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조정에 깔린 석모도 박석 이야기

경복궁 근정전 마당에 깔린 박석

조선시대 궁궐 정전이나 어도(御道)에는 두께가 얇고 넓적한 박석(礡石)이 깔려있다. 박석은 건물 외부 바닥을 포장하는 부재로, 경복궁 근정전의 마당인 조정(朝廷)에 깔린 박석은 거칠게 다듬어져 햇빛으로 인한 눈부심을 줄여주었다. 또한 표면이 거칠어 미끄러운 가죽신을 신은 대신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었으며, 비가 오면 자연스럽게 배수가 되도록 하였다. 박석의 자연스러운 형태와 여러 기능들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했던 조선의 건축에 어울리는 훌륭한 부재였다.

조선시대 궁궐 공사 때 사용된 석재는 돌의 중량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채석하려 했다. 1667년 종묘 영녕전 수리 때는 서울 외곽의 조계산에서 채석하였고. 18세기 궁궐 공사 때는 창의문 밖이나 남산 아래 인근에서 채석했다고 한다. 또는 민간에서 석재를 구입하거나 민간의 가옥 철거 시 나온 석재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민간의 석재는 대부분 작고 열악해서 궁궐 등에 사용하기는 부적합했다고 한다. 궁궐 공사 때 사용한 다양한 용도의 석재들은 서울 가까운 곳에서 얻었지만, 바닥에 깔리는 박석은 인천의 강화 석모도와 해주에서 채석한 것만 사용하였는데, 특히 강화 석모도 박석을 사용하였다.

1647년(인조 25) 창덕궁 공사 때 사용된 박석은 모두 강화도에서 채석되었고, 1906년 경운궁 중건을 비롯해 20세기 초 대한제국 시절에 진행된 공사에도 석모도에서 채석한 박석을 사용하였다.

강희언, <돌깨기>,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채석작업은 먼저 암석을 덮은 표토를 괭이와 삽, 가래 등으로 걷어낸 뒤, 돌을 떠낼 위치를 먹줄로 선을 그어 표시했다. 그리고 정(釘)으로 구멍을 뚫고, 정보다 굵은 비김쇠[쐐기]를 그 구멍에 끼워 쇠로 만든 큰 망치로 내려쳐 돌을 떠낸다. 돌을 떠내는 과정은 18세기에 제작된 강희언(姜熙彦, 1738-1784)의 〈돌깨기〉를 통해 확인된다. 그림을 통해 보면 두 명의 석공이 한 조가 되어 작업을 진행한다. 좌측의 석공이 돌을 떠낼 위치에 정을 세워 위치를 잡고, 파편이 튈까 봐 얼굴을 돌리고 있다. 맞은편 젊은 석공이 쇠망치로 내려치는 모습이다.

채석된 석재는 석공으로 하여금 떠낸 곳에서 다듬어 무게를 줄여 실어 나르도록 했다. 일정한 형태의 크기로 다듬는 초련, 정교한 형태의 부재로 다듬어 모양을 내는 재련을 거쳤다.

석모도에서 채취된 석재들은 어떻게 도성까지 갈 수 있었을까.

강화도의 서쪽에 위치한 석모도에서, 수운을 통해 한강 유역을 비롯해 한반도 중앙부까지도 접근할 수 있었다. 석재는 용산강(龍山江, 용산)에 하역하여, 수레에 싣고 남대문을 통과하여 도성의 공사장에 이르렀다.
겨울에는 얼음 위에서 썰매로 운송하였고, 육지에서는 마차를 사용하거나 소가 끄는 달구지를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중량이 많이 나가는 석재는 높은 마차에 싣기가 어려워 바퀴가 낮은 수레를 이용했다. 육로 운송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도로의 상태 점검이었다. 운송이 이루어지기 전 도로를 점검하고 요철이 있는 부분을 보수한 후 운송이 시작되었다. 궁궐의 출입문과 요철이 있는 길은 문턱 부분에 흙이나 모래를 부어 길을 평탄하게 한 뒤 이동하였다. 이동된 석재들을 해당 장소에 배치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다듬어 공사를 완성하였다.

박석은 궁궐 정전처럼 위상이 높은 건축공간에 한정한 부재였다. 심지어 경회루에 박석을 까는 것조차 꺼렸다고 하니 박석이 깔린 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밖에도 석모도 박석은 궁궐뿐 아니라 강화 돈대축조에도 사용이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까지 구들장에 사용되었으며, 오늘날 문화재수리에 사용되는 박석도 석모도에서 채석됐다. 2008년 광화문 복원공사, 2009년 숭례문 복구공사가 바로 대표적인 경우이다. 석모도 채석장 위치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의 해명산이다. 한 번쯤 방문하여 채석하던 옛 모습을 그려보면 어떨까.

해명산 표지석

글·사진 이정화(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호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 보물 1호 흥인지문(興仁之門)

아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이 알고 있는 문화재 지정 사항일 것이다. 국보 1호와 보물 1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국민적인 상식이다(아마 간첩들도 알 듯하다). 문화재에 부여되는 번호는 그 중요성이나 가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그야말로 행정적으로 부여한 일련번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호’가 갖는 상징성 때문인지 일반 국민들에게 숭례문이나 흥인지문이 갖는 의미는 다른 문화재들보다 더 크게 다가온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08년 2월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해 상부 목조 문루가 무너져 내렸을 때 많은 국민들이 충격과 절망감, 슬픔을 느꼈다. ‘국보 1호’가 갖는 상징성이 그만큼 큰 것이었고, 국민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도 그에 비례해 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눈을 인천으로 돌려보자. 국가가 지정한 국보나 보물처럼, 인천에는 인천광역시가 지정한 문화재들이 있다. 비록 국가 지정문화재보다 가치가 다소 낮을 수는 있지만, 인천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인천시가 지정한 문화재(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문화재자료, 민속문화재 등)의 1호를 아는 인천시민은 얼마나 될까? 아마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문학초등학교 내 인천도호부 청사

인천시의 유형문화재 1호는 ‘인천도호부청사’(仁川都護府廳舍)이다. 조선 시대 인천도호부의 관아 건물로, 오늘날로 치자면 인천시청쯤 된다고 할 수 있겠다. 문화재로 지정된 때는 1982년이다. 인천도호부청사는 미추홀구 문학동의 문학초등학교 교정 한 켠에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객사와 동헌뿐이다. 2016년에는 문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도호부 건물의 것으로 보이는 기초석이 발굴되기도 했다. ‘인천도호부청사’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인천이라는 지명의 기원이 되는 곳, 즉 원인천(原仁川) 지역을 상징하는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인천도호부청사는 인천의 유형문화재 1호임에도(물론 이미 언급한 대로 문화재 지정 번호는 문화재의 중요성과는 상관없기는 하지만) 문학초등학교 교정 안에 위치하다 보니 일반인의 발길은 뜸하다. 게다가,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이겠지만, 철제 울타리를 둘렀는데 그 모습 때문에 더욱더 쓸쓸하고 차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문화재로서 ‘인천도호부청사’가 엄존하고 있음에도 일반 시민들은 ‘인천도호부 청사’라면 아마도 문학경기장 맞은편에 위치한 건물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 문화재인 도호부청사에서 문학경기장 방향으로 약 500여m 떨어진 곳에 도호부청사를 2002년에 재현(복원이라기보다는 재현이 맞을 것 같다)해 놓은 것이다. 1871년에 만들어진 ‘화도진도’(花島鎭圖)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객사와 동헌 등을 재현하였다. 평소에 전통, 민속문화와 관련된 행사가 자주 열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재현된 인천도호부청사의 객사

그런데 재현이 잘 이루어졌느냐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아쉬운 점이 있다. 재현된 ‘도호부청사’가 시민의 문화공간이자 휴식공간으로 활용되는 것도 좋지만 ‘재현’되었다는 것은 명칭에서 분명히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재현 건물의 안내판에는 부기 없이 ‘인천도호부청사’라는 이름만 붙어 있다. 물론 설명 내용을 읽으면 재현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아마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정확한 정보 제공이 아쉬운 부분이다. 재현 공간에 대한 명확한 정보 제공과 아울러 현재 문학초등학교 내의 도호부청사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방안도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인천도호부청사 재현 건물 입구

‘인천도호부청사’에서 또 하나 아쉬운 점은 바로 그 문화재 명칭 자체이다. ‘청사’(廳舍) 라면 일반적으로 관청(官廳)의 건물을 일컫는다. 용어의 의미로만 따지자면 도호부도 관청이었으니 틀리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청사라는 표현은 근현대적 느낌이 진하게 배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청사’라는 용어가 나오기는 하니 무조건 근대부터 썼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편찬된 고종과 순종실록을 제외하면 건물이라는 의미로 ‘청사’를 사용한 경우는 인터넷 조선왕조실록(바로가기)에서 고작 3건만이 검색된다. 전통시대의 일반적인 표현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청사’가 아니라 ‘관아’(官衙) 라는 용어로 바꾸면 어떨까? ‘관아’는 과거 실제 일반적으로 사용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전통’도 변화한다고는 하지만 관아로 바꾸면 그래도 우리의 전통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인천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그중에는 ‘인천은 정체성이 약한 도시다’, ‘인천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정책이 부실하다.’ 등등 걱정과 안타까움의 목소리들이 대부분이다. 이 글을 빌어 제안해 본다. 인천의 정체성 찾기는 전통시대 인천을 상징하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호 ‘인천도호부청사’를 어떻게 자리매김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해 보는 것은 어떨까?

·사진 안홍민(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강화도의 목장 이야기

목장(牧場) 하면 떠오르는 곳이 바로 제주이다. 한라산의 중산간지대 드넓은 대지에 펼쳐진 목장과 뛰어다니는 말떼는 아름다운 풍광과 더불어 제주도의 대표적인 문화 이미지이다. 전근대(前近代)시기 말은 국방, 교통, 운송, 교역 등 다양한 방면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가축이었다. 특히 도로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육상 교통수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키우고 관리하는 일은 “군국(軍國) 사무(事務)” 즉 “나라를 지키는 일과 같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강화도에도 목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시대 강화도는 제주를 제외한 전국의 130여 목장 중 이름난 곳이었다. 강화에 처음 목장이 생긴 것은 기록에 명확히 나타나 있지는 않다. 다만 몽골과의 화친 이후 개경에서 가까운 강화에 목장을 설치해 말을 기르지 않았을까 짐작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강화도에 목장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강화는 제주만큼 따뜻하지 않아 겨울철 말에게 먹을 건초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 등의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도성과 가까워 위급 시 말의 수송이 편리하고 상시적인 관리가 쉽다는 점, 물과 풀이 풍부해 말 사육에 적합했던 점 등은 강화 목장 설치의 근거가 되었다.

강화도의 목장은 태조 이성계가 탔다는 ‘사자황(獅子黃)’과 효종 대 전략적으로 길렀던 ‘벌대총(伐大驄)’의 산지로 유명했다. 아울러 강화도의 각 목장에는 말뿐만 아니라 소나 양, 염소 등과 같은 가축을 기르기도 했으며 그 규모도 상당했다. 하지만 강화의 목장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축소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피폐해진 경제 상황에서 목장의 운영보다 백성의 곤궁한 삶을 바꾸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강화의 목장은 농경지로 바뀌었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폐지된다.

벌대총을 기른 진강목장의 석축 담장(ⓒ인천시립박물관)

현재 강화도에는 진강목장(양도면), 길상목장(길상면), 북일곶목장(화도면), 매음목장(삼산면)만이 그 흔적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두꺼운 목장의 석축 담장이 우뚝 솟아 있는 제주도의 말목장과는 달리 방치되어 훼손되어 가고 있다. 이제라도 사라질 위기에 처한 강화도 목장유적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하다못해 목장의 흔적이 남은 곳에 안내판이라도 세웠으면 좋을 듯하다.

그 옛날 사자황과 벌대총이 뛰어놀던 강화도의 목장은 이제 상상 속에서만 그려볼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인천 시민께 그 흔적이라도 알려 강화의 또 다른 문화 이미지를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글 / 정민섭(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상상속의 자유로운 연미정(燕尾亭)

월곶돈대 홍예문

연미정에 가기 위해 차를 주차하고 별 기대 없이 약간의 언덕을 올라갔다. 월곶돈대 홍예문을 들어서자 상상하지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탁 트인 정자와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그것이다. 시원한 풍광 너머로 연미정에 올라 바라보는 조강은 쓸쓸하고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연미정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바다로 흘러나가는 곳에 있다. 그 모습이 제비 꼬리와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지금이야 북한과 가까워 저 바다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지만, 이곳은 한양으로 들어가는 뱃길의 요충지였다. 세곡을 실은 배들이 바로 연미정 아래 정박하여 조수를 기다렸다 출발하곤 했던 곳이니 얼마나 왁자지껄했을까. 그 뱃사람들의 모습은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만 남았다.
그 이전으로 올라가면 고려 고종 31년(1244)에 시랑(侍郞) 이종주(李宗冑)에게 명하여 구재생도(九齋生徒)를 모아 연미정에서 하과(夏課:여름 공부)를 하고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다. 그렇다면 최소 770년 전에도 연미정의 여름은 공부하기에 알맞은 장소였던 듯하다. 지금도 더운 여름날 연미정에 오르면 느티나무의 그늘과 북녘에서 불어오는 산들산들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조선시대 부산포, 내이포, 염포에 설치한 왜관에서 일본 거류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는데(삼포왜란) 그 폭동을 진압한 공으로 황형에게 연미정을 하사했다. 지금도 그 인연으로 황 씨문중이 이곳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또 정묘호란 때는 금나라 부장 유해(劉海)가 바로 이 연미정에서 조선과 화친하였다. 연미정은 그곳에서 역사의 영화와 치욕을 모두 겪었지만 아무 말 없이 그대로여서 더욱 마음이 쓰이는지 모른다.
지금은 한강과 임진강에서 흘러 내려온 강물만이 자유로이 이곳 앞을 지날 수 있지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시끌벅적 붐비던 연미정을 상상해 보며 다시 그 영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연미정과 느티나무

글·사진 / 홍인희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부평2동, 삼릉마을

부평은 전근대 시기 넓은 평야를 이룬 농업의 중심지였다. 이런 모습은 1899년에 인천과 서울을 잇는 우리나라 최초 철도인 경인선이 개설되면서 점차 그 모습이 변화했다. 일제는 부평지역의 토지와 쌀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부평역을 통해 인천항으로 반출되었다. 또한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중일전쟁의 발발과 이에 따른 원활한 무기 공급을 위해 군수물자 제조·보급공장인 조병창과 더불어 다양한 군수공장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40년에는 부평을 인천으로 편입시키고 조병창을 더욱 확장했다. 이런 변화는 부평지역의 모습을 급격하게 바꾸어 놓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부평 곳곳에 남아 있는 군수공장의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이다.
부평 최초의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는 1937년 일본의 히로나카상공[弘中商工]이 현재 부평2동에 조성하였다. 이후 무리한 확장으로 경영난을 겪던 히로나카상공을 미쓰비시가 인수하면서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도 미쓰비시의 소유가 되었다. 미쓰비시는 한자로 삼릉(三菱)이라 쓰는데 이런 연유로 지금도 부평 2동 및 인천지하철 1호선 동수역 주변은 삼릉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미쓰비시에서 ‘미쓰’는 삼, ‘비시’는 마름모, 즉 ‘세 개의 마름모’를 뜻한다.
미쓰비시는 2차 세계대전 때 전투기를 정부에 납품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와 함께 성장한 대표적 전범(戰犯)기업이다.
(좌측은 일본의 대표적 재벌그룹 미쓰비시(Mitsubishi)의 로고)

 

1948년 당시 사진 (출처: Norb-Faye)

위 사진은 1948년 당시 부평의 모습이다. 사진의 제일 위쪽에는 미쓰비시 공장이 있으며, 그 아래로 사택, 합숙소, 공동목욕탕 등이 있다. 이중 미쓰비시 공장 자리는 미군 부대가 주둔하였다가 한국군 부대를 거쳐 2002년부터 부평공원이 되었다.

 
1947년 항공사진, 미쓰비시 공장 및 사택 위치
(출처: 인천시 지도포털)
  2016년 항공사진
(출처: 다음지도)

미쓰비시 군수공장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강제징용(강제노역)을 피하고자 입사했지만, 그렇다고 처우가 좋았던 건 아니었다. 이들은 오전 8시부터 하루 10시간 근무하며 낮은 임금을 받았다. 또 일본인들만 구내식당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부실한 도시락을 가지고 여럿이 모여 식사를 해결했다. 이렇듯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일본인과 차별을 받았다.

지도에서 보다시피 미쓰비시 공장을 가려면 철길을 건너야 했다. 출퇴근길 매일 위험한 철길을 건너다보니 인명사고가 빈번히 일어났다. 이 밖에도 공장에서 각종 기계를 다루면서 손, 팔 등을 다치거나, 절단되는 사고가 잦았다. 그런데도 미쓰비시는 제대로 된 의료시설을 갖추지 않았으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인 노동자의 몫이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던 군수공장 취직도 이름만 다를 뿐 강제징용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안남로 부근에 조성된 주택지는 공장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곳으로 구(舊)사택이라 불린다. 주택 일부는 철거와 증축 등으로 형태가 바뀌기는 했으나 당시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건물의 끝에는 공동화장실을 두어 사용하였는데, 그 입구가 너무나 비좁았다.

부영로 부근의 신(新)사택은 구사택보다 나중에 지었는데 내부 구조는 방1 , 부엌 1로 같다. 그러나 방에 깔리는 다다미 크기로 볼 때 신사택이 7조 1반, 구사택은 4조 반으로 신사택이 구사택보다 조금 더 넓었다. 일반적으로 다다미 한 장의 크기는 약 180X90.0cm 정도로 이곳에서 몇 명이나 함께 생활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2016년 수치지도, 남아있는 줄사택 위치   구사택지 공동화장실(2016년 촬영)
 
구사택지 전경(2016년 촬영)
 
 
신사택지(2016년 촬영)
 
2018년 일부 철거된 현재 모습

얼마 전 신사택을 다시 찾았을 때 건물 일부가 철거되고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들 사택은 올해 초, 도시의 흉물이라는 이유로 전부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생활여건 개선과 함께 ‘줄사택’ 8채를 리모델링하여 박물관으로 재탄생시키기로 합의하였으나, 최근 주민들의 반대로 보존계획이 백지화되고, 향후 미군기지가 반환되는 자리에 박물관 건립이 논의 중이다.

줄지어 늘어선 독특한 경관에 서려 있는 수탈의 상징 줄사택을 둘러싸고 주민의 이해관계와 역사유산의 보존이라는 양쪽의 입장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줄사택은 계속 훼손될 것이고 결국에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역사를 입증할 유산은 사라져갈 것이다. 이제라도 주민들의 이해관계와 근대유산 보존을 위한 조정이 이루어져 강제노동의 현장과 노동자들의 아픔을 기억해 줄 공간으로서 줄사택이 지켜지길 바란다.

글/사진/도면 이정화(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고려 건국 1100년 기념, ‘강화고려문화축전’ 첫째 날 현장 관람기

올해는 고려가 건국된 지 1,100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는 918년 6월 25일(음력)에 건국되었다. 이 날짜를 양력으로 변환하면 918년 7월 25일인데, 강화군에서는 주말인 28일, 29일 이틀에 걸쳐 강화고려문화축전을 개최한다. ‘고려’를 주제로 하여 큰 규모의 축전을 여는 건 강화군에서도 처음이라고 알고 있다.

 
올해의 관광도시 강화 – 용흥궁 공원 앞 이동식 관광안내소(좌), 타시겨 버스(우), 강화군청 제공

2018년 올해의 관광도시로 선정된 강화도는 강화도 홍보를 위해 관광버스와 이동식 관광안내소를 운영한다. 광성보 등 강화의 유명한 관광지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강화미술관 사진전<고려개성, 강화에서 엿보다>   강화미술관 사진전(갤러리 내부)

먼저 강화문화원 1층 강화미술관을 방문했다. 이곳에서는 7월 20일부터 29일까지 고려의 수도 개성 ‧ 강화의 유적을 소개하는 사진전이 열렸다. 사진전 개최를 위해 강화군의 요청을 받아 인천 역사문화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들을 제공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전시장 내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오히려 차분히 사진을 관람할 수 있어서 좋았다. 벽을 따라 사진들을 걸어 놓은 모습들이 꽤 멋있었다.

 
올해의 관광도시 강화 – 용흥궁 공원 앞 이동식 관광안내소(좌), 타시겨 버스(우), 강화군청 제공

용흥궁 공원에서는 다양한 체험행사가 열렸다. 필자가 간 시간은 본격적인 행사 시작 전이었고, 많은 사람이 분주히 일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구름 하나 없는 하늘에서 쨍쨍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날씨가 무척 더웠고, 행사를 준비하는 분들도 매우 힘드신지 곳곳에서 쉬고 계셨다. 이렇게 날이 더운데 사람들이 많이 올지 걱정스러웠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는데 강화 전통차 시음 코너에서 차 한잔을 권유했다. 약쑥이 들어간 시원한 차를 마시니 약쑥 특유의 향기와 맛이 느껴져 독특했다.

축전의 주요 행사인 고려 고종 황제 행차와 팔만대장경 이운행렬을 보기 위해 용흥궁 공원으로 다시 왔다. 그런데 하늘에 먹구름이 껴있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얼마 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고종이 천도(遷都)를 위해 개경을 떠나 강화도로 온 음력 7월 초는 장마철이어서, 고종을 따라온 많은 관료와 백성들이 비를 맞으며 왔다고 한다. 경우는 다르지만 ‘역사적 장면의 재현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무더위와 갑작스레 쏟아진 소나기 때문에 주요 행사들은 2시간 후로 연기되었다.

저녁 6시가 지나자 본 행사는 시작되었다. 애초 계획보다 시작 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전체적인 행사 소요 시간이 단축되었으나, 이를 생각지 못 했던 필자는 고종 황제 행차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 행사인 팔만대장경 이운행렬만은 봐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뛰어와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팔만대장경 이운행렬, 전통 음악 연주   팔만대장경 이운행렬, 강화군민
 
팔만대장경 이운행렬-강화군민

팔만대장경 이운행렬- 팔만대장경을 옮기는 소

전통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팔만대장경 이운행렬이 용흥궁 공원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중,고등학생부터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강화 군민들이 전통 복장을 하고 이운행렬에 참여했다. 소나기가 그친 직후라 날씨도 선선해서 용흥궁 공원엔 꽤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 행렬을 따라온 사람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축전의 개막을 알리는 유천호 강화군수님(좌), 축하하는 박남춘 인천광역시 시장님(우)
특히 유천호 강화군수님은 이번 축전에서 ‘고종 황제’ 역을 맡으셨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었다. 행사를 보기 위해 많은 군민이 모여 있었고, 한산했던 체험 행사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행사 시작 전 소나기가 내려 더위를 잠시나마 식혀준 게 정말 다행이었다. 고려의 전통의례였던 팔관회 재현이 시작되고, 행사를 축하하는 많은 공연이 이어졌지만, 밤 9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이어서 필자는 끝까지 보지 못하고 인천으로 돌아가야 했다.

행사 시작 직전 행사장 내부 모습. 이후 촬영은 하지 못했으나,
밤 9시가 되어가는 늦은 시간까지도 많은 강화 군민들이 자리를 지켰다.

필자는 축전 첫날밖에 가보지 않았지만 고려 건국 1,100주년을 기념하여 처음 열리는 ‘고려’ 중심의 축전인 만큼 강화군에서도 많은 정성을 기울인 모습들이 보였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와 강화 도서관에서도 군민들을 위한 고려건국 1,100년을 기념하는 학술강연회를 열었고, 고려궁지에서는 고려문화 그림 그리기 대회 수상작 전시가 열렸다. 내년 2019년은 고려 태조 왕건이 개경(개성)으로 수도를 옮긴 지 800년, 그리고 14년 후인 2032년은 고려의 강화 천도 800년이라고 한다. 이번 강화고려문화축전을 시작으로, 고려와 관련된 문화 행사들이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마친다.

/사진 정이슬(인천역사문화센터)




개경 흥왕사와 강도 흥왕사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태조 2년(919) 송악산 남쪽에 도읍을 정한 후 제일 먼저 행한 일이 궁궐을 짓고 관청을 설치하며 행정구역을 구분한 것이고, 두 번째로 한 일이 도읍에 10개의 절을 짓는 것이었다. 태조가 새 도읍 개경에 많은 절들을 한꺼번에 창건한 것은 ‘부처가 도와주는 나라’라는 것을 과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성종 1년(982)에 최승로가 “부처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닦는[修身] 근본이요, 유교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라 하여 유교이념에 따라 통치할 것을 건의했다. 태묘와 사직 등 유교적 문물제도 정비에 힘썼던 성종 때를 제외하면 태조 이래 개경과 경기에는 새로운 절들이 꾸준히 창건되었다.

광종은 재위 2년(951) 부왕과 모후를 위해 봉은사와 불일사를 각각 창건하여 원당(願堂)으로 삼았고, 현종은 재위 9년(1018)에 현화사를 창건하여 부모의 원당으로 삼았다. 역대 왕들이 부모의 원당 건립을 중시한 것은 원당을 통해 지지세력 결집과 불교계에서 왕의 영향력을 강화하려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현종의 아들인 문종이 재위 10년(1056)에 개경 남쪽의 경기 군현인 덕수현의 치소를 옮기고 그 자리에 국력을 기울여 화엄종(華嚴宗)의 흥왕사를 창건한 것은, 한기문 교수에 따르면 국왕 자신의 원당으로 삼으려는 명분이었지만 현화사의 유가종단(瑜伽宗團)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기문, 1998 『고려사원의 구조와 기능』, 민족사)

흥왕사는 12년에 걸친 공사 끝에 문종 21년(1067)에 2,800칸 규모로 완공되었고 3년 뒤에는 절을 보호하는 성도 쌓았다. 공사 기간 중인 문종 16년(1062)에는 흥왕사 창건이나 능묘 조성과 같은 경기 군현에서 벌어지는 각종 국가적 역사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개성현을 개성부로 승격시켜 경기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려고 하는 제도 개편도 수반되었다.

『고려도경』에 흥왕사는 “국성(國城) 동남쪽에 있으며, 장패문(長覇門)을 나서 2리 가량을 가면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만난다. 사찰의 규모가 매우 크다”고 하였다. 송나라 사람 서긍이 보기에도 흥왕사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개경 나성에서 흥왕사까지 실제 거리는 2리가 넘는다.)

김부식은 「흥왕사 홍교원에서 화엄회(華嚴會)를 열며 올린 기도문」에서 “흥왕사는 문종 인효대왕(仁孝大王)께서 발원하여 창건하시어 불사(佛事)를 장엄하게 했던 곳이며, 대각국사(大覺國師)께서 교리를 널리 베풀어 큰 이익을 이룬 곳”이라 했다. 상주하는 승려가 1,000명이 넘고 금탑과 이를 보호하는 석탑 등이 있었던 고려전기 흥왕사는 김부식의 언급처럼 무엇보다 문종의 넷째 아들인 의천이 고려와 송, 요, 일본의 당대 불교를 총결집하여 속장경을 간행한 곳으로 유명하였다.

흥왕사에는 이후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한 최이가 고종 10년(1223)에 황금 200근으로 13층탑과 화병(花甁)을 만들어 안치하기도 하였다.

고종 19년(1232) 몽골과의 항전책으로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하자 홍왕사도 강화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강도시기 덕수현의 흥왕사는 전란으로 완전히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개경 환도 이후 흥왕사는 충숙왕 17년(1330) 복구되어,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 때 안동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와 잠시 머무르기도 했다. 조선 초에는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개풍군 봉동면 흥왕리에 있는 흥왕사지는 1948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간단한 발굴을 실시했다. 이에 따르면 가람은 중심곽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두 개씩의 또 다른 가람을 갖는 형식의 사찰이었다. 중심곽은 동쪽과 서쪽에 평면 8각의 목조탑을 배치하고, 그 뒷쪽 중앙에 금당, 금당 뒤에 규모가 큰 강당을 배치하였으며, 탑 남쪽 중앙에 있는 중문에서 동서로 뻗은 회랑이 북으로 구부러져서 강당 좌우 앞쪽까지 확인되었다. 중심곽 좌우에는 역시 문과 법당이 배치된 별도의 가람이 있었으나, 그들 건물에 대한 상황은 조사가 충분치 못하여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다. … 흥왕사 탑의 형식은 고구려의 기본적인 탑 형식인 평면 8각의 탑이나, 가람은 통일신라에서 보편화된 쌍탑식 가람 배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17, 252∼255쪽)

강도의 흥왕사는 『고려사』 등의 기록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김형우 교수는 “마니산 남쪽에 ‘흥왕리’라는 마을이 있고, 『속수증보강도지(續修增補江都誌)』에 그 마을의 흥왕사 터가 전해오고 있다. 화도면 흥왕리 구 흥왕초등학교의 동쪽 담장을 따라 동네에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난 길로 산을 향해 올라가면 왼쪽의 계곡 건너편에 절터가 있다. 절터의 동쪽과 서쪽의 양쪽에 계곡이 흐르는 완만한 언덕에 3단의 축대로 경계가 구획되어 있다. 높이가 2m 이상 되는 거대한 축대와 계단석, 건물 기단부의 장대석, 초석 등이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중단과 하단 축대 사이에는 석탑의 옥개석과 갑석이 쓰러진 채 땅에 박혀 있어서 절터임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고 한다. (김형우, 2005 「고려시대 강화의 사원 연구」 『국사관논총』106) 

흥왕사지에서 서쪽으로 500미터 거리에 향토유적 13호로 지정된 고려이궁지가 위치하고 있는 점도 이 절터가 강도시기에 창건된 흥왕사였을 개연성을 더해주고 있어 관련성이 주목된다. 고려시대 도읍 일대 절들은 단순히 기도·수행공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군대 주둔지나 정치 모임의 장소, 별궁(이궁) 등 군사적 혹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박윤진, 1998 「고려시대 개경일대 사원의 군사적·정치적 성격」 『한국사학보』3·4 참조 바람)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산39-1번지 일원에 있는 강도의 흥왕사지는 2009년과 2010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과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각각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뿐 더 이상의 학술조사나 유적 정비 없이 현재 방치되어 있다. 개경의 흥왕사지와 관련해서는 리창진·송광일의 「흥왕사 유적조사 보고」가 2012년 『조선고고연구』에 발표된 바 있다.

강도의 흥왕사지 구조가 개경의 흥왕사지 구조와 어떤 상관성이 발견된다면 이는 사찰구조 뿐만 아니라 개경과 강도의 도시구조의 상관성을 밝힐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조속한 시일 안에 이를 위한 남북공동의 연구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이미지
정학수(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인천의 섬과 바다에서 평화를 생각한다

6월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달이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전쟁은 그 자체로도 비극이었지만 전쟁 후 분단 상황이 만들어낸 긴장과 대립도 큰 비극이었다. 그리고 그 긴장과 대립의 중심에 인천의 섬과 바다가 있다.

인천의 섬과 바다는 한반도 긴장과 대립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뉴스에도 종종 등장하는 북방한계선, NLL이 지나는 공간이 바로 인천의 해역이다. 남북관계나 한반도 정세에 난기류가 흐르면 가장 먼저 긴장감이 높아지는 곳이다. NLL에서의 갈등은 교전과 희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99년의 1차 연평해전, 2002년의 2차 연평해전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2차 연평해전에서는 우리 해군 장병 6명이 전사했다. 두 차례 연평해전에서 북한군의 사망자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1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 2010년 3월에는 백령도 해상에서 우리 해군의 천안함이 폭침되어 46명의 젊은 생명들이 스러져 갔다. 같은 해 11월에는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하여 해병대 장병 2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이처럼 인천의 바다는 분단이 만들어낸 비극의 공간이었다.

평시에도 백령도, 연평도 등의 서해5도나 강화도, 교동도에 가면 냉혹한 분단의 현실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평소에 남북분단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북한과의 서해 접경지 섬들의 해안을 따라 설치된 차가운 철책선과 경비 초소 그리고 바다 넘어 북한 땅을 보면 남과 북의 분단과 대립이라는 상황이 가슴속에 다가온다.

인천의 섬에는 분단의 역사를 몸으로 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실향민들이다. 특히 교동도에는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황해도 출신의 실향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한 채 한 맺힌 세월을 보내야 했다. 분단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세상을 떠난 실향민도 많다. 현재 생존한 고령의 실향민들은 하루라도 빨리 고향 땅을 밟을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인천의 섬과 바다는 오늘날만이 아니라 과거 역사 속에서도 전쟁과 긴장, 대립의 공간이었다. 강화도는 대몽항쟁,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사건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에서 손꼽히는 대제국, 열강들의 침입을 직접 겪었던 곳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었고, 문화재의 약탈과 파괴도 일어났다. 한편 교동도는 고려시대 왜구의 잇따른 침입에 고통받아야 했다.

인천의 섬과 바다는 전쟁과 긴장, 대립 그리고 그로 인한 많은 사람의 희생과 고통이 함축된 공간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공간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바로 평화이다. 전쟁과 대립, 긴장을 넘어 미래로 나가는 평화의 공간으로서 인천의 섬과 바다를 바라보아야 한다. 인천의 섬과 바다를 찾는 많은 사람이 전쟁과 분단의 역사적 공간을 체험하면서 평화의 소중함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인천의 섬과 바다는 한반도에서는 다시는 전쟁의 참화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공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018년 4월 27일 남북의 정상이 판문점 군사분계선 위에서 손을 맞잡는 모습은 우리에게 크나큰 감격을 안겨주었다. 당장이라도 완전한 평화의 시대가 찾아올 것만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앞으로의 과정에서 실제 많은 어려움에 마주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과거로의 회귀에 대한 우려, 실망, 허탈의 감정이 교차할 것이다. 분단 이후 긴장, 갈등, 대립으로 점철된 기나긴 세월을 생각해보면 평화로 가는 길이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평화를 향한 인내와 의지가 필요한 시기이다.

한반도 평화를 향해 살얼음판 같은 길을 가는 상황에서 인천의 섬과 바다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부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여정이 꾸준히 이어지고, 그와 함께 인천의 섬과 바다가 긴장과 대립을 넘어 평화와 화합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해 본다.

 

글/사진 안홍민(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월미도에 핀 살구꽃

언제부터인가 4월이 되면 벚꽃을 보며 즐기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인천에도 벚꽃 명소가 여러 곳 있지만, 자유공원에는 경관조명까지 있어 낮과 밤에 보는 느낌이 다르기까지 하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며 즐거워하는데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자유공원에서 바라다보이는 월미도에도 벚꽃이 많지만, 옛 기록을 보면 월미도는 살구꽃이 유명했나 보다. 게다가 조선왕조 시절의 일이다.

1880년대 후반에 인천에 와서 활동한 아오야마 고헤이(靑山好惠)라는 일본 사람은 1892년에 펴낸 『인천사정(仁川事情)』이란 책에 이렇게 썼다.

“섬 안에 살구꽃이 많아 봄 4월 무렵 꽃이 필 때 인천항에서 그걸 보면 일대가 붉은 노을 같다. 하얀 집 여러 채가 그사이에 점철하니 마치 그림 같다고 한다.”

살구꽃 핀 월미도를 찍은 사진은 찾을 수 없지만, 월미산 북쪽 능선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초가집에서 아오야마 고헤이가 묘사한 광경을 떠올려 본다.
월미도는 다채롭다. 사람에 따라 떠올리는 사건과 기억이 다르다. 요즘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월미도는 관광지로 이름났다. 인천명소라는 이름 아래 월미도 공원에서 노니는 사슴을 찍은 사진은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월미도에 기왕이면 벚꽃보다 살구꽃을 심으면 좋겠다. 몇 년 뒤에는 조선 시대 사람들이 본 것처럼 월미도에 활짝 핀 살구꽃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글 / 김락기(인천역사문화센터 센터장)




봄, 4월, 강화도 그리고 광해(光海)

강화도의 4월은 참 아름답다. 4월은 강화에서 고려산 진달래 축제가 열리는 철이다. 또한 진달래 말고도 온갖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강화의 곳곳을 장식한다. 하지만 약 400년 전 누군가에게 강화의 봄, 강화의 4월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슬픔과 회한의 계절이었다.

1623년 음력 3월, 양력으로는 4월의 어느 날, 왕이 쫓겨났다. 새로 등극한 왕은 쫓겨난 과거의 왕을 섬으로 유배 시켰다. 새로운 왕은 인조였고 쫓겨난 왕은 광해군이었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한다. 광해가 유배된 섬은 강화도였다. 도읍 한양에서 너무 멀리 보내버리는 것은 불안했던 것일까. 인조는 일단 한양에서 비교적 가까운 강화도를 유배지로 택하였다. 광해가 강화로 가던 때가 양력으로 4월이었으니 따뜻한 봄날이었다. 아마 당시 강화에도 온갖 봄꽃이 아름다움을 뽐냈을 것이다. 하지만 광해에게는 그 봄꽃들도 슬프고 처량하게 느껴졌으리라.

광해가 쫓겨나면서 왕비, 세자, 세자빈도 함께 폐위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집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갇혀 생활해야 했던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광해와 왕비는 강화 동문 쪽에, 세자와 세자빈은 서문 쪽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광해는 강화도의 유배생활 중 큰 비극을 겪는다. 유배 온 지 석 달 뒤인 6월 폐세자 이지(李祬)가 땅굴을 파고 도주하려다 붙잡혔다. 이 일이 일어난 직후 폐세자빈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폐세자도 곧 사사(賜死)가 결정되어 목을 매고 죽음을 맞았다. 비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어 그해 10월 부인 폐비 유씨도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아마 화병이었을 것이다. 폐위되고 반년 조금 넘는 사이에 아들과 며느리, 부인을 모두 잃는 비극이 강화도에서 일어났다. 광해에게 강화는 아픔의 섬, 비극의 섬이었다. 이후 광해는 교동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겼고 1641년 제주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광해는 명을 배신하고 폐모살제(廢母殺弟)의 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전란복구에 힘썼으며, 명에 대한 맹목적 사대를 배격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 실리외교를 통해 나라를 지키려 하였던 군주로서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반면에 광해는 폭군은 아닐지언정 혼군(昏君)으로서 무리한 토목공사 등을 강행하여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 임금이라는 평가 또한 여전히 만만치 않다. 과연 그는 어떤 임금이었을까? 강화의 봄을 맞으니 그가 다시 생각난다.

 

글·사진 / 안홍민(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