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박근형 작, 연출)를 상연했다. ‘스테이지 149’는 인천문화예술회관의 도로명 주소에서 착안하여 만든 기획시리즈 명으로, 공연예술의 현주소를 관객에게 소개하겠다는 목표로 2014년 시작되었다. 전국 투어를 다니는 공연의 경우 대중성이나 흥행여부를 고려하기 때문에 이전까지 인천에서 관람할 수 있는 공연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인천문화예술회관의 ‘스테이지 149’는 작품성과 예술성을 우선시하여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멀리 가지 않고도 만날 수 있도록 인천 시민들에게 소개한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는 2016년 대한민국의 탈영병 이야기, 2004년 이라크 팔루자에서 피랍된 청년의 이야기, 2010년 초계함의 침몰로 죽은 해군의 이야기, 일제강점기 ‘자살특공대’ 가미카제의 일원이 된 조선 청년의 이야기 등 네 가지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겨있다. 네 가지 이야기 속 인물들은 시대도, 장소도 다르지만 모두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다. 자신의 죽음과 희생을 자랑스럽게 여기겠다고 말하는 가미카제의 청년과,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군대에서 탈영한 청년 사이에 70여 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은 ‘국가가 개인에 우선한다.’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개인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고 있음을 시사한다.

군대에서 일어나는 죽음을 다루었다는 점만 두고 보면 네 개의 이야기는 모두 보편적인 공감을 얻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네 개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미카제에 지원한 조선인 청년은 엄마와 동생이 일본인들에게 더 이상 무시당하며 살지 않기를 바라며, 민간무장단체에 피랍된 청년은 사랑하는 여자친구와의 결혼 자금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라크를 찾은 것이었다. 침몰하는 초계함에서 군인들은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부대를 이탈한 탈영병은 홀로 힘겹게 살아가는 아버지를 찾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내하기로 마음먹었던 개인들은 의도치 않게 국가를 위해서도 똑같이 희생할 것을 강요당한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개인은 더 이상 사랑하는 이들을 지킬 수 없고, 그들의 행복 역시 지킬 수 없다. 국가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가. 개인의 희생을 통해 국가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연극의 말미에서, 탈영병은 제대를 코앞에 남겨두고 탈영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군대 밖으로 나가봤자 잘 살 자신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집도, 학교도, 군대도, 어차피 세상이 전쟁터고, 우리 모두가 군인’이라고 말하며 ‘사람이 어떻게 그냥 참고 살아요, 우리가 그래도 사람인데.’ 하고 목 놓아 외치는 그의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받았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국가에게 희생당한 군인들의 모습은 팀의 동료들의 눈치를 보느라, 친구들, 가족들의 눈치를 보느라 각자의 행복을 포기해야만 했던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는 것이다. 이렇게 군인의 죽음이라는 특수한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된다.

이번 공연이 특히 더 많이 회자되었던 이유로 지난 해 예술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블랙리스트’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를 연출한 박근형 연출가가 지원금 포기를 종용 당했다고 폭로하며 정부의 문화예술 검열 논란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공개된 작품인 만큼 화제성도 높았지만, 오래 기다린 만큼 완성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평이 줄을 이었다. 문화예술 지원제도가 단순히 예술가들의 생존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자유롭게 작품을 선택하고, 좋은 작품을 관람할 권리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였다.

예술가들이 국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희생을 요구당하지 않고, 온전히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기를, 그로 인해 많은 관객들이 좋은 작품을 선택하여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글, 사진 / 인천문화통신 3,0 시민기자 김진아




옛사랑의 기억으로 떠올리는 인천이야기

낙섬과 경인선 기차역

모든 기억은 개인적이며 재현될 수도 없다. 기억이란 것은 그 기억을 갖고 있는 개개의 사람이 죽으면 함께 죽는다. …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린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진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흔히 인천에 정체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인천의 정체성이 없다는 것은 곧 ‘인천’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표상, 이미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인천을 표상하는 이미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인천의 정체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말 인천은 정체성도 지역성도 없는 도시일까요?
이미지로 포착하지 못한 과거는 개개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인천의 과거를 기억하는 개개인이 사라지기 전에, 그들의 기억을 꺼내 기록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인천문화통신 3.0에서는 기획연재를 통해 인천의 과거에 대한 기억,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록하여 인천의 ‘이야기첩’을 만들어 봅니다.

“달빛 밝은 고요한 바다로 오세요.”
지금은 다 메꿔버려서 없어졌지만, 나 어렸을 때는 용현동 쪽에 낙섬이 있었거든. 뭍에서 낙섬까지 둑을 쌓아놨는데, 끝이 까마득하게 보일 정도로 둑이 길었어. 둑 왼쪽으로는 꽃도 있고, 나물도 있고, 짠 물 먹고 자라는 식물들이 잔뜩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바닷물이 들어와서 들어가 수영하는 아이들도 있었지. 바닷물이 들어오면 둑 아래로 물이 찰랑찰랑하는데, 거기 송사리도 헤엄쳐 다니고, 밤게, 칡게도 기어 다녔어. 집에서 저녁 먹고 나와서 둑 위에 앉아 있으면 발에 시원한 바닷물이 찰랑거리고 닿는데 그 느낌이 너무 좋은 거야. 여름에는 해가 기니까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앉아서 노래도 부르고, 책도 읽었어. “달빛 밝은 고요한 바다로 오세요.”하는 노래. 그 노래를 제일 많이 불렀지.

백합도 엄청나게 많아서 한 번 들어가서 백합을 캐면 한 가득 이고, 지고, 들고 나왔어. 철사로 스-윽 긁으면 째까닥, 하고 걸려. 거기를 파면 백합조개가 나오는 거야. 한번 쓱 긁으면 한번만 째까닥하는 게 아니라 째까닥, 째까닥, 째까닥, 백합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바위 사이에 불을 떼서 그 자리서 바로 구워먹었지. 백합이 탁 터져서 입을 벌리면 바로 주워 먹기 바빴어. 바지락은 뻘을 먹어서 모래가 지근지근한데, 백합은 그런 게 하나도 없었어.

국민학교 때는 부모님이랑 같이 갔는데,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친구들이랑 놀러 다녔어. 한 번은 교복을 입고 동네 친구들이랑 함께 낙섬에 놀러갔다가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어. 조개를 캐러 들어가려면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했거든. 조개가 있는 안쪽은 하얀 모래사장이었는데, 가는 길은 발이 푹푹 빠져 허리까지 잠기는 뻘이었던 거야. 그 때 뻘에서 건져내 준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었어. 개흙이 교복에 잔뜩 묻어서 나중에 엄마한테 엄청 혼났지.

중학교 때 배구부를 했는데, 서울에 있는 학교에서 우리 배구부를 스카우트해 갔어. 그때는 전철도 생기기 전이라 친구들이랑 같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학교를 다녔어. 매일 아침에 동인천역에 가서 경인선 기차를 타는 거야. 칙-칙, 폭-폭하고 시끄러운 그 기차. 기차타고 학교 다니면서도 재밌던 일들이 되게 많았어.

매일 같은 시간에 학교를 다니니까, 매일 같은 기차에서 옆 학교 3학년 오빠들을 마주치는 거야. 잘 생기고 공부도 잘 하던 오빠들이라 나랑 내 친구들이 좋아했지. 그 때는 여학생, 남학생이 알은 채 하고 떠들면 어른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욕을 했으니까, 옆에 나란히 서서 슬쩍 뭐 물어보고 소곤소곤 대답하고 그랬어. 하루는 다 같이 학교 가지 말고 서울역에서 내려 놀러갈 궁리를 한 거야. 그 때는 교복이랑 같이 학생 모자를 꼭 써야 했는데, 새 거를 그대로 쓰면 촌스러운 거고 그걸 마구 태우고 긁고 해서 헌 것으로 만들어서 쓰고 그랬어. 우리는 서울이 낯설어서 오빠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녔어. 동대문 시장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놓칠까 전전긍긍했는데, 사람들 머리 사이로 그 지저분한 모자들이 보여서 그것만 따라다녔지.

언젠가는 친구들이랑 학교 끝나고 동인천역에서 내려 자유공원을 올라가고 있었는데, 누가 막 쫓아오는 거야. 보니까 동인천역에서 구두를 닦고 있던 아이인거야. 근데 그 아이가 내가 팔에 끼고 있던 책 한 권을 탁 채가는 거야. 내 것도 아니고 우리 언니 거였는데. 돌려달라고 쫓아가니까, 그 애가 ‘책을 찾으려면 모일 모시에 공설운동장으로 나와라’ 그러는 거야. 

겉모습도 추레하고, 기차역에서 그렇게 구두를 닦고 있던 아이니까, 너무 싫었던 거지. 자기가 공고 다니는 학생이라고 말을 하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어뜩하냐고 걱정을 하고 있으니까, 친구 하나가 공고 다니는 오빠 중에 다들 벌벌 떠는 오빠를 안다고, 그 오빠 이름을 대면서 우리 오빠라고 하면 꼼짝 못 할 거라는 거야. 그래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공설운동장으로 나갔지. 우리 언니 책은 찾아야하니까. 공설운동장으로 나갔더니, 그 놈이 내 책을 들고 서 있더라고. 그 오빠 이름을 대면서 우리 오빠라고 했더니, 그 아이가 책을 돌려주는 거야. 나도 그 때 되게 못됐었어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그 아이한테 침을 뱉고 와 버렸어.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미스 때였는데, 친구들이랑 동인천역 앞 다방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거든. 근데 저 건너 테이블에 앉은 남자가 나를 계속 쳐다보는 거야. 한참 얘기를 하다가 차를 다 마시고 일어나는데, 그 사람이 얼른 일어나서 나를 붙잡는 거야. 그리고 자기를 모르겠냐고 묻더라고. 자세히 보니까 동인천역에서 구두를 닦던 그 아이인거야.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둘이 다방에 남아 한참을 떠들었어. 듣고 보니 부모 없이 고학을 하던 학생이었던 거야. 한 해는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고, 한 해는 기차역에 나와 구두를 닦으며 돈을 벌었다고, 고등학교 졸업하는 데 8년이 걸렸대. 그 얘기를 듣는데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계속 사과를 했어. 

그리고 그 전 얘기로 돌아가서, 내가 왜 좋았는지 그 얘기를 들었어. 내가 매일 동인천역을 가서 통학을 하니까 아침에 학교 갈 때, 저녁에 학교 끝나고 올 때 나를 봤다고 하더라고. 한 번은 내가 통학증을 안 가지고 와서 개찰구에 있는 역무원에게 사정을 하고 애교를 떠는 모습을 봤대. 통학증이 없으면 기차를 못 타는데, 맨날 얼굴을 보니까 역무원도 ‘오늘 하루만 봐준다.’하면서 봐주고 그랬거든. 그렇게 애교를 부리고 친구들이랑 조잘거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고 하더라고.

근데 이거 이름은 안 나가는 거지? 우리 집에 영감님이 들으면 큰일 나. (그분이랑 결혼하신 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때 내가 또 콧대 높이고 튕겨버렸어. 영감님이랑은 선 봐서 결혼한 거야. 이름 나가면 안 돼.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인천이야기>에서는 ‘사라진 것들, 남겨진 것들’을 주제로, 인천의 60세 이상 어르신 스물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연극과 영화로 만드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수업시간에 오고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인천이야기첩’을 연재합니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인천이야기>는 인천광역시와 인천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 주관하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주안노인문화센터의 협력으로 ‘작업장 봄’이 운영합니다.

 

글, 인터뷰 및 정리 / 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김진아
사진 출처 / 네이버블로그 ‘인천의 어제와 오늘’
네이버블로그 ‘애관(愛觀) 보는 것을 사랑하다’




인천공연장상주단체 문화공작소 세움

행사일/ 2017.06.23 19:30
장소/ 부평아트센터 달누리 극장
촬영,편집,구성/ 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김유라




2017 거첨뱅인영감굿

∗ 갤러리 사진을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행사일/ 2017년 6월 3일 (토)
장소/ 인천무형문화재전수관 야외공연장
주최 : 황해도굿 한뜻계보존회
사진/ 인천문화통신 3.0 시민기자 민경찬




아트플랫폼 입주예술가 창작지원 전시 <제보>展

∗ 갤러리 사진을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행사일/ 2017.06.02~20417.07.09
장소/ B동 전시장
사진/ 인천문화통신 3.0 시민기자 민경찬




i-신포니에타 해피콘서트

∗ 갤러리 사진을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행사일/ 2017년 6월 11일(일)
장소/ 엘림아트센터 엘림홀
사진/ 인천문화통신 3.0 시민기자 민경찬




신포동, 떠난 청년들을 되돌리려면?

‘신포청년문화, 비판 넘어 비전 품다’
– 인천청년문화정책포럼 –

요즘의 인천 청년들에게 ‘친구들과 모여 놀 때 주로 가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구월동이나 부평, 송도신도시를 떠올린다. 반면 20년 전의 인천 청년들, 그러니까 지금은 중장년이 된 이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우리는 신포동에서 놀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처럼 신포동은 2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청년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 그야말로 핫플레이스였다. 하지만 시청 청사가 이전하고, 인천여고, 대건고, 숭덕여중,고 등 많은 학교들이 시청을 따라 이전하면서 신포동을 포함한 중, 동구 일대는 낙후하기 시작했다. 행정에서는 개항장 문화지구를 조성하는 등 수년째 구도심 재생사업에 힘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청년들에게 신포동은 낯선 옛날 동네에 불과하다. 

그런 신포동을 발판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세 사람이 모였다. 지난 6월 1일 오후 3시, 인천생활문화센터에서 ‘신포청년문화, 비판 넘어 비전 품다’를 주제로 네 번째 인천청년문화정책포럼이 열렸다. 이날 사회를 맡은 인천지속가능발전협의회 장한섬 교육문화분과위원장은 포럼을 시작하기에 앞서 ‘오늘 포럼에서 나눈 논의를 통해 단지 청년들만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을 통해 신포동의 문화가 지켜지고 발전하는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가장 먼저 고경표 큐레이터가 ‘인천 음악생태계의 자생력과 제도적 한계’를 주제로 발제를 진행했다. 고경표 큐레이터는 지난해 인천 원도심의 음악 장소, 음악인들에 대한 기록을 모아 신포동에 위치한 임시공간에서 <비욘드 레코드> 전시를 열었다. 그가 전시를 위해 원도심의 음악생태계를 조사하며 발견한 키워드는 바로 ‘자생성’이었다. 50년대 신포동에 주둔하던 미군과 지역민의 교류로 자연스레 조성된 음악생태계는 물론이고, 신포동이 인천 청년문화의 중심지였던 7,80년대, 서울과 인천 일대의 음악인들이 신포동을 아지트로 모여 들던 90년대 모두 지역 음악인들의 자발적인 노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전성기였다. 또한 여전히 유지되는 구도심의 음악공간들과 그러한 음악공간을 바탕으로 기획하여 지역 음악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축제 ‘사운드바운드’ 역시 신포동 일대의 음악생태계가 여전한 자생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자생적으로 자리 잡고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하며 발전하는 지역의 문화생태계가 행정에 의해 그 동력을 상실하는 상황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며 지역 문화예술인과 관의 협조로 이뤄낸 도시재생의 사례를 몇 가지 소개했다. 그가 소개한 일본의 야마구치 예술정보센터와 영국의 항구도시 브리스톨에 위치한 복합문화센터 워터셰드는 모두 관의 주도 하에 국가 비용으로 운영되지만, 내부의 콘텐츠 생산과 활용 및 운영은 지역의 문화예술인과 시민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특징을 가진다. 고경표 큐레이터는 사례를 소개하며 많은 시간과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관이 장기적인 시각을 가지고 지역 문화예술인과 협업하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로 발제를 맡은 이의중 건축가는 신포동에서 건축재생을 주제로 3년째 건축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지난 3년의 작업들을 소개하며 ‘신포동에서 발견한 장소를 위한 건축’을 주제로 발제를 진행했다.
그는 연고도 없는 인천에 와서 다양한 건축 작업을 진행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인천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몇 가지 소개했다. 먼저 다른 지역에 비해 지역이 지닌 가치가 저평가되어 있으며 저평가된 지역이 광범위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신포동 일대는 개항을 기점으로 130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지역이며, 경제적 침체로 인해 개발되지 않은 건축 자산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많은 이들이 지역의 문제점이자 맹점으로 뽑는 행정의 무능을 인천이 매력적인 이유로 꼽았다. 지방행정의 의지가 약하고 노련하지 못했기에 사업 추진이 느렸지만, 그만큼 충분히 고민할 시간이 생긴다는 것이다. 지자체의 의지가 컸지만 그만큼 지나치게 빠르게 발전하여 가치를 발견할 시간도 없이 자본이 잠식해버린 군산과 부산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세 번째로 발제를 이어간 다인아트의 윤미경 대표는 인천이 다양한 문화유산과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에 대한 연구나 보존이 미흡하다는 것을 지적하며, 지역의 가치를 보존하고 시민들이 그를 향유할 수 있는 박물관, 미술관 등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여행객들이 지역을 방문할 때 도시경관만 보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 서점, 전통시장 등을 방문하면서 내면의 도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역 출판사로서 인천의 정체성을 모색하고 책 속에 인천의 역사를 담아내려 했던 노력을 소개하며 출판 없이는 문화도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날 토론자로 참석한 인천문화재단 문화교육팀 손동혁 팀장은 ‘항구를 통해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고, 새로운 것들에 흥미를 느낀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것들이 융합되어 재미난 일들이 벌어지던 장소가 신포동이지만 지금은 새로운 것이 형성되기 보다는 오래된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고 말하며, ‘구도심이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오래된 것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일을 벌이는 세 명의 발제자들이 앞으로도 더 많은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응원의 말을 보탰다.

또한 플로어에서 토론에 참여한 오석근 작가는 ‘행정에서 지역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은 콘텐츠와 문화예술 정책을 내놓고 있다.’고 지적하며 ‘정치적 상황에 따라 문화정책이 변화하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을 인천문화재단이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도심에서 청년을 찾는 이유는 분명하다. 청년들의 새로운 아이디어와 활기로 낙후한 지역이 다시 활기를 띠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청년들에게 구도심은 매력적이지 않다. 이날 발제를 맡은 세 명과 같이 구도심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매력을 느꼈다 할지라도, 민간에서 청년의 몸부림만으로 구도심이 다시 살아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구도심에 찾아와, 직접 그 가치를 발견하는 청년들이 발을 붙일 수 있도록,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행정의 몫이다. 청년들이 흔들리지 않고 지역의 가치를 이어갈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주는 행정의 역할을 기대해본다.

 

글/ 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김진아
사진 / 인천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라지는 인천의 옛 모습을 사진에 담다

김보섭 사진전 ‘인천 화교이야기’

지난 6월 9일 한중문화관의 화교역사관 1층 갤러리에서 사진전 ‘인천 화교이야기’가 문을 열었다. 이번 사진전은 인천의 옛 모습이 남아있는 곳들을 돌아다니며 사실적으로 사진에 담아내는 김보섭 사진작가의 개인전으로, 1980년대부터 2000년까지 작가가 직접 인천 화교들의 삶으로 들어가 남긴 기록들이다.

차이나타운이 인천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지금은 화교사회가 많이 개방되었지만, 김보섭 사진작가가 이번 사진전에서 소개한 사진들을 찍던 8,90년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많은 화교들이 배타적이었고,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한국 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이 심했다. 하지만 작가는 처음 인천에 정착하고 화교 문화를 자리하게 한 화교 1세대에 주목했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옛 문화와 삶의 모습을 기록하고자 했다.

처음 화교 사진을 찍게 된 것은 80년대 말, 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생일을 맞은 마당씨 할머니를 만났고, 그 가족의 사진을 찍어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 지금은 관광객도 많고 중식당이 즐비한 화려한 거리가 되었지만, 당시 차이나타운은 어두운 분위기의 거리였다. 작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여 사진을 찍기보다 차이나타운이 가진 어두운 분위기를 그대로 남기고 싶었다. 한 달에 20일 이상, 차이나타운을 찾아 거리를 배회하며 사람들을 만났다.

아무도 없는 집 같았지만 어떤 집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마작을 하기도 하고, 장의사가 직접 관을 짜고 있기도 했다. 마작 집에 붙어있는 빨간 봉투들이 결혼식 초대장이라는 것을 알고 중화루에서 작게 열린 결혼식에도 쫓아갔고,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집에도 찾아갔다. 거리에서 치른 장례식이나, 절에서 열리는 행사 등 말 그대로 그들이 사는 삶 자체를 쫓았다. 처음에는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는 물음에 거절을 하고 문전박대를 하던 사람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으며 만난 한 할아버지가 구정에 중국 산동성의 고향을 방문하는 데 동행해 그의 가족들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

흑백으로 담은 사진들은 그가 포착한 당시 차이나타운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를 담고 있었지만, 관찰자의 시선으로 한 발짝 떨어져 찍은 사진이 아니라 직접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함께 호흡하며 찍은 사진이기 때문인지 포근하고 정감 있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옛 모습’이라는 주제에 대한 집요한 열정으로, 인천의 화교뿐 아니라 중, 동구 일대의 옛 흔적들을 사진 속에 담는 작업들을 이어왔다. 그는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모습 곳곳에 남아있는 옛 모습을 발견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북성포구의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그 아래서는 사람들이 통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바다에 띄우는 모습을 발견하고 ‘바다사진관’을 열어 방문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또한 지금은 동화마을이 되어버린 송월동, 인천아트플랫폼 일대가 된 해안동 일대 등도 개발 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해두었다.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던 곳들은 그가 사진으로 기록한 이후에 개발이 되어 옛 자취를 감추었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배경이 된 차이나타운 역시 2000년대 이후 관광지가 되면서 옛 모습이 사라져 그곳에서의 사진작업을 중단하게 되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작가는 여전히 남아있는 옛 인천의 흔적들을 수집하고 있다. 지금은 신포동 일대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을 찍는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소란한 주점이 아니라 오래된 술집을 오랜 동안 찾아온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도 쭉 인천에서 살며 사진을 찍겠다고 말한다. 그가 담은 사진 속의 대상, 사람이나 풍경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김보섭 작가는 사진 속에 옛 인천의 모습 뿐 아니라 그 시간을 살던 사람들과 사람들의 문화를 남긴다. 시간이 흐르며 삶의 모습과 문화가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무분별하고 인위적인 개발로 만든 도시의 모습은 사람들의 삶과 동떨어지기 마련이다. 새로운 건물들, 화려한 풍경들도 모두 언젠가는 옛 흔적들이 되겠지만, 그 속에도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담길 수 있을까. 작가의 ‘옛’ 사진이 우리의 ‘지금’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때이다.

 

글, 사진/ 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김진아




해양 인천의 문을 연 선구자 이야기

2017년 상반기 작은 전시인 <광제호-머나먼 여정>이 지난 5월 22일부터 인천광역시시립박물관 2층 작은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해양 인천의 문을 연 선구자 신순정 함장과 근대식 기선 광제호에 얽힌 이야기들을 시민에게 소개하며 그동안 잊혀져 있던 지역의 선구적인 인물과 역사에 대한 선양의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며 이 전시를 기획하였다.

1부 근대식 함선 도입의 배경

전시구성은 총 4부로 나뉘어져있다. 1부에서는 근대식 함선 도입의 배경을 다룬다. 양무호와 광제호에 대한 소개로 전시의 포문을 연다. 양무호는 대한제국이 일본 미쓰이물산으로부터 함선을 구입했을 때 고종이 1903년 4월 15일 제물포항에 도착한 이 함선을 “나라의 힘을 키운다”라는 뜻으로 ‘양무호’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양무호는 하루 43톤에 달하는 석탄 소비량 등 운항 비용을 감당 할 수 없어 제물포항에 정박해 있는 날이 더 많았다. 또한 1909년 일본 해운회사에 매각되기까지 양무호는 단 한차례의 출동도 하지 못한 채 러일전쟁에 동원되는 비운을 겪었다. 양무호의 실패를 경험한 대한제국은 해관 총세무사 브라운의 발의에 따라 일본 가와사키조선으로부터 광제호를 구입하였다. 해안경비, 등대 순시 및 세관 감시에 이용하기 위한 광제호는 당시 최신의 조선 기술로 제작되었는데 무선 전신 시설이 설치되어 월미도 무선전신소와 첫 교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부 해양 인천의 문을 연 신순정 함장

2부에서는 해양 인천의 문을 연 신순정 함장에 대한 소개와 함께 조선우선주신회사, 광제호 항해사 시절의 신순정 함장, 그의 졸업증서, 사진엽서 등의 전시가 이어졌다. 신순정함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의 함장이다. 그는 한성일어학교에 재학 중 박영효의 추천을 받아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서 근대식항해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양무호의 함장으로 임명되어 제물포항에 닻을 내린 인물이다. 

3부 광제호의 여정

3부에서는 광제호의 여정을 다룬다. 1904년 12월 20일 대학제국에 인도된 광제호는 해안경비, 등대 순시 및 세관 감시 등에 이용되었다.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통감부의 관용선으로 운영되어 연안 시찰 및 연회 장소로 이용되었고,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동부 소속이 되었다. 1910년에는 무선전신시설이 설치되어 월미도 무선통신소 간의 전파통신을 실시하였다. 이후 조선우선주식회사에서 상선으로, 인천해원양성소의 실습선으로 각각 사용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해군 보급선으로 사용되던 광제호는 광복 후 일본인의 귀환에 이용되는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
 

4부 태극기 휘날리며

마지막 4부에서는 광제호에 게양되었던 태극기에 대한 이야기로 전시가 끝마쳐진다. 이 전시관에 전시된 태극기는 경술국치 전야인 1910년 8월 28일 밤 신순정 함장이 세상의 눈을 피해 고이 간직한 것이다. 광복을 기다리던 이 태극기는 신 함장이 별세한 직후인 1945년 빛을 보았다. 2017년 상반기 작은 전시 <광제호-머나먼 여정>에서는 근대식 기선 광제호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해양 인천의 문을 연 선구자 신순정 함장에 대한 소개가 다뤄진다. 이번 전시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신순정 함장의 항해사로서의 일상을 들어다 보는 계기이다. 항해사로서 행복한 미소를 띠며 사진으로 남아있는 그를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광제호-머나먼 여정>전시는 9월 3일까지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다.  

 

글, 사진/ 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최승주




2017 트라이보울 초이스 딜라이트

행사일/ 2017.06.10
장소/ 트라이보울 야외광장
촬영,편집,구성/ 인천문화통신3.0 시민기자 김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